페이지

posts list

2014년 7월 31일 목요일

하늘도 감동한 이윤(伊尹)의 성품

하늘도 감동한 이윤(伊尹)의 성품
글 연구위원 김성호


공사 3장 39절을 보면 상제님께서 쓰신 글귀 중에 이윤(伊尹)과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그 내용은 ‘걸이 망하고 탕이 흥함은 이윤에게 있다(桀之亡湯之興在伊尹)’라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상제님께서는 그가 성탕을 도와 대업(大業)을 이루었나니 이제 그 일을 도수로 굳게 짜 놓았다고 말씀하시고, 이 도수가 제 한도에 돌아 닿는 대로 새 기틀이 열린다고 말씀하셨다.
과연 상제님께서는 어떠한 연유로 그에 의해서 좌우된 두 임금의 흥망성쇠를 언급하시고, 나아가 이윤이 성탕을 도와 대업을 이룬 일을 후천의 새 기틀을 여는 개벽공사에 까지 쓰셨을까?


걸왕의 폭정과 이윤의 간언
그는 원래 은(殷)의 주왕과 더불어 중국 역사상 포악무도한 폭군으로 손꼽히는 걸왕 밑에서 선관(膳官)으로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가 걸왕의 신하였을 당시는 걸왕(桀王)이 주변의 모든 제후국을 통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걸왕은, 정사(政事)는 뒷전인 채 궁전을 사치스럽게 치장하고 주색에 빠져 악행만을 일삼았다. 그의 무도함은 도의(道義)에 어긋남을 넘어 죄 없는 백성들까지 무참히 살육하고, 제후국을 침략하여 법도를 짓밟는 등 임금으로서 해서는 안 될 행동까지 서슴없이 자행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불안에 떨며 고통의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나날이 계속되자 백성들의 눈에 걸왕은 국가의 멸망을 재촉하는 폭군이자 광인(狂人)으로 비춰질 뿐이었다. 이때 이 같은 광경을 차마 두고 보지 못해 걸왕에게 학정(虐政)을 자제할 것을 간언한 충신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윤과 관룡봉(關龍逢)이었다.
먼저 관룡봉이 무너져 가는 나라의 장래를 염려해 걸왕에게 선대(先代)의 어진 임금들을 본받아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인애(仁愛)로써 백성을 잘 살게 해야 하늘이 천명(天命)을 거두지 않을 것이라고 간언하였다. 하지만 걸왕은 도리어 충간(忠諫)을 한 관룡봉을 참살시켰다. 이에 당시 선관의 벼슬에 있었던 이윤이 죽음을 무릅쓰고 걸왕에게 또 다시 간언(諫言)했다. 그는 걸왕에게 관룡봉을 참살시킨 일과 더불어 그가 정치의 상도(常道)를 어겨 천심(天心)과 민심(民心)을 모두 잃었음을 말하고 더 이상 백성들을 혹세무민하지 말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한다고 진언(進言)했다. 하지만 걸왕은 이윤의 간언 또한 귀담아 듣지 않았다.
농민으로 돌아간 이윤, 박 땅에서 탕에게 초빙되다
걸왕 자신으로 인해 망국의 징조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었음에도 걸왕은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나날이 더 포악해져만 갔다. 걸왕의 이 같은 모습에 이윤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보기에도 더 이상 미치광이 걸왕을 개도시킬 방법은 없어보였다. 이에 이윤은 모든 것을 뒤로하고 박()땅으로 발길을 돌렸다.
걸왕을 떠나 박 땅으로 간 그는 한 동안 그곳에서 평범한 농민으로 지내며 요순(堯舜)의 도(道)를 마음에 품고 살았다. 당시 그는 초야에 묻혀 생활하느라 행색은 비록 남루할지라도 의(義)가 아니고 도(道)가 아니면 천하를 녹으로 준다 해도 돌아보지 않고, 수천 필의 말을 준다 하여도 거들떠보지 않았을 정도로 성품만은 여전히 강직했다.
한편 이런 그의 성품을 알아본 탕은 정중히 폐백을 갖추어 그를 초빙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윤은 탕의 신하가 되는 것이 요순의 도를 즐기는 것만 못하다 하여, 처음에는 탕의 호의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 같은 그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탕은 이윤 같은 어진 이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수차례에 걸쳐 이윤에게 자신의 신하가 되어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그러자 이윤도 탕의 인물됨을 알아보고는 마음을 바꾸어 요순의 도를 혼자 실천하는 것보다는 탕을 요순 같은 임금으로 만들고 백성들을 요순시대의 백성들로 만들 것이라는 결의를 가지고 탕의 신하가 되었다.
이 내용은 『典經』에 기록된 상제님 말씀과 부합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상제님께서도 “이윤(伊尹)이 오십이 지 사십 구년지비(五十而知四十九年之非)를 깨닫고 성탕(成湯)을 도와 대업을 이루었나니 이제 그 도수를 써서 물샐틈없이 굳게 짜놓았으니 제 도수에 돌아 닿는 대로 새 기틀이 열리리라.”(공사 3장 37절)고 말씀하신 바 있다. 상제님의 이 말씀은 역사적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이윤이 50년이 되어서야 49년 동안의 삶이 헛되었음을 깨닫고, 그동안 실행할 여건이 되지 못해 마음으로만 품고 있었던 뜻을 성탕과 함께 펼쳤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태평성대를 위한 결의를 실행에 옮기다
한편 그가 탕의 신하가 되었을 당시 주변의 제후들도 탕이 덕을 수양한다는 사실을 알고 걸왕을 뒤로 하고 탕에게 모여들었다. 제후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탕에게 귀순하였다는 것만 보아도 당시 걸왕의 폭정이 얼마나 심하였는지는 쉽게 짐작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헌데 이윤은 이들이 귀순하기 이전부터 걸왕의 폭정으로 인한 백성들의 아픔을 탕에게 고하고, 나아가 탕이 요순(堯舜)의 도(道)를 받들어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이룩해야 한다는 큰 계획을 상신했다.
그는 태평성대를 이룩하기 위한 방안으로 탕에게 소왕(素王)과 구주(九主)에 관해서 말하고 법술과 상벌로 탕을 보좌해 요순의 도를 재현시키려 했다. 탕 또한 그의 이 같은 점을 높이 사 우상(右相)이라는 위치까지 하사했는데, 우상이 된 이후에도 그는 탕의 치세(治世)를 도와 탕이 대업을 이룰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했다. 이로써 성탕은 폭정에 신음하는 백성들을 구제하고 나아가 어진 정치로써 태평성대를 이룩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함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탕은 하늘에 계신 상제께 죄를 지은 걸왕을 벌하여 달라고 기원하기에 이른다. 검은 황소를 하늘에 바치며 상제께 기원한 결과 하늘은 탕에게 걸왕을 정벌할 것을 명하였는데,『書經』의 기록에 따르면 ‘탕왕이 하늘의 사명을 부여받은 것은, 그 때 이윤과 같은 신하가 있어 하늘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라고 한다.이로 인해 하늘의 사명을 부여받은 탕은 걸왕을 멸하고 은나라를 세워 대업을 성취할 수 있었다. 탕왕이 대업을 성취한 것이 이윤의 노력 때문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이윤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이는 탕 임금과 이윤이 화합하여 요순의 도를 받들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만약 탕왕이 폭군 걸왕과 같이 이윤의 뜻을 알아주지 않고 폭정만을 일삼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탕왕 사후에도 계속된 그의 노력
그렇다면 과연 탕이 대업을 성취하는 데 있어 이윤이 어떠한 역할을 하였기에 하늘까지 감동하였던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이윤이 폭정에 신음하는 백성을 걱정하여 이들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서는 요순의 도를 따라 태평성대를 이루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이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그의 의로운 성품 때문일 것이다. 그의 이 같은 성품은 탕이 대업을 이룩한 뒤에도 한결같았다. 비록 탕이 대업을 이루어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이것을 꾸준히 지켜나가는 것 또한 대업성취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윤은 탕왕 사후에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주군(主君)을 보좌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탕왕 사후 그가 보좌했던 두 임금〔(외병(外丙)ㆍ중임(中壬)〕은 건강상의 문제로 오래 살지 못하고 단명(短命)하였다. 이에 이윤은 대신(大臣)들과 상의하여 탕왕의 손자(孫子)인 태갑(太甲)을 왕으로 즉위시켰다. 하지만 태갑제(太甲帝)가 왕좌(王座)에 오른 지 3년 만에 나라의 법도는 무너지고 정사도 나날이 어지럽게만 되어갔다. 그는 탕왕이 만들어 놓은 법도마저 없애버리고 향락에만 빠져 점점 더 포악해져만 갔다. 이대로 태갑제를 방치해 두었다가는 제2의 걸(桀)왕이 되어 나라를 망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에 이윤은 태갑제를 탕왕(湯王)의 묘가 있는 동궁(桐宮)으로 보내 회유케 했다. 이윤이 태갑제를 동궁으로 보낸 까닭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선대성군(堯·舜·禹·湯)으로부터 지켜진 태평성대를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윤은 태갑제를 동궁으로 보낸 이후에도 그에게 덕치를 실현한 우(禹)왕과 폭군 걸왕의 선례를 들며 왕으로서 지녀야할 덕을 훈계하였다. 하지만 태갑제는 이윤의 간언을 귀담아 듣지 않고 귀찮게만 여겼는데, 이윤은 이에 연연하지 않고 태갑제를 반드시 어진 성군으로 만들겠다는 마음을 놓지 않았다. 그는 태갑제가 마음을 다잡을 때까지 끊임없이 찾아가 어진 임금들의 법도를 교화하고 이를 따라야 한다고 간언했다.이 같이 계속된 그의 노력으로 인해 마침내 태갑제는 동궁으로 간지 3년 만에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마음을 다잡았다. 이에 이윤은 정권을 다시 태갑제에게 돌려주었고, 이윤의 간언으로 개과천선한 태갑제는 그의 훈계대로 성군들의 덕을 본받아 어진정치를 행했다.

천하사(天下事)를 위해 천도(天道)를 따른 이윤
이윤의 인품은 후대에도 칭송되었는데, 송나라의 유학자 주돈이(周敦)의 말을 참고하면, 이윤은 뛰어난 현자로서, 자신이 보좌하던 임금이 요순의 법도와 정사대로 백성을 다스리지 못하면 이를 자신의 탓으로 여겨 항상 자신을 책망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백성들 중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자리를 잡지 못했다면 그것까지 자신의 책임으로 여겨 마치 사람 많은 시장에서 종아리를 맞는 것과 같이 스스로를 책망했었다고 한다. 이처럼 이윤은 매사를 남의 탓으로 돌리기보다는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여겨 임금을 보좌하는 재상(宰相)의 위치에서 늘 자신의 과부족을 반성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러한 그의 성품 때문인지 그가 생(生)을 마감한 뒤에도 그의 뜻을 높이여긴 사람들은 명재상 이윤이 뜻을 두었던 것에 뜻을 두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실천한다면 누구나가 현자(賢者)가 될 수 있다고까지 말하였다.
일생 동안 변치 않았던 ‘이윤의 뜻’이란, 아래로는 백성을 위하고, 위로는 임금을 도와 선대(先代) 성군(聖君)으로부터 이어져온 태평성대를 지키는 것이었다. 이처럼 요순의 도를 지키는 것에 자신의 뜻을 두고 이 일을 평생사명(平生使命)으로 여긴 이윤은 일생 동안 어떠한 난관에 봉착해도 자신의 뜻을 굽히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이를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 이윤은 사욕에 빠지지 않고 죽는 날까지 자신이 맡은 바 소임을 완수했다. 이로 인해 자신이 보좌했던 탕임금과 태갑제는 모두 성군(聖君)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는데, 이러한 그의 덕성(德性) 때문인지 그는 임금에서부터 백성과 신하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로부터 인망(人望)을 얻을 수 있었다.
상제님께서도 “걸이 망하고 탕이 흥함은 이윤에게 있다”라고 말씀하신 까닭도 이윤의 이 같은 면모를 말씀하신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가 살았던 시국은 비록 난세(亂世)였지만, 그는 언제나 자신의 마음을 요순의 도에 비추어 항상 자신을 채찍질하였다. 모든 일을 남의 탓으로 돌리기보다는 늘 자신의 과부족이라 여기며 천하사에 임하는 자의 마음가짐을 갖추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것이다. 그의 노력은 자신의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천하사를 위해 마음을 다잡았고, 그 마음을 임금과 백성들에게까지 미치게 하였다.
이러한 그의 모습이 하늘의 법도〔天道〕와 다르지 않았기에 하늘도 그의 행실에 감동하였던 것이라 생각된다. 상제님께서 그를 높이 여기신 이유도 아마 그가 평생을 사욕(私慾)에 얽매임 없이 천도(天道)를 따라 천하사에 임하여 자신의 책무를 완수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지러운 난세에서 평생을 변치 않고 천도를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수도인들도 이윤의 이 같은 성품을 본받아 일상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며, 자신의 과부족을 살피고 이를 고쳐 나가야 할 것이다. 이로써 자신의 마음을 무욕청정하게 한 이후로는 이윤이 모든 것을 요순의 도에 비추어 뜻을 세우고 변치 않는 마음으로 이를 실천하였듯, 우리 수도인들도 양위 상제님의 유지(遺志)와 유법(遺法), 그리고 도전님의 유훈(遺訓)에 모든 것의 잣대를 두고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변치 않는 마음으로 이를 실천하고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http://webzine.idaesoon.or.kr/board/index.asp?webzine=43&menu_no=633&bno=982&page=1

이윤의 생애

이윤(伊尹)

「이윤(伊尹)이 오십이지사십구년지비(五十而知四十九年之非)를 깨닫고 성탕(成湯)을
도와 대업을 이루었나니 제 도수(度數)에 돌아닿는 대로 새 기틀이 열리리라.」
탕임금은 이윤의 덕으로 왕도정치(王道政治)
「천도교탕어선(天道敎湯於善) 탕지흥재이윤(湯之興在伊尹)」

중국 역사에 있어서 태평시대라고 하면 생각나는 것이 요순시대이다. 그 뒤 우(禹)가 왕위를 물려받아 이끌어 가다가 우의 아들 계(啓)에 이르러 세습 왕조 체제로 바뀌어 하왕조(夏王朝)가 이어진다.
하왕조 17대에 와서 걸왕(桀王)은 매희(妹喜)라는 절세 미녀에 빠져 폭정을 폈기 때문에 은(殷)의 탕왕(湯王)에게 멸망하였다. 이윤은 걸을 망하게 하고 탕을 도와 왕도정치를 펴서 은나라를 부흥시킨 훌륭한 재상(宰相)이다. 그럼 후세에 명재상으로 이름을 남긴 이윤은 어떤 인물인가?
이윤의 본명은 지(摯) 혹은 아형(阿衡)이다. 이윤은 본래 유신씨(有辛氏)의 들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기의 재능을 숨기고 산야에 묻혀 살았다. 탕이 그의 현명함을 알고 사람을 보내어 맞아들이려 하였으나 쉽게 응하지 않았다. 탕은 세 번이나 사신을 보내어 예를 갖추어 청한 후에야 비로소 부름에 응하였다. (史記, 書經)
「여씨춘추(呂氏春秋)」나「열자(列子)」에는 이윤의 출생 경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윤의 어머니는 이수(伊水)가에 살고 있었다. 거기서 이윤을 잉태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꿈에 신령이 나타나 말하기를 『만약 이수에 절구통이 떠내려오거든 너는 그것을 보는 즉시 동쪽을 향하여 달리되 절대로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였다. 이튿날 이수에 가보니 과연 절구통이 떠내려오는지라 그녀는 무조건 동쪽으로 달렸다. 10리쯤 달리고 나서 이제는 괜찮겠지 하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 순간 마을은 완전히 물바다로 변했고 그녀는 속이 빈 뽕나무로 변해 벼렸다. 뽕을 따러 온 여인이 뽕나무 속에 어린아이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이 아이가 이윤이라는 것이다.
이 이상한 아기를 유신국(有辛國)의 왕에게 드렸는데 임금은 이 아기를 주방책임자에게 맡겨 기르도록 명하였다. 이윤은 요리 솜씨가 뛰어났으며, 이로 인하여 탕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탕은 걸이 학정을 일삼는 것을 보고 이윤 같은 사람이 걸을 보좌하면 나라가 올바르게 다스려 질 것이라 믿고 이윤을 걸에게 보냈지만 걸은 『선관(膳官-궁궐 안의 주방을 맡은 관리) 주제에 무슨 참견이냐』하며 들은 척도 아니하여 이윤은 매번 다시 돌아와야만 했다. 날이 갈수록 걸이 나라 일에는 관심이 없고, 매희라는 여자에 빠져 궁중에는 수풀처럼 많은 고기를 쌓아 놓고, 못을 파서 거기다 술을 가득히 부어 배를 띄워서 즐겼다고 한다. 나라 형편이 점점 피폐해지자 충신 관룡봉(關龍逢)이 간언을 하였지만 처형을 당하였다. 이를 지켜본 이윤은 마음을 바꾸어 탕한테 충성하기로 결심을 하였다.
혹은 이런 이야기도 있다. 어느 날 술 취한 사람이 『왜 박으로 가지 않는가? 왜 박으로 가지 않는가? 박은 크기만 한데 깨어나라! 깨어나라! 나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다네. 암흑을 버리고 광명을 찾을거나 무엇이 걱정이란 말이냐!』(주‥여기서 박은 은나라의 수도)라는 노래를 하기에 이제까지 자기가 걸왕을 섬겨 온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고 훌륭한 재상이 되어 탕을 도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걸왕의 횡포가 나날이 심해지자. 민심이 떠나 버린 것을 알아차린 탕은 이윤의 덕으로 폭군 걸왕을 몰아 내고 천자의 자리에 올라 덕치(德治)에 힘을 기울여 왕도정치를 실현하였다.
탕이 백성의 뜻을 받들어 걸왕을 칠 수 있었던 것은 천도(天道)에 따른 것이며 (天道敎桀於惡 天道敎湯於善(천도교걸어악 천도교탕어선)… 공사 3장 39절), 또한 이윤과 같은 현명한 재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상제님께서도 걸이 망하고 탕이 흥한 것은 이윤에게 있다고(桀之亡湯之興在伊尹(걸지망탕지흥재이윤)… 공사 3장 39) 말씀하셨다.
탕왕이 죽은 후 태자 태정(太丁)은 일찍 죽었으므로, 아우 외병(外丙)이 즉위했다. 2년 만에 외병이 죽고, 다시 그 아우 중임(仲壬)이 즉위했는데 4년 만에 죽으니, 태정의 아들 태갑(太甲)이 즉위했다.
그러나 태갑은 어리석고 포악하여 조부인 탕왕의 법을 어기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일이 많았다. 그리하여 이윤은 그를 동궁(棟宮-별궁)에 가두었다. 태갑은 3년 동안 선왕(先王) 중임의 옷을 입고 나서 크게 깨달아 잘못을 뉘우치고 자신의 부덕함을 깨닫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이윤은 태갑을 은의 수도 박으로 모셔 왔다. 그로부터 태갑은 덕을 닦았으므로 제후들이 모두 잘 따랐다. 태갑이 얼마 후 죽자 그의 아들 옥정(沃丁)이 즉위하였는데 이윤이 죽은 것도 이때이다.
이윤이 죽자 은나라에서는 그를 조상묘(祖相廟)에 배향하는 파격적인 은혜를 베풀었다. 이윤이 없었다면 은나라는 천자국이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를 선조(先祖)의 사당에 배향 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이윤이 탕임금을 도와 대업을 이루었던 내용이 상제님의 공사에서 도수로써 쓰여지게 된다.
「전경」에『천지공사를 마치신 후 「포교 오십년 공부종필(布敎 五十年 工夫終畢)」이라 쓰신 종이를 불사르시고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이윤이 오십이지 사십구년지비 (伊尹 五十而知 四十九年之非)」를 깨닫고 성탕(成湯)을 도와 대업을 이루었나니 이제 그 도수를 써서 물샐틈없이 굳게 짜놓았으니 제 도수에 돌아 닿는대로 새 기틀이 열리리라.』 (공사 3장 37절)
『…문왕의 도수와 이윤의 도수가 있으니 그 도수를 맡으려면 극히 어려우니라.』 (공사 2절 16절)라는 구절이 나온다.
http://webzine.idaesoon.or.kr/board/index.asp?webzine=90&menu_no=1461&bno=2883&page=1


서경 - 정치의 재정의와 탕평의 이론적 근거 (신정근), 홍범구주 해석

『서경』, 정치의 재정의와 탕평의 이론적 근거
http://webzine.idaesoon.or.kr/board/index.asp?webzine=179&menu_no=2942&bno=5230&page=1
글 신정근
『주례』, 『서경』, 『춘추』, 『논어』, 『중용』 등은 다들 알다시피 동양고전에 속하는 문헌이다. 이들 동양고전은 전근대에서 다른 문헌보다도 특권의 지위를 누렸다.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자신의 말이 이 문헌에서 나왔다고 하면 더 이상 의심을 하지 않을 정도로 절대적인 지위를 누렸다. 전근대에 학자•관료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전을 배워야 했다. 그래야만 학자•관료 노릇을 할 수 있었다. 누가 “『논어』에 따르면” 하면서 무어라고 하는데, 알아듣지 못한다면 대화를 이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동양고전도 시대마다 다른 대접을 받았다. 어떤 시대에는 한 문헌이 다른 것보다 각광을 받았다면 다른 시대에는 또 다른 문헌이 다른 것보다 화려한 주목을 받기도 했다.01 한(漢) 제국 초기에는 『춘추』가 주목을 받았다. 한 이전의 고대, 즉 삼대(三代)에는 최고 정치지도자가 성왕(聖王)이었기 때문에 현실의 다양한 사건을 처리하는 데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성왕이 최고의 지성인이므로 그들은 늘 최선의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한 이후에 왕은 치열한 공방 끝에 최고의 자리에 올랐지만 최고의 지성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시시각각 터지는 사건을 접하고서 어떻게 결정을 내려야 할지 당황해하기 시작했다. 이때 『춘추』는 복잡한 사건을 처리하는 판례집과 같은 역할을 했다. 사건이 생기면 유사한 사례를 『춘추』에서 찾아서 판단을 내렸다. 한 제국의 이러한 관행을 인경결옥(引經決獄)이라 하는데, 우리는 이러한 사례를 동중서의 『춘추결옥(春秋決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서경』도 역사적으로 부침을 거듭했다. 한 제국에는 고문상서(古文尙書)의 진위를 두고 논쟁이 되었다.02 이 논쟁은 바로 금문경학과 고문경학이 학술의 주도권을 두고 치열하게 대립하던 형태로 진행되었다. 역사적으로 고문상서가 매색(梅賾)의 위작으로 판결이 났지만 전근대 내내 학술 논쟁의 불꽃이 완전히 꺼진 적이 없었다. 주희가 사상의 무게를 오경(五經)보다 사서(四書)에 두면서 『서경』의 비중이 조금 낮아졌다. 아마 성왕이 주인공인 오경보다 군자와 소인이 나오는 사서가 사람의 기질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에서 적용 가능성이 더 풍부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서경』이 다시 한번 더 학술사의 전면에 등장한 적이 있었다. 조선 후기 정조와 정약용이 바로 『서경』의 가치를 재발견한 주인공이었다.03 이들은 『서경』의 어떤 점에 주목했던 것일까?
정조와 정약용, 『서경』의 재발견
한국과 중국의 경우 전근대의 정체는 왕정이었다가 근대에 들어서 민주 공화정으로 전환되었다. 보통 왕정하면 왕이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고 사람 목숨마저 파리 목숨 취급하는 것으로 상상한다. 이러한 상상이 적절한 역사적 사실과 결합해서 동아시아의 전제왕권설이 나타나게 되었다. 한 왕조의 건국 영웅이나 특별한 역사적 변동기에 특정한 왕(황제)이 신권보다 압도적인 왕권을 행사한 적이 있다. 진의 시황제, 한의 무제, 명의 태조, 청의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등이 이들이다. 특히 옹정제는 주접(奏摺)이란 비밀 편지를 활용해서 특정 지역의 동태, 지역 행정의 실상을 소상하게 파악해서 황제의 의지를 이른 시간 안에 전국 곳곳으로 전달하여 현실 정치에 반영하고자 했다.04 하지만 이러한 강력한 왕권은 전근대의 역사에서 보면 짧은 시간에 지나지 않고 특별한 황제들도 개인 의지가 아니라 조종(祖宗)을 존중하고 왕실을 고려하며 신권을 활용하면서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제왕권설은 냉정하게 재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도 분명 왕정의 형태로 운영되었지만 전제왕권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왕과 세자는 개인 의지와 무관하게 서연(書筵)과 경연(經筵)을 통해 유학의 소양을 내면화시켜서 그 이념을 현실 정치에 구현해야 했다. 현실적 구현 여부와 상관없이 왕은 유학의 이념으로부터 아주 자유롭지 못했다. 기상과 취침에 이르는 왕의 움직임과 언행이 하나하나 기록되어 훗날 『실록(實錄)』과 『일기(日記)』 등으로 정리되었으므로 기록으로부터도 자유롭지도 못했다. 또 정책 결정 과정에서도 대신과 협의했고 결정 이후에도 잘잘못을 따지는 대간의 간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재야에 커다란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사림(士林)으로부터 상소를 받았다. 물론 왕 개인의 능력과 통치 스타일에 따라 견제와 압박감은 다를 수 있겠지만 왕이 마음먹은 대로 정치를 주물렀다고 할 수는 결코 없다.
왕들은 다양한 층위의 견제를 넘어서 통제권을 행사하고자 다양한 길을 찾았다. 숙종은 환국(換局) 정치를 통해 특정 붕당의 세력화를 막으면서 이해 조정자로서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했다. 이는 정국 불안을 가중시킬 뿐 의도했던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영조와 정조는 탕평책(蕩平策)을 통해 인재를 균형 있게 선발하고자 했다. 환국이 역학 관계를 조정하려는 현실적인 타개책인 반면, 탕평책은 인위적인 집권파의 교체가 아니라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공정성을 원칙으로 내건 정치 운동이다.
영조와 정조는 탕탕평평(蕩蕩平平)의 탕평책의 근거를 현실적 이해타산이 아니라 절대적 권위를 가진 『서경』에서 찾아냈던 것이다. 『서경』 「홍범」은 세상에 정의를 실현하는 아홉 가지 원칙, 즉 구주(九疇)를 다루고 있다.05 그중 다섯 번째 황극(皇極) 부분은 바로 영조와 정조가 갖고 있던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정조는 황극이 정치의 도(道)를 집약하고 있는데 그 가치를 제대로 몰랐기 때문에 호오(好惡)에 따른 붕당과 편들기에 따른 당쟁이 생겨난다고 보았다.06 황극에서 말하는 탕평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기울어지고 치우치지 않으면서 왕으로서 정의를 따르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서 왕으로서 도리를 따르고,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대로 피하지 않으면서 왕으로서 길을 따라라. 기울어지지 않고 편들지 않으니 왕의 도리가 크고 드넓으며 편들지 않고 기울어지지 않으니 왕의 도리가 가지런하고 고르다.”07
정약용은 영조와 정조의 「홍범」 이해를 한층 심화시킨다. 그는 홍범구주의 틀을 온전히 다섯 번째 황극을 중심으로 파악했다.
7 계의(稽疑)
4 오기(五紀)
1 오행(五行)
8 서징(庶徵)
5 황극(皇極)
2 오사(五事)
9 복극(福極)
6 삼덕(三德)
3 팔정(八政)
<표 1> 정약용의 홍범 구조08
위의 도해에서 구주는 각각 영역이 다른 세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첫째, 1 오행, 4 오기, 7 계의는 하늘의 영역이다. 둘째, 2 오사, 5 황극, 8 서징은 군주의 영역이다. 셋째, 3 팔정, 6 삼덕, 9 복극은 사람의 영역이다.09 이렇게 보면 황극은 단순히 위치상의 중앙이 아니라 나머지 팔주가 서로 올바른 연관을 맺도록 조정하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황극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하늘과 백성 사이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황극은 이 세계의 질서를 재생산하는 중추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 황극은 다른 존재가 아니라 바로 왕이 집행해야 할 덕목이다.
황극 중심의 「홍범」 이해는 단순히 텍스트 정합적인 독해 문제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 도해는 영조에 이어 정조가 추진하고자 하는 탕평책의 이념적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황극(皇極)과 지인(知人)ㆍ안민(安民): 붕당을 넘어 탕평을 위한 근거
황극은 탕평을 위한 총론이라고 할 수 있다. 총론만으로는 탕평을 현실화시킬 수는 없다. 즉 황극을 통해 탕평의 정당성을 확보했다고 하더라도 탕평이 현실에 적용되려면 구체적인 실천 원칙이 필요하다. 「고요모(皐陶謨)」에 보면 고요와 우임금 사이에 대화가 있다. 둘의 대화에서 지인(知人)과 안민(安民)이 정치의 큰 과제로 제시되고 있다. 지인은 사람의 능력을 제대로 알아서 적재적소에 쓰는 일이고, 안민은 사람을 제대로 써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10
정조와 정약용은 정치의 요체를 지인과 안민으로 설정한 『서경』 「고요모」에 주목했다. 「고요모」의 지인과 안민은 「홍범」의 황극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방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인과 안민은 정치의 핵심이자 급무이다. 고요모가 바로 이 점을 말한 것이다. 하지만 우임금이 탄식하면서 아직 그렇게 할 만하다고 깊이 받아들이지 못했는데, 왜 그럴까? … 군주 중에 크게 유위를 떨칠 기량이 없다면 마음속으로 성왕도 미치기 어렵고 이상적인 정치도 실행하기 어렵다고 생각해서 게으름 피우며 포기해버린다. 예컨대 또 지인과 안민은 요임금도 실행하기 어렵다고 여겼으니 누가 다시 그것을 실행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한다.”11
정조는 지인과 안민이 정치의 요체라는 고요모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고요모와 우의 대화에서 우가 요의 한계를 들면서 우려했듯이 지인과 안민의 과제는 당연한 요청임에도 불구하고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정조는 유위(有爲), 즉 커다란 사업을 꿈꾸며 일으키려고 하는 군주라면 지인과 안민의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지인과 안민은 「대학」 한 편의 으뜸 취지이자 또 같은 한 편의 귀결이다. 그 연원이 이 경, 즉 『서경』 「고요모」에 있으니 아득히 멀고 오래전부터 밝혀졌던 것이다.”12
정약용은 정조와 마찬가지로 「고요모」에서 황극을 현실화시키는 지인과 안민의 과제에 주목하고 있다. 이처럼 「홍범」의 황극과 「고요모」의 지인과 안민은 ‘탕평’을 실현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이자 실천 과제였던 것이다.
두 사람의 『서경』 이해는 참으로 특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경(經)을 단순히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여 규제하는 원칙으로 재해석해내고 있다. 한 제국 인경결옥(引經決獄)의 용어를 빌린다면 두 사람의 경전 해석은 인경결의(引經決疑)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서경』 하면 많은 학자들은 성왕들이 서로 전수했다는 「대우모(大禹謨)」의 심법(心法) 16자에 주목한다.13 정약용은 『고문상서(古文尙書)』의 가치를 부정하지만 그곳에 나오는 심법의 의미를 인정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는 『서경』을 심성 수양만이 치국방략(治國方略)을 위한 책으로 독해해내고 있다.14 이렇게 보면 정약용은 바로 정조가 찾고자 했던 지인(知人)의 인(人)이고, 정조는 정약용이 세우고자 하는 황극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의 존재 이유, 정의의 실현
동아시아의 전근대에 숱한 전적(典籍)이 있는데 정약용은 왜 『서경』에 주목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그 책이 경(經)의 지위에 있기 때문이다. 경은 고대 성왕의 언행이 담긴 자료이다. 역사적인 전개에도 불구하고 전근대의 동아시아의 사람들은 그 권위를 부정하지 않았다. 이처럼 신성하고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경에 주목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기독교인에게 성경, 불교 신자에게 불경이 갖는 의의에 견주어본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의문이 남는다. 경만해도 삼경(三經)이니 오경(五經)이니 십삼경(十三經)이 있고, 서(書)만 해도 사서(四書)니 오서(五書)(사서+『소학(小學)』)가 있다. 이렇게 고대의 문헌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정약용은 하필 『서경』에 커다란 관심을 쏟게 되었을까?
동아시아는 자연신, 조상신, 기능신 등 다양한 신이 있지만 유일신이 없다. 여기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즉 현실의 거악, 성공한 쿠데타 등 불의(不義) 또는 부정의(不正義)가 득세를 했을 때 누가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유일신의 문화라면 불의의 사람이 살아있든 죽었든 신의 심판을 받게 된다. 생전이나 사후에 정의가 제자리를 잡을 수 있다. 동아시아의 다신교 전통에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신적 존재가 없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춘추』의 역사 서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에서 역사는 단순히 사실의 기술에 그치지 않고 죽은 악인에 대해 철저한 심판을 가하는 정의의 법정이기도 하다.15
잘 생각해보면 『춘추』가 불의를 심판하여 정의가 승리하게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후에 일어나는 일이다. 즉 현실에서 악인이 떵떵거리며 살고 불의한 자가 정의로운 자를 압살한다고 하더라도 『춘추』는 당장 현실에 개입하여 심판할 수가 없다. 정약용은 이러한 『춘추』의 약점을 어떻게 보완할 수 있을까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명(命)의 의미를 둘로 구분함으로써 “『춘추』 = 사후 심판, 『서경』 = 현실 심판”을 통해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고자 했다.
보통 『서경』 하면 천명(天命)을 떠올린다. 이 천명은 하늘이 유덕자(有德者)에게 세상을 통치할 권한을 위임하는 의식이다. 이것이 바로 『중용』의 대덕수명(大德受命)이다. 그리고 다른 천명이 있다. 『중용』의 첫 구절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 바로 그것이다. 이 천명은 사람이 도덕적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보편적인 성정을 가리킨다. 통상 같은 천명이라고 해도 이 둘을 구분해서 이야기한다. 정약용은 『서경』의 명을 부성지명(賦性之命: 도덕적 성정을 부여하는 명)과 득위지명(得位之命: 정치 지위를 수여하는 명), 호선오악(好善惡惡) 또는 호덕(好德)의 성과 사생화복영욕(死生禍福榮辱)의 명으로 구분한다.
사람은 군주이든 인민이든 부성지명 또는 호선오악의 성에 개입할 수 없다. 그것은 사람의 힘이 미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다만 득위지명과 사생화복영욕의 명은 군주가 하늘을 대신해서 지상에서 행사할 수 있다. 공정한 인사는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금석이었다. 개인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기회를 가질 수 있고 국가는 유능한 인재를 통해 국리민복(國利民福)을 꾀할 수 있다. 따라서 군주는 능력자에게 자리를 주고, 무능력자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바로 그것으로 정의가 실현된다고 할 수 있다.(시대의 한계는 인정한다. 정약용에게 민주주의의 실현을 요구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정치를 현재의 부정의를 바로잡아서 정의를 실현하는 맥락으로 재정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홍범」의 황극, 「고요모」의 지인과 안민 그리고 『서경』의 득위지명은 삼위일체처럼 탕평을 실현하여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정조와 정약용은 『서경』의 성왕이 삼위일체로 태평성대를 열었던 것처럼 자신들도 부정할 수 없는 『서경』의 권위를 빌어 조선을 개혁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처럼 책은 읽기에 따라서 전혀 다른 특성을 드러낼 수 있다. 정약용과 정조는 시대를 구제하는 양약으로 책을 읽는 솜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정조가 탕평으로 붕당을 넘으려고 했지만 사후에 거세게 몰아닥친 세도정치의 파고를 막지 못했다)

필자소개  서울대학교에서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배웠고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유학·동양학부의 교수로 있다. 한국철학회 등 여러 학회의 편집과 연구 분야의 위원과 위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 『공자씨의 유쾌한 논어』, 『제자백가의 다양한 철학흐름』, 『동중서 중화주의 개막』, 『동양철학의 유혹』, 『사람다움의 발견』, 『논어의 숲, 공자의 그늘』, 『중용: 극단의 시대를 넘어 균형의 시대로』, 『어느 철학자의 행복한 고생학』, 『한비자』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백호통의』, 『유학, 우리 삶의 철학』, 『세상을 삼킨 천자문』 『공자신화』, 『춘추』, 『동아시아 미학』 등이 있다.


01  『춘추』, 특히 동중서의 『춘추번로(春秋繁露)』는 청말(淸末)에 다시 한번 더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역사는 단계적 진화[발전]를 거치게 되므로 현재는 국면의 전환을 통해 개선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다시 강유위(康有爲)에 의해서 춘추삼세(春秋三世)의 대동론(大同論)으로 이어지게 되었다.(곡구규구웅(谷口規矩雄) 편, 정성일 옮김, 『아시아 문화와 역사4 중국사-근세Ⅱ』, 신서원, 1997, 240~243쪽)
02 신정근, 『신정근교수의 동양고전이 뭐길래?』, 동아시아, 2012, 45~63쪽 참조.
03 이 점은 백민정, 『정약용의 철학: 주희와 마테오리치를 넘어 새로운 체계로』, 이학사, 2007, 363~400쪽에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필자도 이 글에 힘입은 바가 크다.
04 최근 정조가 근신(近臣)만이 아니라 정적(政敵)과 어찰(御札)을 주고받으면서 정국을 이끌어가려고 했던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옹정제의 주접과 정조의 어찰은 운용 방식이 다르지만 ‘정보’의 완전한 통제를 통해서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권력의 행사 방식에서 공통점이 있어 보인다. 정조의 어찰첩(御札帖)은 김문식·안대외 외, 『정조어찰첩』,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9 참조.
05 홍범구주(洪範九疇)의 내용과 설명은 이민수 옮김, 『서경』, 서문당, 1975, 185~194쪽 참조.
06  『弘齋全書』권50 「策問3 皇極」 王若曰: 爲治之道, 莫京於皇極. 而自箕子之發之, 更後數千載, 尙有能建其有極者乎? 夫朋分於好惡, 黨生於比周, 而皇極之不能用也舊矣. 猗我先大王誕敷建極之治, 五十年如一日. 烏虖蕩蕩無能爲名, 盛矣哉!
07  「洪範」 無偏無陂, 遵王之義. 無有作好, 遵王之道. 無有作惡, 遵王之路. 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
08  정약용의 「홍범」 도해는 『상서고훈(尙書古訓)』 권4: 28b에 나온다.
09  백민정, 『정약용의 철학: 주희와 마테오리치를 넘어 새로운 체계로』, 이학사, 2007, 376쪽.
10  「皐陶謨」 皐陶曰: 都在知人, 在安民. 禹曰: 吁, 咸若時, 惟帝其難之. 知人則哲, 能官人. 安民則惠, 黎民惠之.
11 『홍재전서』권97 「經史講義34·書5」 知人安民, 治道之要務, 皐陶之言是也. 而禹吁而未深然之, 何也? …… 凡人主之不能大有爲者, 其心以爲聖王難及, 至治難行, 故怠焉而沮, 若又以爲知人安民, 堯猶難之, 誰復能爲之云爾.
12 知人安民者, 大學一篇之宗旨, 亦大學一篇之結局. 其淵源在此經, 遙遙其遠矣.
13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無稽之言勿聽, 弗詢之謀勿庸(사람 개개인의 마음은 위태위태하고 도리를 지키려는 마음은 작고 희미하다. 오직 뒤섞지 않고 오직 한 가지에 집중해서 진실하게 중심을 잡아야 한다. 근거 없는 말은 듣지 말고, 제대로 상의하지 않는 대책은 쓰지 않도록 해라). 이 16자는 고대의 전설적인 성왕, 즉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이 서로에게 전해준 정치의 핵심이라 하여 심법(心法)으로 불린다. 사람의 마음은 이랬다저랬다 흔들리기가 쉽고 원칙을 지키려는 마음은 현실의 이해관계에 따라 바람 앞의 촛불마냥 마구 흔들린다. 이때 사람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기준을 굳게 잡지 않으면 스스로 뭘 해야 할지 결정할 수가 없다. 따라서 기준 이외에 다른 것을 끌어들여서 뒤섞지 않고 오로지 기준 하나에만 집중한다면 최선의 선택에 이를 수 있다. 설혹 결정이 내려진 뒤 사람들이 이해를 두고 왈가왈부하더라도 결정을 내린 마음은 어디에도 치우지지 않는 공정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14 「신정근, 『신정근교수의 동양고전이 뭐길래?』, 동아시아, 2012, 53~54, 57~59쪽 참조. 정약용은 『육경사서(六經四書)』로 수기(修己)하고 일표이서[一表二書: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로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할 수 있다고 한 적이 있다. 이는 자신의 학문과 저술의 지형도를 그리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15 신정근, 『신정근교수의 동양고전이 뭐길래?』, 동아시아, 2012, 84~86쪽 참조.

홍산문화 - 요하문명

홍산문화 - 요하문명[편집]

홍산문화는 1908년 일본의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으며 연대는 기원전 4700년 ~ 기원전 2900년 경으로 지금까지 츠펑(赤峰, 발견 당시엔 열하성), 링위안(凌源), 젠핑(建平), 차오양(朝陽) 등 500여곳의 유적을 찾아냈다. 발견 지역은 옌산 산맥의 북쪽 랴오허 지류의 서 랴오허 상류 부근에 널리 퍼져 있다. 중국에 의해 1980년대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지면서 싱룽와 문화(중국어 간체: 兴隆洼文化정체: 흥륭와문화(興隆窪文化)병음: xīnglóngwā wénhuà Xinglongwa culture[*]), 훙산 문화(중국어 간체: 红山文化정체: 紅山文化병음: hóngshān wénhuà), 자오바오거우 문화(중국어 정체: 趙寶溝文化병음: Zhàobǎogōu wénhuà), 신러 문화(중국어 간체: 新乐遗址정체: 新樂遺跡병음: Xīnlè Yízhǐ Xinle culture[*])등의 요하일대의 신석기문화를 문화의 단계를 넘어 세계의 새로운 문명으로 보아 '요하문명'(遼河文明)으로 명명(命名)하여 부르고 있다.[1][2] [3] [4][5]

요하문명 주요 유적과 형성시기[편집]

형성시기한글한자위치
기원전 8000년 ~ 기원전 7000년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신낙 문화 유적(모계씨족의 정주 취락)新樂 文化(신러)랴오닝성 선양 시 북부 지역
기원전 7000년 ~ 기원전 6500년신석기시대 소하서 문화 유적小河西 文化내몽골 츠펑 시 아오한 기 지역
기원전 6200년 ~ 기원전 5200년신석기시대 흥륭와 문화 유적興隆洼 文化(싱룽와)내몽골 츠펑 시 아오한 기 지역
기원전 6000년 ~ 기원전 5200년신석기시대 사해 문화 유적査海 文化내몽골 접경 사해 유역
기원전 5200년 ~ 기원전 5000년신석기시대 부하 문화 유적富河 文化내몽골 츠펑 시 아오한 기 부하 유역
기원전 5000년 ~ 기원전 4400년신석기시대 자오바오거우 문화 유적趙宝溝文化(자오바오거우)내몽골 난하 계곡과 허베이 성 북부
기원전 4500년 ~ 기원전 3000년신석기시대 훙산 문화 유적紅山文化(훙산)내몽골 요동 하북 지방
기원전 3000년 ~ 기원전 2000년동석병용시대(銅石倂用時代) 소하연 문화 유적小河沿 文化내몽골 츠펑 시 아오한 기 소하연 유역
기원전 2000년 ~ 기원전 1500년초기 청동기시대 하가점 하층 문화 유적夏家店 下層 文化내몽골 츠펑 시 아오한 기 맹극하(孟克河) 유역


중국의 신석기 문화


중국의 신석기 문화 목록

시기한국어 명칭한자 명칭현재 위치
기원전 7500년 ~ 기원전 6100년펑터우산 문화彭頭山文化후난성 동서부의 양쯔강 중류
기원전 7000년 ~ 기원전 5000년페이리강 문화裴李崗文化허난성 뤄허(洛河) 부근 계곡
기원전 6500년 ~ 기원전 5500년허우리 문화后李文化산둥지방
기원전 6200년 ~ 기원전 5400년싱룽와 문화興隆洼文化내몽고 접경 지역
기원전 6000년 ~ 기원전 5500년츠산 문화磁山文化허베이성 남부
기원전 5800년 ~ 기원전 5400년라오관타이 문화(다디완 문화)老官台文化, 大地灣文化감숙성과 섬서성 서부
기원전 5500년 ~ 기원전 4800년신러 문화新樂文化랴오둥 반도의 랴오허 하류
기원전 5400년 ~ 기원전 4500년자오바오거우 문화趙宝溝文化내몽고의 난하 계곡과 허베이 성 북부
기원전 5300년 ~ 기원전 4100년베이신 문화北辛文化산둥 성
기원전 5000년 ~ 기원전 4500년허무두 문화河姆渡文化닝보저우산저장 지역
기원전 5000년 ~ 기원전 3000년다시 문화大溪文化삼협 지방
기원전 5000년 ~ 기원전 3000년마자방 문화馬家浜文化태호 지역과 항저우 북부
기원전 5000년 ~ 기원전 3000년양사오 문화仰韶文化허난섬서산서 지방
기원전 4700년 ~ 기원전 2900년훙산 문화紅山文化내몽고요동하북 지방
기원전 4100년 ~ 기원전 2600년다원커우 문화大汶口文化산동안휘허난성강소성 지방
기원전 3400년 ~ 기원전 2250년량주 문화良渚文化양쯔강 삼각주
기원전 3100년 ~ 기원전 2700년마자야오 문화馬家窯文化간쑤 성의 황하 상류와 청해
기원전 3100년 ~ 기원전 2700년취자링 문화屈家嶺文化허베이성의 양쯔강 중류 지역과 허난성
기원전 3000년 ~ 기원전 2000년룽산 문화龍山文化황하 중·하류
기원전 2800년 ~ 기원전 2000년바오둔 문화寶墩文化청두 평원
기원전 2500년 ~ 기원전 2000년스자허 문화石家河文化허베이성의 양쯔강 중류
기원전 2100년 ~ 기원전 1500년얼리터우 문화二里頭文化옌스허난성

신석기 문화 표

아래에는 기원 전 7000년부터 기원 전 1500년까지의 각 문화를 지역별로 나타내고 있다. 신석기 시대 문화는 무인으로, 청동기 문화(기원 전 2000년경부터 출현)는 별표(*)가 붙어 있다. 연대에는, 연구마다 더욱 많은 차이점이 있다.
년도
(기원전)
랴오허유역
(중국북동부)
(1)
황하상류
(중국서북부)
(2)
황하중류지역
(중원)
(3)
황하하류지역
(4)
장강상류지역
(5)
장강중류지역
(6)
쓰촨 (7)중국남동부
(8)
중국남서부
(9)
7500
7000펑투오산 문화성원타오치 문화
(포함(포함
청베이시문화쩡피옌 문화
6500라오관타이 문화페이리강 문화후리 문화자오스 문화
싱룽와 문화다디완 문화츠산 문화6500-55007000-58007000-5500
6200-5400바이자춘 문화자후 유적
60006500-5000리가춘 문화커후차오 문화
6500-50006000-5000
5500
베이신 문화
신러 문화5300-4500
50005300-4800양사오 문화양사오 문화하모도 문화다시 문화다차컹 문화
5000-30005000-30005000-34005000-3300푸궈둔 문화
마자방 문화5000-3000
4500자오바오거우 문화5000-4000
4500-4000다원커우 문화송저 문화
4300-26004000-3000
4000
3500취자링 문화
훙산 문화3500-2600잉판산 문화
(富河文化 포함)마자야오 문화량주 문화3100경?
30003400-23003300-27003200-1800타니산 문화
반산 문화*허난스자허 문화바오둔 문화스샤 문화
2700-2400룽산 문화*산둥-2500-20002800-2000녠위좐 문화
2500마창 문화2800-2000룽산 문화칭롄강 문화펑비터우 문화
2400-20002600-2000= (후베이-허당 문화바이양춘 문화
*치자 문화룽산 문화3000-....2200-2100
2000*샤자뎬 하층문화2300-18002400-2000다이룽탄 문화
2000-300*얼리터우 문화*웨스 문화2100-2000
*Siba1900-15001900-1500*마차오 문화
15001950-1500*얼리강 문화
하나라??
1800-1200*우청 문화
1500-
*쓰촨 문화
(삼성퇴 유적)
1500-
위 도표에서는 중국을 아홉 개의 지역으로 나누고 있다.
  1. 중국 동북부: 내몽고 자치구흑룡강성지린성랴오닝성
  2. 중국 서북부 (황하 상류 지역): 감숙성청해성섬서성 서부
  3. 황하 중류 지역: 산서성하북성하남성 서부, 섬서성 동부 (화북 평야. 이전에는 중국 고대 문명의 발상지로 되어 있었다)
  4. 황하 하류 지역: 산둥성안휘성강소성 북부, 하남성 동부
  5. 장강 하류 지역: 강소성의 대부분 및 절강성
  6. 장강 중류 지역: 호북성과 호남성 북부
  7. 쓰촨성과 장강 상류 지역
  8. 중국 동남부: 푸젠성강서성, 광둥성, 광시 좡족 자치구호남성 남부 (베트남 북부의 홍 강 하류나, 대만도 포함)
  9. 중국 서남: 윈난성귀주성

황하, 장강문명 표

황하 유역장강 상류 지역장강 중류 지역장강 하류 지역
기원전 8000년 이전

위찬옌 유적셴런퉁・루퉁환 유적

7000
|
6000
페이리강 문화
펑터우산 문화


6000
|
5000
페이리강 문화, 라오관타이 문화, 베이신 문화, 츠산 문화
탕가강 문화청베이시 문화

5000
|
4000
양사오 문화

마자방 문화하모도 문화
4000
|
3000

다시 문화쑹쩌 문화

량주 문화
3000
|
2000
룽산 문화바오둔 문화취자링 문화
삼성퇴 유적스자허 문화
2000
|
1000
얼리터우 문화하나라?)마차오 문화
얼리터우 문화

얼리터우 문화(천도전의 은나라얼리강 문화

천도 후의 은나라우청 문화후슈 문화
주나라주나라초나라
1000 이후파촉
오월

황하 문명[편집]

페이리강 문화[편집]

페이리강 문화(裴李崗文化, 기원 전 7000년? ~ 기원 전 5000년?)의 대표 유적은 허난성 화 현의 페이리강 유역에 있다. 이들은 원형·방형의 움집에 살았으며, 조 등의 밭농사 농업을 하고 있었다. 홍갈색의 도기나 마제석기 등을 특색으로 한다.

라오관타이 문화[편집]

라오관타이 문화(老官台文化, 기원 전 6000년?~기원 전 5000년?)의 대표 유적은 샨시성 화 현 (웨이난 시) 의 라오관타이(老官台)이다. 이들은 원형의 움집 주거에 살며, 조 등의 밭농사 농업을 하고 있었다. 암적색의 협사도기를 특징으로 한다.

베이신 문화[편집]

베이신 문화(北辛文化, 기원 전 6000년? ~ 기원 전 5000년?)의 대표 유적은 산둥성 텅저우 시의 베이신이다. 황갈색의 도기를 특징으로 한다.

츠산 문화[편집]

츠산 문화(磁山文化, 기원 전 6000년? ~ 기원 전 5000년?)의 대표 유적은 허베이성 우안 시의 츠산이다. 이들은 원형, 타원형의 움집 주거에 살며, 조 등의 밭농사 농업을 하고 있었다. 홍갈색의 협사도기를 특징으로 한다.

양사오 문화[편집]

양사오 문화(仰韶文化, 기원 전 4800년? ~ 기원 전 2500년?)는 1921년 허난성 몐츠 현 양사오촌에서 발견된 붉은 바탕에 채색 한 토기(칠무늬토기)를 특색으로 하는 문화이다.
전기(기원 전 4800년 무렵)는 홍도가 주류로 대표 유적은 산시 성 (섬서성) 시안 시 반파, 양샤오 반파 유형 문화라고 불린다. 모계 제도로 농촌의 계층화가 보인다. 기원전 4000년경에 녹로의 사용을 볼 수 있는 양사오 묘저구유형 문화가 나타났다.
후기(기원 전 3500년 이후)에는 반파 후기 유형, 시왕촌 유형, 대사공 유형, 진왕색 유형의 4종의 문화로 크게 분류되어 빈부의 차이가 보이는 사회 분업, 계층화가 진행되었다.

허우강 문화[편집]

허우강 문화(後岡文化, 기원 전 5000년? ~ 기원 전 4000년?)의 대표 유적은 허난성 안양 시 허우강이다. 베이신 문화를 계승 발전했다.

다원커우 문화[편집]

다원커우 문화(大漢口文化, 기원 전 4300년? ~ 기원 전 2400년?)는 1959년 산둥성 닝양 현 보투오 촌에서 유적이 처음 발견되었다. 후에 산둥성 타이안 시 타원커우에서도 유적이 발견되고, 이쪽이 대표 유적이 되었다. 전기는 홍도가 주류를 이루었지만, 후기에는 흑도, 회도가 주류로 나타났다. 후기의 란곡흑도의 고병배 무뉘도기는 정교하고 아름다워 산둥 룽산 문화에 계승된다.

룽산 문화[편집]

룽산 문화(龍山文化, 기원 전 2500년? ~ 기원 전 2000년?)는 중국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에 의해서 1930년 산둥성 장추 시 룽산진에서 발견된 흑도(흑색 토기)나 회도를 특색으로 하는 문화이다. 흑도는 얇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흑색의 토기로, 제작에는 소성 온도는 약 1000도 이상되는 녹로가 사용되었다.
후기에는 청동기의 주조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중원 룽산 문화(섬서 룽산 문화, 진난 요서 룽산 문화, 허난 룽산 문화)와 산둥 룽산 문화로 나뉜다.
중원의 룽산 문화는 양사오 후기 문화를 계승해 회도가 주류를 이루며, 뼈가 갈라진 특징을 가진다. 산둥의 룽산 문화를 계승하여 흑도가 주류를 이룬다.

얼리터우 문화[편집]

얼리터우 문화(二里頭文化, 기원전 2000년? ~ 기원전 1600년?)는 1959년 허난성 옌스 시 얼리터우에서 발견되었다. 유적은 약 2km 사방에서 뻗어있고, 중심부에는 두 개의 궁전 자취가 있다. 이 유적의 사람들은 진난 요서 룽산 문화, 허난 룽산 문화를 계승하였으며, 청동 주조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장강 문명[편집]

위찬옌 유적[편집]

위찬옌 유적(玉蟾巖遺跡)은 후난성 다오 현에서 발견된 기원전 14000년(?) ~ 기원전 12000년(?)의 유적으로 추측되는 유적이다. 볍씨가 발견되고 있지만, 재배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셴런퉁 루퉁환 유적[편집]

셴런퉁 루퉁환 유적(仙人洞・呂桶環遺跡)은 장시성 완녠 현에서 발견된 기원전 12000년경의 유적지이다. 재배한 벼가 발견되었고, 중국의 농경이 독자적으로 잔파된 가장 오래된 것 증거로 확인되었다.

펑터우산 문화[편집]

펑터우산 문화(彭頭山文化)는 후난성 리 현 펑터우산에서 발견된 대표적인 유적이다. 기원전 7000년 전 ~ 5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며, 산파농법을 하고 있어 중국의 가장 오래된 수도(水稻)로 추측된다.

다시 문화[편집]

다시 문화(大溪文化)는 충칭 시 우산 현에서 발견된 대표 유적이다. 기원전 4500년경에서 기원전 3300년경의 유적으로 추정되며, 채문홍도가 특징으로 후기에는 흑도, 회도가 등장하였다. 관개 농법이 확립되어 주거지가 물의 보급을 위한 수원지로부터 대규모 농경을 할 수 있는 평야지대로 이동했다.

추자링 문화[편집]

추자링 문화(屈家嶺文化)는 후베이성 징산 현 추자링에서 발견된 유적으로 기원전 3000년경에서 기원전 2500년경의 유적으로 추정된다. 다시 문화를 계승하고, 녹로를 사용한 흑도가 특징이다. 허난 지방의 황허 문명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추측된다.

스자허 문화[편집]

스자허 문화(石家河文化)는 후베이성 톈먼 시 스자허에서 발견된 대규모의 도성을 만든 기원 전 2500년경의 유적으로 추자링과 구별된다. 도성은 남북으로 1.3km, 동서로 1.1km의 크기로 상류 항하 유역의 부족과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인 것으로 추정된다.

하모도 문화[편집]

하모도 문화(河姆渡文化)는 저장성 위야오 시에서 발견된 유적으로 기원전 5000년경에서 기원전 4000년경의 유적으로 추측된다. 하류 지역에서는 가장 오래된 벼농사나 수렵 그리고 어로도 행해져 돼지를 가축화를 시켰다.

마자방 문화[편집]

마자방 문화(馬家浜文化)는 저장성 자싱 시 마자방에서 발견된 유적으로 기원전 5000년경에서 기원전 3800년의 유적으로 추정된다. 하모도 문화를 계승발전 시켰으며, 관개를 시작하였고, 홍도가 특징이다.

쑹쩌 문화[편집]

쑹쩌 문화(崧澤 文化)는 상하이 시 칭푸 구 쑹쩌 촌(崧澤村)에서 발견된 유적으로, 기원전 3800년경에서 기원전 3500년경의 유적으로 추정된다. 구슬로 만든 팔찌 등의 장식품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량주 문화[편집]

량주 문화(良渚文化)는 저장성 위항 구 량주 진에서 에서 발견된 기원전 3500년에서 기원전 2200년경의 유적으로 마자방 문화송저 문화를 계승했다. 다수의 옥기 외에도 비단이 출토되었다. 분업이나 계층화가 진행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순장을 시킨 무덤이 발견되었다. 황하 문명의 산둥 룽산 문화와는 서로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며, 동시기에 쇠퇴한 것은 어떤 공통적인 원인이 있다고 추측되고 있다.

우청 문화[편집]

우청 문화(吳城文化)는 장시성 장수 시 우청진에서 발견된 기원전 1400년에서 기원전 1000년경의 유적으로 황하문명과는 이질적인 청동기가 출토되었고, 원시적인 자기 등도 출토되었다.

쓰촨 문명[편집]

중국 동부지역의(촉) 쓰촨성 지방의 문명

바오둔 문화[편집]

바오둔 문화(宝墩文化)는 청두 시 신진 현 바오둔촌에서 발견된 기원전 2500년에서 기원전 1750년경의 유적지이다. 신석기 시대의 성벽에 둘러싸인 취락이 청두 평원의 민 강 선상지에 복수 존재했다. 최대의 유적인 보물 유적은 1990년대에 발견되었고 발굴이 계속되고 있다.

삼성퇴 유적[편집]

삼성퇴 유적(三星堆遺跡)은 쓰촨 성 삼성퇴에서 발견된 유적으로 기원전 2600년경에서 기원전 850년경의 유적으로 추정된다. 대량의 청동기가 출토되었고, 눈이 올라간 가면과 세로 눈의 가면, 황금 지팡이 등이 나왔으며, 자안패(子安貝)나 상아 등도 출토되어 권력 계측의 존재를 알려주는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청동기에는 원시적인 과정이 없이 고도의 청동기가 제작되었기 때문에 황하 유역에서 기술이 유입된 것으로 추측된다. 장강 문명과 같이 문자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파촉문자(巴蜀文字)라고 불리는 문자가 있어 인더스 문자와 연결하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