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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4일 화요일

조립체들과 실재론적 존재론 Assemblages and Realist ontology



조립체들과 실재론적 존재론
Assemblages and Realist ontology

사물들 자체 안에서 현실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왜 분화는 서로 상관적 관계에 있는 질화이자 [부분들의] 합성이고, 종별화이자 유기적 조직화인가? 왜 분화는 이런 상보적인 두 길을 통해 이루어지는가? 현실적 질과 연장들, 현실적 종과 부분들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는 시공간적 역동성들이 존재한다. 바로 이 역동성들이 현실화의 작인(作因), 분화의 작인이다. 이것들은 보통 이미 구성되어 있는 연장과 질들로 덮혀 있어 보이지 않지만, 모든 영역에서 명확히 드러내어 정리할 필요가 있다. 발생학자들이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매우 각별한 의미를 지닌 어떤 형태발생적 운동들―여유 표면들의 증가, 세포층들의 얇아짐, 주름 생성에 의한 함입, 군(群)들의 국소적 자리 이동 등과 같은 운동들―에 비하면 알이 두 부분으로 나뉘는 과정은 이차적이다. 여기서 드러나고 있는 것은 알의 운동학, 어떤 동역학을 함축하는 운동학 전체이다 ... 따라서 알들이 유형별로 구별되는 것은, 한 구조의 최초의 현실화 요인들에 해당하는 정향들, 전개 축들, 변별적인 속도와 리듬들에 의해 결정되고, 이런 요인들은 현실화되는 ... [그리고] 개체화의 장 안에서 개체-배(胚)를 통해 체험되는 것에 고유한 어떤 시간과 공간을 창조한다.
―― 들뢰즈, <<차이와 반복>>, pp. 480-1.

앞장들에서는 조립체라는 개념과 이해하는 데 그 개념이 도움이 되는 구체적인 객관적 존재자들의 구별짓기를 충분히 강조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체의 물질적 및 표현적 변수들을 갖추고 있는 그 개념을 자체의 물질적 및 표현적 성분들을 갖추고 있는 현실적 사례들 및 그런 성분들을 선택하고 분류하고 연결하며 안정화시키는 분절적 과정들을 분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구별짓기는 인식론적 및 존재론적 이유 때문에 중요하다. 한편으로, 그것은 그 개념과 현실적 사례들 사이의 인지적 관계에 관한 의문을 직면하게 한다. 특히, 이 관계를 유목 포함(class inclusion)의 관계, 즉 '조립체'라는 술어에 의해 지시되는 일반 범주가 존재자들을 조립체들로 분류하기 위한 필요충분 조건을 제공하는 관계로 간주한다면, 철학자들에 의해 이미 만들어진 긴 목록에 다른 한 물화된 일반자를 덧붙이고 있는 것일 것이다. 물론, 이것은 앞장들에서 자세히 언급된 그런 물화들에 반대하는 논증들을 조롱하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관계를 어떻게 간주해야 하는가? 앞장에서는 잠재적 도표를 구성하는 특이성들이 구체적 과정들에서 그것들을 일으키는 상태들과 발산적 현실화(divergent actualization)의 관계를 갖는다―한 위상학적 점이 많은 척도 형태들(구형의 기포, 다면체형의 결정, 측지선형의 광선)과 발산적으로 관련된다―는 주장이 제시되었다. 유사한 발산적 관계가 조립체라는 추상적 개념, 그것의 변수와 매개변수들 그리고 그것의 모든 구체적 현실화 사이에 확립되어야 한다. 어떤 위상학적 점이 어떻게 현실화될 수 있는지 미리 확립할 기계적 조리법은 전혀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 개념의 변수와 매개변수들이 현실적인 물질적 및 표현적 성분들과 분절적 과정들에 발생되는 방식들도 한 번에 하나씩 확립되어야 한다.

개념과 그것의 사례들 사이의 구별짓기도 존재론적 양태를 갖는다. 개념 자체는 우리 마음들의 산물이고, 그래서 우리 마음들이 없다면 현존하지 않을 것이지만, 구체적인 조립체들은 전적으로 우리 마음들과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 진술은 수정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공동체, 조직체 그리고 도시 같은 사회적 조립체들의 경우에 그런 조립체들은 우리 마음들이 사라진다면 더 이상 현존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경우에는 사회적 조립체들은 우리 마음들의 내용과 독립적인 것, 즉 공동체, 조직체 그리고 도시들이 상상되는 방식과 독립적인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이것은 조립체 이론이 실재론적 존재론 내에서 작동한다고 말하는 또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실재론자들은 다른 존재론적 신념들을 품고 있는 철학자들보다 한 가지 더 어려운 과업이 있는데, 왜냐하면 자신의 입장을 진술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재론자들은 자율적인 세계의 내용물들이 무엇인지, 또는 최소한 무엇이 그것의 내용물들에 포함되지 말아야 하는지 추가적으로 규정해야 한다. 예를 들면, 많은 종교적인 사람들은 천당과 지옥, 천사와 악마 같은 초월적 공간과 존재자들에 관한 실재론자들이다. 그러나 유물론적 철학자는 내재적 존재자들, 즉 물질적 또는 에너지적 기체(基體)와 결부되지 않는다면 존속하지 못할 존재자들에 관한 실재론자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유물론자가 천사적 또는 악마적 생명체들을 제거하는 것은 단순할 것이지만, 제거하기가 훨씬 더 어려운 다른 초월성의 형태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대면하여 제거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초월적 존재자는 자율적인 존재자들의 현존과 지속을 설명하기 위해 가정되는 것, 즉 본질이다. 본질은 이천 년 이상 동안 실재론의 일부였다. 가장 잘 방어할 수 있는 이 개념의 판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판본인데, 그는 형이상학 또는 존재론을 별개로 존속할 수 있는 존재자들에 관한 연구와 관련된 학문으로 규정했다. 이것들 사이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연적으로 존속하는 것들과 본질적으로 존속하는 것들을 구분했다. 그의 존재론에서 우연적인 것에 관해 사유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것의 주체를 구성한 것은 두 번째 종류의 존재자들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적었듯이,

그러나 영원하고, 움직이지(변하지) 않으며, (밑감으로부터) 따로 떨어져 있는, 어떤 것이 있다면, 이것에 대한 인식은 분명히 '이론에 관련된 학문'(이론학)의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학의 일도 아니고 [왜냐하면 자연학은 (스스로 또는 다른 것에 의해) '움직이는(변하는) 것(실체)'들을 다루기 때문이다], 수학의 일도 아니다. 그것은 두 학문에 앞서는, (다른) 어떤 학문('으뜸 철학')의 일이다. ... 으뜸 학문('[형이상학]')은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있는' (독립적인), 움직이지(변하지) 않는 것들을 다룬다. 모든 (으뜸가는) 원인들은 틀림없이 영원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김진성 역주), pp. 272-3]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는 존재자들의 세 가지 범주, 유(類), 종(種), 개체가 존재한다. 첫 번째 두 범주들에 속하는 존재자들은 본질적으로 존속하고, 세 번째 범주에 속하는 존재자들은 우연적으로 존속할 뿐이다. 예를 들면, 유는 동물일 수 있고, 종은 인간일 수 있으며, 개체는 우발적인 특성들―하얀 피부, 음악적임, 공정함―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이런저런 특수한 사람이다. 이 존재론으로부터 조립체 이론은 세 번째 범주만 유지하는데, 왜냐하면 모든 조립체는 고유한 역사적 개체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되었듯이, '개체'라는 술어는 '인격체'라는 술어와 동의어가 되었지만, 이것은 일상 언어의 습속일 뿐이다. 존재론적 범주로서 '개체'라는 술어는 규모의 그 어떤 특수한 층위도 선호하지 않는다. 개별적 공동체들, 개별적 조직체들, 개별적 도시들에 관해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바람직하지 않은 함의들을 전혀 환기시키지 않은 채, 개별적 원자들, 개별적 분자들, 개별적 세포들 그리고 개별적 기관들에 관해 말할 수 있다. 이런 존재자들은 모두 조립체인데, 자체를 규정하는 창발적 특성들은 자체의 상호작용하는 부분들에 의해 산출되고, 그래서 필요한 상호작용들의 발생에 달려 있다. 모든 조립체의 역사성과 개별성은 유물론자들로 하여금 어느 주어진 조립체를 산출하거나 생성한 역사적 과정들에 관한 의문을 대면하도록 강요한다. 이런 과정은 개체화 과정(process of individuation)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서두의 인용문에서 들뢰즈에 의해 언급된 발생학적 조작들은 일종의 개체화 과정, 유기체의 개체화를 예시하지만, 어떤 조립체도 자체 성분들 사이의 다소 영구적인 관계들을 확립하는 분절화 과정(process of articulation)들에 의해 개체화된다. 그렇지만 들뢰즈는 '개체'라는 술어를 특별한 방식으로 사용하는데, 존재론적 범주가 아니라 무엇이든 개체화를 현재 겪고 있는 존재자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세포 층들의 늘림과 접힘, 세포 개체군의 이동 그리고 단일한 세포 유형의 다수의 유형들로의 점진적인 변화를 여전히 겪고 있는 배아는 하나의 개체로 간주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갓 태어난 생명체는 개체가 아닐 것이다. 배아는 접힘과 늘림의 체험된 강도뿐 아니라 조립 과정들을 추동하는 화학적 구배의 강도에 의해 규정되는 반면에, 갓 태어난 것은 자체의 연장적 경계와 창발적 특성들에 의해 규정된다. 그가 적고 있듯이, "강도는 개체화하고 강도량들은 어떤 개체화 요인들이다 ... 모든 개체성은 강도적이다. 따라서 개체성은 폭포처럼 떨어지고, 수문처럼 수위를 조절하며, 서로 소통하고, 그런 가운데 자신을 구성하는 강도들 안에서 차이를 포괄할 뿐 아니라 또 그 자체로 긍정한다."(<<차이와 반복>>, p. 524) 그런데 일단 그 과정이 고정된 외연적인 것들과 질들을 낳는다면, 후자는 강도적인 것들을 은폐하여 개체화를 보이지 않게 만들고 객관적 환영을 제시하는데, 그 환영은 우리로 하여금 공간적 및 질적 특성들의 목록―물화될 때 본질을 생성하는 목록―에 의해 최종 산물을 분류하도록 유혹한다.

비슷한 주장이 순전히 존재론적 의미에서 '개체'와 동의어인 다른 한 술어, 즉 헤세이티(haecceity)라는 술어에도 적용된다. 스콜라 철학에서 그 술어는 주어진 어느 존재자의 독특함, 즉 다른 존재자들과 공유되지 않는, 그래서 일반화될 수 없는 어떤 존재자의 특질을 가리킨다. 그 어떤 일반적인 범주도 헤세이티로서의 존재자를 규정하는 데 사용될 수 없기 때문에 실물 지시적 정의에 의해서만 이것을 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헤세이티'라는 술어는 흔히 어느 사물의 '이것임'으로 규정된다. 그렇지만, 가타리와의 공동 저작에서, 들뢰즈는 이런 전통적 정의에 한 가지 강도적 요소를 덧붙이면서 이렇게 단언한다.

인[격체], 주체, 사물 또는 실체의 양태와는 전혀 상이한 개체화의 양태가 있다. 우리는 그것에 <이것임>이라는 이름을 마련해 놓았다. 어느 계절, 어느 겨울, 어느 여름, 어느 시각, 어느 날짜 등은 사물이나 주체가 갖는 개체성과는 다르지만 나름대로 완전한, 무엇 하나 결핍된 것 없는 개체성을 갖고 있다. 이것들이 <이것임>들이다. 여기에서 모든 것은 분자들이나 입자들 간의 운동과 정지의 관계이며, 모든 것은 변용시키고 변용되는 [역량]이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들뢰즈/가타리, <<천 개의 고원>>(김재인 옮김), p.494]

들뢰즈와 가타리가 개체와 유기체 사이에, 또는 헤세이티와 주체 사이에 설정하는 대립은 조립체(원래의 의미에서)와 기체(基體) 사이의 대립에 관한 다른 일례일 뿐이다. 이어지는 글에서 우리는 이런 대립들을 계속해서 회피함으로써 그런 대립자들을 어느 조립체(매개변수화된 의미에서)의 상이한 위상들로 회복시키는 한편으로, '개체'와 '헤세이티'라는 술어들은 그것들의 전통적인 존재론적 의미로만 사용될 것이다.

주요 논증으로 되돌아가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상정된 세 가지 존재론적 범주 가운데 오직 세 번째 범주, 즉 자체의 우발적인 특성들과 성향들에 의해 규정되는 개체들만 유지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리스 철학자의 풍요로운 형이상학을 회복시키는 데 충분한가? 그렇지 않다. 유와 종이 담당하는 역할, 즉 개별적 존재자들의 특질의 규칙성과 안정성을 설명하는 역할을 수행하도록 무언가 다른 것이 추가될 필요가 있다. 앞장에서, 이런 규칙적인 것들은 조립체에 도표를 추가함으로써, 즉 조립체의 성향들과 관련된 가능한 것들의 공간을 특이성들에 의해 구성되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설명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제시되었다. 우리가 이해했듯이, 특이성은 어느 안정한 상태에서 다른 안정한 상태로의 변화(이분화)뿐 아니라 재현되는 안정한 상태(끌개)도 규정한다. 들뢰즈에 대한 특이성들의 호소력은, 개체들의 생성을 설명하는 것은 개체라는 개념을 전제하는 개념들을 포함하지 말아야 한다는 요구 조건에서 비롯된다. 특이성들은 이런 요구 조건을 충족시키는데, 왜냐하면 존재론적으로 그것들은 전(前)개체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명의 가장 높은 일반[적인 것들]은 종과 속들을 넘어서지만, 어디까지나 개체[적 및] 전(前)개체적 [특이성들]을 향해 넘어선다...'(<<차이와 반복>>, p. 530)

아리스토텔레스와 들뢰즈 사이의 다른 한 차이점은 개체들의 생성에 관한 각자의 관념을 포함한다. 자연과 예술 둘 다에서 존재자들이 생성되는 방식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은 형상인으로 작용하는 본질을 사용한다. 그는 자연에서 본질의 작용은 자명하다고 주장했는데, 왜냐하면 말이 말을 낳고, 사람이 사람을 낳기 때문이다. 즉, 어느 동물 종은 개별적 유기체들의 형상인이 됨으로써 그것들을 생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집을 짓는 경우에(또는 환자를 건강하게 만드는 경우에) 형상인은 인간의 영혼 속에 미리 현존하는 관념이다. 어느 집, 또는 '질료를 포함하는' 어떤 다른 존재자도 '질료와 아무 관련성도 없는 것에서 발생하거나 생성되는데, 왜냐하면 의술과 건축술은 건강과 집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이제 실체는 질료와 아무 관련성도 없는 것, 어느 사물의 본질 또는 바로 그 본성 또는 형상인을 의미한다.'(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p. 308) 이 관념은 형상들이 외부로부터 불활성의 유순한 질료 위에 부가된다는 관념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이것은 들뢰즈에게 큰 영향을 끼친 관념들을 제시한 철학자인 질베르 시몽동이 질료형상적 모형(hylomorphic model)이라고 명명한 관념이다. 질료형상적 모형은 세 가지 측면에서 이의가 제기될 수 있다. 첫째, 수동적인 질료를 다른 물질들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들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역량, 새로운 화학적 형태들의 자발적 생성을 낳는 역량(또는 집약적인 정동)을 갖추고 있는 화학 물질들처럼 독자적인 적극적 역능들을 갖추고 있는 물질적인 것으로 대체함으로써 제기된다. 둘째, 그것이 형성시키는 것과 닮은 형상인이라는 관념을 발산적으로 현실화되기 때문에 그것들이 형성시키는 것과 닮지 않은 위상학적 형태들로 대체함으로써 제기된다. 그리고 셋째, 어느 범주에 속하는 데 필요한 본질적 특성들을 자체의 부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들에 달려 있는 전체의 창발적 특징들로 대체함으로써 제기된다. 이런 세 가지 대체―첫 번째 두 가지 대체만이 들뢰즈와 가타리에 의해 인식된다―는 자연적 형태들의 경우뿐 아니라, 목수가 나무에게서 캐낼 수 있는 형태들처럼 인간의 개입을 포함하는 형태들의 경우에도 수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시몽동은 질료형상적 모델은 작용적이고 변용태적인 많은 것을 무시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으로 형식화되거나 형식화될 수 있는 질료에 독자성들[...]을 갖고 있는 운동 중에 있는 에너지적 질료성을 첨가시켜야 한다. 이것들은 이미 기하학적이라기보다는 위상학적인 암묵적 형상으로서 다양한 변형 과정과 조합된다. 가령 나무를 켜는 조작이 나무를 유지하고 있는 섬유 조직의 결의 변화나 비틀림의 변화에 맞춰서 행해지듯이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형상적 본질에서 질료로 흘러가는 본질적 특성들에 강렬한 가변적 변용태들을 첨가해야 한다. 때로는 조작의 결과로서 발생하고 때로는 이와 반대로 조작을 가능하게 하는 변용태들을. 가령 목재의 다공질의 정도나 탄성, 저항력의 정도.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무를 따라가는 것으로서, 질료에 형상을 강요하는 대신 다양한 조작과 나무의 물질성을 연결접속하면서 나무 그 자체에 거스르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가타리, <<천 개의 고원>>, p. 784)

전통적 실재론과 조립체 이론의 실재론적 존재론 사이의 주요한 차이점들을 규정했는데, 이제 개체화 과정들에 대한 몇 가지 구체적인 사례들을 탐구하자. 시작하기 좋은 지점은 원자적 규모, 즉 유는 '원자'이고, 종은 '수소' 또는 '산소'이며, 개체는 여기에 있는 이 원자 또는 저기에 있는 저 원자인 경우이다. 현대적인 아리스토텔레스적 접근 방식은 단일한 양성자와 단일한 전자를 갖고 있음과 같은 '수소'라는 일반 범주에 속하는 필요충분 조건을 부여함으로써 시작될 것이다. 어느 수소 원자에 양성자 하나를 첨가하면 그것의 정체성을 변화시킬 것―두 개의 양성자는 두 개의 전자를 수반하고, 그래서 후자는 결과적으로 얻게 되는 헬륨 원자에 전적으로 상이한 화학적 특성들을 부여한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것은 '수소'라는 화학적 종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완전히 합당한 방식이다. 무엇이든 어느 원자 종의 본질은 그것의 전자 구조에 의해 주어진다는 믿음은 여전히 현대의 실재론자들 사이에서 꽤 일반적인 것인데, 그것이 형상인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상정할 정도까지 나아가지는 않지만 말이다. 어느 원자의 최외각 전자들의 구성이 사실상 중요하다. 최외각에 전자 한 개가 모자라는지, 또는 여분의 전자가 한 개 있는지, 또는 제대로 채우고 있는지에 따라 어느 원자가 다른 원자들과 몇 개의 결합을 형성할 수 있는지 결정하는데, 탄소 원자는 네 개의 결합을 형성하고, 산소 원자는 두 개의 결합을 형성하며, 수소 원자는 한 개의 결합을 형성할 뿐이다. 그렇지만 최외각의 특성들과 이것들이 어느 원자에 부여하는 결합 역량들은 주어진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그것들을 본질로 물화시키기 위한 첫 번째 단계―이 아니라, 어느 원자의 성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들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리고 여전히 일정한 그런 성분들(양성자들)에만 주목하는 대신에 언제나 변이의 원천으로 작용하는 것들(중성자들)을 강조해야 한다. 수소 핵이 갖고 있는 중성자들의 수에 따라 이 화학적 종의 다양한 동위 원소들―프로튬, 중수소 그리고 삼중 수소―이 생성된다. 핵 속 중성자들의 수가 어느 원자의 화학적 특성들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지만, 그것의 물리적 특성에는 영향을 미치는데, 어떤 동위 원소들은 더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반면에, 다른 동위 원소들은 훨씬 더 빨리 붕괴한다. 한 원자가 아니라 개별적 원자들의 개체군 전체를 고찰하면, 동위 원소들의 상대적인 양, 또는 더 정확히, 동위 원소적 변양태의 통계적 분포는 그 개체군의 구성원들을 산출한 역사적 과정들에 관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

이런 역사적 과정들과 관련하여 천체물리학에서 알려져 있는 것을 간략히 묘사하자. 개별적 수소 및 헬륨 원자들의 거대한 개체군들은 가장 격렬한 조건, 우주의 탄생 시에 지배적인 조건에서 선출되었지만, 다른 화학적 종들의 원자들은 항성의 형성을 위해 수 억 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었다. 오늘날 대부분 원자들의 핵은 항성 핵합성(stellar nucleosynthesis)으로 알려져 있는 조립 과정을 통해 항성에서 형성된다. 항성들의 외연적 특성들(크기)과 강도적 특성들(온도 구배)이 상이한 종들의 원자들에 대한 조립 공장들로 작용할 수 있는 그것들의 역량을 규정한다. 항성이 더 거대하고 더 뜨거울수록, 그것은 더욱 더 무거운 원자들을 조립할 수 있다. 우리 태양처럼 더 작은 항성들은 수소를 연료로 연소시켜서 헬륨을 생산물로 산출할 만큼 뜨거울 뿐이다(절대온도 1천만 도). 훨씬 더 높은 온도(1억 도 이상의)에서는 헬륨 자체가 연료로 연소되어 탄소, 산소 그리고 질소를 생산물로 산출할 수 있다. 엄청나게 높은 강도(10억 도)에서는 탄소와 산소가 연료가 되는 한편으로, 생산물은 나트륨, 마그네슘, 실리콘 그리고 황이라는 종들의 원자들이다. 강도가 계속해서 증가함에 따라 실리콘이 연료로 연소되어 철을 생산하고, 마침내 폭발적인 핵합성 과정에서 최대의 강도에 이르게 되는데, 여기서 더 무거운 종들이 '초신성'으로 알려져 있는 격렬한 사건 동안 만들어진다. 이런 개체화 과정에서 중성자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데, 왜냐하면 대단히 안정한 동위 원소들만이 극단적인 항성적 환경에서 더 복잡한 핵들의 조립을 위한 플랫폼의 역할을 담당할 만큼 충분히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정보를 대면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깊은 인상을 받지 못할 것라고 상상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는 집이 건축되는 방식, 또는 환자가 치료되는 방식, 또는 원자가 조립되는 방식에 관한 세부 내용은 그것들의 형상인들보다 덜 중요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항성에서 일어나는 일에 무관하게, 항상 고정되어 있었던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몇 개의 원자 종들이 현존할 뿐이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이런 반대 주장에는 개별적 원자들의 존재론에 가능한 원자 종들의 공간를 구성하는 특이성들을 추가할 필요가 있는 까닭이 되는 어떤 진리가 존재한다. 우선 주기율표에 주어져 있는 대로 이런 원자 종들에 의해 현시되는 규칙성을 고려하자. 주기율표 자체가 다채로운 역사를 나타내는데, 왜냐하면 1869년에 멘델레예프(Mendeleev)가 주기율표에 자기 이름을 새기기 전에 여러 과학자들이 화학적 종들(원자량에 따라 나열했을 때)의 특성들에서 나타나는 규칙성을 식별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수십 년 전에 한 과학자가 이미 세 원소들 사이에서 단순한 산술적 관계를 판별했었고, 다른 과학자들은 일곱 번째 또는 여덟 번째 원소마다 어떤 성향들(화학적 반응성 같은)이 재현된다는 것을 인식했다. 이런 리듬들은 매우 매혹적이어서 배열에 있어서 간극들이 발견될 때 이것들을 주기율표에 무언가 잘못이 있다는 점을 가리키는 것으로 간주하기보다는 그냥 남겨진 간극들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종들이 현존해야 한다는 대담한 예측으로 작용했다. 멘델레예프는 실리콘 근처의 간극에 의거하여 게르마늄의 현존을 예측했다. 나중에 큐리 부처는 인접한 바륨에 의거하여 라듐의 현존을 예측했다. 물질의 화학적 핵심에 놓여 있는 이런 기저의 리듬들을 설명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의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앞장에서 조립체의 도표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도입된 수학적 관념들 가운데 일부를 환기할 필요가 있다. 옛날 수소 및 헬륨의 다양한 화학적 종들로의 분화처럼 실제적인 점진적 분화 과정은 그것의 잠재적 대응물로서 파괴된 대칭들의 연쇄(cascade of broken symmetries)를 갖는다. 어느 수학적 존재자가 그것을 변하지 않은 채로 그대로 두는 변환들의 수에 의해 특징지워진다면, 그런 변환들의 수가 더 클수록 그 존재자는 더 많은 대칭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대칭 파괴 전이는 어느 존재자를 더 많은 대칭을 갖춘 것에서 더 적은 대칭을 갖춘 것으로 변화시키는 사건인데, 연쇄는 일련의 그런 사건들이다. 구체―어떤 회전에 대해서도 여전히 불변하는 도형―에서 시작하여 일군의 형태들을 생성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상상하자. 먼저, 구체가 회전 대칭을 상실하여 2엽의 도형―절반의 회전들에 대해서만 불변하는 도형―이 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그 다음에, 이 도형이 회전 대칭을 추가적으로 상실함에 따라 그것은 4엽의 도형이 되고, 마침내 훨씬 덜 대칭적인 6엽의 도형이 된다. 이런 기하학적 도형들을 핵을 둘러싸고 있는 전자들의 "궤도들"이 상이한 강도의 수준들에서 채택할 수 있는 모양들로 간주한다면, 주기율표를 특징짓는 상이한 리듬들을 설명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인식될 수 있었던 첫 번째 주기성은 기본 물질들의 특성들이 여덟 개의 종마다 재현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중에 더 많은 물질들이 분리되고 정제됨에 따라 화학자들은 리듬이 그것보다 더 복잡하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그 리듬은 8의 주기로 두 번 반복되고, 18의 주기로 두 번 반복되며, 그 다음에 32의 주기로 두 번 반복된다. 이것에 '외로운' 고대 종들, 즉 수소와 헬륨을 추가하면, 그 수열은 2, 8. 8, 18, 18, 32, 32가 된다. 방금 언급된 대칭 파괴 연쇄가 이 수열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전자들은 파동처럼 거동하기 때문에 뚜렷히 규정된 궤적들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비탈(orbital)로 불리는 구름 또는 통계적 분포에 거주한다. 그런데 이런 흐릿한 구름들이 견고한 구체는 아니지만, 그것들은 여전히 어느 정도의 회전 대칭을 부여받을 수 있다. 가능한 오비탈 형태들의 집합은 기본적인 수소 원자 속에 점점 증가하는 양의 에너지를 주입함으로써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원자의 단일한 전자는 구체의 대칭을 갖춘 오비탈에 거주한다. 이 원자를 그 다음 준위로 흥분시키면 두 번째의 더 큰 구형 오비탈을 낳거나, 아니면 2엽 대칭을 갖춘 세 가지 가능한 오비탈(세 가지 상이한 방향으로 정향된 2엽 도형) 가운데 하나를 낳는다. 훨씬 더 큰 에너지를 주입하면, 2엽 오비탈이 4엽 오비탈(다섯 개의 상이한 방향으로 정향된 변양태들을 갖는)이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 그 다음에 흥분이 충분히 강해질 때 6엽 오비탈을 낳는다. 사실상 이렇게 전개되는 연쇄는 수소 원자가 아니라 오히려 핵 속의 양성자 수가 점점 증가하는 원자들에게 일어나는 것인데, 붕소가 비구형적으로 대칭적인 오비탈을 사용하는 최초의 화학적 종이다. 대칭성이 점점 감소하는 이런 일련의 전자 오비탈들을 정반대의 스핀을 갖는 두 전자만이 동일한 오비탈에 거주할 수 있다는 요구 조건과 결합시키면, 수열 2, 8, 8, 18, 18, 32, 32를 정확히 생성할 수 있다. 그러므로, 대칭 붕괴 연쇄가 가능한 오비탈들의 공간의 구조를 올바르게 나타내고, 그래서 화학적 종들의 가능성 공간의 한 가지 중요한 성분을 나타낸다고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다. (또한 후자는 최소 유형과 최대 유형의 특이성들에 의해 구성된, 양성자들과 중성자들의 가능한 조합들의 공간을 포함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증을 요약하자. 조립체 이론에서는 원자 일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고, 개별적인 원자적 조립체들의 개체군들이 존재할 뿐이다. 조립체의 성분들 가운데 일부(양성자, 전자)의 종류와 수는 특성들이 어느 주어진 종의 모든 원자들에 의해 공유된다는 것을 보증하는 반면에, 다른 성분(중성자)의 종류와 수는 그런 특성들을 변화시킨다. 어느 원자의 전자 구조가 그것의 화학적 역능들(주기적 분류에서 그것의 위치뿐 아니라)을 결정하지만, 그것은 어느 화학적 종의 본질로 간주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책략은 개체화 과정의 완성품, 즉 완전히 조립된 원자를 취하여 그것의 특성들 가운데 하나(최외각 전자의 수)를 그것이 어느 영원한 범주에 속하기 위한 필요충분 조건으로 삼는다. 이것은 원자들을 만들어내는 역사적 과정을 제거하고, 그래서 그것들의 안정성이 한 종에서 다른 한 종으로의 실제 생산 경로를 결정하는 동위 원소적 변양태들에 의해 수행되는 역할뿐 아니라 강도적인 것들에 의해 수행되는 역할―항성의 강도가 더 커질수록 합성은 더욱 더 복잡해진다―을 은폐한다. 게다가 그것은 상이한 종들의 전자 구조들 사이에 현존하는 더 깊은 관련성, 즉 전자 오비탈들의 가능성 공간에 대한 분석에 의해 포착되는 관련성을 드러내지 못한다. 세계가 논리적 범주들에 의해 이미 분절된, 일부는 더 종적이고 일부는 더 유적인, 본질주의적 형이상학 대신에 세계가 역사적으로 종으로 분절되는 강도의 연속체(continuum of intensity)로 시작되는 형이상학적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 원자적 조립체들의 경우에 강도적 연속체는 항성, 최소의 절편화(segmentation)를 갖추고 있지만 전적으로 미(未)분화되지는 않은 플라즈마의 구체에서 구현되는데, 왜냐하면 항성의 몸체는 온도, 압력 그리고 밀도의 차이들에 의해 규정되는 강도적 구조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연속체를 절편화하는 가능한 방식들은 유의 종으로의 논리적 분할이 아니라, 수학적으로 포착될 수 있는 잠재적 구조에 의해 주어진다.

이제 더 복잡한 개체화 사례, 즉 '동물' 유와 '인간' 종을 대체할 필요가 있는 사례를 다루어 보자. 오늘날에는 생물학적 종이 유기체만큼 특이하고, 독특하며, 우발적인 것이라는 점이 널리 수용되고 있는데, 종은 자체의 유전자 풀이 생식적 격리(reproductive isolation)를 통해서 유전 물질들의 외부적 흐름들에 대해 폐쇄적인 것이 될 때 탄생하게 되고, 멸종에 의해 마찬가지로 역사적인 죽음을 겪을 수 있다. 이것은, 존재론적으로 말하자면, 종들이 개별적 존재자들이라는 것을 함축한다. 게다가 생식적 격리는 가변적인 매개변수이다. 인간 존재자들은 다른 영장류 존재자들로부터 강하게 격리되어 있는데, 왜냐하면 인간 정자는 그것들의 난자를 수정시킬 수 없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말과 당나귀 같은 동물은 더 약한 강도를 나타내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 수정시킬 수 있지만 그들의 자손, 즉 노새는 불임이기 때문이다. 많은 식물의 유전자 풀은 훨씬 더 약하게 격리되어 있는데, 식물은 자체의 삶 전체를 통해서 교배할 수 있는 역량을 유지한다. 마지막으로, 많은 미생물 유기체는 매우 난잡하여 심지어 안정한 종이 아니라 더 일시적인 계보를 형성한다. 이런 가변성은 생물학적 절편화의 매우 상이한 형식들을 낳는다. 초기 박테리아의 유전 물질들은 핵 속에 감싸져 있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들의 후손이 유전자들을, 세대를 가로질러 수직적으로 전달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여전히 수평적으로 전달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고, 수평적 전달은 이전에 결여하고 있던 역량들(항생제에 대한 내성 같은)을 빠르게 획득할 수 있게 하는 전달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런 박테리아의 고대 포식자들은 자체의 유전 물질들을 핵 속에 감쌌는데, 그래서 유전자들을 자유롭게 교환할 수 있는 능력은 상실했지만, 생식적으로 격리되어 별개의 종들로의 점진적인 분화를 겪을 수 있는 역량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런 두 유형의 미생물 유기체들(진핵 생물과 원핵 생물)의 진화적 역사는 상이한데, 전자는 서로 다소 절편화된 복수의 유전자 풀을 계속해서 형성한 반면에 후자는 지구 전체에 걸쳐 기본적으로 절편화되지 않은 단수의 유전자 풀을 생성했다.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유기체와 종 사이의 관계가 일반 범주의 회원 지위의 관계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종은 유기체들의 조립체, 또는 더 정확히, 유기체들로 구성된 생식 공동체이다. 우리가 유기체들을 분류하는 데 사용하는 해부학적 유사성들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적인 것인데, 포식자들과 기생자들, 희소한 자원 그리고 기후 변화에서 비롯되는 유사한 난제들을 직면한 공동 역사의 결과이다. 선택 압력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어느 종의 유전자 풀을 균일화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래서 종을 구성하는 유기체들이 더 많은 유전자들을 다른 종의 유기체들을 제외하고 서로 공유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원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그대로 있는 것뿐 아니라 변동하는 것도 고찰해야 한다. 돌연 변이나 성적 재조합에 의한 유전적 차이점들의 지속적인 생산이 없다면 선택 압력은 작용할 원료가 전혀 없을 것인데, 적응도가 낮은 변양태가 전혀 걸러지지 않거나, 적응도가 높은 변양태가 조장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생물학적 종은 유전 물질들을 감싸고 있을 뿐 아니라, 무기물 영양분과 에너지를 포획하여 감싸고 있다는 것을 이 설명에 추가해야 한다. 또 하나의 이런 영토화가 한 종을 다른 한 종에 대한 식용 고기의 저장고로 만드는 것인데,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는 먹이 사슬를 가로지르는 흐름들을 추동하는 바이오매스의 구배를 만들어낸다.

식물 및 동물 종들이 절편화로서 나타나게 될 강도적 연속체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항성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연속체'라는 술어는 절편화의 절대적 부재를 함축하지는 않는다. 항성은 화학적 종들―항성이 생산하여 연료로 연소시키는 것들은 제외하고―로 절편화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더 작은 규모에서는 아원자적 입자들에 의해 확실히 절편화된다. 마찬가지로, 생태적 연속체를 생각할 때 우리는 그것을 생물학적으로는 아니지만 물리적으로 또는 화학적으로는 절편화되기 이전의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생명체가 등장하기 이전에 지구는 이미 산성도가 다른(일부는 산성, 일부는 알칼리성) 물질들의 결합 또는 산화 및 환원의 상이한 역량들을 갖춘 물질들의 결합에 의해 만들어진 화학적 구배뿐 아니라, 물리적 구배, 에너지 흐름들을 추동하는 온도의 차이가 있었다. 이런 화학적 구배는 에너지의 흐름뿐 아니라 물질의 흐름도 추동할 수 있었다. 출현할 최초의 생물학적으로 불연속적인 절편화들, 즉 해수와 바닥의 퇴적물 사이의 경계면에 거주하는 부동의 박테리아의 평평한 층들은 생존하고 번성하며 진화하기 위해 그런 구배들을 활용해야 했었다. 초기의 생명 형태들은 가용 무기물들을 발효시킴으로써 연료를 얻었지만, 십억 년 후에는 태양광 구배를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을 진화시켰다. 그후 긴 세월이 흐른 뒤에 그것들은 자체 활동의 부산물로서 형성되었었던 산소의 농도 구배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진화시켰다. 발효에 비해서 광합성과 호흡은 생산성의 엄청난 증가를 초래했으며, 그리고 그 결과로서 나타난 바이오매스의 잉여는 오늘날의 아메바와 짚신벌레의 조상들에 의해 활용될 수 있었던 다른 한 구배가 되었다. 이런 옛날 포식자들이 추가됨으로써, 단순하고 거의 분화되지 않았지만, 새로운 생태적 적소들이 개설되고 참신한 종들이 그런 적소들을 차지하도록 생성됨에 따라 많은 종들로 점진적으로 분화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던 먹이 사슬이 생성되었다.

기본적인 진화적 그림에 한 가지 강도적 성분을 추가시키는 것―전자만큼 논란의 여지가 없지는 않지만―도 오늘날 널리 수용된다. 그런데 조립체의 그 다음 성분, 즉 그것의 도표를 구성하는 가능성 공간들의 잠재적 구조를 추가할 때 이런 친숙한 느낌은 흩어지기 시작한다. 형이상학적으로 이것은 세계에 거주하는 다수의 상이한 동물 종들로 접히고 늘려질 수 있는 위상학적 동물에 관한 적절한 개념 구상을 포함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서술하듯이,

모든 [조립체]들에게 있는 유일한 <추상적인 동물>을 이 조립체들이 실행시킨다. 두족류와 척추동물에 대해 [똑같이 적용되는] 유일하고 동일한 고른판 또는 구성의 판. 척추동물이 <문어>나 <오징어>가 되려면 등을 두 쪽으로 나누는 요소들을 용접시켜 골반과 목덜미를 접근시키고 수족이 모두 몸의 한쪽 끝으로 모일 수 있도록 아주 빨리 몸을 구부리면 그만이다. (들뢰즈/가타리, <<천 개의 고원>>, p. 484)

물론, 이것들과 같은 위상학적 변환들은 성체 동물들에 대해서는 실행될 수 없는데, 그런 동물들의 배아들만이 그런 변환들을 겪을 만큼 유연하다. 다윈에 의해 이미 인식되었던 잘 연구된 사례는 사족 사지(tetropod limb)이다. 어느 동물 조립체의 이 성분을 새의 날개, 발가락이 한 개인 말의 사지, 또는 엄지 손가락이 마주보는 인간 손으로 현실화될 수 있는 미분화된 잠재적 사지로 생각할 수 있다. 일찌기 그것은 적응적 관계의 일례로서 판별되었는데, 그래서 오늘날의 모든 사지의 조상이 될 수 있을 옛날의 균일한 사지 유형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졌다. 그렇지만, 더 최근에, 유사성을 찾아서 성체 형태들을 비교하는 것은 이런 현상을 개념화하는 올바른 방식이 아니라는 점이 명료해졌다. 오히려 과정의 상동 관계들을 판별하기 위해서는 발생학, 즉 개체화 과정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위상학적 동물이라는 개념을 명료화하려고 할 때 만나게 되는 첫 번째 문제는 인간 손이 날개 또는 발굽이 되기 위해 겪어야 하는 접힘과 늘림―발가락의 연장 또는 성장 금지 같은―을 결코 상상할 수 없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런 변환들이 어떻게 유전될 수 있는지 설명해야 한다. 지금까지 사용한 술어들에 의거하여, 영토화 매개변수의 설정뿐 아니라 코드화 매개변수의 설정도 중요한 조립체를 개념화할 필요가 있다. 많은 경우에 미분 방정식들을 사용하여 모형화되는 연속적인 매개변수 공간으로 간주될 수 있는 전자와 달리 가능한 유전자들의 공간은 전적으로 이산적이고 고유한 공간적 질서가 전혀 없다. 우리는 이런 조합적 공간들에 접근하는 어떤 일반적인 방식도 알지 못하고, 그것들의 잠재적 구조를 개념화하는 방식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서 시작하자. 이제 유전자 코드는 잘 확립되어 있으며, 산업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된다. 유전자들과 그것들의 코드화 대상인 단백질들은 성분만 다른 분자들의 선형적 연쇄들인데, 유전자들의 경우에는 핵산 분자들이고, 단백질들의 경우에는 아미노산들이다. 유전자 코드는 한 유형의 분자적 연쇄를 다른 한 유형의 분자적 연쇄와 대응시키는 방식일 뿐인데, 세 개의 핵산이 생명체에 의해 사용되는 스무 개의 아미노산들 각각에 대응되고, 그런 대응 관계 자체는 임의적인 것, 일종의 응결된 우연한 진화적 사건이다.

우리는 가능한 유전자들의 공간과 가능한 단백질들의 공간에 관해 무엇을 아는가? 우리는 그것들의 크기에 관한 견고한 통찰이 있는데, 왜냐하면 어느 주어진 길이의 가능한 연쇄들의 수는 가용 성분들의 수를 취하여 가능한 최대 길이를 나타내는 수로 지수함수화함으로써 계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방금 언급되었듯이, 단백질들이 스무 개의 가능한 아미노산들의 목록에서 도출될 수 있다면, 다섯 개의 아미노산 열로 이루어진 매우 짧은 단백질은 삼백 만 개의 상이한 조합(20^5)으로 현존할 수 있다. 보통의 효소를 구성하는 300개의 아미노산처럼 더 실제적인 길이에 대해서 조합들의 수는 사실상 무한대가 된다. 유전자들은 단 네 개의 성분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가능한 유전자들의 수는 더 작지만, 각 아미노산은 세 개의 핵산이 규정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유전자 길이는 더 길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든 우리는 연쇄의 길이가 증가함에 따라 폭발적으로 커지는 조합적 공간들을 고찰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들이 고유한 공간적 질서를 결여하고 있다면 이런 무한한 공간들의 구조를 어떻게 연구할 수 있는가? 한 가지 전략은 그것들에 임의적이지 않은 질서, 즉 해당하는 분자적 연쇄의 실제 성향들과 어떤 관련성을 갖는 질서를 부과하는 것일 것이다. 유전자들의 경우에 가장 중요한 성향들은 그것들의 복제 역량뿐 아니라, 복제 동안 복사 오류(돌연 변이)를 겪는 경향이다. 그러므로 단 하나의 돌연 변이에 의해서만 달라지는 모든 연쇄들이 이웃 유전자가 되도록 핵산들의 각 연쇄를 배열한다면 한 가지 합당한 공간적 질서가 부과될 수 있다. 어느 유전자가 그것의 모든 이웃 유전자들, 즉 단일한 복사 오류에 의해 변환될 수 있는 모든 유전자들과 직접 접촉한다면, 공간에 부과된 연결성이 타당할 것인데, 무엇이든 어느 한 유전자에서 시작하여 연결된 경로는 진화가 따를 수 있는 경로일 것이다.

이런 배열은 너무 복잡한 듯 보일 것인데, 그 공간은 어느 주어진 유전자의 전체 길이를 따라 각 핵산을 변화시킴으로써 만들어질 수 있는 모든 변양태를 포함해야 하고, 각 변양태는 독자적인 차원을 획득해야 한다. 그런데 다른 가능성 공간들도 유사한 문제점을 갖는다. 모형화되고 있는 현상이 다수의 상이한 방식들로 변화할 수 있다면 앞장에서 검토된 상태 공간들은 매우 높은 차원성을 가질 수 있다. 반면에, 어느 때나 있을 수 있는 상태가 단일한 점이 되기 때문에 복잡한 현상은 극단적으로 단순화되고, 그것의 역사는 단일한 궤적이 된다. 유사한 관념이 가능한 유전자들의 공간에도 적용되는데, 자체의 많은 차원들의 견지에서 그것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한 번에 하나의 돌연 변이를 산출하는 사건들에 의해 추동되는, 한 이웃 유전자에서 그 다음 이웃 유전자로 이어지는 단일한 궤적이 되기 때문에 공간적 배열은 유전자의 진화가 시각화되는 방식을 단순화한다. 이런 진화적 행보들을 인도하는 선택 압력을 포착하기 위해 우리는 조합 공간 위에 일단의 적응도 값들을 가능한 각 연쇄에 하나씩 부과할 수 있다. 이것은 적응도의 최대값 및 최소값의 분포의 형식으로 특이성들의 분포를 낳는다. 우리는 특이성들을 적응도 풍경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지점과 가장 낮은 계곡 지점으로 가정할 수 있다. 가장 단순한 풍경은 쉽게 닿을 수 있는 단일한 봉우리(전체적 최대), 즉 진화적 행보들이 그냥 올라간 다음에 거주할 수 있는 봉우리를 갖는 풍경일 것이다. 이것이 '적자 생존'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슬로건에 의해 포착되는 경우이다. 더 실제적인 판본들은 복수의 국소적 최대를 가져야 하는데, 각각은 충돌하는 선택 압력들에 대한 적응적 타협을 가리킨다. 단일한 전체적 최대를 갖는 풍경은 역사에 대한 역할을 부인하는 듯 보이는 반면에―우리는 최적의 종을 그것이 필연적으로 채택해야 하는 형태와 동일시할 수 있을 것이다―다수의 국소적 최적 조건들을 갖는 풍경은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데, 왜냐하면 어느 주어진 종이 우연히 올라간 봉우리는 우발적인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일단 적응도의 봉우리에 올라서게 되면 한 종은 문자 그대로 그곳에 갖히게 되는데, 왜냐하면 봉우리 아래의 유전자들은 당연히 적응도가 더 낮고, 그래서 거기서 내려와서 더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는 것은 선택 압력에 의해 금지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유전자 부동은 자연 선택의 여과 효과가 미치지 않는 변이의 무작위적인 원천을 제공함으로써 어느 종이 국소적 트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

이것은 유전자들에 대한 가능성 공간을 구성하는 단순하지만 엄밀하게 규정된 방식이다. 그것은 너무 단순한 것인데, 왜냐하면 단 하나의 변이 원천이 포함되기(돌연변이) 때문이고 적응도라는 개념이 유전자들의 직접적인 생산물들―단백질들과 그것들의 촉매 역량들―에 대해서만 잘 규정되기 때문이다. 이런 가능성 공간을 사용하여 최초의 단세포 유기체들로 하여금 광합성과 호흡을 발견하도록 이끈 단백질들의 점진적 분화 과정을 탐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몇 가지 이유 때문에 가능성 공간은 그것을 넘어서면 매우 유용하지 않을 것이다. 한 가지 이유는, 돌연 변이와 달리 성적 재조합은 가능성 공간에서 분리되어 있는 연쇄들로부터 새로운 유전체들을 생산하는 것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어느 국소적인 적응도 봉오리에 머물고 있는 모친의 염색체에 속하는 핵산 연쇄와 다른 한 봉우리에 머물고 있는 부친의 염색체에 속하는 연쇄를 가정하면, 그 둘을 조합하는 것은 중간의 적응도 최저점에 놓여 있는 연쇄를 산출할 것이다. 적응도의 봉우리와 계곡들이 '험악한 풍경'―촘촘하게 뭉쳐 있는 봉우리들 사이에는 깊은 계곡이 전혀 없는―을 형성한다는 점을 요구하는 것과 같은 이런 문제에 대해 제안된 몇 가지 해결책이 있지만, 이런 해결책이 작동할 것인지 여부를 말하기에는 너무 이를 것이다. 다른 한 문제는, 일단 단백질에서 다세포 유기체로 이동한다면, 각각의 가능한 분자적 연쇄의 적응도를 규정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단백질과 달리, 대형 동물의 육체는 유전자들에서 직접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 단세포(수정란)를 갓 태어난 개체의 수백 개의 상이한 세포 유형들로 점진적으로 분화시키며, 그리고 접힘, 늘림 그리고 이동을 통해서 그런 세포들로부터 기관들을 형성하는 복잡한 발생학적 과정를 포함한다.

세 번째 문제를 다루어 보자. 수정란을 유기체로 변환시키는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유전자의 효과가 아니라 작은 부분집합의 효과만을 모형화할 필요가 있는데, 다시 말해서, 모든 세포에 관한 일상적인 부기 업무들을 수행하는 유전자들은 무시하고 상이한 세포 유형들 사이의 차이점들을 초래하는 유전자들에 집중할 수 있다. 다세포 유기체를 구성하는 모든 세포들이 정확히 동일한 DNA를 갖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필요한 경우에 상이한 세포 유형들에서 다른 유전자들을 켜거나 끄는 특수한 유전자들이 존재해야 한다. 이런 특수한 유전자들은 DNA 자체를 목표로 삼고 있는 단백질들에 대한 유전 정보를 지정하는데, 다른 한 '하류(downstream)' 유전자가 표현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도록 그것의 일부에 결합시킨다. 게다가 이런 유형의 유전자는 자체적으로 근처의 하류 유전자들을 제어하는 유전자들과 더불어 상류(upstream) 유전자들에 의해 제어되는 유전자들로 분화될 수 있다. 다른 유전자들을 켜거나 끄는 동시에 켜지거나 끄질 수 있는 단백질을 생산하는 것은 이런 유전자들에게 스위치들의 회로와 연결망들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데스크톱 컴퓨터의 중앙 처리 장치가 바로 그런 스위치들(And-게이트, Or-게이트, Not-게이트)의 연결망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런 유형의 유전자들의 역능이 명백해진다.

스위치들 자체는 단백질들이 부착되어 있는 DNA의 비(非)코드화 영역들이며, 일반적으로 길이는 여섯 개와 아홉 개 사이의 핵산들인데, 이것은 4,096(4^6)과 262,144(4^9) 사이의 가능한 순열들을 낳는다. 스위치 역할을 수행하는 단백질들에 대한 유전 정보를 지정하는 유전자들은 비교적 소수이다. 인간 유전체에서 20,000개의 코드화 유전자들 가운데 500개만이 관여한다고 가정하면, 두 유전자 회로에 대해서는 250,000개의 가능한 회로들이, 세 유전자 회로에 대해서는 1200만개 이상의 가능한 회로들이, 그리고 네 유전자 회로에 대해서는 60억 개 이상의 가능한 회로들이 산출된다. 그러므로, 조절 유전자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상이한 종류의 가능성 공간―가능한 핵산 연쇄들의 공간이 아니라 가능한 회로들의 공간―들을 고찰하게 만든다. 발생 동안 체형 규정에 직접 관여한다는 증거가 있는 유전자들에만 집중함으로써 이런 다른 공간들의 크기를 제한할 수 있다. 이런 유전자들은 이른바 혹스(Hox) 유전자들이다. 예를 들면, 척추 동물이 속하는 문은 네 개의 혹스 집단(39개의 유전자)이 있는 반면에, 곤충이 속하는 문은 두 개의 집단(8개의 유전자)가 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가능한 회로들의 공간에 일단의 적응도 값들을 부과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이런 값들을 결정하는 선택 압력들은 전통적인 외부적 선택 압력들(포식자, 기생자)이 아니라, 오히려 자체를 보존하는 돌연 변이들은 선택하고 그렇지 않는 것들을 제거함으로써 현존하는 회로들의 정합성을 유지시키는 내부적 선택 과정들이어야 한다.

여러 특질들이 혹스 유전자들을 구별한다. 혹스 유전자들은 엄청나게 오래되었는데, 다세포 유기체들의 분화보다 앞선다. 그것들은 동물 유전체에서 뭉쳐 있고, 신체 기획(척추 동물, 연체 동물 또는 곤충의 신체 기획 같은) 전체에 걸쳐 두드러진 유사성들을 드러내며, 강도적 연속체의 절편화에 관한 논의에서 더 중요하게도 그것들의 공간적 배열은 성체를 특징짓는 신체 부위들과 절편들의 분포와 흥미로운 대응 관계를 갖는다. 대응 관계들의 첫 번째 집합은 성체 형태의 대칭성들과 깨진 대칭성(또는 극성)들 사이의 대응 관계와 경도, 위도 글고 고도처럼 배아의 지리를 규정하는 축들이다. 모든 성체 척추 동물은 오른쪽 면과 왼쪽 면이 거울상 변환 아래 대충 불변적인 좌우 대칭성을 나타내지만, 앞과 뒤(말에서는 위와 아래)뿐 아니라 머리와 꼬리는 이런 대칭성을 깨뜨린다. 초기 배아를 구성하는 세포들의 개체군은 세포 스트립 위의 어떤 유전자들을 활성화시킴으로써 이런 두 가지 깨진 대칭성에 해당하는 동-서 축과 남-북 축을 발달시킨다. 사실상, 연속적인 세포 개체군이었던 것이 경도와 위도를 따라 점점 더 정교한 규모로 절편화된다. 절편화의 세부 내용은 종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므로, 모든 척추 동물에 공통적인 신체 계획은 뻣뻣한 척추를 규정하는데, 그것이 절편화되는 방식(척추골의 수와 유형)운 종에 의존한다. 성체 형태의 모듈적 구성과 혹스 유전자들의 모듈적 사용 사이에도 대응 관계가 현존한다. 동물은 구성 요소들의 조립체인데, 구성 요소들 가운데 많은 것이 유형과 크기에 있어서만 상이한 반복되는 모듈들이다. 예를 들면, 사지는 부위들(허벅지, 종아리, 발목; 상완, 전완, 손목)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들의 말단들도 손가락과 발가락의 상이한 뼈처럼 다양하게 반복되는 모듈들로 이루어져 있다. 사지는 동-서 축을 따라 특정한 위치에서 배아로부터 돌출되는 작은 봉오리로서 자체의 현실화를 개시한다. 그 다음에 성장하는 그 봉오리는 국소적인 경도 및 위도들의 독자적인 집합들에 의해 절편화되는데, 각 절편은 특정한 유전자들의 스위치가 켜지는 세포의 하위 개체군들을 포함한다. 결국 이런 사지의 말단들은 일단의 더 정교한 하위 분리들을 통해서 더욱 더 절편화되는데, 미래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미리 형상화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배아 발생 과정은 유기체의 개체화를 가리키지만, 동종의 모든 유기체는 유전자들의 가능한 회로들의 동일한 공간을 공유하고, 그래서 이런 가능성 공간의 도표는 종의 개체화의 잠재적 구성 요소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제 두 가지 개체화 과정을 비교하자. 원자 종의 개체화는 서술하기가 비교적 단순한데, 왜냐하면 그것은 단일한 매개변수, 즉 영토화를 포함할 뿐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유기체] 종의 개체화는 두 번째 매개변수, 즉 코드화를 필요로 한다. 원자들의 조립과 최종 형태는 그것들의 도표(전자 오비탈의 대칭성, 양성자-중성자 상호작용에 있어서 에너지 극소)로부터 직접 도출될 수 있지만, 동종 유기체들의 조립과 공유 형태는 혹스 유전자들에 의한 매우 특정한 코드화를 포함한다. 게다가, 첫 번째 경우에 영토화는 가장 기본적인 형식, 즉 열역학적 평형으로부터의 거리로 측정되지만, 어느 한 순간에 하나의 종을 구성하는 유기체들은 물질과 에너지뿐 아니라 유전자들도 감싸는데, 그래서 첫 번째 매개변수는 유전 물질들의 흐름에 대한 장벽의 창조(생식적 격리)뿐 아니라 상이한 생태적 역할들(포식자, 먹이, 기생자, 숙주, 공생체)을 수행하는 종들 사이의 이산적인 경계들의 창조도 포함한다. 두 번째 차이점은 내부에서 개체화 과정이 일어나는 기체의 특질이다. 항성 환경에 의해 형성된 매체는 원자들을 조립하는 데 필요한 모든 원료뿐 아니라 조립 과정을 추동하는 구배도 포함하고 있다. 반면에, 종의 개체화를 위한 기체는 우주에서 홀로 떠도는 이산적인 플라즈마 구체만큼 유형적이지 않다. 그것은 지구에서의 에너지 및 무기물 영양분들의 흐름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자는 태양광 구배에 의해 추동되고 후자는 화학적 구배에 의해 추동된다. 인간의 관측 시간 척도에서는 이런 흐름들이 비가시적이지만, 여러 번의 탄생과 죽음을 포괄할 만큼 충분히 긴 시간적 척도에서는 유기체들이 이런 연속적인 흐름 속의 일시적인 응고물처럼 보일 것이다. 게다가, 마찬가지로 비가시적인 유전 물질들의 흐름―세대를 가로질러 수직적으로 그리고 계통을 가로질러 수평적으로―즉 처음에 무핵의 단세포 유기체들에서 다소 연속적이었던 흐름이 존재한다. 이런 연속체 내부에서 에너지 구배를 활용하는 세 가지 기본 전략들이 발달된 후에는 그것들이 다시 발명될 필요가 없었다. 감싸진 핵과 종화 역량을 갖춘 후속 생명체들은 그런 유기체들을 기능적 모듈로 그냥 흡수하였는데, 그것들을 자체의 세포막 속에 가두어서 더 영구적인 공생을 확립했다. 그것들은 모든 식물 및 동물 세포 속에서 엽록체와 미토콘드리아로서 여전히 현존하는데, 전체적인 원핵 생물 유전자 풀로부터 격리되어 독자적으로 재생산된다. 그러므로, 매우 실제적인 의미에서, 원래 박테리아의 가볍게 절편화된 유전자 풀은 대사 기구의 중요한 조각들이 추출되어 더 견고하게 절편화된 생명체들로 편입될 수 있었던 강도적 연속체였다.

이런 두 개체화 과정은 원자 종과 생물 종의 탄생 시에 일어나는 일에 대한 감각을 제공하지만, 이 장을 종결하기 위해 그것들이 계속해서 자체의 생을 영위하는 방식에 관한 몇 가지 주장을 추가해야 한다. 예를 들면, 최근에 산출된 한 다발의 수소 원자들은 다양한 가능한 역사들이 앞에 놓여 있다. 이 원자적 조립체들의 일부는 계속해서 자율적으로 현존할 수 있는데, 그것들의 상태는 자체의 도표에 있어서 특이성들의 분포에 의해 결정된다. 그 분포는 두 원자가 결합되는 상태가 두 원자가 독자적으로 현존하는 상태보다 더 낮은 극소에 해당하는지, 즉 그 상태가 에너지적으로 더 선호적인 것인지 결정할 수 있다. 이런 고유한 경향을 감안하면, 유체 상태에서 대류 셀이나 난류성 소용돌이들에 의해서만 절편화된 개체군들로 현존하는 이원자 분자들로서의 수소 원자들을 찾아낼 확률이 더 높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수소 원자들은 자율성을 버리고 나아가서 물 분자와 같은 더 큰 분자적 존재자들의 부분들을 형성한다. 원자들은 다른 원자들과 공유 결합―한 쌍의 최외각 전자들을 공유함으로써 형성되는 대단히 강한 결합―을 형성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 이것은 물 분자를 묶는 그런 종류의 결합이고, 그래서 이 경우에 수소 원자들은 더 큰, 더 견고하게 절편화된 전체의 일부가 된다. 그런데 이런 구속된 상태에서는 원자들이 더 영토화되어 버렸지만, 그것들은 여전히 탈영토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자체의 일반적인 결합 역량에 덧붙여 수소 원자들은 적절하게도 '수소 결합'으로 불리는 더 약한 결합을 형성할 수 있는 한 가지 특이한 역량을 갖추고 있다. 결합 조작의 대상이 되는 원자들의 집단이 전기음성적이며, 그리고 수소 원자 자체가 전기음성적인 원자들의 집단에 공유적으로 결합될 경우에만 이 능력이 구사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조건이 충족되면, 수소 결합은 덜 견고한 전체들의 형성을 가능하게 하는데, 그것들 가운데 일부는 추가된 유연성을 사용하여 정보를 저장할 수 있다. 이것이 염색체에 해당하는 경우이다. 염색체의 정체성은 공유 결합에 의해 시간이 흘러도 보존되지만, 자기복제할 수 있는 자체 역량은 수소 결합에 의해 결정되는데, 왜냐하면 이중 나선의 두 줄이 쉽게 분리되어야 하고, 그래서 새로운 핵산들이 형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각 줄에 쉽게 부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소 원자들의 생이 이렇게 파란만장할 수 있다면, 생물 종은 훨씬 더 많은 모험을 겪을 수 있다고 가정하기가 어렵지 않은데, 왜냐하면 그것은 탈영토화와 탈코드화의 운동을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한 종은 별개의 생태계들에 거주하는 여러 생식적 공동체들의 형태로 현존한다. 먹이 사슬, 즉 그것들이 차지하고 있는 적소에서 이 공동체들의 구성원들이 담당하는 역할은 다소 견고하게 결정된다. 그런데 적소의 가용성을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키는 역사적 사건들이 어느 종이 변화할 기회들을 개방하거나 폐쇄할 수 있다. 단일한 종이 아니라, 포유류와 파충류처럼 종들의 강을 감안하면 이 효과는 시각화하기 더 쉽다. 대략 6000만 년 전에 대부분의 적소들은 고도로 미분화된 파충류 동물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반면에, 포유류 종들은 대체로 미분화되어 있었는데, 오늘날 보이는 환상적인 다양성에 관한 희미한 그림을 제시한 소수의 털로 덮힌 설치류의 야행성 종들을 비롯한 기린과 코뿔소, 돌고래와 고래, 침팬지와 인간들이 존재했었다. 포유류 종들은 잠재적으로 존재했었지만, 그것들의 차이점들이 표현될 수 있었던 적소들의 부재에 의해 억제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후에 하나의 우발적인 사건, 즉 지구를 강타한 유성에 의해 초래된 대량 멸종 때문에 현존하는 먹이 사슬들에서 많은 위치들이 비게 되었고, 그래서 포유류의 분화 기회들이 창조되었다. 이것은 탈영토화 가능성들 가운데 가장 단순한 것일 뿐이다. 더 흥미로운 일례는 상이한 적소들 사이의 관계들을 포함한다. 예를 들면, 포식자들과 그들의 먹이는 포식자를 피하거나 먹이를 포획할 수 있는 능력에 있어서 유전 가능한 어떤 개선도 대응책 개발을 위한 선택 압력으로 작용하는 '무기 경쟁'으로 진입할 수 있다. 이런 상호 자극이 여러 세대에 걸쳐서 유지될 때, 포식자 종과 먹이 종은 자체의 유전자적 정체성을 적응적으로 수정하고 상호적 탈주선에 휩쓸리도록 서로 강제할 수 있다. 공생 같은 다른 생태적 관계들도 탈영토화를 초래할 수 있다. 식물과 식물을 수분시키는 곤충의 사례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지적하듯이,

서양란은 말벌의 이미지를 만들고 말벌을 본뜨면서 탈영토화되지만, 말벌은 이 이미지 위에서 재영토화된다. 한편 말벌은 서양란의 생식 장치의 한 부분이 됨으로써 탈영토화되기도 하지만, 서양란에 꽃가루를 옮김으로써 서양란을 재영토화한다 ... 서양란의 말벌-되기, 말벌의 서양란-되기[.] 이때 이러한 생성물 각각은 한쪽 항을 탈영토화하고 다른쪽 항을 재영토화한다. 또 이 두 생성은 서로 연쇄되어 있고 연계되는데, 탈영토화를 항상 더 멀리 밀어붙이는 모든 강렬함들의 순환에 따라 그렇게 한다. (들뢰즈/가타리, <<천 개의 고원>>, p. 25)

또한 생물 종은 탈코드화의 운동을 따르는데, 유전자들에 의해 견고하게 코드화되지 않은 행태의 창발에 의해 가장 잘 예시된다. 물려받은 패턴들로부터 학습의 점진적인 분리는 학습의 상이한 형태들―고전적(파블로브적) 조건화, 도구적 조건화 그리고 복잡한 기술 획득―을 연쇄적으로 비교함으로써 추적할 수 있다. 첫 번째 학습 형태는 자체의 기초로서 견고하게 코드화된 반사―더듬이와 설탕 용액의 접촉에 이어지는 꿀벌의 핥는 행태 같은―를 사용하고, 생태적으로 유의미한 다양한 자극들과의 연합들을 추가한다. 그러므로 꿀벌은 과즙의 현존을 그런 현존의 자연적 기호(지표)인 다양한 자극들―꽃 향기, 꽃 색깔의 확대 그리고 대칭적인 꽃잎 배열―과 연합시키도록 훈련될 수 있다. 두 번째 학습 형태는 더 탈코드화된 것인데, 자발적이지만 낮은 확률로 일어나는 현존하는 행태 패턴과 보상 경험의 연합을 통한 습관 획득을 포함한다. 이것이 산출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참신한 행태들은 서커스 동물들의 사례에서 쉽게 관찰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습관을 통한 학습을 넘어서 기술의 획득으로 나아갈 수 있다. 많은 경우에 이것은 보상을 포함할 뿐 아니라, 기술을 이미 숙달하여 학습자에 대한 모범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동물의 현존도 포함하는데, 연습을 반복함으로써 숙달하게 된다. 정교한 형태적 변양태들과 끝없는 장식음들이 나타나는, 나이팅게일이나 찌르레기 같은 텃새들의 노래가 좋은 일례이다. 그런데 이미 지적되었듯이, 노하우―본보기로 배우고 실천으로 학습되는 지식―은 인간 종과 더불어 최대의 표현에 이르게 된다. 생산적 능력―이것의 번성은 많은 전문 기술자, 대장장이, 목수, 도공으로의 점진적인 노동 분화에 의해 입증된다―에서, 던지기 곡예사, 줄타기 곡예사 그리고 공중 그네 곡예사의 기술에 의해 예시되듯이, 인체의 잠재력을 표현하는 비생산적 능력에 이르기까지 인간들이 숙달할 수 있는 기술들의 수는 끝이 없는 듯 보인다.

마지막으로, 탈영토화와 탈코드화의 운동 사이에 작동하는 다양한 상호작용들을 고찰해야 하는데, 전자는 어떤 해부학적 구성 요소들을 자유롭게 하고(다른 요소들을 희생하면서), 후자는 행태를 더 다재다능하게 만든다. 인간 손의 모혐이 그런 것인데, 초기 인류의 직립 자세가 인간 손을 이동의 기능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동시에 발에게서 쥘 수 있는 능력을 박탈하는 한편으로, 석기의 등장은 그것을 점점 더 다양해지는 손 기술을 생성시키는 문화적 탈주선과 연결시켰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말로 결론을 내리면,

손은 탈영토화된 과거의 앞발이다. 나아가 자유로운 손은 뭔가를 쥐고 장소를 이동하는 데 쓰이는 원숭이의 손과 비교할 때 탈영토화되어 있다 ... 또 환경과 관련된 탈영토화들도 고려해 보자. 스텝은 숲보다 더 탈영토화된 연합된 환경이며 몸체와 기술에 탈영토화라는 선별 압력을 행사한다(손이 자유로운 형태로 나타나고 불이 기술을 써서 만들 수 있는 물질로 등장할 수 있는 것은 숲에서가 아니라 스텝에서 생겨났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고른판 위에서 펼쳐질 수 있는 유기체, 생태, 기술의 지도들을 만들어야 한다.  (들뢰즈/가타리, <<천 개의 고원>>, p. 123)

―― 마누엘 데란다(Manuel DeLanda), <<조립체 이론(Assemblage Theory)>>(2016), 6장, pp. 137-162.

2015년 9월 17일 목요일

스티븐 샤비로(Steven Shaviro) -사변적 실재론 - 입문글 Speculative Realism - a Primer

http://blog.daum.net/nanomat/997

사변적 실재론 - 입문글
Speculative Realism - a Primer

―― 스티븐 샤비로(Steven Shaviro)

지금까지 근대 서양 철학―최소한 1781년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가 "순수 이성 비판"을 출판한 이래로―은 존재론보다 인식론을 우위에 두는 경향이 있었다. 존재론은 존재의 본성에 관련된 것인데, 가장 기본적인 층위에서 무엇이 존재하는지 규정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인식론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아는지와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세계를 알 수 있는 우리 능력의 근거와 한계를 면밀히 조사한다. 인식론이 존재론에 앞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세계가 어떠한지에 관한 주장을 제시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런 주장들에 대한 근거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 그것들이 참이라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일 뿐이다. 칸트는 당대의 철학이 그런 근거를 제공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관찰이나 경험적 증거에 매이지 않은 채 순수한 논리적 연역에 의해 형이상학적 필연을 발견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독단적이었거나, 아니면 경험적 사실과 주관적 체험에 의거하지만 이런 특수한 사실들과 직접적인 경험을 넘어서 일반화할 수 없다고 주장할 정도로 회의적이었다. 이런 경향 둘 다에 맞서서 칸트는 철학은 자체의 기초를 면밀히 조사하여 설명함으로써 시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철학이 이것을 행하지 못하고, 그 대신에 형이상학적 사변에 직접 착수한다면, 넌센스만이 초래될 것이다. 칸트의 경우에, 그리고 그때 이후 대부분의 철학자들의 경우에,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그리고 무엇이 그것이 참이라는 우리 주장을 정당화하는지 설명할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그저 무언가를 맹목적으로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

원칙적으로 존재론에 대한 인식론의 이런 우위는 나무랄 데가 없는 듯 보인다. 그런데 실제로 그것은 꽤 문제적인 것이 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결국 우리가 만나는 세계 속 사물들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만나는 우리 나름의 과정에 관해 말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사물 자체"는 알 수 없는 것이며, 우리가 정말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현상―사물들이 우리에게 현시되는 양태―뿐이라고 역설한다. 칸트 이후 수 세기 동안 이것은 일종의 공통 감각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세계에 적용하는 독자적인 부과물들의 왜곡 렌즈들을 결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사물들을 그것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오늘날 이런 부과물들은 칸트의 범주들을 넘어서 언어, 우리의 특수한 인지 메커니즘 그리고 우리의 문화적 편향과 이데올로기 같은 것들을 포함한다.

인식론적 성찰은 중요한데, 그것 덕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편견과 의심받지 않은 가정들을 인식하게 된다. 그런데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그런 성찰 때문에 우리가 이런 편견과 가정들에서 벗어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시각들에 갖혀 있어서 여타의 견해를 취할 수 없다. 어쨌든 우리가 모든 것―다른 사람들, 다른 살아 있는 존재자들 그리고 우주 속 다른 것들―을 우리 자신의 모습대로 고치는 것의 위험에 관해 걱정하는 것이 사실상 중요하고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우리가 치르는 비용은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에 관해서만,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만 말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충분히 멀리 밀고 가면, 우리는 세계란 인위적인 사회적 또는 언어적 구성물일 뿐이며, 세계는 우리 자신이 그것에 집어넣은 것으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믿게 된다. 이십 세기 말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 그리고 더 미묘한/복잡한 방식으로, 쟈크 데리다(Jacques Derrida) 같은 사상가들의 탈근대적 철학의 경우에는 이런 구속복에서 벗어날 길이 전혀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지적하고 개탄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벗어날 수 있고, 그래서 진정으로 다른 무언가를 만날 수 없다.

이십일 세기에 철학적 사변의 부활은 이런 딜레마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다. 그것은 인식론의 칸트적 우위를 무화시키고자 하는데, 그런데 그것은 매우 칸트적 이유에서 이것을 행한다. 칸트 자신의 인식론의 격상과 형이상학적 사변의 금지는 독단적 합리주의라는 스킬라와 경험론적 회의주의라는 카리브디스 둘 다를 피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현재 인식론의 격하를 동반하는 칸트의 반전은 맹목적인 이성중심주의와 민족중심주의라는 스킬라와 무한한 해체와 자기 비판이라는 카리브디스 둘 다를 피하고자 하는 비슷하게 고무된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사변이 모든 가능한 지식의 경계를 침범하기 때문에 칸트는 사변을 비난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늘날의 새로운 사변적 사상가들의 경우에는 바로 지식의 한계 때문에 사변이 필요하다. 실재적인 것은 그렇게 존재하지만,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이십일 세기 사변은 우리의 단단한 지식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독단적 주장을 제기하기는 커녕, 이 새로운 형태의 사변은 역설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들의 공간과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의 시간을 탐사한다.

2007년에 네 명의 철학자―퀑탱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 그레이엄 하만(Graham Harman), 레이 브래시어(Ray Brassier) 그리고 이에인 해밀턴 그랜트(Iain Hamilton Grant)―가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표제어 아래 런던의 골드스미스 칼리지에서 각자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들은 서로 그리고 서로의 작업을 얼마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때때로 비교적 균일한 집단으로 간주되었지만, 그 이후로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표제어를 포기했다. 그리고 사실상 이 사상가들 사이의 차이가 매우 커서 그들은 단일한 철학 학파를 이룬다고 할 수 없다. 그래도, 이 사상가들이 최소한 중요한 출발점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가리키는 데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레이블이 여전히 유용하다. 하만의 말에 따르면, "사변적 실재론자가 되는 데 필요한 것은 '상관주의'에 반대하는 것뿐인데, 상관주의는 모든 철학을 인간과 세계의 상호 작용에 정초하는 그런 종류의 철학(오늘날에도 여전히 지배적인)을 가리키는 메이야수의 술어이다."

사변적 실재론은 세계 및 세계 속 사물들의 우리 자신의 개념화로부터의 독립성을 역설한다. 그것은 세계의 질서는 우리 마음(또는 우리 언어 또는 문화)이 그것을 구성하기 위해 작동하는 방식에 의존한다는 칸트적 테제를 거부한다. 또한 그것은 자아와 세계, 또는 주체와 객체, 또는 아는 자와 알려지는 것 사이의 원초적인 호혜성 또는 대응성이라는 현상학적 가정을 거부한다. 실재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기묘하다. 사물들은 우리가 그것들에 관해 지니고 있는 관념들에 결코 들어맞지 않는데, 그것들에는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항상 존재한다. 세계는 우리 자신의 인지적 범형과 서사적 설명 양태들에 꼭 들어맞지 않는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가 아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변이 필요하다. 우리의 고질적인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서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비인간 세계의 존재를 진지하게 고려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변을 전개해야 한다.

미리 결정된 한 가지 사변 형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변은 적절한 결말에 대한 아무 확신도 없는 미지의 것으로의 항해이다. 이런 점에서, 자유로운 철학적 사변(philosophical speculation)과 궁극적으로 이익을 낼 목적으로 항상 실행되는 금융 투기(financial speculation)가 대조될 수 있다. 오늘날 파생 상품 시장에서 실행되는 헤지 펀드의 투기는 위험(risk)을 계산하고 수량화하는 한 방식으로 간주된다. 시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간에, 투자자들은 확률의 법칙들을 고려함으로써 이익을 낼 수 있다. 그러므로 금융 투기는 미래를 관리하고 제어하는 한 방식이다. 그것은 미래가 현재와 정합적일 것이라는 의심받지 않은 가정에 의존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형이상학적 사변은 위험이 아니라 환원 불가능한 불확실성을 대면한다. 이런 구별짓기는 위대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에 의해 처음 이루어졌다. 위험은 고정된 수의 가능한 결과들 사이에 확률을 분배하는 통계적 규칙들에 의해 관장되는데, 동전 던지기 또는 주사위 던지기를 고려하라. 그런데 불확실성은 확률론적 견지에서 수량화될 수 없다. 우리는 어떤 결과들이 가능한지 알 길이 없는데, 그것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것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것들 가운데 무언가가 일어날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는 말할 것도 없다. 오늘날 대부분의 경제학자와 금융 전문가들은 케인스의 분석을 무시하고, 그래서 파생 상품과 선물 시장이 불확실성이 아니라 위기의 견지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잘못 가정한다. 그렇지만 경제학에서의 실정이 어떻든 간에, 철학적 사변은 관리할 수 있는 위기가 아니라 오히려 전적으로 기본적인 불확실성의 문제이다. 그런 사변 과정을 인도할 공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사변적 실재론 사상가들은 각자 우리로부터 떨어져 알 수 없게 존재하는 세계에 관한 사변을 전개하는 상이한 방식을 제시한다.

<<풀려난 허무(Nihil Unbound)>>에서 레이 브래시어는 칸트의 인식론적 관심사, 즉 우리가 세계에 관해 정당하게 말할 수 있는 방식들을 관장하는 범주와 규제적 이상들―또는 오늘날 우리가 합리성의 규범이라고 부를 확률이 더 높을 것―에 대한 주장을 전적으로 거부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브래시어가 이런 규범을 암묵적으로 인간중심적인 칸트의 초점에서 떼어낼 때, 그는 칸트를 넘어서서 일종의 급진적 사변에 관여한다. 브래시어의 경우에, 인과성 같은 칸트의 범주들은 세계에 인식 가능한 어떤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우리 자신의 마음이 세계에 부과하는 구조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우리 마음에 불투명하고 이질적인 사물들에 접근하고자 할 때, 이런 방법과 가정들은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강요된 것이다. 합리성은 소름이 오싹 끼칠 만큼 비인간적이다. 물리과학 덕분에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도 우리의 척도에 따라 만들어지지 않은 세계를 개념화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과학적 기획은 결코 완결돠거나 최종적일 수 없는데, 세계는 궁극적으로 비개념적인 것이고 개념화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물에 관한 우리의 관념들은 사물 자체에 결코 딱 맞을 수 없다. 칸트의 경우에, 이것은 우리가 현상, 즉 단순한 외양들의 영역에 귀속되어 있다―그렇지만 또한 그 내부에서 안전하게 정초되어 있다―는 점을 의미했다. 그런데 브래시어의 경우에, 우리가 끊임없이 사물 자체에 접근함(그런데 결코 최종적으로 이르지는 못한다)에 따라, 우리는 우리가 당연히 여기곤 하는 모든 것을 박탈당한다. 우리가 우주에 부과하기 위해 헛되이 노력한 모든 의미, 가치 그리고 서사들을 벗겨내면, 우주는 본원적으로 공허하고 무심하다. 위로가 되는 우리의 전제들은 용해되고, 그래서 아무 근거도 없는 사변만이 우리에게 남게 된다.

<<유한성 이후>>라는 중요한 책에서, 알랭 바디우의 제자였던 퀑탱 메이야수는 칸트를 안팎으로 뒤집고, 칸트가 거부했던 그런 종류의 존재론적 사변에 대한 필요를 브래시어와 전적으로 상이한 방식으로 갱신한다. 메이야수는 칸트주의와 현상학의 "상관주의적" 가정들에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한다. 그는 자신이 선조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역설하는데, 선조성은 인류, 또는 어떤 형태의 생명에도 선행하는, 그래서 관찰되고 해석되거나 평가받을 어떤 가능성에도 선행하는 우주의 분명한 존재를 가리킨다. 칸트는 무엇이든 어떤 형태의 존재에도 논리적으로 선행해야 하는 "경험의 선험적 조건"(이것은 존재자에 의해 항상 이미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을 확립한다. 그런데 메이야수는 이런 조건 자체가 세계 역사의 어떤 시점에서 생성되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것이 출현하기 전에 우주는 이미 존재했지만, 어떤 의미에서도 우리에게 "주어지"거나 우리의 범주들에 따라 조직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칸트에 의해 확립된 마음과 세계 사이의 상관관계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우연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통찰로부터 나아가서 메이야수는 본원적 우연성이 유일한 보편적 필연성이라고 추론한다. 그는 세계가 현재의 모습과 달리 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상황은 아무 이유도 없이 일어날 수 있다. 이른바 "자연 법칙"조차도 임의로 변하거나 사라질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메이야수는 사변을 통해 진리를 발견한다―또는 더 좋게 말하자면, 사변의 진리를 확립한다―고 주장한다. 칸트는 우리 자신의 오성 능력의 한계 때문에 "사물 자체"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 반면에, 오히려 메이야수는 바로 이런 불가지성이 사물 자체의 실정적인 특성이고, 그래서 우리는 이것이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맞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객체지향 존재론으로 부르는, 사변적 실재론에 관한 그레이엄 하만의 판본은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와 마누엘 데 란다(Manuel De Landa) 같은 사상가들을 언급하면서 우리와 독립적인 사물의 존재에 대한 다른 한 접근방식을 취한다. <<게릴라 형이상학(Guerilla Metaphysics)>>와 <<네겹의 객체(The Quadruple Object)>>를 비롯한 다양한 사변적 저작에서 하만은 칸트의 가장 기본적인 주장들 가운데 하나를 증보함으로써 칸트를 수정하고 사변의 필요성을 다시 도입한다. 칸트는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물에 부과하는 틀로 그것을 경험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물 자체는 알 수 없다고 말하는 반면에, 하만은 이 상황을 우주 속 모든 존재자에게 일반화한다. 세계를 특수한 한정된 방식으로 파악하는 것은 인간, 즉 합리적 존재자들만이 아니다. 세계는 다수의 객체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런 객체들 가운데 어느 것도 피상적인 방식을 넘어서 여타의 객체(심지어 자체에게도)에 접근할 수 없다. 하만의 경우에, 우리 지식의 유한성, 즉 넘어설 수 없는 한계를 역설할 때 칸트는 옳다. 그런데 최소한 그런 한계 내에서 완전하고 확실한 인간중심적인 구조들을 확립하기를 요구할 때 칸트는 그르다. 우리는 세계에 조건을 부과하기보다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의 제한된 능력 내에 갖히게 된다. 칸트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사물에 관해서는 사변을 전개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만은, 우리가 사물 자체를 알 수 없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사변을 전개하는 것이라고 응대한다. 우리는 객체를 인지적으로 파악할 수 없지만, 은유와 다른 심미적 실천을 통해서 객체를 암시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사물을 전적으로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마음에 품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것이 사변의 길인데, "실재적인 것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만 있는 것이다."

브래시어와 마찬가지로 닉 랜드(Nick Land)의 학도였던 이에인 해밀턴 그랜트는 <<셸링 이후의 자연에 관한 철학들(Philosophies of Nature After Schelling)>>에서 다른 한 판본의 사변을 제시한다. 칸트 자신의 철학에서 "경험의 선험적 조건"은 모든 인지가 따라야 하고 따를 필요가 있는 선재하는 구조이다. 그런데 그랜트는 칸트 이후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셸링을 좇아서 이런 구조 자체가 단순히 주어진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 생성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선험적인 것―모든 경험에 선행하고, 경험을 위한 조건을 확립하는 것―은 결코 정적인 산물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진행 중인 과정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셸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랜트의 경우에도 "선험적인" 것은 오직 자연 자체의 진행 중인 무한한 생산성과 동일시될 수 있다. 이런 모든 사상가들에게 사변은 필연적인 것인데, 그것이 우리가 우리 육체와 마음을 생성하지만 우리 마음과 육체로 영원히 파악할 수 없는 힘, 역능 그리고 사건들을 추적하고자 시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사변적 실재론자들은 모두 형이상학적 사변에 대한 칸트의 금지를 우회하는 방식을 찾아낸다. 그들은 칸트가 존재론보다 인식론을 우위에 둔 것에서 비롯되는 인간중심주의에 저항하기 위해 작업한다. 메이야수와 브래시어의 경우에, 칸트적 인식론의 제약을 극복하는 방식은 칸트에 의해 발견된 가능한 지식에 대한 한계가 우리 자신의 인지 역량에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환원 불가능하게도 우연적(메이야수)이거나 비개념적(브래시어)인 사물 자체의 특징이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다. 그런데, 하만과 그랜트의 경우에는 인간 인지에 부여된 특권 자체가 의문시되어야 한다. 인간 지각과 오성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것보다 덜 특별한데, 그것들은 관계와 인과적 영향의 과정들의 훨씬 더 넓은 스펙트럼에 속하기 때문이다. 솜 덩어리를 사색할 때 내가 행하는 것은 솜 덩어리를 물들일 때 염료가 행하는 것과 많이 다르지 않고, 또는 그 점에 있어서 솜 덩어리를 태울 때 불이 행하는 것과 많이 다르지 않다. 하만의 경우에, 이것들은 모두 또렷히 개별적인 존재자들 사이의 "대리적 접촉"에 관한 사례들이다. 그리고 그랜트의 경우에, 그것들은 모두 자연의 끊임없는 생산성에 의해 추동되지만 정지되거나 물화되기도 하는 변형들이다. 인식론에 우위성이 주어질 수 없는데, 이해와 앎 자체가 그것들이 자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더 큰 운동 내에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 사상가들은 모두, 더 고등한 "독단적" 진리을 발견하기 위한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메이야수가 존재의 "거대한 야외"라고 부르는 것―엄청나게 방대하고 기묘하며 본원적으로 불확실하여 우리 자신의 가치와 규범으로 포괄할 수 없는 영역―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사변을 수용한다.


2015년 9월 14일 월요일

퀑탱 메이야수의 사변적 실재론

메이야수의 사변적 실재론 I

퀑탱 메이야수의 사변적 실재론에 관한 개요 I

1. 소개
퀑탱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 1967~ )는 프랑스의 철학자로 첫 저서 유한성 이후(2006)에서 사변적 실재론(realisme spéculatif)이라는 새로운 경향의 사상을 주장한 뒤 주목받는 차세대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사변적 실재론자들의 그룹에는 그의 책이 출간되자마자 곧바로 영미권에 번역한 레이 브라시에가 속해있다. 고등사범학교(ENS) 출신인 그의 아버지는 맑시스트 인류학자로 유명한 클로드 메이야수이며, 프랑스 내 헤겔 권위자인 베르나르 부르주아의 지도 아래 신의 비실존. 잠재적인 신에 관한 시론이라는 제목으로 고등사범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그는 고등사범학교에서 교수로 있으면서, 알랭 바디우와 이브 뒤루와 함께 프랑스 현대철학 센터를 창립했다. 그의 사상은 바디우의 영향을 받았으며, 바디우는 그의 책을 “젊음의 어느 주어진 순간에 사유와 삶을 꿰뚫고 생겨나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해답의 길을 발견해야 하는 질문으로부터” 탄생한다고 서문에서 묘사한다. 그는 여러 논문들을 발표하고 강연활동을 하고 있으며, 2011년에는 말라르메의 시를 해독한 두 번째 저서, 수와 세이렌을 내놓는다.

유한성 이후는 철저한 논증의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엇을 증명하기 위한 논증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그는 우연성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그는 데카르트적인 독단론 dogmatisme(존재하는 것은 완전하다는 사실에는 모순이 없다), 그리고 칸트의 비판철학 이후 철학사를 지배하게 된 상관주의 correlationnisme(의식과 언어를 통하지 않은 실재를 우리는 사유할 수 없다)를 모두 비판하면서 자신의 결론에 이른다. 그렇지만 그의 논증의 과정은 상당히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는데, 이를테면 독단론의 내부적 모순과 상관주의의 내부적 모순을 집요하게 파고 들어가 균열을 일으킴으로써 우연적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절대적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가 더욱 강하게 겨냥하는 것은 상관주의인데, 상관주의야말로 실재와의 모든 접촉을 잃어버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메이야수는 인간중심적인 사고 너머, 의미와 감각 등 인간과 관계하는 모든 것 너머에 있는 실재를 겨냥한다.

2. 메이야수의 몇 가지 주요 개념들
1) 상관관계와 상관주의
메이야수는 데카르트가 했던 사물의 제1성질과 제2성질의 구분으로부터 시작한다. 잘 알고 있듯이 제 1성질은 불변적인 성질들, 예컨대 길이, 넒이, 형태, 무게, 부피와 같은 것이고 제2성질은 감각과 지각에 기인하는 것들, 다시 말해 주체화된 것들이다. 붉음의 지각이 없으면 붉은 사물은 없다. 그런데 이러한 구분 자체 때문에 이후의 철학사가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될 줄은 데카르트도 몰랐을 것이다. 제1성질을 담고 있는 연장(extension)마저도 제2성질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사람들이 믿기 시작한 것이다. 제2성질의 발견 이후로 사람들은 사물과 사물을 경험하는 주관의 관계의 결과로서 생기는 속성들을 사물 자체(즉자)의 성질로 간주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그리하여 관계의 결과에 의한 성질들과 사물 그 자체(즉자)를 구분하기 시작한다. 그럼으로써 사물 그 자체는 우리의 경험 너머, 우리의 인식 너머의 자리로 옮겨간다.
이러한 방식의 사유가 상관관계이다. 상관관계는 지각, 감각, 의미, 언어 등 우리가 세계와 맺는 관계를 넘어서 있는 것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즉자적인 성질들을 진술하게 되었는가? 그것을 담당하게 된 것은 수학이다. 그런데 수학과 같은 과학적 사유에도 변동이 있게 된다. 과학의 법칙들은 과학공동체의 합의에 의해 객관성의 참된 기준으로서의 자격을 얻는다.
따라서 사물의 성질에서나, 즉자적 사물을 다루는 과학의 영역에서나 상관관계가 중요하게 된다. 메이야수는 그러한 사유의 흐름을 상관주의라고 부른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상관주의는 주관성의 영역과 객관성의 영역을 서로 무관한 것처럼 사유하는 모든 주장을 거부한다. 그리고 두 영역의 상호적인 관련성을 ‘상관관계적 원환’이라고 부른다. 메이야수는 적당한 은유를 사용하여 그러한 모든 추론의 방식을 ‘상관관계적 무도의 스텝’이라고도 부른다. 상관관계를 잘 요약하는 인용문을 보자.

“그와 반대로 이를테면 관계가 최초다. 세계는 오로지 내게 세계처럼 나타나기 때문에 세계의 의미를 가지며, 나는 오로지 세계와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가 계시되는 것은 나를 위해서이기 때문에 나의 의미를 가진다”

그랬을 때 중요해지는 것은 언어와 의미(의식)다. 이 두 가지는 외재적인 것들을 관계의 결과들로 만듦으로써 관계를 벗어난 모든 것들을 사유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무언가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내부에(의식과 언어에) 의존해야 하고, 역으로 의식과 언어가 향하는 것은 외재적인 것이다. 하지만 외부의 것을 다룬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의식과 언어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언어와 의식은 마치 투명한 감옥처럼(프란시스 볼프의 용어) 존재하면서, 인간의 외부를 마치 투명한 유리 너머에 있는 외부처럼 ‘유폐적 외부’로 만든다. 일단 상관관계적 사유에 진입한 순간부터 인간은 의식과 언어로부터 벗어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다. 메이야수는 그랬을 때 인간이 잃어버리게 된 것이 거대한 외계(Grand Dehors)라고 말한다. 거대한 외계는 인간에 대해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경험에 주어지든 말든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국의 영토에 있다는―이제는 완전히 다른 곳에 있다는―정당한 감정과 함께 사유가 돌아다닐 수 있었던 저 외계.” 그 외계는 사유가 외부적인 것들을 모두 상대적인 것으로 만들기 전까지는 모험의 지역이었다.
메이야수는 칸트에게서 시작된 상관주의가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에 이르면서 더욱 강력한 상관주의로 변질되었다고 판단한다. 칸트는 경험의 조건들을 이야기한다고 할지라도 물자체의 영역을 여전히 남겨놓으면서 약한 상관주의로 남는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는 언어로 말해질 수 없는 세계를 신비한 것으로 만들었고, 하이데거는 사유와 존재의 만남의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사유를 더욱 신비로운 것으로 만들었다. 메이야수는 이들의 사상을 강한 상관주의라고 명명한다. 강한 상관주의는 물자체를 완전히 배제하고 상관관계에 의해 구성된 세계나 그러한 관계 자체를 신비한 것으로 삼는다.

2) 선조성(ancestralité)
그런데 어떤 영역이 출현한다. 그것은 띠이다. 방사능 핵의 분해 속도 상수와 열광 법칙에 의해 지구의 연대기를 추적하는 그러한 띠는 우주의 기원(135억 년 전), 지구의 형성 시기(44억 5천만 년 전), 지구의 생명체의 기원(35억 년 전), 인간의 기원(200만 년 전)을 표시한다. 이러한 것들은 사유의 출현보다 앞서 있는 것, 즉 인간이 세계와 관계하는 모든 형식보다 앞서 있는 것을 표시한다. 메이야수는 이렇듯 인간 종의 출현보다 앞서 있는 실재 전부를 ‘선조적인 것’이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그렇게 지구의 생명체보다 앞서 있는 실재의 존재나 선조적 사건의 존재를 가리키는 물질들을 원화석(archifossile) 혹은 물질 화석(matière-fossile)이라고 명명한다. 원화석이란 동위원소나 행성의 광선과 같은 선조적 현상에 대한 측정을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지탱물을 가리킨다. 선조적인 것은 상관주의의 틀 안에서는 전혀 이해될 수 없는 것인데, 왜냐하면 상관주의는 상관관계가 아닌 다른 어떤 것도 이해할 수 없고, 또한 상관관계 그 자체가 영원하다고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주장의 경우에 실재로부터 관심은 더욱 멀어진 채로 에고나 정신을 영속시킴으로써만 그에 상대적인 존재자를 영원한 것으로 만들 것이다. 그와 반대로 선조적 진술은 인간에게 그러한 실재가 나타났든 아니든, 인간이 그것을 사유할 수 있든 없든 상관없이 그 자체의 의미가 궁극적 의미라는 조건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즉 선조적 진술은 실재적 의미를 가지며, 오로지 실재적 의미만을 가진다.
메이야수는 특히 수학적 형식이 선조적 진술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수학적 진술만이 인간과 세계의 관계라는 벗어나기 힘든 감옥 사이에서 실재로 향하는 작은 탈출구를 만들기 때문이다.

2. 회의주의, 신앙절대론
메이야수는 상관주의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한 뒤에 현대철학의 흐름을 낱낱이 분석한다. 그가 바라보는 현대철학은 상관주의의 파생적 결과들, 즉 주관적 형이상학 혹은 ‘회의주의적-신앙절대론적 폐쇄’로 규정된다. 더 이상 거대한 외계, 절대적 외계에 닿을 수 없는 상관주의 철학자들은 상관관계 자체를 지배하는 실체들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것은 생명(베르그손, 들뢰즈)일 수도, 절대정신(헤겔)일 수도, 의지(쇼펜하우어)일 수, 힘에의 의지(니체)일 수도 있다. 혹은 레비나스의 절대적 타자일 수도 있다. 그리고 메이야수가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리오타르의 재현불가능한 숭고도 절대적 타자를 전제한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도무지 이성으로 파악될 수 없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 상관주의는 이성의 형이상학에 종언을 고하면서, 그리하여 완전한 절대자를 포기하면서 인간에 대한 것들만을 사유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절대자에 대한 요구를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했는데, 절대자는 이제 사유불가능한 영역에서 신비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 이것을 메이야수는 이렇게 표현한다.

“철학자들은 절대자들로부터 한 가지만을 요구하는데, 그것은 절대자들에는 합리성을 주장하는 그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절대자에 대한 종교적 신앙이 신앙 자체만을 책임지기 시작하면서, ‘사유의 탈절대화’로 이해된 형이상학의 종언은 절대자에 대한 모든 종교적(혹은 ‘시학적–종교적’) 믿음의, 이성에 의한 합법화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형이상학의 종언은 절대자에 대한 모든 주장들에게서 이성을 몰아냄으로써 종교적인 것들의 어떤 과격한 회귀의 형태를 얻게 되었다.”

현대철학이 보여주는 우울한 측면은 회의주의와 비합리적인 신앙절대론의 복합물의 효과들이다. 그것은 절대자에 도달한다는 이성의 사망신고를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출몰하는 절대자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수용이며, 유한한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절대적 타자의 불멸성에 의지해서 자신의 사유의 궁극적 불멸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이다. 그런데 만약 절대자가 우연적이라면, 아니 우연적으로 존재하는 것, 가능적으로만 존재하는 것 자체가 절대적이라면 그러한 절대자를 어떻게 사유해야 할 것인가? 메이야수는 전적으로 우연적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를 필연적으로 만들고, 그럼으로써 완전한 절대자를 전제하는 독단론으로부터 그리고 절대자 자체를 사유할 수 없다는 회의론적 광신으로부터 모두 벗어난다.

3. 우연적인 존재 그 자체의 필연성. 본사실성(factualité)
메이야수가 말하는 절대자는 근거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연히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우연성을 필연성 안에서의 우연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나는 내일 사고를 당해 죽을 수 있다거나 내일 지진이 나서 도시가 폐허가 될 수 있다거나 등등. 하지만 그런 우연성은 경험적 우연성이며, 생성과 소멸이라는 일반적인 원칙 안에서의 우연성이다. 메이야수가 말하는 우연적으로 있음은 순수 가능성을 말한다. 거기에는 어떤 근거도 없다. 메이야수는 절대적 실재를 “그렇게 존재하지 않을 수 있음” 자체가 그것의 존재인 것이라고 정의한다. 다시 반복하지만 메이야수의 절대적 실재는 그렇게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존재 안에 품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가령 헤겔에서 모순적인 것, 바로 윗 문장에서 말한 그렇게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은 완전한 존재로 가는 하나의 계기일 뿐이다. 메이야수가 말하는 절대자는 모순이 없는 순수가능성으로서의 존재다.
그것은 또한 우연하게 있음이라는 사실에 다시 한 번 사실성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하이데거의 사실성과는 다르다. 모든 것이 우연하게 있음 자체를 사실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직도 그러한 사실성에 대한 인간의 무능력을 전제하는 인간적 사유이기 때문이다. 메이야수가 말하는 순수 가능성으로서의 사실은 사실성의 옷을 입지 않은 사실, 다시 말해 인간이 존재하지 않을 때도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본사실성은 사실성의 비–사실성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는 사실성의 자가–부여의 불가능성[사실성이 스스로에게 사실성을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을 ‘사실성의 비–중복non-redoublement de la facticité’이라고 명명할 것이다.”

사실, 메이야수는 하이데거의 사실성과 구분하기 위해 매우 조심한다. 하이데거는 사실성과 사실적이라는 용어들을 사용함으로써 존재 사건에 어떤 필연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메이야수의 본사실성에는 어떤 이중적 의미가 부과되지 않는다. 심지어 그는 “사실성만이 본사실적이지 않다”고까지 말한다.
이제 ‘사변적’이라는 용어의 뜻에 가까이 왔다. 사변적이라 함은 절대자에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철학을 가리킨다. 그리고 ‘형이상학’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은 그러한 절대자에 대한 접근을 이성원리에 의해 근거짓는 철학을 말한다. 그런데 ‘사변적’이면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형이상학적’이지 않을 수 있는데, 이는 메이야수가 말하는 절대자가 어떤 근거도 갖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우연적 존재자를 더 잘 설명하기 위해서 새로운 시간 관념을 제시한다. 그것은 역사적 시간(근거를 갖는 시간)이 전혀 아닌 카오스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카오스는 모든 질서를 파괴하는 카오스가 아니라 아무거나 생성하는 카오스, 심지어 죽음, 비존재마저도 생성하는 카오스다. 우연성을 필연적인 속성으로 갖는 모순적 존재자는 카오스라는 시간성 안에 기입된다. 카오스 안에서의 존재자는 그 어떤 필연성도 갖지 않지만 그 어떤 타자성도 갖지 않는다. 카오스는 비모순적 존재자, 다시 말해 즉자 존재만을 제외한 모든 존재가 생성되는 시간이다. “카오스가 절대로 생산할 수 없는 무엇, 그것은 필연적인 존재자다. 필연적인 어떤 것을 제외한다면 모든 것이 생산될 수 있고 모든 것이 일어날 수 있다. 필연적인 것은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자의 우연성이다.”

4. 표식
메이야수는 사변적 진술에 가장 적합한 기호는 수학이다. 왜냐하면 수학적 진술은 본사실적 특징으로부터 기호의 일자를 역사적, 의미론적 맥락에서 결정된 존재자적 일자와 구분하기 때문이다. 그는 수학의 기호를 의미를 제거한 기호라고 명명한다. 하지만 그것이 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마치 고고학자가 사라진 문명의 폐허 속에서 발견한 석판에 새겨진 반복적 모티브들에서 공간-시간적 반복에 종속되지 않는 표식의 단일성의 양태를 획득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표식이다. 우리가 유사한 표식들을 동일한 유형의 반복처럼 생각할 때 공간-시간 마다 그 표식이 가질 수 있는 차이의 효과가 사라진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표식의 반복이 절대적으로 동일하다도 말할 권리를 갖는다. 또한 그것은 모든 인간적 경험으로부터 벗어난다. 가령 기수들이나 음표들이 단일성의 ‘유형’으로 확립된 기호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의미화하는 작용을 하는 것으로 기호를 파악하거나 유형적으로 기호를 파악한다. 메이야수가 말하는 표식은 후자이다.
그렇게 얻어진 표식이 사실적 표식, 말하자면 절대적인 우연성을 갖는 표식이 될 때 그것은 모든 다른 현실 속에서도 동일하고, 다른 공간과 다른 시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유형으로서 파악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기호의 단일화는 존재론적 단일화로 이행하고 표식 속에 영원한 우연성이 현전하게 된다. 그는 한 논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영원성의 본성이란 무엇인가? 나의 테제는 이렇다. 기호학적 단일성의 파악 속에 잡혀있는 영원성은 기호의 출현의 우연성의 파악 속에서 자신의 원천을 얻는다.”(Quentin Meillassoux, “Contingence et absolutisation de l’Un”) 다시 말해 그 표식은 “존재하는 것은 우연히 존재한다. 그것이 필연적이다”를 함축하는 표식이다. 메이야수가 말하는 표식, 그가 세우고자 하는 존재론적 기호의 절대성은 우연성만이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적 존재자가 필연적인 시간성, 카오스의 시간성 안에서 타당성을 획득한다.


메이야수의 사변적 실재론 II

퀑탱 메이야수의 사변적 실재론에 관한 개요 II

1. 흄의 문제

1.1 당구공의 진로
메이야수는 순수가능성이 조건으로서의 시간성을 카오스라고 정의했다. 카오스는 존재하는 것이 그렇게 존재해야할 아무런 근거를 갖지 않으며, 무엇이건 생성될 수 있는 시간성을 말한다. 이러한 시간성은 역사성을 갖지 않으며 따라서 이야기도 갖지 않는다. 그렇다면 카오스는 무질서, 혼돈인가? 메이야수는 그러한 생각은 세계의 인식을 필연론적 인식과 중첩시키기 때문에 유래하는 것이라고 본다. 세계의 안정성은 있다. 그러나 이 안정성은 인식이 마련해놓은 법칙을 따르는 안정성이 아니라 실재의 안정성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근거를 갖지 않은 존재자들이 출현할 수 있으며 우연적인 사건들이 일어날 수 있다.
흄이 제기한 문제는 상황들이 동일할 때 어제 일어난 일이 오늘도 미래에도 똑같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인과적 연결의 필연성에 대한 질문이다. 그는 <인간 오성에 관한 연구>에서 당구공의 사례를 제시한다.
“가령 내가 다른 공을 향해 직선으로 움직이는 당구공을 볼 때, 두 번째 공의 운동이 그것들의 접촉이나 충돌의 결과처럼 우연적으로 내게 연상된다고 가정한다면 실제로 나는 다양한 백 가지 사건들 역시 저 원인을 따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아닌가? 두 개의 공이 모두 절대적 휴식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을까? 첫 번째 공이 다시금 직선의 운동을 계속하거나, 어떤 선을 그리면서 그리고 어떤 방향을 향해 두 번째 공으로부터 튕겨나올 수는 없을까? 이 모든 가정들은 일관적이며 파악가능하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것들 가운데 다른 것들보다 더 일관적이지도 않고 더 파악가능하지도 않은 어느 하나에 특권을 부여하는가? 우리의 모든 추론은 선험적으로 그러한 특권의 토대를 우리 자신에게 결코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가령 당구공은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수도 있고 당구대를 뚫을 수도 있고 갑자기 산산조각 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공의 진로를 예측하고, 확신한다. 그러한 확신을 물리학자들은 법칙에서 찾을 것이다. 그런데 흄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그러한 확신이 습관이나 관행이라는 심리학적 기원에서 나온다고 본다.
흄의 경험에서의 우연성에 대한 대답은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적 방식이 있고, 칸트의 인식론적 방식이 있다. 전자는 완전한 신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우선 증명한다. 그러한 신은 여러 가능한 세계들 가운데 오로지 최상의 것, 다시 말해 우리의 세계를 창조했을 것이고 이 세계는 영원하게 존재할 것이다. 후자의 방식은 모순적인 것들을 인간은 표상할 수 없기 때문에 설령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그것을 알 수 없다. 가령 당구공이 뛰논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그러한 환상적 무대를 가정하며, 그러한 무대라는 배경은 표상의 통일된 틀 안에 있다. 그런데 흄이 제기하는 문제는 인과성이 어떤 근거에서 세계를 지배하는 가가 아니라 인과적 법칙이 지배하지 않는 경험이 가능한가에 놓여있었다. 즉 그가 제기했던 문제는 물리학 자체가 미래에도 여전히 가능할 것이지를 우리에게 보장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하여간 형이상학적 방식이나 인식론적 방식이나, 흄처럼 그 근거를 심리적인 것에 둔 것이나 경험의 사건을 보장하는 인과적 필연성을 선취된 진리처럼 간주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흄 자신은 현실적인 필연성, 우리의 이성이 뒷받침하지 않은 물리적 세계에서의 필연성을 계속해서 믿는다. 흄이 회의주의의 전통을 만들었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흄을 이은 회의주의자들이 맹신으로 돌아선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1.2 과학소설과 과학 너머의 소설
메이야수는 고등사범학교에서 한 강연에서 과학소설과 과학너머의 소설을 대립시키고, 전자를 포퍼의 철학에 대입시키고 후자를 흄의 철학에 대입시킨다. 아시모프의 단편, <반중력 당구공>을 보면 두 물리학자가 나온다. 제임스 프리스와 에드워드 블룸. 프리스는 노벨상을 받은 물리학자이며 블룸은 그런 프리스의 이론을 이용해서 돈을 번다. 이 둘은 서로를 증오하지만 모두 당구를 엄청 좋아한다. 어느 날 프리스의 성공을 질투한 블룸은 멈추지 않는 운동을 보여주는 아주 복잡한 장치를 만들자는 제안을 한다. 그리고 자신의 발명을 처음 공개하는 날, 그는 기자들과 관객들을 초청하고 자신이 만든 당구대를 보여준다. 블룸은 당구대 중앙에 공이 멈추지 않는 반중력을 만들어내는 장치를 설치했던 것이다. 실험실 안에 당구대가 설치되어 있고 조명이 당구대 위만을 비춘다. 블룸은 프리스에게 자신이 만든 당구대 위에서 처음 당구공을 치는 영광을 제안한다. 프리스가 당구공을 치자, 그 당구공은 반중력 상태를 벗어나 빛의 속도로 블룸의 가슴 한 복판을 뚫고 벽을 뚫고 우주까지 날아간다. 블룸이 그 자리에서 즉사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자리에 있었던 화자이자 기자는 어떻게 장치를 고안한 블룸이 그러한 위험을 알 수 없었는지를 의아해한다.
이 소설을 준거로 삼아서 메이야수는 과학소설과 과학 너머의 소설을 구분한다. 과학 소설은 물리학 법칙을 기반으로 한 소설이고 과학 너머의 소설은 법칙과는 전혀 무관한 소설이다. 흔히 반증주의로 알려진 포퍼는 어떤 새로운 경험에 의해 과학의 이론이 파괴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이 파괴는 새로운 물리학 이론을 위한 동기가 된다. 그랬을 때 포퍼는 새로운 경험을 단지 이론이 아직 목록화하지 않은 경험으로서만 취급한다. 예를 들어 태양이 뜨고 지면서 낮과 밤이 이어진다는 하루의 주기는 남극에서 일정 기간 동안 24시간 내내 낮만 지속되는 새로운 경험에 의해 반박되지만, 이 새로운 경험은 지구의 자전과 공전, 태양의 위치 등등 물리학 법칙에 의해 다시 설명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태양이 태양계로부터 돌연히 벗어나 버린 것이라면? 인간은 빵을 먹어야 살 수 있다는 법칙은 인간이 빵만 먹었을 때 병에 걸려 죽는 새로운 경험으로 반박될 수 있지만, 하지만 이 새로운 경험은 다시금 인간 생존을 위해 필요한 영양소들이 빵에 없다는 사실로 다시금 교정된다. 그런데 만약 똑같은 빵의 화학 분자들이 갑자기 인간을 죽이는 독소의 화학분자가 된다면?
포퍼의 반증주의와 과학 소설은 법칙의 변화들, 그리고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법칙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구성한다. 반면에 흄의 문제와 과학 너머의 소설은 요컨대 가령 내일 물리학 법칙 자체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것은 여하한 물리학 법칙이 감쌀 수 없는 외부 현실의 순수한 가능성이고 카오스의 상태이다. 포퍼는 물리학 이론들의 미래의 유효성에 관한 질문은 이 이론들이 새로운 경험들에 의해 반박될지라도 그 반박이 새로운 물리학 이론들을 위해 형성될 것이기 때문에 미래에도 물리학은 여전히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제한다. 흄의 질문은 개연성의 문제, 더 나아가 확률적인 법칙의 타당성과도 무관하다. 그렇지만 흄은 전혀 인과적이지 않은 우주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을 암시한다.
아시모프의 소설에서 프리스는 저 예상치 못한 사고 이후에 질문을 던진 신문기자에게 당구공의 진로를 과학적으로 설명함으로써 그의 소설이 포퍼적인 과학 소설에 그치게 만든다. 다시 말해 소설에서 저 낯설고 치명적인 새로운 경험이 법칙의 단절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과학 소설은 새로운 현상, 새로운 경험을 언제나 현재의 과학에 비추어 다시 설명하고 과학의 법칙을 교정하기 때문이다.
로바쳅스키가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탄생시켰던 것은 모험을 통해서였다. 그는 우선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준, 즉 어느 직선에 대해 한 점이 주어졌을 때 처음의 직선과 지각을 이루는 평행선은 유일하다는 공준을 증명하기 위해 이 공준의 오류를 가정했다. 예를 들어 한 선분과 평행을 이루는 수많은 직선들이 주어진 한 점을 지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것을 불합리에 의한 증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로바쳅스키가 도달한 것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증명과는 거리가 먼, 유클리드 기하학 만큼이나 일관적이고 새로운 기하학이었다. 이것은 인과적이지 않은 우주가 인과적 우주만큼이나 일관성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수학적 법칙이 알려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랬을 때 “우리는 그러한 비-인과적 우주가 물리적 필연성에 대한 믿음에 내재하는 수수께끼들로부터 해방된 우주임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인과적 우주에서 비-인과적 우주로 이행할 때 우리는 세계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세계의 수수께끼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수께끼는 무엇으로 바뀌게 된 것일까? 그것은 우연적 사건인 것이고 세계의 순수가능성이다. 카오스가 무질서로 인식되는 것은 의식과 세계의 상관관계가 요청하는 질서와 지속성을 불가능하게 만들 때이다. 하지만 세계가 의식의 질서와 무관한 방식으로 존재한다면?
사람들은 온전한 우연성을 인정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연성을 개연적이지 않은 결과들과 비교한다. 그런데 개연성(probabilité)과 비개연성의 편차는 늘 필연론적 전제를 깔고 있다. 다시 말해 개연적인 사건과 비개연적인 사건은 가능성의 총체를 전제한다. 하지만 메이야수에게 우연적 사건은 비개연적인 결과와 다르며, 이 둘을 비교하기 위해 수학을 끌어들이는데, 그것이 칸토어의 초한수이다.

1.3 사행적 추론과 우연적 사건 – 초한수
메이야수는 부조리에 대해 우리가 갖는 두려움이 정확히 사행적 개념화에 근거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두려움은 표상들의 현행적인 불변성을 예외적인 행운으로 간주할 것이다. 이것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우연성을 생각하는 것인데, 메이야수에 따르면 본사실적 사변은 카오스의 안정성, 근거를 전제하는 이성 원리로부터 벗어났다고 할지라도 안정성을 잃지 않는 카오스의 조건 자체를 추구한다. 그리고 이것은 수학적 본성에서 나온다. 물론 이러한 수학적 본성이 확률적인 성격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개연론적 추론은 선험적인(경험 이전의) 가능적 존재가 수적 총합의 방식으로 사유될 수 있다는 조건에서만 타당하다. 개연성을 계산해내기 위해서는 그 가능성들이 유한하건 무한하건 상관없다. 예를 들어 팽팽하게 당겨진 밧줄이 끊어질 수 있는 실증적 개연성을 계산하기 위해서는 밧줄 위에 점들이 무한할지라도 상관없다. 따라서 개연성을 계산하기 위해서는 모순이 부재하는 파악가능한 가능성들의 총합이 실제로 있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다. 이때의 개연적 사건들은 이산적이지만 연속적이다.
그런데 가능성의 총합이라는 전제가 아무런 근거를 갖지 않는다면? 경우들의 총합인 우주-전체의 이념이 근거 없는 것이라면? 과학자들은 가능한 총체에 대한 가설을 만들고 그리하여 전체를 파악하려고 한다. 바로 이러한 수적인 총체화에 반박할 수 있는 수학 이론이 칸토어의 초한수 개념이다. 그 전에 확률과 가능성의 수적 총합에 의한 사행성(요행)과 우연성이 어떻게 다른지를 인용문을 통해 알아보자.

“우리는 ‘요행hasard’(아랍어: az-zahr)과 ‘사행적aléatoire’(라틴어: alea)이라는 용어들이 모두 근접한 어원들과 관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주사위’, ‘주사위 던지기’, ‘주사위 놀이’. 그러므로 이 개념들은 놀이와 계산이라는 주제들을 대립된 것들이 아닌, 분리불가능하게 엮인 것으로 환기시킨다: 모든 주사위 놀이에 내재하는 요행들의 계산. 따라서 존재와 요행의 일치가 사유를 지배할 때마다 주사위–전체라는 주제(가능성들의 수의 한결같은 봉입), 놀이의 무상성이라는 주제(삶과, 삶에 상위적인 표피성 안에서 인식된 세계의 놀이)가 모습을 드러내지만, 또한 빈도수의 냉혹한 계산이라는 주제(생명 보험과 위험 평가의 세계)가 모습을 드러낸다. 가능성들의 봉입의 존재론은 계산의 기술만을 진지하게 고려한다는 사실 때문에 필연적으로 우리를 중력을 혐오하는 세계 안에 위치시킨다.
그와 반대로, 우연성(contingence)이라는 용어는 라틴어 contingere(프랑스어의 arriver)와 관련되는데, 그것은 일어나는 것, 그렇지만 충분히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우연적임, 그것은 요컨대 어떤 것이 마침내 일어날 때다. 이미 등록된 모든 가능성들로부터 벗어나면서, 비개연적인 것까지도 포함한 모든 게 예측 가능한 그런 놀이의 허영심에 종지부를 찍는 다른 무언가가 일어날 때. 무엇이 우리에게 일어날 때, 새로운 것이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몰아세울 때 계산도 놀이도 끝나게 된다. 마침내 진지한 것들이 시작된다.”(메이야수, <유한성 이후>, pp. 185-186)

이 인용문을 보면 우연성은 확률과 다른 것, 가능성의 총체라는 피상적이고도 인간적인 이념을 벗어나 실재의 사건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칸토어의 초한수란 무엇인가? 이것은 바디우가 자신의 집합이론에 적용하는 이론이기도 하다. 간단히 말해서 초한수는 모든 양들의 전체(Tout) 집합이 그 집합의 부분집합들의 종합에 근거해서 획득된 양을 포함할 수 없게 만드는 공집합을 가리킨다. 가령 (1, 2, 3)의 부분집합의 수는 (1), (2), (3), (1,2), (2,3), (1,3)이라는 양적 총합에 ( )이라는 공집합을 더하게 된다. 따라서 모든 집합의 원소들의 수는(비록 이 수가 무한하다고 할지라도) 그 원소들을 다시 묶은 그룹들의 수에 의해 항상 초과된다. 위에서 사례로 든 밧줄에서 끊어질 수 있는 점의 확률을 계산할 수는 있지만 밧줄이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다거나 돌연히 밧줄이 사라진다거나 하는 경우는 확률적 가능성의 총체를 넘어선다. 그리고 이런 우연성은 집합들 전체의 일관성으로부터도 벗어난다.
칸토어의 초한수는 법칙들의 필연성에 대한 모든 믿음을 해체시킨다. 또한 필연성에 대한 기본적인 전제, ‘어째서 그것이 다르게가 아니라 그처럼 존재하는가’를 묻는 질문에 대해 사변 철학자는 간단히 거기에는 근거가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제 신비는 존재하지 않는데, 이는 문제들이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연적 사건을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전제하는 이성 원리가 존재하지 않아서이다. 메이야수는 이성 원리에 의거하지 않는 우연적 사건, 세계를 비전체로 만드는 우연적 사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형상(figure)라는 표현을 쓴다. 우연성을 명기하는 것, 그것은 칸토어의 초한수를 우연적 존재의 조건처럼 사유하는 것이며, 형상의 자격으로서 비-전체를 도출하는 것이다.

2. 프톨레마이오스의 복수(회귀)

프톨레마이오스는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이자. 그는 천동설을 주장하는 알마게스트를 저술했고, 종교적인 이유에서 파문을 당한다. 그의 천동설은 고대 과학의 오랜 발전의 결과이자, 천체들의 관찰, 수, 계산, 척도에 근거해서 세워진 이론이다. 비록 지금 그의 천동설이 비할 데 없이 조야해 보이지만 아무튼 프톨레마이오스는 물리학의 영역에서 하나의 획을 그었다고 볼 수 있다.
메이야수는 <유한성 이후>의 첫 부분을 원화석과 선조성으로부터 시작했다. 이 두 가지가 그가 유일하게 진정한 과학적 담화로 보는 것이자 인간 중심적 과학으로부터 해방된 사변적인 과학 담화라고 보는 것이다. 앞에서 이미 보았듯이 원화석과 선조성은 인간의 출현에 선행하는 사건, 뿐만 아니라 인간 종의 소멸에도 가능한 사건들과 관계한다. 그러한 사건들과 그와 연관된 진술들을 특징짓기 위해 메이야수는 통-시성(dia-chronicité)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통-시성 안에 걸려있는 것이야말로 실험과학 일반의 본성이라고 본다.
갈릴레이와 코페르니쿠스에 의한 근대 과학은 수학에 기초해 있었으며, 메이야수에 의하면 사유와 무관한 존재를 탐사할 수 있는 길을 터주었다. 이러한 근대 과학이 창설되자 이전까지 인간의 실존에 앞설 수 있는 것들을 이야기하기 위해 신화나, 신통계보학, 환상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으며 그러한 것들을 진술하기 위해 오로지 과학적 가설로 충분했다. 관찰자의 실존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 그러한 과학에서 근본적인 점은, 과학이 자연적으로 실재적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데도 존재할 수도 있는 것에 대한 인식의 과정을 전개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의 과정이 과학의 본성을 구성한다는 점(자연의 수학화)이다.
갈릴레이가 수학을 세계와 결합시키기 이전에 프톨레마이오스도 수학과 측량에 의해 천동설을 내놓았으나, 이때 인간이 놓인 중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왜냐하면 지구라는 중심 자리가 우주의 수치스럽고 영광스럽지 못한 자리처럼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연의 수학화 이후에 사람들이 가졌던 상실과 유사하다. 인간은 이제 특권화된 모든 관점을 상실했고, 자신을 자신의 환경에 거주하게 허락했던 의미를 더 이상 세계에 투여할 수 없다. 세계는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 인간은 사르트르가 말하듯이 ‘잉여적 de trop’이 되었다.

“근대 과학이 인간이 자기 자신과 우주에 대해 가질 수 있었던 표상들에 주입한 황폐와 버림의 느낌은 다음의 원인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을 갖지 않는다. 즉 세계에 대한 사유의 우연성에 대한 사유, 사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 세계―사유되었다는 사실이나 사유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해 근본적으로 영향 받지 않는 세계―를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메이야수, <유한성 이후>, p. 199)

따라서 갈릴레오-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은 인간의 탈중심화를 내포하며, 데카르트의 테제, 요컨대 수학적으로 사유가능한 것은 절대적으로 가능하다는 테제를 증언한다. 다만 데카르트가 절대적 존재자에 대한 확신을 유지하는 독단론적 태도를 가졌다면, 메이야수에게서 과학의 수학화에 의한 절대성이 가리키는 것은 가설적 방식에 의해서일지라도 수학적으로 기술될 수 있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현시하든 아니든 상관없이 존속할 수 있다는 것을 인간이 사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통-시적 지시물들(원화석)은 영원불변한 절대자이면서 동시에 전적으로 우연적인 존재이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칸트는 자신의 인식론적 전환을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명명한다. 칸트는 이상하게도 부동적이라고 믿었던 관찰자가 사실상 관찰되는 태양의 둘레를 돈다는 것을 확증하는 코페르니쿠스의 태도와 정반대되는 방식으로 주체가 인식과정 안에서 중심에 있다는 것을 확증하고 있다. 즉 그는 원래의 코페르니쿠스의 발견과는 정반대로 인간의 인식에 의해 대상이 조정되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칸트는 근대과학의 성과를 사유가능성의 조건으로 돌리면서 방향을 전환시켜 버렸다. 그는 갈릴레오-코페르니쿠스적 탈중심화를 예컨대 프톨레마이오스적 중심화(반-혁명)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과학이 처음으로 사유에 있어서, 사유와 세계의 관계와 무관한 세계 인식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발견했다면, 철학은 그러한 발견에 대해 자신의 고유한 오래된 독단주의라는 소박성의 발견으로 응답”한 것이다. 메이야수에 따르면 칸트는 과학적 코페르니쿠스 주의의 심오한 의미란 다름 아닌 철학적 프톨레마이오스 주의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은 근대 과학의 분명한 실재론적 의미가 사실은 현상에 따른 파생적이고 외양적인 의미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과학이 사변적 실재를 갓 사유하자마자 그러한 사유는 칸트에 의해서 곧바로 파면되었다. 이것은 실재, 다시 말해 즉자적 대상(혹은 외계)에 대한 사유를 포기하는 순간과 일치한다. 즉자적 대상은 이성 바깥으로 축출되었다.
칸트는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을까? 그는 근대과학이 모든 형이상학적 사유를 파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졌을 것이다. 그는 불변의 절대자, 필연적인 절대자에 대한 믿음이 독단주의로 흐르는 것을 경계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자에 대한 모든 믿음이 사라지는 것을 염려했을 것이다.
그런데 칸트의 염려와는 다르게 메이야수는 독단적 절대자이지 않으면서도 사유가능한 것을 수학적 가설로부터 찾으려고 한다. “본사실성의 원리의 과제”란 “가설적이라고 할지라도 절대화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정식화할 수 있는 모든 수학적 진술의 능력을 형상(figure)의 자격으로 도출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존재자의 우연성이라는 필연적 조건을 포착하면서” “시도하는 수학”이 될 것이다.

3. 에필로그

메이야수의 강연이 끝나고 사람들이 질문을 한다. 질문자들 다수가 우선은 메이야수의 논증을 따라가기 어려워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사변적 실재론을 현실로서 파악하기를 어려워한다. 어떤 질문자는 그가 말하는 비(非)-전체로서의 세계와 세계의 단일성이 어떻게 동시에 가능한지를 질문한다. 메이야수가 전달하고자 하는 실재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과 무관한 현실, 가설로도 그 존재를 증언할 수 있는 현실, 하지만 전적으로 우연성 아래 놓인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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