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야수의 사변적 실재론 I
퀑탱 메이야수의 사변적 실재론에 관한 개요 I
1. 소개
퀑탱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 1967~ )는 프랑스의 철학자로 첫 저서 유한성 이후(2006)에서 사변적 실재론(realisme spéculatif)이라는 새로운 경향의 사상을 주장한 뒤 주목받는 차세대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사변적 실재론자들의 그룹에는 그의 책이 출간되자마자 곧바로 영미권에 번역한 레이 브라시에가 속해있다. 고등사범학교(ENS) 출신인 그의 아버지는 맑시스트 인류학자로 유명한 클로드 메이야수이며, 프랑스 내 헤겔 권위자인 베르나르 부르주아의 지도 아래 신의 비실존. 잠재적인 신에 관한 시론이라는 제목으로 고등사범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그는 고등사범학교에서 교수로 있으면서, 알랭 바디우와 이브 뒤루와 함께 프랑스 현대철학 센터를 창립했다. 그의 사상은 바디우의 영향을 받았으며, 바디우는 그의 책을 “젊음의 어느 주어진 순간에 사유와 삶을 꿰뚫고 생겨나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해답의 길을 발견해야 하는 질문으로부터” 탄생한다고 서문에서 묘사한다. 그는 여러 논문들을 발표하고 강연활동을 하고 있으며, 2011년에는 말라르메의 시를 해독한 두 번째 저서, 수와 세이렌을 내놓는다.
유한성 이후는 철저한 논증의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엇을 증명하기 위한 논증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그는 우연성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그는 데카르트적인 독단론 dogmatisme(존재하는 것은 완전하다는 사실에는 모순이 없다), 그리고 칸트의 비판철학 이후 철학사를 지배하게 된 상관주의 correlationnisme(의식과 언어를 통하지 않은 실재를 우리는 사유할 수 없다)를 모두 비판하면서 자신의 결론에 이른다. 그렇지만 그의 논증의 과정은 상당히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는데, 이를테면 독단론의 내부적 모순과 상관주의의 내부적 모순을 집요하게 파고 들어가 균열을 일으킴으로써 우연적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절대적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가 더욱 강하게 겨냥하는 것은 상관주의인데, 상관주의야말로 실재와의 모든 접촉을 잃어버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메이야수는 인간중심적인 사고 너머, 의미와 감각 등 인간과 관계하는 모든 것 너머에 있는 실재를 겨냥한다.
2. 메이야수의 몇 가지 주요 개념들
1) 상관관계와 상관주의
메이야수는 데카르트가 했던 사물의 제1성질과 제2성질의 구분으로부터 시작한다. 잘 알고 있듯이 제 1성질은 불변적인 성질들, 예컨대 길이, 넒이, 형태, 무게, 부피와 같은 것이고 제2성질은 감각과 지각에 기인하는 것들, 다시 말해 주체화된 것들이다. 붉음의 지각이 없으면 붉은 사물은 없다. 그런데 이러한 구분 자체 때문에 이후의 철학사가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될 줄은 데카르트도 몰랐을 것이다. 제1성질을 담고 있는 연장(extension)마저도 제2성질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사람들이 믿기 시작한 것이다. 제2성질의 발견 이후로 사람들은 사물과 사물을 경험하는 주관의 관계의 결과로서 생기는 속성들을 사물 자체(즉자)의 성질로 간주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그리하여 관계의 결과에 의한 성질들과 사물 그 자체(즉자)를 구분하기 시작한다. 그럼으로써 사물 그 자체는 우리의 경험 너머, 우리의 인식 너머의 자리로 옮겨간다.
이러한 방식의 사유가 상관관계이다. 상관관계는 지각, 감각, 의미, 언어 등 우리가 세계와 맺는 관계를 넘어서 있는 것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즉자적인 성질들을 진술하게 되었는가? 그것을 담당하게 된 것은 수학이다. 그런데 수학과 같은 과학적 사유에도 변동이 있게 된다. 과학의 법칙들은 과학공동체의 합의에 의해 객관성의 참된 기준으로서의 자격을 얻는다.
따라서 사물의 성질에서나, 즉자적 사물을 다루는 과학의 영역에서나 상관관계가 중요하게 된다. 메이야수는 그러한 사유의 흐름을 상관주의라고 부른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상관주의는 주관성의 영역과 객관성의 영역을 서로 무관한 것처럼 사유하는 모든 주장을 거부한다. 그리고 두 영역의 상호적인 관련성을 ‘상관관계적 원환’이라고 부른다. 메이야수는 적당한 은유를 사용하여 그러한 모든 추론의 방식을 ‘상관관계적 무도의 스텝’이라고도 부른다. 상관관계를 잘 요약하는 인용문을 보자.
“그와 반대로 이를테면 관계가 최초다. 세계는 오로지 내게 세계처럼 나타나기 때문에 세계의 의미를 가지며, 나는 오로지 세계와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가 계시되는 것은 나를 위해서이기 때문에 나의 의미를 가진다”
그랬을 때 중요해지는 것은 언어와 의미(의식)다. 이 두 가지는 외재적인 것들을 관계의 결과들로 만듦으로써 관계를 벗어난 모든 것들을 사유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무언가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내부에(의식과 언어에) 의존해야 하고, 역으로 의식과 언어가 향하는 것은 외재적인 것이다. 하지만 외부의 것을 다룬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의식과 언어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언어와 의식은 마치 투명한 감옥처럼(프란시스 볼프의 용어) 존재하면서, 인간의 외부를 마치 투명한 유리 너머에 있는 외부처럼 ‘유폐적 외부’로 만든다. 일단 상관관계적 사유에 진입한 순간부터 인간은 의식과 언어로부터 벗어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다. 메이야수는 그랬을 때 인간이 잃어버리게 된 것이 거대한 외계(Grand Dehors)라고 말한다. 거대한 외계는 인간에 대해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경험에 주어지든 말든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국의 영토에 있다는―이제는 완전히 다른 곳에 있다는―정당한 감정과 함께 사유가 돌아다닐 수 있었던 저 외계.” 그 외계는 사유가 외부적인 것들을 모두 상대적인 것으로 만들기 전까지는 모험의 지역이었다.
메이야수는 칸트에게서 시작된 상관주의가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에 이르면서 더욱 강력한 상관주의로 변질되었다고 판단한다. 칸트는 경험의 조건들을 이야기한다고 할지라도 물자체의 영역을 여전히 남겨놓으면서 약한 상관주의로 남는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는 언어로 말해질 수 없는 세계를 신비한 것으로 만들었고, 하이데거는 사유와 존재의 만남의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사유를 더욱 신비로운 것으로 만들었다. 메이야수는 이들의 사상을 강한 상관주의라고 명명한다. 강한 상관주의는 물자체를 완전히 배제하고 상관관계에 의해 구성된 세계나 그러한 관계 자체를 신비한 것으로 삼는다.
2) 선조성(ancestralité)
그런데 어떤 영역이 출현한다. 그것은 띠이다. 방사능 핵의 분해 속도 상수와 열광 법칙에 의해 지구의 연대기를 추적하는 그러한 띠는 우주의 기원(135억 년 전), 지구의 형성 시기(44억 5천만 년 전), 지구의 생명체의 기원(35억 년 전), 인간의 기원(200만 년 전)을 표시한다. 이러한 것들은 사유의 출현보다 앞서 있는 것, 즉 인간이 세계와 관계하는 모든 형식보다 앞서 있는 것을 표시한다. 메이야수는 이렇듯 인간 종의 출현보다 앞서 있는 실재 전부를 ‘선조적인 것’이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그렇게 지구의 생명체보다 앞서 있는 실재의 존재나 선조적 사건의 존재를 가리키는 물질들을 원화석(archifossile) 혹은 물질 화석(matière-fossile)이라고 명명한다. 원화석이란 동위원소나 행성의 광선과 같은 선조적 현상에 대한 측정을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지탱물을 가리킨다. 선조적인 것은 상관주의의 틀 안에서는 전혀 이해될 수 없는 것인데, 왜냐하면 상관주의는 상관관계가 아닌 다른 어떤 것도 이해할 수 없고, 또한 상관관계 그 자체가 영원하다고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주장의 경우에 실재로부터 관심은 더욱 멀어진 채로 에고나 정신을 영속시킴으로써만 그에 상대적인 존재자를 영원한 것으로 만들 것이다. 그와 반대로 선조적 진술은 인간에게 그러한 실재가 나타났든 아니든, 인간이 그것을 사유할 수 있든 없든 상관없이 그 자체의 의미가 궁극적 의미라는 조건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즉 선조적 진술은 실재적 의미를 가지며, 오로지 실재적 의미만을 가진다.
메이야수는 특히 수학적 형식이 선조적 진술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수학적 진술만이 인간과 세계의 관계라는 벗어나기 힘든 감옥 사이에서 실재로 향하는 작은 탈출구를 만들기 때문이다.
2. 회의주의, 신앙절대론
메이야수는 상관주의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한 뒤에 현대철학의 흐름을 낱낱이 분석한다. 그가 바라보는 현대철학은 상관주의의 파생적 결과들, 즉 주관적 형이상학 혹은 ‘회의주의적-신앙절대론적 폐쇄’로 규정된다. 더 이상 거대한 외계, 절대적 외계에 닿을 수 없는 상관주의 철학자들은 상관관계 자체를 지배하는 실체들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것은 생명(베르그손, 들뢰즈)일 수도, 절대정신(헤겔)일 수도, 의지(쇼펜하우어)일 수, 힘에의 의지(니체)일 수도 있다. 혹은 레비나스의 절대적 타자일 수도 있다. 그리고 메이야수가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리오타르의 재현불가능한 숭고도 절대적 타자를 전제한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도무지 이성으로 파악될 수 없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 상관주의는 이성의 형이상학에 종언을 고하면서, 그리하여 완전한 절대자를 포기하면서 인간에 대한 것들만을 사유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절대자에 대한 요구를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했는데, 절대자는 이제 사유불가능한 영역에서 신비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 이것을 메이야수는 이렇게 표현한다.
“철학자들은 절대자들로부터 한 가지만을 요구하는데, 그것은 절대자들에는 합리성을 주장하는 그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절대자에 대한 종교적 신앙이 신앙 자체만을 책임지기 시작하면서, ‘사유의 탈절대화’로 이해된 형이상학의 종언은 절대자에 대한 모든 종교적(혹은 ‘시학적–종교적’) 믿음의, 이성에 의한 합법화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형이상학의 종언은 절대자에 대한 모든 주장들에게서 이성을 몰아냄으로써 종교적인 것들의 어떤 과격한 회귀의 형태를 얻게 되었다.”
현대철학이 보여주는 우울한 측면은 회의주의와 비합리적인 신앙절대론의 복합물의 효과들이다. 그것은 절대자에 도달한다는 이성의 사망신고를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출몰하는 절대자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수용이며, 유한한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절대적 타자의 불멸성에 의지해서 자신의 사유의 궁극적 불멸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이다. 그런데 만약 절대자가 우연적이라면, 아니 우연적으로 존재하는 것, 가능적으로만 존재하는 것 자체가 절대적이라면 그러한 절대자를 어떻게 사유해야 할 것인가? 메이야수는 전적으로 우연적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를 필연적으로 만들고, 그럼으로써 완전한 절대자를 전제하는 독단론으로부터 그리고 절대자 자체를 사유할 수 없다는 회의론적 광신으로부터 모두 벗어난다.
3. 우연적인 존재 그 자체의 필연성. 본사실성(factualité)
메이야수가 말하는 절대자는 근거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연히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우연성을 필연성 안에서의 우연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나는 내일 사고를 당해 죽을 수 있다거나 내일 지진이 나서 도시가 폐허가 될 수 있다거나 등등. 하지만 그런 우연성은 경험적 우연성이며, 생성과 소멸이라는 일반적인 원칙 안에서의 우연성이다. 메이야수가 말하는 우연적으로 있음은 순수 가능성을 말한다. 거기에는 어떤 근거도 없다. 메이야수는 절대적 실재를 “그렇게 존재하지 않을 수 있음” 자체가 그것의 존재인 것이라고 정의한다. 다시 반복하지만 메이야수의 절대적 실재는 그렇게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존재 안에 품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가령 헤겔에서 모순적인 것, 바로 윗 문장에서 말한 그렇게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은 완전한 존재로 가는 하나의 계기일 뿐이다. 메이야수가 말하는 절대자는 모순이 없는 순수가능성으로서의 존재다.
그것은 또한 우연하게 있음이라는 사실에 다시 한 번 사실성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하이데거의 사실성과는 다르다. 모든 것이 우연하게 있음 자체를 사실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직도 그러한 사실성에 대한 인간의 무능력을 전제하는 인간적 사유이기 때문이다. 메이야수가 말하는 순수 가능성으로서의 사실은 사실성의 옷을 입지 않은 사실, 다시 말해 인간이 존재하지 않을 때도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본사실성은 사실성의 비–사실성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는 사실성의 자가–부여의 불가능성[사실성이 스스로에게 사실성을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을 ‘사실성의 비–중복non-redoublement de la facticité’이라고 명명할 것이다.”
사실, 메이야수는 하이데거의 사실성과 구분하기 위해 매우 조심한다. 하이데거는 사실성과 사실적이라는 용어들을 사용함으로써 존재 사건에 어떤 필연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메이야수의 본사실성에는 어떤 이중적 의미가 부과되지 않는다. 심지어 그는 “사실성만이 본사실적이지 않다”고까지 말한다.
이제 ‘사변적’이라는 용어의 뜻에 가까이 왔다. 사변적이라 함은 절대자에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철학을 가리킨다. 그리고 ‘형이상학’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은 그러한 절대자에 대한 접근을 이성원리에 의해 근거짓는 철학을 말한다. 그런데 ‘사변적’이면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형이상학적’이지 않을 수 있는데, 이는 메이야수가 말하는 절대자가 어떤 근거도 갖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우연적 존재자를 더 잘 설명하기 위해서 새로운 시간 관념을 제시한다. 그것은 역사적 시간(근거를 갖는 시간)이 전혀 아닌 카오스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카오스는 모든 질서를 파괴하는 카오스가 아니라 아무거나 생성하는 카오스, 심지어 죽음, 비존재마저도 생성하는 카오스다. 우연성을 필연적인 속성으로 갖는 모순적 존재자는 카오스라는 시간성 안에 기입된다. 카오스 안에서의 존재자는 그 어떤 필연성도 갖지 않지만 그 어떤 타자성도 갖지 않는다. 카오스는 비모순적 존재자, 다시 말해 즉자 존재만을 제외한 모든 존재가 생성되는 시간이다. “카오스가 절대로 생산할 수 없는 무엇, 그것은 필연적인 존재자다. 필연적인 어떤 것을 제외한다면 모든 것이 생산될 수 있고 모든 것이 일어날 수 있다. 필연적인 것은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자의 우연성이다.”
4. 표식
메이야수는 사변적 진술에 가장 적합한 기호는 수학이다. 왜냐하면 수학적 진술은 본사실적 특징으로부터 기호의 일자를 역사적, 의미론적 맥락에서 결정된 존재자적 일자와 구분하기 때문이다. 그는 수학의 기호를 의미를 제거한 기호라고 명명한다. 하지만 그것이 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마치 고고학자가 사라진 문명의 폐허 속에서 발견한 석판에 새겨진 반복적 모티브들에서 공간-시간적 반복에 종속되지 않는 표식의 단일성의 양태를 획득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표식이다. 우리가 유사한 표식들을 동일한 유형의 반복처럼 생각할 때 공간-시간 마다 그 표식이 가질 수 있는 차이의 효과가 사라진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표식의 반복이 절대적으로 동일하다도 말할 권리를 갖는다. 또한 그것은 모든 인간적 경험으로부터 벗어난다. 가령 기수들이나 음표들이 단일성의 ‘유형’으로 확립된 기호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의미화하는 작용을 하는 것으로 기호를 파악하거나 유형적으로 기호를 파악한다. 메이야수가 말하는 표식은 후자이다.
그렇게 얻어진 표식이 사실적 표식, 말하자면 절대적인 우연성을 갖는 표식이 될 때 그것은 모든 다른 현실 속에서도 동일하고, 다른 공간과 다른 시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유형으로서 파악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기호의 단일화는 존재론적 단일화로 이행하고 표식 속에 영원한 우연성이 현전하게 된다. 그는 한 논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영원성의 본성이란 무엇인가? 나의 테제는 이렇다. 기호학적 단일성의 파악 속에 잡혀있는 영원성은 기호의 출현의 우연성의 파악 속에서 자신의 원천을 얻는다.”(Quentin Meillassoux, “Contingence et absolutisation de l’Un”) 다시 말해 그 표식은 “존재하는 것은 우연히 존재한다. 그것이 필연적이다”를 함축하는 표식이다. 메이야수가 말하는 표식, 그가 세우고자 하는 존재론적 기호의 절대성은 우연성만이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적 존재자가 필연적인 시간성, 카오스의 시간성 안에서 타당성을 획득한다.
메이야수의 사변적 실재론 II
퀑탱 메이야수의 사변적 실재론에 관한 개요 II
1. 흄의 문제
1.1 당구공의 진로
메이야수는 순수가능성이 조건으로서의 시간성을 카오스라고 정의했다. 카오스는 존재하는 것이 그렇게 존재해야할 아무런 근거를 갖지 않으며, 무엇이건 생성될 수 있는 시간성을 말한다. 이러한 시간성은 역사성을 갖지 않으며 따라서 이야기도 갖지 않는다. 그렇다면 카오스는 무질서, 혼돈인가? 메이야수는 그러한 생각은 세계의 인식을 필연론적 인식과 중첩시키기 때문에 유래하는 것이라고 본다. 세계의 안정성은 있다. 그러나 이 안정성은 인식이 마련해놓은 법칙을 따르는 안정성이 아니라 실재의 안정성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근거를 갖지 않은 존재자들이 출현할 수 있으며 우연적인 사건들이 일어날 수 있다.
흄이 제기한 문제는 상황들이 동일할 때 어제 일어난 일이 오늘도 미래에도 똑같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인과적 연결의 필연성에 대한 질문이다. 그는 <인간 오성에 관한 연구>에서 당구공의 사례를 제시한다.
“가령 내가 다른 공을 향해 직선으로 움직이는 당구공을 볼 때, 두 번째 공의 운동이 그것들의 접촉이나 충돌의 결과처럼 우연적으로 내게 연상된다고 가정한다면 실제로 나는 다양한 백 가지 사건들 역시 저 원인을 따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아닌가? 두 개의 공이 모두 절대적 휴식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을까? 첫 번째 공이 다시금 직선의 운동을 계속하거나, 어떤 선을 그리면서 그리고 어떤 방향을 향해 두 번째 공으로부터 튕겨나올 수는 없을까? 이 모든 가정들은 일관적이며 파악가능하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것들 가운데 다른 것들보다 더 일관적이지도 않고 더 파악가능하지도 않은 어느 하나에 특권을 부여하는가? 우리의 모든 추론은 선험적으로 그러한 특권의 토대를 우리 자신에게 결코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가령 당구공은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수도 있고 당구대를 뚫을 수도 있고 갑자기 산산조각 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공의 진로를 예측하고, 확신한다. 그러한 확신을 물리학자들은 법칙에서 찾을 것이다. 그런데 흄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그러한 확신이 습관이나 관행이라는 심리학적 기원에서 나온다고 본다.
흄의 경험에서의 우연성에 대한 대답은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적 방식이 있고, 칸트의 인식론적 방식이 있다. 전자는 완전한 신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우선 증명한다. 그러한 신은 여러 가능한 세계들 가운데 오로지 최상의 것, 다시 말해 우리의 세계를 창조했을 것이고 이 세계는 영원하게 존재할 것이다. 후자의 방식은 모순적인 것들을 인간은 표상할 수 없기 때문에 설령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그것을 알 수 없다. 가령 당구공이 뛰논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그러한 환상적 무대를 가정하며, 그러한 무대라는 배경은 표상의 통일된 틀 안에 있다. 그런데 흄이 제기하는 문제는 인과성이 어떤 근거에서 세계를 지배하는 가가 아니라 인과적 법칙이 지배하지 않는 경험이 가능한가에 놓여있었다. 즉 그가 제기했던 문제는 물리학 자체가 미래에도 여전히 가능할 것이지를 우리에게 보장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하여간 형이상학적 방식이나 인식론적 방식이나, 흄처럼 그 근거를 심리적인 것에 둔 것이나 경험의 사건을 보장하는 인과적 필연성을 선취된 진리처럼 간주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흄 자신은 현실적인 필연성, 우리의 이성이 뒷받침하지 않은 물리적 세계에서의 필연성을 계속해서 믿는다. 흄이 회의주의의 전통을 만들었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흄을 이은 회의주의자들이 맹신으로 돌아선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1.2 과학소설과 과학 너머의 소설
메이야수는 고등사범학교에서 한 강연에서 과학소설과 과학너머의 소설을 대립시키고, 전자를 포퍼의 철학에 대입시키고 후자를 흄의 철학에 대입시킨다. 아시모프의 단편, <반중력 당구공>을 보면 두 물리학자가 나온다. 제임스 프리스와 에드워드 블룸. 프리스는 노벨상을 받은 물리학자이며 블룸은 그런 프리스의 이론을 이용해서 돈을 번다. 이 둘은 서로를 증오하지만 모두 당구를 엄청 좋아한다. 어느 날 프리스의 성공을 질투한 블룸은 멈추지 않는 운동을 보여주는 아주 복잡한 장치를 만들자는 제안을 한다. 그리고 자신의 발명을 처음 공개하는 날, 그는 기자들과 관객들을 초청하고 자신이 만든 당구대를 보여준다. 블룸은 당구대 중앙에 공이 멈추지 않는 반중력을 만들어내는 장치를 설치했던 것이다. 실험실 안에 당구대가 설치되어 있고 조명이 당구대 위만을 비춘다. 블룸은 프리스에게 자신이 만든 당구대 위에서 처음 당구공을 치는 영광을 제안한다. 프리스가 당구공을 치자, 그 당구공은 반중력 상태를 벗어나 빛의 속도로 블룸의 가슴 한 복판을 뚫고 벽을 뚫고 우주까지 날아간다. 블룸이 그 자리에서 즉사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자리에 있었던 화자이자 기자는 어떻게 장치를 고안한 블룸이 그러한 위험을 알 수 없었는지를 의아해한다.
이 소설을 준거로 삼아서 메이야수는 과학소설과 과학 너머의 소설을 구분한다. 과학 소설은 물리학 법칙을 기반으로 한 소설이고 과학 너머의 소설은 법칙과는 전혀 무관한 소설이다. 흔히 반증주의로 알려진 포퍼는 어떤 새로운 경험에 의해 과학의 이론이 파괴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이 파괴는 새로운 물리학 이론을 위한 동기가 된다. 그랬을 때 포퍼는 새로운 경험을 단지 이론이 아직 목록화하지 않은 경험으로서만 취급한다. 예를 들어 태양이 뜨고 지면서 낮과 밤이 이어진다는 하루의 주기는 남극에서 일정 기간 동안 24시간 내내 낮만 지속되는 새로운 경험에 의해 반박되지만, 이 새로운 경험은 지구의 자전과 공전, 태양의 위치 등등 물리학 법칙에 의해 다시 설명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태양이 태양계로부터 돌연히 벗어나 버린 것이라면? 인간은 빵을 먹어야 살 수 있다는 법칙은 인간이 빵만 먹었을 때 병에 걸려 죽는 새로운 경험으로 반박될 수 있지만, 하지만 이 새로운 경험은 다시금 인간 생존을 위해 필요한 영양소들이 빵에 없다는 사실로 다시금 교정된다. 그런데 만약 똑같은 빵의 화학 분자들이 갑자기 인간을 죽이는 독소의 화학분자가 된다면?
포퍼의 반증주의와 과학 소설은 법칙의 변화들, 그리고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법칙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구성한다. 반면에 흄의 문제와 과학 너머의 소설은 요컨대 가령 내일 물리학 법칙 자체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것은 여하한 물리학 법칙이 감쌀 수 없는 외부 현실의 순수한 가능성이고 카오스의 상태이다. 포퍼는 물리학 이론들의 미래의 유효성에 관한 질문은 이 이론들이 새로운 경험들에 의해 반박될지라도 그 반박이 새로운 물리학 이론들을 위해 형성될 것이기 때문에 미래에도 물리학은 여전히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제한다. 흄의 질문은 개연성의 문제, 더 나아가 확률적인 법칙의 타당성과도 무관하다. 그렇지만 흄은 전혀 인과적이지 않은 우주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을 암시한다.
아시모프의 소설에서 프리스는 저 예상치 못한 사고 이후에 질문을 던진 신문기자에게 당구공의 진로를 과학적으로 설명함으로써 그의 소설이 포퍼적인 과학 소설에 그치게 만든다. 다시 말해 소설에서 저 낯설고 치명적인 새로운 경험이 법칙의 단절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과학 소설은 새로운 현상, 새로운 경험을 언제나 현재의 과학에 비추어 다시 설명하고 과학의 법칙을 교정하기 때문이다.
로바쳅스키가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탄생시켰던 것은 모험을 통해서였다. 그는 우선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준, 즉 어느 직선에 대해 한 점이 주어졌을 때 처음의 직선과 지각을 이루는 평행선은 유일하다는 공준을 증명하기 위해 이 공준의 오류를 가정했다. 예를 들어 한 선분과 평행을 이루는 수많은 직선들이 주어진 한 점을 지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것을 불합리에 의한 증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로바쳅스키가 도달한 것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증명과는 거리가 먼, 유클리드 기하학 만큼이나 일관적이고 새로운 기하학이었다. 이것은 인과적이지 않은 우주가 인과적 우주만큼이나 일관성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수학적 법칙이 알려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랬을 때 “우리는 그러한 비-인과적 우주가 물리적 필연성에 대한 믿음에 내재하는 수수께끼들로부터 해방된 우주임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인과적 우주에서 비-인과적 우주로 이행할 때 우리는 세계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세계의 수수께끼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수께끼는 무엇으로 바뀌게 된 것일까? 그것은 우연적 사건인 것이고 세계의 순수가능성이다. 카오스가 무질서로 인식되는 것은 의식과 세계의 상관관계가 요청하는 질서와 지속성을 불가능하게 만들 때이다. 하지만 세계가 의식의 질서와 무관한 방식으로 존재한다면?
사람들은 온전한 우연성을 인정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연성을 개연적이지 않은 결과들과 비교한다. 그런데 개연성(probabilité)과 비개연성의 편차는 늘 필연론적 전제를 깔고 있다. 다시 말해 개연적인 사건과 비개연적인 사건은 가능성의 총체를 전제한다. 하지만 메이야수에게 우연적 사건은 비개연적인 결과와 다르며, 이 둘을 비교하기 위해 수학을 끌어들이는데, 그것이 칸토어의 초한수이다.
1.3 사행적 추론과 우연적 사건 – 초한수
메이야수는 부조리에 대해 우리가 갖는 두려움이 정확히 사행적 개념화에 근거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두려움은 표상들의 현행적인 불변성을 예외적인 행운으로 간주할 것이다. 이것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우연성을 생각하는 것인데, 메이야수에 따르면 본사실적 사변은 카오스의 안정성, 근거를 전제하는 이성 원리로부터 벗어났다고 할지라도 안정성을 잃지 않는 카오스의 조건 자체를 추구한다. 그리고 이것은 수학적 본성에서 나온다. 물론 이러한 수학적 본성이 확률적인 성격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개연론적 추론은 선험적인(경험 이전의) 가능적 존재가 수적 총합의 방식으로 사유될 수 있다는 조건에서만 타당하다. 개연성을 계산해내기 위해서는 그 가능성들이 유한하건 무한하건 상관없다. 예를 들어 팽팽하게 당겨진 밧줄이 끊어질 수 있는 실증적 개연성을 계산하기 위해서는 밧줄 위에 점들이 무한할지라도 상관없다. 따라서 개연성을 계산하기 위해서는 모순이 부재하는 파악가능한 가능성들의 총합이 실제로 있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다. 이때의 개연적 사건들은 이산적이지만 연속적이다.
그런데 가능성의 총합이라는 전제가 아무런 근거를 갖지 않는다면? 경우들의 총합인 우주-전체의 이념이 근거 없는 것이라면? 과학자들은 가능한 총체에 대한 가설을 만들고 그리하여 전체를 파악하려고 한다. 바로 이러한 수적인 총체화에 반박할 수 있는 수학 이론이 칸토어의 초한수 개념이다. 그 전에 확률과 가능성의 수적 총합에 의한 사행성(요행)과 우연성이 어떻게 다른지를 인용문을 통해 알아보자.
“우리는 ‘요행hasard’(아랍어: az-zahr)과 ‘사행적aléatoire’(라틴어: alea)이라는 용어들이 모두 근접한 어원들과 관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주사위’, ‘주사위 던지기’, ‘주사위 놀이’. 그러므로 이 개념들은 놀이와 계산이라는 주제들을 대립된 것들이 아닌, 분리불가능하게 엮인 것으로 환기시킨다: 모든 주사위 놀이에 내재하는 요행들의 계산. 따라서 존재와 요행의 일치가 사유를 지배할 때마다 주사위–전체라는 주제(가능성들의 수의 한결같은 봉입), 놀이의 무상성이라는 주제(삶과, 삶에 상위적인 표피성 안에서 인식된 세계의 놀이)가 모습을 드러내지만, 또한 빈도수의 냉혹한 계산이라는 주제(생명 보험과 위험 평가의 세계)가 모습을 드러낸다. 가능성들의 봉입의 존재론은 계산의 기술만을 진지하게 고려한다는 사실 때문에 필연적으로 우리를 중력을 혐오하는 세계 안에 위치시킨다.
그와 반대로, 우연성(contingence)이라는 용어는 라틴어 contingere(프랑스어의 arriver)와 관련되는데, 그것은 일어나는 것, 그렇지만 충분히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우연적임, 그것은 요컨대 어떤 것이 마침내 일어날 때다. 이미 등록된 모든 가능성들로부터 벗어나면서, 비개연적인 것까지도 포함한 모든 게 예측 가능한 그런 놀이의 허영심에 종지부를 찍는 다른 무언가가 일어날 때. 무엇이 우리에게 일어날 때, 새로운 것이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몰아세울 때 계산도 놀이도 끝나게 된다. 마침내 진지한 것들이 시작된다.”(메이야수, <유한성 이후>, pp. 185-186)
이 인용문을 보면 우연성은 확률과 다른 것, 가능성의 총체라는 피상적이고도 인간적인 이념을 벗어나 실재의 사건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칸토어의 초한수란 무엇인가? 이것은 바디우가 자신의 집합이론에 적용하는 이론이기도 하다. 간단히 말해서 초한수는 모든 양들의 전체(Tout) 집합이 그 집합의 부분집합들의 종합에 근거해서 획득된 양을 포함할 수 없게 만드는 공집합을 가리킨다. 가령 (1, 2, 3)의 부분집합의 수는 (1), (2), (3), (1,2), (2,3), (1,3)이라는 양적 총합에 ( )이라는 공집합을 더하게 된다. 따라서 모든 집합의 원소들의 수는(비록 이 수가 무한하다고 할지라도) 그 원소들을 다시 묶은 그룹들의 수에 의해 항상 초과된다. 위에서 사례로 든 밧줄에서 끊어질 수 있는 점의 확률을 계산할 수는 있지만 밧줄이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다거나 돌연히 밧줄이 사라진다거나 하는 경우는 확률적 가능성의 총체를 넘어선다. 그리고 이런 우연성은 집합들 전체의 일관성으로부터도 벗어난다.
칸토어의 초한수는 법칙들의 필연성에 대한 모든 믿음을 해체시킨다. 또한 필연성에 대한 기본적인 전제, ‘어째서 그것이 다르게가 아니라 그처럼 존재하는가’를 묻는 질문에 대해 사변 철학자는 간단히 거기에는 근거가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제 신비는 존재하지 않는데, 이는 문제들이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연적 사건을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전제하는 이성 원리가 존재하지 않아서이다. 메이야수는 이성 원리에 의거하지 않는 우연적 사건, 세계를 비전체로 만드는 우연적 사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형상(figure)라는 표현을 쓴다. 우연성을 명기하는 것, 그것은 칸토어의 초한수를 우연적 존재의 조건처럼 사유하는 것이며, 형상의 자격으로서 비-전체를 도출하는 것이다.
2. 프톨레마이오스의 복수(회귀)
프톨레마이오스는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이자. 그는 천동설을 주장하는 알마게스트를 저술했고, 종교적인 이유에서 파문을 당한다. 그의 천동설은 고대 과학의 오랜 발전의 결과이자, 천체들의 관찰, 수, 계산, 척도에 근거해서 세워진 이론이다. 비록 지금 그의 천동설이 비할 데 없이 조야해 보이지만 아무튼 프톨레마이오스는 물리학의 영역에서 하나의 획을 그었다고 볼 수 있다.
메이야수는 <유한성 이후>의 첫 부분을 원화석과 선조성으로부터 시작했다. 이 두 가지가 그가 유일하게 진정한 과학적 담화로 보는 것이자 인간 중심적 과학으로부터 해방된 사변적인 과학 담화라고 보는 것이다. 앞에서 이미 보았듯이 원화석과 선조성은 인간의 출현에 선행하는 사건, 뿐만 아니라 인간 종의 소멸에도 가능한 사건들과 관계한다. 그러한 사건들과 그와 연관된 진술들을 특징짓기 위해 메이야수는 통-시성(dia-chronicité)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통-시성 안에 걸려있는 것이야말로 실험과학 일반의 본성이라고 본다.
갈릴레이와 코페르니쿠스에 의한 근대 과학은 수학에 기초해 있었으며, 메이야수에 의하면 사유와 무관한 존재를 탐사할 수 있는 길을 터주었다. 이러한 근대 과학이 창설되자 이전까지 인간의 실존에 앞설 수 있는 것들을 이야기하기 위해 신화나, 신통계보학, 환상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으며 그러한 것들을 진술하기 위해 오로지 과학적 가설로 충분했다. 관찰자의 실존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 그러한 과학에서 근본적인 점은, 과학이 자연적으로 실재적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데도 존재할 수도 있는 것에 대한 인식의 과정을 전개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의 과정이 과학의 본성을 구성한다는 점(자연의 수학화)이다.
갈릴레이가 수학을 세계와 결합시키기 이전에 프톨레마이오스도 수학과 측량에 의해 천동설을 내놓았으나, 이때 인간이 놓인 중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왜냐하면 지구라는 중심 자리가 우주의 수치스럽고 영광스럽지 못한 자리처럼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연의 수학화 이후에 사람들이 가졌던 상실과 유사하다. 인간은 이제 특권화된 모든 관점을 상실했고, 자신을 자신의 환경에 거주하게 허락했던 의미를 더 이상 세계에 투여할 수 없다. 세계는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 인간은 사르트르가 말하듯이 ‘잉여적 de trop’이 되었다.
“근대 과학이 인간이 자기 자신과 우주에 대해 가질 수 있었던 표상들에 주입한 황폐와 버림의 느낌은 다음의 원인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을 갖지 않는다. 즉 세계에 대한 사유의 우연성에 대한 사유, 사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 세계―사유되었다는 사실이나 사유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해 근본적으로 영향 받지 않는 세계―를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메이야수, <유한성 이후>, p. 199)
따라서 갈릴레오-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은 인간의 탈중심화를 내포하며, 데카르트의 테제, 요컨대 수학적으로 사유가능한 것은 절대적으로 가능하다는 테제를 증언한다. 다만 데카르트가 절대적 존재자에 대한 확신을 유지하는 독단론적 태도를 가졌다면, 메이야수에게서 과학의 수학화에 의한 절대성이 가리키는 것은 가설적 방식에 의해서일지라도 수학적으로 기술될 수 있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현시하든 아니든 상관없이 존속할 수 있다는 것을 인간이 사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통-시적 지시물들(원화석)은 영원불변한 절대자이면서 동시에 전적으로 우연적인 존재이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칸트는 자신의 인식론적 전환을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명명한다. 칸트는 이상하게도 부동적이라고 믿었던 관찰자가 사실상 관찰되는 태양의 둘레를 돈다는 것을 확증하는 코페르니쿠스의 태도와 정반대되는 방식으로 주체가 인식과정 안에서 중심에 있다는 것을 확증하고 있다. 즉 그는 원래의 코페르니쿠스의 발견과는 정반대로 인간의 인식에 의해 대상이 조정되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칸트는 근대과학의 성과를 사유가능성의 조건으로 돌리면서 방향을 전환시켜 버렸다. 그는 갈릴레오-코페르니쿠스적 탈중심화를 예컨대 프톨레마이오스적 중심화(반-혁명)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과학이 처음으로 사유에 있어서, 사유와 세계의 관계와 무관한 세계 인식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발견했다면, 철학은 그러한 발견에 대해 자신의 고유한 오래된 독단주의라는 소박성의 발견으로 응답”한 것이다. 메이야수에 따르면 칸트는 과학적 코페르니쿠스 주의의 심오한 의미란 다름 아닌 철학적 프톨레마이오스 주의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은 근대 과학의 분명한 실재론적 의미가 사실은 현상에 따른 파생적이고 외양적인 의미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과학이 사변적 실재를 갓 사유하자마자 그러한 사유는 칸트에 의해서 곧바로 파면되었다. 이것은 실재, 다시 말해 즉자적 대상(혹은 외계)에 대한 사유를 포기하는 순간과 일치한다. 즉자적 대상은 이성 바깥으로 축출되었다.
칸트는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을까? 그는 근대과학이 모든 형이상학적 사유를 파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졌을 것이다. 그는 불변의 절대자, 필연적인 절대자에 대한 믿음이 독단주의로 흐르는 것을 경계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자에 대한 모든 믿음이 사라지는 것을 염려했을 것이다.
그런데 칸트의 염려와는 다르게 메이야수는 독단적 절대자이지 않으면서도 사유가능한 것을 수학적 가설로부터 찾으려고 한다. “본사실성의 원리의 과제”란 “가설적이라고 할지라도 절대화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정식화할 수 있는 모든 수학적 진술의 능력을 형상(figure)의 자격으로 도출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존재자의 우연성이라는 필연적 조건을 포착하면서” “시도하는 수학”이 될 것이다.
3. 에필로그
메이야수의 강연이 끝나고 사람들이 질문을 한다. 질문자들 다수가 우선은 메이야수의 논증을 따라가기 어려워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사변적 실재론을 현실로서 파악하기를 어려워한다. 어떤 질문자는 그가 말하는 비(非)-전체로서의 세계와 세계의 단일성이 어떻게 동시에 가능한지를 질문한다. 메이야수가 전달하고자 하는 실재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과 무관한 현실, 가설로도 그 존재를 증언할 수 있는 현실, 하지만 전적으로 우연성 아래 놓인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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