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blog.daum.net/nanomat/774
행위주체적 객체들: 행위 존재론
존재 또는 자연은 육체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육체"에 대한 동의어들은 "사물", "객체", "기계", "행위소", "실체", "사건", "과정" 그리고 "존재자"이다. 다른 술어들도 있을 법하다. 지적해야 할 첫번째 점은 여기서 자연과 존재는 동의어로 다루어진다는 것이다. 그 결과,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자연의 존재자이다. 문화와 사회가 존재하는 육체들로 이루어져 있는 한, 그것들은 자연의 존재자들이다. 이것으로부터 두 가지 점이 더 도출된다. 첫째, 존재와 자연이 동의어라면, 그리고 모든 것이 자연의 존재자라면, 당연히 자연/문화 구별짓기는 무화되거나 말소된다. 대중의 상상 속에서 자연은 사회, 도시, 교외, 농장 바깥으로 찾아가는 곳이다. 반면에 문화는 인간들에 의해 길들여지거나 경작된 것을 가리키며 도시와 교외의 영역이다. 이것은 공간적 또는 지리적 자연 개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자연주의적 존재론적 틀 내에서 자연은 서로 물리적으로 상호작용하며 무엇이든 어떤 규칙 또는 법칙들의 지배를 받으면서 존재하는 물질적 또는 물리적 존재자들의 총체를 가리킬 뿐이다. 자연의 외부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문화도, 마음도, 플라톤적 형상도, 유일신도, 신들도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 영향을 미치고 영향을 받는 육체들이 존재할 뿐이다. 이런 육체들이 물질적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둘째, 당연히 인위적인 것과 진정한 것 사이의 구별짓기 역시 말소된다. 역사적으로 자연은 진정한 것들의 영역, 자체에서, 자체로부터 비롯되는 영역으로 간주되어 왔다. 반면에 문화는 인위적인 것들의 영역, 다른 행위주체에 의해 외부에서 존재자에 부과되는 형상의 영역으로 간주되어 왔다. 도토리는 저절로 참나무가 되는 반면에, 어떤 장인만이 한 조각의 나무를 탁자로 변형시킨다. 그런데 모두 다 자연이라면, 진정한 것/인위적인 것 대립쌍은 더 이상 존재의 영역들을 규정하는 데 동원될 수 없다.
일상 언어는 존재론에 대한 아무 지침도 되지 못한다. 예를 들면, "객체"라는 술어를 들을 때 우리는 저곳에 그냥 머물고 있고, 다른 무언가에 의해 움직여지지 않으면 그 어떤 움직임도 없으며, 주체에 대립되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것들은 일상 언어에서 상용되는 "객체"의 함의들이다. 그렇지만, 철학적 성찰의 주요한 목적은 낱말의 함의들을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이 정말로 무엇인지 결정하는 것이다. 흔히 이런 대답들은 꽤 놀랍고 대중의 의견에 반한다. 그러므로 일상 언어는 철학자들에게 아무 권위도 없다. 그것은 철학자들에게 탐구하고 있는 존재자들의 본성에 대한 암시 또는 실마리들을 제공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흔히 잘못되어 있을 뿐이다.
우리가 물려받은 철학과 이론의 전통은 객체에 대한 문제를 두 가지 방식 가운데 한 가지 방식으로 생각한다. 물론 예외들이 존재하며, 중요한 예외들도 있지만, 이 두 가지 접근방식이 통계적으로 지배해온 것이다. 철학에서, 객체에 대한 문제는 주로 객체에 관한 지식의 문제라는 견지에서 사유되었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의 표상들이 그것 자체로 존재하는 대로의 존재자들에 대응되는 방식과 대응 여부이다. 이 틀 내에서는, 한편으로 우리의 표상들이 우리의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존재자들을 존재하는 그대로 나타낸다고 주장하는 인식론적 실재론자들의 사유를 얻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세계에서 만나게 되는 존재자들은 우리의 표상들 또는 언어의 구성물이며, 우리는 오직 우리의 표상들과 언어와 관계를 맺기 떄문에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가 어떠할 것이라는 것은 우리가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실재론자들의 사유를 얻게 된다. 반실재론의 경우에는 세계의 존재자들과 우리의 표상들을 비교할 수 있게 할 3인칭 시각을 채택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존재를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그대로 결코 알 수 없다. 현재의 맥락에서 나는 인식론의 문제들―이런 문제들은 결코 전적으로 외면할 수는 없지만―이나 또는 우리가 객체들을 표상해내는 방식과 표상해내는지 여부에 대해 관심이 없다.
다른 한편으로, 철학 밖의 인문학이나 문화연구에서, 객체에 대한 문제는 객체들의 의미에 대한 해석학으로 다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목적은 객체들이 의미하는 것을 해석하거나 판별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물의 체계>>라는 보드리야르(Baudrillard)의 특별한 초기 저작에 관해 생각할 수 있는데, 이 저작에서 그는 빅토리아식 거실의 가구 배치 같은 사물들에 대한 탐구에 관여하면서 그것들이 어떻게 성별 관계, 가부장제, 계급 등의 논리 전체를 구현하는지 예증한다. 보드리야르로부터 영감을 끌어내어 우리는 교외 가정의 근대식 마루 계획을 탐구하며 부엌이 어떻게 점점 더 출입구를 통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거실에 개방되는지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것이 남성과 여성 사이의 엄격한 노동 분업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대신에 더 통합적이고 평등한 가정 생활을 시사하는 성별 관계와 가족 관계들의 변화를 반영한다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환상의 돌림병(The Plague of Fantasies)>>라는 저작에서 지젝(Zizek)이 행한 프랑스, 독일 그리고 영국 화장실에 대한 악명 높은 분석에 관해 생각할 수 있을 것인데, 여기서 그는 각각의 화장실 양식이 어떻게 특수한 민족 이데올로기를 구현하는지 보여준다. 지젝은 이렇게 쓴다.
전통적인 독일식 화장실에서는 물을 내린 후에 대변이 사라지는 구멍이 꽤 앞에 있고, 그래서 우리가 냄새를 맡고 어떤 질병의 흔적을 조사하도록 대변이 먼저 제시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전형적인 프랑스식 화장실에서는 구멍이 뒤에 있고, 그래서 대변이 가능한 한 빨리 사라지도록 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앵글로색슨식...화장실은 일종의 종합, 이 두 대극 사이의 조정안을 제시한다―변기에 물이 차 있고, 그래서 대변이 그 속에서 부유한다―보이지만 조사할 수는 없는... 이 판본들 가운데 어느 것도 순전히 공리주의적 견지에서는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주체가 우리 육체 내부에서 비롯되는 불쾌한 배설물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어떤 이데올로기적 지각이 분명히 식별 가능하다―또 다시, 세번째로, '진실은 저쪽에 있다'.
헤겔은 독일-프랑스-영국이라는 지리적 삼각 구도를 세 가지 상이한 실존적 태도―독일의 성찰적 철저함, 프랑스의 혁명적 조급함, 영국의 온건한 공리주의적 실용주의―를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한 최초의 부류에 속했다... 화장실들을 고려함으로써 우리는 배설 기능을 수행하는 가장 친근한 영역 속에서 동일한 삼각 구도를 식별할수 있을 뿐 아니라, 배설적 잉여물에 대한 이런 상이한 태도들에서 이 삼각 구도의 근본적인 메커니즘을 생성할 수 있다. 모호한 명상적 매혹, 불쾌한 잉여물을 가능한 한 빨리 제거하려는 조급한 시도, 잉여물을 적절한 방식으로 처리되어야 하는 보통 사물로 다루는 실용적 접근방식. 어떤 강단인이 토론회에서 우리는 탈이데올로기적 세계에서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쉽다. 그런데 열띤 토론 후에 화장실에 가는 순간 그는 또 다시 이데올로기에 휩쓸린다. (1997)
객체에 대한 해석학적 관념에서 객체는 의미 전달체 또는 기표로 다루어진다. 객체들을 탐구할 때 우리는, 철학의 인식론적 의문의 경우처럼, 그것이 무엇인지도 묻지 않을 것이고, 내 자신의 경우처럼, 그것이 무엇을 행하는지도묻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화장실 자체는 대체로 지젝의 주장과 무관하다는 점을 인식할 것이다. 확실히, 각 화장실의 상이한 설계는 지젝의 구조/비교 분석의 기회이지만, 이 의미는 다양한 다른 객체들과 제도들에서 구현될 수 있다. 그런 의미작용 또는 이데올로기적 구성체를 위한 전달체로서 기능하는 객체는 이데올로기가 자체를 물질화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 이외에는 그것 자체로 아무것도 기여하지 못한다. 마르크스가 헤겔을 뒤집어서 관념 또는 개념의 효험 대신에 실재와 실천을 물질화하는 데 주의를 끌려고 노력했던 반면에, 지젝은 마르크스를 뒤집으려고 노력한다.
철학의 인식론적 접근 방식과 인문학의 해석학적 접근 방식 둘 다 상당히 인간형상주의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인식될 것이다. 철학의 경우에 문제는 정말 우리의 지식에 대한 문제이다. 그것은 객체 자체에 대한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표상들에 대한 문제이다. 마찬가지로, 해석학적 접근 방식에서, 우리가 정말로 분석하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지 객체가 아니다. 비판이론가들이 찾아내는 의미는 객체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의 사회적 및 인지적 활동을 통해서 객체로 투영되거나 새겨진 것이다. 이 두 가지 접근 방식에는 객체 자체가 사라지는 흥미로운 방식이 있다. 두 경우 모두에서 우리는 결국 사물이 행하는 것이 아니라 표상에 대해 말하게 된다.
한편으로 나는 철학의 인식론적 접근 방식과 문화 연구의 해석학적 접근 방식 사이의 제3의 길을 명시적으로 표명하려고 노력했다. 스테이시 알레이모와 카렌 바라드 같은 신유물론적 페미니스트들, 브뤼노 라투르 같은 행위자 연결망 이론가들, 마셜 매클루언, 월터 옹 그리고 프리드리히 키틀러 같은 매체 이론가들뿐 아니라 들뢰즈, 가타리, 마누엘 데란다 그리고 존 프로테비 같은 조립체 이론가들의 사유에 큰 빚을 지고 있는 나는, 우리는 육체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덧붙여 그것이 무엇인지에 의해 육체는 무엇을 행하는지에 관해 성찰할 수 있는 공간을 개방하는 데 기여하고자 했다. 나는 "덧붙여"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철학적 인식론에서 발견되는 탐구 형식들과 문화 연구의 해석학적 접근 방식을 거부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석을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분석 양식들을 확장하는 것에 대한 문제이다. 나는 버틀러, 푸코, 지젝, 바르트, 라캉, 보들리야르 등과 같은 사상가들에서 발견되는 기호학적 분석 양식들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여 해석적 방법론을 포기할 수 없다. 신실재론에 속하는 일부는 사회구성주의와 언어구성주의의 종말을 요청하는 듯 보이지만, 나는 이런 다양한 해석학이 해방 계획과 권력 작동 방식에 대한 이해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우리 세계의 실재적이고 주요한 특징들을 드러낸다고 믿는다. 문제는 사회구성주의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과장되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모든 것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지는 않지만 많은 것들이 존재하며, 그리고 우리가 이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구성된 것은 파괴될 수도 있고 그 대신에 새로운 것이 세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철학적 인식론에 덜 열중해 있다고 고백한다. 인식론, 즉 한 지식 형식을 실재계를 반영하는 권위 있는 것으로 정초하고자 하는 담론들에 대한 나의 의심은 푸코에 빚지고 있다. 1975-6년 강연에서 푸코가 말하듯이,
"그것은 과학인가 아닌가?"라는 의문에 대한 계보학자의 대답은 이렇다. "마르크스주의, 또는 정신분석, 또는 무엇이든 다른 무언가를 과학으로 전환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당신을 비판하고 있는 까닭이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 행해질 수 있는 한 가지 반대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마르크스주의가 당연히 과학일 것이라는 것이다." [최소한] 더 온건한 술어―더 정교한 술어는 아닐지라도―로 서술하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마르크스주의 또는 정신분석 같은 것이 일상적 작용, 구성 규칙, 사용하는 개념에 있어서 과학적 실천과 어느 정도 유사한지 알기 전에도 과학이라고 하는 주장에 내재하는 권력에 대한 열망과 관련된 의문을 자문해야 한다. 제기되어야 하는 의문 또는 의문들은 이렇다. "자신은 과학이라고 당신이 말할 때 당신은 어떤 지식 유형들의 자격을 박탈하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나는 이 담론을 말한다. 나는 과학적 담론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과학자이다'라고 당신이 말하기 시작할 때 당신은 어떤 말하는 주체, 어떤 담론적 주체, 어떤 경험과 지식의 주체를 주변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사회는 보호되어야 한다(Science Must Be Defended)>>, 9-10)
인식론과 인식론적 의문들에 대한 나의 혐오는, 근본적으로 그것들은 정말 지식, 즉 우리가 아는 방식과 알고 있는지 여부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 오히려 사실상 한 권위체를 정당화하는 것과 지식, 경험 그리고 현상의 다른 집합체들을 "주변화"하거나 배제하기 위한 일련의 담론적 기법들을 개발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의심에서 비롯된다. 자체적으로, 인식론적 탐구들은 공평성과 객관성이라는 허울 뒤에 숨어 있는 상태에서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제한하는 데 몰입하는 듯 보인다. 확실히 이것은 들뢰즈가 "국가 철학자"라는 인물로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의 일부인데, 그 인물은 역사적으로 우연적인 권력 체제를 위해서 이런 권력 형식의 자연화와 본질화를 통해 작업하면서 그것이 세계 또는 실존의 불가피하고 필연적인 구조로 제시한다. 예를 들면, 오늘날 진화심리학자는 인간이 진화되어 나온 영장류 친척들로부터 물려받은 유전과 생물학에 대한 명확한 의도를 지닌 관념의 견지에서 인간 심리를 설명함으로써 이기적인 신자유주의적 주체를 인간 본성의 고유한 진리로 무의식적으로 제시한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우리 자신을 경험하는 방식을 생물학에 위치시킴으로써 그것을 탈역사화하며, 생물학과 궁극적으로 과학의 권위에 근거를 두고 자신들의 논변들의 권위를 진전시키려고 시도한다. 그렇게 할 때 그들은, 인간 실존의 가능성에 관해 매우 다른 이야기를 말하고, 그래서 오늘날 인간과 다르게 살고 느낄 수 있는 가능성을 개방하는 민족지학과 역사적 연구의 발견 결과를 주변화하거나 배제하려고 시도한다. 인식론의 경우에도 대체로 그렇다. 현대 자연주의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아래로 원자 자체까지 모든 것이 우연적이며 적절한 조건에서는 다르게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현대 물리학과 생물학 둘 다에 의해 증언된다.
온티콜로지 또는 기계지향 존재론―나의 존재론적 입장을 가리키는 이름―의 틀 내에서는 육체가 행하는 것의 견지에서 육체에 접근한다. 그것은 객체를 아는 것에 대한 의문이 아니다. 그것은 객체의 의미를 판독하는 것에 대한 의문이 아니다. 사실상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객체가 행하는 것에 주목해야 할 뿐 아니라 객체란 행위 또는 활동이라고 주장한다. 전통적인 사유에 따르면, 객체는 특성 또는 성질들의 다발로 이루어져 있다고 간주된다. 예를 들면, 우리는 내가 애호하는 청색 커피 머그잔을 그것의 색깔, 즉 청색성, 모양, 단단함 같은 다양한 성질들이 내재하는 실체로 여긴다. 머그잔의 실체성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지속하는 동일성, 즉 그것이 겪는 가능한 모든 정성적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불변하는 것이다.
객체를 이해하는 이런 방식은 성찰과 강단 둘 다에 특유한 관객 입장의 결과물이라고 나는 믿는다. 성찰 행위를 수행하는 사람은 활동에서 물러서서 그저 바라볼 뿐이다. 우리가 주변 세계의 존재자들에 대해 관객적 관계를 향유할 때, 우리의 응시에 나타나는 것은 객체의 성질 아니면 의미이다. 그 다음에 우리는 객체를 이런 특성 또는 성질들의 다발로 취급하는 "유령적 환원(spectral reduction)"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수행한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강단 사회학과 철학적 성찰의 심리학의 결과로 초래되는 객체에 대한 철저히 왜곡된 이해이다. 객체가 무엇인지 알기를 원한다면, 예술가, 공학자, 농부, 목수 또는 요리사에게 문의하는 것이 더 나은데, 그들은 객체에 작용하고 그래서 존재자 내부에 숨겨진 은밀한 역능뿐 아니라, 상이한 매체들의 제약과 도구-존재자 상호작용에서 비롯되는 독특한 현상 또는 구체화를 항구적으로 만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요리사는 고기 요리를 만들 때 주철 프라이팬과 가스 레인지가 대단히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점을 알아챈다.
이것을 위해 나는 객체를 그것의 성질이 아니라 그것이 행하는 것의 견지에서 고려하는 "행위 존재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표현하려고 시도했다. 객체는 활동 또는 행위이며, 최소한 세 가지 방식으로 활동과 결부되어 있다. 첫째, 무엇이든 어떤 객체, 기계 또는 육체의 지속되는 현존은 항구적인 활동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 물리학과 정보 이론에 매우 중요한 엔트로피라는 쟁점을 만나게 된다. 물리학에서 엔트로피는 닫힌 (체)계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 무질서해지는 경향이다. 일정량의 기체를 유리 상자에 불어넣자. 초기 단계에 이 기체는 용기의 한 구석에 국소화될 것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기체 입자들은 용기 전체에 걸쳐 퍼진다. 기체는 낮은 엔트로피 상태에서 높은 엔트로피 상태로 이행해버렸다. 기체의 엔트로피는 기체 입자들의 확률 척도의 함수이다. 초기 단계의 경우에, 기체가 상자의 한 구석에 국소화되어야 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 시점에 기체는 낮은 엔트로피 상태에 처한다. 시간이 흐르게 되면, 용기의 어느 곳에서든지 기체 입자가 발견될 확률은 같아지게 된다. 낮은 엔트로피 상태는 개연성이 거의 없다. 높은 엔트로피 상태는 개연성이 크다.
이것이 객체 및 활동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객체는 물질적 요소들의 조직화된 체계이다. 여기서 모든 객체는 다른 객체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내 육체는 기관, 뼈 그리고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들 역시 세포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세포들은 분자들로 이루어져 있고, 분자들은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고, 계속 내려가면 끈까지 이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조직체는 육체들의 오래된 더미가 전혀 아니며, 오히려 이런 요소들은 모두 서로 특정한 관계들을 맺는다. 그것들은 특정한 패턴 또는 조직을 갖는다. 이것이 모든 객체의 상태이다. 객체들은 모두 시간에 걸쳐 다소간 지속되는 조직 또는 패턴을 갖는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객체를 "비개연적인 것"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의 테제―이것은 들었을 때의 느낌과 달리 음울하지 않다―는 모든 것이 끊임없는 해체 또는 붕괴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엔트로피는 모든 객체의 차원이다. 모든 객체 또는 비개연적인 것은 확률이 더 높은 상태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존재자는 자체 조직을 상실하는 과정 중에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현존하는 모든 것이 계속 현존하기 위해서는 활동이 필요하다. 결국 모든 것은 용기 속 기체 입자들의 운명을 갖지만, 활동을 통해서 존재자는 얼마간 자체 조직을 유지하며, 자체 요소들이 확률이 더 높은 상태로 해체되는 것에 저항할 수 있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활동은 일, 즉 에너지의 소비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학술적 삶의 구성 요소인 관객적 입장 때문에 강단인은 관념론, 즉 우리의 사회적 실재를 구성하는 것은 오직 관념들이라는 견해을 향한 경향을 갖추게 된다. 흔히 우리는 관념은 아무 일 또는 에너지가 필요 없다―그런데 관념도 영양분을 연소한다―고 간주하고, 그래서 사회 사상과 정치 사상에서 일과 에너지의 차원을 놓치게 된다. 게다가 패턴을 갖춘 모든 조직체는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 일과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점을 환기하는 것은 사회적 조립체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주요한 메커니즘들 가운데 하나―대부분의 정치 이론에서 거의 논의되지 않는 차원―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그런데, 모든 것은 붕괴 상태에 있다는 주장이 처음에는 우울한 듯 들릴지라도, 나는 이 테제가 사실상 희망과 낙관주의에 대한 원인이라고 믿는다. 이것이 맞다면, 그 테제가 이의가 제기될 수 없고 전복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강한, 강철로 만들어진 그런 형태의 패턴을 갖춘 조직체―예를 들면, 억압적 정부, 부당한 사회적 체계 또는 기업―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엔트로피가 모든 존재자들의 일반적인 존재론적 차원이라는 것이 맞다면, 당연히 변화와 새로운 패턴을 갖춘 조직체 또는 비개연적인 것의 생성이 항상 가능하다. 패턴을 갖춘 모든 조직체 아래에는 투덜거리는 존재자들의 무정부 상태가 항상 존재하는데, 그것이 새로운 상이한 조직체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둘째, 객체는 행위 또는 활동이라는 주장은 특성 또는 성질은 효과 또는 사건이라는 주장이다. 내가 애호하는 커피 머그잔의 청색성을 고려하자. 우리는 청색이 머그잔이 자체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서 보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이런 청색성을 머그잔에 내재하는 것으로 다룬다. 그런데, 머그잔을 촛불 조명에서 끄집어내어 햇빛 조명으로 가져가면 색깔이 변한다는 점을 인식하게 된다. 햇빛 속에서 그것은 밝은 청색인 반면에, 촛불 속에서 그것은 진한 암청색이다. 조명을 끄게 되면 머그잔은 전혀 아무 색깔도 나타내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머그잔이 정말 무슨 색인지 논쟁하고 싶을 것이다. 예를 들면, 조명이 없을 때에도 머그잔은 여전히 청색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그냥 볼 수 없을 뿐이다. 그 대신에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머그잔은 결코 아무 색깔도 없으며, 오히려 머그잔의 색깔은 주변 세계와 맺는 상호작용을 통해서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 경우에, 다양한 파장의 빛뿐 아니라 관찰자의 눈과 이루어지는 머그잔의 상호작용(예를 들면, 개에게 머그잔은 다르게 나타날 것인데, 개는 상이한 색각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이 청색 사건 또는 "청색을 나타냄"이라는 사건을 산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머그잔은 아무 조명도 없는 조건에서의 무색을 비롯한 이 모든 색깔이다. 이것은 색깔 같은 성질들뿐 아니라, 머그잔의 모양과 단단함 같은 성질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면, 머그잔이 금성의 표면에 존재한다면 그것은 매우 상이한 모양과 단단함을 나타낼 것인데, 그것을 구성하는 유리는 어떤 온도 조건에서만 자체의 강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객체의 입장에서 특성 또는 성질은 행위이다. 그것은 객체가 행하는 것이지, 객체가 고유하게 보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객체가 행위자라는 한 가지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객체는 자체의 성질이 아니라, 오히려 자체의역능 또는 역량의 견지에서 규정되어야 한다. 객체는 영향을 미치고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역능 또는 역량을 갖춘 조직적 체계이다. 이것으로부터 두 가지 결론이 도출된다. 첫째, 이제 객체를 분석하는 방식이 두드러지게 변한다. 흔히 우리는 육체 또는 객체를 다른 육체들과 분리하여 생각한다. 나는 커피 컵이 무엇인지 이해하기를 원하고, 그래서 나는 그것을 세계에 거주하는 여타 존재자들로부터 분리하여 그것의 성질 분석에 착수하고 그것을 자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그런 성질들로 환원시킨다. 그런데, 앞에 제시한 것이 참이라면, 즉 성질이 효과 또는 사건이라면, 당연히 나는 육체들의 장 속에서 객체가 다른 육체들과 맺는 상호작용을 이해하지 않은 채 그것을 이해할 수는 없다. 머그잔의 색깔은 자체 존재의 고유한 특징이 아니라, 오히려 머그잔의 역능, 빛 같은 육체들, 다양한 동물의 신경계 등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되는 사건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객체의 성질은 이런 성질을 효과로 산출하는, 그것이 다른 육체들의 장과 맺는 상호작용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그레이엄 하만의 객체지향 철학에 대한 나의 논쟁의 핵심이며 내가 스스로를 객체지향 존재론라고 여전히 지칭하기를 꺼려하는 까닭이다. 하만의 경우에, 객체는 모든 관계로부터 물러서 있고, 그래서 객체는 자체가 맺는 관계들에 독립적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 그가 주장하듯이, 객체들은 결코 접촉하지 않는다. 나는 객체는 현재 그것이 맺고 있는 관계들로부터 단절될 수 있다―많은 경우에 이것은 죽음 또는 파괴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존재자들이 서로 만나게 될 때 일어나는 일인 듯 보인다. 우리가 탐구해야 하는 것은 분리 상태에 있는 존재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자들 사이의 만남, 즉 그것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방식이다. 이것은 세계 또는 존재에 대한 본질적으로 생태적인 견해이다. 생태학은 "자연", 즉 도시와 마을 바깥에 존재하는 체계들에 대한 연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 상호작용하는 방식 그리고 이런 상호작용과 관계들이 패턴을 갖춘 어떤 조직체들을 낳는 방식의 견지에서 세계를 탐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모든 것은 하나의 생태계인데, 우리 자신의 육체도 그렇다. 객체들이 서로 만나면, 모든 종류의 뜻밖의 현상들을 만들어내는 폭발이 존재한다.
그런데 둘째, 그리고 아마도 더 중요하게도, 앞에서 제시한 것은 우리 자신뿐 아니라 세계에 존재하는 존재자들을 취급함에 있어서 주의의 윤리를 시사한다. 육체를 그것이 몸담고 있는 장에서 분리하는 존재자들에 대한 접근 방식과 관련된 한 가지 문제는 그것이 결국 그런 존재자들의 존재성을 물화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일단의 특징들을 모든 가능한 맥락 또는 장에 놓여 있는 육체에 고유하게 속하는 것으로 다룬다. 그런데, 앞에서 제시한 것은 육체는 본질적으로 가소성이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육체들의 한 장 속에서 어떤 육체가 표현하는 성질은 다른 한 장 속에서 그것이 만들어내는 성질과 다를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육체와 관련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것이 항상 존재한다.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우리는 육체가 할 수 있는 것을 결코 알지 못한다. 이것이 주의의 윤리를 제시한다면, 그 이유는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본질주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어떤 객체를 특수한 일단의 성향들로 환원시키는 것에 저항할 것을 권고할 뿐 아니라, 새로운 맥락에 놓이게 될 때 존재자들은 매우 상이한 방식으로 행동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우리가 개방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뒤샹은 나름의 방식으로 이 점을 제시했다.
객체는 행위자이다. 객체는 활동이다. 객체는 행위이다. 객체는 수행자이다. 이것을 인식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학자와 철학자의 표상으로 되돌아가자. 그들로 하여금 객체의 행위주체성을 무시하게 만드는 학자와 철학자의 사회학 및 심리학이 존재한다. 성찰적 태도 때문에 학자는 모든 행위주체성이 오직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간주하고, 그래서 객체를 일단의 성질과 의미 전달체로 환원시키게 된다. 텍스트와 관념들과 관련하여 항구적으로 작업함으로써 학자들은 역능이 관념, 믿음 그리고 텍스트에서만 비롯되는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사회적 세계가 현재의 형태 또는 패턴을 나타내는 까닭을 사람들의 믿음, 이데올로기 그리고 관념들에 기대어 설명한다. 권력은 대체적으로 담론적 견지에서 간주된다. 이것은 학자의 계급적 지위에 의해 강화된다. 컴퓨터와 워드 프로세싱 프로그램 같은 강단을 유지하는 기술들은 대체로 이용 가능하고 마땅한 방식으로 작동하며,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하이데거가 가르쳤듯이, 여러분의 안경이 깨지거나 파괴되지 않는 한, 결국 여러분은 안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안경을 통해서 무언가를 보는 경향이 있다. 안경은 보이지 않게 된다. 마찬가지로, 강단인들의 경우에, 주거와 음식에 대한 걱정은 일반적으로 해결된 상태에 있다. 강단인들 사이에 벌어지는 다툼은 대체로 지적인 차원에서 경쟁 진영 사이의 관념들의 전투로 일어난다. 그러므로 놀랍지 않게도, 강단인들은 관념, 텍스트들이 세계 전체와 모든 사회적 관계들을 구성하는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
여기서 간과하게 되는 것은 객체들이 사회적 조립체의 구성에 기여하는 힘,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차이이다. 객체들이 라캉주의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본원적으로 무의식적인 방식이 있기 때문에 몇 가지 점에서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객체들과 그것들이 우리에게 작용하는 방식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객체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매우 편재적이고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주장했듯이, 우리는 의미와 목적의 견지에서 생각한다. 그가 말하지 않았던 것은, 이런 점이 우리가 원인의 견지에서 생각하는 것을 터무니 없이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는 객체의 의미작용 또는 그것의 용도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래서 객체의 구성 자체, 그것의 물질적 역능이 우리 행위, 우리가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 우리의 정동 그리고 우리의 인지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간과한다. 이것은 기회의 상실인데, 관념, 즉 개념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객체도 역능을 행사하는 것이 참이라면, 세계에서 변화를 만들어내는 한 가지 방법은 상이한 방식들로 관계들을 강화하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새로운 객체들의 설계와 객체들의 상이한 배치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권력을 유지시킨다고 믿고 있는 관념들의 체계를 비판하지만, 당혹스럽게도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사회적 관계들이 담론적으로 구성된다면, 관념들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사람들에게 납득시켰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모든 것이 여전히 그대로 유지될 수 있겠는가? 왜 설득과 비판만으로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충분하지 못한가? 다른 한편으로, 객체, 세계의 물질적 특징들이 역능을 행사하는 것이 참이라면, 어떤 불쾌한 사회적 관계들에 대해서 엔트로피가 개시하지 못하게 하는 데 기여하는 사회적 조직의 중요한 차원을 놓친 것이다.
빗방울이 최소 저항을 규정하는 잎 위의 경로를 좇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부분적으로는 사람들도 주변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객체들에 의해 제공되는 홈을 따라 살아가고 서로 관계를 맺을 것이다. 움직임의 벡터들의 이런 구성체는 객체들의 행위주체성, 객체들이 우리에게 작용하는 방식과 그것들이 자체 역능을 행사하는 방식과 결부되어 있다. 그것은 객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객체가 무엇을 행사하는지 또는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문제인데, 이것은 다른 가능한 경로들을 제한하면서 행동하고, 관계를 맺고, 느끼며, 수행하는 어떤 방식들을 제공한다. 객체들이 우리에게 어떤 중력을 행사하는 방식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뉴턴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아인슈타인적 의미에서, 우리 자아와 의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움직이게 되는 경로들의 구성을 통해서 작동한다.
객체들이 어떻게 이런 종류의 역능을 행사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도처에 존재하는 스마트폰을 생각하자. 우리가 객체에 대한 보드리야르적 해석자이거나 기호학자라면, 스마트폰의 의미작용을 논의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이 어떻게 계급, 지위, 성별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표식인지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안드로이트와 아이폰을 대조하면서, 안드로이드는 미합중국 주식회사와 기술관료적 태도의 표식인 반면에, 아이폰은 대항문화적인 생태적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대표하는지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십대 여성들이 아이폰을 성의 모호한 기표로서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계급의 가시적인 기호로서 뒷주머니에 꼭대기 부분이 드러나도록 꼽는 습관을 어떻게 채택하게 되었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중요하고 가치가 있고, 그래서 하나의 분석 방식으로서 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요약한 행위주체적 접근 방식에 따르면, 우리가 의미의 층위에서 스마트폰에 귀속시킬 수 있는 어떤 의미작용에도 무관하게, 스마트폰이 무엇이고 무엇을 행하는지의 견지에서 그것에 접근하는 다른 한 방식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스마트폰이 등장함으로써 노동의 구조가 어떻게 변하기 시작하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공적인 노동 시간과 사적인 가정 시간이 엄격히 구분되었던 시대가 있었다. 휴가를 떠나는 것이 여전히 가능했던 시대가 있었다. 8-10시간 동안 일을 한 후에 집에 갔을 것이고, 그래서 나머지 저녁 동안 일에서 벗어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여러분이 집에 있든, 출근 중에 있든, 또는 휴가 중에 있든 간에 항상 이메일과 전화 통화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점점 더 퍼지게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일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이런 동학에서 벗어나기를 선택할 수 있다고, 즉 이런 시기 동안 이메일을 살펴보거나 답장을 보내기를 거부할 수 있다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그 상황은 산업 혁명 후기 동안의 손목 시계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기술이 도처에 존재하게 되면서 그것은 사회적 기대, 즉 규범이 된다. 여러분은 벗어날 수 있지만, 만약 그렇게 한다면 모든 종류의 제재가 있을 것이고 기회가 상실될 것이다. 아마도 당신은 승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휴대 전화가 이것을 행하는 까닭은 그것이 의미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이고 그것이 작용하는 방식 때문이다. 점차적으로 사적 공간은 사라지고 모든 것은 노동의 공간이 된다.
그런데 이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소비 방식도 바뀌었다. 어제 밤 여기에 도착했을 때 나는 지역 음식점들을 찾기 위해 엘프(Yelp)를 열람하고 있었다. 이전에 음식점에 대한 탐색은 부근 지역을 거닐면서 지역 음식점들의 미학적 외관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던 반면에, 이제 내 선택은 타인들의 등급 평가에 따르게 된다. [...]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음식점들을 검색해야 하는 새로운 생태계, 즉 소비자 평가이다. 소비자 평가는 다른 사람들이 따르는 중력, 경로를 만들어내는데, 그것은 정글 속에서 어느 음식점들이 번성하고 어느 음식점들이 실패할지 결정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개미들이 다른 개미들의 페르몬 흔적을 좇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다른 평가자들의 흔적, 즉 이 새로운 기술에 의해 만들어진 경로를 좇는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내 취향인가 아니면 내 취향은 구성된 것인가? 예를 들면, 아마존은 다른 사람의 구매 실적과 내 과거의 구매 실적에 근거하여 내게 책을 추천한다. 이것은 나의 지적 관심사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관심사인가? 여기서 우리는 컴퓨터 알고리듬에 의해 형성되고 있는 취향과 지적 관심사를 만나게 된다. 또 다시, 이것은 사물들이 의미하는 것 또는 어떤 이데올로기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객체들의 활동에 의해 일어난다. 전자들은 후자들과 얽힐 수 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객체들의 영역으로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움직임. 취향, 사상 그리고 정동의 벡터들을 규정하는, 사회 이론과 정치 이론에 대한 논의들에 있어서 강단 내에서 흔히 주변화된, 거의 탐구되지 않는 권력의 전체 영역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정치 투쟁의 방대한 현장들뿐 아니라,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한 거대한 기회들도 놓치고 있다.
답글삭제شركة مكافحة حشرات دبي
شركة تنظيف في راس الخيم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