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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부정성(Negativity)
―― 마우리치오 페라리스(Maurizio Ferraris), <<신실재론 입문(Introduction to New Realism)>>, pp. 17-33.
지난 이 세기 동안(최소한) 그리고 탈근대주의에서 절정에 이른 과정을 거치면서 철학과 문화는 부정성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근대 시대와 탈근대 시대를 특징지운 기본적 관념은 역사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세계에서 많은 것들이 구성되고, 그래서 해체되고, 비판받으며, 변형될 수 있고 변형되어야 한다는 신성 불가침의 믿음이었다. 여기서 사실상 우리는 항상 부인하는 정신의 승리를 목격했는데, 그것은 의회 민주주의, 근대 과학, 성 평등 등―물론, 모든 종류의 재난들과 더불어―을 가져다 주었다. 그렇지만 이런 부정성은 통제할 수 없는 과정과 더불어 특히 호수와 산을 비롯한 모든 것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관념을 촉발했다. 확실히 그런 관념은, 이른바, 세계들의 구성자들이 되는 개인들의 권력에의 의지를 부양한다. 그런데 동시에 그것은 모든 사람이 (외관상)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으며 진리와 허구 사이의 차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거짓 해방에 이르는 길로서 제시된다. 그것은 내가 '리얼리티즘(realitism)'('리얼리티 쇼'에 의거하여 만들어진 낱말)라고 부르는 것의 세계이고 탈근대주의의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하는 듯 보인다.
탈근대주의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는 쇼펜하우어의 원리는 동등하거나 공존하는 존재자들로 간주하게 된(이것이 그 시대의 독특한 특질이다) 매체 체계와 탈근대성의 근본적인 존재론적 원리가 되었다. 결국 다음과 같은 것이 참된 위대한 탈근대적 이론이었다. 실재는 구성되고, 그래서 궁극적으로 실재는 불특정한 인류의 표상들과 독립적으로 현존할 수 없다. 이 이론은 탈근대성에서 매체의 과도한 증강을 설명하는데, 사실상 탈근대주의는 매체 '허구화'로 대체된 실재의 종말을 선언하는 역사 철학으로 자처한다. 니체를 좇아서 실재적 세계는 동화가 되어 버렸고, 그래서 사실은 전혀 존재하지 않고 해석만 존재한다면, 매체학은 존재론이 되고 매체는 실재의 구성자로 변환되는데, 이것은 걸프 전쟁을 순전한 매체 발명품으로 간주한 보드리야르(Baudrillard)뿐 아니라 제국의 권력은 영화 제작업체와 꼭 마찬가지로 실재를 구성할 수 있다고 믿은 것으로 유명한 칼 로브(Karl Rove)와도 일치한다.
이 원리는 내가 탈근대적인 공통의 것들(koine)을 요약한다고 제안하는 세 가지 중요한 점들로 명시적으로 표명된다. 첫째는 아이러니화(ironisation)인데, 이것에 따르면 이론(또는 심지어 낱말들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을 진지하게 간주하는 것은 일종의 독단주의를 나타내고,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진술로부터 역설적인 초연함―철자법적으로는 인용 부호로 표현되고, 심지어 물리적으로는 구두 연설에서 인용 부호를 나타내기 위해 손가락을 구부림으로써 표현된다―을 유지해야 한다. 둘째는 탈승화(desublimation), 즉 욕망이 자체적으로 한 가지 해방 형식을 구성한다는 관념인데, 왜냐하면 이성과 지성은 지배 형식이고, 그래서 해방은 본질적으로 혁명적인 느낌과 육체를 통해서 추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탈객관화(deobjectification), 즉 사실은 전혀 없고 해석만 있을 뿐이라는 가정인데, 이것으로부터 우호적인 연대가 무심하고 폭력적인 객관성을 지배해야 한다는 따름 정리가 도출된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내가 인문학과 철학의 '직업적 반실재론'으로 부르자고 제안하는 것의 기원을 발견하게 된다. 자연 과학(그런데 우리는 간단히 '과학'이라고 해도 무방하다)이 실재와 객관성의 권역 전체를 담당하는 듯 보이는 시기에 철학자라는 것은 실재는 현존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그리고 실재는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언어에 의해 결정되며, 패러다임 등에 의해 제조된다고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과학의 시대에 인문학은 어떤 존중할 만한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과학자들은 구성하고, 인문학자들은 해체한다. 세 가지 기본적인 선택지가 존재한다. 해체주의적 반실재론자, 과학주의의 (실재론적 또는 구성주의적) 옹호자 그리고 부정적 실재론자(이 경우에 진리와 실재는 과학의 특권이다).
내 의견으로는, 왜 지성적인 사람들(탈근대적 철학자들이 그랬듯이)이 로티(Rorty)―내 의견으로는 푸코, 데리다 그리고 들뢰즈보다 덜 독창적이지만, 탈근대적 역설들에 이론적 형식을 부여하려고 시도한 유일한 사람이다―가 올바르게도 '역설적인 이론(ironic theory)'으로 불렀던 것을 실천하면서, 진리의 대응물이 전혀 없이, 돌발적 발언이나 과장된 표현을 표명하는 것에 만족해야 하는지 자문할 가치가 있다. 나는 그 이유가 내가 제시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지난 이 세기 동안 철학은 과학에 예속되거나(실증주의, 그런데 삼십 년 전에 '인간 과학'의 대유행도 생각하자) 아니면 과학을 비판할 수밖에 없었다. 과학자와 반과학자들이 모두 실재에 관한 지식은 과학의 특권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에(두 범주의 구성원들은 아프면 의사에게 간다) 반과학자들은 게다가 반실재론자가 되고, 그래서 인간은 최근의 발명품이며,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등의 주장들을 표명하게 된다. 그런 주장들을 비판하기 위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그것들은 진지하게 간주하는 것일 것이다. '인간은 최근의 발명품이라고 말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까닭을 말해야 한다.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면, 이 순간에 당신이 현존하고 있는 텍스트를 제시해야 한다.' 나는 이것이, 퍼트넘에 의해 사용된 표현을 차용하면, '안개와의 주먹다짐'을 피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있다.
나는 이것이 헛된 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것 덕분에 우리는 탈근대주의가 독일 관념론의 위기의 말기(언제 '철학의 죽음'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있었는지 기억하자)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모든 실재는 과학에 속하고, 그래서 철학에게는 대단치 않은 것들―신학, 영성주의, 정신주의, 개인적 열상, 인간 세계, 생활 세계; 형이상학의 극복, 해체,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사유'의 탐색 같은 현장 활동; 철학사 또는 역사적 지식으로서의 철학; 정치적 운동주의로서의 철학, 탈근대주의, 사실은 전혀 없고 해석만 있을 뿐이다; 구피, 플루토 그리고 도널드 덕의 철학(팝소피아)―이 남게 된다. 이런 불편함의 가장 명백한 증상들 가운데 하나는, 하이데거는 심지어 탈은폐로서의 진리에 관한 대안적 이론―즉, 여타의 사람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반면에 철학자들에게만 적용되는(철학자들이 철학을 하고 있지 않다면 그들에게도 적용되지 않는) 철학자들을 위한 진리―을 개발했었어야 했다는 사실이었다.
분석 철학도 역시 이런 잔류화의 전략에 동참했다. 소피스트(부정하게 논증하는)와 과학자(실재에 관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논증할 필요가 없는)들과 달리 철학자는 제대로 논증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떤 근거에서 논증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물론 나는 매우 조악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내 목적은 탈근대적 반실재론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는 점을 설명하는 것이다. 만약 상황이 이렇다면, 실재론을 역설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거나 자명한 무언가를 역설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대 철학의 거동에 있어서 무언가가 불필요하게 자기 제한적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포퓰리즘
포퓰리즘(populism)은 해방에 대한 탈근대적 희망의 기반을 약화시킨 모든 정치들 가운데 첫 번째의 것이었다. 매체 포퓰리즘의 등장은, 대량 파괴 무기들에 대한 허위 증거에 의거하여 전쟁을 개시하는 지경에 이른 이데올로기적 구성물로서의 진리의 거리낌 없는 사용은 말할 것도 없이, 결코 해방적이지 않은 실재에의 작별의 일례를 제공했다. 매체와 몇 가지 정치적인 프로그램들에서 우리는 "사실은 전혀 없고 해석들만 있을 뿐"이라는 니체의 원리―겨우 몇 년 전에 철학자들이 해방에 이르는 길로서 제안했지만 사실상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말하고 행하는 것에 대한 정당화로 제시되는―의 실재적 결과를 보았다. 그러므로 니체의 구호의 진정한 의미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가장 강한 자의 이유가 항상 최선의 것이다.' 이런 환경은 분석적 세계에 있어서 반실재론의 종말과 대륙적 세계에 있어서 반실재론의 종말 사이의 약간의 시간 간격을 설명한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동안에 여전히 분석적 반실재론은 대부분 존재했고 대륙적 반실재론은 비교 문학 학과들에서 여전히 존재했다.
그런데 21세기에는 실재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오히려 신매체는 증강된 실재, 즉 결코 가상적이지 않는 기록물, 고착물, 기입물, 문서들의 기하급수적인 성장을 드러내었는데, 통화 기록이 범죄로 기소된 사람의 알리바이를 날려 버릴 때처럼 사실상 그것들은 흔히 너무나 실재적이다. 가장 오래되고 가장 성공적인 앱들 가운데 하나로서 근처의 주유소, 레스토랑, 약국 등의 위치를 알려주는 '어라운드미(AroundMe)'라는 앱을 살펴보자. 여기서 우리는 컴퓨터들이 우리로 하여금 제2의 전적으로 가상적인 삶으로 진입하게 하는 수사법에 의해 흔히 언급되는 것과 매우 다른 무언가를 목격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더 이 삶, 우리가 갖는 유일한 삶에 속하며, 그리고 우리는 정보로 풍성해진 이런 증강된 현실의 효과를 너무나 잘 지각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이 지점에서는 돌도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세컨드 라이프(Second Life)의 짧은 가상적 꿈이 방금 먹은 것에 대한 서술까지 섭렵하는 문서들로 가득찬 페이스북에서의 매우 실재적이고 흔히 자책적인 편재에 압도당했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심지어 그런 앱들을 너머 기록이라는 단순한 행위가 우리가 알고 있는 실재(즉, 나중에 내가 밝히듯이, '인식론적 실재'라고 부르곤 하는 것)의 추산할 수 없는 증가를 낳는다. 오늘날에는 <지나가는 어느 여인에게(A une passante)>에서 보들레르에 의해 서술된 것―사라져서 결코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덧없는 아름다움―과 같은 경험―어쨌든 참신성과 일시성으로서의 근대성의 본질인 포의 '네버모어(nevermore)'을 떠올리게 하는 경험―을 갖는 것은 근본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 오늘날 보들레르는 자신의 모바일 폰으로 지나가는 여인의 사진을 찍을 수 있고, 그래서 페이스북에서 친구 요청으로 그녀를 추적하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조건이 참신성, 덧없음 그리고 일시성보다 반복, 보존 그리고 다시 쓰기에 유리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가 언급했듯이, 모든 행위가 기록된다는 사실은 실재를 두드러지게 증가시킨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이미 컴퓨터들로 둘러싸여 있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몇 년 전에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은 것을 자각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자료에 파묻혀 있다는 것이며, 그리고 이제 우리는, 예컨대, 유튜브를 검색하면 이것을 정말로 깨달을 수 있다. 인터넷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거래, 그리고 특히 우리의 모든 연구는 대규모의 초국가적 존재자들에 의해 기록되고, 그래서 훨씬 더 광범위한 통제권을 행사하는데, 사회적 연결망에 자신에 관한 정보를 자발적으로 제공하는 사람들은 통제되는 사람들이다. 이런 환경은 다른 한 고찰을 시사한다. 모든 것이 기록되는 시기에 제공될 수 있는 유일한 보호는 기술적으로 어려운 것(법률은 항상 해커들에 의해 쉽게 우회될 수 있기 때문에 법률적 어려움보다도 훨씬 더)을 거쳐서 이루어진다.
푸칸트(푸코 + 칸트)
탈근대적 리얼리티즘(realitism)은 정치적으로 고무된 반실재론이다. 지금까지 탈근대주의는, 실재는 지배의 목적을 위해 권력에 의해 실제로 구성되며, 그리고 지식은 해방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권력의 도구라는 관념을 계발했다. 나는 이런 태도의 기저에 놓여 있는 철학적 사고 방식을 '푸칸트(Foukant)적'이라고 명명할 것인데, 푸칸트라는 허구적 사상가는 (칸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식에 직접 접근할 수 없고 생각한다는 것은 반드시 우리의 표상들을 동반해야 한다고 믿으며, (사상의 최초 단계에서 푸코와 마찬가지로) 그는 생각한다는 것과 우리의 개념적 도식들은 권력에의 의지를 확언하는 수단이라고 간주한다. 푸칸트의 테제는 궁극적으로 다음과 같은 삼단 논법에 놓여 있다. 실재는 지식에 의해 구성된다. 지식은 권력에 의해 구성된다. 그러므로 실재는 권력에 의해 구성된다. 따라서, 급진적인 탈근대주의에서는 한 가지 논리적인 단계를 거쳐서 실재는 권력의 구성물인 것으로 판명되는데, 그래서 실재는 가증스러운 것('권력'이 우리를 지배하는 권력을 의미한다면)이자 가변적인 것('권력'이 '우리의 권력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면)이 된다.
이 삼단 논법은 세 가지 오류로 명확히 표명된다. 첫 번째 오류는 존재-지식의 오류, 즉 존재론과 인식론 사이, 즉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사이의 혼동이다. 내가 물은 H_2O이다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언어, 도식 그리고 범주들이 필요하다는 점은 명료하다. 그런데 물은 바로 H_2O이다라는 사실은 나의 어떤 지식과도 전적으로 독립적인데, 그래서 화학이 탄생하기 이전에도 물은 H_2O였고, 우리 모두가 지구에서 사라지더라도 여전히 그럴 것이다. 대체로, 비과학적 경혐의 경우에, 내가 알든 모르든 간에 언어, 도식 그리고 범주들과 독립적으로 물은 축축하고 불은 타오른다. 실재 속 무언가가 우리에게 저항한다. 그것이 내가 '수정 불가능성(unamendability)'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실재적인 것의 특이한 특질은 그것이 마음대로 수정되거나 교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하나의 제약일 수 있지만, 동시에 그것 덕분에 우리는 꿈과 실재, 과학과 마술을 구별지을 수 있다.
두 번째 오류는 확인-수용의 오류인데, 이것에 의거하여 탈근대주의자들은 실재를 확인하는 것은 현존하는 사태를 수용하는 것에 놓여 있고, 그래서 거꾸로(논리적 간극이 있지만) 반실재론은 본질적으로 해방적인 것이라고 가정했다. 그런데 명백히 그렇지 않다. 반실재론은 묵종을 수반한다. 진단이 치료의 전제가 되는 것과 동일한 평범한 이유 덕분에 오히려 실재론자가 (원한다면) 비판하고 (할 수 있다면) 변형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추고 있다.
세 번째 그리고 본질적인 오류―삼십 년 전에 탈근대주의를 거대한 반계몽주의적 물결로 간주한 하버마스의 견해를 확인하는―는 지식-권력 오류인데, 이것에 따르면 어떤 형태의 지식의 배후에도 부정적인 것으로 경험되는 권력이 숨어 있다. 결과적으로, 자체를 해방과 관련시키는 대신에 지식은 예속의 도구가 된다. 이런 태도는 독특한 '지식에 대한 공포'를 무심코 드러낸다고 올바르게 주장되었지만, 공포와 더불어 '무지는 축복이다'라는 확신―<<매트릭스(The Matrix)>>에서 사이퍼에 의해 간결하게 표명된―도 존재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결과들을 초래한 책임이 있는 계몽의 변증법으로, 지식에 대한 비판은 지식 자체로부터의 도피로 변환된다.
데칸트(데카르트+칸트)
푸칸트의 삼단 논법의 대전제('실재는 지식에 의해 구성된다')는, 내가 언급했듯이, 현대 철학의 주류를 대표하는 구성주의에서 강력한 이론적 정당화를 찾아낸다. 그런 시각은 우리의 개념적 도식과 지각적 장치들이 실재의 구성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수행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데카르트에서 시작되어 칸트에서 절정에 이르는 이런 견해를 구현하고 있는 허구적 철학자를 '데칸트(Deskant)'라고 부를 것인데, 그 다음에 그 견해는 니체에 의해 허무주의적 의미에서 급진화되거나, 아니면 인식론적, 해석학적, 심리적 의미에서 전문화되었다. 이런 입장은 내가 선험적 오류로 규정하는 것에서 비롯되는데, 그 오류는 이미 언급된 존재론과 인식론 사이의 혼동에 놓여 있다. 그것의 기원에는 데카르트, 흄, 칸트 그리고 헤겔에서 찾아낼 수 있는 어떤 전략이 존재한다. 지식은 무엇보다도 감각적 지식이지만, 감각은 기만적이고, 그래서 우리는 개념적 지식으로 변환해야 한다. 그러므로 구성주의는 더 이상 안정성을 갖추고 있지 않고, 햄릿이 서술했듯이, '어긋나 버린' 세계를 구성을 통해서 다시 정초할 필요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모든 지식은 경험에서 시작되지만, 경험이 구조적으로 불확실하다면, 과학을 통해서 경험을 정초하는 것이 필요할 것인데, 그래서 경험의 불확실성을 안정화하는 선험적 구조들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시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우리는 객체가 아니라 주체에서 출발하고, 학자로서가 아니라 판관으로서 자연을 심문하는 물리학자들의 모형을 좇아서, 즉 도식과 정리들을 사용하여 사물들이 자체적으로 어떠한지 자문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들을 알게 되려면 그것들이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지 자문해야 한다.
그래서 데칸트는 선험적 인식론, 즉 수학을 채택하여 존재론을 정초하는데, 종합적인 선험적 판단들의 가능성 덕분에 우리는 어떤 지식을 통해서 유동적인 실재를 고정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식으로 선험 철학은 구성주의를 수학의 권역에서 존재론의 권역으로 이동했다. 물리학과 수학의 법칙들은 실재에 적용되며, 그리고 데칸트의 가설에서 그것들은 과학자 집단의 고안물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감각들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의 지식은 더 이상 감각의 비신뢰성과 귀납의 불확실성에 의해 위협당하지 않을 것이지만, 우리가 치러야만 하는 댓가는 어떤 객체 X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과 우리가 객체 X를 알고 있다는 사실 사이에 어떤 차이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칸트는 우리로 하여금 현상적 객체 X의 배후에 본체적 객체 Y, 즉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물 자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하도록 환기하지만, 존재의 권역이 대체로 가지적인 것들의 권역과 일치하며, 가지적인 것은 본질적으로 구성 가능한 것과 동등하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는다.
그러므로 선험적 오류의 기원에는 주제들의 얽힘이 존재한다.
1. 감각은 기만적이다(감각은 100% 확실하지는 않다).
2. 귀납은 불확실하다(귀납은 100% 확실하지는 않다).
3. 과학은 경험보다 더 안전한데, 왜냐하면 과학은 감각의 기만성 및 귀납의 불확실성과 독립적인 수학적 원리들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4. 그렇다면 경험은 과학으로 해명되어야 한다(경험은 과학에 의해 정초되어야 하거나, 또는 최악의 경우에 경험은 과학에 의해 오해를 낳을 소지가 있는 '현시적 이미지'로 폭로되어야 한다).
5. 과학은 패러다임들의 구성이기 때문에, 이 지점에서 경험도 역시 구성일 것인데, 즉 경험은 개념적 도식들에서 시작하여 세계를 형성할 것이다.
여기에 탈근대주의의 기원이 놓여 있다.
더 자세히 조사함으로써 우리는 문제 전체의 핵심에서 인과성이라는 개념을 찾아낸다. 데카르트의 문제는 인식 주체가 세계의 일부가 아니라면 세계가 어떻게 인식 주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설명하는 것이다. 대신에 칸트의 문제는 인과성이 선험적 주체 자신에 속하는 범주라면 세계가 어떻게 선험적 주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설명하는 것이다. 인과성을 자신의 선험적 범주들 사이에 위치시킴으로써 칸트는 스스로를 암묵적으로 관념론적인 형태의 구성주의로 몰아넣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세계가 주체에 진정한 인과적 효과를 행사하지 못하게 막기 때문이다. 이것이 데칸트의 테제의 핵심이다. 세계는 주체에 대한 어떤 인과적 역능도 갖고 있지 않는데, 왜냐하면 주체는 세계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데카르트)이고 인과성은 전적으로 주체에 속하기 때문(칸트)이다.
데칸트 및 푸칸트와 달리 칸트는 <<순수 이성 비판>>을 거부하게 되는 <<판단력 비판>>으로 이런 어려움을 이미 자각하게 되었었다는 점을 지적할 가치가 있다. 첫째, 심미적 판단에 대한 비판에서 칸트는 아름다운 것은 아무 개념 없이 애호된다고 적었는데, 다시 말해서, 그는 개념성을 권좌에서 몰아내었으며 지각이 특히 중요한 영역에서 그랬다. 둘째, 목적론적 판단에 대한 비판에서 칸트는 과학론을 명시적으로 제시했는데, 즉 자연은 자체적으로 아무 목적도 없으며, 자연을 과학적으로 탐구할 수 있도록 그것에 목적을 부여하는 것은 인간들이다. 세째, 칸트는 단일한 사례에서 시작하여 일반적 규칙으로 상승하는, 제3 비판에서 도입된 반성적 판단은 일반적 규칙에서 단일한 사례로 하강하는, 제1 비판의 확정적 판단 다음에 위치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그가 가리켰던 것은 확정적 판단을 그저 탐구하기보다는 그것을 대체할 필요성이라고 믿을 만한 좋은 이유들이 존재한다. 사실상, 어느 것을 채용하기로 선택하는 것이 주체에 달려 있게 될 기묘한 이중적 양태에서, 확정적 판단이 어떻게 반성적 판단과 공존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어쨌든, 주체가 반성적 판단에 의지할지라도(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그것만을 사용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그들은 흄에 의해 제기된 반대 의견들에 대응할 수 없을 것인데, 왜냐하면 사실상 반성적 판단은 모든 점에서 경험주의적 귀납―단일한 사례에서 시작하여 규칙으로 상승하는―이기 때문이다.
티-렉스
내가 푸칸트와 데칸트에 대립시킬 기능, 즉 티-렉스(T-Rex)는 인간이 아니라 동물인데,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공룡이다. 공룡은 상부 삼첩기(Upper Triassic, 대략 2억3천만 년 전)와 백악기 말기(대략 6천5백만 년 전) 사이에 생존했다. 최초의 인간들과 그들의 개념적 도식들은 몇몇 사람들에 따르면 2십5만 년 전에 나타났고, 다른 사람들에 따르면 5만 년 전에 나타났다. 1억6천5백만 년 동안 공룡은 존재했지만 인간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6천4백만 년 동안 인간도 공룡도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5십만 년 동안 인간은 존재했지만 공룡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선재성의 논증(argument of pre-existence)'으로 부르는 이런 환경은 테칸트의 경우에 한 가지 문제를 조성한다. 데칸트의 경우에는 사유가 우리가 경험하는 직접적인 최초의 대상이고, 그래서 사유와 그것의 범주들의 매개를 거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저쪽에' 놓여 있는 세계와 전혀 접촉할 수 없다. 데칸트에 따르면 자연적 객체들은,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데 사용하는 범주들과 더불어 우리 마음 속에만 현존하는 시간과 공간에 정위된다. 사람들이 존재하기 전에는 아무 객체들도 존재하지 않았거나, 또는 최소한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의 객체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지만, 명백히 그렇지 않다. 티-렉스는 푸칸트나 데칸트 이전에 그리고 일반적으로 '인식 주체' 이전에 존재했다.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다룰 수 있는가?
좋은 움직임은 구성주의자들에 의거하여 언어적-개념적 차원이 실재적인 것을 구성하는 방식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것일 수 있을 것이다. 두 가지 가능한 경우가 존재한다. 한편으로, 실재는 실제로 우리의 개념들에 의해 구성되고, 그래서 공룡은 결코 존재한 적이 없었다(기껏해야 어떤 인간이 그것들을 발견하는 바로 그 순간에 마법처럼 나타난 공룡 화석들이 존재한다). 다른 한편으로, 실재는 개념이 아니라 객체들―인간 이전에 생존했던 공룡처럼―로 이루어져 있고, 그래서 개념적 도식들은 공룡들의 모습이 어떠했고 어떻게 살았는지 이해하려고 시도하기 위해, 즉 존재론적 기능이 아니라 인식론적 기능을 충족시키기 위해 공룡의 유물들을 관련시키는 데 유용할 뿐이다.
이제 개념적 도식들에 대한 세계의 의존성의 가능한 종류들을 가장 강한 것에서 가장 약한 것까지 살펴 보자. 가장 강한 의존성, 즉 존재자는 사유의 상관물로서 현존할 뿐이라고 단언하는(극단적인 상관주의의 형식으로) 사람들에 의해 제시되는 것을 고찰하자. 이 경우에, 존재는 사유에 인과적으로 의존한다고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강한 판본에서, 객체들의 사유에의 의존성은 명시적인 인과적 의존성이다. 주체가 객체의 인식론적 필요 조건이라는 바로 그 이유만으로도, '아무튼' 주체는 객체를 초래한다. 인식하는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식되는 객체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리고 이것은 논의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그리고 여기에 인과적 의존성의 옹호자가 놓치는 점이 있다) 그것은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객체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의 기원은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라 인식론적인 버컬리의 유명한 논증―숲에서 한 그루의 나무가 쓰러지고 그 소리를 들을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다면, 그것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에 놓여 있다. 그런데, 이 판본에서는 존재(존재론)가 지식(인식론)에 의존하기 떄문에, 인과적 의존성의 옹호자는 누군가가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를 확인할 때에야 비로소 그 나무가 실제로 쓰러졌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므로 공룡들이 돌아다니고 있었을 때(이 지점에서 이런 종류의 표현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가정하면) 인간들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룡은 결코 현존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명백히 도출된다.
인과적 의존성에 대한 잘못된 해석들을 피하기 위해 반실재론자들은 때때로 개념적 의존성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라는 칸트의 유명한 진술의 가능한 결과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이 문장은 두 가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1) '공룡'이라는 개념이 없다면 우리는 공룡을 보더라도 공룡을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2) '공룡'이라는 개념이 없다면 우리는 공룡을 보더라도 공룡을 보지 못할 것이다. 칸트를 옹호하는 경우에, 그는 (1)를 의미했다고 한다. 그런데 칸트가 (1)을 의미했었더라면, 그는 <<순수 이성 비판>>을 저술하지 못했었을 것이고,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 즉 과학론만 저술했었을 것이다. 칸트가 <<순수 이성 비판>>을 저술했다면, 그것은 그가 (2)를 의미했었기 때문이다. 개념이 경험 일반을 구성한다. 그래서 도식주의에 관한 장에서 칸트는 심지어 개의 도식도 제시하게 하는데, 그런 도식이 없다면 개는 기껏해야 본체적 현존을 영위할 것이라고 우리는 가정해야 한다. 그런데, 인과적 의존성이 선재성 논증에 의해 무효화된다면, 개념적 의존성은 다음과 같은 상호작용 논증에 의해 무효화된다. 지금 내가 엄청나게 오래 살았거나 부활된 공룡을 만난다면, 그것의 개념적 도식들이 나의 개념적 도식들과 매우 다를 개연성이 있더라도 나는 그것과 상호작용할 수 있다. '긍정성'에서 내가 전개하듯이,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그것들과 대단히 상이한 개념적 도식 및 지각적 장치들을 갖추고 있거나, 또는 전혀 갖추고 있지 않는 존재자들과 상호작용한다.
선재성 논증과 상호작용 논증을 피하기 위해 반실재론자들은 '표상적 의존성'을 언급하는데, 우리는 우주의 창조자가 아니라, 무정형의 질료로부터 시작하는 우주의 구성자이다. 여기에 현대 철학의 주류가 존재하는데, 내가 보여주었다고 희망하듯이, 그것은 허무주의도 아니고 유아론도 아니라 구성주의, 즉 실재는 저쪽에 존재하지만, 그것 자체는 무정형의 것, 쿠키를 위한 밀가루 반죽, 현상의 구성자가 되는 주체에 의해 주조되는 분화되지 않은 코라(chora)이다라는 관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만나는 세계와 사물들 자체는 현존은 부여받지만 독립성은 부여받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물들의 현존은 결코 부인당하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단언할 수 있게 만들고, 그래서 우리는 현상에만 접근할 수 있을 뿐이지 사물들 자체에는 결코 접근할 수 없다고 덧붙이게 된다. 결과적으로, 무언가를 물 자체로 간주하는 것은 철학의 견지에서 최소의 교양을 갖춘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소박성이다.
그러므로 세계의 개별적 현존은 인정받지만, 세계 자체는 어떤 구조적 및 형태적 자율성―적어도 우리는 알지 못한다―도 갖추고 있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 물 자체는 잠재적으로 매트릭스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표상적 의존성도 작동하지 않는 것으로 판명된다. 사실상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한편으로,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라는 낱말이 우리에 의존하고, 그래서 어떤 중대한 의존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면, 인과적 의존성(유일한 중대한 종류의 의존성이다)의 경우와 꼭 마찬가지로, 티나로사우루스의 존재가 인간들에 의존한다는 것인데, 티라노사우루스 렉스가 현존했을 때 우리가 현존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것은 작동하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공룡들이 존재했을 때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도출될 것이다. 이 지점에서 반실재론자들은 이렇게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당신은 사유에 독립적인 공류의 현존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그런데 대답은 단순할 것이다. '증명을 제시해야 하는 것은 바로 당신이다. 여기서 당신은 공룡의 사유에의 의존성, 즉 지금까지 당신이 행하지 못한 것을 증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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