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posts list

레이블이 사단칠정론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사단칠정론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4년 8월 30일 토요일

<리기선후>, 진래, 이종란 외 옮김, 주희의 철학, 예문서원, 2002.

리기선후 / 주희의 철학 - 진래 致知
2008/07/13 09:59
전용뷰어 보기
진래, 이종란 외 옮김, <리기선후>, <<주희의 철학>>, 예문서원, 2002.
리기선후
p. 28
19세에 진사가 되어 71세로 죽을 때까지, 주희는 리기선후를 포함하여 자신의 사상을 끊임없이 변화시키고 발전시켜 왔다... 주희가 리기 관계를 논할 때 종종 다른 문제, 다른 각도에서 출발하였다... 주희 학설의 이러한 객관적 정황을 고려해 볼 때, 주희의 사상을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시(역사적 변화)·공(다양한 단계와 다양한 각도)의 방법을 모두 동원하여 고찰하는 것이 필수적임을 알 수 있다.



1. <<태극해의>>에 나타난 리기 관계
p.30
진정한 의미의 본체론에서 리기 관계를 처음 밝힌 것은 <<태극해의>>이다... <<태극해의>>의 초고는 건도 경인년(1170) 주희 나이 41세 때에 씌여졌고... 계사년(1173)에 기본적인 원고가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태극해의>>는 주희가 주돈이의 <태극도>와 <태극도설>을 자세히 해석한 것이다. ... 
p.31
주희는 <<태극도설해>>에서 태극을 '형이상의 도'요, '동정음양의 리'라고 하였는데, 이는 그가 리로써 태극의 의미를 명확하게 규정하기 시작하였음을 말해준다. ...
p.32
주희는 태극을 리로, 음양을 기로 삼았기 때문에 리기 관계의 문제를 야기하였다... <<태극해의>>에 나타난 주요 사상은 체용이라는 각도에 따라 리기 관계를 이해한 본체론이다.
주희는 <태극도해>에서... 리는 본체이며 음양동정과 존재의 근거이고, 기의 동정은 리의 외재화 과정이요 표현임... 리는 기 속에 있으면서 기와 떨어질 수 없으나, 서로 섞일 수도 없는 본체인 것이다... '태극은 본체이고, 동정은 작용'... <<태극해의>>를 완성할 때에 이 구절을 수정하였으나, 태극이 본체라는 생각은 바꾸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주희가 당시 체용의 관점에서 태극과 음양동정의 관계를 해석하는 데 주된 관심을 보였음을 말해준다. 이는 실제로 위진 이래 중국 철학 및 불교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p.33
차지하던 유심주의 본체론의 관점이기도 하다.
철학의 기본 문제는 무엇이 제1성질인지를 해결하는 것이지,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나중이라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근본이고 무엇이 어떤 것의 형식을 결정하느냐로 제1성질과 제2성질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본체론'의 특징이다. ...
본체가 태극이고 음양동정은 리가 그것을 빌려서 표현하는 외재 과정이라는 말이다. 리와 기 모두 시간적으로 시작과 끝이 없고, 시종 섞이지도 분리되지도 않는다. 주희의 이 사상은 정이의 '체용일원'과 '음양무시'의 개념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이다... 상술한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주희는 리와 기 사이에는 선후가 없다고 보았다. ...
p.34
근거와 현상 세계는 체와 용, 본연지묘와 소승지기
p.35
의 관계이지, 결코 둘 사이에 선후 관계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
당시에 주희가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인성론과 본체론의 결합에 관한 문제였다. ...
주희가 <<태극해의>>에서 해결하고자 한 문제는 인성의 본체론적 기원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태극해의>>에서 음양동정의 유행 과정 속에서 태극과 음양은 '서로 떨어질 수도 섞일 수도 없음'을 밝혔다. 즉 음양의 기가 구체 사물을 구성한 후에도 태극은 여전히 음양 속에서 변화를 겪으며 사람과 사물의 성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무극의 眞(理)과 음양오행의 精(氣)이 결합하여 이루어지지 않은 사물이 없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인성이라는 말에는 위로부터 품부받은 천지의 理(太極)라는 뜻뿐만 아니라, 태극의 혼연한 전체가 보편적으로 모든 사물에 존재한다는 뜻이 동시에 담겨 있다. 이는 주희가 '성즉리'를 본체론적으로 새롭게 논증한 것이다.
p.36
이상에서 본 것처럼 이 시기 주희의 사상은 이른바 '리본체론'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으며, 이 설에 입각하여 리기선후 문제를 고찰할 때에만 리와 기에는 선후가 없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주희의 학설을 이원론으로 볼 수는 없으며, 유물론이라고 하는 것은 더더구나 적합하지 않다.
P案.. 주희 40대 초반의 이기에 관한 학설은 '리본체론'으로서, 리본체론이라 함은 리를 제1성,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것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리는 본체이며 기의 동정은 리의 외재화 과정이며, 이것은 리를 체로 기를 리의 용으로 파악한 것이다.
리와 기가 떨어져 있을 수 없다는 정리로부터 사람에게도 리가 부여되어 있다는 '성즉리'설이 합리화된다.
2. 태극에 대한 논변
p.40
순희 15년 무신년(1188), 당시 59세였던 주희는 나라의 명을 받고 5월말쯤 대궐에 들어갔다가 6월 중순에 수도 임안을 떠나 강서 옥산으로 돌아왔는데, 이 때 육구연의 편지를 받았다. ...
p.42
음양이 형이상에 속하느냐 아니면 형이하에 속하는냐 하는 문제를 놓고 음양을 다르게 이해한 데서 육구연과 주희의 주장이 갈린다. 육구연은 모든 대립 성질의 범주와 추상을 개괄하여 형이상의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주희는 정이의 설에 입각하여 '일음일양'
p.43
을 음양의 기가 한번 가고 한번 오는 것으로 이해하고, '일음일양지위도'와 '형이상자위지도, 형이하자위지기'를 대응시킴으로써 음양을 기로 보는 리기 철학을 형성하였다.  ...
육구연과 더불어 태극을 논하는 때에 이르러서는 태극이 음양 중에서 작용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음양의 밖에도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주희가 말한 무극이 곧 태극이요 태극에는 리가 있다. 리는 사물이 없던 때에도 존재하였고 사물이 생긴 후에도 있지 않은 적이
p.44
없으며, 음양의 밖에 있으면서 음양 중에서 행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 이것은 주희 자신이 리기선후설로써 주돈이를 해석한 것이다"(<<송원학안>> 권20)라고 한 황종희의 말 그대로이다. 주희의 이러한 사상이 바로 "리가 기에 앞서 있다"(理在氣先)는 것이다. ...
리가 기에 앞선다는 사상을 형성하게 된 시기를 논하려면... <<역하계몽>>을 반드시 살피고 넘어가야 한다. 순희 13년 병오년(1186), 주희 나이 57세 때에 완성된 <<역학계몽>>은 초학자들을 대상으로 주역상수를 설명한 책이다. ...
p.45
주희는 소옹의 加一倍法적 筮法說을 보충하여 흡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해석상에 있어서도 <태극도설>을 통일적으로 파악하고자 하였다. 즉 "상수가 형성되기 전에 리는 이미 갖추어져 있다", "양의가 나뉘기 전에 태극은 혼연히 존재해 있었고, 양의·사상·육십사괘의 이치가 이미 그 속에서 밝게 빛나고 있었다", "태극에서 양의가 나뉘어졌다" 등과 같이 상수 형식으로 표현된 말과, "사물이 생기기 전이나 생긴 후에도 있지 않음이 없었다", "음양의 밖에도 있고, 음양의 속에도 없었던 적이 없다", "도는 처음이 없는 것으로서 실제로는 만물의 근거가 된다"는 말은 사상적
p.46
으로 완전히 일치한다. 이렇게 주희의 상수 이론은 천지·음양·태극의 운행과 변화의 과정을 동시에 반영하고 있다. ...
p.47
상수 역학 사상은 철학 중에서도 우주발생론에 속한다. 소옹이 "괘를 그리기 전에 원래 역이 있었다"고 한 말은 천지 만물이 있기 이전에 이미 우주 원리가 존재해 있었고 태극으로부터 일체 사물이 생겨났다는 것을 뜻한다. "리가 기에 앞서 있다"는 주희 사상은 초년의 '본체론' 사상을 바탕으로 상수학의 우주론을 수용하여 한층 발전시킨 것으로 역학의 상수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만년에 이르러 주희는 다시 논리적으로 리가 기에 앞선다는 선재설을 언급함으로써 우주론의 여러 가지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피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주희가 죽고 난 후에 그의 문인들은 리기선후 사상에 모호한 점이 많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P案.. 주희 50대후반 60대초반의 이기론은, 육구연과의 태극논변과 상수역학의 영향으로 형성되었다. 육구연과의 논변을 통하여 리가 기에 앞선다는 리선기후설을 제창하였으며, 상수역학을 통해 리가 기를 낳는다는 생성론, 발생론적 입장을 취하게 된다. 이 시기의 리선기후란 리로부터 일체 사물이 생겨났다는 것을 뜻한다.
3. 리선기후
p.49
주희의 사상에 입각하여 본질상에서 말하면 태극이 천지에 앞서 있으며, 현존하는 세계의 측면에서 말하면 태극은 천지 만물 가운데 있다. ...
p.52
리기에 선후가 있는가 하는 문제는 본원론인가 구성론인가에 따라 각기 다른 해답을 갖게 된다. ...
p.53
본원상에서 주희는 '리가 기에 앞서 있음'을 말하였다. 그러나 그는 구성상으로는 리가 기에 앞서 있다고 하지 않고 '리기에는 선후가 없다'고 강조하였다. 만약 본원에 대한 논의를 구성에 대한 논의로 보고, 또 반대로 구성에 대한 논의를 본원에 대한 논의로 보면서 주희 철학을 시종일관 '리기무선후의 이원론'이라고 단정지어 말한다면 주희 사상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틀림없이 혼란에 빠지게 되고 만다. ...
p.54
구성상으로는 리기가 한 곳에 있으므로 나뉠 수 없지만, 리가 제1성이라는 각도에서는 '리가 기에 앞서 있다', '리가 사물에 앞서 있다'고 설명된다. ...
p.55
이상의 서술은 주희의 '리선기후' 사상이 한 시기에 크게 발전하였음을 보인 것이다. 초년의 본체론에서 나중에 우주론을 흡수하는 데 이른 것은 이론 사유 면에서 진일보한 것이다. 또 모든 철학적 문제와 마찬가지로 이론상으로 '리가 기에 선재한다'는 견해를 내는 데는 인식적 기초가 요구되는데, 그것은 일정한 철학 문제 처리에 대한 결과이며 이 문제는 리기 관계 속에 포함된 일반과 개별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떤 한 종류의 사물의 '리'는 그 사물의 보편적 본질 또는 법칙이 되는데, 그 리는 한 종류 사물 가운데 어떤 하나의 개별 사물이 사사로이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며 개별 사물의 발생과 소멸로 인해 전이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이미 있었던 한 종류의 사물의 리를 그런 종류 가운데 나중에 만들어진 사물에 대해 '리선물후'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법칙이 일반성을 가
p.56
지고 있다는 것을 표명한 것이다.
P案.. 발생론적 입장의 리선기후설에서도, 본원상에서 논하는 것인가 구성상에서 논하는 것인가를 구별해야 한다. 본원상에서는 발생론적 입장을 견지하므로 당연 리선기후이며, 구성상에서 논할 때는 리기가 나뉠 수 없으므로 리기무선후라고 말해야 한다.
4. 만년정론
p.57
'리의 선재를 미루어 말하는 방식'은... 주희 만년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p.58
주희의 이런 설명을 살펴보면 첫째, 리와 기는 실제상에서는 선후를 말할 수 없다. 둘째, 논리적으로 추론하여 올라가거나 그 소종래를 추론하면 리가 기에 선재한다고 할 수 있다... 풍우란은 그의 저서 <<중국철학사>>에서 이런 사상을 개괄하여 '논리적 선재'라고 하였는데 적합한 표현이다. 여기서 말하는 논리란 흔히 말하는 형식 논리가 아니라 이론상의 관계를 넓은 의미로 가리킨 것이다. 이미 실제적으로 리와 기에 선후가 없는데 어떤 것이 논리적으로 그것들의 선후를 관계짓는가? ...
리가 기에 선재한다는 것은 오늘이나 내일 같은 시간적 선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철학상에서 어떤 것이 제1성이 됨을 가리킨다. 주희는 그의 논리를 풀어서 말하기를 "만일 산하 대지가 모두 무
p.59
너져도 결국 리는 그 속에 있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설령 일체의 물질이 모두 소멸된다 해도 리는 변함없이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즉 기는 생멸할 수 있으나 리는 형이상의 것으로서 생멸이 없다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말하면, 리는 물질이 소멸하는 데 따라 함께 소멸하는 것이 아니며, 마땅히 물질이 아직 생산되지 않았을 때도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질이 소멸하고 산하 대지가 모두 무너진다는 데서 '만일'이란 논리적 가설일 뿐이라는 것이다. 주희는 물질이 소멸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인정하였지만 실제로 물질이 철저하게 소멸된다고 인식한 것은 아니었다. ...
초년기에는 주희가 리선기후설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동정무단', '음양무시'와 모순되지 않았다. 그러나 후에 "리가 기에 선재한다"고 주장하면서부터 '동정무단', '음양무시'와 논리적으로 충돌하게 되었다. ...
p.60
리가 기에 앞서 있다는 설과 음양무시의 개념이 모순이라는 것을 의식하였던 것... 이는 주희가 만년에 이르러 논리적 선재설로 향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주희는 리와 기에 시간적인 선후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양자간에 오늘이나 내일과 같은 시간적 개념과는 구별되는 선후를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예를 들어 "역시 선후가 있다", "요약하면 역시 먼저 리가 있다" 등과 같은 말은 시간적인 선후 관계를 나타낸 것이 아니다. 즉 이 둘 사이에 시간적인 선후는 없지만 그 지위가 나란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른바 선후가 있어야 한다는 말은 양자간에 선차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의 차별을 두기 위하여 한 말이다. 이로써 볼 때 논리적 선재설은 리로써 제1성을 삼은 정치한 유심주의적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p.62
"그 생기는 것을 논하면 함께 생기는 것이고 태극은 음양 속에서 그대로 존재한다. 단지 그 순서를 말하면 오직 실제의 리가 있어야 비로소 음양이 있다"고 한 데서의 '단지 그 순서를 말하자면'이라는 말은 이론상·논리상으로 말한 것이지 결코 사실상의 순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 ...
P案.. 주희의 만년정론 역시 본원상에서 논할 때와 구성상에서 논할 때를 구분하여야 한다. 본원상에서 논할 때는 '리선기후'이다. 그런데 이 리선기후는 발생론적 리선기후, 즉 리에서 만물이 파생한다는 의미는 리선기후가 아니다. 이것은 리가 선차적인 것이며, 본질적인 것이며, 제1성이라는 의미의 리선기후이다. 따라서 이 때의 선후는 시간적 선후가 아니라 지위가 동등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주희 40대의 리본체론적 입장을 다시 견지하는 데 이르게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구성상에서는 뭐.. 리기무선후이다.

횡적으로 볼 때 주희의 리기에 대해서는 선후로 토론할 것이 아니라 본원과 구성의 두 문제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 ...
p.63
종적으로 볼 때 주희의 리기선후 사상은 일대의 발전 과정을 거쳤다. 초년기에 주희는 리가 근본이라는 논의에서 출발하여 리기무선후를 주장하였다. 리가 기에 선재한다는 사상은 남강에 머문 후 진량과의 논변을 거쳐 육구연과의 태극 논변에 이르게 되면서 차츰 형성되어 갔다. 리가 기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 그 때의 '리선기후' 사상의 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주희 만년의 정론은 논리적 선재설이며 논리적 선재설은 다시 높은 수준의 본체론으로 돌아오는 사상이었으므로, 이것은 곧 부정의 부정이다... 그것은 본질상 리의 기에 대한 제일성의 지위를 다른 형식으로 확인한 것이었다.

성性-북송의 성설性說

성性-북송의 성설性說 致知
2010/07/23 20:03
전용뷰어 보기
고지마 쓰요시 지음, 신현승 옮김, <2. 성性- 1.북송北宋의 성설性說>, <<송학의 형성과 전개>>, 논형, 2004.

p.96
육구연은 생애의 대부분을 고향인 무주撫州에서 보냈다. 무주에서는 육구연보다 백 년 정도 이전에 북송을 대표하는 사상가를 배출하였는데, 그가 왕안석이다. 남송에 이르러 도학파를 중심으로 왕안석 비판의 풍조가 높아지고는 있었지만, 왕안석은 의연하게 문묘에 종사되었다. 그 존재가 얼마나 컸음을 느끼게 했던가는 왕안석 비판자인 주희가 <<주자어류朱子語類>> 속에서 빈번하게 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사실로부터도 역설적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또한 육구연에게 <형국왕문공사당기荊國王文公祠堂記>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다.(<<象山先生全集>> 권19) 이 문장이 쓰여진 것은 주희와 논쟁을 전개하고 있는 순희淳熙 15년(1188)의 일이었고, 그 문말文末의 표기는 <방인육모기邦人陸某記>로 되어있다.
육구연의 왕안석에 대한 평가는 호안국이나 주희에 비교해보면 상당히 부드러운 편이다. 그는 왕안석에 대해서 인격에 관련된 공격은 전혀 하지 않았다. 왕안석의 개혁의 잘못은 정치의 요체를 법으로 추구했다는 점에 있었다.
정치를 하는 것은 사람이고, 사람을 등용하는 것은 몸(身)에 의한다. 그 몸을 수양하는 것은 도道에 의하고, 도를 수양하는 것은 인仁에 의한
p.97
다. 인이란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은 정치의 근본이고 몸은 사람의 근본이며 마음은 몸의 근본이다. 근본을 정확히 하지 않고 말末에만 구애되어서는 말末조차 다스릴 수가 없게 된다.
마음을 핵심의 자리에 고정시킨 평소의 지론이 설명되고 있다. 순희 2년(1175)의 <경재기敬齋記>는 "옛날의 사람이 그 몸을 가家·국國·천하天下로 정확히 미치게 하였던 것은 그 본래의 마음(本心)을 잃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시작된다. 천자千字에 조금 못미치는 짧은 문장 속에 '심心'이라는 글자가 열세 번 등장하고 확실히 '심학'의 선언문의 취지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연보 13세 때의 조문에는 '우주야말로 내 마음, 내 마음이야말로 우주'라고 말한 것이 보이고, 육구연에게 있어서의 마음의 문제가 유소년기 때에 이미 깨달음의 단계에 도달한 것 같이 묘사를 하고 있다. 육구연은 마음의 학문(心學)이라고 하는 평가는 이미 일찍부터 정해져 있었다. 왕수인이 '성인의 학문은 심학이다'라고 해서 육구연을 재평가하고 스스로 그 계보를 이어 받은 자로서 자임했던 것도 뚜렷한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심학'의 대극에 위치한 '성리학性理學'자 주희도 심이라는 용어에 유달리 주의를 기울인 사상가였다. 단지 주희의 경우에는 장재張載의 '심心은 성性과 정情을 통합한 것'이라는 규정에 전면적으로 의거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의 문제는 항상 성이나 정의 구별을 둘러싼 의론과 불가분의 관계였다. 바로 그것이 일반적으로 심성론心性論이라고 일컬어지는 이유이다. 그리고 맹자의 성선설에도 전면적으로 의거하기 때문에 선善으로서의 성性이 어째서 그대로 발현되지 않고 이 세상에 악惡을 초래하는가라는 악의 기원을 논하는 것이 심성론에 요구되었다. 하지만 맹자의 성선설은 송대 이전에 결코 정론이었던 것은
p.98
아니다.




북송에서 맹자를 세상에 널리 알린 제일인자는 왕안석이었다. 그에게는 <원성原性>이라는 제목의 문장이 있는데(<<臨川先生文集>> 권68), 어떤 사람이 맹자孟子·순자荀子·양웅楊雄·한유韓愈의 성설이 서로 다른 이유를 질문하다고 하는 상정으로 시작되고 있다. 그 제명 및 그 첫머리부터가 한유의 동명同名의 문장(<<韓昌黎문집>> 권1)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한유는 맹자의 성선설, 순자의 성악설, 양웅의 선악이 뒤섞인 성설을 열거하고 자신의 견해로서 성삼품설性三品說을 제창하였다. 한유의 이 문장이나 <원도原道> 말미의 기슬에 의해 ... 북송에서는 공자의 뒤를 계승하는 대학자로서 이 네 사람의 이름을 내세우는 것이 통례였다. 왕안석의 <원성>에서도 질문자는 이 네 사람은 모두 '옛날에 도道를 갖추고 있던 어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주장이 다른 것은 어떠한 이유였을까라는 형태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것에 대해 왕안석은 자신이 의거하는 것은 공자의 주장뿐이라고 대답한 뒤, 네 사람의 주장에 각각 비판을 덧붙여 간다. 먼저 한유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오상五常을 성 그 자체로 간주하고 있는 점에서 잘못되어 있다. 성이란 이러한 오상의 '태극太極', 즉 근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고 오상과는 구별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음으로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을 한 쌍의 것으로서 받아들이고 어느 쪽이나 모두 선인가 악인가라는 성격규정을 성에 대해서 행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한다. 선악이 문제가 되는 것은 정의 위상 문제에 달려있는 것이고, 성 그 자체에는 선악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情 또는 습習의 위상을 성으로서 논하고 있다. 양웅의 주장도 성이 아니라 습에 관한 논의를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p.99
다. 그리고 공자가 "본성(性)은 서로 가까운 것이지만, 습관(習)이 서로를 멀어지게 한다"(<<論語>> 陽貨)라고 서술한 것이야말로 자신의 견해라고 한다. 즉 성에는 선험적인 시비是非나 선천적인 차이는 보이지 않고 그것들이 문제가 되는 것은 성이 원인이 되어 구체적인 형태로서 발현한 상태·단계라고 하는 것이다.
<성설性說>(<<臨川先生文集>> 권68)은 <원성>의 속편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의 내용을 갖추고, 공자의 위의 말과 상지上智·중인中人·하우下愚라고 하는 인간 유형과의 관계를 논하고 있다. 한유가 제시했던 바와 같은 성삼품설이란 결국 습관에 의해 나누어진 것이고, 하우라고 하더라도 선인善人이 될 소질은 갖추고 있는 것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성은 누구라고 선하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양맹楊孟>(<<臨川先生文集>> 권64)에서는 맹자와 양웅의 서로 다른 점을 개념의 내용규정이 서로 빗나가 있는 점에서 찾고 있다
맹자가 말하는 성이란 올바른 본성만을 가리키고 있다. 양웅이 말하는 성은 본성의 올바르지 않은 부분을 합쳐서 가리키고 있다. 양웅이 말하는 명命은 올바른 명만을 가리키고 있다. 맹자가 말하는 명은 명의 올바르지 않은 부분을 합쳐서 가리키고 있다. ... 지금의 학자들은 맹자 측에 가담해 있으면 양웅을 비판하고 양웅 측에 가담해 있으면 맹자를 비판한다. 그것은 문자의 표면만을 이해한 것뿐이고 거기에서 지시하는 내용을 이해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은 성이나 명의 도리道理를 분별하고 있다고 스스로 일컫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성정性情>(<<臨川先生文集>> 권67)에서도 세간에서 통설로 되어 있는 '성은 선하고 정은 악하다'고 하는 사고방식을 비판하고, 그것이 맹
p.100
자의 문장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에서 유래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맹자의 성선설이란 성이 무조건 언제나 선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에는 악으로 향하는 요소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고, 그렇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양웅도 사람의 성에는 선과 악이 뒤섞여 있다고 설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왕안석은 맹자의 주장을 기본적으로는 시인하고 그 자신의 해석에 맞추어서 양웅을 증거로 인용하는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결국 그의 견해에 의하면 맹자나 양웅도 말하려고 했던 것은 동일한 것이고, 그것은 공자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한다-결국은 왕안석 자신의 견해와도 일치한다. 다만 그 설명방법에 약간의 문제가 있어 정이라고 해야 할 것을 성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이해에 혼란을 초래하였다고 파악하는 방법이다.
북송에는 사마광에 의해 대표되는 맹자 비판세력이 존재하였다. 사마광에 의하면 공자의 교설은 명名을 바로잡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고 맹자는 그 가르침으로부터 이탈해 있다는 것이다. 그의 저서 <의맹疑孟>(<<增廣司馬溫公全集>> 권101) 속에서 사마광은 맹자의 고자告子에 대한 반론을 다시금 논박하고 있다. 고자가 물의 흐름에 비유하여 성에 본래는 선악이 없다는 것을 논한 것에 관해 그 비유는 중인中人에 관해서만 들어맞는 것뿐이고, 한편으로는 확실히 타고난 선인이 있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교도敎導할 방법이 없는 악인도 있으며, 맹자가 말하는 바와 같이 누구에게도 성선性善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마광은 기본적으로는 성삼품설을 주장하였다. 또한 소식은 <맹자변孟子辯>에서 성 그 자체에 선악은 없다고 서술하고 맹자의 주장을 비판하였다. 덧붙여 왕안석과 마찬가지로 <<주례>>에 근거하여 정치의 실현을 구상한 이구李覯는 <상어常語>에서 맹자가 춘추오패春秋五覇*의 업적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이 있는데,
(* 춘추오패: 중국 춘추시대에 가장 강대하여 한때의 패업을 이룬 다섯 사람의 제후. 곧 제 환공·진 문공·진 목공·송 양공·초 장왕, 또는 진 목공·송 양공 대신에 오 부차·월 구천을 넣기도 한다.)
p.101
그것은 공자의 의도에 반한다고 비난하고 있다(여윤문余允文의 <<존맹변尊孟辯>>에 의거함).
그 중에서 왕안석은 맹자의 옹호파이고, 그는 맹자의 성선설을 완벽하다고는 말하지 않더라도 기본적으로는 수긍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에서의 맹자 성선설의 현창顯彰은 정호·정이에서 시작되는 도학계 학자들의 것과 공통의 기반 위에 서 있는 것이었다.
왕안석은 개혁의 일환으로서 과거의 시험과목을 변경하여 당대唐代 이래로 중시되어 오던 시부詩賦를 시험과목에서 제외하고, 그 대신에 책策(시사문제에 관한 대책)과 논論(역사 비평)을 중시하였다. 경학에 관해서는 경문·주석의 암기가 아니라 내용의 이해를 묻고 그 자신이 '단란조보斷爛朝報'**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했다고 하는 <<춘추>>를 빼버리고, 그 대신에 <<주례>>를 넣은 오경五經을 '본경本經'이라고 부르고 이 중에서 선택하게 한 것 이외에, '겸경兼經'이라는 명칭 하에 <<논어>>와 <<맹자>>를 모두 과거의 필수과목으로 삼았다. 결국 <<맹자>>는 이러한 계기를 시작으로 하여 경서로서의 취급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과거시험의 개혁에 관해서는 도학계의 인사들도 <<주례>>를 <<춘추>>로 돌려버렸다는 것 이외에는 왕안석의 개혁을 기본적으로는 답습하였다. 이러한 신학 및 도학의 맹자 현창에 의해, 예를 들면 남송 말 진진손陳振孫의 <<직재서록해제直齋書錄解題>>에서 <<맹자>>는 자子가 아니라 경經으로 분류되고 <경록經錄>에 <어맹류語孟類>로서 <<논어>>와 병칭되기에 이른다.
(**단란조보: 여러 조각이 난 조정의 기록이란 뜻. 왕안석이 <<춘추>>를 헐뜯으며 한 말. 왕안석은 처음에 스스로 춘추를 주해하여 천하에 펴려고 했으나, 이미 손신로孫莘老의 <<춘추경해春秋經解>>가 나왔고, 그와 견줄 수가 없음을 깨닫고 마침내 춘추를 헐뜯어 이를 폐하고, '이것은 단란조보'라고 한 고사.)
이보다 먼저 경덕景德 2년(1005)에 칙명에 의한 사업으로서 당의 <<오경정의五經正義>>를 증보하는 형태로 소疏가 간행되었는데, 그것은 전부 열두 개의 경서로 이루어져 있었다-경학상 엄밀하게 말하면 춘추삼전은 철저하게 전이고 경은 아니지만, 여기에서는 다른 것과 똑같이
p.102
경서라고 부르기로 한다. 즉 <<오경정의>>의 다섯 가지 서적-<<주역>>, <<상서>>, <<시경>>, <<예기>>, <<춘추좌씨전>>-과 <<주례>>, <<의례>>,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 <<효경>>, <<논어>>, <<이아爾雅>>이다. 여기에 <<맹자>>가 덧붙여지면 오늘날 우리들이 통상적으로 불러서 익숙해져 있는 <<십상경주소十三經注疏>>가 갖추어지는 것이지만, 이 시점에서 <<맹자>>는 아직 경서라고 간주되고 있지는 않았다. <<심상경주소>>에 들어 있는 <<맹자>>의 소疏는 경덕의 사업에 참가한 학자의 한 사람인 손석孫奭의 이름을 위에 붙이고 있지만, 이미 주희가 지적한 바와 같이 남송 초기의 사람에 의한 위작이다.
서적 목록에서도 조공무晁公武의 <<군재독서지郡齋讀書志>>나 <<송사宋史>> 예문지藝文志에서는 여전히 경부經部가 아니라 자부子部에 들어가 있다. ...
신학이든 도학이든 맹자를 현창하는 최대의 이유는 인의를 사람의 본성이라고 하는 소위 성선설에 달려 있었다. 당시 왕성하게 논의되었던 성론性論 속에서 그들은 맹자의 주장을 근거로 삼았던 것이다. 그때 필연적으로 본성과 마음의 관계를 논의의 과정 속에 포함시키게 되었다. <<맹자>>에 자주 나오는 마음에 관한 발언, 그리고 "그 마음을 다하는 자는 그 본성을 안다. 그 본성을 알면 하늘을 알게 된다"로 시작되는 진심편盡心篇 첫 장의 논리 등이 초점이 된다.
<<하남정씨유서河南程氏遺書>> 권1에 수록되어 있는 정호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주희에 의해 <<근사록近思錄>> 권1에 재차 수록되어 있다.
태어난 그대로를 본성(性)이라 한다. 본성은 곧 기氣이며, 기는 곧 본성
p.103
으로 이것을 생生-태어난 그대로-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태어나면 기품이 있고 도리(理)에는 선과 악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본성의 안에 본래부터 선과 악이 있는 것이고, 서로 대립하여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선한 사람이 있고, 어릴 때부터 악한 사람도 있다. 이것은 사람에게 기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선은 물론 본성이지만 악도 또한 본성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여기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정호의 주장이 뒤에서 서술할 정이·주희의 그것과는 그 취지를 달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기품 이전의 본성 그 자체에 관해서는 이것을 선인가 악인가로 논할 수 없다는 견해를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왕안석과 일치하기는커녕 여윤문余允文에 의해 맹자 비판파로 분류되고 있는 소식의 주장과도 아주 닮아 있다. 본성이란 사람의 태어난 그대로의 것이라는 표현은 실제로는 맹자의 논적인 고자告子의 논법이었다. 본성을 선악을 뛰어넘는 차원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이러한 사고 방식은 지금부터 살펴보는 바와 같이 도학계열에서는 호굉의 <<지언知言>>이나 장구성張九成의 <<맹자전孟子傳>>으로 계승되고, 이윽고 양명학陽明學의 무선무악론無善無惡論에서 그 면모를 일신하여 부활하게 된다.
그것은 주희의 용어를 가지고 설명하면 그들이 본성(性)이라는 개념을 <<중용>>에서 말하는 바대로 미발未發 단계에서의 마음 상태로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미발의 성에 대하여 이발已發 단계의 상태는 정이라고 불린다. 정호는 그것을 기氣에 의한 것으로서 설명하였다. 왕안석이든지 정호이든지 간에 윤리적인 의미에서의 선악은 이 단계에서 밖에 사용할 수 없는 말이라고 생각하였다. 뒤에서 서술하겠지만 주희 자신은 이러한 방식으로 성과 정을 구별하고 있다. 그리고 주희 이후에도 왕안석이 부정했던 바의 성선정악설性善情惡說에 대한 약간의 수
p.104
정이 한때 널리 퍼지기도 하였다. 이것은 그렇게 파악하는 방법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쉬웠고, 바꾸어 말하면 그들의 생활감각에 익숙해지기도 쉬운 도식이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다만 마음에 관하여 호굉 등이 이발이 단계에, 장구성 등이 미발의 단계에 귀착시키는 것에 대하여 주희는 장재의 주장에 근거하여 새로운 심성론을 이른바 주자정론朱子定論으로서 주장하게 된다. 

사단칠정 논변의 배경 - 김기현

사단칠정 논변의 배경 - 김기현 致知
2008/09/24 17:45
전용뷰어 보기
김기현, <<조선조를 뒤흔든 논쟁>> 상, 길, 2000.
사단칠정 논변의 배경 이해
p.50
사단칠정 논변이 꼭 그 시점에서 꼭 그 네 사람에 의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적 필연성'은 없다. 다만 1) 어떠한 논제의 형태를 띠든 간에 주자학 해석상의 논란은 언젠가는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있다는 '학술상의 필연성'은 있으며, 또한 2) 사칠 논변이 순수하게 학술적 차원에서 순조롭게 진행되고 그 내용이 당시의 지식인층에 주된 관심사로 받아들여지게 된 '정치·학술적 배경'은 있다... 여기서는 2)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훈구파의 독점시대
불교를 국가이념으로 삼았던 고려왕조가 고려 중엽 이래 사회 여건의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점차 그 내부의 문제점들과 국정 운영상의 무능함을 드러내던 시기에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유학을 받아들인 고려의 유교계는 이 신유학에 의거하여 당시의 무능하고 부패한 고려사회를 개혁하려는 포부를 다져간다... 이성계 장군이 위화도 회군으로
p.51
쿠데타를 성공시키고 새로운 왕조 조선을 건립하면서 유교계는 두 진영으로 나뉜다. 한쪽은 새 왕조에의 참여를 긍정하는 유학자들, 그리고 기존의 거물급 유학자들을 어떻게든 이 대열에 끌어들이려는 세력으로 구성된다... 한편 다른 쪽엔 이른바 '불사이군'의 절의를 내세우며 신정권에의 참여를 사양하던 유학자들이 있었다. ...
p.52
불사이군의 절의를 존중하던 진영의 유학자들은 이 사건(정포은은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 의해 선죽교에서 최후를 맞음)으로 중앙을 완전히 떠나 뿔뿔히 산림으로 흩어진다. 중앙에 남은 유학자들은 참여파의 학자들뿐이고, 이들에 의해 조선의 건국이념, 제도의 정비 등 건국 사업이 착실하게 진행되어 간다. 이들이 조선 전기의 관학파 학자들이고 훈구세력이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이래 15세기 중반까지는 관학파가 중앙 정계와 학계를 독점하는 구조가 그대로 유지된다.
신진 사림세력의 중앙 진출과 사화
시간이 갈수록 비대해지고 능수능란해지는 훈구세력에 대해 왕실 쪽에서는 이들을 견제할 세력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잘 살펴보니 이미 저절로 커있는 세력이 있지 않은
p.53
가! 바로 향촌사회에 파묻힌 고려말 절의파 계열 학자들의 맥을 이어온 산림의 유학자들이다. 더욱이 이들은 엄격한 도덕주의로 정신무장을 하고 있어 개혁 작업에 안성맞춤인데다 같은 주자학파의 학자들이므로 훈구대신의 견제에도 적격이었으며, 게다가 15세기 중반 이후로는 이들이 중앙 정계에 직접 참여하여 지식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해보려는 의향을 분명하게 내비치곤 했으니, 왕실 쪽에서는 이보다 더 반가운 일이 있을 수 없었다.
당시 산림 유학자들의 특징은 성리학의 이론 방면에 소극적이고 <<소학>>을 중심으로 실천을 지극히 중시하는 데 있었다. 이들에게 '실천'이란 1차적으로는 일상생활 중의 도덕적 삶을 의미하고, 2차적으로는 사회의 경세 방면에서 이상적 정치를 추구하는 '지치주의'가 된다... 점차 중앙 정계에의 참여를 희구하던 산림 주자학 세력의 의향과 훈구세력에 대한 왕실의 견제 정책이 맞아떨어져 성종(1469~1494 재위) 때부터 본격적으로 산림 도학자들의 중앙 정계 진출이 시도된다. 그러나 정치 고단자들인 훈구세력이 이들 '굴러온 돌들'을 그냥 놔둘 리는 없다. '박힌 돌들'인 훈구세력이 '굴러온 돌들'인 이들 신진 사림 세력을 밀쳐내기 위해 공작을 벌여 일어난 사건이 바로 '사화'이다. ...
p.54
보통 '4대 사화'가 거론된다. 1498년 무오사화와 1519년의 기묘사화 때는 전적으로 사림파 학자들만 일망타진된 사화였고, 두 번째 사화인 1504년의 갑자사화와 네 번째 사화인 1545년의 을사사화 때는 훈구세력 내부의 갈등이 주된 원인이어서 그쪽 학자들이 많이 다쳤으나 이에 부수된 사림의 피해 역시 막심했다.
이 피비린내 나는 정치적 통과의례를 지나 사림세력은 15세기 중반을 거치면서 결국 중앙 정계를 완전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깊은 상처를 입어 후유증을 앓고 있는 상태였다. 가장 큰 상처는 정암 조광조가 38세의 나이로 사형당했던 1519년의 기묘사화 때 입었다... 조선 유학계에 가장 큰 상처를 입힌 이 사건으로 사림세력은 일대 좌절을 맛본다. 이 사건의 후유증은 매우 오래 갔다.
성리학의 이론 탐구에 비중을 두는 신사조
여기서 논란이 될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있다. 16세기 중반의 사림세력은 내면으로는 사화의 후유증에 마음고생을 하고 있었지만, 현실 사회 면에서는 사림세력이 중앙의 주도권을 장악해가고 있었다. 이때 성리학계가 보여준 두드러진 변화는 갈수록 성리학
p.55
의 이론 탐구에 가치를 부여한 점이다. 이것이 1) '개인의 도덕행과 지치주의의 실행을 추구하던 주자학'이 이러한 좌절을 겪으면서 체념의 선상에서 '방향 선회'를 한 것인가, 아니면 2) 개인의 도덕행과 사회에 대한 지치주의의 신념에는 변함이 없으나 다만 일련의 경험에 의해 또는 이론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 '보완'의 차원에서 주자철학의 이론 측면을 '확대·강화'시킨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1)의 관점이 우세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2)의 관점을 지지한다. 그 근거로는, 퇴계의 <<성학십도>>와 율곡의 <<성학집요>>를 보면 사림 학자들의 지치주의의 신념에 달라진 게 거의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기묘사화 때까지의 지치주의가, 외람된 표현이지만, 거의 '저돌적'이었다면, 그 이후에 추진된 지치주의는 속도를 조절해가고 상황을 보아 가며 추진하였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중앙 정계 진출을 시도한 이래 지치주의를 표방했던 사림파 주자학자들의 유학 사조는 사단칠정 논변의 시기를 거치면서 성리학 이론에 대한 논의가 대폭 강화되어 본격적인 성리학 시대의 문을 열게 된다.
고려말 이래 향촌사회의 지도층 지위를 유지하면서 학문의 연마와 후학의 양성에 전념하던 절의파 주자학자들은 15세기 후반의 성종대부터 중앙 정계 진출을 기도하였고 이때 표방한 것이 조선사회를 이상사회로 만들어보겠다는 지치주의였다. 이때까지의 사림파 주자학자들은 성리학의 이론 탐구를 경시하였고, 사실상 무시하였다. 사단칠정 논변을 거치면서 조선의 주자학계는 성리학의 이론 탐구에 적극적인 태도를 갖는 사조로 완전히 바뀌었고, 이 사조는 그 후 조선조 내내 유지된다.
또한 기득권 세력이었던 훈구세력이 제거되고 사림파가 중앙을
p.56
장악한 바로 직후 이 사칠 논변이 이론 면에서의 계기가 되어 사림세력은 안정적인 양대 진영을 형성하게 된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으로서는 사림 내부에서 일어난 정치상의 의견 차이가 발단이 되기는 하였지만,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의 기틀이 잡히기 시작한 것은 사단칠정에 관한 두 해석이 분명해지면서부터였다. 사단칠정 논변이 일어난 시대적 배경과 그 의의는 이상과 같다.

인물성동이논쟁-인간과 만물의 차별성에 대한 검토

인물성동이논쟁-인간과 만물의 차별성에 대한 검토 致知
2010/03/19 18:06
전용뷰어 보기
김형찬, '인물성동이논쟁-인간과 만물의 차별성에 대한 검토', "논쟁으로 보는 한국철학", 예문서원, 1995.


1. 논쟁의 발단과 배경

p.205
성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우주 만물의 발생과 변화는 리와 기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진다. 조선 초부터 인간의 성정에 관심을 기울이고 심성의 올바른 발현을 통해 성리학적 이상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던 조선 성리학자들은 인간의 성정이 우주만물 사이에서 어떻게 구성되고 현실 속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관해 이미 깊은 탐구를 해 왔다. 우리는 그 대표적인 성과를 사단칠정 논쟁이라 부른다. 인간만이 만물의 영장으로서 다른 동물들과 달리 사회 규범을 가지고 이를 실천해 나갈 수 있다고 할 때, 이제 시야를 인간의 성정에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 쪽으로 확장시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자연스런 일이라 할 수 있다. ...
p.206
인간이 왜 동물과 같지 않은가 하는 문제를 둘러싼 일반적 관심이라면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비롯한 성리학자 대부분의 글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인성과 물성의 차이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관심은 사계 김장생, 우담 정시한, 외암 이식, 농암 김창협 등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아무래도 본격적인 논의의 시작은 수암 권상하의 문하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권상하는 이이-김장생-송시열의 뒤를 이어 기호 학파의 맥을 계승하는 사람이다. 그 문하에는 인물성동이 논쟁의 주인공이 되는 외암 이간과 남당 한원진이 있었다. 한원진은 1705년 지은 '시동지설示同志說'에서 인물성론에 관해 이미 상당히 정리된 입장을 밝히고 있고, 이간은 1709년 최성중에게 보내는 편지('與崔成仲')에서 오상과 미발의 관한 논의를 한 바 있다. 즉 1712년에 본격적인 논쟁을 벌이기 이전에 이미 이들은 자기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토론은 1712년 이간이 스승 권상하에게 미발 상태의 순선 문제를 제기하면서 시작된다.
처음에 권상하는 이간의 설에 수긍하였으나, 한원진이 자기의 의견을 설명하자 이번에는 한원진의 설을 인정하였다. 그러자 이간은 스승 권상하에게 편지를 보내 스승과 한원진의 설에 이의를 제기하였고, 한원진은 스승을 대변해서 다시 이간을 반박함으로써 이들 둘 사이의 논쟁은 본격화되었다. 이간은 '리통기국변'(1713), '미발유선악변'(1713), '미발변'(1714), '오상변'(1714)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발변후설'(1719)을 썼다. 그리고 한원진은 '부미발오
p.207
상변'(1715), '부기질지성변증'(1715) 등을 쓰고, 1724년에는 이간이 권상하에게 보낸 편지에 대한 종합적인 변론을 담아 '이공거상사문서변'을 지어 자신의 입장을 마무리하였다.
이들의 논쟁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집단적 논쟁의 성격을 띠면서 조선조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이간이나 한원진은 모두 권상하의 문인들로서 기호지방(충청도)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후 이간의 설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주로 농암 김창협과 삼연 김창흡 계열을 잇는 기원 어유봉, 도암 이재, 여호 박필주 등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서울에 사는 노론 낙론 계열이었으므로 이들의 이론을 낙론洛論(洛下, 즉 서울 부근)이라고도 한다. 한편 권상하와 한원진의 이론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병계 윤봉구, 매봉 최징후, 봉암 채지홍 등 주로 충청도 근방에 살았기 때문에 호론湖論(湖西, 즉 충청도)이라고도 한다. 이 때문에 이들 사이의 논쟁은 '인물성동이론'이라는 명칭 이외에 '호락논쟁'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2. 논쟁의 전개

1. 성 개념의 다의성

성리학에서의 성이란 인간 또는 사물 안에 내재된 리를 가리킨다. 성은 구성상으로는 '기 안의 리'(氣中之理)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p.208
보는 관점에 따라 두 가지 이상의 함의를 지닌다. 동론同論을 주장하는 측과 이론異論을 주장하는 측이 이용하는 논거를 살펴보면 이러한 사실이 명확히 드러난다.
이간은 "중용"의 '천명지위성'에 대한 주희의 주석을 동론의 근거로 든다. 주희의 주석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명命은 령令과 같고, 성性은 곧 리理이다. 하늘이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써 만물을 화생化生하게 함에, 기氣로써 형태를 이룰 때에 리理 역시 부여되니 마치 명령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사람과 사물이 생겨날 때에는 각기 부여된 리를 얻어 건순오상健順五常의 덕德으로 삼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성性이다. ("中庸章句", '天命之謂性'의 朱子註: 命, 猶令也. 性, 卽理也. 天以陰陽五行, 化生萬物, 氣以成形而理亦賦焉, 猶命令也. 於是, 人物之生, 因各得其所賦之理, 以爲健順五常之德, 所謂性也.)
만물이 모두 리를 부여받아 기로써 형태를 이루고, 이 때 각기 부여된 리가 곧 성이 되므로, 인간을 포함하는 만물의 성이 근본적으로 같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원진은 "맹자집주"와 "대학혹문"에서 나오는 주희의 글을 논거로 사용한다. "맹자집주"에서 주희가 주장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사람과 사물이 생겨남에 성性이 없을 수도 없고 기氣가 없을 수도 없다. 그러나 기氣로써 말하면 지각 운동에서는 인간과 사물에 다름이 없는 듯 할지라도, 리理로써 말하면 사물이 어찌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온전하게 받았겠는가? 이것이 인간의 성性이 선하며 만물의 영장이 된 까닭이다. ("孟子集註", '告子上', 3장의 朱子註: 人物之生, 莫不有是性, 亦莫不有是氣. 然以氣言之, 則知覺運動, 人與物, 若不異也. 以理言之, 則仁義禮智之稟, 豈物之所得而全哉. 此人之性, 所以無不善而爲萬物之靈也.)
p.209
기에는 차이가 없지만 품부받는 리가 다르기 때문에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된다고 하니 인물성 이론의 논거가 될 만하다. 주희는 "대학혹문"에서 또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사람과 사물이 생겨남에 반드시 리理를 얻은 다음에 건순인의예지健順仁義禮智의 성性을 이루게 되고, 반드시 기氣를 얻은 다음에 혼백 오장 백해의 신체를 이루게 된다. ... 그런데 그 리理로써 말하면 만물의 근원은 하나이므로 참으로 사람과 사물은 귀천의 차이가 없다. 그러나 그 기氣로써 말하면 기氣의 바르고 통한 것을 얻으면 사람이 되고 그 치우치고 막힌 것을 얻으면 사물이 된다. 그러므로 귀천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大學或問", '經一章': 人物之生必得是理, 然後有以爲健順仁義禮智之性; 必得是氣, 然後有以爲魂魄五臟百骸之身. ... 然以其理而言之, 則萬物一原, 固無人物貴賤之殊; 以其氣而言之, 則得其正且通者爲人, 得其偏且塞者爲物, 是以或貴或賤而不能齊也.)
여기서도 사람과 사물의 차이를 말하고 있기는 하나, 이번에는 리는 동일하지만 기에 차이가 나기 때문에 사람과 사물의 다름이 생긴다고 한다. "중용"의 주석에 따르면 사람과 사물이 모두 천으로부터 리를 부여받아 성으로 삼기 때문에 사람과 사물의 성이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맹자집주"에 따르면 부여받은 리의 차이에 의하여, "대학혹문"에 따르면 기의 차이에 의하여 사람과 사물이 달라진다. 성이란 리가 기와 결합된 경우를 말하므로 리의 차이에 의한 것이든, 기의 차이에 의한 것이든 기와 결합된 리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리와 성의 개념을 다중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주희의 혼용이 문
p.210
제된다. 만물 생성과 변화의 원리라는 의미에서 리는 우주 전체에 관통하고 있고, 그러한 의미에서는 개체 내의 리인 성도 동일하다. 그러나 각종의 사물이 유적類的 특성을 이루게 하고, 또한 각각의 개체이도록 하는 원리를 성이라 할 때 이 성은 사람과 사물에서, 나아가 각각의 개체에서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그 차이의 원인을 기라고 하든 리라고 하든 그것은 그 다음의 문제이다. 이러한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된 성 개념을 사용하는 한 인물성동이 논쟁의 전개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성을 보는 관점에 따라 본원적인 리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고, 각 부류의 유 개념 또는 개별적 특성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는 것은, 이 논쟁에 참여하는 성리학자들도 이미 염두에 두고 있었다. 문제는 그 중 어느 관점을 택하며, 굳이 그 관점을 택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있다. 한원진은 성삼층설性三層說로 이를 해명하려 한다.
 리는 본래 하나이다. 그런데 형기를 초월하여(超形氣) 말한 것이 있고, 기질에 인하여(因氣質) 말한 것이 있고, 기질을 섞어서(雜氣質) 말한 것이 있다. 형기를 초월하여 말하면 태극이라는 이름이 이것으로, 만물의 리가 동일하다. 기질로 인하여 이름하면 건순 오상의 이름이 이것으로, 사람과 사물의 성이 같지 않다. 기질을 섞어서 말하면 선악의 성이 이것으로 사람과 사람, 사물과 사물의 성이 또한 같지 않다. ("
南塘集" 권11, '擬答李公擧': 理本一也。而有以超形氣而言者。有以因氣質而名者。有以雜氣質而言者。超形氣而言。則太極之稱是也。而萬物之理同矣。因氣質而名。則健順五常之名是也。而人物之性不同矣。雜氣質而言。則善惡之性是也。而人人物物又不同矣。)
기질을 초월하여 말할 때는 만물의 리가 동일하고, 기질과 같이 있는 것
p. 211
으로서의 리인 성을 말하자면 사람과 사물의 성이 다르며, 기질과 섞여 있는 것으로서 말하자면 모든 개체의 성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
한편 이간은 '일원一原'과 '이체異體'라는 개념으로 이를 설명한다.
일원으로 말하면, 천명 오상이 모두 형기를 초월할 수 있으므로 사람과 사물에 치우침과 온전함의 다름이 없다. 이것이 이른바 본연지성이다. 이체로 말하면, 천명 오상이 모두 기질로 인하여 영향을 받을 수 있으므로 사람과 사물 사이에 치우침과 온전함의 다름이 있을 뿐 아니라, 성인과 범인 사이에도 천차만별이 있다. 따라서 치우친 곳에서는 성명性命도 함께 치우치고 온전한 곳에서는 성명도 함께 온전하다. 이것이 이른바 기질지성이다. ("巍巖遺稿" 권7, '答韓德昭別紙': 以一原言。則天命五常。俱可超形器。而人與物無偏全之殊。是所謂本然之性也。以異體言。則天命五常。俱可因氣質。而不獨人與物有偏全。聖與凡之間。又是千階萬級。而偏處性命俱偏。全處性命俱全。是所謂 氣質之性也。)
근원으로 말하자면 만물에 다름이 있을 수 없고, 기질에 구애됨으로 말하자면 사람과 사물이 다를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두 사람 다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음을 인정하므로 결국 논쟁의 쟁점은 어느 관점을 위주로 보아야 하는가에 있다. 이간은 '일원一原'의 관점을 택한다. 
본연이든 기질이든 성은 단지 리일 뿐이다. ... 성을 말하는 자리에서 그것을 리로 바꿀 수 없고, 리를 말하는 자리에서 그것을 성으로 해석할 수 없다고 한다면, 나의 미천한 견해가 미칠 바가 아니다. ("巍巖遺稿" 권7, '答韓德昭別紙': 本然氣質之間。性只是此理也。... 言性處。不可以理易之。言理處。不可以性釋之。則非鄙見之所及矣。)
p.212
성은 곧 리이므로 일원의 관점을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한원진은 성을 기와 결합된 리라고 보면서 '인기질因氣質'의 관점을 택하여 인성과 물성이 서로 다름을 주장한다.
성을 말하는 자리에서는 진실로 그것을 리로 바꿀 수 있고, 리를 말하는 자리에서도 또한 그것을 성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성과 리 두 글자를 함께 대비한다면 리가 같고 성이 다름은 분명하다. ("南塘集" 권11, '擬答李公擧': 言性處固可以理易之。言理處亦可以性釋之。然以性理二字。幷擧對言。則理同而性異。不可不辨也。)
리는 기와 상대되는 것이고 성은 기와 결합된 리(氣中之理)이므로 우주의 보편 원리로서의 리와 개별성 또는 유개념으로서의 성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 리통기국理通氣局의 이중성

서로의 관점을 인정하면서도 의견의 대립을 이루는 양측이 공통으로 이용하는 또 하나의 논거가 있다. 그것은 이이의 리통기국설이다. ...
이이는 자신의 리통기국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리통기국은 본체 위에서 말해야 하며, 또한 본체를 떠나서는 따로 유행을 구할 수도 없다. 사람의 성이 사물의 성이 아님은 기氣의 국한됨이요, 사람의 리가 곧 사물의 리임은 리의 통함이다. 모나고 둥근 그릇은 다르나 그릇 안의 물은 동일하고, 크고 작은 병은 다르나 병 안의 공기는 동일하다. 기의 하나의 근본이란 리의 통함 때문이고, 리의 만가지로 다름은 기의 국한됨 때문이다. 본체 가운데 유행이 갖추어져 있고, 유행 가운데 본체가 있다. 이로써 생각해보면 리통기국의 설이 과연 한부분에 떨어지겠는가? ("栗谷全書", 권10, '與成浩原': 理通氣局。要自本體上說出。亦不可離了本體。別求流行也。人之性非物之性者。氣之局也。人之理卽物之理者。理之通也。方圓之器不同。而器中之水一也。大小之瓶不同。而瓶中之空一也。氣之一本者。理之通故也。理之萬殊者。氣之局故也。本體之中。流行具焉。流行之中。本體存焉。由是推之。理通氣局之說。果落一邊乎。)
p.213
이이의 리통기국설은 리의 무형무위無形無爲한 특성과 기의 유형유위有形有爲한 특성에 기초하여 리기의 불상잡 불상리한 구성 관계를 리일분수의 체계로 설명하고자 한 것이었다. 리통에 의하면 사람과 사물의 리가 동일하고, 기국에 의하면 사람과 사물의 성이 다를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물과 사물 사이의 성도 다르다. 따라서 리통에 따르면 인물성동론을 지지하게 되고, 기국에 따르면 인물성이론을 지지하게 된다. ... 그런데 논쟁의 양측은 이것을 받아들이는 관점이 서로 다르다.
율곡에 따르면 천지만물은 기의 국한됨이고, 천지만물의 리는 리의 통함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리의 통함이라는 것은 기의 국한됨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만 오히려 기의 국한됨에 나아가서 그 본체를 가리키면서도 기와 섞지 않고 말하는 것이다. ("巍巖遺稿" 권12, '理通氣局辨': 盖栗谷之意。天地萬物。氣局也。天地萬物之理。理通也。而所謂理通者。非有以離乎氣局也。卽氣局而指其本體。不襍乎氣局而爲言耳。)
p.214
이간은 일원과 이체의 구분 가운데 일원의 입장에서 리통을 이해한다. 성은 기중지리이지만 리의 온전한 성질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것이므로 기와 섞지 않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원진은 통과 국을 각각 리와 성에 대비시킨다.
대개 단지 성자만 말하면 통함과 국한됨은 모두 성이고, 단지 리자만 말하면 통함과 국한됨은 모두 리이다. 성과 리를 상대하여 말하면 통함은 리이고 국한됨은 성이다. 성과 리가 비록 단 하나의 리일 뿐이지만 성이라고도 하고 리라고도 하는 것은 쓰이는 곳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미 리자가 있는데 또 성자가 있는 까닭이다. ("南塘集" 권28, '李公擧上師門書辨': 盖單言性字則通局皆性也。單言理字則通局皆理也。以性與理對言。則通爲理而局爲性。性也理也。雖只一理。曰性曰理。用處不同。此所以旣有理字而又有性字也。)
성을 리가 기와 결합되어 변화된 것으로 보는 한원진은 초형기로서의 리와 인기질로서의 성을 각각 리통과 기국에 대비시키는 것이다.

3. 본연지성과 기질지성

이러한 견해 차이는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에 대한 이해에서도 또한 나타나다.
아직 발하기 전에 리가 기 가운데 있을 때 리만을 가리키면 본연지성이고, 기를 함께 가리키면 기질지성이다. 아마도 바꿀 수 없는 이론일 것이다. ("南塘集" 권11, '附未發氣質辨圖說': 未發之前。理具氣中。單指理爲本然之性。兼指氣爲氣質之性者。恐是不易之論也。)
p.215
한원진은 현상계의 인간과 사물에서 리만 가리킨 것이 본연지성, 리기를 함께 가리킨 것이 기질지성이라 하고, 인기질의 관점에서 기질지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에 대해 이간은 '리기동실理氣同實', '심성일치心性一致'의 입장, 즉 리기를 분리해서 지적할 수 없고, 심心을 두고 성性만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심은 바르지 않을지라도 성은 스스로 중을 지킬 수 있고, 기는 순조롭지 않을지라도 리는 스스로 조화를 이룰 수 있다니, 천하에 이런 것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선만을 가리킨 것은 기器와 분리하는 것이니, 사람의 경우에는 반드시 리기동실理氣同實 심성일치心性一致인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야 한다. ... 심은 둘이 아니다. 그러나 구속됨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두 가지로 지적한다면 이른바 대본지성이란 그 본연지심에 나아가 그것만 가리킨 것이고, 기질지성이란 그 기질지심에 나아가 함께 가리킨 것이다. ("巍巖遺稿" 권12, '未發辨': 心之不正而性能自中。氣之不順而理能自和。天下有是乎。故單指之善。自不干涉於其器。而在人則必待夫理氣同實。心性一致處言之者。... 心非有二也。以其有拘與不拘而有是二指。則所謂大本之性者。當就其本然之心而單指。所謂氣質之性者。當就其氣質之心而兼指矣。)
한원진처럼 기질지성과 본연지성을 구분하여 기와 별개로서의 리를 따로 끄집어내어 이를 본연지성이라 단지單指한다는 것은 이간이 보기에는 성이라고 하기가 곤란하다. 이간은 기와 분리된 리를 성이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기와 결합된 리로서의 성이 본래의 리의 특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리와 기가 공존하는 리기동실 심성일치의 상태를 고수하고자 한다. 본연지심에 나아가서 단지하면 본연지성이고, 기질지심에 나아가서 겸지하면 기질지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원진의 격렬한 비판을 유발한다.
p.216
심은 기이고 성은 리이다. 기는 맑거나 탁함 아름답거나 추함에 가지런하지 않음이 있지만 리는 곧 순선하다. 그러므로 리만을 가리키면 본연지성이고 리와 기를 함께 가리키면 기질지성이나 성에 두 몸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기질을 겸함과 겸하지 않음에 따라 두 가지 이름이 있을 뿐이다. ("南塘集" 권11, '附未發氣質辨圖說': 心卽氣也。性卽理也。氣有淸濁美惡之不齊。而理則純善。故單指理爲本然之性。兼指理氣爲氣質之性。性非有二體也。只是氣質之兼不兼而有二名耳。)
... 한원진은 하나의 물物, 하나의 심心에서 단지와 겸지로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구분하고 기질지성의 관점을 택한 것이다. 이간은 자신의 일관된 리기 불상리 불상잡 및 리기동실 심성일치의 원칙은 고수할 수 있었지만, 하나의 사람 또는 사물 안에 두 개의 심과 두 개의 성이 존재하게 된다는 문제에 부딪힌 것이다.

4. 오상론

... 이들은 인성과 물성의 동이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증거를 오상五常에서 찾는다.

생각건대 만물이 모두 이 성을 가지고 있는데 오직 사람의 성이 가장 귀하고 지극히 선하게 되는 까닭은 인의예지의 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맹자가 성선을 논할 때 다른 말은 없이 다만 인의예지로써 말한 것이다. 만약 만물 중 지각 운동을 가지고 있는 것이 모두 인의예지의 온적한 덕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면, 사람의 성이 가장 귀한다는 것은 과연 무슨 까닭이겠는가? ("南塘集" 권29, '論性同異辨': 盖萬物同有是性。而獨人之性爲最貴而至善者。以其有仁義禮智之德也。故孟子論性善。無他語。只以仁義禮智言之。若使萬物之有知覺運動者。皆具仁義禮智之全德。則人性之爲最貴者。果何事也?)

사물의 지각은 그 기가 오행의 거칠고 흐린 것을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 기는 단지 거칠고 흐린 리를 얻을 뿐이다. 비록 일찌기 그 리가 없지는 않지만 또한 인의예지라고 할 수는 없다. <호랑이와 이리의 인仁, 벌과 개미의 의義와 같은 종류는 오행 가운데서도 그 증 하나의 빼어난 기를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 기는 인이 되고 의가 되지만, 끝내 온전할 수는 없다.> 사람의 지각은 그 기가 오행의 정밀하고 빼어난 것을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 리는 인의예지가 되고, 지각의 발현도 인의예지의 작용이 아님이 없다. ("南塘集" 권29, '論性同異辨': 物之知覺。其氣得五行之粗濁者。故其理只得爲粗濁之理。雖未嘗無其理。亦不可謂仁義禮智也。<虎狼之仁。蜂蟻之義之類。是於五行中亦得其一段秀氣。故其理爲仁爲義而終不能全也。> 人之知覺。其氣得五行之精英者。故其理爲仁義禮智。而知覺之發見者。莫非仁義禮智之用也。)
한원진에 따르면 리는 기와 결합함으로써 성이 되고 기의 청탁수박에 따라 오상을 가짐이 다르다. 사람만이 빼어난 기를 얻은 까닭에 오상도 온전히 갖추지만, 나머지 다른 사물들은 거칠고 흐린 기를 얻었으므로 다섯 가지 오상 중 일부만 갖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사물의 성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간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우주에는 리와 기가 있을 뿐이다. 그 순수지선의 참됨, 무성무취의 오묘함은 천지만물의 똑같은 하나의 근원이다. 그것을 높여서 태극이라 하니 그 명칭은 포괄적이고, 그 전부를 세어 오상이라고 하니 그 조리가 분명하다. 이것은 곧 그치지 않고 계속되는 실체로서, 사람고 ㅏ사물이 받은 온전한 덕이다. ("巍巖遺稿" 권12, '五常辨': 夫宇宙之間。理氣而已。其純粹至善之實。無聲無臭之妙。則天地萬物。同此一原也。尊以目之。謂之太極。而其稱渾然。備以數 之。謂之五常。而其條粲然。此卽於穆不已之實體。人物所受之全德也。
p.218
바른 것도 오상이고 치우친 것도 오상이다. 통하는 것도 오상이고 막힌 것도 오상이다. 모두 오상이지만 바르고 통하므로 발용할 수 있고, 치우치고 막혔으므로 발용할 수 없다. 이제 발용의 여부를 보고서 하나는 있다고 하고 하나는 없다고 한다면, 그 뜻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巍巖遺稿" 권4, '上遂菴先生-別紙': 正亦五常也。偏亦五常也。通亦五常也。塞亦五常也。同是五常。而正且通。故能發用。偏且塞。故不能發用。今見其發用與否。而謂之一有。而一無。無迺爲未盡耶?)
천지만물이 모두 하나의 근원에서 비롯되고 그 근원을 세부적으로 지칭할 때 오상이라고 하므로 사람과 사물이 오상을 온전히 받지 못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오상을 온전히 갖추지 못했다는 것은 태극을 온전히 갖추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사람이건 사물이건 오상을 온전히 갖추고는 있지만, 다만 겉으로 드러남(發用)에서 차이가 날 뿐이라는 것이다.
이간에 의하면 우주만물의 이치인 리가 기 속에서도 그대로 보존되므로 사람과 사물의 차이는 그 발용에서 드러날 뿐이다. 그러나 한원진의 경우 리가 기 안에 들어갔을 때는 그 원인이 기이든 리이든, 이 때의 리는 이미 기와 결합하면서 성으로 변화된다. 따라서 모든 사물의 성이 온전한 오상을 갖추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5. 미발의 심체 문제

사람과 사물의 성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은 단지 존재론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결국은 가치론의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성에 윤리적 가치 실현 능력인 오상이 어떻게 갖추어져 있는가를 문제시하는 한편, 더욱 구체적으로 선악의 가치 실현 가능성을 미발의 심체 문
p.219
제에서 다룬다. 성을 기중지리로 보는 한원진은 심체도 성과 대비되는 기의 측면에서 바라본다.
심이란 기의 모임이니 그 체는 본래 허虛이다. 허이므로 어둡지 않고 기이므로 가지런하지 않다. 그 체가 본래 허하여 어둡지 않다는 데서 말하자면 이를 선善이라 하고, 그 기의 모임이 가지런하지 않다는 데서 말하면 선악善惡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미 선이라 하고 또 선악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 말이 각기 가리키는 바가 있어 서로 방해되는 일이 없다. 기 가운데 있는 성은, 그 미발허명함을 가리켜 대본지성이라 하고, 기품이 가지런 하지 않음을 겸하여 말하면 이를 일러 기질지성이라 한다. ("南塘集" 권11, '擬答李公擧-附未發五常辨': 心者氣之聚而體本虛也。虛故不昧。氣故不齊。自其體本虛而不昧者言則謂之善。自其氣之聚而不齊者言。則謂之有善惡。然則旣謂善而又謂有善惡者。言各有所指而未甞相妨也。性在氣中者。卽其未發虛明而中。則謂之大本之性。兼其氣禀不齊而言。則謂之氣質之性。)

심은 기이고 성은 리이다. 기는 청탁미악의 가지런하지 않음이 있지만 리는 곧 순선하다. ... 기는 비록 청탁미악의 다양함이 있을지라도 미발시에는 기가 움직이지 않으므로(不用事) 선악이 드러나지 않고 고요히 텅 빈 듯 맑을 뿐이다. 비록 고요히 텅 빈 듯 맑을 지라도 그 기품 본래의 청탁미악은 또한 없을 수가 없다. ("南塘集" 권11, '擬答李公擧-附未發氣質辨圖說': 心卽氣也。性卽理也。氣有淸濁美惡之不齊。而理則純善。故單指理爲本然之性。兼指理氣爲氣質之性。性非有二體也。只是氣質之兼不兼而有二名耳。氣雖有淸濁美惡之不齊。而未發之際。氣不用事。故善惡未形。湛然虛明而已矣。雖則湛然虛明。其氣禀本色之淸濁美惡則亦未甞無也。)
리만을 가리켜 말한다면 본연지성이라 하고 리기를 겸하여 말하다면 기질지성이라 하지만, 한원진이 사람과 사물의 성을 이야기할 때 택하는 관점은 기질지성이다. 그러므로 심체에서 기가 발하지 않았을 때에도 기의 선악이 드러나지 않은 것뿐이지 본체에 기의 청탁이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p.220
이와 같이 한원진은 미발을 외물에 접촉하지 않은 고요한 상태에서 기가 발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간은 일반적인 기와 심의 기를 구분한다.
기는 하나이지만 그 거친 것을 말하면 혈기이고 그 섬세한 것을 말하면 신명이다. 거칠고 섬세한 것을 통틀어 기라고 한다. 그러나 심은 혈기가 아니고 신명이다. 심체는 지극히 섬세하지만 기질은 지극히 거칠며, 심체는 지극히 크지만 기질은 지극히 작다. ("巍巖遺稿" 권13, '未發辨後說': 夫氣一也。而語其粗則血氣也。語其精則神明也。統精粗而謂之氣。而所謂心則非血氣也。乃神明也。心體也至精。而氣質也至粗。心體 也至大。而氣質也至小。)
한원진과 달리 심체의 기와 일반적인 기질을 구분한 이간은, 다시 진정한 미발을 혈기와 뒤섞여 있는 미발과 구별한다.
명덕본체는 성인과 범인이 동일하게 가지고 있고 혈기청탁은 성인과 범인이 다르게 가지고 있다. 명덕은 천군이고 혈기는 기질이다. 천군이 주재하면 혈기가 백체에 물러나서 마음이 텅 비어 환하게 되니, 이것이 대본의 소재이며 자사가 말한 '미발'이다. 그러나 천군이 주재하지 못하면 혈기가 마음에서 용사하여 청탁이 가지런하지 않게 된다. 이것은 선과 악이 뒤섞인 것이다. 덕소(한원진)는 이것을 미발이라고 말하고 있다. ("巍巖遺稿" 권12, '未發辨': 故愚謂明德本體。則聖凡同得。而血氣淸濁。則聖凡異稟。明德卽天君也。血氣卽氣質也。天君主宰。則血氣退聽於百體而方寸虛明。此大本所在。而子思所謂未發也。天君不宰。則血氣用事於方寸。而淸濁不齊。此善惡所混。而德昭所謂未發也。)
이간에 의하면, 한원진은 단지 발하지는 않았지만 혈기가 마음에서 용사하는 것을 미발이라고 한다. 그 반면에 자신이 말하는 미발은 단지 외물에 접촉하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천명(天君)을 따
p.221
르는, 즉 리의 실현 가능태를 말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각각 '부중의 미발(不中底未發)'과 '중의 미발(中底未發)'이라고 하여 구분한다.
...

p.223
4. 논쟁의 의의

인성과 물성의 동이 문제는 18세기 초에 시작된 후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거의 모든 지식인이 관심을 기울였던 문제였다. ... 논쟁의 의의를 정리해보면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성性 개념의 다의성, 특히 주희가 사용하는 성 개념의 혼란을 정리했다는 것이다. 사단칠정 논쟁을 거치면서 조선 성리학의 이론적 깊이는 이미 중국을 능가하였다. 우주와의 관련 속에서 인간의 심성정을 정밀히 탐구해왔던 이들은 성 개념의 다의성에 주의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인간 심성의 긍정적 능력을 고양하여 성리학적 이상 국가를 실현하고자 했던 조선 성리학자들에게는 필연적인 과제였다. ...
둘째, 중국 이외에 새로이 등장하는 세력에 대한 대처 문제와 관련된 논의라는 것이다. 병자호란(1636~1637)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맛본 후,
p.224
'가장 사람다운 사람의 문화'로서 중화 문화를 추구하며 소중화를 자부했던 조선이, 짐승에 가깝다고 여기며 천시했던 오랑캐의 강대한 세력을 현실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것은 그 당시 커다란 문제였다. 따라서 이 논쟁을 화이론적인 문화적 우월성에 입각하여 거론되었던 북벌론과 같은 맥락에서 파악하려는 시도도 있다. 또한 같은 논의의 차원에서 정반대의 입장으로 북학파의 인물성론에 주목하는 시도도 있다. 북학파, 특히 홍대용과 박지원은 사람을 포함한 만물이 모두 똑같이 기로 구성되고 공통된 생명의 원리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만물은 균등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사람의 입장에서만 세계를 볼 것이 아니라 사물의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객관적 상대적 관점을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의 상대화 객관화는 중세 사회의 계층적 질서를 부정하고 근대적인 사회 질서를 만들어 가는 데 있어 중요한 사고의 전환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