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구파의 독점시대
불교를 국가이념으로
삼았던 고려왕조가 고려 중엽 이래 사회 여건의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점차 그 내부의 문제점들과 국정 운영상의 무능함을 드러내던 시기에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유학을 받아들인 고려의 유교계는 이 신유학에 의거하여 당시의 무능하고 부패한 고려사회를 개혁하려는 포부를 다져간다...
이성계 장군이 위화도 회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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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를 성공시키고
새로운 왕조 조선을 건립하면서 유교계는 두 진영으로 나뉜다. 한쪽은 새 왕조에의 참여를 긍정하는 유학자들, 그리고 기존의 거물급 유학자들을
어떻게든 이 대열에 끌어들이려는 세력으로 구성된다... 한편 다른 쪽엔 이른바 '불사이군'의 절의를 내세우며 신정권에의 참여를 사양하던
유학자들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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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이군의 절의를
존중하던 진영의 유학자들은 이 사건(정포은은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 의해 선죽교에서 최후를 맞음)으로 중앙을 완전히 떠나 뿔뿔히 산림으로
흩어진다. 중앙에 남은 유학자들은 참여파의 학자들뿐이고, 이들에 의해 조선의 건국이념, 제도의 정비 등 건국 사업이 착실하게 진행되어 간다.
이들이 조선 전기의 관학파 학자들이고 훈구세력이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이래 15세기 중반까지는 관학파가 중앙 정계와 학계를 독점하는
구조가 그대로 유지된다.
신진 사림세력의 중앙 진출과 사화
시간이 갈수록
비대해지고 능수능란해지는 훈구세력에 대해 왕실 쪽에서는 이들을 견제할 세력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잘 살펴보니 이미 저절로 커있는
세력이 있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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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바로 향촌사회에
파묻힌 고려말 절의파 계열 학자들의 맥을 이어온 산림의 유학자들이다. 더욱이 이들은 엄격한 도덕주의로 정신무장을 하고 있어 개혁 작업에
안성맞춤인데다 같은 주자학파의 학자들이므로 훈구대신의 견제에도 적격이었으며, 게다가 15세기 중반 이후로는 이들이 중앙 정계에 직접 참여하여
지식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해보려는 의향을 분명하게 내비치곤 했으니, 왕실 쪽에서는 이보다 더 반가운 일이 있을 수 없었다.
당시 산림 유학자들의
특징은 성리학의 이론 방면에 소극적이고 <<소학>>을 중심으로 실천을 지극히 중시하는 데 있었다. 이들에게 '실천'이란
1차적으로는 일상생활 중의 도덕적 삶을 의미하고, 2차적으로는 사회의 경세 방면에서 이상적 정치를 추구하는 '지치주의'가 된다... 점차 중앙
정계에의 참여를 희구하던 산림 주자학 세력의 의향과 훈구세력에 대한 왕실의 견제 정책이 맞아떨어져 성종(1469~1494 재위) 때부터
본격적으로 산림 도학자들의 중앙 정계 진출이 시도된다. 그러나 정치 고단자들인 훈구세력이 이들 '굴러온 돌들'을 그냥 놔둘 리는 없다. '박힌
돌들'인 훈구세력이 '굴러온 돌들'인 이들 신진 사림 세력을 밀쳐내기 위해 공작을 벌여 일어난 사건이 바로 '사화'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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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4대 사화'가
거론된다. 1498년 무오사화와 1519년의 기묘사화 때는 전적으로 사림파 학자들만 일망타진된 사화였고, 두 번째 사화인 1504년의 갑자사화와
네 번째 사화인 1545년의 을사사화 때는 훈구세력 내부의 갈등이 주된 원인이어서 그쪽 학자들이 많이 다쳤으나 이에 부수된 사림의 피해 역시
막심했다.
이 피비린내 나는
정치적 통과의례를 지나 사림세력은 15세기 중반을 거치면서 결국 중앙 정계를 완전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깊은 상처를 입어 후유증을
앓고 있는 상태였다. 가장 큰 상처는 정암 조광조가 38세의 나이로 사형당했던 1519년의 기묘사화 때 입었다... 조선 유학계에 가장 큰
상처를 입힌 이 사건으로 사림세력은 일대 좌절을 맛본다. 이 사건의 후유증은 매우 오래
갔다.
성리학의 이론 탐구에 비중을 두는 신사조
여기서 논란이 될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있다. 16세기 중반의 사림세력은 내면으로는 사화의 후유증에 마음고생을 하고
있었지만, 현실 사회 면에서는 사림세력이 중앙의 주도권을 장악해가고 있었다. 이때 성리학계가 보여준 두드러진 변화는 갈수록
성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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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이론 탐구에 가치를 부여한 점이다. 이것이 1) '개인의 도덕행과 지치주의의 실행을 추구하던 주자학'이 이러한
좌절을 겪으면서 체념의 선상에서 '방향 선회'를 한 것인가, 아니면 2) 개인의 도덕행과 사회에 대한 지치주의의 신념에는 변함이 없으나 다만
일련의 경험에 의해 또는 이론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 '보완'의 차원에서 주자철학의 이론 측면을 '확대·강화'시킨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1)의 관점이 우세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2)의 관점을 지지한다. 그 근거로는, 퇴계의
<<성학십도>>와 율곡의 <<성학집요>>를 보면 사림 학자들의 지치주의의 신념에 달라진 게 거의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기묘사화 때까지의 지치주의가, 외람된 표현이지만, 거의 '저돌적'이었다면, 그 이후에 추진된 지치주의는 속도를
조절해가고 상황을 보아 가며 추진하였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중앙 정계 진출을 시도한 이래 지치주의를 표방했던 사림파 주자학자들의 유학 사조는 사단칠정 논변의 시기를 거치면서
성리학 이론에 대한 논의가 대폭 강화되어 본격적인 성리학 시대의 문을 열게 된다.
고려말 이래 향촌사회의 지도층 지위를 유지하면서 학문의 연마와 후학의 양성에 전념하던 절의파 주자학자들은 15세기
후반의 성종대부터 중앙 정계 진출을 기도하였고 이때 표방한 것이 조선사회를 이상사회로 만들어보겠다는 지치주의였다. 이때까지의 사림파 주자학자들은
성리학의 이론 탐구를 경시하였고, 사실상 무시하였다. 사단칠정 논변을 거치면서 조선의 주자학계는 성리학의 이론 탐구에 적극적인 태도를 갖는
사조로 완전히 바뀌었고, 이 사조는 그 후 조선조 내내 유지된다.
또한 기득권 세력이었던 훈구세력이 제거되고 사림파가 중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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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악한 바로 직후 이 사칠 논변이 이론 면에서의 계기가 되어 사림세력은 안정적인 양대 진영을 형성하게 된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으로서는 사림 내부에서 일어난 정치상의 의견 차이가 발단이 되기는 하였지만,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의 기틀이 잡히기 시작한 것은
사단칠정에 관한 두 해석이 분명해지면서부터였다. 사단칠정 논변이 일어난 시대적 배경과 그 의의는 이상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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