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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30일 토요일

성性- 4. 무선무악無善無惡, 고지마 쓰요시 지음, 신현승 옮김, ,송학의 형성과 전개, 논형, 2004.

성性-무선무악無善無惡 致知
2010/08/03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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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마 쓰요시 지음, 신현승 옮김, <2. 성性- 4. 무선무악無善無惡>, <<송학의 형성과 전개>>, 논형, 2004.
p.123
가정嘉靖 6년(1527) 9월, 도적토벌의 칙명을 받고 왕수인王守仁은 소흥紹興을 출발하려고 하였다. 이때 유명한 제자인 전덕홍錢德洪과 왕기王畿 두 사람이 새삼스럽게 스승의 성설에 대해 질문하고 토의한 내용은, 후세에 장소의 이름을 채택하여 천천교문답天泉橋問答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
p.124
왕수인의 사구교四句敎는 "선도 없고 악도 없는 것은 마음의 본체이고, 선도 있고 악도 있는 것은 의意의 발동이고, 선을 알고 악을 아는 것은 양지良知이고,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하는 것은 격물格物이다"라고 하는 네 가지인데, 이것의 의미를 둘러싸고 논의는 전개된다.
전덕홍이 수양·노력의 중요성을 역설하여 이 사구를 높게 평가하는 데 반해, 왕기는 마음의 본체를 중시하는 입장으로부터 뒤의 삼구三句도 모두 '선도 없고 악도 없다(無善無惡)'라고 해야만 된다고 주장하였다. 왕수인의 대답은 타고난 소질을 지닌 사람은 본체를 깨달으면 그것으로 족하기 때문에 왕기의 사고방법은 그것으로 올바른 것이겠지만, 보통 사람을 상대로 해서 적용하는 경우에는 전덕홍의 방법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일방적으로 어는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되다고 하는 것이었다. 양명학은 왕수인의 사후에 좌우 양파로 나누어지게 되는데, 이 문답에서 그 분열의 징조가 보인다고 하겠다. 여하튼 왕기는 좌파, 전덕홍은 우파이다.
사구교는 <<대학>> 팔조목의 전반부 네 개에 대해 순서를 거꾸로 하여 나열한 것이었다. 주자학의 경우와는 달리 양명학의 '격물格物'은 사물과의 관계 양태를 바르게 하는 것이고, '치지致知'는 '치양지致良知' 즉 각자에게 갖추어진 천리天理로서의 양지를 올바르게 발휘하는 것이었다. 그러기위한 마음의 준비가 성의誠意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의 올바른 모습이 밝게 드러나는데 그것이 정심正心이라고 하는 것이다. 거기에 시간적인 순서는 없다. 팔조목의 계제성階梯性은 궁극의 목적인 평천하에 도달하는 논리적인 단계로서 이해되었다. 그렇게 된 것은 궁리격물에 의한 수양방법의 한계에 부딪히게 된 왕수인인 대안으로
p.125
이러한 이해의 방법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 왕기는 마음의 본래의 모습에 선악이 없는 이상, 그 현상인 의意 이하도 선악으로 불러야만 할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왕수인이 양자를 조정하게 된 것은 그 자신이 양쪽에 모두 찬성하였기 때문이다. 무선무악은 왕수인의 성설이지만, 이것은 성의 본체는 이발 단계에서의 선악을 뛰어넘는 차원에 있다고 하기 위한 것으로, 요컨대 장구성 등의 논법과 비슷한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 양명학에서도 맹자의 성선설을 신봉하는 것이고 그 지극한 선(至善)의 성을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선善과는 구별해서 무선무악이라고 부른 것이었다. 단지 그러한 어떤 성설을 고집하는 것 자체가 성을 선악의 범주에서 파악하고 있는 것이 된다고 하여 그러한 사소한 개념 규졍에 구애되는 지知의 상태를 빠져나오는 방법으로서의 양지의 개념이 설명되었다.
따라서 성에는 선도 악도 없다는 왕수인이 주장하는 진정한 뜻은 성에 관하여 이것저것 논하는 것 자체의 헛됨을 지적한 것이라고 생각할 구 있다. 주희가 엄밀하게 구별한 성性과 심心의 관계도 왕수인은 어떤 힘도 들이지 않고 건너뛰어 버린다. ... <<전습록>> 권 하下에 있는 ... 문답에서는 '성의 본체에는 원래 선도 악도 없다'고 되어 있지만, 천천교문답에서는 '무선무악은 마음의 본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주자학의 '성즉리性卽理'설에 대하여 양명학이 '심즉리心卽理'를 주장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왕수인은 심·성·리를 구별하는 것이 학문적으로 유효하다는 사고방식 그 자체를 반대했던 것이다.





<<전습록>> 권 상上에는 다음과 같은 문답이 있다.
p.126
"회암晦庵(朱熹) 선생은 <<대학혹문>>에서 '사람이 학문ㅇ르 할 수 있는 것은 마음과 리(心與理)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는데, 이 표현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선생이 말씀하셨다.
"마음이 곧 본성이고 본성이 곧 리이니라. 그 중간에 '~과(與)'라는 글자를 넣은 것은, 그것을 두 가지의 다른 것으로 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잘 살펴야 하느니라."
주희도 마음(心)과 리를 관계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 다음의 발언에 잘 나타나 있다.
마음은 원래부터 주재主宰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의 이른바 '주재한다'고 하는 것은 곧 리理이다. 마음이란 별도로 리라는 것이 있거나, 이 리와는 별도로 마음이라는 것이 있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朱子語類>> 권1) (ㅋㅋ역시 어류 번역은 난해해...)
다만 주희는 그 말이 가리키는 내용으로서 이 양자를 엄밀히 구분한다. ...
주자학의 '성즉리'가 "우리들 인간이 가지고 태어난 본성은 천지만물을 관통하고 있는 리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라는 의미에서의 '즉卽'이었던 것에 비해, 양명학의 '심즉리'란 여기에서 왕수인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마음과 리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라는 의미에서의 에두르지 않고 솔직한(???) '즉卽'이었다. 그것은 학설의 차이라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학문체계(學知)의 이질성에 뿌리박혀 있다.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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