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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30일 토요일

성性-북송의 성설性說

성性-북송의 성설性說 致知
2010/07/23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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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마 쓰요시 지음, 신현승 옮김, <2. 성性- 1.북송北宋의 성설性說>, <<송학의 형성과 전개>>, 논형,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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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구연은 생애의 대부분을 고향인 무주撫州에서 보냈다. 무주에서는 육구연보다 백 년 정도 이전에 북송을 대표하는 사상가를 배출하였는데, 그가 왕안석이다. 남송에 이르러 도학파를 중심으로 왕안석 비판의 풍조가 높아지고는 있었지만, 왕안석은 의연하게 문묘에 종사되었다. 그 존재가 얼마나 컸음을 느끼게 했던가는 왕안석 비판자인 주희가 <<주자어류朱子語類>> 속에서 빈번하게 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사실로부터도 역설적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또한 육구연에게 <형국왕문공사당기荊國王文公祠堂記>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다.(<<象山先生全集>> 권19) 이 문장이 쓰여진 것은 주희와 논쟁을 전개하고 있는 순희淳熙 15년(1188)의 일이었고, 그 문말文末의 표기는 <방인육모기邦人陸某記>로 되어있다.
육구연의 왕안석에 대한 평가는 호안국이나 주희에 비교해보면 상당히 부드러운 편이다. 그는 왕안석에 대해서 인격에 관련된 공격은 전혀 하지 않았다. 왕안석의 개혁의 잘못은 정치의 요체를 법으로 추구했다는 점에 있었다.
정치를 하는 것은 사람이고, 사람을 등용하는 것은 몸(身)에 의한다. 그 몸을 수양하는 것은 도道에 의하고, 도를 수양하는 것은 인仁에 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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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인이란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은 정치의 근본이고 몸은 사람의 근본이며 마음은 몸의 근본이다. 근본을 정확히 하지 않고 말末에만 구애되어서는 말末조차 다스릴 수가 없게 된다.
마음을 핵심의 자리에 고정시킨 평소의 지론이 설명되고 있다. 순희 2년(1175)의 <경재기敬齋記>는 "옛날의 사람이 그 몸을 가家·국國·천하天下로 정확히 미치게 하였던 것은 그 본래의 마음(本心)을 잃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시작된다. 천자千字에 조금 못미치는 짧은 문장 속에 '심心'이라는 글자가 열세 번 등장하고 확실히 '심학'의 선언문의 취지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연보 13세 때의 조문에는 '우주야말로 내 마음, 내 마음이야말로 우주'라고 말한 것이 보이고, 육구연에게 있어서의 마음의 문제가 유소년기 때에 이미 깨달음의 단계에 도달한 것 같이 묘사를 하고 있다. 육구연은 마음의 학문(心學)이라고 하는 평가는 이미 일찍부터 정해져 있었다. 왕수인이 '성인의 학문은 심학이다'라고 해서 육구연을 재평가하고 스스로 그 계보를 이어 받은 자로서 자임했던 것도 뚜렷한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심학'의 대극에 위치한 '성리학性理學'자 주희도 심이라는 용어에 유달리 주의를 기울인 사상가였다. 단지 주희의 경우에는 장재張載의 '심心은 성性과 정情을 통합한 것'이라는 규정에 전면적으로 의거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의 문제는 항상 성이나 정의 구별을 둘러싼 의론과 불가분의 관계였다. 바로 그것이 일반적으로 심성론心性論이라고 일컬어지는 이유이다. 그리고 맹자의 성선설에도 전면적으로 의거하기 때문에 선善으로서의 성性이 어째서 그대로 발현되지 않고 이 세상에 악惡을 초래하는가라는 악의 기원을 논하는 것이 심성론에 요구되었다. 하지만 맹자의 성선설은 송대 이전에 결코 정론이었던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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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북송에서 맹자를 세상에 널리 알린 제일인자는 왕안석이었다. 그에게는 <원성原性>이라는 제목의 문장이 있는데(<<臨川先生文集>> 권68), 어떤 사람이 맹자孟子·순자荀子·양웅楊雄·한유韓愈의 성설이 서로 다른 이유를 질문하다고 하는 상정으로 시작되고 있다. 그 제명 및 그 첫머리부터가 한유의 동명同名의 문장(<<韓昌黎문집>> 권1)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한유는 맹자의 성선설, 순자의 성악설, 양웅의 선악이 뒤섞인 성설을 열거하고 자신의 견해로서 성삼품설性三品說을 제창하였다. 한유의 이 문장이나 <원도原道> 말미의 기슬에 의해 ... 북송에서는 공자의 뒤를 계승하는 대학자로서 이 네 사람의 이름을 내세우는 것이 통례였다. 왕안석의 <원성>에서도 질문자는 이 네 사람은 모두 '옛날에 도道를 갖추고 있던 어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주장이 다른 것은 어떠한 이유였을까라는 형태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것에 대해 왕안석은 자신이 의거하는 것은 공자의 주장뿐이라고 대답한 뒤, 네 사람의 주장에 각각 비판을 덧붙여 간다. 먼저 한유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오상五常을 성 그 자체로 간주하고 있는 점에서 잘못되어 있다. 성이란 이러한 오상의 '태극太極', 즉 근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고 오상과는 구별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음으로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을 한 쌍의 것으로서 받아들이고 어느 쪽이나 모두 선인가 악인가라는 성격규정을 성에 대해서 행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한다. 선악이 문제가 되는 것은 정의 위상 문제에 달려있는 것이고, 성 그 자체에는 선악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情 또는 습習의 위상을 성으로서 논하고 있다. 양웅의 주장도 성이 아니라 습에 관한 논의를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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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리고 공자가 "본성(性)은 서로 가까운 것이지만, 습관(習)이 서로를 멀어지게 한다"(<<論語>> 陽貨)라고 서술한 것이야말로 자신의 견해라고 한다. 즉 성에는 선험적인 시비是非나 선천적인 차이는 보이지 않고 그것들이 문제가 되는 것은 성이 원인이 되어 구체적인 형태로서 발현한 상태·단계라고 하는 것이다.
<성설性說>(<<臨川先生文集>> 권68)은 <원성>의 속편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의 내용을 갖추고, 공자의 위의 말과 상지上智·중인中人·하우下愚라고 하는 인간 유형과의 관계를 논하고 있다. 한유가 제시했던 바와 같은 성삼품설이란 결국 습관에 의해 나누어진 것이고, 하우라고 하더라도 선인善人이 될 소질은 갖추고 있는 것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성은 누구라고 선하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양맹楊孟>(<<臨川先生文集>> 권64)에서는 맹자와 양웅의 서로 다른 점을 개념의 내용규정이 서로 빗나가 있는 점에서 찾고 있다
맹자가 말하는 성이란 올바른 본성만을 가리키고 있다. 양웅이 말하는 성은 본성의 올바르지 않은 부분을 합쳐서 가리키고 있다. 양웅이 말하는 명命은 올바른 명만을 가리키고 있다. 맹자가 말하는 명은 명의 올바르지 않은 부분을 합쳐서 가리키고 있다. ... 지금의 학자들은 맹자 측에 가담해 있으면 양웅을 비판하고 양웅 측에 가담해 있으면 맹자를 비판한다. 그것은 문자의 표면만을 이해한 것뿐이고 거기에서 지시하는 내용을 이해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은 성이나 명의 도리道理를 분별하고 있다고 스스로 일컫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성정性情>(<<臨川先生文集>> 권67)에서도 세간에서 통설로 되어 있는 '성은 선하고 정은 악하다'고 하는 사고방식을 비판하고, 그것이 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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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 문장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에서 유래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맹자의 성선설이란 성이 무조건 언제나 선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에는 악으로 향하는 요소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고, 그렇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양웅도 사람의 성에는 선과 악이 뒤섞여 있다고 설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왕안석은 맹자의 주장을 기본적으로는 시인하고 그 자신의 해석에 맞추어서 양웅을 증거로 인용하는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결국 그의 견해에 의하면 맹자나 양웅도 말하려고 했던 것은 동일한 것이고, 그것은 공자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한다-결국은 왕안석 자신의 견해와도 일치한다. 다만 그 설명방법에 약간의 문제가 있어 정이라고 해야 할 것을 성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이해에 혼란을 초래하였다고 파악하는 방법이다.
북송에는 사마광에 의해 대표되는 맹자 비판세력이 존재하였다. 사마광에 의하면 공자의 교설은 명名을 바로잡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고 맹자는 그 가르침으로부터 이탈해 있다는 것이다. 그의 저서 <의맹疑孟>(<<增廣司馬溫公全集>> 권101) 속에서 사마광은 맹자의 고자告子에 대한 반론을 다시금 논박하고 있다. 고자가 물의 흐름에 비유하여 성에 본래는 선악이 없다는 것을 논한 것에 관해 그 비유는 중인中人에 관해서만 들어맞는 것뿐이고, 한편으로는 확실히 타고난 선인이 있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교도敎導할 방법이 없는 악인도 있으며, 맹자가 말하는 바와 같이 누구에게도 성선性善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마광은 기본적으로는 성삼품설을 주장하였다. 또한 소식은 <맹자변孟子辯>에서 성 그 자체에 선악은 없다고 서술하고 맹자의 주장을 비판하였다. 덧붙여 왕안석과 마찬가지로 <<주례>>에 근거하여 정치의 실현을 구상한 이구는 <상어常語>에서 맹자가 춘추오패春秋五覇*의 업적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이 있는데,
(* 춘추오패: 중국 춘추시대에 가장 강대하여 한때의 패업을 이룬 다섯 사람의 제후. 곧 제 환공·진 문공·진 목공·송 양공·초 장왕, 또는 진 목공·송 양공 대신에 오 부차·월 구천을 넣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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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공자의 의도에 반한다고 비난하고 있다(여윤문余允文의 <<존맹변尊孟辯>>에 의거함).
그 중에서 왕안석은 맹자의 옹호파이고, 그는 맹자의 성선설을 완벽하다고는 말하지 않더라도 기본적으로는 수긍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에서의 맹자 성선설의 현창顯彰은 정호·정이에서 시작되는 도학계 학자들의 것과 공통의 기반 위에 서 있는 것이었다.
왕안석은 개혁의 일환으로서 과거의 시험과목을 변경하여 당대唐代 이래로 중시되어 오던 시부詩賦를 시험과목에서 제외하고, 그 대신에 책策(시사문제에 관한 대책)과 논論(역사 비평)을 중시하였다. 경학에 관해서는 경문·주석의 암기가 아니라 내용의 이해를 묻고 그 자신이 '단란조보斷爛朝報'**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했다고 하는 <<춘추>>를 빼버리고, 그 대신에 <<주례>>를 넣은 오경五經을 '본경本經'이라고 부르고 이 중에서 선택하게 한 것 이외에, '겸경兼經'이라는 명칭 하에 <<논어>>와 <<맹자>>를 모두 과거의 필수과목으로 삼았다. 결국 <<맹자>>는 이러한 계기를 시작으로 하여 경서로서의 취급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과거시험의 개혁에 관해서는 도학계의 인사들도 <<주례>>를 <<춘추>>로 돌려버렸다는 것 이외에는 왕안석의 개혁을 기본적으로는 답습하였다. 이러한 신학 및 도학의 맹자 현창에 의해, 예를 들면 남송 말 진진손陳振孫의 <<직재서록해제直齋書錄解題>>에서 <<맹자>>는 자子가 아니라 경經으로 분류되고 <경록經錄>에 <어맹류語孟類>로서 <<논어>>와 병칭되기에 이른다.
(**단란조보: 여러 조각이 난 조정의 기록이란 뜻. 왕안석이 <<춘추>>를 헐뜯으며 한 말. 왕안석은 처음에 스스로 춘추를 주해하여 천하에 펴려고 했으나, 이미 손신로孫莘老의 <<춘추경해春秋經解>>가 나왔고, 그와 견줄 수가 없음을 깨닫고 마침내 춘추를 헐뜯어 이를 폐하고, '이것은 단란조보'라고 한 고사.)
이보다 먼저 경덕景德 2년(1005)에 칙명에 의한 사업으로서 당의 <<오경정의五經正義>>를 증보하는 형태로 소疏가 간행되었는데, 그것은 전부 열두 개의 경서로 이루어져 있었다-경학상 엄밀하게 말하면 춘추삼전은 철저하게 전이고 경은 아니지만, 여기에서는 다른 것과 똑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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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서라고 부르기로 한다. 즉 <<오경정의>>의 다섯 가지 서적-<<주역>>, <<상서>>, <<시경>>, <<예기>>, <<춘추좌씨전>>-과 <<주례>>, <<의례>>,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 <<효경>>, <<논어>>, <<이아爾雅>>이다. 여기에 <<맹자>>가 덧붙여지면 오늘날 우리들이 통상적으로 불러서 익숙해져 있는 <<십상경주소十三經注疏>>가 갖추어지는 것이지만, 이 시점에서 <<맹자>>는 아직 경서라고 간주되고 있지는 않았다. <<심상경주소>>에 들어 있는 <<맹자>>의 소疏는 경덕의 사업에 참가한 학자의 한 사람인 손석孫奭의 이름을 위에 붙이고 있지만, 이미 주희가 지적한 바와 같이 남송 초기의 사람에 의한 위작이다.
서적 목록에서도 조공무晁公武의 <<군재독서지郡齋讀書志>>나 <<송사宋史>> 예문지藝文志에서는 여전히 경부經部가 아니라 자부子部에 들어가 있다. ...
신학이든 도학이든 맹자를 현창하는 최대의 이유는 인의를 사람의 본성이라고 하는 소위 성선설에 달려 있었다. 당시 왕성하게 논의되었던 성론性論 속에서 그들은 맹자의 주장을 근거로 삼았던 것이다. 그때 필연적으로 본성과 마음의 관계를 논의의 과정 속에 포함시키게 되었다. <<맹자>>에 자주 나오는 마음에 관한 발언, 그리고 "그 마음을 다하는 자는 그 본성을 안다. 그 본성을 알면 하늘을 알게 된다"로 시작되는 진심편盡心篇 첫 장의 논리 등이 초점이 된다.
<<하남정씨유서河南程氏遺書>> 권1에 수록되어 있는 정호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주희에 의해 <<근사록近思錄>> 권1에 재차 수록되어 있다.
태어난 그대로를 본성(性)이라 한다. 본성은 곧 기氣이며, 기는 곧 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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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이것을 생生-태어난 그대로-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태어나면 기품이 있고 도리(理)에는 선과 악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본성의 안에 본래부터 선과 악이 있는 것이고, 서로 대립하여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선한 사람이 있고, 어릴 때부터 악한 사람도 있다. 이것은 사람에게 기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선은 물론 본성이지만 악도 또한 본성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여기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정호의 주장이 뒤에서 서술할 정이·주희의 그것과는 그 취지를 달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기품 이전의 본성 그 자체에 관해서는 이것을 선인가 악인가로 논할 수 없다는 견해를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왕안석과 일치하기는커녕 여윤문余允文에 의해 맹자 비판파로 분류되고 있는 소식의 주장과도 아주 닮아 있다. 본성이란 사람의 태어난 그대로의 것이라는 표현은 실제로는 맹자의 논적인 고자告子의 논법이었다. 본성을 선악을 뛰어넘는 차원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이러한 사고 방식은 지금부터 살펴보는 바와 같이 도학계열에서는 호굉의 <<지언知言>>이나 장구성張九成의 <<맹자전孟子傳>>으로 계승되고, 이윽고 양명학陽明學의 무선무악론無善無惡論에서 그 면모를 일신하여 부활하게 된다.
그것은 주희의 용어를 가지고 설명하면 그들이 본성(性)이라는 개념을 <<중용>>에서 말하는 바대로 미발未發 단계에서의 마음 상태로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미발의 성에 대하여 이발已發 단계의 상태는 정이라고 불린다. 정호는 그것을 기氣에 의한 것으로서 설명하였다. 왕안석이든지 정호이든지 간에 윤리적인 의미에서의 선악은 이 단계에서 밖에 사용할 수 없는 말이라고 생각하였다. 뒤에서 서술하겠지만 주희 자신은 이러한 방식으로 성과 정을 구별하고 있다. 그리고 주희 이후에도 왕안석이 부정했던 바의 성선정악설性善情惡說에 대한 약간의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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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 한때 널리 퍼지기도 하였다. 이것은 그렇게 파악하는 방법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쉬웠고, 바꾸어 말하면 그들의 생활감각에 익숙해지기도 쉬운 도식이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다만 마음에 관하여 호굉 등이 이발이 단계에, 장구성 등이 미발의 단계에 귀착시키는 것에 대하여 주희는 장재의 주장에 근거하여 새로운 심성론을 이른바 주자정론朱子定論으로서 주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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