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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30일 토요일

신유학 이(理)철학의 세계철학사적 의미-류인희

신유학 이(理)철학의 세계철학사적 의미-류인희 致知
2008/05/14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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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인희, <신유학 이(理)철학의 세계철학사적 의미 - 퇴계 성리학과 호락논쟁의 문제 발전을 중심으로-> , <<퇴계, 그는 누구인가>>, 글익는들 에서 발췌...

(P. 227)
퇴계는 <<대학>>의 물격(物格)과 이(理)의 용(用)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P. 228)
"그 (주자의) '이(理)가 만물에 있으나 그 용(用)은 실로 한 사람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아마도 이(理)가 스스로 작용하지 못하고 반드시 사람의 마음을 기다림이 있어야 하고 (이가) 스스로 이른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또 (주자가) '이에는 반드시 용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또 심(心)의 용을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말한 것은, 그(이) 용이 비록 사람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그 용이 되는 신묘한 바는 진실로 이 이가 발현(發現)한 것이 사람의 마음에 이르는 바에 따라 이르지 않는 바가 없고 다하지 않은 바가 없다는 것이니, 다만 아마도 나의 격물(格物)이 지극하지 못할 뿐이지, 이가 스스로 이르지 못할 것을 걱정할 것이 없다." (<<퇴계전서>> 권18, <답기명언 별지>, 31ab>

"그렇다면 바야흐로 그 격물을 말할 때는 진실로 내가 궁구하여 물리(物理)의 지극한 곳에 이르는 것을 말한 것이지만, 그 물격(物格)을 말함에 있어서는 어찌 물리의 지극한 곳이 나의 궁구한 바를 따라서 이르지 않음이 없다고 말할 수 없겠는가. 여기에서 정의(情意)도 없고 조작도 없는 것은 이 이(理)의 본연(本然)의 체(體)이고, 머문 곳에 따라서 발현하여 이르지 않음이 없는 것은 이 이(理)의 지극히 신묘한 용(用)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전에는 단지 본체(本體)의 무위(無爲)에 대해서만 보되 신묘한 용이 능히 드러나 행해지는 것을 알지 못하고서 자못 이(理)를 쓸모없는 것[死物]으로 인식한 것 같으니 그 도와의 거리가 어찌 멀지 않겠는가." (<<퇴계전서>> 권18, <답기명언 별지>, 31b)

이상에서 퇴계가 이에 대해서 그 체와 용의 양면을 분명히 인정하였으니 신유학의 이 관념에 관한 한 이것은 정확한 이해이다. 그리고 퇴계의 이러한 인식은 주자보다도 더 확신에 찬 것으로서 새로운 발견이라고 평가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금의 많은 연구가들은 이점의 인식에서 혼란
(p. 229)
을 가져왔었다. 이제 퇴계의 이 인식을 바르게 소개하는 것은 곧 성리학의 주요 개념과 쟁점 그리고 나아가서 성리학의 기본 정신을 이해하는 데 지름길이라는 것을 거듭 확인해둔다.
위의 인용문을 정리하면 퇴계는,

ㄱ) 이(理)는 느끼거나 움직이는 기능을 갖지 않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의 작용을 빌어서 발현된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강하게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이에는 분명히 용(用)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용이 있다고 할 때의 그 뜻은 이가 사물(死物) 즉 쓸모없거나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기능한다는 것이었다.
ㄴ) 다만 우리가 격물을 철저히 하지 못한 것이 이의 용을 그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까닭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물론 이가 중요하지만 선결문제로서 더 중요한 것은 이 이를 아는 문제이다. 퇴계는 그래서 '일찍이 깊이 생각해보건대,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도록 사람들의 학문과 도술(道術)의 달라진 까닭은 오로지 이 자를 알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른바 이 자를 알기가 어렵다는 것은 대략적으로 알기가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알고 신묘하게 이해하기를 100%에 이르도록 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라고 하여 이 문제를 전면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방법이 중요하다고 해서 격물에 이가 달린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근본 문제는 이란 무엇인지 하는 것이니 이를 퇴계는 '만일 뭇 이치를 궁구하고 100%에 이르러 통견(洞見)하여 이것[物事]을 얻으며, (이것은) 지극히 허(虛)하면서도 지극히 실(實)하고 지극히 무(無)하면서도 지극히 유(有)하며 동(動)하면서도 동함이 없고 정(靜)하면서도 정함이 없는 정결(淨潔)하고도 정결한 것이어서 터럭만큼도 더할 수 없고 터럭만큼도 덜어낼 수 없어 음양오행과 만물 만사의 근본이 되지만 그렇다고 음양오행과 만물 만사에
(p. 230)
머무르지도 않으니, 어찌 기(氣)를 섞어 한 몸체[一體]로 인식하여 같은 것[一物]으로 볼 수 있겠는가'라고 표현해주었다. 그 핵심 주장은 이가 음양오행의 만물의 기와 섞여서 한 몸으로 있을지라도 이는 결코 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案 하나>

"ㄱ) 이(理)는 느끼거나 움직이는 기능을 갖지 않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의 작용을 빌어서 발현된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강하게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이에는 분명히 용(用)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용이 있다고 할 때의 그 뜻은 이가 사물(死物) 즉 쓸모없거나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기능한다는 것이었다."

의문1. 理에 운동성(느끼거나 움직이는 기능)이 없다면, 곧 쓸모없거나 죽은 것이 되는가?
       스스로 움직이지는 않지만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자는 죽은 자인가?

의문2. 理가 살아서 기능한다는 것은 (사람의 경우에 있어서) 사람의 마음 작용을 빌지 않고도 理 스스로 발현한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마음을 닦을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격물은 무엇하러 하는가?

의문2에 대해. 
퇴계가 "(주자가) '이에는 반드시 용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또 심(心)의 용을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말한 것은, 그(이) 용이 비록 사람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그 용이 되는 신묘한 바는 진실로 이 이가 발현(發現)한 것이 사람의 마음에 이르는 바에 따라 이르지 않는 바가 없고 다하지 않은 바가 없다는 것이니, 다만 아마도 나의 격물(格物)이 지극하지 못할 뿐이지, 이가 스스로 이르지 못할 것을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한 것을 보자.
이 말은 다음의 세 가지를 함축한다.
① 理는 스스로 발현함.
② 스스로 발현한 理가 마음이 이르는 곳에 이르름.
③ 理가 이르지 못한 경우(사태 상에서 理가 실현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은
理에 작용성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격물이 지극하지 못하였기 때문 즉 마음이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임.

그렇다면, 理의 발현發見과 理의 이르름[到]은 구별되어야 한다. 퇴계는 理의 발현을 理의 用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理의 이르름에 마음의 의의와 역할을 두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볼 경우, 공부의 자리가 있다. 理가 살아서 기능하기는 하지만, 마음의 작용을 빌어서야 비로소 현실의 구체 사태에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문1에 대해.
퇴계가 理에 用이 있다고 주장하는 데 근거로 삼은 주자의 발언을 보자. '이에는 반드시 용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또 심(心)의 용을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이다. 이것의 원문을 통째로 보자.

<<주자어류>> 권18, 97조목. 
물었다: 혹문에서 ‘심이 비록 일신을 주관하지만 그 體의 허령함은 족히 천하의 理를 주관할 수 있으며; 리가 비록 만물에 흩어져 있지만 그 用의 미묘함은 실로 한 사람의 心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用이 심의 用입니까?(問: “或問云: ‘心雖主乎一身, 而其體之虛靈, 足以管乎天下之理; 理雖散在萬物, 而其用之微妙, 實不外乎一人之心.’ 不知用是心之用否?”)

曰: “理必有用, 何必又說是心之用! 夫心之體具乎是理, 而理則無所不該, 而無一物不在, 然其用實不外乎人心. 蓋理雖在物, 而用實在心也.”)
又云: “理遍在天地萬物之間, 而心則管之; 心旣管之, 則其用實不外乎此心矣. 然則理之體在物, 而其用在心也.”)
次早, 先生云: “此是以身爲主, 以物爲客, 故如此說. 要之, 理在物與在吾身, 只一般.”)

역시나 P의 번역이 신통치 않으므로.. 쉽게 풀어보자.

제자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선생께 질문한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대학혹문>>에서 '사람의 마음은 그의 몸을 주관하는 것이지만 그 體의 허령함은 세상의 모든 理를 주관할 수 있고, 理는 세상만물에 흩어져 있지만 그 用은 한 사람의 마음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요. 그렇게 말해버리면 '用'이 마치 理의 用인 것처럼 읽힐까 걱정이 되서요.. 마음의 用이겠죠?"
선생이 친절하게('답답해하며' 혹은 '짜증을 내며'^^일 수도 있다.) 답해주신다.
"理에 반드시 用이 있는데, 꼭 다시 마음의 用이라고 말할 필요가 있나? 體用의 설법은 다양해. 마음의 體는 理를 갖추고 있어. 그런데 이 理는 마음 뿐 아니라 어디에나 있거든. 하지만 그 理의 用은 마음을 벗어날 수 없어. 理가 세상의 물사에 있더라도 그 用은 마음에 달려있다는 말이야."
선생이 미진함을 느껴 다시 말한다.
"그러니까... 理는 세상만물에 있지만, 그것을 주관하는 것은 마음이라는 얘기야. 마음이 理를 주관하여 그것을 쓰이게 하므로, 理의 用이 마음을 벗어날 수 없다고 한 거야. 마음이 주관하는 理가 내 마음의 理에 한정된 것이 아니란 말이지. 그래서 理의 體는 세상의 모든 물사에 있지만 理의 用은 마음에 달려있다고 한거야."
선생이 자신의 말을 제자가 오해할까 밤새 걱정하다, 다음날 아침 일찌감치 다시 말한다.
"어제 한 말은 사람을 중심으로 말한 것일 뿐이야. 사람의 理가 세상만물의 理를 부릴 수 있다는 뜻이 아니었어. 사람의 理나 세상만물의 理나 하나로 일관되어 있거든. 그래서 마음으로 理를 쓸 수 있다는 것이야."

주자가 이 조목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의 핵심은 理가 쓰이는 것은 心에 의해서라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태극으로서의 一理가 현상 세계의 만물에 萬理로 부여되어 있지만, 그 理가 스스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理는 心에 의해서 발현되고 쓰일 수 있다는 것이다.
주자는 분명 "理의 體는 物에 있지만 그 用은 心에 있다(理之體在物, 而其用在心也)"고 말했다.
놓쳐서는 안될 부분은, 理의 體用을 말하되 物과 心의 관계 하에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物과 心을 떠나서 理의 體用을 설명한 게 아니다. 즉 心을 떠나서는 用을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에는 반드시 용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또 심(心)의 용을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말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간단하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이 조목에서는 '理의 쓰임은 心에 의한다'라고 말하고자 하고 있다. 따라서 理의 用은 스스로 발현함, 스스로 작용함의 用이 아니다. 현상세계에서 理의 드러남을 말하는 것이다. 理는 스스로 작용하지 못하므로, 현상세계에서 理의 드러남은 心에 의지해야만 하는 것이다. 理의 드러남을 理의 用이라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理는 현상세계에서 드러나고 쓰인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理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의문1로 돌아가 보자. 理에 운동성(느끼거나 움직이는 기능)이 없다면, 곧 쓸모없거나 죽은 것이 되는가? 아니다.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쓸모없어지지 않는다. 스스로 움직이지 않더라도 심에 의해 발현될 수 있기 때문이고, 또 理의 내용은 주지하다시피 生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대답은 주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퇴계는 이것에 대해 다르게 생각했나보다. 理가 만물에 내재해 있고, 心에 의해 발현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理에 더 많은 힘을 주고 싶었다. 더욱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그래서 理가 스스로 발현하고 스스로 이른다고 말한다. 그것은 한 철학자의 절절한 고민의 산물일 것이다.
하지만 주자의 원의와는 다르다. 원문의 전문을 읽어 본 우리는 분명히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자... 그렇다면... "이상에서 퇴계가 이에 대해서 그 체와 용의 양면을 분명히 인정하였으니 신유학의 이 관념에 관한 한 이것은 정확한 이해이다."는 무슨 뜻일까....


<案 둘>

"ㄴ) 다만 우리가 격물을 철저히 하지 못한 것이 이의 용을 그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까닭이라는 것이다."

의문3. 理의 用을 발휘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의문3에 대해.
理의 用을 다시 발휘해야 한다면, 결국 理의 用을 발휘하는 그 역할은 心에 주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과연 理가 스스로 발현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理의 用이란 말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理가 쓰여질 수 있음' '理가 발현될 수 있음'이 理의 用인가? 그러한 의미의 用이라면 이미 體 안에 갖추어져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體와 대대하여 用이라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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