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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30일 토요일

성性-주희의 정론定論

성性-주희의 정론定論 致知
2010/07/27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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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마 쓰요시 지음, 신현승 옮김, <2. 성性- 2.주희의 정론定論>, <<송학의 형성과 전개>>, 논형,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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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정을 둘러싼 논의는 주희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단계를 맞이한다. 주희는 복건福建 북부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소흥紹興 18년(1148) 전시殿試에 제278위로 합격한다. 그는 이때 열아홉으로, 과거 합격자의 평균연령을 훨씬 밑도는 대단히 일찍 핀 꽃이었다. 다만 그 순위가 278위라는 성적 때문에 관계의 엘리트 코스에 올라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오히려 조정에서 행정업무에 쫓기지 않고 깊은 사색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는 사실은 사상가로서의 주희가 탄생하는 데 바람직한 방향으로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만일 그 해에 과거시험에 낙제하고 3년 후에 장원이라도 되었다면 동아시아의 근세사상사는 상당히 그 양상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하위의 합격자가 임관되기 위해서는 다시금 전시銓試라는 심사를 통과해야만 했다. 주희는 3년 뒤인 소흥 21년(1151)에 무사히 이것에 합격하여 천주泉州 동안현同安縣 주부主簿에 임명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곧바로 부임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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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인사이동에서 현임자의 후임이 되는 것이 내정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일단 거주지인 건주建州 숭안현崇安縣에 돌아갔다가 소흥 23년(1153)의 여름에 부임길에 올랐다. 숭안에서 동안同安을 향하여 가는 이 여정이 그의 사상을 결정짓는 만남을 초래하게 된다.
숭안을 출발한 주희는 건계建溪를 따라 남하하여 남검주南劍州-현재의 南平-를 지나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의 부친 주송朱松과 마찬가지로 나종언羅從彦에게서 수학한 이동李侗이 살고 있었다. 주희 자신 및 후세의 주자학자에 의한 현창을 거쳐서 그들에 관하여 잘 알고 있는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눈에는 두 사람의 만남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비친다. 나종언의 스승인 양시楊時는 정호에게 "나의 도道는 남쪽으로 전해질 것이다"라고 기대되었던 인물이고, 그의 학술을 전하는 이동에게 주희가 가르침을 청하러 길을 떠난 것은 당연한 과정이라고 보인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중기 이전부터 높은 명성을 날리고 있던 양시에게는 그 문하에 장구성을 비롯하여 많은 훌륭한 제자들이 있었고, 나종언은 시골에 파묻혀 사는 범용한 학자에 지나지 않았다.
<<송원학안宋元學案>>이 나종언의 문인으로서 이동과 주송 두 사람밖에 이름을 내세우고 있지 않다는 것, 주송이 양시 문하의 다른 인물도 사사했다는 것, 자식의 교육을 위해 다른 우인友人을 만나 유언을 남겼다는 것 등을 종합해서 생각해보면 나종언 및 그의 문인 이동이 당시 어느 정도의 평가를 받고 있었는가는 자연스럽게 상상이 갈 것이다. 주희는 범여규范如圭에게 보낸 서간에서 이동에 대하여 일부러 소개하고 있다.(<<朱文公文集>> 권37, <與范直閣>)
범여규는 호안국 문하의 뛰어나고 훌륭한 도학자이면서 건양建陽에 거주하고 있었던 인물이다. 그런 그조차도 이동이라는 이름을 몰랐다고 한다면 이동은 철저하게 무명에 가까운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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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송이 진작부터 이 동문同門의 선비를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겨우 100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인물에게 그 자식이 임지로 향하는 도중, 그 기회에 잠깐 들러서 첫 대면의 인사를 시키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두 사람의 만남은 좀더 일찍 이루어져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운명은 두 사람을 대면시키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것이 주희의 생애에서 가장 결정적인 만남이었다는 것은 선행의 제 연구가 한결같이 지적하는 바이다. 다만 첫 번째의 만남으로 인해 곧바로 주희의 사색에 일대 변화가 오지 않았다는 것은 그 자신이 후년에 술회하고 있다. 이동에게 들었던 것을 동안同安에서 반추할 때 그 깊이를 깨닫고 주희는 임기가 만료되어 숭안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다시금 이동의 거처를 찾아가서 만나 뵈었다.
그때까지 주희의 사색적인 경향은 선禪의 강한 영향 아래에 있었는데, 이동과 만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되고 이정의 학통을 계승하는 도학자로서의 자각이 싹트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마음 수양 방법의 문제에서 현저하게 드러났다. 이동은 마음이 발동하여 나오지 않는 미발未發의 단계 이른바 고요할 때(靜時)의 마음상태에 그 중점을 두었다. 고요할 때에 대본大本을 체인體認해두면 갖가지 사물에 대해서 스스로 올바르게 대응할 수가 있다. 그럴 때야말로 이일理一이면서 분수分殊인 이 세계의 상태에 대처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러한 수양에 힘쓰면서도 마음의 본체와 그 작용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만 할 것인가라는 의문이 주희에게는 아직 남아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서 장식張栻을 방문하고 그 스승인 호굉으로부터 전하는 소위 호남학湖南學의 학풍을 접하게 된다. 그들의 논법은 '미발未發은 성性이고, 이발已發은 심心이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결국 미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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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에 관해서는 수양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마음이 발동한 상태에 있어서의 그 움직임을 명확히 파악하는 것, 이른바 찰식察識이 중시되었다. 거기에 그들의 성설性說, 즉 성 그 자체를 선악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사고방식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여기에서 주희의 사색은 미발에서 이발 쪽으로 다시 크게 흔들렸던 것이다.
그 흔들림에서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은 주희 자신의 사색에 의해 초래된 결과였다. 그때 그가 근거로서 강조했던 것이 장재의 '심心은 성性과 정情을 통합한 것'이라는 테제였다. 마음이라는 개념을 둘러싼 주희의 사색은 여기에서 일단락짓게 된다.
이러한 소위 정론의 확립이 주희의 사색의 종착점은 아니었으며 그후 그의 교설을 계승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 심성론이 더 한층 전개되고 완성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역시 여기에서 잠시 멈추어서서 주희의 심성론에 관해서 살펴두고 싶은 이유는 그러한 심·성·정의 취급방법이 북송 이래의 성설의 전개사 속에서 하나의 전형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정확하게는 후세에 주희의 정론을 가지고 한 방면의 전형으로 삼고, 한편으로는 육구연의 주장을 가지고 다른 한 방면의 전형으로 간주하는 것에 의한 이항대립의 도식이 상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뒤에서 서술하는 바와 같이 두 쪽 모두 맹자의 성선설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는 북송 때의 제 논의의 과정 속에 있는 특정한 유파(道學)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마치 때로는 하늘과 땅만큼의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처럼 취급을 받고, 때로는 외관상 상반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그렇다고 이 종류의 논자들도 인정한다-내실內實은 동일한 것이라고 하여 그 조정이 시도되었다. 또한 때로는 양자가 제각기 시기에 따라 주장을 바꾸어 놓았다고까지 얘기되는-그 대표적인 경우가 '만년정론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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年定論'이라는 사고방식-이러한 이항대립성의 폭넓은 인지와 대립이 있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말의 갖가지 표현 차이를 모두 자기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동향의 실상을 해명하기 위해서 주희의 정론에 관한 설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주희의 정론은 장재의 '심통성정心統性情'과 정이에 의한 '성즉리性卽理'라는 두 개의 규정 위에서 성립되어 있다. 그래서 먼저 이 두 개의 말에 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심통성정'의 본래의 출전은 사실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주희가 편찬한 <<근사록>> 권1에 의해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고 있기는하지만, 장재가 언제 어떠한 문맥에서 집필한 것인지 또는 발언한 어구인가는 알 수 없다. 그의 문장·어록을 수집하여 편집한 <<장자전서張子全書>>는 명대 후반의 편찬물이고, 그 안에 수록된 <성리습유性理拾遺>에 이 유명한 어구를 포함한 조문이 보인다. 단지 <성리습유>란 명대 초기에 편찬된 <<성리대전性理大全>>에서 골라내어 수집했다고 하는 의미이며, 실제로 그 권33 '심성정心性情'에 <<장자전서>>의 일련의 조문이 세 개로 구분되어 수록되어 있다. 그 맨 처음에 나오는 조문은 "장자가 말하기를 심은 성정을 통합한다(張子曰, 心統性情者也)"라고 하는 바로 그 어구만으로 되어 있어 앞뒤의 맥락을 전혀 알 수가 없다. <<성리대전>>은 <<근사록>>으로부터 인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원대에 편찬된 <<장자어록張子語錄>>에는 <후록하後錄下>에 '심통성정'이 몇 번 등장하기는 하지만 어록의 본체에는 이러한 어구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후록하>란 <<주자어류朱子語類>>에서 발췌하여 쓴 것으로, 예컨대 주희가 발언한 말들 중에서 장재에 관련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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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집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 어구가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그 태생부터 의심스러운 이 어구가 지금에 와서 장재의 사상을 말하는 데 빠뜨릴 수 없게 된 것은, 주희가  이것에 의거하여 자신의 정론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것은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면 주희 이전 시대에는 이 어구가 그다지 주의를 끌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보다는 장재라는 사상가 자체가 도학자들 사이에서 평판이 높았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역사적 사실로서 이정과 교류한 사실이 있고, 이정이 그 나름의 경의를 표시하여 그에 관해 언급한 어록이 남아 있기는 하다.
또한 장재의 문하에는 그의 사후에 정이를 스승으로 우러러 받는 자들도 많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동일한 문장이 문헌에 따라서 장재의 발언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정이의 것으로 되어 있기도 하였다. 하지만 도학의 본류는 철저하게 이정 문하의 것이었고, 장재는 이것과는 약간 성격을 달리하는 사상가로서 부즉불리不卽不離의 관계로 보였던 것 같다. 그가 도학사에서 찬연히 빛나는 거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정몽正蒙>>과 <<서명西銘>> 및 그 태허太虛의 사상, 거기에 '심통성정'이라고 하는 한 마디의 어구 등이 주희의 현창을 거친 결과였다. 이것과 비슷한 상황이 '이학理學의 개산開山'이라고 불리는 주돈이周敦頤에게도 벌어진다는 것은 제3장에서 상세하게 살펴본다.
... 주희는 무엇때문에 '심통성정'을 그토록 중시하였던 것일까. 그는 어떤 문인에게 성性·정情·심心·인仁의 관계에 관하여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횡거橫渠(張載)가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데, '마음(心)은 본성(性)과 감정(情)을 통합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맹자가 '가슴아 파하는(惻隱) 마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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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함(仁)의 실마리이고, 부끄러워하고 싫어하는(羞惡) 마음은 의로움(義)의 실마리이다'라고 말한 것도 본성과 감정과 마음을 매우 잘 설명하고 있는 말이다. 본성에는 선善하지 않은 것은 없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 감정이 되지만, 여기에는선하지 않은 것도 있다. 선하지 않은 것은 마음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마음의 본체에는 원래 선하지 않은 것이 없고, 그것의 결과로서 선하지 않게 흐르는 것은 감정이 바깥의 사물(外物)에 옮겨져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본성이란 이치(理)의 총체적인 명칭이며, 인자함(仁)·의로움(義)·예의바름(禮)·지혜로움(智)은 모두 번성 가운데 있는 이치의 총체적인 명칭이다. 가슴 아파하고(惻隱)·부끄러워하고 싫어하며(羞惡)·겸손하고 양보하며(辭遜)·참과 거짓을 가리는 것(是非)은 감정이 드러날 때의 명칭으로 이것들은 감정이 본성에서 비롯되어 선하게 된 것이다. 그 실마리가 드러난 것은 매우 미미하지만, 모두가 이 마음에서 나온다. 때문에 '마음은 본성과 감정을 통합한다'라고 말한다. 본성이란 어떤 것이 특별히 마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본성과 감정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朱子語類>> 권5)
이렇게 설명함으로써 주희는 본성 그 자체에는 선악의 구별이 없다는 기존의 사고방식과 결별하였다. 왕안석이 한유의 잘못으로 비판하였던 인의예지를 본성으로 인정한다고 주희는 감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만인에게 본래적인 성性과 실제로 각자에게 부여되어 있는 본성을 구별하는 발상을 장재에게서 배웠기 때문이다. 장재는 이렇게 말한다.
형체를 갖춘 단계가 되고 나서 기질의 성이라는 것도 나타난다. 원래의 곳으로 돌아갈 수가 있다면 천지의 성을 유지할 수가 있다. 따라서 군자는 기질의 성을 성이라고는 부르지 않았던 것이다.(<<正蒙>><誠明>)
p.111
여기에서는 천지의 성과 기질의 성이라는 이층구조二層構造에 의해 성을 파악하는 방식으로, 맹자가 말한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성과 순자 등이 말하는 현실적인 사람의 양태로서의 성이 정합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사람은 본래 선善으로서의 본성을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질의 소위所爲에 의해 악행이 생겨난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악을 없애기 위해서는 기질을 선善으로서의 본성으로 되돌리기만 하면 된다. 기질변화론氣質變化論이라고 불리는 주자학의 수양론은 이러한 성설에 근거하고 있었다. 주희는 이러한 자기 학설에 의해 '태어난 그대로야말로 본성(性)'이라고 해야할, 앞에서 예를 든 정호의 주장을 막무가내로 바꾸어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인의예지를 전자의 의미의 본성으로서 사람의 마음에 미리 부여된 리理라고 간주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성즉리설性卽理說이다. 다음으로 그 전거가 된 정이의 발언을 살펴보자.
맹자가 사람의 본성(性)이 선하다고 말한 것은 옳다. 순자나 양웅 정도의 학자라도 역시 본성에 관해서는 이해하고 있지 않다. 맹자가 이들 유자儒者보다 한 단계 뛰어난 점은 본성에 관해서 확실히 해둘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분성에 선하지 않은 것은 없다. 선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재才이다. 본성이란 다름아닌 리理이다. 리란 요순堯舜 뿐만 아니라 그 주변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동일하다. 재는 기氣로부터 부여받지만 기에는 청탁淸濁이 있다. 기의 맑은 것을 받으면 현인이 되지만, 기의 탁한 것을 받으면 우둔한 자가 된다.(<<河南程氏遺書>>권18)
성에 대한 재를  세우는 것으로 정이는 성선설을 지지하는 논리를 만들어 내었다. 그것이 성즉리설이다. 이러한 리가 그 본래적인 올바름·선함은 지고至高의 존재라고도 말해야 할 천에 의해 보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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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를 통하여 전체 우주와 연결되어 있는 성에 악이라는 성질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정이의 성선설은 맹자가 사용한 문맥의 단면을 그 나름대로 바꾸어 이해함으로써 선으로서의 성이 만인에게 동등하게 부여되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정이의 설명으로 양웅이나 한유가 성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어차피 재의 차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同, 권19) ... 리로부터 말하면 천, 품수稟受로부터 말하면 성, 사람에게 갖추어져 있는 것으로서 말하면 마음이라고 하는데, 이것들은 하나의 리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同, 권22 상)
주희의 성설은 정이의 이러한 발상을 계승하면서 여기에 성과 정이라는 이층구조를 도입함으로써 왕안석이나 정호가 구별하였던 미발과 이발의 벽을 뛰어넘게 되었다. 그것은 본체로서의 성과 작용으로서의 정을 통합하고 주재하는 것이 되는 마음의 제시였다. 따라서 주자학을 성리학이라고 규정하여 단지 육왕심학陸王心學과 서로 대치되는 것으로 삼는 그러한 이해는 지나칠 정도로 표면적이다. 문제는 마음(心)이 아니며 또한 성리性理를 설명했다고 하는 등의 차원이 아니다.('문제는 마음을 말했다거나 성리를 말했다고 하는 등의 차원이 아니다'의 오역인듯... 원문 확인 불가하여 오역이라 확언할 수는 없음, 원저자가 이상하게 썼을 수도...;;) 이미 선학先學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주자학이 말하는 '마음'과 심학이 말하는 '마음'이 내용적·구조적으로 어떻게 달랐는가 하는 차원에서의 비교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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