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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31일 목요일

하늘도 감동한 이윤(伊尹)의 성품

하늘도 감동한 이윤(伊尹)의 성품
글 연구위원 김성호


공사 3장 39절을 보면 상제님께서 쓰신 글귀 중에 이윤(伊尹)과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그 내용은 ‘걸이 망하고 탕이 흥함은 이윤에게 있다(桀之亡湯之興在伊尹)’라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상제님께서는 그가 성탕을 도와 대업(大業)을 이루었나니 이제 그 일을 도수로 굳게 짜 놓았다고 말씀하시고, 이 도수가 제 한도에 돌아 닿는 대로 새 기틀이 열린다고 말씀하셨다.
과연 상제님께서는 어떠한 연유로 그에 의해서 좌우된 두 임금의 흥망성쇠를 언급하시고, 나아가 이윤이 성탕을 도와 대업을 이룬 일을 후천의 새 기틀을 여는 개벽공사에 까지 쓰셨을까?


걸왕의 폭정과 이윤의 간언
그는 원래 은(殷)의 주왕과 더불어 중국 역사상 포악무도한 폭군으로 손꼽히는 걸왕 밑에서 선관(膳官)으로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가 걸왕의 신하였을 당시는 걸왕(桀王)이 주변의 모든 제후국을 통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걸왕은, 정사(政事)는 뒷전인 채 궁전을 사치스럽게 치장하고 주색에 빠져 악행만을 일삼았다. 그의 무도함은 도의(道義)에 어긋남을 넘어 죄 없는 백성들까지 무참히 살육하고, 제후국을 침략하여 법도를 짓밟는 등 임금으로서 해서는 안 될 행동까지 서슴없이 자행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불안에 떨며 고통의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나날이 계속되자 백성들의 눈에 걸왕은 국가의 멸망을 재촉하는 폭군이자 광인(狂人)으로 비춰질 뿐이었다. 이때 이 같은 광경을 차마 두고 보지 못해 걸왕에게 학정(虐政)을 자제할 것을 간언한 충신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윤과 관룡봉(關龍逢)이었다.
먼저 관룡봉이 무너져 가는 나라의 장래를 염려해 걸왕에게 선대(先代)의 어진 임금들을 본받아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인애(仁愛)로써 백성을 잘 살게 해야 하늘이 천명(天命)을 거두지 않을 것이라고 간언하였다. 하지만 걸왕은 도리어 충간(忠諫)을 한 관룡봉을 참살시켰다. 이에 당시 선관의 벼슬에 있었던 이윤이 죽음을 무릅쓰고 걸왕에게 또 다시 간언(諫言)했다. 그는 걸왕에게 관룡봉을 참살시킨 일과 더불어 그가 정치의 상도(常道)를 어겨 천심(天心)과 민심(民心)을 모두 잃었음을 말하고 더 이상 백성들을 혹세무민하지 말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한다고 진언(進言)했다. 하지만 걸왕은 이윤의 간언 또한 귀담아 듣지 않았다.
농민으로 돌아간 이윤, 박 땅에서 탕에게 초빙되다
걸왕 자신으로 인해 망국의 징조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었음에도 걸왕은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나날이 더 포악해져만 갔다. 걸왕의 이 같은 모습에 이윤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보기에도 더 이상 미치광이 걸왕을 개도시킬 방법은 없어보였다. 이에 이윤은 모든 것을 뒤로하고 박()땅으로 발길을 돌렸다.
걸왕을 떠나 박 땅으로 간 그는 한 동안 그곳에서 평범한 농민으로 지내며 요순(堯舜)의 도(道)를 마음에 품고 살았다. 당시 그는 초야에 묻혀 생활하느라 행색은 비록 남루할지라도 의(義)가 아니고 도(道)가 아니면 천하를 녹으로 준다 해도 돌아보지 않고, 수천 필의 말을 준다 하여도 거들떠보지 않았을 정도로 성품만은 여전히 강직했다.
한편 이런 그의 성품을 알아본 탕은 정중히 폐백을 갖추어 그를 초빙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윤은 탕의 신하가 되는 것이 요순의 도를 즐기는 것만 못하다 하여, 처음에는 탕의 호의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 같은 그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탕은 이윤 같은 어진 이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수차례에 걸쳐 이윤에게 자신의 신하가 되어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그러자 이윤도 탕의 인물됨을 알아보고는 마음을 바꾸어 요순의 도를 혼자 실천하는 것보다는 탕을 요순 같은 임금으로 만들고 백성들을 요순시대의 백성들로 만들 것이라는 결의를 가지고 탕의 신하가 되었다.
이 내용은 『典經』에 기록된 상제님 말씀과 부합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상제님께서도 “이윤(伊尹)이 오십이 지 사십 구년지비(五十而知四十九年之非)를 깨닫고 성탕(成湯)을 도와 대업을 이루었나니 이제 그 도수를 써서 물샐틈없이 굳게 짜놓았으니 제 도수에 돌아 닿는 대로 새 기틀이 열리리라.”(공사 3장 37절)고 말씀하신 바 있다. 상제님의 이 말씀은 역사적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이윤이 50년이 되어서야 49년 동안의 삶이 헛되었음을 깨닫고, 그동안 실행할 여건이 되지 못해 마음으로만 품고 있었던 뜻을 성탕과 함께 펼쳤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태평성대를 위한 결의를 실행에 옮기다
한편 그가 탕의 신하가 되었을 당시 주변의 제후들도 탕이 덕을 수양한다는 사실을 알고 걸왕을 뒤로 하고 탕에게 모여들었다. 제후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탕에게 귀순하였다는 것만 보아도 당시 걸왕의 폭정이 얼마나 심하였는지는 쉽게 짐작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헌데 이윤은 이들이 귀순하기 이전부터 걸왕의 폭정으로 인한 백성들의 아픔을 탕에게 고하고, 나아가 탕이 요순(堯舜)의 도(道)를 받들어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이룩해야 한다는 큰 계획을 상신했다.
그는 태평성대를 이룩하기 위한 방안으로 탕에게 소왕(素王)과 구주(九主)에 관해서 말하고 법술과 상벌로 탕을 보좌해 요순의 도를 재현시키려 했다. 탕 또한 그의 이 같은 점을 높이 사 우상(右相)이라는 위치까지 하사했는데, 우상이 된 이후에도 그는 탕의 치세(治世)를 도와 탕이 대업을 이룰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했다. 이로써 성탕은 폭정에 신음하는 백성들을 구제하고 나아가 어진 정치로써 태평성대를 이룩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함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탕은 하늘에 계신 상제께 죄를 지은 걸왕을 벌하여 달라고 기원하기에 이른다. 검은 황소를 하늘에 바치며 상제께 기원한 결과 하늘은 탕에게 걸왕을 정벌할 것을 명하였는데,『書經』의 기록에 따르면 ‘탕왕이 하늘의 사명을 부여받은 것은, 그 때 이윤과 같은 신하가 있어 하늘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라고 한다.이로 인해 하늘의 사명을 부여받은 탕은 걸왕을 멸하고 은나라를 세워 대업을 성취할 수 있었다. 탕왕이 대업을 성취한 것이 이윤의 노력 때문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이윤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이는 탕 임금과 이윤이 화합하여 요순의 도를 받들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만약 탕왕이 폭군 걸왕과 같이 이윤의 뜻을 알아주지 않고 폭정만을 일삼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탕왕 사후에도 계속된 그의 노력
그렇다면 과연 탕이 대업을 성취하는 데 있어 이윤이 어떠한 역할을 하였기에 하늘까지 감동하였던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이윤이 폭정에 신음하는 백성을 걱정하여 이들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서는 요순의 도를 따라 태평성대를 이루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이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그의 의로운 성품 때문일 것이다. 그의 이 같은 성품은 탕이 대업을 이룩한 뒤에도 한결같았다. 비록 탕이 대업을 이루어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이것을 꾸준히 지켜나가는 것 또한 대업성취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윤은 탕왕 사후에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주군(主君)을 보좌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탕왕 사후 그가 보좌했던 두 임금〔(외병(外丙)ㆍ중임(中壬)〕은 건강상의 문제로 오래 살지 못하고 단명(短命)하였다. 이에 이윤은 대신(大臣)들과 상의하여 탕왕의 손자(孫子)인 태갑(太甲)을 왕으로 즉위시켰다. 하지만 태갑제(太甲帝)가 왕좌(王座)에 오른 지 3년 만에 나라의 법도는 무너지고 정사도 나날이 어지럽게만 되어갔다. 그는 탕왕이 만들어 놓은 법도마저 없애버리고 향락에만 빠져 점점 더 포악해져만 갔다. 이대로 태갑제를 방치해 두었다가는 제2의 걸(桀)왕이 되어 나라를 망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에 이윤은 태갑제를 탕왕(湯王)의 묘가 있는 동궁(桐宮)으로 보내 회유케 했다. 이윤이 태갑제를 동궁으로 보낸 까닭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선대성군(堯·舜·禹·湯)으로부터 지켜진 태평성대를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윤은 태갑제를 동궁으로 보낸 이후에도 그에게 덕치를 실현한 우(禹)왕과 폭군 걸왕의 선례를 들며 왕으로서 지녀야할 덕을 훈계하였다. 하지만 태갑제는 이윤의 간언을 귀담아 듣지 않고 귀찮게만 여겼는데, 이윤은 이에 연연하지 않고 태갑제를 반드시 어진 성군으로 만들겠다는 마음을 놓지 않았다. 그는 태갑제가 마음을 다잡을 때까지 끊임없이 찾아가 어진 임금들의 법도를 교화하고 이를 따라야 한다고 간언했다.이 같이 계속된 그의 노력으로 인해 마침내 태갑제는 동궁으로 간지 3년 만에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마음을 다잡았다. 이에 이윤은 정권을 다시 태갑제에게 돌려주었고, 이윤의 간언으로 개과천선한 태갑제는 그의 훈계대로 성군들의 덕을 본받아 어진정치를 행했다.

천하사(天下事)를 위해 천도(天道)를 따른 이윤
이윤의 인품은 후대에도 칭송되었는데, 송나라의 유학자 주돈이(周敦)의 말을 참고하면, 이윤은 뛰어난 현자로서, 자신이 보좌하던 임금이 요순의 법도와 정사대로 백성을 다스리지 못하면 이를 자신의 탓으로 여겨 항상 자신을 책망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백성들 중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자리를 잡지 못했다면 그것까지 자신의 책임으로 여겨 마치 사람 많은 시장에서 종아리를 맞는 것과 같이 스스로를 책망했었다고 한다. 이처럼 이윤은 매사를 남의 탓으로 돌리기보다는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여겨 임금을 보좌하는 재상(宰相)의 위치에서 늘 자신의 과부족을 반성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러한 그의 성품 때문인지 그가 생(生)을 마감한 뒤에도 그의 뜻을 높이여긴 사람들은 명재상 이윤이 뜻을 두었던 것에 뜻을 두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실천한다면 누구나가 현자(賢者)가 될 수 있다고까지 말하였다.
일생 동안 변치 않았던 ‘이윤의 뜻’이란, 아래로는 백성을 위하고, 위로는 임금을 도와 선대(先代) 성군(聖君)으로부터 이어져온 태평성대를 지키는 것이었다. 이처럼 요순의 도를 지키는 것에 자신의 뜻을 두고 이 일을 평생사명(平生使命)으로 여긴 이윤은 일생 동안 어떠한 난관에 봉착해도 자신의 뜻을 굽히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이를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 이윤은 사욕에 빠지지 않고 죽는 날까지 자신이 맡은 바 소임을 완수했다. 이로 인해 자신이 보좌했던 탕임금과 태갑제는 모두 성군(聖君)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는데, 이러한 그의 덕성(德性) 때문인지 그는 임금에서부터 백성과 신하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로부터 인망(人望)을 얻을 수 있었다.
상제님께서도 “걸이 망하고 탕이 흥함은 이윤에게 있다”라고 말씀하신 까닭도 이윤의 이 같은 면모를 말씀하신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가 살았던 시국은 비록 난세(亂世)였지만, 그는 언제나 자신의 마음을 요순의 도에 비추어 항상 자신을 채찍질하였다. 모든 일을 남의 탓으로 돌리기보다는 늘 자신의 과부족이라 여기며 천하사에 임하는 자의 마음가짐을 갖추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것이다. 그의 노력은 자신의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천하사를 위해 마음을 다잡았고, 그 마음을 임금과 백성들에게까지 미치게 하였다.
이러한 그의 모습이 하늘의 법도〔天道〕와 다르지 않았기에 하늘도 그의 행실에 감동하였던 것이라 생각된다. 상제님께서 그를 높이 여기신 이유도 아마 그가 평생을 사욕(私慾)에 얽매임 없이 천도(天道)를 따라 천하사에 임하여 자신의 책무를 완수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지러운 난세에서 평생을 변치 않고 천도를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수도인들도 이윤의 이 같은 성품을 본받아 일상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며, 자신의 과부족을 살피고 이를 고쳐 나가야 할 것이다. 이로써 자신의 마음을 무욕청정하게 한 이후로는 이윤이 모든 것을 요순의 도에 비추어 뜻을 세우고 변치 않는 마음으로 이를 실천하였듯, 우리 수도인들도 양위 상제님의 유지(遺志)와 유법(遺法), 그리고 도전님의 유훈(遺訓)에 모든 것의 잣대를 두고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변치 않는 마음으로 이를 실천하고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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