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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강의(經史講義) 35 ○ 서경(書經) 6 |
[함유일덕(咸有一德)] |
착한 일을 하면 상서를 내리고 착하지 않은 일을 하면 재앙을 내리는 것은 천도(天道)의 떳떳함이니,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늘인데도 “하늘은 믿기 어렵다.”고 함은 무엇 때문인가?
[홍의호가 대답하였다.]
천도가 복선화음(福善禍淫)함은 바로 떳떳한 이치입니다. 생각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호응하는 것은 그림자나 메아리보다도 빨라 지금 선을 하면 복을 주고 다음날 음란하면 화를 주니, 하늘에 있어서는 일정한 명(命)이 되지만 사람에게 있어서는 일정하지 않은 명이 되므로 ‘믿기 어렵다’고 했던 것입니다.
천도가 복선화음(福善禍淫)함은 바로 떳떳한 이치입니다. 생각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호응하는 것은 그림자나 메아리보다도 빨라 지금 선을 하면 복을 주고 다음날 음란하면 화를 주니, 하늘에 있어서는 일정한 명(命)이 되지만 사람에게 있어서는 일정하지 않은 명이 되므로 ‘믿기 어렵다’고 했던 것입니다.
‘권구일덕(眷求一德)’에서, 구(求) 자는 《시경》의 ‘구민지막(求民之莫)’의 구와 같으니, 하늘이 임금과 스승의 책임을 맡기는 데 있어 구하는 데에도 뜻을 둔 것인가? 오직 하늘이 총명한 사람을 내었다면 낼 때에 이미 얻었는데, 또 무엇 때문에 구한단 말인가.
[이서구가 대답하였다.]
‘구’라는 한 글자에서 하늘의 지극히 공평한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구한다’고 하지 않았다면 혁명하여 하(夏) 왕조를 타도하고 상(商) 나라를 여는 뜻은 걸(桀)의 죄가 뚜렷하게 드러나고 탕(湯)임금의 덕이 능히 천심(天心)에 맞게 되는 날을 기다리지 않고도 이미 앞서 정해져 있어서, 도리어 기수(氣數)에 돌아갔을 것입니다. 하늘이 하 나라의 명을 끊으려고 하지 않았으나 걸의 죄가 저와 같으므로 끊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미 끊고는 또 덕 있는 사람을 구하여 큰 임무를 내리지 아니할 수 없었으니, 이것이 탕임금이 두텁게 권우(眷祐)를 받은 까닭입니다. 구하여 얻은 뒤에는 또 하늘이 탕임금을 낸 것이 본래 우연일 뿐이 아니므로 “하늘이 곧 왕에게 용맹과 지혜를 내려 주었다.” 하였으니, 성인의 말씀이 정밀하기가 이와 같습니다.
‘구’라는 한 글자에서 하늘의 지극히 공평한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구한다’고 하지 않았다면 혁명하여 하(夏) 왕조를 타도하고 상(商) 나라를 여는 뜻은 걸(桀)의 죄가 뚜렷하게 드러나고 탕(湯)임금의 덕이 능히 천심(天心)에 맞게 되는 날을 기다리지 않고도 이미 앞서 정해져 있어서, 도리어 기수(氣數)에 돌아갔을 것입니다. 하늘이 하 나라의 명을 끊으려고 하지 않았으나 걸의 죄가 저와 같으므로 끊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미 끊고는 또 덕 있는 사람을 구하여 큰 임무를 내리지 아니할 수 없었으니, 이것이 탕임금이 두텁게 권우(眷祐)를 받은 까닭입니다. 구하여 얻은 뒤에는 또 하늘이 탕임금을 낸 것이 본래 우연일 뿐이 아니므로 “하늘이 곧 왕에게 용맹과 지혜를 내려 주었다.” 하였으니, 성인의 말씀이 정밀하기가 이와 같습니다.
‘유윤궁기탕 함유일덕(惟尹躬曁湯咸有一德)’은, ‘유윤궁극좌우궐벽(惟尹躬克左右厥辟)’부터 여기에 이르기까지 매번 스스로 그 자(字)를 칭하였으니, 임금 앞에서 칭하는 자는 옛날과 지금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아니면 또 은(殷) 나라 사람은 질(質)을 숭상했으므로 그러한 것인가?
[이서구가 대답하였다.]
윤(尹)이 이름인지 자인지는 그 설이 한결같지 않아 적당한 것을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만약 자라면 임금 앞에서 신하는 이름을 부른다는 법도에 어긋납니다. 소(疏)에, “옛사람은 질박하고 정직하니 후대의 예절로 요약할 수 없다.” 하니, 이치가 혹 그럴 만합니다.
윤(尹)이 이름인지 자인지는 그 설이 한결같지 않아 적당한 것을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만약 자라면 임금 앞에서 신하는 이름을 부른다는 법도에 어긋납니다. 소(疏)에, “옛사람은 질박하고 정직하니 후대의 예절로 요약할 수 없다.” 하니, 이치가 혹 그럴 만합니다.
‘궁기탕 함유일덕(躬曁湯咸有一德)’이라는 말은 스스로를 자랑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이윤이 혐의하지 않았음은 무엇 때문인가? 선대 유학자들은 비록 자임하는 기상으로 논하였지만, 일의 공은 본래 자임할 수 있어도, ‘덕’이란 한 글자를 그리 쉽게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가? 옛사람들이 스스로 칭함에 부덕(否德)이나 과덕(寡德)이라 하며, ‘덕’이라는 말을 스스로 부담하지 않았다. 더구나 순일하여 잡되지 않은 덕이라는 말은 극도로 찬미하는 뜻이 되는 데이겠는가. 또 하물며 스스로 선왕에 비하는 데이겠는가. 만약 고요가, “내가 순임금과 함께 밝은 덕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면 체면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이서구가 대답하였다.]
성인이 도에 나아가는 마음은 끝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조예가 고명하고 공화(功化)가 융성하더라도 자신에 대한 평가는 항상 부족한 것처럼 하여 물러나고 겸손합니다. 그러나 큰일을 맡고 큰 책임을 감당할 때에 이르러서는 혹 사양하고 겸손할 수 없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윤이 부름에 응한 처음에 천민(天民)의 선각(先覺)으로서 자인하였다가, 오늘 도리어 혐의쩍은 자취를 돌아보고 짐짓 물러나 피하려는 말을 한다면 문득 성실한 도리가 아닙니다.
더구나 원로(元老)로서 어린 군주를 권면하는 즈음에 또 어찌 그 진실을 숨길 수 있겠습니까. 고요가 순임금에게 있어서 현명한 임금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만나 충성스러운 신하가 기뻐하여 일하면 다스림이 흥기되는 것[明良喜起]이 성대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탕임금이 배운 뒤에 신하로 삼은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으니, 아마도 비교하여 같다고 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성인이 도에 나아가는 마음은 끝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조예가 고명하고 공화(功化)가 융성하더라도 자신에 대한 평가는 항상 부족한 것처럼 하여 물러나고 겸손합니다. 그러나 큰일을 맡고 큰 책임을 감당할 때에 이르러서는 혹 사양하고 겸손할 수 없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윤이 부름에 응한 처음에 천민(天民)의 선각(先覺)으로서 자인하였다가, 오늘 도리어 혐의쩍은 자취를 돌아보고 짐짓 물러나 피하려는 말을 한다면 문득 성실한 도리가 아닙니다.
더구나 원로(元老)로서 어린 군주를 권면하는 즈음에 또 어찌 그 진실을 숨길 수 있겠습니까. 고요가 순임금에게 있어서 현명한 임금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만나 충성스러운 신하가 기뻐하여 일하면 다스림이 흥기되는 것[明良喜起]이 성대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탕임금이 배운 뒤에 신하로 삼은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으니, 아마도 비교하여 같다고 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좌우유기인(左右惟其人)’은, 이윤이 이미 군신동덕(君臣同德)으로써 태갑을 권면하였고 또 좌우를 그 적임자로 하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이미 물러났으니 태갑이 장차 어떤 동덕과 같이 천직(天職)을 다스리겠는가. 대신이 장차 물러나려 하면 마땅히 어진 사람을 천거하여 자신을 대신하도록 해야 하는데, 이윤이 천거한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니 무엇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글에서 고찰할 수 있는가?
[이서구가 대답하였다.]
태갑이 이미 허물을 고치고 덕을 마쳤으니 일대의 어질고 뛰어난 사람, 곧 구단(咎單)이나 이척(伊陟 이윤의 아들)과 같은 무리들이 필시 조정에 늘어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윤이 비로소 물러나려 한 것이지만 누구를 천거하여 대신하게 했는지는 다시 상고할 수 없습니다. 신이 어찌 감히 억지로 대답하겠습니까.
태갑이 이미 허물을 고치고 덕을 마쳤으니 일대의 어질고 뛰어난 사람, 곧 구단(咎單)이나 이척(伊陟 이윤의 아들)과 같은 무리들이 필시 조정에 늘어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윤이 비로소 물러나려 한 것이지만 누구를 천거하여 대신하게 했는지는 다시 상고할 수 없습니다. 신이 어찌 감히 억지로 대답하겠습니까.
‘유화유일(惟和惟一)’의 일(一)은 ‘임현일사(任賢一事)’의 일이고 ‘통체일덕(統體一德)’의 일은 아닌가? 나누고 합하는 것이 비록 크고 작음이 있으나 그 실은 같은 것이 아닌가.
[이서구가 대답하였다.]
어진 사람에게 맡기는 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결같이 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순일하고 잡되지 않은 덕에 근본하므로 ‘유일’은 곧 일덕(一德)의 한 가지 일이니, 대소는 비록 다르지만 체용(體用)은 실로 서로 의지합니다.
어진 사람에게 맡기는 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결같이 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순일하고 잡되지 않은 덕에 근본하므로 ‘유일’은 곧 일덕(一德)의 한 가지 일이니, 대소는 비록 다르지만 체용(體用)은 실로 서로 의지합니다.
‘선무상주 협우극일(善無常主協于克一)’에 대하여 장남헌(張南軒)은 “이 말이 매우 좋다.”고 하며 ‘정일(精一)’의 훈계와 비교하였다. 이윤이 요순의 도를 즐겼기 때문에 순임금과 우가 주고받은 은미한 뜻을 가져와 태갑에게 일러 주었는데, 그 훈계하는 말을 살펴보면 ‘주선(主善)’은 ‘유정(惟精)’이고 ‘협일(協一)’은 ‘유일(惟一)’이다. 그런데 ‘집중(執中)’의 뜻은 보이지 않으니 왜인가? 일(一)이 곧 중(中)이기 때문에 그런가?
[홍의호가 대답하였다.]
인군의 덕이 선을 주로 하여 일(一)에 합치되면 이것이 바로 천하의 선을 택하고 천하의 중(中)을 때에 맞게 하는 것입니다. 선유들이 말한 바 ‘주선협일(主善協一)’ 네 글자가 정일(精一)과 집중(執中)의 뒤를 이을 수 있다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인군의 덕이 선을 주로 하여 일(一)에 합치되면 이것이 바로 천하의 선을 택하고 천하의 중(中)을 때에 맞게 하는 것입니다. 선유들이 말한 바 ‘주선협일(主善協一)’ 네 글자가 정일(精一)과 집중(執中)의 뒤를 이을 수 있다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무자광이협인(無自廣以狹人)’은, 소주에 신안 진씨가, “일덕(一德)이 비록 온전하더라도 더욱 스스로 만족하게 여겨서는[自足] 안 된다.” 하였으니, ‘자족’은 곧 ‘자긍(自矜)’이다. 사람이 자긍하기 때문에 덕이 온전하지 못하니, 덕이 이미 온전한데도 자긍하는 병통이 있는가?
[이서구가 대답하였다.]
일덕이 이미 온전해지면 스스로 자랑하는 마음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덕이 성한 사람은 스스로 만족하게 여기기 쉬우므로 진씨가 이와 같이 말하였으니, 대체로 힘쓰고 그만두지 않는 뜻을 논하여 이윤이 이것을 말한 본의를 밝혔습니다.
일덕이 이미 온전해지면 스스로 자랑하는 마음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덕이 성한 사람은 스스로 만족하게 여기기 쉬우므로 진씨가 이와 같이 말하였으니, 대체로 힘쓰고 그만두지 않는 뜻을 논하여 이윤이 이것을 말한 본의를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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