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9호-형·지地상학] 중국 개혁개방 30년, 지식인 지형의 변천
현대사 속의 중국 지식인
현대 중국 지식인이 걸어온 길은 순탄치 않다. 전통사회에서 중국 지식인은 사농공상의 으뜸으로서 통치이데올로기 해석권을 기반으로 학술과 중앙·지방정치의 중심에 있었지만,청말 전통왕조의 위기가 과거제도 폐지와 맞물리면서 중국 지식인의 신분적 기반이 한꺼번에 흔들렸다. 이때 중국 지식인들은 신식교육을 받고 근대적 지식인으로 거듭나거나 매판, 상인, 출판인, 법조인, 의사, 막료, 군인 등 새로운 길을 갔다. 그중 일부는 유명대학 교수나 작가, 출판계의 거물로 남부럽지 않은 지위를 누렸지만 대부분의 지식인은 그 전 시대에 비해 주변화되었다. 민국시대 개막 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그리고 그 이후까지도지식인은 정치·군사적 격랑 속에서 쇠락을 거듭했다. 국민당과 공산당이 대립하던 시절에는 정치적인 노선을 선택해야 했고, 일본과 전쟁이 벌어진 1937년 이후에는 학술보다는 생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했으며,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에는 마오쩌둥의 반지식인 정책으로 고초를 겪어야 했다. 마오쩌둥은 일찍이 지식인을 혁명에 동원했다. “지식인은 그들 자신이 가장 무식하고 노동자·농민이 오히려 그들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지식인들은 마오쩌둥에게 적극협력하거나 학술의 영역으로 침잠했다. 그러나 어떤 선택을 했든 크고 작은 정치운동의 연쇄 속에서 박해를 받거나 지식과는 무관한 일을 하며 긴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럼에도 국가와 사회의 현실을 자신의 일로 생각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 지속적으로 애쓴 지식인들이 있다. 민국시대 초기 국민성 개조를 부르짖으며 절망적인 상황에 맞섰던 루쉰, 신문화운동의 주역 천두슈, 후스 리다자오, 민주동맹의 대표자 뤄룽지 등이 그들이다. 1989년 6월 톈안먼 민주화운동의 주역이었던 왕단은 이들을 ‘1세대 공공 지식인’이라 부른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문화대혁명까지 극심한 시련의 시간을 보낸 중국 지식인들은 1980년대부터 다시 조금씩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이 시기 중국에서는 개혁·개방을 강조하는 시대 분위기를 틈타 정치 민주화 요구가 거세게 일었다. 아울러 격렬한 비판의 대상이었던 전통 사상이 재평가되고 새로운 서양 사상이 유입되는 등 지식의 스펙트럼도 다양해졌다. 비록 한계는 있지만 80년대 초반은 중국 지식계의 봄이었다. 그리고 문화대혁명 이후 1977년에 재개된 대학 입시 관문을 통과해 대학에서 성장한 청년 지식인들이 다양한 지적 기반을 갖추고 중견 지식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80년대 이후 중국 지식계의 담론은 풍성하고 지식자원도 다양하다. 이 시기 중국 지식인의 지적 탐구는 학술적 차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중국의 현실을 진단하고 전망을 모색하는 일과도 관련되어 있었다. 이런 면에서 80년대 이후 중국 지식인들은 민국시대 ‘1세대 공공 지식인’의 계승자이다. 이 글에서는 1980년대부터 최근까지 중국 지식인 사회에서 어떤 주제를 핵심적으로 논의했는지, 그 과정에서 지식인의 지형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개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80년대의 민주화운동과 문화열
통상 중국의 80년대는 11기 3중 전회가 열린 1978년을 기점으로 삼는다. 이때의 사회적 분위기 전환은 ‘시단민주벽’이 잘 보여준다. ‘시단민주벽’은 베이징의 시단에 위치한 버스정류장 뒤에 설치된 200미터 정도의 담벼락에 중국의 역사에 대한 평가와 언론 자유, 민주주의 모색 등의 견해를 담은 대자보들이 붙으며 진행된 운동을 가리킨다. 이 때 웨이징성의 『탐색』, 쉬원리의 『45논단』, 왕쥔타오의 『베이징의 봄』등 민주주의 성향의 간행물이 발행되었다. 이 잡지의 주도자들은 80년대 중국 민주화운동의 지도자로 활약했다.공산당 내에서도 분권, 당정 분리, 사법 독립, 언론 독립, 기업관리 체제 개혁을 내건 개혁파가 등장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중국의 정치·경제적 개혁에 대한 논의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러나 대자보 붙이기를 지지했던 덩샤오핑이 운동을 진압하기 시작한다. 1980년 민주화의 열기가 덩샤오핑의 집권에 대한 의구심으로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80년대의 첫번째 민주화 열기는 그렇게 꺾이고 만다.
80년대 지식계의 분위기를 대표적으로 말해주는 또하나의 흐름은 바로 1984년부터 시작된 문화에 관한 논의이다. ‘문화열’이라고도 불리는 이 현상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지식장(知識場)의 확장이다. 이 확장을 이룬 3대 지식인 집단이 있다. 진관타오와 류칭펑의 ‘미래를 향하여’ 그룹, 량수밍 등 신유가가 중심이 되어 결성한 ‘중국문화서원’, 간양의 ‘문화:중국과 세계’ 그룹이 그것이다. 진관타오와 류칭펑은 계몽주의의 열렬한 주창자이자 과학주의자로, 자연과학적 방법론에 입각한 비판적 시각으로 중국사를 해석했다. 이들은 고문을 맡았던 다큐멘터리 <황하의 죽음>을 통해 전통문화의 청산 및 서양식 근대문화로의 이행을 주장했다. ‘중국문화서원’ 그룹에 속한 이들은 마오쩌둥 체제하에서 배척되던 전통문화를 복권·발양시키고 전통문화를 사회주의 현대화에 접목시키려고 노력했다. ‘문화: 중국과 세계’ 그룹은 서양의 근대를 성찰하는 인문주의를 지식 기반으로 삼았다. 특히 간양은 현대화라는 중국의 당면과제를 실현하되 서양의 현대화 사례를 학습하여 대응하자는 ‘이중 작전’ 논리를 폈다. ‘미래를 향하여’와 ‘문화: 중국과 세계’ 그룹은 각각 자신들의 입장을 담은 동명의 잡지를 발간하는 한편 방대한 양의 학술총서를 기획·출판하기도 했다. 이들의 활동은 80년대 중국의 지식장이 교조적 마르크스주의를 뛰어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으며 당시 청년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행사했다. 이들은 1988년에 싱가포르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열띤 토론도 벌였다. 그러나 1989년 문화열에 관여했던 많은 지식인들이 톈안먼 사건에 연루되어 중국을 떠나고 내부의 이해관계로 집단이 해체되면서 문화열은 중단되기에 이른다.
90년대의 시장화와 갈등
톈안먼 사건의 여파와 시장화 개혁의 본격화에 영향을 받아 90년대 중국의 지식인 사회는 새로운 모습을 보이게 된다. 처음에는 톈안먼 민주화운동 실패의 좌절감을 순수 학술연구로 돌파하려는 신진학자들이 등장했다. 1989년 이후 잠시 홍콩에 다녀온 젊은 루쉰 연구자 왕후이가 천핑위안, 왕서우창과 함께 일본 자본의 후원을 받아 1991년 잡지 『학인』을 창간하고, 이후 1998년까지 정치와 거리를 둔 채 역사와 문화를 성찰하는 흐름을 만들고자 했다. 잡지 『학인』에서는 오늘날 중국 학술계의 대가가 된 학자들의 초기작을 여럿 찾아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남순강화 이후 다시 가속화되는 경제발전에 편승해서 정치개혁보다 경제개혁을 우선하는 신권위주의가 등장했다. 샤오궁친, 우자샹 등을 대표자로 꼽아볼 수 있다.
경제성장은 문화공간의 변화도 야기했다. 왕숴의 소설로 대표되는 통속적인 대중문화가 상업화의 바람에 편승하자, 중문학을 전공한 왕샤오밍이 인문정신의 쇠락을 지적했고 이를 계기로 인문정신 논쟁이 일었다. 인문정신의 옹호론자들은 도통, 학통 등 지식인 특유의 엄격한 화두를 제시했고, 인문정신을 부정한 왕멍 같은 이들은 문화대혁명을 통해 이미 지나친 도덕주의의 폐해를 체험했다고 강조했으며, 장이우와 천샤오밍을 위시한 포스트모던·포스트식민주의 이론가들은 인문정신을 거대담론이라며 거부하면서 시장화 개혁에 적극 찬성했다. 이들의 인문정신 논쟁은 표면상으로 문화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바탕에는 시장화 개혁에 대한 견해를 깔고 있었다.
90년대의 경제성장은 민족주의도 발흥시켰다. 경제성장에 따른 자신감이 확산되던 시기에 베이징올림픽 유치에 실패하는 등 서양과의 충돌이 잦아지면서 반서양적 정서가 자라났다. 대표적인 것은 쑹창 등이 펴낸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으로 이들은 최근 『앵그리 차이나』를 발행해서 중국인의 반서양적 자의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아울러 포스트식민주의 이른가들은 서양의 근대성 대신 중화성을 추구해야 한다며 민족주의 성향을 드러냈다. 그러나 사실 이들은 최근에 지적되듯 근본적으로는 서양이 만들어놓은 시장질서와 소비사회를 중화성의 근간으로 삼으며 역으로 서양중심주의의 ‘모범생’이 되어갔다.
중국사회의 시장화 개혁과 민주주의를 본격적으로 다룬 것은 ‘자유주의 논쟁’이다. 이 논쟁은 알려진 것처럼 90년대 중국의 문제점이 국가의 시장화에 있다고 지적한 왕후이의 글에서 시작되었다. 왕후이는 “계몽이 80년대에는 일정한 비판적 역할을 했지만 시장화에 찬성하면서부터는 비판적 생명력을 잃었다”고 비판했다. 이에 자유주의자들은 “중국의 문제는 과도한 시장화가 아니라 여전히 국가의 힘이 과도한 것”이라고 대응했다. 자유주의자 친후이는 “중국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발’이 정상적 시장의 활동을 방해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낙관하는 입장이다. 시장화 개혁이 자연스럽게 민주주의를 유도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양이나 왕후이 등은 그런 낙관에 반박한다.
자유주의 논쟁은 중국의 체제전환에서 비롯된 지식 사회의 분화를 촉발하고 전면화했다.또한 논쟁의 당사자들도 정치, 경제, 학술, 역사(특히 문혁에 대한 평가), 철학 등 모든 분야에서 전 방위적 공방을 주고받았다. 간양과 왕후이를 신좌파로 부르는 이들이 많았지만 이들은 신좌파라는 칭호 대신 ‘자유좌파’ 혹은 ‘비판적 지식인’이라는 이름을 선호했다. 중국에서 좌파가 보여주는 이미지가 마오쩌둥이나 교조적인
마르크스주의를 떠올리는 것을 감안한 것이다. 하지만 여타 외부인들은 거리낌 없이 이들을 신좌파라고 부르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정체성을 찾아서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비판적 문화연구’가 새로운 흐름으로 부상했다. ‘비판적 문화연구’는 영국 버밍엄학파가 저물어가는 고전적 마르크주의를 대체하고자 제창하고 진행했던 것이다. 중국에서는 인문정신의 쇠락을 지적했던 왕샤오밍이 2000년에 문화연구의 필요성을 제창했다. 그는 포스트 마오쩌둥 시대의 중국에서는 ‘새로운 이데올로기’ 분석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그것이 곧 ‘문화’이며 ‘문화연구’를 통해 시장화 개혁이 심화된 중국의 현 상태를 진단하고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또다른 문화연구자로는 베이징대 중문과의 다이진화를 들 수 있다. 그 역시 중국사회 그리고 지식인 사회에 자본이 침투해 만들어낸 현상을 간파하고 이에 대한 분석틀로 문화연구를 제시한다.
중국은 전 세계가 2008년 금융위기로 휘청거릴 때도 거침없이 부상했고 G2담론이 등장한 후로는 더욱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였다. 일군의 사회과학자들은 ‘중국경험’을 서양과 대등한 ‘모델’ 수준으로 격상시켜 ‘중국모델’이라 칭하며 중국의 부상을 포장했다. 물론 중국은 예전부터 세계사의 이론적 흐름에 대응해 독자적으로 진로를 모색해왔다. 일례로2004년에 홍콩 자본의 후원으로 결성된 ‘중국문화포럼’을 들 수 있다. 이 단체는 전 삼련서점 사장 둥슈위가 이사장을 맡았고 이제는 중견학자가 된 간양, 왕후이, 왕샤오밍, 황핑,왕샤오광, 주쑤리 등이 이사를 맡았다. ‘포럼’은 설립취지를 통해 “중국이 전지구화에 대응하는 동시에 중국의 독자적인 방식으로 세계화에 대처하고 더 나아가 오랜 문명국가로서 세계에 기여해야 한다”고 밝힌다. 포럼은 2006년부터 최근까지 매년 열리고 있다. 주제로는 대학교육, 향토중국, 유교, 학술, 5.4시기 서학, 중국의 지속가능성, 드라마 등 중국의 역사와 문화, 학문 등을 다뤄왔다. 아울러 2007년부터는 포럼과 함께 대학공통교육 워크숍을 진행해서 지식인들을 모으고 있다. 대학공통교육 워크숍은 중국적 특성을 갖춘 교양교육 실현을 위한 모임이다.
간양은 매년 포럼과 워크숍을 주관하는 주요 인사로 2000년대 중반부터 주체적인 ‘중국 재해석’에 열중했는데, “오랜 문명국인 중국은 이제 세계사에 모범이 되는 ‘문명-국가’가 돼야 한다고 역설”하기에 이르렀다. 간양의 발언은 지식인 사이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왕후이도 중국 부상의 경험을 자주적이고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물론 이런 상황에 대한 반박도 있다. 쉬지린은 중국 자체의 경험, 중국모델에 역점을 두는 흐름을 ‘역사주의’라고 비판한다. 중국은 특수한 길이 아닌 보편의 길, 즉 이성적 계몽에 바탕을 두고 보편성을 띤 ‘문명’의 길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활동과 논의는 현재 진행형으로 중국의 진로에 대한 새로운 담론 지형 형성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다시 중심으로
사회주의 혁명기부터 현재까지 중국을 해석할 때 자주 따라붙었던 말은 ‘특수성’이다. 문화대혁명기와 시장화 개혁을 추진하던 시기에는 중국의 정체성에 관한 해석이 논쟁거리였다. 지금은 중국의 정치·경제적 진로를 낙관적으로 볼 것이냐, 비관적으로 볼 것이냐를 두고 논쟁하고 있다.
지금까지 다룬 내용은 문화대혁명 종결 이후 재개된 대학교육의 영향을 받은 지식인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30여 년이라는 기나긴 모색과 갈등의 시기를 거친 중국의 지식인들은 근대화 초기의 주변화와 민족국가 건설기의 시련을 넘어 다시 국가의 정체성에 관한 저작권을 발판 삼아 중심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어느덧 자신의 국가를 들여다보는 창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고 있다. 혁명이 부작용을 일으키고 나아가 외면 당한 중국, 그곳에서는 지식인의 관념 속에 국가가 혁명의 자리를 대신하려 한다.
송인재 한림대학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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