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書經) http://hind.tistory.com/m/post/323
《서경(書經)》1은 《시경(詩經)》과 함께 중국 고대문학의 양대 기념비로 간주한다. 《시경(詩經)》이 중국문학의 운문(韻文)의 시원이라면 《서경(書經)》은 산문(散文)의 시원에 해당한다. 《서경(書經)》은 한나라 시대 이전까지 여러 나라에서 전해오던 사관(士官)의 기록을 공자가 정리하여 편찬하여 ‘서(書)’라고 불리다가 이후 유가사상의 지위가 상승되면서 소중한 경전이라는 의미의 ‘서경(書經), 또는 ‘상서(尙書)’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서경(書經)》은 역사 서술을 담당했던 고대 사관(士官)의 기록을 모아놓은 역사서라고 말하지만 실제 내용은 공문서들을 모아놓은 책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에 다음과 같은 말이 실려져있다.
“옛날에는 왕실에서 대대로 사관을 두었는데.., 좌사(左士)는 말을 기록하고 우사(右士)는 일을 기록하였으며 일의 기록이 《춘추(春秋)》가 되었고 말의 기록이 《서경(書經)》이 되었다.”
이런 기록들은 《서경(書經)》이 고대 왕실에서 소장해 왔던 공적인 기록들임을 말해준다. 따라서 서경은 유구한 역사적 기록이며 동시에 풍부한 문학성을 포괄하고 있어서 고대 산문의 시원으로 인정될 만큼 다양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공자의《서경(書經)》은 진(秦)나라의 분서갱유(焚書坑儒)2를 거치는 동안 일시에 자취를 감추었다가 한(漢)나라 시대가 되어 유가사상이 정치이념으로 채택되어 경학(經學)을 장려하자《서경(書經)》이 다시 세상에 전해졌다. 그 당시 다른 경전과 마찬가지로 《서경(書經)》 또한 금문(今文)과 고문(古文)으로 나뉘었는데 그 가운데서 서경은 그 차이가 더 심했다.
금문상서(今文尙書)는 진나라 박사 복생(伏生)이 전한 것으로 모두 29편이며 당시의 글씨체인 예서(隸書), 즉 금문으로 기록되었다. 이 금문상서는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이들을 통해서 진나라 이전의 서경을 찾아볼 수 있다.
고문 상서는 공자의 옛집의 벽속에서 나온 것인데 모두 45편으로 이루어져있다. 공안국(孔安國)이 이것을 금문으로 읽고 해석했으며 그의 사후에 나라에 바쳐졌다. 그러나 유학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일부 유학자들이 조작해 낸 것으로 의심을 받아서 학관(學官)에 채택되지 못하고 곧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오늘날 전해지는 58편의 《서경(書經)》은 동진(東晋)시대 매색(梅賾)이라는 유학자가 조정에 바쳤다는 금문상서 본에 기초하고 있는데 대체로 그의 위작으로 본다. 지금 상서 속에 전하는 위고문(僞古文) 25편이다. 매색(梅賾)의《서경(書經)》은 한나라 초기에 복생(伏生)이 전했다는 금문상서 29편을 근거로 한 것이며 완전히 거짓으로 지어낸 것은 아니라고 판단되었다. 그 당시의 학자들은 아마도 복생이 전해준 29편을 33편으로 늘리고 거기에 25편을 지어내 덧붙여서 만들어 냈으리라고 추측하여 후세로 전해져왔다.
서경은 우(虞) · 하(夏) · 상(商) · 주(周)나라 4대 나라의 역사를 이제(二帝)인 요(堯) · 순(舜)과 삼왕(三王)인 우(禹) · 탕(湯) · 문무(文武)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직접화법 대화체를 사용하고 함축성, 암시성, 수사성이 가미된 서술한 문체는 크게 여섯으로 나뉘는데 아래와 같다.
- 전체(典體) -「요전(堯典)」「순전(舜典)」: 요(堯) · 순(舜) 두 임금의 사적을 미화 시킨 글이다.
- 모체(謨體) -「대우모(大禹謨)」: 동주시대의 글로 추측되는 왕들의 사적을 미화 시킨 글. 모(謨)는 훌륭한 말씀이나 계책이다.
- 훈체(訓體) -「이훈(伊訓)」: 훈은 인도함으로 태갑(太甲)이 지위를 계승하자 이윤이 글을 지어 훈도한 글을 사관이 기록하여 편을 만들었다.
- 고체(誥體) -「대고(大誥)」: 서주시대의 기록으로서 신하에게 가르쳐 당부하고 명령한 글이다.
- 서체(暑滯) -「 감서(甘誓)」: 감(甘)은 지명을 말하는데 정벌하려는 유호(有扈)씨 나라의 남쪽 교외이다. 군사들에게 감(甘)땅에서 죄 있는 자를 정벌한다는 토벌에 대한 맹세를 했으므로 편을 지은 것이다.
- 명체(命體) -「설명(說命)」: 상(商, 殷)나라 고종(高宗)이 신하 부열(傅說)에게 하명한 말을 기록한 글이다.
《서경(書經)》3은 우서(虞書) 5편, 하서(夏書) 4편, 상서(尙書) 17편, 주서(周書) 32편으로 이루어졌다. 대고(大誥)에서 고명(顧命)에 이르는 12편이 가장 오래된 글로서 서주시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밝혀졌지만 나머지 글들은 대부분 공자 이후 전국시대(戰國時代) 즈음에 지어진 것으로 간주된다.
- 요순시절과 하나라에 관한 글들을 모은 '우하서(虞夏書)' 9편에는 하늘의 질서에 따라 백성들의 생업을 안정시키고 관직을 두어 덕 있는 사람을 그 자리에 임명하며, 군주와 신하가 서로 합심하여 이상적인 정치를 실현시키는 내용이다.
- 「요전(堯典)」요임금이 선정을 베푼다음 순임금에게 선양(禪讓)한 사실을 밝혔다. 곧, 요(堯)임금이 고위 관리를 임명하고 농경력(農耕曆)을 만들게 하였고 홍수를 다스리기 위해 곤(鯀)을 발탁한 사실, 다음 순(舜)을 등용하여 정치에 시험한 뒤 선양하는 과정을 기술했다. 순임금이 등극하여 각 지방을 시찰하고, 형법을 정하여 죄 있는 이를 처벌한 사실을 기록했다. 요 임금이 승하하고 순임금이 고위 관리에게 자문하여 여러 관리들을 임명하고 순임금이 승하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 「고요모」에서는 덕 있는 사람이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밝혔다. 정치와 종교가 합일되어 있던 당시의 군주의 자질로 덕을 강조하고 왕위 계승의 중요성을 밝혔다.
- '상서(商書)'는 은(殷)나라에 관한 글로서 군주는 천명을 받아서 올바른 정치를 하여야 한다는 정치 원리를 밝히고 백성에게 이익과 편리를 주기 위하여 수도를 옮긴 사실을 기록했 「고종융일」, 「서백감려」, 「미자」에서는 민심을 잃은 자는 천명을 상실하여 결국 나라를 잃게 되는 천명이 바뀌어 혁명(革命)이 일어난다고 기록되어있다.
- 주나라에 관한 글들을 모은 '주서(周書)'는 일곱 가지로 분류하였다.
- 정치원리 제시 -「홍범」에서 오행설에 기초하여 정치질서를 바로잡고 복서(卜筮)의 신비적 수단을 이용해서 하늘의 뜻을 점쳐 상벌을 행한다.「금등」,「대고」군신 관계의 문란이나 내란 등을 경계한 내용이다.
- 지역의 군주들과 관리들에게 경고 -「강고」,「주고」,「자재」편은 지역의 여러 군주들과 관리들에게 천명과 왕명을 받들고 은나라의 선례와 문왕의 가르침에 따라 덕을 밝히고 일을 신중히 하며 백성을 보전해야 한다고 선포하였다.
- 새 도읍을 건설하는 이유를 명확히하였다.「소고」,「낙고」는 새로운 도읍을 건설하여 천명에 답한다는 사실 선포,「다사」편에 천명이 주나라에 있음을 밝히고 은나라 인사들을 회유한 내용이다.
- 군주의 도리와 제후 및 관료의 직분을 제시 -「무일」편은 임금이 백성의 뜻을 좇아서 덕을 닦는 일이고,「군석」편은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협력하여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는 일이다.「다방」편은 제후와 관료들에게 군주의 명령에 순종함이고「입정」편은 유덕한 관리를 임용하여 형벌을 신중히 할 것을 밝혔다.
- 왕업 계승문제 -「고명」편에 기록되어있다.
- 형벌 제도를 다룸 -「여형」은 명덕(明德)ㆍ신벌(愼罰)을 논하였다.
- 춘추시대에도 왕도가 행해졌다. -「비서」,「문후지명」,「진서」세 편은 춘추시대에 왕도가 행해졌음을 밝혔다.
《서경(書經)》은 역사적 문건으로 주나라의 성립 및 발전과 매우 관계가 깊다. 중요한 글은 '주서(周書)' 가운데「태서(泰誓)」상ㆍ중ㆍ하 세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편은 무왕(武王)이 은나라 주(紂)를 토벌할 때 신하들과 맹세한 말을 실어두었다.
《서경(書經)》은 정치 강령의 책으로 군주의 덕치(德治)를 강조하였다. '주서(周書)'에 들어 있는「무일(無逸)」은 대표적인 글이다. '무일(無逸)'은 곧 노동의 체험을 중시한 말이다. 이 글은 주공(周公)이 조카 성왕(成王)에게 안일에 빠지지 말라고 경계한 내용이라 한다. 옛날부터 국가를 차지한 군주들은 모두 근(勤)으로써 나라를 일으키고, 일(逸)로써 폐하고 말았다는 훈계를 담고 있다.
군자는 편안하게 지내서는 안 된다. 먼저 밭 갈고 농사짓는 노동의 어려움을 알고 그 다음에 편안함을 취해야 비로소 백성들의 고통을 알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의 모습을 보건대 그 부모는 힘써 일하고 농사짓건만 그 자식들은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지 못한 채 편안함을 취하고 함부로 지껄이며 방탕무례하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를 업신여겨 말하기를 옛날 사람들은 아는 것이 없다고 한다.
또한 '주서(周書)'의 「진서」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만약 한 신하가 성실하여 다른 기예가 없으나 그 마음이 곱고 고와서 마치 용납함이 있는 듯하여, 남이 가지고 있는 기예를 자신이 가진 것처럼 여기며 남의 훌륭하고 성스러움을 마음으로 좋아하기를 입에서 나오는 것뿐만이 아닌 것처럼 한다면 이는 남을 포용하는 것이다. 나의 자손과 백성들을 보호할 것이며 또한 일을 맡음에 보탬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군주가 어진 관료를 임명하여 백성들을 보호하여야 한다는 사상을 담은 것이다.
또 '주서(周書' 「군아」편에 "여름은 본래 덥고 비가 많은 철이거늘, 그런데도 인민은 원망하고 한숨지으며, 겨울은 본래 대단히 추운 철이거늘, 그런데도 인민은 원망하고 한숨짓는다."고 하여, 관료가 백성들의 어려운 처지를 잘 살펴야 한다고 경계하였다. 「군아」편은 주나라 목왕(穆王)이 백성의 일과 교육의 일을 담당하는 관직에 군아라는 신하를 임명할 때 명령을 내린 글이라고 한다.
《서경(書經)》전체에서 정치 철학을 논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주서(周書)'의 「홍범(洪範)」편으로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정복한 뒤 은나라의 현자 기자(箕子)에게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을 묻자 기자가 질문에 답한 사실을 적은 것이라고 한다. 기자는 은나라의 왕족으로서 주왕(紂王)에게 간언하다가 투옥되어 있었다. 당시 기자는 홍범구주(洪範九疇)의 강령을 일러 주었다한다.
홍범구주(洪範九疇)
- 5행(五行): 수, 화, 목, 금, 토. 의식주 생활 수단에 이바지하는 자연적 물질이다.
- 5사(五事): 모(貌), 표(表), 시(視), 청(聽), 사(思) 등 개인적인 수양의 내성적 계기가 되었다.
- 8정(八政): 식(食), 화(貨), 사(祀), 사공(司空), 사도(司徒), 사구(司寇), 빈(賓), 사(師) 등 나라 일을 나누어 맡은 각 반이다.
- 5기(五紀): 세(歲), 월(月), 일(日), 성진(星辰), 역수(曆數) 등 천문과 달력에 의한 경륜이다.
- 황극(皇極): 왕도의 극치를 보이며, 중앙에 위치하는 범주가 된다.
- 3덕(三德): 정직(正直), 강극(剛克), 유극(柔克) 등의 세 가지 통치방법이다.
- 계의(稽疑): 복서(卜筮), 즉 점을 쳐서 길흉화복을 알아내는 방법으로 정사(政事에 반영했다.
- 서징(庶徵): 우(雨), 양(暘=晴), 욱(燠=暑), 한(寒), 풍(風), 시(時=調和) 등의 천기를 보는 방법이다.
- 5복(五福), 6극(六極): 5복은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을 일컫는다. 6극은 흉단절(凶短折 — 흉은 7세 전의 죽음, 단은 20세 전의 죽음, 절은 30세 전의 죽음 —), 질(疾), 우(憂), 빈(貧), 악(惡), 약(弱)을 말한다.
우리 선조들은 《서경(書經)》가운데서도 특히「홍범(洪範)」을 매우 중시하였고 신라 청년들이 충성을 맹세하고 학업의 성취를 약속한 내용을 새긴 임신서기명석(壬申誓記銘石)에 새겨진 글을 보면, 신라 젊은이들은 《시경(詩經)》ㆍ《예기(禮記)》ㆍ《춘추(春秋)》와 함께《서경(書經)》을 필독 도서로 하였다. 이처럼 이른시기부터《서경(書經)》은 지식 계층의 필독서로서 유교사상의 이념을 담은 책으로서 매우 귀중하게 취급되었다. 정치이념이나 행정 방안을 제시하는 상소문에서는《서경(書經)》이 자주 인용되었다.
1. 《서경(書經)》의 한문이 어려운 이유는, 평범한 서술이거나 감정의 흐름에 따라 적은 글이 아니라, 정치 문서들을 정리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고문서를 옮겨 적는 과정에서 글자 표기가 일상적인 표기와 달랐던 것 같다. 하지만 역사적인 사건의 흐름과 정치 철학의 대강은 매우 선명하므로, 글의 흐름은 어렵지 않다.
2. 《서경(書經)》가운데 관리나 정치가로서의 품성에 대해 강조한 내용 - 요(堯)임금 때의 법관이었던 고요(皐陶)가 뒷날 우(禹)임금에게 한 말이「고요모」편에 9가지 덕목, 구덕(九德)을 강조한 내용이 있는데.., 관대하면서도 엄격할 것, 부드러우면서도 꿋꿋할 것, 진실하면서도 공손할 것, 일을 잘 처리하면서도 삼갈 것, 잘 순응하면서도 굳셀 것, 곧으면서도 온화할 것, 대범하면서도 모남이 있을 것, 과단성이 있으면서도 독실할 것, 강하면서 의로울 것 등이다. 조선시대 후기의 정약용(丁若鏞)은 이 아홉 가지 덕목이 곧, 당시 인재를 선출하던 기준이라고 보았다.
3. 《서경(書經)》의 본문을 깊이 이해하려면 주해본으로는 '십삼경주소' 가운데 『상서주소(尙書注疏)』에 들어 있는 『공안국전(孔安國傳)』(13권)을 읽어야 한다. 이것은 실은 공안국이 집필한 것이 아니기에 '위공안국전(僞孔安國傳)'이라한다. 근래에 갑골문ㆍ금문. 기타 사료를 이용하여『상서』연구가 활발하다. 굴만리(屈萬里)의 『상서석의(尙書釋義)』 창의적이고 새로운 책들을 참조해야 한다.
《서경집전(書經集傳)》 -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 |
동양고전국역총서(東洋古典國譯叢書) 간행사(刊行辭) | |
이 책에 대하여 | |
범례 | |
- 목 차 - | |
상권(上卷) | |
시경집전(書經集傳) 서(序) | |
卷一 우서(虞書) | 요전(堯典) |
순전(舜典) | |
卷二 우서(虞書) | 대우모(大禹謨) |
고도모(皐陶謨) | |
익직(益稷) | |
卷三 하서(夏書) | 우공(禹貢) |
감서(甘誓) | |
오자지가(五子之歌) | |
윤정(胤征) | |
卷四 상서(商書) | 탕서(湯誓) |
중훼지고(仲虺之誥) | |
탕고(湯誥) | |
이훈(伊訓) | |
태갑(太甲) 上 | |
태갑(太甲) 中 | |
태갑(太甲) 下 | |
감유일덕(甘有一德) | |
卷五 상서(商書) | 반경(盤庚) 上 |
반경(盤庚) 中 | |
반경(盤庚) 下 | |
설명(說命) | |
설명(說命) | |
설명(說命) | |
고종융일(高宗肜日) | |
서백감려(西伯戡黎 | |
미자(微子) | |
부록(附錄) | |
서전도(書典圖) | |
서경(書經) 소서(小序) | |
상서백편이동표(商書百篇異同表) |
하권(下卷) | |
卷六 주서(周書) | 태서(泰誓) 상 |
태서(泰誓) 중 | |
태서(泰誓) 하 | |
목서(牧誓) | |
무성(武成) | |
홍범(洪範) | |
卷七 주서(周書) | 여오(旅獒) |
금등(金縢) | |
대고(大誥) | |
미자지명(微子之命) | |
강고(康誥) | |
주고(酒誥) | |
재재(梓材) | |
卷八 주서(周書) | 소고(召誥) |
낙고(洛誥) | |
다사(多士) | |
무일(無逸) | |
군석(君奭) | |
채중지명(蔡仲之命) | |
卷九 주서(周書) | 다방(多方) |
입정(入政) | |
주관(周官) | |
군진(君陳) | |
고명(誥命) | |
강왕지고(康王) | |
卷十 주서(周書) | 필명(畢命) |
군아(君牙) | |
경명(冏命) | |
여형(呂刑) | |
문후지명(文侯之命) | |
비서(費誓) | |
진서(秦誓) |
《서경집전(書經集傳)》 -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의 안내글
“형벌의 종극(終極)은 형벌을 바르게 세워서 형벌이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서경에 수록된 우(禹)임금의 말이다. 서경은 중국 고대의 역사 기록인 동시에 가장 오래된 정치사상서이다. 따라서 군주를 비롯한 모든 관리들의 필독서였으며, 그들이 가진 정치 철학의 원류였다. 하지만 난해한 원문으로 번역의 한계가 있었다. 본서는 영락대전본을 바탕으로 진사개(陳師凱)의《채전방통(蔡傳旁通)》, 임지기(林之奇)의《상서전해(尙書全解)》, 그리고 일본의 한문대계 및 퇴계의 삼경석의, 사계의 경서변증, 성호의 질서 등을 참고하여 엄밀하게 직역하였다.
- 참고문헌:《경서강독》p 195~196. 1998. 《중국문학사ㅣ》서경(書經)과 역경(易經) p 51~56 1997. 한국방송통신대 출판부. [본문으로]
- 사마천(司馬遷)의《사기(史記)》에 실려 있다. BC 221, 시황제(始皇帝)는 천하를 통일하여 진(秦)나라를 세워 전국시대가 끝났다. 진(秦) 왕조는 주(周) 왕조 때의 봉건제를 폐지하고 중앙집권적인 군현제를 채택한다. 군현제를 실시한 지 8년, 함양궁의 잔치에서 박사 순우월이 현행 제도는 황실의 무궁한 안녕을 기약하기 어렵다며 봉건제로 돌아갈 것을 진언했다. 시황제가 신하들에게 그 의견에 대한 가부를 묻자 군현제의 입안자인 승상 이사가 말했다.<br><br>"봉건시대에는 제후들 간에 전쟁이 끊이질 않아 천하가 어지러웠으나 이제는 통일이 되었고, 법령도 일괄적으로 한 곳에서 발령되어 사회의 안정을 찾았습니다. 하오나 옛 책을 배운 사람들 중에는 그것 만을 옳다고 생각해 새로운 법령이나 정책에 대해서 비방하는 선비들이 있습니다. 하오니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의약, 복서, 종수(농업)에 관한 책과 진(秦)나라 역사서 외에는 모두 수거하여 불태워 없애 버리소서.“<br><br>시황제는 승상 이사의 말에 따라 관청에 제출된 책들이 속속 불태웠다. 당시는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이라 책은 대나무로 만든 '죽간'에 쓰여 있어 복원할 수 없이 사라진 희귀한 책들이 많았다. 이 일을 '분서(焚書)'라고 한다.<br><br>이듬해 상림원(上林苑)에 아방궁(阿房宮)이 건립되자 시황제는 불로장수의 신선술법을 닦는 방사들을 불러들여 후대했다. 그들 중 특히 노생과 후생을 신임했으나, 두 방사는 많은 재물을 사취한 뒤 시황제의 부덕을 비난하며 종적을 감춰 버렸다. 시황제는 진노했고, 화가 나 있던 차에 시중의 염탐꾼을 감독하는 관리로부터 폐하를 비방하는 관리들을 잡아들였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엄중히 심문한 결과 연루자는 460명이나 되었는데 시황제의 노여움은 극에 달하여 그들을 모두 산채로 각각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다. 이 일을 가리켜 '갱유(坑儒)'라고 한다. 네이버 분서갱유(焚書坑儒)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본문으로]
- 아래의 내용 [자료참조: 네이버 지식백과]《서경(書經)》: 동양 정치사상의 원류(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2006.5.22, 휴머니스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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