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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1일 금요일

매씨상서평 - 정약용


개 요

조선 후기의 학자 정약용이 고문상서라고 칭하는 《매씨상서》의 진위를 고증하여 밝힌 책. 9권 3책. 필사본. 정약용이 말년인 1834년(순조 34)에 저술한 것으로 《열수전서》 권16∼19와 《여유당집》 권20∼24에 수록된 내용을 모아 필사한 것이다. 필사자 및 필사연대는 알 수 없다.


내용구성

편차를 보면

《열수전서》 권16인 〈매씨서평〉1에 먼저 이 책의 저술동기를 밝히고, 이어 총서 · 복생소전금문상서제일 · 공안국소헌고문상서제이 · 두림전고문상서사제삼 · 매색소주공전상서제사 · 건무순전고제오 · 하내태서고제육 · 장패위서고제칠 등,

《열수전서》 권17인 〈매씨서평〉 2에 대서(大序) 1∼4, 정의(正義) 1∼10, 집전(集傳) 1∼10,

《열수전서》권18인 〈매씨서평〉 3에 원사(寃詞) 1∼24,

《열수전서》 권19인 〈매씨서평〉 4에 원사(寃詞) 25∼40, 유의(遺議) 1∼8, 강의(講義) 1∼4,

《여유당집》 권20인 〈매씨서평〉 5에 대우모(大禹謨) · 오자지가 (五子之歌) · 윤정(胤征) 등,

《여유당집》 권21인 〈매씨서평〉 6에 중훼지고 · 이훈(伊訓) · 태갑(太甲) 등,

《여유당집》 권22인 〈매씨서평〉 7에 함유일덕(咸有一德) · 열명 (說命) · 태서(泰誓) 등,

《여유당집》 권23인 〈매씨서평〉 8에 하내태서(河內泰誓) · 무성(武成) 등,

《여유당집》 권24인 〈매씨서평〉 9에 미자지명(微子之命) · 주관(周官) · 군진(君陳) · 군아(君牙) · 경명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매씨상서의 진위 고증

〈매씨서평〉 1의 서두에 “일찍이 내가 서울에서 공부할 때 사우간에 《매씨상서》 25편의 문체가 비순하다는 말을 듣고 의심한 바 있었으며, 1792년(정조 16) 희정당에서 〈우공편〉을 시강할 때 임금께서 금문 · 고문에 대해 수 백조를 물으셨으나 이에 대답하지 못하였는데, 이제(1834년) 《매씨상서》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말을 모아 책을 저술하고 보니 임금(정조)이 안 계신 지금 한스러운 마음이 든다.”고 소회를 피력하고 있다.

《서경》은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인하여 인몰된 후에 한대에 이르러 복생(伏生)의 구전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것을 ‘금문상서’라 한다. 이와는 별도로 공자의 옛집을 헐을 때 벽속에서 나왔다는 《서경》이 있었으나 고문자인 과두문자로 되어 있어 해독하지 못하다가 한나라 무제 때 공자의 후손인 공안국(孔安國)이 이를 금문으로 번역하여 읽었는데 이것을 ‘고문상서(古文尙書)’라 하였다. 그러나 이 《고문상서》는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쓰이지 않아 차차로 없어지고, 동진시대(東晋時代) 매색이 공안국의 《고문상서》를 얻었다 하여 저술한 《위고문상서 僞古文尙書》가 전하여지는데, 이 책의 진위문제가 학자들 사이에 논란되어왔다.

저자는 이를 밝히기 위하여 공영달의 《상서정의》, 채침의 《서집전》, 모기령의 《원사》 및 선유의 제설을 인용, 《금문상서》와 《고문상서》의 내용을 일일이 고증적으로 비교, 검토하고 있으며, 매색의 《위고문상서》가 위작임을 밝히고 있다. 《서경》 연구에 귀중한 참고자료가 된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http://www.tasan.or.kr/02_tasan/annotate_05.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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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의 전거를 뒤흔든 저서
 
 서명 : 역주 매씨서평
 글쓴이 : 이봉규(인하대학교 철학과 교수)
 저/역자 : 정약용 지음/이지형 옮김
 출판사 : 문학과지성사
 2002-12-27 / 1054쪽 / 60,000원
1.
한당 시대에 공자나 맹자와 같은 성현들은 그저 존숭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송대에 이르러 유학자들은 성현의 경지가 아득한 것이 아니라 학문과 실천을 통해 도달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들은 성현이나 범인 모두 참된 본성을 동일하게 구비하고 있지만, 단지 타고난 기질의 차이로 인해 달라진 것이고, 이 차이는 부단한 공부와 실천으로 극복해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 기질의 차이를 극복하여 본래 주어진 본성을 실현하는 것이 유학의 본령이며, 역대 성현들이 일깨우고자 한 핵심적 메시지라고 여겼다. 송대의 이러한 사상적 흐름을 집대성한 학자는 바로 주희(朱熹 :1130-1200)였다.

주희는 유학의 본령에 대한 성현의 근본 메시지를 순(舜)이 우(禹)에게 전한 말에서 발견하였는데, 그 전거는 {상서}(尙書) [대우모](大禹謨)에 실려 있는 것이었다. 16글자로 이루어진 순임금의 말을 주희는 불교에서 깨침의 종지를 전하는 법처럼 유학의 전법(傳法)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이 전법을 중심으로 사서를 비롯하여 유학의 텍스트들을 재해석하고 재구성 하였다. 주희가 이룩한 학문적 성과는 한당 시대를 넘어서 유학의 본래 이념을 새롭게 드러낸 사상사적 혁명이었다.

주희이후 주희의 사상적 한계를 넘어서려는 노력은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첫째는 이기론과 심성론 등, 이론적 해명에 대한 보완과 비판이다. 둘째는 이론적 전거와 텍스트의 본래 문맥에 대한 보완과 비판이다. 전자는 주희의 계승자들, 양명학자들, 왕부지 등 반청적 재야 학자들, 마테오리치 등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진행되었고, 후자는 사고전서의 성립과 더불어 가속화된 고증학자들에 의해 진행되었다. 그러나 양 측면에서 함께 일가를 이룬 학자는 극히 드물다. 그 가운데 가장 성찰적이고도 방대한 성과가 19세기 초엽 조선 남도의 유배지에서 한 조선 학자에 의해 이룩되었다. 바로 정약용(丁若鏞 : 1732-1836)이다. 그는 18년간의 유배생활 속에서 경학과 경세에 대한 유학의 본령을 이론과 고증 양 측면에서 새롭게 집대성하였는데, {매씨서평}은 그 가운데 주요한 한 가지 성과였다.

2.
정약용의 학문적 성취는 대체로 출사이전, 출사이후-유배기, 유배이후 등 세 단계를 거쳐 이룩된다. 정약용은 10대 후반부터 이승훈, 권철신, 이가환 등 성호좌파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이들은 이익의 문하에서 주희의 주요한 이론들을 비판하고 서학과 서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신진세력이었다. 정약용은 권철신의 묘지명을 쓰면서 자신의 주요한 성찰 일부가 성호좌파로부터 계승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정약용은 28세에 출사한 뒤 규장각의 초계문신으로 선발되어 정조가 주도하는 학문적 연구와 사업에 참여하였는데, 정약용은 이 때, 정조의 정치적 문제의식과 당시 청조에서 이룩된 학문적 성과와 흐름들을 직접 접하면서, 자신의 정치적·학문적 문제의식을 숙성시켜나갔다. 그러나 서교와의 관련으로 가족과 지우들이 형을 받으면서, 정약용도 10여 년의 관직생활 끝에 결국 18년에 이르는 유배생활을 강진에서 보내게 되는데, 이 시기 동안 자신의 성찰을 경학과 경세에 대한 방대한 저술을 통해 완성하였다. 정약용은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도 홍석주와 홍현주 형제, 김매순 등 당시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성찰을 계속 보완하였는데, {상서}에 대한 연구에서 특히 그러했다.

정약용은 유배시절 동안 {상서}와 관련해서 {매씨서평}(梅氏書平)(1810년 봄), {고훈수략)(古訓蒐略)(1810년 가을), {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1811년 봄) 등을 저술하고, 해배되어 고향에 돌아온 뒤로 신작, 홍석주, 홍현주, 김매순, 김기서 등과 교유하면서 {상서}에 관한 자신의 연구 성과들을 수정 보완하였다. 특히 {매씨서평}에 대한 개정은 1827년 겨울에 홍석주, 홍현주 형제를 통해 얻어 본 염약거(閻若  : 1636-1704)의 {상서고문소증}(尙書古文疏證)이 계기가 되었다. 그는 염약거의 저서에 대한 연구로서 {염씨고문상서소증초}(閻氏古文尙書疏證抄)를 쓰는 한편, 1834년에 {고훈수략}과 {상서지원록}을 합하여 {상서고훈}(尙書古訓)으로 재편하고, {매씨상서평}에 대한 개정 작업도 완성하였다.

{매씨서평}은 동진(東晋) 때 매색(梅 )이 바쳤다는 고문상서(古文尙書) 25편이 위서임을 고증한 책이다. 고문상서의 위작설에 대한 문제제기는 이미 성호좌파에서 제기된 것으로, 정약용은 초계문신 시절 모기령(毛奇齡)의 {고문상서원사}를 접하면서 그 문제의식을 더욱 심화시켰다. 모기령의 저서는 고문상서의 위작설에 대한 염약거의 논증을 반박하기 위하여 저술한 것이었는데, 정약용의 {매씨서평}은 모기령의 설을 반박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었다. 다만 정약용은 염약거가 {고문상서소증}을 반박하기 위하여 모기령이 {고문상서원사}를 저술하였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는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 홍현주, 홍석주 형제를 통해 염씨의 저서를 얻어 보고서야 {매씨서평}과 같은 작업이 이미 청의 학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을 비로소 발견하고, 염씨의 설을 수용하여 {매씨서평}을 보완하는 한편, 염씨의 저서에 대한 자신의 요약과 견해를 글로 남긴다. 그리고 이 글들은 일제 강점기에 {여유당전서}가 간행되면서 {매씨서평}의 마지막 부분에 포함된 것으로 여겨진다.

주희가 전법으로 내세웠던 순임금의 메시지는 바로 고문상서에 들어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고문상서가 위작임을 밝히는 것은 바로 사상사의 한 획을 그었던 주희의 이론적 전거 자체를 흔들 수 있는 의미심장한 작업이다. 그런데 염약거의 {고문상서소증}과 비교해볼 때, 정약용의 {매씨서평}이 가지는 특징은 이론과 고증 양 측면에 걸친 정약용의 문제의식이 복합적으로 깃들어 있는 점이다. 염씨의 저서는 고문상서의 위작설을 입증하는 것에 주안점이 있고, {상서}를 유학의 텍스트로서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 하는, 달리 말하면 유학의 본령에 대한 저자 자신의 문제의식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경학사의 측면에서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작품이지만, 철학사적 측면에서는 빈약한 내용이다. 반면에 {매씨서평}은 {상서}를 유학의 텍스트로서 어디에 주안점을 두고 읽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정약용 자신의 사상적 기획 속에서 저술되었다.

정약용은 주희가 성현의 전법으로 내세운 순임금의 메시지 자체가 편집된 것이라고 해도, 내용상 유학의 사상적 지향을 담고 있는 메시지로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다만, 유학의 전법 내지는 {상서}의 핵심 메시지는 [대우모] 자체가 위작인 이상 다른 곳에서 찾지 않으면 안되는데, 정약용은 그에 관해 자신의 철학적 문제의식에 기반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즉 그는 고문상서가 위작임을 {매씨서평}을 통해 밝히면서, 아울러 금문상서 28편에 대한 자신의 성찰을 {상서지원록}(뒤에 {상서고훈}으로 재편)으로 정리하였는데, 여기에는 [대우모]에 기반해서 유학의 본령을 읽었던 주희의 독법에 대한 대안으로써 [고요모]를 중심으로 읽는 새로운 독법이 제시되고 있다. 그것은 정조가 가지고 있던 국가 운영의 정치적 문제의식을 [고요모]의 관인(官人)과 혜민(惠民)의 관념을 통해 자신의 입장에서 재정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매씨서평}의 저술은 {상서지원록}과 짝을 이루는 것으로 고증과 이론의 양측면에서 주희의 철학적 성찰을 넘어서려는 정약용의 새로운 시대적 문제의식이 토대를 이루고 있다. 이점은 경전의 연구를 통해 현실개혁의 이론적 기반을 재정립하려는 조선 실학의 기풍으로 청대 고증학의 한계를 뛰어넘는 진취적 모습이기도 하다.

정약용의 {맹자요의}를 세심하게 역주한 바 있는 이지형 교수의 {역주 매씨서평} 번역은 성균관대학교 재직시절부터 진행된 것으로, 정년 뒤에도 건강을 돌보지 않고 다산 경학사상의 규명에 일로매진한 결과 이룩된 것이다. 양적 팽창보다 질적 심화가 절실히 필요한 우리 인문학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이지형 교수의 {역주 매씨서평}은 일관지사(一貫之士)의 장인적 정신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쾌거임에 틀림없다. 이제 번역에 참여하고 도왔던 제자들이 {매씨서평}과 짝을 이루는 {상서고훈}을 이어서 번역해낸다면 정약용의 사상적 면모를 드러내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부디 이들의 노력으로 계왕개래(繼往開來)의 학문적 전통이 우리 시대에 더욱 굳건해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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