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전환 1장 번역
우선 [중국과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전환] 1장 초벌해 놓은 것을 올린다.
짧은 영어실력이라 나름대로 꽤 부지런히 찾아보며 하긴 했는데 문맥이 이상한 곳이 좀 있을 것 같다.
여튼 관심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레퍼런스는 너무 길어서 생략했으니 이것도 이해해주시길....
1장. 서문 :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세 가지 전환
짧은 영어실력이라 나름대로 꽤 부지런히 찾아보며 하긴 했는데 문맥이 이상한 곳이 좀 있을 것 같다.
여튼 관심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레퍼런스는 너무 길어서 생략했으니 이것도 이해해주시길....
1장. 서문 :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세 가지 전환
훙호펑
2007년 11월에 중국 중앙정부의 한 중간관료가 베이징국제금융포럼(IFF)에서 중국정부가 미국 달러표시자산의 비중을 줄이고 2006년 이후로 세계최대인 1조 5천억 달러를 넘는 방대한 외환보유액의 통화조합을 다양화할 것이라고 무심코 언급하였다. 몇 시간 안에 국제 통화시장에서 달러가치는 유로화 대비 1,2%, 엔화 대비 1.7% 추락하였다. 개발도상국의 한 평범한 관료가 세계 경제에서 헤게모니를 가진 통화의 가치를 떨어뜨릴 수 있었던 힘은 워싱턴의 통화정책이 개발도상지역과 (일본을 포함한) 비서방세계의 통화가치를 강력하게 좌우하였던 2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다. 『이코노미스트』지가 “세계 통화정책이 점차 워싱턴뿐만 아니라 베이징에서도 결정되고 있다”고 언급한 것은 과장이 아니었다. (The Ecocomist, July 28, 2005) 중국은 또한 세계 자유무역의 운명을 결정하는 주요행위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뉴욕타임즈』는 2008년 여름에 WTO 무역회담의 실패를 다루는 기사에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계 무역회담은 주로 미국, EU, 캐나다, 일본이 주도하였다.......그러나 지금은 중국의 부상으로 세계 무역의 힘의 균형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변하고 있다.”고 언급하였다. 중국이 세계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의 증대는 최근의 세계 금융위기에서도 볼 수 있다. 미국이 자국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채택한 재정 및 통화 구제정책의 실현가능성과 향후 세계경제는 미국 재무부 증권을 계속 구매하려는 중국의 의지에 달려있다.
정치적으로 중국은 개발도상지역의 자원이 풍부한 권위주의적 국가들에 어마어마한 양의 투자와 금융지원을 해주어 자국의 자원안보를 강화해왔는데 이로 인해 점점 인권활동가들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인권활동가들은 수단에서 버마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에서 벌어지는 인권침해에 중국이 공모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 활동가들이 개발도상지역의 수많은 사회적 정치적 병폐가 (우익 독재자들에 대한 지원과 이 지역의 대다수 주민을 궁핍하게 만들었다고 알려진 구조조정 프로그램 때문에) 워싱턴과 워싱턴에 본부가 있는 IMF,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 금융기구들 탓이라고 간주하던 시절은 지나갔다. 부국 정부들도 중국의 급속하게 팽창하는 경제적 영향력과 UN 안보리 상임이사국이라는 지위 때문에 북한, 이란 등지에서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서 점차 중국의 협조를 요청했다.
이러한 최근의 발전은 중국이 어떻게 세계 체계의 발전 경로를 형성하는 지경학적 지정학적으로 영향력 있는 능력을 급속히 가질 수 있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중국의 경제적 성과에 현혹된 서방 세계의 언론 매체에서는 100년 전에 미국의 세기가 도래한 것처럼 중국의 세기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낙관론자가 적지 않다. 발전 정책을 다루는 학자들 사이에서 다수는 급진적인 경제 자유화를 신봉하는 “워싱턴 컨센서스”를 대체하는 발전모델로서 점진적이고 제한적인 시장개혁을 특징으로 하는 “베이징 컨센서스”의 등장을 환영하기도 하였다. (Ramo 2004; Skenkar 2005) 이러한 열광적인 환호를 넘어 중국의 경제적 주도권의 현재와 미래의 궤적과 전지구적인 자본주의 체계에 미치는 장기적인 영향력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시적인 단기 추세의 관찰을 넘어서야 한다. 우리는 장기적인 역사적 전망 속에서 중국의 부상이 어떻게 전지구적 자본주의에서 배태되었는지 검토해야 한다. 이 책에는 각각의 영역에서 중국의 부상의 영향력을 연구해온 탁월한 국제정치경제학자들의 논문이 실려있다.
되돌아보면 중국의 부상은 1970년대 이후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계의 구조적 전환으로 가능했다. 이 전환은 (1)새로운 국제적 노동분업의 출현, (2)미국 헤게모니와 냉전 질서의 이중의 쇠퇴, (3)노동계급 기반, 국가권력 지향의 대중 정치의 형태를 가진 반체계운동의 일반적인 쇠퇴라는 3중의 전환이다. 이 책의 핵심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오늘날 보는 것과 같이 세계-역사적인(world-historical) 범위에서 이러한 전환이 가져다준 기회를 잡아 경제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던 중국의 역사적 유산은 무엇인가? 중국의 경제적 지배력은 결과적으로 이러한 전환의 경로를 어떠한 방식으로 형성하고 있는가? 이러한 지배력이 만들어내는 21세기의 새로운 국제질서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전에 중국의 부상의 단계를 마련한 20세기 후반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전환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미국 중심의 전지구적 자본주의 질서의 형성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고전적인 정식화에 따르면 세계 자본주의 체계는 국가간의 수직적인 노동분업에 의해 구성되어 있으며 이 체계는 중심부, 주변부, 반주변부로 나뉘어진다. 이 세 지역은 각각 고부가가치 생산과 저부가가치 생산, 그리고 그 둘의 혼합으로 특화되어있다. 이 노동분업은 국가간체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국가간체계는 다른 중심부 국가들에 대하여 압도적인 경제적 경쟁력을 누리고 있으며 정치적 리더쉽을 정당화하는 헤게모니 권력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Wallerstein 1974, 1979, 1980, 1989) 이윤추구와 자본축적은 항상 순탄하지만은 않다. 이는 중심부 강대국들이 헤게모니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는 중심부간의 갈등과 하층계급(subaltern class)이 체계 내의 가진 자와 못가진 자들 사이의 양극화에 저항하면서 생겨난 반체계운동의 급증으로 인해 주기적으로 방해받는다.(Chase-Dunn 1998; Arrighi and Silver 1999)
19세기 국제 자유무역 질서의 붕괴, 독일, 영국, 미국을 포함한 헤게모니 경쟁자들 사이의 총력전, 세계 각지에서의 노동운동, 공산주의운동, 반식민지운동의 공세 등 영국 헤게모니의 쇠퇴로 특징지을 수 있는 20세기 초반의 혼란스런 40년간의 시기에 이어서 20세기 중반에 세계체계는 미국 헤게모니 아래에서 안정되었다.(Arrighi 1994: 4장) 이 20세기 중반의 세계 자본주의 질서는 최초에는 전쟁으로 황폐화된 일본을 포함한 서유럽의 중심부 국가들에 대한 미국의 압도적인 우위에 기반을 두었다. 미국의 경쟁력은 혁신주의 시대(the Progressive Era)에 잉태되고 뉴딜 개혁의 한가운데에서 강화된 포드주의-케인즈주의 자본 축적체제(Fordist-Keynesian regime of capital accumulation)에 기반하고 있었다. 한편에서 포드 자동차 회사가 선구적으로 만들어낸 수직적으로 통합된, 그리고 과학적이고 관료주의적으로 경영되는 기업이 재화와 서비스의 대량 생산에 적합한 효율적인 경제단위가 되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케인즈주의적인 정부의 사회적 지출의 확장이 포드주의 기업의 안정적인 고임금 고용과 결합되면서 대량 생산된 제품의 판매를 보장하는 대량 소비 시장의 끊임없는 성장을 촉진하였다.(Gramsci 1971; Chandler 1977; Aglietta 1979; Harvey 1989)
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25년 간, 전쟁에서 회복하는 동안 기타 중심부 국가들은 대부분 이 자본 축적체제를 복제했다. 이 경제체제는 미국의 초국적기업의 투자에 유리한 장소가 되었으며 미국 제품에 유용한 시장이 되었다. 세계 체계의 주변부에서 새로이 식민지에서 벗어난 국가들은 미국의 원조와 장려에 영향을 받았으며, 높은 정부지출과 간섭주의적인 경제 계획을 가진 포드주의-케인즈주의 체제의 변형으로서 국가 주도의 산업 정책을 채택했다. 그러나 이 정책의 일부 성공에도 불구하고 많은 주변부 국가들은 중심부에 1차산품을 수출하고 공산품을 교환하는 식민주의적 노동 분업에서 탈출하지 못했다. 이 국가들은 미국의 농업관련 산업의 투자와 공산품 수출을 위한 직판장이 되었다. 미국 기업들이 중심부와 주변부 국가 양쪽에서 필적할 수 없는 우위를 누리는 것과 더불어 미국은 1994년 브레튼우즈 회의에서 만들어진 통화체제 아래에서 금-달러본위제를 유지하고(달러에 금가치를 고정시키고) 여기에 모든 주요통화를 고정시킴으로써 세계 경제의 금융안정성을 보장했다. 달러에 대한 금본위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막대한 금 보유고에 의해 지지되었다. (Block 1977; Gilpin 1987: 4장-5장; Arrighi 1994: 4장; McMicheal 2008: 2장-3장)
미국의 지경학적 구심의 역할은 냉전의 지정학적 구조 속에서 미국의 리더쉽을 수반했다. 소련 사회주의가 팽창할 것이라는 실질적이고도 상상된 위협 속에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들은 그들의 안보를 미국에 의존했다. NATO의 틀 속에서 서유럽 국가들은 미국의 전쟁기계에 국방을 맡겨두었고 동서 간의 국경을 따라 모여있는 소련의 탱크와 핵미사일을 저지하기 위해서 미군의 주둔에 의존했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은 미국의 점령 기간에 구상된 평화 헌법 아래에서 반주권국가의 처지가 되었다. 일본은 그 자신의 군대를 키워낼 권리를 잃은 채 미국이 서태평양에서 군사적 능력을 투사할 거대한 발판이 되었다. 한편 서태평양에는 한국에서 말라카 해협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군사력 투사를 위한 더 작은 발판으로써 미국의 군사기지와 미국친화적인 군사기지가 산재되어 있었다. (Katzenstein and Shirashi 1997; Gowan 1999: 2장-4장) 개발도상지역에서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들은 어찌되었건 미국에 의존하였다. 이 국가들은 미국의 재정적 군사적 원조 없이는 내부의 반란이나 인접한 공산주의 국가의 침공으로 인해 살아남기 힘들었다. 미국의 동맹국들이 국가권력의 통제를 상실할 때마다 CIA는 항상 무수한 우익 쿠데타로 도와주었다. 1953년의 이란에서 1973년의 칠레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미국 헤게모니의 전성기 동안에 반체계운동도 기존 체제로 흡수되었다. 20세기 초반에 중심부 국가의 노동운동과 반주변부(러시아, 동유럽, 중부유럽)와 주변부(식민지들)에서의 사회주의 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은 공세적이었다. 이 운동들은 노동과 식민지국가들을 위해 노동-자본 간의 그리고 식민국가-식민지국가 간의 힘의 균형을 확실히 바꾸어놓았다. 이러한 성과에 기반하여 이 운동들은 20세기 중반에 현상 유지의 요소가 되었다. 중심부 국가에서는 노동계급 기반의 정당과 노동조합이 선거에서의 승리와 노동-자본 간의 제도화된 협상을 통해 복지국가의 구성요소가 되었다. 동유럽과 주변부에서는 공산주의 운동과 민족해방 운동이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한때 체제를 동요시켰던 이러한 반체계운동은 전후 수십년간 성과를 얻을수록 진정되었으며, 공격성을 대부분 상실하고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대한 도전자에서 보수적인 이익상관자로 변화하였다. 중심부 국가의 노동자 조직은 체제전복적인 노동운동을 외면하였으며, 소비에트 진영의 국가들은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처럼 긴장된 냉전 대립의 정점에서조차 서방과의 공식적 혹은 비공식적인 외교 협상을 통해 냉전 질서를 안정시키길 원했다. (Arrighi et al. 1989; Wallerstein 1990; Arrighi and Silver 1999: 3장)
중심부 국가에서 전통적인 노동계급 기반의 정치는 그 자신의 성공의 제물이 되어 부패한 체제의 일부처럼 보여 외면당했으며 1960년대 후반에 등장한 급진적인 젊은 세대에게 거부당했다. 1960년대에 학생과 노동자들의 봉기는 자본주의적 질서보다는 전통적인 노동조합과 좌파 정당들의 정당성을 손상시켰으며 이들에게는 경멸적으로 “구좌파(Old Left)”라는 딱지가 붙게 되었다. 그 사이에 국제적인 공산주의 운동은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소련의 철수, 1956년의 부다페스트 봉기, 1968년 프라하의 봄에서 볼 수 있듯이 자본주의 국가들의 효과적인 봉쇄와 내부로부터의 도전 속에서 수세적인 위치에 처했다. (Arrighi et al. 1989; Amin et al. 1990; Chase-Dunn and Boswell 2000) 1960년대에 베트콩의 성공적인 공세는 그러한 상황이 일반적임을 보여주는 예외이다. 미국 해병대를 베트남의 정글 속에서 수렁에 빠지게 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는 미국이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동남아시아에서 도미노 효과를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제1세계 젊은이들 사이에서 체 게바라에 대한 숭배현상과 “제2, 제3의 수많은 베트남을 만들자”는 그의 기치에도 불구하고, 체 게바라는 다른 제3세계 국가들에 성공적인 혁명을 수출하지 못했다. 20세기 초반에 속속 나타난 반체계운동은 전후에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노동자와 제3세계에 친화적일 수 있도록 중요한 기여를 했다. 하지만 전지구적 자본주의 질서가 지경학적 지정학적인 측면에서 완전히 재구성되기 시작한 1970년대에 이르러 이 반체계운동은 변화를 향한 진보적인 힘으로서의 정당성과 활력을 상실했다.
20세기 후반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전환
1960년대 후반에 독일, 일본과 다른 중심부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완전히 회복했으며 미국 제조업보다 더 경쟁력 있지는 않을지라도 그만큼 경쟁력 있는 효율적인 제조업 체계를 발전시켰다. 그 결과로 세계 시장에서의 제조업 제품의 범람은 제조업의 수익성을 위협했으며 자본주의 체계에 일반적인 이윤율 하락의 장기적인 시기를 예고했다. (Brenner 2002) 이 이윤율 하락의 경향은 1970년대에 많은 중심부 국가들의 장기간에 걸친 경기침체와 재정문제의 원인이었다. 다른 중심부 강대국들에 경제적인 경쟁우위를 상실하고 재정 위기의 악화와 경상수지 적자로 인해 금보유고가 고갈되면서 미국은 세계 경제의 금융안정성이라는 부담을 짊어질 수 없게 되었다. 1971년에 닉슨은 달러의 금태환 중지를 선언하였고 이에 즉시 고정환율제도의 브레튼 우즈 체제는 붕괴하였으며, 세계 경제는 점점 불안한 시기로 접어들었다.(Block 1977; Gilpin 1987: 4장) 대부분의 중심부 국가에서 20여 년간의 전후 호황의 원인이었던 포드주의-케인즈주의 자본축적체제는 심각한 위기에 빠져들었다. 포드주의 기업들은 병든 공룡이 되었으며, 점차 변덕스럽고 경쟁적으로 변해가는 세계경제에 적응하기에는 너무 거대하고 관료적이었다. 중심부 정부들의 재정 악화는 항상적인 공공 지출 확대를 통해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케인즈주의 전략을 지속할 수 있는 능력을 축소시켰다. (Harvey 1990: 121-200)
자본주의 중심부의 경제 위기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첫 번째 전환으로서 1970년대에 새로운 국제적 노동분업을 야기하였다. 이윤율 하락에 대처하고 경비를 절감하기 위하여 중심부의 기업들은 포드주의적인 수직적으로 통합된 조직 형태에서 다층적인 하청에 기반한 좀 더 유연한 조직 형태로 변화하였다. 하청 네트워크는 곧바로 국경을 벗어났으며, 노동집약적인 생산파트는 주변부의 저임금국가의 제조업자들에게 외부화되었다. 주변부의 원자재 수출과 중심부의 제조업 제품 간의 교환에 기초한 기존의 중심부-주변부 간의 노동분업을 대체하면서 새로운 국제적 노동분업은 주변부의 일부를 전지구적 체계의 새로운 제조업 기지로 전환시켰다. (Froebel et al. 1980; Harvey 1990: 121-200; McMicheal 2008: 5장-7장; Hung 2008)
동아시아의 호랑이들, 즉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폴이 이러한 제조업 이동의 주된 종착지가 되었다. (동아시아 부상의 배후의 힘들은 다음 절에서 살펴보겠다.) 새로운 제조업 중심지로서의 성공에 힘입어 세계 체계 속에서 이 동아시아의 호랑이들의 구조적 지위는 주변부에서 반주변부로 급속히 올라섰으며(한국과 대만의 사례), 심지어는 중심부로 올라섰다.(홍콩과 싱가포르의 사례) 이는 그 나라들에서 일인당 국민소득의 비약적인 상승에서 나타난다. (Arrighi and Drangel 1986) 이 새로운 국제적 노동분업의 규모와 범위는 다른 개발도상지역에서 수입대체체제가 대부분 붕괴하게 되고 이에 더해 레이건 정부 이후 미국이 세계 무역 자유화를 공격적으로 추진하면서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극적으로 확장된다.
새로운 국제적 노동분업이 등장하면서 중심부 경제에 대한 미국의 리더쉽의 정당성이 쇠퇴하였다. 1970년대의 경제적 침체의 연장선에서 미국, 유럽, 일본 사이의 경제적 경쟁이 격화되면서 수출 시장에 대한 경쟁은 무역 전쟁으로 발전하였으며, 소비에트 진영에 대항하는 이 삼각동맹의 이데올로기적 동질성은 해체되기 시작했다. 일본과 유럽의 정책결정자들과 학자들은 “일본식 발전국가”와 “독일식 협력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독특한 자본주의 발전 모델이 미국의 자유 자본주의 모델과 비교하여 더 우수한 종류라고 강조하기 시작했다. 비록 유럽과 일본 자본주의의 특이성이 과장되었을 지라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본과 유럽이 더 이상 미국식 모델을 모방할 만한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는 사실이다. 일본과 유럽은 미국과의 대비로서 그들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데 집중했다. (Stallings 1995; Hall and Soskice, eds. 2001)
이러한 중심부 간의 경쟁은 1980년대에 점차 확대되었으며 중심부 강대국들을 결속시켰던 공동의 적인 공산주의 세계는 극적으로 쇠약해졌다. 이전의 절에서 살펴보았듯이 1970년대에 현존 사회주의 국가들로 구체화되었던 혁명적 운동은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진보적인 대안으로서의 매력을 상실하였다. 설상가상으로 1980년대 초기에 이러한 중앙계획경제는 성장의 동력을 잃어버렸으며 주요 사회주의 국가들은 침체된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여러 범위에서 시장 지향의 개혁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진영이 더 이상 자본주의 중심부에 위협이 되지 않았음은 누구에게나 명확했다. 냉전의 종말이 시작되면서 일본과 서유럽은 차츰 그들 각각의 지역 질서를 강화하여 미국에 대항하는 경제적 경쟁력을 증가시키는 데에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은 지역 내에서 투자와 무역 관계를 심화시켜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그 영향의 범위를 개척하였으며, 유럽 통합이 가속화되었고 유럽 경제는 아프리카에 자신의 권한을 확장하고 심화시켰다. 1980년대 후반에 미국의 직접적인 영향력은 영원히 아메리카 대륙으로 제한된 것으로 보였다. 많은 학자들이 미국이 아메리카 대륙을, 독일이 유럽과 아프리카를, 일본이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주도하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삼극 구조의 출현을 예상했다. (Stallings 1990; Katzenstein and Shirashi 1997; Katzenstein 2005, 1997)
이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첫 번째 두 전환, 즉 새로운 국제적 노동분업의 개시와 중심부 강대국 사이에서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는 세 번째 전환과 함께 발생했으며 이로 인해 강화되었다. 이 세 번째 전환은 한때 세계 체계 속에서 자본의 계급 권력을 효과적으로 억제해왔던 노동계급 기반, 국가권력 지향의 대중운동의 붕괴이다. 현존 국가 사회주의의 쇠퇴로 인해 자본주의 중심부 강대국들의 공동의 적이 사라졌으며, 이는 중심부 간의 경쟁을 가중시켰고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를 유발하였다. 한편 중심부와 기타 지역에서 노동계급 정당과 노동운동이 동력을 상실하면서 새로운 국제적 노동분업이 심화되고 확산되었다.
1980년대에 미국의 레이건 정부와 영국의 대처 정부가 나란히 케인즈주의 복지 국가의 해체, 국가의 안정적인 고용보호 파기, 국제적인 자유무역 추진에 나서면서 이들은 처음에는 국내외 전반에서 조직화된 노동과 사회운동의 상당한 저항에 부딪혔다. 그러나 마가렛 대처가 “대안은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는 유명한 선언을 했을 때, 그녀는 그럴 작정이었다. 대처는 세계 체계에서 반체계운동이 쇠퇴하고 그녀의 신자유주의 공습에 저항이 분산될 것임을 미리 아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맞았다. 장기간 기존 체제의 일부가 되었던 노동운동은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저항하기에는 너무나 무기력한 것으로 증명되었다. 마찬가지로 반항의 시기인 1960년대에 생겨난 소위 신좌파는 이에 대응하기에는 너무나 체계적이지 못했다. (또한 전지구적인 정치경제적 변화를 전혀 주목하지 못할 정도로 문화 정치에 빠져있었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자본은 재분배적이고 상대적으로 노동친화적인 포드주의-케인즈주의 자본축적체제의 제약에서 해방되었으며, 노동에 대한 자본의 계급권력은 자유시장이라는 명목으로 강력한 신자유주의 국가에 의해 상당히 상승하였다. 불과 20년 만에 외부화, 탈산업화, 노동의 비정규직화가 중심부 국가들의 주요 도시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개발도상국들은 차례로 초국적 자본의 유입에 자발적, 비자발적으로 문호를 개방했다. 통제되지 않는 전제적인 공장 생산 체제가 입주한 수출 가공 지역이 개발도상지역 곳곳에서 급증하였다.(Harvey 2005)
20세기의 지난 30년간 새로운 국제적 노동분업의 출현, 중심부 국가 사이에서 다수의 경쟁하는 자본주의적 중심지의 등장, 반체계운동의 후퇴로 인해 중국이 기적적인 경제성장을 조성하는 단계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전환에서 중국의 부상으로 넘어가기 전에 우선 반드시 두 과정을 이어주는 중간 단계로서 동아시아의 지역적인 자본주의 질서의 부상을 검토해야 한다.
세 가지 전환, 동아시아 자본주의, 중국의 부상
1950년대와 1960년대의 냉전의 정점에서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는 미국 중심의 전지구적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냉전의 가장 극심한 두 충돌이었던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은 이 지역에서 벌어졌으며, 아시아는 항상 공산주의의 견제 속에서 가장 취약한 고리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미국은) 지역 내의 미국 의존국들이 무너져서는 안 될 만큼 중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워싱턴은 이 국가들이 번영할 수 있는 우호적인 조건을 창출하는데 예외적으로 관대하였으며, 동아시아의 수출에 서방 시장을 개방하고 금융과 군사 원조를 제공하였다. 이 조건들로 인해 자원이 풍부한 발전국가가 등장할 수 있었으며, 이들은 대부분의 다른 개발도상국들에 일반적인 수입대체 산업화의 유혹에서 그럭저럭 벗어나 일찍부터 수출지향적인 산업정책을 채택하였다. (Haggard 1990; Wade 1990; Evans 1995; So and Chiu 1995) 1960년대에 서방 소비시장과 밀접한 수출관계를 확립하면서 동아시아는 1970년대에 새로운 국제적 노동분업의 등장 속에서 산업 외부화의 주요 종착지가 되었다.
냉전의 지정학 외에도 산업 수출국으로서 일본과 동아시아 호랑이들의 성공은 지역 내부의 특징에도 기인한다. 동아시아에서 노동집약적인 쌀 경작에 기반한 공동체적, 가부장적, 농업적인 사회 질서의 유산과 대부분의 여성 공장 노동자들이 농민 출신이라는 점은 이 국가들에서 순종적이고 규율 잡힌 노동과 낮은 노동재생산 비용의 원인이 되었다.(Bray 1986; Sugihara 2003; 이 책의 2장 참고) 또한 이 지역 경제를 주도하는 일본의 의도적인 리더쉽도 이를 조장하였다. 일본은 해외직접투자와 일본기업 중심의 다층적 하청체계를 통한 자국 자본의 지배 아래에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가치 사슬에 따른 안정적인 노동분업을 유지하였다. 일본은 항상 고부가가치 산업을 특화하였으며 네 마리의 동아시아 호랑이들과 태국, 말레이시아 같은 후발주자들은 저부가가치 산업에 집중했다. 지역내 각국 경제가 협조적인 방식으로 가치사슬을 상승시켰기 때문에 동아시아 지역도 지역내 노동분업의 혼란 없이 전반적으로 상승했다. 이러한 지역 발전의 집단적이고 수직적인 방식은 비유하자면 역 V자 형의 “나는 기러기 떼(flying geese)” 모델의 특징을 나타냈다. (Akamatsu 1962; Ozawa 1979; 이 책의 2장 참고)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미국, 일본, 유럽의 자본주의 사이의 경쟁이 격화되면서 일본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주도적 역할을 확장하고 강화하기 위해 아시아의 이웃국가들에게 투자와 개발 원조를 늘려서 일본의 국제적인 경쟁력을 뒷받침했다. 이러한 지역화를 통한 자본주의 발전 모델은 성공적이어서 일본이 20세기 초반부터 갈망해왔지만 1930년대와 1940년대의 군국주의로 인해 실패했던 일본 중심의 대동아공영권(Greater East Asia Co-Prosperity Sphere)의 출현을 1990년대 초반에 목격할 수 있었다. (Doner 1997; Shiraishi 1997; Pempel 1997; Korshmann 1997) 일본은 동아시아 전체를 뒤에 거느리고 점차 미국의 전지구적인 경제적 리더쉽을 위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지역주의의 동학과 이를 주도하는 일본의 리더쉽은 1990년대 초반부터 중국의 시장 이행과 개방의 가속화로 인해 점차 유동적이었다.
되돌아보자면 동아시아 및 그 외 지역의 자본주의 경제와 중국의 재통합은 반체계운동이 대몰락하는 핵심적인 요소였다. 1949년에 중국공산당(CCP, the Chinese Communist Party)의 국가권력 장악은 20세기의 사회주의혁명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가장 눈부신 성과 중의 하나였다. 중국공산당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 깊숙이 개입했으며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의 많은 국가에서 좌파 게릴라 운동을 지원했다. 이러한 만만치 않은 공산주의 체제가 존재한다는 사실로 인해 냉전 속에서 미국 진영은 동아시아를 가장 약한 고리로 간주하였다.
1950년대에 중국공산당은 소련과 아주 밀접한 관계였다. 그러나 1960년대가 되면서 중국은 소련식의 고도로 중앙집중화된 계획경제 모델에서 점차 이탈하였으며 그와는 구별되는 좀 더 대중동원에 의존하는 발전 양식으로 이동했다. (Schurmann 1966; Selden 1993) 중국공산당 내부의 당파투쟁의 정세, 중국과 소련간의 영토분쟁, 개발도상지역의 다른 혁명국가에 소련의 영향력을 줄이고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중국공산당의 열의로 인해 결국 두 사회주의 국가 간에 전면적인 이데올로기적 분열이 일어났다. 소련이 관료화와 중심부 자본주의 강대국들과의 화해라는 돌이킬 수 없는 길로 간데 비해 마오와 그의 극좌파 동료들은 1966년에서 1969년까지의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에 중국공산당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스탈린주의적 관료기구를 타파하기 위하여 학생과 노동자들을 동원하고 “소련 수정주의(Soviet revisionism)"를 비난함으로써 중국혁명의 열기를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Chan 1985; Perry and Xun 1997; Meisner 1999; Esherick, Pickowicz and Walder 2006) 그러나 혁명을 활기차게 유지하려는 마오의 열정적인 노력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당 내부의 반대세력이 숙청되고 홍위병의 파벌투쟁이 중국을 내전 직전으로 몰고 가자 마오는 1969년의 당대회에서 문화대혁명에 제동을 걸었으며, 이로 인해 혁명은 명목적으로 지속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끝나게 되었다. 당대회 이후에 홍위병 조직은 해체되어 그 참가자들은 농촌으로 쫓겨났고 당-국가(party-state)는 다시 관료화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중국 공산당이 중소 국경에 배치된 군사적 압력을 상쇄하기 위하여 냉전의 미국 진영과 화해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중국공산당의 보수적인 선회로 인해 1970년대 초 미국, 일본을 비롯한 대다수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과 중국의 외교관계가 재개되었다. 이는 공산주의 중국이 반체계운동의 힘에서 전지구적 자본주의 질서를 유지하는 권력으로 전환되었음을 보여주었다. (Dirlik 1994; Selden 1997)
1970년대 초반 중국과 중심부 자본주의 강대국들과의 관계회복에 이어 1970년대 후반에는 완전한 지경학적 재통합이 이루어졌다. 중국의 중앙정부는 누더기가 된 국민경제를 회복시키려는 필사적인 열망 속에서 시장개혁에 착수할 수 있도록 일부 지방정부에 권력을 이양하였으며 외국 투자자들, 특히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의 수출 지향적인 제조업자들에게 지방 경제를 개방하였다. (Shirk 1993; Naughton 1995; Zweig 2002; Guthrie 2006) 중국공산당은 노동 계급의 이익을 위한 반체계운동의 투사가 되기를 그만두고 본래 부르주아 계급에 대항하여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행하기 위한 억압적 기구를 동원하여 연안 도시로 이주한 거대한 농촌 노동력이 전제적인 공장 체제 속에서 순종적으로 노동하게끔 보장하였다. (Pun 1995; Lee 1998)
중국의 외국인 직접투자에 대한 개방은 1980년대에는 남부 연안지역으로 제한되었다. 일본과 동아시아 네 마리 호랑이의 수출 지향적인 제조업 투자의 유입으로 인해 중국 남부지역은 일본 주도의 나는 기러기 떼 대형을 특징으로 하는 동아시아 지역의 경제 질서로 통합되었다. 중국의 외국인 직접투자의 대부분은 동아시아 경제로부터 이루어졌는데, 홍콩, 대만, 일본이 그 목록의 선두에 있었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학자들은 중국 남부지역을 “다섯 번째 호랑이” 혹은 나는 기러기 떼 대형에 합류한 마지막 기러기로 여겼으며 중국의 부상이 일본 주도의 지역질서의 단순한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간주했다. 중국이 일본과 동아시아 네 마리 호랑이의 자본가들의 투자가 가져온 자본, 마케팅 네트워크, 경영, 기술적 노하우로부터 엄청난 이득을 본 것은 태국과 같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990년대 동안에 중국의 개방이 심화 확대되고 가속화되면서 중국이 평범한 기러기가 아님이 밝혀졌다. 저임금 노동력의 막대한 공급 및 국가 사회주의 영역에서 비롯한 엔지니어와 기술자의 거대한 인력풀, 제조업 상품의 거대시장으로서의 잠재력 덕분에 중국은 저부가가치의 제조업 영역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의 가치 사슬에서 제조업 투자를 흡수할 수 있었다. 중국의 부상이 다른 동아시아 경제를 희생시키고 있다는 염려는 『이코노미스트』지의 “팬더가 [나는 기러기 떼] 대형을 무너뜨리고 있다”라는 제목의 잘 알려진 기사에서 가장 잘 묘사되었다.
중국과 이웃한 국가들은 대부분 대륙의 산업 부상에 대하여 경고와 절망이 섞인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일본, 한국, 대만은 저비용의 중국으로 공장이 이전하기 때문에 자국 산업의 “공동화”를 두려워하고 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무역과 투자 흐름에서의 “이탈”을 우려하고 있다.... 중국은 기러기가 아니다. 중국은 [나는 기러기의] 전형적인 형태와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중국은 생리대처럼 단순한 상품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소형전자칩과 같은 복잡한 상품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중국은 전 세계의 가격을 결정할 정도로 전체 가치 사슬에 걸쳐 상품을 생산한다. 이 때문에 동아시아의 우려가 발생한다. 만약 중국이 모든 면에서 더 효율적이 된다면 이웃국가들에게는 할 일이 남겠는가? (2001. 8. 25)
사실 일부 학자들은 1997-98년의 아시아 금융위기가 중국의 부상 때문이며, 그 경쟁의 압력이 다른 많은 활기넘치는 수출지향적인 지역내 산업경제를 혼란으로 밀어넣었다고 주장한다. (Krause 1998; cf. Pempel ed. 1999) 이전의 동아시아 부상의 국면에서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이 축적해온 자본, 마케팅 네트워크, 수출지향적인 제조업에서의 노하우를 대부분 흡수하면서 중국의 눈부신 경제성장은 동아시아의 부상을 중국의 부상으로 바꾸어놓았다. 확실히 일본과 네 마리 호랑이들은 결국에는, 예를 들어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일어난 한국의 하이테크 붐이나 일본의 중국으로의 자본재 수출 붐, 싱가포르의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남아시아를 연결하는 지역내 허브가 되기 위한 공격적인 시도와 같이 그 자신의 독창적인 경쟁력을 회복시킬 효과적인 전략을 구상할지 모른다. 그러나 중국은 의심할 여지없이 아시아의 경제적 역동성의 유일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원천이 되고 있다. 일본과 동아시아의 호랑이들과는 달리 중국이 미국 의존국이 아니라 -적어도 아시아 안에서- 미국에 도전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갖춘 지정학적으로 독립적인 국가라는 점에서 중국의 부상은 그 이전의 일본과 동아시아 호랑이들의 부상과는 구별되기도 한다.
이 책의 주장
20세기 후반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세 가지 전환은 새로운 국제적 노동분업의 출현, 미국 헤게모니와 냉전 질서의 쇠퇴, 반체계운동의 거대한 후퇴이며, 이로 인해 동아시아의 부상과 그 이후의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이 가능했다. 그러나 가능성과 필연은 다르며 이것으로 중국의 부상을 전부 설명할 수는 없다. 2장과 3장에서 지오반니 아리기(Giovanni Arrighi)는 근대 초기의 유산에, 앨빈 소(Alvin So)는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 시기에 초점을 맞추어 중국의 역사적 유산이 어떻게 이러한 전환들이 발생시킨 기회를 잡을 수 있게 했는지 상세히 서술하여 이 설명의 공백을 매우고 있다. 아리기는 유럽과 중국이 근대 초기에 시장 발전의 길에서 분기했다고 주장한다. 중국의 길이 노동집약적, 자본절약적, 내향적이었던 반면에 서구의 길은 국가의 군사적 보호 아래에서 노동절약적, 자본집약적, 외향적이었다. 150년 전의 아편전쟁(1839-42)의 결과로 서구의 길은 중국의 길을 능가하였지만 1970년에 한계에 도달했고 중국의 길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이 부활은 처음에는 일본과 동아시아 호랑이들의 부상의 형태로 나타났으며 중국 자신의 부상이 바로 뒤따랐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중국의 부상은 중국의 길이 발전에 있어서 서구의 길에 대한 장기적인 우위를 회복했다는 점에서 그렇게 놀랄만한 일이 아니며, 서구는 잠깐의 영광을 누린 것이다.
소는 3장에서 중국의 개방에 앞선 30년간의 마오주의적 발전 시기에 형성된 공산주의적 당-국가의 유산에 초점을 맞춰 마오주의의 유산이 개혁 시기 중국의 경제성장에 제약이 되었다기보다는 이득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당-국가는 강력한 발전국가에 공고한 기초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중국은 다른 많은 개발도상국들을 초국적 자본에 굴복하게 만든 전형적인 신자유주의적 시장 개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중국 공산주의 혁명의 정당성의 근거가 된 민족해방의 이데올로기는 중국이 동아시아와 그 외 지역의 화교자본의 지지를 동원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아리기와 소가 개략적으로 서술한 장기와 중기의 역사적 유산이 없었다면 중국은 위에 서술한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전환의 기회를 잡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전환의 수혜자로서 중국은 자신의 진로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지경학의 영역에서 중국의 부상은 주변부의 제조업체들에게 기능을 분산하고 있으며, 새로운 국제적 노동분업에서 협상 지위를 향상시킬 것이다. 지정학적으로 중국의 부상은 중심부 강대국들과 새로운 갈등의 원인들을 창출하고 있으며 중국은 자국으로의 천연자원의 공급과 자국의 경제적 지위를 견고하게 지키고 있다. 또한 중국은 세계의 국가간체계를 다극적 질서에 가깝게 할 새로운 동맹을 예고하고 있다. 반체계운동의 영역에서, 중국에서의 새로운 노동계급의 급속한 형성과 그들의 전지구적인 공급 사슬로의 통합, 그리고 싹트고 있는 행동주의는 전지구적인 노동계급의 힘을 회복시킬 것이다.
4장에서 리처드 아펠바움(Richard Appelbaum)은 중국의 부상이 전지구적인 공급 사슬에서 권력과 이윤의 분배를 새롭게 형성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현재의 공급 사슬에서 제조하청업체들은 대부분 소기업들이다. 이 소기업들은 너무 수가 많고 분산되어 있어서 중심부의 소수 독점 유통업체들은 이들을 빈약한 수익을 내는 계약을 따내기 위한 무자비한 경쟁으로 쉽게 내몰 수 있다. 그러나 아펠바움은 주로 대중화권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중남미와 아프리카로 제조업 활동을 확장하기 시작한 소수의 거대 초국적 하청업체로 생산 통합이 증가하면서 유통업체와 하청업체 사이의 힘의 균형이 후자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 거대 하청업체 중 일부는 지역에서 다른 기업과 부문 사이의 연계를 창출시켜 산업 개선을 가속화하고 중국과 동아시아 전체에서 다양한 기반을 갖춘 경제발전을 촉진할 수 있을 정도로 역량이 있다.
중국의 부상이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의 경제적인 세력 균형을 새로 형성하고 있지만 지정학적인 긴장과 갈등의 가능성도 무수히 발생시키고 있다. 세계체계 안에서 새로운 경제 강대국의 극적인 부상은 항상 기존의 주요 강대국들에 피해를 입힌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준다. 20세기의 전환기에 독일의 부상의 사례에서 너무나 잘 나타나듯이 이는 부상하는 강대국과 몰락하는 강대국 사이에서 광범위한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다행히도 지난 30년간 중국과 아시아 전체의 부상은 아직 이러한 갈등을 발생시키지는 않았다. 5장에서 József Böröcz는 아시아의 부상으로 인한 전통적인 중심부 강대국들이 행사했던 지경학적 지정학적 영향력의 손실이 지금까지는 동유럽 국가들과 러시아의 주변부화로 인해 얻었던 지경학적 지정학적 이득에 의해 보상되고 있다는 주장을 통해 이를 설명한다. Böröcz는 기존 소비에트 진영이 완전히 쇠퇴하고 나서야 중국의 부상이 중심부 강대국들에게 진정으로 피해를 미칠 것이며 그 후에야 두 당사자 사이의 지정학적 갈등이 극적으로 악화될 것으로 예상한다. 미국, 유럽, 일본에서 “중국위협(China Threat)"에 관한 수사가 늘어나는 것과 더불어 중국과 서방 세계 사이의 임박한 무역전쟁은 이 예측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6장에서 Paul Ciccantell은 천연 자원 중심의 새로운 역사적 유물론의 시각으로 좀 더 구체적인 각도에서 천연자원 공급을 확보하기 위한 중국의 공격적인 행보가 어떻게 점차 과열되는 새로운 지정학적 경쟁의 원인이 되고 있는지를 서술한다. 중국과 일본 사이의 자원 경쟁은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미국이 20세기 초반에 세계 각지에서 영국의 자원 주변부를 공격적으로 장악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은 20세기 중반부터 미국의 자원 주변부를 차지했으며, 중국은 원자재 수출 국가와 기업들에게 더 나아보이는 거래를 제안하여 일본의 자원 주변부를 장악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의 중국과 일본 간의 천연자원 경쟁은 이 두 나라가 그 이전 시기의 영국-미국 간, 미국-일본 간 관계를 뒷받침하던 동맹 관계와 문화적 친밀감이 결여되어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중국이 일본의 천연자원 공급경로를 공격적으로 전유하는 것은 두 나라 사이의 갈등 발생 가능성을 높인다. 설상가상으로 중국은 새로운 자원 주변부를 공격적으로 추구하여 미국 및 유럽과의 정치적 경제적 긴장도 악화시키고 있다.
중국의 자원 공급 확보에 있어서의 공격적인 행보는 기존 강대국들과의 충돌 가능성을 높이고 있지만, 이는 또 다른 한편으로 중국이 다른 주요 지정학적 행위자들과의 새로운 동맹을 추구하게끔 하고 있기도 하다. 7장에서 존 굴릭(John Gulick)에 따르면 중국-러시아 동맹의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일단 러시아의 풍부한 탄화수소 매장량은 (중동의 석유가 운반되는 말라카 해협 같은) 미국 통제 아래에 있는 지역을 거치지 않고 중국의 북쪽 국경을 통해 안전하게 운반될 수 있다는 점에서 중국에게 매력적인 대안 에너지 자원이다. 그리고 또 중국은 러시아로부터 군사기술 및 우주기술 이전을 통해 이득을 볼 수 있으며 이미 이득을 보고 있는 중이다. 한편 러시아는 소련의 붕괴에 따른 지정학적 영향력과 국가적 위신의 엄청난 상실에 초조해하는 와중에 동유럽과 중서 아시아 지역에서 미군 주둔의 확장으로 인해 점차 압박을 받고 있다. 이러한 압박으로 인해 러시아는 다극적 세계를 향한 전망을 공유하고 있으며 높은 가격에도 천연자원을 구매할 수 있는 충분한 금융력을 보유한 중국과 더 깊은 동반자관계로 나아갈 것이다. 이 실현가능한 동반자관계는 확실히 중국과 러시아 양측에 이득이 될 것이며,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 미국과 다른 중심부 강대국들에 심각한 도전이 될 막강한 반주변부 권력블록의 기반을 구성할 것이다.
중국의 부상은 지경학적 지정학적으로 극심한 재편성을 야기할 가능성 외에도 노동에 대한 자본의 계급 권력을 역전시킬 충분한 힘을 가진 세계 노동운동이 부활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들을 창출한다. 1980년대와 1990년대 동안 많은 중심부 국가들에서 탈산업화는 전통적인 노동조합주의의 몰락에 의해 가속화되었으며, 노동조합주의는 산업 외부화를 축소시키려는 무모하고 헛된 시도 속에서 보호주의와 외국인 혐오 태도에 의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8장에서 Stephanie Luce와 Edna Bonacich가 지적하듯이, 가혹한 노동조건 속에 있는 엄청난 수의 중국 노동자들이 전지구적 공급 사슬의 생산 부문으로 통합되고 이들의 노동 행동주의가 막 시작되고 있으며, 전지구적 공급 사슬의 도소매업 부문에서 운송업과 서비스업 노동자들의 전투성이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초국적 공급 사슬의 출현이 중국의 선전(Shenzhen)에서 캘리포니아의 롱비치(Long Beach)에 이르는 노동자들의 연대를 조직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이 공급 사슬의 고도의 통합성과 적기(just-in-time) 생산유통방식은 이 사슬의 전략적 연결마디에서의 협력 행위가 자본축적 과정에 커다란 지장을 야기할 수 있음을 의미하며, 이로 인해 전지구적인 노동의 교섭력은 증가한다.
이와는 다른 시각에서 비벌리 실버(Beverly Silver)와 장루(Lu Zhang)는 9장에서 오늘날 중국의 노동 정치에 대한 민족지학적 조사와 그 이전의 신흥 자본주의 중심지들에서의 새로운 노동 행동주의에 대한 역사적인 관찰에 근거하여 중국을 새로운 노동소요의 중심지로 전망하고 전지구적인 노동운동의 부활 가능성을 보다 상세히 증명한다. 이들은 20세기 초반의 미국, 20세기 후반의 한국과 같은 다른 신흥 제조업 중심지에서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중국에서 혼란스러운 자본주의적 이행이 이미 “폴라니식(Polanyi-type) 노동소요”와 “마르크스식(Marx-type) 노동소요”를 둘 다 촉발시켰음을 발견한다. 시장경제의 확산이 기존의 삶과 사회적 결속을 위협하는 것에 저항하는 폴라니식 노동소요는 시장 이행 속에서 국유기업 노동자들의 고용과 이익이 악화되고 있는 중국의 북부 도시들에서 확산되고 있다. 반면에 시장 확산에 의해 창출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선제적인 행동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마르크스식 노동소요는 수출지향적인 신흥 산업도시에서 활발해지고 있으며, 이 지역에서 이주노동자들은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조직화하기 시작했다.
요약하자면 이 책의 각 장들이 보여주는 것은 21세기의 전지구적 자본주의 발전의 예정된 단선적인 길이 아니라 중국의 부상이 수반하는 전지구적 변화의 가능한 궤적들의 불협화음이다. 세부적인 차이점들이 있지만 각 장들은 중국의 부상이 수반하는 세 가지의 새로운 경향으로 수렴된다. 이 세 가지 경향은 전지구적 공급 사슬에서 주변부 제조업체들의 교섭력 증가, 지정학적 긴장의 증가 속에서 다극적인 국가간체계를 향한 운동, 전지구적인 노동 권력의 부활이다. 물론 이 경향들이 새 세기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지속적인 새로운 구조로 구체화될 것인지는 중국의 경제적 주도권의 지속에 달려있다.
결론부분에서 나는 중국의 경제성장의 지속가능성에 대하여 질문을 던진다. 중국의 기적의 국내적인 정치사회적 동학은 많은 면에서 1920년대 미국의 급속한 경제성장과 비슷하다. 광란의 1920년대(Roaring Twenties)와 비슷하게, 오늘날 중국에서는 점차 독점자본으로 부와 권력이 집중되고 있으며 엄청나게 많은 인구가 번영의 공유라는 면에서 소외당하고 있다. 그 결과는 2008년부터 붕괴하기 시작한 부국의 부채를 통한 흥청망청 소비에 대한 중국의 과잉의존과 더불어 과잉투자 및 과소소비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는 중국 국내의 악화된 경제 불균형이다. 게다가 중국의 부주의한 산업화는 중국의 발전의 확대에 점점 방해가 되고 있는 환경 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다. 좋은 소식은 중국 정부가 환경 악화의 심각성뿐만 아니라 장기적인 경제 위기의 위험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의 주요 인사들은 더 균형적이고 환경친화적인 경제를 만들기 위해 중국의 발전 모델을 새로운 형태로 고치려고 시도해왔다. 만약 이들이 성공한다면 중국의 경제성장은 장기적으로 더 지속가능한 경로를 찾게 될 것이다. 나쁜 소식은 이러한 재조정 행위가 충분히 강력하지 않고 시기가 늦어서 현재 발전 방식에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이러한 노력들에 강경하게 저항하고 있다는 것이다. 20세기 초반 미국에서는 더 균형잡히고 지속가능한 성장에 필요한 정치사회적 구조의 변화가 대공황 기간 동안 뉴딜 개혁을 통해 이루어졌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광란의 1920년대에는 실현하기에 너무나 급진적이라고 생각되었던 오랫동안 지체된 개혁을 가능케 한 것은 대공황이었다.(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2차세계대전이었다) 중국 경제에 심각한 도전이 되고 있는 최근의 전지구적인 경제위기가 중국 경제의 불가피한 재조정을 가속화하는 비슷한 역할을 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우리는 중국의 부상과 그로 인한 전지구적 전환들이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할 근거들이 있다. 그러나 미국의 부상이 실현되기 위해 공황과 세계 전쟁을 겪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장기간에 걸친 중국의 부상에는 중기적으로 경제적 혼돈, 지정학적 갈등, 사회적 격변의 진통이 산재되어 있을 가능성도 크다. 그 중기의 시간대는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지라도 아주 어려운 고도로 불확실한 영역이다. 또 이 시간대는 중국 안팎에서 국가, 기업, 사회운동, 그리고 그 밖의 인간 주체들의 전략적이고 상황에 따른 행동이 진정으로 중요한 영역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