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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28일 목요일

고요(하나라), 이윤 (상나라), 강태공(주나라)


고요(하나라)


고요(皐陶)는 순임금 때 법관이다.

생애[편집]


고요는 소호의 후손이다. 고요(皐陶)는 순임금 때 법관이 되었다. 우(禹)임금은 다음 제위을 고요(皐陶)에게 선양하려 하였는데 고요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아들 백익(伯益)의 자손들이 영(英), 육(六), 허(許)에 봉해졌다고 한다.

고요는 공자의 고향으로 알려진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에서 태어났고 묘지는 안휘성(安徽省) 수현(壽縣)에 있다고 전한다.
구덕(九德)론
고요는 리더가 갖춰야 할 자질로 ‘구덕(九德)’론을 제시한다. 구덕은 리더의 자질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모든 유형의 리더십을 정의할 정도로 논리가 정교하다.


이윤 (상나라)

이윤(伊尹)은 하나라 말기부터 상나라 초기에 걸친 정치가이다. 상 왕조 성립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름은 지(摯)이다.

생애[편집]

전설에 의하면, 이윤의 어머니는 대홍수에 휩쓸려가 뽕나무가 되었고 그 줄기에서 이윤이 태어났다고 한다. 여기에서 이윤은 홍수의 신으로 보는 설이 존재한다.
성인이 된 후에는 요리인으로서 어느 귀족을 시중들었고 주인의 딸이 상의 군주인 자리(훗날의 탕왕)에게 시집갈 때에 그 심부름꾼으로서 자리를 시중들었다. 이 때 그 재능을 자리에게 인정받아 상의 국정에 참여해 중책을 맡기에 이른다.
상이 하를 멸할 때에도 활약했고 상 왕조 성립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아형(阿衡)으로서 탕왕을 보좌해 수 백년동안 이어지는 상 왕조의 기초를 굳혔다. (함유일덕)
탕왕의 사후에 그 아들인 외병과 중임의 두 명의 왕을 보좌한 후 탕왕의 손자 태갑이 즉위한 후에도 이윤은 계속해 이를 보좌하였다. 그러나 태갑은 방탕한 생활을 해 국정을 어지럽혔으므로 이윤은 태갑을 동(桐)으로 추방했고 섭정으로서 태갑을 대신했다. 3년 후 태갑이 회개한 것을 확인한 후에 다시 그를 왕으로 맞이해 스스로는 신하로 되돌아갔다.
이윤은 태갑의 아들 옥정의 시대에 죽었다고 한다.

평가[편집]

후세에 이윤은 명신(名臣)으로서 평가받고 있지만 태갑의 추방한 일에 대해서는 유력한 신하가 중간에 주군을 추방했다는 다소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또 태갑의 추방은 전한의 곽광과 함께 후세에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군주를 추방하고 싶은 유력자가 추방의 구실로 삼기도 하였다.
덧붙여 죽서기년에 의하면 이윤은 태갑을 추방한 후 스스로 왕이 되었지만 7년 후에 태갑에 의해 토벌되었다고 한다.


강상 태공상(太公像) (주나라)


강상의 초상. 태공상(太公像)이라고 적혀 있다.
강상(姜尙)은 기원전 1211년(은나라 경정(庚丁) 8년에 출생하여 기원전 1072년(주강왕 6년)에 사망할 때까지 나이(수壽)가 139세에 달했다. 중국 기록은 약간 차이가 난다. 또다른 중국 기록에서 강상은 기원전 1140년 9월 12일(음력 8월 3일(~5) ~ ?)에 태어났다고 한다.
기원전 11세기 중국의 은나라를 멸망시킨 인물로 염제신농의 후손이라고 전해오며, 동해가 고향이다. 동해는 동해상으로도 불린다. 성은 강(姜), 이름은 상(尙), 자는 자아(子牙)이며, 호는 비웅(飛熊)이다. 주왕이 항시 꿈에서라도 바라던 인물이 비로소 나타났다하여 흔히들 태공망이라고도 불렸다
강태공의 본관은 천수강씨(天水姜氏)이며 염제신농씨의 후손이다. 강태공은 주나라 문왕을 도와 주나라를 건국한 일등공신이며, 전국칠웅인 제(齊)나라의 공작이 되었다.
강태공의 자손들(강급, 강소백 등)이 대대로 제나라를 이끌어왔으며 이 시기에 중국의 고(高), 노(盧), 여(呂), 허(許), 구(丘,邱), 강(强), 방(方), 정(丁), 장(章), 사(謝), 제(齊), 하(賀), 향(向), 가(柯), 뢰(賴), 초(焦), 기(紀), 최(崔), 좌(左), 역(易)씨 등 수많은 성씨들이 강태공의 자손들로부터 갈라져나갔다. 강태공 사당에는 해마다 강태공의 후손들과 강씨에서 분파된 성씨들이 대거 참례를 온다.
현재 강태공의 후손은 분성성씨외에 한국의 진주강씨와 중국의 천수강씨가 있다.

생애[편집]

강상은 염제신농황제(炎帝神農皇帝)의 51세손이요, 백이(伯夷)의 36세 손이기도 하다. 주나라 문왕, 무왕, 성왕(成王), 강왕(康王) 4대에 걸쳐 태사(太師)를 지냈으며 춘추전국 시기의 제(齊)나라의 창시자요, 딸은 주 무왕의 왕후이다.
때는 기원전 1046년 2월 겨울, 은나라 주왕의 흉폭한 정치가 계속되어 천하가 비탄에 젖어있을 시 홀연히 나타나 주 문무왕의 스승이 되어 4만 5천의 군사로 72만의 은나라군을 대파하는 기적적인 전쟁을 일구어낸 동이지사(東夷之士)이며 기인(奇人)이다. 이 전쟁을 목야전쟁(牧野戰爭)이라 하며 목야전쟁이 주는 의의는 적은 수로 많은 적을 섬멸한 기적의 전쟁이요, 아무리 불리하더라도 정의(正義)는 반드시 필승(必勝)한다는 정법을 확립시킨 정의 필승의 전쟁이며 대륙을 통일한 천하통일전쟁이라 할 것이다. 이후 제나라를 일으켜 제1대 초대 국왕으로 제나라는 32대 근 800여 년을 존속하였다.
강태공은 주나라 문왕, 무왕의 스승이자 장인이며 천하의 스승국의 위치로 군림하여 제나라의 공작(제 태공)이 되었다. 제나라의 2대 왕좌를 큰아들 강급(姜及)에게 물려주었고 강급은 제 정공(齊丁公)이라고 불렸다. 강태공을 이어 제나라가 가장 흥한 시기는 제 환공 강소백(姜小白)시기로 강소백은 춘추시대 첫번째 패자가 되기도 하여 강태공의 얼을 이었다. 제나라 최전성기에는 사방 5000리를 이룩한 대국으로 성장하기도 하였다.
강태공이 남긴 유명한 명언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복수불반분'(한번 엎지러진 물은 다시 주워담을 수 없다)이다. 강태공의 전 부인 마씨는 강태공이 주문왕을 만나기전 생활고에 견디다 못해 강태공 곁을 떠났는데, 이후 강태공이 성공했을 때 다시 돌아와서 아내로 맞아주길 요청했다. 이에 강태공은 하인더러 물을 떠오라고 한 후 그 물을 땅에 엎었다. 그리고 돌아온 아내에게 지금 바닥의 그 물을 다시 항아리에 담는다면 아내로 맞이 해주겠다고 했다. 즉, 한번 떠난 마음은 두 번 다시 되돌리기 어렵다는 유명한 명언을 남긴 것이다.
강태공은 기원전 1072년에 신선계에 들었으며 그때 연세는 139세였다. 의관을 서주(西周)호경(鎬京)에다 안장하였다. 제나라 사람들은 강태공의 덕을 생각하여 제나라에다 강태공 이관총(衣冠塚)을 세웠다. 강태공은 주역(周易)의 확립자이며 강태공이 저술한 육도삼략(六韜三略)이 현재에도 전해져 오고 있다. 육도삼략은 중국 고대병서의 최고봉인 무경칠서(武經七書) 중의 둘을 차지한다. 후대인 손무의 손자병법도 강태공의 육도삼략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후일 대륙을 정복한 청나라 황실에서조차 강태공을 무성왕(武成王)으로 칭하여 천하통일을 이룬 왕으로 인정하였다.

극화[편집]

봉신연의[편집]

중국 소설 《봉신연의》에서는 본명은 강자아이며, 곤륜산의 도사가 되어 신선들의 살겁을 깨기 위한 봉신을 주도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가족 관계[편집]

  • 아들 : 제 정공(齊丁公) 강급(姜伋)
  • 딸 : 읍강(邑姜)
  • 사위 : 주 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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