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아나키즘의 위상
* 편집자주 : 이 글은 고소 이와사부로의 책, <새로운 아나키즘의 계보학>의 서문 ‘새로운 아나키즘의 위상’ 중 일부입니다. <위클리 수유너머>에 이 글의 게재를 허락해 준 고소 씨에게 감사드립니다.
사유란 주체와 대상 사이에 그러진 선(線)도 아니요, 한편의 다른 한편 주위로의 회전도 아니다. 사유란 오히려 토지 및 지구와의 관련에서 생긴다.
–Deleuze/Guattari1
나는 (이 책에서) ‘새로운 아나키즘’을 표방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명사는 반드시 하나의 고정된 실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종교배적인 미정의 것, 현재진행형으로 전개 중인 다종다양체를 포괄하려 한다. 이 같은 미정성에도 불구, 어째서 이러한 제목으로 한 권의 책이 쓰여야 할까? 그것은 우리 중 많은 수가 지금 이 ‘명사=운동’에 대하여 안고 있는–기대와 의문이 뒤섞인–강한 몸짓을 이유로 들 수 있다. 이 같은 사정도 있어 여기서 전개되는 사유는 조화와 균형 속에서 구축된 건축과는 사뭇 멀며, 다양한 사건이 서로 부딪치는 소란에 찬 거리, 미친 \듯한 폭풍과 역랑의 대양, 불연속적인 능선을 그리며 셀 수 없이 들어찬 고원과 닮았을 것이다.
신좌파 시대 이후, 특히 과거 10년 남짓 동안 가장 활발하였던 운동체 무리는 어느 쪽이냐면 ‘아나키즘’이라 평가를 받고, 가장 활동적이었던 활동가들은 거칠게도 ‘아나키스트’라 불려왔다. 이 ‘아나키즘’은 맑스주의(VS)아나키즘이라는 오랜 이항대립적 구도 속에서 변별된 그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뒤에서 언급하게 되듯) ‘아나키스트적 기본원리’에 기초하여, 그 위에 이들 양자 및 그 외의 요소들을 재배합해가는 ‘새로운 사유/운동공서(共棲)체’라 부르는 편이 낫다. 이는 또한 전통적인 ‘주의주장’에서 벗어나 아직 이름 없는 무언가로 자기형성해가는 계기를 품고 있다.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아나키즘’이란 완결된 체계로 아직 존재하지 않은 운동체의 ‘허구(假構)작업’인 것이다.
이하 전체를 통해 음미할 소재는 이 같은 ‘새로운 사유/운동공서체’를 형성하려는 ‘담론의 다발’이며, 그것들이 ‘현재진행형의 계보학’을 형성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특정 사상가나 활동가, 운동체와 관련된다. 그 점에서 이 책은 작가론/운동론의 집성으로 볼 수도 있다. 또한 각각의 장은 어떤 차원에서 그것들의 대상과 얽힌 ‘지리적 사건’ 혹은 ‘지구적 사건’–즉 민중의 ‘이동’과 ‘투쟁’,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신체를 가지고 공진(共振)하는 대륙들의 ‘대지’ 및 그것들을 잇는 ‘대양’, ‘군도’, ‘하천’, ‘도시’ 등–에 관한 성찰을 연결해 간다. 이런 점에서 이것들을 들뢰즈/가타리에 기대어 ‘지리철학적(geophilosophical)’ 아나키즘론이라 부르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그럼 이 책에 들어서기 전 통과의례로, 이 형성 도중의 ‘새로운 아나키즘’이 되는 것을 개관하여 보자.
맑스주의와 아나키즘을 비교할 때 더 강고한 이론체계를 이루는 것은 틀림없이 전자이다. 그 점에서 맑스주의야말로 ‘주의주장’의 전형이 된다. 이 주의주장이란, 특정한 목적인(telos)으로 자신을 떠받치는 학리 체계(과학)과 실천형태(조직론)의 유일한 합체로 간주된다. 그러나–맑스주의든, 아나키즘이든, 그 외 다른 것이든–‘주의주장’이라는 것이 지금까지와 같은 무결한 전체성을 주장할 수 없는 상황이 출현하였다. 실천영역의 압도적인 풍부함이 목적인을 능가하여, 의문에 부쳐지면서 분해되고 복수화되고 있다. 각각의 주의주장의 내부에 다양한 사유형태가 발생하여, 복수의 대립 혹은 차이를 배양하고, 어떤 종류의 이종혼합과 분업적인 관계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도래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세계적인 사회/경제 정세의 변화와 관련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상황이 어디까지나 새로운 투쟁의 한 형태로, 게다가 (조금 뒤에 기술하듯) 하나의 ‘전개’로 도래한 일이다.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세계자본주의가 거드름 부리며 등장해 지구전체 구석구석까지 자기증식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따르는 투쟁 상황은 그에 대항하는 현대의 ‘반자본주의운동’이 도달한 전지구적 현실인 것이다. 실로 ‘운동들의 운동(movement of movements)’이라 불리는 데서 현저하게 드러나듯, 현대 세계 변혁운동은 어떤 특정한 사상 체계나 전선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것은 세계 속에서 생겨난 운동체 무리와 그것들의 상관관계가 형성하는 비가시적인 총체를 가리키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범운동적 시대’를 살고 있다. ‘새로운 아나키즘’이란 우선 이러한 ‘사상(思想) 선행 시대’를 대신하여 도래한 ‘운동 선행 시대’의 지표이며, 그것이 우리의 출발점이다.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맑스주의와 아나키즘의 성향상의 차이를 짚고 있다. “맑스주의는 혁명전략을 위한 이론적/분석적 담론을 목표로 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비하여 “아나키즘은 혁명 실천을 위한 윤리적 언설을 목표로 하는 경향이 있다”.2 이들 ‘경향’의 정의가 새삼 유효한 것은 이 같은 오늘날의 정세 속에서 그것들이 이제 적대성이 아닌 같은 반자본주의적 세계변혁운동 속에서 서로 다른 역할, 즉 분업형태를 보여주기 때문임에 다름 아니다. ‘분석’과 ‘논리’–이들은 서로 없어서는 안 되는 두 원리이다. 혹은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존재양태/인간성이라 말해도 좋다.
오늘날 도대체 누가 자본주의 분석의 역사적 축적을 전제로 하지 않고, 세계 변혁에 대하여 사유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오늘날 도대체 누가–이상적 사회제도의 도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닌, 현재의 운동형태 안에 이미 이상적 사회관계를 구현해간다는–예시적 정치(prefigurative politics)에 기초한 조직론에 의하지 않고 미래의 지구적 운동을 기획할 수 있을까? 우리는 투철한 유물론적 분석을 향하는 차가운 열정을 방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과거 십 수 년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개인주의를 실천적으로 넘어서기 위해서는 타자에의 존경과 사랑을 토대로 하는 운동밖에 가능성은 없다. 이 같은 투쟁 현실 속에서 맑스주의의 난공불락의 체계성이 후퇴하고, 오히려 단순명쾌한 ‘아나키스트적 기본원리’가 조정자 역할로 부상하였다. 그것은 이 세상을 사는 대부분이 이해할 수 있는 기본적인 항목–예를 들어 자율(autonomy), 자주연합(voluntary association), 자기조직적(self-organization), 상호부조(mutual aid) 그리고 직접민주주의(direct democracy) 등–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좌파시대의 정체(停滯)를 타파하고, 새로운 세계변혁운동의 범례를 제기해온 것이 패미니즘, 젠더적 마이너리티, 원주민과 이민의 운동, 남반구의 노동자/농민/어민 운동이었음은 시사적이다. 이들 운동의 실천 안에서 비로소 타자에의 사랑과 존경을 기초로 한 조직론의 선행성이 확립되었다. ‘반자본주의적 세계상’이 오늘날 가시화될 수 있다면, 한없이 풍요로운 세부로 가득 찬 세계의 지역성과 일상성에서 차오르는 ‘투쟁’이 간난신고를 거쳐 실현되고 있는 새로운 ‘사회적 관습’과 ‘인간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즉 ‘반자본주의’는 그것들의 투쟁이, 무수한 차이를 품은 세계의 착종성을 긍정하고, 그 안에서 이종교배적 운동체를 형성하면서 차차 양성해나갈 ‘에토스’를 통하여 구현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오늘날 운동들의 요점이 되고 있는 ‘아나키스트적 기본원리’는 이 같은 ‘에토스’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분명히 이는 분석적 이성이라기보다 ‘어떤 성향의 싹틈과 성장’에 관련되어 있다. ‘새로운 아나키즘’은 이를 적극적으로 구하고, 발견하고, 그것을 출발점으로 사회적으로 육성해가고자 한다. 그러나 이는 속류 아나키즘에서 보이는 성선설처럼 인간의 본성을 선으로 이상화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역으로 속류 유물론처럼 그것을 한사코 비관론적으로 악이라 단정 짓는 일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성을 본질화하지 않는다. 인간성이란 백지이며, 어떤 것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새로운 아나키즘’은 ‘인간의 천성의 생산’을 세계 변혁 운동의 핵심으로 간주한다.3
‘새로운 아나키즘’은 전위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수평적/네트워크를 목표로 한다. 이는 무슨 뜻인가? 그것은 일부의 전위가 대중을 지도한다는 지향성의 거절이다. 또한 위에서 아래로의 계층 서열적 명령계통을 거절하는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 ‘전위’라는 사상을 부정하고, 다른 한편으로 ‘대중’이라는 관념을 와해한다. 직업정치가 및 언론이 일상적으로 반복하는 “대중은 이러저러 여차저차한 것을 바란다”는 말만큼 거짓은 없다. 그것은 자신의 정책 목표에 따라 ‘대중성’을 생산하고, 거기에 ‘무수한 단독자들’을 충당해가는 수작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수평적/네트워크는 이에 반하여–이면을 가진 ‘지하’의 존재라는 이미지 이외에는–‘대중’의 표상을 거절할 것이다. 그것은 차차 새로운 요청이라는 목표를 거는 한편 창조자로서 지표에 나타나는 무수한 민중운동이, 연대와 동시에 스스로 구축해가는 다종다양체인 것이다.
여기서는 복수(複數)의 정치원리가 수평적으로 연대할 필요성이 부상한다. 마시모 데 안젤리스는 최근의 그의 책 말미에서 이를 대담하고 명쾌하게 정리하고 있다. 그것은 일찍이 협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어온 아나키즘/공산주의/사회주의라는 세 가지 정치/사회원리의 연대이다.4 (A) 시장과 국가의 강제력을 통하지 않고 실로 자주적으로 공동적 생산을 조직할 수 있다는 반권위주의적 신념으로서의 아나키즘, (B) 공통적인 것으로 소유되는 능력/자원 속에서 공동생산과 자기통치를 추진하기 위한 공산주의. (C) 아나키즘과 공산주의의 실현적 가능성의 증대를 목표 삼아, 국가에 의하여 자본주의의 통제를 기획하는 극장으로서의 사회주의–라는 삼자의 연대이다. 오늘날 전지구적 투쟁의 현실이 총체적으로 보여주듯, 이들 세 가지 원리의 상보적 관계성은 반자본주의운동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다시 말해 각각 자기 원리를 우선하여 서로를 물리치는 이들 서로 다른 운동도, 실제로는 협조하고 있는 차원이 있다.) 공산주의 없는 아나키즘은 개인주의적이고 폐쇄적으로 흐른다. 아나키즘 없는 공산주의는 계층 서열적이고 억압적으로 흐른다. 사회주의 없는 아나키즘과 공산주의–즉 ‘국가’ 안에서 그것을 넘어서기 위하여 그에 반하며 이뤄지는 투쟁이 없다면 그것들–는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예전도 지금도 아나키즘은 국가권력의 탈취/통제를 단계적으로도 허용하지 않는다. 한 예로 작금의 표현으로는 존 홀로웨이가 ‘반=권력(anti-power)’이라고 부르는–특정 정치 세력의 특정 권력에 대한 반대가 아니다–이름 없고 셀 수 없는 단독자들의 ‘권력의 존재자체’에 대한 반대를 원칙으로 한다.5 처음부터 ‘아나키즘(an-archism)’이 ‘국가(archy)’가 돼버리는 일–그것은 논리 모순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현존하는 국가를 단순히 무시하고, 그에 대응하는 전략을 모두 내던져도 좋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데 안젤리스가 말한 ‘사회주의’란 실로 그 미묘한 전략적 영역을 가리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이 점은 오늘날 절실한 쟁점 중 하나가 되고 있다.
이처럼 맑스주의와 아나키즘의 이항성이 하나의 복합적 운동의 연관 속에서 ‘전략적 분석’과 ‘실천 논리’로 변용될 가능성을 비추는 데 비하여, 이 아나키즘과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삼항성은, 한 가지의 복합적 운동 연관 속에서 혁명적 정치/사회전약의 서로 다른 국면(phase)으로 재맥락화되려 하고 있다. 이것이 ‘새로운 아나키즘’의 수평적/네트워크적 조직론의 또 한 가지 속성이 된다.
이 조직론은 총체로서 운동을 담당하는 조직 자체가 낡은 사회 안에 새로운 사회로서 자기생성해간다는 지향성을 숨기고 있다. 여기서는 이미 “혁명이 성취된 밤에……”라는 환타지는 주된 상상력원이 아니다. 오히려 확고한 경험적 사실, 혹은 현장의 순수한 사건에 기초하여, 혁명적 상황을 양성하고자 하는–그런 유토피아 충동이다. 예를 들어 그것은 질 들뢰즈가 ‘래디컬한 경험주의’6라 부르는, 어떤 초월성으로도 중개되지 않는 ‘내재성의 평면’에서의 사건=창조이다. 그가, 또한 다른 서적에서 사뮤엘 버틀러가 인용한 것처럼, 유토피아(erehwon)이란 “기원적 <어디에도 없는:no-where>과 환치되고, 위장되고, 변용되고, 항시 재창조되는 <지금-여기:now-here>”로서 재발견되는 것이다.7 지금 여기에서 진행되고 있는 반자본주의적 투쟁은 다양한 지역의 투쟁과 지하에서 연동, 거기서 순간순간 무수히 분기되고 번지며 다종다양체를 형성해 간다. 이처럼 오늘날의 혁명에 최종적 도달점/대단원(=초월성)은 있을 수 없다. 실로 이런 점에서 ‘새로운 아나키즘’은 ‘반자본주의적 삶’ 혹은 ‘자본주의 외부의 삶’을, 혁명이 성취한 후에 확립되는 ‘제도적 현실’로서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운동=투쟁에 있어서 ‘구성적 과정(constitutive prpcess)’으로 번식시켜간다. 따라서 이는 대항운동일뿐 아니라 동시에 새로운 무언가의 구축과 같은 사회적 과정을 가리키는 것이다. ‘새로운 아나키즘’이란 이 출발점–혹은 데 안젤리스가 ‘역사의 종언’으로서 포스트모던에 반하여 말하는 ‘역사의 시작’–의 인식이다.
하지만 이 같은 지향은 무엇을 통해 가능할까? 그것이 경험적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면 어떤 경험인가?
‘공통적인 것(the common)’의 도래 혹은 개시이다. 오늘날 우리는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불가사의한 것, 즉 ‘공통적인 것’을 갈수록 격하게 그리고 근본적으로 맞닥뜨리고 있다. 지금 우리는 마침내 우리에게 궁극적인 가능성과 한계라는 쌍방을 래디컬하게 경험하게 되었다. 이 책을 구성하는 이하 전체는 이 ‘공통적인 것’이 관통하며 그것이 우리 사유의 기조를 형성해 갈 것이다.
이 ‘공통적인 것’은 몇 가지 서로 다른 양상이 있다. 그것은 발견되는 것, 생산되는 것–즉 우리의 ‘가능성’이다. 그 ‘가능성’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현실 속에 존재하는 공산주의”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동시에 존재적이고 가능적인 것으로서 ‘자본주의의 외부’를 주는 물리적 기반 혹은 출발점인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그것은, 이제까지 항시 존재해 왔지만, 오늘날 더욱 더 래디컬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우리의 ‘한계’이기도 하다. 우리의 가능성이며 한계이기도 한 것–그것은 무언인가? ‘지구’이다.
* 편집자 주 : 이 글의 후반부에서는 ‘공통적인 것’의 궁극적 형태로서 ‘지구’와 그것에 개입하는 ‘새로운 아나키즘의 위상’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 Gilles Deleuze/Félix Guattari, Qu’est-ce que la phiosophie?, Paris: Les Edition de Minuit, 1991, p.82 (G. 들뢰즈/F. 가타리『哲學とは何か』 財律理 역, 東京:河出書房新社, 1997년, ) [↩]
- 데이비드 그레이버『アナキスト人類学のための断章』, 高祖岩三郞 역, 東京: 以文社, 2006년, 40쪽 [↩]
- 이같은 의미에서 ‘인간의 생산’은 마이클 하트/안토니오 네그리가 ‘구성적 존재론(constitutive ontology)‘라 부르는 ’주체성의 생산‘과도 관련된다. 특히 마이클 하트가 다음 맥락에서 말하는 것은 해당 맥락과 가깝다. Michael Hardt, “Thomas Jefferson, or, the transition of democracy,” introduction to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by Thomas Jefferson, London, New York: Verso, 2007, xxiii. [↩]
- Massimo De Angelis, The Beginning of History, London, Ann Arbor: Pluto Press, 2007, p.245. [↩]
- John Holloway, Change the World Without Taking Power, London, Sterling, Virgina: Pluto Press, 2002 [↩]
- Gilles Deleuze/Félix Guattari, Qu’est-ce que la phiosophie?, p.49 [↩]
- G. 들뢰즈 『차이와 반복』, 財律理 역, 東京:河出書房新社, 1992년, 1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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