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좌파논어> 책표지 | |
ⓒ 나무, 나무 |
<좌파논어>는 좌파가 쓴 논어인가? <좌파논어>의 저자 주대환은 '사성장군', 별을 네 개씩이나 단 정치범이었다. 그의 전력은 적어도 지난 1970년대와 1980년대를 순탄하게 산 사람이 아니었음을 가리킨다.
하지만 <좌파논어>에 담긴 그의 논설은 전혀 좌파적이지 않다. 적어도 좌파라 한다면 체제의 전복 혹은 혁명을 주장해야 할진대, 눈 씻고 보아도 그런 발언이 없다. 그러면 뭘까? 혹 <좌파논어>는 독자의 시선을 당기기 위해 출판사가 선택한 상업적 이름인가?
주대환의 <좌파논어>를 처음 대하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좌파논어>의 쪽을 넘기다 보면 조용하면서도 차분한 하나의 음성을 듣게 된다. 이 음성은 확고하다.
1천년 동안 계승된 <논어> 해석에 반란
"이런 나의 해석은 주자의 해석과 다르다."(39쪽) "공자의 이런 말씀의 진의를 아는지 모르는지, 주자 이래 유학자들은 전혀 엉뚱하게 해석하고 있다."(45쪽) "결국 '입(立)'이라는 동사의 주어로서 나라가 생략되었다고 보았다. 이는 주자의 해석과 다르다." (154쪽)
<좌파논어>의 저자는 1천년 동안 계승되어온 경전 해석에서 지금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 주자가 누구인가? 조선 500년의 역사에서 선비들의 의식을 주조해버린 이다. 퇴계 이황은 주자의 성리학을 조선에 보급한 사람이고, 율곡 이이는 주자의 성리학을 조선의 풍토에 맞게 토착화한 사람이다. 약간의 차이를 논외로 한다면 퇴계나 율곡이나 모두 주자의 충직한 제자들이다. 우리는 두 분의 초상이 담긴 화폐를 매일 유통하며 살고 있다.
이후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고, 남인과 북인,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가는 과정에서 모두 성리학의 해석 문제가 관련되어 있었지만, 성리학을 오백 년 왕조의 이념으로 설정한 점에서는 이견이 없었다. 그렇게 지난 19세기까지 양반의 자녀들은 주자가 해석한 <논어>를 암송하며 자랐다. 주자에 대해 이견을 제시하는 것은 사문난적으로 지목되어 목숨을 잃었다.
주대환은 감히 주자에 대해 이견을 제시한다. '온고지신'(溫故知新) 아주 익숙한 사자성어이다. 옛 것을 알고 새 것을 알면 가히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내용으로 배웠고 그렇게 알고 있다.
주대환은 말한다. 온고(溫故)는 예전에 듣고 배운 것을 말하는데, 예전에 듣고 배운 것이란 '오랜 시간 동안 여러 사람들의 연구와 토론으로 밝혀진 이론'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온고와 지신은 병렬적 관계가 아니다. 초점은 '지신'에 있다. 지신을 하기 위해서 온고를 하는 것이다. 전통적 해석은 바로 이 점을 분명히 하지 않기 때문에 모호한 것이다." (174쪽)
'무신불립'(無信不立), 신뢰 없이는 어떤 조직이나 단체도 성립할 수 없다. 백성의 믿음이 없으면 나라가 설 수 없는 법이다. 주자는 다르다. 주자는 "사람은 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다"라고 해석했다. '입(立)'이라는 동사의 주어를 사람(民)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입(立)'의 주어는 국가로 보아야 한다는 게 주대환의 주장이다.(154쪽) 사소한 차이이다. 하지만 경전의 해석에 있어서 그 어떤 권위에도 주늑들지 않고 독자적이면서 합리적인 사고를 유지하는 태도를 우리는 주대환에게서 본다.
'군자회덕(君子懷德) 소인회토(小人懷土)'의 문구에서 전통적 해석이 범해온 오류를 지적하는 주대환의 눈매는 매섭다. 성백효 선생은 "군자는 덕을 생각하고 소인은 처하는 곳의 편안함을 생각한다"(55쪽)라고 풀이하였는데 주대환은 생각이 다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토(土)를 고향 또는 연고로 가득한 '나와바리'로 읽는다. 소인은 특혜에 기대서 살아간다."(55쪽) 그러니까 "군자는 덕을 그리워하고 소인은 고향을 그리워한다"라고 풀어야 한다. 가히 탁견이다.
주대환의 논어 해석이 '좌파적'인 이유
생각하여 보니 <좌파논어>의 좌파라는 낱말의 의미는 '비판적 지성'을 뜻하는 말이었다. <좌파논어>는 전통적 해석이 놓쳐온 점들, 혹은 오해하고 있었던 사항들을 빛나는 이성으로 시비를 가려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비판적이며 비판적이기에 좌파적이라 할 수 있겠다.
<좌파논어>는 주대환의 비판적 독창적 사유의 과실을 풍성하게 담고 있는 쟁반이다. 우리는 손을 뻗어 반중의 과실을 집으면 된다. 그중에서도 나는 학이편 8장의 '물탄개(勿憚改, 고치기를 주저하지 말라)'를 풀어내는 주대환의 날카로운 사유 앞에서 깊이 탄복한다. 지난 1000년 동안 <논어>를 암송하여 밥을 먹은 선비들은 많았어도 물탄개(勿憚改)에 대한 주자의 오해를 바로 잡은 선비 하나 나오지 않았으니...
주대환은 말한다.
"유교가 국교가 된 나라들이 여럿이었고,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이 성리학을 유일한 학문 및 종교로 인정한 탓에 공자의 상(像)은 많이 일그러졌다. 우리는 조선의 유학자들이 공자를 닮고자 노력한 사람들이라고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히 조선의 완고한 성리학자들의 모습에서 공자를 떠올리고 있다. 하지만 공자는 그들과 별로 닮지 않았다. 공자는 새로운 정보는 받아들이지 않는, 고집스럽고 완고한 무리들을 정말 싫어했다." (43-44쪽)
성백효 선생이 옮긴 주자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군자가 후중하지 못하면 위엄이 없으니 배움도 견고하지 못하다." 주대환의 주장에 의하면 '학즉불고(學則不固)'는 '배움도 견고하지 못하다'로 해석하면 안 되고, '배우고 받아들여 완고함을 없애야 한다'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좌파논어> 45쪽과 46쪽 두 면에 걸쳐 꽤 긴 분량으로 펼치는 그의 논지는 매우 정확하다.
주대환은 말한다. 공자는 정치판을 기웃거린 사람이었는데 몇몇 학자들에 의해서 경전의 해석이 주도되면서 이상과 같은 오역이 나왔다는 것이다. 실생활의 다양한 경험을 포기하면서 평생 경전 풀이에 매달린 사람들의 훈고학도 소중하다. 하지만 공자의 언설의 이면에 흐르고 있는 공자의 생각을 '살아있는 현실'로서 생생하게 재구성하려면 훈고학자가 아닌 다른 사람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공자의 속내를 풀어 헤쳐 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굴까? 공자는 이념을 추구한 사람이었다. 그리스에선 플라톤이 철인왕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시라쿠사의 디온을 만나듯이, 공자 역시 자신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왕들을 만나고 다녔다. 정도전은 자신의 이념에 따라 새 나라를 건설하였으나 공자는 새 나라를 만들지 못하였다. 노나라의 대사구직을 버린 뒤 14년 동안 떠돌아 다녔다. 풍찬노숙한 것이다.
공자는 혁명가였다. 혁명을 직접 도모한 것은 아니었기에 이 말이 어폐가 있다면 공자는 '세상을 바꾸고자 덤빈 사람'이었다. 정치가로서는 실패했으나 교사로서 성공한 사람, 그가 공자이다. 세상을 바꾸고자 악전고투하지 않고서 책상 앞에서만 경전을 읽은 사람, 일신의 출세를 위해 시험 공부만을 한 사람은 결코 공자의 풍찬노숙과 방랑과 좌절, 그 삶의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뜻을 제대로 공감할 수 없으리라.
다산은 주자를 넘어서고자 하였다. 다산이 주자를 넘어섰다고 평가할 수 있는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주자와 다산은 같은 사회 구성체에서 산 인물들이다. 농업 경제를 토대로 하고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를 상부구조로 하여 운용되었던 점에서 주자의 송나라나 다산의 조선이나 같은 사회 구성체이다. 주자는 불교로부터 유학을 지키고자 성리학을 세웠고, 다산은 그 주자의 성리학을 넘어서려 하였으나, 다산은 그의 사회 구성체를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1945년 일본제국주의로부터 해방이 되고 초등학교에 들어가 한글을 배운 우리 세대는 사회 구성체 상으로 주자와 다산과 다르다. 하여 주자의 시각으로부터 독립적으로 공자를 볼 수 있는 세대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사서삼경을 암송하여 제도권의 녹을 얻어먹던 주자와 다산이 아니다. 따라서 왕조의 이념적 성향으로부터 자유롭다. 우리 세대는 공자의 <논어>가 전제국가의 국교로 자리 잡기 이전, 선진(先秦)유학의 자유로움을 있는 그대로 읽을 수 있는 세대이다.
주대환은 봉건적 통치배들의 이념적 괴수였던 공자의 상(像)을 거부한다. 한때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사회 혁명을 주창했던 그가 공자의 얼굴에서 인류의 보편적 이해를 대변한 사상가라고 칭송하는 것을 보면 좀 의외다.
"공자는 세상 어디에나 통용되는 원리(道)를 추구했고, 보편적으로 누구에게나 미치는 덕을 추구했다."(57쪽) "그는 세계인이고 보편주의자였다." (58쪽) "공자에게 중요한 것은 가치와 이상의 실현이었지, 고향, 조국, 종족, 민족, 인종 등이 아니었다. 우리는 공자나 예수 같은 보편주의자, 사해동포주의자들의 사상혁명에 깊이 공감한다."(54쪽) 모택동과 주은래가 살아난다면 주대환의 공자 평가에 대해 뭐라고 답할지 궁금하다.
공자 사상의 '여성성'
군신유의(君臣有義)요, 군위신강(君爲臣綱)이라.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리가 있어야 하고, 신하는 임금을 위해 충성을 바쳐야 한다는 게 유교의 교리라는 것을 우리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사리를 분별할 나이가 되기도 전에 충과 효는 유교의 기본 덕목이라고 배워버렸기 때문에 군주에 대한 충성은 유교의 창시자 공자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더욱 지난 1970년대 독재자가 앞장서서 충과 효를 강조하는 국면에서 우리는 당연히 공자와 유교에 대해 비판적일 수밖에...
그런데 주대환은 <좌파논어>에서 말한다. '충(忠)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란다. 그의 논어읽기에 따르면 팔일편 19장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곳에서 충은 '마음을 다한다'는 뜻으로 쓰이는 단어였다는 것이다. '충'은 결코 일방적 맹목적 복종을 포함하는 수직적 상하관계의 덕목이 아니었다는 게다.
어쩌다 공자가 '여자와 소인은 기르기가 어렵다'라고 했을까? 우리는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질서를 공자가 옹호한 사람으로 안다. 지난 2천년 여성의 인격을 닭잡듯 잡아버렸던 저 악랄한 칠거지악이 유교에서 정립된 교리인 것으로 알아왔다.
주대환의 논어읽기에 따르면 양화편 25장의 위 문구를 제외하면 여성의 인격을 폄하한 구절이 논어 498장 중 두 번 다시 없다. 주대환은 페미니스트였다. 일관되게 여성의 인격을 존중하고 아내와 가사를 분담해왔다는 점에서 매우 모범적이었다.
공자 사상의 여성성을 주목하는 주대환의 발견은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한 독창적 견해이다. 거친 남자 자로에게 시와 예악의 공부를 요청한 것은 자로에게 여성화를 주문한 것이란다. 시와 예악의 교육을 통해 공자가 함양하고자 한 것은 타인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감의 정신이다. 인이란 무엇인가?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나에게 강제하지 않는 것이다.(己所不欲 勿施於人) 인이란 타인의 입장에 서서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 공감의 능력에서 여성이 남성을 압도한다.
예와 악이 실현된 나라, 그 속에서 인(仁)의 마음이 구현되는 나라를 공자는 이루고자 하였는데, 공자는 자신의 주장이 실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고 주대환은 상상한다. 다만 공자는 그 꿈이 실현되기까지 세월이 오래 걸린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그래서 제자들을 기르는 데 힘을 쏟았다는 것이다.
주대환은 평한다. "공자는 훗날을 기약했고, 실제로 한(漢)대에 이르러, 주(周)나라의 옛 제도와 문화가 다소 변형되었지만 되살아났다. 그가 돈키호테와 다른 점은 조직가였고 교육자였고 이데올로그였으며 당(黨)을 만든 사람이라는 것이다."(68)
공자가 당(黨)을 만든 사람이라는 평가는 좀 낯설다. 뭐냐? 그는 말한다.
"임중도원(任重道遠)이라! 선비가 맡은 임무는 중하고 도는 멀다. 세습되는 봉토나 지위도 없이, 거의 무산자에 가까운, 오직 실력과 군사적 행정적 실적을 내서 대부가 되는 걸 꿈꾸며 살아온 선비들에게 그런 세속적 성공을 뛰어넘는 커다란 이상과 미션을 부여하여 자부심과 인생의 고귀한 목표를 주었으니, 선비들이 유가로 모여든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한다.
'너희들은 이제부터 인민을 위해 봉사하고 '인(仁)'을 실현하여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고 천하에 평화를 가져올 막중한 임무를 가지고 있다'고 가르친 것이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다. 그래서 선비는 군자가 되어야 하고, 군자에게는 흡사 대승불교의 보살처럼 이타적 삶을 살아야 할 의무가 주어진다. 인생에는 '고귀한' 목표가 세워지고, 마음을 넓고 굳세게 가져 인고(忍苦)의 가시밭길을 가야 한다." (60쪽)
제자들에게 선비의 이상과 미션을 부여하여, 그런 이상을 실현하고자 분투하는 사람들의 무리(黨)를 만들어 냈다는 주대환의 평가는 공자의 삶과 <논어>의 전편을 꿰뚫는 탁견이다. 그런 점에서 공자의 무리들은 고대 동아시아의 사회주의자들이 아니었을까라는 물음을 주대환은 우리에게 슬그머니 던진다. "공자의 정치철학을 동아시아의 고대 사회주의 정치철학이라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에 대립하는 법가는 동아시아의 고대 자유주의 정치철학으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을 것이다."(153쪽) 참으로 흥미있는 화두이다.
주대환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제도권으로부터 녹을 받아먹은 적이 없다. 대학에 발을 들어선 이래 지금까지 '이룰 수 없는 꿈'을 이루기 위해 청춘을 다 바쳐 왔던 것으로 안다. 이제 그의 나이 이순을 통과하고 있다. 나이 스무 살에 이상주의자가 아니라면 그를 젊은이라 할 수 없고 나이 사십에도 여전히 이상주의만을 고집한다면 그를 온전한 어른이라고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젊었을 때 주대환이 꾼 꿈의 색깔은 붉디붉었다. 지금 그가 꾸고 있는 꿈의 색깔은 분홍빛이다. 나는 나이 육십을 통과하고 있는 주대환의 분홍빛 꿈에 대해 손가락질을 하고 싶지 않다.
그가 <좌파논어>를 쓰면서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렇다. "이제 우리는 자유와 평등이 실현된 나라에 살면서, 비로소 자유와 평등의 불안정과 한계를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그것은 연대의 정신에 의해 보강되고 뒷받침되지 않으면 지극히 불안정하고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대한민국에 부족한 것은 자유와 평등이 아니라 연대의 가치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인(仁)'이다."(88쪽) "점차 불균(不均)하고 불화(不和)하고 불안(不安)한 나라가 되어가는 우리나라"(99쪽) 어쩌자는 것이냐!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황광우 기자는 <철학콘서트>의 저자입니다. 주대환 (지은이) / 나무,나무 / 2014-04-01 /15000원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