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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8일 수요일

도올과 베버의 대화

도올과 베버의 대화 
http://www.yesu.kimc.net/33dolbe.htm
 ▣ 목차
 1. 머리말
 2. 도올과 베버의 프로필
 3. 베버의 사회과학적 방법론
 4. 금욕주의의 신앙적근원
 5. 근대 자본주의의 특징
 6. 도올의 베버 비판
 7. 맺 음 말
 ● 부 록 1 [도올 논어(2)]
 ◇ 요절 : ① 성경: "네가 자기 사업(직업 또는 사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잠22:29)
               ② 論語: "자왈 '군자불기'(子曰 '君子不器')"
 ▣ 본문
 1. 머리말
 KBS TV1 의 '도올의 논어 이야기' 제42강(2001년 3월 2일, 23:30~24:30)에서 도올의 베버비판을 흥미 있게 시청하고, 그 강의 내용을, 도올 강의를 시청하는 시청자들과 또 이 주제에 관심을 갖는 분들을 위하여, 좀더 부연(敷演)하고자 하여 동서양의 대표적 두 석학(碩學)의 지상대화(紙上對話,Cyber dialogue)의 장(場)을 마련했다. 이것은 작은 세기적인 대화(世紀的인 對話)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대화의 논점(Point)은 서구 근대의 직업관(Beruf, Professional specialist)과 유교권의 직업[기(器), a tool, 동양적인 전문직]사상이 근대의 동서양의 경제사회에 각기 끼친 문화와 시스템(System)의 차이를 비교한 막스 베버(Max weber)의 비판을, 도올이 공자(孔子)편에서 비판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필자가 국외자(Spectator)로서 코멘트(Comment)하는 형식으로 쟁점별로 지상대화를 전개시킨다.  대화의 텍스트(Text)는, '도올논어(2)' (김용옥저서, 서울, 통나무, 2001.2.1)와 '프로테스탄티즘의 倫理와 資本主義의 精神'(막스 베버저서, 강명규의역, 서울, 一潮閣, 1985.3.10)이다.(단, 이 글은 본문에서는 각기'도올논어(2)'와 '베버의 저서'로 약칭한다.)
 2. 도올과 베버의 프로필(Profile)
 도올(김용옥교수)은 한국 천안 태생(서기 2001년 현대 50대 초반)으로 고려대학교, 국립대만대학, 일본동경대학, 미국하바드대학에서 중국 철학을 전공하고 고려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세계적인 중국 철학자의 한 분이다.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는 독일 엘프르트시 태생으로 하이델 베르크대학에서 법률학, 역사학, 경제학, 사회학, 철학등을 수업(修業)한 후, 그의 풍부한 세계사적 지식을 배경으로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 철학등을 포괄적으로 이해.발전시킨 위대한 서구의 사회과학자였다. 그의 핵심적인 업적은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사회과학 방법론의 확립이며, 그 둘은 그의 사회과학 방법론에 의한 근대 자본주의의 해석이다. 그의 대표적 역작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 (Die Protestantishe Ethik Und Geist des Kapitalismus, zuerst 1904-1905)이다
 3. 베버(Max Weber)의 사회과학적 방법론
 (1) 베버의 방법론
 베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베버의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베버의 방법론은 이념형(理念型,Ideal Typus)과 가치 중립성(價値 中立性,Wertfreheit)이다. 현실의 인과관계를 설명할 경우 인과성의 필연성이나 법칙이 아니라 달리도 일어날 수도 있는데 그렇게 일어 났다는 개연성(Probability), 또는 확율성으로 설명한다. 즉 베버는 어떤 역사적 현상의 결과는 무수히 많은 원인들이 모두 일정한 역할을 가지고 참여함으로써 나타난 것이므로 한 가지 요인에 의한 필연적 결과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경제적인 요인만을 중시하는 맑스(K. Marx, 1818-1883)의 방법론과 역사학파의 개념들(역사법칙 및 민족정신등)을 배격하였다.  따라서 그의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의 윤리라는 이념형(理念型)은 자본주의 정신의 기원을 상징하기 위한 수단일 뿐 자본주의 자체를 설명하기 위한 개념은 아니었다. 베버의 개념은 인식자(認識者)의 사유과정(思惟過程)에서 얻어지는 것이므로 현실 속에서 순수하게 발견될 수 없는 것이다. 현실은 여러 이념형들의 혼합체로 나타나므로, 특수한 개별적 특징 모두를 설명해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학파등의 평균(平均槪念)이 제외시킨 비 평균적인 요소도 모두 설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2) 도올의 베버 방법인식
 (가) 도올의 텍스트
 (ㄱ) 자료 1 : "자아! 이 정도되었으면 공자의 '군자불기'(君子不器)로 인하여 동양사상이 얻어먹어야 했던 '베버의 욕지거리'를 독자들은 실컷 얻어 먹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도올논어(2), P149]
 (ㄴ) 자료 2 : "그러나 우선 그가 케피탈리즘의 발생연원의 정신사적 필연성으로서 프로테스탄티즘을 운운하는 것은, 결과적 사태에 대한 기술은 될 수 있을 지언정, 인과론적인 필요충분조건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에서 캐피탈리즘이 발생 안할 수도 있는 것이며, 유교의 현세주의에서 캐피탈리즘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상적 성향을 캐피탈리즘의 발생으로 유도시키는 해석의 행태에는 그 사상자체 이외의 모든 정치, 사회, 경제사적 우발요인이 관여되어 있는 것이다. 캐피탈리즘의 불발생의 원인을 유교에다 물을 수 없다...." [도올논어(2), P150상단)
 (나) 도올 이해에 대한 코멘트
 첫째, 자료1에서 '베버의 욕지거리'란 말은 속어적 표현으로 적당하지 않지만, 더 중요한 요점은 도올이 베버의 가치 중립적 즉 몰가치적(沒價値的)방법론을 간과한 말을 하고 있다.
 둘째, 자료2에서는 세 가지 오류점이 발견된다. 그 하나는, 베버의 방법론이 이념형(Ideal Typus)이라는 것을 지각했다면  "...인과론적인 필요충분조건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표현이 나올 수 없다.  그 둘은,  "...그러한 사상적 성향을 캐피탈리즘의 발생으로 유도시키는 해석의 행태에는 ..."  구절에서도 베버의 이념형과 가치중립적인 방법론을 간과하고 있다.
 그 셋은, "...캐피탈리즘의 발생으로 유도시키는 해석의 행태에는 그 사상자체 이외의 모든 정치, 사회, 경제사적 우발요인이 관여되어 있는 것이다...."라고 하여 이 구문에서는, 도올은 베버의 "현실은 여러 이념형들의 혼합체로 나타나므로 평균개념이 제외시킨 비 평균적인 요소도 모두 설명할 수 있다."는 베버의 이념형과 의견이 일치 하기도 하여 베버 방법론에 대한 이해의 일관성에 혼란을 준다.
 4. 금욕주의(禁慾主義)의 신앙적 근원
 (1) 도올의 텍스트
 ●자료 3 : "퓨리탄의 금욕주의가 가귀(可貴)한 것이라면, 유교의 금욕주의 또한 그 이상의 진실한 내면을 포용하는 것이다."[도올논어(2), P150하단)
 (2)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의 금욕윤리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윤리는 '인간의 모든 소유는 하나님으로부터 맡겨진 것이고, 소유자는 다만 하나님의 관리자(magisrates of officers of God)일뿐이다.'라는 기독교의 교리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을 인간의 향락을 위하여 낭비하는 것은 올바른 행위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진실한 기독교인들은, 성실한 직업생활(잠22:29)로 저축한 재산을 건전한 사업에 투자하여 합법적 이윤을 추구하여, 그것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선용(善用)해야 할 금욕적 소유인들이다.(참고; 마25:14-30)
 (3) 유교의 금욕윤리
 도올은, "유교의 금욕주의 또한 그 이상의 진실한 내면을 포함하고 있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유교의 내면적 금욕윤리의 실체(철학)가 무엇인가? 알고 싶다.
 우리가 알기엔 퓨리탄의 금욕윤리 이상의 진실한 내면적 금욕주의를 들은 적이 없다. 다시말하면 합리적인 절약심이나, 천민자본주의 정신인 '영리욕'(營利慾)이상의 신앙적인(참고; 마6:19-21) 금욕윤리가 유교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5. 근대 자본주의의 특징
 (1) 도올의 텍스트
 ●자료 4 : 도올은,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의 금욕주의에서 캐피탈리즘(Capitalism)이 발생 안할 수도 있는 것이며, 유교의 현세주의에서 캐피탈리즘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도올논어(2), P150]
 (2) 자본주의(Capitalism)의 개념
 (가) 자본주의의 두 개념
 막스베버는 두 가지 자본주의를 말했는데, 그 하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경제활동의 동기인 영리욕(營利慾)만에 의하여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를 천민자본주의(Pariakapitalismus)라고 하고, 프로테스탄티즘(특히 Calvinism)의 금욕윤리에 의하여 규제되는 규범적 이윤추구의 자본주의를 근대적 자본주의 또는 윤리적 자본주의라고 정의했다.
 (나) 근대 자본주의의 인프라(INFRA)
 근대 자본주의 성립의 두 가지 초석은 자본의 축적과 상품노동의 제공이었다.  이것은 주로 프로테스탄트들의 소명의식적인 전문직업인(Professional Specialization)이 제공한 상품노동과 그들의 금욕적 절약에 의한 산업자본의 축적(accumulation)이었다고 한다.
 (ㄱ) 자본(투자자원)
 프로테스탄트들의 금욕적 절약에 의한 투자에 대하여 베버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료 5 : 전형적인 청교도들은 많이 벌고 적게 썼다. 그리고 그의 소득을, 절약하고자 하는 금욕주의적 열정으로부터, 매우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사업에 자본으로서 재투자하였다.[The typical Puritan earned plenty, spent little, and reinvested his income as capital in rational capitalist enterprise out of an asceticist compulsion to save.(RC, p.247)]
 (ㄴ) 상품노동의 제공
 근대 자본주의는 자본과 함께 인간노동의 상품화가 동반된 시스템이었다. 즉 근대의 자본주의는 자본을 갖지 못한 노동자가 자기의 노동력(생산수단)을 팔아서 살아가는 임금노동자가 필요하다. 이 노동자들이 일정한 영역의 노동행위를 전문적으로 반복할 때 근대적인 의미의 직업(Professional, Beruf, Vocation)이 되었고, 또 사회적 지위도 되었다. 이 근대적 의미의 직업은 동양이나 중세의 직업개념과 다르다.
 서구의 중세(캐토릭사회)에 있어서, 직업은 자연적 질서의 하나이나 도덕적 계율에 있어서는 권고(勸告, Consolia)의 영역이지 명령(命令, Praeceta)은 아니었다. 이에 대하여 프로테스탄티즘의 직업개념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사명(Aufgabe)이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는 도덕적 개념이 있다.  즉  Beruf, Vocation이라는 근대사회의 직업개념은 바로 이 소명(Calling)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3)도올 주장(자료 4)의 비평
 도올은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에서 역사상 특유한 경제 시스템을 결과 시킨 윤리적(또는 근대적)자본주의와 천민자본주의 (Pariakapitalismus)와의 구분을 간과한 채,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의 금욕주의에서 캐피탈리즘(Capitalism)이 발생 안할 수도 있고, 유교의 현세주의에서 캐피타리즘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 텍스트의 논점은 유교의 현세주의가 발생시킬 수 있는 자본주의가 그 어떤 자본주의 이냐이다.  분명히 밝히거니와 유교의 현세주의가 결코 근대 서구의, 그 특유한 윤리적 자본주의를 발생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유전인자가 다른 동양인이 서양인을 탄생시킬 수 없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6. 도올의 베버 비판
 (1) 베버의 텍스트
 ●자료 6 : 유생들의 방심치 않는 자기제어, 즉 수신의 목적은 외면적 제스츄어나 고상한 매너의 품위를 유지하는데 있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의 수신은 기본적으로 심미적인 것이었으며 본질적으로 부정적 성격의 것이었다. 그 자체로서 위엄있는 품행, 아무런 실질적 내용이 없는 공허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품행만이 존중되고 욕망되었다.(The watchful self-control of the confucian was to maintain the dignity of external gesture and manner, to keep "face."  The self-control was of an aesthetic and essentially negative nature. Dignified deportment, in itself devoid of definite content, was esteemed and desired.)

 자료 7 : 유자들에게는, 세분화된 전문직종은 그것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유용한 것인가를 불문하고, 진정으로 긍정적인 권위를 갖는 위치로서 인식될 길이 없었다.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공자가 "논어"에서 한 말, 문화적으로 교양을 쌓은 인간들 즉 군자는 하나의 기(器)로 국한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군자불기(君子不器)의 사상과 관련되어 있다. 즉 군자는 이 세계에 대한 적응 즉 처세나 자신의 완성을 지향하는 수신의 방식에 있어서, 그는 그 자신이 최종적 목적이라고 생각할 뿐, 어떠한 기능적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유교윤리의 이러한 핵심은 전문직종의 분업을 거부했으며, 근대적 전문직의 뷰로크라시를 거부했으며, 전문직종을 위한 특수훈련을 거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군자불기(君子不器)의 사상은 이윤의 추구를 위한 경제학의 훈련을 거부했던 것이다.[For the confucian, the specialistic expert could not be raised to truly posetive dignity, no matter what his social usefulness. The decisive factor was that the "cultured man"(gentleman) was "not a tool"; that is, in his adjustment to the world and in his self-perfection he was an end unto himself not a  means for any functional end. This core of confucian ethics rejected professional specializaton, modern expert bureaucracy, and special training; above all, it rejected training in economics for the pursuit of profit.(RC, p.246)]
 (2) 도올의 원론적 비판
 도올은, "군자불기(君子不器)란 기(器)를 부정하는 언급이 아니라, '무본'(務本)의 뜻을 표방하는 것이다. 소라이(荻生조徠, 1666-1728)의 비판에 의하면 막스 베버의 '군자불기'(君子不器) 비판은 근본적으로 과녁이 빗나간 것이다. 근원적으로 해당사항이 없는 것이다.  불기(不器)는 기(器)의 부정이 아니기 때문이다."라 하며 소라이의 '大低學以成器'(대저학이 성기)를 인용하며, 모든 배움은 기(器)를 이루고(成器), 이 성기(成器)를 통하여 기(器)를 부리는 대도(大道不器)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도올논어(2), p.155]
 도올은 이런 불기(不器)의 논리에 의하여, '공자의 군자불기(君子不器)로 인하여 동양사상이 얻어 먹어야 했던 베버의 욕지거리를 독자들은 실컷 얻어 먹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도올논어(2), p.149]라고 하며, 베버의 판단을 불쾌히 여겼고, 나아가서 베버의 군자불기(君子不器) 비판을, '근본적으로 과녁이 빗나갔고, 근원적으로 해당사항이 없다'고 일축했다.[도올논어(2), p.155]
 (3) 도올의 베버 비판에 대한 코멘트
 (가) 기본개념의 이해문제
 (ㄱ) 군자(君子)와 전문직(Professional Specialization)
 도올은 TV강의에서 군자(君子)를 공자 시대에서는 사(射), 서(書), 예(禮), 악(樂)등을 갖춘 도덕적 지도적 인격자로 지칭했다.  이것은 고대희랍(Greece)의 프라톤(Plato, B.C.427-347)의 이상국(The Republic)에서 말하는 지배자계급(gold class)인 엘리트(Elite, 주로 도덕적 철학자)와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공자의 군자(君子, cultured man, gentleman)와 근대 서구의 전문직(Professional)과는 그 개념이 같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도올 자신도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공자언명의 맥락이 과연 근대사회적 특징을 이루는 전문직종에 대한 종사의 거부(巨富)가 군자(君子)됨의 특징이라고 하는 의미의 맥락으로 사용된 것인지는 지극히 불투명하다.'고 말했다.[도올논어(2), p.p.150-151] 공자는 다만 자기시대의 이상적 인간상을 말한 것이지 2000여년 후인 오늘의 군자상(君子像)을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ㄴ) 불기(不器)와 제네랄리스트(generalist)
 도올은, '기(器)는 분명 한 그릇의 국한된 기능'이나, 불기(不器)는 무본(務本)과 대도(大道)의 경지라 설명했다.[도올논어(2), p.151, p.155]
 즉 불기(不器)는 기(器)의 세계의 부정이 아니다. 기(器)를 포용하는 대도(大道)이며, 제네랄리스트(generalist)라는 의미를 암시했다.[도올논어(2), p.156]
 즉 소라이와 도올은, '대저 배움이란 기(器)를 이루지 않음이 없다.(大低學以成器)라고 하여 인간의 모든 배움이 기(器)를 이루고(成器), 이 성기(成器)를 초극하여 대도(大道)에 이르는 것이 불기(不器)의 경지요, 제네랄리스트(generalist)라 했다.[도올논어(2), p.155]
 이런 뜻이라면, 공자의 기(器)는 지행적 실용인(知行的實用人)이 아니라 다만 현학적(衒學的) 지식인에 불과한 것같다.  그러나 근대자본주의 사회의 스페시알리스트(Specialist)는 근대 분업사회의 직업(Beruf, Vocation)인이다. 그리고 도올이 말하는 제네랄리스트(generalist)는 무엇인다?  도올은, '인간과 우주에 대한 근원적 통찰력과 전체적 조망'을 갖는 사람이라고 강조하면서, '우리 당대의 모든 스페시알리스트는 불기(不器)의 스페시알리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도올논어(2), p.156]
도올의 이 주장은 현대적 해석으로는 옳은 말이지만 근대 이전의 유교권 문화사회에는 실업(實業)의 기능인들(동양적 스페시알리스트)은 천시되었다. 이것을 베버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유자들에게는, 세분화된 전문직종은 그것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유용한 것인가를 불문하고, 진정으로 긍정적인 권위를 갖는 위치로서 인식될 길이없었다."고 (For the Confucian, the specialistic expert could not he raised to truly positive dignity, no matter what his social usefulness.)[도올논어(2), p.148]
 오히려 서구의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이 태생시킨 전문직업(Beruf)의 스페시알리스트 들이야말로 '우주의 근원적 진리'인 성경(하나님의 말씀)의 진리 안에서 살기 위하여 노력한 진정한 제네랄리스트 들이 였다고 말할 수 있다.
 (나) 도올의 베버 비판
 (ㄱ) 베버의 비교 구절문제
 이미 언급한바 있듯이 베버의 군자불기(君子不器)에 의한 비교의견(자료 7)을 '베버의 욕지거리, [도올논어(2), p.149]니, 또 '과녁이 빗나갔고 해당사항이 없다.'[도올논어(2), p.155]고 말한 도올의 베버 인식은 재고해 볼 문제점이다.
예컨대 베버는 동서문화(서구근대문화와 동양의 전통문화)의 비교에 있어서, 서구의 근대 자본주의문화의 근원(프로탄티즘)의 대표구절로, '네가 자기사업(직업,사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잠22:29)라는 성경 말씀을 인용했고,(베버의 저서, p.44)  이에 대비되는 유교 윤리의 대표적 구절로서는 공자의 군자불기(君子不器)의 구절을 아필시켰다[도올논어(2), p.142]
 만약 도올이 말한 대로 베버의 군자불기(君子不器)에 대한 비교방법론이 빗나갔다면, 도올은 유교문화권의 대표적 구절로서, '군자불기'(君子不器)가 아닌 다른 대표구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의 유교문화권(경제사회)의 2000여년간의 농경사회적 정체성(停滯性)과의 무관성도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도올은, '군자불기(君子不器)의 가르침은 시공을 초월하여 인간에게 던지는 심오한 가치가 존(存)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동양사상의 대표적 구절임을 자인하고 있다.[도올논어(2), p.156]
 (ㄴ) 베버의 텍스트(자료 6,7)해석
 막스베버는 , 유가사회는 서구근대사회와는 달리 물질적 생산에 기여하는 전문직 종사자들 보다는 군자(君子)라는 현학적(衒學的)인 지적문화인(Cultured man)과 내실보다는 인간 체면(face)과 품행이 존중되는 사회라고 인식했다,(참고;자료 6)  그래서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이 탄생시킨 서구근대의 자본제 시스템의 요소들인, 전문직(Prefessional Specialization), 현대의 전문관료 조직체제(expert bureaucracy) 특수한 교육제도(Special training, 학교교육등), 이윤추구를 위한 합리적인 기업조직 및 경제학(18-9세기의 고전파 경제학의 놀라운 발전을 상상하라.)이 발달하지 못한 유교권사회의 문화적 배경을 지적했다.
 여기서 특히 유의할 점은 베버이론은 지금부터 1-2세기전의 동서양사회의 문화형(Culture pattern)과 경제시스템의 비교인식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동양사회(유교문화사회)는, 이미 유교문화가 지배적이 아닌 오히려 서구사회화, 그것도 천민자본주의 사회가 되어 버린 하나의 경제적인 세계화 사회(WTO등)속에 있다.
 7. 맺음말
 첫째, 베버가 지적했던 유교권 사회의 체면문화(Face Culture)는 동양특유의 유교권 문화가 아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엄중히 섬겼던 유대교사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온통체면치레와 외식(外飾)으로 가장한, 부패한 유대교지도자들을 향하여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질타(叱咤)하셨다.
 "저희(유대교 지도자들)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 하는구나."(마23:5-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 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 하도다."라고(마23:27-28)
 둘째, 막스베버도 서구사회의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의 근대 자본주의 가 19세기 후반기 이래 그 금욕적 윤리성이 퇴색해 가는 역사의 흐름을 바라보고 다음과 같은 경구적(警句的)인 예언을 남겼다. "오늘 날 영리가 최고도로 발달한 합중국(미국)에서 보면 영리활동이 종교적윤리적 의미를 거세 당했기 때문에 순전히 경쟁적인 감정에 휩쓸리는 경향하에 있으며 그 결과는  이미 경(競技)의 성격까지 띠게 되는 경우조차 드물지 않다....이와 같은 문화적 발전의 '최후의 사람'에 관하여는 다음의 말이 진리가 될 것이다.
 '무정신(無精神)의 전문가. 무감성(無感性)의 향락인. 이들 무(無)의 인간들은 인류가 지금껏 도달하지 못한 단계에 올랐다고 자부(自負)하리라.' 고 (베버의 저서, p.161)
 베버의 이 말은, 그때로부터 약 100년이 흐른 오늘의 21세기에, 천민자본주의의 룰(rule)만이 기준이 되는 세계 경기장에서 무(無)의 인간들의 무자비한 무한경쟁으로 실연(實演)되고 있지 않는가. 요컨대 내면적인 도덕적 생명력이 사라진 모든 종교의 교리는, 그 교훈과 교리가 아무리 위대할지라도, 체면문화(體面文化), 또는 외식문화(外飾文化)로 전락하여 도리여 인간의 질곡(桎梏)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이 글을 맺는다.  
 ▣ 부록 1
 ● 도올 논어(2) 중에서(p.142~156)
  2-12. 子曰: "君子不器."
          자왈: "군자불기."
 2-12.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군자는 그릇처럼 국한되지 않는다."
 禱注    공자의 말씀으로서 전해내려 오는 이 "군자불기"라는 말은, 본시 옛부터 유교전통의 핵심적 윤리로서 존중되어온 명언이기도 하지만, 이 말이 20세기 세계학술계의 쟁점(爭點)으로서 지극히 유명하게 된 것은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가 이 말을 그의 역저, "중국 종교"(The Religion of China)에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대비되는 유교 윤리의 대표적 구절로서 아필시킨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베버에 의하면 프로테스탄티즘의 경우 순결한 초월주의의 인정이 오히려 현실을 제어하는 힘을 잉태시켰지만, 유교의 경우는 초월주의의 거부가 합리주의 전통을 강화하는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현실에 대한 합리적 제어의 능력을 상실시켰다고 보는 것이다. 유교적 삶의 방식은 합리적이긴 했지만, 그것은 인간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합리성이 아니었으며, 그것은 예악(禮樂)과 같은 어떤 외면적 규정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라는 것이다.(The is to say, the Confucian way of life was rational but was determined, unlike puritanism, from without rather than from within. RC, N.Y. : The Free Press. 1964, p.247) 그래서 그는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p.142~143)
     Confucian rationalism meant rational adjustment to the world; Puritan rationalism meant rational mastery of the world.
     유교적 합리주의는 이 세계에로의 합리적 적응을 의미하는 반면, 청교도 합리주의는 이 세계의 합리적 제어를 의미하는 것이다.
 청교도의 경우, 초월적인 신에게로의 철저한 복속이 비록 내가 이세계 내에 거주하고 있지만 자신의 삶이 이 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to live "in" the world and yet not be "of" it,) 어떤 극복의 동기를 부여했으며 그것은 무서운 금욕주의를 잉태시켰다.그리고 금욕주의는 자본의 축적이라고 하는 경제적 합리주의(economic rationalism)의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의 가장 핵심이 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개념은 독일어로 "베루프"(Beruf)라고 표현되는 "신의 소명"(God′s calling)이다. 이 "베루프" 라는 독일어를 영어로 바꾸면 "보케이션(vocation)이 되는데, 보케이션은 신의 소명 즉 신의 부르심이라는 말과 동시에 "직업"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즉 이 "베루프"-보케이션"이라는 단어의 배면에는 그 단어의 의미르 탄생시킨 서구 프로테스탄티즘의 문화적 의식구조가 서려있는 것이다. 서구인들은 자기의 현세적 삶의 직업(장인의 직종)을 곧 초월적 신의 소명으로 생각했으며, 그 자체를 성스럽게 생각했으며, 그 직업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초월적 신의 소명을 현세적으로 구현시키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직업의식이 그 직업의 소명에서 생기는 결과를 현세적으로 향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결과를 신의 영광을 위하여 저축해 나갔던 것이다.
     The typical Puritan earned plenty, spent little, and reinvested his income as capital in rational capitalist enterprise out of an asceticist compulsion to save.(RC, p.247).
     전형적인 청교도들은 많이 벌고 적게 썼다. 그리고 그의 소득을, 절약하고자 하는 금욕주의적 열정으로부터, 매우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사업에 자본으로서 재투자하였다.
 그러나 유교적 군자상에는 이러한 내면적 초극의 충동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p.143-144)
    The watchful self-control of the Confucian was to maintain the dignity of external gesture and manner, to keep "face." The self-control was of an aesthetic and essentially negative nature. Dignified deportment, in itself devoid of definite content, was esteemed and desired.
    유생들의 방심치 않는 자기제어, 즉 수신의 목적은 외면적 제스츄어나 고상한 매너의 품위를 유지하는데 있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의 수신은 기본적으로 심미적인 것이었으며 본질적으로 부정적 성격의 것이었다. 그 자체로서 위엄있는 품행, 아무런 실질적 내용이 없는 공허한 것임도 불구하고, 그러한 품행만이 존중되고 욕망되었다.
 유교에는 초월성의 측면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지나치게 현세적이고, 사후의 미래적 보장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현세적 달성만을 추구하며, 현세적 향유만을 최선의 가치로 삼는다. 그래서 심미적 인생만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여기 "심미적"(aesthetic)이란 말은 "닳아빠진 미감"을 의미하는 것으로 매우 부정적인 맥락에서 쓰여진 것이다. 자기내면의 초극의 독백이 없기 때문에 외면적 겉치레만 추구하게 되고, 사회적 관계에서 성립하는 "체면"만을 중시하게 된다."예의"니, "도의"니, "의례"니 하는 모든 것이 이 "체면"과 관련되는 것이다. 여기 베버가 쓴 "face"라는   (p.145)
 말은, 중국말로 "미엔쯔"(面子 면자)라는 말인데, 그것은 우리말로 "체면"에 정확히 해당되는 말이다. 한 마디로 서구 프로테스탄티즘의 문화가 소명의 문화라면 동아시아 유교의 문화는 곧 체면의 문화라는 것이다.
                    서양           소명의 문화(vocation)
                 동양            체면의 문화(face)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이것은 사도바울이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로마서12:6~8). 여기에는 인간의 소명에 대한 이야기가 잘 설명되어 있다. 이 말은 이에 앞서 우리 몸과 지체의 관계를 비유로 들어, 우리 인간들의 삶의 소명을 부연한 것이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로마서12:4-5) (p.146)
     For as in one body we have many members, and all the members do not have the same function, so we, though many, are one body in Christ, and individually members one of another.
 나의 몸은 하나이지만, 이 하나된 몸은 많은 부분(지체)이 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 많은 부분(지체)들은 제각기 다른 고유한 기능(function)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모두 동일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면 나의 몸은 기능할 수 없다. 오히려 그 몸의 지체가 가기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조화된 하나의 몸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 바울은 "그리스도"를 하나된 나의 몸에 비유한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개별적 삶을 그 몸의 각기 다른 개별적 지체의 기능에 비유한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각기 다른 "기능", "소명"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 다른 직분 때문에 오히려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몸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 사도바울의 이러한 언명은 바로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말을 거부하는 듯이 보인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한 지체일 뿐이며,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다"는 것이다. (p.147)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불기(不器)가 아니라, 하나의  기(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섬기는 자는 섬기는 일로,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일로, 위로하는 자는 위로하는 일로, 타이피스트는 타이프치는 일로, 대장장이는 대장장이 일로, 똥푸는 자는 똥푸는 일로, 제각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군자불기(君子不器)가 아니라 군자유기(君子唯器)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베버는 말한다.
    For the Confucian, the specialistic expert could not be raised to truly positive dignity, no matter what his social usefulness. The decisive factor was that the "cultured man"(gentleman) was "not a tool" ; the is, in his adjustment to the world and in his self-perfection he was an end unto himself, not a means for any functional end. The core of confucian ethics rejected professional specializaton, modern expert bureaucracy, and special training; above all. it rejected training in economics for the pursuit of profit.(RC, p.246)
   유자들에게는, 세분화된 전문직종은 그것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유용한 것인가를 불문하고, 진정으로 긍정적인 권위를 갖는 위치로서 인식될 길이 없었다.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공자가 "논어"에서 한 말, 문화적으로 교양을 쌓은 인간들 즉 군자는 하나의  기(器)로 국한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군자불기(君子不器)의 사상과 관련되어 있다.(p.148)
    즉 군자는 이 세계에 대한 적응 즉 처세나 자신의 완성을 지향하는 수신의 방식에 있어서, 그는 그 자신이 최종적 목적이라고 생각할 뿐, 어떠한 기능적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유교윤리의 이러한 핵심은 전문직종의 분업을 거부했으며, 근대적 전문직의 뷰로크라시를 거부했으며, 전문직종을 위한 특수훈련을 거부했다.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군자불기(君子不器)의 사상은 이윤의 추구를 위한 경제학의 훈련을 거부했던 것이다.
 자아! 이 정도 되었으면 공자 "군자불기"(君子不器)로 인하여 동양사상이 얻어먹어야 했던 베버의 욕지거리를 독자들은 실컷 얻어먹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나는 베버의 유교비판을 결코 부정적으로만 생가하는 사람이 아니다. 구한말로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썩어문드러졌던 우리사회의 온갖 병폐를 생각할 때, 그리고 아직까지도 우리사회에 진정한 프로펫셔날리즘(professionalism)의 전통이 결여되어 있다는 현실을 생각할 때, 베버의 비판은 통열하게 우리의 가슴을 저미는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먼 나라 이방인이 동양사회의 직접체험이 없는 자로서, 동양사회의 지니고 있는 허약한 급소들을 그렇게 정확히 찌를 수 있었는가 하는 것도 먼저 우리의 학문적 자세에 대한 심각한 반성을 유발시키는 것이다.(p.149)
 그러나 우선 그가 캐피탈리즘의 발생연원의 정신사적 필연성으로서 프로테스탄티즘을 운운하는 것은, 결과적 사태에 대한 기술은 될 수 있을 지언정, 인과론적인 필요충분조건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프로테스탙티즘의 금욕주의에서 캐피탈리즘이 발생안할 수도 있는 것이며, 유교의 현세주의에서 캐피탈리즘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상적 성향을 캐피탈리즘의 발생으로 유도시키는 해석의 행태에는 그 사상자체 이외의 모든 정치.사회.경제사적 우발적 요인이 관여되어 있는 것이다. 캐피탈리즘의 불발생(不發生)의 원인을 유교에 다 물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캐피탈리즘 그 자체가 유교의 역사에서 발생되어야만 할 어떤 지고의 가치나 목표나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어떠한 사상이든지 동일한 생각의 구조를 유지하더라도, 역사적 맥락에 따라 그것은 건강하게 작용할 수도 있으며 불건강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 유교의 불건강한 시절의 측면만을 들어 유교의 원죄를 다 캐물을 수는 없는 것이다. 유교의 부패는 현실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부패는 더 더욱 인간세에 끔찍한 것일 수도 있다. 퓨리탄의 금욕주의가 가귀(可貴)한 것이라면, 유교의 금욕주의 또한 그 이상의 진실한 내면을 포용하는 것이다.
 여기서 군자부기(君子不器)라는 공자의 언명의 맥락이 과연, 근대사회적 특징을 이루는 전문직종에 대한 종사의 거부가 군자(君子)됨의 특징이라고 하는 의미의 맥락으로 사용된 것인지는 지극히 불투명하다. "기"(器)는 분명 한 그릇의 국한된 기능이라는 뜻이다. 황간(皇侃)의 소(疏)에:  (p.150)
   此章明君子之人, 不係守一業也. 器者, 給用之物也. 猶如舟可汎於海, 不可登山; 車可陸行,    不可濟海. 君子當才業周普, 不得如器之守一也.
    이 장은 군자된 사람은 모름지기 하나의 업을 지키는데 매달리지 말아야 함을 밝힌 것이다.그릇이란 인간에게 한 쓰임을 제공하는 물건이다. 예를 들자면 배는 바다에서는 두둥실 떠 갈 수 있지만 산을 오를 수는 없는 것이다. 수레는 육지를 다닐 수는 있어도 바다를 건널 수는 없는 것이다. 군자는 당연히 그 재능과 업적이 두루 넓게 통하는 것이어야 하며 그릇이 한 기능을 지키는 것과 같아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오규우 소라이(荻生조徠, 1666-1728)는 이러한 류의 논의에 대하여 재미있는 제도사적 반론을 제기한다. 공자의,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언명도 반드시 소인기(小人器), 군자불기(君子不器)식의 이원론적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주(古注)에서 포씨(苞氏)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p.151)
                    器者,  各周其用.  至於君子, 無所不施也.
    그릇이라는 것은 하나의 쓰임에 국한되는 것이다. 군자에 이르게 되면 베풀지 아니하는 바가 없다.
 주자(朱子)가 "기자(器者), 각적기용(各適其用), 이불능상통(而不能相通).  성덕지사(成德之士),  체무불구(體無不具). 고용무부주(故用無不周), 비특위일재일예이이(非特爲一才一藝而已)." (그릇이란 각기 쓰임이 있는 것이요, 서로 통할 수 없는 것이다. 덕을 이루는 선비는 그 몸이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 기능이 통달하지 아니함이 없다. 특별히 한 재능, 한 기예에 국한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한 것도 결국 고주(古注)를 베낀 것인데 이러한 주석은 근원적 제도사적 맥락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소라이는 "예기" "학기"의 마지막에 나오는 재미있는 구절을 인용한다.
         鼓無當於五聲.  五聲弗得不和;   水無當於五色,  五色弗得不章.
     북 그 자체는 궁.상.각.치.우 다섯가지 소리에 해당되는 바가 없다. 그러나 다섯가지 소리는 북이 없이는 조화로운 소리를 낼 길이 없다. 물 그 자체는 청.적.황.백.흑의 다섯가지 색깔에 해당되는 바가 없다. 그러나 다섯가지 색깔은 물이 없이는 그 찬란한 색깔을 드러낼 길이 없다.(p.152)
 소라이는 왜 이 "학기"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 것일까? 소라이의 주석이 간결하여 그 뜻을 명확하게 찝어내기가 힘들지만, 소라이가 노리고 있는 것은 군자(君子)는 이 "학기"의 문장에서 북(鼓)이나 물(水)에 해당되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군자불기"(君子不器)의 불기(不器)의 뜻이 고주(古注)가 말하는 바, "무소불시"(無所不施) 즉 그 능력이 두루 통한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군자(君子)는 근원적으로 기(器)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 즉 군자(君子)는 본질적으로 기(器)로서 규정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군자불기(君子不器)의 불기(不器)는  기(器)의 부정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군자불기(君子不器)는 기(器)의 부정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기(器)에 의하여 한정적으로 규정될 수 없는 어떤 본질적 위상을 말하는 것이며, 이는 기(器)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器)가 이로 인하여 드러나게 되는 자리라는 것이다. 즉 불기(不器)는 기(器)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기(器)를 포괄하는 자리라는 것이다. 그 "자리"란 무엇일까?  소라이는 군자(君子)는 단순히 도덕적인 인격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민(民)의 장(長)이 되는 리더를 말하며, 그는 기(器)가 아닌 기(器)를 부리는 자이다. 그러므로 기(器)는 백관(百官)을 말하는 것이요, 군자(君子)란 군(君)이나 경(卿)을 말하는 것이다.(器者, 百官也; 君子者,君與卿也.)
 예를 들면 양의(良醫)는 여러 한약재료들을 조합(用藥)하여 처방을 내리고 환자의 병을 치료한다. 이때 양의(良醫)는 군자(君子)요, 약(藥)은  기(器)이다.(p.153)
 즉 의사가 곧바로 초본약재(草本藥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의사는 초본약재들을 부리는 자요, 그것을 배합하여 병을 고치는 사람이다. 어찌 의사가 곧 약재라 할 수 있으리오? 그러므로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것이다. 소라이는 앞서 인용한 "예기" "학기"에 연이어 같은 맥락에서 나오고 있는 유명한 말을 다시 인용한다.
     君子曰: "大德不官, 大道不器, 大信不約, 大時不齊. "察此四者, 可以有志於本矣.
    그러므로 군자는 말한다. "위대한 덕성은 하나의 관직에 구애됨이 없고, 위대한 도는 하나의 그릇에 구애됨이 없으며, 위대한 신의는 하나의 약속에 구애됨이 없으며, 위대한 시간은 하나의 절기에 구애됨이 없다." 이 네 가지를 살필 줄 아는 자래야 참으로 학문의 근본에 뜻을 둔다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은 또 무엇인가? 대덕(大德)은 불관(不官)하며, 대도(大道)는 불기(不器)하며, 대신(大信)은 불약(不約)하며, 대시(大時)는 부제(不齊)하다는 것은 곧 군자(君子)가 추구해야 할 것은 기(器)의 말엽의 세계가 아니요 대도(大道)의 근원의 세계임을 말한 것이다.(p.154)
        三王之祭川也, 皆先河而後海; 或源也, 或委也.  此之謂務本.
     하.은.주 삼대의 왕들은 물에 제사지낼 적에 모두 반드시 작은 하천에서 먼저 지내고 큰 바다에서는 나주에 지냈다. 하천이 근원이요, 바다는 말류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일컬어 근본을 힘쓴다 하는 것이다.
  군자가 힘써야 할 것은 근본이지 말류가 아니다. 하천이 오히려 군자(君子)의 대도(大道)의 세계요, 바다가 오히려 배관(百官)의  기(器)의 세계인 것이다. 군자불기(君子不器)란 기(器)를 부정하는 언급이 아니라, "무본"(務本)의 뜻을 표방한 것이다. 따라서 소라이의 비판에 의하면 막스 베버의 "군자불기"(君子不器)비판은 근본적으로 과녁이 빗나간 것이다. 근원적으로 해당사항이 없는 것이다. 불기(不器)는 기(器)의 부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라이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大저學以成器.
                     대저 배움이란 기를 이루지 않음이 없다.
 인간의 모든 배움은 기(器)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군자(君子)의 배움은 성기(成器)를 통하여 불기(不器)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즉 군자불기(君子不器)는 기(器)를 통하여 기(器)를 초극하는 것이요, 성기(成器)의 행위를 통하여 기(器)를 부리는 대도(大道)의 경지에 나아가는 것이다.(p.155)
 굳이 막스 베버의 논쟁이나 소라이의 비판적 지적의 맥락을 떠나 이 "군자불기"(君子不器)의 소박한 맥락을 액면 그대로 수용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분명 스페시알리스트의 기능이 존중되어야 하는 문명의 장이다. 그러나 진정한 스페시알리스트의 위치가 존중되면 존중될수록 진정한 제너랄리스트의 가치가 높아진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닐까? 불기(不器)의 세계가 기(器)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물론 기(器)의 세계 또한 불기(不器)의 세계를 거부하지 않는다. 인간과 우주에 대한 근원적 통찰이나 전체적 조망이 없이 어떻게 스페시알리스트들의 기능만으로 인간세가 조작되어 나가기를 기대하는가? 우리 당대의 모든 스페시알리스트는 당연히 불기(不器)의 스페시알리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불기(不器)의 보편주의가 전제되지 않는 기(器)의 기능은 편견과 독선과 혼선을 낳을 뿐이다.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공자의 가르침은 시공을 초월하여 인간에게 던지는 심오한 가치가 존(存)하는 것이다.(p.156)
         集注       器者, 各適其用, 而不能相通.  成德之士, 體無不具.
                      故用無不周, 非特爲一才一藝而已

 ▣ 부록 2 : 안내 문
              '도올의 논어이야기'에 대하여 

 근간 '도올 신드롬' 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KBS TV1의 '도올의 논어이야기'가 적잖은 센세이션(Sensation)을 일으키며 계속 방영되고 있습니다. 그 도올(김용옥박사, 중국철학자)의 강의 중 기독교사상(복음)에 관련한 오해의 부분이 있었습니다.  예컨대 성경의 허구성 주장과[도올의 논어 이야기 '제5강' 2000.10.27과 '도올 논어(1)',p.p.21-25], 막스 베버(M.Weber, 1864-1920)의 근대 서구의 윤리적 자본주의의 사상에 대한 비판등입니다.['도올의 논어 이야기' 제42강, 2001.3.2, '도올 논어(2)', p.p. 142-156]  이 부분들을 해명하기 위하여 예수 인터넷선교회의 홈페이지에 '도올의 성경관에 대하여'와 '도올과 베버의 대화'라는 신앙에세이를 게재했습니다.
 특히 '도올과 베버의 대화'는, 동서양의 두 석학(碩學)의 세기적인 지상대화(紙上對話)로 접근 시켰습니다.  그 뜻은 이시대(21세기)의 위대한 복음사역자들(Ministers)이  이 글을 통해서 동서양문화의 인프라(Infra)를 이해하시는 데에 작은 도움이 되시기를 바라서입니다. 부디 예수 인터넷선교회(www.yesu.kimc.net)를 방문해 주셔서 필독하여 주시기를 권유드리옵니다. 감사합니다.  (서기 2001년 3월 중순, 예수 인터넷선교회 드림)

  ▣ 부록 3 : 자유게시판에 올린 어느 독자의 글
  2001/03/26 (14:15) from 211.44.3.143' of 211.44.3.143'
   헤비메탈킴
웃기는 도올과 베버의 대화.
난...

한 가지만은 확실히 해두고 싶다.

도올의 Text는 무엇을 참고로 했는지.

베버의 Text는 무엇을 참고로 했는지.

공정성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는지.

마지막으로 하나 더.

에세이인가 보면, 어떤 것은 자신의 의견이라고 하며 슬쩍 단체의

책임회피를 하는 구절도 눈에 띄는데,

그럴 거면 올리지 말지... 쩝.

솔직히, 내가 도올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게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의 학문이 기껏해야 도올 논어라는 책으로 대표될 수도 없다.

그 책은 [독자의 대상이 없는 책]이다.

만일 도올이 만화책으로 만들었으면, 그림 갖고 꼬투리 잡았을것이

분명하다.

난, 기독교인이지만, 사이비다.

믿음?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기독교인에 대해 악감정 없다.

하지만, 제발 부탁인데, 꼬투리 잡고 우기려고 하진 마라.

그래서 얻는게 뭔데?

다른 이야기 해 보자면,

철학자와 종교인이 만나서 말싸움 하면 누가 이기겠는가?

뻔한 거 아닌가?

말싸움해서 그렇게 이겨보고 싶나?

그런 거 초월도 못하면 그게 종교인의 자세인가?

안티기독교 사이트에 가보니까,

그네들 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일리가 있을 뿐이다. 그게 맞는지 틀리는지는 관심이 없어서

생각해 본 바도 없지만,

안티 기독교 사이트에 가서 폭탄 게시판 올려놓는 기독교인들도 있다.

뭐냐?

대체 무엇하고 싶은건가?

그럴만한 정열이 있으면 한 사람이라도 더 전도하던지,

성경책을 읽던지,

구원에 대해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인터넷.

허울 좋다.

인터넷에서 십자군 전쟁이라도 해보고 싶은가?
    
독자의 글에 대한 답서
   헤비메탈킴 선생님께
 킴 선생님께서 '도올과 베버의 대화'라는 저희 예수 인터넷선교회의 '신앙에세이'를 코멘트해주신 것을 감사하오며, 몇 가지 의견을 드립니다.

 첫째, 그 '에세이'는 동서양 두 석학의 근대동서양 문화의 근원에 대한 견해를 비교하고 객관적으로 비평한 글입니다.(가치중립적 입장에서입니다)

 둘째, 킴 선생님께서 문의한 도올의 Text는 '도올논어(2)'의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논어 내용이고  베버의 Text는 '근대자본주의의 정신과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입니다.(이미 그 '에세이'에서 밝혀놓은 것입니다.)

 셋째, 킴 선생님께서 그 '에세이'에 대한 논평을 해주시려면, 구체적으로 문장내용을 제시.분석 하시면서 실명으로 의견을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금처럼 무조건 냉소적인 매도를 하시는 것은 고도의 사회윤리를 요청하는 디지털 문명시대에 피하여야할 사이버.언어폭력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끝으로 다시 저희 예수 인터넷선교회의 '에세이'에 주신 관심을 감사하오며 킴 선생님의 건승을 기도합니다.
                    2001. 3. 26     예수 인터넷선교회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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