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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4일 화요일

조립체들과 실재론적 존재론 Assemblages and Realist ontology



조립체들과 실재론적 존재론
Assemblages and Realist ontology

사물들 자체 안에서 현실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왜 분화는 서로 상관적 관계에 있는 질화이자 [부분들의] 합성이고, 종별화이자 유기적 조직화인가? 왜 분화는 이런 상보적인 두 길을 통해 이루어지는가? 현실적 질과 연장들, 현실적 종과 부분들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는 시공간적 역동성들이 존재한다. 바로 이 역동성들이 현실화의 작인(作因), 분화의 작인이다. 이것들은 보통 이미 구성되어 있는 연장과 질들로 덮혀 있어 보이지 않지만, 모든 영역에서 명확히 드러내어 정리할 필요가 있다. 발생학자들이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매우 각별한 의미를 지닌 어떤 형태발생적 운동들―여유 표면들의 증가, 세포층들의 얇아짐, 주름 생성에 의한 함입, 군(群)들의 국소적 자리 이동 등과 같은 운동들―에 비하면 알이 두 부분으로 나뉘는 과정은 이차적이다. 여기서 드러나고 있는 것은 알의 운동학, 어떤 동역학을 함축하는 운동학 전체이다 ... 따라서 알들이 유형별로 구별되는 것은, 한 구조의 최초의 현실화 요인들에 해당하는 정향들, 전개 축들, 변별적인 속도와 리듬들에 의해 결정되고, 이런 요인들은 현실화되는 ... [그리고] 개체화의 장 안에서 개체-배(胚)를 통해 체험되는 것에 고유한 어떤 시간과 공간을 창조한다.
―― 들뢰즈, <<차이와 반복>>, pp. 480-1.

앞장들에서는 조립체라는 개념과 이해하는 데 그 개념이 도움이 되는 구체적인 객관적 존재자들의 구별짓기를 충분히 강조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체의 물질적 및 표현적 변수들을 갖추고 있는 그 개념을 자체의 물질적 및 표현적 성분들을 갖추고 있는 현실적 사례들 및 그런 성분들을 선택하고 분류하고 연결하며 안정화시키는 분절적 과정들을 분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구별짓기는 인식론적 및 존재론적 이유 때문에 중요하다. 한편으로, 그것은 그 개념과 현실적 사례들 사이의 인지적 관계에 관한 의문을 직면하게 한다. 특히, 이 관계를 유목 포함(class inclusion)의 관계, 즉 '조립체'라는 술어에 의해 지시되는 일반 범주가 존재자들을 조립체들로 분류하기 위한 필요충분 조건을 제공하는 관계로 간주한다면, 철학자들에 의해 이미 만들어진 긴 목록에 다른 한 물화된 일반자를 덧붙이고 있는 것일 것이다. 물론, 이것은 앞장들에서 자세히 언급된 그런 물화들에 반대하는 논증들을 조롱하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관계를 어떻게 간주해야 하는가? 앞장에서는 잠재적 도표를 구성하는 특이성들이 구체적 과정들에서 그것들을 일으키는 상태들과 발산적 현실화(divergent actualization)의 관계를 갖는다―한 위상학적 점이 많은 척도 형태들(구형의 기포, 다면체형의 결정, 측지선형의 광선)과 발산적으로 관련된다―는 주장이 제시되었다. 유사한 발산적 관계가 조립체라는 추상적 개념, 그것의 변수와 매개변수들 그리고 그것의 모든 구체적 현실화 사이에 확립되어야 한다. 어떤 위상학적 점이 어떻게 현실화될 수 있는지 미리 확립할 기계적 조리법은 전혀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 개념의 변수와 매개변수들이 현실적인 물질적 및 표현적 성분들과 분절적 과정들에 발생되는 방식들도 한 번에 하나씩 확립되어야 한다.

개념과 그것의 사례들 사이의 구별짓기도 존재론적 양태를 갖는다. 개념 자체는 우리 마음들의 산물이고, 그래서 우리 마음들이 없다면 현존하지 않을 것이지만, 구체적인 조립체들은 전적으로 우리 마음들과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 진술은 수정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공동체, 조직체 그리고 도시 같은 사회적 조립체들의 경우에 그런 조립체들은 우리 마음들이 사라진다면 더 이상 현존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경우에는 사회적 조립체들은 우리 마음들의 내용과 독립적인 것, 즉 공동체, 조직체 그리고 도시들이 상상되는 방식과 독립적인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이것은 조립체 이론이 실재론적 존재론 내에서 작동한다고 말하는 또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실재론자들은 다른 존재론적 신념들을 품고 있는 철학자들보다 한 가지 더 어려운 과업이 있는데, 왜냐하면 자신의 입장을 진술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재론자들은 자율적인 세계의 내용물들이 무엇인지, 또는 최소한 무엇이 그것의 내용물들에 포함되지 말아야 하는지 추가적으로 규정해야 한다. 예를 들면, 많은 종교적인 사람들은 천당과 지옥, 천사와 악마 같은 초월적 공간과 존재자들에 관한 실재론자들이다. 그러나 유물론적 철학자는 내재적 존재자들, 즉 물질적 또는 에너지적 기체(基體)와 결부되지 않는다면 존속하지 못할 존재자들에 관한 실재론자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유물론자가 천사적 또는 악마적 생명체들을 제거하는 것은 단순할 것이지만, 제거하기가 훨씬 더 어려운 다른 초월성의 형태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대면하여 제거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초월적 존재자는 자율적인 존재자들의 현존과 지속을 설명하기 위해 가정되는 것, 즉 본질이다. 본질은 이천 년 이상 동안 실재론의 일부였다. 가장 잘 방어할 수 있는 이 개념의 판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판본인데, 그는 형이상학 또는 존재론을 별개로 존속할 수 있는 존재자들에 관한 연구와 관련된 학문으로 규정했다. 이것들 사이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연적으로 존속하는 것들과 본질적으로 존속하는 것들을 구분했다. 그의 존재론에서 우연적인 것에 관해 사유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것의 주체를 구성한 것은 두 번째 종류의 존재자들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적었듯이,

그러나 영원하고, 움직이지(변하지) 않으며, (밑감으로부터) 따로 떨어져 있는, 어떤 것이 있다면, 이것에 대한 인식은 분명히 '이론에 관련된 학문'(이론학)의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학의 일도 아니고 [왜냐하면 자연학은 (스스로 또는 다른 것에 의해) '움직이는(변하는) 것(실체)'들을 다루기 때문이다], 수학의 일도 아니다. 그것은 두 학문에 앞서는, (다른) 어떤 학문('으뜸 철학')의 일이다. ... 으뜸 학문('[형이상학]')은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있는' (독립적인), 움직이지(변하지) 않는 것들을 다룬다. 모든 (으뜸가는) 원인들은 틀림없이 영원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김진성 역주), pp. 272-3]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는 존재자들의 세 가지 범주, (類), (種), 개체가 존재한다. 첫 번째 두 범주들에 속하는 존재자들은 본질적으로 존속하고, 세 번째 범주에 속하는 존재자들은 우연적으로 존속할 뿐이다. 예를 들면, 유는 동물일 수 있고, 종은 인간일 수 있으며, 개체는 우발적인 특성들―하얀 피부, 음악적임, 공정함―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이런저런 특수한 사람이다. 이 존재론으로부터 조립체 이론은 세 번째 범주만 유지하는데, 왜냐하면 모든 조립체는 고유한 역사적 개체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되었듯이, '개체'라는 술어는 '인격체'라는 술어와 동의어가 되었지만, 이것은 일상 언어의 습속일 뿐이다. 존재론적 범주로서 '개체'라는 술어는 규모의 그 어떤 특수한 층위도 선호하지 않는다. 개별적 공동체들, 개별적 조직체들, 개별적 도시들에 관해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바람직하지 않은 함의들을 전혀 환기시키지 않은 채, 개별적 원자들, 개별적 분자들, 개별적 세포들 그리고 개별적 기관들에 관해 말할 수 있다. 이런 존재자들은 모두 조립체인데, 자체를 규정하는 창발적 특성들은 자체의 상호작용하는 부분들에 의해 산출되고, 그래서 필요한 상호작용들의 발생에 달려 있다. 모든 조립체의 역사성과 개별성은 유물론자들로 하여금 어느 주어진 조립체를 산출하거나 생성한 역사적 과정들에 관한 의문을 대면하도록 강요한다. 이런 과정은 개체화 과정(process of individuation)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서두의 인용문에서 들뢰즈에 의해 언급된 발생학적 조작들은 일종의 개체화 과정, 유기체의 개체화를 예시하지만, 어떤 조립체도 자체 성분들 사이의 다소 영구적인 관계들을 확립하는 분절화 과정(process of articulation)들에 의해 개체화된다. 그렇지만 들뢰즈는 '개체'라는 술어를 특별한 방식으로 사용하는데, 존재론적 범주가 아니라 무엇이든 개체화를 현재 겪고 있는 존재자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세포 층들의 늘림과 접힘, 세포 개체군의 이동 그리고 단일한 세포 유형의 다수의 유형들로의 점진적인 변화를 여전히 겪고 있는 배아는 하나의 개체로 간주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갓 태어난 생명체는 개체가 아닐 것이다. 배아는 접힘과 늘림의 체험된 강도뿐 아니라 조립 과정들을 추동하는 화학적 구배의 강도에 의해 규정되는 반면에, 갓 태어난 것은 자체의 연장적 경계와 창발적 특성들에 의해 규정된다. 그가 적고 있듯이, "강도는 개체화하고 강도량들은 어떤 개체화 요인들이다 ... 모든 개체성은 강도적이다. 따라서 개체성은 폭포처럼 떨어지고, 수문처럼 수위를 조절하며, 서로 소통하고, 그런 가운데 자신을 구성하는 강도들 안에서 차이를 포괄할 뿐 아니라 또 그 자체로 긍정한다."(<<차이와 반복>>, p. 524) 그런데 일단 그 과정이 고정된 외연적인 것들과 질들을 낳는다면, 후자는 강도적인 것들을 은폐하여 개체화를 보이지 않게 만들고 객관적 환영을 제시하는데, 그 환영은 우리로 하여금 공간적 및 질적 특성들의 목록―물화될 때 본질을 생성하는 목록―에 의해 최종 산물을 분류하도록 유혹한다.

비슷한 주장이 순전히 존재론적 의미에서 '개체'와 동의어인 다른 한 술어, 즉 헤세이티(haecceity)라는 술어에도 적용된다. 스콜라 철학에서 그 술어는 주어진 어느 존재자의 독특함, 즉 다른 존재자들과 공유되지 않는, 그래서 일반화될 수 없는 어떤 존재자의 특질을 가리킨다. 그 어떤 일반적인 범주도 헤세이티로서의 존재자를 규정하는 데 사용될 수 없기 때문에 실물 지시적 정의에 의해서만 이것을 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헤세이티'라는 술어는 흔히 어느 사물의 '이것임'으로 규정된다. 그렇지만, 가타리와의 공동 저작에서, 들뢰즈는 이런 전통적 정의에 한 가지 강도적 요소를 덧붙이면서 이렇게 단언한다.

인[격체], 주체, 사물 또는 실체의 양태와는 전혀 상이한 개체화의 양태가 있다. 우리는 그것에 <이것임>이라는 이름을 마련해 놓았다. 어느 계절, 어느 겨울, 어느 여름, 어느 시각, 어느 날짜 등은 사물이나 주체가 갖는 개체성과는 다르지만 나름대로 완전한, 무엇 하나 결핍된 것 없는 개체성을 갖고 있다. 이것들이 <이것임>들이다. 여기에서 모든 것은 분자들이나 입자들 간의 운동과 정지의 관계이며, 모든 것은 변용시키고 변용되는 [역량]이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들뢰즈/가타리, <<천 개의 고원>>(김재인 옮김), p.494]

들뢰즈와 가타리가 개체와 유기체 사이에, 또는 헤세이티와 주체 사이에 설정하는 대립은 조립체(원래의 의미에서)와 기체(基體) 사이의 대립에 관한 다른 일례일 뿐이다. 이어지는 글에서 우리는 이런 대립들을 계속해서 회피함으로써 그런 대립자들을 어느 조립체(매개변수화된 의미에서)의 상이한 위상들로 회복시키는 한편으로, '개체'와 '헤세이티'라는 술어들은 그것들의 전통적인 존재론적 의미로만 사용될 것이다.

주요 논증으로 되돌아가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상정된 세 가지 존재론적 범주 가운데 오직 세 번째 범주, 즉 자체의 우발적인 특성들과 성향들에 의해 규정되는 개체들만 유지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리스 철학자의 풍요로운 형이상학을 회복시키는 데 충분한가? 그렇지 않다. 유와 종이 담당하는 역할, 즉 개별적 존재자들의 특질의 규칙성과 안정성을 설명하는 역할을 수행하도록 무언가 다른 것이 추가될 필요가 있다. 앞장에서, 이런 규칙적인 것들은 조립체에 도표를 추가함으로써, 즉 조립체의 성향들과 관련된 가능한 것들의 공간을 특이성들에 의해 구성되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설명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제시되었다. 우리가 이해했듯이, 특이성은 어느 안정한 상태에서 다른 안정한 상태로의 변화(이분화)뿐 아니라 재현되는 안정한 상태(끌개)도 규정한다. 들뢰즈에 대한 특이성들의 호소력은, 개체들의 생성을 설명하는 것은 개체라는 개념을 전제하는 개념들을 포함하지 말아야 한다는 요구 조건에서 비롯된다. 특이성들은 이런 요구 조건을 충족시키는데, 왜냐하면 존재론적으로 그것들은 전(前)개체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명의 가장 높은 일반[적인 것들]은 종과 속들을 넘어서지만, 어디까지나 개체[적 및] 전(前)개체적 [특이성들]을 향해 넘어선다...'(<<차이와 반복>>, p. 530)

아리스토텔레스와 들뢰즈 사이의 다른 한 차이점은 개체들의 생성에 관한 각자의 관념을 포함한다. 자연과 예술 둘 다에서 존재자들이 생성되는 방식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은 형상인으로 작용하는 본질을 사용한다. 그는 자연에서 본질의 작용은 자명하다고 주장했는데, 왜냐하면 말이 말을 낳고, 사람이 사람을 낳기 때문이다. 즉, 어느 동물 종은 개별적 유기체들의 형상인이 됨으로써 그것들을 생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집을 짓는 경우에(또는 환자를 건강하게 만드는 경우에) 형상인은 인간의 영혼 속에 미리 현존하는 관념이다. 어느 집, 또는 '질료를 포함하는' 어떤 다른 존재자도 '질료와 아무 관련성도 없는 것에서 발생하거나 생성되는데, 왜냐하면 의술과 건축술은 건강과 집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이제 실체는 질료와 아무 관련성도 없는 것, 어느 사물의 본질 또는 바로 그 본성 또는 형상인을 의미한다.'(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p. 308) 이 관념은 형상들이 외부로부터 불활성의 유순한 질료 위에 부가된다는 관념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이것은 들뢰즈에게 큰 영향을 끼친 관념들을 제시한 철학자인 질베르 시몽동이 질료형상적 모형(hylomorphic model)이라고 명명한 관념이다. 질료형상적 모형은 세 가지 측면에서 이의가 제기될 수 있다. 첫째, 수동적인 질료를 다른 물질들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들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역량, 새로운 화학적 형태들의 자발적 생성을 낳는 역량(또는 집약적인 정동)을 갖추고 있는 화학 물질들처럼 독자적인 적극적 역능들을 갖추고 있는 물질적인 것으로 대체함으로써 제기된다. 둘째, 그것이 형성시키는 것과 닮은 형상인이라는 관념을 발산적으로 현실화되기 때문에 그것들이 형성시키는 것과 닮지 않은 위상학적 형태들로 대체함으로써 제기된다. 그리고 셋째, 어느 범주에 속하는 데 필요한 본질적 특성들을 자체의 부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들에 달려 있는 전체의 창발적 특징들로 대체함으로써 제기된다. 이런 세 가지 대체―첫 번째 두 가지 대체만이 들뢰즈와 가타리에 의해 인식된다―는 자연적 형태들의 경우뿐 아니라, 목수가 나무에게서 캐낼 수 있는 형태들처럼 인간의 개입을 포함하는 형태들의 경우에도 수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시몽동은 질료형상적 모델은 작용적이고 변용태적인 많은 것을 무시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으로 형식화되거나 형식화될 수 있는 질료에 독자성들[...]을 갖고 있는 운동 중에 있는 에너지적 질료성을 첨가시켜야 한다. 이것들은 이미 기하학적이라기보다는 위상학적인 암묵적 형상으로서 다양한 변형 과정과 조합된다. 가령 나무를 켜는 조작이 나무를 유지하고 있는 섬유 조직의 결의 변화나 비틀림의 변화에 맞춰서 행해지듯이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형상적 본질에서 질료로 흘러가는 본질적 특성들에 강렬한 가변적 변용태들을 첨가해야 한다. 때로는 조작의 결과로서 발생하고 때로는 이와 반대로 조작을 가능하게 하는 변용태들을. 가령 목재의 다공질의 정도나 탄성, 저항력의 정도.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무를 따라가는 것으로서, 질료에 형상을 강요하는 대신 다양한 조작과 나무의 물질성을 연결접속하면서 나무 그 자체에 거스르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가타리, <<천 개의 고원>>, p. 784)

전통적 실재론과 조립체 이론의 실재론적 존재론 사이의 주요한 차이점들을 규정했는데, 이제 개체화 과정들에 대한 몇 가지 구체적인 사례들을 탐구하자. 시작하기 좋은 지점은 원자적 규모, 즉 유는 '원자'이고, 종은 '수소' 또는 '산소'이며, 개체는 여기에 있는 이 원자 또는 저기에 있는 저 원자인 경우이다. 현대적인 아리스토텔레스적 접근 방식은 단일한 양성자와 단일한 전자를 갖고 있음과 같은 '수소'라는 일반 범주에 속하는 필요충분 조건을 부여함으로써 시작될 것이다. 어느 수소 원자에 양성자 하나를 첨가하면 그것의 정체성을 변화시킬 것―두 개의 양성자는 두 개의 전자를 수반하고, 그래서 후자는 결과적으로 얻게 되는 헬륨 원자에 전적으로 상이한 화학적 특성들을 부여한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것은 '수소'라는 화학적 종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완전히 합당한 방식이다. 무엇이든 어느 원자 종의 본질은 그것의 전자 구조에 의해 주어진다는 믿음은 여전히 현대의 실재론자들 사이에서 꽤 일반적인 것인데, 그것이 형상인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상정할 정도까지 나아가지는 않지만 말이다. 어느 원자의 최외각 전자들의 구성이 사실상 중요하다. 최외각에 전자 한 개가 모자라는지, 또는 여분의 전자가 한 개 있는지, 또는 제대로 채우고 있는지에 따라 어느 원자가 다른 원자들과 몇 개의 결합을 형성할 수 있는지 결정하는데, 탄소 원자는 네 개의 결합을 형성하고, 산소 원자는 두 개의 결합을 형성하며, 수소 원자는 한 개의 결합을 형성할 뿐이다. 그렇지만 최외각의 특성들과 이것들이 어느 원자에 부여하는 결합 역량들은 주어진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그것들을 본질로 물화시키기 위한 첫 번째 단계―이 아니라, 어느 원자의 성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들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리고 여전히 일정한 그런 성분들(양성자들)에만 주목하는 대신에 언제나 변이의 원천으로 작용하는 것들(중성자들)을 강조해야 한다. 수소 핵이 갖고 있는 중성자들의 수에 따라 이 화학적 종의 다양한 동위 원소들―프로튬, 중수소 그리고 삼중 수소―이 생성된다. 핵 속 중성자들의 수가 어느 원자의 화학적 특성들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지만, 그것의 물리적 특성에는 영향을 미치는데, 어떤 동위 원소들은 더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반면에, 다른 동위 원소들은 훨씬 더 빨리 붕괴한다. 한 원자가 아니라 개별적 원자들의 개체군 전체를 고찰하면, 동위 원소들의 상대적인 양, 또는 더 정확히, 동위 원소적 변양태의 통계적 분포는 그 개체군의 구성원들을 산출한 역사적 과정들에 관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

이런 역사적 과정들과 관련하여 천체물리학에서 알려져 있는 것을 간략히 묘사하자. 개별적 수소 및 헬륨 원자들의 거대한 개체군들은 가장 격렬한 조건, 우주의 탄생 시에 지배적인 조건에서 선출되었지만, 다른 화학적 종들의 원자들은 항성의 형성을 위해 수 억 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었다. 오늘날 대부분 원자들의 핵은 항성 핵합성(stellar nucleosynthesis)으로 알려져 있는 조립 과정을 통해 항성에서 형성된다. 항성들의 외연적 특성들(크기)과 강도적 특성들(온도 구배)이 상이한 종들의 원자들에 대한 조립 공장들로 작용할 수 있는 그것들의 역량을 규정한다. 항성이 더 거대하고 더 뜨거울수록, 그것은 더욱 더 무거운 원자들을 조립할 수 있다. 우리 태양처럼 더 작은 항성들은 수소를 연료로 연소시켜서 헬륨을 생산물로 산출할 만큼 뜨거울 뿐이다(절대온도 1천만 도). 훨씬 더 높은 온도(1억 도 이상의)에서는 헬륨 자체가 연료로 연소되어 탄소, 산소 그리고 질소를 생산물로 산출할 수 있다. 엄청나게 높은 강도(10억 도)에서는 탄소와 산소가 연료가 되는 한편으로, 생산물은 나트륨, 마그네슘, 실리콘 그리고 황이라는 종들의 원자들이다. 강도가 계속해서 증가함에 따라 실리콘이 연료로 연소되어 철을 생산하고, 마침내 폭발적인 핵합성 과정에서 최대의 강도에 이르게 되는데, 여기서 더 무거운 종들이 '초신성'으로 알려져 있는 격렬한 사건 동안 만들어진다. 이런 개체화 과정에서 중성자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데, 왜냐하면 대단히 안정한 동위 원소들만이 극단적인 항성적 환경에서 더 복잡한 핵들의 조립을 위한 플랫폼의 역할을 담당할 만큼 충분히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정보를 대면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깊은 인상을 받지 못할 것라고 상상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는 집이 건축되는 방식, 또는 환자가 치료되는 방식, 또는 원자가 조립되는 방식에 관한 세부 내용은 그것들의 형상인들보다 덜 중요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항성에서 일어나는 일에 무관하게, 항상 고정되어 있었던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몇 개의 원자 종들이 현존할 뿐이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이런 반대 주장에는 개별적 원자들의 존재론에 가능한 원자 종들의 공간를 구성하는 특이성들을 추가할 필요가 있는 까닭이 되는 어떤 진리가 존재한다. 우선 주기율표에 주어져 있는 대로 이런 원자 종들에 의해 현시되는 규칙성을 고려하자. 주기율표 자체가 다채로운 역사를 나타내는데, 왜냐하면 1869년에 멘델레예프(Mendeleev)가 주기율표에 자기 이름을 새기기 전에 여러 과학자들이 화학적 종들(원자량에 따라 나열했을 때)의 특성들에서 나타나는 규칙성을 식별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수십 년 전에 한 과학자가 이미 세 원소들 사이에서 단순한 산술적 관계를 판별했었고, 다른 과학자들은 일곱 번째 또는 여덟 번째 원소마다 어떤 성향들(화학적 반응성 같은)이 재현된다는 것을 인식했다. 이런 리듬들은 매우 매혹적이어서 배열에 있어서 간극들이 발견될 때 이것들을 주기율표에 무언가 잘못이 있다는 점을 가리키는 것으로 간주하기보다는 그냥 남겨진 간극들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종들이 현존해야 한다는 대담한 예측으로 작용했다. 멘델레예프는 실리콘 근처의 간극에 의거하여 게르마늄의 현존을 예측했다. 나중에 큐리 부처는 인접한 바륨에 의거하여 라듐의 현존을 예측했다. 물질의 화학적 핵심에 놓여 있는 이런 기저의 리듬들을 설명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의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앞장에서 조립체의 도표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도입된 수학적 관념들 가운데 일부를 환기할 필요가 있다. 옛날 수소 및 헬륨의 다양한 화학적 종들로의 분화처럼 실제적인 점진적 분화 과정은 그것의 잠재적 대응물로서 파괴된 대칭들의 연쇄(cascade of broken symmetries)를 갖는다. 어느 수학적 존재자가 그것을 변하지 않은 채로 그대로 두는 변환들의 수에 의해 특징지워진다면, 그런 변환들의 수가 더 클수록 그 존재자는 더 많은 대칭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대칭 파괴 전이는 어느 존재자를 더 많은 대칭을 갖춘 것에서 더 적은 대칭을 갖춘 것으로 변화시키는 사건인데, 연쇄는 일련의 그런 사건들이다. 구체―어떤 회전에 대해서도 여전히 불변하는 도형―에서 시작하여 일군의 형태들을 생성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상상하자. 먼저, 구체가 회전 대칭을 상실하여 2엽의 도형―절반의 회전들에 대해서만 불변하는 도형―이 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그 다음에, 이 도형이 회전 대칭을 추가적으로 상실함에 따라 그것은 4엽의 도형이 되고, 마침내 훨씬 덜 대칭적인 6엽의 도형이 된다. 이런 기하학적 도형들을 핵을 둘러싸고 있는 전자들의 "궤도들"이 상이한 강도의 수준들에서 채택할 수 있는 모양들로 간주한다면, 주기율표를 특징짓는 상이한 리듬들을 설명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인식될 수 있었던 첫 번째 주기성은 기본 물질들의 특성들이 여덟 개의 종마다 재현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중에 더 많은 물질들이 분리되고 정제됨에 따라 화학자들은 리듬이 그것보다 더 복잡하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그 리듬은 8의 주기로 두 번 반복되고, 18의 주기로 두 번 반복되며, 그 다음에 32의 주기로 두 번 반복된다. 이것에 '외로운' 고대 종들, 즉 수소와 헬륨을 추가하면, 그 수열은 2, 8. 8, 18, 18, 32, 32가 된다. 방금 언급된 대칭 파괴 연쇄가 이 수열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전자들은 파동처럼 거동하기 때문에 뚜렷히 규정된 궤적들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비탈(orbital)로 불리는 구름 또는 통계적 분포에 거주한다. 그런데 이런 흐릿한 구름들이 견고한 구체는 아니지만, 그것들은 여전히 어느 정도의 회전 대칭을 부여받을 수 있다. 가능한 오비탈 형태들의 집합은 기본적인 수소 원자 속에 점점 증가하는 양의 에너지를 주입함으로써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원자의 단일한 전자는 구체의 대칭을 갖춘 오비탈에 거주한다. 이 원자를 그 다음 준위로 흥분시키면 두 번째의 더 큰 구형 오비탈을 낳거나, 아니면 2엽 대칭을 갖춘 세 가지 가능한 오비탈(세 가지 상이한 방향으로 정향된 2엽 도형) 가운데 하나를 낳는다. 훨씬 더 큰 에너지를 주입하면, 2엽 오비탈이 4엽 오비탈(다섯 개의 상이한 방향으로 정향된 변양태들을 갖는)이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 그 다음에 흥분이 충분히 강해질 때 6엽 오비탈을 낳는다. 사실상 이렇게 전개되는 연쇄는 수소 원자가 아니라 오히려 핵 속의 양성자 수가 점점 증가하는 원자들에게 일어나는 것인데, 붕소가 비구형적으로 대칭적인 오비탈을 사용하는 최초의 화학적 종이다. 대칭성이 점점 감소하는 이런 일련의 전자 오비탈들을 정반대의 스핀을 갖는 두 전자만이 동일한 오비탈에 거주할 수 있다는 요구 조건과 결합시키면, 수열 2, 8, 8, 18, 18, 32, 32를 정확히 생성할 수 있다. 그러므로, 대칭 붕괴 연쇄가 가능한 오비탈들의 공간의 구조를 올바르게 나타내고, 그래서 화학적 종들의 가능성 공간의 한 가지 중요한 성분을 나타낸다고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다. (또한 후자는 최소 유형과 최대 유형의 특이성들에 의해 구성된, 양성자들과 중성자들의 가능한 조합들의 공간을 포함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증을 요약하자. 조립체 이론에서는 원자 일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고, 개별적인 원자적 조립체들의 개체군들이 존재할 뿐이다. 조립체의 성분들 가운데 일부(양성자, 전자)의 종류와 수는 특성들이 어느 주어진 종의 모든 원자들에 의해 공유된다는 것을 보증하는 반면에, 다른 성분(중성자)의 종류와 수는 그런 특성들을 변화시킨다. 어느 원자의 전자 구조가 그것의 화학적 역능들(주기적 분류에서 그것의 위치뿐 아니라)을 결정하지만, 그것은 어느 화학적 종의 본질로 간주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책략은 개체화 과정의 완성품, 즉 완전히 조립된 원자를 취하여 그것의 특성들 가운데 하나(최외각 전자의 수)를 그것이 어느 영원한 범주에 속하기 위한 필요충분 조건으로 삼는다. 이것은 원자들을 만들어내는 역사적 과정을 제거하고, 그래서 그것들의 안정성이 한 종에서 다른 한 종으로의 실제 생산 경로를 결정하는 동위 원소적 변양태들에 의해 수행되는 역할뿐 아니라 강도적인 것들에 의해 수행되는 역할―항성의 강도가 더 커질수록 합성은 더욱 더 복잡해진다―을 은폐한다. 게다가 그것은 상이한 종들의 전자 구조들 사이에 현존하는 더 깊은 관련성, 즉 전자 오비탈들의 가능성 공간에 대한 분석에 의해 포착되는 관련성을 드러내지 못한다. 세계가 논리적 범주들에 의해 이미 분절된, 일부는 더 종적이고 일부는 더 유적인, 본질주의적 형이상학 대신에 세계가 역사적으로 종으로 분절되는 강도의 연속체(continuum of intensity)로 시작되는 형이상학적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 원자적 조립체들의 경우에 강도적 연속체는 항성, 최소의 절편화(segmentation)를 갖추고 있지만 전적으로 미(未)분화되지는 않은 플라즈마의 구체에서 구현되는데, 왜냐하면 항성의 몸체는 온도, 압력 그리고 밀도의 차이들에 의해 규정되는 강도적 구조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연속체를 절편화하는 가능한 방식들은 유의 종으로의 논리적 분할이 아니라, 수학적으로 포착될 수 있는 잠재적 구조에 의해 주어진다.

이제 더 복잡한 개체화 사례, 즉 '동물' 유와 '인간' 종을 대체할 필요가 있는 사례를 다루어 보자. 오늘날에는 생물학적 종이 유기체만큼 특이하고, 독특하며, 우발적인 것이라는 점이 널리 수용되고 있는데, 종은 자체의 유전자 풀이 생식적 격리(reproductive isolation)를 통해서 유전 물질들의 외부적 흐름들에 대해 폐쇄적인 것이 될 때 탄생하게 되고, 멸종에 의해 마찬가지로 역사적인 죽음을 겪을 수 있다. 이것은, 존재론적으로 말하자면, 종들이 개별적 존재자들이라는 것을 함축한다. 게다가 생식적 격리는 가변적인 매개변수이다. 인간 존재자들은 다른 영장류 존재자들로부터 강하게 격리되어 있는데, 왜냐하면 인간 정자는 그것들의 난자를 수정시킬 수 없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말과 당나귀 같은 동물은 더 약한 강도를 나타내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 수정시킬 수 있지만 그들의 자손, 즉 노새는 불임이기 때문이다. 많은 식물의 유전자 풀은 훨씬 더 약하게 격리되어 있는데, 식물은 자체의 삶 전체를 통해서 교배할 수 있는 역량을 유지한다. 마지막으로, 많은 미생물 유기체는 매우 난잡하여 심지어 안정한 종이 아니라 더 일시적인 계보를 형성한다. 이런 가변성은 생물학적 절편화의 매우 상이한 형식들을 낳는다. 초기 박테리아의 유전 물질들은 핵 속에 감싸져 있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들의 후손이 유전자들을, 세대를 가로질러 수직적으로 전달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여전히 수평적으로 전달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고, 수평적 전달은 이전에 결여하고 있던 역량들(항생제에 대한 내성 같은)을 빠르게 획득할 수 있게 하는 전달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런 박테리아의 고대 포식자들은 자체의 유전 물질들을 핵 속에 감쌌는데, 그래서 유전자들을 자유롭게 교환할 수 있는 능력은 상실했지만, 생식적으로 격리되어 별개의 종들로의 점진적인 분화를 겪을 수 있는 역량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런 두 유형의 미생물 유기체들(진핵 생물과 원핵 생물)의 진화적 역사는 상이한데, 전자는 서로 다소 절편화된 복수의 유전자 풀을 계속해서 형성한 반면에 후자는 지구 전체에 걸쳐 기본적으로 절편화되지 않은 단수의 유전자 풀을 생성했다.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유기체와 종 사이의 관계가 일반 범주의 회원 지위의 관계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종은 유기체들의 조립체, 또는 더 정확히, 유기체들로 구성된 생식 공동체이다. 우리가 유기체들을 분류하는 데 사용하는 해부학적 유사성들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적인 것인데, 포식자들과 기생자들, 희소한 자원 그리고 기후 변화에서 비롯되는 유사한 난제들을 직면한 공동 역사의 결과이다. 선택 압력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어느 종의 유전자 풀을 균일화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래서 종을 구성하는 유기체들이 더 많은 유전자들을 다른 종의 유기체들을 제외하고 서로 공유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원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그대로 있는 것뿐 아니라 변동하는 것도 고찰해야 한다. 돌연 변이나 성적 재조합에 의한 유전적 차이점들의 지속적인 생산이 없다면 선택 압력은 작용할 원료가 전혀 없을 것인데, 적응도가 낮은 변양태가 전혀 걸러지지 않거나, 적응도가 높은 변양태가 조장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생물학적 종은 유전 물질들을 감싸고 있을 뿐 아니라, 무기물 영양분과 에너지를 포획하여 감싸고 있다는 것을 이 설명에 추가해야 한다. 또 하나의 이런 영토화가 한 종을 다른 한 종에 대한 식용 고기의 저장고로 만드는 것인데,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는 먹이 사슬를 가로지르는 흐름들을 추동하는 바이오매스의 구배를 만들어낸다.

식물 및 동물 종들이 절편화로서 나타나게 될 강도적 연속체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항성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연속체'라는 술어는 절편화의 절대적 부재를 함축하지는 않는다. 항성은 화학적 종들―항성이 생산하여 연료로 연소시키는 것들은 제외하고―로 절편화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더 작은 규모에서는 아원자적 입자들에 의해 확실히 절편화된다. 마찬가지로, 생태적 연속체를 생각할 때 우리는 그것을 생물학적으로는 아니지만 물리적으로 또는 화학적으로는 절편화되기 이전의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생명체가 등장하기 이전에 지구는 이미 산성도가 다른(일부는 산성, 일부는 알칼리성) 물질들의 결합 또는 산화 및 환원의 상이한 역량들을 갖춘 물질들의 결합에 의해 만들어진 화학적 구배뿐 아니라, 물리적 구배, 에너지 흐름들을 추동하는 온도의 차이가 있었다. 이런 화학적 구배는 에너지의 흐름뿐 아니라 물질의 흐름도 추동할 수 있었다. 출현할 최초의 생물학적으로 불연속적인 절편화들, 즉 해수와 바닥의 퇴적물 사이의 경계면에 거주하는 부동의 박테리아의 평평한 층들은 생존하고 번성하며 진화하기 위해 그런 구배들을 활용해야 했었다. 초기의 생명 형태들은 가용 무기물들을 발효시킴으로써 연료를 얻었지만, 십억 년 후에는 태양광 구배를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을 진화시켰다. 그후 긴 세월이 흐른 뒤에 그것들은 자체 활동의 부산물로서 형성되었었던 산소의 농도 구배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진화시켰다. 발효에 비해서 광합성과 호흡은 생산성의 엄청난 증가를 초래했으며, 그리고 그 결과로서 나타난 바이오매스의 잉여는 오늘날의 아메바와 짚신벌레의 조상들에 의해 활용될 수 있었던 다른 한 구배가 되었다. 이런 옛날 포식자들이 추가됨으로써, 단순하고 거의 분화되지 않았지만, 새로운 생태적 적소들이 개설되고 참신한 종들이 그런 적소들을 차지하도록 생성됨에 따라 많은 종들로 점진적으로 분화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던 먹이 사슬이 생성되었다.

기본적인 진화적 그림에 한 가지 강도적 성분을 추가시키는 것―전자만큼 논란의 여지가 없지는 않지만―도 오늘날 널리 수용된다. 그런데 조립체의 그 다음 성분, 즉 그것의 도표를 구성하는 가능성 공간들의 잠재적 구조를 추가할 때 이런 친숙한 느낌은 흩어지기 시작한다. 형이상학적으로 이것은 세계에 거주하는 다수의 상이한 동물 종들로 접히고 늘려질 수 있는 위상학적 동물에 관한 적절한 개념 구상을 포함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서술하듯이,

모든 [조립체]들에게 있는 유일한 <추상적인 동물>을 이 조립체들이 실행시킨다. 두족류와 척추동물에 대해 [똑같이 적용되는] 유일하고 동일한 고른판 또는 구성의 판. 척추동물이 <문어>나 <오징어>가 되려면 등을 두 쪽으로 나누는 요소들을 용접시켜 골반과 목덜미를 접근시키고 수족이 모두 몸의 한쪽 끝으로 모일 수 있도록 아주 빨리 몸을 구부리면 그만이다. (들뢰즈/가타리, <<천 개의 고원>>, p. 484)

물론, 이것들과 같은 위상학적 변환들은 성체 동물들에 대해서는 실행될 수 없는데, 그런 동물들의 배아들만이 그런 변환들을 겪을 만큼 유연하다. 다윈에 의해 이미 인식되었던 잘 연구된 사례는 사족 사지(tetropod limb)이다. 어느 동물 조립체의 이 성분을 새의 날개, 발가락이 한 개인 말의 사지, 또는 엄지 손가락이 마주보는 인간 손으로 현실화될 수 있는 미분화된 잠재적 사지로 생각할 수 있다. 일찌기 그것은 적응적 관계의 일례로서 판별되었는데, 그래서 오늘날의 모든 사지의 조상이 될 수 있을 옛날의 균일한 사지 유형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졌다. 그렇지만, 더 최근에, 유사성을 찾아서 성체 형태들을 비교하는 것은 이런 현상을 개념화하는 올바른 방식이 아니라는 점이 명료해졌다. 오히려 과정의 상동 관계들을 판별하기 위해서는 발생학, 즉 개체화 과정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위상학적 동물이라는 개념을 명료화하려고 할 때 만나게 되는 첫 번째 문제는 인간 손이 날개 또는 발굽이 되기 위해 겪어야 하는 접힘과 늘림―발가락의 연장 또는 성장 금지 같은―을 결코 상상할 수 없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런 변환들이 어떻게 유전될 수 있는지 설명해야 한다. 지금까지 사용한 술어들에 의거하여, 영토화 매개변수의 설정뿐 아니라 코드화 매개변수의 설정도 중요한 조립체를 개념화할 필요가 있다. 많은 경우에 미분 방정식들을 사용하여 모형화되는 연속적인 매개변수 공간으로 간주될 수 있는 전자와 달리 가능한 유전자들의 공간은 전적으로 이산적이고 고유한 공간적 질서가 전혀 없다. 우리는 이런 조합적 공간들에 접근하는 어떤 일반적인 방식도 알지 못하고, 그것들의 잠재적 구조를 개념화하는 방식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서 시작하자. 이제 유전자 코드는 잘 확립되어 있으며, 산업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된다. 유전자들과 그것들의 코드화 대상인 단백질들은 성분만 다른 분자들의 선형적 연쇄들인데, 유전자들의 경우에는 핵산 분자들이고, 단백질들의 경우에는 아미노산들이다. 유전자 코드는 한 유형의 분자적 연쇄를 다른 한 유형의 분자적 연쇄와 대응시키는 방식일 뿐인데, 세 개의 핵산이 생명체에 의해 사용되는 스무 개의 아미노산들 각각에 대응되고, 그런 대응 관계 자체는 임의적인 것, 일종의 응결된 우연한 진화적 사건이다.

우리는 가능한 유전자들의 공간과 가능한 단백질들의 공간에 관해 무엇을 아는가? 우리는 그것들의 크기에 관한 견고한 통찰이 있는데, 왜냐하면 어느 주어진 길이의 가능한 연쇄들의 수는 가용 성분들의 수를 취하여 가능한 최대 길이를 나타내는 수로 지수함수화함으로써 계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방금 언급되었듯이, 단백질들이 스무 개의 가능한 아미노산들의 목록에서 도출될 수 있다면, 다섯 개의 아미노산 열로 이루어진 매우 짧은 단백질은 삼백 만 개의 상이한 조합(20^5)으로 현존할 수 있다. 보통의 효소를 구성하는 300개의 아미노산처럼 더 실제적인 길이에 대해서 조합들의 수는 사실상 무한대가 된다. 유전자들은 단 네 개의 성분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가능한 유전자들의 수는 더 작지만, 각 아미노산은 세 개의 핵산이 규정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유전자 길이는 더 길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든 우리는 연쇄의 길이가 증가함에 따라 폭발적으로 커지는 조합적 공간들을 고찰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들이 고유한 공간적 질서를 결여하고 있다면 이런 무한한 공간들의 구조를 어떻게 연구할 수 있는가? 한 가지 전략은 그것들에 임의적이지 않은 질서, 즉 해당하는 분자적 연쇄의 실제 성향들과 어떤 관련성을 갖는 질서를 부과하는 것일 것이다. 유전자들의 경우에 가장 중요한 성향들은 그것들의 복제 역량뿐 아니라, 복제 동안 복사 오류(돌연 변이)를 겪는 경향이다. 그러므로 단 하나의 돌연 변이에 의해서만 달라지는 모든 연쇄들이 이웃 유전자가 되도록 핵산들의 각 연쇄를 배열한다면 한 가지 합당한 공간적 질서가 부과될 수 있다. 어느 유전자가 그것의 모든 이웃 유전자들, 즉 단일한 복사 오류에 의해 변환될 수 있는 모든 유전자들과 직접 접촉한다면, 공간에 부과된 연결성이 타당할 것인데, 무엇이든 어느 한 유전자에서 시작하여 연결된 경로는 진화가 따를 수 있는 경로일 것이다.

이런 배열은 너무 복잡한 듯 보일 것인데, 그 공간은 어느 주어진 유전자의 전체 길이를 따라 각 핵산을 변화시킴으로써 만들어질 수 있는 모든 변양태를 포함해야 하고, 각 변양태는 독자적인 차원을 획득해야 한다. 그런데 다른 가능성 공간들도 유사한 문제점을 갖는다. 모형화되고 있는 현상이 다수의 상이한 방식들로 변화할 수 있다면 앞장에서 검토된 상태 공간들은 매우 높은 차원성을 가질 수 있다. 반면에, 어느 때나 있을 수 있는 상태가 단일한 점이 되기 때문에 복잡한 현상은 극단적으로 단순화되고, 그것의 역사는 단일한 궤적이 된다. 유사한 관념이 가능한 유전자들의 공간에도 적용되는데, 자체의 많은 차원들의 견지에서 그것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한 번에 하나의 돌연 변이를 산출하는 사건들에 의해 추동되는, 한 이웃 유전자에서 그 다음 이웃 유전자로 이어지는 단일한 궤적이 되기 때문에 공간적 배열은 유전자의 진화가 시각화되는 방식을 단순화한다. 이런 진화적 행보들을 인도하는 선택 압력을 포착하기 위해 우리는 조합 공간 위에 일단의 적응도 값들을 가능한 각 연쇄에 하나씩 부과할 수 있다. 이것은 적응도의 최대값 및 최소값의 분포의 형식으로 특이성들의 분포를 낳는다. 우리는 특이성들을 적응도 풍경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지점과 가장 낮은 계곡 지점으로 가정할 수 있다. 가장 단순한 풍경은 쉽게 닿을 수 있는 단일한 봉우리(전체적 최대), 즉 진화적 행보들이 그냥 올라간 다음에 거주할 수 있는 봉우리를 갖는 풍경일 것이다. 이것이 '적자 생존'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슬로건에 의해 포착되는 경우이다. 더 실제적인 판본들은 복수의 국소적 최대를 가져야 하는데, 각각은 충돌하는 선택 압력들에 대한 적응적 타협을 가리킨다. 단일한 전체적 최대를 갖는 풍경은 역사에 대한 역할을 부인하는 듯 보이는 반면에―우리는 최적의 종을 그것이 필연적으로 채택해야 하는 형태와 동일시할 수 있을 것이다―다수의 국소적 최적 조건들을 갖는 풍경은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데, 왜냐하면 어느 주어진 종이 우연히 올라간 봉우리는 우발적인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일단 적응도의 봉우리에 올라서게 되면 한 종은 문자 그대로 그곳에 갖히게 되는데, 왜냐하면 봉우리 아래의 유전자들은 당연히 적응도가 더 낮고, 그래서 거기서 내려와서 더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는 것은 선택 압력에 의해 금지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유전자 부동은 자연 선택의 여과 효과가 미치지 않는 변이의 무작위적인 원천을 제공함으로써 어느 종이 국소적 트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

이것은 유전자들에 대한 가능성 공간을 구성하는 단순하지만 엄밀하게 규정된 방식이다. 그것은 너무 단순한 것인데, 왜냐하면 단 하나의 변이 원천이 포함되기(돌연변이) 때문이고 적응도라는 개념이 유전자들의 직접적인 생산물들―단백질들과 그것들의 촉매 역량들―에 대해서만 잘 규정되기 때문이다. 이런 가능성 공간을 사용하여 최초의 단세포 유기체들로 하여금 광합성과 호흡을 발견하도록 이끈 단백질들의 점진적 분화 과정을 탐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몇 가지 이유 때문에 가능성 공간은 그것을 넘어서면 매우 유용하지 않을 것이다. 한 가지 이유는, 돌연 변이와 달리 성적 재조합은 가능성 공간에서 분리되어 있는 연쇄들로부터 새로운 유전체들을 생산하는 것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어느 국소적인 적응도 봉오리에 머물고 있는 모친의 염색체에 속하는 핵산 연쇄와 다른 한 봉우리에 머물고 있는 부친의 염색체에 속하는 연쇄를 가정하면, 그 둘을 조합하는 것은 중간의 적응도 최저점에 놓여 있는 연쇄를 산출할 것이다. 적응도의 봉우리와 계곡들이 '험악한 풍경'―촘촘하게 뭉쳐 있는 봉우리들 사이에는 깊은 계곡이 전혀 없는―을 형성한다는 점을 요구하는 것과 같은 이런 문제에 대해 제안된 몇 가지 해결책이 있지만, 이런 해결책이 작동할 것인지 여부를 말하기에는 너무 이를 것이다. 다른 한 문제는, 일단 단백질에서 다세포 유기체로 이동한다면, 각각의 가능한 분자적 연쇄의 적응도를 규정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단백질과 달리, 대형 동물의 육체는 유전자들에서 직접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 단세포(수정란)를 갓 태어난 개체의 수백 개의 상이한 세포 유형들로 점진적으로 분화시키며, 그리고 접힘, 늘림 그리고 이동을 통해서 그런 세포들로부터 기관들을 형성하는 복잡한 발생학적 과정를 포함한다.

세 번째 문제를 다루어 보자. 수정란을 유기체로 변환시키는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유전자의 효과가 아니라 작은 부분집합의 효과만을 모형화할 필요가 있는데, 다시 말해서, 모든 세포에 관한 일상적인 부기 업무들을 수행하는 유전자들은 무시하고 상이한 세포 유형들 사이의 차이점들을 초래하는 유전자들에 집중할 수 있다. 다세포 유기체를 구성하는 모든 세포들이 정확히 동일한 DNA를 갖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필요한 경우에 상이한 세포 유형들에서 다른 유전자들을 켜거나 끄는 특수한 유전자들이 존재해야 한다. 이런 특수한 유전자들은 DNA 자체를 목표로 삼고 있는 단백질들에 대한 유전 정보를 지정하는데, 다른 한 '하류(downstream)' 유전자가 표현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도록 그것의 일부에 결합시킨다. 게다가 이런 유형의 유전자는 자체적으로 근처의 하류 유전자들을 제어하는 유전자들과 더불어 상류(upstream) 유전자들에 의해 제어되는 유전자들로 분화될 수 있다. 다른 유전자들을 켜거나 끄는 동시에 켜지거나 끄질 수 있는 단백질을 생산하는 것은 이런 유전자들에게 스위치들의 회로와 연결망들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데스크톱 컴퓨터의 중앙 처리 장치가 바로 그런 스위치들(And-게이트, Or-게이트, Not-게이트)의 연결망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런 유형의 유전자들의 역능이 명백해진다.

스위치들 자체는 단백질들이 부착되어 있는 DNA의 비(非)코드화 영역들이며, 일반적으로 길이는 여섯 개와 아홉 개 사이의 핵산들인데, 이것은 4,096(4^6)과 262,144(4^9) 사이의 가능한 순열들을 낳는다. 스위치 역할을 수행하는 단백질들에 대한 유전 정보를 지정하는 유전자들은 비교적 소수이다. 인간 유전체에서 20,000개의 코드화 유전자들 가운데 500개만이 관여한다고 가정하면, 두 유전자 회로에 대해서는 250,000개의 가능한 회로들이, 세 유전자 회로에 대해서는 1200만개 이상의 가능한 회로들이, 그리고 네 유전자 회로에 대해서는 60억 개 이상의 가능한 회로들이 산출된다. 그러므로, 조절 유전자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상이한 종류의 가능성 공간―가능한 핵산 연쇄들의 공간이 아니라 가능한 회로들의 공간―들을 고찰하게 만든다. 발생 동안 체형 규정에 직접 관여한다는 증거가 있는 유전자들에만 집중함으로써 이런 다른 공간들의 크기를 제한할 수 있다. 이런 유전자들은 이른바 혹스(Hox) 유전자들이다. 예를 들면, 척추 동물이 속하는 문은 네 개의 혹스 집단(39개의 유전자)이 있는 반면에, 곤충이 속하는 문은 두 개의 집단(8개의 유전자)가 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가능한 회로들의 공간에 일단의 적응도 값들을 부과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이런 값들을 결정하는 선택 압력들은 전통적인 외부적 선택 압력들(포식자, 기생자)이 아니라, 오히려 자체를 보존하는 돌연 변이들은 선택하고 그렇지 않는 것들을 제거함으로써 현존하는 회로들의 정합성을 유지시키는 내부적 선택 과정들이어야 한다.

여러 특질들이 혹스 유전자들을 구별한다. 혹스 유전자들은 엄청나게 오래되었는데, 다세포 유기체들의 분화보다 앞선다. 그것들은 동물 유전체에서 뭉쳐 있고, 신체 기획(척추 동물, 연체 동물 또는 곤충의 신체 기획 같은) 전체에 걸쳐 두드러진 유사성들을 드러내며, 강도적 연속체의 절편화에 관한 논의에서 더 중요하게도 그것들의 공간적 배열은 성체를 특징짓는 신체 부위들과 절편들의 분포와 흥미로운 대응 관계를 갖는다. 대응 관계들의 첫 번째 집합은 성체 형태의 대칭성들과 깨진 대칭성(또는 극성)들 사이의 대응 관계와 경도, 위도 글고 고도처럼 배아의 지리를 규정하는 축들이다. 모든 성체 척추 동물은 오른쪽 면과 왼쪽 면이 거울상 변환 아래 대충 불변적인 좌우 대칭성을 나타내지만, 앞과 뒤(말에서는 위와 아래)뿐 아니라 머리와 꼬리는 이런 대칭성을 깨뜨린다. 초기 배아를 구성하는 세포들의 개체군은 세포 스트립 위의 어떤 유전자들을 활성화시킴으로써 이런 두 가지 깨진 대칭성에 해당하는 동-서 축과 남-북 축을 발달시킨다. 사실상, 연속적인 세포 개체군이었던 것이 경도와 위도를 따라 점점 더 정교한 규모로 절편화된다. 절편화의 세부 내용은 종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므로, 모든 척추 동물에 공통적인 신체 계획은 뻣뻣한 척추를 규정하는데, 그것이 절편화되는 방식(척추골의 수와 유형)운 종에 의존한다. 성체 형태의 모듈적 구성과 혹스 유전자들의 모듈적 사용 사이에도 대응 관계가 현존한다. 동물은 구성 요소들의 조립체인데, 구성 요소들 가운데 많은 것이 유형과 크기에 있어서만 상이한 반복되는 모듈들이다. 예를 들면, 사지는 부위들(허벅지, 종아리, 발목; 상완, 전완, 손목)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들의 말단들도 손가락과 발가락의 상이한 뼈처럼 다양하게 반복되는 모듈들로 이루어져 있다. 사지는 동-서 축을 따라 특정한 위치에서 배아로부터 돌출되는 작은 봉오리로서 자체의 현실화를 개시한다. 그 다음에 성장하는 그 봉오리는 국소적인 경도 및 위도들의 독자적인 집합들에 의해 절편화되는데, 각 절편은 특정한 유전자들의 스위치가 켜지는 세포의 하위 개체군들을 포함한다. 결국 이런 사지의 말단들은 일단의 더 정교한 하위 분리들을 통해서 더욱 더 절편화되는데, 미래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미리 형상화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배아 발생 과정은 유기체의 개체화를 가리키지만, 동종의 모든 유기체는 유전자들의 가능한 회로들의 동일한 공간을 공유하고, 그래서 이런 가능성 공간의 도표는 종의 개체화의 잠재적 구성 요소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제 두 가지 개체화 과정을 비교하자. 원자 종의 개체화는 서술하기가 비교적 단순한데, 왜냐하면 그것은 단일한 매개변수, 즉 영토화를 포함할 뿐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유기체] 종의 개체화는 두 번째 매개변수, 즉 코드화를 필요로 한다. 원자들의 조립과 최종 형태는 그것들의 도표(전자 오비탈의 대칭성, 양성자-중성자 상호작용에 있어서 에너지 극소)로부터 직접 도출될 수 있지만, 동종 유기체들의 조립과 공유 형태는 혹스 유전자들에 의한 매우 특정한 코드화를 포함한다. 게다가, 첫 번째 경우에 영토화는 가장 기본적인 형식, 즉 열역학적 평형으로부터의 거리로 측정되지만, 어느 한 순간에 하나의 종을 구성하는 유기체들은 물질과 에너지뿐 아니라 유전자들도 감싸는데, 그래서 첫 번째 매개변수는 유전 물질들의 흐름에 대한 장벽의 창조(생식적 격리)뿐 아니라 상이한 생태적 역할들(포식자, 먹이, 기생자, 숙주, 공생체)을 수행하는 종들 사이의 이산적인 경계들의 창조도 포함한다. 두 번째 차이점은 내부에서 개체화 과정이 일어나는 기체의 특질이다. 항성 환경에 의해 형성된 매체는 원자들을 조립하는 데 필요한 모든 원료뿐 아니라 조립 과정을 추동하는 구배도 포함하고 있다. 반면에, 종의 개체화를 위한 기체는 우주에서 홀로 떠도는 이산적인 플라즈마 구체만큼 유형적이지 않다. 그것은 지구에서의 에너지 및 무기물 영양분들의 흐름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자는 태양광 구배에 의해 추동되고 후자는 화학적 구배에 의해 추동된다. 인간의 관측 시간 척도에서는 이런 흐름들이 비가시적이지만, 여러 번의 탄생과 죽음을 포괄할 만큼 충분히 긴 시간적 척도에서는 유기체들이 이런 연속적인 흐름 속의 일시적인 응고물처럼 보일 것이다. 게다가, 마찬가지로 비가시적인 유전 물질들의 흐름―세대를 가로질러 수직적으로 그리고 계통을 가로질러 수평적으로―즉 처음에 무핵의 단세포 유기체들에서 다소 연속적이었던 흐름이 존재한다. 이런 연속체 내부에서 에너지 구배를 활용하는 세 가지 기본 전략들이 발달된 후에는 그것들이 다시 발명될 필요가 없었다. 감싸진 핵과 종화 역량을 갖춘 후속 생명체들은 그런 유기체들을 기능적 모듈로 그냥 흡수하였는데, 그것들을 자체의 세포막 속에 가두어서 더 영구적인 공생을 확립했다. 그것들은 모든 식물 및 동물 세포 속에서 엽록체와 미토콘드리아로서 여전히 현존하는데, 전체적인 원핵 생물 유전자 풀로부터 격리되어 독자적으로 재생산된다. 그러므로, 매우 실제적인 의미에서, 원래 박테리아의 가볍게 절편화된 유전자 풀은 대사 기구의 중요한 조각들이 추출되어 더 견고하게 절편화된 생명체들로 편입될 수 있었던 강도적 연속체였다.

이런 두 개체화 과정은 원자 종과 생물 종의 탄생 시에 일어나는 일에 대한 감각을 제공하지만, 이 장을 종결하기 위해 그것들이 계속해서 자체의 생을 영위하는 방식에 관한 몇 가지 주장을 추가해야 한다. 예를 들면, 최근에 산출된 한 다발의 수소 원자들은 다양한 가능한 역사들이 앞에 놓여 있다. 이 원자적 조립체들의 일부는 계속해서 자율적으로 현존할 수 있는데, 그것들의 상태는 자체의 도표에 있어서 특이성들의 분포에 의해 결정된다. 그 분포는 두 원자가 결합되는 상태가 두 원자가 독자적으로 현존하는 상태보다 더 낮은 극소에 해당하는지, 즉 그 상태가 에너지적으로 더 선호적인 것인지 결정할 수 있다. 이런 고유한 경향을 감안하면, 유체 상태에서 대류 셀이나 난류성 소용돌이들에 의해서만 절편화된 개체군들로 현존하는 이원자 분자들로서의 수소 원자들을 찾아낼 확률이 더 높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수소 원자들은 자율성을 버리고 나아가서 물 분자와 같은 더 큰 분자적 존재자들의 부분들을 형성한다. 원자들은 다른 원자들과 공유 결합―한 쌍의 최외각 전자들을 공유함으로써 형성되는 대단히 강한 결합―을 형성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 이것은 물 분자를 묶는 그런 종류의 결합이고, 그래서 이 경우에 수소 원자들은 더 큰, 더 견고하게 절편화된 전체의 일부가 된다. 그런데 이런 구속된 상태에서는 원자들이 더 영토화되어 버렸지만, 그것들은 여전히 탈영토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자체의 일반적인 결합 역량에 덧붙여 수소 원자들은 적절하게도 '수소 결합'으로 불리는 더 약한 결합을 형성할 수 있는 한 가지 특이한 역량을 갖추고 있다. 결합 조작의 대상이 되는 원자들의 집단이 전기음성적이며, 그리고 수소 원자 자체가 전기음성적인 원자들의 집단에 공유적으로 결합될 경우에만 이 능력이 구사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조건이 충족되면, 수소 결합은 덜 견고한 전체들의 형성을 가능하게 하는데, 그것들 가운데 일부는 추가된 유연성을 사용하여 정보를 저장할 수 있다. 이것이 염색체에 해당하는 경우이다. 염색체의 정체성은 공유 결합에 의해 시간이 흘러도 보존되지만, 자기복제할 수 있는 자체 역량은 수소 결합에 의해 결정되는데, 왜냐하면 이중 나선의 두 줄이 쉽게 분리되어야 하고, 그래서 새로운 핵산들이 형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각 줄에 쉽게 부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소 원자들의 생이 이렇게 파란만장할 수 있다면, 생물 종은 훨씬 더 많은 모험을 겪을 수 있다고 가정하기가 어렵지 않은데, 왜냐하면 그것은 탈영토화와 탈코드화의 운동을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한 종은 별개의 생태계들에 거주하는 여러 생식적 공동체들의 형태로 현존한다. 먹이 사슬, 즉 그것들이 차지하고 있는 적소에서 이 공동체들의 구성원들이 담당하는 역할은 다소 견고하게 결정된다. 그런데 적소의 가용성을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키는 역사적 사건들이 어느 종이 변화할 기회들을 개방하거나 폐쇄할 수 있다. 단일한 종이 아니라, 포유류와 파충류처럼 종들의 강을 감안하면 이 효과는 시각화하기 더 쉽다. 대략 6000만 년 전에 대부분의 적소들은 고도로 미분화된 파충류 동물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반면에, 포유류 종들은 대체로 미분화되어 있었는데, 오늘날 보이는 환상적인 다양성에 관한 희미한 그림을 제시한 소수의 털로 덮힌 설치류의 야행성 종들을 비롯한 기린과 코뿔소, 돌고래와 고래, 침팬지와 인간들이 존재했었다. 포유류 종들은 잠재적으로 존재했었지만, 그것들의 차이점들이 표현될 수 있었던 적소들의 부재에 의해 억제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후에 하나의 우발적인 사건, 즉 지구를 강타한 유성에 의해 초래된 대량 멸종 때문에 현존하는 먹이 사슬들에서 많은 위치들이 비게 되었고, 그래서 포유류의 분화 기회들이 창조되었다. 이것은 탈영토화 가능성들 가운데 가장 단순한 것일 뿐이다. 더 흥미로운 일례는 상이한 적소들 사이의 관계들을 포함한다. 예를 들면, 포식자들과 그들의 먹이는 포식자를 피하거나 먹이를 포획할 수 있는 능력에 있어서 유전 가능한 어떤 개선도 대응책 개발을 위한 선택 압력으로 작용하는 '무기 경쟁'으로 진입할 수 있다. 이런 상호 자극이 여러 세대에 걸쳐서 유지될 때, 포식자 종과 먹이 종은 자체의 유전자적 정체성을 적응적으로 수정하고 상호적 탈주선에 휩쓸리도록 서로 강제할 수 있다. 공생 같은 다른 생태적 관계들도 탈영토화를 초래할 수 있다. 식물과 식물을 수분시키는 곤충의 사례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지적하듯이,

서양란은 말벌의 이미지를 만들고 말벌을 본뜨면서 탈영토화되지만, 말벌은 이 이미지 위에서 재영토화된다. 한편 말벌은 서양란의 생식 장치의 한 부분이 됨으로써 탈영토화되기도 하지만, 서양란에 꽃가루를 옮김으로써 서양란을 재영토화한다 ... 서양란의 말벌-되기, 말벌의 서양란-되기[.] 이때 이러한 생성물 각각은 한쪽 항을 탈영토화하고 다른쪽 항을 재영토화한다. 또 이 두 생성은 서로 연쇄되어 있고 연계되는데, 탈영토화를 항상 더 멀리 밀어붙이는 모든 강렬함들의 순환에 따라 그렇게 한다. (들뢰즈/가타리, <<천 개의 고원>>, p. 25)

또한 생물 종은 탈코드화의 운동을 따르는데, 유전자들에 의해 견고하게 코드화되지 않은 행태의 창발에 의해 가장 잘 예시된다. 물려받은 패턴들로부터 학습의 점진적인 분리는 학습의 상이한 형태들―고전적(파블로브적) 조건화, 도구적 조건화 그리고 복잡한 기술 획득―을 연쇄적으로 비교함으로써 추적할 수 있다. 첫 번째 학습 형태는 자체의 기초로서 견고하게 코드화된 반사―더듬이와 설탕 용액의 접촉에 이어지는 꿀벌의 핥는 행태 같은―를 사용하고, 생태적으로 유의미한 다양한 자극들과의 연합들을 추가한다. 그러므로 꿀벌은 과즙의 현존을 그런 현존의 자연적 기호(지표)인 다양한 자극들―꽃 향기, 꽃 색깔의 확대 그리고 대칭적인 꽃잎 배열―과 연합시키도록 훈련될 수 있다. 두 번째 학습 형태는 더 탈코드화된 것인데, 자발적이지만 낮은 확률로 일어나는 현존하는 행태 패턴과 보상 경험의 연합을 통한 습관 획득을 포함한다. 이것이 산출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참신한 행태들은 서커스 동물들의 사례에서 쉽게 관찰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습관을 통한 학습을 넘어서 기술의 획득으로 나아갈 수 있다. 많은 경우에 이것은 보상을 포함할 뿐 아니라, 기술을 이미 숙달하여 학습자에 대한 모범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동물의 현존도 포함하는데, 연습을 반복함으로써 숙달하게 된다. 정교한 형태적 변양태들과 끝없는 장식음들이 나타나는, 나이팅게일이나 찌르레기 같은 텃새들의 노래가 좋은 일례이다. 그런데 이미 지적되었듯이, 노하우―본보기로 배우고 실천으로 학습되는 지식―은 인간 종과 더불어 최대의 표현에 이르게 된다. 생산적 능력―이것의 번성은 많은 전문 기술자, 대장장이, 목수, 도공으로의 점진적인 노동 분화에 의해 입증된다―에서, 던지기 곡예사, 줄타기 곡예사 그리고 공중 그네 곡예사의 기술에 의해 예시되듯이, 인체의 잠재력을 표현하는 비생산적 능력에 이르기까지 인간들이 숙달할 수 있는 기술들의 수는 끝이 없는 듯 보인다.

마지막으로, 탈영토화와 탈코드화의 운동 사이에 작동하는 다양한 상호작용들을 고찰해야 하는데, 전자는 어떤 해부학적 구성 요소들을 자유롭게 하고(다른 요소들을 희생하면서), 후자는 행태를 더 다재다능하게 만든다. 인간 손의 모혐이 그런 것인데, 초기 인류의 직립 자세가 인간 손을 이동의 기능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동시에 발에게서 쥘 수 있는 능력을 박탈하는 한편으로, 석기의 등장은 그것을 점점 더 다양해지는 손 기술을 생성시키는 문화적 탈주선과 연결시켰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말로 결론을 내리면,

손은 탈영토화된 과거의 앞발이다. 나아가 자유로운 손은 뭔가를 쥐고 장소를 이동하는 데 쓰이는 원숭이의 손과 비교할 때 탈영토화되어 있다 ... 또 환경과 관련된 탈영토화들도 고려해 보자. 스텝은 숲보다 더 탈영토화된 연합된 환경이며 몸체와 기술에 탈영토화라는 선별 압력을 행사한다(손이 자유로운 형태로 나타나고 불이 기술을 써서 만들 수 있는 물질로 등장할 수 있는 것은 숲에서가 아니라 스텝에서 생겨났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고른판 위에서 펼쳐질 수 있는 유기체, 생태, 기술의 지도들을 만들어야 한다.  (들뢰즈/가타리, <<천 개의 고원>>, p. 123)

―― 마누엘 데란다(Manuel DeLanda), <<조립체 이론(Assemblage Theory)>>(2016), 6장, pp. 137-162.

2015년 9월 17일 목요일

스티븐 샤비로(Steven Shaviro) -사변적 실재론 - 입문글 Speculative Realism - a Primer

http://blog.daum.net/nanomat/997

사변적 실재론 - 입문글
Speculative Realism - a Primer

―― 스티븐 샤비로(Steven Shaviro)

지금까지 근대 서양 철학최소한 1781년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순수 이성 비판"을 출판한 이래로은 존재론보다 인식론을 우위에 두는 경향이 있었다. 존재론은 존재의 본성에 관련된 것인데, 가장 기본적인 층위에서 무엇이 존재하는지 규정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인식론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아는지와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세계를 알 수 있는 우리 능력의 근거와 한계를 면밀히 조사한다. 인식론이 존재론에 앞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세계가 어떠한지에 관한 주장을 제시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런 주장들에 대한 근거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 그것들이 참이라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일 뿐이다. 칸트는 당대의 철학이 그런 근거를 제공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관찰이나 경험적 증거에 매이지 않은 채 순수한 논리적 연역에 의해 형이상학적 필연을 발견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독단적이었거나, 아니면 경험적 사실과 주관적 체험에 의거하지만 이런 특수한 사실들과 직접적인 경험을 넘어서 일반화할 수 없다고 주장할 정도로 회의적이었다. 이런 경향 둘 다에 맞서서 칸트는 철학은 자체의 기초를 면밀히 조사하여 설명함으로써 시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철학이 이것을 행하지 못하고, 그 대신에 형이상학적 사변에 직접 착수한다면, 넌센스만이 초래될 것이다. 칸트의 경우에, 그리고 그때 이후 대부분의 철학자들의 경우에,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그리고 무엇이 그것이 참이라는 우리 주장을 정당화하는지 설명할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그저 무언가를 맹목적으로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

원칙적으로 존재론에 대한 인식론의 이런 우위는 나무랄 데가 없는 듯 보인다. 그런데 실제로 그것은 꽤 문제적인 것이 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결국 우리가 만나는 세계 속 사물들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만나는 우리 나름의 과정에 관해 말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사물 자체"는 알 수 없는 것이며, 우리가 정말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현상사물들이 우리에게 현시되는 양태뿐이라고 역설한다. 칸트 이후 수 세기 동안 이것은 일종의 공통 감각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세계에 적용하는 독자적인 부과물들의 왜곡 렌즈들을 결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사물들을 그것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오늘날 이런 부과물들은 칸트의 범주들을 넘어서 언어, 우리의 특수한 인지 메커니즘 그리고 우리의 문화적 편향과 이데올로기 같은 것들을 포함한다.

인식론적 성찰은 중요한데, 그것 덕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편견과 의심받지 않은 가정들을 인식하게 된다. 그런데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그런 성찰 때문에 우리가 이런 편견과 가정들에서 벗어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시각들에 갖혀 있어서 여타의 견해를 취할 수 없다. 어쨌든 우리가 모든 것다른 사람들, 다른 살아 있는 존재자들 그리고 우주 속 다른 것들을 우리 자신의 모습대로 고치는 것의 위험에 관해 걱정하는 것이 사실상 중요하고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우리가 치르는 비용은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에 관해서만,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만 말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충분히 멀리 밀고 가면, 우리는 세계란 인위적인 사회적 또는 언어적 구성물일 뿐이며, 세계는 우리 자신이 그것에 집어넣은 것으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믿게 된다. 이십 세기 말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 그리고 더 미묘한/복잡한 방식으로, 쟈크 데리다(Jacques Derrida) 같은 사상가들의 탈근대적 철학의 경우에는 이런 구속복에서 벗어날 길이 전혀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지적하고 개탄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벗어날 수 있고, 그래서 진정으로 다른 무언가를 만날 수 없다.

이십일 세기에 철학적 사변의 부활은 이런 딜레마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다. 그것은 인식론의 칸트적 우위를 무화시키고자 하는데, 그런데 그것은 매우 칸트적 이유에서 이것을 행한다. 칸트 자신의 인식론의 격상과 형이상학적 사변의 금지는 독단적 합리주의라는 스킬라와 경험론적 회의주의라는 카리브디스 둘 다를 피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현재 인식론의 격하를 동반하는 칸트의 반전은 맹목적인 이성중심주의와 민족중심주의라는 스킬라와 무한한 해체와 자기 비판이라는 카리브디스 둘 다를 피하고자 하는 비슷하게 고무된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사변이 모든 가능한 지식의 경계를 침범하기 때문에 칸트는 사변을 비난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늘날의 새로운 사변적 사상가들의 경우에는 바로 지식의 한계 때문에 사변이 필요하다. 실재적인 것은 그렇게 존재하지만,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이십일 세기 사변은 우리의 단단한 지식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독단적 주장을 제기하기는 커녕, 이 새로운 형태의 사변은 역설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들의 공간과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의 시간을 탐사한다.

2007년에 네 명의 철학자퀑탱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 그레이엄 하만(Graham Harman), 레이 브래시어(Ray Brassier) 그리고 이에인 해밀턴 그랜트(Iain Hamilton Grant)―가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표제어 아래 런던의 골드스미스 칼리지에서 각자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들은 서로 그리고 서로의 작업을 얼마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때때로 비교적 균일한 집단으로 간주되었지만, 그 이후로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표제어를 포기했다. 그리고 사실상 이 사상가들 사이의 차이가 매우 커서 그들은 단일한 철학 학파를 이룬다고 할 수 없다. 그래도, 이 사상가들이 최소한 중요한 출발점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가리키는 데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레이블이 여전히 유용하다. 하만의 말에 따르면, "사변적 실재론자가 되는 데 필요한 것은 '상관주의'에 반대하는 것뿐인데, 상관주의는 모든 철학을 인간과 세계의 상호 작용에 정초하는 그런 종류의 철학(오늘날에도 여전히 지배적인)을 가리키는 메이야수의 술어이다."

사변적 실재론은 세계 및 세계 속 사물들의 우리 자신의 개념화로부터의 독립성을 역설한다. 그것은 세계의 질서는 우리 마음(또는 우리 언어 또는 문화)이 그것을 구성하기 위해 작동하는 방식에 의존한다는 칸트적 테제를 거부한다. 또한 그것은 자아와 세계, 또는 주체와 객체, 또는 아는 자와 알려지는 것 사이의 원초적인 호혜성 또는 대응성이라는 현상학적 가정을 거부한다. 실재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기묘하다. 사물들은 우리가 그것들에 관해 지니고 있는 관념들에 결코 들어맞지 않는데, 그것들에는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항상 존재한다. 세계는 우리 자신의 인지적 범형과 서사적 설명 양태들에 꼭 들어맞지 않는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가 아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변이 필요하다. 우리의 고질적인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서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비인간 세계의 존재를 진지하게 고려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변을 전개해야 한다.

미리 결정된 한 가지 사변 형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변은 적절한 결말에 대한 아무 확신도 없는 미지의 것으로의 항해이다. 이런 점에서, 자유로운 철학적 사변(philosophical speculation)과 궁극적으로 이익을 낼 목적으로 항상 실행되는 금융 투기(financial speculation)가 대조될 수 있다. 오늘날 파생 상품 시장에서 실행되는 헤지 펀드의 투기는 위험(risk)을 계산하고 수량화하는 한 방식으로 간주된다. 시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간에, 투자자들은 확률의 법칙들을 고려함으로써 이익을 낼 수 있다. 그러므로 금융 투기는 미래를 관리하고 제어하는 한 방식이다. 그것은 미래가 현재와 정합적일 것이라는 의심받지 않은 가정에 의존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형이상학적 사변은 위험이 아니라 환원 불가능한 불확실성을 대면한다. 이런 구별짓기는 위대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에 의해 처음 이루어졌다. 위험은 고정된 수의 가능한 결과들 사이에 확률을 분배하는 통계적 규칙들에 의해 관장되는데, 동전 던지기 또는 주사위 던지기를 고려하라. 그런데 불확실성은 확률론적 견지에서 수량화될 수 없다. 우리는 어떤 결과들이 가능한지 알 길이 없는데, 그것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것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것들 가운데 무언가가 일어날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는 말할 것도 없다. 오늘날 대부분의 경제학자와 금융 전문가들은 케인스의 분석을 무시하고, 그래서 파생 상품과 선물 시장이 불확실성이 아니라 위기의 견지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잘못 가정한다. 그렇지만 경제학에서의 실정이 어떻든 간에, 철학적 사변은 관리할 수 있는 위기가 아니라 오히려 전적으로 기본적인 불확실성의 문제이다. 그런 사변 과정을 인도할 공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사변적 실재론 사상가들은 각자 우리로부터 떨어져 알 수 없게 존재하는 세계에 관한 사변을 전개하는 상이한 방식을 제시한다.

<<풀려난 허무(Nihil Unbound)>>에서 레이 브래시어는 칸트의 인식론적 관심사, 즉 우리가 세계에 관해 정당하게 말할 수 있는 방식들을 관장하는 범주와 규제적 이상들또는 오늘날 우리가 합리성의 규범이라고 부를 확률이 더 높을 것에 대한 주장을 전적으로 거부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브래시어가 이런 규범을 암묵적으로 인간중심적인 칸트의 초점에서 떼어낼 때, 그는 칸트를 넘어서서 일종의 급진적 사변에 관여한다. 브래시어의 경우에, 인과성 같은 칸트의 범주들은 세계에 인식 가능한 어떤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우리 자신의 마음이 세계에 부과하는 구조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우리 마음에 불투명하고 이질적인 사물들에 접근하고자 할 때, 이런 방법과 가정들은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강요된 것이다. 합리성은 소름이 오싹 끼칠 만큼 비인간적이다. 물리과학 덕분에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도 우리의 척도에 따라 만들어지지 않은 세계를 개념화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과학적 기획은 결코 완결돠거나 최종적일 수 없는데, 세계는 궁극적으로 비개념적인 것이고 개념화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물에 관한 우리의 관념들은 사물 자체에 결코 딱 맞을 수 없다. 칸트의 경우에, 이것은 우리가 현상, 즉 단순한 외양들의 영역에 귀속되어 있다그렇지만 또한 그 내부에서 안전하게 정초되어 있다는 점을 의미했다. 그런데 브래시어의 경우에, 우리가 끊임없이 사물 자체에 접근함(그런데 결코 최종적으로 이르지는 못한다)에 따라, 우리는 우리가 당연히 여기곤 하는 모든 것을 박탈당한다. 우리가 우주에 부과하기 위해 헛되이 노력한 모든 의미, 가치 그리고 서사들을 벗겨내면, 우주는 본원적으로 공허하고 무심하다. 위로가 되는 우리의 전제들은 용해되고, 그래서 아무 근거도 없는 사변만이 우리에게 남게 된다.

<<유한성 이후>>라는 중요한 책에서, 알랭 바디우의 제자였던 퀑탱 메이야수는 칸트를 안팎으로 뒤집고, 칸트가 거부했던 그런 종류의 존재론적 사변에 대한 필요를 브래시어와 전적으로 상이한 방식으로 갱신한다. 메이야수는 칸트주의와 현상학의 "상관주의적" 가정들에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한다. 그는 자신이 선조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역설하는데, 선조성은 인류, 또는 어떤 형태의 생명에도 선행하는, 그래서 관찰되고 해석되거나 평가받을 어떤 가능성에도 선행하는 우주의 분명한 존재를 가리킨다. 칸트는 무엇이든 어떤 형태의 존재에도 논리적으로 선행해야 하는 "경험의 선험적 조건"(이것은 존재자에 의해 항상 이미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을 확립한다. 그런데 메이야수는 이런 조건 자체가 세계 역사의 어떤 시점에서 생성되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것이 출현하기 전에 우주는 이미 존재했지만, 어떤 의미에서도 우리에게 "주어지"거나 우리의 범주들에 따라 조직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칸트에 의해 확립된 마음과 세계 사이의 상관관계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우연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통찰로부터 나아가서 메이야수는 본원적 우연성이 유일한 보편적 필연성이라고 추론한다. 그는 세계가 현재의 모습과 달리 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상황은 아무 이유도 없이 일어날 수 있다. 이른바 "자연 법칙"조차도 임의로 변하거나 사라질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메이야수는 사변을 통해 진리를 발견한다또는 더 좋게 말하자면, 사변의 진리를 확립한다고 주장한다. 칸트는 우리 자신의 오성 능력의 한계 때문에 "사물 자체"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 반면에, 오히려 메이야수는 바로 이런 불가지성이 사물 자체의 실정적인 특성이고, 그래서 우리는 이것이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맞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객체지향 존재론으로 부르는, 사변적 실재론에 관한 그레이엄 하만의 판본은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와 마누엘 데 란다(Manuel De Landa) 같은 사상가들을 언급하면서 우리와 독립적인 사물의 존재에 대한 다른 한 접근방식을 취한다. <<게릴라 형이상학(Guerilla Metaphysics)>> <<네겹의 객체(The Quadruple Object)>>를 비롯한 다양한 사변적 저작에서 하만은 칸트의 가장 기본적인 주장들 가운데 하나를 증보함으로써 칸트를 수정하고 사변의 필요성을 다시 도입한다. 칸트는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물에 부과하는 틀로 그것을 경험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물 자체는 알 수 없다고 말하는 반면에, 하만은 이 상황을 우주 속 모든 존재자에게 일반화한다. 세계를 특수한 한정된 방식으로 파악하는 것은 인간, 즉 합리적 존재자들만이 아니다. 세계는 다수의 객체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런 객체들 가운데 어느 것도 피상적인 방식을 넘어서 여타의 객체(심지어 자체에게도)에 접근할 수 없다. 하만의 경우에, 우리 지식의 유한성, 즉 넘어설 수 없는 한계를 역설할 때 칸트는 옳다. 그런데 최소한 그런 한계 내에서 완전하고 확실한 인간중심적인 구조들을 확립하기를 요구할 때 칸트는 그르다. 우리는 세계에 조건을 부과하기보다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의 제한된 능력 내에 갖히게 된다. 칸트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사물에 관해서는 사변을 전개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만은, 우리가 사물 자체를 알 수 없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사변을 전개하는 것이라고 응대한다. 우리는 객체를 인지적으로 파악할 수 없지만, 은유와 다른 심미적 실천을 통해서 객체를 암시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사물을 전적으로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마음에 품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것이 사변의 길인데, "실재적인 것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만 있는 것이다."

브래시어와 마찬가지로 닉 랜드(Nick Land)의 학도였던 이에인 해밀턴 그랜트는 <<셸링 이후의 자연에 관한 철학들(Philosophies of Nature After Schelling)>>에서 다른 한 판본의 사변을 제시한다. 칸트 자신의 철학에서 "경험의 선험적 조건"은 모든 인지가 따라야 하고 따를 필요가 있는 선재하는 구조이다. 그런데 그랜트는 칸트 이후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셸링을 좇아서 이런 구조 자체가 단순히 주어진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 생성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선험적인 것모든 경험에 선행하고, 경험을 위한 조건을 확립하는 것은 결코 정적인 산물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진행 중인 과정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셸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랜트의 경우에도 "선험적인" 것은 오직 자연 자체의 진행 중인 무한한 생산성과 동일시될 수 있다. 이런 모든 사상가들에게 사변은 필연적인 것인데, 그것이 우리가 우리 육체와 마음을 생성하지만 우리 마음과 육체로 영원히 파악할 수 없는 힘, 역능 그리고 사건들을 추적하고자 시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사변적 실재론자들은 모두 형이상학적 사변에 대한 칸트의 금지를 우회하는 방식을 찾아낸다. 그들은 칸트가 존재론보다 인식론을 우위에 둔 것에서 비롯되는 인간중심주의에 저항하기 위해 작업한다. 메이야수와 브래시어의 경우에, 칸트적 인식론의 제약을 극복하는 방식은 칸트에 의해 발견된 가능한 지식에 대한 한계가 우리 자신의 인지 역량에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환원 불가능하게도 우연적(메이야수)이거나 비개념적(브래시어)인 사물 자체의 특징이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다. 그런데, 하만과 그랜트의 경우에는 인간 인지에 부여된 특권 자체가 의문시되어야 한다. 인간 지각과 오성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것보다 덜 특별한데, 그것들은 관계와 인과적 영향의 과정들의 훨씬 더 넓은 스펙트럼에 속하기 때문이다. 솜 덩어리를 사색할 때 내가 행하는 것은 솜 덩어리를 물들일 때 염료가 행하는 것과 많이 다르지 않고, 또는 그 점에 있어서 솜 덩어리를 태울 때 불이 행하는 것과 많이 다르지 않다. 하만의 경우에, 이것들은 모두 또렷히 개별적인 존재자들 사이의 "대리적 접촉"에 관한 사례들이다. 그리고 그랜트의 경우에, 그것들은 모두 자연의 끊임없는 생산성에 의해 추동되지만 정지되거나 물화되기도 하는 변형들이다. 인식론에 우위성이 주어질 수 없는데, 이해와 앎 자체가 그것들이 자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더 큰 운동 내에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 사상가들은 모두, 더 고등한 "독단적" 진리을 발견하기 위한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메이야수가 존재의 "거대한 야외"라고 부르는 것엄청나게 방대하고 기묘하며 본원적으로 불확실하여 우리 자신의 가치와 규범으로 포괄할 수 없는 영역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사변을 수용한다.


2015년 9월 14일 월요일

실재론, 반실재론, 존재론

http://blog.daum.net/nanomat/118

- 아래의 인용문은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의 블로그 글 <<실재론, 인식론, 과학, 그리고 과학주의(Realism, Epistemology, Science, and Scientism)>>에서 일부를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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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재론", "반실재론", "인식론", 그리고 "존재론"이라는 술어들을 사용하여 가능한 네 가지 입장을 구별하자.
[...]
1. 실재론적 인식론(Realist Epistemology): 실재론적 인식론은 우리가 세계의 객체들에 직접 접근할 수 있다는 입장인데,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표상들이 그것들 자체와 정확히 같을 것이다. 여기서 정신은, 세계의 객체들로부터 데이터를 있는 그대로 그저받은 다음에 충실하게 보고하는, 수동적인 세계 수용자로 취급된다.

2. 반실재론적 인식론(Anti-realist Epistemology): 반실재론적 입장은 훨씬 더 복잡하다. 여기서는 인식자가 수동적인 수용자가 아니라, 입력에 적극적인 기여를 하는데, 개념, 실천, 언어, 사회적 범주 등을 통해 입력을 조직하여 인식자의 경험의 층위에서 이런 입력에 특정한 형식이나 구조를 부여한다. 여기서 나는, 블랙박스 모형이 반실재론적 인식론과 실재론적 인식론 사이의 차이에 관해 생각하는 가장 쉬운 방식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재론적 인식론은 수용된 자극을 기록만 할 뿐인 수동적인 수용자로 다루는 반면에, 반실재론적 인식론자들은 세계로부터의 자극을 이후에 블랙박스의 구조(언어, 사회적 범주, 정신의 선험적 개념 등)에 의해 처리되는 입력으로 여기는데, 블랙박스는 자체를 거치는 자극을 처리하여 그것과 다른 출력을 산출한다. 내가 보기에, 블랙박스 모형은 모든 반실재론적 입장에 공통적이다. 그것들이 다른 지점, 그것들이 논쟁를 벌이는 논점은 그 블랙박스가 어떤 처리 메커니즘을 포함하고 있는지에 관한 문제이다. 물론 반실재론적 인식론은 당연히 인간중심적일 것인데, 지식에 관한 문제는 우리인간들이 세계를 어떻게 알게 되는지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3. 반실재론적 존재론(Anti-Realist ontology): 존재론은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라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의미에서 무엇이 존재하며 어떤 동역학이 이런 존재자들을 지배하는가"라는 문제를 다룬다. 그러므로 반실재론적 존재론은 존재자들의 존재―존재자들은 무엇인가―를 우리의 작은 블랙박스의 출력과 등치시키는 존재론이다. 그 논제에 따르면, 존재는 블랙박스의 출력―(데리다가 <<그래마톨로지>>에서 서술한 대로) 표명, 또는, 칸트가 서술한 대로, 현상―이라는 것이다. 반실재론적 존재론의 경우에 일반적으로 존재는 두 가지 의미로 진술된다는 점을 유의하자. 한편으로, 존재는 블랙박스의 출력과 등치된다. 그렇지만 출력은 입력 없이는 블랙박스에 의해 산출될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이런 입력은 어딘가에서 와야 하기 때문에, 우리의 블랙박스(여기서 블랙박스는 정신과 직관의 선험적 범주들, 디페랑스의 작용, 현존재에게 존재를 부여하는 것 등을 포함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에 대해 입력을 제공하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한 유형의 존재가 있어야 한다. 요약하면, 반실재론적 존재론들은 헤겔적 또는 버컬리적 경로를 택하지 않는다면 존재를 일의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

4. 실재론적 존재론(Realist ontology): 반실재론적 존재론자들이 "존재란 (우리에 대한) 현상이다"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실재론적 존재자들은 우리에 대해서만 존재하는 존재자들이(예를 들면, 화폐) 있지만, 이것이 존재의 전부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창을 통해 나무를 바라볼 때] 나무가 창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의미에서 인간들로부터 독립적인 존재들도 있으며, 우리는 존재가 의미하는 바의 특질들에 관해 매우 일반적이지만 유의미한 것을 말할 수 있다.

인식론에 대한 이런 두 가지 가능성과 존재론에 대한 이런 두 가지 가능성을 개략적으로 언급되었으니 이제 이런 입장들의 조합들을 형성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알아챌 것이다. 그런 입장들이 세 가지 있다.

1. 실재론적 인식론과 함께 실재론적 존재론을 옹호하는 것이 가능하다. 사실상 실재론적 인식론을 옹호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실재론적 존재론을 옹호한다.

2. 반실재론적 인식론과 반실재론적 존재론을 옹호하는 것이 가능하다. 나는 이것이 오늘날 대륙철학의 지배적인 입장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3. 반실재론적 인식론과 함께 실재론적 존재론을 옹호하는 것이 가능하다.

나는 객체지향 존재론자들이 옹호하는 것은 세 번째 입장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 반실재론적 인식론자들은 올바르게도 실재론적 인식론을 소박하며 독단적인 입장이라고 거부한다. 우리가 사물들을 즉각적으로 지각하는 방식이나 학문들 내부의 학문분과적 경계들이 존재하는 그대로의 세계에 대한 지도를 그린다고 가정할 이유가 전혀 없다. 게다가 자신들의 인식론적 탐구에서 반실재론적 인식론자들은 올바르게도 현상을 조직하고, 지식을 생산하며, 기타 등등에 있어서 블랙박스에 의해 수행되는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했다. 우리는 우리의 블랙박스가 출력의 산출에 기여하는 바에 관한 이런 논쟁들을 가져야 하고, 반실재론적 인식론의 전통이 발견한 중요한 결과들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만, 반실재론적 인식론자들과 실재론적 존재론자들이 갈라지는 지점은 존재들에 대한 우리의 접근에 관한 의문들이 존재들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데 충분하다라는 논제에 대해서이다. 객체지향 존재론자들의 경우에는, 우리가 저쪽에 있는 객체들을 어떻게아는지에 관한 의문들을 넘어서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에 관한 중요하고 결정적인 의문이 여전히 있다. 이 의문은, 로이 바스카를 따르면, 실재론적 존재론자들의 경우에, 우리가 어떻게 아는지에 의해 철저히 규명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객체지향 존재론자는 우리 지식의 한계, 무엇이든 어떤 특수한 유형의 객체를 알기 위해서는 탐구에 나서야 한다는 사실, 기타 등등을 쉽게 인정하지만, 탐구에서 그리고 탐구를 통해서 발견되는 차이들이 출력의 영역에만 속하는다는 논제는 거부한다. 오히려 실재론적 존재론자는 이런 차이들이 출력에만 한정될 수 없으며, 오히려 이런 차이들을 산출하는, 정신으로부터 독립적인 입력, 즉 세계와 관련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

번역: 김효진

신실재론 입문 - 부정성, - 마우리치오 페라리스(Maurizio Ferraris)

http://blog.daum.net/nanomat/774

1부
부정성(Negativity)

―― 마우리치오 페라리스(Maurizio Ferraris), <<신실재론 입문(Introduction to New Realism)>>, pp. 17-33.

지난 이 세기 동안(최소한) 그리고 탈근대주의에서 절정에 이른 과정을 거치면서 철학과 문화는 부정성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근대 시대와 탈근대 시대를 특징지운 기본적 관념은 역사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세계에서 많은 것들이 구성되고, 그래서 해체되고, 비판받으며, 변형될 수 있고 변형되어야 한다는 신성 불가침의 믿음이었다. 여기서 사실상 우리는 항상 부인하는 정신의 승리를 목격했는데, 그것은 의회 민주주의, 근대 과학, 성 평등 등―물론, 모든 종류의 재난들과 더불어―을 가져다 주었다. 그렇지만 이런 부정성은 통제할 수 없는 과정과 더불어 특히 호수와 산을 비롯한 모든 것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관념을 촉발했다. 확실히 그런 관념은, 이른바, 세계들의 구성자들이 되는 개인들의 권력에의 의지를 부양한다. 그런데 동시에 그것은 모든 사람이 (외관상)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으며 진리와 허구 사이의 차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거짓 해방에 이르는 길로서 제시된다. 그것은 내가 '리얼리티즘(realitism)'('리얼리티 쇼'에 의거하여 만들어진 낱말)라고 부르는 것의 세계이고 탈근대주의의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하는 듯 보인다.

탈근대주의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는 쇼펜하우어의 원리는 동등하거나 공존하는 존재자들로 간주하게 된(이것이 그 시대의 독특한 특질이다) 매체 체계와 탈근대성의 근본적인 존재론적 원리가 되었다. 결국 다음과 같은 것이 참된 위대한 탈근대적 이론이었다. 실재는 구성되고, 그래서 궁극적으로 실재는 불특정한 인류의 표상들과 독립적으로 현존할 수 없다. 이 이론은 탈근대성에서 매체의 과도한 증강을 설명하는데, 사실상 탈근대주의는 매체 '허구화'로 대체된 실재의 종말을 선언하는 역사 철학으로 자처한다. 니체를 좇아서 실재적 세계는 동화가 되어 버렸고, 그래서 사실은 전혀 존재하지 않고 해석만 존재한다면, 매체학은 존재론이 되고 매체는 실재의 구성자로 변환되는데, 이것은 걸프 전쟁을 순전한 매체 발명품으로 간주한 보드리야르(Baudrillard)뿐 아니라 제국의 권력은 영화 제작업체와 꼭 마찬가지로 실재를 구성할 수 있다고 믿은 것으로 유명한 칼 로브(Karl Rove)와도 일치한다.

이 원리는 내가 탈근대적인 공통의 것들(koine)을 요약한다고 제안하는 세 가지 중요한 점들로 명시적으로 표명된다. 첫째는 아이러니화(ironisation)인데, 이것에 따르면 이론(또는 심지어 낱말들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을 진지하게 간주하는 것은 일종의 독단주의를 나타내고,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진술로부터 역설적인 초연함―철자법적으로는 인용 부호로 표현되고, 심지어 물리적으로는 구두 연설에서 인용 부호를 나타내기 위해 손가락을 구부림으로써 표현된다―을 유지해야 한다. 둘째는 탈승화(desublimation), 즉 욕망이 자체적으로 한 가지 해방 형식을 구성한다는 관념인데, 왜냐하면 이성과 지성은 지배 형식이고, 그래서 해방은 본질적으로 혁명적인 느낌과 육체를 통해서 추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탈객관화(deobjectification), 즉 사실은 전혀 없고 해석만 있을 뿐이라는 가정인데, 이것으로부터 우호적인 연대가 무심하고 폭력적인 객관성을 지배해야 한다는 따름 정리가 도출된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내가 인문학과 철학의 '직업적 반실재론'으로 부르자고 제안하는 것의 기원을 발견하게 된다. 자연 과학(그런데 우리는 간단히 '과학'이라고 해도 무방하다)이 실재와 객관성의 권역 전체를 담당하는 듯 보이는 시기에 철학자라는 것은 실재는 현존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그리고 실재는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언어에 의해 결정되며, 패러다임 등에 의해 제조된다고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과학의 시대에 인문학은 어떤 존중할 만한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과학자들은 구성하고, 인문학자들은 해체한다. 세 가지 기본적인 선택지가 존재한다. 해체주의적 반실재론자, 과학주의의 (실재론적 또는 구성주의적) 옹호자 그리고 부정적 실재론자(이 경우에 진리와 실재는 과학의 특권이다).

내 의견으로는, 왜 지성적인 사람들(탈근대적 철학자들이 그랬듯이)이 로티(Rorty)―내 의견으로는 푸코, 데리다 그리고 들뢰즈보다 덜 독창적이지만, 탈근대적 역설들에 이론적 형식을 부여하려고 시도한 유일한 사람이다―가 올바르게도 '역설적인 이론(ironic theory)'으로 불렀던 것을 실천하면서, 진리의 대응물이 전혀 없이, 돌발적 발언이나 과장된 표현을 표명하는 것에 만족해야 하는지 자문할 가치가 있다. 나는 그 이유가 내가 제시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지난 이 세기 동안 철학은 과학에 예속되거나(실증주의, 그런데 삼십 년 전에 '인간 과학'의 대유행도 생각하자) 아니면 과학을 비판할 수밖에 없었다. 과학자와 반과학자들이 모두 실재에 관한 지식은 과학의 특권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에(두 범주의 구성원들은 아프면 의사에게 간다) 반과학자들은 게다가 반실재론자가 되고, 그래서 인간은 최근의 발명품이며,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등의 주장들을 표명하게 된다. 그런 주장들을 비판하기 위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그것들은 진지하게 간주하는 것일 것이다. '인간은 최근의 발명품이라고 말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까닭을 말해야 한다.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면, 이 순간에 당신이 현존하고 있는 텍스트를 제시해야 한다.' 나는 이것이, 퍼트넘에 의해 사용된 표현을 차용하면, '안개와의 주먹다짐'을 피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있다.

나는 이것이 헛된 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것 덕분에 우리는 탈근대주의가 독일 관념론의 위기의 말기(언제 '철학의 죽음'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있었는지 기억하자)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모든 실재는 과학에 속하고, 그래서 철학에게는 대단치 않은 것들―신학, 영성주의, 정신주의, 개인적 열상, 인간 세계, 생활 세계; 형이상학의 극복, 해체,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사유'의 탐색 같은 현장 활동; 철학사 또는 역사적 지식으로서의 철학; 정치적 운동주의로서의 철학, 탈근대주의, 사실은 전혀 없고 해석만 있을 뿐이다; 구피, 플루토 그리고 도널드 덕의 철학(팝소피아)―이 남게 된다. 이런 불편함의 가장 명백한 증상들 가운데 하나는, 하이데거는 심지어 탈은폐로서의 진리에 관한 대안적 이론―즉, 여타의 사람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반면에 철학자들에게만 적용되는(철학자들이 철학을 하고 있지 않다면 그들에게도 적용되지 않는) 철학자들을 위한 진리―을 개발했었어야 했다는 사실이었다.

분석 철학도 역시 이런 잔류화의 전략에 동참했다. 소피스트(부정하게 논증하는)와 과학자(실재에 관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논증할 필요가 없는)들과 달리 철학자는 제대로 논증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떤 근거에서 논증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물론 나는 매우 조악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내 목적은 탈근대적 반실재론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는 점을 설명하는 것이다. 만약 상황이 이렇다면, 실재론을 역설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거나 자명한 무언가를 역설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대 철학의 거동에 있어서 무언가가 불필요하게 자기 제한적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포퓰리즘

포퓰리즘(populism)은 해방에 대한 탈근대적 희망의 기반을 약화시킨 모든 정치들 가운데 첫 번째의 것이었다. 매체 포퓰리즘의 등장은, 대량 파괴 무기들에 대한 허위 증거에 의거하여 전쟁을 개시하는 지경에 이른 이데올로기적 구성물로서의 진리의 거리낌 없는 사용은 말할 것도 없이, 결코 해방적이지 않은 실재에의 작별의 일례를 제공했다. 매체와 몇 가지 정치적인 프로그램들에서 우리는 "사실은 전혀 없고 해석들만 있을 뿐"이라는 니체의 원리―겨우 몇 년 전에 철학자들이 해방에 이르는 길로서 제안했지만 사실상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말하고 행하는 것에 대한 정당화로 제시되는―의 실재적 결과를 보았다. 그러므로 니체의 구호의 진정한 의미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가장 강한 자의 이유가 항상 최선의 것이다.' 이런 환경은 분석적 세계에 있어서 반실재론의 종말과 대륙적 세계에 있어서 반실재론의 종말 사이의 약간의 시간 간격을 설명한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동안에 여전히 분석적 반실재론은 대부분 존재했고 대륙적 반실재론은 비교 문학 학과들에서 여전히 존재했다.

그런데 21세기에는 실재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오히려 신매체는 증강된 실재, 즉 결코 가상적이지 않는 기록물, 고착물, 기입물, 문서들의 기하급수적인 성장을 드러내었는데, 통화 기록이 범죄로 기소된 사람의 알리바이를 날려 버릴 때처럼 사실상 그것들은 흔히 너무나 실재적이다. 가장 오래되고 가장 성공적인 앱들 가운데 하나로서 근처의 주유소, 레스토랑, 약국 등의 위치를 알려주는 '어라운드미(AroundMe)'라는 앱을 살펴보자. 여기서 우리는 컴퓨터들이 우리로 하여금 제2의 전적으로 가상적인 삶으로 진입하게 하는 수사법에 의해 흔히 언급되는 것과 매우 다른 무언가를 목격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더  삶, 우리가 갖는 유일한 삶에 속하며, 그리고 우리는 정보로 풍성해진 이런 증강된 현실의 효과를 너무나 잘 지각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이 지점에서는 돌도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세컨드 라이프(Second Life)의 짧은 가상적 꿈이 방금 먹은 것에 대한 서술까지 섭렵하는 문서들로 가득찬 페이스북에서의 매우 실재적이고 흔히 자책적인 편재에 압도당했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심지어 그런 앱들을 너머 기록이라는 단순한 행위가 우리가 알고 있는 실재(즉, 나중에 내가 밝히듯이, '인식론적 실재'라고 부르곤 하는 것)의 추산할 수 없는 증가를 낳는다. 오늘날에는 <지나가는 어느 여인에게(A une passante)>에서 보들레르에 의해 서술된 것―사라져서 결코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덧없는 아름다움―과 같은 경험―어쨌든 참신성과 일시성으로서의 근대성의 본질인 포의 '네버모어(nevermore)'을 떠올리게 하는 경험―을 갖는 것은 근본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 오늘날 보들레르는 자신의 모바일 폰으로 지나가는 여인의 사진을 찍을 수 있고, 그래서 페이스북에서 친구 요청으로 그녀를 추적하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조건이 참신성, 덧없음 그리고 일시성보다 반복, 보존 그리고 다시 쓰기에 유리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가 언급했듯이, 모든 행위가 기록된다는 사실은 실재를 두드러지게 증가시킨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이미 컴퓨터들로 둘러싸여 있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몇 년 전에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은 것을 자각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자료에 파묻혀 있다는 것이며, 그리고 이제 우리는, 예컨대, 유튜브를 검색하면 이것을 정말로 깨달을 수 있다. 인터넷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거래, 그리고 특히 우리의 모든 연구는 대규모의 초국가적 존재자들에 의해 기록되고, 그래서 훨씬 더 광범위한 통제권을 행사하는데, 사회적 연결망에 자신에 관한 정보를 자발적으로 제공하는 사람들은 통제되는 사람들이다. 이런 환경은 다른 한 고찰을 시사한다. 모든 것이 기록되는 시기에 제공될 수 있는 유일한 보호는 기술적으로 어려운 것(법률은 항상 해커들에 의해 쉽게 우회될 수 있기 때문에 법률적 어려움보다도 훨씬 더)을 거쳐서 이루어진다.

푸칸트(푸코 + 칸트)

탈근대적 리얼리티즘(realitism)은 정치적으로 고무된 반실재론이다. 지금까지 탈근대주의는, 실재는 지배의 목적을 위해 권력에 의해 실제로 구성되며, 그리고 지식은 해방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권력의 도구라는 관념을 계발했다. 나는 이런 태도의 기저에 놓여 있는 철학적 사고 방식을 '푸칸트(Foukant)적'이라고 명명할 것인데, 푸칸트라는 허구적 사상가는 (칸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식에 직접 접근할 수 없고 생각한다는 것은 반드시 우리의 표상들을 동반해야 한다고 믿으며, (사상의 최초 단계에서 푸코와 마찬가지로) 그는 생각한다는 것과 우리의 개념적 도식들은 권력에의 의지를 확언하는 수단이라고 간주한다. 푸칸트의 테제는 궁극적으로 다음과 같은 삼단 논법에 놓여 있다. 실재는 지식에 의해 구성된다. 지식은 권력에 의해 구성된다. 그러므로 실재는 권력에 의해 구성된다. 따라서, 급진적인 탈근대주의에서는 한 가지 논리적인 단계를 거쳐서 실재는 권력의 구성물인 것으로 판명되는데, 그래서 실재는 가증스러운 것('권력'이 우리를 지배하는 권력을 의미한다면)이자 가변적인 것('권력'이 '우리의 권력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면)이 된다.

이 삼단 논법은 세 가지 오류로 명확히 표명된다. 첫 번째 오류는 존재-지식의 오류, 즉 존재론과 인식론 사이, 즉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사이의 혼동이다. 내가 물은 H_2O이다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언어, 도식 그리고 범주들이 필요하다는 점은 명료하다. 그런데 물은 바로 H_2O이다라는 사실은 나의 어떤 지식과도 전적으로 독립적인데, 그래서 화학이 탄생하기 이전에도 물은 H_2O였고, 우리 모두가 지구에서 사라지더라도 여전히 그럴 것이다. 대체로, 비과학적 경혐의 경우에, 내가 알든 모르든 간에 언어, 도식 그리고 범주들과 독립적으로 물은 축축하고 불은 타오른다. 실재 속 무언가가 우리에게 저항한다. 그것이 내가 '수정 불가능성(unamendability)'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실재적인 것의 특이한 특질은 그것이 마음대로 수정되거나 교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하나의 제약일 수 있지만, 동시에 그것 덕분에 우리는 꿈과 실재, 과학과 마술을 구별지을 수 있다.

두 번째 오류는 확인-수용의 오류인데, 이것에 의거하여 탈근대주의자들은 실재를 확인하는 것은 현존하는 사태를 수용하는 것에 놓여 있고, 그래서 거꾸로(논리적 간극이 있지만) 반실재론은 본질적으로 해방적인 것이라고 가정했다. 그런데 명백히 그렇지 않다. 반실재론은 묵종을 수반한다. 진단이 치료의 전제가 되는 것과 동일한 평범한 이유 덕분에 오히려 실재론자가 (원한다면) 비판하고 (할 수 있다면) 변형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추고 있다.

세 번째 그리고 본질적인 오류삼십 년 전에 탈근대주의를 거대한 반계몽주의적 물결로 간주한 하버마스의 견해를 확인하는는 지식-권력 오류인데, 이것에 따르면 어떤 형태의 지식의 배후에도 부정적인 것으로 경험되는 권력이 숨어 있다. 결과적으로, 자체를 해방과 관련시키는 대신에 지식은 예속의 도구가 된다. 이런 태도는 독특한 '지식에 대한 공포'를 무심코 드러낸다고 올바르게 주장되었지만, 공포와 더불어 '무지는 축복이다'라는 확신―<<매트릭스(The Matrix)>>에서 사이퍼에 의해 간결하게 표명된―도 존재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결과들을 초래한 책임이 있는 계몽의 변증법으로, 지식에 대한 비판은 지식 자체로부터의 도피로 변환된다.

데칸트(데카르트+칸트)

푸칸트의 삼단 논법의 대전제('실재는 지식에 의해 구성된다')는, 내가 언급했듯이, 현대 철학의 주류를 대표하는 구성주의에서 강력한 이론적 정당화를 찾아낸다. 그런 시각은 우리의 개념적 도식과 지각적 장치들이 실재의 구성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수행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데카르트에서 시작되어 칸트에서 절정에 이르는 이런 견해를 구현하고 있는 허구적 철학자를 '데칸트(Deskant)'라고 부를 것인데, 그 다음에 그 견해는 니체에 의해 허무주의적 의미에서 급진화되거나, 아니면 인식론적, 해석학적, 심리적 의미에서 전문화되었다. 이런 입장은 내가 선험적 오류로 규정하는 것에서 비롯되는데, 그 오류는 이미 언급된 존재론과 인식론 사이의 혼동에 놓여 있다. 그것의 기원에는 데카르트, 흄, 칸트 그리고 헤겔에서 찾아낼 수 있는 어떤 전략이 존재한다. 지식은 무엇보다도 감각적 지식이지만, 감각은 기만적이고, 그래서 우리는 개념적 지식으로 변환해야 한다. 그러므로 구성주의는 더 이상 안정성을 갖추고 있지 않고, 햄릿이 서술했듯이, '어긋나 버린' 세계를 구성을 통해서 다시 정초할 필요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모든 지식은 경험에서 시작되지만, 경험이 구조적으로 불확실하다면, 과학을 통해서 경험을 정초하는 것이 필요할 것인데, 그래서 경험의 불확실성을 안정화하는 선험적 구조들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시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우리는 객체가 아니라 주체에서 출발하고, 학자로서가 아니라 판관으로서 자연을 심문하는 물리학자들의 모형을 좇아서, 즉 도식과 정리들을 사용하여 사물들이 자체적으로 어떠한지 자문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들을 알게 되려면 그것들이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지 자문해야 한다.

그래서 데칸트는 선험적 인식론, 즉 수학을 채택하여 존재론을 정초하는데, 종합적인 선험적 판단들의 가능성 덕분에 우리는 어떤 지식을 통해서 유동적인 실재를 고정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식으로 선험 철학은 구성주의를 수학의 권역에서 존재론의 권역으로 이동했다. 물리학과 수학의 법칙들은 실재에 적용되며, 그리고 데칸트의 가설에서 그것들은 과학자 집단의 고안물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감각들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의 지식은 더 이상 감각의 비신뢰성과 귀납의 불확실성에 의해 위협당하지 않을 것이지만, 우리가 치러야만 하는 댓가는 어떤 객체 X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과 우리가 객체 X를 알고 있다는 사실 사이에 어떤 차이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칸트는 우리로 하여금 현상적 객체 X의 배후에 본체적 객체 Y, 즉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물 자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하도록 환기하지만, 존재의 권역이 대체로 가지적인 것들의 권역과 일치하며, 가지적인 것은 본질적으로 구성 가능한 것과 동등하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는다.

그러므로 선험적 오류의 기원에는 주제들의 얽힘이 존재한다.

1. 감각은 기만적이다(감각은 100% 확실하지는 않다).
2. 귀납은 불확실하다(귀납은 100% 확실하지는 않다).
3. 과학은 경험보다 더 안전한데, 왜냐하면 과학은 감각의 기만성 및 귀납의 불확실성과 독립적인 수학적 원리들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4. 그렇다면 경험은 과학으로 해명되어야 한다(경험은 과학에 의해 정초되어야 하거나, 또는 최악의 경우에 경험은 과학에 의해 오해를 낳을 소지가 있는 '현시적 이미지'로 폭로되어야 한다).
5. 과학은 패러다임들의 구성이기 때문에, 이 지점에서 경험도 역시 구성일 것인데, 즉 경험은 개념적 도식들에서 시작하여 세계를 형성할 것이다.

여기에 탈근대주의의 기원이 놓여 있다.

더 자세히 조사함으로써 우리는 문제 전체의 핵심에서 인과성이라는 개념을 찾아낸다. 데카르트의 문제는 인식 주체가 세계의 일부가 아니라면 세계가 어떻게 인식 주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설명하는 것이다. 대신에 칸트의 문제는 인과성이 선험적 주체 자신에 속하는 범주라면 세계가 어떻게 선험적 주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설명하는 것이다. 인과성을 자신의 선험적 범주들 사이에 위치시킴으로써 칸트는 스스로를 암묵적으로 관념론적인 형태의 구성주의로 몰아넣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세계가 주체에 진정한 인과적 효과를 행사하지 못하게 막기 때문이다. 이것이 데칸트의 테제의 핵심이다. 세계는 주체에 대한 어떤 인과적 역능도 갖고 있지 않는데, 왜냐하면 주체는 세계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데카르트)이고 인과성은 전적으로 주체에 속하기 때문(칸트)이다.

데칸트 및 푸칸트와 달리 칸트는 <<순수 이성 비판>>을 거부하게 되는 <<판단력 비판>>으로 이런 어려움을 이미 자각하게 되었었다는 점을 지적할 가치가 있다. 첫째, 심미적 판단에 대한 비판에서 칸트는 아름다운 것은 아무 개념 없이 애호된다고 적었는데, 다시 말해서, 그는 개념성을 권좌에서 몰아내었으며 지각이 특히 중요한 영역에서 그랬다. 둘째, 목적론적 판단에 대한 비판에서 칸트는 과학론을 명시적으로 제시했는데, 즉 자연은 자체적으로 아무 목적도 없으며, 자연을 과학적으로 탐구할 수 있도록 그것에 목적을 부여하는 것은 인간들이다. 세째, 칸트는 단일한 사례에서 시작하여 일반적 규칙으로 상승하는, 제3 비판에서 도입된 반성적 판단은 일반적 규칙에서 단일한 사례로 하강하는, 제1 비판의 확정적 판단 다음에 위치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그가 가리켰던 것은 확정적 판단을 그저 탐구하기보다는 그것을 대체할 필요성이라고 믿을 만한 좋은 이유들이 존재한다. 사실상, 어느 것을 채용하기로 선택하는 것이 주체에 달려 있게 될 기묘한 이중적 양태에서, 확정적 판단이 어떻게 반성적 판단과 공존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어쨌든, 주체가 반성적 판단에 의지할지라도(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그것만을 사용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그들은 흄에 의해 제기된 반대 의견들에 대응할 수 없을 것인데, 왜냐하면 사실상 반성적 판단은 모든 점에서 경험주의적 귀납―단일한 사례에서 시작하여 규칙으로 상승하는―이기 때문이다.

티-렉스

내가 푸칸트와 데칸트에 대립시킬 기능, 즉 티-렉스(T-Rex)는 인간이 아니라 동물인데,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공룡이다. 공룡은 상부 삼첩기(Upper Triassic, 대략 2억3천만 년 전)와 백악기 말기(대략 6천5백만 년 전) 사이에 생존했다. 최초의 인간들과 그들의 개념적 도식들은 몇몇 사람들에 따르면 2십5만 년 전에 나타났고, 다른 사람들에 따르면 5만 년 전에 나타났다. 1억6천5백만 년 동안 공룡은 존재했지만 인간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6천4백만 년 동안 인간도 공룡도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5십만 년 동안 인간은 존재했지만 공룡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선재성의 논증(argument of pre-existence)'으로 부르는 이런 환경은 테칸트의 경우에 한 가지 문제를 조성한다. 데칸트의 경우에는 사유가 우리가 경험하는 직접적인 최초의 대상이고, 그래서 사유와 그것의 범주들의 매개를 거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저쪽에' 놓여 있는 세계와 전혀 접촉할 수 없다. 데칸트에 따르면 자연적 객체들은,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데 사용하는 범주들과 더불어 우리 마음 속에만 현존하는 시간과 공간에 정위된다. 사람들이 존재하기 전에는 아무 객체들도 존재하지 않았거나, 또는 최소한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의 객체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지만, 명백히 그렇지 않다. 티-렉스는 푸칸트나 데칸트 이전에 그리고 일반적으로 '인식 주체' 이전에 존재했다.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다룰 수 있는가?

좋은 움직임은 구성주의자들에 의거하여 언어적-개념적 차원이 실재적인 것을 구성하는 방식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것일 수 있을 것이다. 두 가지 가능한 경우가 존재한다. 한편으로, 실재는 실제로 우리의 개념들에 의해 구성되고, 그래서 공룡은 결코 존재한 적이 없었다(기껏해야 어떤 인간이 그것들을 발견하는 바로 그 순간에 마법처럼 나타난 공룡 화석들이 존재한다). 다른 한편으로, 실재는 개념이 아니라 객체들―인간 이전에 생존했던 공룡처럼―로 이루어져 있고, 그래서 개념적 도식들은 공룡들의 모습이 어떠했고 어떻게 살았는지 이해하려고 시도하기 위해, 즉 존재론적 기능이 아니라 인식론적 기능을 충족시키기 위해 공룡의 유물들을 관련시키는 데 유용할 뿐이다.

이제 개념적 도식들에 대한 세계의 의존성의 가능한 종류들을 가장 강한 것에서 가장 약한 것까지 살펴 보자. 가장 강한 의존성, 즉 존재자는 사유의 상관물로서 현존할 뿐이라고 단언하는(극단적인 상관주의의 형식으로) 사람들에 의해 제시되는 것을 고찰하자. 이 경우에, 존재는 사유에 인과적으로 의존한다고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강한 판본에서, 객체들의 사유에의 의존성은 명시적인 인과적 의존성이다. 주체가 객체의 인식론적 필요 조건이라는 바로 그 이유만으로도, '아무튼' 주체는 객체를 초래한다. 인식하는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식되는 객체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리고 이것은 논의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그리고 여기에 인과적 의존성의 옹호자가 놓치는 점이 있다) 그것은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객체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의 기원은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라 인식론적인 버컬리의 유명한 논증―숲에서 한 그루의 나무가 쓰러지고 그 소리를 들을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다면, 그것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에 놓여 있다. 그런데, 이 판본에서는 존재(존재론)가 지식(인식론)에 의존하기 떄문에, 인과적 의존성의 옹호자는 누군가가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를 확인할 때에야 비로소 그 나무가 실제로 쓰러졌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므로 공룡들이 돌아다니고 있었을 때(이 지점에서 이런 종류의 표현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가정하면) 인간들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룡은 결코 현존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명백히 도출된다.

인과적 의존성에 대한 잘못된 해석들을 피하기 위해 반실재론자들은 때때로 개념적 의존성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라는 칸트의 유명한 진술의 가능한 결과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이 문장은 두 가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1) '공룡'이라는 개념이 없다면 우리는 공룡을 보더라도 공룡을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2) '공룡'이라는 개념이 없다면 우리는 공룡을 보더라도 공룡을 보지 못할 것이다. 칸트를 옹호하는 경우에, 그는 (1)를 의미했다고 한다. 그런데 칸트가 (1)을 의미했었더라면, 그는 <<순수 이성 비판>>을 저술하지 못했었을 것이고,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 즉 과학론만 저술했었을 것이다. 칸트가 <<순수 이성 비판>>을 저술했다면, 그것은 그가 (2)를 의미했었기 때문이다. 개념이 경험 일반을 구성한다. 그래서 도식주의에 관한 장에서 칸트는 심지어 개의 도식도 제시하게 하는데, 그런 도식이 없다면 개는 기껏해야 본체적 현존을 영위할 것이라고 우리는 가정해야 한다. 그런데, 인과적 의존성이 선재성 논증에 의해 무효화된다면, 개념적 의존성은 다음과 같은 상호작용 논증에 의해 무효화된다. 지금 내가 엄청나게 오래 살았거나 부활된 공룡을 만난다면, 그것의 개념적 도식들이 나의 개념적 도식들과 매우 다를 개연성이 있더라도 나는 그것과 상호작용할 수 있다. '긍정성'에서 내가 전개하듯이,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그것들과 대단히 상이한 개념적 도식 및 지각적 장치들을 갖추고 있거나, 또는 전혀 갖추고 있지 않는 존재자들과 상호작용한다.

선재성 논증과 상호작용 논증을 피하기 위해 반실재론자들은 '표상적 의존성'을 언급하는데, 우리는 우주의 창조자가 아니라, 무정형의 질료로부터 시작하는 우주의 구성자이다. 여기에 현대 철학의 주류가 존재하는데, 내가 보여주었다고 희망하듯이, 그것은 허무주의도 아니고 유아론도 아니라 구성주의, 즉 실재는 저쪽에 존재하지만, 그것 자체는 무정형의 것, 쿠키를 위한 밀가루 반죽, 현상의 구성자가 되는 주체에 의해 주조되는 분화되지 않은 코라(chora)이다라는 관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만나는 세계와 사물들 자체는 현존은 부여받지만 독립성은 부여받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물들의 현존은 결코 부인당하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단언할 수 있게 만들고, 그래서 우리는 현상에만 접근할 수 있을 뿐이지 사물들 자체에는 결코 접근할 수 없다고 덧붙이게 된다. 결과적으로, 무언가를 물 자체로 간주하는 것은 철학의 견지에서 최소의 교양을 갖춘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소박성이다.

그러므로 세계의 개별적 현존은 인정받지만, 세계 자체는 어떤 구조적 및 형태적 자율성―적어도 우리는 알지 못한다―도 갖추고 있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 물 자체는 잠재적으로 매트릭스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표상적 의존성도 작동하지 않는 것으로 판명된다. 사실상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한편으로,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라는 낱말이 우리에 의존하고, 그래서 어떤 중대한 의존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면, 인과적 의존성(유일한 중대한 종류의 의존성이다)의 경우와 꼭 마찬가지로, 티나로사우루스의 존재가 인간들에 의존한다는 것인데, 티라노사우루스 렉스가 현존했을 때 우리가 현존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것은 작동하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공룡들이 존재했을 때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도출될 것이다. 이 지점에서 반실재론자들은 이렇게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당신은 사유에 독립적인 공류의 현존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그런데 대답은 단순할 것이다. '증명을 제시해야 하는 것은 바로 당신이다. 여기서 당신은 공룡의 사유에의 의존성, 즉 지금까지 당신이 행하지 못한 것을 증명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