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고민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중국연구실허난시 03/30 22:44
황해문화 2014년 봄호에 실은 서평 하나를 옮겨봅니다.
- [현대 중국 지식인 지도] (조경란/글항아리 2013) 서평
21세기 들어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국가는 바로 중국이다. 페리 앤더슨(Perry Anderson)은 오늘날 세계의 많은 사람들과 기업, 미디어들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있는 중국을 열광적인 태도로 바라보고 있는 것을 마치 예전 로코코 시대 유럽에서 유행했던 ‘중국풍(chinoiserie)’의 재림이라고 보고 ‘중국열풍(Sinomania)’의 시대가 오고 있다고 평했다. 사람들은 이렇게 부상하는 중국이 과연 어떻게 변해나갈 것이며, 또 중국이 어떻게 세계를 변화시켜 나갈까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중국이 현재 처한 현실을 진단하고 앞으로 중국이 나아가야 할 길을 토론하는 중국 지식인들의 논의로 옮겨가고 있는 중이다.
이런 가운데 출간된 조경란 선생의 저작 [현대 중국 지식인 지도] (글항아리, 2013)는 최근 중국 지식인들의 사유의 변화와 그들 간의 논쟁들을 꼼꼼히 추적하여 현재의 중국 지식계를 입체적이면서도 총체적으로 조망하고 있다. 이 책은 저자의 전작인 19세기 말부터 20세기 말까지 중국 지식인들이 모색해온 사상의 궤적을 추적한 [중국 근현대 사상의 탐색] (삼인, 2003)과 이를 더 심화시켜 21세기 초입까지의 중국 지식계의 논쟁과 입장 변화들을 보다 전문적으로 탐구한 [현대 중국 사상과 동아시아] (태학사, 2008)에 이어 좀 더 대중적으로 최근 중국의 부상에 따른 중국 지식계의 변화 경향을 나름 한국적 시각에서 정리한 것이다. 이는 서구의 중국학계에서 비슷한 주제를 가진 저작들이 대표적인 중국 지식인들의 글들을 단순히 요약번역하여 소개하는 수준에 그치는 것과 비교해볼 때 매우 뛰어난 성과라고 할 수 있으며, 방대한 문헌을 검토하여 복잡한 사상적 자원을 지닌 중국 지식인들의 사유를 효과적으로 정리해낸 노력이 담겨있는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 책의 논의를 소개하자면, 저자는 중국 지식계가 21세기에 접어들어 중국의 부상과 더불어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 등을 기점으로 다시 새롭게 분화하기 시작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즉, 중국 지식인들이 자국의 성공적인 경제성장과 국제 사회에서의 지위 상승을 ‘중국모델론’으로 이론화하기 시작하는 한편, 서구의 제도를 비판하고 중국의 전통을 재조명하기 시작했는데, 이 가운데 중국 지식인들의 ‘국가주의’로의 경도라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지식 지형 재편의 중심에는 1990년대 중후반부터 중국의 시장화와 불평등 확산을 강하게 비판해왔던 신좌파의 ‘국가주의’로의 선회(보수화)가 있으며, 이에 호응하는 신유가의 중국의 유가 전통 재해석이 결국에는 ‘중국모델론’과 ‘유교중국’의 수렴으로 나타나고 있고, 이를 중국 정부가 소프트파워 구상에 적극 이용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자유주의 지식인들 역시 이런 상황에 대응하여 자유주의의 중국화를 고민하는 한편, 기존의 네거티브한 체제비판을 넘어 적극적인 권리찾기 운동을 통해 대중과의 접점을 늘리는 등의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렇듯 저자는 중국 주류 지식계(특히 신좌파)가 국가주의와 중화주의에 함몰되는 것을 비판하는 동시에 국가로부터 거리를 두며 독립성을 모색하는 지식인을 바람직한 비판적 지식인의 상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우리의 중국에 대한 태도도 ‘숭중(崇中)’과 ‘혐중(嫌中)’을 넘어 중국을 객관적으로 연구분석하는 ‘연중(硏中)’과 비판하는 ‘비중(批中)’이 필요함을 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저자의 논의에 전반적으로 공감하지만, 몇 가지 쟁점을 제기하고자 한다. 우선 중국 신좌파들이 국가주의로 경도되어 보수화했다는 평가는 아직 유보적으로 판단해봐야 할 문제는 아닌가 하는 점이고, 다음으로 기존의 이데올로기 중심의 지식인 분류가 한편으론 중국 지식계의 복잡성을 그대로 드러내기 보다는 전형적인 틀로 정형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제기이며, 그 연장선에서 바람직한 중국의 비판적 지식인을 독립/관방의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 중국 지식인들은 국가주의로 함몰되고 있는가?
저자가 지적하듯이 중국 신좌파들이 2000년대 중반 이후 중국 공산당 및 국가에 더욱 친밀성을 드러내는 경향은 분명하지만 이를 신좌파들이 보수화했다거나 국가주의로 침윤되었다는 평가는 약간 과도한 것은 아닌가 하는 판단이 든다. 저자도 지적하고 있듯이 신좌파 내부에도 스펙트럼이 다양한 편이라고 할 수 있고, 신좌파로 분류되던 지식인들이 기존의 '신자유주의 비판-세계화 비판'이라는 공동전선 - 특히 구체적으로 중국의 WTO가입 반대나 국유기업 구조조정, 빈부격차 확대 비판이라는 방식으로 나타났던 논쟁의 전선 - 에서 후진타오-원자바오 집권기에 중국의 정책에 미묘한 변화 - 즉 한편에서 지속적인 시장화는 추구되지만, 또 한편에서 농업세 폐지나 노동계약법 제정, 최저임금 인상 등을 비롯한 친민정책들도 시도되는 등의 변화 -가 나타나자 그에 맞춰 입장들이 다양하게 분화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예를 들어 신좌파로 분류되는 왕샤오광(王紹光)은 지식계나 정책계에 영향을 미치게 된 계기도 1993년 중앙 정부의 역량을 강화할 것을 제언하는 [국가능력보고]였고, 본인 스스로를 국가주의자로 호명해온 경향이 있지만, 추이즈위안(崔之元)이나 왕후이(汪暉)의 경우에는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기층 인민의 밑으로부터의 목소리를 통해 국가에 개입하고 국가를 압박하여 친민정책을 끌어내려 한다는 점에서 이를 ‘국가주의자’라고 단정짓는 것은 시기상조일 수도 있다.
저자의 주 비판대상이 되는 왕후이를 중심으로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최근 왕후이의 핵심 주장인 당국가론은 야오양(姚洋)의 중성국가론을 수용하여 중국이라는 국가가 어느 특정 계급을 대표 한다기보다는 중국의 모든 계급의 이익을 대변해왔고 이것이 개혁개방의 성공의 조건이었다고 보는 저자의 해석은 약간 오해가 있는 듯하다. 저자를 비롯해 최근 몇 년간 여러 사람들에 의해 국가주의로의 함몰로 평가받고 있는 왕후이의 문제의 논문 “중국 굴기의 경험과 도전”(황해문화 2011년 여름호)을 읽어보면, 마치 야오양의 중성국가론을 수용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세세히 구절을 따져가며 읽어보면, 도리어 왕후이는 야오양의 중성국가론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야오양은 신좌파들과는 달리 케인즈주의나 자유주의에 친화적인 경제학자인데, 그의 중성국가론, 더 정확히는 ‘중성정부론(Disinterested government)’은 말 그대로 중국의 개혁개방 성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국가가 어떤 이익집단의 편도 들지 않고 중국 전체의 장기적 이익을 위해 실용적인 정책(즉 시장화와 자유화)을 채택한 것으로 보는 입장으로 굳이 스펙트럼을 구분하자면 발전국가론과 자유주의적 해석의 절충적 입장으로 볼 수 있다. 이후 중국이 나갈 방향에 대해서도 이 입장에 근거해 국가의 지나친 개입도 완전한 방만도 아닌 실용적인 선택을 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왕후이의 정당-국가화 테제는 1960년대 이후 전세계적으로 공히 나타나는 현상으로 정당들이 각자의 정치적 가치를 상실하고 국가기구로 함몰되어 결국 민의를 대변하지 못하고 국가의 동원기구로 전락하는 현상(대의정치의 한계), 즉 “정당-국가 체제”에서 “국가-정당 체제”로 변화하고 있는 탈정치화를 비판하는 입장이다. 그래서 당연히 밑으로부터의 목소리가 커져야 하고 이론 및 노선 투쟁이 재점화되어야 하며, 이를 보장할 수 있는 여러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맥락을 따라 중국의 경험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기층 인민들의 목소리였고 이를 반영한 당 내부의 이론 및 노선 투쟁이었다고 주장한다는 측면에서 국가의 중립성을 먼저 전제하고 이익집단으로부터 거리두기를 강조하는 야오양의 중성국가 논의와 민간의 비판역량이 국가의 중립성을 견인한다는 왕후이의 논의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왕후이는 야오양의 논의를 평가하면서, “국가의 중립성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은 힘들과 그 상호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간주하고 있고, 특히 “30여 년의 개혁을 지나오면서 시장화개혁의 추진자로서 국가기구는 시장의 활동에 매우 깊게 묻혀들어 갔기” 때문에 “‘중성국가’의 개념으로 오늘날의 국가를 설명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왕후이의 분석은 그가 이전부터 수용하던 칼 폴라니(Karl Polanyi)의 이론과도 일맥상통한다. 그가 수용한 폴라니적 국가관(이중적 국가: 시장화를 사회에 강제하는 것도 국가이지만, 한편으로 복지정책 등 사회의 보호운동의 주체도 국가라는 역설)의 입장에서 왕후이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행하는 국가는 비판하고, 복지정책 등을 입안해서 실시하는 국가는 긍정하는 것은 이론적 입장에서 오히려 일관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저자도 인용하고 있듯이 첸리췬(錢理群)의 평가처럼 왕후이의 ‘정당-국가화’ 테제가 현재의 중국 공산당과 국가기구가 일체화된 ‘당-국가 체제’에서 자꾸 중국 공산당을 분리시켜 일당 독재라는 전체주의적 성격을 은폐하고 있다는 점은 경청해야 한다. 실제로 왕후이를 비롯한 신좌파들이 기층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구체적 제도를 제기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이 비판은 그들에게 뼈아픈 일침이다. 다만 그들이 ‘국가’를 중심에 두고 사고한다기 보다는 여전히 ‘사회’와 ‘인민’을 위해 ‘국가’를 어떻게 구상할 것인가가 문제의식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이를 ‘국가주의’라고만 단정짓고 일반화하기에는 성급해 보인다.
- 이념 중심의 분류 구도를 넘어 새로운 모색이 필요하다.
한편, 책에서 중국 지식인들을 유파별(신좌파, 자유주의파, 문화보수주의파, 사회민주주의파, 구좌파, 대중민족주의파, 신민주주의론파)로 분류하고 그 성향을 표로 정리한 지식인 지도(70~73p)를 살펴보면, 약간의 오류들이 발견된다.
우선 구좌파, 즉 마오주의파로 분류된 지식인들의 명단에 경제학자 랑셴핑(郞咸平)이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것은 오류라고 보인다. 랑셴핑이 2000년대들어 사기업들이 국유기업들을 인수, 합병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국유자산 유실 문제를 제기하고, 서민들의 입장에서 경제문제를 해설하고 최근 중국 경제 경착륙 문제를 제기하는 등의 활발한 대중 활동을 벌이자 구좌파들이 그에게 열렬한 지지를 표시한 것은 맞지만, 정작 랑셴핑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마오주의와는 거리가 멀고 주류경제학적 방법론에 입각한 분석을 내놓고 있다. 굳이 한국의 경제학자에 비유하라면 최근의 활동이나 분석 방법, 서민들을 우선시하되 경제나 부동산의 경착륙을 제기한다는 점 등이 유사하다는 측면에서 김광수나 선대인에 비유할 수 있는 지식인을 마오주의파로 분류하는 것은 좀 어색하다.
그리고 정치학자인 판웨이(潘維)를 신좌파로 분류한 것도 잘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판웨이가 중국모델론을 제기하고 서구의 의회민주주의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왕샤오광 등의 주장과 비슷하다는 측면이 있을 수 있으나 신좌파들의 국가론이 서구의 대의제 민주주의의 형태는 아니더라도 대중참여와 직접민주를 강조하는 것이 특징인데 비해 판웨이의 ‘자문형 법치 국가론’은 그 중심이 ‘민주’보다는 법치와 안정적 관리에 있으며 중국의 전통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학자들 사이에서는 신좌파가 아니라 신보수주의(책의 분류에 따르면 문화보수주의)로 분류된다.
저자가 이 책에서 바람직한 비판적 지식인상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첸리췬 역시 간단하게 자유주의로 분류하기에는 그 사상적 자원이 매우 복잡하다. 첸리췬 자신은 스스로 어느 유파에도 분류되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으며, 굳이 자신을 분류하자면 아나키스트에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평한 적도 있고 마오주의에서도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하기도 한다. 자신을 신좌파들은 자유주의자라고 부르고 자유주의자들은 신좌파로 부른다며 그래서 별명이 ‘배트맨’이라고 불린다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그가 역사 속에서 발굴해내는 사상적 자원들이 국가 사회주의 안에서 권위주의적 체제를 좌파적으로 비판하는 민간사상가들이라는 점에서 굳이 첸리췬을 분류하자면 이런 지식인을 호칭하는 ‘이단적 사회주의자’라고 평하던가 아니면 본인의 표현대로 ‘민주적 사회주의자’나 저자도 인용하는 표현인 ‘루쉰좌파’라고도 분류해볼 수 있을 듯하다. 이런 그를 서구의 민주제도를 그대로 중국에 도입할 것을 바라는 류샤오보(劉曉波)나 하이에크와 미제스를 그대로 수용하는 신자유주의자인 류쥔닝(劉軍寧)과 같은 입장으로 분류하는 것은 어색하다. 류샤오보는 중국 공산당을 비판하다가 막대기를 너무 구부린 나머지 미국이라는 정의로운 국가가 무력을 개입해서라도 중국을 바꿔놓기를 바라는 입장이며, 그래서 이라크 전쟁도 응원하고 지지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첸리췬은 최근 왕후이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개진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류샤오보나 류쥔닝보다는 왕후이와 사상적으로 훨씬 가까워보인다.
이 뿐만 아니라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중국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지식인들인 원톄쥔(溫鐵軍)이나 쑨꺼(孫歌), 리쩌허우(李澤厚) 등은 어느 유파에도 배속될 수 없으므로 분류에서 빼놓았다고 했는데, 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국 지식인들을 좌/우, 보편/특수, 국가/시장, 전통/국제, 독립/관방 등의 이분법적인 이념적 성향으로 분류하는 것은 한편에서는 대립구도를 선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이들의 복잡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한다는 단점도 존재한다. 물론 이러한 분류방식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고, 저자가 책 곳곳에서 지식인들의 분화과정과 쟁점들을 자세히 언급하고 서술해주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분류방식을 책의 단점으로 지적할 수는 없지만, 이념적 분류와는 별개로 여러 쟁점에 따른 입장의 차이와 이 지식인들이 각각의 사회세력들, 특히 기층 인민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보여줄 수 있는 분류가 보완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중국연구’와 ‘중국비판’ 뿐만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연대’를 모색하자
저자는 한국의 중국학계 및 대중들에게 중국 숭상(숭중)과 중국 혐오(혐중)를 넘어 중국 연구와 중국 비판을 제언하고 있다. 하지만 서평자의 판단으로는 학계는 물론이고 일반 대중들의 시선으로 넘어가면 한국에 ‘숭중’의 시각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에게 지배적인 중국 담론은 여전히 냉전의 시각을 벗어나지 못하거나 중국의 경제적 부상이 한국 경제에 위협이 된다는 ‘중국위협론’과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이 우리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줄 것이라는 ‘중국기회론’이다. 물론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와 글로벌 헤게모니의 교체기라는 문제제기 속에서 중국의 부상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론’들이 새롭게 등장하고는 있지만 이 담론이 적극적으로 중국을 긍정하고 있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조금 더 지구적인 차원에서 얘기해보자면 사회과학계에서 중국모델론 뿐만 아니라 이러한 동아시아론들은 중국 내부에서 먼저 제기된 것이 아니라 일부 서구 좌파들에게서 시작된 것이 중국에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68혁명의 시기 학문적 성숙기를 거친 학자들에게는 여전히 마오의 혁명론과 제3세계론의 흔적들이 느껴지고, 이것이 한계에 달한 신자유주의와 미국 제국주의와 겹치면서 기존과는 다른 질서에 대한 기대들이 중국에 투사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마오 시기 중국이 가졌던 해방적 전망을 넘어서서 과거 중국의 경제와 정치시스템(예를 들어 조공시스템) 속에서도 서구의 근대적 질서와는 다른 점들을 찾아내려고 했다.
이들의 인식 속에서 유럽은 내부에선 대등한 국제관계를 형성했으나 비서구 사회는 식민지배하며 철저하게 약탈하고 착취했던 위선적인 체제이다. 반면 중원 중심의 조공시스템은 중국 헤게모니 아래에서 철저한 위계에 입각해 있지만 내치에서는 내재적 자율성이 존중되는 독립적 정치체였고, 경제 문제에서도 착취관계가 아닌 재분배적(혹은 상호적) 교환시스템으로 인식되며 그에 따라 지역의 평화와 안정이 가능했던 시스템으로 여겨진다. 여기에 중국의 학자들이 국내 정치경제 모델의 재구성을 넘어 국제정치적인 모색을 시도하면서 위와 같은 전통의 재해석들이 좀 더 힘을 받고 있는 그런 양상으로 보인다. ‘화평굴기론’이라던가 ‘책임있는 강대국론’ 등의 공식담론도 포함해서 중국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부상은 주변국들에게 위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간에 이득이 되는 그런 관계라고 역설한다.
이런 학문적 시도들이 한편으로는 흥미롭고 관심이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불편한 것이 사실이다. 미국 제국주의와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의 각이 너무 중국에 대한 희망적 예단(wishful thinking)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심이 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중국도 또 다른 제국주의 국가에 다름아니라는 현실주의에 입각한 확언도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이에 대한 판단이 더 힘든 것이 중국 내부에서도 여전히 다양한 길을 놓고 탐색 중이고 말 그대로 “돌다리를 두드려가며 강을 건너는(摸著石頭過河)” 중이며 우리가 잘 모르는 현장에서 또 새로운 실험과 정책적 시도들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중국론인가”에 대해서 확답을 내리기보다 중국에서 새로운 대안적 근대를 모색 중인 지식인들과 활동가들의 시도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로서는 섣불리 중국이 가는 길을 단면에서 바라보고 비난하거나 찬양하기 보다는 대안적 실험에 관심을 기울이고 응원하고, 패권과 권력의 길을 넘보는 것에는 단호히 비판하는 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학계의 논의를 넘어 기층으로부터의 연대를 통해 우리와 중국이 서로의 참조점이 되고 있다는 사실들을 더 많이 발굴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리영희라는 비판적 중국연구의 프리즘을 통해 중국의 ‘하방’이라는 역사적 경험이 80년대 한국의 노학연대나 현장진출로 이어졌고, 또 이제는 [전태일 평전]을 비롯해 한국의 노동운동 역사를 담은 책들이 중국어로 번역되어 중국 노동운동가들과 현장 노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중국의 대표적인 농민공 활동가인 쑨헝(孫恒)의 애창곡은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고 한다. 21세기 생산과 금융이 지구화된 시대에 비판적 중국연구란 객관적인 관점에서의 중국연구와 비판을 넘어 서로의 연대의 자원들을 적극 발견하고 지원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