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는 ‘주역(周易)‘에 대하여 공부하기로 합니다. 앞으로 연재상으로는 여러 회 강의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고전강독 강의 전체 분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몇 번의 강의로는 주역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나도 무엇부터 강의해야 하나 매우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주역을 60년 동안 계속 연구하고 있는 분도 있습니다. 64괘의 괘사만 읽으려 하더라도 1년으로는 부족합니다. 몇 회의 강의로 주역을 읽으려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강의는 여러분과 합의한 바와 같이 역시 ‘주역의 관계론’에 초점을 두게 됩니다.
주역은 동양적 사고의 가장 심층에 놓여 있는 기본적 사고양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바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역에 담겨 있는 사상이란 말하자면 수 천년 수 만년을 살아오면서 경험한 것을 정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기간에 걸친 수많은 경험의 누적입니다. 그 반복적 경험의 누적 속에서 발견한 법칙성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역을 역경(易經)이라 하여 유가경전(儒家經傳)으로 한정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왕필(王弼)도 주역과 노자를 회통(會通)하려고 하였습니다. 이 문제는 다시 거론하기로 하겠습니다만 주역은 동양사상의 이해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주역은 쉽게 이야기해서 점치는 책입니다. 점쳤던 결과를 기록해 둔 책이라 해도 좋습니다. 여러분 중에 점을 쳐 본 사람은 많겠지만 주역 점을 쳐 본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주역을 읽어 본 사람은 없으리라고 짐작됩니다. 주역은 점치는 책입니다.
이건 여담입니다만 나는 점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점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약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스스로를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이러한 사람을 의지가 박약한 사람이라고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면 된다’는 류의 의기(意氣) 방자(放恣)한 사람에 비하면 훨씬 좋은 사람이지요.
겸손한 사람이며 ‘나 자신을 아는 사람’이며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실은 강한 사람인지도 모르지만 스스로 약한 사람으로 느끼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약한 사람은 대체로 선량한 사람입니다. 약하기 때문에 선량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선량하기 때문에 약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단언할 수 없지만 선량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선량하나 무력한 사람’이 대개는 부정적 의미로 쓰여집니다만 세상에는 반면(半面)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반면(半面)이란 모순의 반대측면을 이루는 것으로 반면(半面)이면서 동시에 반면(反面)이기도 합니다.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일면입니다. 본질을 구성하는 일면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약함이 선량함의 반면일 수 있습니다. 본론에서 빗나간 이야기였습니다만 주역이 점치는 책이고 점치는 마음을 우리는 비과학적이라고 비하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고 있는 정직함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귀신은 있는가? 손 한 번 들어보겠습니까? 그 보세요. 여러분 중에도 귀신이 있다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저도 귀신을 만나거나 확인한 적은 없지만 귀신에 대해서는 단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가는 동안에 문득 문득 귀신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얼마 전이었습니다. 밤늦게 연구실을 나와서 내가 마지막으로 나오는 참이었기 때문에 복도에 불을 끄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습니다. 연구실이 6층이기 때문에 당연히 내려가는 버튼을 눌렀지요.
그런데 엘리베이터에 타고 문이 닫히자 여자 목소리로 멘트가 나왔어요. “올라갑니다.”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어요. 나는 내려가야 하는데 어떤 여자귀신이 나를 데리고 올라가려는가 보다고 순간적으로 생각했었지요.
아마 캄캄한 복도에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잘못 눌렀던 거지요. 올라가는 버튼을 눌렀었던 거지요. 당연히 내려가리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여자귀신이 나를 옥상으로 데리고 올라가려는가 보다는 생각을 순간적으로 하게 되지요.
귀신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식의 밑바탕에는 귀신에 대한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지요. 나는 인간에게 두려운 것, 즉 경외의 대상이 있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꼭 신이나 귀신이 아니더라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오만을 질타하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점을 치는 마음이 그런 겸손함으로 통하는 것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점치는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지요.
일반적으로 우리가 보통 점이라고 하는 것은 크게 상(相) 명(命) 점(占)으로 나눕니다.
상(相)은 관상(觀相) 수상(手相)과 같이 운명지어진 자신의 일생을 미리 보려는 것이며, 명(命)은 사주팔자(四柱八字)와 같이 자기가 타고난 천명, 운명을 읽으려는 것입니다.
상(相)과 명(命)이 이처럼 이미 결정된 운명을 미리 엿보려는 것임에 반하여 점(占)은 ‘선택(選擇)’과 ‘판단(判斷)’에 관한 것입니다. 이미 결정된 운명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판단이 어려울 때, 결정이 어려울 때에 찾는 것이 점(占)입니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인간의 지혜와 도리를 다 한 연후에 최후로 찾는 것이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경(書經) 홍범조(洪範條)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汝則有大疑 謀及乃心 謀及卿士 謀及庶人 謀及卜筮
汝則從 龜從筮從 卿士從 庶民從 是之謂大同
의난(疑難.의심스럽거나 어려운 상황)이 있을 경우 임금은 먼저 자기 자신에게 묻고, 그 다음 조정대신(朝廷大臣)에게 묻고 그 다음 서민(庶民)에게 묻는다 하였습니다.
그래도 의난이 풀리지 않고 판단할 수 없는 경우에 비로소 복서(卜筮)에 묻는다 즉 점을 친다고 하였습니다. 임금 자신을 비롯하여 조정대신 일반서민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모든 지혜를 다한 다음에 최후로 점을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점괘와 서민의 의견과 조정대신 그리고 임금의 뜻이 일치하는 경우를 대동(大同)이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대학제로 진행하는 대동제(大同祭)가 바로 여기서 연유하는 것이지요. 하나되자는 것이 대동제의 목적이지요.
주역은 판단의 준거(準據)입니다. 무수한 경험의 축적을 바탕으로 구성된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리를 기초로 미래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역은 귀납지(歸納知)이면서 동시에 연역지(演繹知)입니다. 주역이 점치는 책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경험의 누적으로부터 법칙을 이끌어내고 이 법칙으로부터 다시 구체적 사안을 판단하는 구조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가 관계론적 패러다임이라는 것을 주목하자는 것입니다.
고전강독 강의 전체 분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몇 번의 강의로는 주역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나도 무엇부터 강의해야 하나 매우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주역을 60년 동안 계속 연구하고 있는 분도 있습니다. 64괘의 괘사만 읽으려 하더라도 1년으로는 부족합니다. 몇 회의 강의로 주역을 읽으려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강의는 여러분과 합의한 바와 같이 역시 ‘주역의 관계론’에 초점을 두게 됩니다.
주역은 동양적 사고의 가장 심층에 놓여 있는 기본적 사고양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바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역에 담겨 있는 사상이란 말하자면 수 천년 수 만년을 살아오면서 경험한 것을 정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기간에 걸친 수많은 경험의 누적입니다. 그 반복적 경험의 누적 속에서 발견한 법칙성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역을 역경(易經)이라 하여 유가경전(儒家經傳)으로 한정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왕필(王弼)도 주역과 노자를 회통(會通)하려고 하였습니다. 이 문제는 다시 거론하기로 하겠습니다만 주역은 동양사상의 이해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주역은 쉽게 이야기해서 점치는 책입니다. 점쳤던 결과를 기록해 둔 책이라 해도 좋습니다. 여러분 중에 점을 쳐 본 사람은 많겠지만 주역 점을 쳐 본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주역을 읽어 본 사람은 없으리라고 짐작됩니다. 주역은 점치는 책입니다.
이건 여담입니다만 나는 점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점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약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스스로를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이러한 사람을 의지가 박약한 사람이라고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면 된다’는 류의 의기(意氣) 방자(放恣)한 사람에 비하면 훨씬 좋은 사람이지요.
겸손한 사람이며 ‘나 자신을 아는 사람’이며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실은 강한 사람인지도 모르지만 스스로 약한 사람으로 느끼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약한 사람은 대체로 선량한 사람입니다. 약하기 때문에 선량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선량하기 때문에 약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단언할 수 없지만 선량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선량하나 무력한 사람’이 대개는 부정적 의미로 쓰여집니다만 세상에는 반면(半面)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반면(半面)이란 모순의 반대측면을 이루는 것으로 반면(半面)이면서 동시에 반면(反面)이기도 합니다.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일면입니다. 본질을 구성하는 일면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약함이 선량함의 반면일 수 있습니다. 본론에서 빗나간 이야기였습니다만 주역이 점치는 책이고 점치는 마음을 우리는 비과학적이라고 비하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고 있는 정직함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귀신은 있는가? 손 한 번 들어보겠습니까? 그 보세요. 여러분 중에도 귀신이 있다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저도 귀신을 만나거나 확인한 적은 없지만 귀신에 대해서는 단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가는 동안에 문득 문득 귀신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얼마 전이었습니다. 밤늦게 연구실을 나와서 내가 마지막으로 나오는 참이었기 때문에 복도에 불을 끄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습니다. 연구실이 6층이기 때문에 당연히 내려가는 버튼을 눌렀지요.
그런데 엘리베이터에 타고 문이 닫히자 여자 목소리로 멘트가 나왔어요. “올라갑니다.”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어요. 나는 내려가야 하는데 어떤 여자귀신이 나를 데리고 올라가려는가 보다고 순간적으로 생각했었지요.
아마 캄캄한 복도에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잘못 눌렀던 거지요. 올라가는 버튼을 눌렀었던 거지요. 당연히 내려가리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여자귀신이 나를 옥상으로 데리고 올라가려는가 보다는 생각을 순간적으로 하게 되지요.
귀신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식의 밑바탕에는 귀신에 대한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지요. 나는 인간에게 두려운 것, 즉 경외의 대상이 있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꼭 신이나 귀신이 아니더라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오만을 질타하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점을 치는 마음이 그런 겸손함으로 통하는 것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점치는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지요.
일반적으로 우리가 보통 점이라고 하는 것은 크게 상(相) 명(命) 점(占)으로 나눕니다.
상(相)은 관상(觀相) 수상(手相)과 같이 운명지어진 자신의 일생을 미리 보려는 것이며, 명(命)은 사주팔자(四柱八字)와 같이 자기가 타고난 천명, 운명을 읽으려는 것입니다.
상(相)과 명(命)이 이처럼 이미 결정된 운명을 미리 엿보려는 것임에 반하여 점(占)은 ‘선택(選擇)’과 ‘판단(判斷)’에 관한 것입니다. 이미 결정된 운명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판단이 어려울 때, 결정이 어려울 때에 찾는 것이 점(占)입니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인간의 지혜와 도리를 다 한 연후에 최후로 찾는 것이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경(書經) 홍범조(洪範條)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汝則有大疑 謀及乃心 謀及卿士 謀及庶人 謀及卜筮
汝則從 龜從筮從 卿士從 庶民從 是之謂大同
의난(疑難.의심스럽거나 어려운 상황)이 있을 경우 임금은 먼저 자기 자신에게 묻고, 그 다음 조정대신(朝廷大臣)에게 묻고 그 다음 서민(庶民)에게 묻는다 하였습니다.
그래도 의난이 풀리지 않고 판단할 수 없는 경우에 비로소 복서(卜筮)에 묻는다 즉 점을 친다고 하였습니다. 임금 자신을 비롯하여 조정대신 일반서민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모든 지혜를 다한 다음에 최후로 점을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점괘와 서민의 의견과 조정대신 그리고 임금의 뜻이 일치하는 경우를 대동(大同)이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대학제로 진행하는 대동제(大同祭)가 바로 여기서 연유하는 것이지요. 하나되자는 것이 대동제의 목적이지요.
주역은 판단의 준거(準據)입니다. 무수한 경험의 축적을 바탕으로 구성된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리를 기초로 미래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역은 귀납지(歸納知)이면서 동시에 연역지(演繹知)입니다. 주역이 점치는 책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경험의 누적으로부터 법칙을 이끌어내고 이 법칙으로부터 다시 구체적 사안을 판단하는 구조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가 관계론적 패러다임이라는 것을 주목하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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