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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28일 목요일

사마천의 사기에 나타나는 리더십

5000년 중국사에서 리더십을 캔다

25호(2009.01.15) / 김영수필자 소개  



역사 속에서 참된 리더십을 통찰한다
새 정권이 출범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는데도 통치자의 리더십이 크게 손상됐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최고경영자(CEO) 리더십과 정치 리더십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느니, 애당초 기대할 수 없는 리더십을 바란 결과라느니 이런저런 진단이 나오고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시원스러운 답은 없다. 다만 리더의 자질과 리더십에 대해 본질적인 성찰이 필요하다는 씁쓸한 결론을 건졌을 뿐이다.
그렇다. 리더십을 둘러싼 숱한 논의와 진단에 해답과 정답은 없다. 아니 있을 수 없다. 리더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생명체 가운데 가장 복합적이고 복잡한 동물인 인간의 행위를 말이나 글로 딱히 규정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더욱이 다분히 가식적인 리더의 행위의 결과라 할 수 있는 리더십의 정답을 찾는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단지 가장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리더와 리더십을 찾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정답은 없지만 모범 답안은 가능하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모범이 될 만한 답안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 당연히 지나온 인간의 삶의 자취, 즉 역사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범 답안이라는 것도 찾는다고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찾으려는 사람의 인문적 소양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최근 떠오르고 있는 이른바 ‘인문 경영’의 핵심도 여기에 있다. 동서양 수천 년 역사에 대한 기본 지식은 물론 역사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직관력을 갖추어야만 우리는 역사 속에서 참된 리더와 리더십을 발견하고 그 본질을 통찰할 수 있다.
어쩌면 모범 답안을 충실하게 찾아나가는 과정 자체가 리더십을 기르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과거를 돌아본다는 행위가 곧 성찰의 행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성찰할 수 있는 리더야말로 자신의 현재를 직시하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리더다. 역사는 ‘지난 일(과거)을 돌아봄으로써(현재) 다가 올 일(미래)을 생각하는’ 가장 고차원의 인간 행위이기 때문이다.



가장 못난 리더는 백성과 다툰다
26호(2009.02.01) / 김영수필자 소개 

요순(堯舜) 시대
사마천의 ‘사기’는 첫 페이지부터 리더와 리더십에 관한 논의로 시작된다. ‘사기’의 첫 권은 <오제본기>다. 오제(五帝)는 전설 속의 다섯 제왕을 말한다. 전설 속 제왕들이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사실 여부를 놓고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첫 권 ‘오제본기’의 요점은 “백성들이 바라는 이상적 리더상은 어떤 모습인가”로 귀착된다. 사마천은 힘 없고 가진 것 없는 백성들의 간절한 염원을 ‘사기’ 첫 권에 고스란히 반영했다. ‘사기’를 감히 리더와 리더십의 보물 창고라 부를 수 있는 이유도 사마천이 제시하는 리더의 모습과 리더십이 지금 우리의 문제와 절박하게 닿아 있기 때문이다.
<오제본기>는 이른바 ‘요·순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요·순 시대는 흔히 태평성세를 대변하는 용어이며, 요·순은 가장 바람직한 리더의 대명사로 쓰인다. 요·순으로 대표되는 <오제본기> 다섯 리더들의 모습과 리더십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이들의 모습을 통해 지금 우리 사회 리더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되돌아보자.
좋은 리더와 나쁜 리더
오제본기’에 등장하는 다섯 리더는 황제, 전욱, 제곡, 요, 순이다. 이들은 약 7대에 걸친 혈연관계에 있는 것으로 나온다. 사마천은 이들 다섯 리더들의 특징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들의 리더십을 표로 만들어 보았다.(표 참조)

오제의 리더십에서 일단 주목한 것은 기록의 양이 상대적으로 적은 전욱을 제외한 나머지 4명의 제왕들에게 공통적으로 ‘덕(德)’이라는 리더십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그 밖의 항목들은 추상적인 개념부터 상당히 구체적인 것까지 다양하다. 이 리더십 항목들은 오늘날 리더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들이다. 사마천은 이런 리더십을 갖춘 리더나 이를 실천하려는 리더를 좋은 리더, 이상적인 리더로 봤다.



4000년 전 펼쳐진 리더십 대토론

27호(2009.02.15) / 김영수필자 소개  



중국 전설시대의 이상적 통치자로 꼽히는 순(舜) 임금은 “나와 가까운 사람이 아닌 덕과 능력을 갖춘 사람에게 자리를 물려준다”는 ‘선양(禪讓)’을 통해 요(堯) 임금으로부터 천자 자리를 물려받았다. 홀아비이자 민간에서 발탁된 순 임금은 오랜 시간 통치자로서의 자질을 갖추는 훈련을 거친 끝에 추대되었다.
제위에 오른 순은 요 임금 때 기용됐지만 적당한 업무를 배정받지 못하고 있던 기라성 같은 인재들에게 각자의 특기에 맞는 업무를 분배했다. 또 자신의 집무실 문을 모두 개방해 민심과 여론을 수렴하는 열린 통치를 실천에 옮겼다. ‘사기’의 첫 권 ‘오제본기’에 따르면 당시 순 임금이 업무를 분장한 인재가 22명이었다. 특히 용(龍)이란 인재를 여론을 수렴하는 ‘납언(納言)’에 임명하면서 “용! 나는 선량한 사람을 해치는 말과 세상 이치를 파괴하는 행위를 싫어하오. 그런 언행은 내 백성들을 동요시키기 때문이오. 내 그대를 납언에 임명하니 밤낮으로 나의 명령을 전달하고 백성의 의견을 수렴하여 내가 오로지 신의(信義)를 얻을 수 있도록 해주오”라고 했다. 소통의 리더십과 민심을 수렴하는 행위는 곧 리더의 신의와 직결된다는 점을 강조한 대목이다.
그런데 통치 후반기에 접어든 순 임금은 후계 문제를 놓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순을 보좌하면서 큰 실적을 낸 인재로는 아버지 곤의 뒤를 이어 치수사업을 맡아 전국적으로 명성을 쌓은 우(禹)를 비롯해 법을 담당한 고요(皐陶), 제사를 담당한 백이(伯夷) 등이 있었다. 말하자면 이들이 잠재적 후계자였다. 순 역시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리더 자리를 물려줄 생각이었다. 이를 위해 순은 몇 차례 조정 회의를 열어 리더십과 후계 문제에 대한 대토론을 시도했다. 사기 권2 ‘하본기’에 이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4000년前 고요(皐陶), 리더를 논하다

28호(2009.03.01) / 김영수필자 소개  



세계 최초의 리더십 이론가
4000년 전 순(舜) 임금이 치수사업을 성공시킨 우(禹)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자리에서 리더십과 팔로어십(followership)에 대해 날카로운 지적을 서슴지 않았던 고요(皐陶)는 세계 최초의 리더십 전문가라 할 수 있다. 순 임금이 신하의 팔로어십을 전제로 한 리더십을 거론하자 고요는 ‘진실한 리더십 없이는 팔로어십도 없다’는 말로 맞받아쳤다. 그러면서 그는 법도(法度)를 준수하고 현명한 판단력으로 비전과 이상을 제시하는 바람직한 리더상을 주문했다. 이는 오늘날 리더십 이론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참신하다. (DBR 27호 참조)
고요는 요·순 시대 인물로 구요(咎繇)라고도 전해진다. 순 임금 때 형정(刑政)을 주관하는 사(士, 사법부의 수장과 같은 자리)에 임명됐으며, 순을 계승한 우를 보좌하면서 큰 치적을 남겼다. 우는 고요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고요가 먼저 세상을 뜨는 바람에 이뤄지지 못했다. 오늘날 중국의 고(皐) 씨들은 모두 자신의 조상을 고요로 여기고 있다.
고요에 관한 기록은 중국 역사서의 시초로 불리는 ‘서(書)’(상서 또는 서경)의 첫 편 ‘우서(虞書)’ 제4 ‘고요모(皐陶謨)’가 원전이다. 사기(史記)의 ‘하본기’는 고요모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고요의 구덕(九德)론
고요는 리더가 갖춰야 할 자질로 ‘구덕(九德)’론을 제시한다. 구덕은 리더의 자질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모든 유형의 리더십을 정의할 정도로 논리가 정교하다.
먼저 구덕의 의미부터 살펴보자. 숫자 ‘9’는 동양 사회에서 더 이상 갈 데 없는 ‘극수(極數)’로, 완벽한 수를 의미한다. 정치적으로는 최고 통치자인 천자를 상징하는 숫자이기도 하다. 고대의 천자들이 아홉 개의 큰 세발솥, 즉 ‘구정(九鼎)’을 주조해 천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기물로 삼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폭정의 대명사 주 임금의 ‘남 탓’

32호(2009.05.01) / 김영수필자 소개  




‘사기’에는 실패한 리더의 대명사로 이른바 ‘걸주(桀紂)’로 알려진 폭군들이 기록돼 있다. ‘걸’은 중국사 최초의 왕조로 기록돼 있는 하(夏)나라의 마지막 왕으로, 백성들을 힘으로 억압하다 탕(湯) 임금에게 추방돼 죽은 폭군이다. ‘주’는 은(殷) 또는 상(商)나라의 마지막 왕이다. 두 사람은 각각 한 왕조의 제왕으로서 지고무상한 권력을 누렸지만, 그 권력을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고 백성을 괴롭히는 도구로만 사용해 결국 나라를 망쳤다. 특히 주 임금의 사례는 리더십의 변질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리더로서의 자질이 뛰어났던 주 임금
주 임금은 ‘폭정’의 대명사다. 백성들에게 지나친 세금을 부과하고 그 세금을 온갖 사치스러운 생활로 낭비했다. 이른바 ‘주지육림(酒池肉林)’은 바로 그의 방탕한 생활을 대변하는 성어다. 또 자신에 대해 비판하거나 등을 돌리는 백성과 제후들을 탄압하기 위해 불에 달군 쇠기둥 위를 걷게 하는 ‘포락(烙)’이라는 잔혹한 형벌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구후의 딸인 아내가 음탕한 짓을 싫어하자 화가 나서 그녀를 죽이고, 구후도 죽인 다음 그 시체로 포를 떠서 소금에 절일 정도였다.
그런데 ‘사기’의 기록(권3 ‘은본기’)에 따르면, 주 임금의 자질은 누구 못지않게 뛰어났다.
“주 임금은 타고난 바탕이 총명하고 말재주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일처리가 신속하며 힘이 남달라 맨손으로 맹수와 싸울 정도였다. 또한 지혜는 신하의 충고를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였고, 말재주는 자신의 허물을 교묘하게 감출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신하들에게 과시해 천하에 그 명성을 높이려 했으며, 다른 사람은 모두 자기만 못하다고 여겼다.”
주 임금의 자질은 사실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리더의 능력과 닮은 점이 많다. 총명하고, 일 잘하고, 사소한 실수 정도는 지식과 말로 얼마든지 감출 수 있으며, 자신의 능력을 주위에 알리는 데 능숙한 리더…. 전형적인 한국형 리더의 모습 아닌가? 리더의 이 같은 자질은 단점이라기보다는 장점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자질을 어떤 방향으로 무엇을 위해 발휘해나갈 것인가에 있다.



禹임금, 아버지의 실패 딛고 소통의 날개 달다

33호(2009.05.15) / 김영수필자 소개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夏)나라를 건국한 사람은 우(禹) 임금이다. 당시 우 임금은 해마다 홍수로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했던 황하(黃河)의 물길을 다스리는 치수 사업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그 결과 순(舜) 임금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하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우는 아버지인 곤(이 하던 치수 사업을 물려받았다. 곤은 치수에 실패한 죄로 우산(羽山)으로 추방됐다가 그곳에서 처형당했다. 곤의 죽음은 당시 요 임금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됐던 순의 정치적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말하자면 순이 잠재적 대권 경쟁자였던 곤을 치수 사업의 실패를 구실로 제거한 것이다. 게다가 순은 치수 사업의 다음 책임자로 다른 사람도 아닌 곤의 아들 우를 지명하고, 그에게 치수 사업을 계속 맡겨 자신의 감시 아래 두는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했다.
이렇듯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과 순의 정치적 견제 속에서 우는 장장 13년 넘게 집을 떠나 치수 사업에만 전념했다. 그는 13년 동안 3번 자기 집 앞을 지나면서도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결혼 4일 만에 집을 떠나는 바람에, 나중에 태어난 아들 계(啓)의 얼굴도 못 봤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다.
우는 치수 사업을 성공시켜야만 한다는 강박관념과 순의 극심한 정치적 견제 속에서도 리더로서의 자질을 키웠다. 마침내 순으로부터 대권을 물려받아 하 왕조를 건국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엄청난 인내심으로 자신의 리더십을 단련했다.
소통의 리더십을 체득하다
우는 아버지의 치수 사업을 재점검하면서 실패 원인을 찾았다. 아버지 곤은 물길을 제방으로 막아 넘치지 못하게 하는 ‘봉쇄’를 사업의 기조로 삼았다. 이것이 실패의 결정적 원인이었다. 제방을 제아무리 높고 튼튼하게 쌓아도 하늘에서 내리는 비의 양을 예측하지 못하면 언제까지고 홍수를 막을 수 없었다. 고심 끝에 우는 봉쇄가 아닌 ‘소통’의 방법을 택했다. 즉 큰 물줄기 사이로 작은 물줄기를 여러 갈래 만들어 물이 고루 흘러 나가도록 함으로써 황하의 홍수를 다스렸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德의 그물로 백성을 감싸 안다

34호(2009.06.01) / 김영수필자 소개  



사마천이 <사기>에서 일관되게 제시하는 이상적인 리더는 ‘덕(德)’을 갖춘 리더다. 사마천은 덕을 갖춘 리더의 자질로 다음 3가지를 추구했다.
①자현(自賢): 리더 자신의 유능한 자질과 능력
②구현(求賢): 유능한 인재를 갈망함
③포현(布賢): 리더와 리더가 발탁한 인재의 자질과 능력을 실천함
특히 세 번째 ‘포현’의 핵심은 백성들에게 널리 이익이 미치도록 하는 자질이다. ‘자현’과 ‘구현’은 별개가 아니라 상호작용하며 ‘포현’을 이끌어낸다. 이 3가지 리더의 자질은 리더십의 단계이고, 포현은 리더십의 완성 단계라 할 수 있다.
사실 리더십에 대한 모든 논의의 핵심은 유능한 인재를 기용하는 ‘용인(用人)’의 문제다. 인재를 발탁하는 리더의 자세가 곧 백성들에 대한 태도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에서 하(夏)나라에 이어 두 번째 왕조인 상(商) 왕조를 건립한 상탕(商湯)은 인재 기용에 대한 교훈을 주는 인물이다.
폭정의 왕조에 혁명을 일으키다
상탕은 하 왕조에서 상(또는 은[殷]) 종족을 이끌던 제후로, 하 왕조의 마지막 왕인 걸(桀)을 내쫓고 혁명에 성공했다. 그는 ‘나라의 최고 통치자인 천자(天子)는 하늘의 명을 받아 하늘을 대신해 인간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이므로 절대 바꿀 수 없다’는 개념인 ‘천명(天命)’을 바꿔 최초의 변혁을 이뤘다.
당시 이윤(伊尹)이 걸 임금의 폭정을 걱정하며 “지금 잘못을 바로잡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하자, 걸 임금은 “백성에게 군주는 하늘의 태양과 같다. 태양이 없어져야 나도 없어진다”며 일축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백성들은 일제히 “태양아, 빨리 없어져라. 우리도 너와 함께 망하련다” 하고 노래를 부르며 걸 임금의 오만함을 비꼬았다. 민심은 이미 걸에게서 떠나 있었다.
걸 임금은 갖가지 가혹한 형벌을 만들어 반항하거나 비판하는 사람들을 죽였다. 하루는 혹형을 지켜보던 걸이 대신 관용봉(關龍逢)에게 즐겁고 통쾌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관용봉이 “이 형벌은 마치 봄날에 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위험스럽기 짝이 없습니다”라하고 에둘러 비판하자, 걸은 “다른 사람의 위험만 눈에 보이고 네 자신의 위기는 안 보이지?”라며 즉각 그를 활활 타오르는 불더미 속으로 처넣어 죽였다. 관용봉은 중국 역사상 바른말을 하다 죽임을 당한 최초의 충직한 신하로 기록돼 있다.



리더가 되려면 먼저 자신을 알라

35호(2009.06.15) / 김영수필자 소개  



요리로 정치를 논한 이윤
성공한 리더의 뒤에는 특출한 참모가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춘추시대 환공(桓公)을 도와 제나라를 부국강병으로 이끌고, 환공을 최초의 패자(覇者)로 만들었던 관중(管仲)이다.
흥미롭게도 환공과 관중은 원래 원수지간이었다. 관중은 정쟁(政爭)의 와중에 활을 쏘아 환공을 암살하려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환공은 포숙(鮑叔)의 건의를 받아들여 지난날의 원한을 잊고 관중을 용서했으며, 그를 재상으로 발탁하기까지 했다. 제나라는 포숙의 사심 없는 양보와 환공의 통 큰 포용력, 관중의 재능이 합쳐짐으로써 제후국들을 호령하는 최강국이 될 수 있었다.
상(商)나라를 건국한 탕(湯) 임금은 역대 명군 반열에 오른 지도자다. 탕에게는 이윤(伊尹)이라는 뛰어난 참모가 있었다. 지난 호에서 잠깐 소개했듯이 탕이 무려 다섯 차례나 이윤을 찾아가 그를 발탁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것이 유명한 ‘오청이윤(五請伊尹)’이라는 고사다.
탕 임금과 이윤에 관한 설화는 이 밖에도 여러 가지가 전해진다. 이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이 ‘이윤부정(伊尹負鼎)’이다. 글자대로 풀이하자면 ‘이윤이 솥을 짊어졌다’는 뜻이다. 고대에는 다리가 3개 달린 세발솥을 ‘정(鼎)’이라 했는데, 이것은 고기 같은 음식을 삶는 조리 기구다. 솥을 짊어졌다는 말에서 이윤이 요리사 출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윤의 초상화는 대부분 그가 세발솥을 들고 있는 모습을 담았다.

설화에 따르면 이윤은 자신의 큰 뜻을 펼치게 해줄 지도자로 탕을 마음에 두었다. 그러나 좀처럼 탕을 만날 수가 없었다. 생각다 못한 그는 탕에게 접근하기 위해 요리 기구를 전부 싸 들고 탕의 아내가 될 유신씨(有莘氏)의 혼수품에 딸려가는 노예가 됐다(이윤은 유신 부락 출신이다).
이렇게 탕에게로 온 이윤은 일단 훌륭한 요리 솜씨로 탕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고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탕에게 요리법에 비유한 ‘치국의 도(治國之道)’를 이야기했다. 당시 이윤이 탕에게 들려준 나라 다스리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후덕한 유방, 7년만에 건달에서 황제로…

36호(2009.07.01) / 김영수필자 소개  



최근 우리 사회는 ‘제대로 된 리더 및 리더십의 부재’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 문제의 핵심은 ‘덕(德)’이라는 한 글자로 표현할 수 있다. 필자는 올해 초에도 이 코너에서 리더의 자질로 덕이 중요하다고 언급했다(동아비즈니스리뷰 26호 참조). 그때 덕이란 결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각박하지 않음’을 뜻한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의 리더들에게 가장 부족한 자질이 바로 덕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각박하지 않음’이란, 나와 내 편은 물론 너와 상대편을 받아들일 줄 아는 ‘포용’을 전제로 한다. 특별한 인격상의 하자가 없고 특정 분야에 전문성을 갖춘 능력 있는 인재라면, ‘내 사람’이 아니더라도 과감히 기용해 우대할 줄 알아야 ‘덕이 있는 리더’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다. 이것이 포용의 리더십이다. 포용의 리더십은 이념, 정파, 계층을 초월해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차원 높은 인간 행위이며,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절실한 덕목이기도 하다.
역사를 보면 각박하게 행동하고도 성공한 리더는 거의 없다. 반면 포용력을 가진 리더치고 실패한 리더 또한 거의 없다. 아주 단순해 보이는 이치지만 이를 행동으로 실천한 사람은 드문 편이다. 특히 권력을 장악한 다음, 한때 자신에게 반대하거나 맞섰던 정적에게 포용력을 발휘한 리더는 더욱 드물다.
바로 이 대목에서 리더의 자질론이 대두된다. 타고난 리더는 없다. 포용력은 리더가 자기 수양을 통해 기를 수 있는 후천적 자질이다. 역사상 성공한 리더로 꼽히는 두 사람의 사례를 통해 포용력이 리더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살펴보자.
한 고조의 논공행상
주색을 밝히며 건달 생활을 하다 얼떨결에 농민 봉기군의 우두머리가 되고, 그 후 불과 7년 만에 황제가 된 인물이 있다. 바로 한나라를 개국한 고조(高祖) 유방(劉邦)이다. 그는 역사상 리더들에게 가장 많은 영감을 준 인물로도 유명하다. ‘날건달’이 어떤 과정을 밟아 황제가 됐는지에 대한 연구는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유방은 5년에 걸친 항우(項羽)와의 초한쟁패에서 승리해 천하를 재통일했다. 그리고 자신을 보좌했던 공신들을 대상으로 논공행상을 하려 했으나, 뜻하지 않은 암초에 부딪혔다. 공신들이 저마다 자신의 공을 내세우며 자기가 더 높은 상을 받아야 한다고 아우성을 쳤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유방은 1년이 지나도록 논공행상을 하지 못했다. 유방에게 소극적으로 협조했거나, 한때 그를 반대하거나 배신한 경력을 가진 자들은 행여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안절부절못했다. “차라리 반역을 일으키는 쪽이 낫겠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武 임금도 쇼를 했다, 인재를 얻으려고…

37호(2009.07.15) / 김영수필자 소개  



3년을 기다리다
중국 역사상 두 번째 왕조인 상(商, 사기에는 은[殷]으로 기록돼 있음)은 약 550년 동안 지속됐다. 이 기간 동안 약 30명의 제왕들이 부침을 거듭했다. 상 왕조는 제20대 제왕인 반경(盤庚) 때 은(殷)으로 도읍을 옮기는 등 국정 전반에 변화를 줘 쇠약해가던 나라의 기운을 되살리고, 중흥을 위한 기반을 닦았다. 그러나 반경의 뒤를 이은 소신(小辛)과 소을(小乙)의 재위 시절에는 다시 국력이 쇠퇴했다. 그래서 죽은 반경을 그리워하는 노래까지 지어 불렀다고 한다.
이처럼 침체된 분위기에서 소을의 뒤를 이어 즉위한 임금이 무정(武丁)이었다. 무정은 왕조의 부흥에 강력한 의욕을 보였다. 국정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무정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었다. 몰락한 왕족 출신이라, 즉위하자마자 전권을 휘두르며 개혁에 나설 정치적 기반이 없었기 때문이다.

민간의 전설에 따르면, 무정은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궁정이 아닌 민간에서 생활했다. 소을이 죽은 뒤 마땅한 왕위 계승자가 없어 신하들이 수소문한 끝에 몰락한 왕족이었던 그를 찾아내 즉위시켰다. 그러니 무정에게는 왕실 내 정치적 기반은 물론, 궁중 일을 믿고 맡길 만한 측근도 전무했다. 무정은 무려 3년을 기다렸다. 하지만 마냥 기다리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기존 총재(재상)에게 정치를 맡기고, 자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국정 전반을 유심히 관찰했다.



주(周) 문왕의 ‘무서운 기다림’

38호(2009.08.01) / 김영수필자 소개 



주 임금의 폭정을 지켜보며 탄식하다
중국 역사상 두 번째 왕조인 상(商, 사기에는 은[殷]으로 기록돼 있음)의 마지막 임금 주(紂)는 포악한 통치자의 대명사로 불린다(동아비즈니스리뷰 32호 참조). 주 임금은 술과 놀이, 여자를 탐해 자제할 줄 몰랐다. 그는 자질이 뛰어난 통치자였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지나치게 믿고 자만에 빠져 타인의 충고에 귀를 닫았다. 백성에게는 과중한 세금을 매겨 자신의 사욕을 채웠다. 사구(沙丘)라는 곳으로 엄청난 규모의 악단을 부르고, 술로 연못을 채웠으며, 고기를 나무에 매달아 숲처럼 만들어놓고는 나체의 남녀들이 숨바꼭질 놀이를 하게 하면서 밤새 마시고 놀 정도였다. 폭정을 대변하는 ‘주지육림(酒池肉林)’이라는 고사성어가 바로 여기서 나왔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원망의 소리가 높아갔고 제후들은 등을 돌렸다. 그러자 주 임금은 ‘포락(烙)’이라는 혹형을 창안해냈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거나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잡아다가 불에 달군 시뻘건 쇠기둥 위를 걷게 했다. 쇠기둥 아래에는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불에 달궈진 쇠기둥 위를 어떻게 걷겠는가? 몇 걸음 내딛지 못하고 불속으로 떨어져 타 죽을 수밖에….





周 무왕, 넘치는 인재를 컨트롤하다

39호(2009.08.15) / 김영수필자 소개  



아버지 문왕이 닦아놓은 창업의 터전
지난 호(동아비즈니스리뷰 38호)에서 살펴봤던 무왕(武王)은 아버지 서백 창(문왕(文王)의 유업을 받아 상(사기에는 은[]으로 기록돼 있음)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창건했다. 무왕의 아버지 문왕은 유리성(里城)에 7년이나 구금되는 등 견딜 수 없는 상황을 극복해내는 인내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문왕은 안으로는 자신을 수양하고, 밖으로는 덕정을 베풀어 민심을 얻었다.
그는 인재를 제대로 대우할 줄 아는 리더였다. <사기> 제4 ‘주본기’에 따르면, ‘정오가 될 때까지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선비들을 만났다’고 한다. 이른바 ‘일중불가식이대사(日中不暇食以待士)’라는 유명한 고사다. 문왕은 조용히 선행을 실천했고, 제후들은 일이 생길 때마다 그에게 와서 공정한 판결을 부탁했다. 다음 일화는 그가 나라를 어떻게 다스렸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우()와 예(지역 사람들 사이에 다툼이 생겼다. 해결책이 나오지 않자 두 지역의 우두머리들은 문왕을 찾아가 중재를 부탁하기로 했다. 두 사람이 주나라 경계에 들어서서 처음 본 것은 농사짓는 주나라 사람들이 하나같이 밭과 밭 사이에 난 경계 지점의 땅을 서로에게 양보하는 모습이었다. 백성들은 또 연장자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는 풍속도 갖고 있었다. 이에 두 사람은 문왕을 만나봤자 자신들만 부끄러워진다며 서로 양보하고 되돌아갔다.”
문왕의 덕을 칭송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고,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 그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훗날 주나라 창건의 주역이 되는 강태공을 비롯해 태전, 굉요, 산의생, 육자, 신갑 대부 등이 문왕을 추종했다. 고죽국의 왕자들인 백이와 숙제는 왕 자리도 버린 채 그에게로 왔다.
무왕은 아버지 문왕이 닦아놓은 훌륭한 창업의 터전 위에서 유업을 잇도록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시대적 소명을 타고났다.

아버지의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기용하다
 아버지 문왕이 닦아놓은 기반은 무왕에게 더없이 훌륭한 밑천이었다. 하지만 달리 보면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특히 아버지 밑의 기라성 같은 인재들은 무왕을 주눅 들게 할 정도로 대단했다.
강태공(姜太公)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천하의 3분의 2가 주나라에 복종하게 만든’ 계책의 대부분이 그에게서 나왔다고 할 정도였다. 특히 그는 60세가 넘는 고령이 될 때까지 자신을 알아줄 리더를 기다린 내공 깊은 인재였다.
신갑 대부(辛甲大夫)는 상나라의 주 임금을 섬기면서 무려 75차례나 직간(直諫)을 올렸던 꼬장꼬장한 인물이었다. 소공(召公)이 그와 이야기를 나눠보고는 필요한 인재라고 판단해 문왕에게 소개했고, 문왕은 직접 뛰어나가 그를 맞아들였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문왕이 장자를 우대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라까지 팽개치고 달려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훗날 무왕이 상나라의 주 임금을 정벌하러 나서자 “아버지 문왕의 상도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신하가 임금을 치는 것은 도에 어긋난다”며 무왕의 말고삐를 잡았다. 주위에서 이들을 죽이려 하자 강태공이 말려 돌려보냈다.
이렇듯 문왕의 주변에는 무왕이 부담감을 느낄 정도로 특출한 인재들이 많았다. 하지만 무왕은 이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기용하고 우대하는 절제된 리더십을 발휘해 결국 상나라를 무너뜨리고 주나라를 건국했다.
  
균형과 견제의 리더십을 발휘하다
 무왕의 리더십에서 우선 주목할 점은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식견’이다. 이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능으로 보인다. 아버지 문왕의 위패를 앞세우고 군대를 동원해 상나라 정벌에 나선 그의 출정식에는 사전 통보도, 별다른 약속도 없었다. 그런데도 무려 800명의 제후가 맹진(盟津)에 몰려들어 상나라 토벌을 외쳤다. 그런데 돌연 무왕은 한발 물러서 “아직 천명(天命)을 알 수 없다”며 군대를 철수했다. 그는 아버지의 유업을 앞세워 여론을 탐색하면서 동시에 상나라 정벌에 따른 대의명분을 확보했고, 그로부터 2년을 더 기다린 끝에 드디어 상나라를 정벌했다.
무왕의 리더십은 상나라를 멸망시킨 후 더 빛나기 시작했다. 우선 그는 망한 상나라의 유민들을 안심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민심이 새로운 정권에 마음을 주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이전 왕조가 아무리 포악한 정권이었다 하더라도 다수의 민심에는 관성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무왕은 민심의 움직임에 작용하는 ‘관성의 법칙’을 체득하고 있었다. 그래서 상나라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주 임금의 아들 무경(武庚녹보(祿父)를 죽이지 않고 남은 유민들을 관리하는 자리에 앉혔다. 이와 함께 상나라 왕족이었던 기자(箕子)를 석방하고, 어질고 유능한 인재였지만 주 임금에게 박해받고 죽었던 상용(商容)의 마을을 표창했다. 또 주 임금에 의해 처참하게 죽은 비간(比干)의 무덤을 돌보게 하여 남은 상나라 유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권력보다 봉사를 택한 周公의 리더십

40호(2009.09.01) / 김영수필자 소개  



형보다 뛰어난 아우
기원전 11세기에 상(商)나라를 멸망시키고 주(周)나라를 건국한 무왕(武王)은 기라성 같은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기용함과 더불어 적절히 견제함으로써 주나라의 기반을 닦아나갔다. 무왕을 보좌한 인재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존재는 무왕의 친동생 주공(周公)이었다. 주공은 무왕을 도와 상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紂) 임금을 토벌해 주나라 건립에 공을 세운 개국공신이기도 하다.
무왕이 죽고 어린 성왕(成王)이 뒤를 잇자 주공은 조카를 도와 국정을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주공은 상나라의 후예인 무경(武庚)이 일으킨 반란과 자신의 섭정에 불만을 품은 삼감(三監)의 반발 등을 진압해 위기에 처한 주나라를 살리고 권력 기반을 단단히 다지는 데 막강한 역할을 해냈다.
주공은 ‘주나라의 예’ 또는 ‘주공의 예’라고 불리는 주례(周禮)로 대변되는 예악(禮樂)을 제정해 나라를 떠받치는 기둥으로 삼았다. 그는 또 역사상 가장 중국적인 제도로 평가받는 ‘봉건제’라는 통치 질서를 창안한 주인공이었다. 예악과 봉건은 이후 중국의 모든 왕조를 지탱하는 기본 질서로서 수천 년 동안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공자(孔子)는 이런 주공을 꿈속에서조차 사모할 정도였고, 유가에서는 주공을 성인으로 떠받들었다. 주공은 형님인 무왕이 일찍 세상을 뜬 탓에 자신이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책임을 떠안게 됐다. 동시에 이 때문에 평생 주변으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받으며 살아야 했다.
주변의 의심과 반발에 강온책으로 대응
어린 조카인 성왕이 즉위하자 주공은 선왕들에게 고하는 의식도 생략한 채 즉각 섭정(攝政)이 되어 대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어린 왕의 즉위로 민심이 흩어지고 이민족이 침입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주공의 친형인 관숙(管叔)과 친동생인 채숙(蔡叔)이 멸망한 상나라 유민들을 이끌고 있던 무경과 결탁해 ‘주공이 장차 성왕을 해치고 왕위에 오를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주공의 섭정을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충고를 외면한 周 여왕의 몰락
42호(2009.10.01) / 김영수필자 소개  



입에 쓴 좋은 약
“좋은 약은 흔히 입에 쓰다. 그러나 현명한 자는 그것을 먹으라고 권한다. 그래야 병에 좋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한비자> ‘외저설’ 좌상
충고는 좋은 약과 같아 듣기에는 거슬리나 행동에는 유익하다. 충고는 자신의 부족한 점을 발견하게 해주므로 허심탄회하게 경청하면 많은 도움이 된다. 리더라면 특히 그렇다. 타인의 충고를 수용하는지 여부는 리더의 포용력과 리더십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역사상 충언, 직언, 충고를 듣지 않거나 무시하다 낭패를 본 리더는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반면 마음을 열고 충고를 흔쾌히 받아들인 리더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적다. 귀에 거슬리는 충고를 받아들이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말이다. 하지만 충고를 잘 받아들인 리더만이 성공했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중국 상()나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주()는 충신 비간(比干)이 나라의 멸망을 걱정하며 목숨을 걸고 직언하자 “성인의 심장에는 구멍이 7개나 있다고 들었다”면서 진짜인지 보겠다며 비간의 심장을 도려냈다. 결국 주는 주()나라 무왕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불에 뛰어들어 자결하고 상나라는 망국의 운명을 맞이했다.
춘추시대 오()나라의 충신 오자서(伍子胥)는 오 왕 부차(夫差)에게 여러 차례 월()나라의 야심을 경계하라고 충고했다. 이전의 승리에 도취돼 있던 부차는 간신 백비의 이간질과 주색에 빠져 오자서의 충고를 무시한 것은 물론 그에게 자결을 강요했다. 그 결과 20년 동안 절치부심 재기한 월나라의 공격을 받아 오나라는 망하고 부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주왕도, 부차도 모두 지략을 겸비한 대단한 리더들이었다. 이들은 출중한 능력으로 나라를 강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끝내는 망국의 화를 면치 못했다. 위기의 조짐을 간파한 충직한 신하들의 충고와 백성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탄압했기 때문이다. 리더십에서 충고를 받아들이는 열린 가슴과 포용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들이다.
충고를 외면하고 언론을 탄압한 여왕
서주(西周왕조의 제10대 왕이었던 여왕()은 기원전 9세기 무렵 30년 동안 왕위를 지키면서 나라를 이끌었다. 그러나 자신이 총애하는 소인배를 기용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몰두하다 결국은 나라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대부 예량부(芮良夫)는 일찌감치 이런 위기 상황을 예견하고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왕실이 쇠약해지고 있습니다. 영이공은 이익을 독점하는 데만 관심이 있고 닥쳐올 큰 재앙은 모릅니다. 무릇 이익이란 만물과 천지자연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독점하면 그 피해가 커집니다. 천지만물은 모든 사람들이 같이 나누어 써야 하거늘 어찌 독점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초래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큰 재앙에 대비할 수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왕을 이끌면 왕이 오래 자리를 지킬 수 있겠습니까? 무릇 왕이라는 사람은 이익을 개발해 위아래로 공평하게 나눠주어야 합니다. 신과 인간, 그리고 만물이 모두 알맞게 이익을 얻게 하고, 행여 원망이 있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중략) 지금 왕께서 이익을 혼자 독차지하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입니까? 필부가 이익을 독차지해도 도적이라 부르거늘, 왕이 그렇게 하면 왕을 따르는 사람이 적어집니다. 영이공을 기용하시면 틀림없이 낭패를 볼 것입니다.”
예량부의 충고는 간곡하고 현실을 직시한 말이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충정에서 우러나온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여왕은 듣지 않고 끝내 영이공(榮夷公)을 경사(卿士)로 중용해 정권을 장악하게 했다. 영이공이라는 소인배를 최측근으로 앉힌 여왕의 행동은 시간이 흐를수록 포악해지고 교만해졌다. 이에 나라 사람들이 왕을 비방하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를 간파한 소공(召公)은 “백성들이 그런 통치를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그러자 여왕은 버럭 화를 내며 이웃 위()나라 무당을 불러다 비방하는 자들을 감시하게 하여 보고가 올라오면 죽였다. 비방하는 사람은 줄어들었고, 제후들은 조회하러 오지 않았다. 이에 고무된 여왕이 더욱 엄하게 단속하자, 사람들은 감히 말은 못하고 길에서 만나면 눈으로 서로의 마음과 뜻을 나눴다. 여기서 저 유명한 ‘도로이목(道路以目)’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 여왕은 소공을 불러다 비방하는 자들의 입을 완전히 막았다며 의기양양해 했다. 그러자 소공은 다시 간곡히 충고했다. 이 대목은 역사상 신하가 통치자에게 올린 가장 유명한 충언의 하나로 기록될 만한 명문이다.
“그것은 말을 못하게 막은 것입니다.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물을 막는 것보다 더 심각합니다. 막힌 물이 터지면 피해가 엄청난 것처럼 백성들 또한 이와 같습니다. 물을 다스리는 자는 물길을 터주고,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말을 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천자가 정무를 처리하면서 공경과 일반 관원들에게 시를 써서 내게 하고, 악관에게는 노래를 지어 올리게 하고, 사관에게는 앞 시대의 정치를 기록한 사서를 바치게 하고, 악사에게는 잠언을 올리게 하며, 장님에게는 낭송하게 하고, 눈먼 자에게는 음악 없는 시를 읊게 하는 것입니다. 백관들은 솔직하게 충고하고, 백성들은 간접적으로 여론을 전달하고, 가까이 있는 시종들은 간언을 살피는 데 힘을 다하고, 종친은 왕의 잘못을 살펴 보완해주고, 악사와 사관은 음악과 역사로 천자를 바르게 이끌며, 원로대신들은 이런 것들을 가려내 종합합니다. 그런 다음 왕이 이를 참작하면 정치는 어긋나지 않고 잘 실행되는 것입니다.



혁신파 周 선왕도 자만심엔 졌다

44호(2009.11.01) / 김영수필자 소개  



밤새 집무실 앞을 밝히는 화톳불
<시경> ‘소아’ 편에 ‘정료(庭燎)’라는 제목의 시가 나온다.
벌써 날이 샜는가, 아직 한밤중인데
뜰에서 화톳불이 활활 타오르네
제후들 조정에 드는지
말방울 소리 달랑달랑
벌써 날이 샜는가,
아직 날이 새려면 멀었는데
뜰에는 화톳불이 여전히 타고 있네
제후들 조정에 드는지
말방울 소리 달랑달랑
벌써 날이 샜는가,
이제 막 날이 새려고 하는데
뜰의 화톳불은 깜박깜박
제후들 조정에 드는지 깃발이 보이네
이 시는 천신만고 끝에 왕으로 옹립돼 주(周)나라 왕실을 재건한 선왕(宣王)을 칭송한 노래다. 백성의 언론을 통제하고 충직한 신하들의 충고를 외면하다 결국 반란군에게 쫓겨나 외지를 전전하다 쓸쓸하게 죽은 주나라 여왕(동아비즈니스리뷰 42호 참조)의 아들이 바로 선왕이다.
시인은 밤새 나랏일을 걱정하느라 잠 못 이루는 선왕의 고뇌에 찬 모습을 뜰 앞에 밝혀놓은 화톳불이 점점 꺼져가는 모습에 투영했다. 선왕은 나라 안팎의 일 때문에 신하들이 모두 퇴근한 뒤에도 집무실에 남아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져 있다가 날이 새는 줄도 몰랐다. 행여 무슨 소리라도 들리면 혹시 제후들이 조정에 드는 것은 아닌지 정신을 가다듬길 몇 차례. 결국은 제후들이 나올 때까지 꼬박 밤을 새우곤 했다.




진시황의 리더십 집중 해부-1 : 역사 문화 아이콘이 된 ‘단 하나의 제왕’

45호(2009.11.15) / 김영수필자 소개 



천고일제(千古一帝)
최근 건국 60주년 기념행사를 요란하게 치른 중국에서는 새삼 마오쩌둥(毛澤東)이 ‘문화 아이콘’으로 크게 각광받고 있다. 마오쩌둥은 2000년 넘게 지속돼온 제왕 중심의 전제주의를 단번에 무너뜨리고, 평등 정신의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한 주인공이다. 반편 ‘마지막 황제’라는 조롱조의 평가까지 받고 있기도 하다. 이런 그가 역사상의 수많은 영웅호걸들을 물리치고 오늘날 광적인 추앙을 받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역사적 인물이 문화적 아이콘이 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평가가 지속적으로 이뤄지면서도 극명하게 상반되어야 한다. 중국 역사상 이 조건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두 사람이 바로 마오쩌둥과 이 글에서 언급하는 진시황(秦始皇)이다.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는 그의 사후 50년을 넘기도 전에 선명하게 양립되기 시작하더니 끝을 알 수 없는 논쟁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있다. 진시황에 대해서는 죽음과 거의 동시에 부정적 평가가 주류를 이뤘고, 그 후 2000년 가까이 그 기조가 유지됐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오면서 신(사학의 태동과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역사 인식에 힘입어 진시황에 대한 ‘철옹성’ 같은 기존 평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보다 앞서 진시황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사람이 없진 않았다. 중국 역사상 최악의 사상 탄압기였던 16세기 명나라 말기에 온몸으로 체제 이데올로기에 저항했던 이단아 이탁오(李卓吾)는 주저 없이 진시황을 ‘천고일제(千古一帝)’라 불렀다. 진시황에게 ‘역사상 단 하나의 제왕’이라는 최고의 찬사를 보낸 것이다. 이를 계기로 진시황에 대한 평가는 오랜 ‘단조로움’에서 벗어났으며, 이후 흥미진진한 논쟁의 드라마가 연출되기 시작했다.




“태산은 한 줌의 흙도 마다하지 않았기에…”

46호(2009.12.01) / 김영수필자 소개  



통일 전의 진나라
중국사를 크게 구분할 때 흔히 쓰는 용어로 ‘선진(先秦)’이라는 말이 있다. ‘진(秦)나라 이전’이라는 뜻이다. 천하를 최초로 통일한 진나라를 기점으로 중국사를 그 이전과 그 이후로 크게 나누는 말이다. 그만큼 중국사에서 진나라의 통일이 갖는 의미는 크다.
통일제국 이전의 진은 당초 서쪽 변경에 치우쳐 있던 보잘것없는 부족 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기원전 771년 주(周)나라 유왕(幽王)이 자신이 아끼는 애첩 포사를 웃기려고 봉화 놀이를 즐기며 정실을 내쫓고 태자를 폐위시키려다 견융(犬戎)과 신후(申侯)의 공격을 받아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듬해 유왕의 아들 평왕은 동쪽 낙양으로 도망치듯 도읍을 옮겼다. 이때 진의 양공(襄公)은 군대를 파견해 평왕을 호위토록 했다. 이 공을 인정받아 진은 중원의 다른 제후국들과 같은 제후 반열에 끼게 됐다. 이로써 진은 주(周) 중원(中原)의 선진 문물을 접하고 국제 정세에 대한 정보를 입수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어 기원전 7세기 중반에 즉위한 목공(穆公)은 획기적인 인재 기용 정책으로 일약 강자로 급부상했다. 목공은 춘추시대를 대변하는 이른바 ‘춘추오패’의 한 사람으로서 국제사회에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켰다. 목공 때를 전후로 진은 서방의 융족을 평정하고 강역을 크게 넓히는 등 의욕적인 팽창 정책을 추진했다.




천하통일의 전주곡, 상앙의 ‘변법 개혁’

47호(2009.12.15) / 김영수필자 소개 



통일의 전주곡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 왕조를 세운 진시황은 영토통일과 정치통일 외에도 화폐통일, 도량형통일, 문자통일로 대변되는 이른바 ‘삼통(三統)’을 단행했다. 또 진시황은 전국을 중앙집권적 군현제로 개편했다. 이 4가지 사항은 마치 진시황의 전매특허처럼 여겨져 진시황을 언급한 책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실린다.
하지만 사실 진시황은 과거에 존재했던 이 4가지를 좀 더 완벽하게 다듬고 강화한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창안한 사람들은 따로 있다. 동아비즈니스리뷰(DBR) 46호에 잠깐 언급했던 효공(孝公)과 상앙(商鞅)이 그 주인공이다. 진시황의 천하통일은 어느 날 갑자기 이뤄진 게 아니라 오랜 역사적 배경에서 비롯됐고, 가장 직접적으로는 기원전 4세기 중반 효공과 상앙의 개혁 정치에 힘입은 바 크다. 말하자면 통일의 전주곡으로서 상앙이 작곡하고 효공이 연주한 ‘변법(變法) 개혁’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앙의 개혁은 전면적이고 철두철미했다. 그래서 혹자는 이 개혁을 ‘기적’이니 ‘마술’이니 하는 말로 과장하기도 한다.
진나라는 기원전 7세기 목공(穆公) 때 외부 인재를 적극 영입하여 위세를 떨친 후로는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내부에 난이 많았고, 전국시대에 들어와서는 대신들이 권력을 휘두르면서 최고 통치자인 군주를 교체하는 일도 빈번했다. 헌공(獻公) 때 도읍을 역양(중국 산시성[陝西省] 린퉁[臨潼])으로 옮기고 서하 지역을 되찾는 등 중흥의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이 기운을 이어받은 군주가 바로 효공이었다. 효공은 즉위한 이듬해인 기원전 361년 적극적인 ‘구현령’을 통해 세계 개혁사의 기린아로 일컬어지는 상앙과 조우했다.




불안에 빠진 워커홀릭, 不死를 꿈꾸다

48호(2010. 01. 01) / 김영수필자 소개  



진시황의 생애
진시황의 리더십을 본격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진시황의 생애는 크게 네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제1단계:출생∼즉위 전(1∼13세, 기원전 259년∼기원전 247년, 13년)
제2단계:즉위 후∼친정 전(13∼22세, 기원전 247년∼기원전 238년, 10년)
제3단계:친정 후∼천하통일(22∼39세, 기원전 238년∼기원전 221년, 18년)
제4단계:천하통일 이후∼사망(39∼50세, 기원전 221년∼기원전 210년, 12년)
이 네 단계를 염두에 두고 진시황의 간략한 생애와 그의 삶에 영향을 준 주요 사건들을 연대순으로 제시한다. 즉위 이전의 진시황은 ‘영정’, 즉위 이후의 진시황은 ‘진왕 정’, 황제 즉위 후에는 ‘진시황’으로 부르기로 한다.
생애로 본 진시황의 성격과 심리
진시황은 외국에서 태어났다. 인질로 와 있던 아버지 이인(異人)이 여불위의 도움을 받아 겨우 사람 행세를 하게 되고, 이어 여불위의 애첩이었던 조희(趙姬)를 아내로 맞아들여 진시황을 낳았다. 그런데 이인에게 시집 올 당시 조희는 이미 임신을 한 상태였다. 다시 말해 진시황의 생부는 여불위였던 것이다. 진시황의 출생에 얽힌 미스터리는 지금도 말끔하게 해결되지 않았지만 대체로 여불위가 그의 생부라는 설이 우세하다.
여불위의 보살핌 덕분에 어린 영정은 생활고에 시달리진 않았다. 하지만 인질의 아들이었기에 신변의 불안은 컸다. 게다가 아버지 이인은 영정이 세 살 되던 해에 여불위의 도움을 받아 고국인 진으로 귀국하고, 영정은 어머니와 타국에 남게 되었다. 그렇게 아홉 살이 될 때까지 영정은 타국 조(趙)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훗날 영정이 진왕으로 즉위한 뒤 여불위와 어머니 조희가 지난 정을 못 잊어 불륜에 빠진 사실로 미루어볼 때, 아버지 이인이 귀국하고서 영정이 귀국할 때까지 6년 동안 어머니 조희와 여불위의 관계는 심상치 않았을 것이다. 요컨대 세 살 이후 아홉 살이 될 때까지 영정은 타국에서 홀어머니와 함께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보낼 수밖에 없는 불우한 처지였다. 여기에 절대적인 후원자 여불위의 위세에 눌려 조용히 숨죽인 채 모든 불만을 속으로 삭이면서 울적한 나날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홉 살에 아버지 이인이 태자로 책봉되면서 아버지의 나라로 돌아온 영정은 비로소 가정다운 가정을 맛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고, 열세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어린 나이에 한 나라의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진시황의 리더십 집중 해부-6>톱니바퀴 같은 시스템, 제국을 이끌다
52호(2010. 03.01) / 김영수필자 소개  



통일 과정에서 보여준 진시황의 리더십이야말로 그의 전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이다. 그의 뛰어난 리더십은 인재 기용책에서부터 알 수 있다. 진왕 정(즉위 후부터 황제 즉위 전까지의 진시황의 호칭)은 춘추시대 진 목공 때부터 이어져온 국적, 신분, 민족을 따지지 않는 완전 개방된 인재 기용책을 실행했고, 이것은 거의 불문율의 전통이 됐다. 이는 진왕 정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는 데 큰 역할을 한 대표적인 인물인 몽오, 환기, 양단화, 왕전, 왕분, 여불위, 이사, 몽염 등의 면면을 살펴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들 중 절반이 외국 출신이었다. 여불위는 위(衛)나라, 이사는 초(楚)나라 출신이었다. 군사 방면에서 큰 공을 세운 몽오와 그 손자 몽염은 제(齊)나라 출신이다.
통일 과정에서 진왕 정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인재라면 자존심마저 버리고 데려오기도 했다. 이는 불세출의 전략가이자 진왕 정의 생부인 여불위의 영향 때문이 아닌가 한다. 진왕 정의 인재 기용과 관련한 두 가지 대표적인 사례를 소개한다.
먼저, 위나라 출신의 전략가 위료의 기용이다. 위료는 진왕 정에게 재물로 제후국들의 신료들을 매수하라고 건의해 이를 실행에 옮긴 인물이다. 위료는 진왕 정의 성품이 각박하고 잔인해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사람을 해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경멸했다. 하지만 진왕 정은 자신을 경멸하는 위료를 책망하기는커녕 간곡하게 그를 설득해 붙잡아두고는 전폭적인 신임을 보냈다.



진시황의 죽음과 제국의 몰락 - 진시황의 리더십 집중 해부-7(끝)
54호(2010.04.01) / 김영수필자 소개 




천하 통일, 콤플렉스의 결정체
어떤 목표를 정해놓고 치열하게 접근해가는 과정에서 개인의 육체적, 정신적 결함. 즉 콤플렉스는 장애가 아닌 적극적인 자극제로 작용할 수 있다. 역사상 사소한 콤플렉스는 물론 심지어 치명적인 결함을 가졌음에도 궁극적으로 성공한 인물이 적지 않은 건 이 때문이다. 진시황 역시 그랬다. 그는 콤플렉스가 많은 존재였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강인한 의지와 자기만의 독창적 방식으로 극복했고, 천하 통일이라는 위대한 과업을 완수했다.
천하 통일을 이루기까지 진시황이 보여준 리더십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치밀한 준비와 시기를 놓치지 않는 냉혹한 결단, 필요에 따라 자신을 굽힐 줄 아는 유연한 전략적 두뇌, 상대의 치명적인 약점을 물리력이 아닌 심리적으로 파고드는 독수, 확실한 마무리까지 어느 것 하나 나무랄 것이 없었다. 통일에 따른 제국의 재편성 과정에서는 그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시스템에 의한 국정 운영, 이를 위한 문물제도의 정비와 통일, 정치·경제·군사·문화를 한꺼번에 염두에 둔 기반 시설의 확충(도로)과 정책(인구 이주책) 등은 오늘날 보아도 여간 참신하지 않다.
특히 통일 이전의 진시황은 대단히 유연한 모습을 보여줬다. 위료나 왕전에 대해 한껏 자신을 낮춘 게 대표적인 사례다. 한(韓)나라가 진나라의 재정을 파탄 낼 요량으로 수리 전문가 정국(鄭國)을 간첩으로 파견한 사건에 대한 진시황의 대처 방식에서도 그의 유연함이 잘 드러난다. 정국이 간첩이란 사실이 탄로 나자 진나라 조정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펄펄 끓는 물 같았다. 정국을 잡아 죽이자는 의견은 물론 당시 진나라에서 활약하던 외국 출신들을 모조리 내쫓아야 한다는 여론까지 나왔다. 하지만 진시황은 이를 역이용했다. 정국에게 수리 공사를 맡겨 경제적으로 큰 득을 보았다. 수리에 관한 한 정국은 발군의 인재였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유연성은 군사 방면에서도 발휘되었다. 천하 통일을 위한 본격적인 전쟁은 진시황 나이 30세를 전후로 시작되었다. 첫 대상은 진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른바 삼진(三晋)으로 불리는 한(韓), 조(趙), 위(魏)나라였다. 한은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멸망시켰다. 그러나 명장 이목(李牧)이 버티고 있는 조나라는 만만치 않았다. 진시황은 27세(즉위 14년) 무렵 이목에게 크게 패한 적이 있다. 그 후로도 조나라에 대한 공격은 여의치 않았다. 이에 진시황은 32세를 전후로 강경 대응 전략에서 반간계(反間計)로 전략을 수정해 조나라 군과 정계를 흔들었고, 결국 기원전 228년 조나라를 멸망시켰다.
인사 방면에서도 진시황은 확실히 고수였다. 무엇보다 특정인에게 권력이 집중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특정인을 승진시킬 때마다 그 권한을 억제하는 조치를 함께 취했다. 그는 생전에 특정인을 남다르게 총애한 일도 없었다. 측근인 환관이 함부로 설치지 못하게 철저하게 통제했다. 심지어 그는 황후조차 두지 않았다. 이는 음탕한 어머니에 실망해 여성에 대해 환멸감을 가졌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외척의 발호를 근원적으로 예방하는 효과가 있었다. 요컨대 진시황은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부리되, 엄격하게 통제한다’는 자기만의 용인(用人) 원칙을 철저히 고수했다. 이는 통일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 통일에 이르는 과정에서 진시황이 보여준 리더십은 ‘세상에 쓸모없는 인재는 없다. 사람을 쓸 줄 모르는 군주가 있을 뿐’이라는 속설을 정확하게 입증하고 있었다.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 글쓴이 : 정중규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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