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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28일 목요일

다산 정약용과 서학/천주교의 관계에 대한 연구사적 검토–다산의 천주교 신앙문제를 중심으로–

다산 정약용과 서학/천주교의 관계에 대한 연구사적 검토 - 원재연/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다산의 천주교 신앙문제를 중심으로–

1.
머리말
2.
다산 서학/천주교에 대한 선행 연구사 개관
3.
다산 서학/천주교 논의의 출발점과 경과
4.
다산의 처눚교 신앙에 대한 논쟁
5.
맺음말
6.
토론문


1. 머리말

다산 정약용(1762~1836)은 그가 살고 있던 조선후기 사회의 피폐한 현실을 목도하고, 당대 사회의 구조적 모순 제거와 민생의 안즙에 일생의 사환과 저술활동을 헌신한 학자였다. 그러나 생전에 그가 천주교에 연루되었다는 점과 남인이라는 정치적 당색 때문에 그를 반대하는 이들로부터 거센 비판과 공격을 당하여, 그의 업적이 드러나지 못했다. 그러나 다산 사후 50년이 채 안된 1880년대 초반부터 고종과 그의 개화정책을 추진하던 사대부 관료들로부터 조선사회의 구래 병폐를 일소하고 향후의 개혁방안을 제시한 선구적 인물로 인식되어 다산이 남긴 문집이 필사되고, 일제강점기 때는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정신 고취’라는 측면에서 그의 저술들이 마침내 《여유당전서》로 간행되기에 이르렀다. 해방 후 식민지관 청산과 민족의 내재적 발전을 찾아 민주화와 산업화의 정신적 구동력을 얻기 위한 사학계의 노력은 여러 실학자들 중에서도 실학의 집대성자로 평가되는 다산의 개혁자적 면모를 연구하는 것에 더욱 관심이 집중되었다. 1970~1980년대부터는 수차례의 다산 학술서적의 간행이나 대규모 학술대회를 통하여 그의 민족애와 개혁적 사상을 탐색하게 되어 2012년 오늘날까지도 그 흐름이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다산사상은 다산 정약용이 살던 1762년 탄생부터 1836년 임종까지 약 74년간 그가 몸 붙여 활동하던 조선의 중앙정계와 향촌사회를 배경으로 여러 가지 모습으로 존재하던 유교(성리학, 원시유학), 불교, 도교, 천주교, 기타 민간신앙 등에 접하면서, 다산이 이들 사상과 당시 사회의 영향을 받으면서 또 영향을 주는 가운데 형성되었다. 따라서 역사, 철학, 문학을 비롯하여 인문사회와 자연과학 제 분야의 연구자들이 구한말부터 현재까지 약 120년간 나름대로 다산의 사상적 연원과 특징에 대해서 자신의 분야와 관점에서 다양하게 연구해왔다. 특히 다산이 살던 조선후기 사회의 정치적 지배이념이던 유학(性理學)과 사회개혁을 주창하던 실학자들에 의해 적극 연구된 원시유학(洙泗學), 西學(천주교 포함) 등의 상호관계를 규명하는 문제에는 다수의 학자들이 수십 년간 논쟁을 이어오면서 다산 사상의 실체와 연원을 해명하는 데 진력해오고 있다.

또한 이런 연구가 진척되면서 다산의 인물됨과 학문적 업적이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대다수 국민들의 흠모대상이 되어 오면서, 이전부터 다산의 천주교 신자임에 자부심을 지녔던 천주교회 측과 학계의 일각 사이에는 그의 신앙문제를 두고도 논쟁이 전개되었다. 다산의 천주교 신앙과 관련된 논쟁은 다산이 천주교를 한 때 믿었던가(=곧 한때나마 천주교 신자였던가)에 그 초점이 있지 않다. 이 점은 현재까지 전해오는 그 자신의 기록으로도 충분히 증명되고 있기 때문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가 천주교 신앙포기를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후에 과연 천주교 신앙심을 계속 유지했던가, 아니면 완전히 단절했던가에 논쟁의 초점이 있다. 즉 만년에 그가 과연 내적으로나마 천주교 신앙생활을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죽음에 임하여 천주교적 예식(종부성사)을 받았던가 하는 사실의 여부에 논란의 핵심이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천주교회 측에서는 다산이 신자로서 선종했다고 주장하는 데 비해, 이를 부정하는 학계의 흐름도 만만치 않다. 또한 이 문제가 다산 연구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의도적으로 거론하지 않으려는 유보적 입장도 상당수 존재한다. 이런 유보적 입장에 속하는 이들은 주로 다산이 남긴 현존저술의 내용분석을 통하여 그것에서 서학(천주교)의 어떤 영향을 탐색하거나, 또는 그것에서 천주교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유학사상의 흐름을 파악하려는 연구에 치중해왔다. 이 때문에 다산의 천주교 신앙 문제는 그의 생존(1762~1836) 당시부터 문제가 되어 그의 탄생 250주년이 되는 2012년 현재까지도 여전히 쉽게 풀리지 않는 해묵은 과제로 남아 있게 되었다.

본고를 작성한 필자는 교회사와 한국사 일반의 가교적(架橋的) 입지(立地)를 넓히려는 지향을 갖고 이 문제에 접근하였으나, 일개 역사학도로서 명백한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는데, 특히 다산의 유교사상은 물론, 동서양을 아우르는 폭넓은 그의 학문세계를 철학적으로 완벽하게 이해하고 정리하기 어려웠다. 철학에 ‘문외한’인 일개 역사학도로서 이제까지 학계에서 약 반세기 이상 정력적으로 연구해온 여러 선학들의 다산 儒學과 西學 사상에 대한 연구업적을 어떤 독자적 안목과 기준을 가지고 새롭게 비판하고 분석, 정리하는 것은 주어진 시일 내에 도저히 불가능했다. 필자가 전공분야로서 집중할 수 있는 부분은 교회사와 관련된 다산의 천주교 신앙문제 및 이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서학사상의 일 부분에 불과하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필자는 본고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전개하고자 한다. 우선 제1장 머리말에 이어 제2장에서 다산학과 서학 내지 유학의 상호관계에 대해서 언급한 기존의 업적들을 연구사 정리한 논문들이 있으므로 이를 개략적으로 소개하여, 다양한 관점에서의 사상사 인식의 경향성을 일람해본다. 이어서 제3장에서는 다산 사후 현재까지 진행된 다산의 천주교 및 서학 관련 연구업적들을 시기순으로 대략 4기로 구분하여 그 개략적인 진행과정(연구의 흐름)을 고찰하였다. 제4장에서는 다산의 천주교 신앙과 관련하여, 논의의 초점이 된 만년(晩年) 신자설(信者說)을 긍정, 부정하는 입장들을 각각 검토한 후 양쪽 견해의 타당성, 의의 및 문제점들을 짚어보았다. 제5장 맺음말에서는 향후 다산사상을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 견지해야 할 연구시각 및 자료의 문제 해결을 위한 필자의 소견을 간략하게나마 피력해 보았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한 가지 유념해두고 싶은 사항이 있다. 역사상 실존했던 학자나 사상가들의 종교적, 사상적 입장이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일관적으로 변함없이 관철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설령 큰 흐름이나 원칙이 유지되는 경우에도 조금씩이나마 생애 주기에 따라 그를 둘러싼 환경이 변화되면, 이 변화에 적응(適應, 副應)하는 새로운 형태를 대다수의 인물들에서 살펴볼 수 있으며, 그 적응의 정도와 양상은 사람마다 다양한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음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이런 측면은 다산의 경우에도, 또한 오늘날 다산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경우에도 거의 예외가 없이 적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항상 열어두고서 본고에 임하고자 한다. 또 필자가 다루는 내용이 워낙 방대한 분량에 해당되기 때문에, 본고의 연구사 정리에서 누락되었거나 잘못 파악된 점이 있을 것인데, 이는 전적으로 필자의 책임이다. 이런 점들을 발견하고 필자에게 알려준다면 후속 연구를 통해서 계속 수정, 보완해나갈 것이다.


2. 다산 서학/천주교에 대한 선행 연구사 일람

다산학에 대한 연구업적이 늘어나면서 선행 연구업적들, 특히 다산사상과 유학, 서학과의 상관성을 고찰한 기존의 연구성과를 정리하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진행되었다.

정순우는 1993년 〈다산연구의 제논점과 쟁점〉1)이란 연구사정리 논문을 발표하여, 기존의 다산학 연구의 쟁점을 ㉮ 다산학과 성리학의 관계, ㉯ 다산학과 천주교 관계 등 두 가지로 대별했다. ㉮에서는 다시 성리학과 실학(다산학 포함)의 상관관계를 연속적으로 볼 것인가, 단절적으로 볼 것인가 하는 견해를 소개했다. 전자(연속성 강조)는 다산이 퇴율사상(退栗思想)을 계승하였다는 입장으로 다산의 개혁사상은 결코 근대적이지 않고 왕권강화적 보수적 성격이 짙은 성리학적 사유의 한 패턴이라고 평가하는 입장이며 여전론에 대한 홍덕기의 평가에서 드러난다고 보았고, 후자(단절성 강조)는 퇴율사상을 극복한 다산의 독자적인 인식체계를 인정하는 입장으로, 서학의 수용이 그 변화(단절, 극복)의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보는데, 이을호 이후 다수 학자들의 입장에 해당된다고 분류했다. 정순우는 이외에도 서구적 방법론을 도입하여 다산사상을 분석한 유초하와 한형조의 시도를 비중있게 소개하면서, 동시에 다산이 탁월한 현실개혁론자는 될지언정 현상을 전체적이고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사상체계가 결여된 ‘철학없는 철학자’로 평가절하하는 입장도 소개했다.

차기진은 2004년 《조선후기의 西學과 斥邪論 연구》2)에서 다산사상과 서학의 관계를 천주교 신앙적 생애에 중점을 둔 외형적 연구와, 경학사상에 내재한 서학적 요소와의 상관성을 추구하는 내면적 연구로 대별하였다. 전자의 경우 1797년 〈자명소〉 이후 천주교와 단절되었다고 보는 견해와, 한때 배교 후 천주교로 회귀했다는 입장이 있으며,3) 후자의 경우는 3가지로 분류되는데, ① 다산의 경학은 서학과는 무관하게, 유교에서 출발한 독창적인 학문해석과 연구과정의 산물이라는 입장, ② 다산 경학은 탈주자학(脫朱子學)의 입장에서 공맹시대(孔孟時代)의 수사학(洙泗學)에 그 기반을 두고 전개되었으며, 다산 자신도 모르게 천주교 교리들이 취사선택되어 이론화되었기에 반서학적(反西學的) 요소도 있다는 입장, ③ 다산의 학문 안에는 천주교 교리서의 영향은 물론, 서양철학의 요소까지 들어있으며 그 영향의 결과로 다산의 창의적인 이론이 제기되었다는 견해로 나누었다.4)

이봉규는 2005년 〈다산학 연구의 최근 동향과 전망–근대론의 시각을 중심으로–〉5)에서, 다산의 저술과 전기에 대한 연구, 이기론 심성론 등 철학사상에 대한 연구, 경학, 예학, 경세론 등의 5분야로 나누어서 다산사상과 근대성의 상관관계에 대한 기존의 제반 연구성과들을 분석 정리했다.6)

백민정은 2007년 〈정약용에 대한 기존 연구경향과 그에 대한 반성〉7)을 통하여, 다산사상과 서학의 관계에 대한 기존의 연구성과들을, ① 유학적 문제의식들을 중심으로 한 연구, ② 서학과의 관련성을 강조한 연구, ③ 서학과 유학의 관계에 대한 중도적 입장의 연구 등으로 3분했다. ①의 입장은 다산사상과 서학과의 관련성을 단순히 언급하지 않거나 아예 배제하는 입장인데, 백민정은 ①중에서도 “정약용이 주자학적 세계관을 엄격하게 비판하고 자신의 고유한 철학세계를 수립했다”고 보는 관점이 지금까지 다산관련 연구경향 중 가장 대표적인 경향이라고 보았다.8) 백민정은 ①의 입장을 다시 ⓐ 주자학과의 단절을 통한 새로운 유학 정립으로 보는 입장,9) ⓑ 조선주자학(=퇴계학)과의 연속성에 주목한 입장10) 등으로 나누었으며, ②의 경우는 ⓐ 서학의 영향을 긍정적으로 보는 입장, 11)ⓑ 서학의 영향을 부정적으로 보는 입장12)으로 분류했고, ③의 경우도 ⓐ 서학과 고대유학과의 만남으로 이해하는 입장,13) ⓑ 서학과 고대유학 또는 주자학 전통과의 관계를 고려하는 입장14) 등으로 분류했다. 백민정은, 다산 유학의 근대성이야말로 주자학에 대한 다산의 긍정적 계승과 비판 속에서 가능했으며, 다산 철학에는 전통적 유학의 관점과 서학의 관점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다산사상에 대한 유학과 서학의 영향력을 중도적 입장으로 보는 견해(③)로 소개했다. 백민정은 “조선후기 서학은 유학에 도전한 것이 아니라 주자학의 신학에 포섭된 것으로, 서학의 수용이 주자학의 발전적 전개에 한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2008년 연세대학교 강진 다산실학연구원에서는 학술지 《다산과 현대》를 창간하면서, 2003년부터 2008년까지 약 5년간의 다산학 연구동향을 점검하였는데, 박무영이 문학 분야를, 김문식이 역사학 분야를, 구만옥이 자연학 분야를 각각 분담하여 다산학 연구의 성과들을 정리했다. 이 중에서 다산사상과 서학의 관련성에 관계된 김문식, 구만옥의 연구사 정리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김문식은 2008년 〈다산학 연구의 최근 동향 ; 역사학〉15)에서, 여유당전서의 텍스트 연구,16) 역사분야 연구, 주자학과 근대의 문제, 다산학단 연구 등으로 분류하여 다산학 관련 연구사를 정리했다. 이 중에서 다산과 서학사상의 관계를 언급한 부분으로는 ‘주자학과 근대의 문제’라는 제목의 장인데, 이 주제는 실학의 개념 논쟁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보면서, 지금까지 거론된 관점을 ㉮ 다산학을 성리학 내지 유학의 흐름에서 파악하는 시각,17) ㉯ 서학과 근대라는 관점에서 파악하는 시각,18) ㉰ 동서사상의 융합으로 파악하는 시각19) 등으로 3분할 수 있으며, 자신(김문식)의 입장은 ㉰로서, 동서사상의 융합 내지는 한국적 근대를 지지하지만, 아직까지 그 개념이 모호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향후의 다산학 연구는 다산 저술의 텍스트 연구를 통해서 다산 사상의 단계적 변화를 추적하고 이를 재구성하는 데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19세기 다산학의 변화모습을 추구하기 위해서 ‘다산학단’ 연구에도 주력하여 다산사상의 학맥과 연원을 정밀하게 해명해야 함을 강조했다.

구만옥은 2008년 〈다산학 연구의 최근 동향 : 자연학〉20)에서, 다산의 과학사상 내지 과학기술의 내용과 수준 및 그 연원을 고찰한 기존의 연구논문들을 분석하면서, ㉮ 다산의 자연인식을 그의 성리학 또는 경학과의 상호관련 속에서 파악한 연구들, ㉯ 유가전통과의 관련 속에서 다산의 자연세계와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와 태도를 종합적으로 규명한 논고들, ㉰ 다산의 과학기술론과 서양과학과의 관련성 내지 다산의 서학수용, 서학관 등에 대해서 언급한 연구들에 대해서도 일정하게 정리했다.21) 여기서 ㉮, ㉯의 논의는 “다산의 자연학에 대한 담론을 주자학 내부의 논의로 볼 것인가,22) 반주자학 내지 탈주자학의 지향을 지닌 새로운 논의로 볼 것인가”23) 하는 문제로 확장될 수 있다. 주자학 내부의 문제로 본다는 것은 다산의 과학인식이 중세적 과학기술론에 머물렀다는 주장으로 연결되고, 주자학의 한계를 벗어난 논의로 보는 입장은 다산의 과학담론이 근대지향의 새로운 담론이었다는 주장으로 연결된다. ㉰의 논의와 관련해서, 구만옥은 앞서 언급된 백민정의 연구사 정리를 바탕으로 ⓐ 다산과 서학의 상관성을 강조하는 견해와, ⓑ 절충하거나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는 견해로 구분하면서도,24) 결론적으로 천문역법, 의학, 지리학, 축성기술, 기예론 등의 분야를 망라하여 다산사상에서 서학이 차지하는 요소를 어렵지 않게 검출해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구만옥은, “다산의 과학사상은 전통과학을 문헌적으로 경험적으로 정리한 결과이기도 하면서 주자학과 닮은 점, 다른 점 등이 혼재한다”고 정리했는데, 이는 “다산의 학문과 사상은 주자학 계승의 측면 못지않게 변화와 극복의 측면이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고 한 그의 언급과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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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순우, 〈다산연구의 제논점과 쟁점〉, 《한국학대학원논문집》 8집(다산과 다산학 특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1993, 1~9쪽 ; 이 논고의 주된 파악대상은 유초하, 홍덕기, 유권종, 한형조 등 4인의 박사학위 논문들이었다. 유초하, 〈정약용의 우주관〉, 고려대 박사논문(1990) / 홍덕기, 〈다산 정약용의 토지개혁사상연구〉, 전남대 박사논문(1990) / 유권종, 〈다산예학연구〉, 고려대 박사논문(1991) / 한형조, 〈주희에서 정약용에로의 철학적 사유의 전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논문(1992).
2) 차기진, 《조선후기의 西學과 斥邪論 연구》(2002, 한국교회사연구소) ; 이 단행본은 그의 박사학위논문 〈星湖學派의 西學 인식과 斥邪論에 대한 연구〉(1995.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을 보강한 것으로, 본고에서 연구사 성과를 인용(참고)한 부분은 제3장 ‘정약용의 천주교 수용과 서학사상’(175~177쪽)이다.
3) 차기진, 위의 책, 176~177쪽에 의하면, 천주교와 단절입장은 정석종, 〈南皐 尹持範과 茶山〉, 《손보기박사정년기념 한국사학논총》(지식산업사, 1988) 및 김상홍, 〈다산의 천주교 신봉론에 대한 반론〉, 《다산학연구》(계명문화사, 1990) 등이고, 천주교 복귀 입장은 주재용, 《先儒의 天主思想과 祭祀問題》(가톨릭출판사, 1958), 하우봉, 〈정다산의 서학관계에 대한 일고찰〉, 《교회사연구》 1집(1977, 한국교회사연구소), 김옥희, 《광암 이벽의 서학사상》(가톨릭출판사, 1979), 김옥희, 《한국천주교사상사II-다산 정약용의 서학사상 연구》(1991, 순교의 맥), 최석우, 《한국교회사의 탐구II》(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중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정다산의 서학사상〉 등을 그 예로 들었다.
4) ①의 입장–천관우, 〈한국실학사상사〉, 《한국문화사대계》 VI(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70) ; 한종만, 〈다산의 天觀〉, 《실학논총》(전남대 호서문화연구소, 1975) ; 이동환, 〈다산사상에서의 上帝 도입경로에 대한 서설적 고찰〉, 《벽사이우성교수정년퇴직기념논총-민족사의 전개와 그 문화-》 下(창작과 비평사, 1990) // ②의 입장–홍이섭, 《丁若鏞의 政治經濟思想硏究》(한국학연구총서3, 한국연구도서관, 1959) ; 이을호, 《다산학의 이해》(현암사, 1975), 이을호, 《茶山經學思想硏究》(을유문화사, 1979) ; 박종홍, 〈對西歐的 世界觀과 茶山의 洙泗舊觀〉, 《실학논총》(전남대 호서문화연구소, 1975) ; 최동희, 《西學에 대한 韓國實學의 反應》(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88) ; 유명종, 〈尹白湖와 丁茶山〉, 《한국유학연구》(이문출판사, 1988) // ③의 입장–금장태, 〈丁茶山의 사상에 있어서 西學의 영향과 그 의의〉, 《논문집》 3집(국제대학교, 1975) ; 정순우, 〈다산의 형이상학, 《다산학보》 5집(1983) ; 정병련, 〈茶山 哲學의 淵源과 그의 학문성향〉, 《조선조 유학사상의 탐구》(여강출판사, 1988) *③의 입장 중에서도 금장태는 다산경학이 추구하는 세계관의 전반적인 구조와 논리는 서학의 교리서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고 이해했다. 《다산실학탐구》 28쪽.
5) 이봉규, 〈다산학연구의 최근 동향과 전망-근대론의 시각을 중심으로-〉, 《다산학》 6호(2005, 다산학술문화재단). 6) 구체적 내용은 본고 제2장에서 취급될 예정임 ; 본고의 제2장 1990~2000년의 서술내용은 상당수 이봉규의 본 연구사정리에 의거한 것이다.
7) 백민정, 〈정약용에 대한기존 연구경향과 그에 대한 반성〉, 《정약용의 철학》 중 보론(2007, 이학사) 409~472쪽.
8) 백민정의 분류에서는 동일인의 서로 다른 연구경향을 지닌 논문들이 2개 이상의 부류에서 취급되기도 한다. 연구자를 고정적으로 단정하지 않고 그의 연구논문의 내용만을 가지고 백민정이 만든 틀 속에서 그 내용을 논했기 때문이다.
9) ①부류에 속한 연구 중 다산사상과 유학(성리학, 원시유학)의 단절성에 주목한 연구는 다음과 같다. 이을호, 《다산경학사상연구》(을유문화사, 1989) ; 이을호, 〈다산유학과 다산 경학〉, 《다산 정약용》(박홍식 외, 예문서원, 2005) ; 이지형, 《다산경학연구》(1996, 태학사) ; 윤사순, 〈다산의 인간관 : 탈성리학적 관점에서〉, 《정다산 연구의 현황》(한우근 외, 민음사, 1985) ; 윤사순, 〈성리학과 실학, 그 근본사고의 동이성에 대한 고찰〉, 《다산 정약용》(박홍식 외, 2005, 예문서원) ; 윤사순, 〈다산의 인간관〉, 《다산학보》 9집 ; 정일균,《茶山四書經學硏究》(2000, 일지사) ; 장동우, 〈주자학적 패러다임의 반성과 해체과정으로서의 실학 자연학과 인간학의 분리를 중심으로〉, 《태동고전연구》 12(한림대 태동고전연구소, 1995) ; **다산이 탈성리학의 단계를 넘어서 탈유학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다산을 혹평한 논문도 소개했다. 한자경, 〈유교와 천주교 사이의 다산 : 인간본성의 이해를 중심으로 논함〉, 《17 ․ 18세기 조선의 외국서적수용과 문화변동》(이대한국문화연구원, 2005) 한자경의 이 논고는 다산이 전적으로 천주교/서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논리를 전개한 글로 보인다. 따라서 ②의 부류에도 속한다.
10) ①부류에 속한 연구 중 다산사상과 유학(성리학, 원시유학)의 연계성에 주목한 연구는 다음과 같다. 김상홍, 〈다산의 천주교 신봉론에 대한 반론〉, 《동양학》 20집(1990,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김상홍의 이 논고는 다산과 천주교의 상관관계를 주장하는 최석우 신부의 글을 반박한 것이다 ; 이동환, 〈다산 사상에서의 ‘상제’도입의 경로와 성격〉, 《다산 정약용》(박홍식 외, 2005, 예문서원) ; 이광호, 〈『중용강의보』와 『중용자잠』을 통하여 본 다산의 誠의 철학〉, 《다산학》 7호(다산학술문화재단, 2005) ; 한형조, 〈다산과 서학 : 조선 주자학의 연속과 단절〉, 《다산학》 2호(다산학술문화재단, 2001) ; 유권종, 〈後期實學과 性理學의 관계 : 退溪와 茶山을 중심으로〉, 《보학연구》 18집(한국보학연구회, 2003) ; 장승구, 《정약용과실천의 철학》(서광사, 2001).
11) ②에 속한 부류로서 서학의 긍정적 영향에 주목한 논고로는 최석우, 〈다산 서학에 관한 논의〉, 《茶山 丁若鏞의 西學思想-1993년도 다산문화제 기념논총-》(김옥희 수녀 편, 1993.10, 다섯수레) ; 김옥희, 《한국천주교 사상사II-다산 정약용의 서학사상 연구-》(순교의 맥, 1991) ; 송영배, 〈마테오 리치의 서학과 한국 실학의 현대적 의미〉, 《대동문화연구》 45호(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대동문화연구원, 2004) ; 정인재, 〈서학과 정다산의 성기호설〉, 《다산학》 7호(다산학술문화재단, 2005) ; 정순우, 〈다산에 있어서 천과 상제〉, 《다산학》 9호(2006, 다산학술문화재단) ; 장승구, 〈정다산의 개혁적 역사관〉, 《동양철학연구》 16집(1996, 동양철학연구회) ; 장승구, 〈동서사상의 만남과 정약용의 인간관〉, 《다산학》 8호(다산학술문화재단, 2006) ; 장승희, 〈다산 정약용의 도덕적 자율성에 대한 연구〉, 서울대박사논문(1998) ; 장승희, 〈다산 정약용의 윤리사상에 대한 연구〉, 《동양철학연구》 19집(1998, 동양철학연구회).
12) ②에 속한 부류로서 서학의 부정적 영향에 주목한 논고로는 이상
익, 〈정약용의 윤리사상에 대한 주자학적 반론〉, 《동방학지》 119집(연대국학연구원, 2003) ; 이상익, 〈정약용 사회사상의 새로운 지평〉, 《철학》 48집(한국철학회, 1996) ; 한자경, 〈유교와 천주교 사이의 다산 : 인간본성의 이해를 중심으로 논함〉, 《17~18세기 조선의 외국서적수용과 문화변동》(이대한국문화연구원, 2005) ; 최기복, 〈다산의 사생구원관〉, 《다산사상 속의 서학적 지평》(서강대출판부, 2004).
13) ③에 속한 부류로서 서학과 고대유학과의 만남으로 다산사상을 이해하는 입장은 금장태, 〈다산의 心 개념과 마테오 릿치의 영혼론〉, 《종교와 문화》 8권(서울대 종교문제연구소, 2002) ; 금장태, 〈다산 경학의 탈주자학적 세계관〉, 《다산학》 1호(다산학술문화재단, 2000) ; 금장태, 《다산실학탐구》(소학사, 2001) ; 금장태, 《정약용 한국 실학의 집대성》(성균관대 출판부, 2002) ; 금장태, 〈다산의 事天學과 西學收容〉, 《철학사상》 16권(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2003) *금장태는 다산의 철학을 서학에 대한 창조적 수용과 고대유학에 대한 창조적 계승으로 이해했다 ; 김승혜, 〈무언으로 배려하는 天사상에 수용된 서학적 지평〉, 《다산 사상 속의 서학적 지평》(서강대 인문과학연구소, 2004) ; 최기복, 〈다산의 사생구원관〉, 《다산사상 속의 서학적 지평》(서강대 출판부, 2004).
14) ④에 속한 부류로서 서학과 고대유학 또는 주자학 전통과의 만남으로 다산사상을 이해하는 입장은 다음과 같다. 이광호, 〈동서융합의 측면에서 본 정약용의 사상〉, 《퇴계학보》 113호(퇴계학연구원, 2003) ; 이광호, 〈상제관을 중심으로 본 유교와 기독교의 만남〉, 《유교사상연구》 19집(한국유교학회, 2003) ; 이광호, 〈李退溪의 철학사상이 丁茶山의 경학사상의 형성에 미친 영향에 관한 고찰〉, 《퇴계학보》 90호(퇴계학연구원, 1996) ; 임부연, 〈정약용의 수양론 연구〉, 서울대 박사논문(2004) ; 안영상, 〈토미즘과 비교를 통해 본 다산의 인심도심론〉, 《한국실학연구》 9호(한국실학학회, 2005) ; 성태용, 〈다산의 明善論에 대한 일고찰〉, 《태동고전연구》 1집(한림대 태동고전연구소, 1984) ; 성태용, 〈다산학에 있어서 몸 기름과 마음 기름〉, 《다산학》 2호(다산학술문화재단, 2001) ; 한형조, 〈다산과 서학 ; 조선 주자학의 연속과 단절〉, 《다산학》 2호(다산학술문화재단, 2001) ; 한형조, 〈좌담 : 다산, 주자학 그리고 서학〉, 《다산학》 2호(다산학술문화재단, 2001) ; 한형조, 《주희에서 정약용으로 : 조선유학의 철학적 패러다임 연구》(세계사, 2002) ; 한형조, 〈주자 神學의 현대적 옹호〉, 한국실학학회 동계학술대회 논문집(2004).
15) 김문식, 〈다산학 연구의 최근 동향 : 역사학〉, 《다산과 현대》 창간호(연세대 강진다산실학연구원, 2008.12).
16) 다산 저술의 텍스트 연구는 본고의 주제인 다산사상과 서학 및 유학의 관계를 판별하기 위한 선행작업에 속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김문식이 제시한 관련 연구논문은 다음과 같다. 조성을, 〈丁若鏞 著作의 체계와 『여유당집』 雜文의 재검토〉, 《규장각》 8집(서울대 도서관, 1984) ; 조성을, 〈丁若鏞의 尙書硏究 문헌의 검토〉, 《동방학지》 54 ․ 55 ․ 56집(연세대 국학연구원, 1987) ; 조성을, 《與猶堂集의 문헌학적 연구-詩律 및 雜文의 年代考證을 중심으로-》(혜안, 2004) ; 조성을, 〈『경세유표』의 문헌학적 제문제〉, 《다산학》 10호(다산학술문화재단, 2007) ; 김문식, 〈『여유당전서』경질 체제의 검토〉, 《다산학》 5호(다산학술문화재단, 2004) ; 김문식, 〈『尙書知遠錄』필사본의 원문 비교〉, 《다산학》 10호(다산학술문화재단, 2007) ; 홍이섭, 〈『牧民心書』正文에 就하여〉, 《조명기화갑기념불교사학논총》(1965) ; 민영규, 〈茶山 三則〉, 《동방학지》 22집(연세대 국학연구원, 1979) ; 정석종, 〈茶山著作에 대한 2 ․ 3의 問題〉, 《정신문화》 1983년 봄호 ; 김영호, 〈『與猶堂全書』의 텍스트 檢討〉, 《丁茶山硏究의 現況》(민음사, 1985) ; 안병직, 〈『牧民心書』考異〉, 《정다산 연구의 현황》(민음사, 1985) ; 김상홍, 《다산 정약용 문학연구》(단국대 출판부, 1985) ; 장동우, 〈『여유당전서』 정본사업을 위한 필사본 연구〉, 《다산학》 7호(다산학술문화재단, 2005) ; 노경희, 〈일본 소재 丁若鏞 필사본의 소장 현황과 書誌的 특징〉, 《다산학》 9호(다산학술문화재단, 2006) ; 노경희, 〈일본 宮內廳書陵部 소장본 丁學淵 시집 『三倉館集』의 영인 및 해제(1)〉, 《다산학》 6호(다산학술문화재단, 2005) ; 김언종, 〈『여유당전서보유』의 저작별 진위문제에 대하여(상)(중)(하)〉, 《다산학》 9~11호(2006~2007, 다산학술문화재단) ; 박종천, 〈『民堡議』 필사본에 대한 연구〉, 《다산학》 12호(다산학술문화재단, 2008).
17) ㉮ 다산학을 성리학 내지 유학의 흐름에서 파악하는 연구로는, 김영식, 《정약용 사상 속의 과학기술 : 유가전통, 실용성, 과학기술》(서울대출판부, 2006) ; 김영식, 〈미신과 술수에 대한 정약용의 태도〉, 《다산학》 10호(2007, 다산학술문화재단) ; 한자경, 〈유교와 천주교 사이의 다산 : 인간본성의 이해를 중심으로 논함, 《17 ․ 18세기 조선의 외국서적수용과 문화변동》(이대한국문화연구원, 2005) ; 이봉규, 〈다산학 연구의 최근 동향과 전망〉, 《다산학》 6호(다산학술문화재단, 2005) ; 이봉규, 〈다산의 정치론 : 주자와의 거리〉, 《다산학》 11호(다산학술문화재단, 2007) 등을 거론했다. 18) ㉯ 다산학을 ‘서학과 근대’ 라는 관점에서 파악하는 연구로는, 조성을, 〈정약용의 刑政觀〉, 《學林》 23집(연세대 사학연구회, 2002) ; 조성을, 〈실학의 여성관-이익, 정약용을 중심으로-〉, 《한국사상사학》 20집(한국사상사학회, 2003)을 들었다.
19) ㉰ 동서사상의 융합이란 시각에서 다산학을 파악하는 연구로는, 이광호, 〈동서융합의 측면에서 본 정
약용의 사상〉, 《퇴계학보》 113집(퇴계학연구원, 2003) ; 장승구, 〈동서사상의 만남과 정약용의 인간관-作爲의 주체로서의 인간-〉, 《다산학》 8호(다산학술문화재단, 2006) ; 백민정, 〈다산의 ‘允執厥中’론〉, 《한국실학연구》 13집(한국실학학회, 2007)을 들었다.
20) 구만옥, 〈다산학 연구의 최근 동향 : 자연학〉, 《다산과 현대》 창간호(연세대 강진다산실학연구원, 2008.12).
21) 고병익, 〈다산의 진보관-그의 기예론을 중심으로-〉, 《효성조명기박사화갑기념불교사학논총》(1965) ; 한우근, 〈다산사상의 전개, 《정다산 연구의 현황》(민음사, 1985).
22) 김영식, 《정약용 사상 속의 과학기술 : 유가전통, 실용성, 과학기술》(서울대출판부, 2006).
23) 김영호, 〈정다산의 과학기술사상〉, 《동양학》 19집(단국대 동양학연구소, 1989) ; 송성수, 〈정약용의 기술사상〉, 《한국과학사학회지》 제16권 2호(한국과학사학회, 1994) 등
24) 구만옥은 금장태의 경우, 서학이야말로 주자학의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이를 벗어날 수 있는 정연한 논리의 사유체계를 제공했다고 평가하는 연구자로 서학이 다산학에 긍정적으로 기여했음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연구자로 보았다. 금장태, 〈다산 경학의 탈주자학적 세계관〉, 《다산학》 1호(다산학술문화재단, 2000). 이러한 금장태의 견해에 대해 김영식은 매우 대조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고 평가한다. 즉 김영식은, “다산이 젊은 시절 천주교에 접하고 빠졌던 것은 사실이나 1791년 진산사건을 계기로 배교한 후 그의 학문이나 저 에 서학의 영향이 미친 면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하였으며, 다만 젊은 시절 접했던 천주교의 관념들을 유학의 틀 속에 포함시키려고 노력했을 가능성은 인정했다고 한다.
3. 다산 서학/천주교 논의의 출발점과 경과

1) 조선후기~일제강점기 다산 서학/천주교 논의의 제기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서학과 천주교 관련 여부는 그가 생존하던 18세기 말부터 이미 문제가 되어, 그의 사후 176년이 지난 2012년 현재까지도 논란의 테두리 안에 맴돌고 있다. 그리하여 다산은 생전에 서학 또는 천주교와 관련된 주변의 감시와 비판을 우려하여 늘 눈치를 보며, 마치 겨울철 냇물을 건너는 원숭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얼음판을 밟듯 조심조심 자신의 언행을 삼가고 또 절제해야 했다. 그가 당호(堂號)를 ‘여유당(與猶堂)’이라고 지은 것은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잘 대변해준다. 그러나 다산이 서거한 지 50년쯤 지나면서부터는 국왕 고종을 비롯하여 개화기의 사대부 관료들이 그의 개혁사상에 주목하게 되고, 이에 따라 개항기부터 그가 남긴 저술이 수차례 필사되다가 일제강점기에 들어와서는 마침내 간행되기에 이르러, 경학자(經學者)이자 경세가(經世家)로서의 다산의 실학사상이 널리 보급되고 연구되었다.25) 특히 다산에 관한 세간의 관심은 민족이 주권을 빼앗긴 암울한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에게 민족정신을 지탱하고 고취시키려는 목적 하에 보다 체계적이고 학문적인 차원의 연구로 발전했다.26)

1929년 《朝鮮基督敎及外交史》를 저술하여 대서양 교류(對西洋交流)의 일환으로서 조선 천주교회의 연원을 밝힌 이능화(李能和, 1868~ 1945)는 정조 21년 1797년 6월(음) 다산 정약용이 올린 〈자명소〉(自明疏)에 나타난 다산의 서학관(西學觀)과 이에 대한 군신(君臣)의 반응을 기록하였다.27)

1934~1938년에 걸쳐 《與猶堂全書》를 정인보와 함께 교정 간행해낸 안재홍(安在鴻, 1891~1965)은 다산을 서양학문의 선구자 중 하나요, 또 그 집대성을 이룬 인물이라고 평가했다.28) 1938년부터 동아일보에 〈여유당전서를 독함〉이라는 제목으로 다산 관련 글을 65회나 연재한 최익한(崔益翰, 1897~?)은 다산과 서학 및 서학파와의 관련성을 고찰했다. 최익한은 조선 지식인들이 천주교와 서학을 구분하는 입장에서 수용하였는데, 敎로서 수용한 정약종, 황사영, 홍교만, 최창현 등과는 달리 다산은 이익, 이가환 등과 함께 學으로서 수용했다고 보았다. 특히 다산은 李檗의 영향으로 초기에 천주교를 받아들였지만, 신앙은 버리고 과학과 기술만을 섭취한 것으로 파악했다. 최익한의 이러한 인식은 다산이 한때 천주교 신자였다가 유학자로 완전히 회귀했다고 주장하는 오늘날 다수 연구자들의 시초가 된다.

한편 유물론적 사회경제사의 입장에서 백남운(白南雲, 1895~1979)은 다산의 서학사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다산은 유학(儒學) 출신이면서 순유학자도 아니고, 서학(西學)의 신도이면서도 익혹(溺惑)이 아니라 섭취(攝取)였고, 배교자(背敎者)이면서도 (서학) 실천가였던 것이며, 봉건시대 출생이면서도 소극적이나마 봉건사회를 저주했다.29)



백남운은 이처럼 다산이 서학을 필요에 따라 섭취했지만 그것에 완전히 빠지지는 않았고, 천주교의 배교자이면서 서학의 실천가였다고 일견 모순되는 듯한 평가를 했다. 그의 이 같은 평가는 오늘날 중립적 관점을 표방하는 상당수 학자들도 같은 입장을 표명한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선구적 혜안을 보여준다. 다산의 서학 또는 천주교 관련 세간의 관심은 1936년 다산 서거 100주년을 맞이하여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일부 사회주의 계열의 인물들이 추진했던 ‘조선학운동’의 일환으로 다산사상에 대한 연구 붐이 일어나면서 다시 발흥했다. 당시 안재홍, 백남운, 최익한 등이 다산을 독립적 자존의식을 주창한 근대 국민주의의 선구자, 근세적 자유주의 선구, 신아구방(新我舊邦)을 주창한 개혁가 등으로 각각 높이 평가하자, 가톨릭교회에서도 다산을 위대한 신앙인의 모범을 보인 인물로 소개하는 기사를 다투어 쏟아냈다. 당시 대표적 가톨릭계 잡지였던 《가톨릭청년》과 《가톨릭연구》는 1935년 각각 다산 관련 특집기사를 싣고 다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사를 게재했다.

우리 조선이 나은 가장 위대한 학자로서 쓸쓸하고 적막하던 우리 근세 학술사를 호화롭고 찬란케 한 다산 정약용 선생이 기구한 일생을 마치고 별세한 지 벌써 백년을 마지하게 되었다. …일찍이 유교 선배의 한 사람으로서 한번 그리스도의 진리를 깨닫자 유학의 모든 전통적 계루를 완전히 끊어버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기를 높이 휘날리며 조선가톨릭 교회건설기의 투장으로 분투한 공로자로서 추억할 제 일층 감개무량한 바 있다. 선생이 중간에 불행히 일시 배교한 사실이 있던 것만은 선생과 우리들의 영구한 슬픔이겠으나 사람으로서 허물없는 자 누구리오. 다만 회개함으로써 귀함을 삼는다. 선생이 말년에 이르러 자기의 배교하였던 그릇됨을 진절히 통회하고 극기와 보속으로 선종을 예비하다가 드디어 완전한 가톨릭 신앙 가운데 찬류세상을 하직한 그 회개의 아름다운 표양도 가히 모범할 만하다. 30)

지난 7월, 조선 동아 중앙 삼대 신문을 비롯하여 여러 잡지사에서까지 전 조선적으로 다산선생을 기념하여 선생이 조선에 끼친 공적을 칭송할 때, 특히 가톨릭 신자들은 남다른 애착과 호감을 가지고 이에 공명(共鳴)하였을 것이니 이는 다산 선생이 자기 초년과 말년에는 열심한 가톨릭 신자이었던 관계로 인함이다. 모든 이가 다산 선생의 종교에 대하여 말은 하였으나 그중 한분은 어찌하여 다산 선생이 종교를 신봉하였던지 그 참된 이유를 이해치 못하는 모양이다. 그는 아마 다산 선생의 말년 생애보다 전반생을 주목하였고, 장구한 세월을 두고 참회(懺悔)의 눈물을 흘리던 다산보다도 일시적 실수로 배교하던 다산만을 연구한 모양이다. …그가 서거한 후 그의 전 생애를 기록하면서 말년에 이르른 그의 참된 회개생활을 부정하거나 가슴에 품고 죽은 진실한 가톨릭신앙을 덮어버리는 것은 다산 선생에 대하여 모욕이 아니될 수 없다. …역사적 사실 그대로 다산 선생의 진실한 회두와 간절한 회개를 증명하고 인정함은 결코 그의 학자로서의 명예를 털끝만치라도 손상함이 아니다. …1818년부터 1836년까지 18년이란 장구한 기간동안 진절한 통회로 자기의 전죄를 씻었고 마침내 신부가 조선에 들어온 후로는 고해성사(告解聖事)로서 사죄지은(赦罪之恩)을 받았다. … 참으로 다산 선생을 ‘조선과학계의 명성(明星)’, ‘위대한 과학자’, ‘사상계의 선구자’로 추존하여 선생이 과학의 각 방면에 정통하였음을 인정하고 칭송한다면 선생의 장구한 참회생활과 열심한 가톨릭 생활을 결코 그의 무식이나 또는 반민족적 심리에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31)

이처럼 1930년대 다산 정약용에 대한 민족주의자들과 가톨릭교회의 관심은 그의 개혁적 사상이나 과학자적 명성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다산의 서학관이나 천주교 신앙여부와 관련하여 논의되었다. 위 인용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1930년대 가톨릭교회는 이미 박해시대부터 내려오던 교회사 지식을 전수받아, 다산이 한때 배교 후 장기간에 걸쳐 회개의 삶을 살았고, 임종 시에 고해성사까지 받았다는 내용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대 일부 지식인들은 이러한 교회의 인식에 회의적 반감을 갖고 있었다. 1936년 다산 서거 100주년 기념을 전후하여 유학계 지식인들과 천주교회는 다산의 천주교 신앙 및 서학사상과 관련하여 지면을 통한 한 차례 논쟁을 벌였는데, 이때부터 70~80년이 흐른 2012년 현재까지도 다산의 천주교 신앙 지속여부(持續與否)는 여전히 미해결의 상태로 남아 있다. 학문적인 면에서 일제강점기 다산에 대한 관심과 연구의 초점은 다산 실학 형성의 외적요인, 즉 청(淸)을 통해 수용된 서구문화(西歐文化)나 청구문화(淸歐文化)의 작용에 대하여 상당한 관심이 기울어졌는데, 이는 이시기 다산학 연구의 열정이 발전하여, 조선후기 자주적으로 서구의 선진문물을 수용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하고자 했던 다산을 비롯한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경세치용(經世致用)과 애국애민(愛國愛民)의 정신을 우리 민족 구성원들에게 고취하여 일제 침략자들에 맞서 항거할 수 있는 민족자긍심과 독립의 의지로 승화되기를 바랐던 데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인다.

2) 광복(1945년)~1970년대 다산 서학의 쟁점 형성
그러다가 8・15 해방 이후 1950~1960년대에 들어오면 조선후기 사회의 내재적(內在的) 발전 요인을 실학사상에서 찾는 천관우(千寬宇), 김용섭(金容燮) 등의 연구에 힘입어, 종래 실학의 배경을 단순히 서학이나 고증학과 같은 외래사조의 영향으로만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후기의 사회경제적 변화과정이나 성리학 중심의 조선유학계의 변화 등에서 실학 발생의 요인을 찾는 연구들이 속속 등장했고,32) 다산 사상에 대한 연구도 내재적 발전론의 시각에서 연구되었다. 구체적으로 정약용의 철학사상은 개신유학(改新儒學)이나 수사학적(洙泗學的)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 반주자학(反朱子學) 또는 탈성리학(脫性理學)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증명하는 연구들이 주류를 이루었다.33)

홍이섭은 1959년 《정약용의 정치경제사상연구》34)에서, “정약용이 外面 西學을 信奉치 않았고 棄敎의 辨明에 뚜렷한 문자를 남기며, 內在的인 정신에의 영향까지 배제하려고 하였다 하더라도 그의 서학적인 흔적은 유교적인 것과 공통된 점도 있어 가려내기 어렵다. 自己中心에의 인식이 근대적인 선을 중간에 두고 前後 出入함이 없지 않았으며 일면 西歐的인 양상을 띠고 있었음이 西歐的 사상으로서 Catholicism(가톨릭)에서 영향됨이 아닌가 하게 됨은 … 문헌학적 확인이 용이치 않은 것이 반드시 부정적인 반증의 자료일 수만은 없으리라고 본다”고 하여, 다산사상에 끼친 서학의 영향에 대해서 언급했다.

이을호는 1966년 《茶山經學思想硏究》35)를 통하여 다산의 서학수용의 면모를 그의 經學(경전연구)에서 찾아내는 작업을 한 선구적 연구자이다. 이을호는, “다산이 표면상 천주교 사상에 접근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런 시사를 준 바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 어느 一隅에서는 天主敎理의 底流가 맥맥히 흐르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점이 결코 한두 구절에 그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1960년대의 연구경향을 계승한 윤사순(尹絲淳)은 1975년 다산의 경세치용(經世致用)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의 학문을 평가하면서, 다산이 “이기론(理氣論) 등 성리학의 난삽 공허한 형이상학(形而上學)적 폐단은 불교의 영향이다”고 비판했다고 기술했다.36) 윤사순은 다산을 비롯하여 박세당, 이익, 홍대용, 최한기 등이 모두 천근중시(淺近重視)의 태도로 형이하학(形而下學)을 경시하지 않는 실학적 경학관(經學觀)을 견지하고 성리학적 경학관을 부인했다고 평가했다.

1970년대에 들어오면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사관에 입각한 근대지향의식과 민족주체의식을 강조하면서도, 외래사상의 도입, 수용이 문화사상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함께 주목하는 경향이 드러난다. 다산학의 경우 다산의 수사학(원시유학)에의 경도에 주안점을 두면서도, 일정한 한계 내에서 천주교나 서학의 영향을 간과하지 않으려는 입장, 곧 다산의 서학관에 대한 보다 종합적이고 신중한 입장이 제기되고 있다. 1972년 이상은(李相殷)은 다산이 성리학의 천리(天理)를 비판하고 원시유학의 上帝天 개념을 수용한 ‘외유내야(外儒內耶)’에 속하는 학자였음을 주장했다.37)

1975년 박종홍은 〈對西歐的 世界觀과 茶山의 洙泗舊觀〉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38) 그는 이 논문을 통해서 천주교와 다산의 관계에 나름대로 관심을 갖고 천주교의 도입 및 이의 선택적 수용이라는 관점에서 다산에서 보이는 서학/천주교적 요소와 조선 구래의 수사학적 원시유학의 영향 등에 대해서 균형잡힌 시각을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박종홍은 성호학파나 북학파에 속한 여러 학자들의 천주교 비판을 소개하고, 그 영향을 받은 다산이 그의 실학에서 천주교와 서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하려 했는가를 대조적으로 서술했다. 이는 그가 다산사상에서 천주교 또는 서학의 영향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을 신중하게 표명한 것으로 이해되는데,39) 오늘날 서학과 다산사상의 관계를 각 주제별로 설명하는 대부분의 논문들이 그의 주장에서 파생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선구적이고 주목할 만한 혜안을 제시하였다.

다산은 스스로 천주학의 사상내용에 대하여 그의 저술 속에서 언급한 일이 없다. 그러므로 천주교적 세계관에 대한 다산의 생각이 어떤 것이었다고 단언(斷言)한다는 것은 삼가야 할 줄 안다. …다산이 그의 이른바 수사구관(洙泗舊觀)에서 밝히려고 한 것이 성인(聖人)의 소사지학(昭事之學)이라는 것, 거기에 천(天)을 이(理)라고 보려는 정주(程朱)의 성리학과는 거리를 가지게 되고, 오히려 천주교 선교사 이마두(利瑪竇)의 유학관(儒學觀)과 접근한 감이 없지 않으며 따라서 일면 천주교적 세계관이 연상(聯想)된다고 하여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 같다. …음양오행(陰陽五行)의 힘으로 천지(天地)의 창조(創造) 과정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본 다산은 … 천주의 뜻에 의하여 만물이 창조되었다는 천주교적 세계관과 일맥상통할 수 있음직 하다. …일찌기 정조가 인물성(人物性)의 동이(同異)를 다산에게 물은 일이 있다. 이에 대하여 다산은 ‘性에 三品이 있는데 草木의 性은 生만 있고 覺이 없으며 禽獸의 性은 生과 覺을 겸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의 性은 生과 覺을 겸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 靈하고 또 善하다. …얼핏보아 한유(韓愈)의 성삼품설(性三品說)과 비슷한 점이 있다고 할른지 모르나, 善惡의 윤리적 가치만을 기준으로 性을 類別한 한유의 방법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요 利瑪竇의 天主實義, 더 자세히는 같은 서양 선교사 畢方濟의 靈言蠡勺에서 풀이하고 있는 生魂 覺魂 靈魂의 三分法과 너무나 유사하고 그 설명이 또한 다를 바 없음을 발견할 것이다. 靈言蠡勺은 美好를 利美好, 樂美好, 義美好의 셋으로 나누고 있거나와, 다산은 嗜好를 形軀의 기호와 靈知의 기호로 나누고 있다. 耳目口體의 嗜로 性이 된 것은 形軀의 嗜好요, 天命의 性, 性과 天道를 말할 때의 性, 性善, 盡性을 말할 때의 性은 바로 靈知의 嗜好이다. 다산의 이러한 사고방식을 대번에 천주학의 영향이라고 속단함은 우선 경계하여야 할 일이요 더욱 여러 각도에서 보아 넓은 천착이 있어야 할 것이다. …죄의식(罪意識)에 관한 다산의 사상에서 천주교를 연상케 하는 점이 없지 않다. 물론 유교에는 서구의 원죄사상(原罪思想) 같은 것이 없다. …또 하나 천주학을 연상케 함직한 다산사상의 특색은 서(恕)의 强調다. …다산에 의하면 恕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推恕요 다른 하나는 容恕다. (유학의) 고경(古經)에는 推恕가 있을 뿐이요 본래 容恕는 없었다. 推恕라는 것은 自修를 主하여 나의 善을 행하는 것이요 容恕라는 것은 治人을 主하여 타인의 惡을 寬容하는 것이다. …恕로서 父를 섬기면 孝요, 恕로서 君을 섬기면 忠이요, 恕로서 民을 牧하면 慈인 것이니 이른바 仁의 방법이다. 이것도 다산의 수사구관(洙泗舊觀)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라 하겠으나, 천주학과의 관계를 모색하는 데 있어서 아직은 참고삼아 언급하는 데 불과하다고 하겠다. 이상에서 다산의 사상 속에서 천주학과 서로 통할 수 있음직한 점을 주로 다루어 보았으나, 그 반면에 천주교적 세계관과는 거리가 멀어서 서로 용납될 수 없겠다고 생각되는 점도 없지 않다. 첫째로 다산이 정력을 기울여 저술한 16권이나 되는 喪禮四箋의 내용은 어느 모로 보나 천주교적 세계관의 입장이라면 容許하기 힘들만한 대목들이 너무나 많다. …다산이 세상을 떠나매 그의 遺命으로 모든 절차를 그가 저술한 喪儀節要 그대로 준행하였다고 하거니와 그 책 卷一에 設尊이라는 대목이 있고 조석으로 上食한다고 적혀 있다. 일부 학계에서 주장하듯이 다산이 분명히 천주교에 입교한 것이 사실이라면 과연 이러한 일이 가능하였을까 의심스럽다. …하여간 다산이 천주교적 세계관을 그대로 是認하였다면 上食의 절차를 喪儀 속에 넣었으리라고 믿어지지 않는다. 다산은 소사지학(昭事之學)이라고 하여 매양 사천(事天)을 말하면서도 ‘孝悌忠信으로서 事天의 근본을 삼는다’고 하여 무엇보다도 孝悌로부터 시작할 것을 역설하는 동시에 그것이 근본이 된다고 한다. 孝悌는 본래 동양의 縱的인 상하관계를 주로 다룬 윤리인 것이요, 천주교가 이를 경시한다고 할 수는 없으나 모든 윤리, 나아가 학문의 기초를 찾을 정도로 강조하였다고는 보기 힘들 것이다. 다산의 이러한 사상은 가장 동양적인 특색을 잘 드러낸 것이요 그의 洙泗舊觀에 기인한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다산은 유학적인 현세주의(現世主義)에서 안심입명(安心立命)의 경지를 생각하였다고 하겠으나 내세(來世)의 영생(永生)을 따로 추구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현세의 생활 속에서 보람을 느끼며 마음의 안정과 만족을 찾으려는 태도라고 하겠거니와, 이것이 바로 우리 겨레의 뿌리 깊은 정신적 基底로 되어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박종홍은 소사지천(昭事之天)의 개념,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에 입각한 성삼품설(性三品說), 성기호설(性嗜好說), 죄의식(罪意識)과 용서(容恕)의 강조 등의 측면에서 다산 저술의 다수가 천주교의 영향을 받았음을 찾아볼 수 있지만, 상례(喪禮)와 제사(祭祀), 효제충신(孝悌忠信) 등의 강조, 안심입명(安心立命)에 입각한 현세주의(現世主義)와 사후세계[來世]에 대한 무언급 등의 측면에서 천주교와는 거리가 먼 동양적 수사구학(洙泗舊學)의 요소가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고 보았다. 2012년 현재까지 경학(經學), 예론(禮論), 윤리관(倫理觀) 등의 분야에서 다산사상과 원시유학 및 서학과의 관련성 또는 차이점을 함께 비교 연구한 대다수 논문들은 각론(各論)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박종홍의 논리와 대체로 동일한 범주에서 그 주장을 개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산의 서학/천주교 사상사 연구에 있어서 그의 연구업적은 후학을 위한 전형(典型, 모범적 틀)으로 평가된다.

이원순(李元淳)은 박종홍의 위 논문과 같은 시기인 1975년 〈조선후기 實學者의 西學意識〉40)을 통하여 다산 서학에 대해서도 언급하여, 다산이 남긴 천주교 관련 기록의 특성과 천주교에 대한 입장, 곧 天觀, 天命, 修身事天 등에 대하여 분석하였다. 이원순도 박종홍과 마찬가지로 다산의 저술에 그의 천주교 이해 정도를 파악할 수 있는 직접적인 언급이 남아 있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그 이유로 신유정난(辛酉政難)에 연좌되어 18년간 유배의 고초를 겪은 그가 천주교 때문에 화를 입은 일을 강하게 의식하여 그러한 기록을 문자로 남기지 않으려고 한 것으로 파악했다. 다만 그와 가까운 몇 명의 친서파 인물들로 천주교에 연루되어 죄를 뒤집어쓴 사람들의 입장을 변명해주는 기록 수편(묘지명)만이 남아 있기에, 다산과 서학의 관계는 그가 남긴 저서의 경학사상을 고찰해봄으로써 그의 유학과 서학의 관계를 유추해볼 수밖에 없는데 이는 매우 난감한 작업이라고 그 소회를 피력하였다.41) 그러면서 이원순 교수는 홍이섭 교수가 “문헌적으로 다산의 천주교 신앙을 확증해줄 자료가 없다는 것이 반드시 그의 천주교 불신앙을 反證해 준다고 볼 수 없다”라고 한 입장에 공감하면서도, 일단 현재 남겨진 다산 저술에 남은 천주교 또는 서학사상의 흔적을 탐색하는 데 우선적 관심을 두었다.

박종홍과 이원순의 위 논문들은, 오래 전부터 천주교 신자로 알려진 다산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던 천주교회사 연구자들로 하여금 다산에 대한 보다 본격적이고 구체적인 연구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였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소속의 한국교회사연구소는 박종홍의 위 논문이 나온 직후인 1976년 1월, 《한국천주교회사논문선집》 제1집을 발행하여 한국 천주교회의 초창기 설립과 관련된 배경이나 주요 인물들과 관련된 다수의 논문들을 게재하는 가운데, 다산 정약용이 초창기 한국천주교회의 설립과정과 관련된 역사를 기록한 《조선복음전래사》에 대한 최석우 신부의 논문도 실었다. 42)최 신부는 이 논문을 통하여,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달레 신부가 1874년 2권으로 된 “Histoire de l’Eglise de Corée”(한국천주교회사)43)를 편찬하면서 초창기 한국의 천주교회와 관련된 거의 대부분의 사실들을 정약용의 “l’intro- duction de l’Evangile en Corée”(조선복음전래사)44)에서 인용하였음”을 밝혔다.45) 《한국천주교회사논문선집》 제1집에는 최 신부의 위 논문과 함께 홍이섭 교수가 쓴 광암 이벽에 대한 논문도46) 함께 실어서 다산의 천주교 신앙 및 서학사상에 끼친 이벽의 역할(中庸에 대한 해석이나 초창기 전교활동 등 포함)에 대해서도 알렸다.

교회사연구소 측의 연구작업과는 별도로 1976년 조광 교수는 〈정약용의 민권의식 연구〉47)라는 논문을 통하여, 外儒內耶로 평가받던 다산 정약용의 저술에서 西學이 그의 政治思想 내지 民權意識 형성에 기여하였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기했다.48) 이 논문은 다산의 서학에 대한 연구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앞서 언급한 바 1975년에 발표된 박종홍과 이원순의 연구논문들이 다산의 經學思想에서 서학적 요소를 추출한 작업 임에 비해서, 조광 교수의 이 논문은 다산의 經世學에서 서학적 요소가 내재해 있을 가능성을 언급했다는 점에서 후 할 1990년대 박동욱, 원재연 등이 다산의 경세학, 즉 改革思想에서 서학적 요소가 있음을 입증한 논문들의 선구가 되었다고 자리매김된다.

한국교회사연구소는 1977년 5월, 연구소를 대표하는 학술지 《교회사연구》 창간호를 발행하고, 여기에 하우봉 교수의 다산 서학관련 논문을 게재하였다.49) 하우봉은 이 논문에서, 다산의 서학관계를 다룬 기존의 논문들 중 상반된 견해가 속출하는데, 이 같은 혼란과 불확실의 원인은 다산의 서학에 관한 기록의 부족, 사료의 신빙성 문제 등에 그 원인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특히 다산의 〈자명소〉(自明疏)나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의 기록을 시대적 분위기나 그 지인의 기록들을 통해서 볼 때,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왜곡된 면이 있다고 지적했다.50) 하우봉의 이같은 지적은 다산 서학연구에 있어서 사료의 비판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한 것으로 이전까지의 다산관련 논의를 한 단계 더 객관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리면서, 1980년대 중반 다산학 학술대회 때 김영호가 《여유당전서》에 대한 최초의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사료비판 논문을51) 발표하는 데에 마중물의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하우봉은, 다산이 조상제사(祖上祭祀) 폐지에 반대했고, 정미반회(丁未泮會) 때 이승훈보다 다산이 천주교에 빠져든 정도가 덜하다고 이기경(李基慶)이 증언했고, 귀양살이 중에 천주교 신앙문제에 일체 내색한 기록이 없고 사회개혁에 많은 관심을 두었으며, 불교 승려들과 교제하였던 점 등으로 보아 다산이 천주교를 포기(背敎)한 것은 인정된다고 했다. 아울러 다산의 경학(《中庸》) 연구에서 나타난 천관(天觀), 인성관(人性觀), 윤리관(倫理觀)의 특징이 서학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고, 또한 다산의 개혁사상 중 만민평등(萬民平等), 대중성(大衆性), 실천성(實踐性) 등의 특징은 그의 서학연구와 일정한 상관관계에 있다고 파악했다. 이 중 후자는 앞서 언급한 바, 조광 교수가 경세학과 서학 간 상호관련 가능성을 시사한 입장과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더 이상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없어 아쉽다.

1970년대 중반 전남대에서 이을호 교수가 주도한 실학논총이 간행된 이후, 한국 천주교회는 초창기 한국 교회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다산 정약용의 천주교 신앙 및 서학사상 등에 대한 교회사 차원의 본격적 연구의 물꼬를 텄는데, 이에 다산에 대한 일반 학계의 연구관점은 더욱 다양화 되고, 각 주제별로 주요 쟁점들이 형성되기에 이른다. 이와 관련하여 정순우 교수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52)

사회경제사적 측면에서 다산연구가 활기를 띠게 되고, 그의 경학사상에 관한 연구도 획기적인 전기를 맞게 된다. 다산 연구의 새로운 지평은 이을호 교수에 의해 펼쳐졌다. 그의 다산 경학에 대한 선구적 연구는 1980년대 이후 가히 폭발적으로 이루어진 다산학 연구의 뇌관 구실을 했다. 이 교수가 다산사상을 ‘洙泗學的 修己治人의 學’이라고 규정한 후, 이 주장은 하나의 명제가 되어 다양한 반론과 동의가 표출되었다. 다산의 사상을 과연 〈反주자학적〉 혹은 〈脫성리학적〉 성격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뒤따랐고, ‘원시 가로의 회귀’ 라는 복고적 해석에 강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또한 앞서의 그(이을호)의 주장은 다산사상의 학통과 사상적 계보에 대한 논쟁과 다산과 천주학과의 관련성에 대한 첨예한 의견대립을 낳게 하였다. 이 논쟁에는 종래 다산학 연구를 주도하던 철학과 역사학 분야뿐만 (아니라) 문학, 정치, 경제, 국방, 과학, 예술, 교육사 분야 등 실로 다양한 측면에서 논의가 전개되었고, 그 주장하는 바는 한(가지) 문제에 관해서도 해석상의 극단적인 대립을 보여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시기는 다산 연구에 있어서 ‘爭點의 形成期’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1980~1990년대, 다산 천주교 신앙과 서학사상의 쟁점 부각
다산 연구의 다양한 쟁점들이 부각될 수 있었던 것은 1980년대 초반부터 다산학 연구 학술대회가 수차례 거듭 개최된 데에 힘입은 바 컸다. 다산의 서거 150주년을 맞는 1986년을 전후하여 대우재단이 지원한 일련의 다산학술대회 발표와 토론 내용들은 민음사에서 시리즈로 발간했다. 한우근은 〈다산사상의 전개〉53)라는 논고를 통해서, 다산학에서 茶山 西學이 차지하는 위치를 두 가지 측면에서 고려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그 하나는 天主學(敎)에의 관심과 천주교 신앙이라는 면이요, 다른 하나는 서양과학 기술과 西洋文物의 수용이라는 면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修己(治心)와 治人(經世의 學)이라는, 즉 學問의 體와 用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의 西學에 대한 반향을 의미한다. 다산에 있어서도 천주학 내지 천주교는 修己 ․ 治心이라는 면에서 관심과 신앙의 대상이었으며, 서양의 과학 기술과 문물은 經世的 實踐 ․ 實用의 學, 즉 治人之學이라는 면에서 관심과 수용의 대상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산의 사상에 관한 보다 더 폭넓고 종합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길버트가 제시했듯이 연구방법의 새로운 개발과 연구영역의 확대가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우근이 강조하였듯이 1980년대에 들어서 다산학을 각 분야별로 전문화하는 가운데, 다산 서학과 관련해서도 주목할 만한 연구업적들이 쏟아졌다. 1982년 전남 광주에서 개최된 다산학술회의에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김영호가 《여유당전서》의 텍스트를 검토하여 자료수집 및 초고집필(자필이나 대필), 수정(개고), 간행, 보관, 보급 등 다산 저작물의 생산과 보관(분배)의 전 과정에 대한 체계적인 문헌학적, 서지적(書誌的) 연구의 필요성을 강하게 제기했다.54) 김영호에 의하면, 다산의 기록들은 자필(自筆) 수고원본(手稿原本)과 그의 아들, 제자들이 필서한 수고본의 필체(書體) 구별이 어렵고, 실제로 다산이 구술한 것을 그의 제자들이 받아 적거나 제자와 공동으로 저술한 경우도 있으며, 같은 원고를 3~4번씩 개고(修訂)하는 것이 보통이므로 무엇을 다산의 정고본(定稿本)으로 정할 것인가도 문제라고 보았다. 이러한 사정은 다산 저술의 집필~간행 방식이 그 자신을 포함하여 그의 아들, 제자 등 십여 명이 모여서 분업형태로 일을 했던 데55)서 비롯되는 자연스런 결과로도 해석했다. 김영호에 의하면, 1925년 을축년 장마로, 다산이 만년에 따로 집안에 쌓아놓았던 정고본을 담은 책상자들이 강물에 떠내려갈 때 현손 정규영이 결사적으로 그 일부를 건져내어 겨우 오늘에 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같은 김영호의 언급을 통해서 볼 때, 다산의 천주교 또는 서학관련 자료들은 필사과정에서 여러 차례 수정이 가해지거나 첨삭됨은 물론이고, 다산 사후에는 집안에 보관하는 중에 수재, 화재, 부식 등 자연적인 요인 외에도, 천주교 박해기에 흔했던 의도적 폐기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1936년 다산 저작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종합간행물인 《여유당전서》가 출간될 때에도 자료를 정리하고 편집을 담당했던 이들에 의해서 고의 또는 실수 등으로 수고본 자료들이 첨삭되거나 아예 배제될 수도 있는 등 자료의 원본상태가 변형 또는 왜곡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현실화될 수 있었다. 실제로 정인보, 안재홍 등이 주관한 1936년 신조선사의 《여유당전서》 간행 시에는 다산이 따로 자신의 저작물 편집순서를 적어놓은 자찬묘지명의 목록과는 다르게 편집자들의 편의에 따라 편집 간행되어, 다산 만년 저작의 경우 시, 잡문 등 문학 작품들의 순서가 뒤섞인 경우가 많다56)고 한다.

박병호(朴秉濠)는 다산의 법사상(法思想)을 다루면서, 《欽欽心書》에 나타난 다산의 흠휼사상(欽恤思想)은 그의 수사학적(洙泗學的) 수기치인지학(修己治人之學)에 바탕을 둔 천명사상(天命思想)에 기초하는 것임을 밝혔다.57) 박병호는 다산과 서학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그의 다산 저작에 대한 서지학적 검토는 다산 서학과 관련된 첨예한 쟁점들을 객관적으로 해결할 실마리를 제공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또 다산 법사상을 천명사상으로 규명하고자 한 시도는 《中庸》 등 유교경전에 대한 경학연구와 법제개혁이라는 경세학의 이론이 서로 연결될 수 있는 고리를 만들어 주었다는 점에서 각각 의미있는 연구로 평가할 수 있다.

한편 다산의 경학사상을 통하여 다산철학에 끼친 서교(西敎)의 영향에 대해서는 1970년대 중후반 이후 천주교 측에서 제기해온 주장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쏟아졌다.58) 이을호 교수가 〈다산경학 성립의 배경과 성격〉59)을 통해서 경학연구, 그중에서도 상제관(上帝觀)에 미친 서학의 영향에 대해서 언급한 데 대하여, 토론자는 다산의 문집 중에 종교적 교리는 직접 언급되고 있지 않으므로 속단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하면서 유가적 관점에서 상제관념을 보다 충실히 해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속단 금물’ 주장은 앞서 본 바와 같이 박종홍이 이미 1970년대 중반에 주장한 내용과 동일하다. 이에 대해 참석자들도 이 문제에 관한 인식 기준은 다산 저서를 일차적인 실증 근거로 파악하고 추리해야 된다는 전제 하에 자명소와 묘지명의 배교 발언은 부정하기 어렵다는 데에 공감했다. 그러나 일부 논평자는 다산의 주변 인물들 다수가 서교(西敎, 천주교)와 관계가 깊었고 다산 역시 일찍이 천주교 세례까지 받았다는 자료를 참고하고 다산 자신이 박해의 피해를 확대시키지 않기 위해서 천주교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표명을 하지 않았음을 짐작한다면 실제로 서교의 영향은 있었으며, 만약 다산 생존 시에 서교가 전래되지 않았더라면 과연 오늘날의 다산 학설이 형성되었을 것인가 의문을 표하면서 서학의 영향을 긍정했다.

다산의 서학사상과 관련된 연구자들의 토론은 1983년 서울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진행된 ‘정다산과 그 시대’ 워크샵에서 계속되었다. 최석우 신부는 정다산의 서학사상을 발표하면서, 다산의 서학사상은 그의 천주교 신앙생활에서 영향을 받고 또 그것을 바탕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 다산의 서학적 생애를 활동기(1784~1795), 배교기(1795~1811), 회심기(1811~1836) 등 3시기로 나누어 다산과 천주교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한 후, 중요한 서학사상의 요소별로 보유론적 견해와 다산의 견해를 서술했다. 60)이어서 속개된 토론에서는 다산이 말년까지 계속 천주교 신자였는가에 대한 의문, 다산 경학에 보이는 상제천(上帝天)에 대한 해석, 다산 사상에 끼친 불교나 양명학의 영향, 천명지성(天命之性)을 유학적 개념으로 볼 것인가 서학적 개념으로 볼 것인가, 수양(修養)과 윤리적 측면, 교회기록과 관찬기록의 진실성 및 가치 등에 관한 문제들이 제기되었다.61)

발표자 최 신부는 다산과 서학의 관계에 대한 부정적 견해들과 부분적 영향만 인정하는 입장들을 비판하면서, 다산이 그의 생애를 통해서, 특히 배교한 후에도 유배지에서 신앙활동에 참여했고 만년까지 교회 계명을 지키다가 최후에는 성사(聖事)를 받고 선종했다는 사실을 교회 측 사료를 통해 입증했다. 이에 대해서 주로 다산이 남긴 문집에 근거하여 다산이 경학연구와 유교적 정신의 실학적 입장을 제도적으로 구현하는 데 힘쓴 유학자였다는 입장, 다산의 천주교도 여부는 개인의 내면적 신앙문제이고 민족사적 시각에서 그의 사상을 파악할 때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 다산 사상 속에는 불교, 양명학 등 다양한 요소들이 내재하므로 천주교의 비중을 지나치게 높여서 설명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주장 등이 제기되었다.

토론에서는 다산의 천관(天觀)이 원시유교의 천관과 꼭 일치하지 않는 사실에서 종래 다산경학을 수사학(洙泗學)이라 규정했던 입장을 비판하면서, 다산은 천주교의 신관을 받아들여서 원시유교에서 미완성된 모호한 인격신(人格神)의 개념을 보유론적(補儒論的)으로 완성시켜 천주교적 신(神) 개념의 종교성을 뚜렷하게 제시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다산의 천(天) 개념에 내포된 초월성(超越性), 인격성(人格性), 주재성(主宰性) 등에는 창조자, 구원자, 심판자 등의 가톨릭적 개념이 결핍되어 있고 다산 저술에 인간의 원죄(原罪)나 내세(來世)의 개념 등이 결여되어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다산사상을 유교와 천주교의 공통기반으로 이해해야지, 천주교적인 것으로 단정하는 것은 성급하다는 견해도 제시되었다. 또 발표자가 다산의 경학 속에 본체론적(本體論的)인 철학적 인식을 넘어서 있는 서학구조(西學構造)의 종교성이 중시되어야 하며, 외유내야(外儒內耶)의 삶을 통해서 윤리, 인간, 자연의 측면에서 서학구조가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한 데 대해, 다산의 생활태도가 기본적으로 효제충신(孝悌忠信)의 유교적 덕목을 실천하는 것이었으므로 계시(啓示)를 받으며 기도하는 기독교적 신앙보다는 거경(居敬)의 유교적 수양태도를 견지했다는 반박도 나왔다.

또 사료의 진실성 논란과 관련하여, 다산 만년의 천주교적 삶을 규명할 수 있는 자료가 교회 측 자료 밖에 없으므로 객관적 타당성에 취약점이 있다는 비판에 대해서, 달레나 다블뤼의 기록 등 교회 측의 사료가 문집에 나오는 묘지명과 그 내용을 비교해 보더라도 사료적 진실성이 입증되며, 다블뤼 주교의 비망록이 다산 사후 22년(1858년)이란 비교적 가까운 시기의 것이므로 신빙성이 보증된다고 설명했다. 한편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이 비본(秘本)으로 전해진 사실은 그 진실성을 말해주는 것이고, 이 묘지명에서 다산 스스로 천주교도임을 부정하고 있다는 반론에 대해서, 묘지명은 사후에 공개(公開)되는 자료이므로 반드시 진실성을 확보했다고 보기 어려우며, 반면에 다산의 ‘조선복음전래사’는 다산이 신앙인이었고 교회활동에 참여했음을 증명하는 극비본(極秘本) 자료이므로 더욱 참된 기록이라고 반박했다.

1983년 ‘정다산과 그 시대’ 워크샵에서는 이상의 토론 외에도, 다산의 신앙과 업적(저술)을 반드시 일관되게 신앙인의 입장에서만 해석하려고 하지 말고 ‘신앙인으로서의 다산’과 ‘다산의 학문적 업적’을 분리하여 연구하는 것이 다산 사상을 보다 올바로 이해하는 방법이 될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는데, 이러한 견해는 쟁점이 되는 다산 만년의 신앙문제에 대해서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다산의 저술을 통해 발견되는 서학(西學)과의 유사점이나 차이점에 주목하려는 태도로, 일찍이 이원순 교수가 언급한 이후 1990년대 이후부터 2012년 현재까지도 다수의 학자들이 심정적으로 동조하는 다산 연구 방법론에 해당된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다.

1986년 이원순은 그때까지 집필했던 논문들을 모아 단행본 《韓國天主敎會史硏究》(한국교회사연구소 간)와 《朝鮮西學史硏究》(일지사 간)를 차례로 펴내고 그의 천주교관과 서학관에 입각하여 다산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기술을 하였다. 다산은 주자와 달리, 음양이 만물의 근원이 될 수 없고 태극이 창조력을 가진 것도 아님을 밝혔다. 다산은 천(天=上帝)을 성경(誠敬)으로 섬겨야 하며, 천명(天命)에는 득위지명(得位之命)과 부성지명(賦性之命)이 있으며, 부성지명은 성지호덕지명(性之好德之命)과 사생화복지명(死生禍福之命)의 두 가지인데 천(天)으로부터 인간에게 품부(稟賦)된다고 보았다. 또 인간은 본래 육신의 기호(形軀之嗜好)와 영신의 기호(靈神之嗜好)가 있는데, 전자는 금수지성(禽獸之性)에 근거한 인심(人心)이며, 후자는 도의지성(道義之性)에 근거한 도심(道心)으로 마땅히 인심을 절제하고 도심을 살려가야 하며 그렇게 하는 노력이 수신사천(修身事天)의 길이라고 보았다. 이원순은, 다산에게 있어서 제천(祭天)은 외형적인 제례에 의한 하늘을 섬기는 사천(事天)의 방법이었다. 다산의 사천론(事天論)은 권선적공(勸善積功) 행위와 미사의 제례에 의한 천주공경의 교(敎)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보았다(이상 《韓國天主敎會史硏究》).

다산 서학관련 토론은 다산 서거 150주년을 맞는 1986년 3월부터 12월까지 10개월 동안 매월 1~3회씩 이루어졌던 다산 학술발표회를 통하여 더욱 성숙한 차원으로 전개되었다. 재일교포 사학자 강재언(姜在彦)은 〈정다산의 서학관〉62)을 통하여 다산의 천주교와 서양과학 기술에 대한 태도를 실학적 활용론(實用性)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63)

조선에서의 天主敎 傳道史의 시점에서 볼 때, 西敎에 대한 정다산의 자세는 불철저할 뿐만 아니라, 일정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反西敎的이기도 하다. 그러나 茶山經學을 살펴볼 때 西敎와의 내재적 관련이 상통되는 측면과 상충되는 측면이 있어서 그것이 西敎에 대한 불철저성으로 표현되었을 것이며, 특히 ‘廢祭祀’ 문제가 천주교와 결별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정다산의 洙泗學的 경학사상은 그 上帝觀이나 人性論에 있어서 마테오 리치에 대표되는 예수회의 補儒論的인 천주교리와 상통되는 부분이 많을 뿐만 아니라 정다산은 오히려 천주교리에서 사사를 받아서 자기의 경학세계를 더욱 풍부하게 확충(擴充)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반면에 다산 경학에서의 孝論은 《천주실의》에서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상충된다. 天主를 上父, 國君을 中父, 家君을 下父라 하고 下父에 거역하더라도 上父에 따라야 하며, 심지어 上父에 비하면 君臣이나 父子는 兄弟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때 孝悌를 인륜의 근본으로 보는 다산경학과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다. …중국에서의 천주교파의 교체에 따라 조선에서도 祖上祭祀 문제에 대한 자세가 천주교 신앙여부를 판가름하는 試金石으로 제기되었다. 이 무렵 정다산은 천주교와 결별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다산경학에서 孝論의 성격으로 보아서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정다산은 비록 西敎에 대하여 불철저했으며 심지어 背敎 문제도 있었으나 西學受容에 대한 그의 긍정적 자세는 종시일관(終始一貫)하다.64)

강재언은 다산과 서학의 관계에 대한 유관(有關, 동질성), 무관(無關, 차별성)의 양측면을 모두 지적한다는 점에서 일제강점기 최익한 및 1970년대 박종홍의 주장과 같은 논조를 보여준다. 강재언은 결론적으로 다산이 효제(孝悌)를 인륜의 근본으로 보고 있었기에 서교적(西敎的) 입장(천주교 신앙)을 포기하고 자기 생애를 유학자(儒學者)로서 관철했다고 보았다. 한편 그는 “정다산이 유학의 ‘본연지성(本然之性)’이란 용어를 불교에서 나온 것으로 吾儒(우리 유교)의 ‘천명지성(天命之性)’과는 빙탄(氷炭)과 같이 차원이 다른 것으로 부정했다”고 보면서, 다산의 성삼품설(性三品說)은 리치의 혼삼품설(魂三品說)과 매우 비슷하다고 보았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 다산의 서학에 대한 논의 중 ‘다산의 천주교 신앙(信仰) 견지여부(堅持與否)’에 대해서는 1990년 국문학자 김상홍 교수가 단행본을 출간하고, 이를 통해서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교회 측 주장에 대한 반박을 전개했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이에 대해 1991년 김옥희 수녀가 김상홍의 견해에 대해 종합적인 반론을 시도했고 최석우 신부도 1993년 다시 김상홍 교수의 견해를 반박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보강했다. 이후 양측간 논의의 주요 쟁점은 “다산을 천주교 신자로 볼 것인가? 아니면 유학자로 볼 것인가?” 라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평행선처럼 상반된 두 진영의 입장을 현재까지도 각각 줄곧 대변해오고 있다. 65)

김상홍은 다산의 천주교 신봉 여부에 대해 1981년부터 1990년까지 약 8~9회 논문으로 표현한 그의 주장을 종합하여 단행본 《다산학연구–부 다산학 연구논저 총목록–》66)을 간행하고 다산 천주교 신봉론에 대한 자신의 반론을 완결하고자 했다. 김상홍은 “다산은 외배내신(外背內信), 외유내천(外儒內天)의 이중적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천주교를) 외배내배(外背內背)하였고 외유내유(外儒內儒)의 표리가 일치된 삶을 살았음을 종합적으로 규명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하였다. 김상홍은 다산이 젊은 시절 한때 천주교를 수용하였으나 유교의 일파로 인식했고 문원(文垣)의 감상물로 알았으며, 30세 때 신해옥사(辛亥獄事)가 발생하자 제사를 폐지하는 교회 입장에 실망하여 천주교와 절연(絶緣)하였고, 이로부터 죽을 때까지 철저한 유학자로서의 삶을 살았으며 결코 천주교를 신봉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산이 만약에 천주교 신앙생활을 했다면 그의 명성으로 인해 결코 보안이 유지될 수 없었고, 당시 추문이 나서 1836년 4월 4일 중국으로 추방의 길을 떠난 유방제 신부에게 4월 7일 운명한 다산이 종부성사(終付聖事)를 받을 수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여유당전서》에 실린 묘지명들은 그 자신의 양심 언문이므로 결코 신빙성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67)

이에 대해 김옥희 수녀는 1991년 《한국천주교 사상사II–다산 정약용의 서학사상 연구–》68)를 통해서 “다산은 자신의 일생을 기록한 《自撰墓誌銘》(壙中本)에서 일생을 소사상제(昭事上帝, 하느님을 섬김)하였다고 하였을 뿐 천주교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이나 배교 문제를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음을 보아서 유학자, 서학자를 따지기 전에 진심으로 하늘을 섬겼던 위대한 진인(眞人)이었다”고 하면서, 다산이 천주교 신자였음은 명백하다고 했다. 다만 그의 저서는 기본적으로 보유론(補儒論)과 그 구조가 같은 수사학(洙泗學), 즉 원시유학의 표현으로 그의 서학사상을 기록했기 때문에 그의 신앙에 대한 면모가 은닉되고 상징화되어 있는 특징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몇 가지 문초기록이나 극한상황에 내몰렸을 때 던진 몇 마디 말로 그것이 마치 인격적인 그의 내면세계 전체인양 생각하여 배교자(背敎者), 해교자(害敎者) 등의 극단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은 대단히 고졸한 인식방법이자 역사적인 사실을 왜곡하기 쉽다고 하였다. 한편 다산이 공식적으로 천주교 배교를 선언하는 문건, 즉 현존 《여유당전서》(1936년 정인보 등이 편찬한 영인본) 안에 실린 〈自明疏〉와 다산의 현손 정규영(丁奎英)이 1920~ 1921년 사이에 편찬한 다산의 일대기를 기록한 《俟菴先生年譜》의 〈자명소〉 내용이 상이(相異)하다는 점, 특히 《사암선생연보》에서는 《여유당전서》 〈자명소〉에 실린 천주교를 비난하는 글(문구)이 정확하게 삭제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사암선생연보》의 〈자명소〉를 읽어보면 다산이 천주교를 떠났다거나 혹은 배교했다는 내용이 전무(全無)하여 오히려 몇 마디 다산이 서술한 것 같지 않은 잔인한 용어들만 빼면 천주교를 변호하는 듯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다. 김 수녀는 다산의 생존 시를 포함한 천주교 박해기의 사회적 분위기는 천주교에 대한 내용이나 관련 서책들이 소실되거나 감시되고 있었으며, 또한 다산이 천주교와 무관하다고 옹호했던 측에서 다산의 본심과 관계없이 ‘회오지정’(悔悟之情)을 강조하여 기록에 첨가했을 수도 있으므로, 다산의 천주교 배교를 상징하는 자명소를 비롯하여 다산의 기록으로 알려진 서학관련 기록들은 문헌비판(文獻批判), 즉 서지적(書誌的)인 분석이 시급히 요망된다고 지적했다. 한편 다블뤼 주교의 기록들은 그가 조선에 입국하여 20년 동안 거주하여 당시 사정에 밝았고, 또 그가 사료를 수집할 당시에는 교회창립 이래 여러 가지 사건들을 직접 목격한 목격증언자들이 수없이 살아 있어서 그 증언을 들을 수 있었으므로 그의 기록은 사실이라고 했다.

김옥희 수녀는 다산의 생애와 관련된 기록들의 분석 외에도 다산의 저술에 드러난 서학사상에 대해서도 체계적인 분석을 시도했다. 그리하여 다산의 《중용》(中庸) 주(注) 해석에 나타난 지천관(知天觀), 《心經密驗》에 나타난 심성론(心性論)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상재천(上帝天)의 소주처(所住處)’인 인간의 심(心)에 내재하는 영명지천(靈明之天), 다산의 경세제민적(經世濟民的) 치심관(治心觀)을 드러내는, 다산이 특별히 강조한 인(仁)과 서(恕)의 실천덕목들이 성리학적 차원이나 범주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김옥희 수녀는 다산의 심성론에서는 영명지천의 상제와 대월(對越)하는 것에 그 중점이 있고[對越上帝], 수덕론(修德論)에서는 이웃과 상호관계의 덕(德)인 인(仁), 서(恕), 화(和), 애(愛)로 구성된 이타적(利他的) 인애심(仁愛心), 즉 [捨身愛人]의 실천이 그 핵심이라고 결론지었다. 1990년대 초에 김옥희 수녀는 1980년대에 최석우 신부가 체계화한 다산의 천주교 신앙과 서학 관련 천주교회의 입장을 좀 더 보강하고 한층 발전시켰다고 평가할 수 있다.

천주교회 측의 다산 서학과 천주교에 대한 연구성과는 1993년도 다산문화제 기념논총인 《다산 정약용의 서학사상》69)을 통하여 또한번 보강되고 집대성되었다. 이 책자는 최석우 신부, 금장태 교수, 박동옥 교수, 김옥희 수녀 등 4인의 논문을 모아 편집한 다산의 친서학론(親西學論)을 종합한 단행본 서적이다. 우선 최석우 신부는 〈다산 서학에 관한 논의〉70)를 통하여 이전에 다산이 지은 묘지명들과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를 축조대조의 방법으로 그 상관성과 유사성에 대해서 검토한 것의 후속작으로, 이번에는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가 그 내용의 상당부분을 인용하고 있는 원본(原本) 자료 중의 하나인 다블뤼 주교(Mgr. Antoine Daveluy 1818~1866)가 기록한 備忘記 중 제4권에 해당하는 《朝鮮殉敎史備忘記》(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의 내용을 다산의 묘지명과 비교 분석하였다. 최석우 신부는 다블뤼의 비망기에 의하면, 다블뤼 주교가 로마로 보낸 조선 순교자 210명에 대한 설명을 붙일 때 다산의 형인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 순교자에 대한 다산의 증언을 여러 번 인용했는데, 그 증언은 아주 큰 무게가 있어 보인다고 기록한 내용을 들었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는 정약종에 대한 다산의 증언은 현존하는 다산의 묘지명들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으므로, 이것이 바로 다산 묘지명과는 다른, 다산이 저술했다는 《조선복음전래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왜냐하면 다블뤼 주교가 조선의 순교자들에 대한 역사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한 때(1856~1857년경)는 다산이 선종한 지 약 20년이 지난 때로서 다블뤼가 정약종 순교자에 대한 사실을 기록하면서 그 동생인 다산이 증언한 것을 인용하였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다블뤼가 인용한 다산의 증언은 곧 정약종을 포함한 초창기 순교자들에 대한 것을 비롯하여 초창기 교회의 성립 및 발전과정과 주요한 박해의 실상 등을 기록하였다고 보여지는 《조선복음전래사》를 지칭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견해는 최석우 신부가 《조선복음전래사》에 다산의 형 정약종의 순교에 대한 기록이 들어있다고 서술한 것에 근거한다. 최 신부의 이 글로 보아서, 김상홍 교수가 다산서학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면서 “다산이 썼다고 다블뤼 주교가 언급한 《조선복음전래사》가 별도의 책으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다산이 쓴 7편의 묘지명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 견해71)와는 정면으로 상충하게 된다. 최 신부는 다블뤼 주교가 다산의 《조선복음전래사》가 매우 간략하고 그 서술 내용이 정확하다고 언급한 부분도 소개했다. 최 신부는 이 책의 저술연대를 다산의 선종 직전인 1830년대로 추정하면서, 이 책이야말로 다산을 포함한 친서파 남인 학자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척사론자(斥邪論者)들, 특히 한때 친우였던 이기경(李基慶)이 척사론의 입장에서 천주교 탄압의 내막을 기술한 《闢衛編》에 답변하는(대항하는) 성격을 지닌 교회 측과 친서파 남인들의 입장을 피력한 기록일 것이라고 보았다. 최 신부는, 다블뤼 비망기에, “다산이 유배지에서 돌아온 만년에 자주 묵상을 했으며, 그 묵상한 일부와 미신을 반박하고 무식한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교리서 등 여러 종의 책자를 저술하여 그의 집에 보관했는데, 이 책자들은 박해 중에 상당수가 땅속에서 썩어 없어졌으나 상당수는 다블뤼 주교 당시까지도 다산의 집에 보존되어 있다”고 기록된 사실을 밝혔다.

최석우 신부는 아울러 다산이야말로 ‘보유론자(補儒論者)’ 또는 ‘외유내야(外儒內耶)’라기보다는 ‘완전한 유학자(儒學者)이자 동시에 완전한 천주교인(天主敎人)’으로서, 그의 내면에서 유교와 천주교가 서로 대등한 입장에서 서로 만나고 공존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다산에 대한 최석우 신부의 이 같은 해석은 김상홍 교수가 다산이야말로 철저하게 천주교를 배척한 ‘외배내배(外背內背)한 유학자’로 규정한 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입장으로 다산서학에 대한 그의 인식의 특징을 잘 말해준다. 최석우 신부는 ‘정다산의 서학사상’을 규명하기 위해 다산의 西學的 生涯를 活動期(1784~1795), 背敎期(1795~1811), 回心期(1811~1836) 등으로 3분하고, 다블뤼 비망기의 다산 관련 기록과 황사영 백서에서 다산이 비록 한때 천주교에 해를 끼쳤지만 마음속에는 늘 사신(死信, 드러나지 않는 믿음 또는 죽음을 각오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고 기록한 부분 등을 토대로 다산과 천주교, 서학의 관계를 조명했다. 또한 다산에게서 발견되는 서학적 요소를 신관(神觀), 태극론(太極論), 이기론(理氣論), 음양론(陰陽論), 귀신론(鬼神論), 인성론(人性論), 선악론(善惡論)을 포함한 덕행론(德行論), 수양론(修養論)을 겸한 사천론(事天論) 등으로 구분하여 그 내용을 축조적으로 서술했다. 또 최 신부는, 다산이 살던 시기가 박해기였고 주위의 정적으로부터 항상 감시를 당하고 있던 상황에서, 다산의 저술은 반드시 ‘내적비판’(=사료비판)을 해야 하며, 하등의 내적 비판을 하지 않고 액면 그대로 믿으려는 주장은 극히 단순한 논리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내적 비판’은 어떤 저술의 신빙성을 판단하고 그것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 저자가 말한 것만이 아니라 나아가서 말하고자 한 것, 솔직히 말할 수 없었던 것 등을 고려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최 신부는 이와 같은 내적비판의 필요성을, 신유박해 때 국청에서 다산이 문초를 당하면서 한 변론의 진실성 여부, 즉 책롱사건에 대해서 그 책롱이 다산의 형인 정약종의 것이 아님을 극구 부인한 사건을 예로 들어, 다산도 죽음 앞에서는 선의(善意)의 위증(僞證)을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정약종 자신이 책롱을 자신의 것으로 시인했고, 정씨 친척 중 한 사람도 ‘다산이 그 책롱에 대해서 정치적 이유에서 부인했을 것’이라고 말한 사실 등이 다블뤼 비망기에 기록되어 있음을 볼 때, 다산의 말이나 기록도 그가 극한 상황에 처해진 경우 사실과 달라진 점도 있었다는 것을 최 신부가 강조한 것이다. 한편 최 신부는 당시 교회서적에 나온 ‘천주(天主)’라는 호칭을 다산이 그의 저술에서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음에 대해서도, 다산이 일생동안 사회적인 지목(邪敎의 魁首?)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노출시키려고 하지 않았던 것으로 해석한 금장태 교수의 견해에 동의하면서, “만약 정약용이 그의 저서에서 ‘천주’란 말을 노출시켰다면 과연 그와 그의 가족이 살아남았겠으며 그의 저서가 오늘에 전해질 수 있었을까?”라고 반문하고, “이러한 정치적 이유 때문에 다산은 서학의 교리와 역사에 관해서만은 몰래 저술을 하고 또 그것들을 비밀리에 가족으로 하여금 후세에 전하려 했을 것이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천주즉상제(天主卽上帝)’는 마테오 리치 보유론(補儒論)의 핵심이지만, 다산은 이점에 대해서 침묵을 지켰는데, 이는 이른바 ‘침묵(沈黙)의 증언(證言)’이란 역사 해석이론에 의하면 다산이 왜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고, 그 침묵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유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최석우 신부의 위 논문과 나란히 게재된 금장태 교수의 〈다산의 유학사상과 서학사상〉에서는 “1791년 또는 1801년 이후 정약용의 신앙생활 여부는 그의 사상을 해석하는 데 중요한 전제 조건이 될 수 있는 문제일지라도 불충분하거나 불확실한 사료로서 단정하기를 보류하고, 그의 사상 특히 경학사상 속에서 천주교 교리의 영향과 그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 보다 확실한 접근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금 교수의 다산서학 연구방법론이 피력되어 있다. 이러한 방법론은 앞서 1970년대에 이원순이 언급한 것으로 1930년대 이래 우리 학계에서 80여 년간 지속되고 있으며, 특히 30년이나 지속되고 있는 최석우 신부와 김상홍 교수 간의 논쟁 즉 ‘다산의 천주교 신앙 지속여부’에 대한 첨예한 논쟁의 직접적 영향권에서 벗어남으로써, 보다 자유롭고 객관적인 중립지대에서 실증적인 다산 서학 연구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부류의 입장으로 보인다. 금장태 교수는 이 논문에서 다산의 ‘靈明主宰之天’과 관련하여, “인간은 하늘로부터 영명(靈明)을 마치 서학의 영혼(靈魂)처럼 부여받지만, 주재성(主宰性)은 하늘의 고유한 속성으로서 양도되지 않는다. 하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천주교의 교리이면서 유교의 고전 이념이라는 놀라운 양자의 조화를 보여주었다. 특히 하늘은 신(神)의 세계에 속하고 인간은 귀(鬼)로서 신(神)과 혼동되거나 일치되지 않는다는 신(神) 개념은 유교전통으로부터 천주교로 옮겨간 것이라 할 수도 있고, 동시에 유교에 천주교 교리를 받아들여 새로운 유교사상을 구성했다고도 할 수 있다”고 그 철학적 의의를 부여했다. 한편 금 교수는 다산이 천주교 신앙에 빠졌을 때에도 제사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못 보았다고 언급하는 점으로 보아 그의 교리지식이 예수회의 보유론(補儒論)적 입장을 따르는 것임을 보여준다고 하여 다산서학의 성격을 보유론적으로 해석하는 하나의 근거로 삼았다. 금 교수는, 다산이 23세 때 즉 그가 천주교 신앙에 푹 빠져 있을 때 해석한 〈中庸講義〉에서 제기한 문제들이 만년인 73세 때 〈매씨서평〉을 서술할 때까지도 스스로 부정하는 입장을 보이지 않고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음은 다산 경학사상의 기본특징인 “유교 이념을 천주교 교리의 구조와 더불어 재해석한 것”임을 말해주며, “주자학이 불교의 영향을 받았지만 불교가 아닌 것처럼, 다산의 경학사상이 비록 천주교의 영향 속에 형성되었다고 하더라도 기독교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곧 다산의 경학사상은 천주교 교리를 흡수함으로써 유교사상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준 것이다”고 보았다.

박동옥 교수의 〈牧民心書에 나타난 茶山의 西學觀〉은 1818년에 12부 72조로 완성된 다산의 대표작 《목민심서》의 청렴, 절용, 근면, 하늘, 상선벌악, 불교, 귀신붙이, 음사, 자유, 진궁, 호적 등의 항목에서 《천주실의》의 논리와 상통하는 부분과 인도주의 정신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하였다. 기존에 다산 서학 연구는 주로 다산의 6經4書에 대한 저술, 즉 경학(經學)의 논리나 서술구조로부터 서학적 요소를 추출하는 것이었으나, 이 논문에서는 다산의 저술 중 1表2書(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로 상징되는 경세학(經世學)에서 그의 서학사상을 추출했다는 점에서, 일찍이 조광 교수의 개척적인 연구성과72) 이후, 한동안 그 맥이 이어지지 않다가 다산 서학 연구의 분야를 경세학 쪽으로 확충하는 데 일조를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1995년 발표된 원재연의 〈茶山 閭田制의 사회사상적 배경에 관한 일고찰〉73)도 박동옥의 위 논문과 같은 맥락에서 다산서학 연구사상의 의미를 짚어볼 수 있다. 원재연은, 다산이 38세 때인 1799년(정조 23)에 저술한 〈田論〉에 나오는 여전제(閭田制) 토지개혁론은 중국 고전인 〈周禮〉에서 ‘여(閭)’ 개념을 차용하거나 〈孟子〉의 왕토사상(王土思想)을 그 이론적 토대로 하고 있는데 이는 분명히 서학과 관련없는 유학적 배경이라고 보았다. 74)그러나 ‘여전제’의 내용 중에서 만민개로(萬民皆勞), 공산설(共産說)과 재산공유설(財産共有說), 협동농장론(協同農場論, 노동계획관리) 등은 그가 탐독했던 《天主實義》 등 서학서에 나타나는 서학적 배경과도 일정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서학서인 《천주실의》 제3, 제8편에 나오는 구절과 〈전론〉 三, 五에 서술된 거의 동일하거나 유사한 구절들을 일일이 비교 대조했다.75)

1990년대 들어서 다산 서학 연구에서는, 1980년대 연구에서 나온 서학의 수용이 성리학과 실학, 또는 성리학과 다산학 사이의 단절성 내지 변화의 근본 동인을 제공했다는 학설을,76) 이전과는 다른 방법론을 구사하여 해명하고자 하는 새로운 시도들이 등장했다.

이동환은 〈다산사상에서의 ‘上帝’ 도입경로에 대한 序說的 고찰〉77)에서 다산의 상제(上帝) 개념 도입 배경으로 천주교의 영향설을 비판하고 이황 이후 남인학파의 사상적 전통이 작용한 것이라고 해석했으나, 이후 〈다산사상에 있어서의 ‘上帝’ 문제〉78)에서는, 퇴계 학통이 갖고 있던 도학(道學)의 종교성을 주된 매개로 해서 부차적이나마 서학의 수용에도 영향을 받아 다산의 상제 개념이 도입된 것으로 해석하였다.

유초하는 〈정약용의 우주관〉(고려대 대학원, 1990)에서 서구적 방법론인 물질과 정신, 몸과 마음의 특성 및 관계 등의 구도에 비추어 다산의 근본적 사유를 재구성하려는 다소 모험적인 연구논문을 작성함으로써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유초하는, 다산이 보는 우주를 2가지의 근원적 실재와 이에 대응하는 2가지의 존재영역으로 구성된다고 보고, 태극과 상제를 각각 근원으로 하는 유형의 기(氣)의 세계와 무형한 영명(靈明)의 세계가 있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그의 주장은 상제를 태극의 한 변형으로 이해했던 종래의 일원론적 이해태도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학설[心物二元論]을 제기한 것으로 평가된다. 유초하는 다산의 사유방식이 리(理)의 보편관념의 실재를 부정하는 의미에서 관념론을 벗어났지만, 정신의 실재를 주장하는 측면에서는 유물론과도 다르며, 그렇다고 가톨릭 신앙체계나 서양철학의 심신이원론과도 명확히 구분되는 특징을 지닌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다산이 정신을 성립시키는 근원자로서 상제를 도입한 것은 종래의 선험적 도덕형이상학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점이라고 지적했다.

비교항목
다산의 저술 논문
《천주실의》
爲政者選擇
〈原牧〉邃古之初 民而已 豈有牧哉···推而共尊之···皇王之本起於里長 牧爲民有也
〈湯論〉天子者 衆推之而成者也
(제8편) 敎化皇···主敎者之位···不配婚故無有襲嗣 惟擇賢而立
財産共有
〈田論〉三, 一閭之人 咸治厥事 無此疆爾界
(제8편) 又聞尊敎之在會者無私財 而各友之財共焉
萬民皆勞
〈田論〉五, 士何爲游手游足
(제3편) 壯則各有所役 無不苦勞···士人晝夜 劇神殫思焉
士民順序
〈田論〉五, 農···工···商···士
(제3편) 農夫···客旅···百工···士人
勞動計劃管理
〈田論〉三, 事無自專 每聽長者之命焉
(제8편) 又聞···事無自專 每聽長者之命焉
한형조는 〈朱熹에서 정약용에로의 철학적 사유의 전환〉79)을 통하여 인간을 자연과 연속적으로 이해하는 주희 철학체계를 다산이 근본적으로 해체하고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새로운 철학적 구성을 제시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같은 다산의 패러다임 변화작업이 이황(李滉) 이후 이익(李瀷)을 거쳐 정약용에 이른 경학적 전통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 전통 속에서 서학을 흡수하고 비판할 수 있는 서학과의 사상적 친연성(親緣性)을 인정하지만, 서학의 영향에 무게중심을 두는 것은 지나친 것이라고 비판한다.

유초하와 한형조의 연구에서 아쉬움이 있다면 이기론(理氣論)을 비롯한 다산의 형이상학적 개념체계에 집중해서 논의하고 있을 뿐 인륜 내지 예론의 차원으로 확대하여 논의를 전개하지 않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80) 한편 유초하와 한형조의 논문을 새로운 방법론을 제기한 것으로 평가한 정순우는 〈다산연구의 제논점과 쟁점〉81)에서, 다산의 천주교 신앙 유지와 배교 여부, 자명소의 진위 여부 등 다산학과 천주교의 관계는 다산학 연구 중 가장 예민한 쟁점으로 남아 있는 부분이지만, 《천주실의》를 포함한 한역서학서와 다산 문집과의 세밀한 비교를 통하여 다산사상과 천주교와의 관계를 해명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는 앞서 언급한 이원순, 금장태의 주장과 동일한 선상에 있다.

유권종 〈茶山禮學 연구〉(1991, 고려대)은 예학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다산과 천주교는 상호무관하다고 평가했다. 유권종은 다산이 서술한 상례(喪禮)를 분석한 결과, 다산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천주교와는 다른 유교적 신념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다산이 천주교를 일시 접한 것은 어디까지나 보유론적(補儒論的)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권종은, 다산이 무형(無形)한 영명성(靈明性)에 기반하여 귀신(鬼神)을 설명하면서, 목주(木主), 혼백(魂帛) 등 구체적 형상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성리학적 다의적(多義的) 귀신 관념과 행례의절(行禮儀節)을 비판하지만, 천주교의 신 개념과 다산의 신 개념을 연관지어 설명하려는 방식은 배제했다.

4) 2000년~현재, 다산 서학사상 연구의 국제화와 연구사 정리의 성행
2000년 이후의 연구도 1980~1990년대와 마찬가지로 다산 서학과 관련된 다양한 쟁점들이 계속 부각되었지만, 이전의 내용을 약간 보완하여 확대 재생산된 성격이 짙다. 다만 이전 시기와 다른 점은 다산의 사상을 당대(조선후기) 청, 일의 유학자들과 비교하는 동아시아 사상사적 차원의 연구가 등장하고, 또한 현재 동아시아 삼국을 포함한 미국, 유럽 등의 상당수 외국인 학자들도 다산학(서학 포함) 논의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다산의 서학사상 연구가 점차 국제화되는 느낌을 받게 된다. 또한 1993년 정순우가 다산과 서학관련 내용을 포함한 연구사 정리를 시도한 이후, 2000년대에 와서는 앞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차기진(2004년), 이봉규(2005년), 백민정(2007년), 김문식(2008년), 구만옥(2008년) 등의 연구사 정리논문이 계속 나오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같은 연구사 정리의 성행은 그만큼 다산학, 특히 다산사상과 서학(천주교)의 관계 내지 다산 서학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한 논저들이 2000년 이후 급증하였기에 이를 사상사적 관점에서 정리해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다산의 上帝 관념을 서학의 수용과 연관지어 설명하는 금장태는 〈社稷祭와 禘祭에 대한 다산의 禮學的 관점〉82), 《다산실학탐구》83) 등을 통하여, “다산이 사물을 신격화하는 인식에서 벗어나 제사대상을 상제의 신좌(臣佐)로서 천신(天神)과 인귀(人鬼)의 체제로 이해하는 새로운 주장을 제시했는데, 이는 전통적 神 개념의 입장에서 벗어나 새로운 질서를 제시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다산은 한대(漢代) 이후 음양오행설과 참위설에 의해 변질된 제사의 종교적 신성성(神聖性)을 확보하려고 했다”고 보았다. 이러한 금장태의 주장에 대해 이봉규는 〈다산학 연구의 최근 동향과 전망–근대론의 시각을 중심으로–〉84)에서, 금장태의 연구는 동아시아 경학사의 흐름 속에서 다산의 제사론이 갖는 의미를 파악하는 데 소홀한 약점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다산이 제사 대상을 상제를 보좌하는 천신의 일종으로 지시(地示)를 재해석하려는 데에는 유일신(唯一神)의 관념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이는 성호좌파로부터 영향을 받은 천주교의 신 개념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고 파악했다. 그러나 다산이 《천주실의》 등에 나오는 천주교의 신 개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정면으로 언급한 적은 없다고 하면서, 그 이유는 신유옥사(辛酉獄事)로 당한 가문의 피해 때문으로 파악했다. 이처럼 다산은 천주교를 객관화하여 정면으로 탐구할 수 없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자신의 사유 속에 침잠된 신 개념을 암묵적이며 간접적인 형태로 드러내면서, 동아시아 전통에 대해서는 사상의 측면에서보다 고증의 측면에서 다룸으로써 동아시아 사상사의 문제의식들이 고증을 통한 반증작업 속에 함몰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보았다.

차기진은 《조선후기의 西學과 斥邪論 연구》85)의 제3장 〈정약용의 천주교 수용과 서학사상〉에서, 다산 서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산의 서학 인식에 대한 외형적 연구에 속하는 천주교 신앙과 다산 생애의 관계에 대한 고찰도 중요하지만, 경학을 비롯한 다산의 학문 속에 나타난 천주교와 서양철학 등 서학의 요소에 대해서 파악하는 내면적 연구가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다. 앞서 언급한 이원순, 금장태와 비슷한 입장인데, “중요한 것은 그가 만년에 이르러서도 천주교 비판론을 직접 제기하지 않았고, 역으로 서학 내지는 천주교 교리를 들어서 이를 옹호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인데 그 이유를 생각해야 하고, 그 해답을 “그의 경학사상 속에 들어있는 보유론적 인식에서 찾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차기진은, 다산이 修己를 위해 六經四書를 연구했으며, 治人을 위해 一表二書를 저술함으로써 이 둘을 本末로 삼은 것처럼 서학의 요소는 우선 수기(修己=本)를 위한 경학연구와 상관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궁극적으로는 치인(治人=末)을 위한 경세론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하였다. 다산의 경세론, 즉 개혁사상과 서학의 관계에 대한 일정한 상관성을 언급한 이 부분은 앞서 언급한 조광 교수 이래의 하우봉, 박동옥, 원재연 등의 견해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또 다산이 일생동안 추구해온 유교의 윤리관은 천주교의 孝論과 다를 수밖에 없고 그의 예학(제사인식 포함)은 천주교와 상관성을 논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의 스승 권철신과 마찬가지로 다산은 제사문제로 인해서 천주교 신앙을 버리고 전통 윤리를 택하게 되었다고 파악했다.

차기진에 의하면, 다산의 경학은 기존의 주자학 비판에 그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더 나아가 (서학 외에도) 양명학을 접하고 필요한 부분을 수용하였다. 다산의 경학은 특히 명덕(明德), 친민(親民), 인(仁)을 효제자(孝弟慈)라고 한점, 공자일관(孔子一貫)의 도를 서(恕)한 자로 본 점, 사천(事天)을 내세워 원시유학(洙泗學)의 종교성을 회복하고 송유(宋儒)의 이기성정설(理氣性情說)을 선불교(禪佛敎)라고 배격한 점 등의 특징이 있는데, 이는 윤휴(尹鑴)로부터 이익(李瀷) → 이병휴(李秉休) → 권철신(權哲身)으로 이어 내려오는 학문성향에서 영향 받은 바라고 보았다. 또 다산의 萬物論은 리치와 마찬가지로 사물을 자립자(自立者)와 의뢰자(依賴者)로 구분하고 의뢰자에 속하는 리(理)와 기(氣)를 사물의 본질로 보는 이기설(理氣說)을 비판하는 동시에, 주자학에서 우주만물의 원리로서 상천(上天)과 동일시해온 태극(太極)의 속성을 부인하고 태극은 유형(有形)의 시원(始原)으로서 음양을 배태했지만, 무형의 궁극자(窮極者)인 재제지천(宰制之天)이 태극보다 더 근원적인 존재라고 파악했는데, 이는 만물의 창조주요 주재자로서 천주(上帝之天)를 인정한 것과 다를 바 아니라고 본 것이다.

차기진은, 다산의 천관에서 서학의 영향을 받은 점은 영명주재지천을 설정한 점, 천을 종교적인 신앙대상으로 생각한 점, 상제의 유일성을 인정한 점 등이라고 파악했다. 차기진은, “다산에 의하면 귀신이란 상제가 감격임조(感格臨照)한 것이라고 보았는데, 이는 마테오 리치가 귀신은 오직 천주의 명에 의해서만 조화의 일을 관장할 수 있다고 한 설명과는 다르다”고 파악했다. 다산에 있어서 귀신은 상제와 같은 주재적(主宰的) 위치에서 절대적 권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인간에게도 조물주(上帝天)의 영명무형(靈明無形)함이 부여되어 있으므로, 하늘과 인간이 동일한 인격성을 지닌 것[天人合一]으로 이해했다고 보았다. 또한 다산의 천관에는 천주교에서 말하는 구원(救援)의 형태가 담겨 있으며, 상제의 속성에 조물주로서의 유일성, 창조성, 인격성을 부여하고 있기에 원시유학의 종교관과 천의 인격화 경지를 이미 뛰어넘은 종교적 단계로 승화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이 점에서 다산의 천관은 순교자 정약종(丁若鍾)의 천주인식보다 천주의 개념에 더 근접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차기진은 다산이 일찍부터 원시유학, 주자학, 양명학, 서학의 심성론(心性論)을 섭렵한 후에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독창적인 심성론을 완성했다고 보고 그것은 주자의 성즉리설(性卽理說)을 반박하는 성기호설(性嗜好說)이라고 파악했다. 차기진은, 다산의 수양론(修養論)은 지천(知天)에서 출발하여 천명(天命, 天德)에 이르는 수신사천(修身事天)을 추구한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서 성의(誠意), 계신공구(戒愼恐懼), 신독(愼獨) 등을 실천윤리로 제시했으며, 이러한 수양론은 윤휴 이래의 천관, 이병휴가 중시한 성의(誠意)와 신독(愼獨)의 수양론, 권철신과 이벽이 중시한 계신공구(戒愼恐懼)와 천명사상(天命思想)에서 영향을 받았고, 더 나아가 수사학의 윤리적 규범을 뛰어넘어 천주교 교리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파악했다. 차기진은 다산의 수양론, 천관(상제론), 심성론이 상호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으며 서학 내지 천주교와 관련되어 있었다고 보았다.

차기진은, 다산의 이러한 서학사상에도 불구하고 직접 서학을 옹호하거나 반대로 비판하는 (별도의) 글을 남기지 않은 이유를 일생동안 이와 관련하여 지탄을 받으면서 의식적으로 서학사상을 직접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했다고 볼 수도 있으며 그가 처한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고 보았다. 다산이 자신이나 동료들에게 위협이 닥칠 때에만 서학 특히 천주교와의 관련성을 부인한 것은 이 같은 사정과 관련되며, 특히 자신을 천주교 신자로 만들어 고난의 길을 걷게 한 이벽을 전혀 원망하지 않고 훗날까지 그의 학문을 사모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차기진은, 다산이 늙도록 천명지성(天命之性)의 회복과 소사상제(昭事上帝)를 중시하면서 하늘의 총애(天寵)를 강조한 것은 보유론 안에서 설명할 수 있지만, 그의 효론(孝論)이나 예론(禮學)은 천주교 교리와는 상치될 수밖에 없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산이 서학의 내용을 수용한 것은 개혁의식이 강했던 그의 경세론이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는 서학의 과학적 사유방법과 종교적 세계관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다산의 학문은 “주자학 비판 → 수사학으로의 회귀 → 서학수용 → 새로운 세계관의 형성”으로 전개되었다고 차기진은 이해했다.

이봉규는, 〈다산학 연구의 최근 동향과 전망–근대론의 시각을 중심으로–〉86)에서, 다산이 理의 실재성을 부정하면서 대신 구체적인 덕목으로 효(孝), 제(弟), 자(慈)를 강조한 것, 《中庸》의 ‘미발(未發)’ 개념에 대한 주희의 해석을 부인하는 것 등은 서학보다는 양명학의 수용을 통해서 유학전통을 새롭게 해석하던 성호좌파(星湖左派)로부터 계승된 것이라고 파악했다. 그러므로 정약용의 철학사상이 성립되는 과정을 해명하기 위해서 서학과 함께 명청대 사상사의 변화에 대한 성호학파의 대응방식이 다산에게 미친 영향을 좀 더 세밀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봉규는 정약용 저술에 대한 定本의 확립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다산의 저술이 간행되고 전수된 과정, 현존하는 판본들에 대한 정밀한 조사, 그리고 정본을 이용한 譯註가 필요함을 역설했다.87) 또한 다산의 학문적 연원을 해명함에 있어서 학문적으로 정치적으로 다산이 받고 있었던 다양한 영향들에 대해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서학과 서교(천주교) 외에도 성호좌파의 사상, 정조(正祖)와의 관계, 청대 고증학과 일본 고학파를 비롯한 동아시아 사상사의 조류들, 중앙관료와 지방관료로서의 정치적 경험들, 북학파를 비롯한 국내의 사상적 조류 등 이들 다양한 요소가 모두 다산의 저술 속에 깃들어 있으므로 이들 중 어느 한 가지 측면에만 지나치게 강조하는 연구는 다산의 복합적인 문제의식을 단순화시켜 연구의 객관성과 균형성을 상실케 할 뿐만 아니라 다산의 치열한 시대적 고민과 개혁적 의도를 간과하게 된다고 보았다. 아울러 이러한 폐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양한 층차를 함께 고려할 수 있는 학제 간 공동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 다산의 사상을 세계사적 전개 과정에 대한 동아시아 지식인의 대응이라는 측면에서 상대화시켜 연구할 필요가 있으며(일국사적 시각에 매몰되어 다산만이 최고라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해야한다고 봄), 근대화 또는 자본주의화의 시각에서 조선후기 사회를 바라보지 말고 동아시아의 향후 역사 속에서 어떤 인간공동체를 실현해나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전망을 담고 연구에 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영배는 〈茶山哲學과 天主實義의 패러다임 比較硏究〉88)에서, 다산의 저술들과 《천주실의》에 나타나는 개념체계 사이에 이를 테면, 실체와 속성의 구분을 통해서 리(理)의 실체성을 부정하는 방식, 물체와 정신의 구분, 이성능력과 자유의지를 도덕의 기반으로 설정하는 것 등의 측면에서 구조적 동일성이 존재한다고 파악했다. 그러나 그 동일성을 근거로 다산이 천주교의 내세에 대한 종교적 신념을 수용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라고 보았다. 송영배는, 다산이 《천주실의》의 개념을 수용하여 이루고자 한 것은 명상적이고 관념적인 성리학의 학설을 실천적이고 윤리적인 학설로 전환시키려는 것이었다고 해석했다.

안영상도 〈천주교의 수용과정에 나타난 사상적 變容에 관한 연구〉89)를 통하여, 《천주실의》에 드러난 보유론의 특징에 대해서 논했다. 손홍철은 〈조선후기 천주교 수용의 학술사적 의미 고찰–다산 정약용과 신서파, 공서파를 중심으로–〉90)에서, 다산의 학문적 연원은 퇴계를 중심으로 한 남인 계열의 학맥과 서학이라고 보았다. 또 다산의 생애와 철학은 한국 천주교회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나, 다산철학과 천주교와의 관계는 다산철학의 형성 전과 후가 다르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다산의 천주교 신앙여부에 대해서는 첫째, 〈自明疏〉라고 불리는 〈辨謗辭同副承旨疏〉에서 천주교와의 단절을 선언한 후 천주교를 전혀 신앙하지 않았다는 주장, 둘째, 결국 천주교 신자로 회귀하여 죽음을 맞이하였다는 관점, 셋째 다산의 철학사상에 내재한 서학적 요소를 중시하는 관점 등으로 연구자의 논의가 분류된다고 보고, 자신은 세 번째 관점을 중시한다고 했다.91) 이는 앞서 언급한 이원순, 금장태, 차기진 등의 입장과 동일한 것이다.

손홍철은, 다산의 상제 개념은 초월적이고 창조자라는 점에서 천주교의 천주와 매우 유사한 것이기는 하나 창조주보다는 주재자, 즉 강력한 실천을 추동하는 힘의 의미로 사용했기에, 다산은 맹자와 같은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실천성을 강조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손홍철은, 다산은 리(理)가 도덕적 선(善)의 근거가 되지 못하고 리의 주재성(主宰性)이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실천성을 보장할 수 없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다산은 퇴계, 율곡이 말한 천인합일의 논리를 부정했다고 이해했는데, 이 점은 바로 앞에서 언급한 차기진의 견해와 반대된다. 손홍철은, 다산이 상제를 “하늘과 땅과 귀신과 사람의 바깥에서 하늘과 땅, 귀신과 사람, 만물을 조화하며, 그것들을 주관하고 제도하며 (본성대로) 잘 성장하도록 돌보는 존재”로 인식했다고 파악했다. 손홍철은, 다산이 천을 공허한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 실체로 보고, 유학의 최고 이상인 성인(聖人)이 되기 위해서 신독(愼獨)으로서 하늘을 섬기고 힘써 남을 배려함으로써 인(仁)을 구하고 그 (求仁의 노력을) 영원히 쉬지 않아야 한다고 파악한 것으로 이해했다. 손홍철은, 다산은 천주교의 보유론을 한층 더 체계화하여 자신의 철학으로 발전시켰다고 보았다.

2012년은 다산 서학 연구에 있어서도 새로운 활로의 계기를 찾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2012년이 다산 탄생 25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2012년에만 벌써 수차례의 다산학술대회가 개최되었고 다산서학과 관련해서도 많은 논의가 있었다. 2012년 6월 9일 개최된 ‘다산 탄신 250년 기념학술대회’는 다산 연구의 새로운 모색을 주제로 했다. 이날 첫 발표로 나선 김언종은 〈茶山의 經學, 그 대개 및 의의〉에 대해서 발표했는데, “다산의 경학 저술은 청대 초엽까지의 훈고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하고 이에 더한 탈성리학적이자 독창적인 의리학으로 완성된 것이다”고 하여 서학과의 관련성을 아예 배제하였다.

동 학술대회 두 번째 발표자인 조성을은 〈丁若鏞과 敎案〉을 통하여, 다산의 생애 중 출생부터 1795년까지에 한정하여 서교(천주교)와 관련된 내용을 주로 관찬기록과 다산의 문집을 이용하여 축조적으로 고찰하였다. 천진암 ․ 주어사강학회(1779), 갑진선교(甲辰宣敎, 1784), 을사교안(乙巳敎案, 1785), 정미교안(丁未敎案, 1787), 신해교안(辛亥敎案, 1791), 을묘교안(乙卯敎案, 1795) 때 각각 다산이 천주교와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를 다루었다. 조성을은, “다산이 인격적 주체로서의 상제관(上帝觀)을 갖게 되는 계기는 1784년 여름 정조가 출제한 《中庸》 조문에 대해 이벽과 토론한 것에 있었고, 이것이 발전되어 《喪禮四箋》과 《周易四箋》에서 그 해석의 토대에 상제를 두는 것으로 발전했고 다음의 《尙書》 관련 일련의 주석 작업에서도 상제에 토대를 두어 다산의 경학은 상제를 토대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기술했다.

동 학술대회에서 김상홍은 〈茶山의 ‘秘本 墓誌銘 7편’과 天主敎〉에서, 안춘근(安春根)이 수집한 다산 수사본(手寫本)인 《洌水全書續集》 권8(한국학중앙연구원소장 장서, 810.819.정62.여24=4)의 표지에는 ‘秘本 墓誌銘’으로 표기되어 있고 그 속에는 ‘貞軒(李家煥)墓誌銘’, ‘茯菴李基讓墓誌銘’, ‘鹿菴權哲身墓誌銘’, ‘梅丈吳錫忠墓誌銘’, ‘先仲氏(丁若銓)墓誌銘’, ‘壙中本 自撰墓誌銘’, ‘集中本 自撰墓誌銘’ 등이 실려 있는데, 이 묘지명들은 신유년(1801)의 옥사(獄事)가 정적(政敵)을 제거하기 위해 무고한 선비들을 희생시킨 사화(士禍)였음을 밝힌 일종의 백서(白書)라고 했다. 그런데 이 기록은 공서파에 대한 정면도전이 되고 공개될 경우 또다른 화를 자초할 것이므로 후손들에게 세상에 공개하지 말라고 한 것임을 설명했다. 한편 김상홍은, 다산이 그의 셋째 형 丁若鍾의 묘지명을 짓지 않은 것에 대해서 순교한 정약종의 삶이 유교적 세계관에서 보면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기에 비록 형이지만 생애에 관한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이라고 해석했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권일신, 황사영, 이승훈 등의 묘지명도 다산은 짓지 않았다고 했다. 김상홍은, 교회 측이 말하는 당시로서는 불온문서인 《조선복음전래사》를 저술했다면, 정약종의 묘지명을 비본이라도 남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보고 《조선복음전래사》의 존재를 부인했다(이전의 단행본에서는 달레나 다블뤼가 다산의 저술로 기록한 《조선복음전래사》는 바로 다산이 지은 비본 묘지명 7편을 가리킨다고 해석했음).

동 학술대회에서 정민 교수가 발표한 〈茶山 逸文을 통해본 승려와의 교유와 강학〉에 대한 논평을 한 허흥식은 다산의 생애와 관련하여, “다산의 생애는 한국의 사상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데, 먼저 유교의 경학에서 출발하여 가톨릭인 서학에 기울었다가 탄압과 유배로 이를 포기하고 실학에 몰두하면서 (유배지) 인근의 불교계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고 알려졌다”고 전제하고, “다산이 만년에 불교계와 관계가 깊었다고 하지만, 다산은 불교가 남긴 문화유산의 중요성을 느꼈을 뿐이고 불교사상의 위대함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있다”고 했다. 이어서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의 견해를 인용하여 “다산이 진심으로 불교사상에 매료된 것은 아니어서, 강학에서 주로 스님에게 유교경전만 강의하고 불교의 이론서를 강의하거나 토론한 근거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 허흥식은, “다산보다 나이가 적지만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고승들과 교류가 많았고 전각(篆刻)을 지도하여 소산(小山) 오규일(吳圭一)을 명장으로 키웠는데, 이 오규일이 (1830년대에) ‘約翰’[요한]이란 다산의 전각(인장)을 새겼는데, 만약 다산이 만년에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다면 이런 전각을 새겼을 리가 있을까 의문이다”고 했다. 허흥식이 말한 다산의 인장에서 ‘約翰’은 다산 정약용이 1784년 겨울 수표교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에게서 천주교 영세 때 받은 ‘세례명’ 요한(John)의 한자식 표현으로, 이 인장은 세워진 상태로 보면 성모상(마리아) 형태로 되어 있어 더욱 천주교와의 관련성을 잘 말해주는데, 인천의 송암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국 불교사를 전공하는 허흥식이 다산의 종교에 대해서 다산이 불승과 어울렸지만 불교에 동화되지 않았고 오히려 죽을 무렵 천주교 신앙을 간직했던 것으로 본 것은 매우 인상적인 발언이었다.

동 학술대회에서 노경희는 〈다산 저술의 전승과 유통에 대한 서지학적 고찰–다산가장의 고본에서 신조선사의 『여유당전서』에 이르기까지–〉를 발표했다. 이에 의하면, 다산의 고본(稿本)은 첫째 다산의 지시에 따라 오늘날 ‘다산학단’이라 칭하는 아들과 제자들에 의해서 필사되었으며, 둘째, 여러 차례 수정, 가필이 이루어졌으며, 저술에 따라 초고본, 재고본, 삼고본 등 이본(異本)이 전승되어 저술 내용의 변천과정도 살필 수 있으며, 셋째 다산 저술의 정고본(定稿本)이 포함되어 있거나 정고본이 아니더라도 정본(定本)을 확정하는 데 가장 기본자료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또한 노경희에 의하면, 다산의 저술은 다산 생전에도 몇 차례의 계기를 통해서 전체적인 체제가 재정비되고 내용 또한 수정, 보완된 바 있으며, 사후에도 후손과 제자들에 의해서 여러차례 정비되었다고 한다. 노경희의 이 같은 진술에 따르면, 다산이 저술한 수고본 기록들이 다산 사후에 책자로 간행되기 전에 제자들과 자손들에 의해 변형, 삭제, 첨가되었을 가능성이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천주교회 측이 다산의 저서로 주장하는 《조선복음전래사》를 비롯한 천주교 관련 저술도 아직 박해기인 1836년~1880년대 사이에 집안에 미칠 화를 생각하여 어떤 형식으로든 없애버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더구나 다산의 큰아들 정학연(1783~1859)은 말년(대략 1855~1856년경?)에 비록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했지만, 그전까지는 천주교야말로 자기 집안을 폐족으로 망친 철천지원수로 여겼다고 한다. 그러므로 다산의 큰 아들 정학연이 다산 사후인 1836년부터 1850년대 중반까지 약 20년간 천주교에 적대감을 품고 집안을 꾸려갈 때 그가 선친 다산의 글을 정리하고 편집했다면, 이때 상당수의 천주교 관련 저술들은 어떤 형태로든 제거(폐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2012년 7월 5일부터 7일까지 3일간 다산학술문화재단이 주관하고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한 ‘다산탄신 250주년 기념 다산학 국제학술회의’가 열렸다. 여기서도 다산 서학과 관련된 다수의 논의가 나왔다.

2012년 7월 5일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1일차 대회에서 송재소는 〈다산학 연구의 諸問題〉를 발표했다. 송재소는, 다산과 천주교와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이 중요한데, 다산이 젊은 시절 천주교와 접했기 때문에 직간접으로 천주교의 영향을 받았을 것임은 자명하므로 천주교의 교리가 다산사상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밝혀야 한다고 했다. 특히 다산이 주자학의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새로운 사유체계를 형성하는 데에 천주교가 과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는가? 그의 상제론과 성기호설(性嗜好說)은 천주교 교리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자연과 인간의 연속성을 부정하고 자연과 인간을 이분법적으로 파악하려는 다산 자연학의 이론적 근거가 서학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다산의 자연과학 저술이 동양의 전통적인 과학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것인가? 아니면 서학을 단순히 도입한 것인가? 어디까지가 다산의 독창적 견해인가? 등에 대한 문제를 해명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또한 여유당전서의 정본화 작업의 필요성과 그 의의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동 학술대회에서 박철상은 〈간찰을 통해본 다산–文集 未收錄 簡札을 중심으로–〉라는 발표문을 통해서, 다산처럼 간찰에 많은 의미를 부여한 인물도 없으며, 누구보다도 간찰을 쓰고 보관하는 일에 민감했는데, 이는 일찍부터 간찰이 사람의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편 해배 후인 1821년경 다산은 갈수록 쓸쓸함과 외로움 때문에 견디지 못하는 그의 심정을 간찰에 담았다고 한다. 이러한 언급은 결과적으로 볼 때, 다블뤼의 기록을 인용하여 다산이 말년에 친구를 적게 만나고 자기 방에서 자주 묵상했다고 한 최석우 신부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면서, 다산이 유유자적 소요하는 삶으로 만년을 보냈으며, 다산이 양심을 걸고 쓴 기록물들은 사실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김상홍 교수의 주장을 반박할 근거를 제공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동 학술대회 제2일차(7월6일) 발표자인 한형조는 〈유신론적 주자학과 다산학 사이의 대화〉에서, 〈자명소〉에서 다산이 한 말을 분석하여, “다산은 처음 西敎(천주교)가 유문(儒門)의 별파(別派)라고 생각했다가, 곧 황허탄괴(謊虛誕怪, 허황되고 괴이쩍음)를 깨달았다고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서학이 하늘을 거역하고 신을 모독한다[逆天慢神]고 단정했다. 요컨대 다산은 가톨릭의 신학과 인간관, 그리고 제도적 종교의 도그마와 그 의례에 공감하지 않았다. 다산이 동의한 것은 세상 너머에, 세상을 지배하는, 지성과 의지를 가진 초월적 존재가 존재한다는 것, 그것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다산의 천관(天觀)을 분석했다. 특히 다산이 상제를 말하면서도 기독교의 핵심인 계시를 말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다산의 상제는 벙어리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형조는 “물론 그의 신, 또는 하느님(天) 관념의 형성에 가톨릭이 깊이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다산이 초월적 신을 믿었던 것은 분명하다”고 기술했다. 이어서 “하늘이 선한 본성을 주고도, 선악의 갈림길에서 고투하게 한 것이 다 ‘하느님의 의도’라는 것이 아닌가. 하느님이 알고도 그렇게 시키신다”(天非不知而使之然也). 그래야 선(善)이 귀하다는 것을 증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톨릭의 논리이고 또한 칸트의 도덕철학에서 만나는 것이기도 하다고 기술했다. 초월적 존재, 신 혹은 하느님을 ‘인간적 존재’로 생각한 것은 주자학에서는 낯설다. 주자는 “인간적 숙고나 기획”과 연관시키지 말 것을 누누이 주문하지 않았던가? 바로 이점에서 다산의 부정과 해명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다산을 가톨릭과 연관시키고 싶어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다산-주자학-서학의 지형도’란 장에서는 “다산의 통렬한 주자학 비판에도 불구하고, 다산과 주자학의 거리는 (다산과) 가톨릭과의 거리보다는 훨씬 가깝다. 다산 신학과 주자학은 1) 둘다 ‘합리적 이성’으로서 ‘神을 말하고 있고, 2) ‘일상’과 ‘사회’, 그리고 ‘정치’ 안에서 신을 말하고 있다. 3) 공히 ‘종교적 도그마와 교회, 그리고 따로 드릴 예배’로서 神을 의식하지 않았다. 다산이 주자학처럼 신학을 종교가 아니라 정치로 회귀시킨 것을 보라. 다산은 아마도 주자학의 옹호자인 선배 안정복의 《천학문답》의 가톨릭 비판에 거의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한형조와 같은 날 뒤이어 발표한 아일랜드의 Kevin N. Cawley는 논문 Traces of the Same within the Other : Deconstucting Tasan’s Christo-Confucianology(타자 안에 있는 동일자의 흔적들 : 다산의 그리스도–유교학 해체하기)에서, “천주실의를 통해서 발견한 다산의 가톨릭 신앙은 박해로 인해 유교적인 전통으로 돌아갔지만, 주희(1130~ 1200)의 이론체계를 재해석하여, 그가 재개념화한 유학 안에서 그리스도교 개념의 잔존을 허용한 궤도로 방향을 정했는데, 그 유학 안에서 상제는 곧 천주였다”고 주장했다.

같은 발표에서 김영식은 〈정약용 사상과 학문의 실용주의적 성격〉에서, “다산은 학문과 사상, 생활방식 전반에서 실용주의적 경향을 지녔기에, 진지하고 심오한 공부와 성찰에도 불구하고 근본주의자, 원칙주의자, 교조주의자가 되기 힘들었고 독단론에 빠지기도 어려웠다. 다산은 기독교를 두고서도 받아들일 만한 것은 받아들이되, 그에 완전히 빠지지는 않았으며 유가 전통에 기본적으로 반하는 결정적인 문제가 드러났을 경우에는 단호히 버리는 태도를 보였으며 서양과학 기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고 이해했다. 이러한 실용주의적 입장은 위 한형조의 일상과 사회, 정치 안에서 신을 말한다는 입장과 유사성이 발견된다.

동 학술대회의 3일차(7월 7일) 발표자로 나선 김상홍은 〈다산의 문학연구〉에서, 그가 1987년 발표한 〈다산의 천주교 신봉론에 대한 반론–최석우 신부의 논문을 읽고–〉92)은 “다산이 표리부동한 삶, 外儒內天한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천주교와 결별한 후 철저하게 外儒內儒로 일관하였음을 논증하여 다산의 천주교 신봉 여부에 대한 논란에 종지부를 찍음으로서 다산학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자평했다.

같은 날 동 대회에서 발표한 네덜란드의 Boudewijn Walraven은 Tasan’s Writings as a Resource for the Histor

ical Anthoropo- logy of Late Chosŏn Society(조선후기 사회에 대한 인류역사학 자료로서의 다산의 저술들)이란 논문에서, 다산의 저작에 대해 Don Baker가 “다산은 어떠한 사상체계라도 그 장점과 단점을 인식하는 데 개방적인 매우 미묘한 사상가였지만, 그가 인격적 최고신에 대한 신앙을 옹호하던 때조차 근본적으로는 유교의 범주에 머물렀다”고 한 말을 인용하면서, “다산이 살았던 조선후기 사람들을 배타적인 유교, 불교, 혹은 도교의 신앙인으로 구분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가톨릭 신앙을 배타적으로 선택한 정하상은 순교했지만,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그런 선택을 결코 하지 않았으며, 사적인 영역에서 자신들의 개인적 기호에 적합한 사상과 실천을 위해 여기저기 찾아다녔다. 따라서 그들에게 가톨릭, 유교, 불교와 같은 하나의 배타적인 종교적 레벨을 붙여야 한다고 주장하면 그것은 그들이 살았던 정신세계를 왜곡하는 것이다. 다산은 그의 공직생활을 제외한 전 생애를 통하여 불교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갖고 있었음이 확인되는데, 이는 개인적이고 사적인 생활의 경우 공식적 관점에서는 이단으로 볼 수 있는 신앙과 실천의 형태들을 위한 풍부한 공간이 있었던 것이다”고 기술했다.

2012년 8월 13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개최된 다산 학술대회는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 선정기념 학술 심포지엄으로 그 주제는 “다산사상과 서학”이었다. 이렇게 다산사상에서 서학(西學)만을 따로 떼어서 심포지엄을 주최한 것은 이것이 아마도 1930년대 이후 80년 동안의 다산학 연구사에서 결코 흔치 않았던 일이었을 것으로 본다. 이 대회에서 송영배는 〈다산에 보이는 『천주실의』의 철학적 영향〉이란 논문을 통하여, “경학과 관련된 다산의 여러 저술들은 다산이 《천주실의》를 처음으로 접했던 23세 때로부터 30년쯤 지난 51세(1812년)부터 73세(1834년)까지 그의 만년기에 대부분 저술되었다”고 파악하면서, “다산은 《천주실의》에 소개된 서구적인 윤리사상의 구도를 적극적으로 원용함으로써 ‘명상적 관념적인 성리학’의 패러다임을 ‘실천적 윤리중심’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시킬 수 있었다. 다산철학과 《천주실의》에 나타난 철학적 사유의 기본틀 사이에는 구조적인 동일성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1) 만물이 근원적으로 ‘이성을 가진 존재’(有靈之物)와 ‘이성이 없는 존재’(無靈之物)로 구분되며, 2) 만물 중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이성능력과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만이 도덕적인 행위를 할 수 있고 도덕의 문제는 오로지 인간의 실천적 활동에만 귀속된다. 즉 인간 외의 자연계에서는 도덕 실천의 문제를 물을 수 없다는 점이다”고 했다. 이어서 “다산철학의 결정적 의의는 결국 성리학적 천인합일론(天人合一論)의 폐기인 동시에 공맹 등의 선진 유학에 보이는 경세론, 즉 인도(人道)의 적극적인 실현(복원)에 있었다. 다산은 《천주실의》로부터 중요한 서양철학의 개념들을 차용했지만, 현세에서의 ‘자아’의 인격완성을 지향하는 유교인의 정신자세는 그대로 견지했다. 다산은 동서철학 융합의 위대한 작업을 해냈다”고 평가했다. 여기서 송영배가 “다산이 유교의 천인합일을 부정했다”고 본 점은 앞서 언급한 손홍철과 동일하며, 차기진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송영배의 이 발표에 대해서 토론자 백민정은 리치와 다산의 차이점에 대하여 조목조목 짚었다. 다산의 심성 가운데에는 선천적인 도덕감정, 측은지심(惻隱之心), 양지양능(良知良能), 효제자(孝弟慈)의 정감이 가장 뿌리깊게 각인되어 있었으나, 《천주실의》에서 강조된 이성의 추론능력은 다산의 심성론에서 다소 부차적인 사안이었다고 했다. 《천주실의》에 보면 리치는 오히려 양선(良善 : 잠재적인 도덕의 가능성)을 습선(習善)에 비해 상대적으로 폄하하고 있으나, 다산은 효제의 도덕감정을 인간의 고유한 윤리적 토대로 매우 강조했고 측은지심 역시 도심(道心)의 한 종류로서 누구보다 중시했다. 리치는 인간의 본래 마음을 백지로 비유했지만, 다산은 효제자의 선천적 정감으로 가득찬 명백한 유교적인 마음이었다고 파악했다. 리치는 이성적 추론 및 판단능력을 강조하면서 선천적 도덕감정은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했지만, 다산은 권형의 선택능력을 강조하면서도 가장 근본적인 윤리적 토대를 ‘천명지성(天命之性)’ 즉 선천적인 것에 두었다고 보았다. 한편 송영배 교수가 “다산이 인간과 동식물의 본성을 상이하게 인식함으로써 자연과 인간을 통일된 하나의 원리로 설명하던 성리학적 세계관을 벗어나 근대적 사유의 단초를 열었다”고 보지만, 백민정은, 전국시대 순자(荀子)의 4단계 품계론 정도만 해도 자연과 인간의 분리는 충분히 언급될 수 있는 것이므로, 다산에게서 근대성의 요소를 찾으려면 다산이 어떤 존재자의 고유성 또는 개별성 등을 맹아적으로나마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했다.

2012년 8월 13일 발표된 김영식의 〈서양과학에 나타난 정약용의 태도〉는 “다산은 1797년의 ‘자명소’에서 서양과학 기술 때문에 처음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다고 변명했지만, 자신의 성질이 조솔(躁率)해서 과학기술의 어려운 지식에 대해서는 깊이 탐구하지 못하고 오히려 천주교 교리에 빠져버렸다고 실토했다. 다산은 애초에 서양과학 기술에 그다지 깊은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서양과학과 중국의 과학전통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다. 서양과학 기술이 다산에게 더 깊은 인식론적 방법론적 자각을 불러일으킨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93) 다만 기독교와 서양과학 기술 양쪽 모두에 대하여 그의 사상과 활동 전체를 일관하는 실용성 추구의 경향은 드러난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 신학체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기독교 교리 중 상제(上帝), 신독(愼獨), 권형(權衡) 개념 등 도덕적 실천을 확보하는 데 실제 효용이 있는 부분은 관심을 가지고 도입했으며, ‘제사폐지령’에 접했을 때는 천주교 신앙을 단호하고도 쉽게 버릴 수 있었는데 이 또한 그의 실용주의적 특성을 잘 보여준다”고 이해했다.

김영식의 이 발표에 대해서 토론자 구만옥은, “김영식 교수는 다산의 서양과학 기술에 대한 학계의 두 가지 상반된 견해 중 한쪽의 견해를 받아들였는데 그것은 다산이 서양과학 기술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했으며 그것을 전반적으로 수용하고자 한 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학계의 다른 한편에서는 다산의 과학기술이 지극히 실용적이었고 서양과학 기술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보고 있다. 또한 “다산의 실용학은 ‘澤萬民 育萬物’하기 위한 것으로 경세택민(經世澤民), 경제문자(經濟文字) 등과 관련되어 있고 오늘날의 실용(實用)과는 그 수준과 함의가 다르다”고 보았다. 또한 김영식 교수가 다산이 과학지식 일반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증거로 우주론적 주제에 대해서 다산이 불가지론적(不可知論的) 태도를 보였다는 점을 지적했지만, 다산이 “천하의 물리(物理)는 모두 알아내기 어려우며 이는 요순과 같은 성인(聖人)이라도 능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한 점을 보아서, 자연학에 대한 다산의 불가지론적 입장을 보여준다고 하기보다는 성인의 권위와 도리(道理)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경험적 물리탐구의 가능성을 개척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구만옥은, 다산이 홍대용이나 황윤석만큼은 아니지만 수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보았다. 이는 다산이 서양과학 이론 그 자체에도 다소간 관심이 깊었다고 보는 관점으로 해석된다.

2012년 8월 13일 발표된 이향만의 〈쁘레마르와 다산의 유교해석에 대한 토착신학적 의의〉에서는, “다산은 광암의 영향으로 《中庸》을 자신의 본원 유학적 경학사상을 꿸 실마리로 삼아 육경사서를 새롭게 주석하고 응용학을 저술했다. 다산과 광암에 의한 유교의 종교적 해석은 독창적이라기보다는 서학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으며 실존적인 삶 속에서 구체화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다산에게 목주(木主, 신주)는 단순한 나무가 아니라 효(孝)의 상징적 대상이었다. 목주(신주)를 불태우는 것은 사친(事親)의 근거이자 사천(事天)의 시작인 문화적 상징을 폐기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다산에게 천주교 신앙은 유교와의 조화 안에서만 가능했기에 그 조화가 불가능할 때 다산은 천주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이해했다.

같은 날 발표된 김선희 〈라이프니츠의 신, 정약용의 상제〉에서, “다산의 전략은 상제를 인간의 마음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인데, 이 상제는 세계에 주권을 행사하는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두려움으로 만나는 존재로서 멀리 있지 않고 홀로 앉은 방안의 문밖에 있을 뿐이다. 다산은 전통적인 리(理)-천명(天命)-성(性), 심(心)-성(性)의 모델을 전환해서 상제(上帝)-천명(天命)-영명(靈明), 신-형, 기호-자주지권의 모델로 바꾸어 놓았으나 이 세계는 여전히 유가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철저한 유교적 세계다. 다산이 외래의 사유를 들여오고도 이를 철저히 자기 전통 안에서 재구성하는 이 창의적 종합의 능력 때문에 현대의 연구자들은 자기 관심과 관점 안에서 다산을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구성할 수 있다”고 이해했다.

같은 날 발표된 이동희 〈서학수용의 두 가지 반응 : 신후담과 정약용–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 수용을 중심으로–〉는, “신후담이 전통 성리학의 입장에서 《천주실의》를 비판했다면 다산은 《천주실의》의 영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젊은 시절 다산은 서학의 영향이 컸지만 말년으로 갈수록 원시유가 사상의 근본정신을 회복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다산이 상제의 개념을 원시유학 속에서 다시 발견했다고 주장할지라도 젊은 시절 다산의 상제 개념은 《천주실의》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정약용은 《천주실의》를 통해서 인격적 의지적 존재로서의 천(天) 개념과 그러한 존재의 감시 하에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진 인간이 부단히 도덕적 실천에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점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이 같은 도덕적 실천은 그가 《천주실의》 내의 만민개로설(萬民皆勞說) 등에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다산은 리치가 《천주실의》에서 주장한 것처럼 ‘사랑의 실천’, 즉 ‘인의 실천’의 구체적 결과에 대해 고민했을 것이다”고 파악했다. 이동희의 언급 중에서 《천주실의》 내 ‘만민개로설’을 다산의 도덕적 실천과 연관지은 것은 앞서 언급한 바 다산의 경세학과 서학사상의 연관성을 언급한 조광 교수 이래의 박동옥, 원재연, 차기진의 견해와 동일한 맥락으로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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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박흥식, 〈일제강점기 정인보, 안재홍, 최익한의 다산 연구〉, 《다산학》 17호(2010.12) ; 이 논문에서는 1917년 장지연(張志淵)이 《매일신보》에 발표한 조선유교연원에서 정약용을 박지원, 홍대용, 이덕무 등과 함께 경제학파(실학파)로 분류한 것이 일제강점기 다산 연구의 선구가 된다고 보았다.
26) 조광, 〈조선후기 실학사상의 연구동향과 전망〉, 《조선후기 사상계의 전환기적 특징》(경인문화사, 2010) 213~222쪽 참고.
27) 이능화, 《朝鮮基督敎及外交史》(1929, 신한서림) 103~105쪽 ; 이에 의하면, 다산은 자신이 천주교에 빠진 이유를 서양과학 기술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또 자신이 천주교를 믿을 때는 제사를 폐지한다는 말이 없었다고 변명한 것에 대해서, 당시 우의정 이병모(李秉模)는 다산이 서양사설(西洋邪說)을 양묵(楊墨)과 같은 이단(異端)의 학문이란 뜻으로 ‘서학’(西學)으로 칭한 것은 큰 잘못이라 꾸짖고 파직할 것을 청했다. 그러나 정조는 이를 물리치고 다산을 비호했는데, 정조가 ‘홍수(洪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게 하면 다산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方舟)를 언급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같은 반응은 정조도 다산이 본 서학서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이능화는 설명했다.
28) 박흥식, 앞의 글(2010) 63쪽.
29) 백남운, 〈정다산의 사상〉, 《1935년 다산서세 백주년 기념행사》(1935.7.14.) 박흥식 앞의 글(2010)에서 재인용 ; 밑줄친 부분 중 ‘(서학)’은 문맥의 흐름을 보아 필자가 삽입한 것임.
30) 편집실, 〈茶山先生의 逝世百年을 마지하여〉, 《가톨릭청년》 제3권 제9호(1935.9) 722쪽.
31) 宋世興, 〈丁茶山의 信仰與否〉, 《가톨릭청년》 제3권 제11호(1935.11) 903쪽 ; 《가톨릭연구》(1935년 9. 10월 병합호) 77~83쪽에 실린 은율 尹 神父의 기사 다산 선생의 行路를 추억함은 게재 생략.
32) 당시 실학자들의 西學 인식에 대해서는, 천주교 비판론자였던 愼後聃의 서학 비판을 다룬 홍이섭의 〈實學의 理念的 一貌-河濱 愼後聃의 西學辨 紹介-〉, 《인문과학》 제1집(연세대 인문과학연구소, 1957)이 선구를 이루었고, 이어서 朴鍾鴻, 〈西歐思想의 導入 批判과 攝取〉, 《아세아연구》 제12권 3호(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1969), 崔東熙, 〈愼後聃의 西學辨에 관한 연구〉, 《아세아연구》 제15권 2호(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1972) 등이 차례로 발표되었다.
33) 이봉규, 〈다산학 연구의 최근 동향과 전망-근대론의 시각을 중심으로〉, 《다산학》 6호(2005, 다산학술문화재단) ; 이에 의하면 남한에서 1960~1970년대 실학에 대한 연구는 근대지향의식과 민족주체의식을 실학의 학문적 정체성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주류를 이루었다. 관련 주요 저서로는 역사학회편, 《實學硏究入門》(일조각, 1973) /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한국연구실 편, 《실학사상의 탐구》(현암사, 1974) / 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소 편, 《실학논총-이을호박사정년기념》(전남대출판부, 1975) /이을호, 《다산학의 이해》(현암사, 1975) 등.
34) 홍이섭, 《정약용의 정치경제사상연구》(한국연구도서관, 1959).
35) 이을호, 《茶山經學思想硏究》, 을유문화사(1966).
36) 윤사순, 〈實學的 經學觀의 特色〉, 앞의 책, 《실학논총》(1975) 74~75쪽.
37) 이상은, 〈실학사상의 형성과 전개〉, 《創造》 제26권 2호(1972.2).
38) 박종홍, 〈對西歐的 世界觀과 茶山의 洙泗舊觀〉, 《실학논총-이을호박사정년기념》(전남대출판부, 1975).
39) 박종홍, 앞의 글, 목차 구성(1. 천주학비판에 나타난 대서구적 세계관, 2. 천주교적 세계관과 다산의 수사구관)이 이와 같은 필자의 의도를 반영한다.
40) 이원순, 〈조선후기 實學者의 西學意識〉, 《歷史敎育》 17집(1975), 《朝鮮西學史硏究》(1975, 일지사)에 재수록.
41) 이원순, 앞의 책(1986, 일지사), 203~206쪽.
42) 최석우, 〈Dallet가 인용한 정약용의 〈韓國福音傳來史〉, 《한국천주교회사논문선집》 제1집(한국교회사연구소, 1976.1), 239~254쪽.
43) 최석우 ‧ 안응렬 역주, 《韓國天主敎會史》(상 ‧ 중 ‧ 하 ; 1980~1981, 한국교회사연구소)는 이 책의 한국어판 역주본이다.
44) Ch. Dallet, Histoire de l’Eglise de Corée, Vol.1, f.121 ; 이 책을 우리말로 “조선복음전래사” 또는 “한국복음전래사”로 번역한다.
45) 최석우, 앞의 글(1976), 245쪽.
46) 홍이섭, 〈李蘗-韓國近世思想史上의 그의 位置-〉, 《한국천주교회사논문선집》 제1집(한국교회사연구소, 1976.1) ; 이에 의하면 太極說의 경우 이벽은 다산과는 견해가 다르고 退溪 학설을 추종하여 理氣의 發을 靈魂과 肉身 관계에서 捕捉했다고 한다.
47) 조광, 〈정약용의 민권의식 연구〉, 《아세아문제연구》 56집(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1976).
48) 그 예로서 다산 저술 중 蕩論, 原牧 등에 나오는 상향적 권력 구조와 서구의 교황선출 제도와의 유사성을 지적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보아 정약용의 민권의식은 서학에 기반을 둔 것이라기보다는 당시의 발전적인 사상풍토에 기인한 것으로 조선후기 사회가 스스로 도달하게 된 것에 중점을 두었다. **조광 교수는 〈조선후기 서학사상의 사회적 기능〉, 《한국근대사논집》(오세창교수화갑기념논총편집위원회, 1995),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의 기초》(2010, 경인문화사), 17~18쪽 재수록에서, “조선후기 천주교 신자들이 평등관을 갖게 된 것은 한글교리서인 《신명초행》 등 서학서를 학습한 것과 일정한 관계를 가진다”고 하여 다산과 같은 시기 천주교 신자들의 변화된 신분관, 세계관 등에 천주교가 끼친 영향에 대해서 언급했다. 이는 다산의 개혁사상이 그가 학습한 서학서와 일정한 상관관계에 있었다는 위 주장들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49) 하우봉, 〈丁茶山의 西學關係에 對한 一考察〉, 《교회사연구》 1집(한국교회사연구소, 1977.5).
50) 하우봉 위 논문(1977) ; 이에 의하면 하우봉은 다산 서학과 관련된 당대의 거의 모든 기록들을 그대로 믿기에는 많은 부정적인 암초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우선 다산 자신의 기록은 천주교로 인해 비판과 지탄을 받고 있거나, 심지어 生死의 기로에서 코너에 몰려 자신의 살길을 도모하는 변명은 어쩔 수 없다는 측면이 있고, 달레의 천주교회사 기록에 나오는 해배 후 참회생활 등도 교회 밖의 국내 다른 기록에 안 나오므로 그대로 믿기 어려우며, 벽위편 등에 나오는 강준흠, 목태석 등의 다산 고발 상소도 정치적 목적으로 과장되어 있어 용납하기 어려운 점이 있고, 實錄을 비롯한 관찬 연대기에서는 관련기록이 너무 소략하거나 아예 없어서 상황파악이 안 되는 문제점들이 있다고 보았다. 하우봉은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달레 교회사의 원본이 되는 다블뤼 주교의 메모(備忘記)나 이승훈과 관련된 저술로 알려진 《蔓川遺稿》 등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자명소에 대한 하우봉의 비판적 입장은 뒤에 언급할 김영식의 발표문(2012.8.13.) 서양과학에 나타난 정약용의 태도에서도 비슷하게 개진된다. 다산이 자명소에서 비록 서양과학기술 때문에 천주교에 빠져들었다고 했지만 사실상 다산은 처음부터 서양과학기술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김영식의 주장이다.
51) 김영호, 〈『與猶堂全書』의 텍스트 檢討〉, 《丁茶山硏究의 現況》(민음사, 1985).
52) 정순우, 〈다산 연구의 제논점과 쟁점〉, 《한국학대학원논문집》(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1993).
53) 한우근, 〈茶山思想의 展開〉, 《丁茶山 硏究의 現況》(대우학술총서 다산학연구1 ; 민음사, 1985).
54) 김영호, 〈『與猶堂全書』의 텍스트 檢討〉, 《丁茶山硏究의 現況》(민음사, 1985).
55) 다산의 현손 정규영의 《俟菴先生年譜》에 의하면, 많은 제자들이 조수역할을 하고 있었으니, 經史에서 자료를 수집하고 상고하는 자가 數人, 입으로 부르면 재빨리 받아적는 자가 數三人, 初稿를 正書하는 사람이 數三人, 각색 조력을 하면서 책을 꾸미고 잘못된 부분을 고치는 자가 3~4인이 되었다고 한다.
56) 조성을, 《與猶堂集의 文獻學的 硏究-詩律 및 雜文의 年代考證을 中心으로-》(2004, 혜안).
57) 박병호, 〈다산의 법사상〉, 《丁茶山硏究의 現況》(민음사, 1985) 87~89쪽.
58)《丁茶山硏究의 現況》(민음사, 1985) 중 61~166쪽, 〈다산의 경학사상 토론개요-修己治人과 修己牧民-〉.
59) 이을호, 〈茶山經學 成立의 背景과 性格〉, 《丁茶山硏究의 現況》(민음사, 1985).
60) 최석우, 〈丁茶山의 西學思想〉, 《정다산과 그 시대》(민음사, 1986).
61) 위의 책, 《정다산과 그 시대》, 139~143쪽.
62) 姜在彦, 〈丁茶山의 西學觀〉, 《茶山學의 探究》(민음사, 1990).
63) 실학적 활용론의 차원에서 다산 서학을 연구하는 관점은 2012년 8월 13일 서울대 김영식 교수에 의해서도 제기되었다.
64) 강재언, 앞의 글, 위의 책, 51~73쪽.
65) 물론 김옥희 수녀의 논리는 이에 앞선 최석우 신부의 논리에 근거를 두고 있다.
66) 김상홍, 《다산학연구-부 다산학 연구논저 총목록-》(계명문화사, 1990).
67) 이와 같은 주장을 1995년에도 다시 부분적으로 보완하여 발표했다. 김상홍, 〈다산학 연구의 과제〉, 《漢文學論集》 13집(단국한문학회, 1995.11). 그 내용은 1990년의 책과 거의 동일하다. 이러한 김상홍의 주장에 대해서는 제4장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항목을 나누어 상술하고 아울러 그 각각에 대한 지지와 비판의 의견도 각주로 부기했다.
68) 김옥희, 《한국천주교 사상사II-다산 정약용의 서학사상 연구-》(순교의 맥, 1991).
69) 김옥희 수녀 편, 《茶山 丁若鏞의 西學思想-1993년도 다산문화제 기념논총-》(1993.10, 다섯수레).
70) 최석우, 〈다산 서학에 관한 논의〉, 《茶山 丁若鏞의 西學思想-1993년도 다산문화제 기념논총-》(김옥희 수녀 편, 1993.10, 다섯수레).
71) 김상홍, 〈茶山의 ‘秘本 墓誌銘 7편’과 天主敎〉, ‘다산탄신 250년 기념 학술대회 발표문’ (2012.6.9, 고려대).
72) 조광, 〈정약용의 민권의식 연구〉, 《아세아문제연구》 56집(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1976).
73) 원재연, 〈茶山 閭田制의 사회사상적 배경에 관한 일고찰〉, 《교회사연구》 10집(한국교회사연구소, 1995) ; 이를 부분적으로 수정하여 《조선왕조의 법과 그리스도교-동서양의 상호인식과 문화충돌-》(원재연 저, 2003, 한들출판사) 제1부 2장으로 재수록하였다.
74) 물론 이 부분은 ‘공상적 사회주의’ 내지 ‘인류의 원시공동체 상태’에서도 논의될 수 있는 부분이고, 홍대용의 만민개로, 당시 조선사회의 두레노동과 협동농장의 상관성 등의 주장으로도 설명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신용하, 〈茶山 丁若鏞의 閭田制 土地改革思想〉, 《丁茶山硏究의 現況》(민음사, 1986) 등 참고.
75) 원재연, 앞의 글(1995) 및 단행본(2003) 98쪽 ; 여기에는 전론 외에도, 전론과 같은 시기(다산의 사환기)에 쓴 것으로 보이는 원목, 탕론 등의 짧은 글들의 원문과 《천주실의》의 내용을 다음 표와 같이 축조, 비교하였다.
76) 정순우, 〈다산의 形而上學〉, 《다산학보》 5집(1983).
77) 이동환, 〈다산사상에서의 ‘上帝’ 도입경로에 대한 序說的 고찰〉, 《다산학의 탐구》(민음사, 1990).
78) 이동환, 〈다산사상에서의 ‘上帝’ 문제〉, 《민족문화》 19집(민족문화추진회, 1996).
79) 한형조, 〈朱熹에서 정약용에로의 철학적 사유의 전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논문(1992).
80) 이봉규, 〈다산학 연구의 최근 동향과 전망-근대론의 시각을 중심으로-〉, 《다산학》 6호(2005, 다산학술문화재단).
81) 정순우, 〈다산연구의 제논점과 쟁점〉(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논문집 제8집, 1993).
82) 금장태, 〈社稷祭와 禘祭에 대한 다산의 禮學的 관점〉, 《종교학연구》 16집(서울대 종교학연구회, 1997).
83) 금장태, 《다산실학탐구》(소학사, 2001).
84) 이봉규, 〈다산학 연구의 최근 동향과 전망-근대론의 시각을 중심으로-〉, 《다산학》 6호(2005, 다산학술문화재단).
85) 차기진, 《조선후기의 西學과 斥邪論 연구》(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 이 단행본은 차기진의 박사학위 논문(1995년 〈성호학파의 서학인식과 척사론에 대한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을 보강한 것으로, 필자 차기진 박사는 한국천주교회사와 조선후기 사상사 분야에서 다수의 연구업적을 제출했다.
86) 이봉규, 〈다산학 연구의 최근 동향과 전망-근대론의 시각을 중심으로-〉, 《다산학》 6호(2005, 다산학술문화재단).
87) 이러한 진술은 앞서 언급한 하우봉, 김영호의 견해와 동일하며, 최근 다산문화재단에서 그 필요성을 인정하여 김문식, 조성을 두 교수가 2003~2004년부터 이 정본화 작업에 참여해왔으며, 2012년 12월 현재 정본화 작업의 결과물이 출간되었다.
88) 송영배, 〈茶山哲學과 天主實義의 패러다임 比較硏究〉, 《한국실학연구》 2집(2002).
89) 안영상, 〈천주교의 수용과정에 나타난 사상적 變容에 관한 연구〉, 《동양철학연구》 29집(2002).
90) 손홍철, 〈조선후기 천주교 수용의 학술사적 의미 고찰-다산 정약용과 신서파 · 공서파를 중심으로-〉, 《다산학》 9호(2006).
91) 여기에 각 주장과 관련된 개별 논문에 대한 분석이 가미된다면 훌륭한 연구사정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92) 김상홍, 〈다산의 천주교 신봉론에 대한 반론-최석우 신부의 논문을 읽고-〉, 《동양학》 20집(단국대 동양학연구소, 1990).
93) 이상과 같은 발표자 김영식의 견해는 다산이 진술한 〈자명소〉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것뿐 아니라, 일제 때 다산학의 선구자 중 하나인 최익한의 견해와 이를 수용한 현재까지의 다수 연구자들의 견해(=다산이 천주교에 앞서 서양의 과학기술에 호기심을 가졌고, 국가의 금령 이후에는 과학기술만을 선별 수용하게 되었다는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주장이 된다. 이와 관련된 구체적 논의는 본고 제2장 구만옥의 연구사정리 참고.

4. 다산의 천주교 신앙에 대한 논쟁

1) 다산의 ‘만년 신자설(晩年信者說)’을 긍정하는 연구
머리말에서 필자는 다산과 천주교의 관계를 둘러싼 해묵은 논란은 다산이 한때 천주교 신자였다는 사실을 긍정하는가 부정하는가에 달려있지 않다고 했다. 왜냐하면 모든 연구자가 그 스스로 고백한 바와 같이 1787년 무렵부터 최소한 4~5년간 교회 활동에 몰두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논쟁이 되고 있는 부분은 그가 공식적으로 배교를 선언하여 목숨을 구하고 유배를 떠난 1801년부터 그가 임종하는 1836년까지 과연 신앙심을 갖고 있었던가 또는 신자로서의 삶을 살았는가 등에 대한 부분이다. 즉 다산이 만년(晩年)에도 신자였다고 할 만한 자료들이 남아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① 긍정론의 개요 : ‘다산의 만년 천주교 신자설’은 다산이 한때 천주교를 배교하였지만, 만년(晩年)에 천주교 신앙심을 회복하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신자로서 선종(善終)했다는 것이다.

② 경과와 주요논자 : 천주교회 측에서는 이미 다산이 임종한 지 20여 년이 지난 1850~60년대부터 다산이 만년에 신앙인의 삶으로 돌아왔음을 당시 조선교회사를 정리하던 다블뤼 주교가 몇 가지 증언과 자료의 수집을 통하여 확인하였으며, 이런 주장은 곧 교회의 공론이 되어 일제강점기에도 서슴없이 표방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36년 다산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교회 측의 이같은 신념은 교회 밖의 지식인들로부터 비판과 반박을 받기 시작하였고, 교회는 다소의 혼란 가운데서도 이런 공식 입장을 꾸준히 견지해왔다. 그러나 다산의 ‘만년 신자설’에 대해 교회 안은 물론이고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좀 더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근거를 가진 객관적 자료와 논리의 정리가 필요했다.

해방 이후 이 주장의 이론적 체계를 세우고 확립한 이는 최석우 신부이며, 더욱 보강한 이는 김옥희 수녀이다.94) 유홍렬 교수는 최석우 신부의 주장을 인용하는 정도이다.95) 특이한 것은 불교사를 전공하는 허흥식 교수가 1830년대에 오규일이 ‘요한’ 이란 세례명을 새긴 다산의 인장을 증거로 들어 다산이 만년에 천주교 신자였을 것이라고 긍정론에 힘을 보탰다96)는 점이다.

③ 주장의 연원과 현황 :
ⓐ ‘다산의 만년 신자설(茶山晩年信者說)’은 1836년 다산이 선종한 후 약24년 만인 1860년경 저술된 다블뤼 주교(Mgr. Antoine Daveluy 1818~1866, 한국식 이름은 安敦伊)의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朝鮮殉敎史備忘記》, 이하 ‘비망기’로 약칭)에 그 최초의 근거를 두고 있다.

ⓑ 이후 파리외방전교회 교회사가 달레(Dallet Claude Charles, 1829~1878) 신부가 1874년 2권으로 된 Histoire de l’Eglise de Corée(《한국천주교회사》, 이하 ‘달레 교회사’로 약칭)97)를 편찬하면서 다블뤼 서술을 그대로 인용했고, 이후 교회 측 정설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 일제강점기인 1936년 다산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여 《가톨릭청년》 등 교회 측 잡지에서도 같은 주장(배교 후 다시 신앙으로 복귀)을 펴서 다산 선생이야말로 가톨릭교회를 빛나게 해준 위대한 선각자로 현양했으며, 광복을 지나 1970년대까지도 그 흐름이 그대로 계승되었다.

ⓓ 1975년경 천주교 서울대교구 소속의 한국교회사연구소 최석우 소장 신부가 이 같은 주장의 근거를 논리적으로 체계화하기 위한 작업을 최초로 시작했다. 1976년 1월, 최석우 신부는 우선 다산의 만년 신앙생활을 기술한 달레 교회사의 해당 기록을 찾아서 학술지에 발표하였는데, 특히 다산이 직접 목도한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과정에 대해 만년(해배 후)에 기록한 l’introduction de l’Evangile en Corée(한국복음전래사, 또는 조선복음전래사 이하에서 《조선복음전래사》로 약칭)98)의 존재가 달레 교회사에 기록되어 있음을 알렸다(최석우, 〈Dallet가 인용한 정약용의 韓國福音傳來史〉, 《한국천주교회사논문선집》 제1집[한국교회사연구소, 1976.1]).

ⓔ 이어서 1979년 최석우 신부는 다블뤼 비망기의 사본(총 515면, 31×21cm)을 입수하고, 이를 근거로 1983년 서울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진행된 ‘정다산과 그 시대’ 워크샵에서 〈丁茶山의 西學思想〉을 발표하여, 달레와 다블뤼의 기록에 근거하여 다산의 만년 신앙생활에 대해서, “다산이 만년에 신앙심을 회복하고 교회활동에 적극 참여했다”고 주장했다(1986년 단행본 《정다산과 그 시대》로 출간). 또한 이러한 주장의 간접적 근거로 다산의 西學思想을 太極論, 理氣論, 陰陽論, 鬼神論, 人性論, 善惡論, 修養論의 측면에서 차례로 다루고 이들 諸論議 중에 천주교와 서학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음을 논증하였다. 아울러 현존하는 다산 저술 중에 천주교와 서학에 대한 직접적 언급이 없는 (沈黙의) 이유로서 다산의 정치적 입장 때문이라고 해석했다.99)
ⓕ 이후 최석우 신부는 1993년 〈다산 서학에 관한 논의〉100)에서 다산과 관련된 다블뤼 비망기의 구체적인 내용들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 내용은 다블뤼가 비망기를 작성하기 위해 모은 자료 중에는 황사영의 帛書, 이기경의 闢衛編 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교회 설립 때부터 당시까지 생존했던 적지 않은 目擊證人들의 진술도 확보했으며, 무엇보다도 비망기 작성에 결정적인 큰 도움을 준 것은 다산이 저술한 《조선복음전래사》였다는 것이다.

ⓖ 최석우 신부의 위 논문(1993년)에 의하면 《조선복음전래사》는 다산이 남긴 몇 가지 종교(천주교) 저술 중의 하나로서, 다블뤼는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과 관련된 대부분의 사실을 다산의 《조선복음전래사》에서 인용하였으며, 그 결과 (교회기원과 관련해서) 비망기는 단순히 다산의 《조선복음전래사》를 옮기고 연결시키는 데 그쳤다고 비망기에 기록되어 있음을 밝혔다. 또 《조선복음전래사》는 “간략하고 정확하다”는 다블뤼의 평가도 아울러 기록했다.

ⓗ 최석우 신부는 같은 논문(1993년)에서 다블뤼 주교가 조선순교자 210명을 선정하여 파리외방전교회에 보고(다블뤼 주교의 1858년 11월 7일자 서한, 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고 소장)하는 중에, 순교자 “丁若鍾 아우구스티노에 대한 다산의 증언을 여러 번 인용했는데, 그 증언은 아주 큰 무게가 있어 보인다”고 기록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또 비망기에는 다산이 《조선복음전래사》를 저술한 다음 선종했다고 기록되어 있음을 밝히면서 저술연대를 1830년대로 추정했다. 다블뤼는 당시 신자들로부터 다산의 《조선복음전래사》와는 별도의 구전을 들었는데, 그 구전과 다산의 기록은 서로 모순되는 점이 없었다고 기록한 점도 아울러 언급했다. 한편 다블뤼는 1801년 신유박해의 도화선이 된 정약종 집의 冊籠을 다산이 〈自撰墓誌銘〉에서 완강히 부인하고 있지만, 이와 상관없이 정약종 자신과 정씨 친척의 증언을 들어서 그 책롱이 정약종이 家藏하던 것임을 서술했다. 또 다블뤼는 신유박해의 희생자에 대해서, “이 사건을 가장 잘 아는 정약용도 최소한 희생자가 200명에 이를 것으로 보았다”고 기술했다. 1811년 조선교회가 북경교구에 선교사(사제)를 청하는 밀사를 파견할 때, 다산이 권기인, 권노방, 이여진, 조동섬, 홍우송 등과 함께 이 일에 참여했다고 기록했다. 다블뤼는 비망기에서, 다산의 신앙심에 대해서, “정약용이 배교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후의 일이 입증하는 바와 같이 그는 마음으로는 신자로 머물렀다. 실제로 그는 유배지에서 돌아온 후 신심, 묵상, 극기 등 모든 종교행위에 전념하였고, 1835년 유 파치피코(방제) 신부를 만난 후 참된 참회자로서 선종하였다.101) 그는 우리에게 전해지는 ‘조선복음전래사’의 저자이다”라고 기록했음을 적었다. 또 다블뤼는 비망기의 다른 곳에서 다산에 대해, “정약용은 귀양에서 풀려난 지 2, 3년 후부터 신앙생활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천주교 진리는 언제나 명백한 것으로 보였다. 그는 항상 외딴 방에 칩거하면서 소수의 친구들 밖에는 만나지 않았다. 그는 자주 단식과 그밖의 속죄를 위한 고행을 하였다. 그는 직접 만든 아주 고통을 주는 허리띠를 항상 띠고 있었고 또한 자주 몸의 여러 군데를 작은 쇠사슬로 감았다. 그는 오랫동안 묵상을 하고 일부를 적어놓았고, 또 미신을 반박하고 무식한 사람을 가르치기 위해 여러 가지 책을 저술하였다. 그의 저서 중 일부는 여러 박해 동안 땅 속에 숨겨둠으로써 썩어 없어졌다. 그러나 그중 많은 것이 그의 집안에서 보존되었다. 그는 완전히 복권된 후에도 그의 은둔적 생활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고, 날로 더해가는 그의 신앙심은 그를 아는 모든 신자들을 기쁘게 하였다. 그는 1835년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고 사망하였다. 그는 그의 배교의 스캔들을 조선교회 앞에서 그의 좋은 모범으로 보상하였다”라고 기록했음을 밝혔다.

ⓘ 다블뤼는 또 다산의 아들 丁學淵(1783~1859)이 “천주교가 자기 가족이 겪은 모든 불행의 원인이라고 하여 배척하고 천주교를 원수로까지 여기면서 오랫동안 천주교를 멀리하다가 만년에 이르러 회개하고 영세한 후 몇년 후에 사망했다”고 기록한 사실도 들었다.

ⓙ 결론적으로 최석우 신부는 위 논문(1993년) 말미에, “다산은 原始儒學과 西學을 동시에 깊이 이해하고 또 그 고유성을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儒學과 西學이 대등한 입장에서 서로 만날 수 있고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양자택일이 불필요하게 생각되었을 것이다. 이리하여 다산은 완전한 천주교인으로서 신앙과 종교생활을 계속하면서 동시에 완전한 유교인으로서 유교전통에 충실할 수 있었을 것이다”고 자신의 의견(다산의 신앙관)을 첨부했다.102)
ⓚ 김옥희 수녀는 1991년에《韓國天主敎思想史II–茶山 丁若鏞의 西學思想硏究–》103)를 통해서 “다산은 자신의 일생을 기록한 《自撰墓誌銘》(壙中本)에서 일생을 소사상제(昭事上帝, 하느님을 섬김)하였다고 하였을 뿐 천주교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이나 배교 문제를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음을 보아서, 그가 유학자 서학자를 따지기 전에 진심으로 하늘을 섬겼던 위대한 진인(眞人)이었다”고 하여 위에서 언급한 최석우의 결론(ⓙ)이 나오기 전에 다산이 유교와 천주교를 자유롭게 드나들던 유학자이자 천주교 신자였음을 밝혔다.

ⓛ 김옥희는 위 저서(1991년)에서, 김옥희는 다산의 저술로 알려진 천주교 관련 문헌들을 엄격한 문헌비판에 입각하여 새롭게 고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다산은 補儒論에 입각하여 천주교를 수용했기에, 洙泗學의 표현으로 그의 신앙을 상징화하고 은닉하였으며, 극한상황에 몰렸을 때 한 몇 마디 문초기록이나 배교선언 등을 가지고 그것을 다산 인격의 전부인 것처럼 판단하여 背敎者, 또는 害敎者로 극단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은 대단히 고졸한(고지식하고 졸렬한) 인식이자 역사를 왜곡하기 쉽다고 했다. 이와 같이 판단한 근거로 김옥희는 1920~1921년경 다산의 현손 정규영이 편찬한 《俟菴先生年譜》에도 1936년 정인보 등이 편찬한 《與猶堂全書》 속에 실린 2편의 자명소가 모두 들어있는데, 전자는 후자에 들어있는 천주교 관련 비난 문구 등이 대부분 삭제되어 있어, 전자만을 읽으면, 다산이 천주교를 떠났다거나 혹은 배교했다는 내용이 전무(全無)하여 오히려 몇 마디 다산이 서술한 것 같지 않은 잔인한 용어들만 빼면 천주교를 변호하는 듯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다(*실제로 김옥희의 위의 책, 283~309쪽에는 2건의 자명소 한문(영인본)과 한글번역문이 첨부되어 있다) 이외에도 다산이 살던 박해기 당시, 천주교 관련 서적이 압수, 소각되고 신앙생활이 감시당하는 등의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할 때, 다산을 (사학죄인의 멍에에서 풀어주기 위해) 다산의 본심과 관계없이 (다산을 옹호하던 외교인들이) 다산이 배교했다는 ‘회오지정’(悔悟之情)을 강조하여 기록에 첨가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하였다.

ⓜ 김옥희 수녀는 위 책(1991년) 제5부와 1993년 《茶山 丁若鏞의 西學思想–1993년도 다산문화제 기념논총–》(김옥희 수녀 편, 1993.10, 다섯수레)에도 재수록한 〈茶山의 心經密驗에 나타난 心性論에 관한 考察〉을 통하여, “上帝天의 所住處인 인간의 心에 내재하는 靈明之天, 經世濟民的 治心觀을 드러내는 仁과 恕의 실천덕목들이 성리학적 차원이나 범주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확인하면서, 다산의 心性論에서는 靈明之天의 上帝와 對越하는 것에 그 중점이 있고[對越上帝], 修德論에서는 이웃과의 상호관계의 德인 仁, 恕, 和, 愛로 구성된 利他的仁愛心[捨身愛人]의 실천이 그 핵심이다”고 결론지어, 다산이 만년에 천주교 신자였음은 명백한 일이었고, 겉으로 배교를 표방한 시기에도 항상 마음속으로 신앙심을 잃지 않았던 것으로 해석했다.104)

④ 다산의 신앙에 대한 시기구분론 :
㉮ 최석우 신부는 1983년 정다산의 서학사상을 발표하면서, 활동기(1784~1795), 배교기(1795~1811), 회심기(1811~1836) 등 3시기로 나누어 다산의 서학적 생애를 고찰했고, 1986년과 1993년도 글에서도 같은 입장을 지켰다. 여기서 보면 최석우는 1795년 다산이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어, 천주교 신자를 유교로 회귀시키는 등 교회에 명백한 害敎행위를 한 것을 그의 배교기의 시점으로 보고, 1811년 천주교 신자들과 함께 성직자(신부) 영입운동에 동참한 때로부터 신앙의 회심기가 시작된 것으로 보았다. 이와 같은 최석우의 시기구분은 외적으로 명백한 배교 또는 회심의 표시를 시기구분의 경계선으로 삼은 특징이 있다. 또 1822년 다산이 회갑을 맞아 이제부터 평생 지은 죄를 속죄하면서 살겠다고 다짐하는 시기가, 다블뤼 비망기와 달레 교회사에서 해배 후 2~3년 뒤부터 신앙생활을 재개했다는 기록과 시기적으로 일치한다105)는 점을 밝혔다.

㉯ 김옥희 수녀도 최석우 신부와 마찬가지로 활동기, 배교기, 회심기 등으로 3분하고 있으나, 1795년 배교가 시작된 것을 언급했을 뿐 배교기와 회심기를 구분하는 시점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다만 김옥희 1991년의 단행본 중 제2부 〈다산 정약용의 서학(천주교) 신봉론〉의 내용에 의하면, 1801년 강진 유배 이후, 中庸講義補를 저술할 때 이벽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과 다블뤼 주교 비망기에 언급된 교회재건운동의 일환으로서 성직자영입운동에 다산이 참여한 사실들을 회심기 이후의 내용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일단 강진유배기 중에 다산의 회심기가 시작되었다고 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⑤ 다산의 천주교 관련 저술의 존재론 :
㉠ 최석우 신부와 김옥희 수녀 등의 이 같은 주장(다산의 천주교 저술 존재론)은 다산이 만년에 천주교 신앙심을 회복했던 증거로서 설명되는데, 최석우 신부가 먼저 주장했던 이 이론에 대하여 김옥희 수녀는 일치된 의견을 보여준다.

㉡ 최석우 신부는 다블뤼의 비망기를 근거로, 다산이 회심기에 접어든 후, 대략 1830년대에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되고 교회(신앙공동체)가 설립되던 시점의 일을 기록한 《조선복음전래사》를 기록한 외에도, 苦身克己 등을 통해 묵상을 하면서 기록한 묵상의 일부를 기록한 글, 또 우둔한 백성들에게 천주교리를 가르치기 위한 쉬운 교리서적 등 몇 종의 종교서적을 서술해서, 박해기 중에 이들 중 다수가 땅속에서 썩어 없어졌지만, 상당수는 그의 집에 보관되었다고 보았다.

㉢ 최석우 신부는 다산이 저술했다는 《조선복음전래사》의 내용을 다블뤼 비망기로부터 다음과 같이 추출하고 있다.106)
㈠ 이책은 다산이 직접 참여하고 목도한 조선에 천주교가 시작되는 당시의 상황을 기록했다.
㈡ 이책은 간략하고도 정확하여, 이 책과는 무관한 이들로부터 들은 口傳과 다른 곳(어긋나는 곳이)이 없었다.
㈢ 이 책에서 다산은 그의 형 순교자 정약종에 대해서 여러 번 증언하였는데, 이 증언이 매우 큰 무게가 있어 보인다고 다블뤼가 평가했다.
㈣ 이 책에서 다산은 신유박해 때의 순교자 숫자가 200명이라고 했다.


2) ‘다산의 만년 신자설(晩年信者說)’을 부정하는 연구
① 부정론의 개요 : 다산이 한때 천주교 신자였음은 인정하지만, 1791년 호남에서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사른 사건이 문제 시 된 후, 다산은 공식적으로 교회와 결별(배교)하였으며, 이후 죽을 때까지 천주교 신앙에 다시 물들지 않고 온전한 유학자로만 생활했다고 하는 주장이다.

② 주요 논자 : 이 주장을 최초로 제기한 이는 일제강점기 최익한이다. 그 후 체계적 이론을 세운 대표적인 논자는 김상홍 교수이며, 박석무, 강재언, 한형조도 이 주장을 펼쳤다. 이들 외에도 다산의 서학사상을 언급하면서, 다산의 천주교 신자 여부에 대해서 일체 언급을 하지 않은 연구자 중 김언동 등 다수도 이 주장에 동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③ 부정론의 근거 :
ⓐ 대표적인 논자인 김상홍 교수는 1981년부터 2012년 현재까지 대략 10여 차례에 걸쳐 다산의 만년 천주교 신자설을 반박하는 다음과 같은 논문을 써왔다.107)

▷ 〈다산의 시세계〉, 《다산시선집 流刑地와 哀歌》, 단국대출판부, 1981
▷ 〈다산 정약용 문학연구〉, 단국대출판부, 1985
▷ 〈다산의 천주교 신봉 여부–『여유당전서』를 중심으로〉– 《연민이가원선생칠추송수기념논총》, 정음사, 1987.
▷ 〈“다산은 천주교인이다”에 대한 반론〉, 《한국한문학연구》 13집, 1990
▷ 〈다산의 천주교 신봉론에 대한 반론〉, 《동양학》 20집,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1990.
▷ 〈다산의 천주교 신봉론에 대하여〉, 연세대 국학연구원 제129회 월례발표 요지, 1987.5.22.
▷ 〈다산의 천주교 신봉론에 대한 반론〉, 한국학연구회 제101차 월례발표회 요지, 1990.3.24, 중앙대
▷ 〈다산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다〉, 《단대신문》 제822호, 1990.3.6.
▶ 《다산학 연구–부 다산학 연구논저 총목록–》(계명문화사, 1990) 중 제1부, “다산 정약용의 탐구” 중 〈다산의 천주교 신봉론에 대한 반론–최석우 신부의 논문을 읽고–〉, 〈다산의 천주교 신봉여부〉 등 2편 게재
▷ 〈다산의 천주교 신봉에 대한 반론–최석우 신부의 논문을 읽고–〉, 《다산문학의 재조명》, 단국대출판부, 2003.
▶ 〈다산의 「秘本 墓誌銘 7편」과 천주교〉, 다산탄신 250년 기념 학술대회 발표문(2012.6.9, 고려대 인촌기념관)
김상홍의 위 글들 중에서 가장 체계적인 것은 본인 스스로 반박론의 완결편이라고 자평한 1990년 단행본 속에 들어 있는 〈다산의 천주교 신봉론에 대한 반론–최석우 신부의 논문을 읽고–〉와 최근(2012년) 〈다산의 「秘本 墓誌銘 7편」과 천주교〉이다. 김상홍의 이 논문들을 통해서 정리된 입장은 다음과 같다.

ⓑ 다산은 23세 때인 1784년 4월 15일 이벽으로부터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와 서적을 처음으로 접했다. 그러다가 26세(1787)부터 4~5년간 천주교를 믿었다. 그는 이때 천주교를 통하여 서양과학의 문명을 수용하였고, 천주교를 유교의 일파로 인식했으며 문원(文垣)의 감상물로 알았다. 그는 천주교를 믿었던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2차례의 자명소).

ⓒ 다산은 30세 때(1791) 천주교와 완전히 절의(絶意)하였다. 신해옥사 이후 국법으로 西敎(천주교)를 엄금했을 뿐 아니라, 이전(천주교를 믿을 때)에 조상제사를 폐지하라는 교회의 말을 듣지 못했다가 윤지충 등이 모친상에서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폐지한 것에 충격을 받고 절연하였다. 천주교와 절연한 이상 ‘천주교도’라는 오명을 씻는 것이 그의 소원이었고, 1801년 옥사 때도 국문(鞫問)에서 전에 이미 배교한 것이 입증되어 사형을 면하고 유배를 떠났다.

ⓓ 달레와 다블뤼 등 교회 측의 기록에만 나오는 다산의 만년 신앙회복설은 다산의 기록(저술)에서 일체 나오지 않으므로 객관적인 타당성이 결여되어 있어 인정하지 않는다.108)

ⓔ 다산의 천주교 외배내신론(外背內信論)의 근거가 된 황사영의 백서는 1801년 양력에 작성된 것이고 1801년 2월까지 목도한 것에 의존하므로 1801년 2월 이후 다산이 서거하기까지의 상황에 대해서는 일단 해당되지 않는다.

ⓕ 1801년 장기현 유배지에서 지은 〈惜志賦〉의 내용과 같이 외배내신(外背內信)이 아니라 외배내배(外背內背)하여 표리가 일치한 유교적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또한 1797년 〈辨謗辭同副承旨疏〉와 해배 후에 쓴 〈自撰墓誌銘〉에서 30세에 천주교와 절연하였음을 밝히고 있으므로 ‘외배내신론(外背內信論)’은 성립되지 않는다.

ⓖ 최석우 신부의 “다산이 교회재건에 기여했다”는 논의에 대해서는, 다블뤼도 이 문제에 대하여 ‘구전(口傳)에 의하면’ 이라는 단서를 붙였는데, 구전이란 신빙성이 없다.109)

ⓗ 다산은 1810년 유배지 강진에서 쓴 《詩經講義補遺》 머리말에서 “선성(先聖) 선왕(先王)의 대도(大道)에 몸을 바쳐 진력하여 죽은 뒤에야 그만두려고 한다”고 하여 유교주의적 삶으로 일관하고자 다짐했다. 또 〈자찬묘지명〉에서 유배기간을 선왕의 대도를 알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겨 경학연구에 전념하면서, 先聖 先王의 道는 곧 堯 舜 周公 孔子의 道로 이를 구현하고자 했다. 다산의 현손 정규영이 1921년 완성한 〈사암연보〉에서 다산은 유배기간에 상고시대 성인들의 경전을 私淑하였다고 하였다. 이런 것들로 보아 유배기간인 1811년에 다산이 교회재건에 기여했다고 볼 수 없다.110)

ⓘ 최석우 신부가 다산 해배 후 59~60세부터 칩거하면서 천주교를 신봉했다는 논의에 대해서, 다산은 칩거보다는 만년을 소요자적 하였다. 59세에 청평산과 춘천을, 66세에 천진암 일대를, 67세에 송파를, 69세에 용문산 일대를 유람하며 기행시집(紀行詩集)을 남겼다. 이로보아 칩거하면서 신앙생활을 했다고 볼 수 없다.

ⓙ 〈자찬묘지명〉을 “평생의 허물과 죄를 씻어버린다”는 등의 구절을 근거로 최석우 신부가 신봉론(信奉論)의 근거로 본 데 대하여, “다산이 쓴 이가환, 이기양, 권철신, 오석충, 정약전 등과 자신의 묘지명 2편 등 모두 7편은 비본(秘本)으로 전해진 것이므로 진실의 기록이다. 그런데, 같은 묘지명에서 완전히 절의(絶意)했다고 한 부분을 불신하고 일부 구절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자찬묘지명〉의 顧諟明命은 《大學》에 나오고, 樂善好古는 《孟子》와 《論語》에 나오고, 以復乎天命之性은 《中庸》에 나오는 것으로 유교주의적 세계관이다. 묘지명에서 6경4서로 몸을 닦고 1표2서로 천하국가를 다스릴 수 있게 하겠다”고 한 것은 유교적 삶으로 일관하겠다는 것이다. 111)최석우 신부는 다산의 철저한 신앙생활 재개를 1820년대 초반으로 보았는데, 그 이유로 다블뤼가 다산 유배 후 2~3년 후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하는 기록과 묘지명에서 그가 1822년에 회갑을 맞아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것이 시기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묘지명의 일부 표현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것은 다산의 양심선언서인 묘지명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 다산이 만년에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다는 주장에 대하여, 다산은 58세, 62세, 66세(1827) 때에 조정에서 등용논의가 있었는데,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다면 결코 보안이 유지되지 못했을 것이고 등용논의가 나왔을 리가 없다. 또 66세와 69세 때 윤극배가 다산을 천주교 관계로 모함했지만 모두 무고임이 밝혀졌다. 또 다산이 66세 때인 1827년에 정해박해가 있었는데, 다산이 이런 박해기에 신앙생활을 했을 리 없다.112)

ⓛ 다산이 ‘조선복음전래사’를 저술했다고 하지만, 이 책의 원본이나 사본이 한국이나 프랑스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이 책들은 결국 다산이 쓴 7편의 비본 묘지명들을 가리키는 데 불과하다. 왜냐하면 이 묘지명들과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기록이 일치하기 때문이다.113)

ⓜ 다산이 종부성사를 받았다는 주장에 대하여, 다산에게 종부성사를 주었다는 유방제 중국인 신부는 모방 신부로부터 성무집행정지를 받을 정도로 스캔들(돈과 여자 문제)이 난 타락한 자인데, 다산이 그 소문을 모르고 이런 자에게 종부성사를 받을 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이다.114)정규영이 편찬한 〈사암연보〉에는 다산이 종부성사를 받았다는 기록이 없고, 다만 서거하기 4일 전에는 다산에게 병환이 있었다고 하고, 3일 전에는 ‘회근시’를 쓴 것이 남아있는데, 건강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설령 임종 4일 전인 1836년 4월 3일 유 신부에게 종부성사를 받았다고 가정하는 것도 날자상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유방제 신부가 중국으로 쫓겨난 때는 다산이 서거한 때(4월 7일)로부터 4~5일 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회근시에 의하면, 그가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다는 내용이 있을 뿐이고 종부성사와 관련된 언급은 없다. 또한 그가 죽은 후 자손들에게 자신이 쓴 유명첩(遺命帖)과 상의절요(喪儀節要)에 따라 유교식으로 간소하게 장례를 치를 것을 명했고 후손들도 이에 따라 유교식으로 장례를 치렀다고 되어 있다.

ⓝ 다산은 유독 순교한 셋째형 정약종의 묘지명은 짓지 않았는데, 비본으로 간직할 묘지명이라면, 짓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다산이 정약종의 묘지명을 짓지 않은 것은 그와 종교적 뜻(신념)이 다르기 때문에, 또 가문에 일사이적(一死二謫)의 엄청난 재앙을 몰고온 장본인이기 때문에 마음으로부터 짓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카사위인 황사영, 매형인 이승훈 등의 묘지명도 종교적 신념 차이로 그 묘지명을 짓지 않았던 것으로 해석된다.

ⓞ 다산은 〈五學論〉에서 선진유학(洙泗學)을 밝히고 구현하려고 했으며, 목민심서에는 문묘(文廟), 제단(祭壇), 서원(書院), 사묘(祠廟)의 제사중시론(祭祀重視論)을 개진하였고, 효제(孝悌)가 인륜의 근본이라는 다산의 효론(孝論) 등은 천주교와는 다른 것이다. 또 정규영의 〈사암연보〉에서 다산이 유교주의로 일관했다고 한 점 등으로 보아 다산은 만년에 천주교와 무관하다고 할 수 있다. 정규영이 연보를 완성한 때는 1921년으로 다산 사후 85년이 지난 때이며, 이때 굳이 다산의 천주교 관련 행적이 사실이라면 숨길 이유가 없다.

ⓟ 학문과 종교를 분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인데, 다산이 살았던 조선후기 사회에서 이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만약 다산이 외배내신(外背內信)의 이중적 삶을 살았다면 그것은 다산의 불행이자, 조선후기 한국학의 불행이기도 하다. 다산은 천주교와 절의(絶意)한 후에 철저한 유교주의자로 일관했다. 그러므로 그는 천주교 신자가 아님이 밝혀졌다. 115)

ⓠ 한형조는, 2012년 7월 6일, 다산학술문화재단이 주관하고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한 ‘다산탄신 250주년 기념 다산학 국제학술회의’ 제2일차에서 〈유신론적 주자학과 다산학 사이의 대화〉에서, 〈자명소〉에서 다산이 한 말을 분석하여, “다산은 처음 西敎(천주교)가 儒門의 別派라고 생각했다가, 곧 황허탄괴(謊虛誕怪, 허황되고 괴이쩍음)를 깨달았다고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西學이 하늘을 거역하고 神을 모독한다[逆天慢神]고 단정했다. 요컨대 다산은 가톨릭의 신학과 인간관, 그리고 제도적 종교의 도그마와 그 의례에 공감하지 않았다”라고 하면서 다산의 천주교 부정론을 강하게 뒷받침했다. 그러면서도, “물론 그의 神, 또는 하느님(天) 관념의 형성에 가톨릭이 깊이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다산이 초월적 신을 믿었던 것은 분명하다”고 기술했다. 이어서 “하늘이 선한 본성을 주고도, 선악의 갈림길에서 고투하게 한 것이 다 ‘하느님의 의도’라는 것이 아닌가. 하느님이 알고도 그렇게 시키신다(天非不知而使之然也). 그래야 善이 귀하다는 것을 증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톨릭의 논리이고 또한 칸트의 도덕철학에서 만나는 것이기도 하다”라고 기술하여, 다산의 저술에 서학적 영향이 있음을 인정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결론적으로 다산과 주자학의 거리보다도 다산과 천주학의 거리가 더 멀었다고 하면서 다산의 천주교 신앙을 부정하는 주장을 펼쳤다.

ⓡ 김상홍과 별도로 박석무는 정약용, 〈그의 시대와 사상〉, 《한국사회연구》 2(1984) 및 《다산기행》(1988, 한길사) 등에서 “다산은 30세 이후 완전히 천주교와 인연을 끊었다”고 했다.

ⓢ 백민정은 2007년 정약용에 대한기존 연구경향과 그에 대한 반성116)을 통하여 김상홍의 천주교회 측 주장에 대한 반론을 지지하면서117) 최석우 신부와 김옥희 수녀 등 천주교회 측의 주장이 무리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④ 시기구분과 관련하여 : 김상홍을 비롯한 ‘다산의 천주교 신앙 회의론자들’은 다산의 천주교 신앙 배교를 1791년으로 보고 있다. 이점은 앞서 살펴본 최석우, 김옥희 수녀가 1795년을 배교의 시점으로 본 것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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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최석우, 〈Dallet가 인용한 정약용의 韓國福音傳來史〉, 《한국천주교회사논문선집》 제1집(한국교회사연구소, 1976.1) ; 최석우, 〈丁茶山의 西學思想〉, 《정다산과 그 시대》(민음사, 1986) ; 최석우, 《한국교회사의 탐구II》(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중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정다산의 서학사상〉 ; 최석우, 〈다산 서학에 관한 논의〉, 《茶山 丁若鏞의 西學思想-1993년도 다산문화제 기념논총-》(김옥희 수녀 편, 1993.10, 다섯수레) ; 김옥희, 《한국천주교 사상사II-다산 정약용의 서학사상 연구-》(순교의 맥, 1991) ; 김옥희, 《광암 이벽의 서학사상》(가톨릭출판사, 1979).
95) 유홍렬, 《증보 한국천주교회사》 상(가톨릭출판사, 1962) 181, 230쪽. 내용은 달레 교회사와 거의 동일하다.
96) 허흥식, 〈“정민 ; 茶山 逸文을 통해본 승려와의 교유와 강학”에 대한 토론문〉, ‘다산탄신 250주년기념 학술대회’(2012.6.9, 고려대).
97) 최석우 ‧ 안응렬 역주, 《韓國天主敎會史》(상 · 중 · 하 ; 1980~1981, 한국교회사연구소)는 이 책의 한국어판 역주본이다.
98) Ch. Dallet, Histoire de l’Eglise de Corée, Vol.1, f.121 ; 이 책을 우리말로 “한국복음전래사” 또는 “조선복음전래사”로 번역한다.
99) 이에 대해서 백민정은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눈에 보이는 주장이 없다고 하여 정약용이 천주교인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이런 주장이 더 위험하다고 본다. 적어도 정약용이 (천주교에 대한) 진정한 신념과 의지가 있었다면 천주교 신앙인으로서 그의 관점은 분명히 자신의 사상적 저술들 속에 드러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백민정, 〈정약용에 대한기존 연구경향과 그에 대한 반성〉, 《정약용의 철학》중 보론(2007, 이학사).
100) 최석우, 〈다산 서학에 관한 논의〉, 《茶山 丁若鏞의 西學思想-1993년도 다산문화제 기념논총-》(김옥희 수녀 편, 1993.10, 다섯수레).
101) 최석우, 〈다산 서학에 관한 논의〉, 《茶山 丁若鏞의 西學思想-1993년도 다산문화제 기념논총-》(김옥희 수녀 편, 1993.10, 다섯수레) 44쪽.
102) ⓙ의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반론이 가능하다. 유교와 천주교는 事天을 그들의 핵심교리로 하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다산이 말한 유교의 事天之道 ‘仁人’은 부모 섬기기를 天 섬기듯이 하고 天 섬기기를 부모 섬기듯이 한다[事天=事親]고 하지만, 천주교에서는 事天을 위해서 때로 事親이 포기된다. 또 유교의 사천지도는 天性에 근거한 一心을 操存하고 人性을 보존하며 상제가 稟賦하여 주신 천명을 잊지 않는 存心養性에 있지만, 천주교에서는 巫祝과 같이 주야로 罪의 사함과 지옥에서의 구원을 간청하는 기도와 齋素와 예배로 일관되어 있다. 이처럼 유교와 천주교는 그 핵심 교리인 事天의 성격과 방법이 이처럼 다른데 어떻게 다산은 완전한 유학자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천주교인이 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
103) 김옥희, 《한국천주교 사상사II-다산 정약용의 서학사상 연구-》(순교의 맥, 1991).
104) ⓜ 김옥희 수녀의 다산 경전 해석에 대해서 백민정은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정약용은 인간의 마음이 하느님을 섬기는 성전이며 그분께서 內在하고 內住하시고 現存하시는 집이며 언제나 항상 임하셔서 비추어주는 室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고 한 김옥희의 언급은 주로 정약용이《중용》과 관련하여 上帝의 모습을 해명한 내용들을 근거로 한 것이다. 상제의 내재성을 강조할 경우 초월적 의미의 상제보다 양심을 통해서 내재화된 신적 명령을 강조할 때 그 주장의 동일한 근거로 사용될 수 있다. 따라서 김옥희의 경우처럼 이것이 곧 천주와 같은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인격신과의 만남을 드러내주는 필요충분의 논거는 될 수 없다고 본다. 김옥희의 《심경밀험》 분석처럼 다산의 심성론이 어떤 학적 이론체계를 형성하기 위한 인성론이나 성기호설 등의 규명이 아니라고 볼 때, 정약용이 전통유학의 심학적 토대에 대해서 갖고 있던 입장들을 간과하게 된다. 특히 《맹자》와 같은 경전들을 근거로 성기호설을 주장한 것은 다산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쟁점들 역시 배제될 것이다. 따라서 정약용의 저작들을 모두 천주교에서 말한 의미의 靈性을 체험한 공간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백민정, 〈정약용에 대한기존 연구경향과 그에 대한 반성〉, 《정약용의 철학》 중 보론(2007, 이학사) 437~438쪽.
105) 최석우, 〈다산 서학에 관한 논의〉, 《茶山 丁若鏞의 西學思想-1993년도 다산문화제 기념논총-》(김옥희 수녀 편, 1993.10, 다섯수레) 63쪽.
106) 최석우, 〈다산 서학에 관한 논의〉, 《茶山 丁若鏞의 西學思想-1993년도 다산문화제 기념논총-》(김옥희 수녀 편, 1993.10, 다섯수레) 21~25쪽 ; ㈠~㈣ 중 (三)과 (四)는 김상홍 교수가 1993년부터 현재까지 아무런 반론도 가하지 않고 있다.
107) 이 같은 김상홍의 체계적 반론은 교회사를 전공으로 하지 않는 비천주교인으로서 현재까지 거의 유일한 존재라는 점에서, 또 반론의 구체적인 내용에서 보여준 교회사에 대한 세밀한 관심에 대해서 경탄을 표한다. 김상홍 교수의 이러한 교회사에 대한 관심은 교회사를 교회 안의 신자들만의 특별한 역사로 취급해온 그간의 일반 역사학계의 관행과 인식에 일대 전환을 가져올 선구적 작업으로도 볼 수 있다. 필자의 이런 평가와는 별도로 필자보다 앞서 백민정은 교회 측이 다산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지 못하도록 한 점에서 김상홍의 노고에 대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백민정, 〈정약용에 대한기존 연구경향과 그에 대한 반성〉, 《정약용의 철학》 중 보론(2007, 이학사). 108) ⓓ의 견해에 대해서는 앞서 제3장에서 논한 홍이섭의 견해, “··· 문헌학적 확인이 용이치 않은 것이 반드시 부정적인 반증의 자료일 수만은 없으리라고 본다”는 말과 일정하게 배치된다.
109) ⓖ에 대해, 최석우 신부에 의하면, 다블뤼 주교가 교회사관련 자료를 수집하던 1850년대 후반부터 1860년대 초에는 다산 집안의 소상한 사정을 전해주는 目擊證人(다산의 책롱사건 변명에 대한 견해를 밝혔던 다산의 친척도 포함)이 다수 있었다고 하는데, 목격증인의 증언은 2, 3차 傳聞證言과는 달리, 1차 사료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하는 반문이 가능하다.
110) ⓘ의 견해에 대해, 앞서 본문 제3장에서 다산 간찰의 특성을 언급한 박철상의 견해, 즉 “다산처럼 간찰에 많은 의미를 부여한 인물도 없으며, 누구보다도 간찰을 쓰고 보관하는 일에 민감했는데, 이는 일찍부터 간찰이 사람의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편 해배 후인 1821년경 다산은 갈수록 쓸쓸함과 외로움 때문에 견디지 못하는 그의 심정을 간찰에 담았다”고 한 언급은 다산이 해배 후 대체로 바깥활동을 삼갔다는 교회 측의 주장에 일정한 힘을 실어준다. 한편 다산이 가끔 지인들과 함께 소풍을 갔다고 해서 그의 활동을 逍遙遊歷의 나날로 인식하는 것은 그가 해배 후 정적들의 감시 속에서 근신하는 삶을 살아온 모습과도 배치되기에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하겠다.
111) ⓙ와 같이 다산이 유교적 삶으로 일관했고, 내세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고 한 주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반론도 가능하다. 이상익은, 다산이 사후의 심판에 의한 보상의 관념을 도입하여 윤리적 행위의 동기를 확보하려고 했다고 주장했다. 이상익은, 다산이 항상 두려움을 낳는 외재적 초월자인 상제에 대한 복종 그리고 상제가 내리는 福善禍淫의 대가가 없으면 윤리적 인간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상익, 〈정약용 사회사상의 새로운 지평〉, 《철학》 48집(한국철학회, 1996).
112) ⓚ의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반론이 가능하다. 정해박해 때는 주로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에서 박해가 전개되었다. 그런데 정해박해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혹독한 병인박해 때는 전국적으로 근 8년 정도 박해가 지속되었다. 그런데도 신앙심을 지키는 사람들이 순교자 외에도 다수 있었다. 예를 들면 김기호 요한 회장 같은 분이다. 정해박해 때는 경기도 광주 마현(다산이 살던 고장)에서 박해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고, 박해와 관련되어 알려진 사실도 없다. 이점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113) ⓛ의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반론이 가능하다. 최 신부의 논문에 의하면 다블뤼 비망기에는 묘지명에 안 나오는 부분도 두 군데 보인다. 정약종에 대한 다산의 증언과 신유박해 순교자 200명 등.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답할 것인가?
114) ⓜ의 주장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반론이 있다. 교회사 전공자들은 모방 신부로 대표되는 파리외방전교회와 유방제로 대표되는 중국인 사제 사이에 조선전교의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 때문에 유방제 신부에 대한 모방의 기록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고 본다. 또 모방의 진술과는 달리, 신자들의 증언록(“기해병오박해순교자 시복재판록” 등)에는 서울과 서울 인근 경기지방의 신자들이 자기들을 방문한 유방제 신부에게서 성사를 받은 내용을 구술하는 내용이 수차례 나오며, 성인 남경문 베드로(1796~1846)는 유방제 신부가 순방 때 동행했던 전교회장 역할을 한 것으로 기록에 나타난다. 한편 유방제 신부가 조선을 출국한 것은 교회 측 다른 자료들에 의하면 4월 4일이 아니라 그해 12월 초 중국(마카오)으로 유학가던 김대건 등 3소년과 함께 간 것으로 알려진다. 이를 증빙하는 1836년 11월 29일자로 조선에서 쓴 유방제 신부의 라틴어 편지가 있다. 또한 최석우 논문(1993년)에서는 다산이 유방제 신부를 만난 것이 1836년이 아니라 1835년이라고 한 다블뤼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했는데, 이때는 모방 신부가 아직 입국(1836년 1월 13일)하기 전에 해당된다.
115) ⓟ의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반론이 가능하다. 조선후기 양명학이 들어온 후 상당수 유학자들이 겉으로는 성리학(정주학)을 표방하면서도 속으로는 양명학을 신봉했다는 의미에서 ‘外朱內王’으로 표현한다. 다산의 경우도 박해기에 목숨을 구하기 위해 당시의 다수 양반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外儒內天’ 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며, 상장례나 제사 문제를 제외하면 다산에게 천주교와 유교는 그의 會通的 思考 내에서 충분히 양립할 수 있었다.
116) 백민정, 〈정약용에 대한기존 연구경향과 그에 대한 반성〉, 《정약용의 철학》 중 보론(2007, 이학사).
117) 백민정이 김상홍의 주장을 지지한 이유로는, 첫째, 동기의 측면에서 김상홍의 천주교 입장에 대한 반론이 “서학의 영향만으로 정약용 철학을 이해하던 기존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단초를 제공해주었다는 점, 둘째, 다산의 문학작품을 분석하는 김상홍의 분석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는데, 특히 정조에 대한 잊을 수 없는 연모의 정, 기본적 인륜관계인 부모와 자식에 대한 유학자로서의 강한 애착과 사랑, 사서육경의 가르침을 잘 연마하지 못했다는 다산의 깊은 회한 등이 표현된 다산의 문학작품을 통해서 다산이 결국은 유학자로서 죽고 기억되길 바란 인물이라고 한 점 등에 공감이 가기 때문이라고 했다.

5. 맺음말

이상에서 필자는 다산의 서학 또는 천주교와 관련된 논의들을 2000년대 이후 급증한 다수 연구자들의 연구사정리 논문을 통해서 주제별로 살펴본 후, 조선후기부터 현재(2012년)까지 그 연구사적 흐름을 [다산 서학/천주교 논의의 제기(조선후기~1945년) → 다산 서학의 쟁점 형성(1945~1970년대) → 다산 천주교 신앙과 서학사상의 쟁점 부각(1980~1990년대) → 다산 서학사상 연구의 국제화와 관련 연구사 정리의 성행(2000년~현재) 등으로 구분하여 당대의 주요 논자와 그 논의의 주요 내용들을 쟁점을 곁들여 기술해보았다.

주지하듯이, 다산의 서학사상이나 천주교와 관련된 문제들에는 매우 많은 논쟁점들이 있다. 그러한 여러 논의 중에서도 특히 수십 년간 상반된 주장들이 팽팽하게 대립해온 “다산의 만년 천주교 신앙 여부”에 대하여 긍정론자와 부정론자들의 견해를 조목조목 따져보았다. 필자는 공평하게 연구사를 정리해야만 하는 입장에서, 또 직접 원전(原典)을 깊숙이 연구할 기회가 부족했던 관계로 인해서 섣불리 단언을 할 수 없다는 이유와 함께, 머리말에서 밝혔듯이 교회사와 한국사 일반의 가교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겠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도, 본고의 연구사 서술에서는 어느 한 쪽을 일방적으로 지지하고 다른 쪽을 전적으로 배척하는 방식의 논의는 전개하지 않았다. 다만 쟁점이 되는 논점들에 대해서 찬반 양론을 본문이나 각주에서 부기하는 방식으로 가능한 논의를 활성화하면서 기존 논의의 오류를 수정하거나 부족한 점을 보완하도록 함으로써 보다 객관적이고 생산적인 방향으로 결론을 도출하고자 노력했을 따름이다. 이제 다산과 천주교의 상관성에 대한 양쪽 논의에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공통된 문제점만은 지적해두고자 한다.

첫째, 관점(시각)의 문제이다. 이봉규와 돈 베이커, 부드윈 왈라반 등의 지적은 연구의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경청해야 할 적절한 조언으로 생각한다. 즉 천주교, 불교, 유교 등 다양한 요소가 모두 다산의 저술 속에 깃들어 있으므로 이들 중 어느 한 가지 측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연구는 다산의 복합적인 문제의식을 단순화시켜 연구의 객관성과 균형감을 상실케 할 뿐 아니라, 다산의 치열한 시대적 고민과 개혁적 의도를 간과하기 쉽게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또한 비슷한 맥락이지만, 다산과 같은 조선후기에 살았던 사람들은 사적인 영역에서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며 자신들의 개인적 기호에 맞는 사상을 취하고 실천했기 때문에, 이들을 배타적인 유교, 불교, 또는 도교의 신앙인으로 구분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고, 당시대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왜곡하는 것이 된다는 점도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과 연장선상에서 고려해 볼 것은 과연 ‘천주교 신자’, 내지 ‘유학자’의 기준을 어떤 수준에서 규정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즉 조선후기 천주교가 막 들어온 시점에서 그나마 박해까지 당하여 성직자도 없이 평신도들만으로 이루어진 신앙공동체에서 일개 평신도로서 다산 정약용이 어느 정도까지 천주교 교리를 이해할 수 있었던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다산을 비롯하여 한국교회 창설자로 불리는 이승훈, 권일신 등도 모두 당시 교회법규로는 허용되지 않았던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만들어 평신도로서, 성직자만 가능했던 각종 성사(聖事)를 집전했는데, 이는 정통 가톨릭 교리를 사제로부터 제대로 배우지 못한 데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곧 혼자서 또는 동료들과 토론을 통해서 漢文西學書를 보면서 가톨릭 교리를 익혔던 다산의 가톨릭 교리지식상의 한계점에 대해서도 일정부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산이 당시 가톨릭 교리와는 어긋난 유교식 喪祭禮를 거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름대로 가톨릭 신자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한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물론 다산이 자신의 喪祭禮觀이 가톨릭교회의 가르침과 다르다는 점을 1791년 이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 이에 대해서는 좀 더 신중한 자료의 탐색과 해석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1983년 ‘정다산과 그 시대 워크샵’에서 최석우 신부가 발표할 당시에 나온 토론 중에, “신앙인으로서의 다산과 다산의 학문적 업적을 분리하여 연구하는 것이 다산 사상을 보다 올바로 이해하는 방법이 될 것”이라는 주장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으므로 본 연구에서는 고려해보아야 할 조언이다. 고려시대부터 조선후기까지 우리나라 유학자들 중 다수가 외적(公的, 政治的)으로는 유학을 표방하면서, 내적(私的, 心理的)으로는 불교적 삶을 살아간 이들도 많았다. 이런 사상과 문화 풍토에서 조선후기 천주교가 들어와서 조선초기 불교가 탄압받듯이 탄압을 받았을 때, 외적으로 천주교를 배척하는 듯하면서 내심으로 천주교를 믿고 신앙생활을 남몰래 했던 사람이 없었을 것이라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는가? 둘째, 자료(비판)의 문제이다. 이 점에서 하우봉의 언급과 김영호의 선구적 논문은 참으로 필요하고도 타당한 지적을 한 것이다. 또 노희경, 조성을, 김문식 등의 문헌학적 연구도 매우 소중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다산학술재단에서 추진 중인 다산 저술의 정본화 작업은 다산 저술의 진면목과 의도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정본화 작업과 함께 현재까지 학계에 알려지지 않고, 간행되지 않은 다산의 일문(逸文)들을 최대한 조직적으로 수집하고 정리하는 작업도 정본화 작업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혹시라도 1836년 다산서거 직후나, 1934년 여유당전서 간행 전후에, 다산 집안에 소장하던 필사본 자료들을 간행하기 위해 편집하는 과정에서 담당자의 과실이나 고의에 의해 간행되지 못하고 사장된 자료들이 발견된다면, 이들을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미처 알려지지 않았던 다산의 진면목이나 또는 논쟁중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던져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앞으로 상당수의 미공개된 사료들이 발견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또 기대하고 있기도 하다.

셋째, 다산의 내면적인 사상(사고)과 그의 삶(실천)의 문제를 어떻게 어느 정도까지 연결시켜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당위론적으로 말하면 이 양자는 당연히 일치되어야 하고 연구자는 원칙적으로 상관성이 있다는 관점 하에서 논지를 전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다산 자신의 고백은, 과연 오늘날의 연구자들이 솔직한 그의 심정을 현존하는 저술(특히 간행본에서) 찾아볼 수 있을지 회의적인 생각이 든다. 또한 오늘날 연구자가 취해야 할 입장이 어떠해야 할 것인지 참으로 고심하게 한다.

편지 한 통을 쓸 때마다 두 번 세 번 읽어보고 마음속으로 빌었다. 이 편지가 큰길가에 떨어져 나의 원수가 열어보아도 내게 죄를 주는 일이 없겠는가? 또 이렇게 빌었다. “이 편지가 수백 년을 전해 내려가 수많은 지식인들에게 공개되어도 나를 조롱하는 일이 없겠는가?” 그런 다음에야 봉투를 붙였다. 이것이 군자의 신중함이다. 나는 젊어서 글씨를 빨리 쓰다보니 이런 경계를 무시하는 일이 많았다. 중년에는 재앙이 두려워 점차 이 방법을 지켰는데 아주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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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어 : 유학, 성리학, 수사학, 서학, 천주교, 정본화 작업, 일문 수집
투고일 : 2012. 11. 30 심사 시작일 : 2012. 12. 3 심사 완료일 : 2012.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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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발표문, 토론문
Boudewijn Walraven, Tasan’s Writings as a Resource for the Historical Anthoropology of Late Chosŏn Society(조선후기 사회에 대한 인류역사학 자료로서의 다산의 저술들) ‘다산탄신 250주년기념 다산학국제학술회의’(2012.7.6, 다산학술문화재단 주관)
Kevin N. Cawley, Traces of the Same within the Other : Decon- stucting Tasan’s Christo-Confucianology(타자 안에 있는 동일자의 흔적들 : 다산의 그리스도-유교학 해체하기) ‘다산탄신 250주년기념 다산학국제학술회의’(2012.7.6, 다산학술문화재단 주관)
구만옥, 〈“김영식 ; 서양과학에 나타난 정약용의 태도”에 대한 토론문〉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선정기념 다산학술심포지엄’(2012.8.13, 서울 프레스센터)
김상홍, 〈다산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다〉, 《단대신문》 제822호, 1990. 3.6.
———, 〈다산의 「秘本 墓誌銘 7편」과 천주교〉 ‘다산탄신 250주년 기념 학술대회 발표문’(2012.6.9. 고려대 인촌기념관)
———, 〈다산의 문학연구〉 ‘다산탄신 250주년기념 다산학국제학술회의’(2012.7.6, 다산학술문화재단 주관)
———, 〈다산의 천주교 신봉론에 대하여〉 연세대 국학연구원 제129회 월례발표 요지(1987.5.22)
———, 〈다산의 천주교 신봉론에 대한 반론〉 한국학연구회 제101차 월례발표회 요지(1990.3.24, 중앙대)
———, 〈茶山의 ‘秘本 墓誌銘 7편’과 天主敎〉 ‘다산탄신 250주년기념 학술대회 발표문’(2012.6.9, 고려대)
김선희, 〈라이프니츠의 신, 정약용의 상제〉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선정기념 다산학술심포지엄’(2012.8.13, 서울 프레스센터)
김언종, 〈茶山의 經學, 그 대개 및 의의〉 ‘다산탄신 250주년기념 학술대회’(2012.6.9, 고려대)
김영식, 〈서양과학에 나타난 정약용의 태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선정기념 다산학술심포지엄’(2012.8.13, 서울 프레스센터)
———, 〈정약용 사상과 학문의 실용주의적 성격〉 ‘다산탄신 250주년기념 다산학국제학술회의’(2012.7.6, 다산학술문화재단 주관)
노경희, 〈다산 저술의 전승과 유통에 대한 서지학적 고찰–다산가장의 고본에서 신조선사의 『여유당전서』에 이르기까지–〉 ‘다산탄신 250주년기념 학술대회’(2012.6.9, 고려대)
박철상, 〈간찰을 통해본 다산 –文集 未收錄 簡札을 중심으로–〉 ‘다산탄신 250주년기념 다산학국제학술회의’(2012.7.5, 다산학술문화재단 주관)
백민정, 〈“송영배 ; 다산에 보이는 『천주실의』의 철학적 영향”에 대한 토론문〉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선정기념 다산학술심포지엄’ (2012. 8.13, 서울 프레스센터)
송영배, 〈다산에 보이는 『천주실의』의 철학적 영향〉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선정기념 다산학술심포지엄’(2012.8.13, 서울 프레스센터)
송재소, 〈다산학 연구의 諸問題〉 ‘다산탄신 250주년기념 다산학국제학술회의’(2012.7.5, 다산학술문화재단 주관)
이동희, 〈서학수용의 두 가지 반응 : 신후담과 정약용–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 수용을 중심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선정기념 다산학술심포지엄’(2012.8.13, 서울 프레스센터)
이향만, 〈쁘레마르와 다산의 유교해석에 대한 토착신학적 의의〉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선정기념 다산학술심포지엄’(2012.8.13, 서울 프레스센터)
정 민, 〈茶山 逸文을 통해본 승려와의 교유와 강학〉 ‘다산탄신 250주년기념 학술대회’(2012.6.9, 고려대)
한형조, 〈유신론적 주자학과 다산학 사이의 대화〉 ‘다산탄신 250주년기념 다산학국제학술회의’(2012.7.6, 다산학술문화재단 주관)
허흥식, 〈“정민 ; 茶山 逸文을 통해본 승려와의 교유와 강학”에 대한 토론문〉 ‘다산탄신 250주년기념 학술대회’(2012.6.9, 고려대)

ABSTRACT

A Review on the trends of studies about the Relationship between Chŏng Yag-yong and Western learning, Catholicism

Won Jae-yeon
Head Researcher in Suwon Research Institute of Catholic Church History
Tasanhag or the theory of Tasan Chŏng Yag-yong, that is the study on Chŏng Yag-yong(1762~1836) who has lived during 74 years from 1762 to 1836 in the late Choseon dynasty, has become realized through the process of receiving and giving influences on the diverse religions such as the new and the old Confucianism, Buddhism, Taoism, Catholicism and the other popular belief, setting background the Central politics in which he had official life, and the country districts he acted. Until recent for many decades it has been going along that the debating on the relationship between Tasanhag and the Old-confucianism that is the studies of Confucius and Mancius, Neo-confucianism, Western learnings, these were studied by the scholars of Realistic school in that period. I obtained the conclusion as follows, by impartial reviewing the two contrasting claims. First, we should admit the diverse possibilities of optional combination or of the integration of different religions and ideas, because we cannot confine exclusively Tasan and his contemporary Confucianists to only one religion or one thought in their daily lives and study tract. Second, we should try to make an exemplification of the major text, Complete Writings of Tasan and of his school, with constant bibliographic research of the writings. At same time, we should collect diligently the disappeared Tasan’s papers or workings and should examine and compare them each other, and so make strengthen our admissibility of evidence of the original text.

Keywords : Tasanhag, Confucianism, the studies of Confucius and Mancius, the studies of Neo-confucianism, Western learnings, Catholicism, an exemplification of the major text Complete Writings of Tasan, collecting the disappeared Tasan’s papers or workings

토 론 문 1, 2
토론문 1 - 김상홍 / 단국대학교 석좌교수

원재연의 〈다산 정약용과 서학/천주교의 관계에 대한 연구사적 검토–다산의 천주교 신앙문제를 중심으로〉는 연구사를 시대별 · 논쟁별로 자세하게 논하였다. 이 논문은 다산의 서학/천주교 연구사를 이해하는 데 큰 길잡이가 된다. 이 논문을 보완해서 단행본으로 출간하면 좋을 정도로 방대하고 또한 심혈을 경주한 勞作이다.

토론자는 1981년부터 2012년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다산은 1791년 珍山事件 이후 천주교와 絶意하고 다시는 천주교를 신봉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토론자가 일찍이 주장한 내용을 이 논문에서 16개항으로 요약을 했기에 再論하지 않는다.
첫째, 우리 학계의 연구 풍토의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일부 다산 연구자들이 더 이상 다산을 “거짓말을 한 사람”으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다산은 1822년 회갑을 맞아 일생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자신의 묘지명 2편과, 李家煥, 李基讓, 權哲身, 吳錫忠, 丁若銓의 묘지명 7편을 짓고 이를 “秘本”으로 전했다. 이 6인은 1801년 천주교 박해 때 억울하게 獄死하여 棄市되거나, 유배지에서 운명하거나, 장기간 유배생활을 했다. 이 6인의 “秘本” 묘지명 7편(다산 2편)은 다산의 手寫本 《冽水全書 續集》 권8 표지에 “秘本”으로 표시되어 있어 오랫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 비본 7편은 진실의 기록이자 다산의 良心宣言書이다.

梅泉 黃玹은 高宗이 을유년(고종 22, 1885)과 병술년(고종 23, 1886) 간에 《與猶堂集》을 올리도록 명하고 蓋然히 같은 시대에 살지 못함을 탄식했다고 했다.1) 高宗의 御覽本으로 轉寫된 규장각본 《여유당집》 78책에는 “秘本” 7편이 없다. 이 秘本은 1858년 11월 7일 당시에도 “秘本”으로 전해진 것을 다블뤼 主敎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이 “秘本”이 세상에 공개된 것은 다산 逝去 100년 기념사업회에서 《與猶堂全書》 76책을 간행하기 시작한 1935년이다. 이때는 조선왕조가 망한 후인 일제침략시기로 “비본”을 세상에 공개해도 정치적 파장이 없기 때문에 다산 후손들이 이를 공개한 것이다. 다산은 비본 묘지명에서 이렇게 밝혔다.

성균관에서 李檗을 따라 노닐면서 西敎의 교리를 듣고 서교의 서적을 보았다. 정미년(정조 11, 1787) 이후 4~5년 동안 자못 마음을 기울였는데, 신해년(1791) 이래로 국가의 금령이 엄하여 마침내 생각을 아주 끊어버렸다.2)
그런데 우리 학계 일부에서는 秘本의 자찬묘지명에서 분명히 絶意했다는 말을 믿지 않고, 晩年에 믿었다고 하여 다산을 “거짓말을 한 사람”, “거짓말쟁이”, “이중인격자”로 만들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安春根 수집, 茶山 手寫本 《冽水全書續集》 八 표지. 우측에 “墓誌銘 秘本”라고 써 있다.
다산 秘本 묘지명 이가환 묘지명


① 다산 연구자가 다산의 기록을 믿지 않고 천주교를 믿었다고 해야 연구자의 위상이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② 그리고 絶意 이후 다산이 천주교를 믿었다고 해야 천주교의 위상이 더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고 복음화를 이룩한 우리나라 천주교의 역사와 위상은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도 높다.

③ 또한 다산이 만년에 천주교를 믿었다고 해야 다산의 위상이 높아지거나 낮아지는 것이 아니다. 다산은 다산일 뿐이다. 다산이 18년의 유배를 겪고 고향에 돌아와 회갑을 맞이하여 묘지명을 쓰고 “秘本”으로 전한 것은 진실의 기록임을 의미한다. 다산 연구자들은 더 이상 다산을 “거짓말을 한 사람”, “거짓말쟁이”, “이중인격자”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秘本 묘지명은 진실의 기록임을 믿어야 한다.

둘째, 다산이 천주교와 절의한 이후 만년에 천주교를 믿었다면 다산에게 평생 가혹한 짓을 한 徐龍輔가 다산을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다산이 晩年에 천주교를 신봉했는지 여부는 서용보와 연계시켜 보아야 한다.

서용보(1757, 영조 33∼1824, 순조 24)는, 1774년(영조 50) 생원시에 합격한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1800년 순조가 즉위하던 해에 우의정, 1802년 좌의정이 되었으며, 1804년 判中樞府事가 되었다. 1805년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進賀兼謝恩正使가 되어 청나라를 다녀온 뒤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가 있다가, 14년 뒤인 1819년(순조 19) 영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영의정을 사임하고 판중추부사ㆍ領中樞府事를 지냈다.

서용보는 다산과 惡緣이 있다. 다산이 경기도 암행어사 시절(33세, 1794, 정조 18)에 서용보의 비리를 徵治했다.

이때 徐政丞(徐龍輔를 말함)의 家人으로 麻田에 사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鄕校의 땅을 서정승의 집에 바쳐 佳城(묘지)으로 삼도록 도모하면서 거짓말로 땅이 좋지 못하다고 속이고, 鄕儒를 위협하여 學宮[향교]을 옮기는데 이미 明倫堂을 뜯어버렸다. 鏞(다산)이 염탐해서 알고는 엄습하여 잡아서 懲治하였다.3)

이로 인해 서용보는 다산을 일생동안 괴롭히게 된 것이다. 徐龍輔는 다산의 앞길을 여러 차례 막았다. 1801년 신유사화 초에는 洪羲運(洪樂安)이 다산을 죽이려고 앞장섰고 大妃가 석방하려 했는데 徐龍輔가 저지했다. 황사영 백서 사건 때에는 睦萬中, 洪羲運(洪樂安), 李基慶 등이 다산을 죽이려 했고 1803년에 대비가 다산과 蔡弘遠을 석방하라는 특명을 내렸으나 徐龍輔가 또 저지시켰고,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돌아온 후 1819년(기묘) 겨울에 조정에서 다산을 등용하려 했으나 徐龍輔가 극력 저지했다.4) 다산의 일생은 正祖에 의해 꽃이 피었다가 徐龍輔에 의해 꺾이고 시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5) 다산이 만년에 다시 천주교를 믿었다는 최석우의 논문을 그대로 인용한다.

정약용은 이미 유배지에서 과거를 뉘우치고 교회 일을 도왔다. 그러나 그가 신앙생활을 완전히 다시 시작한 것은 유배 생활에서 풀려난 지 수년 후부터였다. 이러한 경위에 대하여 (다블뤼) 비망기는 다음과 같은 생생한 기록을 전하고 있다.6)
이어서 아래의 다블뤼의 비망기를 인용하였다.

정약용 요한은 귀양에서 풀려난 지 2, 3년 후부터 신앙생활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천주교 진리는 그에게 항상 명백하게 보였다. 그는 늘 외딴방에 틀어박혀 소수의 친구밖에 만나지 않았고, 속죄를 위해 자주 단식과 그 밖의 고행을 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만든 몹시 고통을 주는 띠를 늘 매고 있었고 또한 몸의 여러 곳을 작은 사슬로 감고 있었다. 그는 또한 오랫동안 묵상을 하곤 했다.7)

최석우는 “정약용의 이와 같은 철저한 신앙생활의 시작은 그가 1822년에 회갑을 맞아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것과 이상하게도 시기적으로 일치하는 것 같다”8)하고 자찬묘지명을 인용하였다. 다산이 유배에서 고향에 돌아오니 서용보가 서쪽 이웃에 살고 있었다.
다산이 秘本으로 남긴 자찬묘지명을 보자.

(유배에서 풀려나) 향리로 돌아오자, 徐龍輔가 바야흐로 서쪽 이웃에 물러나 살고 있었는데, 사람을 보내어 위로하고 친절한 뜻을 표했다. 기묘년(순조 19, 1819) 봄 다시 相府에 들어갔는데, 가고 옴에 있어 모두 위문하고 은근한 뜻을 전하였다. 겨울에 조정의 논의가 經田하는 일에 용을 다시 쓰려하여 논이 이미 정해졌는데, 徐龍輔가 극력 저지하였다.9)

徐龍輔는 다산이 유배에서 돌아온 다음해인 1819년(순조 19)에 영의정이 되었다. 요시찰 인물이었던 다산이 “귀양에서 풀려난 지 2, 3년 후부터 신앙생활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천주교 진리는 그에게 항상 명백하게 보였다. …자신이 직접 만든 몹시 고통을 주는 띠를 늘 매고 있었고 또한 몸의 여러 곳을 작은 사슬로 감고 있었다. 그는 또한 오랫동안 묵상을 하곤 했다”라면 소문이 영의정 서용보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다. 이 세상에 비밀은 없다. 천주교를 믿었다면 영의정 서용보가 다산을 가만 두었겠는가?
셋째, 다산의 행적에 대하여 ① 다산 자신이 기록한 것과, ②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기록이 서로 다를 때 어느 것을 따라야 하는지의 문제이다. 천진암의 卞基榮 신부는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가 위대한 업적이나 그 내용에 대하여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지적했다. 변기영은 “그(달레)의 한국교회사 내용을 아무런 틀림이나 잘못이 없는 책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별개의 것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달레가 2년이라는 그다지 길지 않은 기간에 자신이 한 번도 가보지 아니한 나라이고, 더욱이 그 당시까지 서양 세계에 전혀 알려지지 아니한 나라에서 일어난 일들을 선교사들의 편지를 중심으로 하여 책으로 편찬해 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천주가 아닌 이상 거기에는 적지 않은 틀림이 있을 수 있고, 또 있을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쯤은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10)라고 했다.
변기영은 이어서 그는 다블뤼의 비망기도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다음과 같이 견해를 밝혔다.

더욱이 그(달레)에게 기본 자료로 제공된 다블뤼 안 신부(1818∼1866)의 편지와 안 신부 자신에 대해서도 좀 생각해야 할 일은 안 신부를 위시하여 당시 한국에서 일한 초기 선교사들이, 아무리 두뇌가 좋고 열의가 컸다고 하더라도 문법책이나 사전도 전혀 없던 시절에 박해를 피해 다니면서 생소한 우리 조선말을 잘 배웠다고 하여도, 거기에는 얼마만큼의 부족과 제약이 불가피했었으리라고 우리는 쉽게 이해할 만하다. 따라서 당시 양반, 상인들의 격차와 족벌 간의 거리 등으로 비록 한국인들끼리도 박해에 관한 이야기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도록 소식을 제대로 전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는 황사영의 백서를 읽으면 가히 짐작할 수 있다.11)

이어서 변기영은 다블뤼나 달레의 기록들이 오류가 있을 수 있는 만큼, 다산의 기록과 달레의 기록이 서로 다를 때는 다산의 기록이 더 신빙성이 있다는 명쾌한 입장을 밝혔다.

달레 저서와 정다산 저서와의 차이는 정다산의 기록을 달레의 기록보다 더 정확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다산이 관직 생활과 문필 활동을 하면서 다른 여러 가지 기록을 소상히 남긴 국내의 대학자인 동시에 자신이 들어 있는 사건의 직접 기술한 사건이고, 달레의 저서는 우선 달레 자신이 한국 땅을 밟아 보지 못한데다가 남들이 수집해서 보내준 자료를 정리해서 출판한 분이니 비록 자료 전달과 편집 및 인쇄 과정에서 착오가 없었다 치더라도 자료 수집자가 그 당시 정다산보다 더 정확하고 신빙할 만한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어렵기 때문이다.12)


따라서 여유당전서, 보유 6개의 권마다 들어 있는 무수한 역사적 연대 기록 등을 볼 때 다산의 기록은 그 어느 누구의 기록보다 더 정확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당연하며, 특히 다산 자신의 동일한 기록 일부가 제3자의 손을 거쳐 외국인들의 손으로 번역된 기록과 번역되지 않은 기록이 상이할 때는 원본 기록에 더 신빙을 두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학문의 방법론에 있어 동일한 사건과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또 관계 면에서(예컨대 가까운 시대에 살던 이의 기록이나, 가까운 곳에 살던 이의 기록, 혹은 같은 당파나 친척의 기록) 보다 가까운 자료를 더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13)


같은 사건에 대한 기록이 서로 다를 때, 다산의 기록을 더 믿어야 한다는 변기영(변기영도 다산이 배교 이후 다시 천주교를 믿었다고 주장함)의 견해는 옳다. 다산의 秘本 〈자찬묘지명〉 2편의 기록은 진실의 기록인 만큼 이를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에 대한 발표자의 의견을 밝혀주기 바란다.
넷째, 다산이 종부성사를 받고 운명했다는 주장과, 다산에게 종부성사를 행했다는 중국인 劉方濟 신부가 중국으로 쫓겨 간 날짜 문제이다.
달레가 《한국천주교회사》에서, 다산이 1835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 것은 誤記이다. 다산은 洪氏 부인과 결혼한 지 꼭 60주년일인 1836년(병신, 헌종 2) 음력 2월 22일(당시 양력 4월 7일)에 향년 75세로 운명했다.14) 유방제 신부는 “唾棄할 만한 不道德으로 자기의 司祭職을 공공연하게 더럽혔기” 때문에 모방(Maubant) 신부는 布敎地의 長으로서 교황청으로부터 받은 권한으로 聖務停止 처분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15) 다산에게 종부성사를 행했다는 중국인 유방제 신부는 周文謨 신부 후임으로 1833년 말에 조선에 들어왔으나 스캔들로 인하여 1836년 양력 4월 4일 이전에 조선을 떠나 山西省의 고향으로 향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산은 결혼 60주년 回婚日인 1836년 음력 2월 22일(당시 양력 4월 7일)에 향년 75세로 운명했다. 모방 신부가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낸 1836년 4월 4일(양력)자 서한과, 4월 6일(양력)자 布敎聖省 장관에게 보낸 서한에서 유방제 신부의 스캔들과 이에 따른 성무집행 정지 조처에 관해 상세히 보고한 기록에 따르면 “모든 이에게 버림을 받은 劉(方濟) 신부는 이리 저리 미룬 끝에” 1836년 양력 4월 4일 이전에 서울에서 중국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16) 유방제 신부는 적어도 다산이 운명하기 3일 전인 4월 4일 이전에 떠났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4월 7일에 운명한 다산에게 종부성사를 의식을 행할 수 있었겠는가?

다산은 운명하기 3일 전에 결혼 60년을 회상한 回巹詩를 썼고 가족들이 回婚式을 준비할 정도로 건강했다. 이런 다산이 4월 4일 이전에 성무집행 정지를 당하고 쫓겨난 유방제 신부에게 종부성사 의식을 받았다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 변기영 신부의 기록에 의하면, 유방제 신부는 마현 강 건너 하류인 구산에 머물고 있었다. 유방제 신부가 반도덕적, 반천주교적 신부로서 모방 신부에게 聖務執行 정지 처분을 받고, 교도들에게 버림을 받아 적어도 쫓겨 가기 하루 전 또는 당일인 바로 4월 3일에 다산은 약간의 병환이 있었다. 유방제 신부가 쫓겨 가기 하루 전 또는 당일에 그가 무슨 정신으로 다산에게 가서 종부성사를 행할 수 있었겠느냐는 점이다.

발표자는 註 114에서 “한편 유방제 신부가 조선을 출국한 것은 교회 측 다른 자료들에 의하면 4월 4일이 아니라 그해 12월 초 중국(마카오)으로 유학가던 김대건 등 3소년과 함께 간 것으로 알려진다. 이를 증빙하는 1836년 11월 29일자로 조선에서 쓴 유방제 신부의 라틴어 편지가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와, 모방 신부의 1836년 4월 4일(양력)자 서한과, 4월 6일(양력)자 서한은 모두 신빙성이 없는 책과 서한이 된다. 이 문제에 대하여 의견을 밝혀주기 바란다.

결론적으로 다산의 秘本 묘지명의 기록을 믿어야 한다. 秘本으로 전한 묘지명은 다산의 良心宣言書이다. 일부 다산 연구자들은 다산이 천주교와 “絶意”했다는 것을 믿지 않고 “거짓말을 한 사람”, “거짓말쟁이”, “이중인격자”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끝으로 다산의 천주교 신봉 여부와 무관한 일이나, 天眞菴이 천주교의 발상지라고 한다면 발상지인 천진암부터 복원을 하고 100년 성당을 건설하는 것이 천주교다운 道理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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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黃玹, 《梅泉野錄》 下, 卷之一 上(甲午以前), 亞細亞文化社 影印, 1978, 948∼949쪽.
2) 정약용, 〈自撰墓誌銘〉(壙中本), 《여유당전서》(一), 권16, 329쪽. “旣上庠, 從李檗游, 聞西敎見西書. 丁未以後四五年, 頗傾心焉. 辛亥以來, 邦禁嚴遂絶意.”
3) 정약용, 〈자찬묘지명〉(集中本), 《여유당전서》(一), 권16, 330∼331쪽. “時徐相家人有居麻田者, 謀以鄕校之地獻于相門, 以爲佳城, 詐云地不吉, 脅鄕儒移學宮, 已毀明倫堂. 鏞廉知之, 則掩捕以懲之.”
4) 정약용, 〈자찬묘지명〉(集中本), 《여유당전서》(一), 권16, 334쪽. “旣還徐龍輔方屏居西鄰, 遣人勞慰, 致款曲. 己卯春, 再入相府, 去來皆慰問殷勤. 冬朝議欲復用鏞以經田, 論旣定, 龍輔力沮之.”
5) 김상홍, 〈茶山의 ‘秘本 墓誌銘 7편’과 天主敎〉, ‘다산탄신 250주년기념 학술대회 발표문’, 2012. 6. 9, 고려대.
6) 최석우, 〈丁茶山의 西學思想〉, 《丁茶山과 그 時代》, 民音社, 1986, 120쪽.
7) ㅡ 다블뤼, 《비망기》, p. 5, p. 291, p. 340 再引(《한국천주교회사》 中, 185∼186쪽 참조).
8) 최석우, 〈丁茶山의 西學思想〉, 《丁茶山과 그 時代》, 民音社, 1986, 120쪽.
9) 정약용, 〈자찬묘지명〉(集中本),《여유당전서》(一), 권16, 334쪽. “旣還徐龍輔方屏居西鄰, 遣人勞慰, 致款曲. 己卯春, 再入相府, 去來皆慰問殷勤. 冬朝議欲復用鏞以經田, 論旣定, 龍輔力沮之.”
10) 변기영, 《이벽성조와 천진암》, 진명출판사, 1981, 재판, 71쪽.
11) 같은 책, 같은 곳.
12) 같은 책, 10쪽.
13) 같은 책, 31∼32쪽.
14) 다산이 운명한 날인 1836년 음력 2월 22일은 양력으로 4월 7일이고, 출생 년 월 일인 1762년 음력 6월 16일은 양력으로 8월 5일이다. 양력으로 계산한 것은 김석형의 다산 정약용의 생애와 활동에서 따른다(《다산 정약용 탄생 200주년 기념논문집》, 북한과학원 철학연구소, 1962). 이 책을 도서출판 푸른숲에서 1989년 3월에 재편집 간행하였다 14쪽).
15) 달레, 안응렬‧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中, 338∼339쪽.
16) 《한국천주교회사》 中, 338∼339쪽의 註 32와 34.

토론문 2 - 조성을 / 아주대학교 교수

이 논문은 다산과 서학의 관계에 대한 기존 연구사를 (1) 논의의 제기(조선후기~1945), (2) 쟁점의 형성(1945~1970년대), (3) 쟁점 부각(1980~1990년대) (4) 연구의 국제화(2000년대)의 네 시기로 나누어 검토한 것이다. 체계적으로 잘 정리되었므로 논문의 내용 자체에 대하여는 별 다른 이의가 없다. 앞으로 이 분야를 연구하는 데에 반드시 참고하여야 할 논문으로 생각된다. 다만 몇 가지 졸견을 말씀드리는 것으로 토론자로서의 소임을 대신하고자 한다.

첫째로 원재연 선생은 다산과 천주교와의 관련 문제의 초점은 그가 한 때 천주교 신자였던가, 아니었던가가 아니라, 천주교 신앙 포기를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후에 과연 천주교 신앙심을 계속 유지했던가 아니면 완전히 단절했던가에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천주교의 입장에서는 중요한 문제일지는 몰라도 한국사상사, 조선중후기 실학사를 연구하는 입장에서는 초점이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사상사 연구의 입장에서는 《천주실의》 등 천주교 서적이 다산 사상의 형성 과정에 미친 영향, 이를 매개로 다산이 원시유학에서의 상제관을 발견하는 과정, 이후 다산 사상에서 양자가 결합되어 그야말로 새로운 다산사상이 형성되는 과정, 이것을 당시의 시대적 상황 및 지적 전통과 구체적으로 연결시키는 문제, 이를 통해 다산사상이 동아시아 유학사에서 갖는 위치와 의미를 찾는 문제, 동서의 문명과 사상의 융합이라는 관점에서 다산사상을 평가하는 문제, 21세기에 다산의 사상적 지평이 갖는 의미 등에 대하여 생각하는 초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둘째로 다산과 서학 문제에 대하여 접근할 때 먼저 서학 및 천주교에 대한 명확한 이해에서 출발하여야 할 것이다. 우선 조선사회에 수용된 서학은 일단 서양의 과학기술 지식과 천주교의 두 측면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나누어 볼 수 있겠다. 이 가운데 문제가 되는 것이 천주교의 측면이다. 여기에서 천주교란 무엇인가라고 하는 점을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본 토론자가 상식적으로 아는 한에서는 초기에 원시기독교가 있었고 삼위일체 논쟁 등을 거쳐 서양 중세에 로마 교황을 정점으로 천주교단이 성립되어 있었으며, 여기에 대하여 루터 등에 의하여 종교개혁이 이루어져 이른바 개신교가 성립하게 됨에 따라서 기독교는 천주교와 개신교로 양분되게 되었다. 그리고 반동반종교개혁을 거쳐 천주교는 동방으로 선교하게 되었으나 이후 전례 문제를 둘러싸고 천주교 내부에서 논쟁이 일어났고 조선에서 천주교 신앙이 시작된 1780년대 중반 이후에는 교황청의 결정에 따라서 천주교 내에서도 유교적 제사를 금지하는 것으로 방향을 정하게 된 것으로 알고 있다.

문제는 1780년대 중반 처음 형성된 조선의 “천주교” 신앙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천주교 교리를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삼위일체에 대한 논의, 십자가에서의 예수의 죽음과 부활 및 그 의미를 믿는지 여부, 인간의 원죄를 인정하는지 여부, 이른바 기존 구약과 신약 이외의 경전을 인정하는지 등의 문제에 대한 논의가 당시 신앙공동체 내에 있었는지 궁금하다. 막연히 인격적 주재자로서의 상제를 믿는 것이었다면 그것을 “천주교” 신앙이라고 볼 수 있을지, 그들의 모임을 “천주교” 신앙공동체로 보아야 하는지 등이 궁금하다. 여기에서 정약용이 배교한 문제에 대하여도, 그가 진정한 의미에서 천주교도였던가, 달리 말하면 어느 정도 천주교 교리를 이해하고 그에 대한 믿음을 가졌던가 하는 점 등을 따져보아야 한다.

천주교 교리를 정확하고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조선의 신앙공동체 내에 정약용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가 진산사건을 통해 촉발된 제사 문제에 대하여 내심으로도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찬동하였기 때문에 일단 교단과 관계를 끊었고 주문모 사건을 계기로 자발적으로 “천주교도”를 회유하는 단계로 나아갔다면, 그가 교단을 떠난 것을 천주교에 대한 배교로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유교적 제사를 중시하는 그의 태도는 강진 시기에 《상례사전》과 《주역사전》, 초고본 《상서고훈》 및 《상서지원록》을 지을 때는 물론 만년까지도 일관되며 이런 제사 중시는 그의 사상 체계 내에서 초기부터 만년까지 지속된 인격적 주재자로서의 상제관과 모순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정약용의 사상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원죄 의식은 없었고 어떤 육체적 부활에 대하여도 언급한 점이 없다. 물론 기독교에서 “예수 부활”에 대하여 생물학적 부활이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 즉 우리들 모두의 마음속에서 예수의 정신이 지속적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 “예수 부활”이라고 설명한다면 모르겠지만 논평자의 상식으로는 개신교이든, 천주교이든 공식적으로 예수의 생물학적 부활을 믿는 것으로 알고 있다.

셋째로 다산과 천주교와의 관계를 생각할 때 다산사상의 성격을 유학의 범주 내에서 이해할 수 있을지 하는 문제이다. 최석우 신부는 “완전한 유학자이자 동시에 완전한 천주교인으로서, 그의 내면에는 유교와 천주교가 서로 대등한 입장에서 만나고 공존할 수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였다. 본 토론자의 생각으로는 다산이 공맹의 사상을 기반으로 수기치인의 학을 지향한 유학자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다산사상은 공맹의 유학도, 신유학도 아닌, 21세기 근대 너머로 열려 있는 제3의 유학이다. 이것은 유학은 폭이 매우 넓고 역사에 따라서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간다고 보는 견해에서 나온 것이다. 만일 기독교 혹은 천주교가 그런 방향으로 갈 수 있다면 예를 들어 천주교 혹은 개신교가 원죄를 부정하고 다원적 구원론을 인정하며 아울러 교황청 또는 개신교 본부들에서 독립한 별개의 한국교회를 생각하여 제국주의적 영향에서 벗어나고 참으로 이 한반도의 민중을 섬기는 신앙을 형성하고 실천하는 교회가 된다면 다산사상은 천주교 또는 개신교와 공존할 수 있으며 이때 다산은 진정한 유학자이자 진정한 천주교도였다고 자리매김 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로 다산과 천주교와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우선 다산 자신의 언급에 대하여 존중하고 기타 자료에 대하여는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물론 다산 자신의 언급도 우리가 문헌 비판적 관점에서 접근하여야 하지만 그가 언급을 하지 않는 경우는 있어도 거짓말을 한 경우는 없다고 여겨진다. 천주교 계통에서 나오는 자료들에 대하여는 좀 더 신중한 문헌 비판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특히 종부성사 주장은 회혼례를 준비하고 있던 번잡한 당시 상황에서 일단 어려웠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정학연 형제는 천주교에 대하여 냉담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들이 종부성사에 대하여 찬성하였을지도 의문이다. 다만 다산이 천주교단으로 돌아왔는지 여부, 그리고 종부성사를 받았는지 여부는 천주교회의 입장에서는 중요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다산사상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에는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상 토론 요지가 약간 핀트가 어긋난 느낌이 있다. 다산과 서학과의 관련 문제, 또는 다산사상의 성격 등과 관련하여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에서, 본 토론자가 다산과 서학 관계에 대하여 평소에 갖고 있던 졸견을 피력해 보았다. 원재연 선생과 다른 참석자 분들께 송구스럽다는 말씀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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