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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29일 금요일

유가의 인심도심론(人心道心論)

인심도심설
人心道心說
유교의 도덕적 심성수양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학설 가운데 하나로서, 마음의 작용이 2가지의 서로 다른 성격을 띨 수 있음을 밝힌 인성론(人性論).
〈서경〉 대우모편(大禹謨篇)에는 순(舜)이 우(禹)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주면서,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미묘하니 마음을 잘 살펴 하나가 되게 하여 진실로 그 중(中)을 잡으라"는 가르침을 주었다는 내용이 있다. 그후 당대(唐代)까지는 유교가 도덕적 심성수양의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 내용은 주목받지 못하고, 오직 불교적인 심성수양론만이 발달했다. 그러나 불교를 비판하면서 성립한 송대(宋代)의 성리학에서는 불교의 심성수양론을 대체할 유교적 이론을 정립해야 했고, 그러한 관심 속에서 이러한 대우모편의 글이 중요하게 취급되기 시작했다. 인심도심설의 기본내용은 주희(朱熹)가 〈중용〉장구서(章句序)에서 설명했다. 마음의 본체는 하나이지만 그것이 작용할 때 형기(形氣)의 사사로움에서 나오기도 하고 성명(性命)의 올바름에 근원하기도 하는데, 그 각각을 가리켜 인심과 도심이라고 했다. 인심은 감각적 욕구에 따른 마음의 작용을 가리키는 것이며, 도심은 도덕적 본성에 따른 마음의 작용을 가리키는 것으로 설명한 것이다. 그리고 인심이 위태하다고 한 것은 그것이 감각적 욕구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부도덕한 방향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는 것이고, 도심이 미묘하다고 한 것은 그것이 도덕적 본성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 것으로 설명했다. 그런데 마음의 작용이 인심과 도심으로 드러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누구나 정일(精一)한 마음자세를 가짐으로써 도심을 잘 살펴서 키워나갈 수 있고 인심이 부도덕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한 심성수양의 결과로 중의 상태, 즉 인욕(人欲)의 사(私)를 물리치고 천리(天理)의 공(公)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상적인 인격을 갖출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찍이 조선 시대의 성리학자들도 인심도심설에 관심을 보였는데, 그들의 인심도심설은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15세기초에 이미 권근(權近)은 마음의 작용을 2가지로 나누면서, 마음 속의 성이 발한 것을 정이라 하면서 사단과 도심을 그러한 정에 포함시켰으며, 마음이 발한 것을 의라 하면서 칠정과 인심을 그러한 의에 포함시켰다. 그후 이황(李滉) 역시 "인심은 칠정이요 도심은 사단이다"라고 했으나, 한편으로는 인심도심과 사단칠정의 명(名)과 실(實)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황은 자신의 인심도심설을 체계적으로 정립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다만 인욕을 막고 천리를 보존하려 할 때, 인욕은 인심에 속하는 것이며 천리는 도심에 속하는 것임을 명확히 깨달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 그쳤다. 조선 성리학에서 인심도심과 사단칠정의 관계에 대해 체계적인 이론을 정립한 이는 이이(李珥)였는데, 그는 성혼(成渾)과 논쟁하면서 자신의 인심도심설을 명백히 밝혔다. 성혼은 도심과 인심이 각각 성명지정(性命之正)과 형기지사(形氣之私)에서 발한다는 것은 곧 이와 기에서 발한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이황이 사단과 칠정을 각각 이와 기에서 발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지 않느냐고 했다. 이에 대해 이이는 사단칠정은 마음의 작용 가운데 정(情)만을 지칭하는 것이고 도심인심은 정과 의(意)를 합해서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개념들이 지칭하는 범주가 다르다고 했다. 또 도심과 인심은 서로 받아들이는 바가 없기 때문에 명백히 나누어 설명할 수 있지만, 칠정 속에 사단이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단과 칠정은 서로 대치되는 것이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도심인심과 사단칠정의 관계를 설명하면 사단을 도심이라고 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칠정을 인심이라고만 하면 틀린 것이므로 인심과 도심을 합친 것이라고 해야 한다고 했다. 또 도심인심도 사단칠정과 마찬가지로 모두 기발이승(氣發理乘)의 한 가지 길뿐이지만, 사람의 의사(意思)가 도덕적 본성에 바탕을 둔 것인지 감각적 욕구에 바탕을 둔 것인지에 따라 도심과 인심으로 나누어진다고 했다. 그런데 이 경우 도심은 오직 천리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순선(純善)이지만, 감각적 욕구는 천리에 따르는 경우도 있고 인욕에 따르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인심에는 선 악 모두가 있다고 했다. 감각적 욕구에 바탕을 둔 마음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마땅한 바를 따르면 그 역시 선(善)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의사가 처음에는 도덕적 본성에 바탕을 둔 것이었으나 그것이 감각적 욕구를 추구하게 되면 도심이 인심으로 바뀔 수 있으며, 또 감각적 욕구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하더라도 마땅한 바를 좇아 사욕에 빠지지 않는다면 인심이 도심으로 바뀔 수 있다고 했다. 이같이 인심과 도심이 서로 바뀔 수 있다는 견해를 가리켜 ' 인심도심종시설'(人心道心終始說)이라고 한다. 이상과 같은 이이의 인심도심설은 결국 도덕적 수양에서 가장 기본되는 것을 성의(誠意)에서 찾는다. 도심과 인심이 갈라지고 또 서로 전환하는 것이 모두 의(意)의 작용이기 때문에 정일하는 공부는 결국 천리에 부합하는 의사를 갖도록 노력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 한국유학의 철학적 전개 : 배종호, 원광대학교 출판부, 1989
  • 한국유학사 : 이병도, 아세아문화사, 1987
  • 한국사상대계 - 성리학사상편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편·발행, 1984
  • 한국유학논구 : 윤사순, 현암사, 1980
  • 퇴계철학의 연구 : 윤사순, 고려대학교 출판부, 1980
  • 조선조유학사상연구 : 김길환, 일지사, 1980
  • 율곡의 생애와 사상 : 이병도, 서문당, 1973
  • 퇴계와 율곡의 인심도심설비교연구 〈철학연구〉 9 : 김기현, 고려대학교 철학회, 1984
  • 조선성리학의 인심도심설에 대한 분석 〈원광대학교논문집〉 15 : 황준연, 원광대학교, 1981
  • 백호윤휴의 사단칠정인심도심설 〈이상백회갑기념논문집〉 : 한우근, 교문사,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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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심도심설 (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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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의 인심도심론(人心道心論)
 http://m.blog.daum.net/ultrastone/1482

유가에서의 마음은 실제적 삶을 구성하고 있는 인간관계 속에서 각자의 행위를
올바르게 인도할 수 있게 하는 작위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유가에서의 마음은
항상 행위 지향적이다. 그러므로 구체적 인간관계의 현실 속에서 전개되는 삶의 문
제에서 옳고 그른 것을 밝히는 일을 중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도덕 규범적 성격이
강하다.
유가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인심과 도심으로 구분하여 분석하고 있다. 인심(人心)
과 도심(道心)의 개념이 처음 경전(經典)에서 등장하고 있는 곳은 『서경(書經)』
「대우모」편이다. 여기서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隱微)하니, 정밀히 하고
한결같이 하여야 진실로 그 중(中)을 잡을 수 있다.(人心惟危,道心惟微,惟精惟
一,允執厥中)”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본래 요(堯)가 순(舜)에게 선양하면서
명을 내린 이른바 “진실로 그 중(中)을 잡아라(允執厥中)”라고 한 것을, 순(舜)이
다시 우(禹)에게 선양하면서 이를 보다 소상하게 풀어서 전한 것이다.
인심도심에 대한 연원20)으로 먼저 공자(B.C.552-479)는 마음을 “마음을 따라
서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법도를 넘지 않는다.(從心所欲不踰矩)”21)라고 하여 단지 사람의 마음을 잃지 않는 것으로만 말하였다. 공자의 뒤를 이은 맹자
(B.C.372-289)는 인심도심론에 대한 유사한 발상으로 대체소체(大體小體)를 설명
한 부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사람이 자기 몸에 대해서 사랑하는 바를 겸하니, 사랑하는 바를 겸하면 기르는 바
를 겸한다. 한 자와 한 치의 살을 사랑하지 않음이 없다면, 한 자와 한 치의 살을 기
르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잘 기르고 잘못 기름을 상고하는 것이 어찌 다른 것이 있
겠는가 자기에게서 취할 뿐이다. 몸에는 귀천(貴賤)이 있으며 대소(大小)가 있으니,
작은 것을 가지고 큰 것을 해치지 말며, 천한 것을 가지고 귀한 것을 해치지 말아야
하니, 작은 것을 기르는 자는 소인(小人)이 되고, 큰 것을 기르는 자는 대인(大人)이
되는 것이다.22)
위의 글에서 맹자(孟子)는 사람의 몸에는 귀천(貴賤)이 있고 대소(大小)가 있으
니, 잘 기르느냐 잘못 기르느냐에 따라 대인(大人)이 되기도 하고, 소인(小人)이 되
기도 한다고 말했다. 또 맹자는 ‘대체(大體)를 따르는 사람은 대인(大人)이 되고, 그
소체(小體)를 따르는 사람은 소인(小人)이 된다’23)고 하였다. 대체(大體)란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마음을 뜻하고, 소체(小體)란 이목(耳目) 등의 외물(外物)에 가려
진 마음을 뜻하므로 이것들은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후로 송대(宋代)에 이르러 인심도심론은 장재(1020-1077)의 『정몽』에 천리
인욕(天理人欲)으로 구분하여 해석되어지고 있다.24) 그러나 실질적으로 정이천
(1033~1107)은 인욕(人欲)과 사욕(私欲)을 구분하여 인심도심이 위태롭고 미미한
원인을 사욕(私欲)에 있으므로, 사욕을 없애면 곧 천리에 밝아진다25)고 하여 수양
론의 문제까지 언급한다. 주자(본명: 朱熹, 1130 ~ 1200)는 기본적으로 정이천의
입장에 동의하여『중용』서문에서 구체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이론의 발전을 보게
된다.
심(心)의 허령지각(虛靈知覺)은 하나일 뿐인데, 인심과 도심의 다름이 있다고 한
것은, 혹은 형기의 사(私)에서 나오고, 혹은 성명의 올바른 것에 바탕을 둠으로써
그 지각(知覺)되게 하는 바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혹은 위태롭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며, 혹은 미묘(微妙)하여 나타나기 어려울 뿐이다. 그러나 사람으로
서 이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가 없으므로 비록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 해도
인심이 없을 수 없고, 또 이 성(性)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가 없으므로 비록 가장
우매한 사람이라 해도 도심(道心)이 없을 수 없다. 이 두 가지가 方寸(마음)의 사
이에 섞여 있는데도 그것을 다스릴 바를 모르면, 위태로운 것이 더욱 위태로워지
고, 은미한 것이 더욱 은미해져서 천리(天理)의 공이 끝내 인욕(人欲)의 사사로움
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정밀하면 곧 두 가지의 사이를 살펴 섞이지 않게 하고, 한
결같으면 곧 그 본심(本心)의 올바름을 지켜 잃지 않게 한다. 이에 종사(從事)하여
끊임이 없게 함으로써 반드시 도심으로 하여금 일신(一身)을 주재하게 하고, 인심
이 항상 명령을 듣게 하면, 위태로운 것이 편안하게 되고, 은미한 것이 드러나게
되어, 그 동(動) ․정(靜)과 말하고 행하는 것이 스스로 과부족이 없게 될 것이
다.26)
주자는 마음의 허령지각을 근거로 해서 인심은 형기의 사사로움에서 생(生)하
고, 도심은 천지의 바름에 근원한다는 것이다. 인심은 위태하여 불안하고 도심은
은미해서 보기 어려운 것이라 한다. 그래서 인심의 과(過) ․불급(不及)의 차질이
없게 하기 위해서는 도심의 명령을 들어야 하며 인욕(人欲)의 사(私)를 이기기
위해서는 정일(精一)해서 도심의 정(正)을 지켜 이로부터 떠나지 말아야 함을 말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심은 왜 형기(形氣)27)의 사사로움에서 생겨나는가? 배고픔(飢) ․배
부름(飽) ․추위(寒) ․따뜻함(暖)과 같은 것들은 모두 내 몸의 혈기나 형체에서 생기
므로 다른 사람이 전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사사로운 것이라고 말한다.28)
또한 도심은 왜 성명(性命)의 올바름에서 생겨나는 것인가? “명의 바른 것은 리
(理)에서 나오고 명의 부여받는 것은 기질에서 나오니, 요체는 모두 하늘에서 부여
받은 것이다(命之正者出於理, 命之禀�者出於氣質, 要之皆天所賦予)”29)라고 하는 데서 보이듯이 성명의 올바름은 순수한 리(理)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명(性命), 곧 성(性)과 천명은 모두 리(理)요, 만물에 예외없이 존재하기 때문에 보편적
이다. 그래서 성명의 올바름에서 근원한 도심을 공명한 것이라고 한다. 주자는 인
심과 도심이 모두 마음에서 비롯되어 발휘하여 나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인
심의 과 ․불급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것이 인욕이다. 주자는 인욕을 없애기 위해 천
리와 인욕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다. 그러면 천리와 인욕은 어떻게 변별할 수 있는
가?
“음식의 사이에 어떤 것이 천리(天理)가 되며 어떤 것이 인욕(人欲)이 됩니까?”라고
물으니, 주자가 “음식을 먹는 것은 천리요, 맛있는 것을 요구하는 것은 인욕이다.”라고 대답하였다.30)
사람은 누구나 음식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이것은 성인이나 일반 사람이나 당연
한 생존본능이다. 인욕(人欲)이 맛을 요구한다고 해서 불선(不善)이라고 볼 수는 없
다. 그 인욕(人欲)이 과불급(過不及)으로 흘러서 중절(中節)에 맞지 않으면 불선(不
善)인 것이다. 주자는 천리와 인욕이 하나의 마음 안에 있지만 동시에 공존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자의 말을 종합해 보면 도심은 또한 주(主)가 되어 인심을 주도해 나가
야만 한다. 위태롭고 불안한 인심이 도심을 위주로 해서 그 명을 듣게 되면 불선으
로 흐르지 않는다. 도심을 확충하여 인욕을 막기 위해서는 정찰(精察)과 정일(精一)
로서 해야 만이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막을 수(存天理 遏人欲)’있다는 것이다.

20) 朱子는中庸章句 서문에 人心道心說을 인용 해설하면서 堯 ․舜 ․禹 ․湯 ․文 ․武 ․
周公 ․ 孔子 ․孟子의 제성인들간에 수수된 도통의설이라고 강조함으로써 성리학의 핵심에로 도입한다
21) 『論語』「爲政」
22) 『孟子』「告子章上」 “孟子曰, “人之於身也, 兼所愛. 兼所愛, 則兼所養1也. 無尺寸之膚不愛焉, 則
無尺寸之膚不養N也. 所以考其善不善者, 豈�有他哉? 於己取之而已矣. 體有貴賤, 有大小. 無以小害大,
無以賤害貴. 養ソ其小者爲小人, 養5其大者爲大人.”
23) 『孟子』「告子章上」“孟子曰 從其大體爲大人 從其小體爲小人”
24) 『正蒙』「誠明」“上達反天理 下達徇人欲者與”
25) 『二程全書』「遺書伊川先生語」人心私欲故危殆 道心天理故精微 滅私欲則天理明矣
26) 『中庸章句序』“(蓋嘗論エ之) 心之虛靈知覺 一而已矣 而以爲有人心道心之異エ者 則以其或生於形氣之
私 或原於性命之正 則危者愈危 微者愈微 而天理之公 卒無以勝夫人欲之私矣。而所以爲知覺者不同.
是以 或危殆而不安 或微妙而難見耳。然人莫不有是形 故 雖上智 不能$無人心 亦莫不有是性 故 雖下
愚 不能無道心。二者가雜於方寸之間而不知所以治之 則危者愈危 微者愈微 而天理之公 卒無以勝夫
人欲之私矣。精則察夫二者之間而不�雜也 一 則守其本心之正而不離也。從事於斯,無少間斷,必使道
心常爲一身之主,而人心每聽命焉,則危者安、微者著,而動靜云爲自無過不及之差矣。”
27) 일정한 질량과 형태를 가지고 있는 사물 혹은 사물의 일정한 질량과 형태 자체를 가리키는말
성리학에서 성명의 세계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이말은 육체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인간의 육체가 정신에 비해 감각할 수있는 질량과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것
이다
28) 『朱子語類』卷62「易3 ․綱領下」“如飢飽寒暖之類。 皆生於吾身血氣形體。 而它人無與。 所謂
私也。”
29) 『朱子語類』卷4「性理1」

30) 『朱子語類』 卷13 “問飮食之間。 孰爲天理。 孰危人欲。 曰飮食者天理。 要求美味人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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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원집 (尤園集)글자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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擬對御製中庸問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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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에 대한 임금의 문목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적어본 글이다. 서문부터 시작해서 장구의 주요 내용에 대한 질문 요지를 적고 저자의 의견을 한 글자 낮추어서 정리하였다. 주된 질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道統" 두 글자는 서문의 핵심이다. 모두 세 번 道統을 말하는데 유독 첫 번째 구절에서만 말을 바꾸어서 道學이라고 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道統과 道學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人心,道心 논쟁과 연관하여 주리, 주기론이 제기되는 것은 주자에게서부터 시작되었으나, 주자가 명확히 밝히지 않았고 제자인 황면재와 이공회의 논쟁을 거쳐면서 더욱 확대되었음을 말하고, 직전 제자 단계에서 이러하였으니 후대 학자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인심, 도심 논쟁은 우리나라에 와서 더욱 번잡하게 되었는데, 인심은 氣가 발하여 理가 탄 것이고 도심은 理가 발하여 氣가 따른다는 것이 퇴계의 학설이고, 인심이든 도심이든 氣가 발하고 理가 탄다는 것이 율곡의 학설이다.

퇴계?율곡 양자의 학설을 겸하여 비판하는 사람은 말하기를, 퇴계는 理氣가 혼융무간하여 원래 분리된 적이 없음을 알지 못하여 개념상의 논의에 그쳤고, 율곡은 발하는 당시에 이미 理가 氣를 타고 氣가 理를 싣는 구별이 생긴다는 것을 알지 못하여 인심?도심에 분명치 못한 부분이 있다고 한다.

성인이 安과 危를 대비하거나 著와 微를 대비시키지 않고 오히려 危와 微를 대비시킨 것은 말을 바꾸어서 어떤 의도를 드러내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뜻이 있어서 인가?

정자가 도심이 천리가 된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지만 인심이 바로 인욕이라고 하는 것은 여전히 의심스럽다. 인심을 인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오로지 정밀하게 하고 전일하게 하여 정성스럽게 그 중용의 도를 잡으라고 한 것을, 어떤 사람은 用에 있어서의 공부라 하고, 어떤 사람은 體用을 겸한 공부라고 하니, 어느 쪽이 옳은가?

程勿齋가 虛靈은 마음의 體라 하고 知覺은 마음의 用이라 하였는데, 陸稼書는 虛, 靈을 대비시켜 虛는 體이고 靈은 用이라 하였으며, {중용} 서문에는 虛靈과 知覺을 대비시켜 虛靈을 體라 하고 知覺을 用이라 하였다.

道心이 일신의 주재이고 人心이 언제나 그 명을 받들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마음은 하나인데 한쪽은 주재이고 한쪽에서는 명을 받든다면, 이것은 마음을 두 가지로 보는 것이요, 유가에서 불가를 비판할 때 쓰는 마음으로 마음을 본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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