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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29일 금요일

도심(道心)과 인심(人心) 이 광 호

도심(道心)과 인심(人心)
이 광 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마음이 몸의 주인이며 주재라고 하지만 마음이 몸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현대인에게는 더욱 더 어렵다. 얼마 전 200여명의 신입생을 대상으로 강의하다 마음이 자기 삶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학생은 손을 들어보라고 하였다. 두 명이 손을 들었다.
  과학이 자연과 인간의 모든 현상을 물질적으로 거의 완벽하게 설명하니, 사람들은 마음을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게다가 소비를 무한으로 창조하며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상업광고가 자기마음의 주인이 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지 않는다면 주체적 인간이 되기에 부족하고, 주체적이지 못한 사람은 민주주의 사회의 진정한 주인이 되기에 부족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주의 삶의 이상인 자유와 평등과 박애는 주체적 삶을 살기 위하여 노력하는 자들만이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 중을 진실되게 잡으라(允執厥中)
  주체적 인간이 되는 것은 이상적 삶의 기본이다. 주체적 인간이 되는 것이 오늘날 특히 더 어렵지만, 어떤 시대 어떤 인간에게나 이는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 자기의 생명이며 자신의 삶인데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운가? 진리의 세계는 절대의 세계라고 하지만 현상세계는 모두 상대적인 것이다.
  인간에게는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육체와 함께 육체를 기초로 해서 있다. 육체가 없으면 마음은 존립기반을 잃고 만다. 사람은 음식을 먹어야 살고, 옷을 입어야 되고, 몸을 둘 거처가 있어야 한다. 어디 그뿐인가? 눈과 귀의 욕망과 부와 귀와 이성에 대한 욕망도 무한하다. 욕망의 뒤를 쫓다보면 마음은 자신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만다. 마음이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면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삶인 중용의 삶을 유지하지 못한다.
  유학에서 성인으로 존경받는 제왕인 요(堯)는 자신의 자리를 이어받을 현자인 순(舜)을 찾아 오랜 동안 능력을 시험한 다음 제왕의 자리를 물려주며 이렇게 말하였다.
  “아, 너 순아. 하늘의 운수가 그대에게 있으니 진실되게 그 중을 잡으라. 사해가 곤궁하면 하늘이 준 복이 영원히 끝날 것이다.”(논어「요왈」)
  ‘진실되게 그 중을 잡으라’(允執其中)고 할 때의 중(中)은 이후 유학 사상의 핵심이 되어,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는 ‘중의 철학서’라고 할 수 있는 중용을 저술하였다. 욕망의 시대인 오늘날도 ‘중’은 여전히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큰 비석에 새겨 태학에 세워 큰 교훈으로 삼아야
  요의 유언이 끝난 다음 “순도 같은 내용으로 우에게 명하였다”는 내용이 「요왈」에 실려 있다. 상서「대우모」에서는 이를 부연하여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정밀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지켜야 진실되게 그 중을 잡는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고 나온다. 주희가 중용장구를 저술하며 그 서문에서 이를 자세하게 설명한 뒤부터 이 16글자는 성리학의 금과옥조로 되었다. 「중용장구서」는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에 비견될 수 있다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다.
  인심의 위태로움과 도심의 은미함은 인간 마음의 양면성을 의미한다. 육체를 가진 인간에게 욕망으로서의 인심이 없을 수 없지만 형체를 초월한 도심을 유학에서는 도덕적 실천의 가능성으로서 매우 중시한다. 주희는 중용장구서문에서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다’는 것을 135글자로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정밀하게 살피고 한결 같이 지킴’을 ‘진실하게 그 중을 잡는’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주희의 형이상학을 강렬하게 비판하는 다산은 후반부에 나오는 주희의 설명은 취하지 않지만 앞부분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찬양의 뜻을 표시하고 있다.
  “『도경』의 20자와 주자 「중용장구서」의 135자는 큰 비석에 새겨 태학에 세워 만세를 위하여 큰 교훈으로 삼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매씨서평』)
  『도경』의 20자는 『순자』「해폐편」에 나오는 인심과 도심과 관련된 20글자이다 다산은 주희의 사상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지만 인심도심설과 관련해서는 적극적인 지지를 보낸다. 다산이 주희를 ‘유학을 중흥시킨 학자(中興之祖)’으로 인정하는 것도 주희의 인심과 도심에 대한 해설 때문이다.
  맹자요의』 끝에서 “맹자가 일생 동안 노력한 것은 도심을 보존한 것이었다.”고맹자전체를 요약하고 있다. 다산은 맹자요의곳곳에서 도심을 강조하며 “도심이 보존되면 인간이 되고, 도심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없어지지 않으면 성인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도심이 보존되고 도심이 인심의 주인이 되어야 사람다운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다산의 실천적 도덕철학의 키워드는 바로 ‘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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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도심(道心)과 인심(人心)


'中'은 마음 '', '庸'은 쓰임. 그러므로 中庸중용이란 '마음 쓰기'란 뜻

그러므로 요임금이 '진실로 중(中)을 잡으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고 '진실로 민생의 마음을 잡으라'고 한 말로 여기면 좋을 것 같음.

다시 말하여 주희가 '중용장구서'에 걱정한 바 이 당시 도가와 불교의 사상체계가 여타 제자백가들의 그 것에 비해 훨씬 고도한, 따라서 중용이란 의미는 용수(龍樹), 지의(智山+豆+頁), 지삽(智鈒) 천태지자가 말하는 중도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되어 집니다.

그러므로 순이 우에게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미묘하니 정밀히 하고 한결같이 하고서야 진실로 그 中을 잡으라'는 의미는 '도를 생각하는 인민의 마음이 겨우 은미할 정도이니 한결같이 잘 생각하여 인민의 마음을 잡으라'는 쉬운 말인 줄로 압니다.

그 좋은 요ㆍ순의 말이 맹자 이후에 끊겼다가 그 도통(道統)을 이정자(二程子)를 거쳐 정식으로 계승됬음을 자부하는 주희의 자부심을 다산이 꺽을 이유가 없는 겁니다.

도심에서 다산이 주희에게 논사가 된 이유는 다산연구소 박(석무) 이사장님이 지적하신대로 영 다른 경우지요.

그리고 불가에서 말하는 중도는 잡아함(雜阿含) 12권 유수경(流樹經), 금강경 應無所住而生其心, 42章經, 선가화두 黑氏 梵志에게 설법한 放下着에서 처럼 폭이 넓습니다.

두 생각이 옳고 그름에 각기 장단점이 있을 때에 그 중간을 취하라는 가르침 역시 양편 또는 두 가지 생각으로부터 서로 한 발씩 물러나서 두 의견의 정 가운데 中의 義로서의 공가중삼제(空假中三諦)가 아닌 줄로 압니다만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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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이지만 중용을 '마음쓰기'라고 번역해야하는 또 다른 경우

그 어느 누가 '제사를 지내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에 중도로서의 중용이라면 '형식은 갖춰야 할 것 아닌가'라는 대답이 나와야 합니다.

중용 성론 해석 중에 율곡 선생에게 한 사람이 '귀신이 차려 놓은 음식을 향음합니까'라고 물었을 때에 선생의 대답은 '만약에 동삼절이라도 따스한 토굴 속에 둔 식물이 움이 트는 것처럼 조상에 대한 정성이 지극하면 귀신이 제사음식을 그러하니라'라고 선언합니다. 이 대답은 중도가 아니지요. 역시 중국에도 없는 선언적 명령일 겁니다.

그러나 일찌기 순자는 '제사는 친목에 의미가 있다'고 말했고 공자는 귀신이 '있는 것 처럼 여여(如如)하게 모신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마음 쓰임입니다. 
이 것이 후일 기독교도 박해가 일어난 동기가 될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율곡선생은 탁등(擢登)한 구도장원공, 아홉번이나 장원급제한 사람.
그러면서도 순자와 공자의 글을 읽지 않았다고 할 수 없지요.
이로써 율곡 선생의 마음씀이 대세를 관망하는 기회주의적인 면이 엿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중용 성론에 부연된 이 예화를 보더라도 중용은 '마음 쓰임'이라는 경우가 된다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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