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재단(이사장 인재근 민주당 의원)과 우석대학교 김근태민주주의연구소(소장 최상명 우석대 교수) 등은 지난 19일 김근태 2주기를 맞아 동아시아의 평화('한반도 정세와 일본의 우경화, 그리고 동아시아 평화')를 모색하는 학술세미나를 열었다. 3명의 발제자와 5명의 토론자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 날 세미나 내용 중 이삼성 서울대 교수와 남기정 교수의 발제문, 백준기 코리아컨센서스 소장의 토론문에 이어 이해영 한신대 교수의 토론문('동아시아론'과 진보: 몇 가지 테제)을 소개한다.
1. 동아시아는 단순히 지리적 공간개념이 아닌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공간이다. 이 개념은 그 자체 지극히 논쟁적인(polemical) 그래서 '정치적인' 개념이긴 하지만, 공동의 동아시아개념과 역사적 경험이야 말로 동아시아의 '진보적' 형성을 위한 전제가 된다고 볼 수 있겠다. 동아시아의 평화 역시 마찬가지다. 빌리 브란트의 말처럼 '평화가 모든 것은 아니다, 하지만 평화가 없다면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현단계 동아시아의 정세와 상황은 어떠한가. 남북한간의 무한긴장, G2간의 헤게모니 각축, 한중일간의 무역전쟁의 현장이 아닌가. 특히 최근 들어 동아시아는 그 무슨 '탈근대'는 고사하고 '전근대'적 무한군비경쟁의 시대에 돌입한 감마저 주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동아시아의 진보는 정치적, 사회경제적 차원은 고사하고, 평화와 인권의 심급을 유지하기에도 숨가쁠 지경이다. 동아시아의 현단계는 '현상유지'가 곧 '진보'라고 말하고 있다. 이 글은 일종의 동아시아 담론사, 혹은 사상사를 위한, 그래서 '문제'로서의 동아시아를 해명하기 위한 한 시도이다.
2. 동아시아는 차라리 마키아벨리와 홉스의 공간이라고 봐야 하겠다. 군주론 제17장의 질문 "잔혹함과 자비로움, 존경의 대상과 두려움의 대상 중 어느 것이 더 나은가" 다시 말해 군주의 잔혹과 자비 둘 중 어느 것이 군주의 권력 유지에 더 '유리'한가라는 치명적 질문이다. 근대적 '대중'의 속성을 잔인하리 만큼 냉혹하게 관찰한 마키아벨리는 둘 다를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잔혹을 선택할 것을 권고한다. 장성택을 제거한 김정은의 선택은 어쩌면 <군주론>이 찾아낸 정치의 일반법칙을 이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 물론 본인은 부정했지만 - 총리가 되고자 했던 중국의 보시라이에 대한 중국의 연출된 재판과 - 승자측 주장이긴 하지만 - 마찬가지 총리가 되고자 했던 장성택에 대한 보여주기식 처형은 중국과 북한, 중심과 주변의 극명히 다른 두 그림을 보여줄 뿐이었다. 동아시아는 그렇게 평화, 인권, 법이라는 다분히 '부르주아적' 보편주의 조차에도 미달하는, 혹시 그런 것이 있다면 동아시아 '문명'의 그저 전근대성을 적나라하게 노출하고 있다.
3. 아베정권에 의한 일본이라는 국가의 '정상화' 프로젝트는 동아시아의 낡은 영토분쟁과 군비경쟁을 격발시켰다. 2개의 전범국가 독일과 일본의 역사와 관계 맺는 방식은 흔히 비교의 대상이 되어 왔다. 독일 역시 분단이라는 비정상성을 '신보수주의적' 흡수통합을 통해 '정상화'한다. 하지만 그 경로는 EU통합에 독일 재통합을 '장착(embedding)'함으로써 주변국의 - 그것이 수동적이든 능동적이든 - '동의'를 확보하거나, 안되면 돈으로 '매수'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집단적 자위권'이란 미명하에 전개되는 아베식 일본 '정상화'는 동아시아통합을 해체하면서, 오히려 낡은 국가주의, 군국주의, 민족주의의 부활경향을 강화시키는 방식이다. 주변국의 동의는 커녕 반발과 항의를 국내정치적으로 자신의 권력자원화하고 있다. 동아시아는 여전히 저 낡은 제국주의 시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4. 양차 세계대전의 전간기, 1928년 윈스턴 처칠이 우화 한 편을 써서 남긴 적이 있다. 대강 이런 내용이다. 어느 날 동물원에서 동물 모두가 모여 무장해제를 결의하고 이를 위한 평화회담을 개최키로 합의했다. 회의에서 코뿔소가 말하기를, 이빨사용은 야만적이고 공포스러우니 만장일치로 금지하자고 했다. 뿔은 주로 방어용이므로 당연히 허용되어야 한다고 덧붙쳤다. 버팔로, 수사슴 그리고 저 작은 고슴토치조차도 여기에 찬성을 표했다. 그러자 사자와 호랑이가 이의를 달았다. 이빨은 물론이고 발톱조차도 저 까마득한 과거로부터 전해온 명예로운 무기라고 했다. 팬더, 표범, 퓨마 나아가 작은 고양이족 모두가 사자와 호랑이를 지지하고 나선다. 그러자 곰이 발언하면서 이렇게 제안했다. 이빨이건 뿔이건 둘 다 금지해야 한다. 싸움이 벌어지면 서로 꼭 껴안는 것(hug)만 허용해도 충분하다. 그것이야 말로 형제애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평화를 향한 거대한 첫걸음이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다른 동물 모두가 곰에게 격분했다. 당연히 회의는 가열되었고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다행히 이 때 중재자가 나타나 이 들을 진정시켜, 각자 조용히 우리속으로 돌아가자고 설득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이 들은 서로 친근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남북한, 북일, 북미 그리고 무엇보다 미중, 이 모든 것은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구성요소이다. 대부분 정치군사적 긴장에 의해 각인되어 있다. 처칠이 그렸던 동물원 총회 상황이다. 여기서 미국은 G2 헤게모니 경쟁의 한 당사자이면서 동시에 중재자 행세를 하기도 한다. 특히 한일관계가 문제가 될 때 그래왔다.
이런 동아시아는 다분히 홉스적이다. 홉스 가라사대 성경에 이르기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했거늘, 하지만 동아시아에서 이 황금률이 지켜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내가 상대방의 이빨이 무섭듯, 나의 뿔 또한 상대방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기본 중에 기본조차 수용할 아량은 당분간 없어 보인다. 이럴 때에는 그저 조용히 각자의 우리안으로 들어가, 다시 친근감이 들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달리 홉스식으로 표현하자면, 한반도에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bellum omnium contra omnes)' 상태를 상호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하는 것이 전제이다. 또한 처칠의 동물원 총회라는 가상우화의 비유를 연상하면서, 다시금 홉스의 명언,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homo homini lupus)'는 명구 역시 동아시아, 한반도에서는 여전히 진실이다. 남과 북은 서로에게 '늑대'이며, 지금, 여기에서는 늑대간의 전쟁이 진행중이다. 그런 한에 있어 그 관계는 늑대 상호간의 관계이고, 그 늑대의 이빨은 분명 서로의 생명을 위협하는 공격용 무기임을 인정해야 한다. 남과 북 어느 쪽도 '양'이 아님을 직시해야 한다는 말이다. 중, 미 또한 마찬가지다. 특히 홉스의 사상이 근대 영토국가로의 이행기의 그것이었다는 점에서, 독도, 조어도, 남쿠릴열도등 여전히 영토문제로 발목이 잡혀 있는 동아시아는 홉스의 시대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5. 지난 한세기이상에 걸쳐 아시아 담론은 19세기 말의 '동양'(東洋), 그 뒤를 이은 '동아(東亞)', '대동아(大東亞)' 그리고 2차 대전이후 '동아시아'로 진화해 왔다. 특히 한국에서는 지리적 위치와 장소라는 의미에서 '극동', '동북아'등의 개념이 혼용되다 90년대 이후 동아시아라는 명칭이 주로 사용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명칭은 그저 그때 그때 시의적인 조건과 상황의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스테판 다나카에 따르면 '동양'개념 자체가 청말기 동아시아에서 '중(中)'국의 중심성을 부인하여 이를 China에서 음차된 '지나(支那)'로 상대화, 격하시키고 이 빈공간을 '동양'이라는 새롭게 '발견된' 범주로 채워나가는 메이지유신기 일본의 외교전략을 대변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일본동양사학이 '발명(invented)'한 바로 이 동양의 새로운 '중심'이자 리더는 전통과 서구의 진보적 문명을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일본이었다. 중국이 지나로 명의변경된 것은 그 중심성에 대한 정신적 해체요구였다. 하지만 이 요구는 단순히 학설이나 주장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정치군사적 수단에 의한 지배의 관철 곧 청일전쟁, 나아가 러일전쟁으로 구체화되었고, 가쓰라-태프트밀약등의 방식으로 국제적으로 공인된 뒤 즉시 - 한일강제병합이라는 방식으로 - 봉인되었다. 조선의 식민지화는 그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리고 동양은 우승열패, 적자생존의 사회진화론과 황인종 vs 백인종의 대결이라는 인종이론적으로 입론된 반러시아주의의 공간으로 재규정되고, 이 때 이 공간의 패권은 당연히 일본의 그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서구에 의해 피규정된 아시아의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이라는 공간에서 일본에 의해 2차 '번역'되어 동양은 하위오리엔탈리즘(Sub-orientalism) 즉 이중적 오리엔탈리즘의 대상으로 타자화된다. 그 출발에 있어 다분히 문화적, 역사적 접근의 소산인 동양과는 달리 '동아'는 정치적 성격을 보다 강하게 띠는 것이었다. 일본의 헤게모니 요구는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민족국가 단위를 뛰어 넘는 초국가적(transnational), 제국주의적 확장으로 이어진다. 일본의 제국주의는 단순히 공간적 확장을 뛰어 넘어 시간적으로는 '근대의 초극(超克)'을 요구한다. 진주만공격직후 일본 사상계와 지식계는 일본의 근대가 본질적으로 서구에 의해 규정된 것이라 할 때, '아시아 태평양전쟁'은 바로 이 규정된 근대를 전쟁을 통해 넘어서는 것이라고 주장하기에 도달한 것이다. 전쟁을 통한 '탈근대' 시도는 물론 엄청난 비극으로 종결되었다. 당대의 전쟁을 통한 근대의 '초극'은 '지금 여기' '탈근대'론의 파국적 선취로 읽힌다.
6. 패전은 아시아를 '실체'로서가 아니라 '방법'으로 인식하자는 전후 일본의 대표적 지성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을 배태한다. 그에게 아시아는 '방법'이었다. 마치 맑스가 헤겔변증법에서 '체계'와 '방법'을 분리해서 변증법적 '방법'이라는 합리적 핵심을 구출하고자 했듯이 말이다. 다케우치의 '방법으로서의 아시아'의 문제의식이다. 아래 그의 말을 들어 본다. "서구의 우수한 문화가치를 보다 큰 규모에서 실현하려면 서양을 다시 한 번 동양으로 싸안아서 거꾸로 서양 자신을 이쪽에서 변혁시킨다는, 이 문화적인 되감기 혹은 가치상의 되감기를 통해 보편성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서양이 낳은 보편적인 가치를 보다 고양시키기 위해 동양의 힘으로 서양을 변혁한다. 이것이 동과 서의 오늘날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어 "그 되감기를 할 때에 자기 안에 독자적인 것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아마도 실체로는 존재하지 않겠죠. 하지만 방법으로는, 즉 주체형성의 과정으로는 있지 않겠는가 생각하는 까닭에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라는 제목을 달아보았지만, 그것은 명확하게 규정하는 일은 저에게도 벅차군요."
"문화적인 되감기 혹은 가치상의 되감기"를 통해 만들어진 새로운 보편성은 군사적 정복을 통한 보편주의 곧 제국의 건설과는 분명히 다른 경로이다. 아시아를 방법이 아니라 실체로 설정하고, 그것과 비아시아 곧 서양의 관계를 보편 대 특수, 주인 대 노예의 그것으로 환치시킬 때 관계의 군사적 전복을 통해 주인이 되는 것 곧 전쟁은 그 필연적 귀결점이 된다. 자기 내재적인 힘에 기초하는 다케우치의 '되감기'는 어떤 점에서 에드워드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 서문에서 말하는 '학습해제(unlearning)'와도 닮은 것인지 모른다. "내가 여기서 기여한 것은 문화적 지배가 작동하는 방식을 좀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새로운 종류로 동양을 대하기를 자극했다면, 진정 그것이 '동양'과 '서양' 둘 다를 제거한다면, 이 때 우리는 레이먼드 윌리암스가 말하는 '내재적 지배양식'의 '학습해제'의 과정으로 조금 더 진전한 것일는지 모른다."(번역은 필자)
서양을 모방하고 동경하고 따라가는 것이 일본의 근대화였다. "나는 일본문화의 구조적인 성질 때문에 일본이 유럽에게 저항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일본문화는 바깥을 향해 늘 새 것을 기대한다. 문화는 늘 서쪽에서 온다." 일본문화의 구조적 성질이란 무엇인가. 일본은 '우등생문화'다. 즉 지체를 만회하려고 분발하는 문화이다. "일본문화는 진보적이며 일본인은 근면하다. 그건 정말이지 그렇다. 역사가 보여준다. '새롭다'가 가치의 규준이 되며, '새롭다'와 '올바르다'가 서로 포개져 표상되는 일본인의 무의식적 심리경향은 일본문화의 진보성과 떼어놓을 수 없으리라." 일본과 동양의 관계는 이제 재인식되어야 한다. "그 현상 (서양의 진보를 실체로 여겨 쫓아가는)이 가장 두드러진 곳은 일본이 첫째가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은 가장 동양적이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일본은 동양의 나라들 가운데 가장 동양적이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라 함은 일반적으로 회자되는 생산력의 양적 비교를 일컫지 않는다. 나는 동양을 두고 저항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 저항이 작다는 의미에서다. 이것은 일본이 자본주의화에서 보여준 눈부신 속도과 관계될 터이다. 그리고 그 진보로 보이는 것이 동시에 타락이라는 점, 가장 동양적이지 않은 것이 동시에 가장 동양적이라는 점과도 결부되리라."
서양을 흉내내고 쫓아 가는 방식의 곧 추격형 근대화가 아닌 다른 근대화도 마땅히 가능하지 않겠는가. "후진국에서 근대화 과정에는 둘 이상의 형태가 있지 않을까. … 일본의 근대화는 하나의 형태이긴 했지만, 동양의 여러 나라가 혹은 후진국이 근대화하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길은 아니며, 그밖에도 다양한 가능성과 길이 있지는 않을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학자' 다케우치 요시미는 말한다. "저는 근대화의 두 가지 형태를 생각할 때, 이제껏 그래왔듯 일본의 근대화를 늘상 서구 선진국과만 비교할 일이 아니구나 생각했습니다. 학자만이 아니라 보통의 국민들도 그랬습니다. 정치가도 경제계 인사도 모두 그런 식이어서, 정치제도는 영국이 어떠니 예술은 프랑스가 어떠니 곧잘 비교하곤 했지요. 그런 단순한 비교로는 안 됩니다. 자기의 위치를 확실히 쥐려면 충분치 않습니다. 적어도 중국이나 인도 마냥 일본과 다른 길을 걸은 유형을 끌어와 세 개의 좌표축을 세워야 하겠구나, 그 당시부터 생각했습니다."
서양을 진보된 무엇으로 고정시켜 놓고 이를 따라해 온 일본의 근대와는 달리, '일본과 다른 길' 유형으로서 중국의 그것은 저항속에서 정체성을 찾아 내고 자신의 고유한 근대화를 이루어 왔다는 말이다. 다케우치 요시미의 자각 곧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는 일본의 근대화 곧 '실체로서의 아시아'의 좌절속에서 '마치 불속에서 밤을 줍듯' 일본의 근대화 '대동아공영권'에 이르러 자폭해 버린 일본의 '아시아주의'에서 어떤 새로운 합리적 핵심을 건지고자 한 시도였다.
7. 1980년대 종속이론가로 잘 알려져 있던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아시아주의는 그것이 우선 비아시아권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체제론의 시각에서 매우 방대한 실증적 근거를 가지고 주장되었다는 점에서 중국의 부상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해석의 전형적 사례라 하겠다. 2002년 한국어판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한 바 있다. "아시아와 특히 중국은 비교적 최근까지 세계경제에서 위세를 누렸던 만큼 머지 않아 그것을 되찾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지난 세기에 서양이 유포시킨 신화와는 달리 지금까지 아시아는 한 세기에서 한 세기 반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만 세계경제의 주도권을 내주었을 뿐"이다. "과거 중국과 아시아 각국이 경제적으로 성공한 것은 서양의 방식을 모방해서가 아니었다. 최근 아시아가 이룩한 경제성장도 서양이 걸었던 길과는 거리가 있다. 따라서 일본이 되었든 어느 나라가 되었든 아시아가 서양을 전범으로 삼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이는 미래에도 그럴것이라고 주장된다.
"나는 다시 한 번 동북아시아가 ... 세계경제성장의 '자연스러운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면서, "비록 1800년에서 멈추기는 했지만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경제가 세계경제에서 누렸던 우위를 되돌아 보는 것은 이 지역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경제발전이 단단한 역사적 기반을 갖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은 물론 앞으로 세계경제의 판도에서 일어날 근본적인 변화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프랑크의 '아시아시대'는 다케우치 요시미가 '방법'으로, 인문학적으로 선취한 것, 동양과 서양이 서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관계속에 있다고 하는 것을 정치경제학적 나아가 세계체제론적으로 그리고 '장주기이론적으로' 입증하고자 한 시도이다. '동양의 쇠퇴와 서양의 발흥'은 어떤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유기적 연관속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러면 서양은 어떻게 발흥했는가? 한마디로 말해 유럽인은 그것을 '샀다'. 처음에는 아시아라는 열차의 좌석하나를 샀다가 나중에는 열차 전체를 사들였던 것이다. ... 유럽인은 무슨 재간으로 그 돈을 손에 넣었을까? 무엇보다도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견한 금광과 은광이 자금줄 역할을 했다".
이처럼 서양의 동양에 대한 패권과 우위, 그것의 담론적 표현인 오리엔탈리즘은 어떤 역사의 내적 법칙에 기반한 필연이었다기 보다는 우발적으로 주어진 역사상의 에피소드에서 비롯된 것으로 왜소화된다. 프랑크의 세계체제론에 기반한 아시아론을 액면가대로 다 동의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우리로서는 그저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를 사유함에 있어 또 오리엔탈리즘의 '학습해제'에 있어 훌륭한 정치경제학적 소재로 선별수용하면 될 일이 아닐까.
8. 중국의 '신좌파' 왕후이가 말하는 '트랜스시스템사회'는 적어도 프랑크가 포착한 중국의 부상을 인문학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라 할 만하다. 그것은 일종의 '중국모델'이다. 말하자면 청제국에서 중앙과 지방을 관장한 방식, 다시 이러한 중앙과 지방이 합쳐진 제국이 주변 국가들과 소통한 '조공체제'라는 방식이 바로 트랜스시스템사회의 역사적 원류다. 그것은 "민족공동체의 시각에서 이뤄지는 각종 사회 서술과도 다르고 다원사회라는 개념과도 다르다. 그것은 상호 침투적인 사회가 독특한 방식으로 연결된 것이다". 왕후이의 트랜스시스템사회는 중국적 황제 및 조공시스템에서 "상호 침투적인 사회가 독특한 방식으로 연결된" 그런 관계망이다.
서양의 기독교에 대해 동양의 유교는 분명 비교할 만한 대상이다. 왕후이는 "중국 사회의 여러 풍부한 맥락들을 고려하면 유교 문화는 청조의 정치 영역과 문화 영역의 통일을 표현하기에 부족하다.…유교사상이 청대에 주도적인 지위를 점했다면 그것은 곧 '유교사상'이 정치적 성격이 매우 강했고 중개 역할을 잘 수행해 다른 시스템들을 매우 탄력적인 네트워크에서 정교하게 조직하면서 이 시스템들 자체의 독특한 특성을 결코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트랜스시스템사회는 서양의 '민족-국가(nation state)'시스템과 비교해 일종의 '문명국가(civilization state)'와 같은 초민족국가 단위에 대한 구상이다. 기본적으로 중국의 성공신화를 어떻게 해석하고 또 이를 미래에 투사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기도 한 것이다. 왕후이가 쓴 '아시아는 세계다'라는 다분히 도전적인 제목의 책은 결국 이 조공시스템의 재구성을 핵심으로 한다. 곧 그는 서양의 근대 민족국가 시스템의 극복한 새로운 형태로서 조공시스템을 발견한다. 이러한 전근대의 동아시아 시스템은 조공-책봉 관계속에서 어떤 방목 상태처럼 서로 상호독립적으로 존재했다. 트랜스시스템사회(trans-systemic society)는 바로 이 조공체계의 21세기 업그레이드 버전인 셈이다.
왕후이는 미국의 신자유주의, 패권주의를 이렇게 비판한다. "오늘날 미국의 금융 패권을 포함한 여러 가지 패권들은 미국의 군사적 패권과 국가적 패권이라는 기초 위에서 형성되었다. 이런 패권 없이는 어떤 금융적, 시장적 패권도 존재하지 않게 되며 모두 붕괴되고 와해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왕후이가 중국의 패권에 무관심한 것은 아니다. 결국 21세기형 '트랜스 시스템사회'속에서 근대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한반도, 일본, 베트남 등 중국의 주변국가가 신형 조공관계속에서 서구의 국가관계와는 다르게 공존하자는 논리가 그의 정치적 결론이라면 과장된 것일까. 왕후이에게서 중국공산당 정부의 '신형대국관계'의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것은 과연 나만의 느낌일까. 미국 패권주의에 대한 비판이 중국중심주의(Sinocentrism)의 근거로 될 수는 없을 것이다. 21세기 아시아에서 중국의 중심성이 유연제국주의는 아닌지, 중국 '신좌파'에게 중국 중심주의는 가히 동아시아의 역사적 전제이자 '자연적' 조건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닌지 따져볼 일이다.
9. 한국의 '동아시아'론은 1989년 냉전의 해체와 한중수교 등 동아시아 역내국가의 교류증진과 더불어 '동아시아'를 새롭게 상상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는 데에서 시작한다. 현존사회주의의 붕괴, 한국의 절차적 민주화의 진전과 시민사회의 확장, 한국 자본주의의 압축성장 등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조건변화를 배경으로 하면서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은 한반도 통일 문제를 새롭게 사고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1993년 <창작과 비평> 특집호를 통해, 최원식 등이 '동아시아적 시각'의 구축을 주장하면서 한국발 동아시아론이 출발한다. 최원식은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동아시아의 비약적 발전과 더불어 냉전의 해체가 몰고 올 미국주도의 자본주의 세계질서, 그것이 초래할 한반도의 악영향(북한에 대한 압박과 한반도 긴장의 격화, 통일의 전망을 어둡게 하는 것 등)을 우려하였고, 창비그룹의 동아시아론의 출발은 시작부터 한반도 통일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속에서 전개되었다. 동아시아를 '서구자본주의 대결의 장'으로 보고, 그 모순의 결과가 한반도의 분단을 초래했을 뿐 아니라 여전히 통일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동아시아 문제의 해결이 곧 한반도 문제의 해결을 용이하게 만든다는 사고, 달리 말하면 한반도 분단을 한반도의 민족문제에 국한하지 않고, 세계체제 및 동아시아의 대립과 갈등의 결절점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동아시아 담론은 첫째, 동아시아 대안문명론 둘째, 동아시아 정체성론 셋째, 동아시아 공동체론의 3가지 형태로 전개되었다. 첫째, 동아시아 대안문명론은 1980년대 사회주의 몰락, 냉전의 해체, 미국주도의 자본주의 세계화라는 세계질서 급변속에 서구문명을 대신할 대안적 문명으로 접근하는 입론으로서, 1990년대부터 동아시아에 주목한 백낙청은 '문명적 유산'에 주목하여 자본주의 문명을 대신할 '대안문명론'을 동아시아에서 발견코자 했으며, 이를 통해 '새로운 전지구적 문명' 건설의 필요성 주장하였고, 서양중심의 근대를 넘어서고자 하는 '근대극복'의 과제를 동아시아를 통해 달성코자한다. '서구적 근대의 진정한 대안을 모색하는 작업, 일국주의를 넘어 새로운 세계형성, 아시아의 전통적 지혜'(최원식), '전지구적 자본의 획일화 논리에 저항하는 커다란 과제를 실현하는 거점, 일국적 시각과 세계체제적 시각의 매개항 시각'(백영서)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둘째, 동아시아 정체성론은 동아시아 문명론의 연장선에 있는 논의로, 문명론처럼 서구(근대자본)문명에 대해 대안담론을 찾는 거대담론이라기 보다, 이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동)아시아'적 가치, 문화, 일체감을 포함한 어떤 '동아시아성'이 존재한다고 믿고 이를 발견해 냄으로써 '동아시아를 하나'로 사고하는 데 논의를 집중한다. 동아시아 정체성론은 동아시아 경제발전 모델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데, 1960년대 이후 동아시아의 눈부신 경제성장(홍콩과 싱가포르 포함)이 독특한 경영구조 및 경제정책 등 '제도적' 측면외에 고유한 '문화'적 요소에 힘입었다고 보는 주장이 제기된다. 여기서 문화적 요소란 공동체 의식, 권위주의, 유교적 문화특징, 근면과 검약정신 등인데 이를 1990년대 이후 '아시아적 가치'라는 용어로 집약되어 '유교자본주의론'으로 이어 진다. 동아시아문명론이 문명에서 서구(근대)극복의 대안을 찾는 것이라면, 유교자본주의는 서구자본주의 종말에 대한 활력의 대안으로 아시아적 유교자본주의를 제시, 그러나 1998년 동남아 경제위기를 계기로 수면아래도 잠수한다.
셋째, 동아시아 공동체론은 지역통합과 밀접한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세계화에 저항하면서도 세계화를 매개하는 이중적 역할의 지역주의에 주목한다. 여기에는 ASEAN을 중심으로 한 경제공동체구상과 정치안보공동체구상으로 구분된다. 동아시아 문명론과 동아시아 정체성론은 동아시아적인 것을 이끌어 내기 위한 것이라면, 공동체 담론은 세계화와 세계적 차원의 지역주의 대두에 대응하기 위해 동아시아 지역주의가 필요하다는 현실적 이해를 내세운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발 동아시아론은 그 주체와 경로라는 구체적 문제제기 앞에서 인식론적 모호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제대로 된 지평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중화주의와 동양주의를 대신한다는 인식이 아니라 양자 사이에 어떻게 균형을 잡는가가 문제다. ... 기존의 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새로운 중심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중심주의 자체를 철저히 해체함으로써 중심 바깥에, 아니 중신들 사이에 균형점을 조정하는 핵심... 한국이 신판중화주의와 신판 동양주의의 완충에서 中型國家로서 자기 소임에 충실할 때 서구의 충격앞에 오히려 자해적 분쟁과 갈등에 함몰했던 20세기를 진심으로 넘어설 가능성이 열릴 것"(최원식), 하지만 힘의 질서로서의 국제관계, 또 국제관계로서의 동아시아는 결코 무주공산이 아닌 것이며 힘의 중심은 반드시 출현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중국의 중화주의, 일본의 동양주의사이에서 하나의 '균형점'으로 한국이 위치할 가능성 역시 궁극적으로는 힘의 문제인 것이다.
아울러 동아시아론이 말하는 문명, 문화, 전통, 문화적 유산이 중국의 것인지, 동아시아의 것인지 역시 남겨진 의문이다. 여기서 동아시아 문명론과 정체성론은 동-서양 이분법, 그리고 우열에 대한 논의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자발적 오리엔탈리즘의 혐의로부터도 자유롭지 않다. 동아시아 문명이나, 정체성이 자체로서 논의되기 보다는 서양의 극복을 위해, 서양과 다른 것을 찾는 과정에서 추구된다.
'탈근대'라는 문제설정과 관련지워 보더라도 동아시아론이 탈근대에 착목하는 이유는 근대가 초래한 착취, 독점, 차별의 문제를 해소하고 정의롭고 평등한 세계 지향이다. 그리하여 민족주의, 국가주의, 제국주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사고가 근대극복론의 핵심을 이룬다. 그런데 여기서 특별히 왜 굳이 '동아시적 시각'이 필요한 것일까? 동아시아론자들의 근대에 대한 인식이 서구적 근대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근대극복의 물신화 문제, 국민국가의 억압성, 자본주의적 무자비한 경쟁, 민족주의의 침략성 등의 문제를 동아시아가 해결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일까.
한국발 동아시아론은 창비그룹이 제기한 태생적 한계로 말미암아 분단체제론의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다른 한편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론을 공통의 기반으로 삼는다. 분단체제론과 이중과제론, 그리고 '변혁중도주의'에 대한 한반도 문제의 특권화 경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보인다. 이 경우 한반도의 중심성을 강조하는 논의일 경우 아무래도 동아시아 지역 전체를 담당하며 소통할 만큼의 담론으로 신뢰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동북아균형자론' 등 참여정부 시기의 동아시아담론은 해방이후 친미일변도의 주류적 외교패러다임으로부터의 일정한 그리고 '소박한' 이탈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지 모른다. 혹은 지적, 정신적 '균형'복원이라는 점에서 '주체적' 외교전략의 한 흐름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뒤이어 한미FTA를 추진함으로써 스스로 이를 부정하는 치명적인 역사적 오류를 범했다. 한미FTA자체의 세세한 내용과 협상과정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거시적인 역사적 안목과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는 뜻이다. 나름 일정한 진보성을 담지한 자신의 담론을 어떤 설득력있는 근거도 제시하지 못한 채 스스로 이를 부정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담론을 제안한 어떤 그룹도 이에 대한 실효적 대안을 제시하거나, 진정성을 갖고 저항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1990년대 중반 형성되고 참여정부 시기 전략화, 정책화로 이어진 한국발 동아시아담론의 내적 허약성이 확인된다 할 것이다.
10. 19세기 메이지 유신기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적 문제설정은 동아시아를 철저하게 타자화, 대상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렇게 오리엔탈리즘은 아시아화되기 시작했다. 2차대전후 분단된 한반도의 남쪽인 한국은 철두철미 '탈아입미(脫亞入美)'를 추구함으로써 아예 아시아에서 탈주해 버렸다. 하지만 집나가 성공한 탕아가 되어 돌아왔다. 이런 의미에서 창비그룹의 동아시아론은 비록 한미FTA에 의해 거부되었지만 머나먼 자기정체성으로의 회귀를 부분적이나마 표현하는 것이다. 대단히 신자유주의적으로 채색되어 있긴 하지만 한중일 FTA를 비롯 각종 동아시아 경제공동체 구상은 그나마 '한 톨'의 동아시아 정체성정도는 함의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 주도 TPP의 출현과 일본의 참여로 그마저 모멘텀을 상실해 가고 있다. '익숙한 것' 그 데자뷔가 다시금 현실을 지배하고 있다. 만에 하나 중국이 TPP에 참여한다면 이번에는 중국의 '탈아'가 시작될 지도 모를 일이다. China goes to global!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한반도는 분단에, 일본은 우경화에, 중국은 '공산자본주의의 모순'에 발목을 잡혀 있고, 군비경쟁이라는 저 낡디 낡은 '국가이성'의 정언명법앞에서 탈근대는 고사하고 근대만 유지해 준다 해도 그나마 다행한 형편이다. 미국의 '아태 리밸런싱'은 동아시아를 더욱 고단하게 하는 제국의 역습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동아시아에서는 현상의 유지가 곧 진보다. 허나 내가 보기에 아시아야말로 우리에겐 가장 먼 곳이긴 했지만,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마저 당장 내려 놓을 일은 아닌 것으로 본다.
1. 동아시아는 단순히 지리적 공간개념이 아닌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공간이다. 이 개념은 그 자체 지극히 논쟁적인(polemical) 그래서 '정치적인' 개념이긴 하지만, 공동의 동아시아개념과 역사적 경험이야 말로 동아시아의 '진보적' 형성을 위한 전제가 된다고 볼 수 있겠다. 동아시아의 평화 역시 마찬가지다. 빌리 브란트의 말처럼 '평화가 모든 것은 아니다, 하지만 평화가 없다면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현단계 동아시아의 정세와 상황은 어떠한가. 남북한간의 무한긴장, G2간의 헤게모니 각축, 한중일간의 무역전쟁의 현장이 아닌가. 특히 최근 들어 동아시아는 그 무슨 '탈근대'는 고사하고 '전근대'적 무한군비경쟁의 시대에 돌입한 감마저 주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동아시아의 진보는 정치적, 사회경제적 차원은 고사하고, 평화와 인권의 심급을 유지하기에도 숨가쁠 지경이다. 동아시아의 현단계는 '현상유지'가 곧 '진보'라고 말하고 있다. 이 글은 일종의 동아시아 담론사, 혹은 사상사를 위한, 그래서 '문제'로서의 동아시아를 해명하기 위한 한 시도이다.
2. 동아시아는 차라리 마키아벨리와 홉스의 공간이라고 봐야 하겠다. 군주론 제17장의 질문 "잔혹함과 자비로움, 존경의 대상과 두려움의 대상 중 어느 것이 더 나은가" 다시 말해 군주의 잔혹과 자비 둘 중 어느 것이 군주의 권력 유지에 더 '유리'한가라는 치명적 질문이다. 근대적 '대중'의 속성을 잔인하리 만큼 냉혹하게 관찰한 마키아벨리는 둘 다를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잔혹을 선택할 것을 권고한다. 장성택을 제거한 김정은의 선택은 어쩌면 <군주론>이 찾아낸 정치의 일반법칙을 이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 물론 본인은 부정했지만 - 총리가 되고자 했던 중국의 보시라이에 대한 중국의 연출된 재판과 - 승자측 주장이긴 하지만 - 마찬가지 총리가 되고자 했던 장성택에 대한 보여주기식 처형은 중국과 북한, 중심과 주변의 극명히 다른 두 그림을 보여줄 뿐이었다. 동아시아는 그렇게 평화, 인권, 법이라는 다분히 '부르주아적' 보편주의 조차에도 미달하는, 혹시 그런 것이 있다면 동아시아 '문명'의 그저 전근대성을 적나라하게 노출하고 있다.
3. 아베정권에 의한 일본이라는 국가의 '정상화' 프로젝트는 동아시아의 낡은 영토분쟁과 군비경쟁을 격발시켰다. 2개의 전범국가 독일과 일본의 역사와 관계 맺는 방식은 흔히 비교의 대상이 되어 왔다. 독일 역시 분단이라는 비정상성을 '신보수주의적' 흡수통합을 통해 '정상화'한다. 하지만 그 경로는 EU통합에 독일 재통합을 '장착(embedding)'함으로써 주변국의 - 그것이 수동적이든 능동적이든 - '동의'를 확보하거나, 안되면 돈으로 '매수'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집단적 자위권'이란 미명하에 전개되는 아베식 일본 '정상화'는 동아시아통합을 해체하면서, 오히려 낡은 국가주의, 군국주의, 민족주의의 부활경향을 강화시키는 방식이다. 주변국의 동의는 커녕 반발과 항의를 국내정치적으로 자신의 권력자원화하고 있다. 동아시아는 여전히 저 낡은 제국주의 시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4. 양차 세계대전의 전간기, 1928년 윈스턴 처칠이 우화 한 편을 써서 남긴 적이 있다. 대강 이런 내용이다. 어느 날 동물원에서 동물 모두가 모여 무장해제를 결의하고 이를 위한 평화회담을 개최키로 합의했다. 회의에서 코뿔소가 말하기를, 이빨사용은 야만적이고 공포스러우니 만장일치로 금지하자고 했다. 뿔은 주로 방어용이므로 당연히 허용되어야 한다고 덧붙쳤다. 버팔로, 수사슴 그리고 저 작은 고슴토치조차도 여기에 찬성을 표했다. 그러자 사자와 호랑이가 이의를 달았다. 이빨은 물론이고 발톱조차도 저 까마득한 과거로부터 전해온 명예로운 무기라고 했다. 팬더, 표범, 퓨마 나아가 작은 고양이족 모두가 사자와 호랑이를 지지하고 나선다. 그러자 곰이 발언하면서 이렇게 제안했다. 이빨이건 뿔이건 둘 다 금지해야 한다. 싸움이 벌어지면 서로 꼭 껴안는 것(hug)만 허용해도 충분하다. 그것이야 말로 형제애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평화를 향한 거대한 첫걸음이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다른 동물 모두가 곰에게 격분했다. 당연히 회의는 가열되었고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다행히 이 때 중재자가 나타나 이 들을 진정시켜, 각자 조용히 우리속으로 돌아가자고 설득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이 들은 서로 친근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남북한, 북일, 북미 그리고 무엇보다 미중, 이 모든 것은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구성요소이다. 대부분 정치군사적 긴장에 의해 각인되어 있다. 처칠이 그렸던 동물원 총회 상황이다. 여기서 미국은 G2 헤게모니 경쟁의 한 당사자이면서 동시에 중재자 행세를 하기도 한다. 특히 한일관계가 문제가 될 때 그래왔다.
이런 동아시아는 다분히 홉스적이다. 홉스 가라사대 성경에 이르기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했거늘, 하지만 동아시아에서 이 황금률이 지켜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내가 상대방의 이빨이 무섭듯, 나의 뿔 또한 상대방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기본 중에 기본조차 수용할 아량은 당분간 없어 보인다. 이럴 때에는 그저 조용히 각자의 우리안으로 들어가, 다시 친근감이 들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달리 홉스식으로 표현하자면, 한반도에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bellum omnium contra omnes)' 상태를 상호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하는 것이 전제이다. 또한 처칠의 동물원 총회라는 가상우화의 비유를 연상하면서, 다시금 홉스의 명언,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homo homini lupus)'는 명구 역시 동아시아, 한반도에서는 여전히 진실이다. 남과 북은 서로에게 '늑대'이며, 지금, 여기에서는 늑대간의 전쟁이 진행중이다. 그런 한에 있어 그 관계는 늑대 상호간의 관계이고, 그 늑대의 이빨은 분명 서로의 생명을 위협하는 공격용 무기임을 인정해야 한다. 남과 북 어느 쪽도 '양'이 아님을 직시해야 한다는 말이다. 중, 미 또한 마찬가지다. 특히 홉스의 사상이 근대 영토국가로의 이행기의 그것이었다는 점에서, 독도, 조어도, 남쿠릴열도등 여전히 영토문제로 발목이 잡혀 있는 동아시아는 홉스의 시대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5. 지난 한세기이상에 걸쳐 아시아 담론은 19세기 말의 '동양'(東洋), 그 뒤를 이은 '동아(東亞)', '대동아(大東亞)' 그리고 2차 대전이후 '동아시아'로 진화해 왔다. 특히 한국에서는 지리적 위치와 장소라는 의미에서 '극동', '동북아'등의 개념이 혼용되다 90년대 이후 동아시아라는 명칭이 주로 사용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명칭은 그저 그때 그때 시의적인 조건과 상황의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스테판 다나카에 따르면 '동양'개념 자체가 청말기 동아시아에서 '중(中)'국의 중심성을 부인하여 이를 China에서 음차된 '지나(支那)'로 상대화, 격하시키고 이 빈공간을 '동양'이라는 새롭게 '발견된' 범주로 채워나가는 메이지유신기 일본의 외교전략을 대변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일본동양사학이 '발명(invented)'한 바로 이 동양의 새로운 '중심'이자 리더는 전통과 서구의 진보적 문명을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일본이었다. 중국이 지나로 명의변경된 것은 그 중심성에 대한 정신적 해체요구였다. 하지만 이 요구는 단순히 학설이나 주장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정치군사적 수단에 의한 지배의 관철 곧 청일전쟁, 나아가 러일전쟁으로 구체화되었고, 가쓰라-태프트밀약등의 방식으로 국제적으로 공인된 뒤 즉시 - 한일강제병합이라는 방식으로 - 봉인되었다. 조선의 식민지화는 그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리고 동양은 우승열패, 적자생존의 사회진화론과 황인종 vs 백인종의 대결이라는 인종이론적으로 입론된 반러시아주의의 공간으로 재규정되고, 이 때 이 공간의 패권은 당연히 일본의 그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서구에 의해 피규정된 아시아의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이라는 공간에서 일본에 의해 2차 '번역'되어 동양은 하위오리엔탈리즘(Sub-orientalism) 즉 이중적 오리엔탈리즘의 대상으로 타자화된다. 그 출발에 있어 다분히 문화적, 역사적 접근의 소산인 동양과는 달리 '동아'는 정치적 성격을 보다 강하게 띠는 것이었다. 일본의 헤게모니 요구는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민족국가 단위를 뛰어 넘는 초국가적(transnational), 제국주의적 확장으로 이어진다. 일본의 제국주의는 단순히 공간적 확장을 뛰어 넘어 시간적으로는 '근대의 초극(超克)'을 요구한다. 진주만공격직후 일본 사상계와 지식계는 일본의 근대가 본질적으로 서구에 의해 규정된 것이라 할 때, '아시아 태평양전쟁'은 바로 이 규정된 근대를 전쟁을 통해 넘어서는 것이라고 주장하기에 도달한 것이다. 전쟁을 통한 '탈근대' 시도는 물론 엄청난 비극으로 종결되었다. 당대의 전쟁을 통한 근대의 '초극'은 '지금 여기' '탈근대'론의 파국적 선취로 읽힌다.
6. 패전은 아시아를 '실체'로서가 아니라 '방법'으로 인식하자는 전후 일본의 대표적 지성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을 배태한다. 그에게 아시아는 '방법'이었다. 마치 맑스가 헤겔변증법에서 '체계'와 '방법'을 분리해서 변증법적 '방법'이라는 합리적 핵심을 구출하고자 했듯이 말이다. 다케우치의 '방법으로서의 아시아'의 문제의식이다. 아래 그의 말을 들어 본다. "서구의 우수한 문화가치를 보다 큰 규모에서 실현하려면 서양을 다시 한 번 동양으로 싸안아서 거꾸로 서양 자신을 이쪽에서 변혁시킨다는, 이 문화적인 되감기 혹은 가치상의 되감기를 통해 보편성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서양이 낳은 보편적인 가치를 보다 고양시키기 위해 동양의 힘으로 서양을 변혁한다. 이것이 동과 서의 오늘날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어 "그 되감기를 할 때에 자기 안에 독자적인 것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아마도 실체로는 존재하지 않겠죠. 하지만 방법으로는, 즉 주체형성의 과정으로는 있지 않겠는가 생각하는 까닭에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라는 제목을 달아보았지만, 그것은 명확하게 규정하는 일은 저에게도 벅차군요."
"문화적인 되감기 혹은 가치상의 되감기"를 통해 만들어진 새로운 보편성은 군사적 정복을 통한 보편주의 곧 제국의 건설과는 분명히 다른 경로이다. 아시아를 방법이 아니라 실체로 설정하고, 그것과 비아시아 곧 서양의 관계를 보편 대 특수, 주인 대 노예의 그것으로 환치시킬 때 관계의 군사적 전복을 통해 주인이 되는 것 곧 전쟁은 그 필연적 귀결점이 된다. 자기 내재적인 힘에 기초하는 다케우치의 '되감기'는 어떤 점에서 에드워드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 서문에서 말하는 '학습해제(unlearning)'와도 닮은 것인지 모른다. "내가 여기서 기여한 것은 문화적 지배가 작동하는 방식을 좀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새로운 종류로 동양을 대하기를 자극했다면, 진정 그것이 '동양'과 '서양' 둘 다를 제거한다면, 이 때 우리는 레이먼드 윌리암스가 말하는 '내재적 지배양식'의 '학습해제'의 과정으로 조금 더 진전한 것일는지 모른다."(번역은 필자)
서양을 모방하고 동경하고 따라가는 것이 일본의 근대화였다. "나는 일본문화의 구조적인 성질 때문에 일본이 유럽에게 저항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일본문화는 바깥을 향해 늘 새 것을 기대한다. 문화는 늘 서쪽에서 온다." 일본문화의 구조적 성질이란 무엇인가. 일본은 '우등생문화'다. 즉 지체를 만회하려고 분발하는 문화이다. "일본문화는 진보적이며 일본인은 근면하다. 그건 정말이지 그렇다. 역사가 보여준다. '새롭다'가 가치의 규준이 되며, '새롭다'와 '올바르다'가 서로 포개져 표상되는 일본인의 무의식적 심리경향은 일본문화의 진보성과 떼어놓을 수 없으리라." 일본과 동양의 관계는 이제 재인식되어야 한다. "그 현상 (서양의 진보를 실체로 여겨 쫓아가는)이 가장 두드러진 곳은 일본이 첫째가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은 가장 동양적이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일본은 동양의 나라들 가운데 가장 동양적이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라 함은 일반적으로 회자되는 생산력의 양적 비교를 일컫지 않는다. 나는 동양을 두고 저항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 저항이 작다는 의미에서다. 이것은 일본이 자본주의화에서 보여준 눈부신 속도과 관계될 터이다. 그리고 그 진보로 보이는 것이 동시에 타락이라는 점, 가장 동양적이지 않은 것이 동시에 가장 동양적이라는 점과도 결부되리라."
서양을 흉내내고 쫓아 가는 방식의 곧 추격형 근대화가 아닌 다른 근대화도 마땅히 가능하지 않겠는가. "후진국에서 근대화 과정에는 둘 이상의 형태가 있지 않을까. … 일본의 근대화는 하나의 형태이긴 했지만, 동양의 여러 나라가 혹은 후진국이 근대화하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길은 아니며, 그밖에도 다양한 가능성과 길이 있지는 않을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학자' 다케우치 요시미는 말한다. "저는 근대화의 두 가지 형태를 생각할 때, 이제껏 그래왔듯 일본의 근대화를 늘상 서구 선진국과만 비교할 일이 아니구나 생각했습니다. 학자만이 아니라 보통의 국민들도 그랬습니다. 정치가도 경제계 인사도 모두 그런 식이어서, 정치제도는 영국이 어떠니 예술은 프랑스가 어떠니 곧잘 비교하곤 했지요. 그런 단순한 비교로는 안 됩니다. 자기의 위치를 확실히 쥐려면 충분치 않습니다. 적어도 중국이나 인도 마냥 일본과 다른 길을 걸은 유형을 끌어와 세 개의 좌표축을 세워야 하겠구나, 그 당시부터 생각했습니다."
서양을 진보된 무엇으로 고정시켜 놓고 이를 따라해 온 일본의 근대와는 달리, '일본과 다른 길' 유형으로서 중국의 그것은 저항속에서 정체성을 찾아 내고 자신의 고유한 근대화를 이루어 왔다는 말이다. 다케우치 요시미의 자각 곧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는 일본의 근대화 곧 '실체로서의 아시아'의 좌절속에서 '마치 불속에서 밤을 줍듯' 일본의 근대화 '대동아공영권'에 이르러 자폭해 버린 일본의 '아시아주의'에서 어떤 새로운 합리적 핵심을 건지고자 한 시도였다.
7. 1980년대 종속이론가로 잘 알려져 있던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아시아주의는 그것이 우선 비아시아권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체제론의 시각에서 매우 방대한 실증적 근거를 가지고 주장되었다는 점에서 중국의 부상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해석의 전형적 사례라 하겠다. 2002년 한국어판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한 바 있다. "아시아와 특히 중국은 비교적 최근까지 세계경제에서 위세를 누렸던 만큼 머지 않아 그것을 되찾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지난 세기에 서양이 유포시킨 신화와는 달리 지금까지 아시아는 한 세기에서 한 세기 반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만 세계경제의 주도권을 내주었을 뿐"이다. "과거 중국과 아시아 각국이 경제적으로 성공한 것은 서양의 방식을 모방해서가 아니었다. 최근 아시아가 이룩한 경제성장도 서양이 걸었던 길과는 거리가 있다. 따라서 일본이 되었든 어느 나라가 되었든 아시아가 서양을 전범으로 삼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이는 미래에도 그럴것이라고 주장된다.
"나는 다시 한 번 동북아시아가 ... 세계경제성장의 '자연스러운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면서, "비록 1800년에서 멈추기는 했지만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경제가 세계경제에서 누렸던 우위를 되돌아 보는 것은 이 지역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경제발전이 단단한 역사적 기반을 갖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은 물론 앞으로 세계경제의 판도에서 일어날 근본적인 변화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프랑크의 '아시아시대'는 다케우치 요시미가 '방법'으로, 인문학적으로 선취한 것, 동양과 서양이 서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관계속에 있다고 하는 것을 정치경제학적 나아가 세계체제론적으로 그리고 '장주기이론적으로' 입증하고자 한 시도이다. '동양의 쇠퇴와 서양의 발흥'은 어떤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유기적 연관속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러면 서양은 어떻게 발흥했는가? 한마디로 말해 유럽인은 그것을 '샀다'. 처음에는 아시아라는 열차의 좌석하나를 샀다가 나중에는 열차 전체를 사들였던 것이다. ... 유럽인은 무슨 재간으로 그 돈을 손에 넣었을까? 무엇보다도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견한 금광과 은광이 자금줄 역할을 했다".
이처럼 서양의 동양에 대한 패권과 우위, 그것의 담론적 표현인 오리엔탈리즘은 어떤 역사의 내적 법칙에 기반한 필연이었다기 보다는 우발적으로 주어진 역사상의 에피소드에서 비롯된 것으로 왜소화된다. 프랑크의 세계체제론에 기반한 아시아론을 액면가대로 다 동의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우리로서는 그저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를 사유함에 있어 또 오리엔탈리즘의 '학습해제'에 있어 훌륭한 정치경제학적 소재로 선별수용하면 될 일이 아닐까.
8. 중국의 '신좌파' 왕후이가 말하는 '트랜스시스템사회'는 적어도 프랑크가 포착한 중국의 부상을 인문학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라 할 만하다. 그것은 일종의 '중국모델'이다. 말하자면 청제국에서 중앙과 지방을 관장한 방식, 다시 이러한 중앙과 지방이 합쳐진 제국이 주변 국가들과 소통한 '조공체제'라는 방식이 바로 트랜스시스템사회의 역사적 원류다. 그것은 "민족공동체의 시각에서 이뤄지는 각종 사회 서술과도 다르고 다원사회라는 개념과도 다르다. 그것은 상호 침투적인 사회가 독특한 방식으로 연결된 것이다". 왕후이의 트랜스시스템사회는 중국적 황제 및 조공시스템에서 "상호 침투적인 사회가 독특한 방식으로 연결된" 그런 관계망이다.
서양의 기독교에 대해 동양의 유교는 분명 비교할 만한 대상이다. 왕후이는 "중국 사회의 여러 풍부한 맥락들을 고려하면 유교 문화는 청조의 정치 영역과 문화 영역의 통일을 표현하기에 부족하다.…유교사상이 청대에 주도적인 지위를 점했다면 그것은 곧 '유교사상'이 정치적 성격이 매우 강했고 중개 역할을 잘 수행해 다른 시스템들을 매우 탄력적인 네트워크에서 정교하게 조직하면서 이 시스템들 자체의 독특한 특성을 결코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트랜스시스템사회는 서양의 '민족-국가(nation state)'시스템과 비교해 일종의 '문명국가(civilization state)'와 같은 초민족국가 단위에 대한 구상이다. 기본적으로 중국의 성공신화를 어떻게 해석하고 또 이를 미래에 투사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기도 한 것이다. 왕후이가 쓴 '아시아는 세계다'라는 다분히 도전적인 제목의 책은 결국 이 조공시스템의 재구성을 핵심으로 한다. 곧 그는 서양의 근대 민족국가 시스템의 극복한 새로운 형태로서 조공시스템을 발견한다. 이러한 전근대의 동아시아 시스템은 조공-책봉 관계속에서 어떤 방목 상태처럼 서로 상호독립적으로 존재했다. 트랜스시스템사회(trans-systemic society)는 바로 이 조공체계의 21세기 업그레이드 버전인 셈이다.
왕후이는 미국의 신자유주의, 패권주의를 이렇게 비판한다. "오늘날 미국의 금융 패권을 포함한 여러 가지 패권들은 미국의 군사적 패권과 국가적 패권이라는 기초 위에서 형성되었다. 이런 패권 없이는 어떤 금융적, 시장적 패권도 존재하지 않게 되며 모두 붕괴되고 와해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왕후이가 중국의 패권에 무관심한 것은 아니다. 결국 21세기형 '트랜스 시스템사회'속에서 근대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한반도, 일본, 베트남 등 중국의 주변국가가 신형 조공관계속에서 서구의 국가관계와는 다르게 공존하자는 논리가 그의 정치적 결론이라면 과장된 것일까. 왕후이에게서 중국공산당 정부의 '신형대국관계'의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것은 과연 나만의 느낌일까. 미국 패권주의에 대한 비판이 중국중심주의(Sinocentrism)의 근거로 될 수는 없을 것이다. 21세기 아시아에서 중국의 중심성이 유연제국주의는 아닌지, 중국 '신좌파'에게 중국 중심주의는 가히 동아시아의 역사적 전제이자 '자연적' 조건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닌지 따져볼 일이다.
9. 한국의 '동아시아'론은 1989년 냉전의 해체와 한중수교 등 동아시아 역내국가의 교류증진과 더불어 '동아시아'를 새롭게 상상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는 데에서 시작한다. 현존사회주의의 붕괴, 한국의 절차적 민주화의 진전과 시민사회의 확장, 한국 자본주의의 압축성장 등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조건변화를 배경으로 하면서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은 한반도 통일 문제를 새롭게 사고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1993년 <창작과 비평> 특집호를 통해, 최원식 등이 '동아시아적 시각'의 구축을 주장하면서 한국발 동아시아론이 출발한다. 최원식은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동아시아의 비약적 발전과 더불어 냉전의 해체가 몰고 올 미국주도의 자본주의 세계질서, 그것이 초래할 한반도의 악영향(북한에 대한 압박과 한반도 긴장의 격화, 통일의 전망을 어둡게 하는 것 등)을 우려하였고, 창비그룹의 동아시아론의 출발은 시작부터 한반도 통일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속에서 전개되었다. 동아시아를 '서구자본주의 대결의 장'으로 보고, 그 모순의 결과가 한반도의 분단을 초래했을 뿐 아니라 여전히 통일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동아시아 문제의 해결이 곧 한반도 문제의 해결을 용이하게 만든다는 사고, 달리 말하면 한반도 분단을 한반도의 민족문제에 국한하지 않고, 세계체제 및 동아시아의 대립과 갈등의 결절점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동아시아 담론은 첫째, 동아시아 대안문명론 둘째, 동아시아 정체성론 셋째, 동아시아 공동체론의 3가지 형태로 전개되었다. 첫째, 동아시아 대안문명론은 1980년대 사회주의 몰락, 냉전의 해체, 미국주도의 자본주의 세계화라는 세계질서 급변속에 서구문명을 대신할 대안적 문명으로 접근하는 입론으로서, 1990년대부터 동아시아에 주목한 백낙청은 '문명적 유산'에 주목하여 자본주의 문명을 대신할 '대안문명론'을 동아시아에서 발견코자 했으며, 이를 통해 '새로운 전지구적 문명' 건설의 필요성 주장하였고, 서양중심의 근대를 넘어서고자 하는 '근대극복'의 과제를 동아시아를 통해 달성코자한다. '서구적 근대의 진정한 대안을 모색하는 작업, 일국주의를 넘어 새로운 세계형성, 아시아의 전통적 지혜'(최원식), '전지구적 자본의 획일화 논리에 저항하는 커다란 과제를 실현하는 거점, 일국적 시각과 세계체제적 시각의 매개항 시각'(백영서)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둘째, 동아시아 정체성론은 동아시아 문명론의 연장선에 있는 논의로, 문명론처럼 서구(근대자본)문명에 대해 대안담론을 찾는 거대담론이라기 보다, 이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동)아시아'적 가치, 문화, 일체감을 포함한 어떤 '동아시아성'이 존재한다고 믿고 이를 발견해 냄으로써 '동아시아를 하나'로 사고하는 데 논의를 집중한다. 동아시아 정체성론은 동아시아 경제발전 모델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데, 1960년대 이후 동아시아의 눈부신 경제성장(홍콩과 싱가포르 포함)이 독특한 경영구조 및 경제정책 등 '제도적' 측면외에 고유한 '문화'적 요소에 힘입었다고 보는 주장이 제기된다. 여기서 문화적 요소란 공동체 의식, 권위주의, 유교적 문화특징, 근면과 검약정신 등인데 이를 1990년대 이후 '아시아적 가치'라는 용어로 집약되어 '유교자본주의론'으로 이어 진다. 동아시아문명론이 문명에서 서구(근대)극복의 대안을 찾는 것이라면, 유교자본주의는 서구자본주의 종말에 대한 활력의 대안으로 아시아적 유교자본주의를 제시, 그러나 1998년 동남아 경제위기를 계기로 수면아래도 잠수한다.
셋째, 동아시아 공동체론은 지역통합과 밀접한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세계화에 저항하면서도 세계화를 매개하는 이중적 역할의 지역주의에 주목한다. 여기에는 ASEAN을 중심으로 한 경제공동체구상과 정치안보공동체구상으로 구분된다. 동아시아 문명론과 동아시아 정체성론은 동아시아적인 것을 이끌어 내기 위한 것이라면, 공동체 담론은 세계화와 세계적 차원의 지역주의 대두에 대응하기 위해 동아시아 지역주의가 필요하다는 현실적 이해를 내세운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발 동아시아론은 그 주체와 경로라는 구체적 문제제기 앞에서 인식론적 모호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제대로 된 지평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중화주의와 동양주의를 대신한다는 인식이 아니라 양자 사이에 어떻게 균형을 잡는가가 문제다. ... 기존의 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새로운 중심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중심주의 자체를 철저히 해체함으로써 중심 바깥에, 아니 중신들 사이에 균형점을 조정하는 핵심... 한국이 신판중화주의와 신판 동양주의의 완충에서 中型國家로서 자기 소임에 충실할 때 서구의 충격앞에 오히려 자해적 분쟁과 갈등에 함몰했던 20세기를 진심으로 넘어설 가능성이 열릴 것"(최원식), 하지만 힘의 질서로서의 국제관계, 또 국제관계로서의 동아시아는 결코 무주공산이 아닌 것이며 힘의 중심은 반드시 출현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중국의 중화주의, 일본의 동양주의사이에서 하나의 '균형점'으로 한국이 위치할 가능성 역시 궁극적으로는 힘의 문제인 것이다.
아울러 동아시아론이 말하는 문명, 문화, 전통, 문화적 유산이 중국의 것인지, 동아시아의 것인지 역시 남겨진 의문이다. 여기서 동아시아 문명론과 정체성론은 동-서양 이분법, 그리고 우열에 대한 논의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자발적 오리엔탈리즘의 혐의로부터도 자유롭지 않다. 동아시아 문명이나, 정체성이 자체로서 논의되기 보다는 서양의 극복을 위해, 서양과 다른 것을 찾는 과정에서 추구된다.
'탈근대'라는 문제설정과 관련지워 보더라도 동아시아론이 탈근대에 착목하는 이유는 근대가 초래한 착취, 독점, 차별의 문제를 해소하고 정의롭고 평등한 세계 지향이다. 그리하여 민족주의, 국가주의, 제국주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사고가 근대극복론의 핵심을 이룬다. 그런데 여기서 특별히 왜 굳이 '동아시적 시각'이 필요한 것일까? 동아시아론자들의 근대에 대한 인식이 서구적 근대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근대극복의 물신화 문제, 국민국가의 억압성, 자본주의적 무자비한 경쟁, 민족주의의 침략성 등의 문제를 동아시아가 해결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일까.
한국발 동아시아론은 창비그룹이 제기한 태생적 한계로 말미암아 분단체제론의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다른 한편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론을 공통의 기반으로 삼는다. 분단체제론과 이중과제론, 그리고 '변혁중도주의'에 대한 한반도 문제의 특권화 경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보인다. 이 경우 한반도의 중심성을 강조하는 논의일 경우 아무래도 동아시아 지역 전체를 담당하며 소통할 만큼의 담론으로 신뢰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동북아균형자론' 등 참여정부 시기의 동아시아담론은 해방이후 친미일변도의 주류적 외교패러다임으로부터의 일정한 그리고 '소박한' 이탈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지 모른다. 혹은 지적, 정신적 '균형'복원이라는 점에서 '주체적' 외교전략의 한 흐름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뒤이어 한미FTA를 추진함으로써 스스로 이를 부정하는 치명적인 역사적 오류를 범했다. 한미FTA자체의 세세한 내용과 협상과정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거시적인 역사적 안목과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는 뜻이다. 나름 일정한 진보성을 담지한 자신의 담론을 어떤 설득력있는 근거도 제시하지 못한 채 스스로 이를 부정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담론을 제안한 어떤 그룹도 이에 대한 실효적 대안을 제시하거나, 진정성을 갖고 저항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1990년대 중반 형성되고 참여정부 시기 전략화, 정책화로 이어진 한국발 동아시아담론의 내적 허약성이 확인된다 할 것이다.
10. 19세기 메이지 유신기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적 문제설정은 동아시아를 철저하게 타자화, 대상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렇게 오리엔탈리즘은 아시아화되기 시작했다. 2차대전후 분단된 한반도의 남쪽인 한국은 철두철미 '탈아입미(脫亞入美)'를 추구함으로써 아예 아시아에서 탈주해 버렸다. 하지만 집나가 성공한 탕아가 되어 돌아왔다. 이런 의미에서 창비그룹의 동아시아론은 비록 한미FTA에 의해 거부되었지만 머나먼 자기정체성으로의 회귀를 부분적이나마 표현하는 것이다. 대단히 신자유주의적으로 채색되어 있긴 하지만 한중일 FTA를 비롯 각종 동아시아 경제공동체 구상은 그나마 '한 톨'의 동아시아 정체성정도는 함의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 주도 TPP의 출현과 일본의 참여로 그마저 모멘텀을 상실해 가고 있다. '익숙한 것' 그 데자뷔가 다시금 현실을 지배하고 있다. 만에 하나 중국이 TPP에 참여한다면 이번에는 중국의 '탈아'가 시작될 지도 모를 일이다. China goes to global!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한반도는 분단에, 일본은 우경화에, 중국은 '공산자본주의의 모순'에 발목을 잡혀 있고, 군비경쟁이라는 저 낡디 낡은 '국가이성'의 정언명법앞에서 탈근대는 고사하고 근대만 유지해 준다 해도 그나마 다행한 형편이다. 미국의 '아태 리밸런싱'은 동아시아를 더욱 고단하게 하는 제국의 역습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동아시아에서는 현상의 유지가 곧 진보다. 허나 내가 보기에 아시아야말로 우리에겐 가장 먼 곳이긴 했지만,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마저 당장 내려 놓을 일은 아닌 것으로 본다.
이해영 한신대 교수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0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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