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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29일 금요일

기대승(奇大升)의 논사록(論思錄)

 기대승(奇大升)의 논사록(論思錄)

  조선 중기의 유학자인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이 경연(經筵, 임금 앞에서 경전(經典)을 강독함을 이름)에서의 강론을 모아 엮은 책으로 조선 명종(明宗) 19년(1564년)부터 선조 2년(1569년)까지의 기록은 상권에, 선조 2년(1569년)부터 선조 5년(1572)까지는 하권에 편집되어 있다.

  1592년(선조 25)에 허봉(許篈)이 선조(宣祖) 대왕의 명을 받고 엮었다. 허봉은 허균(許筠)의 형이다. 이 책에는 기대승의 정치이념이 잘 표출되어 있다고 평가되고 있으며, 현재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논사록(論思錄)은〈고봉집 高峰集〉제4, 5책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기대승은 서기 1559년부터 1566년까지 만 7년 간 벌어졌던 저 유명한 사칠논변(四七論辯)이라는 학술적 논쟁을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과 치열하게 벌였고, 이 사단칠정의 논쟁은 조선 유학사상(儒學思想)에 깊은 영향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은,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문하(門下)로 비통하게 스러져간 기묘명현(己卯名賢) 중 한 분이신, 복재(服齋) 기준(奇遵, 1492~ 1521) 선생의 당 조카이기도다. 복재(服齋) 기준(奇遵) 선생은 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 1507~1581) 등 후학들을 양성하였으나 젊은 나이인 30세에 사사(賜死)되어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은 학자이다.

  다음은 기대승(奇大升)의『고봉집(高峯集)』상권에 있는 논사록(論思錄)의 한 대목이다. 여기에 기록한 국가 통치이념은 비단 나라에만 국한되는 게 아닌듯 하다. 한 가정이나 사회, 집단에서도 리더와 참모들이 갖췄으면 하는 구절들임을 느껴본다.


(원문)
古之人君。孰不欲治安而惡亂亡也。終不能治而卒底于亂且亡者。有疑心與自用故也。有疑心則以直言爲斥已。有自用則厭人言而莫聞。君子盡言故疏之。小人承順故悅之。所謂小人者。又引進群類。排斥善人。窺伺人主喜怒之端。粟喜而誘之。因怒而激之。朝廷上下。意思不通。則終有危亡之禍而莫之救。(고지인군 숙불욕치안이악란망야。종불능치이졸저우란차망자 유의심여자용고야。유의심칙이직언위척이 유자용칙염인언이막문。군자진언고소지 소인승순고열지。소위소인자 우인진군류 배척선인。규사인주희노지단 속희이유지。인노이격지 조정상하 의사불통。즉종유위망지화이막지구。)
(한글 자음은 아래 붙인 국역문을 쫓아 단락을 지었으니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원문에는 단락된 것이 아닙니다.)

(국역문)
옛날 군주 중에 누군들 태평과 안정을 바라고 혼란과 멸망을 싫어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끝내 나라가 잘 다스려지지 못하고 혼란과 멸망에 이르렀던 것은 현자들을 의심하고 자기 생각만을 썼기 때문입니다.
의심이 있으면 직언을 가지고 자신을 배척한다고 여기고, 자기 생각을 쓰면 남의 말을 싫어하여 듣지 않습니다.
군자는 직언을 다하므로 소원하게 대하고 소인은 자신의 뜻에 맞추므로 기뻐합니다.
이른바 소인들은 또 동류(同類)를 끌어와서 선한 사람들을 배척하며,
군주가 기뻐하고 노하는지 눈치를 보아서 기쁨을 틈타 유인하고,
노여움을 계기로 격발시키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조정 상하 간에 의사가 통하지 않으니,
마침내는 국가가 위태롭고 멸망하는 화가 닥쳐도 구원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 국역문은 한국고전번역원본을 인용하였다.
☞ 누군가가 내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보고 비겁하다는 혹평이 있어 글을 쓴다는 걸 두렵게 생각한다. 따라서 편집자의 감정은 일체 배제하고 원문만 소개하는 형식을 빌었으므로 이을 양해 바라는 바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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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 기대승의 논사록(論思錄) 주역 학술 자료실
2011/03/16 22:29



◈ 고봉 기대승의 논사록(論思錄)

조선 임금들의 제왕학 교과서

 

논사록(論思錄)은 조선 중기의 학자 기대승(奇大升)이 경연에서 강론한 내용을 가려 모은 책으로 기대승(奇大升)이 죽은 뒤 경연에서 행한 그의 강설을 소중히 여겨 선조의 명으로 1592년(선조 25)에 허봉(許篈)이 경연기록에서 뽑아 엮었다. 기대승(奇大升)의 조카사위인 선산도호부사 조찬한(趙纘韓)이 선산도호부사 재임 때에 간행했다. 책 끝에는 조찬한(趙纘韓)이 1630년(인조 8)에 쓴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에는 기대승(奇大升)의 정치이념이 잘 표출되어 있다. 그는 군왕은 완전한 인격체여야 하고, 백성의 마음의 향방을 파악해 이를 정치에 반영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성왕의 선결조건이라고 주장한다. 또 군왕의 통치권을 대신들에게 나누어주어 권력을 분산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도학의 실천을 주장하는 동시에 이론의 정립에도 노력한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 중간(重刊) 고봉 선생 《논사록》 서(序)

고봉 선생의 《논사록》은 일찍이 간행본이 있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아, 선생의 시대에 도학이 지극히 성대하였다. 당시에 퇴계(退溪) 이 문순공(李文純公)은 양조(兩朝)의 대로(大老)로서 태산북두처럼 임해 있었고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이 뒤를 이어 조정에 나아오니 덕망이 한 시대를 진작시켰다. 선생이 그 사이에서 주선하며 경륜을 격양시켜 사문을 흥기시키는 책무를 다하셨으니, 사대부들이 모두 의지하여 추중하고 본받아 정진하여 찬연하기가 마치 오색구름이 일어나는 것처럼 성대하였다. 이에 소기묘(小己卯)라는 칭송이 있었다. 2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비록 후생과 젊은이라 할지라도 선생의 풍모를 들은 이들은 상상하며 칭송하고 흠모하지 않은 이라곤 없으니, 어찌 진실로 성대하지 않은가. 그러나 선생의 학술과 조예는 다 알 수 없는 점이 있는 듯하니, 참으로 덕을 상고하기 어렵다.

문순공과 문성공은 동방의 대현이다. 문순공이 조정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갈 때에 선조께서는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 학문하는 선비를 물었는데 문순공께서 천거한 분은 오직 고봉 선생뿐이었고, 문성공이 사단(四端)ㆍ칠정(七情)과 이기(理氣)에 관한 논변을 만들 때에도 또한 오직 고봉 선생의 말만을 표장하여 발명하였으니, 선생의 학술과 조예에 대해 누가 또 이론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인가. 택당(澤堂) 이식(李植) 공은 “고봉의 퇴계에 대한 관계는 횡거(橫渠)의 정자(程子)에 대한 관계와 같아서 고봉만 퇴계에게 질정을 받은 것이 아니라 퇴계 역시 고봉에게 도움 받은 것이 많다.” 하였으니, 이 말에서 또한 충분히 징험할 수 있다.

선생이 돌아가시고 난 뒤 선조께서 사관(史官)에게 《기거주일록(起居注日錄)》을 가져다 고찰하여 선생이 일찍이 건의한 것을 모아 한 부의 책으로 묶으라고 명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이른바 《논사록》이다. 그러나 선생이 선조 5년(1572)에 돌아가신 데다 재야에 계신 세월이 많았기 때문에 조정에 나아가 생각을 논한 것은 며칠에 불과할 뿐이다. 애석하다. 설령 승지가 기록을 잘 한다 하더라도 조정에 계신 날이 벌써 적어 그 책이 몹시 소략하니, 실로 선생이 이룩한 학문의 전체(全體)와 대용(大用)을 드러낼 수 없다. 더구나 기록한 내용이 급하게 쓴 기사관이 붓 가는 대로 쓴 초고에서 나왔으므로 글이 난삽하여 분명하지 못하고 말이 소략하여 결락된 부분이 많으니 읽는 이들이 문제로 여겼다. 간행본이 전하지 않는 것은 아마 이것 때문인가 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제왕(帝王)의 대도(大道)를 밝히고 성정(誠正)의 극공(極功)을 지적할 때에 아는 것은 모두 말했고 말을 하면 극진히 하지 않음이 없어서, 기필코 군주를 요순처럼 만들고 태평성대를 재현하려 하였다. 그리고 사특함을 배척하고 정도(正道)를 부양하는 즈음에는 더욱 격렬하고 되풀이하며 명백하고 절실하였으니, 그 고심(苦心)과 혈성(血誠)은 정성스럽게 군주를 감동시키는 점이 있었다. 정암(靜庵) 조 문정공(趙文正公)과 회재(晦齋) 이 문원공(李文元公)이 신원되고 추증된 것도 모두 선생이 앞장서서 주장한 힘인데, 오히려 이 책에서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이 책이 장차 세교(世敎)를 돕는 하나의 단서가 될 터인데, 또 어찌 흔적 없이 사라져 전해지지 않도록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저 단혈(丹穴)에서 떨어진 봉황의 깃털은 그것이 상서로운 세상의 문장이 있음을 보이기만 하면 그것으로 족하니, 저 기사관이 극히 훌륭하게 쓰지 못한 것이 선생의 논사(論思)에 어찌 누를 끼칠 것인가. 보는 이는 스스로 알 것이다.

선생의 후손 간의군(諫議君) 언정(彦鼎) 씨가 재목을 구해 《논사록》을 중간하려 할 때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는데, 내가 감히 문장에 능하지 못하다는 것으로 사양할 수 없었기에 마침내 서문을 쓴다.

숭정(崇禎 명 의종(明毅宗)의 연호) 후 세 번째 정미년(1787, 정조11) 계하(季夏)에 후학(後學) 풍양(豐壤) 조경(趙璥)은 삼가 서(序)한다.

◐ 고봉선생 논사록 상권은 이렇게 시작 된다.

갑자년(1564, 명종19) 2월 13일 명종조

주강에 입시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국가의 안위는 재상에게 달려 있고 군주의 덕이 성취됨은 경연에서 이루어지니, 경연의 중요성은 재상과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군주의 덕이 성취된 뒤에야 어진 재상을 알아 임용할 수 있으니, 그렇다면 경연이 더 중요한 법인데 후세에는 다만 형식만 구비되어 있고 실제가 없습니다. 이제 성덕이 숙성하시어 의리의 학문에 대하여 밝게 깨달아 의심이 없으시니, 더욱 유념하시어 부지런히 경연에 나아가신다면 성덕이 더더욱 빛날 것입니다.

근래에 성상의 체후(體候)가 편치 못하시고 국가에 또 변고가 있었던 데다가 날씨 또한 추워서 오랫동안 경연을 열지 못했으므로 신등은 늘 걱정되었습니다. 요즈음 삼가 전지(傳旨)를 보건대 강학에 연연하는 뜻이 있으니, 이것을 듣고 보는 자들이 누구인들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학문의 도는 다만 신하를 접대함에 공경을 지극히 하는 것뿐이 아니니, 더욱 한가로울 때에 몸을 닦고 살펴야 합니다. 옛날 부열(傅說)이 고종(高宗)에게 경계하기를 ‘생각의 처음과 끝을 학문에 둔다면 저도 모르게 덕이 닦일 것입니다.〔念終始 典于學 厥德修 罔覺〕’ 하였으니, 학문의 도는 모름지기 시작과 끝이 있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군주가 학문을 좋아하여 신하들을 접견하여 자주 강론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근래에 행하지 못하였구나. 나의 뜻을 승정원에 모두 하유(下諭)하였다. 대체로 아뢴 뜻이 마땅하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언로(言路)는 국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언로가 열리면 국가가 편안해지고 언로가 막히면 국가가 위태로워집니다. 그러나 지금 언로가 크게 열려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지난번 하늘의 변고로 인하여 직언을 구하였을 때 5개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상소하는 자가 있었는데, 이제 또 상께서 그 말의 근원을 끝까지 힐문하고 있습니다.-이에 앞서 헌부에서 상소하였는데, “궁금(宮禁)을 엄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거늘 제목(除目 벼슬을 제수하는 글)이 내리기도 전에 득실을 먼저 알고 윤음(綸音)이 내리기도 전에 여항(閭巷)에서 먼저 듣고 있습니다.

그래서 혹 옥사를 결단하는 중에 사봉(斜封)이 내리기도 하고 혹 직책을 제수할 때에 내지(內旨)가 내리기까지 하여 도하(都下)에서 떠들썩하게 전파되고 있으니, 어찌 성덕에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운운한 내용이 있었다. 이에 상이 노하여 지평 이기(李墍)에게 해석하기를 명하여 힐문하였기 때문에 선생께서 아뢴 것이다.- 신은 이 뒤로부터 더욱 진언(進言)하는 자가 없을까 두렵습니다. 옛날 당나라 육지(陸摯)가 덕종(德宗)에게 말하기를 ‘간하는 자가 광망(狂妄)한 소리를 하고 속이는 말을 하는 것은 곧 우리 군주의 관대함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하였으니, 행여 사리에 맞지 않고 경솔한 말이 있더라도 심상하게 여기고 용납하여 신하들로 하여금 자기의 소회가 있으면 반드시 아뢰게 하여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언로의 통하고 막힘은 진실로 국가와 관계가 있다. 그러나 이번에 헌부에서 올린 소장은 미진한 뜻이 있으므로 내가 힐문하는 것이니, 언로에 해로울 것이 특별히 없다.”

하자, 선생이 또 아뢰기를,
“성상의 뜻은 이와 같더라도 옛사람의 말에 ‘가가호호마다 찾아가서 설명할 수는 없다.’ 하였는데, 이제 그 말한 근거를 거듭거듭 힐문하시니 보고 듣는 데에 매우 미안합니다.”
하였다.

◐ 고봉속집 《논사록》 발(跋)

문집이 나온 다음 해 봄에 《논사록》1책을 찾아보니, 그 끝에 “융경 임신년 12월에 후학 예문관 검열 양천 허봉이 정원에서 상고하여 베껴 내다.〔隆慶壬申十二月後學藝文館檢閱陽川許篈在政院取考謄出〕”란 25자가 있었다. 선생이 임신년(1572, 선조5) 11월 1일에 고부(古阜)의 시골집에서 별세하셨는데, 허봉이 그해 12월 모일에 선생이 경연 석상에서 진계(進啓)한 것을 다 상고하여 베껴 내고 모아서 1권짜리 2건(件)을 만들고는 그 하나를 본가(本家)로 보내어 길이 전하도록 한 것이니, 여기서 당대에 선생을 성대하게 높이고 사모했던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살펴보건대 이 글의 내용이 당시 일을 기록한 자의 손에서 번갈아 나와 간혹 거칠고 조잡한 것도 있다.

그러나 고봉이 심학(心學)의 정미함을 분석하여 위로 요(堯)ㆍ순(舜)ㆍ주공(周公)ㆍ공자(孔子)에서부터 아래로 자사(子思)ㆍ맹자(孟子)ㆍ정자(程子)ㆍ주자(朱子)에 이르기까지 원류와 갈래를 일일이 말하고 조목조목 관통시켰으며, 경전(經典)을 넘나들고 예전(禮典)을 참고하여 종묘(宗廟)와 조정에 진달함으로써 마침내 선정(先正)의 억울함을 신설(伸雪)하고 현자(賢者)들을 맞이할 길을 넓혀 놓았으며, 위로 성학(聖學)을 찬양(贊颺)하고 아래로 사문(斯文)을 부식(扶植)하였으니, 그 말한 의도가 이 책 속에 소상하게 게시되어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이 기록이 세교(世敎)를 신장하는 데 도움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묵은 종이들 속에서 차마 인몰되게 할 수 없어 이에 아울러 간행하여 2권으로 나누어 만들고는 속집이라 명명하여 문집과 함께 1질(秩)로 만들어 후세의 군자가 취사선택을 어떻게 할지를 기다릴 뿐이다.

숭정(崇禎) 경오년(1630, 인조8) 7월 일에 후학 조찬한(趙纘韓)은 삼가 발을 쓴다.-선산(善山)에 있을 때이다.-


논사록의 발문.


◐ 고봉 선생 《논사록》 소지(小識)

선생은 임신년(1572, 선조5) 11월에 별세하셨는데, 상이 그해 12월에 선생이 경연에서 진계(進啓)한 것들을 모두 상고하여 베껴 내고 모아서 이것을 세상에 오래도록 전하게 하였다. 이때 검열(檢閱) 허봉(許篈)이 정원에 있으면서 상고하여 베껴 냈으니, 여기에서 다시 상이 선생을 숭모한 뜻을 징험할 수 있다. 다만 그 문자가 당시 사관들이 창졸간에 일을 기록한 데서 번갈아 나왔으므로 글이 대부분 졸렬하고 난삽하여 답답하고 통창하지 못하다. 그러나 위로는 요(堯)ㆍ순(舜)ㆍ공자(孔子)ㆍ맹자(孟子)에서부터 아래로는 주염계(周濂溪)ㆍ장횡거(張橫渠)ㆍ정자(程子)ㆍ주자(朱子)에 이르기까지 도학의 연원(淵源)을 상세히 말하고 조목조목 관통시켰으며, 경전(經傳)을 출입하고 사기(史記)를 곁들여 종묘와 조정에서 모두 이것을 말함으로써 마침내 선정(先正)들의 억울함을 신설(伸雪)하고 또 현자(賢者)들을 맞이할 길을 열어 놓았다. 이로써 성학(聖學)을 찬양하고 사문(斯文)을 부식(扶植)한 것이 찬란히 책 속에 나와 있으니, 이 기록이 세교(世敎)에 어찌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후세의 군자들이 취사선택을 어떻게 할지를 기다릴 뿐이다.
후학 한양(漢陽) 조찬한(趙纘韓)은 삼가 쓰다.


◐ 고봉 선생 《논사록》 발(跋)

나는 이미 고봉 선생의 〈사칠이기변(四七理氣辨)〉을 교정하고는 그 아래에 한마디 말을 붙였다. 이윽고 또 선생의 《논사록》을 얻어 손을 씻고 공경히 읽어 보니, 그 내용이 간곡하고 명쾌하여 말씀이 정성스럽고 뜻이 길어서 흉중에 있는 소회를 피력하여 자세히 말씀하고 그칠 줄을 몰랐다. 이것은 한결같이 천덕(天德)과 왕도(王道)에 근본하였고 털끝만 한 공리(功利)의 사욕도 끼이지 않았으니, 여기에서 선생의 올바른 학문을 볼 수 있고 선생의 독실한 충성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선생이 손수 기록한 것이 아니요, 바로 선생이 세상을 버리신 직후에 선조(宣祖)께서 사관에게 명하여 기거주(起居注)에 있는 것을 기록하여 뽑아내게 한 것이니, 그렇다면 현명한 군주와 어진 신하가 좋은 세상에서 서로 만난 것이다. 아, 훌륭한 일이다. 요순(堯舜) 시대에 고요(皐陶), 백익(伯益), 직(稷)이 군주 앞에서 훌륭한 계책을 말했을 때에도 또한 이렇게 한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 선조께서 처음 즉위하시자 조정이 청명해졌고 여러 현자들이 대거 진출하였다. 선생이 조정에 계실 때에 퇴계(退溪) 이 문순공(李文純公)이 앞에서 천거하였고, 사암(思菴) 박순(朴淳), 송강(松江) 정철(鄭澈),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 약포(藥圃) 정탁(鄭琢), 백록(白麓) 신응시(辛應時),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 등 여러분들이 뒤에서 도왔으니, 이때에 세도(世道)와 인심은 하나도 걱정할 만한 것이 없을 듯했다. 그런데도 선생만은 정성스럽고 간곡하게 현자와 간신의 소장(消長)하는 기미(幾微)를 아뢰었으며, 심지어는 “소인이 군자를 공격할 때에 조정의 정사를 비난한다 하는데, 군주가 혹 이것을 살피지 못하면 사화가 이 때문에 일어난다.” 하였고, 동한(東漢)의 당고(黨錮)와 당나라 말기의 백마역(白馬驛) 사건을 인용하여 밝혔으며, 또 말하기를 “외척이 비록 어진 사람이라도 군주는 그를 의지하여 함께 정사를 해서는 안 되며, 선비들도 외척들과 더불어 일을 함께 하면 안 된다.’ 하였으니, 그 고심(苦心)이 담겨 있어서 천 년이 지난 뒤에도 사람들로 하여금 세 번 반복해 읽고 눈물을 흘려 그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아, 그 천하와 만세를 위한 생각이 장구하다 하겠다. 가령 구천(九泉)에 있는 분을 다시 세상에 나오게 할 수 있다면, 내가 선생 말고 누구를 하겠는가. 아, 슬프다.

숭정(崇禎) 후 세 번째 병오(丙午, 1786) 중동(仲冬)에 후학 청풍(淸風) 김종수(金鍾秀)는 삼가 쓰다.

◐ 고봉선생 논사록 후지(後識))

이것은 나의 선조이신 고봉 선생께서 경연에서 논사(論思)하신 것을 기록한 것이다. 아, 선생의 세대에는 뛰어나신 선비들이 한 세상에 대거 진출하여 마치 구름이 일듯 노을이 찬연히 비치듯 하여 소기묘(小己卯)라는 칭찬이 있었다. 퇴계 선생이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실 때에 선조께서는 조정에서 학문하는 인사를 하문하셨는데 퇴계 선생이 유독 선생을 들어 대답하였으니, 이것을 가지고도 선생의 학술의 밝음과 조예의 깊음을 대략 알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이 별세하시자 선조께서는 사신(史臣)에게 명하여 선생의 기거주일록(起居注日錄)을 베껴 내어 보실 수 있도록 하게 하였으니, 아, 훌륭한 일이다. 선생은 초야에 계시면서 강학한 날이 많고 조정에 나아가 논사하신 것은 얼마간의 기간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 책이 매우 소략하니, 진실로 선생의 학문의 전체(全體)와 대용(大用)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경연에 계시면서 아는 것은 모두 말씀하였고 말을 하면 극진히 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하여 제왕의 대도를 천명하였고, 성의(誠意)ㆍ정심(正心)의 지극한 공부를 말씀하시어 반드시 요순 같은 성군을 만들려고 하였고 지극한 정치를 이룩하려고 하였다. 더욱이 사특함을 배척하고 정도를 부양하는 일에 있어서는 명백하고 간절하게 말씀하셨으니, 그 고심과 혈성은 임금을 충분히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그리하여 기묘사화와 을사사화에 화를 받은 모든 현인들을 신원ㆍ표창하고 증직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선생이 앞서서 주장하신 공로였다.

선생이 별세하시자마자 세도가 곧 나빠져서 동서분당(東西分黨)이 되어 서로 알력이 일어났다. 이것을 조정(調整)하려고 힘쓰던 선배들도 당쟁에 휘말림을 면치 못하였다. 유식한 자들은 말하기를 “고봉이 만일 살아 계셨다면 당론을 거의 조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니, 선생을 깊이 알고 잘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이 책에 기록된 것은 기사관(記事官)이 붓 가는 대로 쓴 초고에서 나왔으므로 글이 난삽하여 분명하지 못하고 말이 소략하여 누락된 부분이 많으니, 읽는 이들이 문제로 여긴다. 그러나 선생의 논사에 무슨 손상이 있겠는가. 이것을 보는 자들은 스스로 알 것이다. 세상의 정권을 잡고 국가를 다스리는 자들이 이 책을 보고 흥기하는 바가 있다면 정치와 교화에 도움이 매우 클 것이다.
경술년(1970) 7월 상현(上弦)에 후손 세훈(世勳)은 삼가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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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http://blog.daum.net/segon53/15859627에서 발췌함.

고봉이 별세한 한 달 뒤인 1572년 12월, 선조 임금은 어명으로 경연 가운데서 고봉의 말을 뽑아 기록하도록 명하였다. 경연은 임금에게 유학의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강론하는 것으로서 하루에 오전, 오후, 저녁 세 번 이루어졌고 때로는 밤에도 강론이 있었다. 경연은 덕에 의한 교화를 이상으로 하는 정치원리를 근거로 왕에게 경사經史를 가르쳐 유교의 이상 정치 理想政治를 실현하려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이곳에서 정치현안이 논의되기도 하였다.

선조의 어명이 있자, 예문관 검열 하곡 허봉(1551-1588)은 경연일기를 검토하여 문장을 다시 교열하고 차례를 만들어 편찬을 하였다. 이 책이 바로 논사록 論思錄이다. 편찬자인 허봉은 초당 허엽의 아들이고 허균의 형이다.

논사록 論思錄은 상, 하 두 권으로 로 되어 있는 데 상권은 명종 19년(1564)에서 선조 2년(1569) 4월까지 경연 내용 중 19개 항목을, 하권은 선조 2년(1569) 5월에서 선조5년(1572)년 5월 까지 경연 중 9개 항목을 수록하고 있다. 논사록의 내용은 <논어> <대학> <예기><소학> <근사록>등 경전을 가지고 강론한 내용을 중점을 두면서도 당시 조정에서의 정치현안과 경세제민에 관한 사항의 논의가 이루어졌다. 특히 논사록은 고봉의 경세사상 즉 치국과 제민에 대한 철학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강의록으로서 사단칠정논변이 유학의 이론서라면 논사록은 유학의 실용서이다.
  
그러면 논사록에 나타난 고봉의 정치철학을 알아보자. 먼저 고봉은 나라를 다스리려면 시비가 분명하고 언로가 열려 있으며 의로움이 중요시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천하의 일에는 옳고 그름 즉 시비 是非가 없을 수 없으니, 옳고 그름이 분명해진 뒤에야 인심이 복종하여 정사가 순조로워집니다. 옳고 그름은 비단 사람의 인심에서 나올 뿐만 아니라 실로 천리 天理에서 나오는 것이니, 일시적으로는 비록 이것을 엄폐하고 사람들을 처형하여 입을 막는다 할지라도, 그 시비의 본심 本心은 끝내 없앨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새로운 정사를 베풀 때에 어진 이를 초청함은 심히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어진 이를 등용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옳고 그름을 밝혀서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한 뒤에야 어진 자를 나오게 할 수 있습니다.

위 말은 선조 즉위년인 1567년 10월23일 조강 朝講에 <대학>을 강하면서 선조임금에게 한 말이다. 이 날 강의는 16세의 선조가 임금이 되어 처음 열린 경연자리였다. 이 첫 경연의 강사가 바로 고봉이었다. 당시에는 퇴계 선생도 안동에서 아직 서울로 올라오지 않아 고봉이 첫 강의를 하게 맡게 된 것이다. 이 강의에서 고봉은 성리학의 정통을 정몽주,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로 이어짐을 밝히고 조광조와 이언적의 명예회복을 주청하였다. 그러면서 시비가 분명하여야 나라의 기강이 확립됨을 강의한 것이다. 요즘 이야기로 하면 역사 바로 보기를 하여 시비를 가려야 새 나라를 세울 수 있다는 요지이다.

국가의 안위는 재상 宰相에게 달려 있고, 군주의 덕이 성취됨은 경연에서 이루어지니 , 경연의 중요성은 재상과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군주의 덕이 성취된 뒤에야 어진 재상을 알아 임용할 수 있는 것이니, 그렇다면 경연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후세에는 다만 형식이 있고 그 실제가 없습니다. 이제 성덕聖德이 숙성하시어 의리의 학문에 대하여 밝게 깨달아 의심이 없으십니다. 다시 유념하시어 부지런히 경연에 나아가신다면 성덕이 더 더욱 빛날 것입니다.

언로 言路 는 국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언로가 열려 있으면 국가가 평안하고 언로가 막혀 있으면 국가가 위태롭습니다. 그러나 지금 언로가 크게 열려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중략) 지난번 하늘의 변고로 인하여 직언을 구하였을 때 5개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상소하는 자가 있었는데,이제 또 상께서 그 말의 근원을 끝까지 힐문하고 있습니다. 신은 이 뒤로부터 더욱 진언하는 자가 없을까 두렵습니다. (중략) 행여 사리에 맞지 않고 경솔한 말이 있더라도 심상하게 여기고 용납하여 신하들로 하여금 자기의 소회가 있으면 반드시 아뢰게 하여야 합니다.

위 강의는 명종 19년, 1564년 2월 13일 주강 晝講에서 아뢴 말로서 <논사록>의 맨 처음에 나온다. 경연의 중요성과 언로가 열려 있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또한 국정 철학은 이익보다는 의로움이 중요시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국가는 이익을 이익으로 여기지 않고 의로움을 이익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참다운 이 利는 의 義에서 나오는 것이니 자기도 편안하고 남도 편안한 것입니다. 이익을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롭지 않음이 없는 것이 이른 바 의로서 이로움을 삼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욕 利慾의 마음은 남과 나를 구별하는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니 자기에게 이롭고자 한다면 반드시 남을 해치게 마련입니다. 사람들마다 자기에게 이롭게 하고자 하여 나와 다투고 빼앗으려 한다면 이익을 추구해도 얻지는 못한 채 해만 따르게 되니 이것이 이익을 이익으로 삼는다 하는 것입니다.
한편 고봉은 제왕의 임무에 대하여는 수신과 인재등용을 역설한다.
제왕의 자리는 매우 어려운 것이니 마땅히 깊은 못에 임한 살얼음을 밟는 듯 조심해야 하고 잠시라도 방심하거나 경솔히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또 반드시 간사한 사람과 정직한 사람을 밝게 구별 한 뒤에야 인재를 등용하고 소인을 물리침에 마땅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부터 제왕들이 지극한 정치를 이룩하고자 할 때는 반드시 수신을 근본으로 삼았고 또 인재를 불러 모으는 것을 급선무로 여겼습니다. 국가의 온갖 일을 군주 혼자서 처리할 수는 없으니 현자와 더불어 함께 하여야 마땅합니다. 사람들이 집을 짓고자 할 때에도 먼저 재목을 준비한 뒤에야 집을 지을 수 있는 것인데 하물며 국가를 다스림에 있어서 이겠습니까?

뜻을 세우고(立志) 어진 이를 구하고(求賢) 책임을 맡기는 것 (責任), 이 세 가지 일을 항상 유념하소서. 다만 어진 이를 구하려는 마음만 있고 이러한 뜻이 서지 못한다면 비록 어진 이를 구할 지라도 얻지 못 할 것이요, 설령 이전 선비를 얻었다 할지라도 이러한 뜻이 굳게 서지 못하면 또한 활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임무를 맡겨주고 성공하기를 꾀할 것이며 하찮은 과오는 접어두고 따지지 마소서. 이것이 치도의 큰 강령입니다. 큰 강령이 서지 못하면 하찮은 폐단을 바로 잡고자 하여도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경세제민 經世濟民, 즉 세상을 경영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고봉은 민본 民本과 재물 財物을 강조한다.

백성이 좋아하는 바를 좋아하고 백성이 싫어하는 바를 싫어하는 것이 바로 백성의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아서 백성들이 편안하고자 하면 편안히 해 주고 백성들이 수고로운 것을 싫어하면 수고로움을 면해주니 이것이 이른바 그 마음과 같이 하는 것이 서 恕가 된다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항상 백성들을 생각해서 날씨가 추워지면 혹시 헐벗는 자가 있는 지 염려하며 흉년이 들면 굶주린 자가 있는 지 염려하여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과 같이 한다면 선한 정사를 거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의 생리는 반드시 음식을 먹어야 살 수 있는 것이니 하루도 재물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재물을 위주로 하면 이욕이 생겨서 분쟁이 일어나기 때문에 ‘덕은 근본이요 재물은 말단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백성이 편안한 뒤에야 국가가 다스려지는 것이니 백성들이 풍족하다면 군주가 어찌 홀로 풍족하지 못하겠습니까?

<논사록>은 선조 이후 역대 조선 임금들의 제왕학 교과서가 되었다. 논사록이 나온 뒤 200년 지난 뒤에 논사록이 다시 중간된다. 정조 임금은 논사록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는다.
그러면 정조임금의 전교와 치제문을 살펴보자. 먼저 전교이다.

고봉 선생의 《논사록(論思錄)을 중간(重刊)한 뒤 정조임금의 전교(1788년),

이제 <논사록>을 보니, 이것은 바로 고 故 승지 기대승이 경연에서 아뢴 말이다. 서문과 발문을 보면 근래에 비로소 중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좋은 말을 아뢰고 착한 선비들을 보호한 그 공로에 대해 책을 어루만지며 세 번 반복해 보니 어찌 존경스럽고 탄상하는 심정을 금할 수 있겠는가. 살아서는 성군을 만나 자신의 소회를 다 말하였고, 죽어서는 군주가 사관에게 명하여 그가 아뢴 말을 모아 기록 하도록 까지 하였으니, 아,거룩하다. 지금 나는 이 책을 즐겨 보느라 밤이 이미 깊어 촛불을 여러 번 바꾸어 켰는지도 몰랐으니, 열 번의 야대 夜對보다도 훨씬 낫다.


(후략)

다음은 정조임금의 치제문을 보자.
명종과 선조의 태평성세에 / 明宣盛際
여러 현인들이 울흥하였네. / 衆賢蔚興

(중략)

이와 기의 원류와 / 源流理氣
전례의 상과 변에 대하여 / 常變典禮
명쾌하게 분석하니 / 劈析明快
선배들도 존경하였네. / 先輩所畏
얼굴빛을 엄숙히 하고 조정에 서니 / 正色立朝
군왕의 외척들이 숨을 죽였네. / 戚畹屛息
태평성세를 만나 / 際遇明明
행하고 그침을 여유 있게 하였네. / 行止綽綽
벼슬을 버리고 남쪽으로 돌아가니 / 卷以南歸
명망과 절개가 더욱 드높았네. / 名節逾卓
내가 그의 유서를 읽으니 / 予讀遺書
그 이름이 《논사록》이었네 / 其名論思
사관이 모아서 기록한 것을 / 起注所裒
성조께서 명명하셨네. / 聖祖命之
훌륭한 그 말씀이여 / 旨哉攸言
같은 시대에 태어나지 못함이 한스러워라 / 恨不同時
촛불을 여러 번 바꾸어 켜고 책을 읽으며 / 燭跋頻剪
서너 번이나 무릎을 치고 감탄하였네. / 擊節三四
시대는 다르나 감동되니 / 曠世相感
내 그리움은 더욱 두텁네. / 予懷冞摯
이는 실로 정신으로 사귀는 것이니 / 實維神交
어찌 옛날과 지금의 간격이 있을쏜가. / 豈間今古

(후략)

이 치제문은 읽으면 읽을수록 명문 名文이고 감동적이다. 특히 ‘같은 시대에 태어나지 못함이 한스러워라. 촛불을 여러 번 바꾸어 켜고 책을 읽으며 서너 번이나 무릎을 치고 감탄하였네.’는 개혁군주 정조,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 꾼 정조 임금이 <논사록>에 얼마나 심취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구절이다.

글을 마치면서 이 시대의 정치가들, 지도자들, 지식인들을 생각하여 본다. 국가와 민족 그리고 국민을 위하여 한 목숨 다 바치겠다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이들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은 고봉 선생의 말씀처럼 의 義일까. 아니면 의義를 가장한 이利일까. 이 시대의 빛과 소금이기를 자처하는 이들이여. <논사록>을 꼭 한번 읽어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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