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와 성혼간의 논쟁, 이황과 기대승 간의 논쟁, 인심도심설
- 2007-09-06 14:57:40 조회 933 추천 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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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이와 성혼간의 논쟁에 대해서 (1)기호학파 (畿湖學派) 이이(李珥)의 성리학설(性理學說)을 계승한 일단의 학자들에 대한 총칭. 이들이 주로 경기(京畿)와 호서(湖西)에 살았기 때문에 이황(李滉) 및 그의 문인들과 구별하여 기호학파라 하였다. 여기에 속한 학자로는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김창협(金昌協)·송시열(宋時烈)·송익필(宋翼弼) 등이 대표적이다. 이이는 서경덕(徐敬德)의 기일원론(氣一元論)과 기대승(奇大升)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등의 영향을 받아 그것을 정리하고 이기일원론적 이원론(理氣一元論的二元論)을 확립하였는데, 곧 우주의 본체는 이기이원(理氣二元)으로 구성되었으나, 이와 기는 공간적·시간적으로 분리 내지 선후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기는 최초부터 동시에 존재하며 영원무궁하게 떨어질 수 없고, 도덕적 가치에 있어서도 인간심리의 근본이 이와 기의 두 가지 근원이 아닌 일원적이라 하였다. 이러한 이이의 학설을 계승한 김장생은 최명룡(崔命龍)·정경세(鄭經世) 등과의 논쟁을 통해 이이의 성리설을 변론하였고,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에서 이덕홍(李德弘)·기대승의 주장을 이이의 관점에서 논박하였다. 그는 이러한 변론을 통해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과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등에 관한 이이의 성리학설을 재천명하고, 이를 계승하여 그의 문인에게 전수함으로써 기호학파의 사상적 기초를 다졌다. 그의 아들인 김집은 부친의 성리설을 계승하여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고수하였다. 또 《신독재유고(愼獨齋遺稿)》에서 권근(權近)이나 이황이 이기를 분리시킨 것을 비판하고 이이의 성리설을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김창협의 경우는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이이의 학통을 이었지만, 학문적 경향은 이황과 이이 양쪽을 모두 비판적으로 흡수하여 절충적 이론을 내놓았다. 즉 그는 《농암속집(農巖續集)》에서 주자와 이황이 사단칠정을 주리·주기로 구분한 것에 대해 동의하면서, 이기의 발(發) 문제에 있어서는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에 찬성하였다. 그리고 이이의 적통(嫡統)으로 기호학파의 주류를 형성한 중심인물인 송시열은 노론의 영수로서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논박하고 이이의 성리설을 변호하였는데, 이를 조작이 없는 것, 기를 운용작위(運用作爲)하는 것이라는 전제 아래 영남학파의 이발기수설(理發氣隨說)을 반박하였다. 그는 영남학파의 입론 근거가 된 《주자어류(朱子語類)》에서의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는 말이 주자의 말이 아님을 확신하고서 영남학파의 입론이 잘못되었음을 밝히고자 하였고, 이황·기대승·성혼(成渾)은 물론 이이에 대해서도 더러 오류가 있었음을 지적하였다. 그는 주자학의 신봉자로 심오한 이론을 전개하였으나, 강한 이단의식으로 견해가 다른 학설을 배척하는 등의 배타적인 면모를 보였다. 또 송익필은 《태극문(太極問)》에서 태극과 동정(動靜)과의 관계에 대해 <동정을 하지 않으면서도 그 가능성을 함유한 것을 태극, 동과 정의 양단이 순환하여 그치지 않는 것 즉 동정하는 것은 기, 또 그 동정의 소이(所以)를 태극>이라 하여 이이가 주장한 <발지자(發之者)는 기, 소이발자(所以發者)는 이다>에 동의하였다. 이들은 기호지방의 불안정한 지주·관료층을 대변하며, 현실문제에 있어서 타학파보다 민감하였다. (2)성혼(成渾 1535∼1598(중종 30 ∼ 선조 31) 조선 중기 성리학자. 자는 호원(浩原), 호는 묵암(默庵)·우계(牛溪). 본관은 창녕(昌寧). 서울 출생. 현감 수침(守琛)의 아들로 1551년(명종 6) 생원·진사의 양장(兩場) 초시에 모두 합격하였지만 복시에 응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해 백인걸(白人傑)의 문하에서 《상서(尙書)》를 배웠다. 54년 같은 고을의 이이(李珥)와 평생지기가 되었으며, 68년(선조 1) 이황(李滉)을 만나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해 경기감사 윤현(尹鉉)의 천거로 전생서참봉(典牲署參奉)에 임명되고, 69년 적성현감(積城縣監) 등에 제수되나 사양하였고, 조헌(趙憲) 등 사방에서 모여든 학도들의 교훈에 힘썼다. 72년 이이와 9차에 걸쳐 서신을 주고 받으면서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하였다. 선조의 속된 관직 제수에 사임의사를 나타내다가 81년 사정전(思政殿)에 등대(登對)하여 학문과 정치 및 민정에 관하여 진달하였으며 왕의 특은(特恩)으로 미곡을 받았다. 83년 이조참판에 특배되었고, 뒤에 동인들이 득세하여 그를 공격하므로 자핵상소(自劾上疏)를 올렸고, 87년에는 자지문(自誌文)을 지었다. 이이가 죽은 뒤에는 서인 가운데 중진 지도자가 되었다. 91년 《율곡집(粟谷集)》을 평정하였다. 죽은 뒤 기축옥사와 관련되어 삭탈관직되었다가, 1633년(인조 11) 복관사제(復官賜祭)되어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81년(숙종 7) 문묘에 배향되었지만 89년 한때 출향(黜享)되었다가 94년 다시 승무되었다. 저서로 《우계집》 《주문지결(朱門旨訣)》 《위학지방(爲學之方)》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 2. 이이와 기대승간의 사단칠정논쟁과는 무엇이 다른지? (1) 이이(李珥 1536 ~ 1584) 조선 중기의 학자·정치가. 본관 덕수(德水). 자 숙헌(叔獻). 호 율곡(栗谷)·석담(石潭). 시호 문성(文成). 강릉 출생. 사헌부 감찰을 지낸 원수(元秀)의 아들.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 1548년(명종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22세에 성주 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고, 다음해 예안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 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 때 임명된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 예조·이조의 좌랑 등의 육조 낭관직, 사간원 정언·사헌부 지평 등의 대간직, 홍문관 교리·부제학 등의 옥당직, 승정원 우부승지 등의 승지직 등을 역임하여 중앙 관서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아울러 청주 목사와 황해도 관찰사를 맡아서 지방의 외직에 대한 경험까지 쌓는 동안, 자연스럽게 일선 정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하였고, 이러한 정치적 식견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40세 무렵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동안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 사단칠정 인심도심설(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76년(선조 9) 무렵 동인과 서인의 대립 갈등이 심화되면서 그의 중재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더구나 건의한 개혁안이 선조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 율곡리로 낙향하였다. 이후 한동안 관직에 부임하지 않고 본가가 있는 파주의 율곡과 처가가 있는 해주의 석담(石潭)을 오가며 교육과 교화 사업에 종사하였는데, 그동안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술하고 해주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건립하여 제자 교육에 힘썼으며 향약과 사창법(社倉法)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산적한 현안을 그대로 좌시할 수 없어, 45세 때 대사간의 임명을 받아들여 복관하였다. 이후 호조·이조·형조·병조 판서 등 전보다 한층 비중 있는 직책을 맡으며, 평소 주장한 개혁안의 실시와 동인·서인 간의 갈등 해소에 적극적 노력을 기울였다. 이무렵 《기자실기(箕子實記)》와 《경연일기(經筵日記)》를 완성하였으며 왕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지어 바치는 한편 경연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활발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이이의 개혁안에 대해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취함에 따라 그가 주장한 개혁안은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으며, 동인·서인 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면서 그도 점차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때까지 중립적인 입장를 지키려고 노력한 그가 동인측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이어서 동인이 장악한 삼사(三司)의 강력한 탄핵이 뒤따르자 48세 때 관직을 버리고 율곡으로 돌아왔으며, 다음해 서울의 대사동(大寺洞) 집에서 죽었다. 파주의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고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과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전국 20여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1) 이이의 정치사상 이이가 관직 생활을 시작한 명종말~선조 초는 명종대에 정치를 좌우한 척신이 제거되고 새로운 정치 세력이 부상한 정치적 변동기였다.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가 죽자 윤원형(尹元衡) 등 그간 정사를 전횡한 권신이 차례로 쫓겨나고, 을사사화 때 죄를 입은 사람들이 신원되는 등 정세가 일변함에 따라 사림이 정계에 복귀하기 시작하였고, 곧이어 선조가 즉위하자 사림의 정계 진출은 더욱 본격화되어 그동안 훈척정치 하에서 이루어진 폐정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방안이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중앙의 고위 관직을 상당 부분 차지한 구신(舊臣)과 삼사(三司)를 중심으로 포진한 사림이 대치한 정국의 구도 속에서 구체제 인물에 대한 처리 방식을 놓고 사림간의 견해 차이가 드러났는데, 강온의 입장 차이에 따라 동인과 서인으로 붕당이 갈렸다. 이이는 처음에는 훈척으로부터 사림 세력을 보호하기 위해 사림의 정치 집단인 붕당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주장하였으나, 이 때에 사림이 분열하자 붕당의 지나친 분파 활동이 수반하는 폐단을 경계하며 사림의 결속을 도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분열된 사림의 결합을 위한 그의 노력은 치열해져 가는 정쟁(政爭)의 격화 속에서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그 자신마저 동인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그의 붕당관은 그가 가진 시국관과도 무관하지 않다. 당시 가장 시급한 문제는 훈척정치 아래에서 파생된 많은 사회적 모순과 폐정을 개혁하여 민생고를 해결하는 일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위해서는 이제 막 정권 담당층으로 자리 굳힌 사림의 총력을 결집시킬 필요성에서 그 분열과 소모적인 논쟁을 경계한 것이다. 자기가 살던 16세기의 조선 사회를, 건국 뒤 정비된 각종 제도가 무너져 가는 ‘중쇠기(中衰期)’라고 진단하고서, 시급한 국가의 재정비를 위해 일대 경장(更張)이 요구되는 시대라고 판단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변통(變通)을 통한 일대 경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동호문답》 《만언봉사》 등의 저술을 통하여 안민(安民)을 위한 국정 개혁안을 선조에게 제시하였는데, 이것이 ‘경장론(更張論)’이다. 《만언봉사》에 의하면 ‘정치에 있어서는 때를 아는 것이 소중하고 일에 있어서는 실질적인 것에 힘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때에 알맞게 한다(時宜)는 것은 때에 따라 변통을 하고 법을 마련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시대가 바뀌면 법제도 맞지 않기 때문에 현실에 맞게 제도를 개혁해야 하며, 이러한 변통을 통해 경장이 이루어져야 안민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가 당시 조선 사회를 중쇠기로 파악한 구체적 증후로서 지배층의 기강 해이와 백성의 경제적 파탄을 들었는데, 그 원인은 각종 제도의 폐단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국가의 재정비를 위해서는 마땅히 잘못된 제도를 경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경장의 구체적인 방법은 국가의 통치 체제 정비를 통해 기강을 확립하고, 공안(貢案)과 군정(軍政)등 부세(賦稅)제도의 개혁을 통해 백성의 고통을 덜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밖에도 서원향약(西原鄕約)·해주향약(海州鄕約)·사창계약속(社倉契約束) 등을 만들어 향약과 사창법을 실시함으로써 향촌에서의 농민 생활 안정과 사족 중심의 향촌 질서 유지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결국 그는 이러한 방법으로 안민을 이루어 중세 사회의 동요를 막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경장론은 동·서인의 분쟁 격화와 선조의 소극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당대에는 거의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그의 정치사상은 시의를 쫓아 실공(實功)과 실효를 강조한 현실적 면모를 보이는데, 진리란 현실 문제와 직결된 것이고 그것을 떠나서 별도로 구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 점에서 일관되게 주장한 이기론, 즉 이(理)와 기(氣)를 불리(不離)의 관계에서 파악한 율곡 성리설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2) 이이의 철학사상 16세기 전반기에는 성리학에 대한 깊은 연구 결과로 이기론·사단칠정론·인심도심설 등 이기심성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표출되어 이를 둘러싼 논쟁과 학문적 심화 과정을 통해 조선 성리학이 정착되었다. 이황과 기대승(奇大升)간의 사칠논쟁, 이를 둘러싼 성혼과 이이와의 우율논변(牛栗論辨)이 벌어지고, 서경덕과 이황이 각기 기(氣)와 이(理)를 둘러싸고 학설 상의 차이를 보이는데, 이이는 이들의 주장을 아우르며 독특한 성리설을 전개하였다. 이황은 이기론에 있어서는 기뿐만 아니라 이도 발한다는 이기호발설을 견지하여 ‘이발이기수지 기발이이승지(理發而氣隨之氣發而理乘之)’를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견해는 사단칠정론에도 그대로 이어져 순선(純善)인 사단(四端)은 이발(理發)의 결과이고 유선악(有善惡)인 칠정(七情)은 기발(氣發)의 결과이므로, 결국 사단과 칠정을 별개로 취급하여 ‘사단대 칠정’논리를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이는 이발을 인정하지 않고 ‘발하는 것은 기이며 발하는 까닭이 이’라고 하여 ‘기발이이승지’의 한 길(一途)만을 주장하면서 사단칠정이 모두 이것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단지 칠정은 정(情)의 전부이며, 사단은 칠정 중에서 선한 것만을 가려내 말한 것이라고 하여 칠정이 사단을 포함한다는 ‘칠정포사단’의 논리를 전개하여 기대승의 사단칠정론에 찬동하였다. 이이의 경우 이와 기는 논리적으로는 구별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사물에 있어 이는 기의 주재(主宰)역할을 하고 기는 이의 재료가 된다는 점에서 양자를 불리(不離)의 관계에서 파악하고, 하나이며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이들의 관계를 ‘이기지묘(理氣之妙)’라고 표현하였다. 이들이 이런 사상을 갖게된 현실적 배경을 살펴보면, 이황의 경우 이이보다 35년 연상으로 훈척정치하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기를 살면서 타락한 정치 윤리와 도덕을 바로잡기 위해서 기보다는 이, 칠정보다는 사단, 인심보다는 도심에 역점을 두어 선(善)을 지향하는 이 위주의 이기이원론적 사고방식을 취한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이이의 경우, 정권 담당층이 훈척에서 사림으로 교체되는 등 개선된 정치 여건 속에서 시급한 민생 문제 해결을 위해 현실에 적극 참여하고 개혁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의리와 실사(實事)가 결합되고 이와 기가 통합된 일 원론적 사고방식을 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이이의 이기론은 다양한 현상(氣)속에 보편적 원리(理)가 존재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이가 현실 속에서는 구체적 기에 의해 규정되고 따라서 보편적 이는 구체적인 변화상을 떠나서는 추구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가 주장한 경장론의 변통논리와 일맥 상통한다. 이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변화하고 제한적인 기(氣局) 속에는 항상 보편적 이(理通)가 존재한다는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제시하였다. 이를 서경덕의 주기론과 관련하여 살펴보면, 서경덕의 주기론에 대해 이이는 그가 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기불리를 주장하였다는 점에서는 동의하지만, 서경덕이 궁극적 존재를 기, 즉 태허지기(太虛之氣)로 인식한데 대해서는 비판을 가하여 궁극적 존재는 태허지기가 아니라 바로 이, 즉 태극지리(太極之理)라고 주장하여 이의 중요성을 동시에 부각시켰다. 결국 이이는 서경덕의 기 위주의 주기론에 대해서는 이의 중요성을 들어 비판하고, 이황의 이 위주의 이기이원론 이기호발설에 대해서는 기의 중요성과 이기불리를 들어 기발일도설(氣發一途說) 이기지묘를 주장하였으니, 이이는 서경덕과 이황 등 당대 성리학자의 상이한 주장을 균형있게 아우르며 그의 독특한 성리설을 전개시켜 나갔다고 하겠다. 3) 기대승 (奇大升 1527 ∼ 1572 (중종 22 ∼ 선조 5) 조선시대의 문인·서예가.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峰). 본관은 행주(幸州). 나주 출생. 1549년(명종 4) 사마시(司馬試)에, 58년(명종 13)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공조참의(工曹參議)·대사간(大司諫)까지 이르렀다. 사승(師承)한 바 없이 스스로 학문에 힘써 널리 고금(古今)에 통했으며 특히 이퇴계(李退溪)와 12년에 걸쳐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논했던 당대의 유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그와 이행(李荇)·신광한(申光漢)·심수경(沈守慶)·심희수(沈喜壽) 등 5명이 쓴 것들에서 시격(詩格) 및 필법이 다 잘된 것을 추려 모아놓은 《좌해쌍절(左海雙絶)》이라는 것이 있다. 《근묵(槿墨)》에 실린 해행(楷行)으로 쓴 시고(詩稿)를 보면 조맹부체로 썼는데 정성스럽고 조심스러운, 그러면서도 담담한 서풍(書風)이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고봉집》 15책과 《논사록(論思錄)》 《주자문록(朱子文錄)》 4책 등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憲). 고봉(高峯) 기대승은 기묘사화가 있는 지 8년 후에 전라남도 광주(소고룡리 송현동제)에 태어났다. 그의 숙부는 참신한 사림파의 한 사람으로서 두 번의 귀양 끝에 교살당한 기묘명현이었다. 그의 부친은 아우의 죽음을 보고 식솔들을 데리고 광주에 거처를 정한 다음 천거된 벼슬도 사양한 채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의 고조인 건(虔) 역시 세조 때의 절의파 인물로 추앙받아온 터이다. 이런 절의의 가정적 분위기 속에서 기대승은 남다은 명민과 재질로 학문연마에 몰두하여 스무 살 이전에 이미 성리학에 일가견을 이루었다. 기대승은 감수성이 예민한 열라홉 살 때 을사사화 목격하였다. 이상의 세계를 헤매던 그는 이 피비린내 나는 권력다툼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학고 두문불출하여 '자경설(自警說)'을 지어 스스로를 경계함과 동시에 행동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는 스물세 살 때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곧이어 치러진 알성시에서는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이우는 성적이 불량해서가 아니라 성적이 너무 좋아서 일부러 낙방시켰다고 한다. 사림파의 반대세력이었던 윤원형의 기묘명현의 후예를 등용하지 않으려는 음모였으리라. 그의 가문내력으로 보아도 그렇지만 이렇게 직접적인 피해까지 몸소 겪은 만큼, 이후 기대승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권신들의 정횡에 철저히 항거하는 한편 이상에 충실하려는 사림의 태도를 분명히 하였다. 어쨌든 기대승은 서름한 살 때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관이 된 후 사정(司正), 대사성을 거쳐 대사간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는 사정으로 있을 때 신진사류의 영수로 지목되어 훈구파에 의해 사직되는 불운을 겪었고, 대사성으로 있을때는 영의정 이준경과의 의견충돌로 인하여 해직당하는 쓰라림을 맛보았다. 그후 다시 대사성으로 복직되었으나 사퇴하였고, 부제학으로 복직되었을 때도 또한 사퇴하였다. 이 출사기간 동안 그는 기묘사화에 희생된 조광조, 이언적의 추증을 건의하는 용기를 보였다. 기대승은 정치가로서보다는 학자로서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퇴계와의 사이에 벌어진 '사단칠정논쟁'은 조선후기의 성리학을 주리파로 주기파로 나누는 연원이 되었고, 또 율곡과 우계와의 논쟁도 이에서 발단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작 논쟁의 당사자였던 퇴계와 고봉은 서로 예의를 갖추어 정중하게 대하였으며 서로가 묻고 배우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퇴계가 고봉보다 26년이나 연상이었지만 퇴계는 그를 제자로서보다는 학우로 대하였으며, 고봉은 퇴계를 스승으로 대하였다고 한다. 삼십대 초반의 청년 기대승은 오랫동안 명성을 들어왔고 또 서신으로 학문적 논쟁을 벌였던 퇴계를 직접 만나보고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퇴계가 학자의 길을 걷기 위해 안동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는 광나루까지 퇴계를 전송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한강은 도도히 쉼없이 흐르는데 선생의 가심을 어찌 말리랴 모랫가 머뭇거리며 돛 당기는 곳에서 이별의 슬픔 헤아릴 수도 없네" 앞에서 말한 바와 마찬가지로 기대승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정치의 이상에 충실하려는 사림의 태도를 분명히 하였다. 대의 명분에 어긋나는 일을 저지르는 사람과는 그가 누구이든간에 배척해 마지않았다. 공의전의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에는 심지어 퇴계의 판단까지도 뒤집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결국 조정에서 빈번한 마찰을 불러일으켰고 그 결과 그는 사직과 귀향을 되풀이해야 했다.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을적에도 고봉은 그 직을 사하고 귀향하여 '낙암(樂庵)'이라는 거재를 짓고, 후진을 양성하면서 학문에만 종사하고자 한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름바 변무주청사의 일로 소명을 내렸던 까닭에, 기대승은 하는 수 없이 나가 수 개월 동안 대사간 자리에 있다가 곧 사퇴하고 귀향을 서둘렀다. 그러나 불행히도 도중에서 얻은 병으로 그는 귀향조차 다하지 못한 채 목숨을 읽게 되니 그의 나이 겨우 마흔다섯이었다. 그는 죽음에 임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명이 길고 짧은 것,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어려서부터 글읽기에 힘썼고 드디어 성현의 학문에 뜻을 모았다, 중년 이래도 겨우 얻은 바 있으나 공부가 독실하지 못하여 항상 마음먹음 바에 부응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만일 임하(林下)에서 몇 년만 더 학문을 강구할 수 있었다면 다행이었을텐데, 병이 들었으니 이를 어찌할꼬?" 주기론(主氣論)의 입장에서 이황과 '사단칠정논쟁'을 벌여 그의 관점을 완화 시켰다. 이황은 이(理)개념을 보편이념으로 삼아 그것이 물질적 세계 밖에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리하여 이것을 도덕규범의 근원으로 삼음으로써 봉건윤리의 절대성을 합리화하였다. 그러나 기대승은 도덕성이란 칠정(七情)이 현실 속에서 도덕규범과 합치될 때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유교적 정신에 투철한 그의 통치이념을 묶어 놓은 책이 바로 <논사록>이다. 4) 사단칠정(四端七情) 4단이란 맹자가 말한 것으로 인간 본성이 선함을 설명하는 예이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측은지심 惻隱之心),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불의를 미워하는 마음(수오지심 羞惡之心), 사양하는 마음(사양지심 辭讓之心),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시비지심 是非之心)을 말한다. 7정이란 예기(禮記)에 나오는 용어로서 희노애구애오욕(憙怒哀懼愛惡欲)등 인간의 감정을 통틀어 일컬은 것이다. 즉 4단이 도덕적인 감정이라면, 7정은 일반적인 감정(욕망까지를 포함하는 전반적인 것)이다. 5) 조선 중기 기대승과 이황의 사단칠정논쟁 사단칠정논쟁이란 조선 명종 때인 1559년부터 성리학자 퇴계 이황 선생과 고봉 기대승 선행이 8년간 서한을 주고받으면서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해 논쟁을 벌인 것. 원래 주자(朱子)는 '이(理)'란 우주 만물의 근원이 되는 이치로서 '기(氣)'의 활동 근거가 되는 것이고, '기(氣)'란 만물을 구성하는 재료로서 사물을 낳는 도구라고 설명하였다. 4단7정(四端七情) 논쟁은 퇴계 이황이 정추만이 지은 <천명도설(天命圖說)>의 일부 구절을 수정하면서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하자, 고봉 기대승이 퇴계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이황은 '4단은 이(理)가 발현한 것이고 7정은 기(氣)가 발현한 것이다(四端理之發, 七靑氣之發)'고 하여, 선악이 섞이지 않은 마음의 작용인 4단은 이(理)가 발현한 것이고, 인간감정의 총칭인 7정은 기(氣)가 발현한 것이라고 구분하고(理氣互發說), 이(理)를 기(氣)의 우위에 삼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를 주장했다. 이에 기대승은 이황에게 편지를 보내 인간감정인 4단과 7정은 칠정이 4단의 범위를 포함하고 있으며, 인간감정의 발현에 理와 氣를 구별할 수 없고, 理와 氣가 함께 작용하여 발현된다는 '이기공발설(理氣共發說)'을 주장했다. 이 논쟁은 1559년부터 약 8년간이나 지속되었는데, 후에 퇴계의 입장을 지지하는 우계 성혼과 그에 반대하는 율곡 이이 사이의 논변으로 전개되었으며, 급기야는 조선 성리학자 대부분이 이 논의에 참가함으로써 '이기호발(理氣互發)'을 주장하는 퇴계 계열의 '주리파'와 '기발일도(氣發一途)'를 주장하는 율곡 계열의 '주기파'의 논쟁으로 확대되었다. 4단7정에 대한 논란은 인간의 마음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이끌어 냈으며, 조선 시대 성리학에 있어서 심리적 인성론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3. 인심도심설은 무엇인지? (1)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성리학의 심성론(心性論)에서 심(心)의 현상을 인심과 도심으로 나누어 설명한 이론으로 사람의 마음이란 매우 오묘한 것이어서 그 실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마음에 대한 관심은 오랜 것으로 보이며 인심 도심설의 문제도 그 중의 하나이다. 중국 철학사에서 인심도심설에 대한 문제가 나타난 것은 중국의 고전인 《서경》의 기록에 따르면 요순시대라고 본다. 그뒤 《논어》나 《순자》와 같은 책에서 인심도심에 관련된 구절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 해석은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고, 11세기 송나라의 주자(朱子)에 이르러서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사서(四書) 중의 하나인 《중용》의 머릿글에서 인심도심의 문제에 의의를 부여하고 그 철학적인 해석을 시도하였다. 주자에 의하면, 인심이란 대체로 인간의 신체적 기운에서 나타나는 것이요, 도심이란 선천적인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마음을 비추어볼 때 순수하게 도덕적인 것은 도심이요, 그 자체로서는 부도덕한 것은 아니나 신체적인 기 운에 따라 부도덕으로 흐를 위험성이 높은 것은 인심이다. 사람의 마음이 원래는 한마음이지만 그것이 작용할 때 의리를 따라서 나타나면 도심이요, 신체상의 어떤 욕구를 따라서 나타나면 인심인 것이다. 따라서 도심에 대해서는 선하다고 말할 수 있고, 인심에 대해서는 선한 경우와 악한 경우가 같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도심이란 곧 도덕적인 마음이다. 이것이 순수하게 착한 마음이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타고날 때부터 착하다고 보는 것 (性善說)에 근거를 둔다. 그러므로 인간이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 부끄러워하는 마음, 사양하는 마음, 그리고 옳고 그름 을 구별하는 마음이 있는 이상, 도심은 이러한 마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도심은 성질상 매우 미묘한 것이어 서, 마음의 깊은 곳을 잘 살피지 않으면 도심을 깨달을 수가 없고, 그러한 점에서 욕심에 흐르기 쉬운 것이다. 이러한 도심에 비하여 인심이란 그 자체를 가리켜 부도덕한 마음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항상 부도덕으로 흘러갈 위험성 이 있는 마음이다. 즉, 인심의 성질은 위태로운 것인데, 그 이유는 인간에게 감각적인 욕구는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이 며, 그런 만큼 맹목적이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경》에서는 ‘도심은 희미하다(道心惟微)’라 하고 ‘인심은 위태 하다(人心惟危)’라 하였다. 한국철학에서 인심도심설의 대표적인 인물은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이다. 이황은 ‘인심은 칠정(七情)이 되고 도심은 사단(四端)이 된다’라고 말함으로써 인심도심설의 문제를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의 문제와 관련시키고 있다. 그리고 인심을 인욕의 다른 이름으로 부르면서 인심을 나쁜 측면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이이는 47세 되던 1582년 <인심도심도설>이라는 글과 그림을 그려 임금에게 올리면서 인심도심설의 문제를 논리 적이고 명석하게 정리하였다. 이이는 사람의 기질이란 고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여, 인간의 도덕성을 함양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황과는 달리 이이는 사단이 도심인 것은 가능하지만 칠정은 인심과 도심을 합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이는 인심과 도심은 서로 시작과 끝의 관계가 있다는 이른바 ‘인심도심종시설(人心道心終始說)’을 주장하고 있다. 즉 인심과 도심은 서로 쌍립하여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 인심이던 것이 나중에 도심이 되고 처음에 도심이던 것이 나중에 인심이 된다는 것으로, 인심과 도심의 상호작용을 밝혀주는 의미가 된다. 현대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인심은 감성적인 것이고 도심은 이성적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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