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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30일 토요일

내면적 수양과 현실 정치 사이에서

[인문학 채팅] 2부 3장. 내면적 수양과 현실 정치 사이에서

3. 내면적 수양과 현실 정치 사이에서
: 리의 딜레마 – 이황 (李滉, 1501-1570)과 이이 (李珥, 1536-1584)

주자가 남긴 숙제 : 사단으로서의 정, 칠정으로서의 정
앞서 우리는 유교가 성선설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살펴보았고 주희에 이르러 그러한 성선설이 우주론적 차원에서 정교하게 이론화되는 경위도 살펴보았다. 주희는 인간의 선한 본성(性 즉, 인의예지)이 네 가지 단서(四端)를 통해 유추될 수 있다는 맹자의 이론을 발전시켰는데 이러한 네 가지 단서는 한편 情(감정)이라고도 불린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주희는 앞서 말한 四端을 情이라고 부른 반면 또 다른 의미로도 情을 말했던 것이다. 주희가 말한 또 다른 情이란 바로 禮記에 나오는 희노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 ; 즐거움, 노여움, 슬픔, 두려움, 사랑, 미워함, 욕망) 등의 일곱 가지 감정(七情)을 일컫는다.
성 -> 정(사단)
성 -> 정(칠정)
주희는 情이라는 것을 때로는 四端의 의미로, 또 때로는 七情의 의미로 사용했기 때문에 이후 유학자들, 특히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혼동을 불러 일으켰다. 그런데 이 혼동은 그냥 넘어가기 힘든 것이었다. 四端만을 性이 발현된 情이라고 볼 경우엔 문제가 없었으나 七情도 성이 발현된 情이라고 볼 경우엔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사단은 언제나 선하지만 七情이라고 하는 인간의 감정은 항상 선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선한 본성이 발현되어 생기는 情이 선하지 않을 수 있는 七情이 될 수도 있다는 명제는 주자학을 신봉하던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당혹감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은 주자가 남겨 놓은 성리학의 숙제였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바로 이렇게 인간의 선한 본성과 관련된 성리학의 숙제를 理와 氣라고 하는, 주자에 의해 정교하게 체계화된 설명틀을 가지고 해결하고자 했다. 이러한 노력은 매우 치열한 논쟁을 통해 발전되었는데 사단과 칠정의 문제를 리와 기를 통해 해결하고자 했기 때문에 그 논쟁을 사칠리기논쟁, 혹은 그냥 사칠논쟁이라고 부른다.
퇴계이황
퇴계 이황

서울대 총장과 대학원생 사이의 치열한 논쟁
이 논쟁은 이황과 기대승 사이의 논쟁으로부터 촉발되어 이후 조선조를 통틀어 두고두고 반복되고 발전되었다. 오늘날로 치면 서울대 총장 정도에 해당하는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58세의 노숙한 대학자인 이황에게 서른 두 살 먹은 젊은 학도인 기대승이 당돌하게 문제를 제기했고 거기에 대해 이황은 편견 없이 매우 진지한 자세로 응했던 것이다. 요즘의 시각으로 봐도 보기 드문 열려 있는 토론자세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수 차례의 편지 교환을 통해 이황은 점차 자신의 이론을 다듬어가게 되는데 이들의 문제의식은 10여 년 후 이이와 성혼 사이의 논쟁을 통해 다시 한 번 새롭게 부각된다. 대체적으로 이황의 생각은 성혼의 생각과 닮아 있고 기대승의 생각은 이이와 닮아 있다. 이황은 인간의 선한 본성을 보다 적극적으로 엄격하게 발현시켜 나가야 한다고 실천의 의미를 강조했고 이이는 더욱 정교한 이론적 틀 안에서의 실천을 도모하고자 했다. 두 사람 모두 주자가 남긴 미해결의 과제를 나름의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했고 그러한 노력은 이후 수 백 년에 걸쳐 넘치는 활력을 제공해 조선사상사를 논쟁의 역사로 풍요하게 가꾸는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 유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조를 통해 이와 같은 치열한 논쟁은 여러 가지 정치, 사회적 갈등과 화해의 밑바탕을 이루게 되었다.

이황의 해결 방식 : 모든 것은 원리를 중심으로!
이황은 사단과 칠정에 얽힌 이 같은 문제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즉 “사단은 리(理)가 발하여 기(氣)가 그것을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氣)가 발하여 리(理)가 그것을 타는 것”이라고 하여 사단과 칠정을 각각 리와 기에 연결시켰다. 앞서 주희에 관한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성리학에 있어 리(理)란 우주질서의 원리이자 도덕적 표준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리 그 자체는 순수하게 선할 뿐이다. 반면 리와 함께 하고 있으면서 리를 현실화시켜주는 기는 그 현실적 제약에 의해 순수함과 맑음의 정도에서 차이를 보이게 된다. 태어날 때 우리가 타고나는 기가 얼마나 순수하고 맑으냐에 따라 그 사람의 도덕적 품성이 어느 정도는 결정된다고 하는 다소 결정주의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렇듯 기라고 하는 것은 인간을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게 하는 현실적 제약의 역할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언제나 선한 리(理)와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는 기(氣)가 늘 함께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이다. 리와 기는 분명 구별되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언제나 함께 하지 않으면 그 둘 모두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 인간의 본성은 원칙상으로는 완벽히 선하지만 현실적으로 기의 제약을 받는 한에서 완전한 선을 보장할 수는 없다. 인간의 본성의 이 같은 이중적인 측면 때문에 그것이 발동하여 생기는 정(情)이라는 것도 이중적인 측면을 보이게 된다. 이때 리라고 하는 순수한 선에 주안점을 두어 발동하는 정(情)을 사단(四端)이라고 하고,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는 기에 초점을 두어 발동하는 정(情)을 칠정(七情)이라고 하자는 것이 바로 이황의 해결책이었다. 주희보다 더 엄격하게 리의 절대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황의 해결방식>
성 -> 정(사단) : 理가 발하여 氣가 그것을 따르는 것
성 -> 정(칠정) : 氣가 발하여 理가 그것을 올라타는 것
고봉 기대승
고봉 기대승

기대승의 비판을 받아들인 이론 수정의 결과
처음에는 단순히 “사단(四端)은 리(理)가 발동한 것이고 칠정(七情)은 기(氣)가 발동한 것”이라고 했었는데 이 경우 리와 기를 너무 엄격히 구별하여 마치 리와 기가 따로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폐단이 있다는 기대승의 비판을 받아들여 후에 “사단은 리가 발하여 기가 그것을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리가 그것을 타는 것”이라고 수정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리와 기가 언제나 함께 한다는 성리학의 기본명제에도 충실하게 되면서 리의 순선(純善)함과 기의 선악혼재성을 동시에 드러내어 줄 수 있게 된다.
즉, 인간 본성의 선함을 추론케 해주는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 등의 네 가지 단서들은 리라고 하는 순수하게 선한 것이 먼저 발동한 다음 기의 현실적 제약을 받게 되는 것이고 희노애구애오욕이라는,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는 일곱 가지 감정은 기가 먼저 발동한 다음 리가 그것을 규율하게 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사단을 리와 연결시키면서도 기의 제약을 인정하고 있으며 칠정을 기와 연결시키면서도 리의 규율을 강조하고 있는 이 같은 절묘한 설명은 주희가 남긴 숙제에 대한 훌륭한 해답이 될 수 있었다.
무릇 ‘리(理)가 발동하여 기(氣)가 따른다고 한 것은 리를 주로 하여 말할 수 있다’는 것일 뿐이지 기의 밖에 리가 있다는 말은 아니다. 사단이 바로 이것이다. ‘기가 발동하여 리가 그 기를 탄다’고 한 것은 기를 주로 하여 말할 수 있다는 얘기일 뿐이지 리의 밖에 있는 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칠정이 바로 이것이다.

주자가 남긴 숙제에 대한 멋진 해결
이처럼 사단과 칠정을 각각 리와 기에 연결시키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의 대립항들과도 연결시킴으로써 획일적인 범주화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으며 또한 사단과 칠정의 역동적인 모습을 두루 관조할 수 있게 했다. 리가 먼저 발동하여 기가 그것을 따르게 되는 사단은 원칙적으로 선한 것이지만 기가 탁할 경우 사단조차도 악으로 흐를 수 있다. 예컨대 가난한 사람을 돕고자 재단에 기부하는 행위는 측은지심의 발로로서 원칙적으로 선한 행위이지만 거기에 세금을 면제받기 위한 목적이 개입한다면 순선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칠정은 원칙적으로 기가 먼저 발동한 다음 리가 그것을 주재하는 것이므로 리의 규율을 벗어날 위험이 크지만 리의 규율을 완벽하게 소화해 낸다면 칠정이라는 인간의 감정도 모두 선하게 될 수 있다. 예컨대 일흔 살의 나이에 이른 공자가 드러내는 칠정은 완벽하게 선한 것이다.
이처럼 까마득한 후학의 비판을 수용해 사단과 칠정의 역동적인 변형을 인정하는 융통성을 보이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황이 중점을 둔 것은 역시 사단과 칠정의 준별에 있었다. 사단과 칠정은 결코 하나의 것으로 혼동될 수 없으며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기의 제약을 뛰어넘는 선한 본성의 발현이라는 것이 이황의 일관된 자세였다.
이렇듯 주희가 남긴 성리학의 숙제를 주희보다 더 엄격한 리 위주의 도덕론으로 발전시켜 해결하고자 했던 이황의 구상은 한편으로 또 다른 문제점을 야기하게 된다. 문제는 바로 ‘리(理)가 발동한다’고 하는 부분이다. 앞서 주희에 관한 설명에서 이미 언급되었다시피 리는 무형의 것으로서 움직임이 없고 형태가 없는 것이다. 사물의 형태 및 움직임 등과 연결되는 계기는 바로 기가 담당하고 있었다. 따라서 ‘리가 발동한다’고 하는 명제는 ‘리는 움직임도 없고 형태도 없다’는 성리학의 기본 명제에 배치되게 된다. 무언가 발동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기인 것이지 결코 리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이황의 구상과는 조금 맥을 달리하는 설명을 시도했던 것이 바로 이이였다.
율곡 이이
율곡 이이

이이의 새로운 해결방식 : 사단을 칠정에 포함시켜 버리자
이황이 사단과 칠정을 준별하여 각각 리와 기에 강하게 연결시킨 것에 반해 이이는 사단을 칠정 속에 포함시켜 일원적으로 보고자 했다. 정(情)은 칠정만이 있을 뿐이고 그 가운데 리(理)에 초점을 두어 선한 것만을 추려낸 것을 사단이라고 간주한다. 따라서 주희가 사단을 정이라고 말했을 때도 칠정 가운데 그 선한 부분만 중점을 두어 말하고자 한 것이지 칠정과 구별되는 사단이 따로 있음을 주장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고 해석한다.
<이이의 해결방식>
성 -> 정(=칠정 : 사단은 칠정 가운데 순선한 것)
이 같은 설명은 이황이 주장하는 ‘리(理)의 발동’의 문제점을 해소한다. 이이는 리는 결코 움직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발동할 수 없고 발동할 수 있는 것은 기일 뿐이라고 한다. 즉, 인간의 본성(인의예지)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외부와 현실적으로 접촉함으로써, 즉 기의 발동을 겪음으로써 정(情: 七情)으로 되는 것인데 그 정 가운데 기의 현실적 제약을 극복하고 인간의 선한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칠정(七情)만을 사단(四端)이라고 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 물론 그렇게 기의 발동으로 인간의 본성이 정으로 드러날 때 그 과정을 규율하는 준거점이자 근본 원인이 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황에 있어서는 리가 먼저 발동한 다음 기가 그것을 따르게 되면 사단이 되고 기가 먼저 발동을 하고 리가 규율을 하게 되면 칠정이 된다고 하지만 이이에 있어 리와 기는 칠정이 되는 과정에서 선후의 차이가 없이 동시에 역할을 하게 된다. 이 때 발동하는 역할은 기가 맡고 그 기의 객관적, 윤리적 규범이자 원인으로서의 역할은 리가 맡게 된다는 것이 이이의 설명이다.

원리는 움직일 수 없다. 다만 주재할 뿐이다.
사람의 희로애락(칠정을 간단히 희로애락이라고 하기도 한다.)은 하늘의 춘하추동과 같다. 춘하추동은 기가 흐르고 움직이는 것이고 이 기가 흐르고 움직이게 되는 원인이 바로 리이다. 희로애락도 마찬가지로 기가 발동한 것이고 이 기의 기틀을 타는 것이 바로 리이다. 무릇 형체도 있고 작위도 있으며 움직임도 있고 고요함도 있는 것은 기이고 형체도 없고 작위도 없으면서 움직임에도 있으며 고요함에도 있는 것은 리이다. 리가 비록 형체도 없고 작위도 없지만 이 리가 없으면 기가 근본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형체도 없고 작위도 없으면서 형체도 있고 작위도 있는 것의 주재(主宰)가 되는 것은 리이고 형체도 있고 작위도 있으면서 형체도 없고 작위도 없는 것의 그릇이 되는 것은 기이다.”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 대개 성(性)에는 인의예지신(이것을 오상(五常)이라고 하는데 인의예지에서 신(信)이 하나 추가됐다. 내용파악에는 문제가 없다.)이 있고 정(情)에는 희노애락애오욕(구(懼) 대신 락(樂)이 들어갔지만 내용 파악에는 마찬가지로 문제가 없다)이 있을 뿐이다. 오상(인의예지신) 밖에 따로 성이 있는 것이 아니고 칠정 이외에 다른 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칠정 가운데서 인욕이 섞이지 않고 순수하게 천리에서 나온 것이 바로 사단이다.
이이는 이처럼 ‘리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는 성리학의 전제에 충실하면서 사단과 칠정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사단은 리에만 초점을 두어 말한 것이고 칠정은 리와 기를 동시에 염두에 두어 말한 것이라는 차이점을 가질 뿐이라고 그는 해석한다. 반면에 이황은 사단을 리에만 초점을 두어 파악했고 칠정은 기에만 초점을 두어 파악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리의 규범으로서의 역할은 인정했으며 이런 점에서 성리학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공유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황은 규범의 능동적 역할을 강조하고자 했기 때문에 ‘리의 운동’을 인정하게 되는 무리를 범하게 되었고 이이는 보다 냉정하게 이론적 정합성을 훼손치 않고자 했다는 차이점을 보일 뿐이다.

이황과 이이를 모르면 조선을 논할 수 없다
그런데 이이의 주장에도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황이 지나치게 도덕적 실천을 강조하여 리의 자발성을 인정하게 되는 이론적 누를 범하게 되었다면 반면 이이는 이론의 정합성을 잃지 않은 대신 실천의 의미에서 이황보다 다소 호소력을 잃게 되고 말았다고 볼 수 있다. 도덕적 표준인 리가 스스로 움직여 인간을 규율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떻게 리의 순선함을 드러낼 수 있겠는가 하는 도덕적 실천의 측면에서의 반문이 가능할 수 있다.
이때 이이에 의해 강조되는 것은 인간의 의지(意志)이다. 인간이 주체적 의지를 가지고 현실생활을 영위해 가는 과정에서 지나치고 모자란 것을 그때그때 겪어 나감에 따라 리의 본연의 모습을 체험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이에 있어 악(惡)이란 지나치거나 모자란 것(過不及)이다. 체험의 과정에서 객관적 규준을 세우는 것이 오히려 폭력적일 수 있다는 점에서 보면 율곡이 이 같이 인간의 의지에 의한 체험의 상대적 측면을 고려할 것을 주문한 것은 오히려 더 실천의 의미에서 설득력을 가진다고도 볼 수 있다. 이이도 리의 규범으로서의 역할을 부인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리의 자발성을 인정할 수도 없고 부인할 수도 없는 이러한 딜레마에 마주쳐 이황과 이이는 이같이 서로 미묘한 철학적 차이를 보이게 된다. 엄격한 실천의 의미를 강조한 이황과 이론적 정합성을 잃지 않는 한에서 주체적 실천의 의미를 찾고자 한 이이의 차이는 그 후 인심도심논쟁이나 인물성동이논쟁 등 숱한 논쟁의 실마리 역할을 하게 된다. 두 주자학의 달인들로 말미암아 조선의 성리학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정밀함과 풍부함을 자랑하게 되는데 그 정밀함과 풍부함이 오히려 18 세기 이후 역사의 역동성을 가로막는 장애의 역할을 하게 된다. 과연 이러한 장애를 뚫고 어떤 새로운 사상이 가능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을 되돌아보는 것은 우리에게 남겨진 크나큰 숙제가 아닐 수 없다. 이황과 이이라는 두 거목에 대한 연구는 그래서 더더욱 우리에게 절실하다.


<대화>————————

매일 만나는 이황과 이이
동천: 너 지갑 좀 한 번 꺼내 봐라. 거기 천 원짜리에 이황 얼굴 박혀 있지?
서혁: 뭐 꺼내 봐야 아냐? 천원짜리엔 이황, 오천 원 짜리엔 이이, 만 원 짜리엔 세종대왕이 그려져 있지. 그러고 보니, 조선시대의 이황, 이이, 세종대왕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이라는 평가가 담겨 있는 셈이네.
동천: 세종대왕이 위대한 거야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구. 그렇다면 도대체 이황과 이이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기에 지폐의 표지인물이 됐는지 너 설명 좀 한 번 해 봐라.
서혁: 다른 인물들은 초상화가 없어서 그랬던 게 아닐까?
동천: 모르면 말이나 말 것이지…
서혁: 웃자고 해본 소리야. 그러고 보니 대한민국 지폐 그림을 통해 생각할 거리들이 있구나. 왕들 그림으로 일관성 있게 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 학자들을 그려 넣은 것도 그렇고 조선시대 인물들만 골라 넣은 것도 그렇고 말야. 그런데 이이의 가치가 이황보다 한 수 위인 모양이네. 세종이야 왕이니까 그렇다 치고
동천: 천 원짜리가 더 많이 쓰이니까 그 반대일 수도 있지. 어쨌든 두 분 다 우리 역사에 빛나는 위대한 인물임에는 분명한데 왜 그렇게 그들이 위대한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얘기를 잘 못하는 것 같아. 그 분들은 정치가이자 교육자였지만 무엇보다도 사상가들이었지. 그들의 사상이 왜 중요한가에 대해 상식적인 차원에서라도 한 두 마디 정도는 할 줄 아는 게 대한민국 국민 된 도리 아니겠냐?
서혁: 파시스트 국가주의에 찌든 녀석 같으니. 그냥 상식을 좀 갖추자 하면 될 걸 가지고 무슨 ‘도리’씩이나 거론하고 그러냐? 어쨌거나 문제가 있긴 하지. 중고등학교 때 교과서를 봐도 잘 모르겠거든. 이황이나 이이가 무슨 의미 있는 얘기를 했는지 말야. 기껏 이이의 10만 양병설 정도밖에 모르는 상황이란 말야.
한국화폐

피비린내 나는 사화 속에서 피어난 학문의 향기
동천: 우선 이황과 이이가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는지부터 한 번 얘기해 보자구. 당시가 어떤 때였는지 아냐? 피비린내 나는 사화로 뜻 있는 선비들이 죽어나가던 때였어. 그런 살벌한 칼부림의 한 복판에서도 인간의 선한 본성을 믿고 참된 인간과 올바르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는 거 대단하지 않냐?
서혁: 참된 인간과 올바른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사상가들이 어디 있겠냐? 그런 말 말구 좀 영양가 있는 얘기 좀 해 봐. 조선 초기 사회적 문제에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처했다는 거야?
동천: 유럽의 사상가들이랑 확연히 비교가 되는 측면인데, 조선조의 사상가들은 언제나 현실정치와 관련을 맺으면서 자신들의 사상을 발전시켰거든. 유학이라는 사상체계가 갖는 특징이기도 한데 조선조 초기에는 이런 특징이 아주 긍정적으로 드러난 측면이 많아.
서혁: 텔레비전 드라마 소재로도 많이 나오는 조광조의 개혁이라든가 하는 정치적 활동이 모두 유교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얘기군.
동천: 그래. 말 잘 했다. 조광조는 성리학적 원칙을 너무 성급하게 정치에 반영하려다가 비참하게 죽었어. 그냥 무슨 정치적 권력 다툼을 하다가 죽은 게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바탕으로 그것을 정치적으로 발현해야겠다는 야망을 실현하다 좌절한 거니까 사상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사건이다 이 말씀이야.
서혁: 결국 이황과 이이는 조광조 이후의 성리학자로서 조광조의 죽음과 정치적 좌절을 보면서 뭔가 느끼는 게 있었다 이거네. 지고한 이념만을 내세워서 그걸 섣불리 실현시키려 해서는 안 되겠다는 반성도 했을 테구.
전남 능주의 조광조 유배지에 있는 추모비
전남 능주의 조광조 유배지에 있는 추모비

종교의 질곡으로부터의 탈출
동천: 유럽 근대가 종교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신에 대한 인간의 상대적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이 중심이었다면 조선은 불교로 인해 나라의 기강이 무너진 상황에서 어떻게든 정치 사회적 구심점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현실적 요청이 중심이었던 거야. 그 와중에 지나친 원칙론을 내세우다 희생된 조광조를 되새기며 이황과 이이 등의 후배들이 성리학을 더욱 정교화해야겠다는 자각을 하게 된 거구.
서혁: 불교 신도들은 열 받겠지만, 개인주의적인 불교 교리가 국가체제 수립에 방해가 된 건 사실일 거야. 왕권을 위해 주자학을 발전시킬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필요성도 일단 인정해. 하지만 그렇게 주자학을 발전시킨 결말이 뭐냐구.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탁상공론으로밖에 안 보이는 주리, 주기의 대결이 니가 말하는 정교한 발전의 결과냐?

조선주자학은 공리공론?
동천: 유럽 사상사의 발전과정과 조선사상사의 발전과정을 되돌아 볼 때 고려해야 할 측면이 있어. 좋든 싫든 유럽의 사상사는 지금의 우리를 포함한 현대 세계의 사상사에 고스란히 연결되어 있지만 우리의 조선사상사는 현대와 거의 완전한 단절을 겪었다는 점 말이야. 그런 점에서 조선사상사의 어떤 측면을 얘기하더라도 공리공론으로 보이고 하나마나한 지엽적인 문제들 가지고 쓸데없이 싸운 것처럼 보일 수 있거든. 만약 조선조의 그런 성리학적 문제의식이 지금에까지 연결되고 오히려 유럽사상사가 단절을 겪었다고 한다면 유럽 근대의 문제의식이 오히려 공리공론으로 보일 거야.
서혁: 글세… 사상사적 단절을 겪었기 때문에 공리공론으로 보이는 게 아니라 공리공론이었기 때문에 사상사적 단절을 겪어야 했던 건 아닐까? 뭐 어쨌든 좋아. 조선조 내내 유학사상체계가 일관되게 정치와 사회를 지배했던 사실도 고려해 보면 공리공론이란 비난은 지나칠 수도 있겠군. 조선사상을 얘기할 땐 최대한 당시의 문제의식을 추체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점 인정하지.
동천: 고맙다 고마워…
서혁: 그렇긴 한데 말야. 이황과 이이의 사상이 그냥 머리 속에서 나온 게 아니고 또 일제시대 관학자들이 음해한 것처럼 그렇게 탁상공론이었던 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주리니 주기니 사단칠정이니 하는 그들의 사상이 구체적으로 정치현실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사실이거든.
퇴계를 기리기 위해 세운 도산서원
퇴계를 기리기 위해 세운 도산서원

주리와 주기는 현실적인 문제였다
동천: 이황은 조광조 등의 실패를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지. “정치는 덧없다. 더욱 더 엄격하게 성리학 정신에 입각하여 내면에 충실하자!” 라고 말야. 반면 이이는 “더 깊은 내면의 공부를 통해 진정한 사회적 개혁에 도달하자!”라고 생각했지. 이황은 개인의 수양에 치중한 반면 이이는 개인의 수양을 중시하면서도 사회적 정의를 항상 염두에 두었던 거야. 그런 현실적 입장의 차이가 그들의 사상에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
서혁: 그래서 이황은 좀더 원리 중심적인 주리(主理) 경향을 띠고 이이는 실천을 강조하는 주기(主氣) 경향을 띤 거군.
동천: 그렇지.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주리와 주기의 대립이 그리 심각한 편은 아니었어. 이황과 이이 스스로도 주리와 주기로 자신들을 구분하려 하지 않았구 말이야. 사단과 칠정에 대한 서로의 미묘한 차이 때문에 현실에 대한 시각도 조금 차이가 났었는데 그후 이황과 이이를 계승한 후대 학자이자 정치가들에 의해 그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나고 그게 정치적 당파로 연결되게 되었던 거지.
서혁: 더욱 원칙론에 충실한 이황을 계승한 학자들은 정치적으로도 더 선명성이 높은 당파를 만들게 됐구 현실에 좀 더 민감했던 이이를 계승한 학자들은 정치적으로도 더 현실적인 당파를 형성했다 이 얘기냐?
동천: 이황의 사상체계는 사실 거의 종교적 경지에 다다랐을 정도로 원칙에 충실하고 엄격했어. 그래서 후에 그를 추종하는 선비들이 그의 사상을 따라서 정치적으로도 상당히 엄격한 원칙을 내세우는 영남학파를 이루게 됐던 거구. 이이의 후학들은 그에 비해 상당히 현실적인 기호학파를 형성하게 됐지. 이런 학파의 갈등이 그저 학파간의 갈등에 그친 게 아니라 현실정치노선의 차이로도 드러나게 됐거든.
서혁: 그렇게 원칙에 엄격하게 된 이황과 현실적인 이이의 차이는 알겠는데 그렇게 된 배경도 뭔가 있을 것 같아 보여.
동천: 이황이 이이보다 35세 연상이야. 이황의 시기가 정치적으로 훨씬 혼탁했었어. 국사책에도 많이 나오는 이른바 훈척세력이 정치를 아주 자기들 편리한대로 했거든. 성리학을 내세웠던 사림들이 많이 죽거나 귀양가기두 했구 말야. 그런 참담한 현실을 겪으면 겪을수록 더욱 원칙에 충실해지려는 게 사상가들의 특성 아니겠냐? 반면 이이의 경우 몇 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상대적으로 사림들 세력이 정치 일선에 많이 진출해서 그나마 이황 때보다는 좀 나은 형편이었지. 이황 때보다는 현실정치노선을 드러내기가 좀 더 유리한 상황이었단 얘기야.
서혁: 음… 학교에서 배운 이이의 십만양병설이 다시 떠오르는군. 이황과 이이의 입장 차이에 그런 맥락이 있다는 건 이제 알겠어.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이론이 탁상공론이라는 느낌이 들거든. 그들의 철학이 양반 사대부들만의 기득권적 사유에 불과하지 당시 민중들의 삶과는 밀접한 관계를 갖지 못한 건 아니냔 말이야.

조선 유학의 엘리트주의
동천: 솔직히 말해 철학이라는 게 동서양을 막론하고 엘리트들의 전유물 아니겠냐? 이황과 이이의 사상에도 엘리트적인 측면이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게 치명적인 약점은 될 수 없다고 봐. 이황과 이이가 고민했던 문제는 분명 인간 일반의 문제였거든. 그걸 실천하는 현실적 조건이 양반에게 유리했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말야. 어쨌든 일반 시민들을 정치의 주체로 상정하는 민주주의와는 다른 맥락에서 그들이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도모했던 것은 분명해.
서혁: 사실 이래서 나는 조선유학을 도저히 높게 평가할 수가 없어. 서양의 근대철학은 일단 엘리트의 전유물이었다 해도 사회적 신분을 넘어서 보편적 인간에게 빛이 되는 사유를 담고 있다는 거지. 어쨌거나… 당시의 이황과 이이의 사상이 백성 전체에 적용되는 철학이기를 바라는 건 무리가 아니겠어?
동천: 당시의 시대 조건을 너무 무시하는군. 성리학에 충실했던 초기의 재야 소장학자들을 일컬어 사림이라고 그러거든. 그들이 정치개혁을 추진하다 입은 참화를 사화라고 하고 말야. 그렇게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는 의지가 있는 인물들이었지. 그들의 고민은 나 하나만 잘 살기 위한 고민이 아니라 백성 전체, 인간 전체가 인간답게 되기 위한 그런 고민이었다구. 이황과 이이는 노예매매라든가 참혹한 식민지 개척에 대해서는 아무런 발언권도 행사하지 않은 채 고상한 형이상학과 인식론을 펼치기에만 급급했던 서양 근대 철학자들보다도 오히려 나으면 나았지 못할 게 없다는 게 내 생각이야.
서혁: 이황이나 이이의 철학이 현실적인 측면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면서도 동시에 보편성을 띠었다는 점은 인정해주지. 하지만 왕권을 중심으로 귀족 정치가 이루어졌던 조선시대라면 몰라도 지금 그들의 철학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철학과 정치를 아우른 성리학
동천: 왕정을 전제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사상은 여전히 두 가지 측면에서 의미 있다고 봐. 하나는 철학적인 측면에서이고 또 하나는 정치적인 측면에서지. 철학적 측면에서 보편을 놓치지 않으려 했고 정치적인 측면에서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고자 했었거든.
서혁: 철학과 정치라…
동천: 이황이나 이이 모두 주희의 계승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성리학의 기본모토인 ‘인간과 자연을 일관적으로 생각하자’는 입장에 충실했지. 환경문제나 도덕의 문제에 관해 얻어들을 얘기가 많다 이거야.
서혁: 또 환경 얘기… 그 얘기는 지겹다. 그렇다면 정치문제는?
동천: 옛날 영국정치에서 토리당과 휘그당의 대립과 화해의 과정을 민주주의의 모범으로 우리가 존중하는 것처럼 이황과 이이로 촉발된 붕당정치에도 그렇게 존중할 만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건강하고 진실한 모습을 보여줬다고 평가해 줘야 할 것 같아. 그런 현실 정치적인 측면에서의 건강함의 밑바탕엔 성리학적 철학이 자리잡고 있었고 말야.
서혁: 이황은 정치 안 했다며?
동천: 직접 정치를 하지 않으면서도 정치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 신기하게 보이겠지만 그게 또 성리학이 지닌 현실적 강점이기도 해. 임금이나 정치권이 언제나 재야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거든.
서혁: 최근의 정치문화를 보면 학자들의 의견보다는 오히려 여론의 향방에 귀를 기울이던데… 이황은 지금으로 치면 양식 있는 시민단체의 역할을 한 거군.


진보적 시민운동가로서의 이황과 이이?
동천: 그렇다고도 볼 수 있겠지. 하지만 요즘 시민단체는 지나치게 분업화되어 있어서 시민정신을 대변할만한 근본적인 철학까지 제시해주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아. 그런 점에서 보면 성리학적 세계관으로 개인의 덕성을 중시하면서 그러한 개인의 내면적 수양이 밑바탕이 되어야 진정한 정치를 펼칠 수 있다고 본 이황과 이이가 더 진보적이라고도 볼 수 있지.
서혁: 그렇게 개인의 수양을 강조하다 망한 게 조선의 정치잖아. 더구나 현대정치사에서 개인의 수양을 강조했던 때는 대부분 독재 정권 시대였다는 걸 직시할 필요가 있어. 지덕체의 조화니 새마을 운동이니 하면서 온 국민을 자신의 입맛대로 개조하려 했던 박정희 시대처럼 말야.

내면적 수양과 정치는 연결되어야 한다
동천: 나는 그게 바로 우리 현대정치사의 약점이라고 생각해. 개인의 내면적 수양과 현실정치가 마땅히 연결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나뉘어서 독재에 이용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건 분명 비극이지. 지금 제대로 수양이 된 정치인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현실을 보며 안타까워한다면 성리학적 수양과 정치를 연결짓는 게 그리 허튼 주장으로만 보일 수는 없다고 보는데. 하지만 네가 지적한 것처럼 개인의 내면을 중시하는 주장이 보수 이데올로기에 이용될 수 있다는 점은 경계해야겠지. 나도 그런 것까지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서혁: 인정을 하니 마음이 약해지는군. 니 말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해. 대중의 내면적 개혁과 연결되는 정치적 개혁 논리. 그런 깊이 있는 가치관과 세계관을 담고 있는 정치 철학이 지금 절실히 요구된다는 점 말야.
동천: 나도 예전에 이황과 이이가 얘기했던 내용 그대로를 지금에 옮겨오자고 주장하는 건 아니야. 지금 사단과 칠정을 다시 논해서 얻을 건 별로 없어. 그들의 문제의식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지.

이황과 이이의 현실노선의 차이
서혁: 얘기가 너무 커졌다는 느낌이 드는데… 조금 좁혀보자. 이황과 이이의 차이점이 아직도 분명하게 다가오지 않거든. 가령 이황과 이이가 오늘날의 정치 환경 속에 있다면 각각 어떤 식으로 대처하려 할까?
동천: 이황은 아마도 재야에 남아서 더 원칙적인 주장을 하거나 아니면 그냥 학자로서 충실하고자 했겠고…
서혁: 이이는 국회의원이나 장관을 하고 있을 거란 거냐?. 나 참, 그 정도 얘기야 나도 하겠다. 그런 거 말고 어떤 정치적 입장 차이를 갖겠느냐는 거야. 이황과 이이로 대변되는 주리론과 주기론을 서양철학적으로 비교할 수 있을까? 가령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원리를 중시하는 이성주의와 개인의 감각적 경험을 중시하는 경험주의로 말야.
동천: 이황은 원칙을 더 중시해서 그 원칙을 거의 신적으로 떠받들었거든. 반면 이이는 원칙은 원칙일 뿐이고 현실이 엄연히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지. 하지만 이이도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원칙을 인정했다는 점에서는 근본적으로는 차이가 없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렇기 때문에 이성주의와 경험주의의 차이와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아.
파주시에 있는 율곡 기념관
파주시에 있는 율곡 기념관

조선유학의 한계 – 종합이 없었다
서혁: 그렇다면 주리론과 주기론이 생각만큼 큰 대립양상을 보인 것도 아니네. 그런데도 그렇게 싸움을 했다는 게 잘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어. 사실 이성주의와 경험주의도 큰 틀의 근대철학적 관점에서는 일치하는 면이 있는 데다가 칸트가 이 두 진영의 관점을 절충시켰잖아. 서구 이성주의와 경험주의의 차이보다도 소소한 차이를 보인 주리론과 주기론을 통합하지 못했다는 건 조선유학의 한계라고 보이는데? 대립보다는 상생, 모순과 투쟁보다는 화해를 추구한다고 자랑삼는 동양철학이 고작 이거밖에 안되냐?
동천: 물론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이황과 이이의 차이는 성리학 안에서의 소소한 차이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당시에는 그게 큰 차이로 보였을 거야. 시대가 지남에 따라 그러한 차이를 소소한 차이가 되게끔 만드는 종합적이고 거시적인 시도가 부족했다는 점은 네 말마따나 조선유학의 한계야. 우리에겐 칸트가 없었던 거 맞아.
서혁: 자… 이제 결론을 짓자. 이황과 이이가 대한민국의 지폐 모델이 된 이유를 결론적으로 말해봐라.
동천: 우리 근대의 역사는 사실상 단절의 역사라고 볼 수밖에 없어. 조선의 역사는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막을 내렸고 이후에도 시민적인 합의에 의한 정체(政體)를 찾지 못한 채 독재 정권에 시달리게 되었지. 거의 100년 동안 말이야. 우리 앞 세대 조선의 역사를 사상적으로 대표하는 이황과 이이를 통해 그렇게 단절된 역사를 이어줄 단서를 발견하고자 하는 희망이 담겨 있는 모델 선정이었다고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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