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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5일 화요일

보편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 사이에서의 "시민"개념

보편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 사이에서의 "시민"개념
 글쓴이 : 아포리아
 조회 : 691  
 

도서정보
저자명아리스토텔레스 
저서명정치학 
출판사숲 
연도(ISBN)2009(9788991290280) 
보편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 사이에서의 "시민"개념
시민(市民)이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풀자면 시민이란 도시에 사는 사람이다. 물론 이러한 풀이는 역사적 배경과 일치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민이란 도시국가의 자유민이었고 근대 시민계급이 형성되었던 역사적 무대도 중세의 자치도시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은 그저 말의 유래를 설명할 수 있을 뿐, 도시라는 장소성의 역사를 통해서는 정작 이 글에서 다루려는 문제인 시민 개념에 단 한발자국도 다가서지 못한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일정한 장소에 거주한다고 해서 시민이 되는 것은 아니다.”(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1275a5)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리적 장소를 준거로 삼아 시민을 정의할 수 없는 이유를 노예나 외국인 체류자들도 시민들과 같은 장소에 거주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외국인 체류자들처럼 단순히 “고소하거나 재판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해서 시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시민은 정치적 개념이고 정치적 구성물이다
시민이란 매우 특별한 권리의 주체,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자면 “의결권과 재판에 참여할 권리가 있는 사람들”(1275b13), 곧 “정체에 참여하는 사람들”(1276a30)을 뜻한다. 시민 각자는 서로 다르지만 그들 모두가 “정치공동체의 안정이라는 공통의 과제”(1276b16)를 가진다. 시민 개념은 서양 정치철학에 처음 등장할 때부터 정치적 개념이었고 당대 그리스의 현실에서도 시민은 정치적 구성물로서 폴리스, 곧 정치공동체를 전제로 한다. 시민은 한갓 생명(zoe), 즉 살아있다는 단순한 사실성이 아니라 한 개인이나 집단에 고유한 살아가는 방식이나 형태, 곧 사회화 형식으로서의 존재성(bios)이다. 시민은 정치적 개념이고, 국가 곧 ‘공공체’(res publica)를 전제한 개념이다. 근대 정치철학의 전개와 함께 인간과 자연에 관한 이해방식이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시민 개념이 정치적 구성물이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시민 개념에는 시민다움의 요건이 따라붙는다. 시민의 요건은 물리적 장소의 문제가 아니기에 어떤 사람이 어떤 국가에서 태어나거나 체류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시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시민다움의 요건을 충족시킬 때 비로소 시민이 된다. 정치철학의 역사에서 완전시민과 불완전시민, 적극시민과 소극시민의 구분이 오랫동안 논의되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완전시민과 불완전시민
이와 같은 구분에 처음으로 중요성을 부여한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는 “국가의 존립에 필요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시민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1277b39)고 말한다. 이는 아리스토레레스의 악명 높은 이론인 인간 본성에 따른 자유민과 노예의 구분에 관한 언명이 아니다. 그것은 자유민 안에서 완전시민과 불완전시민의 구분과 관련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미성년자는 “조건부 시민”이며 “최선의 국가라면 직공을 시민으로 만들지는 않을 것”(1278a6)이라고 말한다. “훌륭한 시민은 자유민답게 지배할 줄도 알고 자유민답게 복종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이러한 것들이 바로 시민의 미덕이다.”(1277b17) 이와 같은 “시민의 탁월함은 모든 자유민이 다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자들만이 가질 수 있기”(1278a6) 때문이다. “필요한 노동을 하면서 개인에게 봉사하는 자들은 노예들이고,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자들은 직공들이고 품팔이꾼들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오직 불완전시민일 뿐이다. 불완전시민이란 마치 “아무런 명예도 없는 재류외인인 양” 어떤 공직에도 참여할 수 없다는 것, 오늘날의 정치제도로 말하자면 피선거권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공동체에 대한 참여를 인간 본성으로 보고 개인에 대한 정치공동체의 우위로부터 『정치학』의 서술을 전개했다. 이와 정반대로 근대 정치철학은 개인으로부터 출발하며 정치공동체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개인들 간의 계약 또는 동의의 산물로 본다. 이와 같은 관점은 “인간은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이라는 명제로부터 출발하는 정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뒤집은 것이다. 이와 함께 정치공동체는 인간 본성에 내재한 목적이 아니라 삶을 위한 수단으로 바뀐다. 이러한 전도(顚倒)는 정치공동체와 규범을 합리적 개인들의 선택으로 보는 ‘방법론적 개인주의’의 출발점을 이룬다. 정치공동체가 개인에 대하여 더 이상 인륜적 우선성이나 존재론적 우선성을 가지지 않게 됨으로써 어떠한 정치공동체를 정당한 것으로 볼 것인가는 전적으로 정치공동체 이전의 자연적 개인을 어떻게 파악하는가에 달려 있게 된다. 근대 정치철학은 공통적으로 자연적 개인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행위자로 간주한다.또한 아리스토텔레스-아퀴나스 전통과는 달리 근대 정치철학은 이성을 특정한 인륜적 내용과 일치시키지 않으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 판단 능력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근대 사회계약론 내부에서의 세세한 차이점들은 이와 같은 판단 능력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관한 차이, 곧 이성관의 차이로부터 비롯된다. 대표적으로, 이해득실을 타산할 줄 아는 합리성으로서 이성 개념을 사용하는 홉스의 사회계약론과 정언명법처럼 보편화하고 일반화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 실천이성 개념을 사용하는 칸트의 사회계약론은 전혀 다른 정치공동체를 논증하게 된다.
근대 사회계약론의 틀에서는 완전시민과 불완전시민의 구분은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시민의 요건은 이성 능력이며, 어떠한 이성 개념을 사용하든지 이성이란 인간 누구에게나 부여된 보편적 능력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결국 근대 정치철학에서 시민은 이성을 가진 모든 이를 포괄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치공동체를 탄생시키는 ‘만인과 만인의 계약’이라는 아이디어도 완전시민과 불완전시민, 적극시민과 소극시민의 구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장치이기도 하다. 근대 정치철학의 틀에서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시민이 될 수 있고, 나아가 루소나 칸트가 강조하듯 만인은 사회계약을 통해 정치공동체의 시민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자유로의 강제’(루소)이며 ‘이성의 강제’(칸트)이다.(1) 결국 어떤 이도 시민이 되지 않은 채 그저 인간일 수는 없다는 말이다. 사회계약과 정치공동체의 필연성에 관한 이러한 논거는 적극시민과 소극시민의 구분에 대한 어떠한 정당성도 제공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러한 이중화를 배척하는 기능을 가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완정시민과 불완전시민의 구분은 근대 정치철학의 전개와 함께 적어도 규범적 수준에서는 기각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적어도 이러한 점에서는 근대 정치철학이 민주주의 이론의 규범적 틀을 형성한다.
그럼에도 17세기 사회계약론에는 적극시민과 소극시민의 구분이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었고 소유자만이 완전시민으로 간주되었다는 주장도 있다.(2) 홉스와 로크의 사회계약론에 대한 이데올로기 비판의 성격을 띤 이와 같은 주장은 칸트의 사회계약론에 대해 되풀이되기도 한다.(3) 물론 칸트의『인륜의 형이상학』(Metaphysik der Sitten)에는 실제로 도제(徒弟)와 여성을 소극시민으로 서술하는 부분이 나온다.(4)하지만 이 부분은 칸트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이 현실에 관한 서술, 곧 ‘현실의 공화국’(reale Republik)에 관한 서술일 뿐이다. 반면에 ‘모든 사람의 결합된 의지’의 산물인 ‘이념의 공화국’(ideale Republik)은 소극시민의 개념을 허용하지 않는다. 칸트의 정치철학은 규범적 이론이며, 규범 이론은 현실의 서술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규제적 원칙의 제시를 목표로 한다. ‘이념의 공화국’은 ‘현실의 공화국’에 대한 규제적 원칙이다. 그러므로 칸트가 소유권적 개인주의에 입각하여 이중적 시민구분을 전제했다고 해석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겠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칸트로부터 읽어낼 수 있는 것도 어떤 국가가 ‘이념의 공화국’에 접근하려면 공직을 담당할 수 없는 소극시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요청에 불과하며, 그러한 요청이 어떠한 구체적인 제도를 통하여 실현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공무를 담당하는 적극시민과 법을 따르고 법에 의해 보호받을 뿐인 소극시민의 구분은 규범적 정치철학의 뒷문에서 실제적으로 존재했고 보통선거제도가 등장한 것은 한참 뒤인 20세기의 일이다. 시민의 구체적인 자격 요건은 근대 정치철학의 핵심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높은 추상 수준에서 인간은 이성적 능력의 보유자로서 또한 잠재적인 시민으로서 파악되었을 따름이다.
근대 정치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자들만이 시민의 탁월함을 가지며”(1278a6) 적극시민일 수 있다고 노골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근대 정치철학의 틀에서 시민 자격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 판단 능력인 이성에 연관되지만 어떠한 구체적 조건 속에서 이와 같은 판단 능력이 함양되며 또는 발휘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따지지 않는다. 규범철학이라는 특성으로 말미암아 이와 같은 실제적인 문제는 회피된다. 근대 정치철학에 암묵적으로 적극시민과 소극시민의 구분이 전제되어 있는가의 문제는 근대 정치철학이 민주주의 이론인가의 문제이다. 그와 같은 이중적 시민규정을 정치공동체의 구성적 전제로서 파악하는 이론은 오늘날 제도적 민주주의가 도달한 수준인 보통선거제의 의미에서 민주주의 이론이라 말할 수 없다. 
시민 개념과 민주주의의 정치철학
그런데 보편적인 인간 이성, 평등한 판단 능력에서 출발하는 이론은 모두 민주주의 이론이라고 단정하는 것에는 무리가 따른다. 예컨대 17세기 사회계약론을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민주주의 이론이라고 말할 수 없다. 만인의 자연적 힘의 평등과 만인의 보편적 합리성으로부터 출발하는 홉스의 정치철학은 인민을 정치공동체의 기원이자 주권의 원천으로 파악한다. 하지만 홉스에게서 인민 또는 시민은 주권자로서 적극적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정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틀 안에서는 정치공동체는 인간의 본성에 따른 목적으로 간주되고 이를 통해 정치공동체와 정치적 지배의 정당화 요건에 대한 논구는 불필요한 것이 되어 버린다. 다시 말하여 거기에는 민주주의와 같은 틀을 통해 국가와 정치적 지배를 정당화할 이유가 없다. 정치적 지배의 정당화 문제를 부각시키는 홉스의 정치철학은 정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문맥과 비교할 때 분명 보편적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징검다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주권자가 아니라 오직 주권의 원천으로서만 파악된 시민 개념은 아직 채 민주주의의 시민 개념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만인이 자연상태에서 가지고 있던 무제한의 권리를 상호적으로 포기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홉스의 계약은 주권자와 신민(臣民)의 분리를 만들어 낼 뿐이며, 홉스의 리바이어던 국가에서 개별적인 시민들은 결코 주권자가 아니다. 개별적인 시민들은 오직 주권의 원천으로서 수동적이고 소극적으로 파악될 뿐이다.
자유주의적 입헌주의로 귀결되는 로크의 사회계약론은 이와 같은 절대주권론에 대한 제한으로 읽을 수 있는데, 그와 같은 제한정부론은 주권 개념을 주변화하고 민주주의적 시민주권론의 적극적 전개를 가로막는 역할도 동시에 수행한다. 모든 개별적인 인간을 주권의 원천으로 파악하는 논변(홉스)이나 국가의 설립 이전에 보유하고 있던 자연적 권리를 실정적 국가주권의 한계로 파악하는 논변(로크)은 둘 다 정치공동체와 정치적 지배의 내적 구성원리에 대한 탐색이며 정치철학을 보편적 민주주의의 방향으로 전개시킬 계기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홉스나 로크와 더불어 민주주의의 정치철학이 본젹적으로 등장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란 정치적 지배를 정당화하는 요건이며, 이때 정치적 지배가 정당화되는 근거는 바로 통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이다. 이와 같은 동일성은 홉스와 로크에게서 수미일관하게 전개되지 않는다. 보편적 민주주의, 곧 만인주권은 개별적 개인들의 독립성과 자기지배의 이념 속에서만 비로소 완결된다. 달리 말하자면, 민주주의란 통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의 원리이며, 이 원리는 정치적 지배를 시민의 자율, 곧 자기지배로서 정당화한다. 이와 같은 민주주의 원리는 18세기의 정치철학인 루소와 칸트에 이르러 비로소 등장한다. 그들은 법에 대한 복종을 외부의 선(善)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법에 대한 내적 복종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했고, 정치공동체의 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자기입법에 입각한 자기구속에서 발견했다. 칸트의 경우에 이는 자유의지와 이성법의 통일에 관한 정교한 논의로 발전한다. 이와 같은 전개를 통해 자기지배와 자기입법, 통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 국민과 국가의 동일성 등 현대 민주주의의 규범적 틀이 완성된다.
이러한 규범적 틀과 실제의 현실은 괴리된다. 루소와 칸트로 대표되는 18세기 정치철학은 괴리된 현실에 대하여 규범철학으로서의 규제적 역할만을 수행할 뿐이며 현실을 어떻게 규범적 틀에 접근시킬 것인가의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 여기에서 규범과 현실의 괴리는 단지 당시에는 보통선거제가 실시되지 않았다는 사실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당시에 보통선거제의 실시를 막았던 논거가 민주주의 정치철학이 풀어야 할 숙제에 대하여 암시하고 있을 것이다. 왜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적극시민의 자격이 주어지지 않아야 하는가에 대한 논거는 거꾸로 보편적 시민 개념과 민주주의의 실질적 기초는 무엇인지에 관하여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이다.
보통선거제 논쟁과 민주주의의 실질적 기초
이러한 문제는 보통선거제도의 도입이 중요한 정치쟁점이 된 상황에서 매우 구체적인 방식으로 다루어진다. 보편적 시민 개념에 입각한 보통선거제의 사회경제적 토대의 문제를 가장 일찍 깨달았던 사람은 로베스피에르라고 말할 수 있다. 1793년 프랑스 헌법은 재산에 기초한 제한선거제를 폐지하고 보통선거제의 도입을 명문화한다. 단 한 번도 보통선거를 실시하지 못했지만 로베스피에르는 교육과 노동, 자산의 분할 등의 조치를 통해서만 보통선거제가 실현될 토대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점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모든 시민의 물질적 독립성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사회만이 정당한 사회라는 로베스피에르의 근본 관점은 시민 개념의 기초를 독립적인 물질적 기초와 연관시키는 공화주의적 특징을 드러낸다.(5) 제도로서 정착시키지는 못했지만 로베스피에르는 보통교육, 최저임금제, 자산재분배 등을 보통선거제의 기초로 보았다. 만약 보통선거제가 도입된다 하더라도 그와 같은 제도가 정착되지 못한다면 보편적 민주주의의 형식만이 도입된 것이고 실질적인 민주주의는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실질적 민주주의의 기준에 관한 논의는 역설적으로 가난한 자도 투표에 참가시켜야 하지만 부자가 더 많은 표를 행사해야 한다고 믿었던 존 스튜어트 밀의 논의에서 더 구체적으로 전개된다.『대의정부에 관한 고찰』(Considerations on Representative Government)에서 그는 차등선거제를 옹호했는데, 보다 많은 사람이 정치에 참여하는 경우가 더 많은 역사적 진보를 만들어 낼 것이며 모두가 참여하는 경우가 가장 이상적인 상태라고 일단 전제한 이후에 구체적인 대의제도에 관한 입장을 펼친다. 밀은 사회구성원이 공무에 참여하는 것은 자질을 향상시키는 계기가 된다고 보았고 모두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는 보통선거제도가 이롭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는 선거권을 부여하지 말아야 할 부류들을 정하는데, 첫째는 읽기,쓰기, 셈하기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두 번째 부류는 세금을 내지 않는 사람들이고, 세 번째 부류는 공적 구호의 수혜자들이다. 밀에 따르면 이러한 사람들은 무능력하거나, 무책임하거나, 나태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선거권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 아울러 앞으로 정부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선거권이 부여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할 때 밀은 보통교육, 소득에 따른 과세, 경제적 독립성이 보통선거제의 사회적 기초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특징적인 점은 선거권을 부여하지 말아야 할 대상과 관련하여 밀은 공적 구호에 의존하는 시장낙오자를 포함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모든 이에게 투표권이 부여되는 ‘유리한 제도’가 실현되려면 시장의 실패는 없어야 한다. 낙오자는 나태한 자들이라고 말할 때 밀은 시장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셈이다. 이 점에서 밀은 이후의 자본주의 전개에 대하여 전혀 예견력을 가지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 밀은 모든 사람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이 더 좋은 정부를 만들 것이라고 전망하지만 평등선거를 찬성하지는 않았다. 밀은 부와 지성이 비례한다고 보았고, 따라서 고용인은 노동자보다, 숙련 노동자는 미숙련 노동자보다, 은행가나 대기업가는 소상인보다 더 많은 표를 행사하는 제도, 즉 부의 크기와 직업에 따른 차등적인 복수투표제가 보통평등선거제보다 우월하다고 보았다. 이 두 가지 점은 시장과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하여 숙고하지 못했던 밀의 한계라고 볼 수 있다.
민주주의의 주권원리와 사회적 권리
이처럼 로베스피에르와 존 스튜어트 밀은 각각 다른 철학적 배경 속에서 보통선거제의 사회적 기초를 탐색한다. 이러한 탐색은 정치공동체를 정당화 하는 요건인 민주주의는 단순한 투표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요건의 문제라는 점을 드러낸다. 그래서 20세기에 들어와서 쟁취된 보통선거제는 단순히 투표권의 확대만이 아니라 이와 연동된 사회적 변화, 곧 보통교육과 최저임금의 도입, 그리고 이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기에는 공공서비스의 형태로 보장되는 사회적 권리의 확장과 결합된 과정이었다. 그리하여 50-60년대의 복지국가에서 사회적 권리들은 시민권, 곧 주권과 같은 뿌리를 가진 것으로 보편적 시민 자격에 연동된 것으로 이해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역사는 이처럼 단선적인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았고 서구국가들에서도 70년대의 장기불황의 끝은 사회적 권리들이 박탈되고 축소되는 시대, 포스트민주주의의 시대, 바로 신자유주의의 개막이었다. 그 결과 민주주의의 주권원리는 정치적 권리에 대한 원리로 축소되었으며 사회적 권리는 더 이상 보편적 시민자격에 당연하게 부여된 무조건적 권리로 이해되지 않게 되었다.
보편적 시민 개념의 실질적 토대와 시민 개념의 재구성
위기 속의 신자유주의가 영원히 지속된다는 보장은 없다. 어차피 지금의 신자유주의도 70년대의 불황 끝에 탄생한 특정한 시대의 산물일 따름이다. 현재의 장기불황 이후에도 신자유주의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믿는 것은 미신에 가깝다. 만약 신자유주의의 종식과 더불어 축소된 공공서비스가 복원되고 그뿐만 아니라 현금기본소득까지 도입된다면 그것은 시민 개념과 민주주의의 확장을 의미할 것이다.
개별적 시민의 물질적 독립성은 민주주의의 토대이다. 현금기본소득의 도입은 시민의 물질적 독립성이 지금처럼 시장에만 의존하지 않고 사회적인 수준에서 독자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것은 경제적 토대에서 민주주의의 개막을 뜻하게 될 것이다. 현금기본소득은 공적인 방식으로 조달되고 지급되지만 엄연히 개별 시민들의 소유이며 전적으로 개별 시민들의 처분에 맡겨져 있다. 곧 현금기본소득은 시장적 개인과 구별되는 새로운 개인에 사회적 토대를 부여한다. 기본소득은 시장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사회화 형식이며 새로운 시민 개념을 만들어내는 주체화 형식이 된다. 기본소득의 도입은 시민의 요건을 바꾸고 이를 통해 시민 개념을 확장하고 재구성한다.
이러한 변화는 정치공동체의 성격변화를 가져온다. 정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문법인 폴리스와 오이코스의 구분에서 폴리스는 사적인 영역에 대별되고 사적 영역과 분리 구획된 공적 영역으로 나타난다. 시민은 오이코스의 사적 이해관계를 폴리스에 들여와서는 안 되며 폴리스는 개인들의 오이코스와 무관계한 공동선을 추구해야 한다. 이를 위반하면 폭군정이고 과두정이며 좋은 정체가 아니다. 반면에 보편적 기본소득이 도입된 상태를 가정한다면, 정치공동체는 이와 같은 소극적 규정을 넘어서서 개인의 물질적 독립성을 유지하고 부양하는 적극적 기능을 떠맡게 된다. 이를 통해 공공체(res publica)는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것들의 연합인 공통체(commonwealth)의 성격도 가지게 된다. 기본소득을 통해 공공체는 비로소 공통체로 확장되고 변형된다.
<주>
(1)  J. J. Rousseau, Du Contrat Social ou Principes, I, 7: I. Kant, Metaphysik der Sitten, Rechtslehre, §§41-44.
(2) C.B. Macpherson, The Political Theory of Possessive Individualism: From Hobbes to Locke, 1962.
(3) Richard Saage, Kant und der Besitzindividualismus. Nomos: Baden-Baden 1994.
(4)  Metaphysik der Sitten, Rechtslehre, § 46.
(5) 여기에 관해서 D. Raventós, Basic Income. The Material Conditions of Freedom, London 2007, 57-61. 라벤토스는 로베스피에르의 공화주의가 기본소득과 연결될 수 있다고 쓴다.
* 이 글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음을 밝힙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6, 2014년 6월, 금민, 기본소득 네트워크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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