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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1일 금요일

이윤 자료

이윤
글쓴이 : 운영자                   날짜 : 2009-06-04 (목) 16:34 조회 :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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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에 있어서 태평시대라고 하면 생각나는 것이 “요(堯), 순(舜) 시대”이다. 그 뒤 “우(禹)”가 왕위를 물려받아 이끌어 가다가 “우(禹)”의 아들 “계(啓)”에 이르러 세습왕조체제로 바뀌어 하왕조(夏王朝)가 시작된 것이다.

하왕조 17대(마지막 왕)은  “걸왕(傑王)”이다. 재위기간은 52년이다. 그는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과 폭군의 대명사로 알려져 왔다.
즉, “요순시대(堯舜時代)”의 반대말이 바로 “걸주시대(傑紂時代)”인 것이다. 걸왕은 인접국인 “유신씨국”을 정복하고 진상품으로 “매희(妹喜)”(말희(末喜)라고도 함)라는 절세미녀를 얻는다. 그녀와 함께 그는 “주지육림(酒池肉林)”의 세월 속에 있었다. (“주지육림”이란 고사 성어는 여기서 나왔음)

백성들에게 계속된 폭정은 결국 “은(殷)나라 탕왕(湯王)”이 이끄는 반군에게 나라가 멸망하게 되었다. 쿠데타에 성공한 반군 탕왕은 걸왕을 시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이 모시던 주군(主君)을 시해하여 한 것이 아니라, 어려움과 핍박당하는 백성들과 제후국들이 하늘의 뜻에 따라 폭군을 몰아내었기 때문이다. 탕왕은 걸왕과 말희를 아무도 시중을 들지 않는 황량한 시골로 유배시켰다. 스스로 일할 줄 모르는 걸왕과 말희는 와우산(臥牛山) 어느 중턱에서 굶어 죽었다고 한다.

“탕왕(湯王)”은 누구이고 어떻게 훌륭한 재상 “이윤(伊尹)” 을 만났을까?

'탕왕'은 성은 자(子)이고 이름은 리(履)이다. 무탕(武湯), 무왕(武王)등이라고 칭한다. 갑골문에는 당태을(唐太乙), 고조을(高祖乙)이라고 하였다. 그는 상(商)부락에 군장이었다. 그는 '이윤'과 한께 하(夏)나라를 멸하고 상(商)나라를 건국하였다. 재위기간은 13년이다. 100세 때 까지 천수를 누렸다고 한다.
'탕'은 오제(五帝)중 제곡(帝곡)의 후손인 설(契)의 자손이다. “설”의 어머니는 “유융씨”의 딸 이름이 “간적(間狄)”이었다.

“간적”은 어느 날 세 명의 친구와 강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데 어디 선가 제비 한 마리가 날아와 알을 떨어뜨리고 가버렸다. “간적”은 무심코 그 알을 집어서 깨어 먹었는데 그러자 잉태하여 “설”을 낳았다고 한다. “설”은 “요순시대”에 사도(司徒)에 임명되어 상(商: 河南省(하남성)) 땅을 하사 받았다. 임금으로부터 子라는 성을 받았다. 설

은 우(禹)를 도와 치수공사에도 많은 공을 세웠다. 그로부터 13대 천을(天乙)의 대에 이르렀는데 그가 바로 덕이 높기로 유명한 은의 탕왕(湯王)이다.

상(商)부락을 이끌든 군장이었다. 하왕조 말기에 '걸왕'의 폭정으로 민심을 잃자 탕은 하나라를 멸하고자 결심을 하였다. 그때 “탕”은 “걸왕”의 폭정을 간하다가 참형을 당한 “관용봉(關龍逢)”을 부하를 시켜서 위로했는데 이것이 마음에 거슬린 “탕왕”을 잡아다가 하대(夏臺)에 있는 옥에 가두었다. 이에 상부족(商部族)은 걸왕에게 많은 황금을 바치고, 걸왕의 측신들 에게도 구명 뇌물로 매수를 하여 “탕”을 석방했다. 죽을 고비를 넘긴 “탕”은 하를 멸할 인재를 모으기 시작한다.

“탕”과 “이윤”의 만남...
“이윤”은 “걸”을 망하게 하고 “탕”을 도와 왕도정치를 펴서 “은나라”를 부흥시킨 훌륭한 재상이다. 그럼 후세에 명재상으로 이름을 남긴 “이윤”은 어떤 인물인가?

** “이윤”의 본명은 “지(摯)” 혹은 “아형(阿衡)”이다. “이윤”은 본래 “유신씨(有辛氏)”의 들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기의 재능을 숨기고 산야에 묻혀 살았다. “탕”이 그의 현명함을 알고 사람을 보내어 맞아들이려 하였으나 이윤은 쉽사리 응하지 않았다. 탕은 세 번이나 사신을 보내어 예를 갖추어 청한 후에야 비로소 부름에 응하였다.**  <사기(史記), 서경(書經)>

"여씨춘추(呂氏春秋)』"나 "열자(列子)』"에는 “이윤(伊尹)”의 출생경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윤”의 어머니는 유신국(有莘國)이라는 나라에 이수(伊水)가에 살고 있었다. “이윤”이라는 이름은 수(伊水)가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름을 이윤(伊尹)이라 부르게 되었다. 영웅에게는 훌륭한 조력자가 있게 마련이다.  조력자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신이 나타나서 앞 일을 말해주거나 주술적 힘이 있는 칼, 거울 등의 도구를 주기도 하고 용이나 봉황새와 같은 상서로운 짐승이 나타나서 사악한 기운을 물리쳐 준다면 이들은 초자연적 조력자이다.
  
유능한 인물이 보좌하여 영웅에게 조언을 해주거나 어려운 일을 대신해 준다면 이는 인격적 조력자이다. 끝으로 충직한 개가 앞길을 인도해준다든가 천리마가 출현하여 영웅의 여행길을 도와준다면 이들은 동물적 조력자다. 건국 영웅에게는 인격적 조력자인 어진 신화 곧 현신(賢臣)이 있다.
  
탕왕(湯王)이 하(夏)의 폭군 걸(桀)을 정벌하고 은(殷)을 세우는 데에 가장 공로가 컸던 현신은 '이윤(伊尹)'이다. 이윤의 탄생에 대해서는 신기한 이야기가 전해내려 온다.
“이윤”의 어머니가 “이윤”을 잉태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꿈에 신령이 나타나 말하기를 '만약 이수에 절구통이 떠내려 오거든 너는 그것을 보는 즉시 동쪽을 향하여 달리되 절대로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였다.

이튿날 이수에 가보니 과연 절구통이 떠내려 오는지라 그녀는 무조건 동쪽으로 달렸다. 10리쯤 달리고 나서 이제는 괜찮겠지 하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 순간 마을은 완전히 물바다로 변했고 그녀는 속이 빈 뽕나무로 변해버렸다.

그때 마침 뽕을 따러 온 여인이 뽕나무 속에 어린아이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이 아이가 “이윤”이라는 것이다.

이 이상한 아기를 “유신국(有辛國)”의 왕에게 드렸는데 ‘유신국왕’은 ‘이윤’을 주방의 요리사에게 기르게 하고는 학문도 가르쳤다. 대궐 요리사에 의해 길러진 ‘이윤’은 요리 솜씨도 훌륭하지만 학문이 뛰어난 젊은이로 성장했다.
그는 ‘은’의 ‘탕왕’이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탕왕’을 위해 일하고 싶었으나 ‘은’으로 갈 구실이 없었다.

때마침 ‘탕’이 동방을 순시할 때 ‘유신신국’을 지나게 되었다. ‘유신국왕’의 딸이 아름답고 총명하다고 이야기를 들은 ‘탕’은 ‘유신국왕’에게 혼례를 부탁하여 허락을 받았다. ‘유신씨’의 딸이 ‘탕왕’의 비(妃)로 간택되었다.

‘이윤’은 공주를 수행하는 요리사가 되어 ‘은’으로 가게 되었다. ‘이윤’은 평소 ”탕“을 흠모하던 차, 자신의 빼어난 요리 솜씨를 한껏 과시하였다. ‘은’의 궁정에서 맛있는 요리로 주목을 끌게 된 ‘이윤’은 마침내 ‘탕’의 눈에 띄었다. ‘탕’이 요리에 대해 물어보자 그는 거침없이 대답할 뿐만 아니라 요리의 이치로서 정치의 도리까지 설명하니 ‘탕’은 ‘이윤’의 인물됨에 감탄했다.

<하지만 ‘이윤’은 이 때 ‘탕’에 의해 즉각 중용된 것이 아니었다. ‘한비자(韓非子)’ ‘사기(史記)’ 등의 기록에 의하면 웬일인지 ‘탕’은 그의 정견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고 이에 실망한 ‘이윤’은 ‘탕’을 떠나 ‘하’의 ‘걸왕’에게 가서 한동안 벼슬을 살기도 하였다고 한다.>

‘탕’을 위해 주방 일을 맡아 열심히 일을 했으나 ‘탕’은 ‘이윤’을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자 ‘이윤’은 ‘탕’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하나라의 ‘걸왕’에게로 가서 어선관(御饍官)이라는 음식을 담당하는 관리가 되었다. 당시 ‘걸왕’은 포악무도한 정치를 했고 백성들의 원성은 날로 더해갔다. 한번은 ‘걸’이 요대의 ‘주지육림’에서 한창 놀아나고 있을 때 ‘이윤’이 잔을 들어 권하면서 간언 하였다.

<국왕께서 저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나라가 망할 것입니다.>이 말을 듣는 순간 걸은 탁자를 내리치면서 벽력같은 소리를 질렀다.
<너 이놈! 요언(妖言)으로 사람을 현혹시키지 말지어다. 내가 천하를 가지고 있는 것은 하늘에 태양이 있는 것과 같다. 그 누가 태양이 멸망한다고 하더냐? 태양이 멸망한다면 나도 망하지.>이처럼 ‘걸’은 자신만만했었다.

‘걸’이 조금도 회개할 낌새가 없다는 것을 알아버린 ‘이윤’은 착잡한 심정을 억누르면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 날 저녁 길거리를 지나는데 술 취한 몇 사람이 비틀거리면서 이상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왜 박으로 가지 않는가? 왜 박으로 가지 않는가? 박은 크기만 한데…』‘이윤’은 깜짝 놀랐다. ‘박’이라면 ‘은 탕왕’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왜 이곳 사람들은 다들 ‘박’으로 돌아가라는 노래를 부르는 것인지 궁금하였고 ‘하나라’의 백성들조차 ‘탕왕’을 흠모하고 있는지 의문이 쌓여 만 갔다. 그때 또 다시 부근의 골목에서 격양된 목소리의 노래가 들려왔다.
『깨어나라! 깨어나라! 나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다네! 암흑을 버리고 광명을 찾을 거나. 무엇이 걱정이란 말인가?』

‘이윤’은 그제야 깨닫는 바가 있었다. 이 노래들은 자신을 위해 부르는 노래임이 틀림없었다. ‘이윤’은 지난날을 후회했다. ‘은’의 ‘탕왕’을 버리고, ‘하’의 ‘걸왕’을 섬겼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깊이 뉘우치고는 날이 밝기가 무섭게 ‘탕왕’이 있는 ‘박’으로 향했다.

그때 ‘걸왕’은 날이 갈수록 나랏일에는 관심이 없고 매희라는 여자에 빠져 궁중에는 수풀처럼 많은 고기를 쌓아 놓고 못을 파서 거기다 술을 가득히 부어 배를 띄워서 즐겼다 한다.

나라형편이 점점 피폐해지자 충신 “관룡봉(關龍逢)”이 지금의 형태에 대하여 간언을 하였지만 ‘걸’은 그를 처형을 시켜버렸다. 이 말을 들은 ‘탕’은 부하를 시켜 “관용봉(關龍逢)”의 가족에게 위로를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걸왕’은 “탕”을 잡아다가 하대(夏臺)에 있는 옥에 가두었다. 이에 상부족(商部族)은 ‘걸왕’에게 많은 황금을 바치고, ‘걸왕’의 측신들 에게도 구명 뇌물로 매수를 하여 “탕”을 석방했다. 죽을 고비를 넘긴 “탕”은 하를 멸할 인재를 모으기 시작한다.

이런 때에 ‘이윤’이 자기를 찾아 온 것이다. ‘탕’은 ‘이윤’을 상나라의 재상으로 삼고 하나라  군대가 있는 ‘경성’까지 파죽지세로 진격하였다. 결국 폭군 ‘걸왕’은 ‘탕’에게 전쟁다운 정쟁을 해보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져버렸다.

쿠데타에 승공한 ‘탕왕’은 ‘걸왕’과 ‘말희’를 아무도 시중을 들지 않는 황량한 시골인 남소(南巢)로 유배시켰다. 스스로 일할 줄 모르는 ‘걸왕’과 ‘말희’는 ‘와우산(臥牛山)’ 어느 중턱에서 굶어 죽었다고 한다.

천하의 모든 제후와 백성들은 ‘탕왕’을 천자(天子)로 추대하였다.  

“탕”이 백성의 뜻을 받들어 “걸”왕을 칠 수 있었던 것은 천도에 따른 것이며, 또한 이윤과 같은 현명한 재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걸”이 망하고 “탕”이 흥한 것은 “이윤”에게 있다고 한다. <걸지망 탕지흥 재이윤(桀之亡 湯之興 在伊尹)>

'탕왕'이 천자가 되고나서 7년 동안 가뭄이 계속되었다. 태사(천문을 보고 점치는 사람)에게 그 까닭을 점쳐보게 하였더니 태사는 말했다.
“아무래도 사람을 희생으로 바치고 빌지 않으면 비가 오지 않겠습니다.”
탕왕은 머리를 가로 저었다.
“내가 비를 비는 것은 백성을 위한 것이다. 기어코 사람의 몸을 희생으로 써야 한다면 내가 희생이 될 것이다.”
그리고 장식이 없는 흰 수례에 흰 말을 메워서 타고 흰 띠를 띠고 스스로 희생이 되어 상림(桑林)의 들에 나가 여섯 조항의 스스로를 꾸짖는 말을 하늘을 향하여 아뢰었다.

“제가 한 정치에 절제가 없어 문란해졌기 때문입니까?
 백성이 직업을 잃고 곤궁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까?
 제 궁정이 너무 화려하기 때문입니까?
 여알(女謁)이 성하여 정치가 공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까?
  (여자의 권고에 의한 정사)
 뇌물이 성행해서 바른 도를 해치고 있기 때문입니까?
 참소하는 말로 인해 어진 사람이 배척당하기 때문입니까?”
탕왕이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큰 비가 내려서 이 비는 수 천리의 땅을 적시었다.


“탕왕(湯王)”이 죽은 후 얼마 안 되어 태자 “태정(太丁)”도 일찍 죽었으므로, 아우 “외병(外丙)”이 즉위했다. 2년 만에 “외병(外丙)”이 죽고, 다시 그 아우 “중임(仲壬)”이 즉위했는데 또한 4년 만에 죽으니, “태정(太丁)”의 아들 “태갑(太甲)”이 즉위했다.

그러나 “태갑(太甲)”은 어리석고 포악하여 조부인 “탕왕(湯王)의 법을 어기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일이 많았다. 그리하여 “이윤”은 그를 동궁(棟宮-별궁)에 가두었다. “태갑(太甲)”은 3년 동안 선왕(先王)인 “중임(仲壬)”의 옷을 입고 나서 크게 깨달아 잘못을 뉘우치고 자신의 부덕함을 깨닫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이윤”은 “태갑(太甲)”을 은의 수도 “박(亳)”으로 모셔왔다. 그로부터 “태갑(太甲)”은 덕을 잘 닦았으므로 제후들이 모두 잘 따랐다. “태갑(太甲)”이 얼마 후 죽자 그의 아들 “옥정(沃丁)”이 즉위하였는데 “이윤”이 죽은 것도 이때이다.

“이윤”이 죽자 “은나라”에서는 그들 조상묘(祖喪廟)에 배향하는 파격적인 은혜를 베풀었다. “이윤”이 없었다면 “은나라”는 천자국(天子國)이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를 선조의 사당에 배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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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춘추전국시대 때에 공손추(公孫丑)가 맹자(孟子)에게 물었다.

“이윤(伊尹)은 부정한 일을 그냥 보고 견딜 수 없다고 하면서 왕 태갑(太甲)을 동궁으로 쫓아냈는데 백성들이 크게 좋아했습니다. 태갑이 현명해지자 다시 돌아오게 했는데 백성들이 크게 기뻐했습니다. 현명한 사람이 신하가 되었을 때 그 임금이 현명하지 못하다면 본래 쫓아내기 마련입니까?”

그러자 맹자는 이렇게 답했다.

“이윤과 같은 생각으로라면 괜찮지만, 이윤과 같은 생각이 없다면 찬탈이다.”
●『맹자』, 「만장 상(萬章 上)」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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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은 은(殷)나라의 밭을 가는 농부였다. 의(義)가 아니고 도(道)가 아니면 천하를 녹(祿)으로 준다 해도 돌아보지 않았고, 의와 도가 아니면 한 오라기 풀도 주고받지 않았다.
탕(湯)왕이 세 번이나 사람을 보내어 그를 초빙하니 그제서야 마음을 바꾸었다.

‘내가 밭 갈며 요순(堯舜)의 도를 즐기는 것이 어찌 요임금이나 순임금과 같이 만드는 것만 하겠는가?  하늘이 이 백성을 내시어 먼저 아는 자를 시켜서 뒤늦게 아는 자를 알게 하시고, 먼저 깨달은 자를 시켜서 뒤늦게 깨닫는 자를 일깨워주셨다.
나는 하늘이 낸 백성 중 먼저 깨달은 자이다.
나는 도를 가지고 이 백성들을 일깨워주겠다.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이윤은 이러한 사명감에서 탕왕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때 하(夏)의 걸(桀)왕이 포악무도하여 민심은 도탄에 빠지고 정국은 문란하여 혼란에 빠졌다.


이윤은 탕왕을 도와서 대혁명을 수행했다. 탕왕이 죽은 후, 이윤은 선왕의 부탁으로 태자 태갑을 도와서 재상이 되었다. 태갑은 즉위하자 불의한 행동을 자행함으로써 나쁜 습성으로 되돌아갔다. 이윤이 아무리 간하여도 왕은 듣지 않았다.
이윤은 “왕이 깨닫지 못한다면 신(臣)은 선왕의 명을 받아 뒤에 오는 왕에게 잘못이 없도록 부탁을 받았으니 도에 어긋난 행실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하며, 곧 동궁이라는 궁궐을 새로 건축하여 왕을 거기에 옮겼다. 그곳은 선왕의 묘와 가까운 곳이다.
이는 언제나 부왕의 능묘를 눈앞에 두고 보게 함으로써 선왕의 교훈을 생각하여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게 하기 위함이었다.

또 탕왕의 능 근처에 동궁을 짓고 꾸준히 간하여 매사에 미혹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왕이 왕궁에 있으면 아첨하는 많은 무리가 왕의 행실에 잘못이 있어도 오히려 그것을 칭찬했다. 그래서 이윤은 미혹한 왕을 왕궁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겨 스스로 반성할 기`회를 준 것이었다. 그리하여 왕은 별궁에서 3년 동안 외롭게 지냈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구도 이윤이 왕위를 찬탈하려 한다고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윤이 말하기를, “왕이 여전히 변치 않으시므로 불의는 습성이 되었으니 나는 의를 행치 않는 자는 따를 수 없다. 동(桐) 땅에 궁을 세우고 선왕을 가까이 모시어 교훈을 받음으로써 평생토록 미혹되지 않게 하리라.”
왕이 동궁(桐宮)으로 가서 부왕의 묘(廟)에 복상(服喪)하고 계셨으니 마침내 진실 된 덕을 닦을 수 있게 되었다.


王未克變 伊尹曰 玆乃不義 習與性成 予弗狎于弗順 營于桐宮 密邇先王其訓 無碑世迷 王緖桐宮居憂 克終允德  ●『서경』, 「태갑(太甲)」1편

** 『서경』에는 「이훈(伊訓)」, 「태갑(太甲)」, 「함유일덕(咸有一德)」 세 편이 있는데, 이 중에서 이윤이 왕 태갑에게 올린 글은 오늘까지도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주고 있다.


태갑은 원래 현명했으므로 매일 부왕의 묘 곁에서 조용히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탕왕이 나라를 세울 때의 노고를 생각하며 행실을 삼가고 덕을 닦게 되었다. 이에 이윤은 대단히 기뻐하여 다시 왕을 영접하고 복위시켰다.

왕이 겸허한 태도로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이르시되,
“소자는 덕에 밝지 못하여 스스로 불초에 이르러 욕심으로 법도를 어기며 방탕하여 예를 폐하고 허물을 몸에 부르니, 하늘이 내리신 재앙은 오히려 피하려니와 스스로 지은 재앙에서 가히 도망하지 못하니, 과거 스승의 훈계를 등져 그 처음에는 미치지 못하나, 그대의 덕을 힘입어 그 마침을 도모하나이다.”

이윤이 공손히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이르되,
“그 몸을 닦으며 미쁜 덕이 아래와 화합하는 밝은 임금인 것입니다. 선왕이 곤궁한 백성들을 자식같이 사랑하셨으므로 백성이 그 명령을 복종하여 기뻐하지 않은 이가 없었고 이웃나라까지도 우리 임금을 기다리고 있으니 임금님이 오시면 벌을 받지 않게 된다고 했습니다.” ●『서경』, 「태갑」편

이윤이 임금에게 정사를 다시 맡긴 후에 은퇴하면서 덕으로 훈계를 하였다.
“슬프도다! 
하늘은 믿을 수 없고 명(命)은 일정치 않으니 그 이 떳떳하면 자리를 보전하고, 그 덕이 떳떳하지 못하면 구주(九州)가 이로써 망할 것입니다“ ●『서경』, 「함유일덕」편

번지가 공자에게 “인(仁)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니라.
라고 답했다.
다시 번지가 “지(知)는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지(知)는 사람을 아는 것이니라. 옛날에 탕 임금이 백성 가운데서 이윤을 천거하여 재상을 삼으니 불인(不仁)한 자가 멀어졌다”고 하며 이윤의 사람됨을 찬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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