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다시 한 번 ‘선언’을 읽자
인터넷은 모두가 평등한 상태에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인가? 이 질문에 그렇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특히 한국에서는 더욱더. 그럼에도 사람들은 인터넷으로 계속해서 모여들고 있고,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일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지상파 뉴스 대신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통해 세상을 읽는다. 신문과 방송으로 접하지 못하는 정보들이 그곳에 있다.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공유하고, 의견을 나누고, 창작하고, 여가를 즐긴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는 허위사실 유포와 명예훼손으로 이용자들을 고소하고, 불법다운로드 근절을 핑계로 사람들을 감시한다.
인터넷에 어떤 내용이 올라오고, 어떤 파일들이 오고 가는지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런 컨텐츠들을 접하기 위해 어떤 포털을 이용하는지, 어떤 웹 브라우저를 이용하는지, 또 어떤 OS를 쓰는지, 또 그 과정에서 (이용자가) 어떤 정보들을 흘리는지, 나아가 어떤 구조로 만들어진 하드웨어를 이용하는지까지 거의 모든 것이 문제가 있다.
과연 인터넷은 자유로운 공간인가?
드미트리 클라이너는 이 책 [텔레코뮤니스트 선언]에서 아주 직접적인 방식으로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원래 상호협력적이고 대안적인 생산양식을 창출시킬 가능성을 가진 인터넷이 그런 식으로 문제화되는 방식을 단적으로 ‘클라이언트-서버 자본주의 국가’, 혹은 ‘벤처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클라이너가 정의하는 벤처 자본주의하에서 “웹사이트의 운영자는 사용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콘텐츠와 선택사양을 완전히 통제”한다.
그런데 의문이다. 우리는 무능하고 수동적인 소비자가 아니다. 최근 이색적인 홍보로 관심을 불러모았던 한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의 광고 문구처럼, 사람들은 ‘나는 멍청한 소비자가 아니야!’(I am not a stupid consumer!)라고 외칠만할지도 모르겠다. 웹2.0 시대에서 우리는 일방적인 콘텐츠의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자였고, 그야말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기표현의 주체이지 않았던가.
정말 우리는 능동적인 주체인가?
클라이너가 문제 삼고 있는 곳은 정확히 바로 그 지점이다. 벤처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고 정말 원하는 것은 바로 그것, 사람들이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기표현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클라이너가 보기에 그 ‘현명한 생산자들’이야 말로 “급여를 요구하지 않고 무한한 콘텐츠를 생산하는 지칠 줄 모르는 노동자”(57쪽)들이다. 그 현명한 생산자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심지어 즐겁게 착취당하는 이들이다. 그는 “웹 2.0은 공동체가 창출한 가치를 사적으로 포획하는 비즈니스 모델”(59쪽)이고, “자유로운 또래 협력 시스템의 몰락이자 획일적인 온라인 서비스의 회귀”(65쪽)이자 “정보 공유지에 대한 자본주의적 인클로저의 제2 물결”(67쪽)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그는 최근 미래성장을 위한 가장 중요한 동력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클라우드 컴퓨팅을 “정보공유지에 대한 제3의 인클로저” (67쪽)운동이라고 규정한다. 문제는 통제 가능한 형태로 점점 집중화되어가는 시스템이고, 그를 통해 공유 자원을 사유화시키는 자본의 논리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인터넷에 대한 통제와 검열의 폐지나 더 많은 자유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논리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생산양식을 고안해내는 것이다.
이 책의 미덕은 바로 여기 있다. 비판을 급진화하는 대신 실현 가능성이라는 이름으로 모두가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에 몰두하는 시대에, 반자본주의적 프로그램을 마련하기보다는 자본주의 내부에서 점진적인 변화를 꿈꾸는 것이 운동의 정석이 되어버린 시대에 클라이너는 다시 마르크스를 호명하며 ‘인터넷 노동계급의 상태’를 분석하고 ‘선언’을 감행한다.
소유권, 카피라이트, 카피레프트
문제의 핵심을 자본으로부터 찾은 클라이너는 곧바로 소유의 문제로 들어간다. 특히 문화적 창작물들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어떻게 개인의 소유로 전환되는가를 살펴봄으로써 그는 사적 소유에서 공유적 생산(또래 생산)으로의 전환을 선언의 중심에 위치시킨다. 물론 이때의 문화적 창작물이란 비물질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클라이너의 관심은 처음부터 생산물이라는 결과가 아니라 그것들을 생산하기 위한 조건을 어떻게 새롭게 만들어낼 것이냐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문화적 창작물들의 소유에 관해 살펴보기 위해 한국에서 저작권이라고 불리는 카피라이트의 역사적 형성과 현재적 논의 지형을 검토한다.
그런데 왜 카피라이트일까? 그것은 단지 글이나 음악, 영상 따위를 대상으로 하는 협소한 규정일 뿐이지 않는가. 물론 그렇다. 하지만 그것은 그 이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소유의 대상일 뿐 아니라 소유라는 관념을 근본적으로 확장하고 보편화하는 핵심적인 이데올로기적 구성물이다. 물론 여기서 이데올로기라 함은 허위의식이나 단순한 가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물질적 현실을 실현하는 초월론적 가상이자 현실의 구성 원리라 할 수 있다.
앤 여왕법, 근대적 저작권법의 시작
복제 출판물의 정치적 검열을 목적으로 한 출판규제법을 제외한다면, 근대적 의미의 저작권법은 1710년 영국에서 출현했다고 할 수 있다. 보통 ‘앤 여왕법’이라 불리는 이 근대적 저작권법은 당시 왕당파를 지지하고 후원하던 출판업 동맹의 힘을 약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앤 여왕법’ 전까지만 해도 저자라는 개념은 없었고 헐값에 넘겨받은 출판물을 자유로이 복제하고 판매할 수 있는 권리는 출판업자에게 있었다. ‘앤 여왕법’은 출판업자들을 견제하기 위해 ‘저자’라는 개념을 고안해냈고, 창작물은 저자의 것이지 출판업자들의 것이 아니라고 선언하게 된다.
당시 출판업 동맹의 세력을 약화하기 위해 저자개념을 고안해낸 인물 중 하나는 [로빈슨 크루소]로 유명한 다니엘 디포우(Daniel Defoe)다. 디포우는 ‘앤 여왕법’이 제정되기 전 [출판규제론]이라는 글에서 정치적 검열을 위한 사전 검열은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면 사후에 처벌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사후 처벌을 위해 출판된 글에 저자의 이름을 명기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디포우의 이러한 주장이 흥미로운 점은 저자의 명기를 재산권과 연결하여 설명한다는 점이다.
그는 작가가 자신의 저작에서 이익을 취할 수 있어야만 그 저작의 내용에 대해서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지적하며, 법을 통해 “서적에 대한 저자의 재산권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디포우의 이러한 주장은 역사상 저자의 재산권을 주장한 최초의 사례로 기록된다. 앤 여왕법이 제정된 이후 저자란 무엇이며, 그에게 어떤 ‘창조성’이나 ‘독창성’이 있기에 글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지와 관련된 논쟁이 근 한 세기 동안 지루하게 진행된다.
이처럼 저자라는 개념뿐 아니라 창작물의 소유라는 관념도 역사적으로 보면 극히 최근에 나타난 것일 뿐이다. 이 논쟁의 진행과 더불어 드디어 저자와 그의 소유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이 논쟁 이후에야 비로소 타인의 소유물과 저자의 소유물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재산으로서의 가치를 가지는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을 구별하는 관습이 생겨났다. 18세기 동안 계속해서 진행되었던 ‘결정판’ 혹은 특정 작가의 ‘전집’ 편집 열기는 이러한 저작권의 확립이라는 배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이때 내가 쓴 글과 타인이 쓴 글을 구별하는 인용부호와 같은 문법적 규칙이 표준화되고 그것의 강제적 사용이 의무화된다.
카피라이트, 확장된 소유 개념
카피라이트를 매개로 한 확장된 소유 개념은 놀라우리만치 확고하게 우리 삶에 뿌리내리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9·11 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테러리스트로 알려진 인물은 ‘유나바머’였다. 그의 본명은 시어도어 카진스키로, 16세에 하버드대에 입학하고, 25세에 UC버클리 조교수가 된 천재라 불리던 이 중 하나였다. 그의 유나바머라는 별칭은 ‘university and airline bomber’에서 온 것으로 주요 테러 장소가 대학과 공항 같은 곳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었다.
그는 1995년에 테러 중단을 조건으로 유력 언론이었던 뉴욕타임즈와 워싱턴포스트지에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과학기술문명비판’ 논문 게재를 요구했다. 그의 선언문은 [산업사회와 그 미래]라는 제목을 단 책으로 출간될 만큼 긴 분량이었다. 그는 “혁명의 목표는 정부의 전복이 아니라 테크놀로지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극단적인 기술혐오주의자였다.
주목할 부분은 그 선언문의 각주 16번이다. 거기에는 “만약 저작권법이 문제가 되어 게재할 수 없다면 주 16을 다음 문장으로 바꿔주기 바란다”는 문장이 나온다. 20여 년 동안 테러를 해오며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그였고, 테러와의 타협을 절대 용인하지 않는 미국에서 자신의 요구를 관철한 인물이었던 그가 자신의 글이 카피라이트 때문에 게재되지 못할 것을 우려했다는 것은 거의 코미디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그토록 자신이 혐오한 기술이 지적 재산권을 통해 보호되고 있다는 점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클라이너가 비판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의 카피라이트라 할 수 있다. 카피라이트(copyright)는 보통 저작권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이런 번역은 잘못된 것이다. 마치 카피라이트가 저자, 즉 창작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카피라이트는 말 그대로 복제의 권리일 뿐이다. 복제의 권리는 법적으로 일부 혹은 전부를 양도할 수 있다. 따라서 카피라이트는 복제의 권리를 가진 사람의 이해를 보장하기 위한 제도로 형성될 수밖에 없다. 당연히 그 복제의 권리는 거대 유통망을 장악하고 있는 기업들에 귀속될 것이다.
한국의 저작권법
한국의 저작권법은 1957년에 만들어졌는데, 사실상 유명무실한 법이었다. 1986년 1차 전부 개정 이후 2009년의 17차 개정 이전까지 1조는 한 번도 개정된 적이 없다. 원래 모든 법의 1조는 법의 목적을 명시하는 것으로, 그것은 바뀌지 않는다.
2009년 17차 개정 이전에 저작권법 1조(목적)는 “저작자의 권리와 이에 인접하는 권리를 보호하고 저작물의 공정한 이용을 도모함으로써 문화의 향상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한미 FTA 협상이 마무리되고 난 이후인 2009년의 17차 개정에서는 1조의 ‘문화의 향상발전’이라는 문구가 ‘문화 및 관련 산업의 향상 발전’으로 바뀌게 된다. 이는 저작권법이 존재하는 실질적인 이유를 보여주는 징후적인 변화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좁게는 카피라이트가 문화산업의 이해에 충실하게 작동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넓게는 소유의 범위를 확장하고, 소유에 대한 관념과 사유를 뿌리에서부터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규정하겠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라 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클라이너가 이 책에서 카피라이트를 법적인 쟁점이 아니라 소유를 중심에 둔 자본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투쟁의 한 거점으로 삼는 이유일 것이고, 카피파레프트라는 전략을 제안하게 된 이유일 것이다.
남겨진 쟁점들
자본의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자유로운 인터넷도 자유로운 문화도, 그리고 그것들을 만들기 위한 자유로운 사회도 불가능하다는 클라이너의 비판은 충분히 의미 있는 것이고, 지금 이 시점에서 필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쟁점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예를 들어 그가 경제 시스템의 문제를 소유권의 문제로, 착취의 문제를 법적 특권을 통한 강탈의 문제로 환원할 때 경제는 사라지고 정치적 강제만이 남게 된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이 글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을 염두에 둔 것이었고, 심지어 이 책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텔레코뮤니스트 네트워크 선언’에서는 [공산당 선언]의 문구들을 세심하게 수정하여 현대적 버전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책은 마르크스를 반복하며 현 정세를 분석하고 계급투쟁과 사회변혁 전략에 대해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때의 마르크스가 그의 핵심에서의 마르크스, 고유한 문제설정을 가진 마르크스인가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자본주의가 얼마나 사악한 체제인지를 고발하려는 목적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경제라고 부르는 것이 정치경제학을 통해 어떻게 현실화하고 그 경제 속에 어떤 적대와 모순이 내재하는지를 밝히려는 시도였다면, 정치의 우위 속에서 경제를 삭제하는 것은 마르크스를 완전히 오해하고 제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정세를 분석하고 자본의 모순을 드러내기 위해서 마르크스를 다시 불러들이는 일은 경제를 분석함으로써 경제의 불가능성을 주장하는 마르크스를 다시 마주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을 주장하며 그에 따른 생산양식의 발전이라는 진화론적 역사주의의 흔적을 남긴 마르크스를 비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클라이너는 그 진화론적 역사주의의 흔적을 제거하기는커녕 그 진화론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의 서문에서부터, (그것을 인용하며) 글을 시작하고 있다.
[텔레코뮤니스트 선언]은 이론서가 아니라 도래할 미래를 위한 프로그램을 제시하기 위해 쓰였다. 여기서 이론적 논의를 부각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무의미한 일일 수 있으며, 그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선언]이 정세 분석과 비판을 토대로 한 것이라면 그것을 따져 묻는 것도 이 책이 가진 중요한 쟁점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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