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 의 판본과 성립의 역사
衍坡 | 2013/10/16 22:06 | 도덕경[노자]
《도덕경》 의 판본과 성립의 역사
-이석명, 〈해제 : 백서본과 곽점본, 그리고 왕필본〉 《백서노자》, 청계출판, 2003.
-이석명, 〈해제 : 백서본과 곽점본, 그리고 왕필본〉 《백서노자》, 청계출판, 2003.
Ⅰ. “노자”의 판본과 출토
1.老子의 판본 : 郭店本 / 帛書本 / 王弼本
2.백서본 “노자” 발굴
1) 출토 시기 및 장소, 출토물
* 1973년 12월 중국 長沙 馬王堆, 한나라 초기 묘지 발굴 중 3호묘
* “老子”, “周易”, 고대의 사상, 역사, 군사, 천문, 역법 등과 관련된 20여 종의 고적 포함
2) 백서 “노자” 갑본 / 을본
* 발굴 당시 두 종류의 “노자” 출토(비교적 오래된 것이 ‘甲本’, 늦은 것이 ‘乙本’)
* 갑본 “노자”
- 길이는 약 24cm, 篆書와 隸書 중간 글자체로 464행에 기록
- 劉邦과 呂雉는 물론, 진시황의 이름(政)과 장양왕의 이름(楚)을 避諱하지 않았고,
1) 출토 시기 및 장소, 출토물
* 1973년 12월 중국 長沙 馬王堆, 한나라 초기 묘지 발굴 중 3호묘
* “老子”, “周易”, 고대의 사상, 역사, 군사, 천문, 역법 등과 관련된 20여 종의 고적 포함
2) 백서 “노자” 갑본 / 을본
* 발굴 당시 두 종류의 “노자” 출토(비교적 오래된 것이 ‘甲本’, 늦은 것이 ‘乙本’)
* 갑본 “노자”
- 길이는 약 24cm, 篆書와 隸書 중간 글자체로 464행에 기록
- 劉邦과 呂雉는 물론, 진시황의 이름(政)과 장양왕의 이름(楚)을 避諱하지 않았고,
글자체가 隸書와 篆書 사이인 점을 고려할 때,
B.C 247년 이전 전국 시대 말엽에 성립되었을 것으로 추정
- ‘德經’이 앞에, ‘道經’이 뒤에 배치되어 있으며, 일부 단락 사이에 ‘●’ 표시로 分章 표시
* 을본 “노자”
- 길이가 48cm, 隸書로 252행에 기록되어 있음
- 한고조의 이름(邦)을 避諱하였으나, 이후 황제들은 피휘하지 않았고,
- ‘德經’이 앞에, ‘道經’이 뒤에 배치되어 있으며, 일부 단락 사이에 ‘●’ 표시로 分章 표시
* 을본 “노자”
- 길이가 48cm, 隸書로 252행에 기록되어 있음
- 한고조의 이름(邦)을 避諱하였으나, 이후 황제들은 피휘하지 않았고,
‘당대 황제의 이름만 피휘한다’는 秦始皇 피휘법을 감안할 때,
漢高祖 시기(최대 B.C 195년 이전)에 성립되었을 것으로 추정
- 내용상 분장되지 않았음
- 내용상 분장되지 않았음
3.곽점본 “노자” 발굴
1) 출토 시기 및 장소, 출토물
* 1993년 겨울, 중국 湖北省 荊門市 沙洋區 四方鄕 郭店村에서 출토
* 800여 매의 죽간 출토, 그 중 일보는 “노자”의 글이 기록되어 있음
- 곽점본 “노자”와 함께 출토된 유물을 통해 곽점 “노자”가 戰國時代 중기~후반 사이에
1) 출토 시기 및 장소, 출토물
* 1993년 겨울, 중국 湖北省 荊門市 沙洋區 四方鄕 郭店村에서 출토
* 800여 매의 죽간 출토, 그 중 일보는 “노자”의 글이 기록되어 있음
- 곽점본 “노자”와 함께 출토된 유물을 통해 곽점 “노자”가 戰國時代 중기~후반 사이에
성립되었을 것으로 추정
Ⅱ. 판본별 차이
1.곽점본과 백서본의 차이 1) 시기적 차이 : 곽점본은 전국시대 중~후반 사이 성립 / 백서본은 전국시대 말기 성립
2) 분량의 차이 : 곽점본은 백서본의 2/5 정도 분량
3) 형식상의 차이
* 곽점본에는 백서본의 구절이 없음(왕필본 1, 3, 4, 6, 7장 등 49개 장)
* 곽점본의 내용이 백서본에 이르러서는 일부 문자 및 문구가 추가
2) 분량의 차이 : 곽점본은 백서본의 2/5 정도 분량
3) 형식상의 차이
* 곽점본에는 백서본의 구절이 없음(왕필본 1, 3, 4, 6, 7장 등 49개 장)
* 곽점본의 내용이 백서본에 이르러서는 일부 문자 및 문구가 추가
[‘成而弗去’ → ‘成功而弗居也’]
- 곽점본과 백서본에 중복되는 내용 31장 중 16회에 걸쳐 이러한 현상이 등장
* 백서본에는 오류로 보이는 문자와 문구가 등장
- 筆寫 과정에서 발생한 ‘轉寫의 오류’ / 注文을 經文에 잘못 기록한 ‘주문의 경문화’
* 문장 형태를 살펴볼 때, 백서본이 곽점본보다 더 정형화 된 문장을 구사
4) 사상적 차이
* 백서본은 곽점본에 비해 反儒家적 특징이 두드러짐(왕필본 5, 18, 19장)
* 곽점본에 비해 백서본은 정치화된 문구들이 나타나기 시작(왕필본 7, 36, 65장)
- 백서노자의 성립 시기가 황로학 유행 시기와 일치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 곽점본과 백서본에 중복되는 내용 31장 중 16회에 걸쳐 이러한 현상이 등장
* 백서본에는 오류로 보이는 문자와 문구가 등장
- 筆寫 과정에서 발생한 ‘轉寫의 오류’ / 注文을 經文에 잘못 기록한 ‘주문의 경문화’
* 문장 형태를 살펴볼 때, 백서본이 곽점본보다 더 정형화 된 문장을 구사
4) 사상적 차이
* 백서본은 곽점본에 비해 反儒家적 특징이 두드러짐(왕필본 5, 18, 19장)
* 곽점본에 비해 백서본은 정치화된 문구들이 나타나기 시작(왕필본 7, 36, 65장)
- 백서노자의 성립 시기가 황로학 유행 시기와 일치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황로학의 영향 때문으로 추정
* 백서본에는 곽점본과 달리 본격적인 우주생성론의 사유가 등장(42장)
- 우주생성론은 전국 말기에 출현하고, 음양 사상에 기반을 둔 氣化宇宙論 유행
※소결 : “곽점본과 백서본의 형식적 차이에 근거할 때, 백서본은 기존의 ‘노자’ 자료들을 바탕으로 많은 부분을 새롭게 추가하여 발전시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백서본 성립 당시 유행하던 사상적 경향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p.20)
* 백서본에는 곽점본과 달리 본격적인 우주생성론의 사유가 등장(42장)
- 우주생성론은 전국 말기에 출현하고, 음양 사상에 기반을 둔 氣化宇宙論 유행
※소결 : “곽점본과 백서본의 형식적 차이에 근거할 때, 백서본은 기존의 ‘노자’ 자료들을 바탕으로 많은 부분을 새롭게 추가하여 발전시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백서본 성립 당시 유행하던 사상적 경향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p.20)
2.백서본과 왕필본의 차이 1) 백서본에서는 分章이 불분명함(갑본의 경우에도 부분적으로만 있음)
* “노자”를 ‘道上’ / ‘德下’로 편집하여 81장으로 확정한 것은 서한 말기 劉向
* 정식으로 “노자”의 編次를 확정하여 고정한 것은 唐 玄宗
2) 篇의 순서에 차이가 있음
* 왕필본은 ‘道經’이 上篇으로, ‘德經’이 下篇으로 구성되어있는 반면, 백서본은 ‘덕경’이 앞에, ‘도경’이 뒤에 배치되어 있음.
(저자는 아마 ‘도경’과 ‘덕경’의 구분도 분장과 마찬가지로 후대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봄.)
3) 일부 장의 순서에 차이가 있음
* 왕필본의 22-23-24장은 백서본에 24-22-24장순으로 구성, 40-41-42장 역시 41-40-42장으로 구성
4) 백서본에는 假借字 가 많고 복잡함
* 先秦 ~ 漢初에는 한자의 수가 3,300여 자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가차자가 많음
* 백서본 假借字에는 같은 음을 빌린 가차자, 선진과 한 대에 통용되던 가차자,
* “노자”를 ‘道上’ / ‘德下’로 편집하여 81장으로 확정한 것은 서한 말기 劉向
* 정식으로 “노자”의 編次를 확정하여 고정한 것은 唐 玄宗
2) 篇의 순서에 차이가 있음
* 왕필본은 ‘道經’이 上篇으로, ‘德經’이 下篇으로 구성되어있는 반면, 백서본은 ‘덕경’이 앞에, ‘도경’이 뒤에 배치되어 있음.
(저자는 아마 ‘도경’과 ‘덕경’의 구분도 분장과 마찬가지로 후대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봄.)
3) 일부 장의 순서에 차이가 있음
* 왕필본의 22-23-24장은 백서본에 24-22-24장순으로 구성, 40-41-42장 역시 41-40-42장으로 구성
4) 백서본에는 假借字 가 많고 복잡함
* 先秦 ~ 漢初에는 한자의 수가 3,300여 자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가차자가 많음
* 백서본 假借字에는 같은 음을 빌린 가차자, 선진과 한 대에 통용되던 가차자,
일부가 생략된 형태의 가차자, 의미가 같은 글자의 가차자
5) 백서본 문장에 어조사가 자주 등장
5) 백서본 문장에 어조사가 자주 등장
Ⅲ. “노자” 성립에 대한 가설
1. 곽점본-백서본-왕필본을 비교분석한 저자는 “노자”라는 텍스트가 노자 한 사람에 의해 한 사람의 사상을 담은 텍스트가 아니라, 역사적 과정 속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져 온 텍스트라는 결론을 내림
2. 현재 통용되는 “노자”는 “고대부터 전국 말기까지 ‘노자학파’의 사상이 종합되고 응집된 ‘종합서’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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