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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13일 토요일

자유 학문의 종말 - 광고와 인기에 영합하는 학문으로 타락하는 현대 학문들 -


자유 학문의 종말
- 광고와 인기에 영합하는 학문으로 타락하는 현대 학문들 -
학문은 진리에 근거해야하는 의무를 지닌다. Niklas Luhmann은 학문체계를 다른 체계로부터 구별해주는 근본적 특징으로 진리/비진리라는 이중 코드를 지칭했다. 학문은 16세기에서 17세기로의 전환기에 정치와 신학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고유한 기능체계로 형성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학문은 진리탐구에만 배타적으로 의무 지워진 자기지시(Selbstreferenz)이자 자기생산(Autopoiesis) 체계로 자리 메김 되었다.
Galileo Galilei와 교회가 겪었던 갈등은 이러한 과도기적 상황을 예시적으로 보여준다. 학문체계가 완전히 진리/비-진리로 코드화되었다고 해서, 진리 개념이 역사적 발달과정에서 내용과 프로그램 차원에서 다양한 변화와 상대화를 경험한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중세 스콜라철학의 verum est ens(존재자가 진리다.)라는 과격한(pathetisch) 진리개념은 Giambattista Vico에 이르러 verum quia factum(진리란 만들어진 것이다.)이라는 구성주의적 진리개뎜으로 대체되었다.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Für-wahr-halten)이 진리(Wahrheit)의 자리에 들어선 것이다. 그 후 Kant의 비판적 합리주의를 통해 진리의 도달불가능성 가설이 출현했다. 진리는 단지 부정적(ex negativo)으로만 규정될 수 있을 뿐이다. 즉 우리는 어떤 것이 아직 반증되지 않는 한에서만 그것을 진리로 볼 수 있을 뿐이다. 진리의 상태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옳지 않은 경우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면 될수룩 우리는 진리에 더욱 근접하게 된다.
진리의 상대화와 일시화(Temporalisierung)에도 불구하고 진리/비진리라는 근본적인 이항적 기준은 여전히 타당성을 지닌다. 아직 반증되지 않은 것이 진리이며, 학문은 모든 노력을 기울여 자신을 검증과 반증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조건들에 내맡겨야만 한다. 학문은 인증이 아니라 반증을 찾아 나서야만 하며, 자신을 가능한 한 단순하게 반증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상황에 내맡겨야만 한다. 만일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학문은 자기면역화 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자기면역화란 학문적 진술 내에 반증을 어렵게 만드는 메커니즘을 구축하려는 노력을 일컫다. 예컨대 마르크스주의가 전체 노동자의 “참되고 객관적인” 이익을 부각시키고, 이것을 경험적 이익에 대비시켰다면, 여기서 관건이 되는 것이 바로 면역화 전략이다. 왜냐하면 참된 이익은 어떤 방식으로도 경험적(즉 그릇된) 이익을 통해 의문시될 수 없기 때문이다. 참된 이익을 경험적 이익이라는 우회로 없이도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신성한 진리소유자의 위치에 있는 것이며, 자신을 노력이 많이 드는 반론의 처치에 내맡길 필요가 없다. 이를 통해 이론은 성공적으로 면역화된다.
자유 학문은 연구의 자유와 사고의 자유를 전제한다. 이 두 가지가 충족되어졌을 때라야 사회적으로 이슈가 될 수 있는 모든 주제들이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내용적 금기 또는 방법적 금기는 학문의 죽음을 의미한다.
사회과학은 기본적으로 진리로 생각된 것을 결정적 비진리로부터 구별하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첫째는 경험적인 검증에 의한 방법으로서, 여기서는 경험적 사회연구의 규칙들과 방법들이 정확하게 확립되어 있어서 다양한 사회적 요소들의 관련성에 관한 가설들을 가능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자료들을 수집하고 구성한다.
둘째는 학문공동체의 상호주관성에 의한 방법으로서, 여기서는 제시된 가정들이 전문가들의 경쟁적인 대화의 과정에서 저울질되고 비판받게 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가해질 비판은 합리적 근거가 있는 비판이라야만 한다. 물론 진리가 전문가들의 타당성결정 하나에 근거하여 구해져서는 안 된다. 그리고 어떤 것이 진리인지 아닌지가 다수결에 의해 결정될 수도 없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판결은, 이 가설들은 아직 반증되지 않은 것으로, 즉 일시적으로만 진리로 인정될 수 있는 시점에 이르기까지, 다시금 반론의 조처에 맡겨지도록 하기 위하여, 문제제기 및 방법적 검증 메커니즘이 새롭게 다듬어지도록 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
이와 같은 반복적인 처치(방법)는 연구의 자유와 사고의 자유를 전제한다. 단지 이 두 가지 자유가 보장될 경우라야 모든 사회적 주제와 모든 방법적 접근이 학문적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내용적 문제제기 또는 방법적 배열에서의 금기는 학문의 죽음이다. 이것은 어떤 경우에서든 보장되어야만 한다.
학문의 자유는 또한 사회적 독립을 요청한다. 전후 사회학의 학문발달에 있어서 특이했던 점은 이것이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의 발달에 종속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1968년 이후 이러한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러한 연관에서 Ute Scheuch의 저서 『Erwin K. Scheuch im roten Jahrzehnt』는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그녀의 남편이자 사회연구가였던 Erwin K. Scheuch가 어떻게 좌파 마르크스주의자 집단의 표적이 되었으며, 그의 강의가 어떻게 방해를 받았고, 보이코트되어졌는지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회학은 점점 더 사회적으로 신성불가침한 가치관을 지향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1970년대 사회학의 문제가 되었다. 상황이 어떤가라는 물음은 제기되지 않았고 단지 사회는 어떻게 조직되어야만 하는가라는 당위적인 물음만이 제기되었을 뿐이다. 교리가 분석에 선행했던 셈이다.
사회학은 이러한 사회적 경향을 자신의 학문적 관심 대상으로 만드는 대신에 학문적으로 치장하여 재생산하면서, 사회적 경향들의 폭넓은 부분들에 자신을 내맡겼다. 연구 대상에 대한 사회학의 성찰적 거리두기는 점차로 사라져갔다.
일상 정치를 분석적으로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으로 일상 정치에 의해 내용적으로 침투당하고 정치적 입장에 따라 나누어진 전후 독일 사회학을 “더러운 학문”으로 표현했던 Brigitta Nedelmann의 생각은 전적으로 옳았다. 그는 “다양한 이론들 대신에 정치적인 입장들만이 무성하게 생겨났다.”고 당시의 상황을 평가했다.
이와 같은 일상과의 무차별적 결탁을 통해 사회학은 주류적인 정치적 견해를 재생산했다. 보수적 사회학은 이러한 상황 하에서 더 이상 자신의 실존적 토대를 발견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사회학에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자연과학 영역에서도 학문적 자율성이 포기되는 경우를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지원금과 연구비에 종속되는 경향이 심화되면서 연구의 내용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학문적, 대중매체적, 정치경제적 복합체가 형성되었다. 이는 비록 애석한 일이지만 진리/비진리라는 코드가 유효한 한에서 제한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대중매체적으로 사전에 미리 구상된 원칙들을 추종하는 “인기에 영합하는 학문(Gefälligkeitswissenschaft)”을 더 이상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Linus Geisler는 점점 더 광고학문으로 변모하고 있는 의학과 바이오테크놀로지 연구에서 위험을 보았다. 재정을 지원받기 원하는 학문은 자신의 연구를 통해 요청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광고하고, 선전해야만 한다.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기초 연구는 실종된다.
예를 들면 유전자조작기술 연구는 점점 더 아직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장차 가능할 수도 있는 알츠하이머병, 파킨슨씨병, 후천성 치매, 또는 유사한 퇴행성 신경체계질환의 치유가능성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를 정당화한다. Geisler는 그의 저서 『행함과 하지 않음 사이에서(Zwischen Tun und Lassen)』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관점의 왜곡, 연구목적들의 실체화, 정치적 부담, 기대압력, 중병환자들의 기만, 그리고 경제적 탐욕으로부터 유해한 혼합물이 생겨난다. 유전자조작기술 연구는 학문의 자유와 더 이상 관계가 없다.”
건강과학과 스포츠과학의 상황에 관한 Swen Körner의 체계이론적 분석 『다시 본 비만 아동(Dicke Kinder revisited)』(2008)은 독창적이다. Körner는 이 학문들이 대중매체와 정치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반향을 생산하기 위하여 그들의 자료들을 어떻게 극화시키고 친숙한 체질량지수(BMI) 같이 복잡성이 떨어지는 지수 체계들로 포장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프로젝트성 용역연구의 지속가능성은, 사회적 관심의 정도가 명료성의 정도에 비례하는 학문외적 반향 맥락들에서, 그러한 연구를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여부에 결정적으로 의존한다.”
지원금과 연구비에 종속이 심화되면서 학문적, 대중매체적, 정치경제적 복합체가 형성되었다. 한 때 자긍심을 지녔던 학문들이 광고 학문으로 또는 인기에 영합하는 학문으로 타락한다.
비만과 과체중의 확산에 관한 숫자들은 체계적으로 과장되고, 높게 계산되며, 측정방법들은 타당성을 잃을 정도로 단순화되고, 이를 통해 이 숫자들은 사회에 대한 큰 위협가능성을 재현한다. 단지 그렇게 이 학문들은 사회의 관심을 끌게 된다. Körner에 따르면 여기서 “학문적 처치방법의 전도”가 일어난다. 규정에 적합하게(lege artis) 처치하고 평가의 방향을 자료들에 맞추는 대신에 경험적 자료의 재료가 미리 기존에 선정된 평가에 맞춰진다.
이러한 트릭을 통해 매체의 관심을 끌고, 신문에 “독일은 너무 뚱뚱하다!” 같은 기사제목이 나타나도록 하는데 성공한다. 그 효과는 계속적인 연구비의 수주이다. 그리고 전국 차원에서 식사습관과 운동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캠페인 계획이 세워진다. 루만이 알았듯이 중요한 것은 제시된 결과를 통해 계약연장을 위한 조건들을 충족하는 일이다.
어떤 학문은 경험적으로 얻어진 자료들을 통계 처리하여 평가하는데 전혀 관여할 필요조차 없다. 예컨대 기상연구는 컴퓨터시뮬레이션을 이용해서, 미래의 경험적 선취에 해당하는, 미래의 시나리오를 구상한다. 이를 통해 기상연구는, 급박한 정치적 행위를 필요하게 만드는, 인류에 대한 위협가능성을 연출할 수 있다. 정치는 다시금 계속해서 연구비를 마련해주며, 이를 통해 미래의 기상은 조금 더 좋게 예견될 수 있다.
요약하자면 학문은 대중매체의 바늘구멍같이 좁은 귀를 통해 계속해서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는 장차 극화하고, 스캔들화하며, 흔들어 깨우고, 경악시켜야만 한다. 대중매체는 촉매와 순간온수기와 반향증폭기를 하나로 모아 놓은 것과 같다. 대중매체는 공식이나 퍼센트 수치로 단순화시킨 응축된 자료를 달라고 아우성을 친다. 오직 내재적인 “극단화의 압력”에 순종하는 자만이 주목받고 국가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모든 사회 영역들이 대중매체에 의해 침략당하고 있는 시대에 학문은 새로운 종속에 처한다. 지금까지 지배적이었던 학문공동체로의 내부지향이 증폭된 외부지향을 통해 대체되고 중첩될 위험이 크다. 새롭게 출현한 대중매체와 보다 강화된 지원금 종속성은 학문이 학문 외적 공간에서 반향을 증폭하도록 강요한다. 학문업무에로의 복귀가 이루어져야 한다. 학문의 자유를 걱정해야만 할 것 같다.
Jost Bauch(www.jungefreiheit.de 34/10 20. August2010)의 Das Ende Freier Wissenschaften: Ankuendigungen und Gefaelligkeiten
JUNGE FREIHEIT - Wochenzeitung aus Berlin - Nachrichten aus Politik und Wirtschaft sowie zu aktuellen Themen aus Kultur und Wissenschaft.
JUNGEFREIHEIT.DE|작성자: CHRISTIAN DO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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