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자 구별하기: Maturana에 대한 해석 하나
Ernst von Glasersf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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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 없이 내 있을 리 없고, 내 없이 구별이 있을 리 없지.
장자, 4th Cent., B.C.(*)
"언어하기(languaging)"는, Maturana가 이따금씩 설명한 대로, 여타 것들 사이에서 방향잡기를 합니다. 그가 이 단어로 의미한 것은, 주의 돌리기이며, 그 결과로서, 타자들에 대한 개체 경험입니다; 이는 언어발달을 위한 필수 전제 조건으로서 "합의 영역들(consensual domains)"의 발달을 조장하는 한 방식입니다. 내가 이곳에서 시작한 ("언어하기") 문장은 기껏해야 Maturana 스타일의 핏기 없는 모방에 불과할지라도, 그것은 필시 Maturana 시스템의 중요한 한 측면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측면이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방식으로 반복해서 속출하는 순환성입니다.
내 해석으로, Maturana의 해설들 가운데 순환성에 주목할 때마다 절대 필요불가결한 것은, 이러한 순환성이, 우리 서양 철학의 가장 전통적 체계에서 말하는, 일종의 헛발 짚기 또는 실수가 아니란 점을 자신한테 부단히 반복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실수가 아니라, 자기-창발적(autopoietic) 모델에서 직접 생겨나는, 일부러 선택한, 바탕 조건입니다. Maturana에 따르면, 인지하기 유기체는 정보의 측면에서는 닫혀 있습니다. 그 유기체가, 그럼에도, 기술(記述)을, 말인즉, 개념들, 개념 형성 구조들, 이론들, 그리고 결국 자신의 세계상(世界像)에 이르기까지, 생산할 수 있다면, 그 유기체는 오로지 그 자신의 경험 영역(experiential domain)에서 상당한 추상 과정을 거치며 주워모은 쌓기 블록들을 사용함으로써만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을 뿐이란 점은 분명합니다. Maturana가 "모든 인지 영역(cognitive domain)들은 전적으로 그 유기체 자신이 만든 구별 조작들의 결과로 생겨납니다"로 표현한 이러한 통찰력은, 내 조우(遭遇)한 바로 첫 순간 그의 작업에 끌려들게 만든 점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1
나는 Maturana가 자기-창발(autopoiesis)이라는 생물학 관념을 정식화할 때 바탕한 것들과는 전혀 다른 기저(基底) 고찰들에 바탕해서 같은 결론에 이르렀습니다.2 (약간은 축약된 그리고 이상화된) 내 자신의 경로는, 초반에는 Montaigne를 통한 소트라테스 이전 학파들, Berkeley, Vico, 그리고 Kant의 의혹들에서 실용주의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Ceccato의 "조작 학파"와 Piaget의 "발생론적 인식론"으로 이어졌습니다. 여기서는 이와 관계 없어 보이지만, Maturana의 해설들이 전통 철학에 전혀 준거하고 있지 않기에, 그의 몇몇 기본 주장들이 인습에 박힌 인식론 역사에서 돌발적으로 출현했던 일련의 사상들로 실증될 수 있음을 언급하는 것은 타당해 보입니다. 이들 일련의 사상들이 가끔씩 공식적 철학 분과에 염장(鹽臧)을 질렀지만, 그들은 지속적 효과를 얻지 못한 채 변경의 호기심으로 머물러 있습니다. 내 제안하는 바, 이러한 무시의 근거는 서양 관념의 전(全) 역사와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두 가지 필요 조건이 인식론적 기도(企圖)의 바탕으로 고려되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필요한 것은, 우리가 "참된 지식"이라 부르고 싶은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알기 주체와 독립된 것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 요구 조건은, 지식은 "물-자체"의 세계를, 진리 혹 사실 일치의 그 시대 양식으로, 재현(再現)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에만 진지하게 고려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모든 시대 회의론자들이 이들 두 요구 조건은 달성될 수 없는 것들임을 논리적 논증들을 빌어 설명했으며, 자신들을 한정지워 절대 지식은 불가능하다고 관찰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단지 몇몇 인물들만이, 한 발 더 나아가, 행하기 주체의 경험 세계에서 성취될 수 있는 것들에다 지식 개념을 자유롭게 적용할 수 있게끔 그 개념을 언급된 가능하지 않은 제약 조건들에서 해방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러한 발걸음을 내딪은 이들은 아웃사이더(局外者)들로 낙인찍혔고 그 덕택에 직업적 철학가들은 무시할 수 있었습니다.
닫힌 경험 세계
여기서 과거 2-30년에 걸쳐 철학적 분위기가 왜 변했는가를 검토할 의도는 없습니다. 사실, 오늘날에는 지식의 상대적 관점 혹은 견해를 취하는 입장들은 허무주의나 여타 위험한 이단으로 낙인찍히지 않고도 방어될 수 있습니다.
Maturana가 칠레의 반동적 독재자 피노체트에 대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막바지 20년간 살아남았다는 것은, 그한테는, 그리고 우리한테도, 행운입니다. 행운이라 말하는 것은, Maturana는 의심할 바 없이, 지난 세기, 철회된 바 없이 성취를 이룬 사상가들 가운데 한 명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에서, (유물론적이든 형이상학적이든) 실재론적 도그마의 권위주의적 지배를 확실히 뒤흔든 것은 물리학에 대한 관점들의 혁명 뿐만 아니라,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 "진실, 혹 진리들"에 대해 신뢰할 수 없음을 명백히 표명하는 흐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지식을 유기체에 의존하는 것으로 그리고 내부(internal) 조작들로 조성된 닫힌 회로의 산물로까지 설명하는 인지 모델들에 대한 혐오감(嫌惡感)는 결코 사라지고 있지 않습니다.
Maturana가 그의 강의 중에 종종 보여준 광범위한 개념적 흐름도, 좌측에는 객관성을 갖춘 설명이 (청중의 관점에서) 붕괴되는 바가, 우측에는 객관성 없는 설명이 주어집니다. 사람들이 그 자신의 기술하기에서 왼편을 택하든 오른편을 택하든, Maturana에 따르면, 그것은 정서의 문제입니다. 지식과 언어가 관련되는 한, 왼편을 택하면, 지식은 객관적 실재를 포착할 수 있고 언어는 그것을 지시할 수 있고 상징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신념에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Maturana가 생각하는 객관성 개념은 이러한 믿음에 의존하는 것입니다.3 Maturana 또한, 내가 그를 바르게 이해했다면, 이러한 신념을 공유하고 있지 않으며, 논의할 바 없이 자신을 오른편에 위치짓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객관성은 폐기되며 ("괄호쳐지며(put in parentheses)") 오로지 가능한 실재들이란 관찰자의 구별 조작들로 맺혀 산출된 실재들에 다름아닙니다.
나한테, 그 도식의 왼편은 단지 인습적(因襲的) 철학의 잘못된 경로들에 대한 설명만을 추가하는 것으로, 아울러 그와 같은 교훈적 기능들에 정당성을 주지는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나한테 의심할 바 없이, 이런 식으로 밖에 이해될 수 없는 까닭은, 객관적 실재, 세계 그 자체에 관한 지식의 획득 가능성에 대한 신념은, 생물학이나 자기-창발 없이, Kant가 말했던 대로, 회의론자들이 정식화한 논증들로 무너질 수 있습니다. 내 관점에서, 그때 남는 것은, 우리 지식(즉, 우리가 성공적으로 쓰고 있는 모든 개념 구조들)과 살아 있는 우리 자신들이 발견되는 곳인 "매체(medium)" 사이 관계를 대체할 새로운 설명의 필요성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설명은 입증이 결단코 불가능한 동형 가정(isomorphic assumption)에 의존하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Maturana가 생물학을 기반으로 "인지"라 불리는 모든 현상들을 기술하고 설명하고자 시도했음을 억기(憶起)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의 프로젝트가 성공적인 한, 그는 전통적 지식 이론을 무시하며, 자신의 생각하기 방식의 차이를 강조할 목적으로만 그것을 인용할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철학사에 진입하지도 않고 철학사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그는 나름의 인지 개념들이 변함없이 인습적 지식 개념에 묶여 있는 모든 이들한테는 오해될 위험을 무릎쓰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Maturana도 Piaget가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같은 종류의 잘못된 착상과 마주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종종 발견하곤 합니다. Piaget 또한 자신의 이론에서 인지란 객관적 실재의 지식을 얻는 수단이 아니라 능동적 유기체가 자신의 경험 세계에 적응하도록 돕는 수단이라는 점은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Maturana가 "조작들로 효과내기(operational effectiveness)"라 부른 것은, 내 구성론적 조망에서는, "살클수(viability)"에 상응하는 것이며, 철학사에서는 지난 세기 전환기에 실용주의자들이 띄어올린 슬로건 "참 혹은 진리란 작동하는 것이다(True is what works)"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Maturana의 "조작들로 효과내기"는 실용주의자들의 "기능하기"보다 그 응용에 있어서 더욱 성공적인 것입니다. Maturana의 정의에 따르면, 모든 조작들과 그것들이 내는 효과는 특정 관찰자가 만든 구별들로 결정된 기술 영역(discriptive domain) 내에 있으며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는 달리, 실용주의자들의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았지만) 일반화된 "기능하기"는, "기능"을 행하는 일정한 방식에 기반해서 "객관적" 세계와 접할 외관 혹 광경에 대한 유혹을 조장했습니다. Maturana의 모델이 그와 같은 어떤 유혹도 그 싹에서부터 꺽어버리는 것은, "효과내기"는 관찰자의 구별하기 활동으로 맺혀 산출된 경험 영역 내에서 내려진 판단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험 세계들과 그것들의 영역들은 행하기 관찰자만이 산출할 수 있는 것이라는 바는, 내 믿기로, 바로 Hans Vaihinger가 그의 탁월한 Die Philosophie des Als Ob (처럼 철학)을 썼을 때 부족했던 통찰력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결여로, 그는 진화론을 본체적(ontic) 실재로 이동시키지 않고는 그의 체계를 마무리할 수 없었습니다.4
관찰자의 탄생
Maturana가 쌓은 거대한 개념적 빌딩에서, 나한테, 가장 어려운 점들 가운데 하나는, 관찰자도, 마찬가지로, 더 바닥의 가정들 없이, 자기-창발적 유기체들의 상호작용들과 언어활동을 통제하는 생물학적 기본 조건들에 대한 그의 체계적 진술에서 유도될 수 있다는 그의 잦은 반복된 단언(斷言)이었습니다. 이러한 유도에 대한, 나 자신을 위한, 해석 구성에는 10년 이상이 걸렸습니다. 그것을 여기에 제시하지만, 그렇다할지라도, 그것은, 정말이지, (원본에 부합하는) 진짜임을 주장하지 않는 사적 해석이라는 엄중한 경고를 붙입니다. Maturana에 따르면, 모든 언어 활동 또는 "언어하기"는 살기 실천/관행 가운데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자신들을 그 가운데 잠겨 있는 살기 시스템들로 발견합니다. Maturana한테, 언어하기는 소식 또는 어떤 류의 "정보" 전달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상호 적응으로 조율된 행위들의 정렬에서 생겨나는 사회적 활동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행위 정렬 없이 기술하기는 있을 수 없으며, 그렇다면 행위자가 만드는, 그래서 의식에 이르는, 구별들을 위한 어떤 방식도 있을 수 없습니다. 구별들을 알아차리는 것을, 관찰하기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구별 제작자로서 관찰하는 것은, 자신을 의식하게 되는 것, 말인즉, 자각(自覺)에 다름아닙니다. 최근에 Maturana는 이를 아주 명확히 기술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구별한 것이 우리가 한 일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경우, 현대 물리학에서 그런 것처럼, 관찰자들로서 우리는 합리성을 부여받았고 그리고 이는 설명될 필요도 설명할 수도 없는 것임을 은연 중 당연시하는 가운데 조작 처리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관찰자들로서 우리 경험을 숙고할 경우, 우리 경험이란 우리 자신들이 관찰하고, 말하고, 또는 행하는 바를 알아차리는 것임을, 그리고 우리가 한 일에 대한 설명 또는 기술이란 우리가 한 일에 대해 그리하는 가운데 자신들을 알아차리는 우리 경험에서 부차적인, 말인즉, 파생된 것임을, 발견한다.5
이렇게 닫힌 원환에서 두드러진 점은, Maturana가 매우 자주 반복하고 있는, 말하자면, 관찰되는 것은 "그와 같이" 실존하는 세계의 사물들, 속성들 또는 관계들이 아니라, 실은 관찰자 자신이 만든 구별들로 야기된 결과들입니다. 따라서, 이들 결과들은 그 누군가의 구별하기 활동이 없다면 그 어떤 것이든 실존할 수 없습니다. 최초의 구성론자, Vico가 말한 바와 같이, 인지 주체는 사실들만을 알 수 있을 뿐이며, 그 사실들(영어: facts)이란 주체 그 자신이 만들었던(라틴어: facere) 항들입니다. 그렇기에, 관찰자는 그 자신의 기술하기 방식들과 도구들에서, 말인즉, 그 자신을 구별함으로써, 생겨납니다.
여기서, 바로, 나는 Descartes와 연결을 보지만, 그것은 Volker Riegas가 "Maturana와 대화"에서 언급한 데카르트의 이원론과 연결이 아닙니다. 의심을, Descartes는 그가 남기길 바랬던 확실한 진리들에서 미덥지 않은 모든 것들을 분리하는 도구로 사용함으로써 회의론을 패퇴시키고자 했습니다. 노고의 종착점에서 그가 발견했던 것은, 그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말하자면, 의심하기라는 반성 활동에 개입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이라는 점이었습니다. 회의론의 논증들에도 불구하고 본체적 실재에 이르는 방식이 발견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그의 탐구가 촉발된 이후, 그는 지체없이 그 자신의 의심하기의 확실성을 존재론적 원리로 정식화했습니다: cogito ergo sum.
Maturana한테, 이러한 정식화가 허용될 수 없는 것은, 바로, "sum"이 존재론적 뜻으로 실존을 단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Descartes가, Maturana가 분명히 보았던 것처럼6, 그가 그토록 확신했던 의심하기가 그 어떤 본체적 실재도 아닌 그 자신의 실험 세계에서 자신이 만들고 있는 구별들에 기대고 있음을 보았다면, 그때 Descartes는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입니다: "구별하기로서, 나는 나 자신을 관찰자로서 창조한다". 내가 Maturana를 이해했다면, 그는 이러한 데카르트 원리의 새로운 정식화를 쉽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내 조망에서 보자면, Maturana가 제공하고 있는 것은, 의식이 관찰자가 되기 위해서는 필히 올라가야만 하는, 말하자면, 사다리입니다. 그러한 의식의 기원과 관련해서 그는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 나는 "나 자신이 언어 속에 잠겨 있음을 발견한다"는, 나한테, 내가 나 자신을 발견할 깜냥을 갖고 있다는, 그리고 일종의 반성을 수반하는 이러한 깜냥은 내가 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에 속한다는, 뜻을 갖습니다.
재현과 기억
최근 Maturana가 Carmen Luz Mendez, Fernando Coddou와 함께 쓴 논문, "The bringing forth of pathology"에서, 언어와 다양한 형식의 대화들에 관한 절이 있습니다. 이들 형식들 가운데 두 가지는 꽤 자세히 기술되고 있습니다:
첫째, 대화들에 참여자들의 특성들에 관한 일치되지 않은 기대들이 수반되고 있을 경우, 성격 묘사 대화들이라 부르겠다. 둘째, 대화들에 그 이전 합의되지 않았던 참여자들의 행동들에 관련하여 성취되지 않은 기대들에 관한 불평들이 수반되고 있을 경우, 부당한 비난 대화들이라 부르겠다. 7 (p.l55)
Maturana가, 자신의 저작들 여러 곳에서, 아주 분명히 하고 있는 바가 단어 "representation"과 통상 고리짓는 개념을 그가 용인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라 한다면, 혹자는 여기 인용구에서 그가 "기대들"에 기반해서 대화들을 차별짓는 데에 처음에는 놀랄 수도 있습니다. 기대를 갖는다는 것은, 내 분석에서, 앞선 경험의 흐름에서 만들어진, 그러나 현재 실제하는 지각 장에서는 이용될 수 없는 구별들로 마음 속에 무언가를 조성할 목적으로 자신의 상상력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조성물들을 상상하는 데에는 과거 경험들의 하다못해 파편들이라도 자신한테 재현하는, 말인즉, 다시 떠올리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한편, 명백한 모순이 사라지는 것은, 영어 단어 "representation"이 여러 상이한 개념들을 나타내는 것으로 쓰이고 있음을 고려할 때입니다; 그 개념들 가운데 두 개는 독일어 단어들Darstellung과 Vorstellung으로 가리켜지고 있습니다.8 첫째 단어는 달리 의도된 명시적 지시항이 없을 때마다 영어 화자들 마음에 떠오르는 것입니다. 이 개념은 "사진/그림" 관념에 가까우며, 이처럼 "원본(original)"으로 범주화된 어떤 것에 대한 물리적 또는 형식적 방식으로 복제하는 과정를 수반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개념은 "개념적 구성물" 관념에 가까우며, 이에 대응하는 독일어 단어 Vorstellung은 Kant와 Schopenhauer 철학들에서 핵심적인 것입니다.
Maturana의 "representation"에 대한 혐오감은, 그가 유기체의 인지 영역에서 객관적, 본체적 실재에 대한 개념적 사진/그림 또는 복제들을, Kant와 Schopenhauer처럼, 배제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와 달리, Piaget의 의미로 재-현(re-presentation)들이란 이전 경험에서 구별된 항들의 반복 또는 재구성들입니다. Maturana가 1988년 10월 ASC 회의 토론 과정에서 설명했던 대로, 이와 같은 재현들은 또한 자기-창발적 모델에서도 가능한 것입니다. 그곳에서 Maturana는 경험 다시-살기(re-living)에 대해 언급했는데, 내 조망에서 보자면 이것은, 반성은 있을 수 없는 바로서, Vorstellung으로서 재현 개념과 부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각도에서, 이제 분명해지는 것은, 자기-창발적 유기체에서도 마찬가지로, "기대들"이란 아직 경험되지 않은 쪽으로 지금 투사되고 있는 경험의 재-현에 불과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고찰은 Maturana 이론 맥락에서 자주 답이 없는 채로 남겨져 있는 또 하나의 의문으로 이어집니다: 그것은 억기(憶起)를 가능하게 하는 기억(記憶)과 그 메커니즘에 대한 의문입니다. Maturana가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는 바처럼,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혹자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기술(記述)들의 수준에, 타자들이 아닌 바로 혹자가 일정한 구별들을 만들고 있다는 그 사실로 확정되는 수준에, 놓여져 있습니다. Maturana는, Heinz von Foerster가 그러한 것처럼, 인상(印象), 경험, 행위, 관계, 등등을 쌓아 보관할 수 있는 "저장소(storage)" 관념을 폐기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내 관점에서, 그럼에도 분명한 것으로, 다시-살기로서 무언가를 기술하고 있는 관찰자한테 불가결한 것은, 지시된 경험은 이전에 적어도 한번은 살아졌던 경험이라는 점; 그리고 이러한 반복을 실현하는 데에는 통상 영어에서 "억기하기(to remember)"라 불리는 역할을 하는 메커니즘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자기-창발적 유기체한테, 모든 요동, 모든 경험, 모든 내적 사건들은 유기체를 조성하고 있는 네트워크의 구조를 변화시킵니다. 물론, 이들 변화들은 모두 같은 종류가 아닙니다. 어떤 변화는 새로운 연결들을 형성하는 것으로서, 그래서 네트워크에 새로운 경로들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변화는 이미 존재하는 길을 "매끄럽게 하기" 또는 원활하게 하기라 부르는 것일 수 있습니다. 다시-살기를 언급하고 있는 관찰자는 최초로 생성되고 있는 경로를 보다 이전에 만들어진 연결들을 쓰고 있는 경로와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그 기술(記述)이 또 다른 유기체의 조작들과 관계되든 관찰자 그 자신의 조작들과 관계되든 상관없이, 꼭 필요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어떤 경험의 반복이 확인되는 것은, 오로지 관찰자가, 앞서 밟은 적이 있던 경로의 사용과 새로운 경로의 개척을 구별할 목적으로, 경험의 흐름에서, 아주 잠깐이나마, 한발 벗어날 수 있는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내 용어로, 그것은 관찰자가 반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Maturana는 그의 모델에서 유기체의 모든 행하기와 행동들은 전적으로 그 유기체의 구조와 조직이 결정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거기서는 그 어떤 반성도 필요치 않습니다. 하지만, 기술(記述)들의 수준, 기술될 수 있는 것이라면 오직 관찰자의 구별 조작들로만 산출되는 수준에서는, 내가 확인할 수 있는 한, 반성없이 해낼 수는 없습니다. 내 알기로, Maturana는 이에 관해 말한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관찰자가 간단히 특정 경험 영역에서 행하기, 관찰하기, 그리고 최종적으로 반성하기 주체로 구별함으로써 자신의 반성 능력을 생성시키고 있다는 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배제된 실재
Maturana 이론에서 관찰자의 기원에 관한 의문이 나한테 풀려지는 방식은, 전체 경험 세계는 혹자가 자신한테 만들어주는 구별들의 산물(産物)로 간주할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경험의 흐름 또한 그/그녀가 가진 구별하기로 자신을 관찰자로 구별해냄으로써 생겨난다고 하는 점을 계속해서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본체적 세계를 "아는" 깜냥을 지닌 본체적 주체로 "실존하는" 어떤 것의 기원/발생을 설명하고 있노라 사칭하는 형이상학적 답이 아닙니다. Maturana는 과학을 하고 있으며 과학적 방법으로 신중하게 해내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그의 모델에, 논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기에 정당화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 가정들 스리슬쩍 도입하는 것은 삼가고 있음을 함의합니다. 그는 이를 다양한 방식들로 표현했습니다:
... 대상들, 것 또는 관계들은 관찰자가 행하는 바와는 독립적으로 실존하는 것처럼, 그것들에 관한 진술이나 주장의 조작적 기저를 관찰자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9
그리고 Riegas와 인터뷰에서 그는 말했습니다: "초월적/선험적 실재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p. 53).
이러한 입장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Vico, Kant, Schopenhauer한테서, 그리고 최근에는 Richard Rorty한테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관찰자가 산출될 수 있는 주변 여건들을 디자인하는 혹 짜펼치는 경험 세계에 대한 생물학적 해석은 새로운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을 작업 가설로서 받아들이면, 경험 세계와 우리의 개념적 관계에 대한 광범위한 영향력을 지닌 귀결이 그 가설에서 나옵니다. 모든 과학적 모델에서처럼, Maturana가 "설명"하고 있는 것은 가설이 현상(現象)을 - 관찰자의 발생을 - 어떻게 다루는가 이지, 왜 다루는가는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과학적 과정에 적합한 기준입니다. 물리학은, 이를테면, 무거운 대상/물체들이 "낙하"하는 일이 어떻게 생기는가에 대해 중력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천체(天體)들은 중력이 작용해 끌어당기고 있으며, 필시 공간 곡률로 환산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간이 본체적 세계에서는 왜 휘어져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물리학자는 설명할 답을 갖고 있지도 않고 답할 필요도 없습니다 - 그는 그저 휘어진 공간에 대한 가정이 상당히 유용한 계산과 예측들을 가능하게 해주고 있다는 점을 관찰할 수 있을 뿐입니다. 자신들의 과학의 인식론적 토대들을 알아차리게 된 그러한 물리학자들이 이를 아주 분명히 말했던 것은, 그들도, Maturana처럼, 그들이 그들 과학에서 기술하고 있는 경험 세계를 맺혀 산출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들 자신의 개념들, 그들 자신의 구별 조작들이라는 바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토대 대신 일관성
서두에 나는 Maturana 이론에서 순환성을 언급했으며, 그때 내 조망에서 그 개념적 원환을 이루는 몇몇 섹트들을 명확히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내 조금이라도 성공했다면, Maturana에 반대하는 한 가지 이상 측면으로 형성된 주요 근거들 가운데 하나를 제거하는 것은 이제 쉬운 일일 것입니다. Gerhard Roth의 정확한 정식화를 사례로 들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순환적 이론의 착상은 토대의 그리고 시작의 문제를 일으킵니다. 관찰자, 그의 관찰 조건과 관찰 대상들(대상들의 구별, 시스템-부분들, 등등)을 차례차례 인식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하든 그래서 생명 시스템들에 대한 구성론적 이론에 이르게 되든, 두뇌 이론, 인지 이론,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관찰자 이론에 이르게 하는 생명 시스템들의 조직에 대한 객관론적 설명으로 시작하든, 마찬가지입니다. Maturana는 양자를 동시에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상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은, 구성론적 접근과 객관론적 접근 사이 모순으로 얽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10 (p.88).
토대의 문제와 시작의 문제는, 그를 비평한 이 논문 서두 페이지에서 이미 분명해진 바처럼, Roth의 견해에서는 서로 긴밀하게 서로 짜여 있습니다. 이것은 전통 지식 이론들을 다루는 수단으로는 적절할 수 있지만, 객관적 세계 그 자체에 대한 지식을 명확이 배제하는 인식론에 대한 비평 수단으로는 적절할 수 없습니다. 하여, 그와 같은 상호 관련은 나한테는 용인될 수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존재론적 토대의 결여는 상당수 Maturana 독자들이 말하고 있는 비판입니다. 이러한비판은 1711년 Vico의 De antiquissima Italorum sapientia(고대 이태리인의 지혜)에 대한 Giornale de' letterati에 익명의 평론가가 행한 주된 비판과 동일한 것입니다.11 Vico는, 그 비판인즉, 그의 철학에 대한 탁월한 해명을 산출했지만, 그것이 진리인 증명을 제공하지는 못했습니다. 지식이 독립된 존재론적 "실재"와 일치 혹은 대응해야 한다는 그 나름의 관념을 고의로 폐기한 구성론자한테, 그와 같은 증명에 대한 요청이 부조리한 것은, 그가 그의 철학의 핵심 <논증 명제>, 말인즉, <지식은 존재론적 세계를 반영할 수도 필요도 없는 것이며 다만 경험 세계에서 그것의 기능하고 있는 바로 그리고 일관성(coherence)으로 판단되어야 하는 것이다>라는 <테제>를 모순없이 제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Maturana는, Vico보다 더 명확하게, 지식은 자신을 "효과적 행위"로 나타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답변에서도 또한 그의 이론이 고의로 순환적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작점을 요구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원환은, 여타 것들 가운데서도, 시작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로 특징지어집니다. Maturana의 거대 체계에서, 모든 점들은 앞선 점들에서 생겨납니다 - 마치 알프스 빙하 위 짙은 안개 속에서 한 발자국 앞도 뒤도 볼 수 없는 채 한 발을 띄어 바로 앞에 한 발자국을 놓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리고 가끔씩 그와 같은 안개 속에서 몇 시간을 걸은 후 자신이 발자국을 따라 걷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과 같습니다. 어떤 특정 지점에서 원환을 시작했다는 사실은 더 높은 수준의 유리한 지점에서만, 안개가 걷히고 더 넓은 시야가 확보되는 경우, 지각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본체적 실재에 대한 우리 시야를 가리우고 있는 안개는 걷힐 수 없으며, 그 까닭은, Kant가 앞서 보았던 것처럼, 그 안개는 빠져나올 수 없게 만들어진 우리 경험하기 방식들과 수단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Maturana의 탐구와 같이 극도로 세심한 탐구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원환의 어디로 발을 들이든 관계 없이 그 경로의 끝에 이를 수도, 우리 발자국을 되밟아 시작에 이를 수도 없다는 점일 뿐입니다. 기껏해야, 우리는 필시 우리가 탐색을 시작할 때 전제로서 구별했던 점을 다시 부를(recalling) 수 있을 것입니다.
말해진 모든 것들이 관찰자가 그 자신의 구별 조작들에 바탕해서 말한 것들이라면, 이것들은, 경험 세계의 특정 영역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유효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Maturana의 세계관에서, 외적 존재론적 토대들은 그 어떤 "절대적" 시작점도 요청될 수 없습니다. 이 양자의 요구들은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마나 한 짓입니다. 존재론적 의미에서 "토대 혹 바탕"이 전제로 삼고 있는 것은, 관찰자와 독립된 세계에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바입니다. Maturana는 그 가능성을 부인하며, 따라서 그 어떤 강제적인 외적 시작점을 지정하지 않은 것은 아주 일관된 바입니다; 그 까닭은 이러한 점이 바로 경험적 정당화 없이 유효한 것으로 여기도록 하는 "조건없는 형이상학적 원리"와 동등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위에 순수 논리로 거대한 이론적 빌딩이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비평가들의 오해는 Maturana가, 우리 가운데 여타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F학점을 받았던; 이천년 이상, 소박한 또는 형이상학적인, 실재론으로 갈고닦여진, 언어를 써서 그의 해설을 전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언어는 그가 그 모든 문법 형식들에서 본체적 실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가정을 함의하는 단어 "있다 또는 존재한다(to be)"를 쓸 수밖에 없도록 합니다. 그렇지만, Maturana에 대한 주의깊은 독자라면, 아마도 그가 말한 모든 것들은 우리를 그러한 불가피한 함의에서 벗어나도록 "방향짓기" 위해 의도된 것들임을 알아차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Maturana의 자기-창발적 이론에 대한 내 해석이 살클 수 있는 것인 한, 나는 일관성을 깨뜨리는 불일치를 그의 이론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내 관점에서 보자면, 일관성이 필수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모든 것을 포괄하는 철학 체계의 평가 기준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이를테면, Leibniz의 단자론(monadology)은 일관성에 관해서는 흠 잡을 데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적용될 수 있는 세계관으로서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최종 분석으로, Maturana 작업의 가치는 성공 여부에, 말인즉, 그것이 현재 우리 경험의 실천/관행에 응용되고 있는 바에서 그리고 계속해서 그럴 수 있는 것으로 판명되는 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한테는 "정서적으로" 보다 중요한 것으로, 우리는 그가 최근에 내놓은 윤리의 기원/시작들이, <위험에 빠진 우리 혹성에서 합의 영역은 창조될 수 있다>는 희망의 성취를 도울지 여부를 지켜보아야 할 것입니다: 인간 문화의 생존을 가능하게 할 협력에 관한 합의를 도처에서 관행으로/제도로 확립시킨 영역 말입니다.
미 주
(*) Fung Yu-lan, Chuang-tzu: A new selected translation. Shanghai: The Commercial Press, 1933. Quoted by Alan Watts in The Watercourse Way, Pantheon Books, New York, 1975, p.52.
1. 차이가 하나 있다면, 나한테는, 구별짓기 활동과 더불어 관계짓기 활동이 생겨나고 그것 없이 더 복잡한 개념적 구조들은 있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모든 알기가 구별들 만들기로 시작된다는 점은 고대 중국 철학자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 George Spencer Brown 또한. (cfr, 그의 <<Laws of Form>>, London: Allen & Unwin, 1969) 말했습니다.
2. Cf. my "Wissen ohne Erkenntnis", in Gerhard Pasternak (Ed.), Philosophie und Wissenschaften: Das Problem des Apriorismus, Frankfurt/Bern: P. Lang, 1987.
3. Maturana 텍스트에서 객관성은 단독 개체의 "주관성"의 반대 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고전 철학의 의미로, 말인즉, 더도 덜도 없이 또는 경험자로 야기된 왜곡 없이 "그 자체로서" 세계를 재현할 의도 또는 요청을 나타내는 것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4. Hans Vaihinger, Die Philosophie des Als Ob. Berlin: Reuther & Reichard, 2nd edition, 1913. 그의 뛰어난 저작 서문의 "Preliminary Remarks"에서, Vaihinger는 실용주의를 비난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그의 말로, 실용주의가 "삶을 견디도록 돕는 것은 무엇이든" 참된 것이라 혹은 진리라 부를 때, "최악의 공리주의"(p. XI)로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약 300페이지를 넘긴 후, "… 오늘날의 일단의 범주들은 그저 자연선택과 적응의 산물에 불과한 것들이다". 그는 Kant가 사용한 의미로 "범주들(categories)"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진술로 그는 분명히 다윈의 진화론을 존재론적 실재로 이동시키고 있으며, "범주들", 말인즉, 경험 세계에 대한 우리들 개념화의 핵심 요소들을 생존의 "공리론적" 도구들로 바꾸고 있습니다
5. Cf. Humberto Maturana. "Ontology of observing: The biological foundations of self-consciousness and the physical domain of existence". Texts in Cybernetic Theory, American Society for Cybernetics, 1988; p.36.
6. Cf. Humberto Maturana, "Reality: The search for objectivity or the quest for a compelling argument". The Irish Journal of Psychology, 1988, 9 (1), p. 26.
7. Carmen Luz Mendez, Fernando Coddou & Humberto Maturana. "The beginning forth of pathology", The Irish Journal of Psychology, 1988, 9 (1), 144-172.
8. 단어 "representation"에서 야기되는 개념적 뒤죽박죽에 대한 추가 논의는 in C. Janvier가 편집한 << Problems of representation in the teaching and learning of mathematics, Hillsdale, New Jersey: Earlbaum, 1987>>에 수록된 내 "Preliminaries to any theory or representation"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나는 이러한 사례로 독일어가 더 풍요롭고 더 정확한 언어라는 결론은 아주 잘못된 것이라 언급하고 있습니다. 상이한 개념들의 우연의 일치는 또한 다른 방향에서 찾아질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영어 단어들, "to isolate"와 "to insulate"는 분명히 명시할 수 있는 개념적 차이가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하나이자 똑같은 독일어 단어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9. Humberto Maturana, "Reality: The search for objectivity or the quest for a compelling argument". The Irish Journal of Psychology, 1988, 9 (1), p.30.
10. Gerhard Roth, "Wissenschaftlicher Rationalismus und holistische Weltdeutung". In Gerhard Pasternak (Ed.), Rationalitaet und Wissenschaft, (Vol. 6), Bremen: Zentrum Philosophische Grundlagen der Wissenschaften, 1988.
11. Vico's De antiquissima was published with an excellent Italian translation by Francesco Saverio Pomodoro and the discussion in theVenetian journal by Stamperia de' Classici Latini, Naples, 1858.
감사
나는 Heinz von Foerster한테 이 논문의 초고에 대한 쓸만한 비판적 논평들로 신세를 졌습니다.
초록/E. Von Glasersfeld
Humberto Maturana는, Plato 또는 Leibniz에 견줄만한, 폭넓고, 완벽한, 설명 체계 구성에 착수하고 있는 몇몇 저자들 가운데 한 명입니다. 그의 "자기-창발적(autopoietic)" 접근은 또한, 관찰자 자신한테 세계관을 제공한 (조직 원리와 규칙들로서) 일단의 이전 방법들을 가리키는 관찰자의 기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나는 Maturana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알아차림/自覺을 얻고 있는 것(entity)으로서) <res cogitans>의 탄생을 보는 방식을 따르고자 합니다.. 내가 입증하고자 하는 것은, 구별하기라는 기본 활동은 예외없이 관찰자를 관찰된 것에서 분리하는 구별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 적어도 이러한 해석자한테는 - 능동적 의식, 말인즉, 구별하기 에이젼트로서 활동하고 있는 어떤 것의 기원은 변함없이 애매한 채로 남게 된다고 결론짓습니다.
http://hompi.sogang.ac.kr/mkyang/O/cognition/maturank.htm
북소믈리에 한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