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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22일 수요일

관찰자 구별하기- Maturana에 대한 해석 하나

관찰자 구별하기: Maturana에 대한 해석 하나
Ernst von Glasersfeld
English


타자 없이 내 있을 리 없고, 내 없이 구별이 있을 리 없지.
장자, 4th Cent., B.C.(*)

"언어하기(languaging)"는, Maturana가 이따금씩 설명한 대로, 여타 것들 사이에서 방향잡기를 합니다. 그가 이 단어로 의미한 것은, 주의 돌리기이며, 그 결과로서, 타자들에 대한 개체 경험입니다; 이는 언어발달을 위한 필수 전제 조건으로서 "합의 영역들(consensual domains)"의 발달을 조장하는 한 방식입니다. 내가 이곳에서 시작한 ("언어하기") 문장은 기껏해야 Maturana 스타일의 핏기 없는 모방에 불과할지라도, 그것은 필시 Maturana 시스템의 중요한 한 측면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측면이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방식으로 반복해서 속출하는 순환성입니다.
내 해석으로, Maturana의 해설들 가운데 순환성에 주목할 때마다 절대 필요불가결한 것은, 이러한 순환성이, 우리 서양 철학의 가장 전통적 체계에서 말하는, 일종의 헛발 짚기 또는 실수가 아니란 점을 자신한테 부단히 반복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실수가 아니라, 자기-창발적(autopoietic) 모델에서 직접 생겨나는, 일부러 선택한, 바탕 조건입니다. Maturana에 따르면, 인지하기 유기체는 정보의 측면에서는 닫혀 있습니다. 그 유기체가, 그럼에도, 기술(記述)을, 말인즉, 개념들, 개념 형성 구조들, 이론들, 그리고 결국 자신의 세계상(世界像)에 이르기까지, 생산할 수 있다면, 그 유기체는 오로지 그 자신의 경험 영역(experiential domain)에서 상당한 추상 과정을 거치며 주워모은 쌓기 블록들을 사용함으로써만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을 뿐이란 점은 분명합니다. Maturana가 "모든 인지 영역(cognitive domain)들은 전적으로 그 유기체 자신이 만든 구별 조작들의 결과로 생겨납니다"로 표현한 이러한 통찰력은, 내 조우(遭遇)한 바로 첫 순간 그의 작업에 끌려들게 만든 점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1  
나는 Maturana가 자기-창발(autopoiesis)이라는 생물학 관념을 정식화할 때 바탕한 것들과는 전혀 다른 기저(基底) 고찰들에 바탕해서 같은 결론에 이르렀습니다.2 (약간은 축약된 그리고 이상화된) 내 자신의 경로는, 초반에는 Montaigne를 통한 소트라테스 이전 학파들, Berkeley, Vico, 그리고 Kant의 의혹들에서 실용주의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Ceccato의 "조작 학파"와 Piaget의 "발생론적 인식론"으로 이어졌습니다. 여기서는 이와 관계 없어 보이지만, Maturana의 해설들이 전통 철학에 전혀 준거하고 있지 않기에, 그의 몇몇 기본 주장들이 인습에 박힌 인식론 역사에서 돌발적으로 출현했던 일련의 사상들로 실증될 수 있음을 언급하는 것은 타당해 보입니다. 이들 일련의 사상들이 가끔씩 공식적 철학 분과에 염장(鹽臧)을 질렀지만, 그들은 지속적 효과를 얻지 못한 채 변경의 호기심으로 머물러 있습니다. 내 제안하는 바, 이러한 무시의 근거는 서양 관념의 전(全) 역사와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두 가지 필요 조건이 인식론적 기도(企圖)의 바탕으로 고려되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필요한 것은, 우리가 "참된 지식"이라 부르고 싶은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알기 주체와 독립된 것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 요구 조건은, 지식은 "물-자체"의 세계를, 진리 혹 사실 일치의 그 시대 양식으로, 재현(再現)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에만 진지하게 고려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모든 시대 회의론자들이 이들 두 요구 조건은 달성될 수 없는 것들임을 논리적 논증들을 빌어 설명했으며, 자신들을 한정지워 절대 지식은 불가능하다고 관찰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단지 몇몇 인물들만이, 한 발 더 나아가, 행하기 주체의 경험 세계에서 성취될 수 있는 것들에다 지식 개념을 자유롭게 적용할 수 있게끔 그 개념을 언급된 가능하지 않은 제약 조건들에서 해방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러한 발걸음을 내딪은 이들은 아웃사이더(局外者)들로 낙인찍혔고 그 덕택에 직업적 철학가들은 무시할 수 있었습니다.   


닫힌 경험 세계
여기서 과거 2-30년에 걸쳐 철학적 분위기가 왜 변했는가를 검토할 의도는 없습니다. 사실, 오늘날에는 지식의 상대적 관점 혹은 견해를 취하는 입장들은 허무주의나 여타 위험한 이단으로 낙인찍히지 않고도 방어될 수 있습니다.   
Maturana가 칠레의 반동적 독재자 피노체트에 대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막바지 20년간 살아남았다는 것은, 그한테는, 그리고 우리한테도, 행운입니다. 행운이라 말하는 것은, Maturana는 의심할 바 없이, 지난 세기, 철회된 바 없이 성취를 이룬 사상가들 가운데 한 명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에서, (유물론적이든 형이상학적이든) 실재론적 도그마의 권위주의적 지배를 확실히 뒤흔든 것은 물리학에 대한 관점들의 혁명 뿐만 아니라,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 "진실, 혹 진리들"에 대해 신뢰할 수 없음을 명백히 표명하는 흐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지식을 유기체에 의존하는 것으로 그리고 내부(internal) 조작들로 조성된 닫힌 회로의 산물로까지 설명하는 인지 모델들에 대한 혐오감(嫌惡感)는 결코 사라지고 있지 않습니다.
Maturana가 그의 강의 중에 종종 보여준 광범위한 개념적 흐름도, 좌측에는  객관성을 갖춘 설명이 (청중의 관점에서) 붕괴되는 바가, 우측에는 객관성 없는 설명이 주어집니다. 사람들이 그 자신의 기술하기에서 왼편을 택하든 오른편을 택하든, Maturana에 따르면, 그것은 정서의 문제입니다. 지식과 언어가 관련되는 한, 왼편을 택하면, 지식은 객관적 실재를 포착할 수 있고 언어는 그것을 지시할 수 있고 상징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신념에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Maturana가 생각하는 객관성 개념은 이러한 믿음에 의존하는 것입니다.3 Maturana 또한, 내가 그를 바르게 이해했다면, 이러한 신념을 공유하고 있지 않으며, 논의할 바 없이 자신을 오른편에 위치짓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객관성은 폐기되며 ("괄호쳐지며(put in parentheses)") 오로지 가능한 실재들이란 관찰자의 구별 조작들로 맺혀 산출된 실재들에 다름아닙니다.
나한테, 그 도식의 왼편은 단지 인습적(因襲的) 철학의 잘못된 경로들에 대한 설명만을 추가하는 것으로, 아울러 그와 같은 교훈적 기능들에 정당성을 주지는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나한테 의심할 바 없이, 이런 식으로 밖에 이해될 수 없는 까닭은, 객관적 실재, 세계 그 자체에 관한 지식의 획득 가능성에 대한 신념은, 생물학이나 자기-창발 없이, Kant가 말했던 대로, 회의론자들이 정식화한 논증들로 무너질 수 있습니다. 내 관점에서, 그때 남는 것은, 우리 지식(, 우리가 성공적으로 쓰고 있는 모든 개념 구조들)과 살아 있는 우리 자신들이 발견되는 곳인 "매체(medium)" 사이 관계를 대체할 새로운 설명의 필요성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설명은 입증이 결단코 불가능한 동형 가정(isomorphic assumption)에 의존하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Maturana가 생물학을 기반으로 "인지"라 불리는 모든 현상들을 기술하고 설명하고자 시도했음을 억기(憶起)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의 프로젝트가 성공적인 한, 그는 전통적 지식 이론을 무시하며, 자신의 생각하기 방식의 차이를 강조할 목적으로만 그것을 인용할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철학사에 진입하지도 않고 철학사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그는 나름의 인지 개념들이 변함없이 인습적 지식 개념에 묶여 있는 모든 이들한테는 오해될 위험을 무릎쓰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Maturana도 Piaget가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같은 종류의 잘못된 착상과 마주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종종 발견하곤 합니다. Piaget 또한 자신의 이론에서 인지란 객관적 실재의 지식을 얻는 수단이 아니라 능동적 유기체가 자신의 경험 세계에 적응하도록 돕는 수단이라는 점은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Maturana가 "조작들로 효과내기(operational effectiveness)"라 부른 것은, 내 구성론적 조망에서는, "살클수(viability)"에 상응하는 것이며, 철학사에서는 지난 세기 전환기에 실용주의자들이 띄어올린 슬로건 "참 혹은 진리란 작동하는 것이다(True is what works)"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Maturana의 "조작들로 효과내기"는 실용주의자들의 "기능하기"보다 그 응용에 있어서 더욱 성공적인 것입니다. Maturana의 정의에 따르면, 모든 조작들과 그것들이 내는 효과는 특정 관찰자가 만든 구별들로 결정된 기술 영역(discriptive domain) 내에 있으며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는 달리, 실용주의자들의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았지만) 일반화된 "기능하기"는, "기능"을 행하는 일정한 방식에 기반해서 "객관적" 세계와 접할 외관 혹 광경에 대한 유혹을 조장했습니다. Maturana의 모델이 그와 같은 어떤 유혹도 그 싹에서부터 꺽어버리는 것은, "효과내기"는 관찰자의 구별하기 활동으로 맺혀 산출된 경험 영역 내에서 내려진 판단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험 세계들과 그것들의 영역들은 행하기 관찰자만이 산출할 수 있는 것이라는 바는, 내 믿기로, 바로 Hans Vaihinger가 그의 탁월한 Die Philosophie des Als Ob (처럼 철학)을 썼을 때 부족했던 통찰력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결여로, 그는 진화론을 본체적(ontic) 실재로 이동시키지 않고는 그의 체계를 마무리할 수 없었습니다.4


관찰자의 탄생
Maturana가 쌓은 거대한 개념적 빌딩에서, 나한테, 가장 어려운 점들 가운데 하나는, 관찰자도, 마찬가지로, 더 바닥의 가정들 없이, 자기-창발적 유기체들의 상호작용들과 언어활동을 통제하는 생물학적 기본 조건들에 대한 그의 체계적 진술에서 유도될 수 있다는 그의 잦은 반복된 단언(斷言)이었습니다. 이러한 유도에 대한, 나 자신을 위한, 해석 구성에는 10년 이상이 걸렸습니다. 그것을 여기에 제시하지만, 그렇다할지라도, 그것은, 정말이지, (원본에 부합하는) 진짜임을 주장하지 않는 사적 해석이라는 엄중한 경고를 붙입니다. Maturana에 따르면, 모든 언어 활동 또는 "언어하기"는 살기 실천/관행 가운데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자신들을 그 가운데 잠겨 있는 살기 시스템들로 발견합니다. Maturana한테, 언어하기는 소식 또는 어떤 류의 "정보" 전달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상호 적응으로 조율된 행위들의 정렬에서 생겨나는 사회적 활동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행위 정렬 없이 기술하기는 있을 수 없으며, 그렇다면 행위자가 만드는, 그래서 의식에 이르는, 구별들을 위한 어떤 방식도 있을 수 없습니다. 구별들을 알아차리는 것을, 관찰하기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구별 제작자로서 관찰하는 것은, 자신을 의식하게 되는 것, 말인즉, 자각(自覺)에 다름아닙니다. 최근에 Maturana는 이를 아주 명확히 기술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구별한 것이 우리가 한 일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경우, 현대 물리학에서 그런 것처럼, 관찰자들로서 우리는 합리성을 부여받았고 그리고 이는 설명될 필요도 설명할 수도 없는 것임을 은연 중 당연시하는 가운데 조작 처리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관찰자들로서 우리 경험을 숙고할 경우, 우리 경험이란 우리 자신들이 관찰하고, 말하고, 또는 행하는 바를 알아차리는 것임을, 그리고 우리가 한 일에 대한 설명 또는 기술이란 우리가 한 일에 대해 그리하는 가운데 자신들을 알아차리는 우리 경험에서 부차적인, 말인즉, 파생된 것임을, 발견한다.5
이렇게 닫힌 원환에서 두드러진 점은, Maturana가 매우 자주 반복하고 있는, 말하자면, 관찰되는 것은 "그와 같이" 실존하는 세계의 사물들, 속성들 또는 관계들이 아니라, 실은 관찰자 자신이 만든 구별들로 야기된 결과들입니다. 따라서, 이들 결과들은 그 누군가의 구별하기 활동이 없다면 그 어떤 것이든 실존할 수 없습니다. 최초의 구성론자, Vico가 말한 바와 같이, 인지 주체는 사실들만을 알 수 있을 뿐이며, 그 사실들(영어: facts)이란 주체 그 자신이 만들었던(라틴어: facere) 항들입니다. 그렇기에, 관찰자는 그 자신의 기술하기 방식들과 도구들에서, 말인즉, 그 자신을 구별함으로써, 생겨납니다.
여기서, 바로, 나는 Descartes와 연결을 보지만, 그것은 Volker Riegas가 "Maturana와 대화"에서 언급한 데카르트의 이원론과 연결이 아닙니다. 의심을, Descartes는 그가 남기길 바랬던 확실한 진리들에서 미덥지 않은 모든 것들을 분리하는 도구로 사용함으로써 회의론을 패퇴시키고자 했습니다. 노고의 종착점에서 그가 발견했던 것은, 그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말하자면, 의심하기라는 반성 활동에 개입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이라는 점이었습니다. 회의론의 논증들에도 불구하고 본체적 실재에 이르는 방식이 발견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그의 탐구가 촉발된 이후, 그는 지체없이 그 자신의 의심하기의 확실성을 존재론적 원리로 정식화했습니다: cogito ergo sum.
Maturana한테, 이러한 정식화가 허용될 수 없는 것은, 바로, "sum"이 존재론적 뜻으로 실존을 단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Descartes가, Maturana가 분명히 보았던 것처럼6, 그가 그토록 확신했던 의심하기가 그 어떤 본체적 실재도 아닌 그 자신의 실험  세계에서 자신이 만들고 있는 구별들에 기대고 있음을 보았다면, 그때 Descartes는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입니다: "구별하기로서, 나는 나 자신을 관찰자로서 창조한다". 내가 Maturana를 이해했다면, 그는 이러한 데카르트 원리의 새로운 정식화를 쉽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내 조망에서 보자면, Maturana가 제공하고 있는 것은, 의식이 관찰자가 되기 위해서는 필히 올라가야만 하는, 말하자면, 사다리입니다. 그러한 의식의 기원과 관련해서 그는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 나는 "나 자신이 언어 속에 잠겨 있음을 발견한다"는, 나한테, 내가 나 자신을 발견할 깜냥을 갖고 있다는, 그리고 일종의 반성을 수반하는 이러한 깜냥은 내가 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에 속한다는, 뜻을 갖습니다.


재현과 기억
최근 Maturana가 Carmen Luz Mendez, Fernando Coddou와 함께 쓴 논문, "The bringing forth of pathology"에서, 언어와 다양한 형식의 대화들에 관한 절이 있습니다. 이들 형식들 가운데 두 가지는 꽤 자세히 기술되고 있습니다:
첫째, 대화들에 참여자들의 특성들에 관한 일치되지 않은 기대들이 수반되고 있을 경우, 성격 묘사 대화들이라 부르겠다. 둘째, 대화들에 그 이전 합의되지 않았던 참여자들의 행동들에 관련하여 성취되지 않은 기대들에 관한 불평들이 수반되고 있을 경우, 부당한 비난 대화들이라 부르겠다. 7 (p.l55)
Maturana가, 자신의 저작들 여러 곳에서, 아주 분명히 하고 있는 바가 단어 "representation"과 통상 고리짓는 개념을 그가 용인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라 한다면, 혹자는 여기 인용구에서 그가 "기대들"에 기반해서 대화들을 차별짓는 데에 처음에는 놀랄 수도 있습니다. 기대를 갖는다는 것은, 내 분석에서, 앞선 경험의 흐름에서 만들어진, 그러나 현재 실제하는 지각 장에서는 이용될 수 없는 구별들로 마음 속에 무언가를 조성할 목적으로 자신의 상상력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조성물들을 상상하는 데에는 과거 경험들의 하다못해 파편들이라도 자신한테 재현하는, 말인즉, 다시 떠올리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한편, 명백한 모순이 사라지는 것은, 영어 단어 "representation"이 여러 상이한 개념들을 나타내는 것으로 쓰이고 있음을 고려할 때입니다; 그 개념들 가운데 두 개는 독일어 단어들Darstellung과 Vorstellung으로 가리켜지고 있습니다.8 첫째 단어는 달리 의도된 명시적 지시항이 없을 때마다 영어 화자들 마음에 떠오르는 것입니다. 이 개념은 "사진/그림" 관념에 가까우며, 이처럼 "원본(original)"으로 범주화된 어떤 것에 대한 물리적 또는 형식적 방식으로 복제하는 과정를 수반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개념은 "개념적 구성물" 관념에 가까우며, 이에 대응하는 독일어 단어 Vorstellung은 Kant와 Schopenhauer 철학들에서 핵심적인 것입니다.
Maturana의 "representation"에 대한 혐오감은, 그가 유기체의 인지 영역에서 객관적, 본체적 실재에 대한 개념적 사진/그림 또는 복제들을, Kant와 Schopenhauer처럼, 배제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와 달리, Piaget의 의미로 재-현(re-presentation)들이란 이전 경험에서 구별된 항들의 반복 또는 재구성들입니다. Maturana가 1988년 10월 ASC 회의 토론 과정에서 설명했던 대로, 이와 같은 재현들은 또한 자기-창발적 모델에서도 가능한 것입니다. 그곳에서 Maturana는 경험 다시-살기(re-living)에 대해 언급했는데, 내 조망에서 보자면 이것은, 반성은 있을 수 없는 바로서, Vorstellung으로서 재현 개념과 부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각도에서, 이제 분명해지는 것은, 자기-창발적 유기체에서도 마찬가지로, "기대들"이란 아직 경험되지 않은 쪽으로 지금 투사되고 있는 경험의 재-현에 불과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고찰은 Maturana 이론 맥락에서 자주 답이 없는 채로 남겨져 있는 또 하나의 의문으로 이어집니다: 그것은 억기(憶起)를 가능하게 하는 기억(記憶)과 그 메커니즘에 대한 의문입니다. Maturana가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는 바처럼,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혹자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기술(記述)들의 수준에, 타자들이 아닌 바로 혹자가 일정한 구별들을 만들고 있다는 그 사실로 확정되는 수준에, 놓여져 있습니다. Maturana는, Heinz von Foerster가 그러한 것처럼, 인상(印象), 경험, 행위, 관계, 등등을 쌓아 보관할 수 있는 "저장소(storage)" 관념을 폐기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내 관점에서, 그럼에도 분명한 것으로, 다시-살기로서 무언가를 기술하고 있는 관찰자한테 불가결한 것은, 지시된 경험은 이전에 적어도 한번은 살아졌던 경험이라는 점; 그리고 이러한 반복을 실현하는 데에는 통상 영어에서 "억기하기(to remember)"라 불리는 역할을 하는 메커니즘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자기-창발적 유기체한테, 모든 요동, 모든 경험, 모든 내적 사건들은 유기체를 조성하고 있는 네트워크의 구조를 변화시킵니다. 물론, 이들 변화들은 모두 같은 종류가 아닙니다. 어떤 변화는 새로운 연결들을 형성하는 것으로서, 그래서 네트워크에 새로운 경로들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변화는 이미 존재하는 길을 "매끄럽게 하기" 또는 원활하게 하기라 부르는 것일 수 있습니다. 다시-살기를 언급하고 있는 관찰자는 최초로 생성되고 있는 경로를 보다 이전에 만들어진 연결들을 쓰고 있는 경로와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그 기술(記述)이 또 다른 유기체의 조작들과 관계되든 관찰자 그 자신의 조작들과 관계되든 상관없이, 꼭 필요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어떤 경험의 반복이 확인되는 것은, 오로지 관찰자가, 앞서 밟은 적이 있던 경로의 사용과 새로운 경로의 개척을 구별할 목적으로, 경험의 흐름에서, 아주 잠깐이나마, 한발 벗어날 수 있는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내 용어로, 그것은 관찰자가 반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Maturana는 그의 모델에서 유기체의 모든 행하기와 행동들은 전적으로 그 유기체의 구조와 조직이 결정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거기서는 그 어떤 반성도 필요치 않습니다. 하지만, 기술(記述)들의 수준, 기술될 수 있는 것이라면 오직 관찰자의 구별 조작들로만 산출되는 수준에서는, 내가 확인할 수 있는 한, 반성없이 해낼 수는 없습니다. 내 알기로, Maturana는 이에 관해 말한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관찰자가 간단히 특정 경험 영역에서 행하기, 관찰하기, 그리고 최종적으로 반성하기 주체로 구별함으로써 자신의 반성 능력을 생성시키고 있다는 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배제된 실재
Maturana 이론에서 관찰자의 기원에 관한 의문이 나한테 풀려지는 방식은, 전체 경험 세계는 혹자가 자신한테 만들어주는 구별들의 산물(産物)로 간주할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경험의 흐름 또한 그/그녀가 가진 구별하기로 자신을 관찰자로 구별해냄으로써 생겨난다고 하는 점을 계속해서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본체적 세계를 "아는" 깜냥을 지닌 본체적 주체로 "실존하는" 어떤 것의 기원/발생을 설명하고 있노라 사칭하는 형이상학적 답이 아닙니다. Maturana는 과학을 하고 있으며 과학적 방법으로 신중하게 해내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그의 모델에, 논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기에 정당화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 가정들 스리슬쩍 도입하는 것은 삼가고 있음을 함의합니다. 그는 이를 다양한 방식들로 표현했습니다:
... 대상들, 것 또는 관계들은 관찰자가 행하는 바와는 독립적으로 실존하는 것처럼, 그것들에 관한 진술이나 주장의 조작적 기저를 관찰자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9
그리고 Riegas와 인터뷰에서 그는 말했습니다: "초월적/선험적 실재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p. 53).
이러한 입장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Vico, Kant, Schopenhauer한테서, 그리고 최근에는 Richard Rorty한테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관찰자가 산출될 수 있는 주변 여건들을 디자인하는 혹 짜펼치는 경험 세계에 대한 생물학적 해석은 새로운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을 작업 가설로서 받아들이면, 경험 세계와 우리의 개념적 관계에 대한 광범위한 영향력을 지닌 귀결이 그 가설에서 나옵니다. 모든 과학적 모델에서처럼, Maturana가 "설명"하고 있는 것은 가설이 현상(現象)을 - 관찰자의 발생을 - 어떻게 다루는가 이지,  다루는가는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과학적 과정에 적합한 기준입니다. 물리학은, 이를테면, 무거운 대상/물체들이 "낙하"하는 일이 어떻게 생기는가에 대해 중력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천체(天體)들은 중력이 작용해 끌어당기고 있으며, 필시 공간 곡률로 환산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간이 본체적 세계에서는  휘어져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물리학자는 설명할 답을 갖고 있지도 않고 답할 필요도 없습니다 - 그는 그저 휘어진 공간에 대한 가정이 상당히 유용한 계산과 예측들을 가능하게 해주고 있다는 점을 관찰할 수 있을 뿐입니다. 자신들의 과학의 인식론적 토대들을 알아차리게 된 그러한 물리학자들이 이를 아주 분명히 말했던 것은, 그들도, Maturana처럼, 그들이 그들 과학에서 기술하고 있는 경험 세계를 맺혀 산출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들 자신의 개념들, 그들 자신의 구별 조작들이라는 바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토대 대신 일관성
서두에 나는 Maturana 이론에서 순환성을 언급했으며, 그때 내 조망에서 그 개념적 원환을 이루는 몇몇 섹트들을 명확히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내 조금이라도 성공했다면, Maturana에 반대하는 한 가지 이상 측면으로 형성된 주요 근거들 가운데 하나를 제거하는 것은 이제 쉬운 일일 것입니다. Gerhard Roth의 정확한 정식화를 사례로 들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순환적 이론의 착상은 토대의 그리고 시작의 문제를 일으킵니다. 관찰자, 그의 관찰 조건과 관찰 대상들(대상들의 구별, 시스템-부분들, 등등)을 차례차례 인식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하든 그래서 생명 시스템들에 대한 구성론적 이론에 이르게 되든, 두뇌 이론, 인지 이론,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관찰자 이론에 이르게 하는 생명 시스템들의 조직에 대한 객관론적 설명으로 시작하든, 마찬가지입니다. Maturana는 양자를 동시에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상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은, 구성론적 접근과 객관론적 접근 사이 모순으로 얽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10 (p.88).
토대의 문제와 시작의 문제는, 그를 비평한 이 논문 서두 페이지에서 이미 분명해진 바처럼, Roth의 견해에서는 서로 긴밀하게 서로 짜여 있습니다. 이것은 전통 지식 이론들을 다루는 수단으로는 적절할 수 있지만, 객관적 세계 그 자체에 대한 지식을 명확이 배제하는 인식론에 대한 비평 수단으로는 적절할 수 없습니다. 하여, 그와 같은 상호 관련은 나한테는 용인될 수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존재론적 토대의 결여는 상당수 Maturana 독자들이 말하고 있는 비판입니다. 이러한비판은 1711년 Vico의 De antiquissima Italorum sapientia(고대 이태리인의 지혜)에 대한 Giornale de' letterati에 익명의 평론가가 행한 주된 비판과 동일한 것입니다.11 Vico는, 그 비판인즉, 그의 철학에 대한 탁월한 해명을 산출했지만, 그것이 진리인 증명을 제공하지는 못했습니다. 지식이 독립된 존재론적 "실재"와 일치 혹은 대응해야 한다는 그 나름의 관념을 고의로 폐기한 구성론자한테, 그와 같은 증명에 대한 요청이 부조리한 것은, 그가 그의 철학의 핵심 <논증 명제>, 말인즉, <지식은 존재론적 세계를 반영할 수도 필요도 없는 것이며 다만 경험 세계에서 그것의 기능하고 있는 바로 그리고 일관성(coherence)으로 판단되어야 하는 것이다>라는 <테제>를 모순없이 제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Maturana는, Vico보다 더 명확하게, 지식은 자신을 "효과적 행위"로 나타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답변에서도 또한 그의 이론이 고의로 순환적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작점을 요구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원환은, 여타 것들 가운데서도, 시작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로 특징지어집니다. Maturana의 거대 체계에서, 모든 점들은 앞선 점들에서 생겨납니다 - 마치 알프스 빙하 위 짙은 안개 속에서 한 발자국 앞도 뒤도 볼 수 없는 채 한 발을 띄어 바로 앞에 한 발자국을 놓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리고 가끔씩 그와 같은 안개 속에서 몇 시간을 걸은 후 자신이 발자국을 따라 걷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과 같습니다. 어떤 특정 지점에서 원환을 시작했다는 사실은 더 높은 수준의 유리한 지점에서만, 안개가 걷히고 더 넓은 시야가 확보되는 경우, 지각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본체적 실재에 대한 우리 시야를 가리우고 있는 안개는 걷힐 수 없으며, 그 까닭은, Kant가 앞서 보았던 것처럼, 그 안개는 빠져나올 수 없게 만들어진 우리 경험하기 방식들과 수단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Maturana의 탐구와 같이 극도로 세심한 탐구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원환의 어디로 발을 들이든 관계 없이 그 경로의 끝에 이를 수도, 우리 발자국을 되밟아 시작에 이를 수도 없다는 점일 뿐입니다. 기껏해야, 우리는 필시 우리가 탐색을 시작할 때 전제로서 구별했던 점을 다시 부를(recalling) 수 있을 것입니다.    
말해진 모든 것들이 관찰자가 그 자신의 구별 조작들에 바탕해서 말한 것들이라면, 이것들은, 경험 세계의 특정 영역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유효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Maturana의 세계관에서, 외적 존재론적 토대들은 그 어떤 "절대적" 시작점도 요청될 수 없습니다. 이 양자의 요구들은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마나 한 짓입니다. 존재론적 의미에서 "토대 혹 바탕"이 전제로 삼고 있는 것은, 관찰자와 독립된 세계에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바입니다. Maturana는 그 가능성을 부인하며, 따라서 그 어떤 강제적인 외적 시작점을 지정하지 않은 것은 아주 일관된 바입니다; 그 까닭은 이러한 점이 바로 경험적 정당화 없이 유효한 것으로 여기도록 하는 "조건없는 형이상학적 원리"와 동등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위에 순수 논리로 거대한 이론적 빌딩이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비평가들의 오해는 Maturana가, 우리 가운데 여타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F학점을 받았던; 이천년 이상, 소박한 또는 형이상학적인, 실재론으로 갈고닦여진, 언어를 써서 그의 해설을 전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언어는 그가 그 모든 문법 형식들에서 본체적 실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가정을 함의하는 단어 "있다 또는 존재한다(to be)"를 쓸 수밖에 없도록 합니다. 그렇지만, Maturana에 대한 주의깊은 독자라면, 아마도 그가 말한 모든 것들은 우리를 그러한 불가피한 함의에서 벗어나도록 "방향짓기" 위해 의도된 것들임을 알아차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Maturana의 자기-창발적 이론에 대한 내 해석이 살클 수 있는 것인 한, 나는 일관성을 깨뜨리는 불일치를 그의 이론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내 관점에서 보자면, 일관성이 필수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모든 것을 포괄하는 철학 체계의 평가 기준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이를테면, Leibniz의 단자론(monadology)은 일관성에 관해서는 흠 잡을 데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적용될 수 있는 세계관으로서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최종 분석으로, Maturana 작업의 가치는 성공 여부에, 말인즉, 그것이 현재 우리 경험의 실천/관행에 응용되고 있는 바에서 그리고 계속해서 그럴 수 있는 것으로 판명되는 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한테는 "정서적으로" 보다 중요한 것으로, 우리는 그가 최근에 내놓은 윤리의 기원/시작들이, <위험에 빠진 우리 혹성에서 합의 영역은 창조될 수 있다>는 희망의 성취를 도울지 여부를 지켜보아야 할 것입니다: 인간 문화의 생존을 가능하게 할 협력에 관한 합의를 도처에서 관행으로/제도로 확립시킨 영역 말입니다.
                    


          미 주
(*) Fung Yu-lan, Chuang-tzu: A new selected translation. Shanghai: The Commercial Press, 1933. Quoted by Alan Watts in The Watercourse Way, Pantheon Books, New York, 1975, p.52.
1. 차이가 하나 있다면, 나한테는, 구별짓기 활동과 더불어 관계짓기 활동이 생겨나고 그것 없이 더 복잡한 개념적 구조들은 있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모든 알기가 구별들 만들기로 시작된다는 점은 고대 중국 철학자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 George Spencer Brown 또한. (cfr, 그의 <<Laws of Form>>, London: Allen & Unwin, 1969) 말했습니다.
2. Cf. my "Wissen ohne Erkenntnis", in Gerhard Pasternak (Ed.), Philosophie und Wissenschaften: Das Problem des Apriorismus, Frankfurt/Bern: P. Lang, 1987.
3. Maturana 텍스트에서 객관성은 단독 개체의 "주관성"의 반대 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고전 철학의 의미로, 말인즉, 더도 덜도 없이 또는 경험자로 야기된 왜곡 없이 "그 자체로서" 세계를 재현할 의도 또는 요청을 나타내는 것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4. Hans Vaihinger, Die Philosophie des Als Ob. Berlin: Reuther & Reichard, 2nd edition, 1913. 그의 뛰어난 저작 서문의 "Preliminary Remarks"에서, Vaihinger는 실용주의를 비난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그의 말로, 실용주의가 "삶을 견디도록 돕는 것은 무엇이든" 참된 것이라 혹은 진리라 부를 때, "최악의 공리주의"(p. XI)로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약 300페이지를 넘긴 후, "… 오늘날의 일단의 범주들은 그저 자연선택과 적응의 산물에 불과한 것들이다". 그는 Kant가 사용한 의미로 "범주들(categories)"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진술로 그는 분명히 다윈의 진화론을 존재론적 실재로 이동시키고 있으며, "범주들", 말인즉, 경험 세계에 대한 우리들 개념화의 핵심 요소들을 생존의 "공리론적" 도구들로 바꾸고 있습니다
5. Cf. Humberto Maturana. "Ontology of observing: The biological foundations of self-consciousness and the physical domain of existence". Texts in Cybernetic Theory, American Society for Cybernetics, 1988; p.36.
6. Cf. Humberto Maturana, "Reality: The search for objectivity or the quest for a compelling argument". The Irish Journal of Psychology, 1988, 9 (1), p. 26.
7. Carmen Luz Mendez, Fernando Coddou & Humberto Maturana. "The beginning forth of pathology", The Irish Journal of Psychology, 1988, 9 (1), 144-172.
8. 단어 "representation"에서 야기되는 개념적 뒤죽박죽에 대한 추가 논의는 in C. Janvier가 편집한 << Problems of representation in the teaching and learning of mathematics, Hillsdale, New Jersey: Earlbaum, 1987>>에 수록된 내 "Preliminaries to any theory or representation"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나는 이러한 사례로 독일어가 더 풍요롭고 더 정확한 언어라는 결론은 아주 잘못된 것이라 언급하고 있습니다. 상이한 개념들의 우연의 일치는 또한 다른 방향에서 찾아질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영어 단어들, "to isolate"와 "to insulate"는 분명히 명시할 수 있는 개념적 차이가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하나이자 똑같은 독일어 단어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9. Humberto Maturana, "Reality: The search for objectivity or the quest for a compelling argument". The Irish Journal of Psychology, 1988, 9 (1), p.30.
10. Gerhard Roth, "Wissenschaftlicher Rationalismus und holistische Weltdeutung". In Gerhard Pasternak (Ed.), Rationalitaet und Wissenschaft, (Vol. 6), Bremen: Zentrum Philosophische Grundlagen der Wissenschaften, 1988.
11. Vico's De antiquissima was published with an excellent Italian translation by Francesco Saverio Pomodoro and the discussion in theVenetian journal by Stamperia de' Classici Latini, Naples, 1858.



        감사
나는 Heinz von Foerster한테 이 논문의 초고에 대한 쓸만한 비판적 논평들로 신세를 졌습니다.

        초록/E. Von Glasersfeld
Humberto Maturana는, Plato 또는 Leibniz에 견줄만한, 폭넓고, 완벽한, 설명 체계 구성에 착수하고 있는 몇몇 저자들 가운데 한 명입니다. 그의 "자기-창발적(autopoietic)" 접근은 또한, 관찰자 자신한테 세계관을 제공한 (조직 원리와 규칙들로서) 일단의 이전 방법들을 가리키는 관찰자의 기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나는 Maturana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알아차림/自覺을 얻고 있는 것(entity)으로서) <res cogitans>의 탄생을 보는 방식을 따르고자 합니다.. 내가 입증하고자 하는 것은, 구별하기라는 기본 활동은 예외없이 관찰자를 관찰된 것에서 분리하는 구별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 적어도 이러한 해석자한테는 - 능동적 의식, 말인즉, 구별하기 에이젼트로서 활동하고 있는 어떤 것의 기원은 변함없이 애매한 채로 남게 된다고 결론짓습니다.

 http://hompi.sogang.ac.kr/mkyang/O/cognition/maturank.htm

2014년 10월 10일 금요일

덕치, 인치, 법치 노자, 공자, 한비자의 정치 사상



  덕치, 인치, 법치 노자, 공자, 한비자의 정치 사상 
   철학의 부재시대에서 바라 본 우리몸에 맞는 정치철학찾기
  저자/역자신동준 저
  발간일2003년 8월 14일
  가격20,000 원 →회원할인가 18,000 원
  분류연구총서 | 도가/제자철학
  포인트900점


철학이 없어진 현재, 우리 몸에 맞는 정치철학은 없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에 답하면서 동양의 철학을 정치철학으로 해석하고 있다. 우리의 사상 속에서 발견한 우리 몸에 맞는 정치철학이 깊게 담겨 있는 책이다. 

판형:신국판 | 쪽수:488쪽 

정치철학의 부재 시대, 우리 몸에 맞는 우리의 정치철학은 없는가 ?

동양의 철학을 정치사상으로 해석한 책이 나왔다. {덕치, 인치, 법치} 노자와 공자, 한비자의 사상을 정치사상의 측면에서 접근한 이 책이 바로 그것이다. 그동안 동양의 전통적 정치사상에 대한 단편적인 언급들은 있었지만 이 책처럼 전격적으로 정치사상에 관한 부분만을 다룬 경우는 처음이다.
일반적으로 동양의 전통사상은 현실성이 결여된 형이상학적 담론으로 이해되어 왔다. 법가의 사상이야 원래 현실과 동떨어져 존재할 수 없겠지만 유가와 도가, 특히 도가의 사상은 현실을 떠난 고원한 담론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 책은 동양의 전통사상들이 형이상학적 담론으로 이해되는 현실을 거부한다. 이 책에서는 노자와 공자, 한비자를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정치의 실현을 위해 진력했던 정치사상가로 이해하고 그들의 철학을 현실과는 결코 유리될 수 없는 입세간의 정치사상으로 해석하고 있다.

흔히 정치학이라고 하면 근대 이후의 서양 이론을 떠올리곤 한다. 실제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전통사상 가운데 정치학 이론으로 연구된 분야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현재 우리의 정치는 구미 민주주의 체제를 지향하고 있고, 정치학 이론 역시 서양의 이론들 일색이다. 그러나 맞지 않은 옷을 몸에 걸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의 정치 현실은 엉거주춤하다. 현재 채택하고 있는 우리 정치 체제의 뿌리가 얕은 까닭이다.
우리의 현대사는 일제치하의 고통, 분단과 전쟁, 연이은 독재를 겪으며 수많은 멍울을 감추고 있다. 그 상처의 일차적인 원인은 무엇보다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확장과 침략에 있을 것이다. 아편전쟁 이후 동아시아 3국에 몰아닥친 제국주의의 광풍은 전통적인 삶의 조건들을 빠르게 변화시켰는데, 그 과정은 매우 폭력적이었다. 정치 분야에 있어서는 기존의 제왕정이 공화정으로 바뀌었지만 짧은 순간에 서양의 정치 체제가 정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뿌리가 얕은 정치 체제가 그것에 의지하는 사람들의 삶의 조건을 뒤흔들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에서 서양의 정치철학은 이미 그 한계를 드러내었다. 현실 정치의 암울함을 정치 담당자들의 사람됨의 문제로만 치부하기에는 그 폐해가 너무 오래되고 심각하다. 대안은 무엇일까? 저자는 동양의 전통사상에 뿌리를 둔 '통치학'을 역설한다. 저자가 역설하는 통치학은 도가, 유가, 법가의 사상에 기초하고 있는 새로운 정치사상이다. 이들 사상 가운데 저자는 특히 노자의 사상에 주목한다. 노자는 인간 사회에 발생하는 모든 폐단의 원인을 '과잉된 인위'에서 찾고 절욕과 절제를 주장하였다. 비록 2천 년 이상의 시간상의 갭이 있지만, 과잉된 인위로 인해 갈등과 분열이 만연한 지금 노자의 사상은 한계에 봉착한 서양 정치사상의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사상가들의 면모는 다양하다. 저자는 우선 동양 정치사상의 출발점을 관중으로 잡고, 그를 기준으로 도가와 유가, 법가의 정치사상을 분석하고 있다. 도가의 사상가는 노자에 한정되는데, 노자와 더불어 도가 사상의 핵심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장자의 경우는 출세간적 성향이 너무나 강해 정치사상 분야에서는 언급할 만한 부분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가 사상가는 공자를 중심으로 맹자와 순자를 병행해서 살펴보고 있다. 맹자와 순자는 각기 다른 방향에서 공자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정치사상적 성과들을 일구어냈기 때문이다. 이밖에 법가의 사상가는 자료상의 제약으로 인해 한비자만을 다루고 다른 사상가들은 거의 언급하지 못하였다.

공화정이냐 제왕정이냐, 민주주의냐 사회주의냐, 이런 것들만이 정치학의 전부는 아니다. 이 책은 도가, 유가, 법가의 정치사상을 치본론과 치도론, 치술론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 있다. 치본론은 통치의 본질에 관한 논의라 할 수 있고, 치도론과 치술론은 각각 통치목적론과 통치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세 가지 기준 속에서 저자는 전통사상에 대한 정치학적 접근을 시도한다. 저자의 시도 가운데 특징적인 면을 든다면 무엇보다도 이것이 정치학적 해석이라는 점이다. 저자는 공자의 적통을 맹자가 아닌 순자에게로 연결시키고, 노자의 사상은 장자에 이르러 결정적으로 왜곡되었다고 단정한다. 또한 관중과 한비자를 전통사상의 핵심 영역 속에 편입시키고 있다. 이러한 해석들이 가능한 것은 그것이 모두 철학적 접근이 아닌 정치학적 접근이기 때문이다.



신동준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정치학)를 취득하였다. 조선일보, 한겨레신문 기자를 거쳐 일본 東京大學 東洋文化硏究所의 객원연구원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등에 출강하고 있다. 대표 저술로는 『통치보감』,『관중과 제환공』,『치도와 망도』,『역사대장정』,『난세를 평정하는 중국 통치학』등이 있다.

춘추전국 묵가/병가/법가사상과 PR철학

춘추전국 묵가/병가/법가사상과 PR철학박기철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논문
관리자  |  admin@the-p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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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0.11.23  21: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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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500여년 전 중국은 춘추 시대다. 춘추시대 이후 진나라의 중국 통일 이전까지 전국시대가 이어진다. 과도기적 춘추전국이라는 역사에서 제자백가라 일컬어지는 사상들이 생겨나게 됐다. 이러한 여러 가지 사상들 중 공중관계 활동인 PR과 가장 관련이 깊은 사상은 원시유교사상과 원시도교사상이다. 그 당시 인도에서 생긴 원시불교사상도 PR철학과 관련이 깊다. 아울러 춘추전국시대 묵가, 병가, 법가 사상도 PR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지난달 19일 한국PR학회가 주최한 추계 정기학술대회에서 박기철 경성대 광고홍보학과 교수가 발표한 ‘춘추전국시대 묵가·병가·법가 사상과 PR철학’이 그같은 내용을 담아 눈길을 끌었다. 박 교수의 논문 내용을 요약 소개한다. <편집자 주>

■ PR에 의미를 주는 원시 동양사상
논어 속 공자님 말씀을 살펴 보면 원시 유교 사상은 순리적이며, 인간적이고, 현실에 충실한 사상이었다. 그러한 원시 유교 사상에 맞게 현대 PR은 유연·관계·가치의 철학을 가진다. 이제 현대 PR은 이윤 추구를 위한 마케팅 PR(MPR)을 넘어 가치 추구의 브랜딩 PR(BPR)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 또한 조직과 공중의 관계를 넘어 조직과 생태와의 관계를 배려하면서 공동체 내의 조직과 공중이라는 공동체 PR의 철학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현대 PR은 공자님 말씀이었던 순리적 인간적 충실한 모습을 제대로 받아들여야 할 때이다. 그래서 순리적 유연성, 인간적 관계성, 충실한 가치에 따른 현대 PR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노자 도덕경에 실린 도의 철학 역시 주술과 거리가 먼 패러다임 전환의 커다란 철학이다. 노자 사상의 관점에서 PR이란 이기기보다 감싸는 여성성의 페미니즘 PR이며, 공중으로부터 이윤을 얻기보다 공중에게 가치를 베푸는 PR이며, 차이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PR이며, 조직과 공중 간의 관계만이 아닌 생태적 공동체를 실현하려는 PR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PR이란 조직과 공중 간의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넘는 그물망 커뮤니케이션으로 하나의 생태적 공동체 안에서 조직과 공중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조직이 공중에게 가치를 주며 서로를 감싸는 관계 활동이다.
불교의 초기 경전인 아함경에서 알 수 있는 원시 불교사상을 살피면 불교는 연기(緣起)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매우 현실적인 세계관의 철학이다. 이러한 원시불교 철학의 관점에서 PR은 공중관계 PR만이 아닌 생태관계 PR로서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 공중관계 PR은 조직이 중심에서 환경을 이루는 다양한 공중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이 공중관계 PR에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것은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다. 하지만 생태관계 PR에서 조직은 중심에 있지 않고 생태계 안의 인간이 그렇듯 그물망 속의 한 점에 불과하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그물망 커뮤니케이션이다. 석가모니 부처가 깨달은 연기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원시 불교 사상과 생태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현대 PR 철학이 만나는 전환점에서 PR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면, “PR은 호의적 공중 관계를 맺기 위한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다”라기보다 “PR은 지속적 생태 관계를 맺어가는 그물망 커뮤니케이션”이다.
■ 원시 묵가 사상과 PR 철학
원시유교사상, 원시도교사상과 마찬가지로 약 2,500여년 전에 생긴 원시묵가사상의 핵심을 세 가지 한자로 압축요약한다면 실(實), 겸(兼), 천(天)이다. 
● 실(實)의 사상 : 묵가사상의 기반은 실용주의, 또는 현실주의 철학이다. 그 사상의 가장 근본적인 요체는 바로 뜬 구름 잡는 이상을 배격하는 실의 사상에 있다. 묵자의 문헌에서 이러한 실의 사상을 가장 실감나게 잘 알 수 있는 부분은 절용(節用)편이다. 절용이란 비용의 절감을 뜻한다. 
● 겸(兼)의 사상 : 겸(兼)이란 더불어·함께의 뜻을 가지고 있다. 겸애(兼愛)란 더불어 사랑한다는 뜻이다. 더불어 사랑하는 것은 자기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도 같이 사랑한다는 뜻이다. 이 세상의 모든 죄악은 바로 자기만 사랑하는데서 생긴다. 남의 아픔과 고통에 대해서는 무지한데서 생긴다. 그렇게 자기만 사랑하고 남에 대해서는 아무 상관없이 무심한 것은 하나의 병이다. 싸이코패스라는 정신질환은 그러한 병의 결정판이다.
● 천(天)의 사상 : 여기서 하늘이란 천주교와 같이 신앙적인 대상이 아니라 철학적인 표상이다. 즉 하늘의 뜻에 따라 일을 추진하고 일이 성사되어야 현실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묵자 전편에 흐르는 이러한 하늘 중심의 사상은 천지(天志)편에 가장 직접적으로 나와 있다. 천지란 말 그대로 하늘의 뜻이다. 하늘의 뜻을 좇아 따르는 사람을 천자라 한다. 천자는 하늘의 뜻에 따라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 그러한 하늘의 뜻은 강하고 큰 나라가 약하고 작은 나라를 공격하지 않고, 머리가 좋고 높은 사람이 아랫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는 것이다.
■ 원시 병가 사상과 PR 철학
손자병법에서 가장 유명한 문구를 말하라고 하면 대개 ‘知彼知己 百戰百勝’이라고 하는데, 손자병법에는 이런 말이 없다. 손자는 이렇게 욕심스럽게 말하지 않고 다만 ‘知彼知己 白戰不殆’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뜻이다. 그래서 손자는 전쟁을 미학(art of war)으로 끌어 올렸다는 평을 받고 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전쟁미학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즉 이기기 위한 전쟁의 기술을 제시한 사람이 아니라 이기게 되는 전쟁의 철학을 제시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손자병법을 다룬 해설서(권형안 2006, 유동환b 2005, 노태준 2009)에서 가장 감명깊은 구절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일 것이다. 
“是故百戰百勝 非善之善者也 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이런 고로 백번 싸워 백번 이기는 것은 최선 중의 최선이 아니다. 전쟁하지 않고 적병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선 중의 최선이다.)
경쟁자보다 한 수 위에 있어야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다. 공중관계 활동인 PR도 마찬가지다. 공중과 좋은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루어 가려면 경쟁자보다 한 수 위에서 고객에게 좋은 가치를 지속적으로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렇게 하면 시시하게 쩨쩨하게 경쟁하지 않고 결과적으로 승리하게 된다. 승리 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승리라는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경쟁을 넘는 경쟁미학이다. 또한 마케팅의 미학이며, PR의 미학이기도 하다.
■ 원시 법가 사상과 PR 철학
법가 사상이란 순자처럼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보기 때문에 인치나 덕치가 아니라 철저한 법치에 의해 강하게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한비자의 법치주의 사상 안에는 노자사상이 짙게 깔려 있다. 가령 노자도덕경 63장에 天下難事 必作於易 天下大事 必作於細이라는 유명한 말이 나온다. 천하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것에서 시작되고, 천하의 큰 일은 반드시 작은 것에서 비롯된다는 뜻이다. 한비자는 이러한 문구를 비유해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千丈之堤, 以?蟻之穴潰 百尺之室 以突隙之烟焚 즉 천길의 강둑도 개미구멍으로 무너지고 백척의 큰집도 굴뚝연기로 불탄다는 뜻이다. 이러한 상황이니 매사에 세심하고 치밀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법가 사상은 PR의 현실적이며 구체적인 방법이 무엇인지의 문제와 관련시킬 수 있다. 지금까지 원시유교나 원시도교, 원시불교 사상은 개념적으로 PR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에 도움은 되나, 그렇다면 PR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방법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답을 주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한비자의 법가 사상에 대해 나라를 움직이는 방법적 시스템이라고 할 때, 이러한 해석을 PR에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PR이 제대로 되려면 널리 알리는 홍보 시스템이 아니라 다양한 공중관계 시스템을 순리적으로 갖추는 일이 PR의 도(道)이고, 또한 PR의 법(法)이다. 다양한 공중관계 시스템이란 공중별 PR을 위한 시스템이다. 내부 직원이라는 공중과의 관계, 협력업체라는 공중과의 관계, 소비자라는 공중과의 관계, 투자자라는 공중과의 관계, 지역사회 주민이라는 공중과의 관계, 정부 공무원이라는 공중과의 관계, 네티즌이라는 공중과의 관계, 언론사 기자라는 공중과의 관계 등… 이러한 다양한 공중들과 지속적으로 호의적 관계를 이루어 갈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PR을 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 된다. 
결론적으로 사변화 이전의 원시 유교사상은 유연한 인간관계, 주술화 이전의 원시 도교사상은 물처럼 흐르는 순리, 신앙화 이전의 원시 불교사상은 세상만사 얽히고 설킨 연기의 철학이었다. 묵가 사상은 안을 채우는 충실, 병가 사상은 이기게 되는 결과, 법가 사상은 실제로 구현하는 방법의 철학이었다. 이러한 여섯 가지 동양사상의 키워드를 사용해 PR에 대해 종합적으로 정의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PR은 그물망 안에서 서로 緣起 되어진 공중들과 지속적 關係를 順理에 따라 이루어 가기 위해 먼저 속을 充實히 한 후 다양한 공중들과의 관계 方法을 마련하여 경쟁에서도 이기게 되는 結果를 가져오는 활동이다.”
■ PR 철학의 패러다임 전환
원시 유교사상 등 동양사상들은 PR에 대한 기본적인 철학과 방법을 일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토대로 PR에 대한 지침을 열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널리 홍보하기보다 가까운 관계부터 맺어 가라.PR은 홍보와 전혀 다르다. 널리 알리는 홍보는 단지 노출을 많이 하도록 해 전달을 잘 하면 되지만, 공중관계인 PR은 더 복합적이며 입체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을 가져야 한다. PR이 잘 되려면 멀리 있는 공중보다 가장 가까운 내부직원, 협력업체 등의 공중부터 좋은 관계를 맺어 가야 한다. PR은 외부로 알리는 활동이라기보다 내부에서부터 먼저 공감이 가도록 지속적으로 이루어 가는 활동이다.
2. 허상적 이미지를 꾸미기보다 실체적 밸류를 가꿔라.
PR에 대한 가장 커다란 오해는 이미지를 좋게 포장하는 것이라는 인식이다. 이미지란 실제와 상관없이 만들어질 수 있는 허상이기 쉽다. PR은 이미지를 겉으로 좋게 해 멋지게 꾸미며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안으로부터 내부의 가치를 충실히 가꾸어 가는 것이다. 이미지 메이킹이 아니라 밸류 빌딩인 셈이다. 이는 실속을 중시하는 묵가 사상과 같은 맥락이다. PR의 키워드는 이미지가 아닌 밸류이다.
3. 입소문을 내려 하지 말고 입소문이 나도록 하라.헛소문과 입소문은 다르다. 헛소문(rumor)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헛되게 퍼지는 것이라면 입소문(mouth to mouth)은 실제로 써 본 사람의 입을 통해 다른 사람의 귀로 들어가 차례대로 전달되는 것이다. 이러한 입소문이란 인위적으로 내려고 해서 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나게 되는 것이다. 입소문이 나는 것은 실제로 써 본 사람이 좋은 가치를 통해 좋은 체험을 하고 좋은 관계를 가지고 싶을 때이다.
4. 쌍방향 공중관계보다 그물망 생태관계를 배려하라.
정통적인 PR의 관점에서 조직과 공중 간의 쌍방향 균형은 가장 이상적인 상태이다. 하지만 쌍방향 균형은 단지 조직과 공중 간의 관계일 뿐이다. 불교의 연기사상을 수용했을 때 PR은 더욱 포괄적이며 전반적인 관점을 취하게 된다. 조직과 공중은 모두 관계망인 그물망에 걸쳐 있는 하나의 점일 뿐이다. 그물망에 속해 있는 모든 점들은 고정된 하나의 중심 없이 모두 얽히고 설켜 있는 관계에 있다.
5. 튀는 독창성보다 끌리는 진정성을 가져라.독창성은 다른 것들과 차별화 되는 것이다. 차별화 되면 남들보다 튀게 된다. 광고에서 가장 중요한 것도 바로 이러한 크리에이티브이다. 하지만 광고에서건 광고보다 훨씬 더 포괄적인 PR에서건 독창성(creativity)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진정성(authenticity)이다. 즉 진심이 느껴져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진정성이 있으면 튀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끌리게 된다. 진정성 없는 독창성은 사기에 불과하다.
6. 이기려는 목적이 아니라 이기게 되는 결과를 얻어라. PR은 승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맺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PR은 싸움(戰)에서 이기기 위한 꾀(略)인 전략이라는 말과 근본적으로 어울리지 않는다. PR이 추구하는 것은 이기려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이기게 되는 것이다. 이는 손자가 전쟁에서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레드오션이 아닌 블루오션에서도 결국 싸움의 경쟁에서 벗어나면 결과적으로 이기게 된다.
7. 이윤을 얻는 MPR보다 가치를 주는 BPR을 하라.기존의 CPR(Corporate PR)이 머릿속의 호의를 얻는 것이라면, 1991년에 새롭게 생긴 MPR(Marketing PR)은 마케팅 상의 실제적 이윤 얻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MPR은 기업의 목표에 부합되므로 보편적인 용어가 되었다. 하지만 PR은 이윤을 얻기 위한 활동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가치를 주기 위한 활동이다. 여기서 가치란 브랜드를 뜻한다. 그래서 BPR(Branding PR)은 가치를 주는 PR이다. 
8. 거창한 뉴스꺼리보다 생생한 이야기꺼리를 찾아라.널리 알리는 홍보를 위해 언론홍보가 중요하다. 그래서 보도자료를 기자에게 제공하는 PR(Press Release)를 통해 대중매체에 공표(publicity)될 수 있다. 이를 위해 거창한 뉴스거리의 보도자료를 기자에게 주려고 한다. 하지만 기자의 입장에서 그런 뉴스거리는 별 뉴스가치가 없을 수 있다. 대신에 의미있고 흥미있는 생생한 이야기꺼리가 담긴 보도자료는 끌리게 되어 보다 비중있는 기사로 다루어지기 쉽다.
9. 집중적 정보전달보다 지속적 상호작용에 힘써라.커뮤니케이션이란 쌍방적 의사소통을 뜻하는데, 일방적 의사전달로 이해하기 쉽다. 집중적으로 우리의 정보나 의사를 전달하면 커뮤니케이션이 잘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집중성보다 중요한 것은 지속성이다. 그것도 단지 일시적인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상호작용이 중요하다. PR이 추구하는 관계는 그러한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진다.
10. 다양한 공중관계 시스템을 실제로 갖춰라.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루어 가는 PR 마인드와 철학을 갖췄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이것이 구현되려면 다양한 공중들과의 관계 시스템이 방법적으로 마련돼야 한다. 법가 사상이 치밀하며 세심한 시스템으로 나라를 운영해야 하는 방법과 같은 맥락이다. PR은 복잡하며 입체적이고 전반적인 영역이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넓고 깊이 생각한 후에 마인드(Philosophy) 기반의 관계 시스템(method)이 작동되어야 한다.

대여대취- 크게 주고 크게 얻어라, 신동준

대여대취 크게 주고 크게 얻어라


신동준 지음 | 21세기북스 | 2012년 07월 20일 출간

책소개

손자를 벼린 조조의 성공 지략으로 나만의 ‘대물’을 꿈꿔라!

크게 주고 크게 얻어라『대여대취』. 고전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과 사람의 길을 찾는 고전 연구가이자 역사문화 평론가인 저자 신동준이 조조의《손자약해》를 바탕으로 대여대취 정신을 ‘지금 당장’의 현리 가치로 쉽게 풀어냈다. 저자는 삼국시대 당시 천하통일 기반을 닦은 조조는 도가와 법가 사상에 입각해《손자병법》을 새롭게 편제하고 주석을 가했던 바, 《손자병법》은 반드시 조조 시각에서 접근해야 그 취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조조의 지혜가 담긴《손자병법》으로, 임기응변으로 주도권을 쥐는 방법부터 적과 나의 실력을 알고 싸우는 법, 지략이 뛰어난 자를 활용하는 법 등 ‘크게 주고 크게 얻는’ 비결들을 알려준다.

북소믈리에 한마디!

이 책은 제왕을 위시해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에게 끊임없는 사랑을 받고 있는《손자병법》의 내용을 조조의 시각으로 새롭게 재구성하여 담아낸 책이다. 다양한 전략과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이 비즈니스의 아이디어를 얻고, 사람을 깊이 읽는 안목을 얻고, 치국평천하의 방략을 찾을 수 있도록 안내한다.

저자소개

저자 : 신동준

신동준저자 신동준은 학오學吾 신동준申東埈은 고전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과 사람의 길을 찾는 고전연구가이자 역사문화 평론가다.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안목을 바탕으로 이를 현대화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그의 저서는 독자들에게 고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고 있다. 경기고등학교 재학시절 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학의 대가인 청명 임창순 선생 밑에서 사서삼경과 『춘추좌전』, 『조선왕조실록』 등의 고전을 배웠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뒤 《조선일보》와 《한겨레》 등에서 10여 년 간 정치부 기자로 활약했다. 1994년에 다시 모교 박사과정에 들어가 동양정치사상을 전공했고, 이후 일본의 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을 거쳐 『춘추전국시대 정치사상 비교연구』로 모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21세기정경연구소 소장으로 있는 그는 서울대학교·고려대학교·한국외국어대학교 등에서 학생들에게 동양 3국의 역사문화와 정치사상 등을 가르치고 있다. 또한 《월간조선》, 《주간동아》, 《주간경향》, 《이코노믹리뷰》 등 다양한 매체에 꾸준히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2012년부터는 《조선일보》 주말판 경제섹션 〈위클리비즈〉의 인기 칼럼 ‘동양학 산책’을 연재 중이다. 저서로는 『후흑학』, 『사마천의 부자경제학』, 『조조 사람혁명』, 『팍스 시니카』, 『열국지 교양강의』, 『조선국왕 vs 중국황제』, 『인물로 읽는 중국 현대사』, 『삼국지, 군웅과 치도를 논하다』, 『춘추전국의 영웅들』(전3권), 『CEO의 삼국지』,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연산군을 위한 변명』, 역서 및 편저로는 『자치통감 삼국지』(전2권), 『춘추좌전』(전3권),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초한지』 등이 있다.

목차

서문 ­ 대여대취, 크게 주고 크게 얻어라 005
서설 ­ 조조의 『손자약해』 014

제1장 인리제권因利制權 임기응변으로 주도권을 쥐어라 [대계大計]
국가 존망을 생각하라 · 025 | 전쟁 이치를 파악하라 · 027 | 천지운행을 이해하라 · 029 | 냉철히 비교 분석하라 · 032 | 적의 예상을 깨라 · 036 | 이길 조건을 갖춰라 · 040

제2장 병귀신속兵貴神速 패할 때도 속전속결로 끝내라 [작전作戰]
비용을 생각하라 · 047 | 오래 끌지 말라 · 051 | 현지서 조달하라 · 059 | 민폐를 줄여라 · 062 | 내 것으로 만들라 · 065 | 속전속결을 행하라 · 069

제3장 지피지기知彼知己 적과 나의 실력을 알고 싸워라 [모공謀攻]
싸우지 말고 이겨라 · 075 | 유혈전을 피하라 · 086 | 유연하게 생각하라 · 089 | 양장을 선발하라 · 093 | 맡겼으면 믿어라 · 095 | 자신부터 돌아보라 · 101

제4장 가승재적可勝在敵 승리는 적에게 달려 있다 [군형軍形]
공격처럼 수비하라 · 109 | 패하지 않는 싸움을 하라 · 112 | 내부를 바르게 하라 · 116 | 인재를 길러라 · 119

제5장 기정상생奇正相生 기병과 정병을 뒤섞어 운용하라 [병세兵勢]
기병을 활용하라 · 125 | 절도를 갖춰라 · 133 | 미끼로 유인하라 · 139 | 전세를 장악하라 · 142

제6장 피실격허避實擊虛 실한 곳을 피하고 허한 곳을 쳐라 [허실虛實]
고정된 상식을 깨라 · 149 | 재빨리 치고 빠져라 · 152 | 힘을 집중시켜라 · 156 | 자취를 감춰라 · 161

제7장 병이사립兵以詐立 용병은 적을 속이는데서 시작한다 [군쟁軍爭]
돌아가듯 직진하라 · 173 | 능력껏 짐을 져라 · 177 | 유리할 때 움직여라 · 182 | 상대를 흔들어라 · 186 | 퇴로를 열어 주어라 · 191

제8장 필사가살必死可殺 죽기로 싸울 것을 고집하면 패한다 [구변九變]
현장에서 대처하라 · 201 | 군명을 거부하라 · 209 | 유사시를 대비하라 · 218 | 자신을 경계하라 · 223

제9장 병비익다兵非益多 병력이 많다고 꼭 좋은 게 아니다 [행군行軍]
알고 움직여라 · 235 | 발밑을 조심하라 · 238 | 조짐을 읽어라 · 244 | 문무를 겸전하라 · 252

제10장 지천지지知天知地 천시와 지리까지 읽어야 이긴다 [지형地形]
현지 전술을 구사하라 · 265 | 내부부터 단속하라 · 272 | 백성을 보호하라 · 277 | 자식처럼 아껴라 · 281

제11장 오월동주吳越同舟 필요하면 적과 함께 배에 올라라 [구지九地]
상황에 적응하라 · 289 | 불리하면 중지하라 · 299 | 사지로 내던져라 · 303 | 오월동주를 행하라 · 308 | 필승을 기하라 · 312 | 천하를 품어라 · 319 | 임무만 알려라 · 325

제12장 비리부동非利不動 이익이 없으면 움직이지 마라 [화공火攻]
도구부터 준비하라 · 335 | 바람을 따르라 · 342 | 감정을 자제하라 · 350

제13장 이지위간以智爲間 지략이 뛰어난 자를 활용하라 [용간用間]
정보망을 갖춰라 · 361 | 보안에 주의하라 · 367 | 인재를 활용하라 · 374

후기 21세기 승부는 손자병법 손에 있다! 380
참고문헌 391

책 속으로

『손자병법』에 나오는 모든 전략 전술은 기본적으로 부득이용병 또는 집이시동에 입각한다. 평시에는 무기를 거두었다가 전시에 무기를 들고 대응하라고 주문한다. 그렇다면 「시계」에서 부득이용병의 구체적인 방안으로 거론하는 도道, 천天, 지地, 장將, 법法은 과연 무엇을 뜻할까? 우선 「시계」에서 말하는 ‘도’는 『도덕경』에서 역설하듯이 ‘덕德’의 본원을 뜻한다. 덕을 두고 노자는 무위지치無爲之治, 장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 공자는 인仁, 묵자와 맹자는 의義, 순자는 예禮, 한비자는 법法, 손무는 무武라 했다. 이처럼 제자백가 모두 덕을 언급하지만, 모두가 최상으로 여겼던 것은 무위지치다. 무위지치는 제왕의 통치가 마치 해와 달이 만물을 고루 비추듯이 지극히 공평무사함을 뜻한다. (28쪽)

삼국시대 초기 신흥 강자 조조와 당대 최고의 무력을 자랑한 원소의 운명이 갈리게 된 결정적인 배경은 조조가 천자를 옆에 끼고 천하를 호령하는 이른바 ‘협천자挾天子, 영제후令諸侯’를 실행한 데 있다. 명분상의 우위를 점한 것이 요체다. 원소는 힘만 믿고 이를 무시했다. 대개 원소의 자만심이 지나쳤다고 해석하나 이는 반만 맞는 말이다. 원소 스스로 천자가 되고자 욕심을 낸 것이 정답이다. 이미 민심이 한나라를 떠난 만큼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자 한 것 자체를 탓할 수는 없다. 문제는 그릇이다. 원소는 그릇이 작았다. 게다가 시기심과 욕심도 많았다. 난세에 천하를 거머쥐려는 자로서는 실격이다. (90쪽)

조조의 인재 등용은 공적인 대의에 입각한 구현求賢, 유비의 용인술은 사사로운 의리에 기초한 인현引賢으로 표현할 수 있다. 손권은 시의時宜를 좇은 용현用賢에 해당한다. 그의 용현은 일정한 선을 넘지 않았다. 그 비결은 손권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도 잘 나타난다. “상대의 장점을 높이고 상대의 단점을 곧 잊어버린다.” 그는 상대의 단점에 눈을 감아버리고 장점을 발휘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한번 일을 맡긴 뒤에는 전폭적인 신임을 아끼지 않았다. 적벽대전에서 주유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이릉대전에서 육손을 탁용한 데 이어 제갈근에게 끝없는 믿음을 보낸 것이 그 증거다. (114­115쪽)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문’과 ‘무’를 고루 갖춰 명실상부한 ‘문무겸전’의 자세로 새 왕조를 개창한 인물은 삼국시대 위나라의 창업주인 위무제 조조다. 그는 동탁토벌을 기치로 내걸고 군벌 경쟁에 뛰어든 이래 죽을 때까지 전장에서 평생을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목할 것은 당시 유비와 손권을 포함한 여러 군웅 가운데 조조처럼 전장에서조차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열심히 공부한 인물이 전무했다는 점이다. 조조의 행보 가운데 문무겸전의 병도 이치를 가장 잘 보여 준 사례로 ‘분소밀신焚燒密信’ 일화를 들 수 있다. 이 일화는 조조가 원소를 격파한 관도대전 승리 이후에 나온 것이다. (253­254쪽)

“옛날 용병을 잘하는 사람은 아군에게 유리하면 곧바로 공격하고 불리하면 곧바로 중지했다”는 대목 가운데 중요한 것은 불리할 때 중지하는 일이다. 유리할 때 공격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웬만한 장수라면 능히 할 수 있다. 그러나 불리할 때 중지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객관적인 잣대를 들이대 판단하기도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설령 그런 판단을 내렸을지라도 이미 투자한 것이 많은 까닭에 선뜻 발을 빼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리더십의 진면목은 바로 이때 나온다. 이를 잘한 인물로 삼국시대의 조조를 들 수 있다. (300쪽) 닫기

출판사 서평

손자병법, 세상을 크게 바라보는 안목을 담다

천하를 사로잡은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모두 『손자병법』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손정의는 『손자병법』을 자신의 경영 전략과 접목시킨 ‘자승병법自乘兵法’을 만들어 일본 최고의 부자가 됐다. 세계 최고의 부자 빌 게이츠도 오늘의 자신이 있는 것은 『손자병법』 덕분이라고 했다. 스티브 잡스가 ‘창조 경영’과 소프트웨어의 상징 애플제국을 건설하고, 빌 게이츠가 윈도우 개발로 천하의 부를 거머쥐고, 손정의가 일본 최대의 컴퓨터 회사를 창립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고금을 관통하는 『손자병법』의 위대한 면모를 웅변하는 대목이다.
고금의 역사를 개관하면 알 수 있듯이 무력을 동원하기 전에 명예와 이익, 권력을 좋아하는 인간의 기본 심성을 적극 활용해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이 고수의 비결이다. 『손자병법』은 바로 이런 이치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았다. 『손자병법』은 병가 사상의 정수를 응축한 최고의 고전이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오래전부터 『손자병법』을 세상을 크게 바라보는 안목과 지혜로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고전으로 간주했다.
수천 년에 걸쳐 많은 병서가 명멸했지만 유일하게 『손자병법』만 제왕을 위시해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에게 끊임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이 읽으면 글로벌 비즈니스의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고, 두목 같은 문인이 읽으면 사람을 깊이 읽는 안목을 얻을 수 있으며, 조조 같은 위정자가 읽으면 치국평천하의 방략을 찾을 수 있다.

대여대취, 크게 주고 크게 얻어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적확한 탐구가 빛나는 최고의 지략서 『손자병법』의 핵심은 ‘대여대취’다. 크게 주고 크게 얻으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익을 향해 무한 질주하는 인간의 본성 ‘호리지성好利之性’을 정밀하게 추적함으로써 얻어낸 것이다. 그 호리지성, 대여대취의 뜻을 『손자병법』의 뚜렷한 맥으로 관통시킨 인물이 바로 조조다.
이 책은 조조의 『손자약해』를 바탕으로 대여대취 정신을 ‘지금 당장’의 현실 가치로 풀어쓴 것이다. 삼국시대 당시 천하통일 기반을 닦은 조조는 도가와 법가 사상에 입각해 『손자병법』을 새롭게 편제하고 주석을 가했던바, 『손자병법』은 반드시 조조 시각에서 접근해야 그 취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시중에는 『한비자』의 「외저설 좌상」에 나오듯 겉의 화려한 장식에 현혹되어 정작 알맹이를 놓치는 매독환주買?還珠의 우를 범하는 책들이 넘쳐난다. 조조가 역설한 집이시동 이치를 무시하거나 간과한 결과다. 여기에서 집이시동은 평소 무기를 거두어들였다가 부득이할 때 사용한다는 뜻이다. 집이시동은 『손자병법』 전체를 관통하는 기본 이념에 해당한다.
대여대취는 곧 커다란 미끼로 상대방을 유인해 제압한다는 뜻이다. 인간의 본성을 최대한 활용해야 궁극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의미다. 『손자병법』이 「모공」에서 백전백승은 결코 최상의 계책이 될 수 없다고 못 박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실제로 『손자병법』의 저자로 알려진 손무와 이를 새롭게 편제한 조조, 무위지치를 역설한 노자, 무위자연을 내세운 장자, 공평무사한 법치를 역설한 한비자 모두 대여대취의 취지에 공명했다.

손자병법, 난세의 제왕학

『손자병법』이 『한비자』와 더불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동안 ‘난세의 제왕학’으로 군림하는 것은 극히 현실적인 입장에서 난세의 종식 방략을 제시한 덕분이다. 진시황이 병가와 법가 사상에 입각해 사상 최초로 천하를 통일한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조조가 당대 최고의 병법가이자 법가 사상가로 행보하며 삼국시대를 마무리 짓는 기틀을 닦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조조가 『손자병법』을 새롭게 펴낸 『손자약해』 서문에서 『도덕경』의 제도帝道 이념을 병도 이념으로 끌어들인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조조가 “영웅은 가슴에는 큰 뜻을 품고, 뱃속에는 좋은 계책이 있어야 한다”고 일갈한 것처럼 ‘뜻’과 ‘꿈’을 크게 갖고 대성하고 싶다면 반드시 이 책을 접해야 할 것이다. 백날의 작은 승리는 별것 아니며 매사가 그렇듯 큰 이익을 미끼로 내걸어야만 큰 고기를 낚을 수 있다. 조조의 지혜가 살아 꿈틀대는 『손자병법』으로 ‘크게 주고 크게 얻는’ 그 최강 비결을 배워라.

2014년 10월 8일 수요일

도올과 베버의 대화

도올과 베버의 대화 
http://www.yesu.kimc.net/33dolbe.htm
 ▣ 목차
 1. 머리말
 2. 도올과 베버의 프로필
 3. 베버의 사회과학적 방법론
 4. 금욕주의의 신앙적근원
 5. 근대 자본주의의 특징
 6. 도올의 베버 비판
 7. 맺 음 말
 ● 부 록 1 [도올 논어(2)]
 ◇ 요절 : ① 성경: "네가 자기 사업(직업 또는 사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잠22:29)
               ② 論語: "자왈 '군자불기'(子曰 '君子不器')"
 ▣ 본문
 1. 머리말
 KBS TV1 의 '도올의 논어 이야기' 제42강(2001년 3월 2일, 23:30~24:30)에서 도올의 베버비판을 흥미 있게 시청하고, 그 강의 내용을, 도올 강의를 시청하는 시청자들과 또 이 주제에 관심을 갖는 분들을 위하여, 좀더 부연(敷演)하고자 하여 동서양의 대표적 두 석학(碩學)의 지상대화(紙上對話,Cyber dialogue)의 장(場)을 마련했다. 이것은 작은 세기적인 대화(世紀的인 對話)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대화의 논점(Point)은 서구 근대의 직업관(Beruf, Professional specialist)과 유교권의 직업[기(器), a tool, 동양적인 전문직]사상이 근대의 동서양의 경제사회에 각기 끼친 문화와 시스템(System)의 차이를 비교한 막스 베버(Max weber)의 비판을, 도올이 공자(孔子)편에서 비판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필자가 국외자(Spectator)로서 코멘트(Comment)하는 형식으로 쟁점별로 지상대화를 전개시킨다.  대화의 텍스트(Text)는, '도올논어(2)' (김용옥저서, 서울, 통나무, 2001.2.1)와 '프로테스탄티즘의 倫理와 資本主義의 精神'(막스 베버저서, 강명규의역, 서울, 一潮閣, 1985.3.10)이다.(단, 이 글은 본문에서는 각기'도올논어(2)'와 '베버의 저서'로 약칭한다.)
 2. 도올과 베버의 프로필(Profile)
 도올(김용옥교수)은 한국 천안 태생(서기 2001년 현대 50대 초반)으로 고려대학교, 국립대만대학, 일본동경대학, 미국하바드대학에서 중국 철학을 전공하고 고려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세계적인 중국 철학자의 한 분이다.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는 독일 엘프르트시 태생으로 하이델 베르크대학에서 법률학, 역사학, 경제학, 사회학, 철학등을 수업(修業)한 후, 그의 풍부한 세계사적 지식을 배경으로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 철학등을 포괄적으로 이해.발전시킨 위대한 서구의 사회과학자였다. 그의 핵심적인 업적은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사회과학 방법론의 확립이며, 그 둘은 그의 사회과학 방법론에 의한 근대 자본주의의 해석이다. 그의 대표적 역작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 (Die Protestantishe Ethik Und Geist des Kapitalismus, zuerst 1904-1905)이다
 3. 베버(Max Weber)의 사회과학적 방법론
 (1) 베버의 방법론
 베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베버의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베버의 방법론은 이념형(理念型,Ideal Typus)과 가치 중립성(價値 中立性,Wertfreheit)이다. 현실의 인과관계를 설명할 경우 인과성의 필연성이나 법칙이 아니라 달리도 일어날 수도 있는데 그렇게 일어 났다는 개연성(Probability), 또는 확율성으로 설명한다. 즉 베버는 어떤 역사적 현상의 결과는 무수히 많은 원인들이 모두 일정한 역할을 가지고 참여함으로써 나타난 것이므로 한 가지 요인에 의한 필연적 결과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경제적인 요인만을 중시하는 맑스(K. Marx, 1818-1883)의 방법론과 역사학파의 개념들(역사법칙 및 민족정신등)을 배격하였다.  따라서 그의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의 윤리라는 이념형(理念型)은 자본주의 정신의 기원을 상징하기 위한 수단일 뿐 자본주의 자체를 설명하기 위한 개념은 아니었다. 베버의 개념은 인식자(認識者)의 사유과정(思惟過程)에서 얻어지는 것이므로 현실 속에서 순수하게 발견될 수 없는 것이다. 현실은 여러 이념형들의 혼합체로 나타나므로, 특수한 개별적 특징 모두를 설명해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학파등의 평균(平均槪念)이 제외시킨 비 평균적인 요소도 모두 설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2) 도올의 베버 방법인식
 (가) 도올의 텍스트
 (ㄱ) 자료 1 : "자아! 이 정도되었으면 공자의 '군자불기'(君子不器)로 인하여 동양사상이 얻어먹어야 했던 '베버의 욕지거리'를 독자들은 실컷 얻어 먹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도올논어(2), P149]
 (ㄴ) 자료 2 : "그러나 우선 그가 케피탈리즘의 발생연원의 정신사적 필연성으로서 프로테스탄티즘을 운운하는 것은, 결과적 사태에 대한 기술은 될 수 있을 지언정, 인과론적인 필요충분조건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에서 캐피탈리즘이 발생 안할 수도 있는 것이며, 유교의 현세주의에서 캐피탈리즘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상적 성향을 캐피탈리즘의 발생으로 유도시키는 해석의 행태에는 그 사상자체 이외의 모든 정치, 사회, 경제사적 우발요인이 관여되어 있는 것이다. 캐피탈리즘의 불발생의 원인을 유교에다 물을 수 없다...." [도올논어(2), P150상단)
 (나) 도올 이해에 대한 코멘트
 첫째, 자료1에서 '베버의 욕지거리'란 말은 속어적 표현으로 적당하지 않지만, 더 중요한 요점은 도올이 베버의 가치 중립적 즉 몰가치적(沒價値的)방법론을 간과한 말을 하고 있다.
 둘째, 자료2에서는 세 가지 오류점이 발견된다. 그 하나는, 베버의 방법론이 이념형(Ideal Typus)이라는 것을 지각했다면  "...인과론적인 필요충분조건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표현이 나올 수 없다.  그 둘은,  "...그러한 사상적 성향을 캐피탈리즘의 발생으로 유도시키는 해석의 행태에는 ..."  구절에서도 베버의 이념형과 가치중립적인 방법론을 간과하고 있다.
 그 셋은, "...캐피탈리즘의 발생으로 유도시키는 해석의 행태에는 그 사상자체 이외의 모든 정치, 사회, 경제사적 우발요인이 관여되어 있는 것이다...."라고 하여 이 구문에서는, 도올은 베버의 "현실은 여러 이념형들의 혼합체로 나타나므로 평균개념이 제외시킨 비 평균적인 요소도 모두 설명할 수 있다."는 베버의 이념형과 의견이 일치 하기도 하여 베버 방법론에 대한 이해의 일관성에 혼란을 준다.
 4. 금욕주의(禁慾主義)의 신앙적 근원
 (1) 도올의 텍스트
 ●자료 3 : "퓨리탄의 금욕주의가 가귀(可貴)한 것이라면, 유교의 금욕주의 또한 그 이상의 진실한 내면을 포용하는 것이다."[도올논어(2), P150하단)
 (2)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의 금욕윤리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윤리는 '인간의 모든 소유는 하나님으로부터 맡겨진 것이고, 소유자는 다만 하나님의 관리자(magisrates of officers of God)일뿐이다.'라는 기독교의 교리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을 인간의 향락을 위하여 낭비하는 것은 올바른 행위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진실한 기독교인들은, 성실한 직업생활(잠22:29)로 저축한 재산을 건전한 사업에 투자하여 합법적 이윤을 추구하여, 그것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선용(善用)해야 할 금욕적 소유인들이다.(참고; 마25:14-30)
 (3) 유교의 금욕윤리
 도올은, "유교의 금욕주의 또한 그 이상의 진실한 내면을 포함하고 있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유교의 내면적 금욕윤리의 실체(철학)가 무엇인가? 알고 싶다.
 우리가 알기엔 퓨리탄의 금욕윤리 이상의 진실한 내면적 금욕주의를 들은 적이 없다. 다시말하면 합리적인 절약심이나, 천민자본주의 정신인 '영리욕'(營利慾)이상의 신앙적인(참고; 마6:19-21) 금욕윤리가 유교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5. 근대 자본주의의 특징
 (1) 도올의 텍스트
 ●자료 4 : 도올은,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의 금욕주의에서 캐피탈리즘(Capitalism)이 발생 안할 수도 있는 것이며, 유교의 현세주의에서 캐피탈리즘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도올논어(2), P150]
 (2) 자본주의(Capitalism)의 개념
 (가) 자본주의의 두 개념
 막스베버는 두 가지 자본주의를 말했는데, 그 하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경제활동의 동기인 영리욕(營利慾)만에 의하여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를 천민자본주의(Pariakapitalismus)라고 하고, 프로테스탄티즘(특히 Calvinism)의 금욕윤리에 의하여 규제되는 규범적 이윤추구의 자본주의를 근대적 자본주의 또는 윤리적 자본주의라고 정의했다.
 (나) 근대 자본주의의 인프라(INFRA)
 근대 자본주의 성립의 두 가지 초석은 자본의 축적과 상품노동의 제공이었다.  이것은 주로 프로테스탄트들의 소명의식적인 전문직업인(Professional Specialization)이 제공한 상품노동과 그들의 금욕적 절약에 의한 산업자본의 축적(accumulation)이었다고 한다.
 (ㄱ) 자본(투자자원)
 프로테스탄트들의 금욕적 절약에 의한 투자에 대하여 베버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료 5 : 전형적인 청교도들은 많이 벌고 적게 썼다. 그리고 그의 소득을, 절약하고자 하는 금욕주의적 열정으로부터, 매우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사업에 자본으로서 재투자하였다.[The typical Puritan earned plenty, spent little, and reinvested his income as capital in rational capitalist enterprise out of an asceticist compulsion to save.(RC, p.247)]
 (ㄴ) 상품노동의 제공
 근대 자본주의는 자본과 함께 인간노동의 상품화가 동반된 시스템이었다. 즉 근대의 자본주의는 자본을 갖지 못한 노동자가 자기의 노동력(생산수단)을 팔아서 살아가는 임금노동자가 필요하다. 이 노동자들이 일정한 영역의 노동행위를 전문적으로 반복할 때 근대적인 의미의 직업(Professional, Beruf, Vocation)이 되었고, 또 사회적 지위도 되었다. 이 근대적 의미의 직업은 동양이나 중세의 직업개념과 다르다.
 서구의 중세(캐토릭사회)에 있어서, 직업은 자연적 질서의 하나이나 도덕적 계율에 있어서는 권고(勸告, Consolia)의 영역이지 명령(命令, Praeceta)은 아니었다. 이에 대하여 프로테스탄티즘의 직업개념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사명(Aufgabe)이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는 도덕적 개념이 있다.  즉  Beruf, Vocation이라는 근대사회의 직업개념은 바로 이 소명(Calling)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3)도올 주장(자료 4)의 비평
 도올은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에서 역사상 특유한 경제 시스템을 결과 시킨 윤리적(또는 근대적)자본주의와 천민자본주의 (Pariakapitalismus)와의 구분을 간과한 채,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의 금욕주의에서 캐피탈리즘(Capitalism)이 발생 안할 수도 있고, 유교의 현세주의에서 캐피타리즘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 텍스트의 논점은 유교의 현세주의가 발생시킬 수 있는 자본주의가 그 어떤 자본주의 이냐이다.  분명히 밝히거니와 유교의 현세주의가 결코 근대 서구의, 그 특유한 윤리적 자본주의를 발생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유전인자가 다른 동양인이 서양인을 탄생시킬 수 없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6. 도올의 베버 비판
 (1) 베버의 텍스트
 ●자료 6 : 유생들의 방심치 않는 자기제어, 즉 수신의 목적은 외면적 제스츄어나 고상한 매너의 품위를 유지하는데 있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의 수신은 기본적으로 심미적인 것이었으며 본질적으로 부정적 성격의 것이었다. 그 자체로서 위엄있는 품행, 아무런 실질적 내용이 없는 공허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품행만이 존중되고 욕망되었다.(The watchful self-control of the confucian was to maintain the dignity of external gesture and manner, to keep "face."  The self-control was of an aesthetic and essentially negative nature. Dignified deportment, in itself devoid of definite content, was esteemed and desired.)

 자료 7 : 유자들에게는, 세분화된 전문직종은 그것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유용한 것인가를 불문하고, 진정으로 긍정적인 권위를 갖는 위치로서 인식될 길이 없었다.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공자가 "논어"에서 한 말, 문화적으로 교양을 쌓은 인간들 즉 군자는 하나의 기(器)로 국한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군자불기(君子不器)의 사상과 관련되어 있다. 즉 군자는 이 세계에 대한 적응 즉 처세나 자신의 완성을 지향하는 수신의 방식에 있어서, 그는 그 자신이 최종적 목적이라고 생각할 뿐, 어떠한 기능적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유교윤리의 이러한 핵심은 전문직종의 분업을 거부했으며, 근대적 전문직의 뷰로크라시를 거부했으며, 전문직종을 위한 특수훈련을 거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군자불기(君子不器)의 사상은 이윤의 추구를 위한 경제학의 훈련을 거부했던 것이다.[For the confucian, the specialistic expert could not be raised to truly posetive dignity, no matter what his social usefulness. The decisive factor was that the "cultured man"(gentleman) was "not a tool"; that is, in his adjustment to the world and in his self-perfection he was an end unto himself not a  means for any functional end. This core of confucian ethics rejected professional specializaton, modern expert bureaucracy, and special training; above all, it rejected training in economics for the pursuit of profit.(RC, p.246)]
 (2) 도올의 원론적 비판
 도올은, "군자불기(君子不器)란 기(器)를 부정하는 언급이 아니라, '무본'(務本)의 뜻을 표방하는 것이다. 소라이(荻生조徠, 1666-1728)의 비판에 의하면 막스 베버의 '군자불기'(君子不器) 비판은 근본적으로 과녁이 빗나간 것이다. 근원적으로 해당사항이 없는 것이다.  불기(不器)는 기(器)의 부정이 아니기 때문이다."라 하며 소라이의 '大低學以成器'(대저학이 성기)를 인용하며, 모든 배움은 기(器)를 이루고(成器), 이 성기(成器)를 통하여 기(器)를 부리는 대도(大道不器)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도올논어(2), p.155]
 도올은 이런 불기(不器)의 논리에 의하여, '공자의 군자불기(君子不器)로 인하여 동양사상이 얻어 먹어야 했던 베버의 욕지거리를 독자들은 실컷 얻어 먹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도올논어(2), p.149]라고 하며, 베버의 판단을 불쾌히 여겼고, 나아가서 베버의 군자불기(君子不器) 비판을, '근본적으로 과녁이 빗나갔고, 근원적으로 해당사항이 없다'고 일축했다.[도올논어(2), p.155]
 (3) 도올의 베버 비판에 대한 코멘트
 (가) 기본개념의 이해문제
 (ㄱ) 군자(君子)와 전문직(Professional Specialization)
 도올은 TV강의에서 군자(君子)를 공자 시대에서는 사(射), 서(書), 예(禮), 악(樂)등을 갖춘 도덕적 지도적 인격자로 지칭했다.  이것은 고대희랍(Greece)의 프라톤(Plato, B.C.427-347)의 이상국(The Republic)에서 말하는 지배자계급(gold class)인 엘리트(Elite, 주로 도덕적 철학자)와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공자의 군자(君子, cultured man, gentleman)와 근대 서구의 전문직(Professional)과는 그 개념이 같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도올 자신도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공자언명의 맥락이 과연 근대사회적 특징을 이루는 전문직종에 대한 종사의 거부(巨富)가 군자(君子)됨의 특징이라고 하는 의미의 맥락으로 사용된 것인지는 지극히 불투명하다.'고 말했다.[도올논어(2), p.p.150-151] 공자는 다만 자기시대의 이상적 인간상을 말한 것이지 2000여년 후인 오늘의 군자상(君子像)을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ㄴ) 불기(不器)와 제네랄리스트(generalist)
 도올은, '기(器)는 분명 한 그릇의 국한된 기능'이나, 불기(不器)는 무본(務本)과 대도(大道)의 경지라 설명했다.[도올논어(2), p.151, p.155]
 즉 불기(不器)는 기(器)의 세계의 부정이 아니다. 기(器)를 포용하는 대도(大道)이며, 제네랄리스트(generalist)라는 의미를 암시했다.[도올논어(2), p.156]
 즉 소라이와 도올은, '대저 배움이란 기(器)를 이루지 않음이 없다.(大低學以成器)라고 하여 인간의 모든 배움이 기(器)를 이루고(成器), 이 성기(成器)를 초극하여 대도(大道)에 이르는 것이 불기(不器)의 경지요, 제네랄리스트(generalist)라 했다.[도올논어(2), p.155]
 이런 뜻이라면, 공자의 기(器)는 지행적 실용인(知行的實用人)이 아니라 다만 현학적(衒學的) 지식인에 불과한 것같다.  그러나 근대자본주의 사회의 스페시알리스트(Specialist)는 근대 분업사회의 직업(Beruf, Vocation)인이다. 그리고 도올이 말하는 제네랄리스트(generalist)는 무엇인다?  도올은, '인간과 우주에 대한 근원적 통찰력과 전체적 조망'을 갖는 사람이라고 강조하면서, '우리 당대의 모든 스페시알리스트는 불기(不器)의 스페시알리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도올논어(2), p.156]
도올의 이 주장은 현대적 해석으로는 옳은 말이지만 근대 이전의 유교권 문화사회에는 실업(實業)의 기능인들(동양적 스페시알리스트)은 천시되었다. 이것을 베버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유자들에게는, 세분화된 전문직종은 그것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유용한 것인가를 불문하고, 진정으로 긍정적인 권위를 갖는 위치로서 인식될 길이없었다."고 (For the Confucian, the specialistic expert could not he raised to truly positive dignity, no matter what his social usefulness.)[도올논어(2), p.148]
 오히려 서구의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이 태생시킨 전문직업(Beruf)의 스페시알리스트 들이야말로 '우주의 근원적 진리'인 성경(하나님의 말씀)의 진리 안에서 살기 위하여 노력한 진정한 제네랄리스트 들이 였다고 말할 수 있다.
 (나) 도올의 베버 비판
 (ㄱ) 베버의 비교 구절문제
 이미 언급한바 있듯이 베버의 군자불기(君子不器)에 의한 비교의견(자료 7)을 '베버의 욕지거리, [도올논어(2), p.149]니, 또 '과녁이 빗나갔고 해당사항이 없다.'[도올논어(2), p.155]고 말한 도올의 베버 인식은 재고해 볼 문제점이다.
예컨대 베버는 동서문화(서구근대문화와 동양의 전통문화)의 비교에 있어서, 서구의 근대 자본주의문화의 근원(프로탄티즘)의 대표구절로, '네가 자기사업(직업,사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잠22:29)라는 성경 말씀을 인용했고,(베버의 저서, p.44)  이에 대비되는 유교 윤리의 대표적 구절로서는 공자의 군자불기(君子不器)의 구절을 아필시켰다[도올논어(2), p.142]
 만약 도올이 말한 대로 베버의 군자불기(君子不器)에 대한 비교방법론이 빗나갔다면, 도올은 유교문화권의 대표적 구절로서, '군자불기'(君子不器)가 아닌 다른 대표구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의 유교문화권(경제사회)의 2000여년간의 농경사회적 정체성(停滯性)과의 무관성도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도올은, '군자불기(君子不器)의 가르침은 시공을 초월하여 인간에게 던지는 심오한 가치가 존(存)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동양사상의 대표적 구절임을 자인하고 있다.[도올논어(2), p.156]
 (ㄴ) 베버의 텍스트(자료 6,7)해석
 막스베버는 , 유가사회는 서구근대사회와는 달리 물질적 생산에 기여하는 전문직 종사자들 보다는 군자(君子)라는 현학적(衒學的)인 지적문화인(Cultured man)과 내실보다는 인간 체면(face)과 품행이 존중되는 사회라고 인식했다,(참고;자료 6)  그래서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이 탄생시킨 서구근대의 자본제 시스템의 요소들인, 전문직(Prefessional Specialization), 현대의 전문관료 조직체제(expert bureaucracy) 특수한 교육제도(Special training, 학교교육등), 이윤추구를 위한 합리적인 기업조직 및 경제학(18-9세기의 고전파 경제학의 놀라운 발전을 상상하라.)이 발달하지 못한 유교권사회의 문화적 배경을 지적했다.
 여기서 특히 유의할 점은 베버이론은 지금부터 1-2세기전의 동서양사회의 문화형(Culture pattern)과 경제시스템의 비교인식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동양사회(유교문화사회)는, 이미 유교문화가 지배적이 아닌 오히려 서구사회화, 그것도 천민자본주의 사회가 되어 버린 하나의 경제적인 세계화 사회(WTO등)속에 있다.
 7. 맺음말
 첫째, 베버가 지적했던 유교권 사회의 체면문화(Face Culture)는 동양특유의 유교권 문화가 아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엄중히 섬겼던 유대교사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온통체면치레와 외식(外飾)으로 가장한, 부패한 유대교지도자들을 향하여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질타(叱咤)하셨다.
 "저희(유대교 지도자들)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 하는구나."(마23:5-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 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 하도다."라고(마23:27-28)
 둘째, 막스베버도 서구사회의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의 근대 자본주의 가 19세기 후반기 이래 그 금욕적 윤리성이 퇴색해 가는 역사의 흐름을 바라보고 다음과 같은 경구적(警句的)인 예언을 남겼다. "오늘 날 영리가 최고도로 발달한 합중국(미국)에서 보면 영리활동이 종교적윤리적 의미를 거세 당했기 때문에 순전히 경쟁적인 감정에 휩쓸리는 경향하에 있으며 그 결과는  이미 경(競技)의 성격까지 띠게 되는 경우조차 드물지 않다....이와 같은 문화적 발전의 '최후의 사람'에 관하여는 다음의 말이 진리가 될 것이다.
 '무정신(無精神)의 전문가. 무감성(無感性)의 향락인. 이들 무(無)의 인간들은 인류가 지금껏 도달하지 못한 단계에 올랐다고 자부(自負)하리라.' 고 (베버의 저서, p.161)
 베버의 이 말은, 그때로부터 약 100년이 흐른 오늘의 21세기에, 천민자본주의의 룰(rule)만이 기준이 되는 세계 경기장에서 무(無)의 인간들의 무자비한 무한경쟁으로 실연(實演)되고 있지 않는가. 요컨대 내면적인 도덕적 생명력이 사라진 모든 종교의 교리는, 그 교훈과 교리가 아무리 위대할지라도, 체면문화(體面文化), 또는 외식문화(外飾文化)로 전락하여 도리여 인간의 질곡(桎梏)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이 글을 맺는다.  
 ▣ 부록 1
 ● 도올 논어(2) 중에서(p.142~156)
  2-12. 子曰: "君子不器."
          자왈: "군자불기."
 2-12.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군자는 그릇처럼 국한되지 않는다."
 禱注    공자의 말씀으로서 전해내려 오는 이 "군자불기"라는 말은, 본시 옛부터 유교전통의 핵심적 윤리로서 존중되어온 명언이기도 하지만, 이 말이 20세기 세계학술계의 쟁점(爭點)으로서 지극히 유명하게 된 것은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가 이 말을 그의 역저, "중국 종교"(The Religion of China)에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대비되는 유교 윤리의 대표적 구절로서 아필시킨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베버에 의하면 프로테스탄티즘의 경우 순결한 초월주의의 인정이 오히려 현실을 제어하는 힘을 잉태시켰지만, 유교의 경우는 초월주의의 거부가 합리주의 전통을 강화하는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현실에 대한 합리적 제어의 능력을 상실시켰다고 보는 것이다. 유교적 삶의 방식은 합리적이긴 했지만, 그것은 인간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합리성이 아니었으며, 그것은 예악(禮樂)과 같은 어떤 외면적 규정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라는 것이다.(The is to say, the Confucian way of life was rational but was determined, unlike puritanism, from without rather than from within. RC, N.Y. : The Free Press. 1964, p.247) 그래서 그는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p.142~143)
     Confucian rationalism meant rational adjustment to the world; Puritan rationalism meant rational mastery of the world.
     유교적 합리주의는 이 세계에로의 합리적 적응을 의미하는 반면, 청교도 합리주의는 이 세계의 합리적 제어를 의미하는 것이다.
 청교도의 경우, 초월적인 신에게로의 철저한 복속이 비록 내가 이세계 내에 거주하고 있지만 자신의 삶이 이 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to live "in" the world and yet not be "of" it,) 어떤 극복의 동기를 부여했으며 그것은 무서운 금욕주의를 잉태시켰다.그리고 금욕주의는 자본의 축적이라고 하는 경제적 합리주의(economic rationalism)의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의 가장 핵심이 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개념은 독일어로 "베루프"(Beruf)라고 표현되는 "신의 소명"(God′s calling)이다. 이 "베루프" 라는 독일어를 영어로 바꾸면 "보케이션(vocation)이 되는데, 보케이션은 신의 소명 즉 신의 부르심이라는 말과 동시에 "직업"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즉 이 "베루프"-보케이션"이라는 단어의 배면에는 그 단어의 의미르 탄생시킨 서구 프로테스탄티즘의 문화적 의식구조가 서려있는 것이다. 서구인들은 자기의 현세적 삶의 직업(장인의 직종)을 곧 초월적 신의 소명으로 생각했으며, 그 자체를 성스럽게 생각했으며, 그 직업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초월적 신의 소명을 현세적으로 구현시키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직업의식이 그 직업의 소명에서 생기는 결과를 현세적으로 향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결과를 신의 영광을 위하여 저축해 나갔던 것이다.
     The typical Puritan earned plenty, spent little, and reinvested his income as capital in rational capitalist enterprise out of an asceticist compulsion to save.(RC, p.247).
     전형적인 청교도들은 많이 벌고 적게 썼다. 그리고 그의 소득을, 절약하고자 하는 금욕주의적 열정으로부터, 매우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사업에 자본으로서 재투자하였다.
 그러나 유교적 군자상에는 이러한 내면적 초극의 충동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p.143-144)
    The watchful self-control of the Confucian was to maintain the dignity of external gesture and manner, to keep "face." The self-control was of an aesthetic and essentially negative nature. Dignified deportment, in itself devoid of definite content, was esteemed and desired.
    유생들의 방심치 않는 자기제어, 즉 수신의 목적은 외면적 제스츄어나 고상한 매너의 품위를 유지하는데 있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의 수신은 기본적으로 심미적인 것이었으며 본질적으로 부정적 성격의 것이었다. 그 자체로서 위엄있는 품행, 아무런 실질적 내용이 없는 공허한 것임도 불구하고, 그러한 품행만이 존중되고 욕망되었다.
 유교에는 초월성의 측면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지나치게 현세적이고, 사후의 미래적 보장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현세적 달성만을 추구하며, 현세적 향유만을 최선의 가치로 삼는다. 그래서 심미적 인생만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여기 "심미적"(aesthetic)이란 말은 "닳아빠진 미감"을 의미하는 것으로 매우 부정적인 맥락에서 쓰여진 것이다. 자기내면의 초극의 독백이 없기 때문에 외면적 겉치레만 추구하게 되고, 사회적 관계에서 성립하는 "체면"만을 중시하게 된다."예의"니, "도의"니, "의례"니 하는 모든 것이 이 "체면"과 관련되는 것이다. 여기 베버가 쓴 "face"라는   (p.145)
 말은, 중국말로 "미엔쯔"(面子 면자)라는 말인데, 그것은 우리말로 "체면"에 정확히 해당되는 말이다. 한 마디로 서구 프로테스탄티즘의 문화가 소명의 문화라면 동아시아 유교의 문화는 곧 체면의 문화라는 것이다.
                    서양           소명의 문화(vocation)
                 동양            체면의 문화(face)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이것은 사도바울이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로마서12:6~8). 여기에는 인간의 소명에 대한 이야기가 잘 설명되어 있다. 이 말은 이에 앞서 우리 몸과 지체의 관계를 비유로 들어, 우리 인간들의 삶의 소명을 부연한 것이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로마서12:4-5) (p.146)
     For as in one body we have many members, and all the members do not have the same function, so we, though many, are one body in Christ, and individually members one of another.
 나의 몸은 하나이지만, 이 하나된 몸은 많은 부분(지체)이 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 많은 부분(지체)들은 제각기 다른 고유한 기능(function)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모두 동일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면 나의 몸은 기능할 수 없다. 오히려 그 몸의 지체가 가기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조화된 하나의 몸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 바울은 "그리스도"를 하나된 나의 몸에 비유한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개별적 삶을 그 몸의 각기 다른 개별적 지체의 기능에 비유한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각기 다른 "기능", "소명"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 다른 직분 때문에 오히려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몸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 사도바울의 이러한 언명은 바로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말을 거부하는 듯이 보인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한 지체일 뿐이며,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다"는 것이다. (p.147)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불기(不器)가 아니라, 하나의  기(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섬기는 자는 섬기는 일로,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일로, 위로하는 자는 위로하는 일로, 타이피스트는 타이프치는 일로, 대장장이는 대장장이 일로, 똥푸는 자는 똥푸는 일로, 제각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군자불기(君子不器)가 아니라 군자유기(君子唯器)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베버는 말한다.
    For the Confucian, the specialistic expert could not be raised to truly positive dignity, no matter what his social usefulness. The decisive factor was that the "cultured man"(gentleman) was "not a tool" ; the is, in his adjustment to the world and in his self-perfection he was an end unto himself, not a means for any functional end. The core of confucian ethics rejected professional specializaton, modern expert bureaucracy, and special training; above all. it rejected training in economics for the pursuit of profit.(RC, p.246)
   유자들에게는, 세분화된 전문직종은 그것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유용한 것인가를 불문하고, 진정으로 긍정적인 권위를 갖는 위치로서 인식될 길이 없었다.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공자가 "논어"에서 한 말, 문화적으로 교양을 쌓은 인간들 즉 군자는 하나의  기(器)로 국한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군자불기(君子不器)의 사상과 관련되어 있다.(p.148)
    즉 군자는 이 세계에 대한 적응 즉 처세나 자신의 완성을 지향하는 수신의 방식에 있어서, 그는 그 자신이 최종적 목적이라고 생각할 뿐, 어떠한 기능적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유교윤리의 이러한 핵심은 전문직종의 분업을 거부했으며, 근대적 전문직의 뷰로크라시를 거부했으며, 전문직종을 위한 특수훈련을 거부했다.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군자불기(君子不器)의 사상은 이윤의 추구를 위한 경제학의 훈련을 거부했던 것이다.
 자아! 이 정도 되었으면 공자 "군자불기"(君子不器)로 인하여 동양사상이 얻어먹어야 했던 베버의 욕지거리를 독자들은 실컷 얻어먹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나는 베버의 유교비판을 결코 부정적으로만 생가하는 사람이 아니다. 구한말로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썩어문드러졌던 우리사회의 온갖 병폐를 생각할 때, 그리고 아직까지도 우리사회에 진정한 프로펫셔날리즘(professionalism)의 전통이 결여되어 있다는 현실을 생각할 때, 베버의 비판은 통열하게 우리의 가슴을 저미는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먼 나라 이방인이 동양사회의 직접체험이 없는 자로서, 동양사회의 지니고 있는 허약한 급소들을 그렇게 정확히 찌를 수 있었는가 하는 것도 먼저 우리의 학문적 자세에 대한 심각한 반성을 유발시키는 것이다.(p.149)
 그러나 우선 그가 캐피탈리즘의 발생연원의 정신사적 필연성으로서 프로테스탄티즘을 운운하는 것은, 결과적 사태에 대한 기술은 될 수 있을 지언정, 인과론적인 필요충분조건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프로테스탙티즘의 금욕주의에서 캐피탈리즘이 발생안할 수도 있는 것이며, 유교의 현세주의에서 캐피탈리즘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상적 성향을 캐피탈리즘의 발생으로 유도시키는 해석의 행태에는 그 사상자체 이외의 모든 정치.사회.경제사적 우발적 요인이 관여되어 있는 것이다. 캐피탈리즘의 불발생(不發生)의 원인을 유교에 다 물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캐피탈리즘 그 자체가 유교의 역사에서 발생되어야만 할 어떤 지고의 가치나 목표나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어떠한 사상이든지 동일한 생각의 구조를 유지하더라도, 역사적 맥락에 따라 그것은 건강하게 작용할 수도 있으며 불건강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 유교의 불건강한 시절의 측면만을 들어 유교의 원죄를 다 캐물을 수는 없는 것이다. 유교의 부패는 현실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부패는 더 더욱 인간세에 끔찍한 것일 수도 있다. 퓨리탄의 금욕주의가 가귀(可貴)한 것이라면, 유교의 금욕주의 또한 그 이상의 진실한 내면을 포용하는 것이다.
 여기서 군자부기(君子不器)라는 공자의 언명의 맥락이 과연, 근대사회적 특징을 이루는 전문직종에 대한 종사의 거부가 군자(君子)됨의 특징이라고 하는 의미의 맥락으로 사용된 것인지는 지극히 불투명하다. "기"(器)는 분명 한 그릇의 국한된 기능이라는 뜻이다. 황간(皇侃)의 소(疏)에:  (p.150)
   此章明君子之人, 不係守一業也. 器者, 給用之物也. 猶如舟可汎於海, 不可登山; 車可陸行,    不可濟海. 君子當才業周普, 不得如器之守一也.
    이 장은 군자된 사람은 모름지기 하나의 업을 지키는데 매달리지 말아야 함을 밝힌 것이다.그릇이란 인간에게 한 쓰임을 제공하는 물건이다. 예를 들자면 배는 바다에서는 두둥실 떠 갈 수 있지만 산을 오를 수는 없는 것이다. 수레는 육지를 다닐 수는 있어도 바다를 건널 수는 없는 것이다. 군자는 당연히 그 재능과 업적이 두루 넓게 통하는 것이어야 하며 그릇이 한 기능을 지키는 것과 같아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오규우 소라이(荻生조徠, 1666-1728)는 이러한 류의 논의에 대하여 재미있는 제도사적 반론을 제기한다. 공자의,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언명도 반드시 소인기(小人器), 군자불기(君子不器)식의 이원론적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주(古注)에서 포씨(苞氏)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p.151)
                    器者,  各周其用.  至於君子, 無所不施也.
    그릇이라는 것은 하나의 쓰임에 국한되는 것이다. 군자에 이르게 되면 베풀지 아니하는 바가 없다.
 주자(朱子)가 "기자(器者), 각적기용(各適其用), 이불능상통(而不能相通).  성덕지사(成德之士),  체무불구(體無不具). 고용무부주(故用無不周), 비특위일재일예이이(非特爲一才一藝而已)." (그릇이란 각기 쓰임이 있는 것이요, 서로 통할 수 없는 것이다. 덕을 이루는 선비는 그 몸이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 기능이 통달하지 아니함이 없다. 특별히 한 재능, 한 기예에 국한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한 것도 결국 고주(古注)를 베낀 것인데 이러한 주석은 근원적 제도사적 맥락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소라이는 "예기" "학기"의 마지막에 나오는 재미있는 구절을 인용한다.
         鼓無當於五聲.  五聲弗得不和;   水無當於五色,  五色弗得不章.
     북 그 자체는 궁.상.각.치.우 다섯가지 소리에 해당되는 바가 없다. 그러나 다섯가지 소리는 북이 없이는 조화로운 소리를 낼 길이 없다. 물 그 자체는 청.적.황.백.흑의 다섯가지 색깔에 해당되는 바가 없다. 그러나 다섯가지 색깔은 물이 없이는 그 찬란한 색깔을 드러낼 길이 없다.(p.152)
 소라이는 왜 이 "학기"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 것일까? 소라이의 주석이 간결하여 그 뜻을 명확하게 찝어내기가 힘들지만, 소라이가 노리고 있는 것은 군자(君子)는 이 "학기"의 문장에서 북(鼓)이나 물(水)에 해당되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군자불기"(君子不器)의 불기(不器)의 뜻이 고주(古注)가 말하는 바, "무소불시"(無所不施) 즉 그 능력이 두루 통한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군자(君子)는 근원적으로 기(器)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 즉 군자(君子)는 본질적으로 기(器)로서 규정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군자불기(君子不器)의 불기(不器)는  기(器)의 부정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군자불기(君子不器)는 기(器)의 부정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기(器)에 의하여 한정적으로 규정될 수 없는 어떤 본질적 위상을 말하는 것이며, 이는 기(器)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器)가 이로 인하여 드러나게 되는 자리라는 것이다. 즉 불기(不器)는 기(器)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기(器)를 포괄하는 자리라는 것이다. 그 "자리"란 무엇일까?  소라이는 군자(君子)는 단순히 도덕적인 인격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민(民)의 장(長)이 되는 리더를 말하며, 그는 기(器)가 아닌 기(器)를 부리는 자이다. 그러므로 기(器)는 백관(百官)을 말하는 것이요, 군자(君子)란 군(君)이나 경(卿)을 말하는 것이다.(器者, 百官也; 君子者,君與卿也.)
 예를 들면 양의(良醫)는 여러 한약재료들을 조합(用藥)하여 처방을 내리고 환자의 병을 치료한다. 이때 양의(良醫)는 군자(君子)요, 약(藥)은  기(器)이다.(p.153)
 즉 의사가 곧바로 초본약재(草本藥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의사는 초본약재들을 부리는 자요, 그것을 배합하여 병을 고치는 사람이다. 어찌 의사가 곧 약재라 할 수 있으리오? 그러므로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것이다. 소라이는 앞서 인용한 "예기" "학기"에 연이어 같은 맥락에서 나오고 있는 유명한 말을 다시 인용한다.
     君子曰: "大德不官, 大道不器, 大信不約, 大時不齊. "察此四者, 可以有志於本矣.
    그러므로 군자는 말한다. "위대한 덕성은 하나의 관직에 구애됨이 없고, 위대한 도는 하나의 그릇에 구애됨이 없으며, 위대한 신의는 하나의 약속에 구애됨이 없으며, 위대한 시간은 하나의 절기에 구애됨이 없다." 이 네 가지를 살필 줄 아는 자래야 참으로 학문의 근본에 뜻을 둔다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은 또 무엇인가? 대덕(大德)은 불관(不官)하며, 대도(大道)는 불기(不器)하며, 대신(大信)은 불약(不約)하며, 대시(大時)는 부제(不齊)하다는 것은 곧 군자(君子)가 추구해야 할 것은 기(器)의 말엽의 세계가 아니요 대도(大道)의 근원의 세계임을 말한 것이다.(p.154)
        三王之祭川也, 皆先河而後海; 或源也, 或委也.  此之謂務本.
     하.은.주 삼대의 왕들은 물에 제사지낼 적에 모두 반드시 작은 하천에서 먼저 지내고 큰 바다에서는 나주에 지냈다. 하천이 근원이요, 바다는 말류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일컬어 근본을 힘쓴다 하는 것이다.
  군자가 힘써야 할 것은 근본이지 말류가 아니다. 하천이 오히려 군자(君子)의 대도(大道)의 세계요, 바다가 오히려 배관(百官)의  기(器)의 세계인 것이다. 군자불기(君子不器)란 기(器)를 부정하는 언급이 아니라, "무본"(務本)의 뜻을 표방한 것이다. 따라서 소라이의 비판에 의하면 막스 베버의 "군자불기"(君子不器)비판은 근본적으로 과녁이 빗나간 것이다. 근원적으로 해당사항이 없는 것이다. 불기(不器)는 기(器)의 부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라이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大저學以成器.
                     대저 배움이란 기를 이루지 않음이 없다.
 인간의 모든 배움은 기(器)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군자(君子)의 배움은 성기(成器)를 통하여 불기(不器)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즉 군자불기(君子不器)는 기(器)를 통하여 기(器)를 초극하는 것이요, 성기(成器)의 행위를 통하여 기(器)를 부리는 대도(大道)의 경지에 나아가는 것이다.(p.155)
 굳이 막스 베버의 논쟁이나 소라이의 비판적 지적의 맥락을 떠나 이 "군자불기"(君子不器)의 소박한 맥락을 액면 그대로 수용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분명 스페시알리스트의 기능이 존중되어야 하는 문명의 장이다. 그러나 진정한 스페시알리스트의 위치가 존중되면 존중될수록 진정한 제너랄리스트의 가치가 높아진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닐까? 불기(不器)의 세계가 기(器)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물론 기(器)의 세계 또한 불기(不器)의 세계를 거부하지 않는다. 인간과 우주에 대한 근원적 통찰이나 전체적 조망이 없이 어떻게 스페시알리스트들의 기능만으로 인간세가 조작되어 나가기를 기대하는가? 우리 당대의 모든 스페시알리스트는 당연히 불기(不器)의 스페시알리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불기(不器)의 보편주의가 전제되지 않는 기(器)의 기능은 편견과 독선과 혼선을 낳을 뿐이다.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공자의 가르침은 시공을 초월하여 인간에게 던지는 심오한 가치가 존(存)하는 것이다.(p.156)
         集注       器者, 各適其用, 而不能相通.  成德之士, 體無不具.
                      故用無不周, 非特爲一才一藝而已

 ▣ 부록 2 : 안내 문
              '도올의 논어이야기'에 대하여 

 근간 '도올 신드롬' 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KBS TV1의 '도올의 논어이야기'가 적잖은 센세이션(Sensation)을 일으키며 계속 방영되고 있습니다. 그 도올(김용옥박사, 중국철학자)의 강의 중 기독교사상(복음)에 관련한 오해의 부분이 있었습니다.  예컨대 성경의 허구성 주장과[도올의 논어 이야기 '제5강' 2000.10.27과 '도올 논어(1)',p.p.21-25], 막스 베버(M.Weber, 1864-1920)의 근대 서구의 윤리적 자본주의의 사상에 대한 비판등입니다.['도올의 논어 이야기' 제42강, 2001.3.2, '도올 논어(2)', p.p. 142-156]  이 부분들을 해명하기 위하여 예수 인터넷선교회의 홈페이지에 '도올의 성경관에 대하여'와 '도올과 베버의 대화'라는 신앙에세이를 게재했습니다.
 특히 '도올과 베버의 대화'는, 동서양의 두 석학(碩學)의 세기적인 지상대화(紙上對話)로 접근 시켰습니다.  그 뜻은 이시대(21세기)의 위대한 복음사역자들(Ministers)이  이 글을 통해서 동서양문화의 인프라(Infra)를 이해하시는 데에 작은 도움이 되시기를 바라서입니다. 부디 예수 인터넷선교회(www.yesu.kimc.net)를 방문해 주셔서 필독하여 주시기를 권유드리옵니다. 감사합니다.  (서기 2001년 3월 중순, 예수 인터넷선교회 드림)

  ▣ 부록 3 : 자유게시판에 올린 어느 독자의 글
  2001/03/26 (14:15) from 211.44.3.143' of 211.44.3.143'
   헤비메탈킴
웃기는 도올과 베버의 대화.
난...

한 가지만은 확실히 해두고 싶다.

도올의 Text는 무엇을 참고로 했는지.

베버의 Text는 무엇을 참고로 했는지.

공정성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는지.

마지막으로 하나 더.

에세이인가 보면, 어떤 것은 자신의 의견이라고 하며 슬쩍 단체의

책임회피를 하는 구절도 눈에 띄는데,

그럴 거면 올리지 말지... 쩝.

솔직히, 내가 도올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게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의 학문이 기껏해야 도올 논어라는 책으로 대표될 수도 없다.

그 책은 [독자의 대상이 없는 책]이다.

만일 도올이 만화책으로 만들었으면, 그림 갖고 꼬투리 잡았을것이

분명하다.

난, 기독교인이지만, 사이비다.

믿음?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기독교인에 대해 악감정 없다.

하지만, 제발 부탁인데, 꼬투리 잡고 우기려고 하진 마라.

그래서 얻는게 뭔데?

다른 이야기 해 보자면,

철학자와 종교인이 만나서 말싸움 하면 누가 이기겠는가?

뻔한 거 아닌가?

말싸움해서 그렇게 이겨보고 싶나?

그런 거 초월도 못하면 그게 종교인의 자세인가?

안티기독교 사이트에 가보니까,

그네들 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일리가 있을 뿐이다. 그게 맞는지 틀리는지는 관심이 없어서

생각해 본 바도 없지만,

안티 기독교 사이트에 가서 폭탄 게시판 올려놓는 기독교인들도 있다.

뭐냐?

대체 무엇하고 싶은건가?

그럴만한 정열이 있으면 한 사람이라도 더 전도하던지,

성경책을 읽던지,

구원에 대해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인터넷.

허울 좋다.

인터넷에서 십자군 전쟁이라도 해보고 싶은가?
    
독자의 글에 대한 답서
   헤비메탈킴 선생님께
 킴 선생님께서 '도올과 베버의 대화'라는 저희 예수 인터넷선교회의 '신앙에세이'를 코멘트해주신 것을 감사하오며, 몇 가지 의견을 드립니다.

 첫째, 그 '에세이'는 동서양 두 석학의 근대동서양 문화의 근원에 대한 견해를 비교하고 객관적으로 비평한 글입니다.(가치중립적 입장에서입니다)

 둘째, 킴 선생님께서 문의한 도올의 Text는 '도올논어(2)'의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논어 내용이고  베버의 Text는 '근대자본주의의 정신과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입니다.(이미 그 '에세이'에서 밝혀놓은 것입니다.)

 셋째, 킴 선생님께서 그 '에세이'에 대한 논평을 해주시려면, 구체적으로 문장내용을 제시.분석 하시면서 실명으로 의견을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금처럼 무조건 냉소적인 매도를 하시는 것은 고도의 사회윤리를 요청하는 디지털 문명시대에 피하여야할 사이버.언어폭력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끝으로 다시 저희 예수 인터넷선교회의 '에세이'에 주신 관심을 감사하오며 킴 선생님의 건승을 기도합니다.
                    2001. 3. 26     예수 인터넷선교회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