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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14일 월요일

행위주체적 객체들: 행위 존재론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http://blog.daum.net/nanomat/774

행위주체적 객체들: 행위 존재론


존재 또는 자연은 육체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육체"에 대한 동의어들은 "사물", "객체", "기계", "행위소", "실체", "사건", "과정" 그리고 "존재자"이다. 다른 술어들도 있을 법하다. 지적해야 할 첫번째 점은 여기서 자연과 존재는 동의어로 다루어진다는 것이다. 그 결과,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자연의 존재자이다. 문화와 사회가 존재하는 육체들로 이루어져 있는 한, 그것들은 자연의 존재자들이다. 이것으로부터 두 가지 점이 더 도출된다. 첫째, 존재와 자연이 동의어라면, 그리고 모든 것이 자연의 존재자라면, 당연히 자연/문화 구별짓기는 무화되거나 말소된다. 대중의 상상 속에서 자연은 사회, 도시, 교외, 농장 바깥으로 찾아가는 곳이다. 반면에 문화는 인간들에 의해 길들여지거나 경작된 것을 가리키며 도시와 교외의 영역이다. 이것은 공간적 또는 지리적 자연 개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자연주의적 존재론적 틀 내에서 자연은 서로 물리적으로 상호작용하며 무엇이든 어떤 규칙 또는 법칙들의 지배를 받으면서 존재하는 물질적 또는 물리적 존재자들의 총체를 가리킬 뿐이다. 자연의 외부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문화도, 마음도, 플라톤적 형상도, 유일신도, 신들도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 영향을 미치고 영향을 받는 육체들이 존재할 뿐이다. 이런 육체들이 물질적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둘째, 당연히 인위적인 것과 진정한 것 사이의 구별짓기 역시 말소된다. 역사적으로 자연은 진정한 것들의 영역, 자체에서, 자체로부터 비롯되는 영역으로 간주되어 왔다. 반면에 문화는 인위적인 것들의 영역, 다른 행위주체에 의해 외부에서 존재자에 부과되는 형상의 영역으로 간주되어 왔다. 도토리는 저절로 참나무가 되는 반면에, 어떤 장인만이 한 조각의 나무를 탁자로 변형시킨다. 그런데 모두 다 자연이라면, 진정한 것/인위적인 것 대립쌍은 더 이상 존재의 영역들을 규정하는 데 동원될 수 없다.

일상 언어는 존재론에 대한 아무 지침도 되지 못한다. 예를 들면, "객체"라는 술어를 들을 때 우리는 저곳에 그냥 머물고 있고, 다른 무언가에 의해 움직여지지 않으면 그 어떤 움직임도 없으며, 주체에 대립되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것들은 일상 언어에서 상용되는 "객체"의 함의들이다. 그렇지만, 철학적 성찰의 주요한 목적은 낱말의 함의들을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이 정말로 무엇인지 결정하는 것이다. 흔히 이런 대답들은 꽤 놀랍고 대중의 의견에 반한다. 그러므로 일상 언어는 철학자들에게 아무 권위도 없다. 그것은 철학자들에게 탐구하고 있는 존재자들의 본성에 대한 암시 또는 실마리들을 제공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흔히 잘못되어 있을 뿐이다.

우리가 물려받은 철학과 이론의 전통은 객체에 대한 문제를 두 가지 방식 가운데 한 가지 방식으로 생각한다. 물론 예외들이 존재하며, 중요한 예외들도 있지만, 이 두 가지 접근방식이 통계적으로 지배해온 것이다. 철학에서, 객체에 대한 문제는 주로 객체에 관한 지식의 문제라는 견지에서 사유되었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의 표상들이 그것 자체로 존재하는 대로의 존재자들에 대응되는 방식과 대응 여부이다. 이 틀 내에서는, 한편으로 우리의 표상들이 우리의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존재자들을 존재하는 그대로 나타낸다고 주장하는 인식론적 실재론자들의 사유를 얻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세계에서 만나게 되는 존재자들은 우리의 표상들 또는 언어의 구성물이며, 우리는 오직 우리의 표상들과 언어와 관계를 맺기 떄문에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가 어떠할 것이라는 것은 우리가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실재론자들의 사유를 얻게 된다. 반실재론의 경우에는 세계의 존재자들과 우리의 표상들을 비교할 수 있게 할 3인칭 시각을 채택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존재를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그대로 결코 알 수 없다. 현재의 맥락에서 나는 인식론의 문제들―이런 문제들은 결코 전적으로 외면할 수는 없지만―이나 또는 우리가 객체들을 표상해내는 방식과 표상해내는지 여부에 대해 관심이 없다.

다른 한편으로, 철학 밖의 인문학이나 문화연구에서, 객체에 대한 문제는 객체들의 의미에 대한 해석학으로 다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목적은 객체들이 의미하는 것을 해석하거나 판별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물의 체계>>라는 보드리야르(Baudrillard)의 특별한 초기 저작에 관해 생각할 수 있는데, 이 저작에서 그는 빅토리아식 거실의 가구 배치 같은 사물들에 대한 탐구에 관여하면서 그것들이 어떻게 성별 관계, 가부장제, 계급 등의 논리 전체를 구현하는지 예증한다. 보드리야르로부터 영감을 끌어내어 우리는 교외 가정의 근대식 마루 계획을 탐구하며 부엌이 어떻게 점점 더 출입구를 통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거실에 개방되는지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것이 남성과 여성 사이의 엄격한 노동 분업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대신에 더 통합적이고 평등한 가정 생활을 시사하는 성별 관계와 가족 관계들의 변화를 반영한다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환상의 돌림병(The Plague of Fantasies)>>라는 저작에서 지젝(Zizek)이 행한 프랑스, 독일 그리고 영국 화장실에 대한 악명 높은 분석에 관해 생각할 수 있을 것인데, 여기서 그는 각각의 화장실 양식이 어떻게 특수한 민족 이데올로기를 구현하는지 보여준다. 지젝은 이렇게 쓴다.

전통적인 독일식 화장실에서는 물을 내린 후에 대변이 사라지는 구멍이 꽤 앞에 있고, 그래서 우리가 냄새를 맡고 어떤 질병의 흔적을 조사하도록 대변이 먼저 제시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전형적인 프랑스식 화장실에서는 구멍이 뒤에 있고, 그래서 대변이 가능한 한 빨리 사라지도록 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앵글로색슨식...화장실은 일종의 종합, 이 두 대극 사이의 조정안을 제시한다―변기에 물이 차 있고, 그래서 대변이 그 속에서 부유한다―보이지만 조사할 수는 없는... 이 판본들 가운데 어느 것도 순전히 공리주의적 견지에서는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주체가 우리 육체 내부에서 비롯되는 불쾌한 배설물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어떤 이데올로기적 지각이 분명히 식별 가능하다―또 다시, 세번째로, '진실은 저쪽에 있다'.

헤겔은 독일-프랑스-영국이라는 지리적 삼각 구도를 세 가지 상이한 실존적 태도―독일의 성찰적 철저함, 프랑스의 혁명적 조급함, 영국의 온건한 공리주의적 실용주의―를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한 최초의 부류에 속했다... 화장실들을 고려함으로써 우리는 배설 기능을 수행하는 가장 친근한 영역 속에서 동일한 삼각 구도를 식별할수 있을 뿐 아니라, 배설적 잉여물에 대한 이런 상이한 태도들에서 이 삼각 구도의 근본적인 메커니즘을 생성할 수 있다. 모호한 명상적 매혹, 불쾌한 잉여물을 가능한 한 빨리 제거하려는 조급한 시도, 잉여물을 적절한 방식으로 처리되어야 하는 보통 사물로 다루는 실용적 접근방식. 어떤 강단인이 토론회에서 우리는 탈이데올로기적 세계에서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쉽다. 그런데 열띤 토론 후에 화장실에 가는 순간 그는 또 다시 이데올로기에 휩쓸린다. (1997)

객체에 대한 해석학적 관념에서 객체는 의미 전달체 또는 기표로 다루어진다. 객체들을 탐구할 때 우리는, 철학의 인식론적 의문의 경우처럼, 그것이 무엇인지도 묻지 않을 것이고, 내 자신의 경우처럼, 그것이 무엇을 행하는지도묻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화장실 자체는 대체로 지젝의 주장과 무관하다는 점을 인식할 것이다. 확실히, 각 화장실의 상이한 설계는 지젝의 구조/비교 분석의 기회이지만, 이 의미는 다양한 다른 객체들과 제도들에서 구현될 수 있다. 그런 의미작용 또는 이데올로기적 구성체를 위한 전달체로서 기능하는 객체는 이데올로기가 자체를 물질화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 이외에는 그것 자체로 아무것도 기여하지 못한다. 마르크스가 헤겔을 뒤집어서 관념 또는 개념의 효험 대신에 실재와 실천을 물질화하는 데 주의를 끌려고 노력했던 반면에, 지젝은 마르크스를 뒤집으려고 노력한다.

철학의 인식론적 접근 방식과 인문학의 해석학적 접근 방식 둘 다 상당히 인간형상주의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인식될 것이다. 철학의 경우에 문제는 정말 우리의 지식에 대한 문제이다. 그것은 객체 자체에 대한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표상들에 대한 문제이다. 마찬가지로, 해석학적 접근 방식에서, 우리가 정말로 분석하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지 객체가 아니다. 비판이론가들이 찾아내는 의미는 객체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의 사회적 및 인지적 활동을 통해서 객체로 투영되거나 새겨진 것이다. 이 두 가지 접근 방식에는 객체 자체가 사라지는 흥미로운 방식이 있다. 두 경우 모두에서 우리는 결국 사물이 행하는 것이 아니라 표상에 대해 말하게 된다.

한편으로 나는 철학의 인식론적 접근 방식과 문화 연구의 해석학적 접근 방식 사이의 제3의 길을 명시적으로 표명하려고 노력했다. 스테이시 알레이모와 카렌 바라드 같은 신유물론적 페미니스트들, 브뤼노 라투르 같은 행위자 연결망 이론가들, 마셜 매클루언, 월터 옹 그리고 프리드리히 키틀러 같은 매체 이론가들뿐 아니라 들뢰즈, 가타리, 마누엘 데란다 그리고 존 프로테비 같은 조립체 이론가들의 사유에 큰 빚을 지고 있는 나는, 우리는 육체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덧붙여 그것이 무엇인지에 의해 육체는 무엇을 행하는지에 관해 성찰할 수 있는 공간을 개방하는 데 기여하고자 했다. 나는 "덧붙여"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철학적 인식론에서 발견되는 탐구 형식들과 문화 연구의 해석학적 접근 방식을 거부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석을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분석 양식들을 확장하는 것에 대한 문제이다. 나는 버틀러, 푸코, 지젝, 바르트, 라캉, 보들리야르 등과 같은 사상가들에서 발견되는 기호학적 분석 양식들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여 해석적 방법론을 포기할 수 없다. 신실재론에 속하는 일부는 사회구성주의와 언어구성주의의 종말을 요청하는 듯 보이지만, 나는 이런 다양한 해석학이 해방 계획과 권력 작동 방식에 대한 이해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우리 세계의 실재적이고 주요한 특징들을 드러낸다고 믿는다. 문제는 사회구성주의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과장되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모든 것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지는 않지만 많은 것들이 존재하며, 그리고 우리가 이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구성된 것은 파괴될 수도 있고 그 대신에 새로운 것이 세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철학적 인식론에 덜 열중해 있다고 고백한다. 인식론, 즉 한 지식 형식을 실재계를 반영하는 권위 있는 것으로 정초하고자 하는 담론들에 대한 나의 의심은 푸코에 빚지고 있다. 1975-6년 강연에서 푸코가 말하듯이,

"그것은 과학인가 아닌가?"라는 의문에 대한 계보학자의 대답은 이렇다. "마르크스주의, 또는 정신분석, 또는 무엇이든 다른 무언가를 과학으로 전환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당신을 비판하고 있는 까닭이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 행해질 수 있는 한 가지 반대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마르크스주의가 당연히 과학일 것이라는 것이다." [최소한] 더 온건한 술어―더 정교한 술어는 아닐지라도―로 서술하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마르크스주의 또는 정신분석 같은 것이 일상적 작용, 구성 규칙, 사용하는 개념에 있어서 과학적 실천과 어느 정도 유사한지 알기 전에도 과학이라고 하는 주장에 내재하는 권력에 대한 열망과 관련된 의문을 자문해야 한다. 제기되어야 하는 의문 또는 의문들은 이렇다. "자신은 과학이라고 당신이 말할 때 당신은 어떤 지식 유형들의 자격을 박탈하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나는 이 담론을 말한다. 나는 과학적 담론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과학자이다'라고 당신이 말하기 시작할 때 당신은 어떤 말하는 주체, 어떤 담론적 주체, 어떤 경험과 지식의 주체를 주변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사회는 보호되어야 한다(Science Must Be Defended)>>, 9-10)

인식론과 인식론적 의문들에 대한 나의 혐오는, 근본적으로 그것들은 정말 지식, 즉 우리가 아는 방식과 알고 있는지 여부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 오히려 사실상 한 권위체를 정당화하는 것과 지식, 경험 그리고 현상의 다른 집합체들을 "주변화"하거나 배제하기 위한 일련의 담론적 기법들을 개발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의심에서 비롯된다. 자체적으로, 인식론적 탐구들은 공평성과 객관성이라는 허울 뒤에 숨어 있는 상태에서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제한하는 데 몰입하는 듯 보인다. 확실히 이것은 들뢰즈가 "국가 철학자"라는 인물로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의 일부인데, 그 인물은 역사적으로 우연적인 권력 체제를 위해서 이런 권력 형식의 자연화와 본질화를 통해 작업하면서 그것이 세계 또는 실존의 불가피하고 필연적인 구조로 제시한다. 예를 들면, 오늘날 진화심리학자는 인간이 진화되어 나온 영장류 친척들로부터 물려받은 유전과 생물학에 대한 명확한 의도를 지닌 관념의 견지에서 인간 심리를 설명함으로써 이기적인 신자유주의적 주체를 인간 본성의 고유한 진리로 무의식적으로 제시한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우리 자신을 경험하는 방식을 생물학에 위치시킴으로써 그것을 탈역사화하며, 생물학과 궁극적으로 과학의 권위에 근거를 두고 자신들의 논변들의 권위를 진전시키려고 시도한다. 그렇게 할 때 그들은, 인간 실존의 가능성에 관해 매우 다른 이야기를 말하고, 그래서 오늘날 인간과 다르게 살고 느낄 수 있는 가능성을 개방하는 민족지학과 역사적 연구의 발견 결과를 주변화하거나 배제하려고 시도한다. 인식론의 경우에도 대체로 그렇다. 현대 자연주의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아래로 원자 자체까지 모든 것이 우연적이며 적절한 조건에서는 다르게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현대 물리학과 생물학 둘 다에 의해 증언된다.

온티콜로지 또는 기계지향 존재론―나의 존재론적 입장을 가리키는 이름―의 틀 내에서는 육체가 행하는 것의 견지에서 육체에 접근한다. 그것은 객체를 아는 것에 대한 의문이 아니다. 그것은 객체의 의미를 판독하는 것에 대한 의문이 아니다. 사실상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객체가 행하는 것에 주목해야 할 뿐 아니라 객체란 행위 또는 활동이라고 주장한다. 전통적인 사유에 따르면, 객체는 특성 또는 성질들의 다발로 이루어져 있다고 간주된다. 예를 들면, 우리는 내가 애호하는 청색 커피 머그잔을 그것의 색깔, 즉 청색성, 모양, 단단함 같은 다양한 성질들이 내재하는 실체로 여긴다. 머그잔의 실체성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지속하는 동일성, 즉 그것이 겪는 가능한 모든 정성적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불변하는 것이다.

객체를 이해하는 이런 방식은 성찰과 강단 둘 다에 특유한 관객 입장의 결과물이라고 나는 믿는다. 성찰 행위를 수행하는 사람은 활동에서 물러서서 그저 바라볼 뿐이다. 우리가 주변 세계의 존재자들에 대해 관객적 관계를 향유할 때, 우리의 응시에 나타나는 것은 객체의 성질 아니면 의미이다. 그 다음에 우리는 객체를 이런 특성 또는 성질들의 다발로 취급하는 "유령적 환원(spectral reduction)"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수행한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강단 사회학과 철학적 성찰의 심리학의 결과로 초래되는 객체에 대한 철저히 왜곡된 이해이다. 객체가 무엇인지 알기를 원한다면, 예술가, 공학자, 농부, 목수 또는 요리사에게 문의하는 것이 더 나은데, 그들은 객체에 작용하고 그래서 존재자 내부에 숨겨진 은밀한 역능뿐 아니라, 상이한 매체들의 제약과 도구-존재자 상호작용에서 비롯되는 독특한 현상 또는 구체화를 항구적으로 만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요리사는 고기 요리를 만들 때 주철 프라이팬과 가스 레인지가 대단히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점을 알아챈다.

이것을 위해 나는 객체를 그것의 성질이 아니라 그것이 행하는 것의 견지에서 고려하는 "행위 존재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표현하려고 시도했다. 객체는 활동 또는 행위이며, 최소한 세 가지 방식으로 활동과 결부되어 있다. 첫째, 무엇이든 어떤 객체, 기계 또는 육체의 지속되는 현존은 항구적인 활동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 물리학과 정보 이론에 매우 중요한 엔트로피라는 쟁점을 만나게 된다. 물리학에서 엔트로피는 닫힌 (체)계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 무질서해지는 경향이다. 일정량의 기체를 유리 상자에 불어넣자. 초기 단계에 이 기체는 용기의 한 구석에 국소화될 것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기체 입자들은 용기 전체에 걸쳐 퍼진다. 기체는 낮은 엔트로피 상태에서 높은 엔트로피 상태로 이행해버렸다. 기체의 엔트로피는 기체 입자들의 확률 척도의 함수이다. 초기 단계의 경우에, 기체가 상자의 한 구석에 국소화되어야 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 시점에 기체는 낮은 엔트로피 상태에 처한다. 시간이 흐르게 되면, 용기의 어느 곳에서든지 기체 입자가 발견될 확률은 같아지게 된다.  낮은 엔트로피 상태는 개연성이 거의 없다. 높은 엔트로피 상태는 개연성이 크다.

이것이 객체 및 활동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객체는 물질적 요소들의 조직화된 체계이다. 여기서 모든 객체는 다른 객체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내 육체는 기관, 뼈 그리고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들 역시 세포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세포들은 분자들로 이루어져 있고, 분자들은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고, 계속 내려가면 끈까지 이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조직체는 육체들의 오래된 더미가 전혀 아니며, 오히려 이런 요소들은 모두 서로 특정한 관계들을 맺는다. 그것들은 특정한 패턴 또는 조직을 갖는다. 이것이 모든 객체의 상태이다. 객체들은 모두 시간에 걸쳐 다소간 지속되는 조직 또는 패턴을 갖는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객체를 "비개연적인 것"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의 테제―이것은 들었을 때의 느낌과 달리 음울하지 않다―는 모든 것이 끊임없는 해체 또는 붕괴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엔트로피는 모든 객체의 차원이다. 모든 객체 또는 비개연적인 것은 확률이 더 높은 상태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존재자는 자체 조직을 상실하는 과정 중에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현존하는 모든 것이 계속 현존하기 위해서는 활동이 필요하다. 결국 모든 것은 용기 속 기체 입자들의 운명을 갖지만, 활동을 통해서 존재자는 얼마간 자체 조직을 유지하며, 자체 요소들이 확률이 더 높은 상태로 해체되는 것에 저항할 수 있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활동은 , 즉 에너지의 소비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학술적 삶의 구성 요소인 관객적 입장 때문에 강단인은 관념론, 즉 우리의 사회적 실재를 구성하는 것은 오직 관념들이라는 견해을 향한 경향을 갖추게 된다. 흔히 우리는 관념은 아무 일 또는 에너지가 필요 없다―그런데 관념도 영양분을 연소한다―고 간주하고, 그래서 사회 사상과 정치 사상에서 일과 에너지의 차원을 놓치게 된다. 게다가 패턴을 갖춘 모든 조직체는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 일과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점을 환기하는 것은 사회적 조립체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주요한 메커니즘들 가운데 하나―대부분의 정치 이론에서 거의 논의되지 않는 차원―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그런데, 모든 것은 붕괴 상태에 있다는 주장이 처음에는 우울한 듯 들릴지라도, 나는 이 테제가 사실상 희망과 낙관주의에 대한 원인이라고 믿는다. 이것이 맞다면, 그 테제가 이의가 제기될 수 없고 전복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강한, 강철로 만들어진 그런 형태의 패턴을 갖춘 조직체―예를 들면, 억압적 정부, 부당한 사회적 체계 또는 기업―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엔트로피가 모든 존재자들의 일반적인 존재론적 차원이라는 것이 맞다면, 당연히 변화와 새로운 패턴을 갖춘 조직체 또는 비개연적인 것의 생성이 항상 가능하다. 패턴을 갖춘 모든 조직체 아래에는 투덜거리는 존재자들의 무정부 상태가 항상 존재하는데, 그것이 새로운 상이한 조직체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둘째, 객체는 행위 또는 활동이라는 주장은 특성 또는 성질은 효과 또는 사건이라는 주장이다. 내가 애호하는 커피 머그잔의 청색성을 고려하자. 우리는 청색이 머그잔이 자체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서 보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이런 청색성을 머그잔에 내재하는 것으로 다룬다. 그런데, 머그잔을 촛불 조명에서 끄집어내어 햇빛 조명으로 가져가면 색깔이 변한다는 점을 인식하게 된다. 햇빛 속에서 그것은 밝은 청색인 반면에, 촛불 속에서 그것은 진한 암청색이다. 조명을 끄게 되면 머그잔은 전혀 아무 색깔도 나타내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머그잔이 정말 무슨 색인지 논쟁하고 싶을 것이다. 예를 들면, 조명이 없을 때에도 머그잔은 여전히 청색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그냥 볼 수 없을 뿐이다. 그 대신에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머그잔은 결코 아무 색깔도 없으며, 오히려 머그잔의 색깔은 주변 세계와 맺는 상호작용을 통해서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 경우에, 다양한 파장의 빛뿐 아니라 관찰자의 눈과 이루어지는 머그잔의 상호작용(예를 들면, 개에게 머그잔은 다르게 나타날 것인데, 개는 상이한 색각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이 청색 사건 또는 "청색을 나타냄"이라는 사건을 산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머그잔은 아무 조명도 없는 조건에서의 무색을 비롯한 이 모든 색깔이다. 이것은 색깔 같은 성질들뿐 아니라, 머그잔의 모양과 단단함 같은 성질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면, 머그잔이 금성의 표면에 존재한다면 그것은 매우 상이한 모양과 단단함을 나타낼 것인데, 그것을 구성하는 유리는 어떤 온도 조건에서만 자체의 강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객체의 입장에서 특성 또는 성질은 행위이다. 그것은 객체가 행하는 것이지, 객체가 고유하게 보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객체가 행위자라는 한 가지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객체는 자체의 성질이 아니라, 오히려 자체의역능 또는 역량의 견지에서 규정되어야 한다. 객체는 영향을 미치고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역능 또는 역량을 갖춘 조직적 체계이다. 이것으로부터 두 가지 결론이 도출된다. 첫째, 이제 객체를 분석하는 방식이 두드러지게 변한다. 흔히 우리는 육체 또는 객체를 다른 육체들과 분리하여 생각한다. 나는 커피 컵이 무엇인지 이해하기를 원하고, 그래서 나는 그것을 세계에 거주하는 여타 존재자들로부터 분리하여 그것의 성질 분석에 착수하고 그것을 자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그런 성질들로 환원시킨다. 그런데, 앞에 제시한 것이 참이라면, 즉 성질이 효과 또는 사건이라면, 당연히 나는 육체들의 장 속에서 객체가 다른 육체들과 맺는 상호작용을 이해하지 않은 채 그것을 이해할 수는 없다. 머그잔의 색깔은 자체 존재의 고유한 특징이 아니라, 오히려 머그잔의 역능, 빛 같은 육체들, 다양한 동물의 신경계 등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되는 사건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객체의 성질은 이런 성질을 효과로 산출하는, 그것이 다른 육체들의 장과 맺는 상호작용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그레이엄 하만의 객체지향 철학에 대한 나의 논쟁의 핵심이며 내가 스스로를 객체지향 존재론라고 여전히 지칭하기를 꺼려하는 까닭이다. 하만의 경우에, 객체는 모든 관계로부터 물러서 있고, 그래서 객체는 자체가 맺는 관계들에 독립적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 그가 주장하듯이, 객체들은 결코 접촉하지 않는다. 나는 객체는 현재 그것이 맺고 있는 관계들로부터 단절될 수 있다―많은 경우에 이것은 죽음 또는 파괴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존재자들이 서로 만나게 될 때 일어나는 일인 듯 보인다. 우리가 탐구해야 하는 것은 분리 상태에 있는 존재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자들 사이의 만남, 즉 그것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방식이다. 이것은 세계 또는 존재에 대한 본질적으로 생태적인 견해이다. 생태학은 "자연", 즉 도시와 마을 바깥에 존재하는 체계들에 대한 연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 상호작용하는 방식 그리고 이런 상호작용과 관계들이 패턴을 갖춘 어떤 조직체들을 낳는 방식의 견지에서 세계를 탐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모든 것은 하나의 생태계인데, 우리 자신의 육체도 그렇다. 객체들이 서로 만나면, 모든 종류의 뜻밖의 현상들을 만들어내는 폭발이 존재한다.

그런데 둘째, 그리고 아마도 더 중요하게도, 앞에서 제시한 것은 우리 자신뿐 아니라 세계에 존재하는 존재자들을 취급함에 있어서 주의의 윤리를 시사한다. 육체를 그것이 몸담고 있는 장에서 분리하는 존재자들에 대한 접근 방식과 관련된 한 가지 문제는 그것이 결국 그런 존재자들의 존재성을 물화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일단의 특징들을 모든 가능한 맥락 또는 장에 놓여 있는 육체에 고유하게 속하는 것으로 다룬다. 그런데, 앞에서 제시한 것은 육체는 본질적으로 가소성이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육체들의 한 장 속에서 어떤 육체가 표현하는 성질은 다른 한 장 속에서 그것이 만들어내는 성질과 다를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육체와 관련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것이 항상 존재한다.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우리는 육체가 할 수 있는 것을 결코 알지 못한다. 이것이 주의의 윤리를 제시한다면, 그 이유는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본질주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어떤 객체를 특수한 일단의 성향들로 환원시키는 것에 저항할 것을 권고할 뿐 아니라, 새로운 맥락에 놓이게 될 때 존재자들은 매우 상이한 방식으로 행동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우리가 개방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뒤샹은 나름의 방식으로 이 점을 제시했다.

객체는 행위자이다. 객체는 활동이다. 객체는 행위이다. 객체는 수행자이다. 이것을 인식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학자와 철학자의 표상으로 되돌아가자. 그들로 하여금 객체의 행위주체성을 무시하게 만드는 학자와 철학자의 사회학 및 심리학이 존재한다. 성찰적 태도 때문에 학자는 모든 행위주체성이 오직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간주하고, 그래서 객체를 일단의 성질과 의미 전달체로 환원시키게 된다. 텍스트와 관념들과 관련하여 항구적으로 작업함으로써 학자들은 역능이 관념, 믿음 그리고 텍스트에서만 비롯되는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사회적 세계가 현재의 형태 또는 패턴을 나타내는 까닭을 사람들의 믿음, 이데올로기 그리고 관념들에 기대어 설명한다. 권력은 대체적으로 담론적 견지에서 간주된다. 이것은 학자의 계급적 지위에 의해 강화된다. 컴퓨터와 워드 프로세싱 프로그램 같은 강단을 유지하는 기술들은 대체로 이용 가능하고 마땅한 방식으로 작동하며,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하이데거가 가르쳤듯이, 여러분의 안경이 깨지거나 파괴되지 않는 한, 결국 여러분은 안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안경을 통해서 무언가를 보는 경향이 있다. 안경은 보이지 않게 된다. 마찬가지로, 강단인들의 경우에, 주거와 음식에 대한 걱정은 일반적으로 해결된 상태에 있다. 강단인들 사이에 벌어지는 다툼은 대체로 지적인 차원에서 경쟁 진영 사이의 관념들의 전투로 일어난다. 그러므로 놀랍지 않게도, 강단인들은 관념, 텍스트들이 세계 전체와 모든 사회적 관계들을 구성하는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

여기서 간과하게 되는 것은 객체들이 사회적 조립체의 구성에 기여하는 힘,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차이이다. 객체들이 라캉주의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본원적으로 무의식적인 방식이 있기 때문에 몇 가지 점에서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객체들과 그것들이 우리에게 작용하는 방식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객체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매우 편재적이고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주장했듯이, 우리는 의미와 목적의 견지에서 생각한다. 그가 말하지 않았던 것은, 이런 점이 우리가 원인의 견지에서 생각하는 것을 터무니 없이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는 객체의 의미작용 또는 그것의 용도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래서 객체의 구성 자체, 그것의 물질적 역능이 우리 행위, 우리가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 우리의 정동 그리고 우리의 인지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간과한다. 이것은 기회의 상실인데, 관념, 즉 개념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객체도 역능을 행사하는 것이 참이라면, 세계에서 변화를 만들어내는 한 가지 방법은 상이한 방식들로 관계들을 강화하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새로운 객체들의 설계와 객체들의 상이한 배치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권력을 유지시킨다고 믿고 있는 관념들의 체계를 비판하지만, 당혹스럽게도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사회적 관계들이 담론적으로 구성된다면, 관념들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사람들에게 납득시켰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모든 것이 여전히 그대로 유지될 수 있겠는가? 왜 설득과 비판만으로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충분하지 못한가? 다른 한편으로, 객체, 세계의 물질적 특징들이 역능을 행사하는 것이 참이라면, 어떤 불쾌한 사회적 관계들에 대해서 엔트로피가 개시하지 못하게 하는 데 기여하는 사회적 조직의 중요한 차원을 놓친 것이다.

빗방울이 최소 저항을 규정하는 잎 위의 경로를 좇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부분적으로는 사람들도 주변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객체들에 의해 제공되는 홈을 따라 살아가고 서로 관계를 맺을 것이다. 움직임의 벡터들의 이런 구성체는 객체들의 행위주체성, 객체들이 우리에게 작용하는 방식과 그것들이 자체 역능을 행사하는 방식과 결부되어 있다. 그것은 객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객체가 무엇을 행사하는지 또는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문제인데, 이것은 다른 가능한 경로들을 제한하면서 행동하고, 관계를 맺고, 느끼며, 수행하는 어떤 방식들을 제공한다. 객체들이 우리에게 어떤 중력을 행사하는 방식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뉴턴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아인슈타인적 의미에서, 우리 자아와 의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움직이게 되는 경로들의 구성을 통해서 작동한다.

객체들이 어떻게 이런 종류의 역능을 행사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도처에 존재하는 스마트폰을 생각하자. 우리가 객체에 대한 보드리야르적 해석자이거나 기호학자라면, 스마트폰의 의미작용을 논의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이 어떻게 계급, 지위, 성별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표식인지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안드로이트와 아이폰을 대조하면서, 안드로이드는 미합중국 주식회사와 기술관료적 태도의 표식인 반면에, 아이폰은 대항문화적인 생태적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대표하는지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십대 여성들이 아이폰을 성의 모호한 기표로서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계급의 가시적인 기호로서 뒷주머니에 꼭대기 부분이 드러나도록 꼽는 습관을 어떻게 채택하게 되었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중요하고 가치가 있고, 그래서 하나의 분석 방식으로서 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요약한 행위주체적 접근 방식에 따르면, 우리가 의미의 층위에서 스마트폰에 귀속시킬 수 있는 어떤 의미작용에도 무관하게, 스마트폰이 무엇이고 무엇을 행하는지의 견지에서 그것에 접근하는 다른 한 방식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스마트폰이 등장함으로써 노동의 구조가 어떻게 변하기 시작하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공적인 노동 시간과 사적인 가정 시간이 엄격히 구분되었던 시대가 있었다. 휴가를 떠나는 것이 여전히 가능했던 시대가 있었다. 8-10시간 동안 일을 한 후에 집에 갔을 것이고, 그래서 나머지 저녁 동안 일에서 벗어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여러분이 집에 있든, 출근 중에 있든, 또는 휴가 중에 있든 간에 항상 이메일과 전화 통화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점점 더 퍼지게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일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이런 동학에서 벗어나기를 선택할 수 있다고, 즉 이런 시기 동안 이메일을 살펴보거나 답장을 보내기를 거부할 수 있다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그 상황은 산업 혁명 후기 동안의 손목 시계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기술이 도처에 존재하게 되면서 그것은 사회적 기대, 즉 규범이 된다. 여러분은 벗어날 수 있지만, 만약 그렇게 한다면 모든 종류의 제재가 있을 것이고 기회가 상실될 것이다. 아마도 당신은 승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휴대 전화가 이것을 행하는 까닭은 그것이 의미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이고 그것이 작용하는 방식 때문이다. 점차적으로 사적 공간은 사라지고 모든 것은 노동의 공간이 된다.

그런데 이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소비 방식도 바뀌었다. 어제 밤 여기에 도착했을 때 나는 지역 음식점들을 찾기 위해 엘프(Yelp)를 열람하고 있었다. 이전에 음식점에 대한 탐색은 부근 지역을 거닐면서 지역 음식점들의 미학적 외관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던 반면에, 이제 내 선택은 타인들의 등급 평가에 따르게 된다. [...]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음식점들을 검색해야 하는 새로운 생태계, 즉 소비자 평가이다. 소비자 평가는 다른 사람들이 따르는 중력, 경로를 만들어내는데, 그것은 정글 속에서 어느 음식점들이 번성하고 어느 음식점들이 실패할지 결정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개미들이 다른 개미들의 페르몬 흔적을 좇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다른 평가자들의 흔적, 즉 이 새로운 기술에 의해 만들어진 경로를 좇는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내 취향인가 아니면 내 취향은 구성된 것인가? 예를 들면, 아마존은 다른 사람의 구매 실적과 내 과거의 구매 실적에 근거하여 내게 책을 추천한다. 이것은 나의 지적 관심사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관심사인가? 여기서 우리는 컴퓨터 알고리듬에 의해 형성되고 있는 취향과 지적 관심사를 만나게 된다. 또 다시, 이것은 사물들이 의미하는 것 또는 어떤 이데올로기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객체들의 활동에 의해 일어난다. 전자들은 후자들과 얽힐 수 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객체들의 영역으로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움직임. 취향, 사상 그리고 정동의 벡터들을 규정하는, 사회 이론과 정치 이론에 대한 논의들에 있어서 강단 내에서 흔히 주변화된, 거의 탐구되지 않는 권력의 전체 영역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정치 투쟁의 방대한 현장들뿐 아니라,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한 거대한 기회들도 놓치고 있다.

퀑탱 메이야수의 사변적 실재론

메이야수의 사변적 실재론 I

퀑탱 메이야수의 사변적 실재론에 관한 개요 I

1. 소개
퀑탱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 1967~ )는 프랑스의 철학자로 첫 저서 유한성 이후(2006)에서 사변적 실재론(realisme spéculatif)이라는 새로운 경향의 사상을 주장한 뒤 주목받는 차세대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사변적 실재론자들의 그룹에는 그의 책이 출간되자마자 곧바로 영미권에 번역한 레이 브라시에가 속해있다. 고등사범학교(ENS) 출신인 그의 아버지는 맑시스트 인류학자로 유명한 클로드 메이야수이며, 프랑스 내 헤겔 권위자인 베르나르 부르주아의 지도 아래 신의 비실존. 잠재적인 신에 관한 시론이라는 제목으로 고등사범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그는 고등사범학교에서 교수로 있으면서, 알랭 바디우와 이브 뒤루와 함께 프랑스 현대철학 센터를 창립했다. 그의 사상은 바디우의 영향을 받았으며, 바디우는 그의 책을 “젊음의 어느 주어진 순간에 사유와 삶을 꿰뚫고 생겨나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해답의 길을 발견해야 하는 질문으로부터” 탄생한다고 서문에서 묘사한다. 그는 여러 논문들을 발표하고 강연활동을 하고 있으며, 2011년에는 말라르메의 시를 해독한 두 번째 저서, 수와 세이렌을 내놓는다.

유한성 이후는 철저한 논증의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엇을 증명하기 위한 논증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그는 우연성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그는 데카르트적인 독단론 dogmatisme(존재하는 것은 완전하다는 사실에는 모순이 없다), 그리고 칸트의 비판철학 이후 철학사를 지배하게 된 상관주의 correlationnisme(의식과 언어를 통하지 않은 실재를 우리는 사유할 수 없다)를 모두 비판하면서 자신의 결론에 이른다. 그렇지만 그의 논증의 과정은 상당히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는데, 이를테면 독단론의 내부적 모순과 상관주의의 내부적 모순을 집요하게 파고 들어가 균열을 일으킴으로써 우연적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절대적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가 더욱 강하게 겨냥하는 것은 상관주의인데, 상관주의야말로 실재와의 모든 접촉을 잃어버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메이야수는 인간중심적인 사고 너머, 의미와 감각 등 인간과 관계하는 모든 것 너머에 있는 실재를 겨냥한다.

2. 메이야수의 몇 가지 주요 개념들
1) 상관관계와 상관주의
메이야수는 데카르트가 했던 사물의 제1성질과 제2성질의 구분으로부터 시작한다. 잘 알고 있듯이 제 1성질은 불변적인 성질들, 예컨대 길이, 넒이, 형태, 무게, 부피와 같은 것이고 제2성질은 감각과 지각에 기인하는 것들, 다시 말해 주체화된 것들이다. 붉음의 지각이 없으면 붉은 사물은 없다. 그런데 이러한 구분 자체 때문에 이후의 철학사가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될 줄은 데카르트도 몰랐을 것이다. 제1성질을 담고 있는 연장(extension)마저도 제2성질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사람들이 믿기 시작한 것이다. 제2성질의 발견 이후로 사람들은 사물과 사물을 경험하는 주관의 관계의 결과로서 생기는 속성들을 사물 자체(즉자)의 성질로 간주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그리하여 관계의 결과에 의한 성질들과 사물 그 자체(즉자)를 구분하기 시작한다. 그럼으로써 사물 그 자체는 우리의 경험 너머, 우리의 인식 너머의 자리로 옮겨간다.
이러한 방식의 사유가 상관관계이다. 상관관계는 지각, 감각, 의미, 언어 등 우리가 세계와 맺는 관계를 넘어서 있는 것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즉자적인 성질들을 진술하게 되었는가? 그것을 담당하게 된 것은 수학이다. 그런데 수학과 같은 과학적 사유에도 변동이 있게 된다. 과학의 법칙들은 과학공동체의 합의에 의해 객관성의 참된 기준으로서의 자격을 얻는다.
따라서 사물의 성질에서나, 즉자적 사물을 다루는 과학의 영역에서나 상관관계가 중요하게 된다. 메이야수는 그러한 사유의 흐름을 상관주의라고 부른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상관주의는 주관성의 영역과 객관성의 영역을 서로 무관한 것처럼 사유하는 모든 주장을 거부한다. 그리고 두 영역의 상호적인 관련성을 ‘상관관계적 원환’이라고 부른다. 메이야수는 적당한 은유를 사용하여 그러한 모든 추론의 방식을 ‘상관관계적 무도의 스텝’이라고도 부른다. 상관관계를 잘 요약하는 인용문을 보자.

“그와 반대로 이를테면 관계가 최초다. 세계는 오로지 내게 세계처럼 나타나기 때문에 세계의 의미를 가지며, 나는 오로지 세계와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가 계시되는 것은 나를 위해서이기 때문에 나의 의미를 가진다”

그랬을 때 중요해지는 것은 언어와 의미(의식)다. 이 두 가지는 외재적인 것들을 관계의 결과들로 만듦으로써 관계를 벗어난 모든 것들을 사유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무언가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내부에(의식과 언어에) 의존해야 하고, 역으로 의식과 언어가 향하는 것은 외재적인 것이다. 하지만 외부의 것을 다룬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의식과 언어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언어와 의식은 마치 투명한 감옥처럼(프란시스 볼프의 용어) 존재하면서, 인간의 외부를 마치 투명한 유리 너머에 있는 외부처럼 ‘유폐적 외부’로 만든다. 일단 상관관계적 사유에 진입한 순간부터 인간은 의식과 언어로부터 벗어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다. 메이야수는 그랬을 때 인간이 잃어버리게 된 것이 거대한 외계(Grand Dehors)라고 말한다. 거대한 외계는 인간에 대해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경험에 주어지든 말든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국의 영토에 있다는―이제는 완전히 다른 곳에 있다는―정당한 감정과 함께 사유가 돌아다닐 수 있었던 저 외계.” 그 외계는 사유가 외부적인 것들을 모두 상대적인 것으로 만들기 전까지는 모험의 지역이었다.
메이야수는 칸트에게서 시작된 상관주의가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에 이르면서 더욱 강력한 상관주의로 변질되었다고 판단한다. 칸트는 경험의 조건들을 이야기한다고 할지라도 물자체의 영역을 여전히 남겨놓으면서 약한 상관주의로 남는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는 언어로 말해질 수 없는 세계를 신비한 것으로 만들었고, 하이데거는 사유와 존재의 만남의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사유를 더욱 신비로운 것으로 만들었다. 메이야수는 이들의 사상을 강한 상관주의라고 명명한다. 강한 상관주의는 물자체를 완전히 배제하고 상관관계에 의해 구성된 세계나 그러한 관계 자체를 신비한 것으로 삼는다.

2) 선조성(ancestralité)
그런데 어떤 영역이 출현한다. 그것은 띠이다. 방사능 핵의 분해 속도 상수와 열광 법칙에 의해 지구의 연대기를 추적하는 그러한 띠는 우주의 기원(135억 년 전), 지구의 형성 시기(44억 5천만 년 전), 지구의 생명체의 기원(35억 년 전), 인간의 기원(200만 년 전)을 표시한다. 이러한 것들은 사유의 출현보다 앞서 있는 것, 즉 인간이 세계와 관계하는 모든 형식보다 앞서 있는 것을 표시한다. 메이야수는 이렇듯 인간 종의 출현보다 앞서 있는 실재 전부를 ‘선조적인 것’이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그렇게 지구의 생명체보다 앞서 있는 실재의 존재나 선조적 사건의 존재를 가리키는 물질들을 원화석(archifossile) 혹은 물질 화석(matière-fossile)이라고 명명한다. 원화석이란 동위원소나 행성의 광선과 같은 선조적 현상에 대한 측정을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지탱물을 가리킨다. 선조적인 것은 상관주의의 틀 안에서는 전혀 이해될 수 없는 것인데, 왜냐하면 상관주의는 상관관계가 아닌 다른 어떤 것도 이해할 수 없고, 또한 상관관계 그 자체가 영원하다고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주장의 경우에 실재로부터 관심은 더욱 멀어진 채로 에고나 정신을 영속시킴으로써만 그에 상대적인 존재자를 영원한 것으로 만들 것이다. 그와 반대로 선조적 진술은 인간에게 그러한 실재가 나타났든 아니든, 인간이 그것을 사유할 수 있든 없든 상관없이 그 자체의 의미가 궁극적 의미라는 조건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즉 선조적 진술은 실재적 의미를 가지며, 오로지 실재적 의미만을 가진다.
메이야수는 특히 수학적 형식이 선조적 진술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수학적 진술만이 인간과 세계의 관계라는 벗어나기 힘든 감옥 사이에서 실재로 향하는 작은 탈출구를 만들기 때문이다.

2. 회의주의, 신앙절대론
메이야수는 상관주의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한 뒤에 현대철학의 흐름을 낱낱이 분석한다. 그가 바라보는 현대철학은 상관주의의 파생적 결과들, 즉 주관적 형이상학 혹은 ‘회의주의적-신앙절대론적 폐쇄’로 규정된다. 더 이상 거대한 외계, 절대적 외계에 닿을 수 없는 상관주의 철학자들은 상관관계 자체를 지배하는 실체들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것은 생명(베르그손, 들뢰즈)일 수도, 절대정신(헤겔)일 수도, 의지(쇼펜하우어)일 수, 힘에의 의지(니체)일 수도 있다. 혹은 레비나스의 절대적 타자일 수도 있다. 그리고 메이야수가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리오타르의 재현불가능한 숭고도 절대적 타자를 전제한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도무지 이성으로 파악될 수 없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 상관주의는 이성의 형이상학에 종언을 고하면서, 그리하여 완전한 절대자를 포기하면서 인간에 대한 것들만을 사유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절대자에 대한 요구를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했는데, 절대자는 이제 사유불가능한 영역에서 신비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 이것을 메이야수는 이렇게 표현한다.

“철학자들은 절대자들로부터 한 가지만을 요구하는데, 그것은 절대자들에는 합리성을 주장하는 그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절대자에 대한 종교적 신앙이 신앙 자체만을 책임지기 시작하면서, ‘사유의 탈절대화’로 이해된 형이상학의 종언은 절대자에 대한 모든 종교적(혹은 ‘시학적–종교적’) 믿음의, 이성에 의한 합법화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형이상학의 종언은 절대자에 대한 모든 주장들에게서 이성을 몰아냄으로써 종교적인 것들의 어떤 과격한 회귀의 형태를 얻게 되었다.”

현대철학이 보여주는 우울한 측면은 회의주의와 비합리적인 신앙절대론의 복합물의 효과들이다. 그것은 절대자에 도달한다는 이성의 사망신고를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출몰하는 절대자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수용이며, 유한한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절대적 타자의 불멸성에 의지해서 자신의 사유의 궁극적 불멸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이다. 그런데 만약 절대자가 우연적이라면, 아니 우연적으로 존재하는 것, 가능적으로만 존재하는 것 자체가 절대적이라면 그러한 절대자를 어떻게 사유해야 할 것인가? 메이야수는 전적으로 우연적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를 필연적으로 만들고, 그럼으로써 완전한 절대자를 전제하는 독단론으로부터 그리고 절대자 자체를 사유할 수 없다는 회의론적 광신으로부터 모두 벗어난다.

3. 우연적인 존재 그 자체의 필연성. 본사실성(factualité)
메이야수가 말하는 절대자는 근거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연히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우연성을 필연성 안에서의 우연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나는 내일 사고를 당해 죽을 수 있다거나 내일 지진이 나서 도시가 폐허가 될 수 있다거나 등등. 하지만 그런 우연성은 경험적 우연성이며, 생성과 소멸이라는 일반적인 원칙 안에서의 우연성이다. 메이야수가 말하는 우연적으로 있음은 순수 가능성을 말한다. 거기에는 어떤 근거도 없다. 메이야수는 절대적 실재를 “그렇게 존재하지 않을 수 있음” 자체가 그것의 존재인 것이라고 정의한다. 다시 반복하지만 메이야수의 절대적 실재는 그렇게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존재 안에 품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가령 헤겔에서 모순적인 것, 바로 윗 문장에서 말한 그렇게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은 완전한 존재로 가는 하나의 계기일 뿐이다. 메이야수가 말하는 절대자는 모순이 없는 순수가능성으로서의 존재다.
그것은 또한 우연하게 있음이라는 사실에 다시 한 번 사실성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하이데거의 사실성과는 다르다. 모든 것이 우연하게 있음 자체를 사실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직도 그러한 사실성에 대한 인간의 무능력을 전제하는 인간적 사유이기 때문이다. 메이야수가 말하는 순수 가능성으로서의 사실은 사실성의 옷을 입지 않은 사실, 다시 말해 인간이 존재하지 않을 때도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본사실성은 사실성의 비–사실성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는 사실성의 자가–부여의 불가능성[사실성이 스스로에게 사실성을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을 ‘사실성의 비–중복non-redoublement de la facticité’이라고 명명할 것이다.”

사실, 메이야수는 하이데거의 사실성과 구분하기 위해 매우 조심한다. 하이데거는 사실성과 사실적이라는 용어들을 사용함으로써 존재 사건에 어떤 필연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메이야수의 본사실성에는 어떤 이중적 의미가 부과되지 않는다. 심지어 그는 “사실성만이 본사실적이지 않다”고까지 말한다.
이제 ‘사변적’이라는 용어의 뜻에 가까이 왔다. 사변적이라 함은 절대자에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철학을 가리킨다. 그리고 ‘형이상학’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은 그러한 절대자에 대한 접근을 이성원리에 의해 근거짓는 철학을 말한다. 그런데 ‘사변적’이면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형이상학적’이지 않을 수 있는데, 이는 메이야수가 말하는 절대자가 어떤 근거도 갖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우연적 존재자를 더 잘 설명하기 위해서 새로운 시간 관념을 제시한다. 그것은 역사적 시간(근거를 갖는 시간)이 전혀 아닌 카오스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카오스는 모든 질서를 파괴하는 카오스가 아니라 아무거나 생성하는 카오스, 심지어 죽음, 비존재마저도 생성하는 카오스다. 우연성을 필연적인 속성으로 갖는 모순적 존재자는 카오스라는 시간성 안에 기입된다. 카오스 안에서의 존재자는 그 어떤 필연성도 갖지 않지만 그 어떤 타자성도 갖지 않는다. 카오스는 비모순적 존재자, 다시 말해 즉자 존재만을 제외한 모든 존재가 생성되는 시간이다. “카오스가 절대로 생산할 수 없는 무엇, 그것은 필연적인 존재자다. 필연적인 어떤 것을 제외한다면 모든 것이 생산될 수 있고 모든 것이 일어날 수 있다. 필연적인 것은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자의 우연성이다.”

4. 표식
메이야수는 사변적 진술에 가장 적합한 기호는 수학이다. 왜냐하면 수학적 진술은 본사실적 특징으로부터 기호의 일자를 역사적, 의미론적 맥락에서 결정된 존재자적 일자와 구분하기 때문이다. 그는 수학의 기호를 의미를 제거한 기호라고 명명한다. 하지만 그것이 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마치 고고학자가 사라진 문명의 폐허 속에서 발견한 석판에 새겨진 반복적 모티브들에서 공간-시간적 반복에 종속되지 않는 표식의 단일성의 양태를 획득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표식이다. 우리가 유사한 표식들을 동일한 유형의 반복처럼 생각할 때 공간-시간 마다 그 표식이 가질 수 있는 차이의 효과가 사라진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표식의 반복이 절대적으로 동일하다도 말할 권리를 갖는다. 또한 그것은 모든 인간적 경험으로부터 벗어난다. 가령 기수들이나 음표들이 단일성의 ‘유형’으로 확립된 기호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의미화하는 작용을 하는 것으로 기호를 파악하거나 유형적으로 기호를 파악한다. 메이야수가 말하는 표식은 후자이다.
그렇게 얻어진 표식이 사실적 표식, 말하자면 절대적인 우연성을 갖는 표식이 될 때 그것은 모든 다른 현실 속에서도 동일하고, 다른 공간과 다른 시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유형으로서 파악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기호의 단일화는 존재론적 단일화로 이행하고 표식 속에 영원한 우연성이 현전하게 된다. 그는 한 논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영원성의 본성이란 무엇인가? 나의 테제는 이렇다. 기호학적 단일성의 파악 속에 잡혀있는 영원성은 기호의 출현의 우연성의 파악 속에서 자신의 원천을 얻는다.”(Quentin Meillassoux, “Contingence et absolutisation de l’Un”) 다시 말해 그 표식은 “존재하는 것은 우연히 존재한다. 그것이 필연적이다”를 함축하는 표식이다. 메이야수가 말하는 표식, 그가 세우고자 하는 존재론적 기호의 절대성은 우연성만이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적 존재자가 필연적인 시간성, 카오스의 시간성 안에서 타당성을 획득한다.


메이야수의 사변적 실재론 II

퀑탱 메이야수의 사변적 실재론에 관한 개요 II

1. 흄의 문제

1.1 당구공의 진로
메이야수는 순수가능성이 조건으로서의 시간성을 카오스라고 정의했다. 카오스는 존재하는 것이 그렇게 존재해야할 아무런 근거를 갖지 않으며, 무엇이건 생성될 수 있는 시간성을 말한다. 이러한 시간성은 역사성을 갖지 않으며 따라서 이야기도 갖지 않는다. 그렇다면 카오스는 무질서, 혼돈인가? 메이야수는 그러한 생각은 세계의 인식을 필연론적 인식과 중첩시키기 때문에 유래하는 것이라고 본다. 세계의 안정성은 있다. 그러나 이 안정성은 인식이 마련해놓은 법칙을 따르는 안정성이 아니라 실재의 안정성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근거를 갖지 않은 존재자들이 출현할 수 있으며 우연적인 사건들이 일어날 수 있다.
흄이 제기한 문제는 상황들이 동일할 때 어제 일어난 일이 오늘도 미래에도 똑같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인과적 연결의 필연성에 대한 질문이다. 그는 <인간 오성에 관한 연구>에서 당구공의 사례를 제시한다.
“가령 내가 다른 공을 향해 직선으로 움직이는 당구공을 볼 때, 두 번째 공의 운동이 그것들의 접촉이나 충돌의 결과처럼 우연적으로 내게 연상된다고 가정한다면 실제로 나는 다양한 백 가지 사건들 역시 저 원인을 따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아닌가? 두 개의 공이 모두 절대적 휴식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을까? 첫 번째 공이 다시금 직선의 운동을 계속하거나, 어떤 선을 그리면서 그리고 어떤 방향을 향해 두 번째 공으로부터 튕겨나올 수는 없을까? 이 모든 가정들은 일관적이며 파악가능하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것들 가운데 다른 것들보다 더 일관적이지도 않고 더 파악가능하지도 않은 어느 하나에 특권을 부여하는가? 우리의 모든 추론은 선험적으로 그러한 특권의 토대를 우리 자신에게 결코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가령 당구공은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수도 있고 당구대를 뚫을 수도 있고 갑자기 산산조각 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공의 진로를 예측하고, 확신한다. 그러한 확신을 물리학자들은 법칙에서 찾을 것이다. 그런데 흄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그러한 확신이 습관이나 관행이라는 심리학적 기원에서 나온다고 본다.
흄의 경험에서의 우연성에 대한 대답은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적 방식이 있고, 칸트의 인식론적 방식이 있다. 전자는 완전한 신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우선 증명한다. 그러한 신은 여러 가능한 세계들 가운데 오로지 최상의 것, 다시 말해 우리의 세계를 창조했을 것이고 이 세계는 영원하게 존재할 것이다. 후자의 방식은 모순적인 것들을 인간은 표상할 수 없기 때문에 설령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그것을 알 수 없다. 가령 당구공이 뛰논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그러한 환상적 무대를 가정하며, 그러한 무대라는 배경은 표상의 통일된 틀 안에 있다. 그런데 흄이 제기하는 문제는 인과성이 어떤 근거에서 세계를 지배하는 가가 아니라 인과적 법칙이 지배하지 않는 경험이 가능한가에 놓여있었다. 즉 그가 제기했던 문제는 물리학 자체가 미래에도 여전히 가능할 것이지를 우리에게 보장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하여간 형이상학적 방식이나 인식론적 방식이나, 흄처럼 그 근거를 심리적인 것에 둔 것이나 경험의 사건을 보장하는 인과적 필연성을 선취된 진리처럼 간주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흄 자신은 현실적인 필연성, 우리의 이성이 뒷받침하지 않은 물리적 세계에서의 필연성을 계속해서 믿는다. 흄이 회의주의의 전통을 만들었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흄을 이은 회의주의자들이 맹신으로 돌아선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1.2 과학소설과 과학 너머의 소설
메이야수는 고등사범학교에서 한 강연에서 과학소설과 과학너머의 소설을 대립시키고, 전자를 포퍼의 철학에 대입시키고 후자를 흄의 철학에 대입시킨다. 아시모프의 단편, <반중력 당구공>을 보면 두 물리학자가 나온다. 제임스 프리스와 에드워드 블룸. 프리스는 노벨상을 받은 물리학자이며 블룸은 그런 프리스의 이론을 이용해서 돈을 번다. 이 둘은 서로를 증오하지만 모두 당구를 엄청 좋아한다. 어느 날 프리스의 성공을 질투한 블룸은 멈추지 않는 운동을 보여주는 아주 복잡한 장치를 만들자는 제안을 한다. 그리고 자신의 발명을 처음 공개하는 날, 그는 기자들과 관객들을 초청하고 자신이 만든 당구대를 보여준다. 블룸은 당구대 중앙에 공이 멈추지 않는 반중력을 만들어내는 장치를 설치했던 것이다. 실험실 안에 당구대가 설치되어 있고 조명이 당구대 위만을 비춘다. 블룸은 프리스에게 자신이 만든 당구대 위에서 처음 당구공을 치는 영광을 제안한다. 프리스가 당구공을 치자, 그 당구공은 반중력 상태를 벗어나 빛의 속도로 블룸의 가슴 한 복판을 뚫고 벽을 뚫고 우주까지 날아간다. 블룸이 그 자리에서 즉사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자리에 있었던 화자이자 기자는 어떻게 장치를 고안한 블룸이 그러한 위험을 알 수 없었는지를 의아해한다.
이 소설을 준거로 삼아서 메이야수는 과학소설과 과학 너머의 소설을 구분한다. 과학 소설은 물리학 법칙을 기반으로 한 소설이고 과학 너머의 소설은 법칙과는 전혀 무관한 소설이다. 흔히 반증주의로 알려진 포퍼는 어떤 새로운 경험에 의해 과학의 이론이 파괴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이 파괴는 새로운 물리학 이론을 위한 동기가 된다. 그랬을 때 포퍼는 새로운 경험을 단지 이론이 아직 목록화하지 않은 경험으로서만 취급한다. 예를 들어 태양이 뜨고 지면서 낮과 밤이 이어진다는 하루의 주기는 남극에서 일정 기간 동안 24시간 내내 낮만 지속되는 새로운 경험에 의해 반박되지만, 이 새로운 경험은 지구의 자전과 공전, 태양의 위치 등등 물리학 법칙에 의해 다시 설명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태양이 태양계로부터 돌연히 벗어나 버린 것이라면? 인간은 빵을 먹어야 살 수 있다는 법칙은 인간이 빵만 먹었을 때 병에 걸려 죽는 새로운 경험으로 반박될 수 있지만, 하지만 이 새로운 경험은 다시금 인간 생존을 위해 필요한 영양소들이 빵에 없다는 사실로 다시금 교정된다. 그런데 만약 똑같은 빵의 화학 분자들이 갑자기 인간을 죽이는 독소의 화학분자가 된다면?
포퍼의 반증주의와 과학 소설은 법칙의 변화들, 그리고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법칙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구성한다. 반면에 흄의 문제와 과학 너머의 소설은 요컨대 가령 내일 물리학 법칙 자체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것은 여하한 물리학 법칙이 감쌀 수 없는 외부 현실의 순수한 가능성이고 카오스의 상태이다. 포퍼는 물리학 이론들의 미래의 유효성에 관한 질문은 이 이론들이 새로운 경험들에 의해 반박될지라도 그 반박이 새로운 물리학 이론들을 위해 형성될 것이기 때문에 미래에도 물리학은 여전히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제한다. 흄의 질문은 개연성의 문제, 더 나아가 확률적인 법칙의 타당성과도 무관하다. 그렇지만 흄은 전혀 인과적이지 않은 우주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을 암시한다.
아시모프의 소설에서 프리스는 저 예상치 못한 사고 이후에 질문을 던진 신문기자에게 당구공의 진로를 과학적으로 설명함으로써 그의 소설이 포퍼적인 과학 소설에 그치게 만든다. 다시 말해 소설에서 저 낯설고 치명적인 새로운 경험이 법칙의 단절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과학 소설은 새로운 현상, 새로운 경험을 언제나 현재의 과학에 비추어 다시 설명하고 과학의 법칙을 교정하기 때문이다.
로바쳅스키가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탄생시켰던 것은 모험을 통해서였다. 그는 우선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준, 즉 어느 직선에 대해 한 점이 주어졌을 때 처음의 직선과 지각을 이루는 평행선은 유일하다는 공준을 증명하기 위해 이 공준의 오류를 가정했다. 예를 들어 한 선분과 평행을 이루는 수많은 직선들이 주어진 한 점을 지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것을 불합리에 의한 증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로바쳅스키가 도달한 것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증명과는 거리가 먼, 유클리드 기하학 만큼이나 일관적이고 새로운 기하학이었다. 이것은 인과적이지 않은 우주가 인과적 우주만큼이나 일관성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수학적 법칙이 알려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랬을 때 “우리는 그러한 비-인과적 우주가 물리적 필연성에 대한 믿음에 내재하는 수수께끼들로부터 해방된 우주임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인과적 우주에서 비-인과적 우주로 이행할 때 우리는 세계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세계의 수수께끼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수께끼는 무엇으로 바뀌게 된 것일까? 그것은 우연적 사건인 것이고 세계의 순수가능성이다. 카오스가 무질서로 인식되는 것은 의식과 세계의 상관관계가 요청하는 질서와 지속성을 불가능하게 만들 때이다. 하지만 세계가 의식의 질서와 무관한 방식으로 존재한다면?
사람들은 온전한 우연성을 인정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연성을 개연적이지 않은 결과들과 비교한다. 그런데 개연성(probabilité)과 비개연성의 편차는 늘 필연론적 전제를 깔고 있다. 다시 말해 개연적인 사건과 비개연적인 사건은 가능성의 총체를 전제한다. 하지만 메이야수에게 우연적 사건은 비개연적인 결과와 다르며, 이 둘을 비교하기 위해 수학을 끌어들이는데, 그것이 칸토어의 초한수이다.

1.3 사행적 추론과 우연적 사건 – 초한수
메이야수는 부조리에 대해 우리가 갖는 두려움이 정확히 사행적 개념화에 근거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두려움은 표상들의 현행적인 불변성을 예외적인 행운으로 간주할 것이다. 이것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우연성을 생각하는 것인데, 메이야수에 따르면 본사실적 사변은 카오스의 안정성, 근거를 전제하는 이성 원리로부터 벗어났다고 할지라도 안정성을 잃지 않는 카오스의 조건 자체를 추구한다. 그리고 이것은 수학적 본성에서 나온다. 물론 이러한 수학적 본성이 확률적인 성격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개연론적 추론은 선험적인(경험 이전의) 가능적 존재가 수적 총합의 방식으로 사유될 수 있다는 조건에서만 타당하다. 개연성을 계산해내기 위해서는 그 가능성들이 유한하건 무한하건 상관없다. 예를 들어 팽팽하게 당겨진 밧줄이 끊어질 수 있는 실증적 개연성을 계산하기 위해서는 밧줄 위에 점들이 무한할지라도 상관없다. 따라서 개연성을 계산하기 위해서는 모순이 부재하는 파악가능한 가능성들의 총합이 실제로 있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다. 이때의 개연적 사건들은 이산적이지만 연속적이다.
그런데 가능성의 총합이라는 전제가 아무런 근거를 갖지 않는다면? 경우들의 총합인 우주-전체의 이념이 근거 없는 것이라면? 과학자들은 가능한 총체에 대한 가설을 만들고 그리하여 전체를 파악하려고 한다. 바로 이러한 수적인 총체화에 반박할 수 있는 수학 이론이 칸토어의 초한수 개념이다. 그 전에 확률과 가능성의 수적 총합에 의한 사행성(요행)과 우연성이 어떻게 다른지를 인용문을 통해 알아보자.

“우리는 ‘요행hasard’(아랍어: az-zahr)과 ‘사행적aléatoire’(라틴어: alea)이라는 용어들이 모두 근접한 어원들과 관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주사위’, ‘주사위 던지기’, ‘주사위 놀이’. 그러므로 이 개념들은 놀이와 계산이라는 주제들을 대립된 것들이 아닌, 분리불가능하게 엮인 것으로 환기시킨다: 모든 주사위 놀이에 내재하는 요행들의 계산. 따라서 존재와 요행의 일치가 사유를 지배할 때마다 주사위–전체라는 주제(가능성들의 수의 한결같은 봉입), 놀이의 무상성이라는 주제(삶과, 삶에 상위적인 표피성 안에서 인식된 세계의 놀이)가 모습을 드러내지만, 또한 빈도수의 냉혹한 계산이라는 주제(생명 보험과 위험 평가의 세계)가 모습을 드러낸다. 가능성들의 봉입의 존재론은 계산의 기술만을 진지하게 고려한다는 사실 때문에 필연적으로 우리를 중력을 혐오하는 세계 안에 위치시킨다.
그와 반대로, 우연성(contingence)이라는 용어는 라틴어 contingere(프랑스어의 arriver)와 관련되는데, 그것은 일어나는 것, 그렇지만 충분히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우연적임, 그것은 요컨대 어떤 것이 마침내 일어날 때다. 이미 등록된 모든 가능성들로부터 벗어나면서, 비개연적인 것까지도 포함한 모든 게 예측 가능한 그런 놀이의 허영심에 종지부를 찍는 다른 무언가가 일어날 때. 무엇이 우리에게 일어날 때, 새로운 것이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몰아세울 때 계산도 놀이도 끝나게 된다. 마침내 진지한 것들이 시작된다.”(메이야수, <유한성 이후>, pp. 185-186)

이 인용문을 보면 우연성은 확률과 다른 것, 가능성의 총체라는 피상적이고도 인간적인 이념을 벗어나 실재의 사건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칸토어의 초한수란 무엇인가? 이것은 바디우가 자신의 집합이론에 적용하는 이론이기도 하다. 간단히 말해서 초한수는 모든 양들의 전체(Tout) 집합이 그 집합의 부분집합들의 종합에 근거해서 획득된 양을 포함할 수 없게 만드는 공집합을 가리킨다. 가령 (1, 2, 3)의 부분집합의 수는 (1), (2), (3), (1,2), (2,3), (1,3)이라는 양적 총합에 ( )이라는 공집합을 더하게 된다. 따라서 모든 집합의 원소들의 수는(비록 이 수가 무한하다고 할지라도) 그 원소들을 다시 묶은 그룹들의 수에 의해 항상 초과된다. 위에서 사례로 든 밧줄에서 끊어질 수 있는 점의 확률을 계산할 수는 있지만 밧줄이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다거나 돌연히 밧줄이 사라진다거나 하는 경우는 확률적 가능성의 총체를 넘어선다. 그리고 이런 우연성은 집합들 전체의 일관성으로부터도 벗어난다.
칸토어의 초한수는 법칙들의 필연성에 대한 모든 믿음을 해체시킨다. 또한 필연성에 대한 기본적인 전제, ‘어째서 그것이 다르게가 아니라 그처럼 존재하는가’를 묻는 질문에 대해 사변 철학자는 간단히 거기에는 근거가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제 신비는 존재하지 않는데, 이는 문제들이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연적 사건을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전제하는 이성 원리가 존재하지 않아서이다. 메이야수는 이성 원리에 의거하지 않는 우연적 사건, 세계를 비전체로 만드는 우연적 사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형상(figure)라는 표현을 쓴다. 우연성을 명기하는 것, 그것은 칸토어의 초한수를 우연적 존재의 조건처럼 사유하는 것이며, 형상의 자격으로서 비-전체를 도출하는 것이다.

2. 프톨레마이오스의 복수(회귀)

프톨레마이오스는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이자. 그는 천동설을 주장하는 알마게스트를 저술했고, 종교적인 이유에서 파문을 당한다. 그의 천동설은 고대 과학의 오랜 발전의 결과이자, 천체들의 관찰, 수, 계산, 척도에 근거해서 세워진 이론이다. 비록 지금 그의 천동설이 비할 데 없이 조야해 보이지만 아무튼 프톨레마이오스는 물리학의 영역에서 하나의 획을 그었다고 볼 수 있다.
메이야수는 <유한성 이후>의 첫 부분을 원화석과 선조성으로부터 시작했다. 이 두 가지가 그가 유일하게 진정한 과학적 담화로 보는 것이자 인간 중심적 과학으로부터 해방된 사변적인 과학 담화라고 보는 것이다. 앞에서 이미 보았듯이 원화석과 선조성은 인간의 출현에 선행하는 사건, 뿐만 아니라 인간 종의 소멸에도 가능한 사건들과 관계한다. 그러한 사건들과 그와 연관된 진술들을 특징짓기 위해 메이야수는 통-시성(dia-chronicité)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통-시성 안에 걸려있는 것이야말로 실험과학 일반의 본성이라고 본다.
갈릴레이와 코페르니쿠스에 의한 근대 과학은 수학에 기초해 있었으며, 메이야수에 의하면 사유와 무관한 존재를 탐사할 수 있는 길을 터주었다. 이러한 근대 과학이 창설되자 이전까지 인간의 실존에 앞설 수 있는 것들을 이야기하기 위해 신화나, 신통계보학, 환상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으며 그러한 것들을 진술하기 위해 오로지 과학적 가설로 충분했다. 관찰자의 실존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 그러한 과학에서 근본적인 점은, 과학이 자연적으로 실재적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데도 존재할 수도 있는 것에 대한 인식의 과정을 전개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의 과정이 과학의 본성을 구성한다는 점(자연의 수학화)이다.
갈릴레이가 수학을 세계와 결합시키기 이전에 프톨레마이오스도 수학과 측량에 의해 천동설을 내놓았으나, 이때 인간이 놓인 중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왜냐하면 지구라는 중심 자리가 우주의 수치스럽고 영광스럽지 못한 자리처럼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연의 수학화 이후에 사람들이 가졌던 상실과 유사하다. 인간은 이제 특권화된 모든 관점을 상실했고, 자신을 자신의 환경에 거주하게 허락했던 의미를 더 이상 세계에 투여할 수 없다. 세계는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 인간은 사르트르가 말하듯이 ‘잉여적 de trop’이 되었다.

“근대 과학이 인간이 자기 자신과 우주에 대해 가질 수 있었던 표상들에 주입한 황폐와 버림의 느낌은 다음의 원인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을 갖지 않는다. 즉 세계에 대한 사유의 우연성에 대한 사유, 사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 세계―사유되었다는 사실이나 사유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해 근본적으로 영향 받지 않는 세계―를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메이야수, <유한성 이후>, p. 199)

따라서 갈릴레오-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은 인간의 탈중심화를 내포하며, 데카르트의 테제, 요컨대 수학적으로 사유가능한 것은 절대적으로 가능하다는 테제를 증언한다. 다만 데카르트가 절대적 존재자에 대한 확신을 유지하는 독단론적 태도를 가졌다면, 메이야수에게서 과학의 수학화에 의한 절대성이 가리키는 것은 가설적 방식에 의해서일지라도 수학적으로 기술될 수 있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현시하든 아니든 상관없이 존속할 수 있다는 것을 인간이 사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통-시적 지시물들(원화석)은 영원불변한 절대자이면서 동시에 전적으로 우연적인 존재이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칸트는 자신의 인식론적 전환을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명명한다. 칸트는 이상하게도 부동적이라고 믿었던 관찰자가 사실상 관찰되는 태양의 둘레를 돈다는 것을 확증하는 코페르니쿠스의 태도와 정반대되는 방식으로 주체가 인식과정 안에서 중심에 있다는 것을 확증하고 있다. 즉 그는 원래의 코페르니쿠스의 발견과는 정반대로 인간의 인식에 의해 대상이 조정되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칸트는 근대과학의 성과를 사유가능성의 조건으로 돌리면서 방향을 전환시켜 버렸다. 그는 갈릴레오-코페르니쿠스적 탈중심화를 예컨대 프톨레마이오스적 중심화(반-혁명)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과학이 처음으로 사유에 있어서, 사유와 세계의 관계와 무관한 세계 인식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발견했다면, 철학은 그러한 발견에 대해 자신의 고유한 오래된 독단주의라는 소박성의 발견으로 응답”한 것이다. 메이야수에 따르면 칸트는 과학적 코페르니쿠스 주의의 심오한 의미란 다름 아닌 철학적 프톨레마이오스 주의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은 근대 과학의 분명한 실재론적 의미가 사실은 현상에 따른 파생적이고 외양적인 의미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과학이 사변적 실재를 갓 사유하자마자 그러한 사유는 칸트에 의해서 곧바로 파면되었다. 이것은 실재, 다시 말해 즉자적 대상(혹은 외계)에 대한 사유를 포기하는 순간과 일치한다. 즉자적 대상은 이성 바깥으로 축출되었다.
칸트는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을까? 그는 근대과학이 모든 형이상학적 사유를 파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졌을 것이다. 그는 불변의 절대자, 필연적인 절대자에 대한 믿음이 독단주의로 흐르는 것을 경계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자에 대한 모든 믿음이 사라지는 것을 염려했을 것이다.
그런데 칸트의 염려와는 다르게 메이야수는 독단적 절대자이지 않으면서도 사유가능한 것을 수학적 가설로부터 찾으려고 한다. “본사실성의 원리의 과제”란 “가설적이라고 할지라도 절대화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정식화할 수 있는 모든 수학적 진술의 능력을 형상(figure)의 자격으로 도출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존재자의 우연성이라는 필연적 조건을 포착하면서” “시도하는 수학”이 될 것이다.

3. 에필로그

메이야수의 강연이 끝나고 사람들이 질문을 한다. 질문자들 다수가 우선은 메이야수의 논증을 따라가기 어려워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사변적 실재론을 현실로서 파악하기를 어려워한다. 어떤 질문자는 그가 말하는 비(非)-전체로서의 세계와 세계의 단일성이 어떻게 동시에 가능한지를 질문한다. 메이야수가 전달하고자 하는 실재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과 무관한 현실, 가설로도 그 존재를 증언할 수 있는 현실, 하지만 전적으로 우연성 아래 놓인 현실이다....

https://www.facebook.com/notes/chung-chieun/%EB%A9%94%EC%9D%B4%EC%95%BC%EC%88%98%EC%9D%98-%EC%82%AC%EB%B3%80%EC%A0%81-%EC%8B%A4%EC%9E%AC%EB%A1%A0-ii/667455553300265

2015년 8월 19일 수요일

스펜서-브라운 산법의 의의

스펜서-브라운 산법의 의의에 대해서
https://www.facebook.com/textlab/posts/996597280385423?fref=nf
- 사실 텀블러의 제목이 [스펜서-브라운과 차이의 세계]임에도 스펜서-브라운을 소개하는데 게으르기만 했다. 아마도 한 참 열을 올렸던 스펜서-브라운 [형식의 법칙]과 스펜서-브라운을 기반으로 지시의 산법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해 정리하고, 그를 사회학적, 인류학적 영역으로 확장했던 오오사와 마사치의 [행위의 대수학]에 대해 초벌 번역을 마치고 나서, 에너지가 과잉 소모되었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이 책들을 출판하려 하는 출판사가 없었던 게 더 실망스러운 일이었기는 하지만)
- 다행스럽게도 국내 루만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이제 조금씩 스펜서-브라운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고, 학술 저널에도 스펜서-브라운에 대한 논문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아쉬운 것은 여기서는 스펜서-브라운의 풍요로운 잠재성에 대해서 이야기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스펜서-브라운의 독해가 일면적이라는 점.
- 그런 점에서는 스펜서-브라운의 산법에 기반해서 사회를 이해하려던 오오사와 마사치의 작업은 산법의 가능성과 깊이에 대해 좋은 시사를 보여주지 않을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예전에 아내와 함게 초벌 번역했던 오오사와 마사치의 [행위의 대수학]의 서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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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의 대수학
스펜서-브라운에서 사회적 시스템론으로
오오사와 마사치 지음
박상우, 조은하 번역
0. 시원
존재가 행위와 함께 나타나는 양상을 관찰해보자. 스펜서-브라운(G. Spencer-Brown)이 구축한 ‘지시의 산법(calculus of indication)’이 얼마나 유효한 지 경험하게 될 것이다.
스펜서-브라운의 저서 [형식의 법칙(Laws of Form)](1969=1987)을 보면, 서문과 본문 사이의 여백에 “무명천지지시(無名天地之始)”라는 한자를 인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문장과 같은 정신을 공유한다고 생각되는 고대 중국의 잘 알려진 우화로부터 논의를 개시해보자. 이 우화는 [장자(莊子)] 내편의 끝에 실려 있다.
“남해의 왕을 숙(儵)이라 하고, 북해의 왕을 홀(忽)이라 하며, 중앙의 왕을 혼돈(渾沌)이라 한다. 숙과 홀은 혼돈의 거처로 가서 진심어린 환대를 받는다. 이에 감격한 숙과 홀은 혼돈의 정성에 보답하자고 상의를 한다. ‘사람의 신체는 모두 눈, 코, 귀, 입의 일곱 개 구멍이 있고, 이에 따라 명석하게 분별한다. 하지만 혼돈은 구멍이 없으니, 구멍을 뚫어주면 어떨까.’ 이에 숙과 홀은 매일 한 개씩 혼돈의 신체에 구멍을 뚫었으니, 칠일 째 되는 날, 혼돈은 죽어버렸다.”
장자의 철학에 관련지어 보면, 이 우화는 ‘자연에 대한 표상으로서의 혼돈’에서 질서를 만드는 우주 창조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는데, 시사하는 몇 가지의 우의가 흥미를 끈다.
① 여기서는 우주의 ‘소재=질료’는 하나의 신체이고, 우주의 창조는 그 신체에 차이(구멍)를 만드는(뚫는) 것이다. 게다가 차이를 만드는 것은 그 자신, 대상에 차이(분별)를 구축하는 기관―지각ㆍ감각기관―을 우주라는 신체에 나누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때문에 우주는 ‘차이를 구성하는 것’이라는 사태와 함께 성립하게 된다.
② 혼돈의 신체에 구멍을 뚫은 두 왕의 이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숙과 홀은 모두 빠른 것, 즉 속도를 나타내는 명사로서, 은유적으로 ‘우주의 존재’와 ‘시간의 차원’의 등근원성(等根源性)을 암시한다.
③ 우주 창조의 사건은 모두 증여와 보은의 맥락 속에서 생겨난다. 즉 혼돈의 신체에 차이를 나누어 주는 것은 두 왕이 혼돈에게 행한 증여이자, 혼돈의 환대에 대한 보답이다. 존재와 시간의 확립은 증여 관계의 수립과 연관된다.
④ 왕권에 관한 이야기로도 볼 수 있다. 그 근거로 장자의 응제왕편(応帝王篇)―왕의 이상적인 모습에 대해 서술한 부분―에도 이 우화가 수록되어 있다. 장자에 있어서 이상적인 왕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왕, 왕으로서의 존재가 부정되는 왕이다. 혼돈은 이러한 이상적 왕의 위상에 대응하는, 일종의 왕의 부정이나 부재를 대변하는 존재이다. 그에 대해 증여하는 자로서의 두 왕은 왕권의 적극적인 상태에 대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우의의 공존은 흥미롭게도 우연은 아니다.
다음을 유의해보면 좋을 것이다. 오오무로 미키오(大室幹雄, 1974)에 의하면, 노장사상에 있어서 우주의 기본적인 이미지는 우로보로스(ουροβóρος)―스스로의 꼬리를 물고 있는 뱀, 혹은 서로 상대편의 꼬리를 물고 있는 두 마리의 뱀―다. 우로보로스는 행위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행위의 대상이 되는 자기준거적 순환을 표상한다. 그렇다면 우화에서 혼돈에게 구멍을 뚫어 우주를 구성하는 두 왕은 혼돈 자신의 투사된 모습으로 볼 수도 있다.
결국 이야기는 혼돈의 죽음으로 끝난다. 이것은 우주의 구성으로 향하는 인간 정신의 숙명적 비극을 암시한다.
이 책은 스펜서-브라운이 [형식의 법칙]에서 구성한 수학에 대한 해제다. 즉 그의 수학에 내재된 가능성을 남김없이 전개하는 동시에, 행위와 존재의 실태에 대한 탐구를 수행하고자 한다. 나아가 사고를 확장하여 행위의 시스템으로서의 사회의 존립 기제와 사회가 사회로서 유지될 때 생겨날 수 밖에 없는 다양한 현상들을 지탱하는 여러 기제를 해명하고자 한다.
즉 수학의 필연적 전개와 그 해석을 통해 존재, 시간, 행위, 주체, 언어 등을 둘러싼 여러 사조들을 있을 만한 위치에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이 책에서는 수학을 둘러싼 사상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수학 그 자체를 하나의 사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독자는 이 수학의 전개에서 ‘헤겔적’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움직임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헤겔적인 체계에 대한 초극은 그 해당 체계의 내부에 깃들여 있는 가능성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도 알아야만 한다. 실제로 이러한 형태의 초극을 바따이유의 사고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바따이유는 철저하게 헤겔의 체계에 내재해서―예를 들면 바따이유가 말하는 ‘지고성(souveraineté)’은 헤겔이 말하는 ‘지배(Herrshaft)’의 번역이다―그에 따라 독특한 사회학을 구축하고 헤겔이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게 된다. 스펜서-브라운의 산법에 의해 예시되는 전개는 헤겔보다는 바따이유의 행보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이 책은 바따이유의 사회학에서 중심적인 과제인 ‘증여’ 현상에 관한 문제들의 재발견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시’의 조작에 관한 스펜서-브라운의 산법을 통해서 발견하는 것은 존재와 의미의 가능성(존재와 의미는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에 대한 고찰이다. 이 고찰은 ‘차이와 동일성’을 둘러싼 현대철학의 사고와도 연결된다. 동일성이나 의미를 ‘차이의 체계’로 해소하는 수법은, 구조주의를 그 일부로 포함하고 있는 ‘언어론적 전개’에서는 상투적인 것이다. 그러나 언어론적 전개에서는 질문되지 않은 것이 있다. 차이의 체계의 체계성, 체계로서의 동일성이다. 차이의 본원성, 일차성을 주장한다면, 체계의 동일성에까지 그것을 적용해야만 한다. 스펜서-브라운의 산법과 사상적인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언어론적 전개에서 유행하는 여러 사조보다는 오히려 하이데거의 철학이나 그것에 의해 촉발되어 전개된 여러 철학―말하자면 ‘구조주의’적 틀을 ‘탈구축’하는 데리다의 그것―이다. 마찬가지의 논의는 사회학의 기초이론 특히 니클라스 루만의 이론에서도 발견된다. 스펜서-브라운의 산법은 ‘차이’의 본원성, 일차성이라는 전제와 그 귀결에 대해 그 이상은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탐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탐구의 첫걸음은 어느 정도 현상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탐구는 현상학에서 ‘지평’이라고 불리는 경우―그것은 여기서는 ‘씌어지지 않은 울타리’라고 불린다―를 발견한다. 동시에 ‘씌어지지 않은 울타리’라는 설정은 현상학적 틀로부터 이탈하는 돌파구이기도 하다.
여기서 자기준거적 인지와 행위의 구조에 수학적 표현을 부여하는 작업이 또 다른 포인트이다. 수학적 결론을―수학 자체를 그 일부로 포함하는―인지와 행위의 영역으로 일반화함으로써 다양한 사고실험을 통해서만 직관적으로 포착 가능한 어떤 현상에 대해 엄밀하게 개념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면, 스펜서-브라운의 산법은 이른바 ‘해석학적 순환’―하이데거에 의하면 그것은 단순한 텍스트의 독해를 순환하는 형식이 아니라, ‘현존재’의 수행 양식을 전체로서 덮고 있는 기제다―에 걸맞은 수학적 표현을 발견한다.
독특한 산법에서 촉발된 탐구는 나아가 자기준거적 인지나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여러 계기의 해석을 지향하지만, 거기에서 신체의 본원적인 사회성과 조우하게 된다. 예를 들면 비트겐슈타인이 ‘수학’의 가능성 문제와 언어 게임의 문제―즉 사회성에 대한 문제―를 구별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탐구의 이 단계는 메를로-퐁티가 만년에 확립했던 ‘신체론’을 기초로 한다.
논의는 시간에 대한 물음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우선 일반적으로 놓치기 쉬운 시간에 대한 패러독스, 특히 맥타거트(J. McTaggart)에 의해 철저하게 파헤쳐졌던 시간이라는 현상의 패러독스에 대해, 이 패러독스를 거쳐 왔던 ‘분석철학’의 여러 논의를 검토하면서 함께 제시하고자 한다. 산법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시간에 대한 패러독스와 자기준거적 형식에 대한 논리적 패러독스의 관련성을 발견하게 한다. 결론은 베르그송적이며 또한 하이데거적이다. 특히 하이데거의 철학은 시간을 증여라는 현상(Es gibt)과 관계 짓는다는 점에서 우리의 이어지는 논의와 긴밀한 연대를 형성한다. 또한 시간과 자기준거적인 인지가 실제로 통합적으로 등장하는 문제 영역으로서 양자역학에서 이야기하는 ‘관측문제’를 다루어본다.
최초에 장자의 사상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했던 것에서도 암시되었던 것처럼, 동양의 여러 사조도 지금부터 확립하고자 하는 이론과 무관하지는 않다. 즉 존재의 실질을 ‘차이’로 해소하려하는 철저성에 있어서 스펜서-브라운의 수학은 나가르주나(Nāgārjuna, 龍樹)의 철학을 상기시킨다. 실제로 스펜서-브라운의 대수는 결론에 있어 나가르주나의 논리와 매우 유사한 구성을 지닌다.
또한 동시에 스펜서-브라운의 산법을 행위나 체험으로서 사회에 관한 구체적인 여러 현상을 해명하는 데 이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행위와 인지의 자기준거성의 실질을 신체의 사회성에서 구하고자 한다. 이로부터 자기준거성에 수학적인 표현을 부여하는 스펜서-브라운의 산법을 사회현상의 해명에 직접적으로 응용하는 것의 정당성이 주어진다. 특히 산법은 ‘자기조직성 self-organizing’이라고 총칭되는 ‘사회적 시스템’의 특성을 귀결하는, 기초적 미시적 과정을 표현하고 분석하는 강력한 무기다. 사회적 시스템의 자기조직성은 시스템의 구성요소인 행위의 특수한 재귀적 관여의 양식으로부터 나온다. 이러한 행위의 양식을 표현하는 수학을 여기서 제기하고자 한다. 행위의 이러한 계기에 대해 최근 강한 관심을 기울이는 연구자는 니클라스 루만(Niklaus Luhmann)이다. 그래서 우리는 루만의 이론을 자주 언급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루만 자신은 ‘자기조직성’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창출(autopoiesis)’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그래서 당연하게 여기서 제기하는 이론은 사회라고 불리는 행위의 질서에 대한 존립의 기제(틀)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이 때 몇 가지의 선구적인 작업과의 연계가 그려진다. 예를 들면 쟈끄 라깡의 정신분석학에 대해 스펜서-브라운의 산법을 사용한 우리의 논의는 명확한 관점을 제공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제기된 사회형성의 기본적인 기제에 대한 이론은 구체적인 사회현상에 대한 기술(記述)을 통해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작업을 철저하게 수행하기에는 충분한 여유가 없는 만큼, 별도의 작업을 통해 기대할 수밖에 없다. 다만 약간의 구체적인 민족학적 사례를 통해 이론에 대한 방증을 제공할 것이다. 예를 들면 특별히 단순한 사회에서 발견되는, 일견 필요성이 의심되는 의례의 의의, 그리고 그러한 사회에서 특히 넓게 분포되어 있는 상징 질서의 움직임에 대해 극히 짧지만 해명을 위한 시사를 제시하고자 한다.
우리가 여기서 제기하는 이론을 통해 오리구치 시노부(折口信夫)의 ‘외래인론(まれびと論)’을 대체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의외일까. 즉 우리가 스펜서-브라운의 독특한 수학을 해설하면서 제기한 이론은 오리구치 시노부가 ‘외래인’이라는 구체적 역사적 개념을 사용하면서 구축했던 이론의 보편적 원질을 설명해 줄 수도 있다. ‘국문학의 발생’ 등의 논고에서 오리구치가 탐구했던 ‘표현’에 대한 원리는 실은 동시에 사회라고 불리는 질서를 가져오는 원리(사회형성의 기제)이기도 하다. 오리구치의 논의에 있어서 ‘외래인’라는 설정은 ‘사실’에 대한 탐구와 ‘논리’적인 탐구가 직접적으로 융합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 전개하는 산법은 ‘사회 형성’에 부수적이라고 인정되는 다양한 사회 현상의 설명에도 이용될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일찍이 ‘근친상간의 금지’를, ‘언어’와 함께, ‘문화’를 자연으로부터 이탈시키는 경계축으로 이해했다. 이를 통해 근친상간의 금지의 이면에 있는 ‘여성의 교환’에 대한 분명한 대수적 모델을 제출한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근친상간의 금지가 이처럼 일반적인 사회현상일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이에 비해 우리의 이론은 ‘다른 공동체에 대한 여성의 증여’를 사회가 가장 기초적인 ‘자기조직성’을 발휘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일정한 효과로서 일관되게 이해했다고 자부하고 싶다. 그것은 산법이 기술하는 ‘전달 현상’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다양한 유형의 ‘증여’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증여’는 증여하는 ‘주체’에 위치할 때, 그것을 수행해야만 하는 동기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증여하는 ‘주체’에게 순수한 손실을 강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회에서 발견되는 현상이다. 그것은 대개 여성의 증여(혼자의 이동)와 의미 있는 상관성을 가진다. 증여는 특히 사회가 단순해서 원초적인 단계에 있는 경우(potlatch)에는 중요한 의의를 담당한다. 증여의 파격적인 중요성에 대해서는 확실히 이전부터 주목받았지만, 때로는 자기파괴에까지 이르는 증여의 존재 이유는 사실 설명되어지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오직 바따이유만이 직관을 통해 증여를 지탱하는 특수한 기제에 주목했다.
증여에 관한 산법의 설명을 행위의 접속적 연쇄 일반으로 확장할 수도 있다. 특히 베이츠슨이 민족학적 연구에서 얻었던 ‘분열 생성’의 관계는 가장 단순한 전달관계의 두 가지 전개 형태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산법은 ‘권력’ 같은 현상의 설명에도 이용될 수 있다. 즉 산법은 사회 속의 여러 개체가 특권적 초월성(초월적 타자)에 종속하는데 이르는 기제를 가시적으로 만든다.
예를 들면 그것은 ‘왕권’ 같은 집권적인 권력의 존립 기반을 해명하기 위한 단서를 제공한다. 일본의 ‘천황제’도 (무엇보다 천황제는 불완전한, 혹은 미완성의 왕권이지만) 왕권의 일종이다. 오리구치의 ‘외래인론’에서 외래인’이 천황의 원형을 제공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라는 주장에 새삼 주목하게 된다.
통상 발달한 왕권에서는 ‘법’이 뒤따르고, ‘법’에 의해서 왕의 권력은 보강된다. ‘법’이 성립하는 것은 사회가 어떤 종류의 조건을 충족시킬 때다. 스펜서-브라운의 지시에 대한 대수에서 등장하는 고차방정식(3차 이상의 방정식)은 이 조건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문제의 ‘조건’은 3차 미만의 방정식과 3차 이상의 방정식의 운동 편차로부터 미루어 생각된다.
‘왕’과 같은 초월성은 우리 시대인 ‘근대’에 이르면 완전히 극복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기간적인 중요성을 잃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확실히 어떤 면에서는 그러한 인정이 마땅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왕’으로 대표되는 초월성은 근대에도 보존(지양)되어, 근대라는 사회를 총체로서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된다. 근대를 움직이는 원리를 알기 위해서도, 근대가 스스로 파괴되어 가는 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이런 종류의 초월성을 지탱하는 기제를 보다 잘 해명할 필요가 있다.
끝으로 산법의 논리학적 해석을 제시하고자 한다. 우선 이른바 ‘전칭 명제’와 ‘특수 명제’의 기묘한 비대칭성이 고찰의 중심 대상이 된다. 그런데 이 문제는 논리학에 있어서 기술적인 문제를 넘어선다. 전칭 명제와 특수 명제의 비대칭성는 우주와 존재에 대한 우리의 일정한 태도를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존재의 실질을 차이(구별)에서 구하는 우리의 전제가 다시 보강될 것이며, 이에 따라 고찰은 여기서 전개된 이론의 뼈대가 되는 구상 자체로 회귀하게 된다.
이 책을 읽어나가는 데에는 몇 가지 주의사항이 있다.
독자 중에는 수학에 강한 거부감을 지닌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사용되는 수학은 결코 어렵지 않다. 물론 처음에는 어느 정도 난관이 있겠지만, 다른 것에 구애되지 말고, 연산에 기계적으로 익숙해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또한 수학적인 설명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 부분을 일단 읽고 진도를 나아가는 것도 크게 상관은 없다. 수학이 말하고자 하는 본질을 이해하는 것과 수학적 기술에 익숙해지는 것은 별개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잘 이해되지 않던 것도 뒤에서 반복하다 보면 이해가 된다.
수학적인 증명에서 까다로운 부분은 책의 맨 뒤 ‘증명’에 따로 수록했다. 본문에서 대응하는 정리가 나올 때 참조하기를 바란다. 증명이 필요한 대부분의 정리는 2장에 나온다. 급한 독자는 정리의 내용만 살피고, 우선은 증명을 읽고 본문을 통독한 다음, 증명을 다시 살펴봐도 좋을 것이다. 어쨌든 증명의 내용을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증명을 따라 해보기를 바란다.
‘부록’은 상당히 기술적인 부분으로 본문의 내용을 발전시키고자 상술했다. 부록 1절은 본문 2장을, 2절은 4장의 발전ㆍ확장이다. 2절은 1절을 전제로 한다. 3절은 8장의 설명에 사용되는 함수의 해설이다. 3절은 1절, 2절과 독립해서 읽을 수 있다. 부록은 각각 본문의 해당 부분을 읽은 뒤 참조해도 좋고, 본문 전체를 우선 읽은 후에 읽어도 좋다. 부록을 읽지 않아도 본문을 읽는 데 큰 지장이 없고, 부록만 따로 읽을 수 있도록 썼다.
인덱스에서는 중요하고 특수한 용어에 대해 그것의 정의가 나온 페이지나 또한 특히 그것을 이용한 논의가 진행되는 부분의 페이지를 적었다.
문헌 목록의 방법은 ‘소시오로고스’ 방식을 사용했다. 예를 들면 Luhmann[1984]이라고 한다면, Luhmann이 1984년에 발표한 저서 또는 논문이라는 뜻이다. 권말의 문헌표의 해당 부분을 보면, 그 저서나 논문의 제목 등에 대한 정보가 있다. 또한 Dummett[1978=1986:45] 등이 있는 경우는 [=]에 따른 숫자(1986)는 번역의 발표년도, [:] 뒤의 숫자(45)는 번역의 참조 페이지다.
또한 { }안의 숫자는 [형식의 법칙]의 번역(Spencer-Brown[1969=1987])의 페이지수다.
주석의 양이 많기 때문에 독자 입장에서는 대단히 불편한 것이다. 다만 변명하자면, 나에게 ‘주’란 대단히 편리한 방법이다. 문장으로 사고 표현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선형적으로 전개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하나의 선처럼 하나의 사고만이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의 사고는 자주 불가항력적으로 외부의 별개의 사고와 조우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직접적으로 본문에 반영하게 되면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어지러운 문장이 될 것이다. 주석은 이처럼 외부로부터 다가온 사고를 어떻게든 표현하고자 하는 고육책이다.
비로소 우리는 탐구의 첫걸음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2014년 10월 22일 수요일

관찰자 구별하기- Maturana에 대한 해석 하나

관찰자 구별하기: Maturana에 대한 해석 하나
Ernst von Glasersfeld
English


타자 없이 내 있을 리 없고, 내 없이 구별이 있을 리 없지.
장자, 4th Cent., B.C.(*)

"언어하기(languaging)"는, Maturana가 이따금씩 설명한 대로, 여타 것들 사이에서 방향잡기를 합니다. 그가 이 단어로 의미한 것은, 주의 돌리기이며, 그 결과로서, 타자들에 대한 개체 경험입니다; 이는 언어발달을 위한 필수 전제 조건으로서 "합의 영역들(consensual domains)"의 발달을 조장하는 한 방식입니다. 내가 이곳에서 시작한 ("언어하기") 문장은 기껏해야 Maturana 스타일의 핏기 없는 모방에 불과할지라도, 그것은 필시 Maturana 시스템의 중요한 한 측면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측면이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방식으로 반복해서 속출하는 순환성입니다.
내 해석으로, Maturana의 해설들 가운데 순환성에 주목할 때마다 절대 필요불가결한 것은, 이러한 순환성이, 우리 서양 철학의 가장 전통적 체계에서 말하는, 일종의 헛발 짚기 또는 실수가 아니란 점을 자신한테 부단히 반복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실수가 아니라, 자기-창발적(autopoietic) 모델에서 직접 생겨나는, 일부러 선택한, 바탕 조건입니다. Maturana에 따르면, 인지하기 유기체는 정보의 측면에서는 닫혀 있습니다. 그 유기체가, 그럼에도, 기술(記述)을, 말인즉, 개념들, 개념 형성 구조들, 이론들, 그리고 결국 자신의 세계상(世界像)에 이르기까지, 생산할 수 있다면, 그 유기체는 오로지 그 자신의 경험 영역(experiential domain)에서 상당한 추상 과정을 거치며 주워모은 쌓기 블록들을 사용함으로써만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을 뿐이란 점은 분명합니다. Maturana가 "모든 인지 영역(cognitive domain)들은 전적으로 그 유기체 자신이 만든 구별 조작들의 결과로 생겨납니다"로 표현한 이러한 통찰력은, 내 조우(遭遇)한 바로 첫 순간 그의 작업에 끌려들게 만든 점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1  
나는 Maturana가 자기-창발(autopoiesis)이라는 생물학 관념을 정식화할 때 바탕한 것들과는 전혀 다른 기저(基底) 고찰들에 바탕해서 같은 결론에 이르렀습니다.2 (약간은 축약된 그리고 이상화된) 내 자신의 경로는, 초반에는 Montaigne를 통한 소트라테스 이전 학파들, Berkeley, Vico, 그리고 Kant의 의혹들에서 실용주의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Ceccato의 "조작 학파"와 Piaget의 "발생론적 인식론"으로 이어졌습니다. 여기서는 이와 관계 없어 보이지만, Maturana의 해설들이 전통 철학에 전혀 준거하고 있지 않기에, 그의 몇몇 기본 주장들이 인습에 박힌 인식론 역사에서 돌발적으로 출현했던 일련의 사상들로 실증될 수 있음을 언급하는 것은 타당해 보입니다. 이들 일련의 사상들이 가끔씩 공식적 철학 분과에 염장(鹽臧)을 질렀지만, 그들은 지속적 효과를 얻지 못한 채 변경의 호기심으로 머물러 있습니다. 내 제안하는 바, 이러한 무시의 근거는 서양 관념의 전(全) 역사와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두 가지 필요 조건이 인식론적 기도(企圖)의 바탕으로 고려되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필요한 것은, 우리가 "참된 지식"이라 부르고 싶은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알기 주체와 독립된 것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 요구 조건은, 지식은 "물-자체"의 세계를, 진리 혹 사실 일치의 그 시대 양식으로, 재현(再現)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에만 진지하게 고려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모든 시대 회의론자들이 이들 두 요구 조건은 달성될 수 없는 것들임을 논리적 논증들을 빌어 설명했으며, 자신들을 한정지워 절대 지식은 불가능하다고 관찰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단지 몇몇 인물들만이, 한 발 더 나아가, 행하기 주체의 경험 세계에서 성취될 수 있는 것들에다 지식 개념을 자유롭게 적용할 수 있게끔 그 개념을 언급된 가능하지 않은 제약 조건들에서 해방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러한 발걸음을 내딪은 이들은 아웃사이더(局外者)들로 낙인찍혔고 그 덕택에 직업적 철학가들은 무시할 수 있었습니다.   


닫힌 경험 세계
여기서 과거 2-30년에 걸쳐 철학적 분위기가 왜 변했는가를 검토할 의도는 없습니다. 사실, 오늘날에는 지식의 상대적 관점 혹은 견해를 취하는 입장들은 허무주의나 여타 위험한 이단으로 낙인찍히지 않고도 방어될 수 있습니다.   
Maturana가 칠레의 반동적 독재자 피노체트에 대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막바지 20년간 살아남았다는 것은, 그한테는, 그리고 우리한테도, 행운입니다. 행운이라 말하는 것은, Maturana는 의심할 바 없이, 지난 세기, 철회된 바 없이 성취를 이룬 사상가들 가운데 한 명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에서, (유물론적이든 형이상학적이든) 실재론적 도그마의 권위주의적 지배를 확실히 뒤흔든 것은 물리학에 대한 관점들의 혁명 뿐만 아니라,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 "진실, 혹 진리들"에 대해 신뢰할 수 없음을 명백히 표명하는 흐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지식을 유기체에 의존하는 것으로 그리고 내부(internal) 조작들로 조성된 닫힌 회로의 산물로까지 설명하는 인지 모델들에 대한 혐오감(嫌惡感)는 결코 사라지고 있지 않습니다.
Maturana가 그의 강의 중에 종종 보여준 광범위한 개념적 흐름도, 좌측에는  객관성을 갖춘 설명이 (청중의 관점에서) 붕괴되는 바가, 우측에는 객관성 없는 설명이 주어집니다. 사람들이 그 자신의 기술하기에서 왼편을 택하든 오른편을 택하든, Maturana에 따르면, 그것은 정서의 문제입니다. 지식과 언어가 관련되는 한, 왼편을 택하면, 지식은 객관적 실재를 포착할 수 있고 언어는 그것을 지시할 수 있고 상징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신념에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Maturana가 생각하는 객관성 개념은 이러한 믿음에 의존하는 것입니다.3 Maturana 또한, 내가 그를 바르게 이해했다면, 이러한 신념을 공유하고 있지 않으며, 논의할 바 없이 자신을 오른편에 위치짓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객관성은 폐기되며 ("괄호쳐지며(put in parentheses)") 오로지 가능한 실재들이란 관찰자의 구별 조작들로 맺혀 산출된 실재들에 다름아닙니다.
나한테, 그 도식의 왼편은 단지 인습적(因襲的) 철학의 잘못된 경로들에 대한 설명만을 추가하는 것으로, 아울러 그와 같은 교훈적 기능들에 정당성을 주지는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나한테 의심할 바 없이, 이런 식으로 밖에 이해될 수 없는 까닭은, 객관적 실재, 세계 그 자체에 관한 지식의 획득 가능성에 대한 신념은, 생물학이나 자기-창발 없이, Kant가 말했던 대로, 회의론자들이 정식화한 논증들로 무너질 수 있습니다. 내 관점에서, 그때 남는 것은, 우리 지식(, 우리가 성공적으로 쓰고 있는 모든 개념 구조들)과 살아 있는 우리 자신들이 발견되는 곳인 "매체(medium)" 사이 관계를 대체할 새로운 설명의 필요성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설명은 입증이 결단코 불가능한 동형 가정(isomorphic assumption)에 의존하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Maturana가 생물학을 기반으로 "인지"라 불리는 모든 현상들을 기술하고 설명하고자 시도했음을 억기(憶起)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의 프로젝트가 성공적인 한, 그는 전통적 지식 이론을 무시하며, 자신의 생각하기 방식의 차이를 강조할 목적으로만 그것을 인용할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철학사에 진입하지도 않고 철학사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그는 나름의 인지 개념들이 변함없이 인습적 지식 개념에 묶여 있는 모든 이들한테는 오해될 위험을 무릎쓰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Maturana도 Piaget가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같은 종류의 잘못된 착상과 마주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종종 발견하곤 합니다. Piaget 또한 자신의 이론에서 인지란 객관적 실재의 지식을 얻는 수단이 아니라 능동적 유기체가 자신의 경험 세계에 적응하도록 돕는 수단이라는 점은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Maturana가 "조작들로 효과내기(operational effectiveness)"라 부른 것은, 내 구성론적 조망에서는, "살클수(viability)"에 상응하는 것이며, 철학사에서는 지난 세기 전환기에 실용주의자들이 띄어올린 슬로건 "참 혹은 진리란 작동하는 것이다(True is what works)"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Maturana의 "조작들로 효과내기"는 실용주의자들의 "기능하기"보다 그 응용에 있어서 더욱 성공적인 것입니다. Maturana의 정의에 따르면, 모든 조작들과 그것들이 내는 효과는 특정 관찰자가 만든 구별들로 결정된 기술 영역(discriptive domain) 내에 있으며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는 달리, 실용주의자들의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았지만) 일반화된 "기능하기"는, "기능"을 행하는 일정한 방식에 기반해서 "객관적" 세계와 접할 외관 혹 광경에 대한 유혹을 조장했습니다. Maturana의 모델이 그와 같은 어떤 유혹도 그 싹에서부터 꺽어버리는 것은, "효과내기"는 관찰자의 구별하기 활동으로 맺혀 산출된 경험 영역 내에서 내려진 판단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험 세계들과 그것들의 영역들은 행하기 관찰자만이 산출할 수 있는 것이라는 바는, 내 믿기로, 바로 Hans Vaihinger가 그의 탁월한 Die Philosophie des Als Ob (처럼 철학)을 썼을 때 부족했던 통찰력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결여로, 그는 진화론을 본체적(ontic) 실재로 이동시키지 않고는 그의 체계를 마무리할 수 없었습니다.4


관찰자의 탄생
Maturana가 쌓은 거대한 개념적 빌딩에서, 나한테, 가장 어려운 점들 가운데 하나는, 관찰자도, 마찬가지로, 더 바닥의 가정들 없이, 자기-창발적 유기체들의 상호작용들과 언어활동을 통제하는 생물학적 기본 조건들에 대한 그의 체계적 진술에서 유도될 수 있다는 그의 잦은 반복된 단언(斷言)이었습니다. 이러한 유도에 대한, 나 자신을 위한, 해석 구성에는 10년 이상이 걸렸습니다. 그것을 여기에 제시하지만, 그렇다할지라도, 그것은, 정말이지, (원본에 부합하는) 진짜임을 주장하지 않는 사적 해석이라는 엄중한 경고를 붙입니다. Maturana에 따르면, 모든 언어 활동 또는 "언어하기"는 살기 실천/관행 가운데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자신들을 그 가운데 잠겨 있는 살기 시스템들로 발견합니다. Maturana한테, 언어하기는 소식 또는 어떤 류의 "정보" 전달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상호 적응으로 조율된 행위들의 정렬에서 생겨나는 사회적 활동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행위 정렬 없이 기술하기는 있을 수 없으며, 그렇다면 행위자가 만드는, 그래서 의식에 이르는, 구별들을 위한 어떤 방식도 있을 수 없습니다. 구별들을 알아차리는 것을, 관찰하기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구별 제작자로서 관찰하는 것은, 자신을 의식하게 되는 것, 말인즉, 자각(自覺)에 다름아닙니다. 최근에 Maturana는 이를 아주 명확히 기술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구별한 것이 우리가 한 일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경우, 현대 물리학에서 그런 것처럼, 관찰자들로서 우리는 합리성을 부여받았고 그리고 이는 설명될 필요도 설명할 수도 없는 것임을 은연 중 당연시하는 가운데 조작 처리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관찰자들로서 우리 경험을 숙고할 경우, 우리 경험이란 우리 자신들이 관찰하고, 말하고, 또는 행하는 바를 알아차리는 것임을, 그리고 우리가 한 일에 대한 설명 또는 기술이란 우리가 한 일에 대해 그리하는 가운데 자신들을 알아차리는 우리 경험에서 부차적인, 말인즉, 파생된 것임을, 발견한다.5
이렇게 닫힌 원환에서 두드러진 점은, Maturana가 매우 자주 반복하고 있는, 말하자면, 관찰되는 것은 "그와 같이" 실존하는 세계의 사물들, 속성들 또는 관계들이 아니라, 실은 관찰자 자신이 만든 구별들로 야기된 결과들입니다. 따라서, 이들 결과들은 그 누군가의 구별하기 활동이 없다면 그 어떤 것이든 실존할 수 없습니다. 최초의 구성론자, Vico가 말한 바와 같이, 인지 주체는 사실들만을 알 수 있을 뿐이며, 그 사실들(영어: facts)이란 주체 그 자신이 만들었던(라틴어: facere) 항들입니다. 그렇기에, 관찰자는 그 자신의 기술하기 방식들과 도구들에서, 말인즉, 그 자신을 구별함으로써, 생겨납니다.
여기서, 바로, 나는 Descartes와 연결을 보지만, 그것은 Volker Riegas가 "Maturana와 대화"에서 언급한 데카르트의 이원론과 연결이 아닙니다. 의심을, Descartes는 그가 남기길 바랬던 확실한 진리들에서 미덥지 않은 모든 것들을 분리하는 도구로 사용함으로써 회의론을 패퇴시키고자 했습니다. 노고의 종착점에서 그가 발견했던 것은, 그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말하자면, 의심하기라는 반성 활동에 개입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이라는 점이었습니다. 회의론의 논증들에도 불구하고 본체적 실재에 이르는 방식이 발견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그의 탐구가 촉발된 이후, 그는 지체없이 그 자신의 의심하기의 확실성을 존재론적 원리로 정식화했습니다: cogito ergo sum.
Maturana한테, 이러한 정식화가 허용될 수 없는 것은, 바로, "sum"이 존재론적 뜻으로 실존을 단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Descartes가, Maturana가 분명히 보았던 것처럼6, 그가 그토록 확신했던 의심하기가 그 어떤 본체적 실재도 아닌 그 자신의 실험  세계에서 자신이 만들고 있는 구별들에 기대고 있음을 보았다면, 그때 Descartes는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입니다: "구별하기로서, 나는 나 자신을 관찰자로서 창조한다". 내가 Maturana를 이해했다면, 그는 이러한 데카르트 원리의 새로운 정식화를 쉽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내 조망에서 보자면, Maturana가 제공하고 있는 것은, 의식이 관찰자가 되기 위해서는 필히 올라가야만 하는, 말하자면, 사다리입니다. 그러한 의식의 기원과 관련해서 그는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 나는 "나 자신이 언어 속에 잠겨 있음을 발견한다"는, 나한테, 내가 나 자신을 발견할 깜냥을 갖고 있다는, 그리고 일종의 반성을 수반하는 이러한 깜냥은 내가 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에 속한다는, 뜻을 갖습니다.


재현과 기억
최근 Maturana가 Carmen Luz Mendez, Fernando Coddou와 함께 쓴 논문, "The bringing forth of pathology"에서, 언어와 다양한 형식의 대화들에 관한 절이 있습니다. 이들 형식들 가운데 두 가지는 꽤 자세히 기술되고 있습니다:
첫째, 대화들에 참여자들의 특성들에 관한 일치되지 않은 기대들이 수반되고 있을 경우, 성격 묘사 대화들이라 부르겠다. 둘째, 대화들에 그 이전 합의되지 않았던 참여자들의 행동들에 관련하여 성취되지 않은 기대들에 관한 불평들이 수반되고 있을 경우, 부당한 비난 대화들이라 부르겠다. 7 (p.l55)
Maturana가, 자신의 저작들 여러 곳에서, 아주 분명히 하고 있는 바가 단어 "representation"과 통상 고리짓는 개념을 그가 용인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라 한다면, 혹자는 여기 인용구에서 그가 "기대들"에 기반해서 대화들을 차별짓는 데에 처음에는 놀랄 수도 있습니다. 기대를 갖는다는 것은, 내 분석에서, 앞선 경험의 흐름에서 만들어진, 그러나 현재 실제하는 지각 장에서는 이용될 수 없는 구별들로 마음 속에 무언가를 조성할 목적으로 자신의 상상력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조성물들을 상상하는 데에는 과거 경험들의 하다못해 파편들이라도 자신한테 재현하는, 말인즉, 다시 떠올리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한편, 명백한 모순이 사라지는 것은, 영어 단어 "representation"이 여러 상이한 개념들을 나타내는 것으로 쓰이고 있음을 고려할 때입니다; 그 개념들 가운데 두 개는 독일어 단어들Darstellung과 Vorstellung으로 가리켜지고 있습니다.8 첫째 단어는 달리 의도된 명시적 지시항이 없을 때마다 영어 화자들 마음에 떠오르는 것입니다. 이 개념은 "사진/그림" 관념에 가까우며, 이처럼 "원본(original)"으로 범주화된 어떤 것에 대한 물리적 또는 형식적 방식으로 복제하는 과정를 수반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개념은 "개념적 구성물" 관념에 가까우며, 이에 대응하는 독일어 단어 Vorstellung은 Kant와 Schopenhauer 철학들에서 핵심적인 것입니다.
Maturana의 "representation"에 대한 혐오감은, 그가 유기체의 인지 영역에서 객관적, 본체적 실재에 대한 개념적 사진/그림 또는 복제들을, Kant와 Schopenhauer처럼, 배제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와 달리, Piaget의 의미로 재-현(re-presentation)들이란 이전 경험에서 구별된 항들의 반복 또는 재구성들입니다. Maturana가 1988년 10월 ASC 회의 토론 과정에서 설명했던 대로, 이와 같은 재현들은 또한 자기-창발적 모델에서도 가능한 것입니다. 그곳에서 Maturana는 경험 다시-살기(re-living)에 대해 언급했는데, 내 조망에서 보자면 이것은, 반성은 있을 수 없는 바로서, Vorstellung으로서 재현 개념과 부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각도에서, 이제 분명해지는 것은, 자기-창발적 유기체에서도 마찬가지로, "기대들"이란 아직 경험되지 않은 쪽으로 지금 투사되고 있는 경험의 재-현에 불과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고찰은 Maturana 이론 맥락에서 자주 답이 없는 채로 남겨져 있는 또 하나의 의문으로 이어집니다: 그것은 억기(憶起)를 가능하게 하는 기억(記憶)과 그 메커니즘에 대한 의문입니다. Maturana가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는 바처럼,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혹자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기술(記述)들의 수준에, 타자들이 아닌 바로 혹자가 일정한 구별들을 만들고 있다는 그 사실로 확정되는 수준에, 놓여져 있습니다. Maturana는, Heinz von Foerster가 그러한 것처럼, 인상(印象), 경험, 행위, 관계, 등등을 쌓아 보관할 수 있는 "저장소(storage)" 관념을 폐기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내 관점에서, 그럼에도 분명한 것으로, 다시-살기로서 무언가를 기술하고 있는 관찰자한테 불가결한 것은, 지시된 경험은 이전에 적어도 한번은 살아졌던 경험이라는 점; 그리고 이러한 반복을 실현하는 데에는 통상 영어에서 "억기하기(to remember)"라 불리는 역할을 하는 메커니즘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자기-창발적 유기체한테, 모든 요동, 모든 경험, 모든 내적 사건들은 유기체를 조성하고 있는 네트워크의 구조를 변화시킵니다. 물론, 이들 변화들은 모두 같은 종류가 아닙니다. 어떤 변화는 새로운 연결들을 형성하는 것으로서, 그래서 네트워크에 새로운 경로들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변화는 이미 존재하는 길을 "매끄럽게 하기" 또는 원활하게 하기라 부르는 것일 수 있습니다. 다시-살기를 언급하고 있는 관찰자는 최초로 생성되고 있는 경로를 보다 이전에 만들어진 연결들을 쓰고 있는 경로와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그 기술(記述)이 또 다른 유기체의 조작들과 관계되든 관찰자 그 자신의 조작들과 관계되든 상관없이, 꼭 필요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어떤 경험의 반복이 확인되는 것은, 오로지 관찰자가, 앞서 밟은 적이 있던 경로의 사용과 새로운 경로의 개척을 구별할 목적으로, 경험의 흐름에서, 아주 잠깐이나마, 한발 벗어날 수 있는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내 용어로, 그것은 관찰자가 반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Maturana는 그의 모델에서 유기체의 모든 행하기와 행동들은 전적으로 그 유기체의 구조와 조직이 결정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거기서는 그 어떤 반성도 필요치 않습니다. 하지만, 기술(記述)들의 수준, 기술될 수 있는 것이라면 오직 관찰자의 구별 조작들로만 산출되는 수준에서는, 내가 확인할 수 있는 한, 반성없이 해낼 수는 없습니다. 내 알기로, Maturana는 이에 관해 말한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관찰자가 간단히 특정 경험 영역에서 행하기, 관찰하기, 그리고 최종적으로 반성하기 주체로 구별함으로써 자신의 반성 능력을 생성시키고 있다는 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배제된 실재
Maturana 이론에서 관찰자의 기원에 관한 의문이 나한테 풀려지는 방식은, 전체 경험 세계는 혹자가 자신한테 만들어주는 구별들의 산물(産物)로 간주할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경험의 흐름 또한 그/그녀가 가진 구별하기로 자신을 관찰자로 구별해냄으로써 생겨난다고 하는 점을 계속해서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본체적 세계를 "아는" 깜냥을 지닌 본체적 주체로 "실존하는" 어떤 것의 기원/발생을 설명하고 있노라 사칭하는 형이상학적 답이 아닙니다. Maturana는 과학을 하고 있으며 과학적 방법으로 신중하게 해내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그의 모델에, 논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기에 정당화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 가정들 스리슬쩍 도입하는 것은 삼가고 있음을 함의합니다. 그는 이를 다양한 방식들로 표현했습니다:
... 대상들, 것 또는 관계들은 관찰자가 행하는 바와는 독립적으로 실존하는 것처럼, 그것들에 관한 진술이나 주장의 조작적 기저를 관찰자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9
그리고 Riegas와 인터뷰에서 그는 말했습니다: "초월적/선험적 실재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p. 53).
이러한 입장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Vico, Kant, Schopenhauer한테서, 그리고 최근에는 Richard Rorty한테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관찰자가 산출될 수 있는 주변 여건들을 디자인하는 혹 짜펼치는 경험 세계에 대한 생물학적 해석은 새로운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을 작업 가설로서 받아들이면, 경험 세계와 우리의 개념적 관계에 대한 광범위한 영향력을 지닌 귀결이 그 가설에서 나옵니다. 모든 과학적 모델에서처럼, Maturana가 "설명"하고 있는 것은 가설이 현상(現象)을 - 관찰자의 발생을 - 어떻게 다루는가 이지,  다루는가는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과학적 과정에 적합한 기준입니다. 물리학은, 이를테면, 무거운 대상/물체들이 "낙하"하는 일이 어떻게 생기는가에 대해 중력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천체(天體)들은 중력이 작용해 끌어당기고 있으며, 필시 공간 곡률로 환산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간이 본체적 세계에서는  휘어져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물리학자는 설명할 답을 갖고 있지도 않고 답할 필요도 없습니다 - 그는 그저 휘어진 공간에 대한 가정이 상당히 유용한 계산과 예측들을 가능하게 해주고 있다는 점을 관찰할 수 있을 뿐입니다. 자신들의 과학의 인식론적 토대들을 알아차리게 된 그러한 물리학자들이 이를 아주 분명히 말했던 것은, 그들도, Maturana처럼, 그들이 그들 과학에서 기술하고 있는 경험 세계를 맺혀 산출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들 자신의 개념들, 그들 자신의 구별 조작들이라는 바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토대 대신 일관성
서두에 나는 Maturana 이론에서 순환성을 언급했으며, 그때 내 조망에서 그 개념적 원환을 이루는 몇몇 섹트들을 명확히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내 조금이라도 성공했다면, Maturana에 반대하는 한 가지 이상 측면으로 형성된 주요 근거들 가운데 하나를 제거하는 것은 이제 쉬운 일일 것입니다. Gerhard Roth의 정확한 정식화를 사례로 들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순환적 이론의 착상은 토대의 그리고 시작의 문제를 일으킵니다. 관찰자, 그의 관찰 조건과 관찰 대상들(대상들의 구별, 시스템-부분들, 등등)을 차례차례 인식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하든 그래서 생명 시스템들에 대한 구성론적 이론에 이르게 되든, 두뇌 이론, 인지 이론,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관찰자 이론에 이르게 하는 생명 시스템들의 조직에 대한 객관론적 설명으로 시작하든, 마찬가지입니다. Maturana는 양자를 동시에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상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은, 구성론적 접근과 객관론적 접근 사이 모순으로 얽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10 (p.88).
토대의 문제와 시작의 문제는, 그를 비평한 이 논문 서두 페이지에서 이미 분명해진 바처럼, Roth의 견해에서는 서로 긴밀하게 서로 짜여 있습니다. 이것은 전통 지식 이론들을 다루는 수단으로는 적절할 수 있지만, 객관적 세계 그 자체에 대한 지식을 명확이 배제하는 인식론에 대한 비평 수단으로는 적절할 수 없습니다. 하여, 그와 같은 상호 관련은 나한테는 용인될 수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존재론적 토대의 결여는 상당수 Maturana 독자들이 말하고 있는 비판입니다. 이러한비판은 1711년 Vico의 De antiquissima Italorum sapientia(고대 이태리인의 지혜)에 대한 Giornale de' letterati에 익명의 평론가가 행한 주된 비판과 동일한 것입니다.11 Vico는, 그 비판인즉, 그의 철학에 대한 탁월한 해명을 산출했지만, 그것이 진리인 증명을 제공하지는 못했습니다. 지식이 독립된 존재론적 "실재"와 일치 혹은 대응해야 한다는 그 나름의 관념을 고의로 폐기한 구성론자한테, 그와 같은 증명에 대한 요청이 부조리한 것은, 그가 그의 철학의 핵심 <논증 명제>, 말인즉, <지식은 존재론적 세계를 반영할 수도 필요도 없는 것이며 다만 경험 세계에서 그것의 기능하고 있는 바로 그리고 일관성(coherence)으로 판단되어야 하는 것이다>라는 <테제>를 모순없이 제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Maturana는, Vico보다 더 명확하게, 지식은 자신을 "효과적 행위"로 나타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답변에서도 또한 그의 이론이 고의로 순환적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작점을 요구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원환은, 여타 것들 가운데서도, 시작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로 특징지어집니다. Maturana의 거대 체계에서, 모든 점들은 앞선 점들에서 생겨납니다 - 마치 알프스 빙하 위 짙은 안개 속에서 한 발자국 앞도 뒤도 볼 수 없는 채 한 발을 띄어 바로 앞에 한 발자국을 놓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리고 가끔씩 그와 같은 안개 속에서 몇 시간을 걸은 후 자신이 발자국을 따라 걷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과 같습니다. 어떤 특정 지점에서 원환을 시작했다는 사실은 더 높은 수준의 유리한 지점에서만, 안개가 걷히고 더 넓은 시야가 확보되는 경우, 지각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본체적 실재에 대한 우리 시야를 가리우고 있는 안개는 걷힐 수 없으며, 그 까닭은, Kant가 앞서 보았던 것처럼, 그 안개는 빠져나올 수 없게 만들어진 우리 경험하기 방식들과 수단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Maturana의 탐구와 같이 극도로 세심한 탐구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원환의 어디로 발을 들이든 관계 없이 그 경로의 끝에 이를 수도, 우리 발자국을 되밟아 시작에 이를 수도 없다는 점일 뿐입니다. 기껏해야, 우리는 필시 우리가 탐색을 시작할 때 전제로서 구별했던 점을 다시 부를(recalling) 수 있을 것입니다.    
말해진 모든 것들이 관찰자가 그 자신의 구별 조작들에 바탕해서 말한 것들이라면, 이것들은, 경험 세계의 특정 영역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유효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Maturana의 세계관에서, 외적 존재론적 토대들은 그 어떤 "절대적" 시작점도 요청될 수 없습니다. 이 양자의 요구들은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마나 한 짓입니다. 존재론적 의미에서 "토대 혹 바탕"이 전제로 삼고 있는 것은, 관찰자와 독립된 세계에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바입니다. Maturana는 그 가능성을 부인하며, 따라서 그 어떤 강제적인 외적 시작점을 지정하지 않은 것은 아주 일관된 바입니다; 그 까닭은 이러한 점이 바로 경험적 정당화 없이 유효한 것으로 여기도록 하는 "조건없는 형이상학적 원리"와 동등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위에 순수 논리로 거대한 이론적 빌딩이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비평가들의 오해는 Maturana가, 우리 가운데 여타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F학점을 받았던; 이천년 이상, 소박한 또는 형이상학적인, 실재론으로 갈고닦여진, 언어를 써서 그의 해설을 전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언어는 그가 그 모든 문법 형식들에서 본체적 실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가정을 함의하는 단어 "있다 또는 존재한다(to be)"를 쓸 수밖에 없도록 합니다. 그렇지만, Maturana에 대한 주의깊은 독자라면, 아마도 그가 말한 모든 것들은 우리를 그러한 불가피한 함의에서 벗어나도록 "방향짓기" 위해 의도된 것들임을 알아차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Maturana의 자기-창발적 이론에 대한 내 해석이 살클 수 있는 것인 한, 나는 일관성을 깨뜨리는 불일치를 그의 이론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내 관점에서 보자면, 일관성이 필수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모든 것을 포괄하는 철학 체계의 평가 기준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이를테면, Leibniz의 단자론(monadology)은 일관성에 관해서는 흠 잡을 데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적용될 수 있는 세계관으로서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최종 분석으로, Maturana 작업의 가치는 성공 여부에, 말인즉, 그것이 현재 우리 경험의 실천/관행에 응용되고 있는 바에서 그리고 계속해서 그럴 수 있는 것으로 판명되는 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한테는 "정서적으로" 보다 중요한 것으로, 우리는 그가 최근에 내놓은 윤리의 기원/시작들이, <위험에 빠진 우리 혹성에서 합의 영역은 창조될 수 있다>는 희망의 성취를 도울지 여부를 지켜보아야 할 것입니다: 인간 문화의 생존을 가능하게 할 협력에 관한 합의를 도처에서 관행으로/제도로 확립시킨 영역 말입니다.
                    


          미 주
(*) Fung Yu-lan, Chuang-tzu: A new selected translation. Shanghai: The Commercial Press, 1933. Quoted by Alan Watts in The Watercourse Way, Pantheon Books, New York, 1975, p.52.
1. 차이가 하나 있다면, 나한테는, 구별짓기 활동과 더불어 관계짓기 활동이 생겨나고 그것 없이 더 복잡한 개념적 구조들은 있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모든 알기가 구별들 만들기로 시작된다는 점은 고대 중국 철학자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 George Spencer Brown 또한. (cfr, 그의 <<Laws of Form>>, London: Allen & Unwin, 1969) 말했습니다.
2. Cf. my "Wissen ohne Erkenntnis", in Gerhard Pasternak (Ed.), Philosophie und Wissenschaften: Das Problem des Apriorismus, Frankfurt/Bern: P. Lang, 1987.
3. Maturana 텍스트에서 객관성은 단독 개체의 "주관성"의 반대 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고전 철학의 의미로, 말인즉, 더도 덜도 없이 또는 경험자로 야기된 왜곡 없이 "그 자체로서" 세계를 재현할 의도 또는 요청을 나타내는 것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4. Hans Vaihinger, Die Philosophie des Als Ob. Berlin: Reuther & Reichard, 2nd edition, 1913. 그의 뛰어난 저작 서문의 "Preliminary Remarks"에서, Vaihinger는 실용주의를 비난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그의 말로, 실용주의가 "삶을 견디도록 돕는 것은 무엇이든" 참된 것이라 혹은 진리라 부를 때, "최악의 공리주의"(p. XI)로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약 300페이지를 넘긴 후, "… 오늘날의 일단의 범주들은 그저 자연선택과 적응의 산물에 불과한 것들이다". 그는 Kant가 사용한 의미로 "범주들(categories)"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진술로 그는 분명히 다윈의 진화론을 존재론적 실재로 이동시키고 있으며, "범주들", 말인즉, 경험 세계에 대한 우리들 개념화의 핵심 요소들을 생존의 "공리론적" 도구들로 바꾸고 있습니다
5. Cf. Humberto Maturana. "Ontology of observing: The biological foundations of self-consciousness and the physical domain of existence". Texts in Cybernetic Theory, American Society for Cybernetics, 1988; p.36.
6. Cf. Humberto Maturana, "Reality: The search for objectivity or the quest for a compelling argument". The Irish Journal of Psychology, 1988, 9 (1), p. 26.
7. Carmen Luz Mendez, Fernando Coddou & Humberto Maturana. "The beginning forth of pathology", The Irish Journal of Psychology, 1988, 9 (1), 144-172.
8. 단어 "representation"에서 야기되는 개념적 뒤죽박죽에 대한 추가 논의는 in C. Janvier가 편집한 << Problems of representation in the teaching and learning of mathematics, Hillsdale, New Jersey: Earlbaum, 1987>>에 수록된 내 "Preliminaries to any theory or representation"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나는 이러한 사례로 독일어가 더 풍요롭고 더 정확한 언어라는 결론은 아주 잘못된 것이라 언급하고 있습니다. 상이한 개념들의 우연의 일치는 또한 다른 방향에서 찾아질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영어 단어들, "to isolate"와 "to insulate"는 분명히 명시할 수 있는 개념적 차이가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하나이자 똑같은 독일어 단어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9. Humberto Maturana, "Reality: The search for objectivity or the quest for a compelling argument". The Irish Journal of Psychology, 1988, 9 (1), p.30.
10. Gerhard Roth, "Wissenschaftlicher Rationalismus und holistische Weltdeutung". In Gerhard Pasternak (Ed.), Rationalitaet und Wissenschaft, (Vol. 6), Bremen: Zentrum Philosophische Grundlagen der Wissenschaften, 1988.
11. Vico's De antiquissima was published with an excellent Italian translation by Francesco Saverio Pomodoro and the discussion in theVenetian journal by Stamperia de' Classici Latini, Naples, 1858.



        감사
나는 Heinz von Foerster한테 이 논문의 초고에 대한 쓸만한 비판적 논평들로 신세를 졌습니다.

        초록/E. Von Glasersfeld
Humberto Maturana는, Plato 또는 Leibniz에 견줄만한, 폭넓고, 완벽한, 설명 체계 구성에 착수하고 있는 몇몇 저자들 가운데 한 명입니다. 그의 "자기-창발적(autopoietic)" 접근은 또한, 관찰자 자신한테 세계관을 제공한 (조직 원리와 규칙들로서) 일단의 이전 방법들을 가리키는 관찰자의 기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나는 Maturana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알아차림/自覺을 얻고 있는 것(entity)으로서) <res cogitans>의 탄생을 보는 방식을 따르고자 합니다.. 내가 입증하고자 하는 것은, 구별하기라는 기본 활동은 예외없이 관찰자를 관찰된 것에서 분리하는 구별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 적어도 이러한 해석자한테는 - 능동적 의식, 말인즉, 구별하기 에이젼트로서 활동하고 있는 어떤 것의 기원은 변함없이 애매한 채로 남게 된다고 결론짓습니다.

 http://hompi.sogang.ac.kr/mkyang/O/cognition/maturank.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