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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16일 토요일

한자의 서체 발전과정 -篆․隸․楷․行․草

漢字 서예는 篆․隸․楷․行․草 등 5체를 완비한 예술
[2009-05-18, 15:52:03] 온바오  조회수:10514
한자의 서체 발전과정
한자는 고대 문자인 전서(篆書)를 비롯하여, 한나라 때의 예서(隸書), 일점·일획을 정확히 독립시켜 쓰는 해서(楷書), 해서를 약간 흘림글씨로 쓰는 행서(行書), 그리고 이들 글자의 일부 자획을 생략하여 흘림글씨로 쓰는 초서체(草書) 등 5체를 완비하고 있다. 

서체발전과정이 곧 중국서예사이며, 그 근원과 특징을 알아야 서예를 제대로 공부할 수 있다. 

(1) 전서(篆書)
전서는 진한 이전의 여러 서체를 통칭하는 말이다. 전서는 크게 대전(大篆)과 소전(小篆)으로 나누고, 100년 전에 발굴된 은상 시대의 복사문(卜辭文)도 대전으로 분류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 

한자의 기원에 대한 논의는 일반적으로 중국 고대 제왕시대(帝王時代) 황제(黃帝)의 사관(史官)이었던 창힐이 새나 짐승의 발자국을 보고 한자를 만들었다는 전설이 중심이지만, 이는 중국의 여러 성인창조전설(聖人創造傳說)의 하나에 불과하다.

고대 삼황(三皇)의 하나인 복희씨(伏羲氏)가 팔괘(八卦)와 書契를 만들어 정치에 사용했다는 전설에서, 이 팔괘와 서계를 한자의 기원으로 보기도 하지만, 이 역시 복희씨가 용의 몸에 사람 얼굴을 하고 있는 신화 속의 인물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전설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한자의 역사를 기원전 3000년 이전으로 올라가는 것으로 보는 객관적 학설은 고고학(考古學)에서 발굴로 확인된 갑골문의 유물을 통해서 가능했던 것이다.

甲骨文한자 서체의 변천은 회화적 요소가 중심이었던 갑골문에서부터 역사적인 시대 변천에 따라 많은 변화를 이루게 되는데, 큰 변화를 살펴보면 초기의 갑골문과 금문(金文)에서 전서(篆書)로 변화된 시점과 전서에서 예서(隸書)로의 변화, 또 예서에서 초서(草書), 해서(楷書), 행서(行書)와 같은 현재 사용되는 서체로 변화된 시점을 큰 줄기로 볼 수 있다. 

또한 고대 한자 서체가 회화적 요소라는 기본 특징을 지니던 것이 점차 회화적 요소가 줄어들면서 문자로써의 기능이 강조된 기호적 요소로 발전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甲骨의 '甲(갑)'은 거북의 배 껍질의 의미이고, '骨(골)'은 소 같은 짐승의 어깨뼈나 넓적다리 뼈 같은 것이다. 기원전 1,500년경부터 1,000년 무렵까지 있었던 중국 고대 商나라는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정치형태를 지니고 있었는데, 전쟁 등의 국가 중대사부터 모든 행위와 현상을 제사장이 天神이나 自然神, 혹은 祖上神에게 이 갑골을 이용해 점을 쳤다.

점을 치는 방법은 주로 갑골에 구멍 같은 흠집을 내고 그것을 불에 올려놓고, 열로 인해 그 흠집으로부터 갈라진 방향에 따라 길흉(吉凶)의 판단했다. 주로 점을 친 후에 그 결과를 갑골에 기록을 해 놓았기 때문에 갑골문은 "복사(卜辭)"라고도 불리고, 칼로 새겨놓았기 때문에 '계문(契文)'이라고도 한다. 

또한 1899년 홍수 때 처음 발견된 갑골문은 그 지역[현재 하남성(河南城) 안양현(安陽縣) 소둔(小屯)]이 은(殷)나라의 도읍지였기 때문에 '은나라의 옛터'라는 의미로 '은허(殷墟)'라고 불리고 그 문자를 '殷墟文字'라고도 한니다.
 
갑골은 그 자체가 아주 딱딱하기 때문에 그 표면에 글자를 새기기 위해서 청동(靑銅) 같은 금속이나 경옥(硬玉) 같은 단단한 칼날을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래서 갑골문은 서체가 가늘고 긴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한 갑골문은 원시 문자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 회화적 요소가 강한 특징이 있다. 사물의 모양을 그대로 묘사해 문자화했기 때문에 상형문자(象形文字)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주로 단독적인 독체자(獨體字)가 주를 이루고 있다.

현재 대략 4,000여 자 정도를 확인했는데, 아직 상당수의 글자는 해독을 못하고 있고, 특이한 점은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동일한 글자도 그 모양의 차이가 상당하게 나타나고 있다.

갑골문은 현재에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문자학(文字學)뿐만 아니라 고대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소중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한자 이해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갑골문의 서체를 처음 접하면 현재의 한자가 어떻게 해서 만들어 진 것인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결국 한자 이해의 측면에서 갑골문으로부터 서체의 변화를 접하면서 보다 분명한 한자의 자원(字源)을 확인하는 것이 한자를 바르게 이해하는 첩경이 될 것이다.

金文 
갑골문(甲骨文)과 함께 한자의 원형을 찾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서체인 금문(金文)은 갑골문보다 폭넓은 지역과 많은 유물로 인해 문자학의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광범위한 지역에서 출토된 성격으로 인해 다양한 서체(書體)의 형태가 나타나고 있다. 금속에 주조된 특징으로 인해 금석학(金石學)의 시원과 함께 원시 한자 서체의 또 다른 한 축을 나타내게 되고, 고대 주(周)나라의 다양한 문화까지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金'은 고대부터 금속의 대표적 성격을 띠고 있는 글자이기 때문에 금문의 '金'은 중국 고대 청동(靑銅)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로 금문은 청동기를 주조할 때 주물 틀에 새겨 넣은 글자들인데, 이로 인해 금문의 다른 명칭으로 청동기의 대표적인 유물인 악기류(樂器類)의 鐘이나 예기류(禮器類)의 솥[鼎]의 이름에서 유래해 종정문(鐘鼎文)이라고도 한다.
 
시기적으로는 중국 고대 周나라 시절의 유물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지만, 그 이전 왕조인 은(殷)나라에서 사용된 금문이 발견되기도 하였고, 후대 鐵器 시대인 漢나라 때까지 금문의 형태를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거의 1,000년에 가까운 사용 시기로 인해 다양한 서체의 특징을 보이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갑골문보다 더 원형에 가까운 자형을 나타내고 있는 것들도 있다.

아울러 금문이 새겨진 器物에는 한 글자만 주조된 것부터 몇 백 글자가 주조된 기물까지 발견되었는데, 새겨진 내용으로는 주조된 청동 기물의 축복을 기원하는 내용을 표시하거나 주조된 연원이나 기물의 주인 등을 표시했고, 또한 전반적인 당시의 상황인 전쟁이나 제례(祭禮), 계약 등을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정치나 사회, 문화 등을 이해하는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금문은 청동기를 주조할 때 주물의 틀에 글자를 새기는 것이었기에, 주조되어 완성된 器物에 명확하게 글자가 보여 지기 위해서는 새기는 글자의 크기가 크고 굵어야만 했다. 그래서 가늘고 긴 서체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던 갑골문과 비교하면 금문은 넓고 굵은 서체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오랜 세월동안 광범위한 지역에서 사용되었던 이유로 인해 동일한 글자가 여러 모양의 형태로 나타나는 異體字가 많은 특징을 보이고 있다.

또한 갑골문에 비해 금문은 회화적 요소로부터 점차 문자로서의 특징을 지닌 기호적 요소가 많이 나타나 점차 문자의 틀이 발전되어 가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주로 두 개 이상의 개념으로 분석이 가능한 합체자(合體字)가 많아지고 있다.

무겁고 가공하기 어려운 石器에서 벗어나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만들어진 청동기의 기물들은 획기적인 발명이었으며, 그 기물을 주조할 때 틀에 새겨 넣은 금문은 당시대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역사적 자료임과 동시에 문자학의 또 다른 양상을 나타내고 있는 특징을 보여 준다. 특히 西周 후기부터 자형의 획이 곧은 직선으로 변하면서 가늘어지는 문자로서의 발전 양상을 보이는 것을 통해 한자의 새로운 발전 양상을 확인하게 된다.

大篆의 대표적인 작품은 대전 자체(字體)의 가장 구체적인 작품이며, 중국역사상 가장 오래된 각석으로 북 모양으로 다듬은 돌에 새겨져 있다하여 이름 지은 石鼓文이다. 돌의 수는 10개이고 표면에 700여자가 실려 있으나, 판독이 가능한 글자 수는 270여자, 현재 통용되고 있는 글자 수는 470여자 정도이다.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하나, 동주의 위열왕 4년(기원전 481)에 진나라에서 만들어졌다고 하는 설이 유력하다. 

석고문은 4언구로 현재 내용이 완벽하게 이해되어 있지는 않지만, 대체로 전국시대의 진나라 군주가 사냥을 하는 것과 영토의 개척으로 도읍을 세운 것, 제사에 관한 일들이 기술되어 있다. 석고문은 금문과 소전의 중간에 속하고 금문보다 잘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소전보다 방편(方遍)하고 복잡한 것이 있고 자체는 대체로 정방형을 이루고 있다. 

小篆
이전의 서체에서 획일적인 변화를 보인 전서(篆書)는 인위적인 수정 작업으로 인해 탄생된 서체였기에 통일된 특징을 갖추기 시작한 최초의 문자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문자학의 연구 성과가 이룩되기 시작한 허신의《설문해자(說文解字)》의 기본 제시 자형을 소전(小篆)으로 사용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한자 연구의 오랜 전통과 보편성을 지닌 서체라 할 것이다. 

일반적 한자 구분의 큰 구획인 고문자(古文字)의 마지막 해당 서체인 전서(篆書)를 통해 통일된 서체의 전형을 엿볼 수 있다.
 
본래 전서(篆書)는 대전(大篆)과 소전(小篆)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전서의 대표격은 小篆을 주로 말한다. 殷代와 周代의 甲骨文과 金文의 사용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졌지만, 周나라 말기의 춘추시대(春秋時代)와 전국시대(戰國時代)를 거치면서 각 지역별 문화의 특성이 독립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문자 역시 각 지역의 국가별로 개별적 특징을 보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진시황(秦始皇)의 전국통일로 인해 모든 문화와 문물의 인위적 통일까지 이어진다. 역사에 등장하는 진시황의 문자통일(文字統一)이라는 것이 바로 小篆의 서체로 획일화시킨 것이다. 사료에 의하면 진시황이 丞相이었던 李斯 등이 이전에 흩어져 있던 복잡하고 불편한 문자들을 통일시켰다.

특이한 점은 진나라가 통일 이전에 사용하던 주나라 선왕(宣王)때 태사(太史)인 사 주(籒) 가 만들어 주나라 말기 전국시대까지 사용하던 문자를 그대로 계승한 것이 아니라 이것을 바탕으로 새롭게 개량해서 만들게 되었는데, 통일 이전 사용하던 점과 획의 범위가 복잡한 조형미를 지녔던 문자를 대전[大篆 - 혹은 주의 태사가 만든 글이라는 의미로 주문(籒文) 이라고도 함]이라 하고, 통일된 새로운 문자를 小篆이라 한다. 하지만 진의 흥망과 함께 운명을 같이 했던 소전이었기에, 사용시기는 그리 오래지 않고 곧 새로운 서체인 예서(隸書)가 등장하게 된다.

앞서 소전(小篆)의 특징이 인위적인 통일이라는 점으로 인해 서체가 거의 획일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또한 소전은 자형 자체로 보더라도 이전의 갑골문이나 금문보다 상당하게 상형(象形)의 회화적 성격을 탈피하고 문자의 기호적 성격으로 전환하고 있는 특징을 보인다. 

이와 같이 자형의 일치로 인해 하나의 완전한 글자들로 형태를 지니게 된 소전은 현재까지 문자학(文字學) 연구의 기본적인 자형으로 이어오고 있다. 

소전의 대표적 작품은 태산각석(泰山刻石)과 낭아대각석(瑯牙臺刻石)이다.
태산각석은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후, 동방의 군현을 순회하면서 세운 송덕비의 하나로 낭아대각석과 더불어 소전의 표준 이라 불릴 만큼 유명하다. 이 각석을 탁본해 본 결과 2백 23자의 전문을 얻을 수 있었는데, 명시대의 탁본에는 29자만 남아 있었고, 청조 때는 화재로 파손되어 그 패석에 겨우 10여자가 보일 뿐이었다. 

진시황제는 태산각석을 세운 해에 산동의 낭아에 올라가 제대를 쌓고 돌에 각하여 진의 덕을 기리었다. 이 각석의 글자는 뭉개지고 떨어져나가 겨우 탁본으로 10행정도 전해지고 있다. 이 비석의 패석은 북경 박물관에 일부 소장되어 있다. 이사의 서(書)로 전해지며, 태산각석이 정제된데 비해 용필이 좀 부드럽고 좌우 상칭의 균제가 잘 잡힌 힘찬 표현의 장중감을 준다.

(2)隸書
古文字들과는 다른 차원의 획기적으로 새로운 한자의 자형(字形)이 성립된 예서(隸書)는 秦나라의 군현제(郡縣制) 실시라는 정치적인 배경이 이끌어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행정적 실용성이 중시되어 보다 빠르고 쉽게 문자를 쓰기 위해 고안되었던 것이다. 상형(象形)의 회화적 요소를 벗어버리고 문자의 기호적 요소가 완성되어 현대 한자의 출발점으로도 볼 수 있는 예서(隸書)의 전형을 살펴 보자.
 
진시황은 중원을 통일한 뒤 군현제를 실시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었다. 이에 따라 공문서 등이 증가하면서 전서를 간략하게 만든 새로운 서체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 때 만들어 진 것이 예서이다. 

기록에 보면 예서는 장막(程邈)이 만들었다. 그가 죄를 지어 감옥에 있을 때 십 년을 연구하여 예서 3,000자를 지어 진상하였는데 진시황이 좋게 여겨 어사를 시켰다. 예서란 말은 진대의 복역수를 도예(徒隸)라 하였는데 정막이 그러했으므로 예(隸)자를 따서 지었다. 예서에서 파책이 없는, 곧 전서와 근접한 것을 고예(古隸)라 하고, 파책이 있는 것을 팔분(八分)이라 한다. 예서는 전한과 후한에 걸쳐 끊임없이 발달하였다. 

조전비와 예기비 같은 유려형(流麗型), 장천비 같은 방정형(方整型), 하승비(夏承碑)같은 기고형(奇古型)들로 분리되며, 그 수많은 서적(書蹟)은 이루 나열할 수 없을 정도이다. 예서의 자형은 납작한 것이 보통이다. 

漢나라 중기에 채옹(蔡邕)이라는 인물이 만들었다는 팔분(八分體)체는 篆書의 요소를 완전히 탈피한 예서의 틀을 완성시킨 서체인데, 특히 장식미를 더한 양식의 서체로 후한시대에 많이 사용됨으로 해서 예서와 해서의 과도기적 단계의 서체라고 보기도 한다.

서체뿐만 아니라 경전 해석 연구에도 큰 의의를 둘 수 있는데, 기원후 100년경에 완성된 허신(許愼)의《설문해자(說文解字)》에도 이 고문경서의 서체를 고문(古文)이라 제시하면서 기본 소전(小篆) 자형과 함께 인용하고 있다. 결국《설문해자》는 당시 규격화되어 가는 서체[예서]로 인해 정확한 한자의 연원을 밝히려는 의도와 경전의 바른 해석을 도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와 함께 또 다른 획기적인 변화는 한자들마다 각기 복잡한 모양의 서체를 유사한 모양이면 공통의 모양으로 간략화 시켜 실용성을 더한 것인데, 이 부분은 후대에 한자의 자형만으로 의미를 이해하는데 다소 부적절하거나 난해한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다. 결국 小篆과 같은 古文字의 자형이 한자의 자원을 이해하는 중요 수단이 되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상형적 회화요소의 고대문자 틀을 벗고 왕성한 새로운 문자의 규격을 이루게 된 예서의 출현은 이후 한자 자형의 전형을 제시하게 된다. 문자의 틀이 완성되어 급속도의 서체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예서의 가치는 이후 書藝라는 개념까지 도출하게 된다.

실제 이후에 등장한 서체의 규범이라고 하는 해서(楷書)의 자형도 예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보면 이미 지금으로부터 대략 2000년 전에 한자 자형의 전형은 예서에서 모두 갖추어졌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은은한 고풍(古風)의 예술미(藝術美)를 느낄 수 있는 서체로 현대까지 많은 사람들이 애용하는 서체로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예서의 대표적인 법첩은 예기비(禮器碑), 을영비(乙瑛碑), 사신비(史晨碑), 조전비(曺全碑), 장천비(張遷碑) 등이 있다.

(3)楷書
서체의 변천사에서 해서체(楷書體)부터는 문자학적 논의보다는 예술적 논의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특히 정서(正書)나 진서(眞書)의 명칭으로도 불리는 해서체는 현재까지 서예(書藝)의 기본 교습 서체로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한 문자학적 논의보다는 예술적 경지에 이른 당대의 대표적인 서예가(書藝家)의 면모를 살펴보는 것이 해서체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중국 후한(後漢)시대 말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해서(楷書)는 '楷'자가 '본보기'나 '모범'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듯이 표준으로 삼을 만한 서체라는 의미이다. 위(魏)·진(晉), 남북조(南北朝)시대에 그 기틀이 완성된 해서(楷書)는 동진(東晋)의 유명한 왕희지(王羲之)와 함께 당(唐)나라에 들어서 구양순(歐陽詢)이나 안진경(顔眞卿) 등의 걸출한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그들 이름의 서체라는 명칭이 생길 정도로 서체의 전형이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해서(楷書)가 현재까지 표준 서체로서의 면모를 지닐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인물들에 의해서 완성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예서(隸書)에서 발전된 해서체의 가장 커다란 특징은 예서체(隸書體) 자형의 전체 윤곽이 다소 가로로 퍼진 형태라면, 해서(楷書體)는 다소 세로로 퍼진 형태를 지니고 있는 점이다. 이는 서체가 보다 부드러우면서도 명확한 양식으로 발전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인데, 역시 유명한 서예가들의 서체 전형으로 인해 정착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모범적인 표준의 서체로 정착된 해서(楷書)는 현대까지 한자 교본의 전형으로 이어오고 있다. 이는 초서(草書)나 행서(行書)의 지나친 파격을 극복하고 점(點) 하나 획(劃) 하나라도 정확하게 독립시켜 씀으로 해서 필사에 다소 불편했던 예서(隸書)의 지위를 넘겨받은 서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해서(楷書)는 바른 한자(漢字) 자형의 전형으로 본보기 삼을 수 있는 서체이기에 앞으로도 방정한 예술미와 함께 한자 교습의 기본 서체로 그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 작품으로는 안 근례비(顔勤禮碑),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天銘), 장맹룡비(張孟龍碑) 등이 있다. 
 

(4)行書몇 천 년간의 한자(漢字)의 역사를 볼 때 다양한 문자(文字) 형태를 가지고 발전되어 왔지만, 역시 문자가 지닌 기본적인 특징인 효율적 사용을 위해서는 단순한 자형(字形)과 편리한 필기(筆記)의 가치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러한 단순성과 편리성을 함께 지닌 특성을 가지고 일반인이 주로 사용하는 서체가 바로 행서(行書)이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글자들의 모양에서 다양성과 변화의 아름다움까지 느끼게 만든 행서를 알아보다.

규격체로 인해 비능률적인 해서(楷書)의 단점과 지나친 간략화로 난해한 초서(草書)의 단점을 함께 보완하고자 생겨난 서체가 행서(行書)이다.

발생시기에 대해서 흔히 행서(行書)가 해서(楷書)와 초서(草書)의 중간 형태를 띠고 있고, 일반적으로 초서(草書)가 서체의 종류 가운데 가장 흘려 쓴 형태이기 때문에 복잡함에서 단순함으로, 곧 규격체에서 흘림체로 변천하는 과정으로 볼 때 초서가 가장 마지막 단계의 서체(書體)로 보여, 발생 시기도 초서가 가장 후대의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후대의 서체는 행서(行書)이다.

후한(後漢) 말기부터 시작되어 진(晋)의 왕희지(王羲之)가 등장하면서 확고한 틀이 완성된 행서(行書)는 해서(楷書)의 필기체(筆記體) 형태를 띠고 있어 초서(草書)처럼 획을 연결해 쓰면서도 지나친 간략화를 하지 않아 쓰기 쉽고 보기 좋은 두 가지 양상을 모두 해결했다. 특히 서예의 대표적 작품으로 꼽는 왕희지의《난정서(蘭亭序)》는 행서의 특징인 표현의 다양성과 형태의 변화감을 만끽할 수 있는 최고의 작품으로 전해진다.

행서의 기본적인 특징은 해서와의 차이점에서 쉽게 알 수 있는데, 해서(楷書)가 쓰는 방식이 획을 정성들여 헛된 부분이 나타나지 않게 쓰는 감추는 방식인 '장봉(藏鋒)의 필체'인 반면에 행서(行書)는 자연스럽게 필기하는 방식이어서 획의 연결선 등을 드러내는 방식인 '노봉(露鋒)의 필체'를 지니고 있다.

서체(書體)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서체의 변화 방향은 자형(字形)의 복잡함에서 간단함으로, 또 필기(筆記)와 이해의 난해함에서 편리함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형의 간단함과 필기 이해의 편리함을 모두 어느 정도 소화해 낸 서체가 바로 행서(行書)이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서체들 가운데 예서(隸書)나 초서(草書)는 주로 예술적 가치로 사용되고, 해서(楷書)는 활자체의 대표 격으로 쓰이는데 비해서 행서(行書)는 보통 사람들의 친근한 필기체로 보다 서민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서체이다.
 
(5)草書
고대(古代)에서 중세(中世)로 접어들면서 문자(文字)의 활동 정도는 크게 신장된다. 이에 이전의 예서(隸書)가 지닌 혁신성 역시 크게 감소되면서, 보다 실용적으로 신속하게 문자를 쓸 필요가 생겨났고, 이에 부흥해서 크게 유행하게 된 초서(草書)가 등장하게 된다. 

초서는 아주 거칠고 단정하지 못하다는 의미인 "초솔(草率)하다"는 의미에서 극도로 흘려서 쓴 서체라는 의미로 초서(草書)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표의문자(表意文字)의 단점인 서체(書體)의 복잡함과 난해함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극도로 흘려서 빠르고 간단하게 쓴 서체를 생각해 낸 것이다. 규격을 갖춘 서체인 예서(隸書)로부터 해서(楷書)로 발전했지만, 글자를 쓸 때 너무 복잡하고 많은 정성이 들어가 쓰는 시간도 꾀 필요한데,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간략하게 흘려 쓰는 초서(草書)가 생겨난 것이다.

현재 초서는 문자로서의 실용성을 넘어 예술적 경지로까지 발전하여 그 멋을 자랑하고 있지만, 오히려 너무 지나치게 간략화시켜 흘려 쓰게 된 결과 해독(解讀)의 어려움을 가져와 실용성을 상실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예서(隸書)나 해서(楷書)의 규격성과 복잡함을 해소하기 위해 글자의 윤곽이나 일부분만으로 표현하면서 전체적으로 획을 연결해서 신속하게 쓸 수 있게 발전한다. 발생시기도 "한조(漢朝)가 흥하자 초서(草書)가 나왔다"는 《설문해자(說文解字)》서문(序文)을 보듯이 예서(隸書)가 한창 번성하던 한(漢)나라시대에 함께 등장했는데, 초기의 장초(章草)에서 동진(東晋)시대의 금초(今草)와 당(唐)나라 때의 광초(狂草)까지 다양하게 발전을 하지만 실용성은 떨어지게 된다.

장초(章草) 초기의 초서체로 진말한초(秦末漢初)에 예서체(隸書體)를 간략하게 흘려 쓰기 시작하면서 발생되었는데, 장제(章帝)가 즐겨 써서 장초(章草)라고 한다.

금초(今草) 후한(後漢)에서 동진(東晋)시대에 장초(章草)에서 발전해 독자적인 서체의 틀을 완성해 현재까지 일반적인 초서(草書)의 틀을 의미하게 된다.

광초(狂草) 
마치 미친 듯이 거의 끊어짐 없이 글자들까지 이어서 쓰는 형식의 광초(狂草)는 당(唐)나라 때 벌써 예술적 경지로 발전한다.

몇 십 번의 필획으로 사각형 네모꼴의 규격에 맞춰 정성을 들여야 하는 기존의 예서체(隸書體)나 해서체(楷書體)의 어려움을 극복한 초서(草書)는 효율적이고 신속한 필기 형태로 인해 다양하게 발전한다. 

그러나 그 취지가 너무 강조된 나머지 지나치게 간략화 해 현대까지 예술적 대상으로 다양하게 발전하였지만, 실용적 가치를 다소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결국 일반인들의 속성(速成) 필기체의 주축을 행서체(行書體)로 옮겨가게 한다.

이처럼 한자서예는 기나긴 역사과정을 거쳐 篆․隸․楷․行․草 등 5체를 완비하게 되었으며, 드디어 동양 특유의 예술로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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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단법인 연변문자예술협회 회장, 현 한국서정대학교 교수
서영근 칼럼니스트    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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