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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29일 금요일

서경덕

스스로 깨달아 얻는 학문적 독립성으로 일관한 삶
집이 가난하여 매일 들에 나가 나물을 뜯어와야 하는 소년이 있었다. 매일 늦게 돌아오면서도 소년의 바구니에는 나물이 별로 없었다. 부모가 소년에게 까닭을 물었다. “나물을 뜯다가 새끼 새가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첫날은 땅에서 한 치 정도밖에 날지 못하다가 다음 날은 두 치, 그 다음 날은 세 치를 날다가 점차 하늘을 날아다니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얼마나 신기한 일이던지요. 날마다 새끼 새가 조금씩 더 날게 되는 것을 지켜보며 그 이치를 깊이 생각해보았지만 터득하기 어려웠습니다.”

박세채(1631∼1695)의 [남계집]에 나오는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의 어린 시절에 관한 일화로, 그가 어릴 때부터 생명 현상의 이치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심이 남달랐다는 것을 짐작케 해주는 일화다. 서경덕이 12살 때(1501) 서당에서 [서경]의 ‘요전’에 나오는 ‘366일을 1년으로 삼고 윤달로 사시(四時)를 정하고 해를 이루게 했다’(三百有六旬有六日, 以閏月定四時成歲)라는 대목을 읽는데, 훈장님이 이를 정확히 설명해주지 못했다. 서경덕은 보름 동안 그 이치를 궁리한 끝에 스스로 깨달았다. 이는 우주의 이치에 관한 호기심과 탐구욕이 강했음을 보여주는 일화다.
17살 때에는(1506) [대학]을 읽다가 ‘격물치지’(格物致知) 대목에서 깨달은 바가 있어, ‘배우는 데에 먼저 물(物)의 이치를 탐구하지 아니하면 책만 읽어서 무슨 소용인가’라고 탄식했다. 그리고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사물의 이름을 써서 벽에 붙여놓고 그 이치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20살 때에는 잠자는 것도 먹는 것도 자주 잊은 채 사색에만 잠기는 습관이 생겨 3년을 그렇게 지냈다. 이러한 여러 일화들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서경덕은 자기 자신의 사색과 궁리의 힘으로 스스로 깨닫는 데에 힘을 쏟았다는 뜻이다.
퇴계 이황은 그런 서경덕을 가리켜 ‘성현의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비판하면서 서경덕의 학설에는 ‘병통(病痛)이 없는 부분이 없다’고까지 지적했다. 이황이 말한 성현은 정확하게는 주자(朱子)를 뜻한다. 주자보다 더 주자답기를 바랐던 이황이 보기에는, 자득(自得)의 학문을 추구했던 서경덕이 주자의 길에서 벗어났던 것. 서경덕에게 중요한 것은 학문적 정통성이나 전통적인 권위가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 얻은 이치였고, 유교 경서에 주석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이치를 궁리하는 것이었다. 일종의 학문적 독립성과 자율성, 그리고 주체성을 우선시했던 것이다.
어지러운 세상에 나가지 않고 처사(處士)의 길을 걷다

그런 그가 별다른 스승 없이 사실상 독학으로 일관한 것이나 1519년(중종 14년) 조광조의 주도로 시행하게 된 현량과에 천거되었지만 사양한 것, 1531년(중종 26년) 어머니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생원과에 합격했지만 대과(大科)에는 끝내 응시하지 않은 것, 그리고 1544년 말년에 후릉참봉(厚陵參奉. 후릉은 개성에 있는 정종과 정안왕후의 능) 벼슬을 받았지만 곧 사직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이른바 처사(處士)의 길,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서 은둔하는 선비의 길로 일관했다. 내성외왕(內聖外王- 안으로는 성인이며 밖으로는 임금의 덕을 갖춘 사람)의 길 중에서 내성의 길에만 충실하고자 했던 것이다.
서경덕이 벼슬길에 나아가 역사와 현실에 참여하는 출(出)의 길이 아니라 뜻과 마음을 온전히 지키면서 은일(隱逸)에 머무는 처(處)의 길을 걸었던 것에는, 그가 살던 시대의 어지러운 정치 상황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서경덕이 9살 때인 1498년(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시작으로 선비들의 대수난이 시작되었고, 1506년 중종반정 이후 잠시 조광조와 사림이 득세하기도 했지만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로 다시 피바람이 부는 등, 문자 그대로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의 소용돌이가 그칠 줄 몰랐다. 안 그래도 처사형 기질이 짙다고 할 수 있는 서경덕에게 그러한 현실은 더욱더 처사로서의 소신과 삶의 자세를 굳히게 만들었을 것이다.
‘신은 본래 사리에 어두운데다가 산과 들에서 자라나 조용히 살아왔습니다. 거기에 가난이 겹쳐 거친 음식이나 나물국까지도 끼니에 대지 못할 때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몸이 쇠약해지고 병까지 걸렸으니, 신의 나이 쉰여섯이나 칠십 노인과 다름없습니다. 스스로 쓰임에 적합하지 못함을 알고 있으니, 타고난 대로 숲과 샘물 사이에서 정양(靜養- 몸과 마음을 휴앙함)하며 여생을 보전함이 좋을 것이며, 그것이 분수에 맞는 길일 것입니다.’ - 중종에게 올린 사직을 바라는 글 중에서
1544년 병이 들어 거동하기 불편하게 되었을 때 서경덕은 이렇게 말했다. ‘성현들의 말씀에 대해 이미 선배 유학자들이 주석을 더하였으니 내가 거듭 말할 필요는 없고, 다만 아직 해명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기록하여 전해야 하겠다.’ 시를 짓는 것 외에 학문적 저술 작업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서경덕은 이렇게 삶의 마지막에 가까워진 다음에야 ‘원리기’(原理氣), ‘이기설’(理氣說), ‘태허설’(太虛說),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 ‘복기견천지지심설’(復其見天地之心說) 등의 길지 않은 학문적 논설을 작성했다.
리(理)와 기(氣)에 대한 서경덕의 입장
서경덕의 산문집 [화담집]. 이기(理氣)에 관한 그의 주장과 역(易)의 사생론 및 음양(陰陽)에 대한 논술이 실려있어 그의 이기철학을 살피는 데에 유일한 자료가 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기(氣) 바깥에 리(理)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리는 기를 주재한다. 여기에서 주재한다는 것은 밖으로부터 와서 주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기의 작용을 지시하여 그 작용이 바르게 저절로 그렇게 되도록 하기 때문에 주재한다고 하는 것이다. 리는 기보다 앞서는 것이 아니며, 기가 시작이 없기에 리도 본래 시작이 없다.
- [이기설] 중에서
서경덕은 위와 같이 리가 기와 별도로 존재하면서 기를 주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 스스로가 기의 작용을 바르게 이끄는 내재적이고 자율적인 작용 원리이자 이치라고 보았다. 굳이 서양철학식 표현을 빌리면 리는 기가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기(氣) 내재적인 속성’ 또는 ‘내재적 원리’에 가깝다. 서경덕의 이러한 입장에 대해 ‘기(氣)일원론’, ‘유기론’(唯氣論), ‘주기론’(主氣論) 등으로 일컫기도 하지만, 이른바 주리(主理)와 주기(主氣)의 이분법이 유학의 이기론을 설명하는 틀로 타당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의문과 이의를 제기하는 것도 사실이다.
‘죽음과 삶, 사람, 영혼은 다만 기(氣)의 뭉침과 흩어짐일 뿐이다. 모이고 흩어짐은 있을지언정 있고 없음은 없다. 그것이 기의 본질이다.…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같은 것일지라도 그 기는 마침내 흩어지지 않거늘, 하물며 사람의 정신 지각처럼 크고 오래 걸려 뭉쳐진 것이랴.…비록 한 조각 촛불의 기가 눈앞에서 꺼지는 것을 보더라도, 그 남은 기는 끝내 없어지지 않는다.’ - [귀신사생론] 중에서
서경덕의 위와 같은 입장을 접하고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나 질량 보존의 법칙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기론을 서양의 자연과학에 직접 견주는 것은 무리다. 그 배경과 맥락이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서경덕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 방편적으로 유용한 것만은 사실이다. 서경덕의 이러한 입장을 가리켜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유물론에 가깝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실체를 물질로 보느냐 정신으로 보느냐 하는 유물과 유심의 틀은 어디까지나 서양 형이상학의 맥락이라는 점에서 ‘서경덕은 곧 유물론’이라는 등식에는 무리가 있다.
율곡 이이는 서경덕의 학문이 독창적이며 특히 기(氣)의 미묘한 측면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한다. 그러면서도 서경덕이 기(氣)를 리(理)로 알고 있는 병통을 지녔다며 비판한다. 퇴계 이황은 서경덕이 기(氣)를 리(理)로 잘못 알고 있으며, 사실상 기(氣)의 불멸을 주장함으로써 불교의 미망에 빠졌다고 비판한다. 본래부터 우주에 편재되어 있는 도덕적, 윤리적 원리이자 본성으로서의 리(理)를 강조하고자 했던 유학자들의 입장에서는, 리를 내재하고 있는 자연 그 자체로서의 기(氣)를 강조한 서경덕이 매우 불편했을 것이다. 이황과 이이가 자연-도덕주의자였다면 서경덕은 자연주의자에 가깝다.
삶과 죽음의 이치를 깨달아 평안했던 서경덕의 마지막

서경덕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가 황진이(黃眞伊), 박연(朴淵) 폭포와 함께 이른바 ‘송도삼절(松都三絶)’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떠올린다. 또한 개성의 이름난 기생 황진이가 고승 지족((知足)선사와 서경덕을 유혹했고, 지족선사는 유혹에 넘어갔지만 서경덕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는 이야기, 이후 서경덕과 황진이가 사제 관계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그러나 황진이에 관해 전해지는 기록들은 ‘역사학적으로’ 고증하기 힘든 야사, 야담에 가까우며 신뢰할 수 있는 직접적인 사료는 사실상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경덕과 황진이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완전한 사실 무근으로 단정하기도 어렵다.

서경덕과 황진이가 같은 중종 시대에 개성에서 살았다는 것(황진이의 생몰 연대는 불확실), 황진이가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시 작품이 있기에 그가 문학적 능력과 교양을 갖춘 범상치 않은 기생이었으리라는 것, 또한 서경덕이 도가적 성향까지 보이며 권력과 명예, 재물과는 거리가 먼 비주류 방외지사(方外之士)의 삶을 살았다는 것. 이러한 몇몇 요소들이 서경덕과 황진이에 관한 ‘이야기’를 낳고 또 점점 더 굳어지게 만들지 않았나 하는 추측도 해볼 수 있다. 그들이 실제로 모종의 인연을 맺기는 했지만 고고한 선비와 기생의 관계라는 점에서 당대에는 공식적으로 기록되지 못하고있다가 개성 일대에서 일화의 형태로 전해 내려와 널리 퍼졌을 가능성도 물론 있다.
1546년(명종 1년) 57세 때 서경덕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이미 2년 가까이 병들어 지내 온 터였다. 마지막으로 목욕을 하고 임종을 앞 둔 그에게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 지금 심경이 어떠십니까?” 서경덕이 답했다. “삶과 죽음의 이치를 깨달은 지 이미 오래이니, 내 지금 마음이 편안하구나.” 서경덕의 마지막 말이었다. ‘사람의 죽음을 애도함’(挽人)이라는 서경덕의 시에서 ‘애도’보다는 ‘평정심’을 더 느낄 수 있으니, 그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만물은 어디에서 왔다가 또 어디로 가는지
음양이 모였다 헤어졌다 하는 이치는 알듯 모를 듯 오묘하다
구름이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 것을 깨우쳤는지 못 깨우쳤는지
만물의 이치를 보면 달이 차고 기우는 것과 같다
시작에서 끝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항아리 치며 노래한 뜻을 알겠고
아, 인생이 약상(弱喪) 같다는 것을 아는 이 얼마나 되는가
제 집으로 돌아가듯 본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죽음일지니

(항아리 치며 노래한 뜻: 장자가 아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한 행동.
약상: 고향을 떠나 타향을 방랑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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