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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30일 토요일

인심과 도심 - 최진덕

인심과 도심 - 최진덕 致知
2009/01/05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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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덕, <<주자학을 위한 변명>>, 청계, 2000.

1. 주자의 인심도심설
p.233
인심도심은 둘 다 신묘불측한 심의 지각 작용이다. 다만 인심은 형기지사에서 유래하고 도심은 성명지정에 근거하기 때문에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묘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인심이란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는 등의 생리적 욕구를 가리킨다. 이 욕구는 인간의 신체에서 유래한다. 신체는 만인이 공유하는 공적인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사적인 것이다. 그래서 형기지사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형기지사에서 나오는 인심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으며, 그 자체가 인욕지사의 악은 아니다. 그러나 인심은 인욕지사로 전락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危'라고 했다.
p.234
이 위태로운 인심은 의리를 지향하는 또하나의 지각 작용인 도심에 의해 통제되지 않으면 안된다. 도심은 맹자의 사단과 같은 마음이다. 도심은 성명지정에 근거한 것이며, 천리지공을 따라가는 심의 작용이다. 도심은 인간의 생리적 욕구인 인심처럼 현저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도심은 '微'라고 말한다. ...
인심도심은 모두 심의 지각 작용이며, 하나의 심 속에 섞여 있다. 그러나 하나는 통제받아야 하고 다른 하나는 통제한다. ...
주자의 인심도심에 대한 풀이는 분명히 도덕 의식에 의해 지배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인심도심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는 단순한
p.235
도덕적 설교에 불과한 것은 결코 아니다. 주자는 여기서 리기론이라는 광대한 우주론적 사유를 배경으로 인간의 생리적 욕구와 우주적 이법 사이의 미묘한 이중적 관계를 말하고 있다. 주자는 인간의 신체에서 유래하는 생리적 욕구인 인심과 보편적인 우주적 이법을 지향하는 도심이 심의 작용 안에 자연적인 것으로서 동시에 자리잡고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주자는 동일한 심의 지각 작용인 인심과 도심을 둘로 나누기 위해 애쓴다. 그의 주된 관심은 역시 양자를 확연히 나누는 도덕적 측면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인심과 도심은 이미 그 유래로부터 구분된다. "인심은 형기지사에서 발생하고 도심은 성명지정에서 근원하여 지각이 되는 소이가 다르다"고 주자는 말한다. 자연적으로 주어진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다 인정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것을 송두리째 부정할 수도 없는 것이 송명리학의 근원적인 딜레마이다. 도덕적인 것은 근본적으로 자연적인 것이고, 자연적인 것을 떠나서는 도덕적인 것이 도저히 성립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자연적인 모든 것이 도덕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주자의 인심도심설은 이 딜레마 앞에서 인심과 도심이 모두 하나의 심에 주어진 자연적인 것이라고 일단 인정하면서도, 양자를 그 유래에서부터 애써 구분하는 양면적인 전략을 구사한다. 주자의 이같은 전략은 과연 성공적인 것일까.
기와 리, 형기와 성명이 이물일 수 없고, 모든 것이 리기의 합이라는 주자 리기론의 전제에서 본다면, 하나의 심에 귀속되는 인심과 도심을 그렇게 형기와 성명으로 판연히 다르게 해석하는 것은 일단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형기지사에서 발생하는 인심 역시 성명지정에 근원하지 않을 수 없고, 성명지정에 근원하
p.236
는 도심 역시 형기지사가 없으면 발생할 수 없다. 형기와 성명은 애당초 구분되지 않는다. 양자는 불가분하게 상호 침투해있다. 형기와 성명, 인심과 도심을 이물로 구분하면, 성명이나 거기에 뿌리박은 도심은 공허해져서 석노의 학문으로 흘러갈 것이다...
주자의 인심도심설은 한쪽에 심이라는 근원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천리와 인욕의 엄격한 변별이 있지만, 그것이 역점을 두고 있는 방향은 천리와 인욕의 변별 쪽이다. 인심이 도심의 명령을 따르게 하여 인욕을 제거하고 천리를 보존하자는 것이 주자의 근본 취지이다. 자연주의에 바탕한 도덕주의가 다시 자연주의를 압도하고 있는 셈이다. 자연과 도덕의 미묘한 일치와 괴리라는 송명리학의 근원적인 딜레마가 주자의
p.237
인심도심설에서 반복되고 있다. 그런데 인심과 도심을 이분하고 인심에 대한 도심의 주재적 기능을 강조하는 도덕주의적인 의도를 충분히 살리기 위해서는 인심과 도심을 다 같은 심으로 보기 보다는 차라리 양자를 정과 성 혹은 심과 성으로 그 근원에서부터 나누어 보는 것이 더 일관된 해석일 것이다. 주자가 자신의 도덕주의적 의도에도 불구하고 인심과 도심을 둘 다 이발의 지각이라고 보는 것은 <<서경>>의 인심과 도심이 모두 심자를 가지고 있다는 지극히 평범한 문헌적 사실에 구애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2. 체용론적 해석
인심이나 도심 모두 심이다. 심은 하나인데 성인이 둘로 나누어
p.238
말한 것은 단지 그 '지각이 되는 소이'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도심은 심의 일정불변한 체이고 인심은 심의 변화무쌍한 용으로서 양자가 애당초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정암은 풀이한다. 그래서 정암은 인심도심을 성체정용이라는 심성론적 틀에 끼워 맞춘다. ...
p.239
정암은 <계사전>의 말을 동원하여 도심을 적연부동의 至精之體(性)로 보고, 인심을 감이수통의 至變之用(情)으로 본다. 바로 그 때문에 위와 미에 대한 해석도 주자와 달라진다. 주자는 위를
p.240
'위태하고 불안하다'로, 미를 '미묘하고 살피기 어렵다'로 풀이한다. 주자의 이런 풀이는 두 가지 다른 지각 작용을 형용한 것이다. 반면에 정암은 인심과 도심을 주자와 달리 정용과 성체로 나누어보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으므로 위하고', '살필 수 없으므로 미하다'고 풀이한다. 그렇다면 정암에게 위는 '음양불측의 神'과 같은 뜻이고, 미는 '형이상' 혹은 '무성무취'와 같은 뜻이다. ...
p.241
주자나 정암에게 인간의 심리 현상은 우주의 자연 현상과 근본적으로 동질적이다. 그러나 인심도심의 해석에서 주자는 인심도심을 심리 현상의 테두리에 국한시켜 보는 경향이 강한 반면, 정암은 인심도심을 주저없이 우주의 자연 현상과 연결시킨다. ...
도심은 일음일양의 실체인 도가 사람에게 내재된 것이고, 인심은 음양불측의 묘용인 신이 사람에게 내재된 것이다.
3. 인심도심과 천리인욕
p.242
인심도심을 이처럼 성체정용의 심성론으로 풀이했기 때문에 인심도심과 천리인욕의 관계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주자는 인심을 인욕으로, 도심을 천리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정암은 '인심은 인욕이고 도심은 천리'라는 정자의 말을 전폭적으로 시인한다. ...
정암에게 인욕은 곧 性之欲이다. 정암은 욕과 인욕을 전혀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미리 주
p.243
의할 필요가 있다. 정암에게 인욕은 '人이 가진 欲'이란 뜻 외에 다른 뜻이 없다. 정암에 의하면 '성지욕'의 욕은 칠정의 하나인 동시에 칠정을 대표하는 것이다. ...
정암에게 욕은 感物而動한 전부이며, 곧 정이다. 즉 욕은 심의 동 혹은 이발을 가리킨다. 결국 정암에게 욕 혹은 인욕은 그의 인심 개념과 다르지 않다.
또한 정암은 욕 혹은 인욕이 '天之性'과 마찬가지로 人이 아니라 天에서 유래한다고 생각한다. 심의 동정은 곧 천의 동정이다. ...
p.244
욕·인욕에 대한 정암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정암이 "인심은 인욕이다", "인이 욕을 갖는 것은 천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말하고, 심지어 주자의 '거인욕' 혹은 '알인욕'까지도 부정하는 것을 본다면, 주자학에서 벗어난 근대적인 욕망 긍정론 혹은 욕망 해방론의 징조로 잘못 읽기 쉽다. ...
p.245
정암의 인욕은 심의 지각 작용 전부를 가리킨다. 정암의 인욕은 주자가 말하는 형기지사에서 발생하는 인심과 성명지정에 근원하는 도심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즉 인간의 생리적 욕망과 감각 작용과 인식 작용이 모두 인욕 속에 포함된다.
4. 절욕의 윤리학과 대본
정암은 인욕 즉 인심이 천에서 나온 것이며 결코 제거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인간 조건이라고 보면서도, 인욕의 모든 현상을 다 긍정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그와 주자의 차이가 개념 정의의 차이에 불과하며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정암 역시 절욕의 윤리학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욕을 악이라 할 수 없다. 욕이 선이 되고 악이 되는 것은 節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을 뿐이다."..
p.248
절욕의 윤리학은 자연과 인간, 욕구와 도덕의 교차점에 서 있다. 절욕의 윤리학은 상호 배척하는 두 원리 사이의 불안한 균형 위에 서 있기 때문에 쉽게 이론화되지 않는다. 그래서 유가 철학의 절욕의 윤리학은 늘 무욕과 종욕 사이에서 고심한다. 이론적으로 생생의 세계에 뿌리박고 있는 송명리학의 경우는 그런 고심이 더욱 심각하다. 욕은 생의 가장 현저한 발로이기 때문이다. ...
인심과 도심, 인욕과 천리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정암과 주자는 절욕의 윤리학이라는 유가 철학의 철칙을 공유하고 있따. 절욕의 윤리학은 인간의 자연적 욕구와 그 욕구를 규제하는 원리의 구별,..을 필연적으로 전제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구별 속에서 욕구보다는
p.249
그 욕구를 규제하는 원리 즉 대본에 더 비중을 둔다. 규제하는 것은 규제당하는 것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주자 역시 절욕의 윤리학에 따라 인심과 도심의 유래인 형기지사와 성명지정을 구별하고, 또 인욕과 천리를 확연히 구별하며 인욕에 대한 천리의 규제를 강조했다. 그렇지만 인심도심에 대해서는 그와 같이 구별하지 않았다. 주자는 인심과 도심을 심의 이발인 지각으로 해석하고, 인심을 도심의 명령을 들어야 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정암은 인심과 도심을 아예 성체와 정용으로 구별했다. 이것은 규제하는 것과 규제당하는 것을 구별하는 절욕의 윤리학의 근본적인 요청에 주자보다 더 충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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