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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30일 토요일

인심과 도심 - 몽배원

인심과 도심 - 몽배원 致知
2009/01/04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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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배원, <<성리학의 개념들>>, 예문서원, 2008.
'미발'과 '이발'이 사람의 주체의식, 특히 정감의식과 잠재된 본체의식에 대해서 분석하고 해석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도심'과 '인심'은 현상적으로 이미 발한 것, 즉 이미 밖으로 표현된 주체의식에 대해서 분석하고 해석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도심·인심과 미발·이발 사이에는 논리적 연관성이 있다. 논리적으로 말하면 전자는 후자를 구성하고 있는 한 부분이고, 내용적으로 말한다면 전자는 후자가 한 단계 더 전개된 것이다.



1. 송대 이전
도심과 인심은 <<고문상서>> <대우모>편에 제일 먼저 나타나는데, 거기에서는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은미하니, 마음을 정미하고 한결같이 하여 中을 잡으라"라고 말한다. 이 말은 도의의 심은 은미
p.581
하여 잘 드러나지 않고 보통 사람들의 심은 위태하여 안정되기 어려우므로, 오직 심을 정미하고 한결같이 하면서 다른 것을 섞지 않아야 중을 보존하고 어느 곳에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뒷날 순자는 <해폐>편에서 <<도경>>을 인용하여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은미한데, 오직 지혜로운 군자라야 위태로움과 은미함이 나누어지는 기미를 알아차릴 수 있다"라고 말한다. 지금으로서는 <<도경>>이 어떠한 책인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순자 이전에 이미 도심과 인심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순자의 사상에 따르면 인심은 일반적인 사물을 아는 마음을 가리키고, 도심은 도를 아는 마음을 가리킨다. 도는 하늘의 도와 사람의 도를 포함하는 것으로, 객관사물들의 보편법칙을 가리킨다. 심은 허일이정하기 때문에 리를 살피고 옳고 그름을 판정할 수 있는데,.. 이렇게 도를 아는 마음이라야 만물을 마름하고 관장할 수 있다. 순자의 중심 사상은 이지적인 마음의 인식능력에 잘 표현되어 있다. 만약 이러한 사유의 방법에 따라서 발전했다면 훌륭한 인식이론의 발전이 있었겠지만, 실제로 이러한 발전은 없었다.(--;)
2. 북송시대
p.582
도심과 인심이 성리학 심성론의 중요한 개념이 된 것은 정이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도심을 도에 합치하는 심 혹은 도를 깨닫는 심으로 해석했지, 지식에 관계된 인식심으로 해석하지는 않았다. 도를 깨닫는 심이란 바로 자아 체험의 도덕본심으로, 다시 말해 이것은 깨닫는 것을 마음으로 여기는 그러한 심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도덕의식과 도덕관념이다... 정이는 사람마다 모두 선험적인 도덕본심을 가진다고 생각했다. ...
이것은 바로 내재된 이성의 원칙이며 또한 도덕본체의 자기현현으로, 사실상 내재화된 사회윤리의식이다.
인심은 감성과 같은 자연적인 본능이나 물질욕망 등의 개인의식으로 설명된다. 여기에서는 개인의식과 집단의식이 관계가 문제로 제기되는데,
p.583
이 부분은 성리학 심성론이 한 단계 더 발전한 모습이다. 하지만 정이는 인심, 즉 개인의식을 완전히 부정하는 입장을 취한다. ...
정이는 도심과 인심을 대립시켜, 도심은 바른 것이고 인심은 사악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정미하고 한결같은 공부를 함으로써 도심을 잘 보존하여 인심에 의해 흔들리지 않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정이가 보기에 도심과 인심 곧 집단의식과 개인의식은 대립적이기 때문에 조화될 수 없고, 따라서 이 둘은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반드
p.584
시 인심을 없애버려야 도심을 보존할 수 있다... 그는 도심과 천리를 같은 것으로 보고, 인심과 인욕을 같은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그 자체로 개인의 이익과 개인의 의식을 희생시켜 집단의 이익과 집단의 의식에 복종시키려는 의미를 가진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
3. 남송시대
주희는 정이의 관점이 가진 극단성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정이의 견해를 고쳐 인심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제기했다. 또한 인심에 대해 좋지 않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더욱이 그것을 소멸시킬 수 없다는 입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
p.585
주희가 "사람은 하나의 심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을 때의 심은 지각하는 심이지 본체의 심은 아니다. 지각하는 심은 비록 본체의 심과 떨어질 수는 없지만, 형이상의 초월적인 심과 같은 수는 없다. 형이하의 지각작용이라는 측면에서 말하면, 리를 지각해야 할 뿐 아니라 기도 지각해야 한다. 여기에서 도심과 인심의 구별이 생겨난다.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은 사람들 모두가 가지고 있다. 그 지각되는 것에는 이성에 의해서 지각되는 것도 있고 감성에 의해서 지각되는 것도 있는데, 이 역시 사람들 모두가 가지고 있다. 도덕이성에 대한 자기인식이 바로 도심으로, 의리지심이라고도 부른다. 이에 비해 생리적 필요에 따라 발생하는 감성을 인식하는 것이 인심으로, 물욕의 심이라고도 부른다... 인식주체로서의 사람은 이성적 측면과 감성적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며 또한 집단의식과 개인의식도 함께 가지고 있다. ...
p.586
주희는 또한 도심은 도덕적 의리에서 생하거나 발하고, 인심은 육체적 욕망에서 생하거나 발한다고 생각했다. ...
지각은 주체의식의 인식작용이라는 측면에서 말한 것이고, '~에서 생겨난다'거나 '~에서 발생한다'라는 말은 근원의 측면에서 말한 것으로, 이러한 두 가지 설명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주희가 보기에 도심과 인심은 모두 성에 근거하지만, 도심은 본연지성에 근거하고 인심은 기질지성에 근거한다. 도심은 선험적 도덕의식이고, 인심은 생리적 욕구이다. 하지만 주희는 도심과 인심을 근원의 측면에서보다 인식주체의 인식작용이라는 측면에서 말한 지각을 더 강조한다. 구체적으로 말해 의리에서 지각하는 것은 도덕의식의 자각 또는 도덕의식의 직각이고, 욕망에서 지각하는 것은 배고프고 추우며 아프고 가려운 것 등과 같은 감성적 지각이다. 이것이
p.587
바로 인심과 도심에 대한 주희의 기본적인 해석이다. ...
입이 좋은 맛을 원하는 것, 눈이 좋은 색을 보기 원하는 것, 귀가 좋은 소리를 듣기 원하는 것, 코가 좋은 냄새를 맡기 원하는 것, 육체가 편안하기를 원하는 것 등은 모두 성이지만, 이러한 것에 따라서 지각하게 되면 바로 인심이 된다. 이것이 비록 성의 본원은 아니지만, "성 가운데 이 리가 있어서, ... 저절로 이와 같이 드러나는 것이다."(惟性中有此理, ... 自然發出如此.) ...
그는 도심과 인심 모두 이발한 심 상태를 가리켜서 말하고 있으며,.. 측은지심 등과 같은 것을 도심이라 하고 희노애락과 같은 것을 인심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이것은 도덕정감과 자연정감을 말한 것이다. 도심은 바로 현실적 감성
p.588
의 형식을 통해 초월적 도덕내용을 표현한 것이다. ...
인심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것에 빠져 도심으로 돌아가는 것을 잊어버리면 그것 역시 해가 된다. 따라서 인심은 반드시 도심의 주재와 조절을 받아서 바름으로 돌아가야 한다. ...
하지만 인심 이외에 달리 도심이 있어서 그것이 인심을 통제하고 지배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인심과 도심은 본질적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 층차의 구분만 있을 뿐이다.
p.589
자아의식의 측면에서 보면 개인의식은 공공의 윤리의식에 복종하고, 윤리의식은 개인의식을 통해 표현된다. 주희는 윤리의식이 개체의식과 따로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데, 이것은 주희의 사상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동시에 그는 개인의식과 윤리의식 사이에는 대립되는 일면이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는데, 이것 역시 중요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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