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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30일 토요일

인심도심론의 실천적 의미 - 이상익

인심도심론의 실천적 의미 - 이상익 致知
2008/12/03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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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익, <인심도심론의 실천적 의미>, <<주자학의 길>>, 심산, 2007.


1. 인심 도심에 대한 개괄적 논의
p.245
주자는 인간의 몸을 주재하는 것은 마음인데, 마음에는 인심과 도심의 두 측면이 있다고 보았다. 즉 마음의 본질적 기능은 지각인데, 천리를 지각하면 도심이요, 욕망을 지각하면 인심이라는 것이다. '형기지사'에 근원하는 인심은 '사적 욕망'을 지각하고 추구하는 것이며, '성명지정'에 근원하
p.246
는 도심은 '공정한 천리'를 지각하고 추구하는 것이다. ...
p.247
인심이란 육체(형기)로 인해 생기는 마음으로서, 배가 고프면 음식을 먹고자 하고, 추우면 옷을 입고자 하며, 정욕이 일면 이성을 그리워하는 것 등이 이에 해당된다. 주자는 인심을 '형기지사' 또는 '인욕지사'와 연결시켜 설명하였다. '사'란 '개체에 속한다'는 뜻이니,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인심이다. 도심이란 인의예지의 본성(천리)으로 인해 생기는 마음으로서, 측은지심·수오지심·사양지심·시비지심 등이 이에 해당된다. 주자는 도심을 '천리지공' 또는 '성명지정'과 연결시켜 설명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도 함께(公) 할 수 있도록 바름(正)을 추구하는 것'이 이 도심이다.
위의 인용문(중용장구서)은 인심도심론에 대한 기본적 논의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첫째, 인심과 도심은 모두 불가결하다는 것이다. 인심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육체적 생존을 뒷받침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지라도 인심이 없을 수 없다. 또 도심은 인의예지의 본성으로부터 발하는 것으로서, 하우 역시 도덕적 지각능력이 있는 것이다. 또한 인심만으로는 위태롭고,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인간의 존엄성을 담보할 수 없다. 반면에 도심만으로는 은미하고,
p.248
인간의 육체적 생존을 뒷받침할 수 없다. 따라서 양자는 항상 동시에 요구된다는 것이다. 둘째, 도심이 인심을 주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 주재: 주자학에서 '주재'라는 말은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된다. 첫째, "리가 기를 주재한다"고도 말하는데, '리의 주재'는 '리가 기의 운동의 표준이 됨'을 뜻한다. 둘째, "기가 리를 주재한다"고도 말하는데, '기의 주재'는 '기가 리를 맡아서 운용함'을 뜻한다. 셋째, "도심이 인심을 주재해야 한다"고도 말하는데, '도심의 주재'는 '도심이 인심에게 합당한 길을 명령함'을 뜻한다.
즉 인심과 도심은 모두 불가결한 것인바, 양자의 바람직한 관계는 '도심이 인심에게 합당한 길을 제시하고, 인심이 항상 그에 따르는 것'이라고 본다. 주자는 '유정유일'을 "인심인지 도심인지 정밀하게 살피고(精), 도심의 주재를 전일하게 관철시킴(一)"으로 설명하였다. 셋째, 천하를 다스리는 것처럼 중대한 일도 인심과 도심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는 것, 즉 '유정유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주자에 의하면, 인심이란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으로서, 사적인 것이다. 이것은 다시 두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생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둘째는... 사치와 방탕에 빠지는 것이다. 주자는 첫째에 대해서는 '성인도 없을 수 없는 것'으로 긍정하지만, 둘째에 대해서는 '인욕으로서 결국 악으로 귀착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p.249
그리하여 인심을 곧바로 '악'으로 규정하지 않고, 다만 '危'라고 규정한 것이다. ...
인심은 그 자체로서는 '정당성에 대한 자각'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위태로운 것이다. 주자는 그러므로 인심은 도심의 주재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인심과 마찬가지로, 도심도 역시 두 맥락을 지니고 있다. 첫째는 육체적 욕망과는 무관하게 순수하게 인륜과 정의만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는 '군신과 부자의 윤리를 아는 것'·'의리를 아는 것'·'측은지심과 수오지심' 등을 도심이라고 규정한다. 둘째는 육체적 욕망과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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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 것이라도 도심의 주재를 받으면 역시 도심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는 '그 마땅히 성내야 할 것을 성내는 것'·'음식의 ㅇ로바름을 얻은 것' 등도 도심으로 규정한다. 요컨대 인심도 도심의 주재를 받아 공정하게 추구된다면 도심이 된다는 것이다. '도심의 주재를 받아 공정하게 인심을 추구한 것'이 바로 '윤집궐중'일 것이다. '윤집궐중'은 개인적 차원에서는 '인심과 도심의 조화'로 해석될 수 있고, 사회적 차원에서는 '사익과 공익의 조화'로 해석될 수 있다.
주자 인심도심설의 결론은 '도심으로 인심을 주재하라'는 것인데, 이는 곧 '공정성의 원칙에 입각하여 사적 욕망을 추구하라'는 말이다. 그러면 개인의 입장에서는 왜 사적 욕망을 공정성의 원칙에 종속시켜야 하는가? 그것은 "천리를 따르면 사익을 추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불리함이 없으나, 인욕을 따르면 사익을 추구해도 얻어지지 않고 오히려 손해가 따르기 때문"이다.  


2. 합리성으로서의 인심과 합당성으로서의 도심
p.251
롤즈는 인간은 본래 善觀과 정의감이라는 두 가지 도덕적 능력을 지닌다고 전제하고, 이 두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만이 '도덕적 인격'으로서 '시민'의 자격이 있다고 본다. 롤즈는 합리성을 선으로 규정하고, 합당성(공정성)을 정의로 규정한다. ...
롤즈는 선을 '애착과 추구의 대상'을 '합리적으로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선관의 능력'이란 '우리들이 가치있는 인생이라고 느끼는 선의 관념을 형성하고, 수정하고, 추구하는 능력'이다. 롤즈는 선관은 '궁극적 목표와 목적 그리고 욕망의 결정적 체계'로 이루어지는 것이 정상적이라고 본다. 합리성을 추구하는 선관이 '사적'인 것이라면, 합당성을
p.252
추구하는 정의감은 '공적'인 것이다. 롤즈는 정의감 즉 합당성을 추구하는 것은 이타적인 것도 아니고, 이기적인 것도 아니며, 다만 공정성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본다.
롤즈는 합리성과 합당성을 대비함에 있어서, 합리성을 추구하는 선관은 각자의 목표를 제시하는 것으로 그것은 다양할수록 좋다고 하였고, 합당성을 추구하는 정의감은 각자의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또는 방법) 상의 원칙으로서 그것은 마땅히 합의를 통해 통일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
p.253
롤즈에 의하면, 합리성은 자신만의 고유한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요, 합당성은 타인과의 공정한 협력조건 즉 정의의 원칙을 제시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롤즈는 합리성이 결여되면 자신만의 고유한 인생목표를 실현할 수 없고, 합당성이 결여되면 구성권 상호간의 신뢰나 협력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양자는 상호보완적인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합리성과 합당성은 반드시 결합되어야 하는데, 그 결합은 합당성이 합리성에 우선하는 결합이어야 한다('좋음'에 대한 '옳음'의 우선성). 롤즈는 이것을 '인격의 통일성'이라 하였다. '인격의 통일성'은 개인으로 하여금 결국 '한정적 선관'을 지니게 만드는데, 그것은 합당성(정의의 원칙)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자신의 목표(선)를 추구함을 말한다. ...
p.254
주자는 인심을 설명할 때에는 대부분 그것이 '개인의 육체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었다. 그런데 위(<문장경부>)에서는 '영위하고 모려하는 바가 있는 것'을 인심이라 했는 바, 이는 보다 직접적으로 인심이란 '사익(사적 목표)을 추구하는 것'임을 지적한 것이다. 그리고... "사익을 추구함이 천리에서 벗어날 때에는 사욕이라 한다"고 해석한 것이다...
p.255
요컨대, 주자는 인심을 '사익을 추구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그것이 천리(합당성)에서 벗어날 때는 특히 사욕이라 한 것이다.* ...
* 오늘날 학계에서는 보통 주자가 초년에는 정자의 "인심은 사욕"이라는 주장을 따랐다가, 뒤에는 "인심과 인욕을 동일시 할 수 없다"는 차원에서 이 말을 따르지 않은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위 인용문(문장경부)으로 보면, 주자는 한때는 정자의 "인심은 사욕"이라는 주장을 의심했다가, 뒤에는 다시 승인한 것 같다. 즉 정자의 "인심은 사욕"이라는 주장에 대해, 주자는 처음에는 따랐다가, 중간에는 의심했었고, 최종적으로는 다시 승인했던 것 같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기회에 상론하기로 하겠다.
(주자는) 인심을 맹자의 '이목지관'에 비유하고, 도심을 맹자의 '심지관'에 비유했다. 눈과 귀는 사물을 보고 듣는 기능은 있으나, (시비와 선악을) 생각하고 판단하는 기능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눈과 귀만 있
p.256
다면, 보고 듣는 대상 사물에 이끌리게 마련이다. 마음의 기능은 생각하는 것인 바, 보고 듣는 대상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대상 사물에 이끌리는 것의 가부를 결정하는 것이 마음의 역할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맹자는 '먼저 그 대체(마음)를 확립함이 중요하다'고 보았던 것인데, 주자는 '먼저 그 대체를 확립함'을 '도심의 주재를 확립함'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
또한 "인심은 사사로운 쪽만 알 뿐"이라 했는데, 이는 "인심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위태롭다"는 말이다. 한편, "도심은 다만 도리의 공정한 쪽만 알 뿐"이라는 말은 "도심만으로는 각자의 사적 목표를 이룰 수 없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인심만으로는 위태롭고 도심만으로는 각자의 사적 목표를 이룰 수 없다고 한다면, 원만한 삶을 위해서는 인심과 도심이 반드시 서로를 보완해야 하는 것이다... 도심의 주재를 받으면 인심도 도심이 되는 것이라 했는데, 이는 바로 인심과 도심을 바람직하게 매개하는 방식을 제시한 것이다. '인심·도심'에 대한 주자의 이러한 설명은 롤즈의 '합리성·합당성'에 대한 설명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첫째, 롤즈는 합리성과 합당성을 전혀 별개의 것으로 규정했는데, 이는 주자가 인심은 '형기지사'에 근원하고 도시은 '성명지정'에 근원한다고 본 것과 상응한다.
둘째, 롤즈는 합리성은 개인의 사적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며 합당성은 사회의 공적 원칙을 준수하는 것이라고 보았는데, 이는 주자가 인심은 사적 욕망(인욕지사)을 추구하는 것이요 도심은 공적 원칙(천리지공)을 주수하는 것이라고 본 것과 상응한다.
셋째, 롤즈는 '합리성만으로는 부당하고 어처구니가 없다'고 보았는
p.257
데, 이는 주자가 '인심은 오직 위태롭다'고 한 것과 상응한다.
넷째, 롤즈는 합리성과 합당성은 상호보완적이라고 보았는데, 이는 주자가 인심과 도심을 모두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규정한 것과 상응한다.
다섯째, 롤즈는 합당성이 합리성에 우선한다고 규정했는데, 이는 주자가 인심은 도심의 주재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한 것과 상응한다.
여섯째, 롤즈는 합당성(정의원칙)에 있어서는 통일(합의)을 이루어야 하고 합리성(선관)에 있어서는 다양성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주자의 리일분수설과 상응한다. ...
다만 문제는, 롤즈는 합리성을 선으로 규정하는데, 주자는 인심을 선으로 규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롤즈가 단순히 합리성을 선이라 한 것은 '선에 대한 기초론(thin theory)'이었다. 롤즈도 '선에 대한 완전론(full theory)'에서는 '합당성과 결합된 합리성만이 선'이라 하고, 이것을 '도덕적 선'이라 불렀다. 롤즈는 '선에 대한 기초론'은 '도덕적 중립성'을 취하는 것이라 했다. 이는 사실 주자가 '인심은 위태롭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롤즈가 '선에 대한 완전론'의 입장에서 '합당성과 결합된 합리성만이 도덕적 선'이라고 한 것은, 주자가 "인심도 도심의 주재를 받으면 도심이 된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3. '공정한 원칙'에 따른 '사익의 추구'
p.258
주자는 개인의 시비득실이나 국가의 치란안위를 궁극적으로 '인심·도심의 문제'로 규명했다. ...
p.259
'인심과 도심'은 오늘날의 일반적인 개념으로는 '욕심과 양심'으로 풀이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항상 욕심과 양심 사이에서 갈등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그 갈등을 어떻게 결말짓느냐에 따라 시비득실과 치란안위가 결정된다는 것이 주자의 설명이다. ...
p.261
(주자는) 인심과 도심을 '욕망의 마음'과 '의리의 마음'으로 구분하고, 도심은 인심의 사이에서 '섞여서 나오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 양심과 욕심이 혼재하면서 양자가 갈등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욕망의 마음'과 '의리의 마음'이라는 논법은 결국 욕망에는 '추구해도 되는 욕망'과 '추구해서는 안 되는 욕망'이 있다는 것이요, 그것을 판가름해주는 것이 '의리'라는 논법인 것이다... '도심의 주재'를 여러가지 방식으로 설명하였다. 첫째는 인심이 도심을 준칙(표준)으로 삼아 자신의 욕망을 추구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둘째는 인심이 '도심의 區處'를 따라야 한다는 설명이다. '구처'란 말그대로 '구분하여 처리함'을 뜻한다... 셋째, '정밀하게 실핌과 전일하게 지킴' 역시 도심의 주재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
p.264
주자는 '도심의 주재에 따른 인심'을 '도심'이라 하기도 하고, '인심이지만 도심을 잃지 않은 것'이라 하기도 했으며, '인심 또한 변화하여 도심이 된다'고도 하였다. 이처럼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위의 내용들은 '합당하고 공정한 방식으로 인심으로 추구하라'는 점에 있어서는 모두 일치하는 것이다. ...
인성론적 개념으로서의 인심과 도심은 사회철학적 개념으로서는 각각 '사적 욕망'과 '공정한 규범'으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주자가 그리는 이상사회는 '공정한 규범'의 주재 하에 개인의 '사적 욕망'이 실현되는 것이다. 사회의 구성원들이 인심만을 발휘한다면, 그러한 사회는 곧 혼란과 갈등에 빠지게 된다. 혼란과 갈등 속에서는 '개인의 정당한 권리'마저도 보호될 수 없다. 따라서 개인적 차원에서나 사회적 차원에서나 도심의 주재는 긴요한 것이다. '사적인 인심'은 '공정한 도심'의 주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 자체 '사적 욕망을 배제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다만 사적 욕망은 공정성의 한계 안에서 추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도심의 주
p.265
재에 따른 인심'은 '도심'이라 하였듯이, 공정한 규범에 따라서 추구한 사익은 정당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자의 인심도심론이 제시하는 삶의 모습이란 '공정한 원칙에 따라 사익을 추구하는 삶'이라 하겠다. '공정한 원칙에 따른 사익의 실현'은 또한 '유정유일 윤집궐중'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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