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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30일 토요일

사칠리기논쟁, 심설논쟁

사칠리기논쟁-전호근 (2) 致知
2008/08/12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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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근, <주희 심성론의 한국적 전개를 위한 최초의 갈등>, <<논쟁으로 보는 한국철학>>, 한국철학사상사연구회, 예문서원, 1995

5. 이황과 기대승은 각각 어떤 근거로 입론하였는가

1.기대승의 입론 근거
p.171
이황의 입장에 대한 기대승의 반론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그의 반론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근거를 지니고 있다.
첫째, 사단과 칠정의 내포와 외연을 따질 때 사단은 칠정 속에 포함되는 구조이므로 결코 상대적인 개념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
기대승이 이황을 반박하는 또 다른 근거는 리와 기의 관계를 불상리의 입장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리와 기의 불가분리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성정을 논하게 되면 리의 발동은 설 자리가 없다. 이는 그가 성을 '리가 기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곧 리와 기의 합체로 규정한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더욱이 주희가 리의 작용성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들어 리의 발동을 부인했을 뿐만 아니라, 천리의 발현이 순수한 그대로 완수되느냐의 여부는 전적으로 기에 달려있다고 주장함으로써 리의 무조작성을 강조하고 있다. 리기 관계의 이와 같이 파악하고 나면 사단 칠정의 개념적 규정과는 상관없이 리발 자체가 성립할 수 없게 된다.
P案.. 리기불상리를 강조하면 리를 기질지성으로 파악하게 되고, 리기불상잡을 강조하면 리를 본연지성으로 파악하기 쉽다.
고봉의 경우, 리기불상리와 리의 무조작성을 강조하므로 리발 자체를 인정할 수 없고, 리발/기발의 도식이 아닌 다른 기준으로 사단과 칠정을 구분할 필요가 있었다.
그럼에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기대승은 리의 발동을 인정할 수 없다는 직접적인 표현을 쓰지 않는다. 도리어... 이황의 입장을 수정하면서도 "정이 발하는 것은 혹은 리가 움직임에 기가 갖추어지고 혹은 기가 감응함에 리가 탄다"고 하여 리의 작용성을 분명히 인정하고 있다. 이는 모순이 아닐 수 없다.
2. 이황의 입론 근거
p. 173
그는 인간의 다양한 심리 현상이 비록 본성에 의해 선을 보장받고는 있지만 그 중의 일부분, 곧 칠정은 매우 위태로운 것으로 보았다. 칠정은 형기에 의해 쉽게 악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그가 수양 공부로 지경을 강조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처럼 그는 인간의 다양한 심리 활동 속에 선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혼재되어 있다고 보고 이들을 분명히 구분하는 것이 학문의 목적이라고 생각했다.(<심통성정도설>)...
그는 사단은 순선무악한 것이므로 욕구와는 성질이 다른 반면, 칠정은 유선유악이므로 절제되지 않으면 악으로 흐르게 되는 욕구로 본 것이다. 순선무악한 사단은 절제의 필요성이 없고 유선유악한 칠정은 절제를 필요로 한다... 완전무결한 본연지성이 그대로 발현되는 사단은 '완전한 것'이고 형기에 가려져 선이 보장되지 않는 칠정은 '불완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완전한 사단과 불완전한 칠정이 동일한 발생 내원을 가진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고, 그 때문에 각각을 리와 기에 분속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P案.. 인간의 심리 현상 중에는 그 결과, '자신을 위하여 타인을 해치는 것'과 '나보다 먼저 타인을 배려하는 것'과 '나를 위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 있다. 자신을 위하여 타인을 해치게 하는 심리 현상은 불선이다. 그리고 타인을 배려하게 하는 심리 현상은 선이다. 이는 퇴계에게서나 고봉에게서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나를 위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에서 두 학자의 의견이 갈린다. 퇴계에게 그것은 '선'이라고 이름붙이기에는 좀 모자란 것이고, 고봉에게 그것은 '선'이다.
두 학자에게 공히 선의 근거는 리에 있고, 불선이 발생하는 것은 기 때문이다. 리를 보편성으로 보자면, 타인을 배려하는 것은 분명 리에 근거한 것이지만, 타인에게 해를 주건 그렇지 않건 자신을 위하는 것의 근거는 기에 있다는 것이 퇴계의 의견이다. 고봉은 자신을 위하는 것도 그것이 타인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면 그 근거를 리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보편성은 개체를 배제한 것이 아니라 개체를 포함하는 것이므로.
결국 기대승에게는 사단과 칠정이라는 상위 범주 속에 포함되었던 구조
p.174
가 이황에게서는 완전과 불완전으로 서로 등치된 것이다. 이는 인간의 도덕성을 결코 욕구 속에 매몰되어 있는 미약한 존재로 파악하지 않으려는 이황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그가 "리는 사물에 명령하기만 하고 명령을 받지 않는다"고 하여 리의 극존무대성을 강조하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양은 움직이고 음은 고요하다"고 한 것은 태극이 스스로 동정하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리에 동정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리는 볼 수가 없고 음양에 의지한 뒤에 알 수가 있다. 리는 음양에 실려 있으니 마치 사람이 말에 타고 있는 것과 같다"(<<주자어류>>, 권94, <주자지서, 태극도>)
p.175
주희는 리가 직접 움직일 수는 없지만, 리는 음양이라는 기를 통해서 자신의 움직임을 실현할 수는 있다고 규정한 것이다. 이는 결국 말을 사람의 통제하에 두듯이 기를 리의 통제하에 둠으로써 기에 대한 리의 주재성을 확보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작용성과 주재성의 개념적 차이가 리의 동정에 대한 해석을 결정한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주희는 현상 세계에 대한 객관적 해석을 끌어 내려는 입장에서 리기의 동정을 규정했다기보다는 도덕적 가치를 중시하는 관점에서 리의 주재성을 강조했다고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도덕적 가치의 보편성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존재에 대한 객관적 해석의 틀을 빌린 것이다.
P案.. 주재성과 작용성. 고봉의 태양과 구름의 비유로는 태양의 주재성을 설명할 수 없다. 길의 비유가 리의 주재성과 무조작성을 나타내기 위한 가장 좋은 비유일 듯.
6. 사칠리기 논쟁이 주자학에서 갖는 의의
p.177
리의 작용성을 강조한 이황... 이는 선과 악을 서로 대응하는 개념으로 파악함으로써 개인의 행위에 대한 자기 반성적 수양을 무엇보다 중시한 이황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때문에 이황은 기대승과는 반대로 사단칠정도 상대적인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을 제기했다. 이와 같은 그의 입장은 사단이 칠정 속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도리어 인간의 도덕적인 행위에 제한을 가하는 것으로 보고 칠정보다는 사단을, 악보다는 선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각각 리와 기에 분리 소속시킴으로써 사단의 독립성을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현실에서의 선과 악이라는 문제를 주자학 본래의 범주로 구분하지 않고, 양자간에 긴장 관계를 조성함으로써 개인의 도덕적 실천을 더욱 절실하게 촉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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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설논쟁-이상호 致知
2008/08/22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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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 <주자학적 심설 논의에 대한 수정주의와 정통주의의 대립>, <<논쟁으로 보는 한국철학>>,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예문서원, 1995
1. 머리말

우리 나라의 철학사 전개에서 13세기의 주자학 수용이 단순히 새로운 사상의 유입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것은 주자학이 조선 시대 어느 한 시기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왕조 교체의 이념으로 작용하였고, 조선 시대 전 기간에 걸쳐 사상계를 지배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한 사회가 새로운 사상을 수용할 때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시대적 요구를 배경으로 한다. 이 경우 그 수용 과정은 선택적일 수밖에 없으며, 전면적이고 단일한 형태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이 점은 주자학 수용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자학 수용 과정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은 이후 조선 성리학의 기본 특질 형성과 정립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조선 성리학이 주자학에 대한 원론적 이해에서 벗어나 나름대로 독자적 전개를 보이는 것은 퇴계 이황 이후부터이다. 이렇게 보면 주자학 수용 이후 200여 년이 경과한 이후에야 비로소 원론적 이해의 수준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당시의 학계 수준이 저급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원론적 수준이라고 할 때 그것이 갖는 의미는 주자학의 형이상학, 즉 리기심성론에 대한 독자적 이해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며, 주자학 이해라고 하는 측면에서의 상대적 비교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여말·선초에 주자학은 고려 유학계에 내재되어 있던 불교 비판의 요구에 따라 그 이론적 도구로서 수용되었으며, 그것은 주자학의 가치론적 이해의 기반을 마련해주고 있었다. 주자학의 정치적 원리화를 위한 사림파의 활동은 주자학의 가치론적 이해를 더욱 심화시켜 나갔으며, 그것이 이황에 의해 형이상학적 이론에 반영됨으로써 조선 성리학의 독자적 전개의 길을 열게 되었던 것이다.
주자학의 가치론적 이해의 심화는 주자학에 내재되어 있던 분화의 가능성을 드러내었고, 그것은 이황에 의해 리理의 능동적 원인성(기에 대한 리의 주재·통제 작용을 가리킨다. 이 때 리는 기의 동인으로서 초월적 성격이 강조된다)에 대한 긍정과 심의 구조적 이해라고 하는 측면으로 제기되었다. 이러한 이해는 주희의 본래 의도와는 상충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점이 율곡 이이에 의해 비판되었고, 그것은 리의 능동적 원인성에 대한 부정과 심의 질적 규정이라고 하는 측면으로 제기되었다. 리의 능동성은 적어도 주희의 논의 구조 속에서 주희가 끝까지 부정한 부분이었다. 그것은 사물의 내재적 근거로서의 리의 의미를 보장해주지 못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이가 이황을 비판하면서 리의 무위성無爲性을 강조하고 있는 것 역시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이의 논의 구조 속에서도 위와 같은 문제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그것은 이른바 리기지묘理氣之妙(이이는 이것을 리와 기는 서로 떨어질 수도 없고 서로 섞일 수도 없으며,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라는 논리로 설명하다. 이것은 형식 논리를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에 리기지묘라고 한 것이다)의 논리로 제기되고 있다.  여기서 이황과 이이의 논의가 모두 주희의 논의를 근거로 해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하는 점은 주자학 자체에 이미 양립할 수 없는 모순 요소가 내재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황과 이이는 새로운 명제를 제기함으로써 주자학의 그러한 이중적 구조(리 일원론을 지향하면서도 리기 이원론적 논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거나 가치의 문제를 존재론화시키는 것 등)를 극복하려 했던 것이며, 이황과 이이 이후 새로운 논쟁점이 제기됨에 따라 주자학의 이중적 구조에 대한 인식은 더욱 분명하게 되었다. 그것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주자학의 기본 명제인 성즉리와 대립되는 심즉리라는 명제까지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아울러 리기를 생성론적 관계로 분명히 규정하거나 기 운동의 자기 원인성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것은, 비록 그것이 주희의 논의에 근거하고 있기는 하지만 주자학적 사유 체계를 이탈할 수 있는 마지막 지점에 와 있는 것이다.
조선 후기의 조선 성리학파에게서도 성리설 논의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이황과 이이에 의해 제기되었던 이러한 문제 의식이다. 그들 가운데 주자학을 수정하려는 입장에서 가장 중요하게 내세운 입각점은 심성정을 리의 측면에서 일관된 형태로 파악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심은 심의 본체라고 하는 측면을 보편화시킨 것이며, 그 주된 문제 의식은 심이 일신一身을 주재한다는 것이다. 주재라고 하는 측면, 즉 인간의 의식이 행위를 주재한다고 하는 것은 리의 능동적 원인성을 강조하게 된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며, 이것은 인간의 선 행위의 근거를 심에서 직접 구함으로써 그 실천을 더욱 강조하고 보편화시키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주자학에 대한 전통적 논의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주장은 비판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조선 후기의 심설 논쟁은 조선 성리학 전 기간에 걸쳐 제기된 문제를 총괄적으로 이해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즉 이황과 이이에 의해 제기된 문제 의식을 공유하면서 그것을 최종적 결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용적으로 그것은 어떤 한 시기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조선 성리학 전 기간에 걸쳐 제기된 문제였으며, 적어도 주자학적 논의의 틀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마지막 지점까지 와 있었다. 이 글에서는 심설논쟁의 주된 입장, 즉 주자학 수정의 입장과 전통주의적 입장의 심설을 서술함으로써 그러한 문제 의식을 살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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