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도 좌파는 존재하는가? 20세기에 좌파를 자처했던 사회주의권이 몰락한 지금 좌파의 존재 양식은 무엇이고 좌파의 기준은 무엇인가?
지구상에 몇 안 되는 공산당이 집권하고 있는 중국은 신민주주의 혁명을 통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립한 이후 '중국적 사회주의' 또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60년 이상 시행해왔다. 그러나 개혁 개방 이후, 특히 1989년 '톈안먼 사건'과 1992년 '남순강화' 이후의 중국―이른바 '64 체제'의 중국―을 과연 사회주의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와 더불어 '일당전제'의 '당-정 국가'에서 좌파의 존재 여부와 존재 방식의 문제는 관심의 초점이다. 전자는 '중국은 어디로 가는가?'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고, 후자의 경우 '64 체제'의 중국을 '일당전제'의 '당-정 국가'라는 평가에 동의한다면 당내에서 좌파는 찾기 어렵게 되고 이른바 '신좌파'가 우리의 주목을 끈다.
1980년대 '신계몽 운동'이라는 범자유화 사조는 1994년 <구준(顧准)문집>과 왕후이의 '당대 중국의 사상 상황과 현대성 문제'의 출간을 그 표지로 삼아 '자유파'와 '신좌파'로 분기했다. '자유파'가 서양의 자유주의로부터 시장화와 민주화의 사상적 자원을 찾아내려 했고, 지속적으로 극좌 이데올로기와 권력 구조를 비판하는 한편, 중국의 입헌 민주 체제를 위한 정치 체제 개혁을 추진했던 것에 반해, '신좌파'는 서양의 좌익 비판 이론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반(反)자본주의적인 신좌익 비판 전통을 새롭게 건설하려 했다.
서양 자유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것을 중국 상황에 적응/왜곡시킨 중국의 자유주의가 복잡한 것 이상으로, '신좌파' 또한 각종 좌익 비판 사상의 혼합체였다. 그 사상 자원은 대개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 세계 체제 이론, 프랑크푸르트학파, 공화주의, 공동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식민주의 등 각종 비(非)자유주의적 이론을 포괄하고 있다.
'신좌파'는 이론 형태가 복잡한 반(反)자유주의 사상 연맹으로, 그 가치 지향과 사상 자원은 각자 다르다. 자유주의에 대한 '신좌파'의 비판은 중국의 하이에크식 경제적 자유주의와 귀족적 자본주의의 시장 만능주의를 직접 겨냥하고 있으며 그 주요 주장은 평등과 공정의 문제에 놓여 있다.
자유주의에 하이에크 중심의 우파와 롤스 중심의 좌파가 있는데, 왕사오광 추이즈위안 등과 함께 '신좌파'로 불리는 간양은 자신들을 마르크스-레닌주의식의 '구좌파'와 변별해 '자유 좌파'라 부르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1990년대 중국 자유파 지식인이 '자유 좌파'와 '자유 우파' 또는 '신좌파'와 '신우파'의 두 진영으로 분화되었다는 것이다.
간양이 말하는 '자유 우파' 또는 '신우파'는 바로 레이거노믹스를 추종하는 '신자유주의파'를 지칭하는 것이고 '자유 좌파' 또는 '신좌파'는 케인스식 수정주의 입장에 가깝다. 이들에 비해 왕후이의 비판 이론은 월러스틴과 폴라니를 대표로 하는 서양 '뉴 레프트' 전통에 기대고 있다.
첸리췬은 <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 1949-2009>(한울 펴냄)에서, 신좌파와 자유파의 논쟁이 모두 1990년대 중국 사회 변동에 대한 반응이며 서로 다른 판단과 이론적 분석이 있고, 서로 다른 대책을 가지고 있으며 그 자체로서 깊이 있는 역사적 내용과 현실 의의를 가지는 것이며 동시에 논쟁을 통해 모종의 공통 인식(즉, 이른바 최대공약수)에 도달할 수도 있고, 동시에 각자의 의견을 보존할 수도 있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쌍방이 상대방을 주요 위험으로 보았다는 데 있다고 진단한다. 신좌파는 자유주의자가 독점 엘리트의 대변인이라고 여겼고, 자유주의자는 신좌파가 독제 체제의 공모자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역사는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며 반복되고 있다. 상호 변증법적으로 절합해야 할 개혁 세력의 쌍방이 적대적으로 대립하고, 그 사이에 보수 세력은 개혁 세력의 분쟁을 지켜보며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 좌파'라 자칭한 추이즈위안 등은 후진타오 시절 이른바 '싱크 탱크' 노릇을 한 반면, 왕후이는 여전히 체제의 경계에서 자신의 독특한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왕후이는 현재 서양에 가장 많이 소개된 중국학자이다. 문학 연구로 시작해 철학과 사상 그리고 사회과학을 넘나들고, 중국에 국한되지 않고 아시아를 사유하며 소수자에도 관심을 기울여 티베트와 오키나와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인문사회과학 학자다.
그의 탁월함은 '키워드를 통한 아젠다 제시'에서 두드러진다. 루쉰을 연구할 때도 '절망에 반항', '역사적 중간물' 등으로 루쉰의 정신과 그 역할을 요약했고, 그 이후에도 '반현대성적 현대화 이데올로기'와 '현대성적 현대화 이데올로기'라는 용어로 마오쩌둥의 '중국적 사회주의'/혁명적 사회주의와 덩샤오핑의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개혁 개방 사회주의를 변별했으며, '탈정치화된 정치화'는 단기 20세기의 혁명 실험이 실패―중국의 경우 1989년 톈안먼 사건―로 끝난 이후 탈혁명화 상황을 요약한 것이고, '트랜스시스템 사회'는 포스트 사회주의 시대에 내셔널리즘과 국민 국가를 초월하는 동시에 신자유주의적 글로벌리즘에 제한을 가하는 방안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처럼 그는 키워드를 통해 중국 지식계의 아젠다를 제시하곤 했다. 그는 1994년 한국에서 먼저 발표된 글을 통해 자유파와 신좌파의 논쟁의 불을 붙이고 신좌파의 명망을 한 몸에 얻었지만, 정작 자신은 신좌파라는 명명보다는 비판적 지식인을 자처한다. 그는 이른바 '신좌파' 중에서는 서유럽의 '뉴 레프트'에 가까워 보이지만, '세련된 중화주의자'라는 혐의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1996년부터 시작한 <두수(讀書)> 주편 경력은 그의 진보성을 대표한다. 그러나 <두수>를 출간하는 싼롄서점의 성격을 감안한다면, 체제와의 타협이라는 측면도 존재한다. 아울러 <두수>와 리카싱의 커넥션도 눈여겨 볼 지점이다. 싼롄서점 홍콩지사 전 대표였던 모 인사는 몇 년 전부터 리카싱의 지원을 받아 리카싱의 부인과 함께 <중국문화논단>을 만들었다. 그 인사는 퇴직한 후에도 싼롄서점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출판인이다. 리카싱의 해외 자본과 중선부 산하의 싼롄서점 그리고 거기서 발행하는 <두수>의 커넥션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왕후이 등의 <두수>의 역할을 폄하할 필요는 없지만 다소 과대평가된 것도 사실이다. 신화화된 측면도 없지 않은 것이다. 이는 당국의 압력과 회유에 유연하게 '협상과 타협'을 하고 있는 이른바 '6세대' 독립 영화 제작자들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왕후이가 <두수> 주편을 그만둔 것을 중국 당국의 탄압이라 여기고 그에 대해 항의해야 한다고 했던 일부 국내 학자들의 반응은 난센스였다 하겠다. 그리고 2010년의 표절 사건이 있었다. 금년에는 밀실 정치와 신자유주의의 권토중래라는 각도에서 충칭 사건을 재평가하는 글을 다시 한국에서 먼저 발표함으로써 충칭 사건을 국제적 이슈로 만들었다.
국내에서도 왕후이는 주목의 대상으로 그와 관련된 글이 꾸준히 발표되고 있다. 이 가운데 왕후이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바라보던 백승욱은 '중국굴기의 경험과 도전'에 대한 토론문에서 "너무 빨리 반환점을 돌았다", '중국 경험의 이례성'을 주장했다고 비판한 바 있다. 그러나 왕후이의 제자들과 옹호자들은 그가 변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그는 좌우의 잣대로 나눌 수 없는 사상가라는 것이다.
왕후이는 문제적이다. 그러므로 왕후이를 제대로 문제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의 글 한두 편을 대상으로 토픽화하는 것은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격이다. 왕후이를 제대로 문제화하기 위해서는 그의 주저인 <현대 중국 사상의 흥기>(전4권)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중요하다. 마침 국내에서 번역중이라 하니 기대해봄직하다.
아울러 왕후이가 기대고 있는 폴라니의 세계 체제론 등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 물론 그의 이론적 입론이 폴라니의 케인스주의적 관점과 아리기의 스미스주의적 관점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은 그를 '신좌파'라고 분류했던 것 자체가 '신화적'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1673
지구상에 몇 안 되는 공산당이 집권하고 있는 중국은 신민주주의 혁명을 통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립한 이후 '중국적 사회주의' 또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60년 이상 시행해왔다. 그러나 개혁 개방 이후, 특히 1989년 '톈안먼 사건'과 1992년 '남순강화' 이후의 중국―이른바 '64 체제'의 중국―을 과연 사회주의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와 더불어 '일당전제'의 '당-정 국가'에서 좌파의 존재 여부와 존재 방식의 문제는 관심의 초점이다. 전자는 '중국은 어디로 가는가?'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고, 후자의 경우 '64 체제'의 중국을 '일당전제'의 '당-정 국가'라는 평가에 동의한다면 당내에서 좌파는 찾기 어렵게 되고 이른바 '신좌파'가 우리의 주목을 끈다.
1980년대 '신계몽 운동'이라는 범자유화 사조는 1994년 <구준(顧准)문집>과 왕후이의 '당대 중국의 사상 상황과 현대성 문제'의 출간을 그 표지로 삼아 '자유파'와 '신좌파'로 분기했다. '자유파'가 서양의 자유주의로부터 시장화와 민주화의 사상적 자원을 찾아내려 했고, 지속적으로 극좌 이데올로기와 권력 구조를 비판하는 한편, 중국의 입헌 민주 체제를 위한 정치 체제 개혁을 추진했던 것에 반해, '신좌파'는 서양의 좌익 비판 이론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반(反)자본주의적인 신좌익 비판 전통을 새롭게 건설하려 했다.
서양 자유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것을 중국 상황에 적응/왜곡시킨 중국의 자유주의가 복잡한 것 이상으로, '신좌파' 또한 각종 좌익 비판 사상의 혼합체였다. 그 사상 자원은 대개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 세계 체제 이론, 프랑크푸르트학파, 공화주의, 공동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식민주의 등 각종 비(非)자유주의적 이론을 포괄하고 있다.
'신좌파'는 이론 형태가 복잡한 반(反)자유주의 사상 연맹으로, 그 가치 지향과 사상 자원은 각자 다르다. 자유주의에 대한 '신좌파'의 비판은 중국의 하이에크식 경제적 자유주의와 귀족적 자본주의의 시장 만능주의를 직접 겨냥하고 있으며 그 주요 주장은 평등과 공정의 문제에 놓여 있다.
자유주의에 하이에크 중심의 우파와 롤스 중심의 좌파가 있는데, 왕사오광 추이즈위안 등과 함께 '신좌파'로 불리는 간양은 자신들을 마르크스-레닌주의식의 '구좌파'와 변별해 '자유 좌파'라 부르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1990년대 중국 자유파 지식인이 '자유 좌파'와 '자유 우파' 또는 '신좌파'와 '신우파'의 두 진영으로 분화되었다는 것이다.
간양이 말하는 '자유 우파' 또는 '신우파'는 바로 레이거노믹스를 추종하는 '신자유주의파'를 지칭하는 것이고 '자유 좌파' 또는 '신좌파'는 케인스식 수정주의 입장에 가깝다. 이들에 비해 왕후이의 비판 이론은 월러스틴과 폴라니를 대표로 하는 서양 '뉴 레프트' 전통에 기대고 있다.
첸리췬은 <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 1949-2009>(한울 펴냄)에서, 신좌파와 자유파의 논쟁이 모두 1990년대 중국 사회 변동에 대한 반응이며 서로 다른 판단과 이론적 분석이 있고, 서로 다른 대책을 가지고 있으며 그 자체로서 깊이 있는 역사적 내용과 현실 의의를 가지는 것이며 동시에 논쟁을 통해 모종의 공통 인식(즉, 이른바 최대공약수)에 도달할 수도 있고, 동시에 각자의 의견을 보존할 수도 있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쌍방이 상대방을 주요 위험으로 보았다는 데 있다고 진단한다. 신좌파는 자유주의자가 독점 엘리트의 대변인이라고 여겼고, 자유주의자는 신좌파가 독제 체제의 공모자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역사는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며 반복되고 있다. 상호 변증법적으로 절합해야 할 개혁 세력의 쌍방이 적대적으로 대립하고, 그 사이에 보수 세력은 개혁 세력의 분쟁을 지켜보며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 좌파'라 자칭한 추이즈위안 등은 후진타오 시절 이른바 '싱크 탱크' 노릇을 한 반면, 왕후이는 여전히 체제의 경계에서 자신의 독특한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왕후이는 현재 서양에 가장 많이 소개된 중국학자이다. 문학 연구로 시작해 철학과 사상 그리고 사회과학을 넘나들고, 중국에 국한되지 않고 아시아를 사유하며 소수자에도 관심을 기울여 티베트와 오키나와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인문사회과학 학자다.
그의 탁월함은 '키워드를 통한 아젠다 제시'에서 두드러진다. 루쉰을 연구할 때도 '절망에 반항', '역사적 중간물' 등으로 루쉰의 정신과 그 역할을 요약했고, 그 이후에도 '반현대성적 현대화 이데올로기'와 '현대성적 현대화 이데올로기'라는 용어로 마오쩌둥의 '중국적 사회주의'/혁명적 사회주의와 덩샤오핑의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개혁 개방 사회주의를 변별했으며, '탈정치화된 정치화'는 단기 20세기의 혁명 실험이 실패―중국의 경우 1989년 톈안먼 사건―로 끝난 이후 탈혁명화 상황을 요약한 것이고, '트랜스시스템 사회'는 포스트 사회주의 시대에 내셔널리즘과 국민 국가를 초월하는 동시에 신자유주의적 글로벌리즘에 제한을 가하는 방안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처럼 그는 키워드를 통해 중국 지식계의 아젠다를 제시하곤 했다. 그는 1994년 한국에서 먼저 발표된 글을 통해 자유파와 신좌파의 논쟁의 불을 붙이고 신좌파의 명망을 한 몸에 얻었지만, 정작 자신은 신좌파라는 명명보다는 비판적 지식인을 자처한다. 그는 이른바 '신좌파' 중에서는 서유럽의 '뉴 레프트'에 가까워 보이지만, '세련된 중화주의자'라는 혐의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1996년부터 시작한 <두수(讀書)> 주편 경력은 그의 진보성을 대표한다. 그러나 <두수>를 출간하는 싼롄서점의 성격을 감안한다면, 체제와의 타협이라는 측면도 존재한다. 아울러 <두수>와 리카싱의 커넥션도 눈여겨 볼 지점이다. 싼롄서점 홍콩지사 전 대표였던 모 인사는 몇 년 전부터 리카싱의 지원을 받아 리카싱의 부인과 함께 <중국문화논단>을 만들었다. 그 인사는 퇴직한 후에도 싼롄서점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출판인이다. 리카싱의 해외 자본과 중선부 산하의 싼롄서점 그리고 거기서 발행하는 <두수>의 커넥션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왕후이 등의 <두수>의 역할을 폄하할 필요는 없지만 다소 과대평가된 것도 사실이다. 신화화된 측면도 없지 않은 것이다. 이는 당국의 압력과 회유에 유연하게 '협상과 타협'을 하고 있는 이른바 '6세대' 독립 영화 제작자들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왕후이가 <두수> 주편을 그만둔 것을 중국 당국의 탄압이라 여기고 그에 대해 항의해야 한다고 했던 일부 국내 학자들의 반응은 난센스였다 하겠다. 그리고 2010년의 표절 사건이 있었다. 금년에는 밀실 정치와 신자유주의의 권토중래라는 각도에서 충칭 사건을 재평가하는 글을 다시 한국에서 먼저 발표함으로써 충칭 사건을 국제적 이슈로 만들었다.
국내에서도 왕후이는 주목의 대상으로 그와 관련된 글이 꾸준히 발표되고 있다. 이 가운데 왕후이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바라보던 백승욱은 '중국굴기의 경험과 도전'에 대한 토론문에서 "너무 빨리 반환점을 돌았다", '중국 경험의 이례성'을 주장했다고 비판한 바 있다. 그러나 왕후이의 제자들과 옹호자들은 그가 변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그는 좌우의 잣대로 나눌 수 없는 사상가라는 것이다.
왕후이는 문제적이다. 그러므로 왕후이를 제대로 문제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의 글 한두 편을 대상으로 토픽화하는 것은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격이다. 왕후이를 제대로 문제화하기 위해서는 그의 주저인 <현대 중국 사상의 흥기>(전4권)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중요하다. 마침 국내에서 번역중이라 하니 기대해봄직하다.
아울러 왕후이가 기대고 있는 폴라니의 세계 체제론 등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 물론 그의 이론적 입론이 폴라니의 케인스주의적 관점과 아리기의 스미스주의적 관점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은 그를 '신좌파'라고 분류했던 것 자체가 '신화적'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임춘성 목포대학교 교수의 이 글은 <서남포럼 뉴스레터> 199호에 실린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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