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다시보기(7): 덕(德)의 양대 구성요소, 중(中)과 화(和)
앞에서 덕(德)이란 “성인들이 행한 강함과 부드러움의 통치법을 조화롭게 실천하려는 절조(절개와 지조)”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 덕(德)을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강령 다시 말해서 덕을 구성하는 요소들에는 과연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 먼저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기록을 살펴보자.
희로애락이 드러나지 않은 것, 그것을 중이라고 일컫고, 드러나지만 모두 절도에 맞은 것, 그것을 화라고 한다. 중이라는 것은, 세상의 큰 근본이고, 화라고 하는 것은, 세상이 도에 닿은 것이다. 중과 화에 이르면, 천지가 자리를 잡고, 만물이 자란다. [禮記(예기)] <中庸(중용)>
우선적으로 대강 살펴보면, 즉 이 말은 중(中)과 화(和)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아직 잘 모르지만, 아무튼 중(中)은 도(道)의 근본이고 화(和)는 그 자체로 이미 도에 도달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1. 중(中): 공정하고도 객관적인 태도
우리는 중(中)을 “중립” 또는 “중간”이라는 의미로 인식하고 있고, 또 그렇게 자주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공자가 말하는 중(中) 역시 그러한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쉬이 이해할 수 있을만한 예를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주지하다시피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자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주의국가들은 남쪽을 지지했고, 반면에 사회주의국가인 중국은 북쪽을 지지했다. 그리고 또 세계에는 이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어느 쪽에도 편입되지 않는 소위 “중립국”을 표방하는 나라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국가가 스위스인데, 과연 스위스는 한국전쟁에서 어느 쪽을 지지했을까? 정답부터 말하자면, 스위스는 당시 한국에 물자를 지원한 우리의 우방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 이제부터 중(中)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하나하나 살펴보면, 그 이유를 자연스레 알 수 있을 것이다.
(순)임금이 말했다: “(생략) 나는 그대의 덕을 독려하고, 그대의 큰 공을 기리니, 하늘의 헤아림이 그대 몸에 있어서, 그대가 결국에는 임금에 오를 것이오. 사람의 마음은 위태롭고, 도의 마음은 희미하니, 정성스럽고도 한결같이, 그 중을 진실로 잡아야 하오. (생략).” [尙書(상서)] <大禹謨(대우모)>
어진 이를 돕고 덕이 있는 이를 도우며, 충성스러운 이를 드러내고 어진 이를 이루게 하며, 약한 이는 포용하고 어리석은 이는 책망하며, 어지러운 이를 돕고 망하는 이를 업신여기며, 없애야 할 것을 밀어내고 존재해야 할 것을 튼튼히 하면, 나라가 이에 번창합니다. 덕이 날로 새로워지면, 만방이 그리워하고, 마음이 자만하면, 구족이 이에 떠날 것이니, 임금께서는 힘써 큰 덕을 밝혀, 백성들에게 중을 세워야 합니다. (생략)" [尙書(상서)] <仲虺之誥(중훼지고)>
임금(성왕)이 말했다: “군진이여, 그대는 주공의 큰 교훈을 넓히고, 권세에 의지하여 위세를 떨치지 말며, 법에 의거하여 모질게 하지 마시오. 너그럽고도 법도가 있고, 침착하고 덤비지 않음으로써 화합하시오. 은나라 백성들이 벗어났을 때(위법을 했을 때), 내가 벌하라고 말해도, 그대는 벌하지 말고, 내가 용서하라고 말해도, 그대는 용서하지 말며, 오직 중을 따르시오.” [尙書(상서)] <君陳(군진)>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순임금은 크게 지혜로우셨으니, 순임금은 묻기를 좋아하시고 천근한 말(깊이가 없는 얕은 말)도 살피기를 좋아하셨으며, 악함은 숨기시고 선함을 드러내셨다. 그 양 극단을 잡아, 백성들에게 그 중간을 쓰셨으니, 이 때문에 순임금이 되셨다. [禮記(예기)] <中庸(중용)>
진실함은 하늘의 도이고, 진실하게 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 진실한 사람은 힘쓰지 않아도 중하고, 생각하지 않아도 얻게 되어, 차분하게 도에 들어맞는 것이니, 성인이다. 진실하게 한다는 것은, 선을 가리어 굳게 잡는 것이다. [禮記(예기)] <中庸(중용)>
제곡은 이미 중을 잡아 두루 세상에 미쳤으므로, 해와 달이 비치는 곳과, 바람과 비가 이르는 곳이면, 복종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史記(사기)] <五帝本紀(오제본기)>
즉 중(中)이라 함은 “편벽되지 않고 치우치지 않으며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음”이 되는 것이니, 다름 아닌 공정하고도 객관적인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자정자(子程子) 역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중이라는 것은, 편벽되지 않고 치우치지 않으며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는 것의 이름이요, 용은 늘 그러함이다. [禮記(예기)] <中庸ㆍ序(중용ㆍ서)>
그러므로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공자가 이르시기를: “군자는 두루 미쳐서 편들고 가려서 뽑지 않지만; 소인은 편들고 가려서 뽑지 두루 미치지 않는다.”[論語(논어)] <爲政(위정)>
여기서 공자는 중(中) 즉 양 끝단을 잡아서 그 가운데를 짚는 공정함의 유무로 군자와 소인을 구분하고 있는데,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 있듯이 군자는 소강사회의 지도자 즉 도를 배우고 부단히 노력하여 실천하는 올바른 지도자이다. 즉 이 말은 “군자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편들지 않고 공정하게 판단하는 반면, 도를 따르지 않고 사사로운 이익만을 탐하는 올바르지 못한 인격의 소인배는 한쪽으로 치우쳐 편들기에 공정하게 판단하지 못한다.”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는 왜 이처럼 중(中)을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다음의 기록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치우치지 않고 편들지 않으면, 임금의 도는 평탄하고, 편들지 않고 치우치지 않으면, 임금의 도는 평평하며, 어기지 않고 배반하지 않으면, 왕의 도는 정직해지고, 지극함이 있는 이들을 모으면, 지극함이 있음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尙書(상서)] <洪範(홍범)>
그만큼 중(中)이라는 것은 실천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것이고, 또 중(中)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양쪽의 입장을 모두 이해하여 최종적으로 공정하고도 객관적인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스위스가 중립국을 표방하면서도 한국에 물자를 지원한 이유는, 객관적으로 상황을 파악했을 때 피해국이 한국임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는 하나의 방증이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左傳(좌전)] <昭公(소공) 14년>의 기록을 소개해 보기로 한다.
진(晉)나라의 형후(邢侯)와 옹자(雍子)가 축(鄐)이라는 지역을 가지려고 오랫동안 다퉜는데, 이 일은 본래 사경백(士景伯)이 판단해야 할 업무였지만, 마침 다른 일 때문에 초(楚)나라로 가느라 자리를 비웠다. 이에 한선자(韓宣子)의 명으로 숙어(叔魚)가 대리로 그 일을 판단했는데, 사실 잘못은 옹자가 했지만 옹자가 그의 딸을 숙어에게 바치자 숙어는 잘못을 형후에게 덮어 씌웠고, 결국 형후는 분노하여 숙어와 옹자를 모두 죽였다. 한선자가 숙향(叔向)에게 누구의 잘못이냐고 묻자, 숙향은 “옹자는 자신의 잘못을 알면서도 뇌물로 속였고, 숙어는 공정해야 할 소송을 거래하는 물건으로 여겼으며, 형후는 사람을 함부로 죽였는데, [상서]의 <夏書(하서)>에 잘못을 미화하는 혼(昏)과 뇌물을 받아 관료의 권위를 더럽히는 묵(墨) 그리고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적(賊)은 모두 사형을 내린다고 되어있으니, 세 사람의 죄는 같습니다.”라도 대답했다. 이 일에 대해서, 공자는 숙향이 숙어의 친형인데도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고 공정하게 판단했다고 평가하고 있으니, 이제 중(中)이 왜 덕(德)을 구성하는 중대한 요소가 되는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2. 화(和): 어느 하나 버리지 않고 함께 가기
화(和)는 액면 그대로의 의미인 “조화로움”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조화로움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필자의 소견으로는 이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하느니, 차라리 노자의 표현을 인용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세상이 모두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이 되는 것을 아는 것, 이는 바로 추함일 따름이고; 모두 선함이 선함이 되는 것을 아는 것, 이는 선하지 못함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이 함께 생겨나고, 어려움과 쉬움이 함께 형성되며, 길고 짧음이 함께 견주고, 높고 낮음이 함께 기울며, 소리와 음률이 함께 조화를 이루고, 앞과 뒤가 함께 따른다. [道德經(도덕경)] <2장>
세상이 모두 어떤 것이 아름다운지를 아는 것은, 바로 추함이 존재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다. 모두 어떤 것이 선인지를 아는 것은, 선하지 못함이 존재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선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대동사회의 이치는 있음과 없음이 함께 조화를 이루는 것이고, 어려움과 쉬움이 함께 조화를 이루는 것이며, 길고 짧음이 함께 조화를 이루는 것이고, 높고 낮음이 함께 조화를 이루는 것이며, 소리와 음률이 함께 조화를 이루는 것이고, 앞과 뒤가 함께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즉 노자는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서로를 지탱하며 걸어가야 한다고 외치는 것이다. 그런데 공자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공자가 이르시기를: "군자는 조화롭게 지내지만 같이 하지는 않고, 소인은 같이 하지만 조화롭게 지내지는 못한다." [論語(논어)] <子路(자로)>
공자가 이 말을 통해서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은 다름 아닌 화(和)와 동(同)의 개념이다. 이를 이해하려면 노자 [도덕경] 4장 4-3의 “그 광채를 조화롭게 하고, 그 속세와 함께 한다.(和其光,同其塵。)”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으니, 노자는 화(和)와 동(同)을 모두 긍정적으로 보는 반면, 공자는 화(和)와 동(同)을 차별화함으로써 화(和)만을 긍정적으로 보고 동(同)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다시 한 번 다음의 기록을 살펴보자.
희로애락이 드러나지 않은 것, 그것을 중이라고 일컫고, 드러나지만 모두 절도에 맞은 것, 그것을 화라고 한다. 중이라는 것은, 세상의 큰 근본이고, 화라고 하는 것은, 세상이 도에 닿은 것이다. 중과 화에 이르면, 천지가 자리를 잡고, 만물이 자란다. [禮記(예기)] <中庸(중용)>
즉 화(和)란 희로애락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모두 드러내 표출시키는 것이니, 기쁨과 분노 그리고 슬픔과 즐거움이 각각 고유의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서로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화(和)는 “서로의 수준이 다름을 인식하면서도, 함께 어우러져 사이가 좋은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同)은 이와 상대적인 개념이 되어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므로, 곧 “같은 수준으로 합쳐져서, 구별이 없이 똑같아지는 상태”를 뜻하게 된다. 어쩌면 이는 “어울림과 아우름은 같은 것일까?”라는 물음과도 상통하는 개념이 될 터인데, 어울림은 “두 가지 이상이 서로 잘 조화됨”을 뜻하는 반면 아우름은 “여럿을 모아 한 덩어리가 되게 함”을 의미하는 것이니, 아마도 화(和)는 “어울림”을, 반면에 동(同)은 “아우름”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따라서 공자가 <자로편>에서 말하고자 한 바는 “도(道)를 배우고 부단히 노력하여 실천하는 올바른 지도자인 군자는 서로 수준이 다른 이들과 함께 어우러져 사이가 좋지만, 그들과 같은 수준으로 합쳐져서 구별이 없이 똑같아지지는 않는다. 반면에 도를 따르지 않고 사사로운 이익만을 탐하는 올바르지 못한 인격의 소인배는 다른 이들과 같은 수준으로 합쳐져서 구별이 없이 똑같아질 뿐, 서로의 수준이 다름을 인식하면서도 함께 어우러질 수는 없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즉 공자는 노자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는 중(中)과 화(和)가 도(道)로 나아가는, 다시 말해서 덕(德)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임에는 공감하지만, 동(同)에 대한 가치관에서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이 점 역시 [예기]의 <예운(禮運)>편에 기록된 “대동사회에서는 사람들은 자신의 어버이만이 어버이가 아니었고, 자신의 자식만이 자식이 아니었다. 하지만 소강사회에서는 각각 자신의 어버이만이 어버이가 되고, 자신의 자식만이 자식이 되었으며, 재물과 힘은 자신을 위해 썼다.”라는 표현처럼, 대동과 소강을 구분 지을 수 있는 중대한 차이점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고전 다시읽기]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3, 2014년 3월, 안성재, 인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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