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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13일 토요일

공자 다시보기(7): 덕(德)이란 무엇인가?, 덕(德)의 양대 구성요소-중(中)과 화(和)




공자 다시보기 (6): 덕(德)이란 무엇인가?
 글쓴이 : 아포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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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다시보기(6): 덕(德)이란 무엇인가? 

덕(德), 강함(剛)과 부드러움(柔)을 조화롭게 실천하는 절조

우리는 “덕(德)을 쌓는다.”라는 말을 흔히 쓰고는 한다. 그런데 정작 “덕이란 무엇이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덕을 쌓을 수 있는 것일까?”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대답할 수 없거니와, 별로 깊이 생각해 본 적조차도 없는 듯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간단한데, 왜냐하면 “덕”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다소 막연하기까지 한 형이상학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형이상학적 개념은 말로 명확하고도 간단하게 정의내릴 수 없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그 긍정적인 의미로서의 특징은 또 그만큼 쉽게 이해하여 실천하기가 어렵다는 부정적인 의미로서의 한계점으로 변해버리기도 한다. 바꿔 말해서, 만약 우리가 형이상학적 개념을 말로 풀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영원히 우리가 그 개념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도 나아가 실천할 수도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자 역시 [도덕경] 1장 첫 구절에서 분명히 “도(道)라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변치 않는(常) 도가 아니다.”라고 피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뒤의 2장부터 81장까지 5천여자의 운문(韻文)으로 도(道)가 무엇인지 설명하려고 그토록 노력했던 것이리라.

이와 관련하여 수많은 형이상학적 개념들 중에서, 구체적으로 사랑(愛)이란 개념을 그 예로 들어 설명해보기로 하자. 오늘날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참으로 많이 쓴다. 아니 필자의 개인적 소견으로는 거의 남발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하리라. 그렇다면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일까? 또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일까? 명품가방을 선물하면 사랑하는 것이고, 손수 만든 십자수를 선물하면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 

만약 누군가 필자에게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자기 자신을 아끼고 또 잘 되기를 바라는 그 마음과 태도를, 오롯이 타인에게 전하는 것”이라고 설명할 것이다. 물론 필자의 이 사랑에 대한 정의가 사랑에 대한 100% 완벽한 정의라고 믿지는 않는다. 다만 이렇게라도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다른 누군가가 사랑을 이해하고 실천하는데 일정한 도움이 될 것이라고 위안을 삼을 수는 있을 것이다. 나아가 또 다른 누군가가 여기에 더하여 필자보다 더 온전한 표현방식으로 사랑을 정의내릴 수 있기를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고.

[상서] <강고편>에 이르기를 “갓난아이를 보살피듯 하라.”고 하였다. 마음을 정성스럽게 하여 구하면, 비록 과녁을 맞추지 못해도, 화살이 과녁에서 멀지는 않을 것이다. [禮記(예기)] <大學, 傳(대학, 전)>

따라서 이제부터 필자는 비록 과녁에 적중시킬 수는 없을지라도 비슷하게나마 그 개념들을 정리하고자 하니, 덕(德)을 시작으로 도(道)를 구성하는 각각의 형이상학적 요소들을 현대어로 풀이하고자 한다. 아울러서 공자가 말하는 도(道)의 구성요소들에 대한 현대적 풀이는 필자의 [논어] 해설서들을 정리한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이제 덕(德)과 관련하여 다음의 기록들을 먼저 살펴보자.

덕이 있음을 숭상하는 것은 어찌된 것인가? 그것(덕)이 도에 가깝기 때문이다. [禮記(예기)] <祭義(제의)>

따라서 큰 덕을 지닌 이는 반드시 명을 받는다. [禮記(예기)] <中庸(중용)>

따라서 말하기를: 진실로 덕에 이르지 못하면, 도가 머물지 않는다. [禮記(예기)] <中庸(중용)>

공자는 이처럼 도(道)와 덕(德)의 관계를 명확히 하고 있으니, 즉 덕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도에 이르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덕은 도 바로 다음의 하위개념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노자 역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도를 잃은 후에 비로소 덕이 있고, 덕을 잃은 후에 인이 있으며, 인을 잃은 후에 의가 있고, 의를 잃은 후에 예가 있다. [道德經(도덕경)] <38장>

그런데 공자는 덕을 설명할 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공자가 이르시기를: “정치를 행함에 덕으로 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마치 북두성이 그 곳에 자리를 잡아서 여러 별들이 함께 하는 것과도 같다.” [論語(논어)] <爲政(위정)>

그렇다면 공자는 왜 덕과 정치를 연계하여 설명하는 것일까? 이제 다음의 기록을 보면, 쉬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태갑으로부터 옥정 태경 소갑 옹기를 거쳐, 태무에 이르러, 박에 요망한 뽕나무와 곡식(또는 닥나무)이 함께 아침에 나서 하루가 지나 저물녘에 크게 한 아름만 해지니 이척(이윤의 아들)이 말하기를, “요망함은 덕을 이기지 못하니 임금님께서는 그 덕을 닦으소서.”하였다. 태무가 선왕(선대의 어진 임금)의 정치를 닦으니 이틀 만에 요망한 뽕나무가 말라죽고 은나라의 왕도가 다시 일어나니 이를 불러 중종이라 일컬었다. [十八史略(십팔사략)] <殷王朝篇(은왕조편)>

즉 덕을 닦는다는 것은, 막연하게나마 태평성대를 이끌었던 선왕들의 정치를 배워서 실천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위 [논어] <위정편>의 말은 지도자가 덕으로 다스리는 덕치(德治)를 행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그를 지지하고 따르게 된다는 뜻이 되니, 바로 그 유명한 다음의 구절과 서로 통하게 되는 것이다.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무리들이 있어서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論語(논어)] <學而(학이)>

참고적으로 위 구절의 “무리”는 다름 아닌 백성들을 지칭하는 말로서, 그간 주희(朱熹)의 해설을 따라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나 심지어 “벗, 친구”로 해석하는 것은 본의와 괴리된 것임을 밝혀둔다. 아무튼 덕이라는 것은 이처럼 정치의 구체적인 방법이니, 이제 그 구체적인 항목들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고요가 말했다: “아! 행함에는 또한 구덕(아홉 가지 덕)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덕이 있으면, 이에 가리고 가려 행했다고 말합니다.” 우가 말했다: “어떤 것입니까?” 고요가 말했다: “관대하면서도 엄격하고, 온유하면서도 확고히 서며, 정중하면서도 함께 하고, 다스리면서도 공경하며, 길들이면서도 강인하고, 정직하면서도 부드러우며, 질박하면서도 청렴하고, 강직하면서도 정성스러우며, 굳세면서도 의로운 것이니, 항상 그러함을 밝히면, 길합니다. 날마다 세 가지 덕을 널리 펴고, 아침저녁으로 삼가 밝히면 가문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여섯 가지 덕을 엄격하게 떨치고 공경하며, 명확하게 분간하면, 나라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합해 거두어 널리 베풀어서, 아홉 가지 덕을 모두 섬기면, 뛰어난 인재가 관직에 있게 되어, 모든 관료들이 기준으로 삼고 따를 것입니다. 모든 관료들이 때에 맞춰, 오진(오행)을 따르면, 모든 공적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尙書(상서)] <皐陶謨(고요모)>

상술한 내용들을 정리해보면, 구덕(九德) 즉 아홉 가지 덕은 1. 관이율(寬而栗): 관대하면서도 엄격함,2. 유이립(柔而立): 온유하면서도 확고히 섬,3. 원이공(願而共): 정중하면서도 함께 함, 4. 치이경(治而敬): 다스리면서도 공경함,5. 요이의(擾而毅): 길들이면서도 강인함,6. 직이온(直而溫): 정직하면서도 부드러움,7. 간이염(簡而廉): 질박하면서도 청렴함,8. 강이실(剛而實): 강직하면서도 정성스러움,9. 강이의(強而義): 굳세면서도 의로움을 말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삼덕(三德) 즉 세 가지 덕을 행하면 가문을 소유할 수 있으니 바로 “제가(齊家)”를 뜻하고, 육덕(六德) 즉 여섯 가지 덕을 행하면 나라를 소유할 수 있으니 “치국(治國)”을 의미하며, 이 모두를 합친 구덕(九德) 즉 아홉 가지 덕을 섬기면 모든 관료들이 엄숙하고 삼가게 되니 “평천하(平天下)”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아홉 가지 덕목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강함과 부드러움의 조화라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덕이란 바로 “성인들이 행한 강함과 부드러움의 통치법을 조화롭게 실천하려는 절조(절개와 지조)”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를 하는 지도자가 어떻게 이 강함과 부드러움을 모두 갖춤으로써 조화롭게 실천할 수 있을까? 타인의 실수는 너그러이 포용하여 감싸주는 반면 자신의 실수는 엄격하게 따짐으로써 그 허물을 고치는데 부끄러워하지 않는 모습, 그리고 자신은 검소하게 지내면서 백성들에게는 오히려 베푸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오늘날의 위정자들을 보면 덕을 베푸는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어서 안타깝기 조차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이 “구덕”중에서 “삼덕”과 “육덕”은 어떻게 구별해야 할까? 이어서 다음의 기록들을 살펴보자.

삼덕(세 가지 덕)이라 함은, 첫 번째는 정직함을 말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강직함으로 다스림을 말하는 것이요, 세 번째는 유함으로 다스림을 말하는 것이니, 평화롭고 안락하면 정직함으로 하고, 굳어서 따르지 않으면 강직함으로 다스리며, 화해하여 따르면 유함으로 다스리고, 성정이 가라앉아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강직함으로 다스리며, 식견이 높으면 유함으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尙書(상서)] <周書(주서)>

즉 삼덕은 “정직함”과 “강직함” 그리고 “부드러움”으로 다스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는 위의 “구덕” 중에서 2. 유이립(柔而立): 온유하면서도 확고히 섬,6. 직이온(直而溫): 정직하면서도 부드러움,8. 강이실(剛而實): 강직하면서도 정성스러움에 해당하고, 나머지는 바로 육덕이 됨을 알 수 있다. 이제 이를 그림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이는 필자의 저서인 [논어, 그 오해와 진실]에 수록된 도표를 가져온 것임을 일러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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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러한 “삼덕”과 “육덕” 그리고 “구덕”은 언제부터 있었던 개념일까? 

우 임금이 구주(전 중국)의 쇠를 거두어, 아홉 개의 솥을 주조하니, 세 발은 삼덕을 상징하였다. [十八史略(십팔사략)] <夏王朝篇(하왕조편)>

상술한 기록을 살펴보면 “삼덕”은 우임금 때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보다 위에서 언급했던 고요의 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순임금 때에 이미 “구덕”의 개념이 확립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으니, 이러한 “삼덕, 육덕, 구덕”은 공자를 떠나서 상고시대인 대동의 사회부터 존재했었던 것이다. 

또 바로 여기서 한 가지 풀고 넘어가야 할 오해가 있으니, 그간 [논어] 등을 통해서 알려진 공자의 사상은 공자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공자는 대동사회로부터 시작하여 소강사회를 거쳐서 계승되어온 도(道)를 온전하게 배워 실천하고자 한 정치가이자 사상가 나아가 그것들을 제자들에게 오롯이 가르치고자 했던 교육자였던 인물이지, 새로운 사상이나 가치관의 창시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실은 공자와 동시대를 살다 간 노자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될 터이지만.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고전 다시읽기]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2, 2014년 2월, 안성재, 인천대 교수) 

공자 다시보기(7): 덕(德)의 양대 구성요소, 중(中)과 화(和)
 글쓴이 : 아포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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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다시보기(7): 덕(德)의 양대 구성요소, 중(中)과 화(和)  

앞에서 덕(德)이란 “성인들이 행한 강함과 부드러움의 통치법을 조화롭게 실천하려는 절조(절개와 지조)”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 덕(德)을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강령 다시 말해서 덕을 구성하는 요소들에는 과연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 먼저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기록을 살펴보자. 

희로애락이 드러나지 않은 것, 그것을 중이라고 일컫고, 드러나지만 모두 절도에 맞은 것, 그것을 화라고 한다. 중이라는 것은, 세상의 큰 근본이고, 화라고 하는 것은, 세상이 도에 닿은 것이다. 중과 화에 이르면, 천지가 자리를 잡고, 만물이 자란다. [禮記(예기)] <中庸(중용)>

우선적으로 대강 살펴보면, 즉 이 말은 중(中)과 화(和)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아직 잘 모르지만, 아무튼 중(中)은 도(道)의 근본이고 화(和)는 그 자체로 이미 도에 도달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1. 중(中): 공정하고도 객관적인 태도

우리는 중(中)을 “중립” 또는 “중간”이라는 의미로 인식하고 있고, 또 그렇게 자주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공자가 말하는 중(中) 역시 그러한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쉬이 이해할 수 있을만한 예를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주지하다시피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자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주의국가들은 남쪽을 지지했고, 반면에 사회주의국가인 중국은 북쪽을 지지했다. 그리고 또 세계에는 이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어느 쪽에도 편입되지 않는 소위 “중립국”을 표방하는 나라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국가가 스위스인데, 과연 스위스는 한국전쟁에서 어느 쪽을 지지했을까? 정답부터 말하자면, 스위스는 당시 한국에 물자를 지원한 우리의 우방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 이제부터 중(中)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하나하나 살펴보면, 그 이유를 자연스레 알 수 있을 것이다.

(순)임금이 말했다: “(생략) 나는 그대의 덕을 독려하고, 그대의 큰 공을 기리니, 하늘의 헤아림이 그대 몸에 있어서, 그대가 결국에는 임금에 오를 것이오. 사람의 마음은 위태롭고, 도의 마음은 희미하니, 정성스럽고도 한결같이, 그 중을 진실로 잡아야 하오. (생략).” [尙書(상서)] <大禹謨(대우모)>

어진 이를 돕고 덕이 있는 이를 도우며, 충성스러운 이를 드러내고 어진 이를 이루게 하며, 약한 이는 포용하고 어리석은 이는 책망하며, 어지러운 이를 돕고 망하는 이를 업신여기며, 없애야 할 것을 밀어내고 존재해야 할 것을 튼튼히 하면, 나라가 이에 번창합니다. 덕이 날로 새로워지면, 만방이 그리워하고, 마음이 자만하면, 구족이 이에 떠날 것이니, 임금께서는 힘써 큰 덕을 밝혀, 백성들에게 중을 세워야 합니다. (생략)" [尙書(상서)] <仲虺之誥(중훼지고)>

임금(성왕)이 말했다: “군진이여, 그대는 주공의 큰 교훈을 넓히고, 권세에 의지하여 위세를 떨치지 말며, 법에 의거하여 모질게 하지 마시오. 너그럽고도 법도가 있고, 침착하고 덤비지 않음으로써 화합하시오. 은나라 백성들이 벗어났을 때(위법을 했을 때), 내가 벌하라고 말해도, 그대는 벌하지 말고, 내가 용서하라고 말해도, 그대는 용서하지 말며, 오직 중을 따르시오.” [尙書(상서)] <君陳(군진)>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순임금은 크게 지혜로우셨으니, 순임금은 묻기를 좋아하시고 천근한 말(깊이가 없는 얕은 말)도 살피기를 좋아하셨으며, 악함은 숨기시고 선함을 드러내셨다. 그 양 극단을 잡아, 백성들에게 그 중간을 쓰셨으니, 이 때문에 순임금이 되셨다. [禮記(예기)] <中庸(중용)>

진실함은 하늘의 도이고, 진실하게 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 진실한 사람은 힘쓰지 않아도 중하고, 생각하지 않아도 얻게 되어, 차분하게 도에 들어맞는 것이니, 성인이다. 진실하게 한다는 것은, 선을 가리어 굳게 잡는 것이다. [禮記(예기)] <中庸(중용)>

제곡은 이미 중을 잡아 두루 세상에 미쳤으므로, 해와 달이 비치는 곳과, 바람과 비가 이르는 곳이면, 복종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史記(사기)] <五帝本紀(오제본기)>

즉 중(中)이라 함은 “편벽되지 않고 치우치지 않으며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음”이 되는 것이니, 다름 아닌 공정하고도 객관적인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자정자(子程子) 역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중이라는 것은, 편벽되지 않고 치우치지 않으며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는 것의 이름이요, 용은 늘 그러함이다. [禮記(예기)] <中庸ㆍ序(중용ㆍ서)>

그러므로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공자가 이르시기를: “군자는 두루 미쳐서 편들고 가려서 뽑지 않지만; 소인은 편들고 가려서 뽑지 두루 미치지 않는다.”[論語(논어)] <爲政(위정)>

여기서 공자는 중(中) 즉 양 끝단을 잡아서 그 가운데를 짚는 공정함의 유무로 군자와 소인을 구분하고 있는데,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 있듯이 군자는 소강사회의 지도자 즉 도를 배우고 부단히 노력하여 실천하는 올바른 지도자이다. 즉 이 말은 “군자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편들지 않고 공정하게 판단하는 반면, 도를 따르지 않고 사사로운 이익만을 탐하는 올바르지 못한 인격의 소인배는 한쪽으로 치우쳐 편들기에 공정하게 판단하지 못한다.”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는 왜 이처럼 중(中)을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다음의 기록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치우치지 않고 편들지 않으면, 임금의 도는 평탄하고, 편들지 않고 치우치지 않으면, 임금의 도는 평평하며, 어기지 않고 배반하지 않으면, 왕의 도는 정직해지고, 지극함이 있는 이들을 모으면, 지극함이 있음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尙書(상서)] <洪範(홍범)>

그만큼 중(中)이라는 것은 실천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것이고, 또 중(中)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양쪽의 입장을 모두 이해하여 최종적으로 공정하고도 객관적인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스위스가 중립국을 표방하면서도 한국에 물자를 지원한 이유는, 객관적으로 상황을 파악했을 때 피해국이 한국임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는 하나의 방증이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左傳(좌전)] <昭公(소공) 14년>의 기록을 소개해 보기로 한다. 

진(晉)나라의 형후(邢侯)와 옹자(雍子)가 축(鄐)이라는 지역을 가지려고 오랫동안 다퉜는데, 이 일은 본래 사경백(士景伯)이 판단해야 할 업무였지만, 마침 다른 일 때문에 초(楚)나라로 가느라 자리를 비웠다. 이에 한선자(韓宣子)의 명으로 숙어(叔魚)가 대리로 그 일을 판단했는데, 사실 잘못은 옹자가 했지만 옹자가 그의 딸을 숙어에게 바치자 숙어는 잘못을 형후에게 덮어 씌웠고, 결국 형후는 분노하여 숙어와 옹자를 모두 죽였다. 한선자가 숙향(叔向)에게 누구의 잘못이냐고 묻자, 숙향은 “옹자는 자신의 잘못을 알면서도 뇌물로 속였고, 숙어는 공정해야 할 소송을 거래하는 물건으로 여겼으며, 형후는 사람을 함부로 죽였는데, [상서]의 <夏書(하서)>에 잘못을 미화하는 혼(昏)과 뇌물을 받아 관료의 권위를 더럽히는 묵(墨) 그리고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적(賊)은 모두 사형을 내린다고 되어있으니, 세 사람의 죄는 같습니다.”라도 대답했다. 이 일에 대해서, 공자는 숙향이 숙어의 친형인데도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고 공정하게 판단했다고 평가하고 있으니, 이제 중(中)이 왜 덕(德)을 구성하는 중대한 요소가 되는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2. 화(和): 어느 하나 버리지 않고 함께 가기

화(和)는 액면 그대로의 의미인 “조화로움”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조화로움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필자의 소견으로는 이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하느니, 차라리 노자의 표현을 인용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세상이 모두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이 되는 것을 아는 것, 이는 바로 추함일 따름이고; 모두 선함이 선함이 되는 것을 아는 것, 이는 선하지 못함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이 함께 생겨나고, 어려움과 쉬움이 함께 형성되며, 길고 짧음이 함께 견주고, 높고 낮음이 함께 기울며, 소리와 음률이 함께 조화를 이루고, 앞과 뒤가 함께 따른다. [道德經(도덕경)] <2장>

세상이 모두 어떤 것이 아름다운지를 아는 것은, 바로 추함이 존재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다. 모두 어떤 것이 선인지를 아는 것은, 선하지 못함이 존재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선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대동사회의 이치는 있음과 없음이 함께 조화를 이루는 것이고, 어려움과 쉬움이 함께 조화를 이루는 것이며, 길고 짧음이 함께 조화를 이루는 것이고, 높고 낮음이 함께 조화를 이루는 것이며, 소리와 음률이 함께 조화를 이루는 것이고, 앞과 뒤가 함께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즉 노자는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서로를 지탱하며 걸어가야 한다고 외치는 것이다. 그런데 공자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공자가 이르시기를: "군자는 조화롭게 지내지만 같이 하지는 않고, 소인은 같이 하지만 조화롭게 지내지는 못한다." [論語(논어)] <子路(자로)>

공자가 이 말을 통해서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은 다름 아닌 화(和)와 동(同)의 개념이다. 이를 이해하려면 노자 [도덕경] 4장 4-3의 “그 광채를 조화롭게 하고, 그 속세와 함께 한다.(和其光,同其塵。)”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으니, 노자는 화(和)와 동(同)을 모두 긍정적으로 보는 반면, 공자는 화(和)와 동(同)을 차별화함으로써 화(和)만을 긍정적으로 보고 동(同)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다시 한 번 다음의 기록을 살펴보자.

희로애락이 드러나지 않은 것, 그것을 중이라고 일컫고, 드러나지만 모두 절도에 맞은 것, 그것을 화라고 한다. 중이라는 것은, 세상의 큰 근본이고, 화라고 하는 것은, 세상이 도에 닿은 것이다. 중과 화에 이르면, 천지가 자리를 잡고, 만물이 자란다. [禮記(예기)] <中庸(중용)>

즉 화(和)란 희로애락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모두 드러내 표출시키는 것이니, 기쁨과 분노 그리고 슬픔과 즐거움이 각각 고유의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서로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화(和)는 “서로의 수준이 다름을 인식하면서도, 함께 어우러져 사이가 좋은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同)은 이와 상대적인 개념이 되어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므로, 곧 “같은 수준으로 합쳐져서, 구별이 없이 똑같아지는 상태”를 뜻하게 된다. 어쩌면 이는 “어울림과 아우름은 같은 것일까?”라는 물음과도 상통하는 개념이 될 터인데, 어울림은 “두 가지 이상이 서로 잘 조화됨”을 뜻하는 반면 아우름은 “여럿을 모아 한 덩어리가 되게 함”을 의미하는 것이니, 아마도 화(和)는 “어울림”을, 반면에 동(同)은 “아우름”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따라서 공자가 <자로편>에서 말하고자 한 바는 “도(道)를 배우고 부단히 노력하여 실천하는 올바른 지도자인 군자는 서로 수준이 다른 이들과 함께 어우러져 사이가 좋지만, 그들과 같은 수준으로 합쳐져서 구별이 없이 똑같아지지는 않는다. 반면에 도를 따르지 않고 사사로운 이익만을 탐하는 올바르지 못한 인격의 소인배는 다른 이들과 같은 수준으로 합쳐져서 구별이 없이 똑같아질 뿐, 서로의 수준이 다름을 인식하면서도 함께 어우러질 수는 없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즉 공자는 노자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는 중(中)과 화(和)가 도(道)로 나아가는, 다시 말해서 덕(德)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임에는 공감하지만, 동(同)에 대한 가치관에서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이 점 역시 [예기]의 <예운(禮運)>편에 기록된 “대동사회에서는 사람들은 자신의 어버이만이 어버이가 아니었고, 자신의 자식만이 자식이 아니었다. 하지만 소강사회에서는 각각 자신의 어버이만이 어버이가 되고, 자신의 자식만이 자식이 되었으며, 재물과 힘은 자신을 위해 썼다.”라는 표현처럼, 대동과 소강을 구분 지을 수 있는 중대한 차이점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고전 다시읽기]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3, 2014년 3월, 안성재, 인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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