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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17일 목요일

스티븐 샤비로(Steven Shaviro) -사변적 실재론 - 입문글 Speculative Realism - a Primer

http://blog.daum.net/nanomat/997

사변적 실재론 - 입문글
Speculative Realism - a Primer

―― 스티븐 샤비로(Steven Shaviro)

지금까지 근대 서양 철학최소한 1781년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순수 이성 비판"을 출판한 이래로은 존재론보다 인식론을 우위에 두는 경향이 있었다. 존재론은 존재의 본성에 관련된 것인데, 가장 기본적인 층위에서 무엇이 존재하는지 규정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인식론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아는지와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세계를 알 수 있는 우리 능력의 근거와 한계를 면밀히 조사한다. 인식론이 존재론에 앞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세계가 어떠한지에 관한 주장을 제시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런 주장들에 대한 근거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 그것들이 참이라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일 뿐이다. 칸트는 당대의 철학이 그런 근거를 제공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관찰이나 경험적 증거에 매이지 않은 채 순수한 논리적 연역에 의해 형이상학적 필연을 발견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독단적이었거나, 아니면 경험적 사실과 주관적 체험에 의거하지만 이런 특수한 사실들과 직접적인 경험을 넘어서 일반화할 수 없다고 주장할 정도로 회의적이었다. 이런 경향 둘 다에 맞서서 칸트는 철학은 자체의 기초를 면밀히 조사하여 설명함으로써 시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철학이 이것을 행하지 못하고, 그 대신에 형이상학적 사변에 직접 착수한다면, 넌센스만이 초래될 것이다. 칸트의 경우에, 그리고 그때 이후 대부분의 철학자들의 경우에,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그리고 무엇이 그것이 참이라는 우리 주장을 정당화하는지 설명할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그저 무언가를 맹목적으로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

원칙적으로 존재론에 대한 인식론의 이런 우위는 나무랄 데가 없는 듯 보인다. 그런데 실제로 그것은 꽤 문제적인 것이 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결국 우리가 만나는 세계 속 사물들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만나는 우리 나름의 과정에 관해 말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사물 자체"는 알 수 없는 것이며, 우리가 정말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현상사물들이 우리에게 현시되는 양태뿐이라고 역설한다. 칸트 이후 수 세기 동안 이것은 일종의 공통 감각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세계에 적용하는 독자적인 부과물들의 왜곡 렌즈들을 결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사물들을 그것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오늘날 이런 부과물들은 칸트의 범주들을 넘어서 언어, 우리의 특수한 인지 메커니즘 그리고 우리의 문화적 편향과 이데올로기 같은 것들을 포함한다.

인식론적 성찰은 중요한데, 그것 덕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편견과 의심받지 않은 가정들을 인식하게 된다. 그런데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그런 성찰 때문에 우리가 이런 편견과 가정들에서 벗어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시각들에 갖혀 있어서 여타의 견해를 취할 수 없다. 어쨌든 우리가 모든 것다른 사람들, 다른 살아 있는 존재자들 그리고 우주 속 다른 것들을 우리 자신의 모습대로 고치는 것의 위험에 관해 걱정하는 것이 사실상 중요하고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우리가 치르는 비용은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에 관해서만,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만 말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충분히 멀리 밀고 가면, 우리는 세계란 인위적인 사회적 또는 언어적 구성물일 뿐이며, 세계는 우리 자신이 그것에 집어넣은 것으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믿게 된다. 이십 세기 말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 그리고 더 미묘한/복잡한 방식으로, 쟈크 데리다(Jacques Derrida) 같은 사상가들의 탈근대적 철학의 경우에는 이런 구속복에서 벗어날 길이 전혀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지적하고 개탄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벗어날 수 있고, 그래서 진정으로 다른 무언가를 만날 수 없다.

이십일 세기에 철학적 사변의 부활은 이런 딜레마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다. 그것은 인식론의 칸트적 우위를 무화시키고자 하는데, 그런데 그것은 매우 칸트적 이유에서 이것을 행한다. 칸트 자신의 인식론의 격상과 형이상학적 사변의 금지는 독단적 합리주의라는 스킬라와 경험론적 회의주의라는 카리브디스 둘 다를 피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현재 인식론의 격하를 동반하는 칸트의 반전은 맹목적인 이성중심주의와 민족중심주의라는 스킬라와 무한한 해체와 자기 비판이라는 카리브디스 둘 다를 피하고자 하는 비슷하게 고무된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사변이 모든 가능한 지식의 경계를 침범하기 때문에 칸트는 사변을 비난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늘날의 새로운 사변적 사상가들의 경우에는 바로 지식의 한계 때문에 사변이 필요하다. 실재적인 것은 그렇게 존재하지만,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이십일 세기 사변은 우리의 단단한 지식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독단적 주장을 제기하기는 커녕, 이 새로운 형태의 사변은 역설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들의 공간과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의 시간을 탐사한다.

2007년에 네 명의 철학자퀑탱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 그레이엄 하만(Graham Harman), 레이 브래시어(Ray Brassier) 그리고 이에인 해밀턴 그랜트(Iain Hamilton Grant)―가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표제어 아래 런던의 골드스미스 칼리지에서 각자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들은 서로 그리고 서로의 작업을 얼마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때때로 비교적 균일한 집단으로 간주되었지만, 그 이후로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표제어를 포기했다. 그리고 사실상 이 사상가들 사이의 차이가 매우 커서 그들은 단일한 철학 학파를 이룬다고 할 수 없다. 그래도, 이 사상가들이 최소한 중요한 출발점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가리키는 데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레이블이 여전히 유용하다. 하만의 말에 따르면, "사변적 실재론자가 되는 데 필요한 것은 '상관주의'에 반대하는 것뿐인데, 상관주의는 모든 철학을 인간과 세계의 상호 작용에 정초하는 그런 종류의 철학(오늘날에도 여전히 지배적인)을 가리키는 메이야수의 술어이다."

사변적 실재론은 세계 및 세계 속 사물들의 우리 자신의 개념화로부터의 독립성을 역설한다. 그것은 세계의 질서는 우리 마음(또는 우리 언어 또는 문화)이 그것을 구성하기 위해 작동하는 방식에 의존한다는 칸트적 테제를 거부한다. 또한 그것은 자아와 세계, 또는 주체와 객체, 또는 아는 자와 알려지는 것 사이의 원초적인 호혜성 또는 대응성이라는 현상학적 가정을 거부한다. 실재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기묘하다. 사물들은 우리가 그것들에 관해 지니고 있는 관념들에 결코 들어맞지 않는데, 그것들에는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항상 존재한다. 세계는 우리 자신의 인지적 범형과 서사적 설명 양태들에 꼭 들어맞지 않는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가 아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변이 필요하다. 우리의 고질적인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서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비인간 세계의 존재를 진지하게 고려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변을 전개해야 한다.

미리 결정된 한 가지 사변 형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변은 적절한 결말에 대한 아무 확신도 없는 미지의 것으로의 항해이다. 이런 점에서, 자유로운 철학적 사변(philosophical speculation)과 궁극적으로 이익을 낼 목적으로 항상 실행되는 금융 투기(financial speculation)가 대조될 수 있다. 오늘날 파생 상품 시장에서 실행되는 헤지 펀드의 투기는 위험(risk)을 계산하고 수량화하는 한 방식으로 간주된다. 시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간에, 투자자들은 확률의 법칙들을 고려함으로써 이익을 낼 수 있다. 그러므로 금융 투기는 미래를 관리하고 제어하는 한 방식이다. 그것은 미래가 현재와 정합적일 것이라는 의심받지 않은 가정에 의존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형이상학적 사변은 위험이 아니라 환원 불가능한 불확실성을 대면한다. 이런 구별짓기는 위대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에 의해 처음 이루어졌다. 위험은 고정된 수의 가능한 결과들 사이에 확률을 분배하는 통계적 규칙들에 의해 관장되는데, 동전 던지기 또는 주사위 던지기를 고려하라. 그런데 불확실성은 확률론적 견지에서 수량화될 수 없다. 우리는 어떤 결과들이 가능한지 알 길이 없는데, 그것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것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것들 가운데 무언가가 일어날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는 말할 것도 없다. 오늘날 대부분의 경제학자와 금융 전문가들은 케인스의 분석을 무시하고, 그래서 파생 상품과 선물 시장이 불확실성이 아니라 위기의 견지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잘못 가정한다. 그렇지만 경제학에서의 실정이 어떻든 간에, 철학적 사변은 관리할 수 있는 위기가 아니라 오히려 전적으로 기본적인 불확실성의 문제이다. 그런 사변 과정을 인도할 공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사변적 실재론 사상가들은 각자 우리로부터 떨어져 알 수 없게 존재하는 세계에 관한 사변을 전개하는 상이한 방식을 제시한다.

<<풀려난 허무(Nihil Unbound)>>에서 레이 브래시어는 칸트의 인식론적 관심사, 즉 우리가 세계에 관해 정당하게 말할 수 있는 방식들을 관장하는 범주와 규제적 이상들또는 오늘날 우리가 합리성의 규범이라고 부를 확률이 더 높을 것에 대한 주장을 전적으로 거부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브래시어가 이런 규범을 암묵적으로 인간중심적인 칸트의 초점에서 떼어낼 때, 그는 칸트를 넘어서서 일종의 급진적 사변에 관여한다. 브래시어의 경우에, 인과성 같은 칸트의 범주들은 세계에 인식 가능한 어떤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우리 자신의 마음이 세계에 부과하는 구조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우리 마음에 불투명하고 이질적인 사물들에 접근하고자 할 때, 이런 방법과 가정들은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강요된 것이다. 합리성은 소름이 오싹 끼칠 만큼 비인간적이다. 물리과학 덕분에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도 우리의 척도에 따라 만들어지지 않은 세계를 개념화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과학적 기획은 결코 완결돠거나 최종적일 수 없는데, 세계는 궁극적으로 비개념적인 것이고 개념화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물에 관한 우리의 관념들은 사물 자체에 결코 딱 맞을 수 없다. 칸트의 경우에, 이것은 우리가 현상, 즉 단순한 외양들의 영역에 귀속되어 있다그렇지만 또한 그 내부에서 안전하게 정초되어 있다는 점을 의미했다. 그런데 브래시어의 경우에, 우리가 끊임없이 사물 자체에 접근함(그런데 결코 최종적으로 이르지는 못한다)에 따라, 우리는 우리가 당연히 여기곤 하는 모든 것을 박탈당한다. 우리가 우주에 부과하기 위해 헛되이 노력한 모든 의미, 가치 그리고 서사들을 벗겨내면, 우주는 본원적으로 공허하고 무심하다. 위로가 되는 우리의 전제들은 용해되고, 그래서 아무 근거도 없는 사변만이 우리에게 남게 된다.

<<유한성 이후>>라는 중요한 책에서, 알랭 바디우의 제자였던 퀑탱 메이야수는 칸트를 안팎으로 뒤집고, 칸트가 거부했던 그런 종류의 존재론적 사변에 대한 필요를 브래시어와 전적으로 상이한 방식으로 갱신한다. 메이야수는 칸트주의와 현상학의 "상관주의적" 가정들에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한다. 그는 자신이 선조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역설하는데, 선조성은 인류, 또는 어떤 형태의 생명에도 선행하는, 그래서 관찰되고 해석되거나 평가받을 어떤 가능성에도 선행하는 우주의 분명한 존재를 가리킨다. 칸트는 무엇이든 어떤 형태의 존재에도 논리적으로 선행해야 하는 "경험의 선험적 조건"(이것은 존재자에 의해 항상 이미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을 확립한다. 그런데 메이야수는 이런 조건 자체가 세계 역사의 어떤 시점에서 생성되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것이 출현하기 전에 우주는 이미 존재했지만, 어떤 의미에서도 우리에게 "주어지"거나 우리의 범주들에 따라 조직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칸트에 의해 확립된 마음과 세계 사이의 상관관계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우연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통찰로부터 나아가서 메이야수는 본원적 우연성이 유일한 보편적 필연성이라고 추론한다. 그는 세계가 현재의 모습과 달리 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상황은 아무 이유도 없이 일어날 수 있다. 이른바 "자연 법칙"조차도 임의로 변하거나 사라질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메이야수는 사변을 통해 진리를 발견한다또는 더 좋게 말하자면, 사변의 진리를 확립한다고 주장한다. 칸트는 우리 자신의 오성 능력의 한계 때문에 "사물 자체"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 반면에, 오히려 메이야수는 바로 이런 불가지성이 사물 자체의 실정적인 특성이고, 그래서 우리는 이것이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맞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객체지향 존재론으로 부르는, 사변적 실재론에 관한 그레이엄 하만의 판본은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와 마누엘 데 란다(Manuel De Landa) 같은 사상가들을 언급하면서 우리와 독립적인 사물의 존재에 대한 다른 한 접근방식을 취한다. <<게릴라 형이상학(Guerilla Metaphysics)>> <<네겹의 객체(The Quadruple Object)>>를 비롯한 다양한 사변적 저작에서 하만은 칸트의 가장 기본적인 주장들 가운데 하나를 증보함으로써 칸트를 수정하고 사변의 필요성을 다시 도입한다. 칸트는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물에 부과하는 틀로 그것을 경험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물 자체는 알 수 없다고 말하는 반면에, 하만은 이 상황을 우주 속 모든 존재자에게 일반화한다. 세계를 특수한 한정된 방식으로 파악하는 것은 인간, 즉 합리적 존재자들만이 아니다. 세계는 다수의 객체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런 객체들 가운데 어느 것도 피상적인 방식을 넘어서 여타의 객체(심지어 자체에게도)에 접근할 수 없다. 하만의 경우에, 우리 지식의 유한성, 즉 넘어설 수 없는 한계를 역설할 때 칸트는 옳다. 그런데 최소한 그런 한계 내에서 완전하고 확실한 인간중심적인 구조들을 확립하기를 요구할 때 칸트는 그르다. 우리는 세계에 조건을 부과하기보다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의 제한된 능력 내에 갖히게 된다. 칸트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사물에 관해서는 사변을 전개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만은, 우리가 사물 자체를 알 수 없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사변을 전개하는 것이라고 응대한다. 우리는 객체를 인지적으로 파악할 수 없지만, 은유와 다른 심미적 실천을 통해서 객체를 암시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사물을 전적으로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마음에 품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것이 사변의 길인데, "실재적인 것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만 있는 것이다."

브래시어와 마찬가지로 닉 랜드(Nick Land)의 학도였던 이에인 해밀턴 그랜트는 <<셸링 이후의 자연에 관한 철학들(Philosophies of Nature After Schelling)>>에서 다른 한 판본의 사변을 제시한다. 칸트 자신의 철학에서 "경험의 선험적 조건"은 모든 인지가 따라야 하고 따를 필요가 있는 선재하는 구조이다. 그런데 그랜트는 칸트 이후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셸링을 좇아서 이런 구조 자체가 단순히 주어진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 생성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선험적인 것모든 경험에 선행하고, 경험을 위한 조건을 확립하는 것은 결코 정적인 산물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진행 중인 과정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셸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랜트의 경우에도 "선험적인" 것은 오직 자연 자체의 진행 중인 무한한 생산성과 동일시될 수 있다. 이런 모든 사상가들에게 사변은 필연적인 것인데, 그것이 우리가 우리 육체와 마음을 생성하지만 우리 마음과 육체로 영원히 파악할 수 없는 힘, 역능 그리고 사건들을 추적하고자 시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사변적 실재론자들은 모두 형이상학적 사변에 대한 칸트의 금지를 우회하는 방식을 찾아낸다. 그들은 칸트가 존재론보다 인식론을 우위에 둔 것에서 비롯되는 인간중심주의에 저항하기 위해 작업한다. 메이야수와 브래시어의 경우에, 칸트적 인식론의 제약을 극복하는 방식은 칸트에 의해 발견된 가능한 지식에 대한 한계가 우리 자신의 인지 역량에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환원 불가능하게도 우연적(메이야수)이거나 비개념적(브래시어)인 사물 자체의 특징이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다. 그런데, 하만과 그랜트의 경우에는 인간 인지에 부여된 특권 자체가 의문시되어야 한다. 인간 지각과 오성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것보다 덜 특별한데, 그것들은 관계와 인과적 영향의 과정들의 훨씬 더 넓은 스펙트럼에 속하기 때문이다. 솜 덩어리를 사색할 때 내가 행하는 것은 솜 덩어리를 물들일 때 염료가 행하는 것과 많이 다르지 않고, 또는 그 점에 있어서 솜 덩어리를 태울 때 불이 행하는 것과 많이 다르지 않다. 하만의 경우에, 이것들은 모두 또렷히 개별적인 존재자들 사이의 "대리적 접촉"에 관한 사례들이다. 그리고 그랜트의 경우에, 그것들은 모두 자연의 끊임없는 생산성에 의해 추동되지만 정지되거나 물화되기도 하는 변형들이다. 인식론에 우위성이 주어질 수 없는데, 이해와 앎 자체가 그것들이 자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더 큰 운동 내에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 사상가들은 모두, 더 고등한 "독단적" 진리을 발견하기 위한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메이야수가 존재의 "거대한 야외"라고 부르는 것엄청나게 방대하고 기묘하며 본원적으로 불확실하여 우리 자신의 가치와 규범으로 포괄할 수 없는 영역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사변을 수용한다.


2015년 9월 14일 월요일

실재론, 반실재론, 존재론

http://blog.daum.net/nanomat/118

- 아래의 인용문은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의 블로그 글 <<실재론, 인식론, 과학, 그리고 과학주의(Realism, Epistemology, Science, and Scientism)>>에서 일부를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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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재론", "반실재론", "인식론", 그리고 "존재론"이라는 술어들을 사용하여 가능한 네 가지 입장을 구별하자.
[...]
1. 실재론적 인식론(Realist Epistemology): 실재론적 인식론은 우리가 세계의 객체들에 직접 접근할 수 있다는 입장인데,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표상들이 그것들 자체와 정확히 같을 것이다. 여기서 정신은, 세계의 객체들로부터 데이터를 있는 그대로 그저받은 다음에 충실하게 보고하는, 수동적인 세계 수용자로 취급된다.

2. 반실재론적 인식론(Anti-realist Epistemology): 반실재론적 입장은 훨씬 더 복잡하다. 여기서는 인식자가 수동적인 수용자가 아니라, 입력에 적극적인 기여를 하는데, 개념, 실천, 언어, 사회적 범주 등을 통해 입력을 조직하여 인식자의 경험의 층위에서 이런 입력에 특정한 형식이나 구조를 부여한다. 여기서 나는, 블랙박스 모형이 반실재론적 인식론과 실재론적 인식론 사이의 차이에 관해 생각하는 가장 쉬운 방식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재론적 인식론은 수용된 자극을 기록만 할 뿐인 수동적인 수용자로 다루는 반면에, 반실재론적 인식론자들은 세계로부터의 자극을 이후에 블랙박스의 구조(언어, 사회적 범주, 정신의 선험적 개념 등)에 의해 처리되는 입력으로 여기는데, 블랙박스는 자체를 거치는 자극을 처리하여 그것과 다른 출력을 산출한다. 내가 보기에, 블랙박스 모형은 모든 반실재론적 입장에 공통적이다. 그것들이 다른 지점, 그것들이 논쟁를 벌이는 논점은 그 블랙박스가 어떤 처리 메커니즘을 포함하고 있는지에 관한 문제이다. 물론 반실재론적 인식론은 당연히 인간중심적일 것인데, 지식에 관한 문제는 우리인간들이 세계를 어떻게 알게 되는지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3. 반실재론적 존재론(Anti-Realist ontology): 존재론은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라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의미에서 무엇이 존재하며 어떤 동역학이 이런 존재자들을 지배하는가"라는 문제를 다룬다. 그러므로 반실재론적 존재론은 존재자들의 존재―존재자들은 무엇인가―를 우리의 작은 블랙박스의 출력과 등치시키는 존재론이다. 그 논제에 따르면, 존재는 블랙박스의 출력―(데리다가 <<그래마톨로지>>에서 서술한 대로) 표명, 또는, 칸트가 서술한 대로, 현상―이라는 것이다. 반실재론적 존재론의 경우에 일반적으로 존재는 두 가지 의미로 진술된다는 점을 유의하자. 한편으로, 존재는 블랙박스의 출력과 등치된다. 그렇지만 출력은 입력 없이는 블랙박스에 의해 산출될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이런 입력은 어딘가에서 와야 하기 때문에, 우리의 블랙박스(여기서 블랙박스는 정신과 직관의 선험적 범주들, 디페랑스의 작용, 현존재에게 존재를 부여하는 것 등을 포함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에 대해 입력을 제공하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한 유형의 존재가 있어야 한다. 요약하면, 반실재론적 존재론들은 헤겔적 또는 버컬리적 경로를 택하지 않는다면 존재를 일의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

4. 실재론적 존재론(Realist ontology): 반실재론적 존재론자들이 "존재란 (우리에 대한) 현상이다"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실재론적 존재자들은 우리에 대해서만 존재하는 존재자들이(예를 들면, 화폐) 있지만, 이것이 존재의 전부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창을 통해 나무를 바라볼 때] 나무가 창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의미에서 인간들로부터 독립적인 존재들도 있으며, 우리는 존재가 의미하는 바의 특질들에 관해 매우 일반적이지만 유의미한 것을 말할 수 있다.

인식론에 대한 이런 두 가지 가능성과 존재론에 대한 이런 두 가지 가능성을 개략적으로 언급되었으니 이제 이런 입장들의 조합들을 형성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알아챌 것이다. 그런 입장들이 세 가지 있다.

1. 실재론적 인식론과 함께 실재론적 존재론을 옹호하는 것이 가능하다. 사실상 실재론적 인식론을 옹호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실재론적 존재론을 옹호한다.

2. 반실재론적 인식론과 반실재론적 존재론을 옹호하는 것이 가능하다. 나는 이것이 오늘날 대륙철학의 지배적인 입장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3. 반실재론적 인식론과 함께 실재론적 존재론을 옹호하는 것이 가능하다.

나는 객체지향 존재론자들이 옹호하는 것은 세 번째 입장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 반실재론적 인식론자들은 올바르게도 실재론적 인식론을 소박하며 독단적인 입장이라고 거부한다. 우리가 사물들을 즉각적으로 지각하는 방식이나 학문들 내부의 학문분과적 경계들이 존재하는 그대로의 세계에 대한 지도를 그린다고 가정할 이유가 전혀 없다. 게다가 자신들의 인식론적 탐구에서 반실재론적 인식론자들은 올바르게도 현상을 조직하고, 지식을 생산하며, 기타 등등에 있어서 블랙박스에 의해 수행되는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했다. 우리는 우리의 블랙박스가 출력의 산출에 기여하는 바에 관한 이런 논쟁들을 가져야 하고, 반실재론적 인식론의 전통이 발견한 중요한 결과들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만, 반실재론적 인식론자들과 실재론적 존재론자들이 갈라지는 지점은 존재들에 대한 우리의 접근에 관한 의문들이 존재들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데 충분하다라는 논제에 대해서이다. 객체지향 존재론자들의 경우에는, 우리가 저쪽에 있는 객체들을 어떻게아는지에 관한 의문들을 넘어서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에 관한 중요하고 결정적인 의문이 여전히 있다. 이 의문은, 로이 바스카를 따르면, 실재론적 존재론자들의 경우에, 우리가 어떻게 아는지에 의해 철저히 규명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객체지향 존재론자는 우리 지식의 한계, 무엇이든 어떤 특수한 유형의 객체를 알기 위해서는 탐구에 나서야 한다는 사실, 기타 등등을 쉽게 인정하지만, 탐구에서 그리고 탐구를 통해서 발견되는 차이들이 출력의 영역에만 속하는다는 논제는 거부한다. 오히려 실재론적 존재론자는 이런 차이들이 출력에만 한정될 수 없으며, 오히려 이런 차이들을 산출하는, 정신으로부터 독립적인 입력, 즉 세계와 관련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

번역: 김효진

신실재론 입문 - 부정성, - 마우리치오 페라리스(Maurizio Ferraris)

http://blog.daum.net/nanomat/774

1부
부정성(Negativity)

―― 마우리치오 페라리스(Maurizio Ferraris), <<신실재론 입문(Introduction to New Realism)>>, pp. 17-33.

지난 이 세기 동안(최소한) 그리고 탈근대주의에서 절정에 이른 과정을 거치면서 철학과 문화는 부정성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근대 시대와 탈근대 시대를 특징지운 기본적 관념은 역사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세계에서 많은 것들이 구성되고, 그래서 해체되고, 비판받으며, 변형될 수 있고 변형되어야 한다는 신성 불가침의 믿음이었다. 여기서 사실상 우리는 항상 부인하는 정신의 승리를 목격했는데, 그것은 의회 민주주의, 근대 과학, 성 평등 등―물론, 모든 종류의 재난들과 더불어―을 가져다 주었다. 그렇지만 이런 부정성은 통제할 수 없는 과정과 더불어 특히 호수와 산을 비롯한 모든 것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관념을 촉발했다. 확실히 그런 관념은, 이른바, 세계들의 구성자들이 되는 개인들의 권력에의 의지를 부양한다. 그런데 동시에 그것은 모든 사람이 (외관상)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으며 진리와 허구 사이의 차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거짓 해방에 이르는 길로서 제시된다. 그것은 내가 '리얼리티즘(realitism)'('리얼리티 쇼'에 의거하여 만들어진 낱말)라고 부르는 것의 세계이고 탈근대주의의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하는 듯 보인다.

탈근대주의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는 쇼펜하우어의 원리는 동등하거나 공존하는 존재자들로 간주하게 된(이것이 그 시대의 독특한 특질이다) 매체 체계와 탈근대성의 근본적인 존재론적 원리가 되었다. 결국 다음과 같은 것이 참된 위대한 탈근대적 이론이었다. 실재는 구성되고, 그래서 궁극적으로 실재는 불특정한 인류의 표상들과 독립적으로 현존할 수 없다. 이 이론은 탈근대성에서 매체의 과도한 증강을 설명하는데, 사실상 탈근대주의는 매체 '허구화'로 대체된 실재의 종말을 선언하는 역사 철학으로 자처한다. 니체를 좇아서 실재적 세계는 동화가 되어 버렸고, 그래서 사실은 전혀 존재하지 않고 해석만 존재한다면, 매체학은 존재론이 되고 매체는 실재의 구성자로 변환되는데, 이것은 걸프 전쟁을 순전한 매체 발명품으로 간주한 보드리야르(Baudrillard)뿐 아니라 제국의 권력은 영화 제작업체와 꼭 마찬가지로 실재를 구성할 수 있다고 믿은 것으로 유명한 칼 로브(Karl Rove)와도 일치한다.

이 원리는 내가 탈근대적인 공통의 것들(koine)을 요약한다고 제안하는 세 가지 중요한 점들로 명시적으로 표명된다. 첫째는 아이러니화(ironisation)인데, 이것에 따르면 이론(또는 심지어 낱말들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을 진지하게 간주하는 것은 일종의 독단주의를 나타내고,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진술로부터 역설적인 초연함―철자법적으로는 인용 부호로 표현되고, 심지어 물리적으로는 구두 연설에서 인용 부호를 나타내기 위해 손가락을 구부림으로써 표현된다―을 유지해야 한다. 둘째는 탈승화(desublimation), 즉 욕망이 자체적으로 한 가지 해방 형식을 구성한다는 관념인데, 왜냐하면 이성과 지성은 지배 형식이고, 그래서 해방은 본질적으로 혁명적인 느낌과 육체를 통해서 추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탈객관화(deobjectification), 즉 사실은 전혀 없고 해석만 있을 뿐이라는 가정인데, 이것으로부터 우호적인 연대가 무심하고 폭력적인 객관성을 지배해야 한다는 따름 정리가 도출된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내가 인문학과 철학의 '직업적 반실재론'으로 부르자고 제안하는 것의 기원을 발견하게 된다. 자연 과학(그런데 우리는 간단히 '과학'이라고 해도 무방하다)이 실재와 객관성의 권역 전체를 담당하는 듯 보이는 시기에 철학자라는 것은 실재는 현존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그리고 실재는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언어에 의해 결정되며, 패러다임 등에 의해 제조된다고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과학의 시대에 인문학은 어떤 존중할 만한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과학자들은 구성하고, 인문학자들은 해체한다. 세 가지 기본적인 선택지가 존재한다. 해체주의적 반실재론자, 과학주의의 (실재론적 또는 구성주의적) 옹호자 그리고 부정적 실재론자(이 경우에 진리와 실재는 과학의 특권이다).

내 의견으로는, 왜 지성적인 사람들(탈근대적 철학자들이 그랬듯이)이 로티(Rorty)―내 의견으로는 푸코, 데리다 그리고 들뢰즈보다 덜 독창적이지만, 탈근대적 역설들에 이론적 형식을 부여하려고 시도한 유일한 사람이다―가 올바르게도 '역설적인 이론(ironic theory)'으로 불렀던 것을 실천하면서, 진리의 대응물이 전혀 없이, 돌발적 발언이나 과장된 표현을 표명하는 것에 만족해야 하는지 자문할 가치가 있다. 나는 그 이유가 내가 제시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지난 이 세기 동안 철학은 과학에 예속되거나(실증주의, 그런데 삼십 년 전에 '인간 과학'의 대유행도 생각하자) 아니면 과학을 비판할 수밖에 없었다. 과학자와 반과학자들이 모두 실재에 관한 지식은 과학의 특권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에(두 범주의 구성원들은 아프면 의사에게 간다) 반과학자들은 게다가 반실재론자가 되고, 그래서 인간은 최근의 발명품이며,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등의 주장들을 표명하게 된다. 그런 주장들을 비판하기 위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그것들은 진지하게 간주하는 것일 것이다. '인간은 최근의 발명품이라고 말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까닭을 말해야 한다.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면, 이 순간에 당신이 현존하고 있는 텍스트를 제시해야 한다.' 나는 이것이, 퍼트넘에 의해 사용된 표현을 차용하면, '안개와의 주먹다짐'을 피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있다.

나는 이것이 헛된 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것 덕분에 우리는 탈근대주의가 독일 관념론의 위기의 말기(언제 '철학의 죽음'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있었는지 기억하자)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모든 실재는 과학에 속하고, 그래서 철학에게는 대단치 않은 것들―신학, 영성주의, 정신주의, 개인적 열상, 인간 세계, 생활 세계; 형이상학의 극복, 해체,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사유'의 탐색 같은 현장 활동; 철학사 또는 역사적 지식으로서의 철학; 정치적 운동주의로서의 철학, 탈근대주의, 사실은 전혀 없고 해석만 있을 뿐이다; 구피, 플루토 그리고 도널드 덕의 철학(팝소피아)―이 남게 된다. 이런 불편함의 가장 명백한 증상들 가운데 하나는, 하이데거는 심지어 탈은폐로서의 진리에 관한 대안적 이론―즉, 여타의 사람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반면에 철학자들에게만 적용되는(철학자들이 철학을 하고 있지 않다면 그들에게도 적용되지 않는) 철학자들을 위한 진리―을 개발했었어야 했다는 사실이었다.

분석 철학도 역시 이런 잔류화의 전략에 동참했다. 소피스트(부정하게 논증하는)와 과학자(실재에 관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논증할 필요가 없는)들과 달리 철학자는 제대로 논증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떤 근거에서 논증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물론 나는 매우 조악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내 목적은 탈근대적 반실재론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는 점을 설명하는 것이다. 만약 상황이 이렇다면, 실재론을 역설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거나 자명한 무언가를 역설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대 철학의 거동에 있어서 무언가가 불필요하게 자기 제한적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포퓰리즘

포퓰리즘(populism)은 해방에 대한 탈근대적 희망의 기반을 약화시킨 모든 정치들 가운데 첫 번째의 것이었다. 매체 포퓰리즘의 등장은, 대량 파괴 무기들에 대한 허위 증거에 의거하여 전쟁을 개시하는 지경에 이른 이데올로기적 구성물로서의 진리의 거리낌 없는 사용은 말할 것도 없이, 결코 해방적이지 않은 실재에의 작별의 일례를 제공했다. 매체와 몇 가지 정치적인 프로그램들에서 우리는 "사실은 전혀 없고 해석들만 있을 뿐"이라는 니체의 원리―겨우 몇 년 전에 철학자들이 해방에 이르는 길로서 제안했지만 사실상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말하고 행하는 것에 대한 정당화로 제시되는―의 실재적 결과를 보았다. 그러므로 니체의 구호의 진정한 의미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가장 강한 자의 이유가 항상 최선의 것이다.' 이런 환경은 분석적 세계에 있어서 반실재론의 종말과 대륙적 세계에 있어서 반실재론의 종말 사이의 약간의 시간 간격을 설명한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동안에 여전히 분석적 반실재론은 대부분 존재했고 대륙적 반실재론은 비교 문학 학과들에서 여전히 존재했다.

그런데 21세기에는 실재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오히려 신매체는 증강된 실재, 즉 결코 가상적이지 않는 기록물, 고착물, 기입물, 문서들의 기하급수적인 성장을 드러내었는데, 통화 기록이 범죄로 기소된 사람의 알리바이를 날려 버릴 때처럼 사실상 그것들은 흔히 너무나 실재적이다. 가장 오래되고 가장 성공적인 앱들 가운데 하나로서 근처의 주유소, 레스토랑, 약국 등의 위치를 알려주는 '어라운드미(AroundMe)'라는 앱을 살펴보자. 여기서 우리는 컴퓨터들이 우리로 하여금 제2의 전적으로 가상적인 삶으로 진입하게 하는 수사법에 의해 흔히 언급되는 것과 매우 다른 무언가를 목격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더  삶, 우리가 갖는 유일한 삶에 속하며, 그리고 우리는 정보로 풍성해진 이런 증강된 현실의 효과를 너무나 잘 지각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이 지점에서는 돌도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세컨드 라이프(Second Life)의 짧은 가상적 꿈이 방금 먹은 것에 대한 서술까지 섭렵하는 문서들로 가득찬 페이스북에서의 매우 실재적이고 흔히 자책적인 편재에 압도당했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심지어 그런 앱들을 너머 기록이라는 단순한 행위가 우리가 알고 있는 실재(즉, 나중에 내가 밝히듯이, '인식론적 실재'라고 부르곤 하는 것)의 추산할 수 없는 증가를 낳는다. 오늘날에는 <지나가는 어느 여인에게(A une passante)>에서 보들레르에 의해 서술된 것―사라져서 결코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덧없는 아름다움―과 같은 경험―어쨌든 참신성과 일시성으로서의 근대성의 본질인 포의 '네버모어(nevermore)'을 떠올리게 하는 경험―을 갖는 것은 근본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 오늘날 보들레르는 자신의 모바일 폰으로 지나가는 여인의 사진을 찍을 수 있고, 그래서 페이스북에서 친구 요청으로 그녀를 추적하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조건이 참신성, 덧없음 그리고 일시성보다 반복, 보존 그리고 다시 쓰기에 유리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가 언급했듯이, 모든 행위가 기록된다는 사실은 실재를 두드러지게 증가시킨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이미 컴퓨터들로 둘러싸여 있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몇 년 전에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은 것을 자각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자료에 파묻혀 있다는 것이며, 그리고 이제 우리는, 예컨대, 유튜브를 검색하면 이것을 정말로 깨달을 수 있다. 인터넷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거래, 그리고 특히 우리의 모든 연구는 대규모의 초국가적 존재자들에 의해 기록되고, 그래서 훨씬 더 광범위한 통제권을 행사하는데, 사회적 연결망에 자신에 관한 정보를 자발적으로 제공하는 사람들은 통제되는 사람들이다. 이런 환경은 다른 한 고찰을 시사한다. 모든 것이 기록되는 시기에 제공될 수 있는 유일한 보호는 기술적으로 어려운 것(법률은 항상 해커들에 의해 쉽게 우회될 수 있기 때문에 법률적 어려움보다도 훨씬 더)을 거쳐서 이루어진다.

푸칸트(푸코 + 칸트)

탈근대적 리얼리티즘(realitism)은 정치적으로 고무된 반실재론이다. 지금까지 탈근대주의는, 실재는 지배의 목적을 위해 권력에 의해 실제로 구성되며, 그리고 지식은 해방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권력의 도구라는 관념을 계발했다. 나는 이런 태도의 기저에 놓여 있는 철학적 사고 방식을 '푸칸트(Foukant)적'이라고 명명할 것인데, 푸칸트라는 허구적 사상가는 (칸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식에 직접 접근할 수 없고 생각한다는 것은 반드시 우리의 표상들을 동반해야 한다고 믿으며, (사상의 최초 단계에서 푸코와 마찬가지로) 그는 생각한다는 것과 우리의 개념적 도식들은 권력에의 의지를 확언하는 수단이라고 간주한다. 푸칸트의 테제는 궁극적으로 다음과 같은 삼단 논법에 놓여 있다. 실재는 지식에 의해 구성된다. 지식은 권력에 의해 구성된다. 그러므로 실재는 권력에 의해 구성된다. 따라서, 급진적인 탈근대주의에서는 한 가지 논리적인 단계를 거쳐서 실재는 권력의 구성물인 것으로 판명되는데, 그래서 실재는 가증스러운 것('권력'이 우리를 지배하는 권력을 의미한다면)이자 가변적인 것('권력'이 '우리의 권력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면)이 된다.

이 삼단 논법은 세 가지 오류로 명확히 표명된다. 첫 번째 오류는 존재-지식의 오류, 즉 존재론과 인식론 사이, 즉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사이의 혼동이다. 내가 물은 H_2O이다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언어, 도식 그리고 범주들이 필요하다는 점은 명료하다. 그런데 물은 바로 H_2O이다라는 사실은 나의 어떤 지식과도 전적으로 독립적인데, 그래서 화학이 탄생하기 이전에도 물은 H_2O였고, 우리 모두가 지구에서 사라지더라도 여전히 그럴 것이다. 대체로, 비과학적 경혐의 경우에, 내가 알든 모르든 간에 언어, 도식 그리고 범주들과 독립적으로 물은 축축하고 불은 타오른다. 실재 속 무언가가 우리에게 저항한다. 그것이 내가 '수정 불가능성(unamendability)'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실재적인 것의 특이한 특질은 그것이 마음대로 수정되거나 교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하나의 제약일 수 있지만, 동시에 그것 덕분에 우리는 꿈과 실재, 과학과 마술을 구별지을 수 있다.

두 번째 오류는 확인-수용의 오류인데, 이것에 의거하여 탈근대주의자들은 실재를 확인하는 것은 현존하는 사태를 수용하는 것에 놓여 있고, 그래서 거꾸로(논리적 간극이 있지만) 반실재론은 본질적으로 해방적인 것이라고 가정했다. 그런데 명백히 그렇지 않다. 반실재론은 묵종을 수반한다. 진단이 치료의 전제가 되는 것과 동일한 평범한 이유 덕분에 오히려 실재론자가 (원한다면) 비판하고 (할 수 있다면) 변형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추고 있다.

세 번째 그리고 본질적인 오류삼십 년 전에 탈근대주의를 거대한 반계몽주의적 물결로 간주한 하버마스의 견해를 확인하는는 지식-권력 오류인데, 이것에 따르면 어떤 형태의 지식의 배후에도 부정적인 것으로 경험되는 권력이 숨어 있다. 결과적으로, 자체를 해방과 관련시키는 대신에 지식은 예속의 도구가 된다. 이런 태도는 독특한 '지식에 대한 공포'를 무심코 드러낸다고 올바르게 주장되었지만, 공포와 더불어 '무지는 축복이다'라는 확신―<<매트릭스(The Matrix)>>에서 사이퍼에 의해 간결하게 표명된―도 존재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결과들을 초래한 책임이 있는 계몽의 변증법으로, 지식에 대한 비판은 지식 자체로부터의 도피로 변환된다.

데칸트(데카르트+칸트)

푸칸트의 삼단 논법의 대전제('실재는 지식에 의해 구성된다')는, 내가 언급했듯이, 현대 철학의 주류를 대표하는 구성주의에서 강력한 이론적 정당화를 찾아낸다. 그런 시각은 우리의 개념적 도식과 지각적 장치들이 실재의 구성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수행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데카르트에서 시작되어 칸트에서 절정에 이르는 이런 견해를 구현하고 있는 허구적 철학자를 '데칸트(Deskant)'라고 부를 것인데, 그 다음에 그 견해는 니체에 의해 허무주의적 의미에서 급진화되거나, 아니면 인식론적, 해석학적, 심리적 의미에서 전문화되었다. 이런 입장은 내가 선험적 오류로 규정하는 것에서 비롯되는데, 그 오류는 이미 언급된 존재론과 인식론 사이의 혼동에 놓여 있다. 그것의 기원에는 데카르트, 흄, 칸트 그리고 헤겔에서 찾아낼 수 있는 어떤 전략이 존재한다. 지식은 무엇보다도 감각적 지식이지만, 감각은 기만적이고, 그래서 우리는 개념적 지식으로 변환해야 한다. 그러므로 구성주의는 더 이상 안정성을 갖추고 있지 않고, 햄릿이 서술했듯이, '어긋나 버린' 세계를 구성을 통해서 다시 정초할 필요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모든 지식은 경험에서 시작되지만, 경험이 구조적으로 불확실하다면, 과학을 통해서 경험을 정초하는 것이 필요할 것인데, 그래서 경험의 불확실성을 안정화하는 선험적 구조들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시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우리는 객체가 아니라 주체에서 출발하고, 학자로서가 아니라 판관으로서 자연을 심문하는 물리학자들의 모형을 좇아서, 즉 도식과 정리들을 사용하여 사물들이 자체적으로 어떠한지 자문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들을 알게 되려면 그것들이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지 자문해야 한다.

그래서 데칸트는 선험적 인식론, 즉 수학을 채택하여 존재론을 정초하는데, 종합적인 선험적 판단들의 가능성 덕분에 우리는 어떤 지식을 통해서 유동적인 실재를 고정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식으로 선험 철학은 구성주의를 수학의 권역에서 존재론의 권역으로 이동했다. 물리학과 수학의 법칙들은 실재에 적용되며, 그리고 데칸트의 가설에서 그것들은 과학자 집단의 고안물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감각들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의 지식은 더 이상 감각의 비신뢰성과 귀납의 불확실성에 의해 위협당하지 않을 것이지만, 우리가 치러야만 하는 댓가는 어떤 객체 X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과 우리가 객체 X를 알고 있다는 사실 사이에 어떤 차이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칸트는 우리로 하여금 현상적 객체 X의 배후에 본체적 객체 Y, 즉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물 자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하도록 환기하지만, 존재의 권역이 대체로 가지적인 것들의 권역과 일치하며, 가지적인 것은 본질적으로 구성 가능한 것과 동등하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는다.

그러므로 선험적 오류의 기원에는 주제들의 얽힘이 존재한다.

1. 감각은 기만적이다(감각은 100% 확실하지는 않다).
2. 귀납은 불확실하다(귀납은 100% 확실하지는 않다).
3. 과학은 경험보다 더 안전한데, 왜냐하면 과학은 감각의 기만성 및 귀납의 불확실성과 독립적인 수학적 원리들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4. 그렇다면 경험은 과학으로 해명되어야 한다(경험은 과학에 의해 정초되어야 하거나, 또는 최악의 경우에 경험은 과학에 의해 오해를 낳을 소지가 있는 '현시적 이미지'로 폭로되어야 한다).
5. 과학은 패러다임들의 구성이기 때문에, 이 지점에서 경험도 역시 구성일 것인데, 즉 경험은 개념적 도식들에서 시작하여 세계를 형성할 것이다.

여기에 탈근대주의의 기원이 놓여 있다.

더 자세히 조사함으로써 우리는 문제 전체의 핵심에서 인과성이라는 개념을 찾아낸다. 데카르트의 문제는 인식 주체가 세계의 일부가 아니라면 세계가 어떻게 인식 주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설명하는 것이다. 대신에 칸트의 문제는 인과성이 선험적 주체 자신에 속하는 범주라면 세계가 어떻게 선험적 주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설명하는 것이다. 인과성을 자신의 선험적 범주들 사이에 위치시킴으로써 칸트는 스스로를 암묵적으로 관념론적인 형태의 구성주의로 몰아넣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세계가 주체에 진정한 인과적 효과를 행사하지 못하게 막기 때문이다. 이것이 데칸트의 테제의 핵심이다. 세계는 주체에 대한 어떤 인과적 역능도 갖고 있지 않는데, 왜냐하면 주체는 세계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데카르트)이고 인과성은 전적으로 주체에 속하기 때문(칸트)이다.

데칸트 및 푸칸트와 달리 칸트는 <<순수 이성 비판>>을 거부하게 되는 <<판단력 비판>>으로 이런 어려움을 이미 자각하게 되었었다는 점을 지적할 가치가 있다. 첫째, 심미적 판단에 대한 비판에서 칸트는 아름다운 것은 아무 개념 없이 애호된다고 적었는데, 다시 말해서, 그는 개념성을 권좌에서 몰아내었으며 지각이 특히 중요한 영역에서 그랬다. 둘째, 목적론적 판단에 대한 비판에서 칸트는 과학론을 명시적으로 제시했는데, 즉 자연은 자체적으로 아무 목적도 없으며, 자연을 과학적으로 탐구할 수 있도록 그것에 목적을 부여하는 것은 인간들이다. 세째, 칸트는 단일한 사례에서 시작하여 일반적 규칙으로 상승하는, 제3 비판에서 도입된 반성적 판단은 일반적 규칙에서 단일한 사례로 하강하는, 제1 비판의 확정적 판단 다음에 위치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그가 가리켰던 것은 확정적 판단을 그저 탐구하기보다는 그것을 대체할 필요성이라고 믿을 만한 좋은 이유들이 존재한다. 사실상, 어느 것을 채용하기로 선택하는 것이 주체에 달려 있게 될 기묘한 이중적 양태에서, 확정적 판단이 어떻게 반성적 판단과 공존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어쨌든, 주체가 반성적 판단에 의지할지라도(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그것만을 사용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그들은 흄에 의해 제기된 반대 의견들에 대응할 수 없을 것인데, 왜냐하면 사실상 반성적 판단은 모든 점에서 경험주의적 귀납―단일한 사례에서 시작하여 규칙으로 상승하는―이기 때문이다.

티-렉스

내가 푸칸트와 데칸트에 대립시킬 기능, 즉 티-렉스(T-Rex)는 인간이 아니라 동물인데,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공룡이다. 공룡은 상부 삼첩기(Upper Triassic, 대략 2억3천만 년 전)와 백악기 말기(대략 6천5백만 년 전) 사이에 생존했다. 최초의 인간들과 그들의 개념적 도식들은 몇몇 사람들에 따르면 2십5만 년 전에 나타났고, 다른 사람들에 따르면 5만 년 전에 나타났다. 1억6천5백만 년 동안 공룡은 존재했지만 인간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6천4백만 년 동안 인간도 공룡도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5십만 년 동안 인간은 존재했지만 공룡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선재성의 논증(argument of pre-existence)'으로 부르는 이런 환경은 테칸트의 경우에 한 가지 문제를 조성한다. 데칸트의 경우에는 사유가 우리가 경험하는 직접적인 최초의 대상이고, 그래서 사유와 그것의 범주들의 매개를 거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저쪽에' 놓여 있는 세계와 전혀 접촉할 수 없다. 데칸트에 따르면 자연적 객체들은,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데 사용하는 범주들과 더불어 우리 마음 속에만 현존하는 시간과 공간에 정위된다. 사람들이 존재하기 전에는 아무 객체들도 존재하지 않았거나, 또는 최소한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의 객체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지만, 명백히 그렇지 않다. 티-렉스는 푸칸트나 데칸트 이전에 그리고 일반적으로 '인식 주체' 이전에 존재했다.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다룰 수 있는가?

좋은 움직임은 구성주의자들에 의거하여 언어적-개념적 차원이 실재적인 것을 구성하는 방식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것일 수 있을 것이다. 두 가지 가능한 경우가 존재한다. 한편으로, 실재는 실제로 우리의 개념들에 의해 구성되고, 그래서 공룡은 결코 존재한 적이 없었다(기껏해야 어떤 인간이 그것들을 발견하는 바로 그 순간에 마법처럼 나타난 공룡 화석들이 존재한다). 다른 한편으로, 실재는 개념이 아니라 객체들―인간 이전에 생존했던 공룡처럼―로 이루어져 있고, 그래서 개념적 도식들은 공룡들의 모습이 어떠했고 어떻게 살았는지 이해하려고 시도하기 위해, 즉 존재론적 기능이 아니라 인식론적 기능을 충족시키기 위해 공룡의 유물들을 관련시키는 데 유용할 뿐이다.

이제 개념적 도식들에 대한 세계의 의존성의 가능한 종류들을 가장 강한 것에서 가장 약한 것까지 살펴 보자. 가장 강한 의존성, 즉 존재자는 사유의 상관물로서 현존할 뿐이라고 단언하는(극단적인 상관주의의 형식으로) 사람들에 의해 제시되는 것을 고찰하자. 이 경우에, 존재는 사유에 인과적으로 의존한다고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강한 판본에서, 객체들의 사유에의 의존성은 명시적인 인과적 의존성이다. 주체가 객체의 인식론적 필요 조건이라는 바로 그 이유만으로도, '아무튼' 주체는 객체를 초래한다. 인식하는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식되는 객체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리고 이것은 논의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그리고 여기에 인과적 의존성의 옹호자가 놓치는 점이 있다) 그것은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객체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의 기원은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라 인식론적인 버컬리의 유명한 논증―숲에서 한 그루의 나무가 쓰러지고 그 소리를 들을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다면, 그것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에 놓여 있다. 그런데, 이 판본에서는 존재(존재론)가 지식(인식론)에 의존하기 떄문에, 인과적 의존성의 옹호자는 누군가가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를 확인할 때에야 비로소 그 나무가 실제로 쓰러졌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므로 공룡들이 돌아다니고 있었을 때(이 지점에서 이런 종류의 표현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가정하면) 인간들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룡은 결코 현존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명백히 도출된다.

인과적 의존성에 대한 잘못된 해석들을 피하기 위해 반실재론자들은 때때로 개념적 의존성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라는 칸트의 유명한 진술의 가능한 결과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이 문장은 두 가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1) '공룡'이라는 개념이 없다면 우리는 공룡을 보더라도 공룡을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2) '공룡'이라는 개념이 없다면 우리는 공룡을 보더라도 공룡을 보지 못할 것이다. 칸트를 옹호하는 경우에, 그는 (1)를 의미했다고 한다. 그런데 칸트가 (1)을 의미했었더라면, 그는 <<순수 이성 비판>>을 저술하지 못했었을 것이고,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 즉 과학론만 저술했었을 것이다. 칸트가 <<순수 이성 비판>>을 저술했다면, 그것은 그가 (2)를 의미했었기 때문이다. 개념이 경험 일반을 구성한다. 그래서 도식주의에 관한 장에서 칸트는 심지어 개의 도식도 제시하게 하는데, 그런 도식이 없다면 개는 기껏해야 본체적 현존을 영위할 것이라고 우리는 가정해야 한다. 그런데, 인과적 의존성이 선재성 논증에 의해 무효화된다면, 개념적 의존성은 다음과 같은 상호작용 논증에 의해 무효화된다. 지금 내가 엄청나게 오래 살았거나 부활된 공룡을 만난다면, 그것의 개념적 도식들이 나의 개념적 도식들과 매우 다를 개연성이 있더라도 나는 그것과 상호작용할 수 있다. '긍정성'에서 내가 전개하듯이,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그것들과 대단히 상이한 개념적 도식 및 지각적 장치들을 갖추고 있거나, 또는 전혀 갖추고 있지 않는 존재자들과 상호작용한다.

선재성 논증과 상호작용 논증을 피하기 위해 반실재론자들은 '표상적 의존성'을 언급하는데, 우리는 우주의 창조자가 아니라, 무정형의 질료로부터 시작하는 우주의 구성자이다. 여기에 현대 철학의 주류가 존재하는데, 내가 보여주었다고 희망하듯이, 그것은 허무주의도 아니고 유아론도 아니라 구성주의, 즉 실재는 저쪽에 존재하지만, 그것 자체는 무정형의 것, 쿠키를 위한 밀가루 반죽, 현상의 구성자가 되는 주체에 의해 주조되는 분화되지 않은 코라(chora)이다라는 관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만나는 세계와 사물들 자체는 현존은 부여받지만 독립성은 부여받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물들의 현존은 결코 부인당하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단언할 수 있게 만들고, 그래서 우리는 현상에만 접근할 수 있을 뿐이지 사물들 자체에는 결코 접근할 수 없다고 덧붙이게 된다. 결과적으로, 무언가를 물 자체로 간주하는 것은 철학의 견지에서 최소의 교양을 갖춘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소박성이다.

그러므로 세계의 개별적 현존은 인정받지만, 세계 자체는 어떤 구조적 및 형태적 자율성―적어도 우리는 알지 못한다―도 갖추고 있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 물 자체는 잠재적으로 매트릭스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표상적 의존성도 작동하지 않는 것으로 판명된다. 사실상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한편으로,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라는 낱말이 우리에 의존하고, 그래서 어떤 중대한 의존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면, 인과적 의존성(유일한 중대한 종류의 의존성이다)의 경우와 꼭 마찬가지로, 티나로사우루스의 존재가 인간들에 의존한다는 것인데, 티라노사우루스 렉스가 현존했을 때 우리가 현존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것은 작동하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공룡들이 존재했을 때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도출될 것이다. 이 지점에서 반실재론자들은 이렇게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당신은 사유에 독립적인 공류의 현존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그런데 대답은 단순할 것이다. '증명을 제시해야 하는 것은 바로 당신이다. 여기서 당신은 공룡의 사유에의 의존성, 즉 지금까지 당신이 행하지 못한 것을 증명해야 한다.'

행위주체적 객체들: 행위 존재론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http://blog.daum.net/nanomat/774

행위주체적 객체들: 행위 존재론


존재 또는 자연은 육체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육체"에 대한 동의어들은 "사물", "객체", "기계", "행위소", "실체", "사건", "과정" 그리고 "존재자"이다. 다른 술어들도 있을 법하다. 지적해야 할 첫번째 점은 여기서 자연과 존재는 동의어로 다루어진다는 것이다. 그 결과,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자연의 존재자이다. 문화와 사회가 존재하는 육체들로 이루어져 있는 한, 그것들은 자연의 존재자들이다. 이것으로부터 두 가지 점이 더 도출된다. 첫째, 존재와 자연이 동의어라면, 그리고 모든 것이 자연의 존재자라면, 당연히 자연/문화 구별짓기는 무화되거나 말소된다. 대중의 상상 속에서 자연은 사회, 도시, 교외, 농장 바깥으로 찾아가는 곳이다. 반면에 문화는 인간들에 의해 길들여지거나 경작된 것을 가리키며 도시와 교외의 영역이다. 이것은 공간적 또는 지리적 자연 개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자연주의적 존재론적 틀 내에서 자연은 서로 물리적으로 상호작용하며 무엇이든 어떤 규칙 또는 법칙들의 지배를 받으면서 존재하는 물질적 또는 물리적 존재자들의 총체를 가리킬 뿐이다. 자연의 외부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문화도, 마음도, 플라톤적 형상도, 유일신도, 신들도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 영향을 미치고 영향을 받는 육체들이 존재할 뿐이다. 이런 육체들이 물질적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둘째, 당연히 인위적인 것과 진정한 것 사이의 구별짓기 역시 말소된다. 역사적으로 자연은 진정한 것들의 영역, 자체에서, 자체로부터 비롯되는 영역으로 간주되어 왔다. 반면에 문화는 인위적인 것들의 영역, 다른 행위주체에 의해 외부에서 존재자에 부과되는 형상의 영역으로 간주되어 왔다. 도토리는 저절로 참나무가 되는 반면에, 어떤 장인만이 한 조각의 나무를 탁자로 변형시킨다. 그런데 모두 다 자연이라면, 진정한 것/인위적인 것 대립쌍은 더 이상 존재의 영역들을 규정하는 데 동원될 수 없다.

일상 언어는 존재론에 대한 아무 지침도 되지 못한다. 예를 들면, "객체"라는 술어를 들을 때 우리는 저곳에 그냥 머물고 있고, 다른 무언가에 의해 움직여지지 않으면 그 어떤 움직임도 없으며, 주체에 대립되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것들은 일상 언어에서 상용되는 "객체"의 함의들이다. 그렇지만, 철학적 성찰의 주요한 목적은 낱말의 함의들을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이 정말로 무엇인지 결정하는 것이다. 흔히 이런 대답들은 꽤 놀랍고 대중의 의견에 반한다. 그러므로 일상 언어는 철학자들에게 아무 권위도 없다. 그것은 철학자들에게 탐구하고 있는 존재자들의 본성에 대한 암시 또는 실마리들을 제공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흔히 잘못되어 있을 뿐이다.

우리가 물려받은 철학과 이론의 전통은 객체에 대한 문제를 두 가지 방식 가운데 한 가지 방식으로 생각한다. 물론 예외들이 존재하며, 중요한 예외들도 있지만, 이 두 가지 접근방식이 통계적으로 지배해온 것이다. 철학에서, 객체에 대한 문제는 주로 객체에 관한 지식의 문제라는 견지에서 사유되었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의 표상들이 그것 자체로 존재하는 대로의 존재자들에 대응되는 방식과 대응 여부이다. 이 틀 내에서는, 한편으로 우리의 표상들이 우리의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존재자들을 존재하는 그대로 나타낸다고 주장하는 인식론적 실재론자들의 사유를 얻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세계에서 만나게 되는 존재자들은 우리의 표상들 또는 언어의 구성물이며, 우리는 오직 우리의 표상들과 언어와 관계를 맺기 떄문에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가 어떠할 것이라는 것은 우리가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실재론자들의 사유를 얻게 된다. 반실재론의 경우에는 세계의 존재자들과 우리의 표상들을 비교할 수 있게 할 3인칭 시각을 채택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존재를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그대로 결코 알 수 없다. 현재의 맥락에서 나는 인식론의 문제들―이런 문제들은 결코 전적으로 외면할 수는 없지만―이나 또는 우리가 객체들을 표상해내는 방식과 표상해내는지 여부에 대해 관심이 없다.

다른 한편으로, 철학 밖의 인문학이나 문화연구에서, 객체에 대한 문제는 객체들의 의미에 대한 해석학으로 다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목적은 객체들이 의미하는 것을 해석하거나 판별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물의 체계>>라는 보드리야르(Baudrillard)의 특별한 초기 저작에 관해 생각할 수 있는데, 이 저작에서 그는 빅토리아식 거실의 가구 배치 같은 사물들에 대한 탐구에 관여하면서 그것들이 어떻게 성별 관계, 가부장제, 계급 등의 논리 전체를 구현하는지 예증한다. 보드리야르로부터 영감을 끌어내어 우리는 교외 가정의 근대식 마루 계획을 탐구하며 부엌이 어떻게 점점 더 출입구를 통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거실에 개방되는지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것이 남성과 여성 사이의 엄격한 노동 분업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대신에 더 통합적이고 평등한 가정 생활을 시사하는 성별 관계와 가족 관계들의 변화를 반영한다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환상의 돌림병(The Plague of Fantasies)>>라는 저작에서 지젝(Zizek)이 행한 프랑스, 독일 그리고 영국 화장실에 대한 악명 높은 분석에 관해 생각할 수 있을 것인데, 여기서 그는 각각의 화장실 양식이 어떻게 특수한 민족 이데올로기를 구현하는지 보여준다. 지젝은 이렇게 쓴다.

전통적인 독일식 화장실에서는 물을 내린 후에 대변이 사라지는 구멍이 꽤 앞에 있고, 그래서 우리가 냄새를 맡고 어떤 질병의 흔적을 조사하도록 대변이 먼저 제시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전형적인 프랑스식 화장실에서는 구멍이 뒤에 있고, 그래서 대변이 가능한 한 빨리 사라지도록 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앵글로색슨식...화장실은 일종의 종합, 이 두 대극 사이의 조정안을 제시한다―변기에 물이 차 있고, 그래서 대변이 그 속에서 부유한다―보이지만 조사할 수는 없는... 이 판본들 가운데 어느 것도 순전히 공리주의적 견지에서는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주체가 우리 육체 내부에서 비롯되는 불쾌한 배설물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어떤 이데올로기적 지각이 분명히 식별 가능하다―또 다시, 세번째로, '진실은 저쪽에 있다'.

헤겔은 독일-프랑스-영국이라는 지리적 삼각 구도를 세 가지 상이한 실존적 태도―독일의 성찰적 철저함, 프랑스의 혁명적 조급함, 영국의 온건한 공리주의적 실용주의―를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한 최초의 부류에 속했다... 화장실들을 고려함으로써 우리는 배설 기능을 수행하는 가장 친근한 영역 속에서 동일한 삼각 구도를 식별할수 있을 뿐 아니라, 배설적 잉여물에 대한 이런 상이한 태도들에서 이 삼각 구도의 근본적인 메커니즘을 생성할 수 있다. 모호한 명상적 매혹, 불쾌한 잉여물을 가능한 한 빨리 제거하려는 조급한 시도, 잉여물을 적절한 방식으로 처리되어야 하는 보통 사물로 다루는 실용적 접근방식. 어떤 강단인이 토론회에서 우리는 탈이데올로기적 세계에서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쉽다. 그런데 열띤 토론 후에 화장실에 가는 순간 그는 또 다시 이데올로기에 휩쓸린다. (1997)

객체에 대한 해석학적 관념에서 객체는 의미 전달체 또는 기표로 다루어진다. 객체들을 탐구할 때 우리는, 철학의 인식론적 의문의 경우처럼, 그것이 무엇인지도 묻지 않을 것이고, 내 자신의 경우처럼, 그것이 무엇을 행하는지도묻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화장실 자체는 대체로 지젝의 주장과 무관하다는 점을 인식할 것이다. 확실히, 각 화장실의 상이한 설계는 지젝의 구조/비교 분석의 기회이지만, 이 의미는 다양한 다른 객체들과 제도들에서 구현될 수 있다. 그런 의미작용 또는 이데올로기적 구성체를 위한 전달체로서 기능하는 객체는 이데올로기가 자체를 물질화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 이외에는 그것 자체로 아무것도 기여하지 못한다. 마르크스가 헤겔을 뒤집어서 관념 또는 개념의 효험 대신에 실재와 실천을 물질화하는 데 주의를 끌려고 노력했던 반면에, 지젝은 마르크스를 뒤집으려고 노력한다.

철학의 인식론적 접근 방식과 인문학의 해석학적 접근 방식 둘 다 상당히 인간형상주의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인식될 것이다. 철학의 경우에 문제는 정말 우리의 지식에 대한 문제이다. 그것은 객체 자체에 대한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표상들에 대한 문제이다. 마찬가지로, 해석학적 접근 방식에서, 우리가 정말로 분석하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지 객체가 아니다. 비판이론가들이 찾아내는 의미는 객체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의 사회적 및 인지적 활동을 통해서 객체로 투영되거나 새겨진 것이다. 이 두 가지 접근 방식에는 객체 자체가 사라지는 흥미로운 방식이 있다. 두 경우 모두에서 우리는 결국 사물이 행하는 것이 아니라 표상에 대해 말하게 된다.

한편으로 나는 철학의 인식론적 접근 방식과 문화 연구의 해석학적 접근 방식 사이의 제3의 길을 명시적으로 표명하려고 노력했다. 스테이시 알레이모와 카렌 바라드 같은 신유물론적 페미니스트들, 브뤼노 라투르 같은 행위자 연결망 이론가들, 마셜 매클루언, 월터 옹 그리고 프리드리히 키틀러 같은 매체 이론가들뿐 아니라 들뢰즈, 가타리, 마누엘 데란다 그리고 존 프로테비 같은 조립체 이론가들의 사유에 큰 빚을 지고 있는 나는, 우리는 육체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덧붙여 그것이 무엇인지에 의해 육체는 무엇을 행하는지에 관해 성찰할 수 있는 공간을 개방하는 데 기여하고자 했다. 나는 "덧붙여"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철학적 인식론에서 발견되는 탐구 형식들과 문화 연구의 해석학적 접근 방식을 거부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석을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분석 양식들을 확장하는 것에 대한 문제이다. 나는 버틀러, 푸코, 지젝, 바르트, 라캉, 보들리야르 등과 같은 사상가들에서 발견되는 기호학적 분석 양식들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여 해석적 방법론을 포기할 수 없다. 신실재론에 속하는 일부는 사회구성주의와 언어구성주의의 종말을 요청하는 듯 보이지만, 나는 이런 다양한 해석학이 해방 계획과 권력 작동 방식에 대한 이해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우리 세계의 실재적이고 주요한 특징들을 드러낸다고 믿는다. 문제는 사회구성주의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과장되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모든 것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지는 않지만 많은 것들이 존재하며, 그리고 우리가 이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구성된 것은 파괴될 수도 있고 그 대신에 새로운 것이 세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철학적 인식론에 덜 열중해 있다고 고백한다. 인식론, 즉 한 지식 형식을 실재계를 반영하는 권위 있는 것으로 정초하고자 하는 담론들에 대한 나의 의심은 푸코에 빚지고 있다. 1975-6년 강연에서 푸코가 말하듯이,

"그것은 과학인가 아닌가?"라는 의문에 대한 계보학자의 대답은 이렇다. "마르크스주의, 또는 정신분석, 또는 무엇이든 다른 무언가를 과학으로 전환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당신을 비판하고 있는 까닭이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 행해질 수 있는 한 가지 반대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마르크스주의가 당연히 과학일 것이라는 것이다." [최소한] 더 온건한 술어―더 정교한 술어는 아닐지라도―로 서술하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마르크스주의 또는 정신분석 같은 것이 일상적 작용, 구성 규칙, 사용하는 개념에 있어서 과학적 실천과 어느 정도 유사한지 알기 전에도 과학이라고 하는 주장에 내재하는 권력에 대한 열망과 관련된 의문을 자문해야 한다. 제기되어야 하는 의문 또는 의문들은 이렇다. "자신은 과학이라고 당신이 말할 때 당신은 어떤 지식 유형들의 자격을 박탈하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나는 이 담론을 말한다. 나는 과학적 담론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과학자이다'라고 당신이 말하기 시작할 때 당신은 어떤 말하는 주체, 어떤 담론적 주체, 어떤 경험과 지식의 주체를 주변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사회는 보호되어야 한다(Science Must Be Defended)>>, 9-10)

인식론과 인식론적 의문들에 대한 나의 혐오는, 근본적으로 그것들은 정말 지식, 즉 우리가 아는 방식과 알고 있는지 여부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 오히려 사실상 한 권위체를 정당화하는 것과 지식, 경험 그리고 현상의 다른 집합체들을 "주변화"하거나 배제하기 위한 일련의 담론적 기법들을 개발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의심에서 비롯된다. 자체적으로, 인식론적 탐구들은 공평성과 객관성이라는 허울 뒤에 숨어 있는 상태에서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제한하는 데 몰입하는 듯 보인다. 확실히 이것은 들뢰즈가 "국가 철학자"라는 인물로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의 일부인데, 그 인물은 역사적으로 우연적인 권력 체제를 위해서 이런 권력 형식의 자연화와 본질화를 통해 작업하면서 그것이 세계 또는 실존의 불가피하고 필연적인 구조로 제시한다. 예를 들면, 오늘날 진화심리학자는 인간이 진화되어 나온 영장류 친척들로부터 물려받은 유전과 생물학에 대한 명확한 의도를 지닌 관념의 견지에서 인간 심리를 설명함으로써 이기적인 신자유주의적 주체를 인간 본성의 고유한 진리로 무의식적으로 제시한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우리 자신을 경험하는 방식을 생물학에 위치시킴으로써 그것을 탈역사화하며, 생물학과 궁극적으로 과학의 권위에 근거를 두고 자신들의 논변들의 권위를 진전시키려고 시도한다. 그렇게 할 때 그들은, 인간 실존의 가능성에 관해 매우 다른 이야기를 말하고, 그래서 오늘날 인간과 다르게 살고 느낄 수 있는 가능성을 개방하는 민족지학과 역사적 연구의 발견 결과를 주변화하거나 배제하려고 시도한다. 인식론의 경우에도 대체로 그렇다. 현대 자연주의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아래로 원자 자체까지 모든 것이 우연적이며 적절한 조건에서는 다르게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현대 물리학과 생물학 둘 다에 의해 증언된다.

온티콜로지 또는 기계지향 존재론―나의 존재론적 입장을 가리키는 이름―의 틀 내에서는 육체가 행하는 것의 견지에서 육체에 접근한다. 그것은 객체를 아는 것에 대한 의문이 아니다. 그것은 객체의 의미를 판독하는 것에 대한 의문이 아니다. 사실상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객체가 행하는 것에 주목해야 할 뿐 아니라 객체란 행위 또는 활동이라고 주장한다. 전통적인 사유에 따르면, 객체는 특성 또는 성질들의 다발로 이루어져 있다고 간주된다. 예를 들면, 우리는 내가 애호하는 청색 커피 머그잔을 그것의 색깔, 즉 청색성, 모양, 단단함 같은 다양한 성질들이 내재하는 실체로 여긴다. 머그잔의 실체성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지속하는 동일성, 즉 그것이 겪는 가능한 모든 정성적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불변하는 것이다.

객체를 이해하는 이런 방식은 성찰과 강단 둘 다에 특유한 관객 입장의 결과물이라고 나는 믿는다. 성찰 행위를 수행하는 사람은 활동에서 물러서서 그저 바라볼 뿐이다. 우리가 주변 세계의 존재자들에 대해 관객적 관계를 향유할 때, 우리의 응시에 나타나는 것은 객체의 성질 아니면 의미이다. 그 다음에 우리는 객체를 이런 특성 또는 성질들의 다발로 취급하는 "유령적 환원(spectral reduction)"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수행한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강단 사회학과 철학적 성찰의 심리학의 결과로 초래되는 객체에 대한 철저히 왜곡된 이해이다. 객체가 무엇인지 알기를 원한다면, 예술가, 공학자, 농부, 목수 또는 요리사에게 문의하는 것이 더 나은데, 그들은 객체에 작용하고 그래서 존재자 내부에 숨겨진 은밀한 역능뿐 아니라, 상이한 매체들의 제약과 도구-존재자 상호작용에서 비롯되는 독특한 현상 또는 구체화를 항구적으로 만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요리사는 고기 요리를 만들 때 주철 프라이팬과 가스 레인지가 대단히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점을 알아챈다.

이것을 위해 나는 객체를 그것의 성질이 아니라 그것이 행하는 것의 견지에서 고려하는 "행위 존재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표현하려고 시도했다. 객체는 활동 또는 행위이며, 최소한 세 가지 방식으로 활동과 결부되어 있다. 첫째, 무엇이든 어떤 객체, 기계 또는 육체의 지속되는 현존은 항구적인 활동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 물리학과 정보 이론에 매우 중요한 엔트로피라는 쟁점을 만나게 된다. 물리학에서 엔트로피는 닫힌 (체)계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 무질서해지는 경향이다. 일정량의 기체를 유리 상자에 불어넣자. 초기 단계에 이 기체는 용기의 한 구석에 국소화될 것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기체 입자들은 용기 전체에 걸쳐 퍼진다. 기체는 낮은 엔트로피 상태에서 높은 엔트로피 상태로 이행해버렸다. 기체의 엔트로피는 기체 입자들의 확률 척도의 함수이다. 초기 단계의 경우에, 기체가 상자의 한 구석에 국소화되어야 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 시점에 기체는 낮은 엔트로피 상태에 처한다. 시간이 흐르게 되면, 용기의 어느 곳에서든지 기체 입자가 발견될 확률은 같아지게 된다.  낮은 엔트로피 상태는 개연성이 거의 없다. 높은 엔트로피 상태는 개연성이 크다.

이것이 객체 및 활동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객체는 물질적 요소들의 조직화된 체계이다. 여기서 모든 객체는 다른 객체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내 육체는 기관, 뼈 그리고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들 역시 세포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세포들은 분자들로 이루어져 있고, 분자들은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고, 계속 내려가면 끈까지 이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조직체는 육체들의 오래된 더미가 전혀 아니며, 오히려 이런 요소들은 모두 서로 특정한 관계들을 맺는다. 그것들은 특정한 패턴 또는 조직을 갖는다. 이것이 모든 객체의 상태이다. 객체들은 모두 시간에 걸쳐 다소간 지속되는 조직 또는 패턴을 갖는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객체를 "비개연적인 것"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의 테제―이것은 들었을 때의 느낌과 달리 음울하지 않다―는 모든 것이 끊임없는 해체 또는 붕괴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엔트로피는 모든 객체의 차원이다. 모든 객체 또는 비개연적인 것은 확률이 더 높은 상태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존재자는 자체 조직을 상실하는 과정 중에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현존하는 모든 것이 계속 현존하기 위해서는 활동이 필요하다. 결국 모든 것은 용기 속 기체 입자들의 운명을 갖지만, 활동을 통해서 존재자는 얼마간 자체 조직을 유지하며, 자체 요소들이 확률이 더 높은 상태로 해체되는 것에 저항할 수 있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활동은 , 즉 에너지의 소비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학술적 삶의 구성 요소인 관객적 입장 때문에 강단인은 관념론, 즉 우리의 사회적 실재를 구성하는 것은 오직 관념들이라는 견해을 향한 경향을 갖추게 된다. 흔히 우리는 관념은 아무 일 또는 에너지가 필요 없다―그런데 관념도 영양분을 연소한다―고 간주하고, 그래서 사회 사상과 정치 사상에서 일과 에너지의 차원을 놓치게 된다. 게다가 패턴을 갖춘 모든 조직체는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 일과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점을 환기하는 것은 사회적 조립체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주요한 메커니즘들 가운데 하나―대부분의 정치 이론에서 거의 논의되지 않는 차원―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그런데, 모든 것은 붕괴 상태에 있다는 주장이 처음에는 우울한 듯 들릴지라도, 나는 이 테제가 사실상 희망과 낙관주의에 대한 원인이라고 믿는다. 이것이 맞다면, 그 테제가 이의가 제기될 수 없고 전복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강한, 강철로 만들어진 그런 형태의 패턴을 갖춘 조직체―예를 들면, 억압적 정부, 부당한 사회적 체계 또는 기업―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엔트로피가 모든 존재자들의 일반적인 존재론적 차원이라는 것이 맞다면, 당연히 변화와 새로운 패턴을 갖춘 조직체 또는 비개연적인 것의 생성이 항상 가능하다. 패턴을 갖춘 모든 조직체 아래에는 투덜거리는 존재자들의 무정부 상태가 항상 존재하는데, 그것이 새로운 상이한 조직체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둘째, 객체는 행위 또는 활동이라는 주장은 특성 또는 성질은 효과 또는 사건이라는 주장이다. 내가 애호하는 커피 머그잔의 청색성을 고려하자. 우리는 청색이 머그잔이 자체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서 보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이런 청색성을 머그잔에 내재하는 것으로 다룬다. 그런데, 머그잔을 촛불 조명에서 끄집어내어 햇빛 조명으로 가져가면 색깔이 변한다는 점을 인식하게 된다. 햇빛 속에서 그것은 밝은 청색인 반면에, 촛불 속에서 그것은 진한 암청색이다. 조명을 끄게 되면 머그잔은 전혀 아무 색깔도 나타내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머그잔이 정말 무슨 색인지 논쟁하고 싶을 것이다. 예를 들면, 조명이 없을 때에도 머그잔은 여전히 청색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그냥 볼 수 없을 뿐이다. 그 대신에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머그잔은 결코 아무 색깔도 없으며, 오히려 머그잔의 색깔은 주변 세계와 맺는 상호작용을 통해서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 경우에, 다양한 파장의 빛뿐 아니라 관찰자의 눈과 이루어지는 머그잔의 상호작용(예를 들면, 개에게 머그잔은 다르게 나타날 것인데, 개는 상이한 색각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이 청색 사건 또는 "청색을 나타냄"이라는 사건을 산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머그잔은 아무 조명도 없는 조건에서의 무색을 비롯한 이 모든 색깔이다. 이것은 색깔 같은 성질들뿐 아니라, 머그잔의 모양과 단단함 같은 성질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면, 머그잔이 금성의 표면에 존재한다면 그것은 매우 상이한 모양과 단단함을 나타낼 것인데, 그것을 구성하는 유리는 어떤 온도 조건에서만 자체의 강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객체의 입장에서 특성 또는 성질은 행위이다. 그것은 객체가 행하는 것이지, 객체가 고유하게 보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객체가 행위자라는 한 가지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객체는 자체의 성질이 아니라, 오히려 자체의역능 또는 역량의 견지에서 규정되어야 한다. 객체는 영향을 미치고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역능 또는 역량을 갖춘 조직적 체계이다. 이것으로부터 두 가지 결론이 도출된다. 첫째, 이제 객체를 분석하는 방식이 두드러지게 변한다. 흔히 우리는 육체 또는 객체를 다른 육체들과 분리하여 생각한다. 나는 커피 컵이 무엇인지 이해하기를 원하고, 그래서 나는 그것을 세계에 거주하는 여타 존재자들로부터 분리하여 그것의 성질 분석에 착수하고 그것을 자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그런 성질들로 환원시킨다. 그런데, 앞에 제시한 것이 참이라면, 즉 성질이 효과 또는 사건이라면, 당연히 나는 육체들의 장 속에서 객체가 다른 육체들과 맺는 상호작용을 이해하지 않은 채 그것을 이해할 수는 없다. 머그잔의 색깔은 자체 존재의 고유한 특징이 아니라, 오히려 머그잔의 역능, 빛 같은 육체들, 다양한 동물의 신경계 등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되는 사건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객체의 성질은 이런 성질을 효과로 산출하는, 그것이 다른 육체들의 장과 맺는 상호작용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그레이엄 하만의 객체지향 철학에 대한 나의 논쟁의 핵심이며 내가 스스로를 객체지향 존재론라고 여전히 지칭하기를 꺼려하는 까닭이다. 하만의 경우에, 객체는 모든 관계로부터 물러서 있고, 그래서 객체는 자체가 맺는 관계들에 독립적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 그가 주장하듯이, 객체들은 결코 접촉하지 않는다. 나는 객체는 현재 그것이 맺고 있는 관계들로부터 단절될 수 있다―많은 경우에 이것은 죽음 또는 파괴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존재자들이 서로 만나게 될 때 일어나는 일인 듯 보인다. 우리가 탐구해야 하는 것은 분리 상태에 있는 존재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자들 사이의 만남, 즉 그것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방식이다. 이것은 세계 또는 존재에 대한 본질적으로 생태적인 견해이다. 생태학은 "자연", 즉 도시와 마을 바깥에 존재하는 체계들에 대한 연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 상호작용하는 방식 그리고 이런 상호작용과 관계들이 패턴을 갖춘 어떤 조직체들을 낳는 방식의 견지에서 세계를 탐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모든 것은 하나의 생태계인데, 우리 자신의 육체도 그렇다. 객체들이 서로 만나면, 모든 종류의 뜻밖의 현상들을 만들어내는 폭발이 존재한다.

그런데 둘째, 그리고 아마도 더 중요하게도, 앞에서 제시한 것은 우리 자신뿐 아니라 세계에 존재하는 존재자들을 취급함에 있어서 주의의 윤리를 시사한다. 육체를 그것이 몸담고 있는 장에서 분리하는 존재자들에 대한 접근 방식과 관련된 한 가지 문제는 그것이 결국 그런 존재자들의 존재성을 물화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일단의 특징들을 모든 가능한 맥락 또는 장에 놓여 있는 육체에 고유하게 속하는 것으로 다룬다. 그런데, 앞에서 제시한 것은 육체는 본질적으로 가소성이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육체들의 한 장 속에서 어떤 육체가 표현하는 성질은 다른 한 장 속에서 그것이 만들어내는 성질과 다를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육체와 관련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것이 항상 존재한다.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우리는 육체가 할 수 있는 것을 결코 알지 못한다. 이것이 주의의 윤리를 제시한다면, 그 이유는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본질주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어떤 객체를 특수한 일단의 성향들로 환원시키는 것에 저항할 것을 권고할 뿐 아니라, 새로운 맥락에 놓이게 될 때 존재자들은 매우 상이한 방식으로 행동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우리가 개방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뒤샹은 나름의 방식으로 이 점을 제시했다.

객체는 행위자이다. 객체는 활동이다. 객체는 행위이다. 객체는 수행자이다. 이것을 인식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학자와 철학자의 표상으로 되돌아가자. 그들로 하여금 객체의 행위주체성을 무시하게 만드는 학자와 철학자의 사회학 및 심리학이 존재한다. 성찰적 태도 때문에 학자는 모든 행위주체성이 오직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간주하고, 그래서 객체를 일단의 성질과 의미 전달체로 환원시키게 된다. 텍스트와 관념들과 관련하여 항구적으로 작업함으로써 학자들은 역능이 관념, 믿음 그리고 텍스트에서만 비롯되는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사회적 세계가 현재의 형태 또는 패턴을 나타내는 까닭을 사람들의 믿음, 이데올로기 그리고 관념들에 기대어 설명한다. 권력은 대체적으로 담론적 견지에서 간주된다. 이것은 학자의 계급적 지위에 의해 강화된다. 컴퓨터와 워드 프로세싱 프로그램 같은 강단을 유지하는 기술들은 대체로 이용 가능하고 마땅한 방식으로 작동하며,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하이데거가 가르쳤듯이, 여러분의 안경이 깨지거나 파괴되지 않는 한, 결국 여러분은 안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안경을 통해서 무언가를 보는 경향이 있다. 안경은 보이지 않게 된다. 마찬가지로, 강단인들의 경우에, 주거와 음식에 대한 걱정은 일반적으로 해결된 상태에 있다. 강단인들 사이에 벌어지는 다툼은 대체로 지적인 차원에서 경쟁 진영 사이의 관념들의 전투로 일어난다. 그러므로 놀랍지 않게도, 강단인들은 관념, 텍스트들이 세계 전체와 모든 사회적 관계들을 구성하는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

여기서 간과하게 되는 것은 객체들이 사회적 조립체의 구성에 기여하는 힘,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차이이다. 객체들이 라캉주의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본원적으로 무의식적인 방식이 있기 때문에 몇 가지 점에서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객체들과 그것들이 우리에게 작용하는 방식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객체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매우 편재적이고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주장했듯이, 우리는 의미와 목적의 견지에서 생각한다. 그가 말하지 않았던 것은, 이런 점이 우리가 원인의 견지에서 생각하는 것을 터무니 없이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는 객체의 의미작용 또는 그것의 용도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래서 객체의 구성 자체, 그것의 물질적 역능이 우리 행위, 우리가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 우리의 정동 그리고 우리의 인지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간과한다. 이것은 기회의 상실인데, 관념, 즉 개념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객체도 역능을 행사하는 것이 참이라면, 세계에서 변화를 만들어내는 한 가지 방법은 상이한 방식들로 관계들을 강화하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새로운 객체들의 설계와 객체들의 상이한 배치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권력을 유지시킨다고 믿고 있는 관념들의 체계를 비판하지만, 당혹스럽게도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사회적 관계들이 담론적으로 구성된다면, 관념들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사람들에게 납득시켰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모든 것이 여전히 그대로 유지될 수 있겠는가? 왜 설득과 비판만으로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충분하지 못한가? 다른 한편으로, 객체, 세계의 물질적 특징들이 역능을 행사하는 것이 참이라면, 어떤 불쾌한 사회적 관계들에 대해서 엔트로피가 개시하지 못하게 하는 데 기여하는 사회적 조직의 중요한 차원을 놓친 것이다.

빗방울이 최소 저항을 규정하는 잎 위의 경로를 좇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부분적으로는 사람들도 주변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객체들에 의해 제공되는 홈을 따라 살아가고 서로 관계를 맺을 것이다. 움직임의 벡터들의 이런 구성체는 객체들의 행위주체성, 객체들이 우리에게 작용하는 방식과 그것들이 자체 역능을 행사하는 방식과 결부되어 있다. 그것은 객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객체가 무엇을 행사하는지 또는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문제인데, 이것은 다른 가능한 경로들을 제한하면서 행동하고, 관계를 맺고, 느끼며, 수행하는 어떤 방식들을 제공한다. 객체들이 우리에게 어떤 중력을 행사하는 방식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뉴턴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아인슈타인적 의미에서, 우리 자아와 의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움직이게 되는 경로들의 구성을 통해서 작동한다.

객체들이 어떻게 이런 종류의 역능을 행사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도처에 존재하는 스마트폰을 생각하자. 우리가 객체에 대한 보드리야르적 해석자이거나 기호학자라면, 스마트폰의 의미작용을 논의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이 어떻게 계급, 지위, 성별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표식인지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안드로이트와 아이폰을 대조하면서, 안드로이드는 미합중국 주식회사와 기술관료적 태도의 표식인 반면에, 아이폰은 대항문화적인 생태적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대표하는지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십대 여성들이 아이폰을 성의 모호한 기표로서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계급의 가시적인 기호로서 뒷주머니에 꼭대기 부분이 드러나도록 꼽는 습관을 어떻게 채택하게 되었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중요하고 가치가 있고, 그래서 하나의 분석 방식으로서 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요약한 행위주체적 접근 방식에 따르면, 우리가 의미의 층위에서 스마트폰에 귀속시킬 수 있는 어떤 의미작용에도 무관하게, 스마트폰이 무엇이고 무엇을 행하는지의 견지에서 그것에 접근하는 다른 한 방식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스마트폰이 등장함으로써 노동의 구조가 어떻게 변하기 시작하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공적인 노동 시간과 사적인 가정 시간이 엄격히 구분되었던 시대가 있었다. 휴가를 떠나는 것이 여전히 가능했던 시대가 있었다. 8-10시간 동안 일을 한 후에 집에 갔을 것이고, 그래서 나머지 저녁 동안 일에서 벗어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여러분이 집에 있든, 출근 중에 있든, 또는 휴가 중에 있든 간에 항상 이메일과 전화 통화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점점 더 퍼지게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일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이런 동학에서 벗어나기를 선택할 수 있다고, 즉 이런 시기 동안 이메일을 살펴보거나 답장을 보내기를 거부할 수 있다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그 상황은 산업 혁명 후기 동안의 손목 시계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기술이 도처에 존재하게 되면서 그것은 사회적 기대, 즉 규범이 된다. 여러분은 벗어날 수 있지만, 만약 그렇게 한다면 모든 종류의 제재가 있을 것이고 기회가 상실될 것이다. 아마도 당신은 승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휴대 전화가 이것을 행하는 까닭은 그것이 의미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이고 그것이 작용하는 방식 때문이다. 점차적으로 사적 공간은 사라지고 모든 것은 노동의 공간이 된다.

그런데 이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소비 방식도 바뀌었다. 어제 밤 여기에 도착했을 때 나는 지역 음식점들을 찾기 위해 엘프(Yelp)를 열람하고 있었다. 이전에 음식점에 대한 탐색은 부근 지역을 거닐면서 지역 음식점들의 미학적 외관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던 반면에, 이제 내 선택은 타인들의 등급 평가에 따르게 된다. [...]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음식점들을 검색해야 하는 새로운 생태계, 즉 소비자 평가이다. 소비자 평가는 다른 사람들이 따르는 중력, 경로를 만들어내는데, 그것은 정글 속에서 어느 음식점들이 번성하고 어느 음식점들이 실패할지 결정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개미들이 다른 개미들의 페르몬 흔적을 좇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다른 평가자들의 흔적, 즉 이 새로운 기술에 의해 만들어진 경로를 좇는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내 취향인가 아니면 내 취향은 구성된 것인가? 예를 들면, 아마존은 다른 사람의 구매 실적과 내 과거의 구매 실적에 근거하여 내게 책을 추천한다. 이것은 나의 지적 관심사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관심사인가? 여기서 우리는 컴퓨터 알고리듬에 의해 형성되고 있는 취향과 지적 관심사를 만나게 된다. 또 다시, 이것은 사물들이 의미하는 것 또는 어떤 이데올로기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객체들의 활동에 의해 일어난다. 전자들은 후자들과 얽힐 수 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객체들의 영역으로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움직임. 취향, 사상 그리고 정동의 벡터들을 규정하는, 사회 이론과 정치 이론에 대한 논의들에 있어서 강단 내에서 흔히 주변화된, 거의 탐구되지 않는 권력의 전체 영역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정치 투쟁의 방대한 현장들뿐 아니라,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한 거대한 기회들도 놓치고 있다.

퀑탱 메이야수의 사변적 실재론

메이야수의 사변적 실재론 I

퀑탱 메이야수의 사변적 실재론에 관한 개요 I

1. 소개
퀑탱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 1967~ )는 프랑스의 철학자로 첫 저서 유한성 이후(2006)에서 사변적 실재론(realisme spéculatif)이라는 새로운 경향의 사상을 주장한 뒤 주목받는 차세대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사변적 실재론자들의 그룹에는 그의 책이 출간되자마자 곧바로 영미권에 번역한 레이 브라시에가 속해있다. 고등사범학교(ENS) 출신인 그의 아버지는 맑시스트 인류학자로 유명한 클로드 메이야수이며, 프랑스 내 헤겔 권위자인 베르나르 부르주아의 지도 아래 신의 비실존. 잠재적인 신에 관한 시론이라는 제목으로 고등사범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그는 고등사범학교에서 교수로 있으면서, 알랭 바디우와 이브 뒤루와 함께 프랑스 현대철학 센터를 창립했다. 그의 사상은 바디우의 영향을 받았으며, 바디우는 그의 책을 “젊음의 어느 주어진 순간에 사유와 삶을 꿰뚫고 생겨나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해답의 길을 발견해야 하는 질문으로부터” 탄생한다고 서문에서 묘사한다. 그는 여러 논문들을 발표하고 강연활동을 하고 있으며, 2011년에는 말라르메의 시를 해독한 두 번째 저서, 수와 세이렌을 내놓는다.

유한성 이후는 철저한 논증의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엇을 증명하기 위한 논증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그는 우연성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그는 데카르트적인 독단론 dogmatisme(존재하는 것은 완전하다는 사실에는 모순이 없다), 그리고 칸트의 비판철학 이후 철학사를 지배하게 된 상관주의 correlationnisme(의식과 언어를 통하지 않은 실재를 우리는 사유할 수 없다)를 모두 비판하면서 자신의 결론에 이른다. 그렇지만 그의 논증의 과정은 상당히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는데, 이를테면 독단론의 내부적 모순과 상관주의의 내부적 모순을 집요하게 파고 들어가 균열을 일으킴으로써 우연적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절대적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가 더욱 강하게 겨냥하는 것은 상관주의인데, 상관주의야말로 실재와의 모든 접촉을 잃어버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메이야수는 인간중심적인 사고 너머, 의미와 감각 등 인간과 관계하는 모든 것 너머에 있는 실재를 겨냥한다.

2. 메이야수의 몇 가지 주요 개념들
1) 상관관계와 상관주의
메이야수는 데카르트가 했던 사물의 제1성질과 제2성질의 구분으로부터 시작한다. 잘 알고 있듯이 제 1성질은 불변적인 성질들, 예컨대 길이, 넒이, 형태, 무게, 부피와 같은 것이고 제2성질은 감각과 지각에 기인하는 것들, 다시 말해 주체화된 것들이다. 붉음의 지각이 없으면 붉은 사물은 없다. 그런데 이러한 구분 자체 때문에 이후의 철학사가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될 줄은 데카르트도 몰랐을 것이다. 제1성질을 담고 있는 연장(extension)마저도 제2성질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사람들이 믿기 시작한 것이다. 제2성질의 발견 이후로 사람들은 사물과 사물을 경험하는 주관의 관계의 결과로서 생기는 속성들을 사물 자체(즉자)의 성질로 간주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그리하여 관계의 결과에 의한 성질들과 사물 그 자체(즉자)를 구분하기 시작한다. 그럼으로써 사물 그 자체는 우리의 경험 너머, 우리의 인식 너머의 자리로 옮겨간다.
이러한 방식의 사유가 상관관계이다. 상관관계는 지각, 감각, 의미, 언어 등 우리가 세계와 맺는 관계를 넘어서 있는 것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즉자적인 성질들을 진술하게 되었는가? 그것을 담당하게 된 것은 수학이다. 그런데 수학과 같은 과학적 사유에도 변동이 있게 된다. 과학의 법칙들은 과학공동체의 합의에 의해 객관성의 참된 기준으로서의 자격을 얻는다.
따라서 사물의 성질에서나, 즉자적 사물을 다루는 과학의 영역에서나 상관관계가 중요하게 된다. 메이야수는 그러한 사유의 흐름을 상관주의라고 부른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상관주의는 주관성의 영역과 객관성의 영역을 서로 무관한 것처럼 사유하는 모든 주장을 거부한다. 그리고 두 영역의 상호적인 관련성을 ‘상관관계적 원환’이라고 부른다. 메이야수는 적당한 은유를 사용하여 그러한 모든 추론의 방식을 ‘상관관계적 무도의 스텝’이라고도 부른다. 상관관계를 잘 요약하는 인용문을 보자.

“그와 반대로 이를테면 관계가 최초다. 세계는 오로지 내게 세계처럼 나타나기 때문에 세계의 의미를 가지며, 나는 오로지 세계와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가 계시되는 것은 나를 위해서이기 때문에 나의 의미를 가진다”

그랬을 때 중요해지는 것은 언어와 의미(의식)다. 이 두 가지는 외재적인 것들을 관계의 결과들로 만듦으로써 관계를 벗어난 모든 것들을 사유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무언가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내부에(의식과 언어에) 의존해야 하고, 역으로 의식과 언어가 향하는 것은 외재적인 것이다. 하지만 외부의 것을 다룬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의식과 언어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언어와 의식은 마치 투명한 감옥처럼(프란시스 볼프의 용어) 존재하면서, 인간의 외부를 마치 투명한 유리 너머에 있는 외부처럼 ‘유폐적 외부’로 만든다. 일단 상관관계적 사유에 진입한 순간부터 인간은 의식과 언어로부터 벗어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다. 메이야수는 그랬을 때 인간이 잃어버리게 된 것이 거대한 외계(Grand Dehors)라고 말한다. 거대한 외계는 인간에 대해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경험에 주어지든 말든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국의 영토에 있다는―이제는 완전히 다른 곳에 있다는―정당한 감정과 함께 사유가 돌아다닐 수 있었던 저 외계.” 그 외계는 사유가 외부적인 것들을 모두 상대적인 것으로 만들기 전까지는 모험의 지역이었다.
메이야수는 칸트에게서 시작된 상관주의가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에 이르면서 더욱 강력한 상관주의로 변질되었다고 판단한다. 칸트는 경험의 조건들을 이야기한다고 할지라도 물자체의 영역을 여전히 남겨놓으면서 약한 상관주의로 남는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는 언어로 말해질 수 없는 세계를 신비한 것으로 만들었고, 하이데거는 사유와 존재의 만남의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사유를 더욱 신비로운 것으로 만들었다. 메이야수는 이들의 사상을 강한 상관주의라고 명명한다. 강한 상관주의는 물자체를 완전히 배제하고 상관관계에 의해 구성된 세계나 그러한 관계 자체를 신비한 것으로 삼는다.

2) 선조성(ancestralité)
그런데 어떤 영역이 출현한다. 그것은 띠이다. 방사능 핵의 분해 속도 상수와 열광 법칙에 의해 지구의 연대기를 추적하는 그러한 띠는 우주의 기원(135억 년 전), 지구의 형성 시기(44억 5천만 년 전), 지구의 생명체의 기원(35억 년 전), 인간의 기원(200만 년 전)을 표시한다. 이러한 것들은 사유의 출현보다 앞서 있는 것, 즉 인간이 세계와 관계하는 모든 형식보다 앞서 있는 것을 표시한다. 메이야수는 이렇듯 인간 종의 출현보다 앞서 있는 실재 전부를 ‘선조적인 것’이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그렇게 지구의 생명체보다 앞서 있는 실재의 존재나 선조적 사건의 존재를 가리키는 물질들을 원화석(archifossile) 혹은 물질 화석(matière-fossile)이라고 명명한다. 원화석이란 동위원소나 행성의 광선과 같은 선조적 현상에 대한 측정을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 지탱물을 가리킨다. 선조적인 것은 상관주의의 틀 안에서는 전혀 이해될 수 없는 것인데, 왜냐하면 상관주의는 상관관계가 아닌 다른 어떤 것도 이해할 수 없고, 또한 상관관계 그 자체가 영원하다고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주장의 경우에 실재로부터 관심은 더욱 멀어진 채로 에고나 정신을 영속시킴으로써만 그에 상대적인 존재자를 영원한 것으로 만들 것이다. 그와 반대로 선조적 진술은 인간에게 그러한 실재가 나타났든 아니든, 인간이 그것을 사유할 수 있든 없든 상관없이 그 자체의 의미가 궁극적 의미라는 조건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즉 선조적 진술은 실재적 의미를 가지며, 오로지 실재적 의미만을 가진다.
메이야수는 특히 수학적 형식이 선조적 진술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수학적 진술만이 인간과 세계의 관계라는 벗어나기 힘든 감옥 사이에서 실재로 향하는 작은 탈출구를 만들기 때문이다.

2. 회의주의, 신앙절대론
메이야수는 상관주의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한 뒤에 현대철학의 흐름을 낱낱이 분석한다. 그가 바라보는 현대철학은 상관주의의 파생적 결과들, 즉 주관적 형이상학 혹은 ‘회의주의적-신앙절대론적 폐쇄’로 규정된다. 더 이상 거대한 외계, 절대적 외계에 닿을 수 없는 상관주의 철학자들은 상관관계 자체를 지배하는 실체들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것은 생명(베르그손, 들뢰즈)일 수도, 절대정신(헤겔)일 수도, 의지(쇼펜하우어)일 수, 힘에의 의지(니체)일 수도 있다. 혹은 레비나스의 절대적 타자일 수도 있다. 그리고 메이야수가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리오타르의 재현불가능한 숭고도 절대적 타자를 전제한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도무지 이성으로 파악될 수 없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 상관주의는 이성의 형이상학에 종언을 고하면서, 그리하여 완전한 절대자를 포기하면서 인간에 대한 것들만을 사유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절대자에 대한 요구를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했는데, 절대자는 이제 사유불가능한 영역에서 신비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 이것을 메이야수는 이렇게 표현한다.

“철학자들은 절대자들로부터 한 가지만을 요구하는데, 그것은 절대자들에는 합리성을 주장하는 그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절대자에 대한 종교적 신앙이 신앙 자체만을 책임지기 시작하면서, ‘사유의 탈절대화’로 이해된 형이상학의 종언은 절대자에 대한 모든 종교적(혹은 ‘시학적–종교적’) 믿음의, 이성에 의한 합법화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형이상학의 종언은 절대자에 대한 모든 주장들에게서 이성을 몰아냄으로써 종교적인 것들의 어떤 과격한 회귀의 형태를 얻게 되었다.”

현대철학이 보여주는 우울한 측면은 회의주의와 비합리적인 신앙절대론의 복합물의 효과들이다. 그것은 절대자에 도달한다는 이성의 사망신고를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출몰하는 절대자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수용이며, 유한한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절대적 타자의 불멸성에 의지해서 자신의 사유의 궁극적 불멸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이다. 그런데 만약 절대자가 우연적이라면, 아니 우연적으로 존재하는 것, 가능적으로만 존재하는 것 자체가 절대적이라면 그러한 절대자를 어떻게 사유해야 할 것인가? 메이야수는 전적으로 우연적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를 필연적으로 만들고, 그럼으로써 완전한 절대자를 전제하는 독단론으로부터 그리고 절대자 자체를 사유할 수 없다는 회의론적 광신으로부터 모두 벗어난다.

3. 우연적인 존재 그 자체의 필연성. 본사실성(factualité)
메이야수가 말하는 절대자는 근거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연히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우연성을 필연성 안에서의 우연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나는 내일 사고를 당해 죽을 수 있다거나 내일 지진이 나서 도시가 폐허가 될 수 있다거나 등등. 하지만 그런 우연성은 경험적 우연성이며, 생성과 소멸이라는 일반적인 원칙 안에서의 우연성이다. 메이야수가 말하는 우연적으로 있음은 순수 가능성을 말한다. 거기에는 어떤 근거도 없다. 메이야수는 절대적 실재를 “그렇게 존재하지 않을 수 있음” 자체가 그것의 존재인 것이라고 정의한다. 다시 반복하지만 메이야수의 절대적 실재는 그렇게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존재 안에 품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가령 헤겔에서 모순적인 것, 바로 윗 문장에서 말한 그렇게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은 완전한 존재로 가는 하나의 계기일 뿐이다. 메이야수가 말하는 절대자는 모순이 없는 순수가능성으로서의 존재다.
그것은 또한 우연하게 있음이라는 사실에 다시 한 번 사실성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하이데거의 사실성과는 다르다. 모든 것이 우연하게 있음 자체를 사실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직도 그러한 사실성에 대한 인간의 무능력을 전제하는 인간적 사유이기 때문이다. 메이야수가 말하는 순수 가능성으로서의 사실은 사실성의 옷을 입지 않은 사실, 다시 말해 인간이 존재하지 않을 때도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본사실성은 사실성의 비–사실성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는 사실성의 자가–부여의 불가능성[사실성이 스스로에게 사실성을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을 ‘사실성의 비–중복non-redoublement de la facticité’이라고 명명할 것이다.”

사실, 메이야수는 하이데거의 사실성과 구분하기 위해 매우 조심한다. 하이데거는 사실성과 사실적이라는 용어들을 사용함으로써 존재 사건에 어떤 필연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메이야수의 본사실성에는 어떤 이중적 의미가 부과되지 않는다. 심지어 그는 “사실성만이 본사실적이지 않다”고까지 말한다.
이제 ‘사변적’이라는 용어의 뜻에 가까이 왔다. 사변적이라 함은 절대자에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철학을 가리킨다. 그리고 ‘형이상학’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은 그러한 절대자에 대한 접근을 이성원리에 의해 근거짓는 철학을 말한다. 그런데 ‘사변적’이면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형이상학적’이지 않을 수 있는데, 이는 메이야수가 말하는 절대자가 어떤 근거도 갖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우연적 존재자를 더 잘 설명하기 위해서 새로운 시간 관념을 제시한다. 그것은 역사적 시간(근거를 갖는 시간)이 전혀 아닌 카오스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카오스는 모든 질서를 파괴하는 카오스가 아니라 아무거나 생성하는 카오스, 심지어 죽음, 비존재마저도 생성하는 카오스다. 우연성을 필연적인 속성으로 갖는 모순적 존재자는 카오스라는 시간성 안에 기입된다. 카오스 안에서의 존재자는 그 어떤 필연성도 갖지 않지만 그 어떤 타자성도 갖지 않는다. 카오스는 비모순적 존재자, 다시 말해 즉자 존재만을 제외한 모든 존재가 생성되는 시간이다. “카오스가 절대로 생산할 수 없는 무엇, 그것은 필연적인 존재자다. 필연적인 어떤 것을 제외한다면 모든 것이 생산될 수 있고 모든 것이 일어날 수 있다. 필연적인 것은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자의 우연성이다.”

4. 표식
메이야수는 사변적 진술에 가장 적합한 기호는 수학이다. 왜냐하면 수학적 진술은 본사실적 특징으로부터 기호의 일자를 역사적, 의미론적 맥락에서 결정된 존재자적 일자와 구분하기 때문이다. 그는 수학의 기호를 의미를 제거한 기호라고 명명한다. 하지만 그것이 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마치 고고학자가 사라진 문명의 폐허 속에서 발견한 석판에 새겨진 반복적 모티브들에서 공간-시간적 반복에 종속되지 않는 표식의 단일성의 양태를 획득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표식이다. 우리가 유사한 표식들을 동일한 유형의 반복처럼 생각할 때 공간-시간 마다 그 표식이 가질 수 있는 차이의 효과가 사라진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표식의 반복이 절대적으로 동일하다도 말할 권리를 갖는다. 또한 그것은 모든 인간적 경험으로부터 벗어난다. 가령 기수들이나 음표들이 단일성의 ‘유형’으로 확립된 기호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의미화하는 작용을 하는 것으로 기호를 파악하거나 유형적으로 기호를 파악한다. 메이야수가 말하는 표식은 후자이다.
그렇게 얻어진 표식이 사실적 표식, 말하자면 절대적인 우연성을 갖는 표식이 될 때 그것은 모든 다른 현실 속에서도 동일하고, 다른 공간과 다른 시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유형으로서 파악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기호의 단일화는 존재론적 단일화로 이행하고 표식 속에 영원한 우연성이 현전하게 된다. 그는 한 논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영원성의 본성이란 무엇인가? 나의 테제는 이렇다. 기호학적 단일성의 파악 속에 잡혀있는 영원성은 기호의 출현의 우연성의 파악 속에서 자신의 원천을 얻는다.”(Quentin Meillassoux, “Contingence et absolutisation de l’Un”) 다시 말해 그 표식은 “존재하는 것은 우연히 존재한다. 그것이 필연적이다”를 함축하는 표식이다. 메이야수가 말하는 표식, 그가 세우고자 하는 존재론적 기호의 절대성은 우연성만이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적 존재자가 필연적인 시간성, 카오스의 시간성 안에서 타당성을 획득한다.


메이야수의 사변적 실재론 II

퀑탱 메이야수의 사변적 실재론에 관한 개요 II

1. 흄의 문제

1.1 당구공의 진로
메이야수는 순수가능성이 조건으로서의 시간성을 카오스라고 정의했다. 카오스는 존재하는 것이 그렇게 존재해야할 아무런 근거를 갖지 않으며, 무엇이건 생성될 수 있는 시간성을 말한다. 이러한 시간성은 역사성을 갖지 않으며 따라서 이야기도 갖지 않는다. 그렇다면 카오스는 무질서, 혼돈인가? 메이야수는 그러한 생각은 세계의 인식을 필연론적 인식과 중첩시키기 때문에 유래하는 것이라고 본다. 세계의 안정성은 있다. 그러나 이 안정성은 인식이 마련해놓은 법칙을 따르는 안정성이 아니라 실재의 안정성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근거를 갖지 않은 존재자들이 출현할 수 있으며 우연적인 사건들이 일어날 수 있다.
흄이 제기한 문제는 상황들이 동일할 때 어제 일어난 일이 오늘도 미래에도 똑같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인과적 연결의 필연성에 대한 질문이다. 그는 <인간 오성에 관한 연구>에서 당구공의 사례를 제시한다.
“가령 내가 다른 공을 향해 직선으로 움직이는 당구공을 볼 때, 두 번째 공의 운동이 그것들의 접촉이나 충돌의 결과처럼 우연적으로 내게 연상된다고 가정한다면 실제로 나는 다양한 백 가지 사건들 역시 저 원인을 따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아닌가? 두 개의 공이 모두 절대적 휴식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을까? 첫 번째 공이 다시금 직선의 운동을 계속하거나, 어떤 선을 그리면서 그리고 어떤 방향을 향해 두 번째 공으로부터 튕겨나올 수는 없을까? 이 모든 가정들은 일관적이며 파악가능하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것들 가운데 다른 것들보다 더 일관적이지도 않고 더 파악가능하지도 않은 어느 하나에 특권을 부여하는가? 우리의 모든 추론은 선험적으로 그러한 특권의 토대를 우리 자신에게 결코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가령 당구공은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수도 있고 당구대를 뚫을 수도 있고 갑자기 산산조각 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공의 진로를 예측하고, 확신한다. 그러한 확신을 물리학자들은 법칙에서 찾을 것이다. 그런데 흄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그러한 확신이 습관이나 관행이라는 심리학적 기원에서 나온다고 본다.
흄의 경험에서의 우연성에 대한 대답은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적 방식이 있고, 칸트의 인식론적 방식이 있다. 전자는 완전한 신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우선 증명한다. 그러한 신은 여러 가능한 세계들 가운데 오로지 최상의 것, 다시 말해 우리의 세계를 창조했을 것이고 이 세계는 영원하게 존재할 것이다. 후자의 방식은 모순적인 것들을 인간은 표상할 수 없기 때문에 설령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그것을 알 수 없다. 가령 당구공이 뛰논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그러한 환상적 무대를 가정하며, 그러한 무대라는 배경은 표상의 통일된 틀 안에 있다. 그런데 흄이 제기하는 문제는 인과성이 어떤 근거에서 세계를 지배하는 가가 아니라 인과적 법칙이 지배하지 않는 경험이 가능한가에 놓여있었다. 즉 그가 제기했던 문제는 물리학 자체가 미래에도 여전히 가능할 것이지를 우리에게 보장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하여간 형이상학적 방식이나 인식론적 방식이나, 흄처럼 그 근거를 심리적인 것에 둔 것이나 경험의 사건을 보장하는 인과적 필연성을 선취된 진리처럼 간주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흄 자신은 현실적인 필연성, 우리의 이성이 뒷받침하지 않은 물리적 세계에서의 필연성을 계속해서 믿는다. 흄이 회의주의의 전통을 만들었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흄을 이은 회의주의자들이 맹신으로 돌아선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1.2 과학소설과 과학 너머의 소설
메이야수는 고등사범학교에서 한 강연에서 과학소설과 과학너머의 소설을 대립시키고, 전자를 포퍼의 철학에 대입시키고 후자를 흄의 철학에 대입시킨다. 아시모프의 단편, <반중력 당구공>을 보면 두 물리학자가 나온다. 제임스 프리스와 에드워드 블룸. 프리스는 노벨상을 받은 물리학자이며 블룸은 그런 프리스의 이론을 이용해서 돈을 번다. 이 둘은 서로를 증오하지만 모두 당구를 엄청 좋아한다. 어느 날 프리스의 성공을 질투한 블룸은 멈추지 않는 운동을 보여주는 아주 복잡한 장치를 만들자는 제안을 한다. 그리고 자신의 발명을 처음 공개하는 날, 그는 기자들과 관객들을 초청하고 자신이 만든 당구대를 보여준다. 블룸은 당구대 중앙에 공이 멈추지 않는 반중력을 만들어내는 장치를 설치했던 것이다. 실험실 안에 당구대가 설치되어 있고 조명이 당구대 위만을 비춘다. 블룸은 프리스에게 자신이 만든 당구대 위에서 처음 당구공을 치는 영광을 제안한다. 프리스가 당구공을 치자, 그 당구공은 반중력 상태를 벗어나 빛의 속도로 블룸의 가슴 한 복판을 뚫고 벽을 뚫고 우주까지 날아간다. 블룸이 그 자리에서 즉사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자리에 있었던 화자이자 기자는 어떻게 장치를 고안한 블룸이 그러한 위험을 알 수 없었는지를 의아해한다.
이 소설을 준거로 삼아서 메이야수는 과학소설과 과학 너머의 소설을 구분한다. 과학 소설은 물리학 법칙을 기반으로 한 소설이고 과학 너머의 소설은 법칙과는 전혀 무관한 소설이다. 흔히 반증주의로 알려진 포퍼는 어떤 새로운 경험에 의해 과학의 이론이 파괴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이 파괴는 새로운 물리학 이론을 위한 동기가 된다. 그랬을 때 포퍼는 새로운 경험을 단지 이론이 아직 목록화하지 않은 경험으로서만 취급한다. 예를 들어 태양이 뜨고 지면서 낮과 밤이 이어진다는 하루의 주기는 남극에서 일정 기간 동안 24시간 내내 낮만 지속되는 새로운 경험에 의해 반박되지만, 이 새로운 경험은 지구의 자전과 공전, 태양의 위치 등등 물리학 법칙에 의해 다시 설명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태양이 태양계로부터 돌연히 벗어나 버린 것이라면? 인간은 빵을 먹어야 살 수 있다는 법칙은 인간이 빵만 먹었을 때 병에 걸려 죽는 새로운 경험으로 반박될 수 있지만, 하지만 이 새로운 경험은 다시금 인간 생존을 위해 필요한 영양소들이 빵에 없다는 사실로 다시금 교정된다. 그런데 만약 똑같은 빵의 화학 분자들이 갑자기 인간을 죽이는 독소의 화학분자가 된다면?
포퍼의 반증주의와 과학 소설은 법칙의 변화들, 그리고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법칙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구성한다. 반면에 흄의 문제와 과학 너머의 소설은 요컨대 가령 내일 물리학 법칙 자체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것은 여하한 물리학 법칙이 감쌀 수 없는 외부 현실의 순수한 가능성이고 카오스의 상태이다. 포퍼는 물리학 이론들의 미래의 유효성에 관한 질문은 이 이론들이 새로운 경험들에 의해 반박될지라도 그 반박이 새로운 물리학 이론들을 위해 형성될 것이기 때문에 미래에도 물리학은 여전히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제한다. 흄의 질문은 개연성의 문제, 더 나아가 확률적인 법칙의 타당성과도 무관하다. 그렇지만 흄은 전혀 인과적이지 않은 우주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을 암시한다.
아시모프의 소설에서 프리스는 저 예상치 못한 사고 이후에 질문을 던진 신문기자에게 당구공의 진로를 과학적으로 설명함으로써 그의 소설이 포퍼적인 과학 소설에 그치게 만든다. 다시 말해 소설에서 저 낯설고 치명적인 새로운 경험이 법칙의 단절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과학 소설은 새로운 현상, 새로운 경험을 언제나 현재의 과학에 비추어 다시 설명하고 과학의 법칙을 교정하기 때문이다.
로바쳅스키가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탄생시켰던 것은 모험을 통해서였다. 그는 우선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준, 즉 어느 직선에 대해 한 점이 주어졌을 때 처음의 직선과 지각을 이루는 평행선은 유일하다는 공준을 증명하기 위해 이 공준의 오류를 가정했다. 예를 들어 한 선분과 평행을 이루는 수많은 직선들이 주어진 한 점을 지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것을 불합리에 의한 증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로바쳅스키가 도달한 것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증명과는 거리가 먼, 유클리드 기하학 만큼이나 일관적이고 새로운 기하학이었다. 이것은 인과적이지 않은 우주가 인과적 우주만큼이나 일관성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수학적 법칙이 알려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랬을 때 “우리는 그러한 비-인과적 우주가 물리적 필연성에 대한 믿음에 내재하는 수수께끼들로부터 해방된 우주임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인과적 우주에서 비-인과적 우주로 이행할 때 우리는 세계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세계의 수수께끼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수께끼는 무엇으로 바뀌게 된 것일까? 그것은 우연적 사건인 것이고 세계의 순수가능성이다. 카오스가 무질서로 인식되는 것은 의식과 세계의 상관관계가 요청하는 질서와 지속성을 불가능하게 만들 때이다. 하지만 세계가 의식의 질서와 무관한 방식으로 존재한다면?
사람들은 온전한 우연성을 인정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연성을 개연적이지 않은 결과들과 비교한다. 그런데 개연성(probabilité)과 비개연성의 편차는 늘 필연론적 전제를 깔고 있다. 다시 말해 개연적인 사건과 비개연적인 사건은 가능성의 총체를 전제한다. 하지만 메이야수에게 우연적 사건은 비개연적인 결과와 다르며, 이 둘을 비교하기 위해 수학을 끌어들이는데, 그것이 칸토어의 초한수이다.

1.3 사행적 추론과 우연적 사건 – 초한수
메이야수는 부조리에 대해 우리가 갖는 두려움이 정확히 사행적 개념화에 근거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두려움은 표상들의 현행적인 불변성을 예외적인 행운으로 간주할 것이다. 이것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우연성을 생각하는 것인데, 메이야수에 따르면 본사실적 사변은 카오스의 안정성, 근거를 전제하는 이성 원리로부터 벗어났다고 할지라도 안정성을 잃지 않는 카오스의 조건 자체를 추구한다. 그리고 이것은 수학적 본성에서 나온다. 물론 이러한 수학적 본성이 확률적인 성격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개연론적 추론은 선험적인(경험 이전의) 가능적 존재가 수적 총합의 방식으로 사유될 수 있다는 조건에서만 타당하다. 개연성을 계산해내기 위해서는 그 가능성들이 유한하건 무한하건 상관없다. 예를 들어 팽팽하게 당겨진 밧줄이 끊어질 수 있는 실증적 개연성을 계산하기 위해서는 밧줄 위에 점들이 무한할지라도 상관없다. 따라서 개연성을 계산하기 위해서는 모순이 부재하는 파악가능한 가능성들의 총합이 실제로 있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다. 이때의 개연적 사건들은 이산적이지만 연속적이다.
그런데 가능성의 총합이라는 전제가 아무런 근거를 갖지 않는다면? 경우들의 총합인 우주-전체의 이념이 근거 없는 것이라면? 과학자들은 가능한 총체에 대한 가설을 만들고 그리하여 전체를 파악하려고 한다. 바로 이러한 수적인 총체화에 반박할 수 있는 수학 이론이 칸토어의 초한수 개념이다. 그 전에 확률과 가능성의 수적 총합에 의한 사행성(요행)과 우연성이 어떻게 다른지를 인용문을 통해 알아보자.

“우리는 ‘요행hasard’(아랍어: az-zahr)과 ‘사행적aléatoire’(라틴어: alea)이라는 용어들이 모두 근접한 어원들과 관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주사위’, ‘주사위 던지기’, ‘주사위 놀이’. 그러므로 이 개념들은 놀이와 계산이라는 주제들을 대립된 것들이 아닌, 분리불가능하게 엮인 것으로 환기시킨다: 모든 주사위 놀이에 내재하는 요행들의 계산. 따라서 존재와 요행의 일치가 사유를 지배할 때마다 주사위–전체라는 주제(가능성들의 수의 한결같은 봉입), 놀이의 무상성이라는 주제(삶과, 삶에 상위적인 표피성 안에서 인식된 세계의 놀이)가 모습을 드러내지만, 또한 빈도수의 냉혹한 계산이라는 주제(생명 보험과 위험 평가의 세계)가 모습을 드러낸다. 가능성들의 봉입의 존재론은 계산의 기술만을 진지하게 고려한다는 사실 때문에 필연적으로 우리를 중력을 혐오하는 세계 안에 위치시킨다.
그와 반대로, 우연성(contingence)이라는 용어는 라틴어 contingere(프랑스어의 arriver)와 관련되는데, 그것은 일어나는 것, 그렇지만 충분히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우연적임, 그것은 요컨대 어떤 것이 마침내 일어날 때다. 이미 등록된 모든 가능성들로부터 벗어나면서, 비개연적인 것까지도 포함한 모든 게 예측 가능한 그런 놀이의 허영심에 종지부를 찍는 다른 무언가가 일어날 때. 무엇이 우리에게 일어날 때, 새로운 것이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몰아세울 때 계산도 놀이도 끝나게 된다. 마침내 진지한 것들이 시작된다.”(메이야수, <유한성 이후>, pp. 185-186)

이 인용문을 보면 우연성은 확률과 다른 것, 가능성의 총체라는 피상적이고도 인간적인 이념을 벗어나 실재의 사건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칸토어의 초한수란 무엇인가? 이것은 바디우가 자신의 집합이론에 적용하는 이론이기도 하다. 간단히 말해서 초한수는 모든 양들의 전체(Tout) 집합이 그 집합의 부분집합들의 종합에 근거해서 획득된 양을 포함할 수 없게 만드는 공집합을 가리킨다. 가령 (1, 2, 3)의 부분집합의 수는 (1), (2), (3), (1,2), (2,3), (1,3)이라는 양적 총합에 ( )이라는 공집합을 더하게 된다. 따라서 모든 집합의 원소들의 수는(비록 이 수가 무한하다고 할지라도) 그 원소들을 다시 묶은 그룹들의 수에 의해 항상 초과된다. 위에서 사례로 든 밧줄에서 끊어질 수 있는 점의 확률을 계산할 수는 있지만 밧줄이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다거나 돌연히 밧줄이 사라진다거나 하는 경우는 확률적 가능성의 총체를 넘어선다. 그리고 이런 우연성은 집합들 전체의 일관성으로부터도 벗어난다.
칸토어의 초한수는 법칙들의 필연성에 대한 모든 믿음을 해체시킨다. 또한 필연성에 대한 기본적인 전제, ‘어째서 그것이 다르게가 아니라 그처럼 존재하는가’를 묻는 질문에 대해 사변 철학자는 간단히 거기에는 근거가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제 신비는 존재하지 않는데, 이는 문제들이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연적 사건을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전제하는 이성 원리가 존재하지 않아서이다. 메이야수는 이성 원리에 의거하지 않는 우연적 사건, 세계를 비전체로 만드는 우연적 사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형상(figure)라는 표현을 쓴다. 우연성을 명기하는 것, 그것은 칸토어의 초한수를 우연적 존재의 조건처럼 사유하는 것이며, 형상의 자격으로서 비-전체를 도출하는 것이다.

2. 프톨레마이오스의 복수(회귀)

프톨레마이오스는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이자. 그는 천동설을 주장하는 알마게스트를 저술했고, 종교적인 이유에서 파문을 당한다. 그의 천동설은 고대 과학의 오랜 발전의 결과이자, 천체들의 관찰, 수, 계산, 척도에 근거해서 세워진 이론이다. 비록 지금 그의 천동설이 비할 데 없이 조야해 보이지만 아무튼 프톨레마이오스는 물리학의 영역에서 하나의 획을 그었다고 볼 수 있다.
메이야수는 <유한성 이후>의 첫 부분을 원화석과 선조성으로부터 시작했다. 이 두 가지가 그가 유일하게 진정한 과학적 담화로 보는 것이자 인간 중심적 과학으로부터 해방된 사변적인 과학 담화라고 보는 것이다. 앞에서 이미 보았듯이 원화석과 선조성은 인간의 출현에 선행하는 사건, 뿐만 아니라 인간 종의 소멸에도 가능한 사건들과 관계한다. 그러한 사건들과 그와 연관된 진술들을 특징짓기 위해 메이야수는 통-시성(dia-chronicité)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리고 통-시성 안에 걸려있는 것이야말로 실험과학 일반의 본성이라고 본다.
갈릴레이와 코페르니쿠스에 의한 근대 과학은 수학에 기초해 있었으며, 메이야수에 의하면 사유와 무관한 존재를 탐사할 수 있는 길을 터주었다. 이러한 근대 과학이 창설되자 이전까지 인간의 실존에 앞설 수 있는 것들을 이야기하기 위해 신화나, 신통계보학, 환상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으며 그러한 것들을 진술하기 위해 오로지 과학적 가설로 충분했다. 관찰자의 실존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 그러한 과학에서 근본적인 점은, 과학이 자연적으로 실재적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데도 존재할 수도 있는 것에 대한 인식의 과정을 전개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의 과정이 과학의 본성을 구성한다는 점(자연의 수학화)이다.
갈릴레이가 수학을 세계와 결합시키기 이전에 프톨레마이오스도 수학과 측량에 의해 천동설을 내놓았으나, 이때 인간이 놓인 중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왜냐하면 지구라는 중심 자리가 우주의 수치스럽고 영광스럽지 못한 자리처럼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연의 수학화 이후에 사람들이 가졌던 상실과 유사하다. 인간은 이제 특권화된 모든 관점을 상실했고, 자신을 자신의 환경에 거주하게 허락했던 의미를 더 이상 세계에 투여할 수 없다. 세계는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 인간은 사르트르가 말하듯이 ‘잉여적 de trop’이 되었다.

“근대 과학이 인간이 자기 자신과 우주에 대해 가질 수 있었던 표상들에 주입한 황폐와 버림의 느낌은 다음의 원인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을 갖지 않는다. 즉 세계에 대한 사유의 우연성에 대한 사유, 사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 세계―사유되었다는 사실이나 사유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해 근본적으로 영향 받지 않는 세계―를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메이야수, <유한성 이후>, p. 199)

따라서 갈릴레오-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은 인간의 탈중심화를 내포하며, 데카르트의 테제, 요컨대 수학적으로 사유가능한 것은 절대적으로 가능하다는 테제를 증언한다. 다만 데카르트가 절대적 존재자에 대한 확신을 유지하는 독단론적 태도를 가졌다면, 메이야수에게서 과학의 수학화에 의한 절대성이 가리키는 것은 가설적 방식에 의해서일지라도 수학적으로 기술될 수 있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현시하든 아니든 상관없이 존속할 수 있다는 것을 인간이 사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통-시적 지시물들(원화석)은 영원불변한 절대자이면서 동시에 전적으로 우연적인 존재이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칸트는 자신의 인식론적 전환을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명명한다. 칸트는 이상하게도 부동적이라고 믿었던 관찰자가 사실상 관찰되는 태양의 둘레를 돈다는 것을 확증하는 코페르니쿠스의 태도와 정반대되는 방식으로 주체가 인식과정 안에서 중심에 있다는 것을 확증하고 있다. 즉 그는 원래의 코페르니쿠스의 발견과는 정반대로 인간의 인식에 의해 대상이 조정되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칸트는 근대과학의 성과를 사유가능성의 조건으로 돌리면서 방향을 전환시켜 버렸다. 그는 갈릴레오-코페르니쿠스적 탈중심화를 예컨대 프톨레마이오스적 중심화(반-혁명)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과학이 처음으로 사유에 있어서, 사유와 세계의 관계와 무관한 세계 인식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발견했다면, 철학은 그러한 발견에 대해 자신의 고유한 오래된 독단주의라는 소박성의 발견으로 응답”한 것이다. 메이야수에 따르면 칸트는 과학적 코페르니쿠스 주의의 심오한 의미란 다름 아닌 철학적 프톨레마이오스 주의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은 근대 과학의 분명한 실재론적 의미가 사실은 현상에 따른 파생적이고 외양적인 의미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과학이 사변적 실재를 갓 사유하자마자 그러한 사유는 칸트에 의해서 곧바로 파면되었다. 이것은 실재, 다시 말해 즉자적 대상(혹은 외계)에 대한 사유를 포기하는 순간과 일치한다. 즉자적 대상은 이성 바깥으로 축출되었다.
칸트는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을까? 그는 근대과학이 모든 형이상학적 사유를 파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졌을 것이다. 그는 불변의 절대자, 필연적인 절대자에 대한 믿음이 독단주의로 흐르는 것을 경계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자에 대한 모든 믿음이 사라지는 것을 염려했을 것이다.
그런데 칸트의 염려와는 다르게 메이야수는 독단적 절대자이지 않으면서도 사유가능한 것을 수학적 가설로부터 찾으려고 한다. “본사실성의 원리의 과제”란 “가설적이라고 할지라도 절대화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정식화할 수 있는 모든 수학적 진술의 능력을 형상(figure)의 자격으로 도출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존재자의 우연성이라는 필연적 조건을 포착하면서” “시도하는 수학”이 될 것이다.

3. 에필로그

메이야수의 강연이 끝나고 사람들이 질문을 한다. 질문자들 다수가 우선은 메이야수의 논증을 따라가기 어려워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사변적 실재론을 현실로서 파악하기를 어려워한다. 어떤 질문자는 그가 말하는 비(非)-전체로서의 세계와 세계의 단일성이 어떻게 동시에 가능한지를 질문한다. 메이야수가 전달하고자 하는 실재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과 무관한 현실, 가설로도 그 존재를 증언할 수 있는 현실, 하지만 전적으로 우연성 아래 놓인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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