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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8일 수요일

도올과 베버의 대화

도올과 베버의 대화 
http://www.yesu.kimc.net/33dolbe.htm
 ▣ 목차
 1. 머리말
 2. 도올과 베버의 프로필
 3. 베버의 사회과학적 방법론
 4. 금욕주의의 신앙적근원
 5. 근대 자본주의의 특징
 6. 도올의 베버 비판
 7. 맺 음 말
 ● 부 록 1 [도올 논어(2)]
 ◇ 요절 : ① 성경: "네가 자기 사업(직업 또는 사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잠22:29)
               ② 論語: "자왈 '군자불기'(子曰 '君子不器')"
 ▣ 본문
 1. 머리말
 KBS TV1 의 '도올의 논어 이야기' 제42강(2001년 3월 2일, 23:30~24:30)에서 도올의 베버비판을 흥미 있게 시청하고, 그 강의 내용을, 도올 강의를 시청하는 시청자들과 또 이 주제에 관심을 갖는 분들을 위하여, 좀더 부연(敷演)하고자 하여 동서양의 대표적 두 석학(碩學)의 지상대화(紙上對話,Cyber dialogue)의 장(場)을 마련했다. 이것은 작은 세기적인 대화(世紀的인 對話)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대화의 논점(Point)은 서구 근대의 직업관(Beruf, Professional specialist)과 유교권의 직업[기(器), a tool, 동양적인 전문직]사상이 근대의 동서양의 경제사회에 각기 끼친 문화와 시스템(System)의 차이를 비교한 막스 베버(Max weber)의 비판을, 도올이 공자(孔子)편에서 비판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필자가 국외자(Spectator)로서 코멘트(Comment)하는 형식으로 쟁점별로 지상대화를 전개시킨다.  대화의 텍스트(Text)는, '도올논어(2)' (김용옥저서, 서울, 통나무, 2001.2.1)와 '프로테스탄티즘의 倫理와 資本主義의 精神'(막스 베버저서, 강명규의역, 서울, 一潮閣, 1985.3.10)이다.(단, 이 글은 본문에서는 각기'도올논어(2)'와 '베버의 저서'로 약칭한다.)
 2. 도올과 베버의 프로필(Profile)
 도올(김용옥교수)은 한국 천안 태생(서기 2001년 현대 50대 초반)으로 고려대학교, 국립대만대학, 일본동경대학, 미국하바드대학에서 중국 철학을 전공하고 고려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세계적인 중국 철학자의 한 분이다.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는 독일 엘프르트시 태생으로 하이델 베르크대학에서 법률학, 역사학, 경제학, 사회학, 철학등을 수업(修業)한 후, 그의 풍부한 세계사적 지식을 배경으로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 철학등을 포괄적으로 이해.발전시킨 위대한 서구의 사회과학자였다. 그의 핵심적인 업적은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사회과학 방법론의 확립이며, 그 둘은 그의 사회과학 방법론에 의한 근대 자본주의의 해석이다. 그의 대표적 역작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 (Die Protestantishe Ethik Und Geist des Kapitalismus, zuerst 1904-1905)이다
 3. 베버(Max Weber)의 사회과학적 방법론
 (1) 베버의 방법론
 베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베버의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베버의 방법론은 이념형(理念型,Ideal Typus)과 가치 중립성(價値 中立性,Wertfreheit)이다. 현실의 인과관계를 설명할 경우 인과성의 필연성이나 법칙이 아니라 달리도 일어날 수도 있는데 그렇게 일어 났다는 개연성(Probability), 또는 확율성으로 설명한다. 즉 베버는 어떤 역사적 현상의 결과는 무수히 많은 원인들이 모두 일정한 역할을 가지고 참여함으로써 나타난 것이므로 한 가지 요인에 의한 필연적 결과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경제적인 요인만을 중시하는 맑스(K. Marx, 1818-1883)의 방법론과 역사학파의 개념들(역사법칙 및 민족정신등)을 배격하였다.  따라서 그의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의 윤리라는 이념형(理念型)은 자본주의 정신의 기원을 상징하기 위한 수단일 뿐 자본주의 자체를 설명하기 위한 개념은 아니었다. 베버의 개념은 인식자(認識者)의 사유과정(思惟過程)에서 얻어지는 것이므로 현실 속에서 순수하게 발견될 수 없는 것이다. 현실은 여러 이념형들의 혼합체로 나타나므로, 특수한 개별적 특징 모두를 설명해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학파등의 평균(平均槪念)이 제외시킨 비 평균적인 요소도 모두 설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2) 도올의 베버 방법인식
 (가) 도올의 텍스트
 (ㄱ) 자료 1 : "자아! 이 정도되었으면 공자의 '군자불기'(君子不器)로 인하여 동양사상이 얻어먹어야 했던 '베버의 욕지거리'를 독자들은 실컷 얻어 먹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도올논어(2), P149]
 (ㄴ) 자료 2 : "그러나 우선 그가 케피탈리즘의 발생연원의 정신사적 필연성으로서 프로테스탄티즘을 운운하는 것은, 결과적 사태에 대한 기술은 될 수 있을 지언정, 인과론적인 필요충분조건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에서 캐피탈리즘이 발생 안할 수도 있는 것이며, 유교의 현세주의에서 캐피탈리즘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상적 성향을 캐피탈리즘의 발생으로 유도시키는 해석의 행태에는 그 사상자체 이외의 모든 정치, 사회, 경제사적 우발요인이 관여되어 있는 것이다. 캐피탈리즘의 불발생의 원인을 유교에다 물을 수 없다...." [도올논어(2), P150상단)
 (나) 도올 이해에 대한 코멘트
 첫째, 자료1에서 '베버의 욕지거리'란 말은 속어적 표현으로 적당하지 않지만, 더 중요한 요점은 도올이 베버의 가치 중립적 즉 몰가치적(沒價値的)방법론을 간과한 말을 하고 있다.
 둘째, 자료2에서는 세 가지 오류점이 발견된다. 그 하나는, 베버의 방법론이 이념형(Ideal Typus)이라는 것을 지각했다면  "...인과론적인 필요충분조건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표현이 나올 수 없다.  그 둘은,  "...그러한 사상적 성향을 캐피탈리즘의 발생으로 유도시키는 해석의 행태에는 ..."  구절에서도 베버의 이념형과 가치중립적인 방법론을 간과하고 있다.
 그 셋은, "...캐피탈리즘의 발생으로 유도시키는 해석의 행태에는 그 사상자체 이외의 모든 정치, 사회, 경제사적 우발요인이 관여되어 있는 것이다...."라고 하여 이 구문에서는, 도올은 베버의 "현실은 여러 이념형들의 혼합체로 나타나므로 평균개념이 제외시킨 비 평균적인 요소도 모두 설명할 수 있다."는 베버의 이념형과 의견이 일치 하기도 하여 베버 방법론에 대한 이해의 일관성에 혼란을 준다.
 4. 금욕주의(禁慾主義)의 신앙적 근원
 (1) 도올의 텍스트
 ●자료 3 : "퓨리탄의 금욕주의가 가귀(可貴)한 것이라면, 유교의 금욕주의 또한 그 이상의 진실한 내면을 포용하는 것이다."[도올논어(2), P150하단)
 (2)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의 금욕윤리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윤리는 '인간의 모든 소유는 하나님으로부터 맡겨진 것이고, 소유자는 다만 하나님의 관리자(magisrates of officers of God)일뿐이다.'라는 기독교의 교리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을 인간의 향락을 위하여 낭비하는 것은 올바른 행위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진실한 기독교인들은, 성실한 직업생활(잠22:29)로 저축한 재산을 건전한 사업에 투자하여 합법적 이윤을 추구하여, 그것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선용(善用)해야 할 금욕적 소유인들이다.(참고; 마25:14-30)
 (3) 유교의 금욕윤리
 도올은, "유교의 금욕주의 또한 그 이상의 진실한 내면을 포함하고 있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유교의 내면적 금욕윤리의 실체(철학)가 무엇인가? 알고 싶다.
 우리가 알기엔 퓨리탄의 금욕윤리 이상의 진실한 내면적 금욕주의를 들은 적이 없다. 다시말하면 합리적인 절약심이나, 천민자본주의 정신인 '영리욕'(營利慾)이상의 신앙적인(참고; 마6:19-21) 금욕윤리가 유교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5. 근대 자본주의의 특징
 (1) 도올의 텍스트
 ●자료 4 : 도올은,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의 금욕주의에서 캐피탈리즘(Capitalism)이 발생 안할 수도 있는 것이며, 유교의 현세주의에서 캐피탈리즘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도올논어(2), P150]
 (2) 자본주의(Capitalism)의 개념
 (가) 자본주의의 두 개념
 막스베버는 두 가지 자본주의를 말했는데, 그 하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경제활동의 동기인 영리욕(營利慾)만에 의하여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를 천민자본주의(Pariakapitalismus)라고 하고, 프로테스탄티즘(특히 Calvinism)의 금욕윤리에 의하여 규제되는 규범적 이윤추구의 자본주의를 근대적 자본주의 또는 윤리적 자본주의라고 정의했다.
 (나) 근대 자본주의의 인프라(INFRA)
 근대 자본주의 성립의 두 가지 초석은 자본의 축적과 상품노동의 제공이었다.  이것은 주로 프로테스탄트들의 소명의식적인 전문직업인(Professional Specialization)이 제공한 상품노동과 그들의 금욕적 절약에 의한 산업자본의 축적(accumulation)이었다고 한다.
 (ㄱ) 자본(투자자원)
 프로테스탄트들의 금욕적 절약에 의한 투자에 대하여 베버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료 5 : 전형적인 청교도들은 많이 벌고 적게 썼다. 그리고 그의 소득을, 절약하고자 하는 금욕주의적 열정으로부터, 매우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사업에 자본으로서 재투자하였다.[The typical Puritan earned plenty, spent little, and reinvested his income as capital in rational capitalist enterprise out of an asceticist compulsion to save.(RC, p.247)]
 (ㄴ) 상품노동의 제공
 근대 자본주의는 자본과 함께 인간노동의 상품화가 동반된 시스템이었다. 즉 근대의 자본주의는 자본을 갖지 못한 노동자가 자기의 노동력(생산수단)을 팔아서 살아가는 임금노동자가 필요하다. 이 노동자들이 일정한 영역의 노동행위를 전문적으로 반복할 때 근대적인 의미의 직업(Professional, Beruf, Vocation)이 되었고, 또 사회적 지위도 되었다. 이 근대적 의미의 직업은 동양이나 중세의 직업개념과 다르다.
 서구의 중세(캐토릭사회)에 있어서, 직업은 자연적 질서의 하나이나 도덕적 계율에 있어서는 권고(勸告, Consolia)의 영역이지 명령(命令, Praeceta)은 아니었다. 이에 대하여 프로테스탄티즘의 직업개념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사명(Aufgabe)이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는 도덕적 개념이 있다.  즉  Beruf, Vocation이라는 근대사회의 직업개념은 바로 이 소명(Calling)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3)도올 주장(자료 4)의 비평
 도올은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에서 역사상 특유한 경제 시스템을 결과 시킨 윤리적(또는 근대적)자본주의와 천민자본주의 (Pariakapitalismus)와의 구분을 간과한 채,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의 금욕주의에서 캐피탈리즘(Capitalism)이 발생 안할 수도 있고, 유교의 현세주의에서 캐피타리즘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 텍스트의 논점은 유교의 현세주의가 발생시킬 수 있는 자본주의가 그 어떤 자본주의 이냐이다.  분명히 밝히거니와 유교의 현세주의가 결코 근대 서구의, 그 특유한 윤리적 자본주의를 발생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유전인자가 다른 동양인이 서양인을 탄생시킬 수 없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6. 도올의 베버 비판
 (1) 베버의 텍스트
 ●자료 6 : 유생들의 방심치 않는 자기제어, 즉 수신의 목적은 외면적 제스츄어나 고상한 매너의 품위를 유지하는데 있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의 수신은 기본적으로 심미적인 것이었으며 본질적으로 부정적 성격의 것이었다. 그 자체로서 위엄있는 품행, 아무런 실질적 내용이 없는 공허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품행만이 존중되고 욕망되었다.(The watchful self-control of the confucian was to maintain the dignity of external gesture and manner, to keep "face."  The self-control was of an aesthetic and essentially negative nature. Dignified deportment, in itself devoid of definite content, was esteemed and desired.)

 자료 7 : 유자들에게는, 세분화된 전문직종은 그것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유용한 것인가를 불문하고, 진정으로 긍정적인 권위를 갖는 위치로서 인식될 길이 없었다.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공자가 "논어"에서 한 말, 문화적으로 교양을 쌓은 인간들 즉 군자는 하나의 기(器)로 국한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군자불기(君子不器)의 사상과 관련되어 있다. 즉 군자는 이 세계에 대한 적응 즉 처세나 자신의 완성을 지향하는 수신의 방식에 있어서, 그는 그 자신이 최종적 목적이라고 생각할 뿐, 어떠한 기능적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유교윤리의 이러한 핵심은 전문직종의 분업을 거부했으며, 근대적 전문직의 뷰로크라시를 거부했으며, 전문직종을 위한 특수훈련을 거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군자불기(君子不器)의 사상은 이윤의 추구를 위한 경제학의 훈련을 거부했던 것이다.[For the confucian, the specialistic expert could not be raised to truly posetive dignity, no matter what his social usefulness. The decisive factor was that the "cultured man"(gentleman) was "not a tool"; that is, in his adjustment to the world and in his self-perfection he was an end unto himself not a  means for any functional end. This core of confucian ethics rejected professional specializaton, modern expert bureaucracy, and special training; above all, it rejected training in economics for the pursuit of profit.(RC, p.246)]
 (2) 도올의 원론적 비판
 도올은, "군자불기(君子不器)란 기(器)를 부정하는 언급이 아니라, '무본'(務本)의 뜻을 표방하는 것이다. 소라이(荻生조徠, 1666-1728)의 비판에 의하면 막스 베버의 '군자불기'(君子不器) 비판은 근본적으로 과녁이 빗나간 것이다. 근원적으로 해당사항이 없는 것이다.  불기(不器)는 기(器)의 부정이 아니기 때문이다."라 하며 소라이의 '大低學以成器'(대저학이 성기)를 인용하며, 모든 배움은 기(器)를 이루고(成器), 이 성기(成器)를 통하여 기(器)를 부리는 대도(大道不器)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도올논어(2), p.155]
 도올은 이런 불기(不器)의 논리에 의하여, '공자의 군자불기(君子不器)로 인하여 동양사상이 얻어 먹어야 했던 베버의 욕지거리를 독자들은 실컷 얻어 먹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도올논어(2), p.149]라고 하며, 베버의 판단을 불쾌히 여겼고, 나아가서 베버의 군자불기(君子不器) 비판을, '근본적으로 과녁이 빗나갔고, 근원적으로 해당사항이 없다'고 일축했다.[도올논어(2), p.155]
 (3) 도올의 베버 비판에 대한 코멘트
 (가) 기본개념의 이해문제
 (ㄱ) 군자(君子)와 전문직(Professional Specialization)
 도올은 TV강의에서 군자(君子)를 공자 시대에서는 사(射), 서(書), 예(禮), 악(樂)등을 갖춘 도덕적 지도적 인격자로 지칭했다.  이것은 고대희랍(Greece)의 프라톤(Plato, B.C.427-347)의 이상국(The Republic)에서 말하는 지배자계급(gold class)인 엘리트(Elite, 주로 도덕적 철학자)와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공자의 군자(君子, cultured man, gentleman)와 근대 서구의 전문직(Professional)과는 그 개념이 같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도올 자신도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공자언명의 맥락이 과연 근대사회적 특징을 이루는 전문직종에 대한 종사의 거부(巨富)가 군자(君子)됨의 특징이라고 하는 의미의 맥락으로 사용된 것인지는 지극히 불투명하다.'고 말했다.[도올논어(2), p.p.150-151] 공자는 다만 자기시대의 이상적 인간상을 말한 것이지 2000여년 후인 오늘의 군자상(君子像)을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ㄴ) 불기(不器)와 제네랄리스트(generalist)
 도올은, '기(器)는 분명 한 그릇의 국한된 기능'이나, 불기(不器)는 무본(務本)과 대도(大道)의 경지라 설명했다.[도올논어(2), p.151, p.155]
 즉 불기(不器)는 기(器)의 세계의 부정이 아니다. 기(器)를 포용하는 대도(大道)이며, 제네랄리스트(generalist)라는 의미를 암시했다.[도올논어(2), p.156]
 즉 소라이와 도올은, '대저 배움이란 기(器)를 이루지 않음이 없다.(大低學以成器)라고 하여 인간의 모든 배움이 기(器)를 이루고(成器), 이 성기(成器)를 초극하여 대도(大道)에 이르는 것이 불기(不器)의 경지요, 제네랄리스트(generalist)라 했다.[도올논어(2), p.155]
 이런 뜻이라면, 공자의 기(器)는 지행적 실용인(知行的實用人)이 아니라 다만 현학적(衒學的) 지식인에 불과한 것같다.  그러나 근대자본주의 사회의 스페시알리스트(Specialist)는 근대 분업사회의 직업(Beruf, Vocation)인이다. 그리고 도올이 말하는 제네랄리스트(generalist)는 무엇인다?  도올은, '인간과 우주에 대한 근원적 통찰력과 전체적 조망'을 갖는 사람이라고 강조하면서, '우리 당대의 모든 스페시알리스트는 불기(不器)의 스페시알리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도올논어(2), p.156]
도올의 이 주장은 현대적 해석으로는 옳은 말이지만 근대 이전의 유교권 문화사회에는 실업(實業)의 기능인들(동양적 스페시알리스트)은 천시되었다. 이것을 베버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유자들에게는, 세분화된 전문직종은 그것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유용한 것인가를 불문하고, 진정으로 긍정적인 권위를 갖는 위치로서 인식될 길이없었다."고 (For the Confucian, the specialistic expert could not he raised to truly positive dignity, no matter what his social usefulness.)[도올논어(2), p.148]
 오히려 서구의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이 태생시킨 전문직업(Beruf)의 스페시알리스트 들이야말로 '우주의 근원적 진리'인 성경(하나님의 말씀)의 진리 안에서 살기 위하여 노력한 진정한 제네랄리스트 들이 였다고 말할 수 있다.
 (나) 도올의 베버 비판
 (ㄱ) 베버의 비교 구절문제
 이미 언급한바 있듯이 베버의 군자불기(君子不器)에 의한 비교의견(자료 7)을 '베버의 욕지거리, [도올논어(2), p.149]니, 또 '과녁이 빗나갔고 해당사항이 없다.'[도올논어(2), p.155]고 말한 도올의 베버 인식은 재고해 볼 문제점이다.
예컨대 베버는 동서문화(서구근대문화와 동양의 전통문화)의 비교에 있어서, 서구의 근대 자본주의문화의 근원(프로탄티즘)의 대표구절로, '네가 자기사업(직업,사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잠22:29)라는 성경 말씀을 인용했고,(베버의 저서, p.44)  이에 대비되는 유교 윤리의 대표적 구절로서는 공자의 군자불기(君子不器)의 구절을 아필시켰다[도올논어(2), p.142]
 만약 도올이 말한 대로 베버의 군자불기(君子不器)에 대한 비교방법론이 빗나갔다면, 도올은 유교문화권의 대표적 구절로서, '군자불기'(君子不器)가 아닌 다른 대표구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의 유교문화권(경제사회)의 2000여년간의 농경사회적 정체성(停滯性)과의 무관성도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도올은, '군자불기(君子不器)의 가르침은 시공을 초월하여 인간에게 던지는 심오한 가치가 존(存)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동양사상의 대표적 구절임을 자인하고 있다.[도올논어(2), p.156]
 (ㄴ) 베버의 텍스트(자료 6,7)해석
 막스베버는 , 유가사회는 서구근대사회와는 달리 물질적 생산에 기여하는 전문직 종사자들 보다는 군자(君子)라는 현학적(衒學的)인 지적문화인(Cultured man)과 내실보다는 인간 체면(face)과 품행이 존중되는 사회라고 인식했다,(참고;자료 6)  그래서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이 탄생시킨 서구근대의 자본제 시스템의 요소들인, 전문직(Prefessional Specialization), 현대의 전문관료 조직체제(expert bureaucracy) 특수한 교육제도(Special training, 학교교육등), 이윤추구를 위한 합리적인 기업조직 및 경제학(18-9세기의 고전파 경제학의 놀라운 발전을 상상하라.)이 발달하지 못한 유교권사회의 문화적 배경을 지적했다.
 여기서 특히 유의할 점은 베버이론은 지금부터 1-2세기전의 동서양사회의 문화형(Culture pattern)과 경제시스템의 비교인식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동양사회(유교문화사회)는, 이미 유교문화가 지배적이 아닌 오히려 서구사회화, 그것도 천민자본주의 사회가 되어 버린 하나의 경제적인 세계화 사회(WTO등)속에 있다.
 7. 맺음말
 첫째, 베버가 지적했던 유교권 사회의 체면문화(Face Culture)는 동양특유의 유교권 문화가 아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엄중히 섬겼던 유대교사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온통체면치레와 외식(外飾)으로 가장한, 부패한 유대교지도자들을 향하여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질타(叱咤)하셨다.
 "저희(유대교 지도자들)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 하는구나."(마23:5-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 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 하도다."라고(마23:27-28)
 둘째, 막스베버도 서구사회의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의 근대 자본주의 가 19세기 후반기 이래 그 금욕적 윤리성이 퇴색해 가는 역사의 흐름을 바라보고 다음과 같은 경구적(警句的)인 예언을 남겼다. "오늘 날 영리가 최고도로 발달한 합중국(미국)에서 보면 영리활동이 종교적윤리적 의미를 거세 당했기 때문에 순전히 경쟁적인 감정에 휩쓸리는 경향하에 있으며 그 결과는  이미 경(競技)의 성격까지 띠게 되는 경우조차 드물지 않다....이와 같은 문화적 발전의 '최후의 사람'에 관하여는 다음의 말이 진리가 될 것이다.
 '무정신(無精神)의 전문가. 무감성(無感性)의 향락인. 이들 무(無)의 인간들은 인류가 지금껏 도달하지 못한 단계에 올랐다고 자부(自負)하리라.' 고 (베버의 저서, p.161)
 베버의 이 말은, 그때로부터 약 100년이 흐른 오늘의 21세기에, 천민자본주의의 룰(rule)만이 기준이 되는 세계 경기장에서 무(無)의 인간들의 무자비한 무한경쟁으로 실연(實演)되고 있지 않는가. 요컨대 내면적인 도덕적 생명력이 사라진 모든 종교의 교리는, 그 교훈과 교리가 아무리 위대할지라도, 체면문화(體面文化), 또는 외식문화(外飾文化)로 전락하여 도리여 인간의 질곡(桎梏)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이 글을 맺는다.  
 ▣ 부록 1
 ● 도올 논어(2) 중에서(p.142~156)
  2-12. 子曰: "君子不器."
          자왈: "군자불기."
 2-12.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군자는 그릇처럼 국한되지 않는다."
 禱注    공자의 말씀으로서 전해내려 오는 이 "군자불기"라는 말은, 본시 옛부터 유교전통의 핵심적 윤리로서 존중되어온 명언이기도 하지만, 이 말이 20세기 세계학술계의 쟁점(爭點)으로서 지극히 유명하게 된 것은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가 이 말을 그의 역저, "중국 종교"(The Religion of China)에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대비되는 유교 윤리의 대표적 구절로서 아필시킨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베버에 의하면 프로테스탄티즘의 경우 순결한 초월주의의 인정이 오히려 현실을 제어하는 힘을 잉태시켰지만, 유교의 경우는 초월주의의 거부가 합리주의 전통을 강화하는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현실에 대한 합리적 제어의 능력을 상실시켰다고 보는 것이다. 유교적 삶의 방식은 합리적이긴 했지만, 그것은 인간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합리성이 아니었으며, 그것은 예악(禮樂)과 같은 어떤 외면적 규정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라는 것이다.(The is to say, the Confucian way of life was rational but was determined, unlike puritanism, from without rather than from within. RC, N.Y. : The Free Press. 1964, p.247) 그래서 그는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p.142~143)
     Confucian rationalism meant rational adjustment to the world; Puritan rationalism meant rational mastery of the world.
     유교적 합리주의는 이 세계에로의 합리적 적응을 의미하는 반면, 청교도 합리주의는 이 세계의 합리적 제어를 의미하는 것이다.
 청교도의 경우, 초월적인 신에게로의 철저한 복속이 비록 내가 이세계 내에 거주하고 있지만 자신의 삶이 이 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to live "in" the world and yet not be "of" it,) 어떤 극복의 동기를 부여했으며 그것은 무서운 금욕주의를 잉태시켰다.그리고 금욕주의는 자본의 축적이라고 하는 경제적 합리주의(economic rationalism)의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의 가장 핵심이 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개념은 독일어로 "베루프"(Beruf)라고 표현되는 "신의 소명"(God′s calling)이다. 이 "베루프" 라는 독일어를 영어로 바꾸면 "보케이션(vocation)이 되는데, 보케이션은 신의 소명 즉 신의 부르심이라는 말과 동시에 "직업"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즉 이 "베루프"-보케이션"이라는 단어의 배면에는 그 단어의 의미르 탄생시킨 서구 프로테스탄티즘의 문화적 의식구조가 서려있는 것이다. 서구인들은 자기의 현세적 삶의 직업(장인의 직종)을 곧 초월적 신의 소명으로 생각했으며, 그 자체를 성스럽게 생각했으며, 그 직업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초월적 신의 소명을 현세적으로 구현시키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직업의식이 그 직업의 소명에서 생기는 결과를 현세적으로 향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결과를 신의 영광을 위하여 저축해 나갔던 것이다.
     The typical Puritan earned plenty, spent little, and reinvested his income as capital in rational capitalist enterprise out of an asceticist compulsion to save.(RC, p.247).
     전형적인 청교도들은 많이 벌고 적게 썼다. 그리고 그의 소득을, 절약하고자 하는 금욕주의적 열정으로부터, 매우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사업에 자본으로서 재투자하였다.
 그러나 유교적 군자상에는 이러한 내면적 초극의 충동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p.143-144)
    The watchful self-control of the Confucian was to maintain the dignity of external gesture and manner, to keep "face." The self-control was of an aesthetic and essentially negative nature. Dignified deportment, in itself devoid of definite content, was esteemed and desired.
    유생들의 방심치 않는 자기제어, 즉 수신의 목적은 외면적 제스츄어나 고상한 매너의 품위를 유지하는데 있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의 수신은 기본적으로 심미적인 것이었으며 본질적으로 부정적 성격의 것이었다. 그 자체로서 위엄있는 품행, 아무런 실질적 내용이 없는 공허한 것임도 불구하고, 그러한 품행만이 존중되고 욕망되었다.
 유교에는 초월성의 측면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지나치게 현세적이고, 사후의 미래적 보장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현세적 달성만을 추구하며, 현세적 향유만을 최선의 가치로 삼는다. 그래서 심미적 인생만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여기 "심미적"(aesthetic)이란 말은 "닳아빠진 미감"을 의미하는 것으로 매우 부정적인 맥락에서 쓰여진 것이다. 자기내면의 초극의 독백이 없기 때문에 외면적 겉치레만 추구하게 되고, 사회적 관계에서 성립하는 "체면"만을 중시하게 된다."예의"니, "도의"니, "의례"니 하는 모든 것이 이 "체면"과 관련되는 것이다. 여기 베버가 쓴 "face"라는   (p.145)
 말은, 중국말로 "미엔쯔"(面子 면자)라는 말인데, 그것은 우리말로 "체면"에 정확히 해당되는 말이다. 한 마디로 서구 프로테스탄티즘의 문화가 소명의 문화라면 동아시아 유교의 문화는 곧 체면의 문화라는 것이다.
                    서양           소명의 문화(vocation)
                 동양            체면의 문화(face)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이것은 사도바울이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로마서12:6~8). 여기에는 인간의 소명에 대한 이야기가 잘 설명되어 있다. 이 말은 이에 앞서 우리 몸과 지체의 관계를 비유로 들어, 우리 인간들의 삶의 소명을 부연한 것이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로마서12:4-5) (p.146)
     For as in one body we have many members, and all the members do not have the same function, so we, though many, are one body in Christ, and individually members one of another.
 나의 몸은 하나이지만, 이 하나된 몸은 많은 부분(지체)이 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 많은 부분(지체)들은 제각기 다른 고유한 기능(function)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모두 동일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면 나의 몸은 기능할 수 없다. 오히려 그 몸의 지체가 가기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조화된 하나의 몸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 바울은 "그리스도"를 하나된 나의 몸에 비유한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개별적 삶을 그 몸의 각기 다른 개별적 지체의 기능에 비유한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각기 다른 "기능", "소명"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 다른 직분 때문에 오히려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몸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 사도바울의 이러한 언명은 바로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말을 거부하는 듯이 보인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한 지체일 뿐이며,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다"는 것이다. (p.147)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불기(不器)가 아니라, 하나의  기(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섬기는 자는 섬기는 일로,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일로, 위로하는 자는 위로하는 일로, 타이피스트는 타이프치는 일로, 대장장이는 대장장이 일로, 똥푸는 자는 똥푸는 일로, 제각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군자불기(君子不器)가 아니라 군자유기(君子唯器)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베버는 말한다.
    For the Confucian, the specialistic expert could not be raised to truly positive dignity, no matter what his social usefulness. The decisive factor was that the "cultured man"(gentleman) was "not a tool" ; the is, in his adjustment to the world and in his self-perfection he was an end unto himself, not a means for any functional end. The core of confucian ethics rejected professional specializaton, modern expert bureaucracy, and special training; above all. it rejected training in economics for the pursuit of profit.(RC, p.246)
   유자들에게는, 세분화된 전문직종은 그것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유용한 것인가를 불문하고, 진정으로 긍정적인 권위를 갖는 위치로서 인식될 길이 없었다.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공자가 "논어"에서 한 말, 문화적으로 교양을 쌓은 인간들 즉 군자는 하나의  기(器)로 국한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군자불기(君子不器)의 사상과 관련되어 있다.(p.148)
    즉 군자는 이 세계에 대한 적응 즉 처세나 자신의 완성을 지향하는 수신의 방식에 있어서, 그는 그 자신이 최종적 목적이라고 생각할 뿐, 어떠한 기능적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유교윤리의 이러한 핵심은 전문직종의 분업을 거부했으며, 근대적 전문직의 뷰로크라시를 거부했으며, 전문직종을 위한 특수훈련을 거부했다.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군자불기(君子不器)의 사상은 이윤의 추구를 위한 경제학의 훈련을 거부했던 것이다.
 자아! 이 정도 되었으면 공자 "군자불기"(君子不器)로 인하여 동양사상이 얻어먹어야 했던 베버의 욕지거리를 독자들은 실컷 얻어먹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나는 베버의 유교비판을 결코 부정적으로만 생가하는 사람이 아니다. 구한말로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썩어문드러졌던 우리사회의 온갖 병폐를 생각할 때, 그리고 아직까지도 우리사회에 진정한 프로펫셔날리즘(professionalism)의 전통이 결여되어 있다는 현실을 생각할 때, 베버의 비판은 통열하게 우리의 가슴을 저미는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먼 나라 이방인이 동양사회의 직접체험이 없는 자로서, 동양사회의 지니고 있는 허약한 급소들을 그렇게 정확히 찌를 수 있었는가 하는 것도 먼저 우리의 학문적 자세에 대한 심각한 반성을 유발시키는 것이다.(p.149)
 그러나 우선 그가 캐피탈리즘의 발생연원의 정신사적 필연성으로서 프로테스탄티즘을 운운하는 것은, 결과적 사태에 대한 기술은 될 수 있을 지언정, 인과론적인 필요충분조건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프로테스탙티즘의 금욕주의에서 캐피탈리즘이 발생안할 수도 있는 것이며, 유교의 현세주의에서 캐피탈리즘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상적 성향을 캐피탈리즘의 발생으로 유도시키는 해석의 행태에는 그 사상자체 이외의 모든 정치.사회.경제사적 우발적 요인이 관여되어 있는 것이다. 캐피탈리즘의 불발생(不發生)의 원인을 유교에 다 물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캐피탈리즘 그 자체가 유교의 역사에서 발생되어야만 할 어떤 지고의 가치나 목표나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어떠한 사상이든지 동일한 생각의 구조를 유지하더라도, 역사적 맥락에 따라 그것은 건강하게 작용할 수도 있으며 불건강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 유교의 불건강한 시절의 측면만을 들어 유교의 원죄를 다 캐물을 수는 없는 것이다. 유교의 부패는 현실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부패는 더 더욱 인간세에 끔찍한 것일 수도 있다. 퓨리탄의 금욕주의가 가귀(可貴)한 것이라면, 유교의 금욕주의 또한 그 이상의 진실한 내면을 포용하는 것이다.
 여기서 군자부기(君子不器)라는 공자의 언명의 맥락이 과연, 근대사회적 특징을 이루는 전문직종에 대한 종사의 거부가 군자(君子)됨의 특징이라고 하는 의미의 맥락으로 사용된 것인지는 지극히 불투명하다. "기"(器)는 분명 한 그릇의 국한된 기능이라는 뜻이다. 황간(皇侃)의 소(疏)에:  (p.150)
   此章明君子之人, 不係守一業也. 器者, 給用之物也. 猶如舟可汎於海, 不可登山; 車可陸行,    不可濟海. 君子當才業周普, 不得如器之守一也.
    이 장은 군자된 사람은 모름지기 하나의 업을 지키는데 매달리지 말아야 함을 밝힌 것이다.그릇이란 인간에게 한 쓰임을 제공하는 물건이다. 예를 들자면 배는 바다에서는 두둥실 떠 갈 수 있지만 산을 오를 수는 없는 것이다. 수레는 육지를 다닐 수는 있어도 바다를 건널 수는 없는 것이다. 군자는 당연히 그 재능과 업적이 두루 넓게 통하는 것이어야 하며 그릇이 한 기능을 지키는 것과 같아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오규우 소라이(荻生조徠, 1666-1728)는 이러한 류의 논의에 대하여 재미있는 제도사적 반론을 제기한다. 공자의,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언명도 반드시 소인기(小人器), 군자불기(君子不器)식의 이원론적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주(古注)에서 포씨(苞氏)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p.151)
                    器者,  各周其用.  至於君子, 無所不施也.
    그릇이라는 것은 하나의 쓰임에 국한되는 것이다. 군자에 이르게 되면 베풀지 아니하는 바가 없다.
 주자(朱子)가 "기자(器者), 각적기용(各適其用), 이불능상통(而不能相通).  성덕지사(成德之士),  체무불구(體無不具). 고용무부주(故用無不周), 비특위일재일예이이(非特爲一才一藝而已)." (그릇이란 각기 쓰임이 있는 것이요, 서로 통할 수 없는 것이다. 덕을 이루는 선비는 그 몸이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 기능이 통달하지 아니함이 없다. 특별히 한 재능, 한 기예에 국한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한 것도 결국 고주(古注)를 베낀 것인데 이러한 주석은 근원적 제도사적 맥락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소라이는 "예기" "학기"의 마지막에 나오는 재미있는 구절을 인용한다.
         鼓無當於五聲.  五聲弗得不和;   水無當於五色,  五色弗得不章.
     북 그 자체는 궁.상.각.치.우 다섯가지 소리에 해당되는 바가 없다. 그러나 다섯가지 소리는 북이 없이는 조화로운 소리를 낼 길이 없다. 물 그 자체는 청.적.황.백.흑의 다섯가지 색깔에 해당되는 바가 없다. 그러나 다섯가지 색깔은 물이 없이는 그 찬란한 색깔을 드러낼 길이 없다.(p.152)
 소라이는 왜 이 "학기"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 것일까? 소라이의 주석이 간결하여 그 뜻을 명확하게 찝어내기가 힘들지만, 소라이가 노리고 있는 것은 군자(君子)는 이 "학기"의 문장에서 북(鼓)이나 물(水)에 해당되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군자불기"(君子不器)의 불기(不器)의 뜻이 고주(古注)가 말하는 바, "무소불시"(無所不施) 즉 그 능력이 두루 통한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군자(君子)는 근원적으로 기(器)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 즉 군자(君子)는 본질적으로 기(器)로서 규정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군자불기(君子不器)의 불기(不器)는  기(器)의 부정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군자불기(君子不器)는 기(器)의 부정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기(器)에 의하여 한정적으로 규정될 수 없는 어떤 본질적 위상을 말하는 것이며, 이는 기(器)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器)가 이로 인하여 드러나게 되는 자리라는 것이다. 즉 불기(不器)는 기(器)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기(器)를 포괄하는 자리라는 것이다. 그 "자리"란 무엇일까?  소라이는 군자(君子)는 단순히 도덕적인 인격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민(民)의 장(長)이 되는 리더를 말하며, 그는 기(器)가 아닌 기(器)를 부리는 자이다. 그러므로 기(器)는 백관(百官)을 말하는 것이요, 군자(君子)란 군(君)이나 경(卿)을 말하는 것이다.(器者, 百官也; 君子者,君與卿也.)
 예를 들면 양의(良醫)는 여러 한약재료들을 조합(用藥)하여 처방을 내리고 환자의 병을 치료한다. 이때 양의(良醫)는 군자(君子)요, 약(藥)은  기(器)이다.(p.153)
 즉 의사가 곧바로 초본약재(草本藥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의사는 초본약재들을 부리는 자요, 그것을 배합하여 병을 고치는 사람이다. 어찌 의사가 곧 약재라 할 수 있으리오? 그러므로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것이다. 소라이는 앞서 인용한 "예기" "학기"에 연이어 같은 맥락에서 나오고 있는 유명한 말을 다시 인용한다.
     君子曰: "大德不官, 大道不器, 大信不約, 大時不齊. "察此四者, 可以有志於本矣.
    그러므로 군자는 말한다. "위대한 덕성은 하나의 관직에 구애됨이 없고, 위대한 도는 하나의 그릇에 구애됨이 없으며, 위대한 신의는 하나의 약속에 구애됨이 없으며, 위대한 시간은 하나의 절기에 구애됨이 없다." 이 네 가지를 살필 줄 아는 자래야 참으로 학문의 근본에 뜻을 둔다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은 또 무엇인가? 대덕(大德)은 불관(不官)하며, 대도(大道)는 불기(不器)하며, 대신(大信)은 불약(不約)하며, 대시(大時)는 부제(不齊)하다는 것은 곧 군자(君子)가 추구해야 할 것은 기(器)의 말엽의 세계가 아니요 대도(大道)의 근원의 세계임을 말한 것이다.(p.154)
        三王之祭川也, 皆先河而後海; 或源也, 或委也.  此之謂務本.
     하.은.주 삼대의 왕들은 물에 제사지낼 적에 모두 반드시 작은 하천에서 먼저 지내고 큰 바다에서는 나주에 지냈다. 하천이 근원이요, 바다는 말류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일컬어 근본을 힘쓴다 하는 것이다.
  군자가 힘써야 할 것은 근본이지 말류가 아니다. 하천이 오히려 군자(君子)의 대도(大道)의 세계요, 바다가 오히려 배관(百官)의  기(器)의 세계인 것이다. 군자불기(君子不器)란 기(器)를 부정하는 언급이 아니라, "무본"(務本)의 뜻을 표방한 것이다. 따라서 소라이의 비판에 의하면 막스 베버의 "군자불기"(君子不器)비판은 근본적으로 과녁이 빗나간 것이다. 근원적으로 해당사항이 없는 것이다. 불기(不器)는 기(器)의 부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라이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大저學以成器.
                     대저 배움이란 기를 이루지 않음이 없다.
 인간의 모든 배움은 기(器)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군자(君子)의 배움은 성기(成器)를 통하여 불기(不器)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즉 군자불기(君子不器)는 기(器)를 통하여 기(器)를 초극하는 것이요, 성기(成器)의 행위를 통하여 기(器)를 부리는 대도(大道)의 경지에 나아가는 것이다.(p.155)
 굳이 막스 베버의 논쟁이나 소라이의 비판적 지적의 맥락을 떠나 이 "군자불기"(君子不器)의 소박한 맥락을 액면 그대로 수용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분명 스페시알리스트의 기능이 존중되어야 하는 문명의 장이다. 그러나 진정한 스페시알리스트의 위치가 존중되면 존중될수록 진정한 제너랄리스트의 가치가 높아진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닐까? 불기(不器)의 세계가 기(器)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물론 기(器)의 세계 또한 불기(不器)의 세계를 거부하지 않는다. 인간과 우주에 대한 근원적 통찰이나 전체적 조망이 없이 어떻게 스페시알리스트들의 기능만으로 인간세가 조작되어 나가기를 기대하는가? 우리 당대의 모든 스페시알리스트는 당연히 불기(不器)의 스페시알리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불기(不器)의 보편주의가 전제되지 않는 기(器)의 기능은 편견과 독선과 혼선을 낳을 뿐이다.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공자의 가르침은 시공을 초월하여 인간에게 던지는 심오한 가치가 존(存)하는 것이다.(p.156)
         集注       器者, 各適其用, 而不能相通.  成德之士, 體無不具.
                      故用無不周, 非特爲一才一藝而已

 ▣ 부록 2 : 안내 문
              '도올의 논어이야기'에 대하여 

 근간 '도올 신드롬' 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KBS TV1의 '도올의 논어이야기'가 적잖은 센세이션(Sensation)을 일으키며 계속 방영되고 있습니다. 그 도올(김용옥박사, 중국철학자)의 강의 중 기독교사상(복음)에 관련한 오해의 부분이 있었습니다.  예컨대 성경의 허구성 주장과[도올의 논어 이야기 '제5강' 2000.10.27과 '도올 논어(1)',p.p.21-25], 막스 베버(M.Weber, 1864-1920)의 근대 서구의 윤리적 자본주의의 사상에 대한 비판등입니다.['도올의 논어 이야기' 제42강, 2001.3.2, '도올 논어(2)', p.p. 142-156]  이 부분들을 해명하기 위하여 예수 인터넷선교회의 홈페이지에 '도올의 성경관에 대하여'와 '도올과 베버의 대화'라는 신앙에세이를 게재했습니다.
 특히 '도올과 베버의 대화'는, 동서양의 두 석학(碩學)의 세기적인 지상대화(紙上對話)로 접근 시켰습니다.  그 뜻은 이시대(21세기)의 위대한 복음사역자들(Ministers)이  이 글을 통해서 동서양문화의 인프라(Infra)를 이해하시는 데에 작은 도움이 되시기를 바라서입니다. 부디 예수 인터넷선교회(www.yesu.kimc.net)를 방문해 주셔서 필독하여 주시기를 권유드리옵니다. 감사합니다.  (서기 2001년 3월 중순, 예수 인터넷선교회 드림)

  ▣ 부록 3 : 자유게시판에 올린 어느 독자의 글
  2001/03/26 (14:15) from 211.44.3.143' of 211.44.3.143'
   헤비메탈킴
웃기는 도올과 베버의 대화.
난...

한 가지만은 확실히 해두고 싶다.

도올의 Text는 무엇을 참고로 했는지.

베버의 Text는 무엇을 참고로 했는지.

공정성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는지.

마지막으로 하나 더.

에세이인가 보면, 어떤 것은 자신의 의견이라고 하며 슬쩍 단체의

책임회피를 하는 구절도 눈에 띄는데,

그럴 거면 올리지 말지... 쩝.

솔직히, 내가 도올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게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의 학문이 기껏해야 도올 논어라는 책으로 대표될 수도 없다.

그 책은 [독자의 대상이 없는 책]이다.

만일 도올이 만화책으로 만들었으면, 그림 갖고 꼬투리 잡았을것이

분명하다.

난, 기독교인이지만, 사이비다.

믿음?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기독교인에 대해 악감정 없다.

하지만, 제발 부탁인데, 꼬투리 잡고 우기려고 하진 마라.

그래서 얻는게 뭔데?

다른 이야기 해 보자면,

철학자와 종교인이 만나서 말싸움 하면 누가 이기겠는가?

뻔한 거 아닌가?

말싸움해서 그렇게 이겨보고 싶나?

그런 거 초월도 못하면 그게 종교인의 자세인가?

안티기독교 사이트에 가보니까,

그네들 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일리가 있을 뿐이다. 그게 맞는지 틀리는지는 관심이 없어서

생각해 본 바도 없지만,

안티 기독교 사이트에 가서 폭탄 게시판 올려놓는 기독교인들도 있다.

뭐냐?

대체 무엇하고 싶은건가?

그럴만한 정열이 있으면 한 사람이라도 더 전도하던지,

성경책을 읽던지,

구원에 대해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인터넷.

허울 좋다.

인터넷에서 십자군 전쟁이라도 해보고 싶은가?
    
독자의 글에 대한 답서
   헤비메탈킴 선생님께
 킴 선생님께서 '도올과 베버의 대화'라는 저희 예수 인터넷선교회의 '신앙에세이'를 코멘트해주신 것을 감사하오며, 몇 가지 의견을 드립니다.

 첫째, 그 '에세이'는 동서양 두 석학의 근대동서양 문화의 근원에 대한 견해를 비교하고 객관적으로 비평한 글입니다.(가치중립적 입장에서입니다)

 둘째, 킴 선생님께서 문의한 도올의 Text는 '도올논어(2)'의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논어 내용이고  베버의 Text는 '근대자본주의의 정신과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입니다.(이미 그 '에세이'에서 밝혀놓은 것입니다.)

 셋째, 킴 선생님께서 그 '에세이'에 대한 논평을 해주시려면, 구체적으로 문장내용을 제시.분석 하시면서 실명으로 의견을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금처럼 무조건 냉소적인 매도를 하시는 것은 고도의 사회윤리를 요청하는 디지털 문명시대에 피하여야할 사이버.언어폭력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끝으로 다시 저희 예수 인터넷선교회의 '에세이'에 주신 관심을 감사하오며 킴 선생님의 건승을 기도합니다.
                    2001. 3. 26     예수 인터넷선교회 드림

2014년 8월 28일 목요일

홍범구주(洪範九鑄)에 대해

 고조선답사 소고(小考): 홍범구주(洪範九鑄)에 대해 -- 양체제의 장점을 발전시켜 --
저자:  노태구조회: 821발행 일자: 11.22.2013카테고리: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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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민족의 혼을 깨우치며한민족의 구 강역의 원류를 찾아 민족의 혼을 깨우치기 위해 27차 고조선 유적답사를 이번에는 배달국(환국)의 배달겨레(한밭민족, 한겨레)의 터전이었던 흑룡강성 일대를 중심으로 고조선을 원류로 하는 (북)부여를 중심으로 북위, 실위, 선비족의 발자취를 따라 8박9일의 여행을 떠났다.
서울에서는 한여름의 긴 장마와 더불어 보기드믄 폭염이 계속되는데, 우리는 2013년 7월 31일 오후 7시에 탑승하여 할빈을 향해 출발하였다.
2시간 여에 걸려 당도한 옛 고조선의 강역인 동북 3성의 하나인 흑룡강성의 성도 할빈의 날씨는 한국의 여름날씨와 같았다. 그런대로 여행을 시작함에 견딜만한 날씨였다. 또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의 여정이 계속되는 동안은 여기서도 장마기간인지 비교적 날씨도 흐리고 비도 자주 와 여행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우리가 여행을 끝내고 한국에 도착하고 나서 며칠 있다가 아무르강을 비롯 송화강 유역 일대가 큰 홍수가 난 것을 알 수 있었다. Ⅱ. 고조선의 발원지를 찾아서
우리는 8월 1일에는 오대련지(五大連池, 세계지질공원), 2일에는 흑하시 애휘현(黑河市 愛輝縣)을 둘러보았다. 이 지역의 행정기구인 을룬춘 협령공서(卾倫春 協領公署)와 청대의 애휘세관을 둘러보았다. 이 지역은 애휘 불평등조약으로 유명하다. 1858년 5월 28일 하오 청․러 간에 애휘조약(일명 아이훈(愛暉)조약)을 맺어 청은 60여 평방km의 토지를 상실하게 된다. 애휘조약 기념비는 1945년 8월 15일 소련 홍군이 흑하시를 해방하였을 때 비문에 새겨 있는 반소(反蘇)와 일만협정(日滿協定) 등의 내용을 훼손하였다.
아이휘박물관에는 양상곤(楊尙困)이 1996년 7월에 써놓은 글이 있었다. “爲愛輝古城題: 牢記歷史 開創未來(위애휘고성제: 뇌기역사 개창미래, 아이휘 고성을 위한 글: 역사를 굳게 기억하여 미래를 열어가자). 호마(呼瑪)현을 통과하면서 호마천이 범람하여 가교(架橋)로 도강(渡江)하기까지 1시간 이상을 기다려 밤중에 호마시내 신달여관(鍂達賓館)에서 여장을 풀었다. 3일에는 백은납(白銀納)에 도착하여 얼운춘족 풍정(風情)을 구경하였다. 탑하현(塔河縣)을 거쳐 막하(漠河)시내에 있는 애국빈관(愛國賓館)에서 투숙하였다. 4일은 짙은 안개로 그러나 청명한 아침을 맞으며 중국 최북단 북극촌(北極村)에 도착하였다. 막하현 백야, 오로라, 타이거 기후대를 체험하며 막하시내 조선 구육관(狗肉館)에서 점심을 하고 호중진(呼中鎭)시에 도착하였다. 6일은 월료일로 여전히 짙은 안개와 청명한 아침으로 하루 여정을 시작한다. 가거다치(加格達奇)시(市) 녹엽화과(綠葉火鍋)에서 점심을 하고 오룬춘족(鄂倫春族)의 오룬춘기(鄂倫春旗)(아리하진(阿里河鎭))광장을 둘러보고 가거다치 시내의 연사빈관(燕莎賓館)에서 힘들게 또 하룻밤을 보냈다.
6일에는 아침에 가거다치 상점에서 블루베리를 구입하여 10시경 늦게 출발하였다. 가거다치 구역의 여진족 박물관, 시장구경, 알선동굴(嘎仙洞), 아리하(阿里河, 한강), 눈강(嫩江, 송화강으로 흐름, 결국은 아리수이고), 치치하얼을 거쳐 대경(大慶)시에 도착하여 러브호텔인 희룡빈관(禧龍賓館)에서 여장을 풀었다.
오늘 낮에는 별다른 체험을 하였다. 부여족의 발원지인 알선동굴 앞을 흐르는 아리하에서 잠시 온몸을 담그는 기회를 가졌다는 것이다. 지난해 림프종을 치유하고 난 후 아직도 면역력이 제대로 회복되지 않아서인지 조금만 과로하면 신체에 가려운 반점이 생기는 것이다. 심지어 몇 개월 전에는 대상포진도 앓은 적이 있다. 그래서 고조선의 발원지를 떠올리면서, 한편 원기를 회복하여 그 호연지기로 오늘 여정을 함께 하는 동지들과 뜻을 규합하여 한반도를 통일하고 한민족의 통일된 역량으로 나아가서 다시금 고조선의 강역을 회복할 수 있는 날이 도래할 수 있기를 기원하며 이 신선한 개천에서 멱을 감았던 것이다.
7일에는 탁트인 광활한 시가지와 대경시 내외에 쉴 새 없이 작동하고 있는 유전 채취기계들을 보면서 중국의 대표적인 유전지대인 대경의 규모가 과연 얼마만한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중국의 G2로 비약하는 에너지의 원천이 북만주의 대평원의 곡창지대와 더불어 바로 여기 대경유전이 아닌가 싶었다.
정오경 할빈의 태양도(太陽島) 선착장(船着場)에 도착하여 시내로 들어왔다. 흑룡강성 박물관 앞에 서있는 ‘흑룡강성혈액중심’의 헌혈 버스에는 “學習雷鋒, 奉獻他人, 提升自己(학습뢰봉, 봉헌타인, 제승자기: 뇌봉을 학습하여 타인에 봉사하며 자긍심을 올리자)”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서라벌(薩拉伯爾) 정통(正宗) 한국요리점에서 모처럼 불고기로 점심을 하였다. 오후에는 할빈역에 도착하여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장소를 둘러보았다. 안의사기념관도 들렀으나 보수중이었다. 러시아 성당(정교)을 둘러보고 이비스(Ibis, 宜必思)호텔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이 숙소는 첫날 머문 곳이기도 하다.
8일은 출국날이라 새벽부터 서둘러 일어나 7시 60분에 공항에 도착하여 9시에 탑승을 시작하여 2시간여에 걸려 오전 11시 16분에 인천국제공항에 착륙함으로써 우리들의 긴 여행은 마무리되었다. Ⅲ. 부여는 어떤 나라인가?1)
참으로 이번 여행은 12명의 동지들이 모두 호흡이 잘 맞았지만 그 중에서도 옆자리에 앉아 긴 여정을 함께 한 전 전주문화원장을 지낸 서승(徐昇) 선생님과의 ‘조선상고사’에 대한 대화가 막연했던 고조선 역사에 대한 답사를 구체적으로 그 이론, 논리까지를 충족시켜주는 역할을 해주어 이번 여행은 더없는 값진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또한 서원장님은 저와 가까이 지내고 있는 미국의 볼티모어에 거주하시는 김영식 선생님과는 고교동창이기도 하여 더없이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다.
우선 서원장님의 이렇게 호한한 조선상고사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된 배경부터 들어보도록 하였다. 한국의 역사교육은 우리나라 고대사역사를 두고 삼국사기 이전의 역사는 신화로 보거나, 심지어 사대주의(慕華史觀)로 인하여 단군을 신화로 보고 부여나 발해의 역사를 제대로 취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제 신채호(丹齊 申采浩)의 「조선상고사」를 접하면서 우리 역사가 반도사관에 머물지 않고 웅혼한 대륙사관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병화(李秉華)선생은 고조선의 강역을 한반도와 만주에 국한하는 것이 반도사관이고, 감숙성, 청해성에까지 나아갈 때 한국사의 대륙사관이 된다고 하였다.2) 그래서 그는 중원을 지배할 수 있는 대륙사관을 갖기 위해서는 단재의「조선상고사」와「환단고기」를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단재는 김부식의「삼국사기」를 버렸는데, 왜냐하면「삼국사기」에는 단군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부여는 어떤 나라인가? 부여는 불여, 불무리로, 즉 아침(火)의 나라라는 뜻이다. 졸본부여는 줄기부여, 뿌리의 부여로 황제 고두막한(汗)(칸, 황제)(=동명성왕)에 의해 한 무제의 군대가 쫓겨나오니 이들 중에 해모수가 북부여를 세우고 나중에 동명성왕(고주몽)으로 고구려를 건국했다. 한구(한나라의 도둑들)를 쫓아내니 인민들이 고두막한을 동명성왕으로 추대했다. 삼국사기는 고주몽이 동명성왕이라는 기록은 잘못된 것으로 광개토왕 비문에 보면 확인된다.
남부여는 백제말기 성왕이 공주에서 사비성으로 천도하여 남부여라고 했다. 온조가 열다라(십제)를 세웠다. 백제는 고두막한의 후예인 구태(仇台)가 세운 것이 온다라(백제)이다. 온조는 후대 백제의 담로국(제후국)이 되었다(고이왕 AD. 239) 북부여의 5대 단군으로 즉위하려던 해부루가 고두막한(동명성왕)에 밀려서 동쪽으로 간 것이 동부여이다. 동부여의 초대 천대(1대 임금)이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일연은 단군의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그러나 환인, 환웅, 단군을 1代로 다룬 것이 한계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제가 여기에 근거하여 조선총독부의 조선사편찬위원회(1935)의 주 집필자인 이마니시류(今西龍)가 단군세기를 신화로 부르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이마니시류는 이병도의 스승이다. 「삼국사기」는 단군이라는 말이 처음부터 없다.
「동국통감」이나 「삼국사기」에는 신화라는 말이 없는데 1935년에 조선총독부의 이미니시류가 AD 369년 이전의 삼국사기 초기의 역사를 신화, 설화라는 말을 지어내어 ‘조선사’를 왜곡시켰던 것이다.
조선상고사 설명을 두고 김정배, 김원룡 류의 역사학자들은 삼국사기에 있는 내용대로만 얘기한다고 했다.

* 환국(桓國)은 환인(桓因)의 시대로 7代로 3301년을 지배함(연대는 확실하지 않고)
* 배달은 환웅(桓雄)의 시대로 18代로 1563년간 지배함.
* 아사달3)은 단군시대로 47代로 2096년간 지배(44대~47대, 이 년간(심양근방)을 ‘대부여’, ‘전부여’라고 한다).4) 다시말해 부여의 자손인 구물이 아사달의 44대 단군으로 즉위하면서 부여라고 국호를 바꾸었다. 이것이 대부여다.
* 부여는 오래된 역사로 2세 단군(임금의 호칭)의 이름이 부여이다. 오랜 시일이 지나 43대 단군 때 아사달의 수도가 심양으로 가서(지금의 혜성지방) 마지막 아사달의 수도가 된다. 44대 단군이 부여의 자손이다.
아사달이 패권, 패도로 국운이 기울어지니까, 즉 47대 고열가 단군 때 나라의 기강이 조금 흐트려져(천부경정신이 흐려지자), 또 춘추전국시대를 거친 중국이 밀려나오자 대부여가 해체되면서, 이 때 북쪽에서 왕족 중의 하나인 해모수가 떨어져나와 해모수의 북부여시대(BC 239-39)가 열리게 된다.
해모수단군의 동생 해부루가 BC 108년에 한무제가 번한인 위만조선을 침략하자 이를 무찌른 고두막한이 북부여를 대신한 졸본부여(줄기부여, 뿌리부여)의 단군이 되자 동으로 옮겨 동부여를 세우게 된다. 동부여의 땅을 가섭원이라 하여 가섭원부여라고도 한다. 온조의 후예로 무열왕의 아들인 성왕 때 공주부근으로 천도한다. 천도할 때 부여는 사비였다. 이 때 남부여(온조후대)로 국호를 바꾼다. 이것이 오늘의 부여이다.
또 동부여의 3대왕 대소가 유리왕에게 토벌이 되어 대소의 동생이 서쪽으로 이동해서 서부여 또는 갈사부여를 세웠다. 그래서 6부여가 성립된다. 이러한 부여를 두고 삼국사기에는 하나의 부여만 말하고 있으니 역사공부에 혼선이 오는 것이다.
여기서 3조선 관경(管境)을 관찰해보자. 단군이 단군조선이 되고, 기자의 후손들이 조선땅에 살면서 기자조선으로 나오듯이, 3한을 3조선으로 BC 2333년에 바꾼 것이다. 이 때는 연방제이며 한반도에서 일본 영토에까지 세력이 뻗어 있었다. 부여 이전의 고조선이야기이다. 즉 대부여 이야기이다. 부여를 시작한 구물 단군이 3한관경을 3조선 관경으로 했다. 진한, 마한, 번한을 진조선, 마조선, 번조선으로 바꾸었다. 부여시대의 고열가 단군이 정치를 포기하여 새로운 단군이 추대되지 못하고 5가가 공화정(단군 없이 6년)으로 있다가 해모수에 넘겨주면서 아사달이 없어지니까 북부여가 나오자 해모수가 다 흡수하지 못하니까 연방제가 흩어지면서(열국) 여러 낙랑(나라)이 100여개 출현하게 된다. 한사군의 낙랑도 여기에 속한다. 삼국사기의 낙랑의 낙랑공주5)의 아버지는 낙랑의 최숭왕(最崇王)이다.
* 삼국시대는 다음과 같다.
BC 59년 해모수의 고손자 고주몽이 고구려를 세운다. 북부여를 차지한 졸본부여의 초대단군 고두막한에 이어 2대 단군 때 아들이 없자, 고무루 단군이 고주몽을 사위로 삼아 단군을 삼자, 졸본부여사람들이 고주몽을 쫓아내자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나중에 소서노(小西奴)를 만나 고구려를 세우게 된다. 고구려가 힘이 강성해지자 졸본부여는 적봉 지역으로 밀려나게 된다. 백제는 부여의 고두막한(BC 108년)의 손자, 구태가 AD 204년에 백제를 세운다. 소서노(온조의 어머니, BC 42년)가 고주몽을 떠나서 오늘의 요동반도의 뿌리인 영구지방에 반천리의 장원을 가꾸고 고주몽에 편지를 보내자 소서노를 어하라(백제의 임금)로 책봉했다. 그후 13년(BC 13년)에 소서노가 죽자 큰아들 비류(온조의 형)가 계승했다. 그러나 1년 후인(BC 18년) 온조가 형님 비류를 떠나 동쪽으로 가서 열다라(10제)를 세웠다. 그 십제가 동쪽의 낙랑과 북쪽의 말갈의 괴롭힘을 피해 압록강을 건너 마한땅을 얻어 수도를 옮긴 곳이 한성이다. 그 후 동쪽으로 내려오는 박씨 신라, 서쪽으로 내려오는 석씨 신라가 마한을 습격하여 수멸(마침내 멸망)시켰다(AD 8년). 그래서 지금의 대동강(마한의 수도, 박아강)을 차지했다. 그리고나서 구태의 온다라를 이은 고이왕이 AD 238년에 웅진강(금강)에서 고이왕이 다루, 기루, 개루, 초고, 구수, 사반에 이르러는 10다라를 담로(擔魯)(식민지)로 즉 백제의 일부분으로 흡수했다. 이들 십제와 합쳐 AD 238년에 오늘의 백제로 건국하게 된다.
신라는6) 설명이 복잡하다. 먼저 박혁거세는 할빈 아래의 길림성의 진한 6촌을 아울러 신라방을 세우고 두만강을 넘어서 남하하기 시작했다. 함경도, 강원도로 내려오면서 대동강지역의 10다라와 부딪치면서 동해안으로 내려왔다.
석탈해는 BC~AD년간에 요서지역에서 한반도의 서해안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 있다가 AD 369년에 근초고왕에게 흡수된다. 백제왕이 망하니까 AD 22년에 중국(漢나라)에 있던 김씨(김일제 후손)가 한반도로 건너와 함께 서라벌로 갔다.
김윤의(김일제의 동생)후손들은 남해안으로 가서 김수로왕의 남해안에 금관가야를 세웠다. 김일제의 큰 집은 서해안에서 석씨 신라와 만나서 왕비 집안이 된다. 석씨 신라가 망하자 경주로 가서 김씨 신라가 되어 강원도에서 내려온 박씨 신라와 합쳤다. 석씨신라는 AD 369년에 백제가 망하자 석씨 신라 유민을 데리고 낙동강을 건너 경주로 가다가 낙동강 지역의 임나가야(백제의 근초고왕이 흡수하여 세움)와 충돌하였다. 광개토대왕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AD 400년에 공격하자 임나가야는 해체되었다. 그리고 경주지역으로 들어가서, 김일제 후손의 김씨 신라가 강원도지역에서 내려온 박씨 신라와 세력을 합쳐서 오늘의 신라가 되었다. 박․석․김의 신라가 아닌 것이다. AD 502년 김씨가 눌지왕 때 신라 국호를 세운다. 이외에 참고로 서승원장으로부터 들은 조선상고사연구와 관련한 얘기들을 서술해 본다.7)
여기서 ‘동아세계백과대사전’에 나와 있는 ‘부여’에 대해 소개해 보도록 하자. 부여(夫餘): ‘동아세계백과대사전’에는 고조선 시대와 거의 같은 시기에 지금의 북만주 일대에 웅거하였던 부족국가라고 한다. BC 1세기 경부터 300년 동안 퉁구스계(系)의 부여족이 세운 나라다. 부여는 토지가 광활한 농업을 하기에 적합한 북만주 농안(農安), 창춘(長春) 일대에서 농업을 주로 하여 진보된 조직과 대오를 가졌다고 한다(궁실<宮室>, 성책<城柵>, 창고, 감옥 등). 정치는 완전한 귀족정치로서 계급에는 왕과 그 밑에 가축의 이름을 붙인 관직이 있었으니 전국을 사출도(四出道) 또는 사가도(四街道)로 나누어 큰 지역은 수천호, 작은 것은 수백호가 되었다. 풍속 중에는 영고(迎鼓)라는 제천대회(祭天大會)가 있었고, 법률이 매우 엄중하여 도둑질, 간음 등에 대해서는 엄벌로 다스렸다. 부여의 주위에는 서쪽으로 선비(鮮卑), 오환(五桓), 동쪽에는 읍루(挹婁),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한(漢)나라의 현토군(玄菟郡)과 인접해 있었다. 해부루왕(解夫婁王)때 아란불(阿蘭弗)의 권고로 가엽원(迦葉原)으로 서울을 옮긴 뒤부터는 동부여라고 칭한다. 가엽원은 지금의 강원도 명주군(溟州郡) 일대다. 후에 동부여의 땅은 모두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여기에 발해에 대해서도 소개해보기로 하자.8) 발해(渤海): 「발해고(渤海考)」는 류득공(柳得恭)이 발해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우리나라를 비롯, 중국, 일본의 사서(史書) 24종을 참고하여 1784(정조 8)년에 완성하였다. 발해사를 독립적으로 다루었다는 점과 특히 자주적인 입장에서 발해사를 체계화시키고 발해를 우리 국사의 영역으로 끌여들여 발해 고토(故土)가 우리 영토라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사본으로 전해오던 것을 1910(융희 4년)년 조선고서간행위원회에서 영인․간행했다.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은 1937년 만주 요동(遼東) 사람 김육불(金毓黻)이 완성하여 발간했다. 이 책에서 발해를 건국한 사람을 논하면서 대조영(大祚榮)이 고구려 출신임을 분명히 하고, 발해문화를 고구려 문화의 계승으로 설명하였다. 「삼국사기」이후로 우리나라에서는 발해에 대해 무관심해왔는데, 실학자들이 나와서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발해사에 깊은 관심을 표시하였다.
류득공은 「발해고」에서 통일신라를 남국(南國), 발해를 북국(北國)으로 하는 남북국설(南北國說)을 제창하고 삼국사(三國史) 다음에 남북국사를 엮을 것을 역설했다.
한치윤(韓致奫)은 그의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 발해를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와 같은 비중으로 다루었다. 이 책은 중국 본위로 엮어졌기 때문에 발해관(觀)이나 이론(理論)에 모순이 없는 것은 아니나 우리의 발해사 연구에 크게 기여한다.
발해 왕국은 9C에서 10C 초에 걸쳐 중국의 동부(만주)지방 동반부에서 소련의 연해주(沿海州)와 한반도 동북부에 걸쳐 있었던 나라이름(699-926)이다. 건국시조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함께 말갈족을 끌여들여 발해를 세웠다. 왕실과 지배층은 고구려계이고 피지배측은 말갈족으로 구성된 복합국가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대외정책은 영토의 개척에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당과 신라를 멀리하여 항쟁하는 한편 바다 건너의 일본을 가까이 하는 근공원교책(近攻遠交策)으로 일관된 감이 있었다. 또 옛 폐단을 극복하여 중앙정부의 통제를 강화하는 동시에 지방행정의 기구를 정비하여 그 번영은 당에서도 ‘해동의 성국’이라고 칭하기에 이르렀다.
제14인 애왕(대인선)(哀王<大諲譔>)에 이르러 중앙정부의 내분과 지방의 혼란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최악의 상태에 빠져 중신(重臣)들로서 고려로 난을 피하는 사람도 많았다. 마침 이때 서쪽인 요하(遼河) 상류에 흘러내리는 시라무렌(Sira muren) 유역에는 거란족의 국가 요(遼)가 세워졌다. 발해 국내의 정치혼란을 틈타 요의 태조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926년에 발해로 홀한성(忽汗城: 상경현덕부(上京顯德府))을 포위하게 되자, 230년 가까이 이어내려 오던 이 왕국은 1개월을 지키지 못하고 멸망의 비운을 겪게 되었다.
특히 금제국을 세운 여진 완안부(完顔部)의 맹공격을 받아 제국이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있던 1115년에 요제국 심장부 요주(饒州)에서 고욕(古欲)이 중심이 된 발해유민의 광복운동이라든지, 1116년에 고영창(高永昌)을 영도자로 하여 요양에서 ‘대발해국’을 세웠던 발해 유민의 광복운동은 비롯 그것이 좌절되었지만 그 끈질긴 저항정신은 동양사에 드물었던 일이다. 즉 나라를 잃고도 197년 간이나 그 유민은 지배자인 요에 집단 항거를 하였던 것이다. 유적에 발굴되는 건축물의 부속에는 와당에 새겨진 연화문(蓮花文)을 비롯 고구려의 영향이 매우 짙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발해왕국의 문화는 고구려 문화의 전통을 이어받아 거기에 다시 당의 문화까지 섭취하여 그 생활에 맞는 알맞은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던 자취가 뚜렷이 보이고 있다.
「송사고려전(宋史高麗傳)」에 고려 왕국의 총인구를 210만으로 계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내투한 발해의 호수는 결코 적지 않은 비율로 차지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 출신이 발해인 것이 뚜렷이 알려지고 있는 태씨(太氏)를 제외한 나머지 발해유민의 후예도 한반도 전역에 흩어져 한국민족에 혼융(混融)되어 한국민족으로서의 문화와 역사를 더불어 누리고 있다.
<다음호 계속>
---------------------------------------------------- 1) 부여사는 『신단실기』와 『북부여기』참고. 동부여, 북부여, 갈사부여, 서부여, 임나, 가라 가 소개되어 있음. 『환단고기』「고구려본기」도 참고할 필요가 있음. 2) 한국정신과학학회 제40회 추계학술대회(2013. 10. 26. 토), 대주제; “양자과학과 정신과학 시대 통합심신치유와 영성적 삶”. 3) 아사달: 아사는 아침, 달은 다라(나라), 따라서 아사달은 ‘아침의 나라’를 뜻함. 4) 北崖子(북애노인), 신학균 역『규원사화(揆園史話)』명지대학교 출판부(1986). 5) 낙랑공주는 고구려의 호동왕자를 만나기 위해 북이 울리지 못하도록 북을 찟는 비련의 공주이기도 하다. 6) 신라사는 『부도지』, 『삼국사기』 참고. 『부도지』는 신라사 자체로 이 두권의 저술로 완벽하게 설명이 됨. 7) * 조선의 3대악은 ① 평양 기생 ② 충청도 양반 ③ 전라도 아전 * 선비족의 어원과 관련하여 조선의 선비는 학자, 양반이라면, 중국의 선비(士)는 장기판에서 볼 수 있듯 유방과 항우의 초, 한 양장군의 입장에서 보면 졸에 불과하다. * 사마천의 사기조선열전」에서 사기를 쓸 때에는 사기의 조선열전에는 위만조선이 망한 자리(지금의 하북성)에 조선5군(朝鮮五郡)(획청(획淸), 축저(축狙), 평주(平州), 기(畿), 날양(날陽))이 설치되었는데, 그 사기열전을 그대로 베낀 반고의 한서의 조선열전에는 임둔(任屯), 진번(辰番), 낙랑(樂浪), 현토(玄菟) 8글자를 삽입하여 한4군(漢四郡)이라 했다. 후한서부터는 한4군으로 변한 것이다. * 최치원이 당나라 사신으로 가 왕에게 상소를 올릴 때, 옛날에 3국이 있었는데 고구려, 백제가 각각 100만 대군이 있었고, 백제는 양자강까지 차지하고 북으로는 유, 연, 제를 차지하고, 남으로는 오, 월나라를 차지했다고 했다. 삼국사기 열전에 나오는 말이다. * 공자는 구이(구려)(산동반도)에는 병도 없고 장수하는 불사국(不死國)이 있어서 이를 찾아 가고 싶다고 했다. 이를 읽은 진시황은 성인군자가 많은 이 지역에 불로초를 찾아 사람을 보냈다고 한다. * 송시열이 숙청당할 때 사문난적(斯文亂賊)(성리학에서 교리를 어지럽히고 사상에 어긋나는 언행을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말해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조선후기 노론의 맹주로 우암은 명나라를 사대하지 않으면 거꾸로 사문난적으로 몰았다. 그래서 명이 망하자 우리가 소중화라고 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 노나라 역사책이 춘추다. 춘추필법은 존주양이(尊周攘夷)로 周를 높이고 오랑캐를 낮춘다는 역사서술로 공자책에는 춘추가 없다. 정론직필이 아닌 것이다. 8) 발해사는 『태백일사』, 『대진국본기』, 『구당서』, 『신당서』 참고. 당나라가 발해의 속국으로 되어있음. 북애노인의 『규원사화』에도 「진역유기」에서 발해를 언급하고 있으나 단재의 경우처럼 문인의 수준에 머물고 있음.

-- 양체제의 장점을 발전시켜 --
Ⅳ. 홍범구주(洪範九鑄)에 대해9)
고조선의 정치사상이었던 홍범구주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연구가 되어야 한다고 하여 필자 나름으로 자료를 찾아 보았다. 홍범구주와 이와 관련된 개념들을 옮겨보았으니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서승원장은 고조선의 천부경(天符經10)), 환력(桓曆)이 화하(華夏)족에 건너가 오늘의 주역으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조선의 기자가 주(周)의 문왕(文王)에 소개한 것이라고 한다. 또 환역이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사상으로 3원론인데 반해 주역은 음양의 이원론임으로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환단고기』에는 홍범구주(洪範九疇)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11)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 적혀있는 심오한 글로 65자 9개 항목으로 되어있다. 은(殷)나라 임금의 숙부인 기자(箕子)가 주(周)나라 무왕(武王)에게 전했다고 하나, 홍범구주는 ‘5행치수법’과 함께 단군왕검의 태자인 부루가 하우(夏禹)에게 전한 것이다. 중국은 이것을 자기들 문화라고 하여 『서전』, 『사기』, 『죽서기년』 등에 기록하였으나 실은 그 뿌리가 『삼황내문경』에까지 연결된다. 홍범구주는 고조선 이전부터 있었으며 임금들은 이를 바탕으로 하여 밝은 정치를 펴서 사람을 널리 유익하게 하였다."
이병화선생은 홍범구주는 숙신(肅愼)12)의 왕수긍(王壽兢)에 의해 창안되어, 은의 기자가 주의 문왕에 전해주었고, 그 뒤 홍범구주는 중국의 유교가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정경희교수의 논문을 중심으로 설명해보고자 한다.13)
홍범구주의 뜻을 한국선도를 대표하는 경전인 『천부경(天符經)』,『3•1신고(三一神誥)』,『부도지(符都誌)』를 통해 고찰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한국선도의 존재론의 핵심인 1•3•9론(一․三․九論)과 3원조화론(三元造化論)이 『천부경』과 『삼일신고』에서 제시되고 『부도지』에 담긴 1․3․9론과 기․화․수․토‐․천부론(氣․火․水․土․天符論)을 통해 홍범구주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또 주역(周易)의 음양오행론(1․2․4․8론)도 환역(桓易)의 3원오행론(1․3․9론)에 포괄되어 있으며 따라서 한국의 선도인 환역(桓易)의 삼원오행론을 두고 삼원조화론 또는 천부조화론이라는 개념으로 더욱 잘 설명해준다는 것이다.
그리고『부도지』에서 목․화․토․금․수 오행론 중 중앙의 토가 ‘통제적’으로 이해되어온 것을 비판하고 이 자리가 ‘조화점’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복본(復本)하여 마고성(麻姑城)의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14) 九州의 땅에 세운 당도(唐都)를 부도(符都)로 대신하는 것이다.
부도지의 복본은 마고성 출성(出城)이후 감각에 오염된 사람들을 마고성 당시의 인조(人祖)들의 모습(本)으로 회복하는(復) 것이다. 다시말해 천․지‐․인(天․地․人) 3재(才) 가운데 인(人, 氣에너지)으로서 조화점을 찾아, 즉 천부의 조화점을 찾아 홍범구주의 세상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러한 경전들은 고조선이래 선도의 전통이 약화되는 추세 속에서 오랜 시대의 간극을 뛰어넘어 현대사회에서도 존재(론)의 본질에 대한 빛나는 통찰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특히 한국 선도 으뜸 경전인 『천부경』에서 가장 본질적이면서도 명쾌한 통찰로서 3원조화론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3원조화론은 종래의 3가지 차원으로서 천․지․인 3원, 곧 현상의 차원(地, 질료), 현상을 존재하게 한 본질의 차원(天, 정보), 주인된 자리에서 본질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를 연결시키고 주재하는 주체의 차원(人, 氣에너지)을 제시, 이 3가지가 어울려 돌아가는 작용을 이해하게 하며, 그 셋이 본래 나뉠 수 없는 하나임을 깨닫게 한다. 삼원조화론은 특히 人의 차원이 天의 차원 및 地의 차원을 조화시키는 조화력을 중시, 존재를 통일된 전체로 파악하는 조화와 통합의 세계관을 제시한다.
이에 따라 人차원의 확고한 중심을 갖고 天차원을 地차원 속에 정확하게 구현하는 삶의 모델로서 弘益人間, 在世理化의 방식을 제시한다. 이는 현대인들의 전도된 흑백논리와 같은 2원적 사유체계가 갖는 대립과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조화․평화․통일사상으로서 통시대적인 의의와 가치를 제시해주고 있다.
한국선도에서는 존재의 궁극처인 ‘一’과 ‘三’은 대체로 體•用의 관계로 이해되며, 天은 정보(또는 無․空), 地는 질료, 人은 氣에너지로 해석된다.
『천부경』에서는 존재의 세 차원인 천지인의 어우러짐으로 인해 만물이 생성되는 과정을 十元論(一積十鉅 無匱化三)15) 또는 九元論(天二三, 地二三, 人二三)으로16) 설명하고 있다.17) 『삼일신고』에서는『천부경』과 마찬가지로 천․인․지 3원이 2차에 걸쳐 분화된다고 설명한다. 곧 신(檀, 하느님)이 1차로 천․인․지 3원으로 분화되는데, 그 천․인․지 3원은 다시 각각 3眞(性․命․精), 3妄(心․氣․身), 3途(感․息․觸)로 나뉜다고 보았다.18)
『삼일신고』에서는 9元의 의미에 대해서도 주목할만한 해석을 하고 있다. 곧 3眞을 無善惡, 無淸濁, 無厚薄, 3妄을 有善惡, 有淸濁, 有厚薄, 3途를 無善惡, 無淸濁, 無厚薄 단계와 有善惡, 有淸濁, 有厚薄 단계가 어우러진 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또 현대의 선도인 「단학」계열에서는 ‘존재의 근본상태에서 ① 존재의 형상화 이전의 상태 ② 존재의 형상화된 상태 ③ 존재의 형상화 이전과 형상화된 상태가 어울려 작용하는 상태’로 해석하고 있다.
『부도지』는 내용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제1부는 ‘존재론 및 사관(史觀)’의 부분으로 사서(史書)로서의 기본이론이 실려 있다. 시기적으로는 先天, 朕世(짐세), 그리고 後天 중에서도 인간의 시조(人祖)가 원거주지인 마고성(麻姑城)에서 분거(分居)하기 이전까지의 시기에 해당한다. 제2부는 인류사 및 한국사의 시원부분으로 제1부에서 제시한 존재론 및 사관을 직접적으로 역사에 대입해서 얻어낸 부분이다.
따라서『부도지』전반부에는 특유의 세계관이 신화의 방식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 골간은 일․삼․구론이다. 신화의 간략한 내용으로는 先天과 朕世(과도기)를 거친 후 후천이 시작될 때에 마고성의 마고가 二姬(穹姬, 巢姬)를 낳고 二姬는 四天人(黃穹氏, 靑穹氏, 白巢氏, 黑巢氏)과 四天女를 낳았는데 그 4천인, 4천녀의 결합에 의해 존재계가 생겨났으며 존재계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인간의 시조(人祖)까지 생겨났다. 또 人祖들은 마고성에서 생활하면서 존재계의 질서를 바로잡는 일(修證)을 담당하였는데 ‘五味의 禍’19) 를 계기로 인조들이 존재계의 질서를 바로잡는 원래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면서 존재계의 질서가 와해, 인조들이 마고성에서 출성하게 된다.
이 신화 속에서 ‘1․3․9론’은 ‘주기론(週期論)’, ‘허달성(虛達城), 마고성(麻姑城), 실달성(實達城) 3원론’, ‘마고→(天符)․二姬(궁희, 소희)→(천부)․四天女 四天人(황궁씨, 청궁씨, 백소씨, 흑소씨)論’, ‘여율론(呂律論), 음향론(音響論)’, ‘기․화․수․토․천부론(氣․火․水․土․天符論)’등 여러 이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
부도지에서는 한국선도의 존재(계) 자체인 一신에서 존재의 세 차원으로 천, 인, 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대해 부도지에서는 이를 허달성, 마고성, 실달성으로 무수한 주기의 만물 중에서도 후천의 주기에 역점을 두어 표현하고 있다. 天(정보)이 갖고 있는 無性, 空性을 범주화하여 ‘허달성’으로, 地(질료)가 갖고 있는 물질성,
구체성을 범주화하여 ‘실달성’으로, 人(氣에너지)이 갖고 있는 3원조화의 중심으로서의 운동성, 창조성을 ‘마고’라는 여신으로 의인화하고 또 이를 마고성으로 범주화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3원 중에도 마고성차원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한국선도의 천․인․지 3원론에서 특히 人(氣에너지) 차원에 3원조화의 중심역할을 부여하는 특징에 다름 아니다. 마고성은 지상에서 가장 높은 성으로 천부를 받들어 先天을 계승하였다.
한편 이러한 창조과정의 ‘중심점’이자 ‘조화점’으로서 ‘천부’가 존재하였다는 점이다. 천부는 궁희, 소희나 4천녀, 4천인처럼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창조의 조화점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특히 다음에 소개할 ‘기․화․수․토․천부론’에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다음은 ‘기․화․수․토․천부론’이다. 부도지에서는 4대 원소를 조화시키는 중심점으로 ‘천부’를 설정하고 있다. 이는 人祖들이 거주하였다고 하는 마고성 또는 마고성 출성이후 마고성을 본따 만든 ‘부도(符都)’를 상징적 구조 속에 제시하고 있다.
부도지에서는 마고성 및 부도의 구조에 대해 중앙의 天符壇을 중심으로 사방에 기․화․수․토의 4개의 보단(保壇)이 배치된 형상으로 설명하고 있다.
본문 중에 화․수와 기․토가 맞불리는 구조로 설명되는 구절을 통하여 이것이 존재계의 수승화강(水昇火降)의 원리를 말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또 1․3․9론의 원리를 상징화하여 김시습은 金尺20)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火․水가 수직이며, 氣․土는 수평의 방향임을 알 수 있다.

위의 그림이 4대 원소의 조화점으로 ‘천부’를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삼일신고」에서는 나타나지 않은「부도지」만의 고유이론으로 한국선도의 더욱 다채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상에서「부도지」의 설명내용을 표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처럼 부도지는 ‘1․3․9론’의 구조를 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화․수․토․천부론’까지도 담아내고 있다. 「천부경」, 「삼일신고」와 더불어 「부도지」도 ‘1․3․9론’과 유사한 3원론적 구조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이 되며, 더 나아가서는 위의 두 경전에서 다루지 않는 ‘기․화․수․토․천부론’의 5원론까지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천부경 ‘1․3․9론’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으로 주목되는 것이다.
부도지의 3원인 허달성(天, 정보), 마고성(人, 에너지), 실달성(地, 질료)에서는 특히 마고성의 차원이 3원을 묶는 조화의 중심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九원인 天符, 四天人, 四天女에서는 특히 ‘天符’가 구원을 묶는 중심점이자 조화점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9원론’도 ‘天符’로 조화의 기준이 제시되고 있으니 한국선도 핵심사상인 ‘3원조화론’으로 정리할 수 있다.
부연하여 부도지의 ‘1․3․9론’은 주역의 2․4․8론과 음양오행론을22)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재자역할을 하고 간접적인 ‘천부’의 역할을 빼면 주역의 원리도 내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139론은 248론에 비하여 존재의 다중 차원의 중심을 잡아주는 중심의 조화점에 대한 기준이 분명하다. 따라서 3원론의 측면에서 보면 ‘人(氣에너지)’차원의 역할을 강조하는 ‘3원조화론’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며, 9원론의 측면에서 보면 ‘天符’차원의 역할을 강조하는 ‘천부조화론’으로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역의 음양오행의 오행론에서 중앙의 ‘토’를 지배와 복종의 통제점으로 권위주의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을 극력 비판하고 이를 천부조화론의 방식으로 되돌려 놓고자 한 것이『부도지』이다.
이렇게 볼 때 홍범구주의 논리인 한국의 환역(桓易)은 주역의 양태극적 화합을 한국선도의 전통인 3태극으로23) 대신한 것이다. 3재론은 우리문화의 정수로 천리(天理)(하늘의 돌아가는 이치)를 두고 1년 사시사철을 따라 시공(時空)을 따라 나타나는 것이다. 이 것이 수로 나타난 것이 역(易)이고, 글로 나타난 것이 경(經)이다. 또 이를 형상화 한것이 삼족오(三足烏)이다. 이 3재론의 상생의 동이사상을 상극의 음양론의 중화사상으로 바꿔치기한 것이다. 환역(桓易)을 기자가 주공에게 가리켜주어 홍범구주의 주역이 된다. 홍범구주를 정리한 것이 「서경(書經)」이다.
환역의 3원5행을 통해 주역의 2원5행론의 지배적 일방적 소통을 지양(止揚)하여 쌍방소통을 통한 원환(圓環)론적 상생의 우주관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또한「천부경」, 「삼일신고」, 「부도지」를 통해 볼 수 있는 한국선도의 1․3․9론이 3원5행론으로 「주역」의 2․4․8론의 2원적인 음양5행론을 실상 같은 논리로 포용하여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론하여 1․2․4․8론의 음양의 2원5행론보다는 1․39론의 3원5행론이 존재의 중심조화점으로서 3원주의인(氣에너지) 차원, 9원 중의 ‘천부’차원을 명백하게 드러내어 평화통일의 교훈으로 3원조화론과 천부조화론의 이념적 틀을 제시하고 있다.
더욱이 「부도지」에서는 오행의 ‘토’가 통제점으로 이해되어온 점을 비판하고 이 자리가 ‘통제점’이 아닌 ‘조화점’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내용을 보면서 다시 한번 한국선도의 1․3․9론이 3원5행론으로 천부조화론적 복선,복본임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부도지에서 복본(復本)은 마고성 출성(出城)이후 감각에 오염된 사람들이 각고의 노력을 통하여 마고성 당시 인조(人祖)들의 원래의 모습(本)을 회복한다(復)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1․3․9론의 입장에서 ‘복본’의 의미를 추적해보면 사람들 속에 이미 내재되어 있으면서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는 人(기에너지)의 조화점, 또 천부의 조화점을 다시 가동시키는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부도지 속의 1․3․9론은 그 천부조화론적 속성으로 인하여 단순히 이론적•학술적 空論으로 그치지 않고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실천론으로 귀결될 수 있겠다.
한국선도의 전통에서는 ‘깨달음(性通)’과 함께 ‘깨달음의 실천(功完)’을 꼭같이 중시하는 ‘性通功完論’이 선도수행론의 전형으로 제시되어 왔다. ‘성통’과 ‘공완’ 양 측면 중에서도 특히 ‘공완’에 대한 강조는 동서고금의 어느 사상, 종교 전통보다도 강한 편인데24) 부도지 역시 그러하다.
한국선도의 대표적 존재론인 1․3․9론에서조차도 이것이 단순히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라 ‘복본’이라는 구체적이고 실천적 방향으로 설명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주역의 5행의 ‘토’의 통제점을 천부조화론적 시각에서 이해하여 포용하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洪範九鑄의 홍범이 弘益人間의 정신을 넓게 펴고자 하는 규범이라면 9주는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부도지에 따르면 “도요(陶堯)가 일찍이 祭市의 모임에 왕래하고 서쪽 堡의 간(干)에게서 道를 배웠으나 원래 敎에 부지런하지 못하였다. 九數五中(1․3․9론 및 기․화․수․토․천부의 5행론)의 이치를 잘 알지 못하고 中五 이외의 여덟을 하나로서 여덟을 제어하며 안(內)으로써 밖(外)을 제어하는 이치라 하여 음양5행의 2원론적 법을 만들어 帝王의 도를 주창하므로 소부(巢夫)와 허유(許由) 등이 심히 꾸짖고 그것을 거절하였다. …… 堯가 九州의 땅을 그어 나라를 만들고 스스로 5中에 제왕이라 칭하여 당도(唐都)를 세워 부도(符都)와 대립하였다.”25)
우리는 여기서 부도는 당도와는 달리 음양오행의 ‘土’를 당도의 통제에서 부도의 造化로 정치의 패턴이 바뀌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정전제(井田制)에서 사방 1리(里)의 땅을 ‘井’자 모양으로 아홉 등분하여 여덟 농가에게 나누어 맡기고, 그 중앙의 땅은 여덟 집에서 공동으로 부치어 그 수확을 나라에 바치게 하였듯이 조화의 9의 의미는 한국선도의 1․3․9론과 함께 중요한 의미를 한국사상사에서는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고조선의 웅혼한 통치철학이었던 ‘홍범구주’를 두고 한국선도의 주요저서를 통해 고찰해 보았다시피, 3원5행론의 논리를 특징으로 하는 3원조화론과 천부조화론이 바로 후대의 홍범구주의 정치사상(논리)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하고 사료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앞으로 더욱 많은 자료의 발굴과 다양한 접근방식으로 홍범구주사상의 진면목이 드러나길 바란다.

동학․천도교에서는 21자 주문에서 우주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천․지․인 3재(三才)에 성․경․신, 수심정기(誠․敬․信 修心正氣) 7자를 천․지․인에 각각 곱하여 21수가 되고, 또 5행에 21수를 곱해 105수가 된다고 하였다. 21염주와 105염주가 이 천수(天數)에 기인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해월은 수운과의 한울을 통한 대화를 통해 “갑자기 찬 물에 들어가면 몸에 해로우니라”라는 말을 듣고 시천주(侍天主)가 인시천(人是天)임을 깨달아, 즉 “사람이 곧 한울임”을 깨우쳐 득도하였는데, 그는 득도후 성․경․신과 수심정기의 실천을 위해 21자 주문외우기에 증진하였다고 한다.

다음은 홍범(구주)와 관련된 기록들을 소개해보기로 한다.
홍범(洪範)은 구주(九鑄)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의 고전(古典)인 서경(書經)의 한 편(篇). 유가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기술한 정치철학서로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친 후 은나라의 유신 기자(箕子)에게 도(道)를 물었을 때, 기자는 우(禹)가 천제의 계시(啓示)로 얻은 홍범을 주었다. 홍범은 그 내용이 9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 오행(五行) ②오사(五事) ③ 팔정(八政) ④ 오기(五紀) ⑤ 황극(皇極) ⑥ 삼덕(三德) ⑦계의(稽疑) ⑧ 서징(庶徵) ⑨ 오복육국(五福六極). 참고로 ④의 5기를 살펴보고 ⑤의 황극에 대해서는 황극경세서와, 황극편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26)
먼저 『서경(書經)』에 나와있는 홍범구주의 내용을 소개해보도록 하자.
겸손한 무왕에게 박식한 기자는 아홉 가지의 원칙과 육십 가지 세부사항들을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① 첫째는 5행
② 둘째는 경건한 태도에 필요한 5가지 삼갈 바
③ 셋째는 농사 등 국가운영에 필요한 8가지 정책
④ 넷째는 협력에 필요한 5가지 기강
⑤ 다섯째는 임금과 백성에게 행할 5가지 법도
⑥ 여섯째는 3가지 덕목
⑦ 일곱째는 밝혀 아는 데 필요한 점치는 법
⑧ 여덟째는 8가지 자연현상의 관찰
⑨ 아홉째는 5복을 누림과 동시에 6가지 화를 잘 피하는 비결

初一曰五行, 次二曰敬用五事, 車三曰農用八政(초일왈오행, 차이왈경용오사, 차삼왈농용팔정) 次四曰協用五紀, 次五曰建用皇極, 次六曰乂用三德(차사왈협용오기, 차오왈건용황극, 차육왈예용삼덕) 次七曰明用稽疑, 次八曰念用庶徵, 次九曰嚮用五福(차칠왈명용계의, 차팔왈념용서징, 차구왈향용오덕) 威用六極(위용육극)


우선 5행(五行)을 보자.

오행은 水, 火, 木, 金, 土의 다섯 가지 물질이다.
수는 물로 윤택하게 흘러내리는 것이다. 화는 불로 위로 타오른다. 목은 나무로 굽은 것과 곧은 것이 있다. 금은 청동으로 틀을 따라 변모시킬 수 있다. 토는 흙으로 심고 거두는데 필요한 것이다. 맛으로 치면 수는 짠맛, 화는 쓴맛, 목은 신맛, 금은 매운 맛, 토는 단맛에 해당된다.
一, 五行: 一曰水, 二曰火, 三曰木, 四曰金, 五曰土(일, 오행, 일왈수, 이왈화, 삼왈목, 사왈금, 오왈토), 水曰潤下, 火曰炎上, 木曰曲直, 金曰從革, 土爰稼穡(수왈윤하, 화왈염상, 목왈곡직, 금왈종혁, 토원가색), 潤下作鹹, 炎上作苦, 曲直作酸, 從革作辛, 稼穡作甘(윤하작함, 염상작고, 곡직작산, 종혁작신, 가색작감)


흔히 동양철학에서 언급하는 5행의 기본은 바로 이 「홍범」의 5행에서 나온 것이다. 최초의 5행은 철학적 순환이나 변환의 법칙으로까지는 발전하지 않은 소박한 것이었다. 단지 원시사회의 경제활동에 꼭 필요한 다섯 가지 자연소재를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5행을 언급한 이유는 바로 이들 다섯 가지 자연 소재를 적절히 고르고 활용할 줄 알아야 백성들의 생활을 효과적으로 보살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맛과 5행과의 연관도 마찬가지다. 물과 짠맛은 물이 많으면 싱겁고 적으면 짜지는 화학적 상관관계를 언급한 것이다. 불과 쓴맛은 음식물이 불에 그을리고 탔을 때 나는 맛이고, 나무와 신맛은 나무의 진액 맛을 뜻하는 것이다.
청동의 매움은 맛의 매움이 아닌 신체적 고통의 매움을 뜻한다. 매울 ‘辛’은 청동으로 만든 문신용 칼의 상형문자로 노예나 첩의 이마에 문신을 새기는 도구다. 그래서 매운 맛이라는 의미가 파생한 것이다. 마지막의 흙과 단맛은, 흙이 생산해낸 곡물로 달콤한 술을 빚을 수 있기 때문에 연관지은 것이다.

이번에는 사람이 보기 좋은 태도를 만드는데 필요한 다섯 가지 사항(五事)을 보자.

5사는 태도, 말, 보기, 듣기, 생각을 말한다. 태도는 겸손해야 하며 말은 이치에 맞아 순해야 한다. 보는 것은 분별 있게 보아야 하고, 듣는 것은 사리 있게 들어야 하며 생각은 깊이 있게 해야 한다. 태도가 겸손하면 엄숙함이 생겨나고 말이 순해지면 화기애애해진다. 분별 있게 볼 줄 알면 일의 진상을 밝힐 수 있고 사리 있게 들을 줄 알면 선견지명이 생긴다. 깊이 있게 생각할 줄 알면 커다란 지혜자가 될 수 있다.


二, 五事: 一曰帽, 二曰言, 三曰視, 四曰聽, 五曰思(이, 오사 일왈모, 이왈언, 삼왈시, 사왈청, 오왈사), 貌曰恭, 言曰從, 視曰明, 聽曰聰, 思曰睿, 恭作肅(모왈공, 언왈종, 시왈명, 청왈총, 사왈예, 공작숙), 從作乂, 明作哲, 聰作謀, 睿作聖(종작예, 명작철, 총작모, 예작성)


이번에는 농업 등 국가 운영에 필요한 여덟 가지 정책(八政:)을 보자.


여덟 가지 정책은 음식, 돈, 제사, 관리, 교육자, 치안 경찰, 제후 접대, 군대 관리다. 八政: 一曰食, 二曰貨, 三曰祀, 四曰司空, 五曰司徒, 六曰司寇, 七曰賓, 八曰師(팔정 일왈식, 이왈화, 삼왈사, 사왈사공, 오왈사도, 육왈사구, 칠왈빈, 팔왈사)

먹는 일에서 군대까지 소박하긴 하지만 현대사회의 흐름과 비교해 보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국가 운영 체계다. 특히 음식과 돈, 경제의 실체가 처음 부분에서 언급되고 있음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이번에는 관찰해야 할 다섯 가지 자연 현상들을 알아보자.

다섯 가지 현상은 비, 별, 더위, 추위, 바람, 절기다. 이것들이 잘 갖추어져서 순서 있게 진행되면 뭇 풀들이 무성할 것이다. 하나라도 지나치면 흉하게 되고 하나라도 모자라면 역시 흉하게 된다.

曰雨, 曰陽, 曰燠, 曰寒, 曰風, 曰時, 五者來備(왈우, 왈양, 왈욱, 왈한, 왈풍, 왈시, 오자래비) 各以其敍, 庶草蕃廡, 一極備凶, 一極無凶(각이기서, 서초번무, 일극비흉, 일극무흉)

이러한 모든 것이 갖추어진 뒤에도 개인에게는 다음의 다섯 가지 복(五福)이 따라야 한다. 5복은 장수, 부, 건강, 선행, 행복한 임종이다.

五福: 一曰壽, 二曰富, 三曰康寧, 四曰攸好德, 五曰考終命(오복 일왈수, 이왈부, 삼왈강녕, 사왈유호덕, 오왈고종명)

여기의 5복은 동양 문화 속에 놀아들어 지금까지도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의 실체들이다. 특히 장수, 건강, 행복한 임종 등 신체와 관계된 것이 세 가지나 되는 사실은 동양인들의 처세술이 유달리 음식관리, 몸 관리에 치중되어 있는 이유를 알게 해주는 부분이다.

이번에는 여섯 가지 피해야 할 일들(六極)을 보자. 여섯 가지 피해야 할 일은 재난을 만나 죽는 것, 질병, 근심, 가난함, 악한 태도, 허약함이다.

六極: 一曰凶短折, 二曰疾, 三曰憂, 四曰貧, 五曰惡, 六曰弱(육극: 일왈흉단절,이왈질, 삼왈우, 사왈빈, 오왈악, 육왈약)

곰곰이 살펴보면 기자가 만든 최초의 법 정신은 결국 오랜 기간의 인간 관찰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조직관리, 사람 경영, 자기 처신, 이 모든 교훈은 세월이 흘렀어도 설득력을 잃지 않고 있다. 하늘 아래 새 것이 없다던가?

이상은 『사서삼경(四書三經)』의 「서경(書經)」에서27) 나오는 홍범구주에 관한 글을 옮겨보았으나 9가지 원칙과 60가지 세부사항이 「서경」에 수록되어 있다고 했으나 자세하지가 않다. 지금부터는 국내에서 편찬된 주요백과사전을 중심으로 관련 개념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 오기(五紀): 오기력(五紀曆)은 세(歲), 월(月), 일(日), 성신(星辰), 역수(曆數)등의 5가지를 기록한 달력이다. 신라는 오기력에 이어 8세기 말엽에서 9세기 초엽에 걸쳐 선명력(宣明曆)으로 개혁하고 그것이 고려에 계승되었다. 또 오기력은 중국의 당(唐)나라 때의 달력이다.

*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중국의 북송(北宋)의 학자 소옹(邵雍)의 저서. 역리(易理)를 응용하여 수리(數理)로서 천지만물의 생성변화를 관찰 설명한 것이다. 모두 12권으로 되어 있다. 12진(辰)을 하루, 30일을 한 달, 12개월을 1년, 30년의 1세(世), 12세를 1운(運), 30운을 1회(會), 12회를 1원(元)으로 한다. 그러므로 12만9천600년이 1원이며, 天地는 1원마다 한 번 변천하고 만물은 이 시간적 순서에 따라 진보한다는 것이다. 6권까지는 역(易)의 64괘(卦)를 원․회․운․세에 배당하여 요제(堯帝)의 갑신년(甲申年)에서 후주(後周)의 현덕(顯德) 6년(959)까지의 치란(治亂)의 자취를 적시하고, 7~10권에는 율려성음(律呂聲音)을 논하고, 11~12권은 동식물에 관해 논하고 있다.

* 황극편(皇極編): 조선시대의 당쟁(黨爭)사실을 엮은 책. 12권 6책. 정조어제서(正祖御製序)가 붙어 있는데, 곧 당쟁을 초월한 객관적 입장에서 공정히 사실대로 서술한 것이라 하여, 탕평책(蕩平策)의 극치로 황극의 중정성(中正性)을 도달케 한다는 의미로 황극을 이 책의 이름으로 하였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이 없는데 ⑤의 삼덕은 참고로 천주교의 기도문에 삼덕송(三德頌)이 있어서 소개해본다. 신덕송(信德頌): 믿음에 대한 기도문), 망덕송(亡德頌: 희망에 대한 기도문), 애덕송(愛德頌: 사랑에 대한 기도문)이 있다. 향주삼덕(向主三德)이라 하여 하느님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게 되는 덕행의 기도문이다.

홍범구주는 그 내용이 9부분으로 나누어져 불리우는 이름이다. 실제로는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만들어졌는데 오행사상을 토대로 정치․도덕의 9대 법칙을 제시하고 있는데, 한 대(漢代)에서는 이 사상을 도리어 재이설(災異說)에 결부시키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여기서 갑오경장(甲午更張)후 제정된 이조의 기본법인 홍범14조(弘範十四조)를 소개해보도록 하자. 홍범은 「서경」의 편명(篇名)으로서 대법(大法)을 뜻한다. 새로 제정된 14조가 정치제도의 근대화와 자주독립국가의 대법이라는 뜻에서 홍범구주의 정신과 같다는 의미에서 불려진 이름이다. 이 홍범14조는 우리나라의 최초의 헌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청국에 의존하는 생각을 끊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확립한다.
② 왕실규범을 제정하여 왕위계승은 왕족만이 하고 왕족과 친척과의 구별을 명확히 한다.
③ 왕은 대신들과 의논하여 정사를 처리하고 종택이나 외척의 내정간섭을 허용치 않는다.
④ 왕실사무와 국정사무를 분리하여 서로 혼동하지 않는다.
⑤ 의정부(議政府) 및 아문(衙門)(내각, 행정부, 기무아문)의 직무․권한을 명백히 규정한다.
⑥ 납세는 납세법에 규정하고 함부로 세금을 징수하지 못한다.
⑦ 조세의 징수와 경비지출은 모두 탁지아문(度支衙門)(기획재정부)의 관할에 속한다.
⑧ 왕실의 경비는 솔선하여 절약하고 이로써 각 아문과 지방관의 모범이 되게 한다.
⑨ 왕실과 관부(官府)의 1년간의 비용을 예정하여 재정의 기초를 확립한다.
⑩ 지방관리의 권한을 제한한다.
⑪ 우수한 젊은이들을 파견시켜 외국의 학술, 기예를 받아들인다.
⑫ 장교를 교육하고 징병을 실시하여 군제의 기초를 확립한다.
⑬ 민법․형법을 제정하여 인명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
⑭ 문벌을 가리지 않고 널리 인재를 등용한다.

이로써 오랫동안 사용하지 못했던 짐(朕), 폐하(陛下), 조(詔), 태자(太子) 등 왕실용어를 되찾고 청에 대한 종주권을 부인했으며 왕권의 전제를 제한한 점 등 자주독립과 민주적인 정신을 반영한 것으로 주목된다.
그러나 이것이 제정된 배경이 보수적인 민비 일파의 세력을 몰아내고 일본 세력을 업고 성립한 김홍집 내각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일본의 내정간섭이 더욱 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홍범14조는 용두사미로 되어 민족의 민주화를 도리어 저해하게 되었다.28) 서구문명이 들어오면서 서양이론인 갈등이론의 2분법을 두고 우리는 그 한계를 경험적으로 터득하고 있다. 지구촌의 말세를 두고 현재의 세계문화를 홍익인간으로 회복할 수있는 대안이 한민족(알타이족)의 3재론에 기초한 3원조화론, 천부조화론의 홍범구주사상이다. 우리가 상고사의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이다.
3재(才)(천․지․인)사상, 3신(神)(환인, 환웅, 환단)문화를 다시 살려야한다.

Ⅴ. 대륙사관으로 통일을

마르크 위르겐스마이어(Mark Juergensmeyer)교수는 그의 저서29)에서 문명충돌론에 대해 말하면서 서구문명의 제1천년(millenium)은 희랍반도에서 희랍민족주의 (Hellenism = Hellas+Nationalism)로 소크라테스의 희생, 즉 그의 삶과 사상을 그의 제자들(Plato, Aristoteles)이 인도주의 정치사상으로 표방하여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고 했다. 또 제2천년은 예수의 순교로 초인적인 천본주의(天本主義)이념이 이태리반도에서 헤브라이즘(Hebraism=Hebrew+Nationalism)으로 교부철학자인 아우구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등에 의해 집대성되어 로마제국 멸망후 종교개혁과 르네상스운동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이제 21C부터 시작하는 제3천년시대를 맞이하여 세속국가(secular state)의 종교민족주의가 출현하여야 한다고 한다, 20C말로 하여 미국의 자본주의와 소련의 공산주의가 종교민족주의로서 그 역할을 끝냈으므로, 이제는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를 변증법적으로 지양(止揚)한 새로운 신인합일(神人合一)의 종교(문화, 정신)민족주의가 나와야 하는데 마르크는 그것이 친미적인 팔레비 왕 퇴위 이후 아야톨라 호메이니에 의해 세워진 이란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목격하고 있다시피 오늘날 중동의 현실은 회교민족주의가 평화와 통일의 시대를 열어가지 못하고 폭력과 테러, 전쟁이 난무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실정을 두고 새로운 냉전이 또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저서명에서 의문부호를 찍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마르크교수는 「동방주의(Orientalism)」을 쓴 사이드(Edward Said)교수와 마찬가지로, 윌버(Ken Wilberry) 교수가 지적한 21C 신종교의 범재신관(汎在神觀, pan - en - theism)의 시대를 맞이하여 일신관(一神論, monotheism)의 수준을 벗어나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범재신관에 대해서는 김상일교수가 일찍이 화이트헤드(White head) 교수의 신철학, 신사상의 신서학을 수운(水雲, 최제우)의 동학사상과 비교하여 범재신관에 기초한 미래종교로서 동학사상에 기초한 민족종교(천도교)에서 21C 새천년의 미래를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동학․천도교의 세계사적 의의를 지적한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제3천년의 문명은 한반도에서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를 통섭(consilience)한 신인합일의 인내천주의(人乃天主義)에서 새천년(new millenium)의 문명을 찾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인내천이념을 한국민족주의(Koreanism=Korean+Nationalism)로 하여 21C로부터 시작하는 세속국가의 정치이념으로 내걸어 통일과 평화의 시대로 나아갈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반도가 동․서문명이 부딪치는 질곡과 시련의 지역이기도 하지만 그 모진 인고의 세월을 극복할 때는 희랍문명과 로마문명이 반도에서 발전하여 꽃을 피웠듯이 천년의 정신문명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분단민족인 한반도에서 남북이 통일을 이룩함으로써 그 여력으로 동북아시대를 열어 고조선의 강역을 수복해가면서 세계일가 건설에 견인차 역할을 할 때가 도래한 것이다.

달마대사(達磨大師)는 혜가(惠可)에게 인과응보(因果應報)를 두고, 인과는 불락(不落)에 잊지 않고 불매(不昧)를 깨닫는데 있다고 하였다. 인과는 불락이 아니라 불매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 대각(大覺)하여 더욱 지행일치(知行一致),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삶에 노력하여 선종의 초대 교조 달마를 이어 역사에 길이 남는 2대 교조가 된 것이다.
우리도 고조선연구회의 연구의 열정으로 홍범구주의 대륙사관을 정립하여 민족 평화통일에 더욱 증진해가야 하겠다. 인과불매(因果不昧)의 자세로 진력해가다 보면 남북통일은 어느 날 큰바위의 얼굴처럼 우리들 앞에 성큼 다가설 것으로 믿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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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기자가 문왕의 동생인 주공에게 가르켜준 것이 홍범구주인데, 이 안에 오행이 다 들어 있다. 동•서•남•북•중 이 삼라만상을 다 포함하듯 문화•사상 등 모두를 아우르고 있는 것이 홍범구주이다. 「상서(尙書)」를 연구하다보면 주역의 뿌리가 환역(桓易)인 것을 알 수 있다. 원저의 뿌리를 숨기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홍범구주는 삶의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정치•경제•사회•정신문화 등 너무나 방대한 우리 생활의 모든 것을 정리한 것으로 상수학(象數學)으로 설명한 것이 주역이다. 64괘(卦)를 3효(爻)로 해석한 것이다. 간단히 설명하기 힘들다. 하늘과 땅이 얼마나 넓은가?
10) 천부경은 천부3인(거울, 방울, 칼)을 원•방•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개천할 때 하늘의 뜻을 그대로 실천해야겠는데 환웅(천황, 하늘)에 이어 2세 환웅이 신지혁득에게 명령하여 사슴발자국을 보고 녹도문을 만들었다. 문자세계의 처음이다. 최정음으로 가림토정음, 훈민정음 등 41자 녹도문 천부경을 두고 81자 천부경을 다시 썼다. 우주의 진리가 다 들어 있다.
11) 계연수 엮음, 고도영 옮김 『환단고기』(뿌리, 2006). p. 162.
12) 숙신은 뒤에 읍루(挹婁), 물길(勿吉: 끝없이 길한 것)이 되었다.
13) 정경희(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교수), “한국선도의 ‘3원5행론’”, 한국동•서철학회논문집『동서철학연구⑧』제48호, 2008. 6.
14) 朴堤上 저, 金殷洙 편, 『符都誌(金時習의 澄心錄追記)』(가나출판사: 1986) 참고.
15) 하나(一)가 쌓여 十으로 커지지만 三(천•지•인)차원으로 환원될 뿐이다.
16) 하늘이 둘을 얻어 셋이 되고, 땅이 둘을 얻어 셋이 되며, 사람이 둘을 얻어 셋이 된다. 하늘도 천•지•인 세차원을 가지고 있고, 땅도 사람도 모두 그러하여 전체 존재계는 모두 9개 차원을 갖는다.
17) 정경희, 상게서,(표1) 『천부경』의 一•三•九論.
18) 정경희, 전게서,(표2) 『삼일신고』의 一•三•九論.
19) 마고성의 人祖들은 地乳를 섭취함으로써 스스로 天(정보•無•空)•人(氣에너지)•地(질료) 3원의 조화로운 상태를 유지하였는데, 그중 일부가 지유가 아닌 포도의 5味를 맛보면서 3원의 조화상태가 깨어지게 되었고(‛오미의 화’), 이에 마고성에서 출성(出城)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박제상 편, 김은수 역 『부도지』(문화, 2000). p.33.
20)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징심록추기(澄心錄追記)」에서 金尺을 곧 한국선도의‘삼원오행론’적 원리를 상징화하여 만든 것이라 했다. 또 금척의 형상이 머리에는 불구슬을 물고 四節五寸의 형상이라는 설명을 통하여 불구슬(火)이 五寸중에서도 머리마디(寸)가 되어 수직방향으로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水•火가 火를 머리로 한 수직의 방향이라면 나머지 氣•土는 자연스럽게 수평방향이 된다.
21) 공자는 율려에 의해 예를 가르쳤다. 원래는 율려에 의한 태극이 3원태극이다. 송나라이후 율려가 음양의 양태극이 된다.
22) 여기서 음양오행설과 주역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음양 5행설: 우주가 인간의 모든 현상을 음•양 두 원리의 소장(消長)으로 설명하는 음양설과 이 영향을 받아 만물의 생성소멸(生成消滅)을 木, 火, 土, 金, 水의 변전(變轉)으로 설명하는 오행설을 함께 묶어 이르는 말.
五行은 「尙書」의 홍범구주편(洪範九疇篇)에 나오는 것으로 이용후생을 위해 그 성질과 규율을 나타내는 것이다.
오행상생(五行相生): 목생화, 화생토, 토생금, 금생수, 수생목 / 오행상극(五行相剋): 목극토, 토극수, 수극화, 화극금, 금극목
오행표를 참고하길 바란다. (동아출판사, 세계대백과사전 제21권, p.400) 음양가들은 남녀가 상생으로 화합하면 행복하고, 상극으로 만나면 재화(災禍)가 있다고 한다.
*주역: 왕필(王弼)은 복희씨(伏羲氏)가 황하강(黃河)에서 나온 용마(龍馬)의 등에 있는 도형(圖形)을 보고 계시(啓示)를 얻어 천문지리를 살피고 만물의 변화를 고찰하여 처음 팔괘를 만들고, 이것을 더 발전시켜 64괘를 만들었다고 한다. 사마천(司馬遷)은 복희씨가 8괘를 만들고 이것을 더 발전시켜 만들었다고 하였으며 또 십익(十翼)은 공자가 만들었다고 한다. *역(易)은 양과 음의 이원론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사물과 현상들(천지만물)을 하늘과 땅, 해와 달, 강과 약, 고 저 등을 음양으로 구분하고 그 위치나 상태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이 주역의 원리다. 이 원칙을 인간사에 적용하여 비교•연구하면서 풀이한 것이 주역이다. 한편 공자는 주역을 깊이 연구하여 그 원 글을 해석하고 이치를 밝힌 10익을 저술하였다. 십익이란 새의 날개처럼 돕는 열가지라는 뜻이니, 즉 단전(彖傳) 상•하편, 상전(象傳) 상•하편, 계사전(繫辭傳) 상•하편, 문언전(文言傳), 설괘전(說卦傳), 서괘전(序卦傳), 잡괘전(雜卦傳)이 그것이다. 이 주역을 우리의 전통적인 역으로 나온 것이 김일부의 정역(正易)이다. 주역을 규범적 연구에서 상수학의 과학이론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주역은 유교의 경전 중에서도 특히 우주철학을 논하고 있어 우리나라를 비롯한 일본, 베트남 등의 유가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운명을 점치는 점복술의 원전으로 깊이 뿌리박혀 있다.
23) 여기서 환력의 삼태극(三元太極) 설명을 위해 삼재론에 대해서도 소개해보도록 하자.
*삼재(三才): 조선 고대의 사상에서 天•地•人을 가리키는 우주의 근원을 뜻하는 말. 역(易)의 계사전(繫辭傳)에 괘(卦)에 6개의 효(爻)가 있는 이유를 설명하여 天道가 있고, 地道가 있고, 人道가 있으며 三才를 겸하여 이를 둘로 한다. 그래서 6이라 하고 있다. 동양사상의 특징으로서 인간은 천지자연과 대립해서 이를 정복하는 존재로 생각할 수는 없다. 인간은 자연에 순응해야 하는 존재, 또한 스스로 만물을 기르는 천지의 작용에 참가해야 하는 존재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발견할 수 있다. 천지의 움직임은 무한한 조화와 목적이 있는 법칙성을 포함하고 있거니와, 그것은 인간의 세계에도 공통되는 것이다. 삼재는 이와 같은 철학을 언외(言外)에 품고 있는 개념이다. 삼재를 삼극(三極), 삼태극(三太極), 삼원태극(三元太極))이라고도 한다.
天•地•人 삼재에 걸쳐 사물을 설명하고 있다. 천문, 지리, 인물, 시령(時令), 궁실(宮室), 기용(器用), 진보(珍寶), 문사(文史), 조수(鳥獸), 초목(草木)의 14부분으로 분류하였으며 그 중에는 황당무계한 것도 포함되어 있다.
어떤 것은 석경(釋經)에 주력하여 의리(義理)에서 앞섰으며, 어떤 것은 기사(記事)에 주력하여 사학(史學)적 가치가 높다. 동아출판사, 『동아세계대백과사전』제16권, p.274.
25) 朴堤上 저, 金殷洙 편, 「符都誌」 (附 金時習의 澄心錄追記)(가나출판사, 1986), p.57.
26) 동아출판사, 『동아세계대백과사전』
27) 김경일 저, 『사서삼경(四書三經)』의 「서경(書經)」(바다출판사: 2006), pp. 350~354.
28) Wilkinson, The Corean Government Constitutional July 1894 to October, 1895. 천관우, “갑오경장과 근대화” (사상계, 1954)
29) Mark Juergensmeyer, The New Cold War?: Religious Nationalism Confronts the Secular State,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 pp. 2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