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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30일 토요일

<리기선후>, 진래, 이종란 외 옮김, 주희의 철학, 예문서원, 2002.

리기선후 / 주희의 철학 - 진래 致知
2008/07/13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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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래, 이종란 외 옮김, <리기선후>, <<주희의 철학>>, 예문서원, 2002.
리기선후
p. 28
19세에 진사가 되어 71세로 죽을 때까지, 주희는 리기선후를 포함하여 자신의 사상을 끊임없이 변화시키고 발전시켜 왔다... 주희가 리기 관계를 논할 때 종종 다른 문제, 다른 각도에서 출발하였다... 주희 학설의 이러한 객관적 정황을 고려해 볼 때, 주희의 사상을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시(역사적 변화)·공(다양한 단계와 다양한 각도)의 방법을 모두 동원하여 고찰하는 것이 필수적임을 알 수 있다.



1. <<태극해의>>에 나타난 리기 관계
p.30
진정한 의미의 본체론에서 리기 관계를 처음 밝힌 것은 <<태극해의>>이다... <<태극해의>>의 초고는 건도 경인년(1170) 주희 나이 41세 때에 씌여졌고... 계사년(1173)에 기본적인 원고가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태극해의>>는 주희가 주돈이의 <태극도>와 <태극도설>을 자세히 해석한 것이다. ... 
p.31
주희는 <<태극도설해>>에서 태극을 '형이상의 도'요, '동정음양의 리'라고 하였는데, 이는 그가 리로써 태극의 의미를 명확하게 규정하기 시작하였음을 말해준다. ...
p.32
주희는 태극을 리로, 음양을 기로 삼았기 때문에 리기 관계의 문제를 야기하였다... <<태극해의>>에 나타난 주요 사상은 체용이라는 각도에 따라 리기 관계를 이해한 본체론이다.
주희는 <태극도해>에서... 리는 본체이며 음양동정과 존재의 근거이고, 기의 동정은 리의 외재화 과정이요 표현임... 리는 기 속에 있으면서 기와 떨어질 수 없으나, 서로 섞일 수도 없는 본체인 것이다... '태극은 본체이고, 동정은 작용'... <<태극해의>>를 완성할 때에 이 구절을 수정하였으나, 태극이 본체라는 생각은 바꾸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주희가 당시 체용의 관점에서 태극과 음양동정의 관계를 해석하는 데 주된 관심을 보였음을 말해준다. 이는 실제로 위진 이래 중국 철학 및 불교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p.33
차지하던 유심주의 본체론의 관점이기도 하다.
철학의 기본 문제는 무엇이 제1성질인지를 해결하는 것이지,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나중이라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근본이고 무엇이 어떤 것의 형식을 결정하느냐로 제1성질과 제2성질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본체론'의 특징이다. ...
본체가 태극이고 음양동정은 리가 그것을 빌려서 표현하는 외재 과정이라는 말이다. 리와 기 모두 시간적으로 시작과 끝이 없고, 시종 섞이지도 분리되지도 않는다. 주희의 이 사상은 정이의 '체용일원'과 '음양무시'의 개념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이다... 상술한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주희는 리와 기 사이에는 선후가 없다고 보았다. ...
p.34
근거와 현상 세계는 체와 용, 본연지묘와 소승지기
p.35
의 관계이지, 결코 둘 사이에 선후 관계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
당시에 주희가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인성론과 본체론의 결합에 관한 문제였다. ...
주희가 <<태극해의>>에서 해결하고자 한 문제는 인성의 본체론적 기원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태극해의>>에서 음양동정의 유행 과정 속에서 태극과 음양은 '서로 떨어질 수도 섞일 수도 없음'을 밝혔다. 즉 음양의 기가 구체 사물을 구성한 후에도 태극은 여전히 음양 속에서 변화를 겪으며 사람과 사물의 성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무극의 眞(理)과 음양오행의 精(氣)이 결합하여 이루어지지 않은 사물이 없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인성이라는 말에는 위로부터 품부받은 천지의 理(太極)라는 뜻뿐만 아니라, 태극의 혼연한 전체가 보편적으로 모든 사물에 존재한다는 뜻이 동시에 담겨 있다. 이는 주희가 '성즉리'를 본체론적으로 새롭게 논증한 것이다.
p.36
이상에서 본 것처럼 이 시기 주희의 사상은 이른바 '리본체론'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으며, 이 설에 입각하여 리기선후 문제를 고찰할 때에만 리와 기에는 선후가 없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주희의 학설을 이원론으로 볼 수는 없으며, 유물론이라고 하는 것은 더더구나 적합하지 않다.
P案.. 주희 40대 초반의 이기에 관한 학설은 '리본체론'으로서, 리본체론이라 함은 리를 제1성,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것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리는 본체이며 기의 동정은 리의 외재화 과정이며, 이것은 리를 체로 기를 리의 용으로 파악한 것이다.
리와 기가 떨어져 있을 수 없다는 정리로부터 사람에게도 리가 부여되어 있다는 '성즉리'설이 합리화된다.
2. 태극에 대한 논변
p.40
순희 15년 무신년(1188), 당시 59세였던 주희는 나라의 명을 받고 5월말쯤 대궐에 들어갔다가 6월 중순에 수도 임안을 떠나 강서 옥산으로 돌아왔는데, 이 때 육구연의 편지를 받았다. ...
p.42
음양이 형이상에 속하느냐 아니면 형이하에 속하는냐 하는 문제를 놓고 음양을 다르게 이해한 데서 육구연과 주희의 주장이 갈린다. 육구연은 모든 대립 성질의 범주와 추상을 개괄하여 형이상의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주희는 정이의 설에 입각하여 '일음일양'
p.43
을 음양의 기가 한번 가고 한번 오는 것으로 이해하고, '일음일양지위도'와 '형이상자위지도, 형이하자위지기'를 대응시킴으로써 음양을 기로 보는 리기 철학을 형성하였다.  ...
육구연과 더불어 태극을 논하는 때에 이르러서는 태극이 음양 중에서 작용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음양의 밖에도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주희가 말한 무극이 곧 태극이요 태극에는 리가 있다. 리는 사물이 없던 때에도 존재하였고 사물이 생긴 후에도 있지 않은 적이
p.44
없으며, 음양의 밖에 있으면서 음양 중에서 행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 이것은 주희 자신이 리기선후설로써 주돈이를 해석한 것이다"(<<송원학안>> 권20)라고 한 황종희의 말 그대로이다. 주희의 이러한 사상이 바로 "리가 기에 앞서 있다"(理在氣先)는 것이다. ...
리가 기에 앞선다는 사상을 형성하게 된 시기를 논하려면... <<역하계몽>>을 반드시 살피고 넘어가야 한다. 순희 13년 병오년(1186), 주희 나이 57세 때에 완성된 <<역학계몽>>은 초학자들을 대상으로 주역상수를 설명한 책이다. ...
p.45
주희는 소옹의 加一倍法적 筮法說을 보충하여 흡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해석상에 있어서도 <태극도설>을 통일적으로 파악하고자 하였다. 즉 "상수가 형성되기 전에 리는 이미 갖추어져 있다", "양의가 나뉘기 전에 태극은 혼연히 존재해 있었고, 양의·사상·육십사괘의 이치가 이미 그 속에서 밝게 빛나고 있었다", "태극에서 양의가 나뉘어졌다" 등과 같이 상수 형식으로 표현된 말과, "사물이 생기기 전이나 생긴 후에도 있지 않음이 없었다", "음양의 밖에도 있고, 음양의 속에도 없었던 적이 없다", "도는 처음이 없는 것으로서 실제로는 만물의 근거가 된다"는 말은 사상적
p.46
으로 완전히 일치한다. 이렇게 주희의 상수 이론은 천지·음양·태극의 운행과 변화의 과정을 동시에 반영하고 있다. ...
p.47
상수 역학 사상은 철학 중에서도 우주발생론에 속한다. 소옹이 "괘를 그리기 전에 원래 역이 있었다"고 한 말은 천지 만물이 있기 이전에 이미 우주 원리가 존재해 있었고 태극으로부터 일체 사물이 생겨났다는 것을 뜻한다. "리가 기에 앞서 있다"는 주희 사상은 초년의 '본체론' 사상을 바탕으로 상수학의 우주론을 수용하여 한층 발전시킨 것으로 역학의 상수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만년에 이르러 주희는 다시 논리적으로 리가 기에 앞선다는 선재설을 언급함으로써 우주론의 여러 가지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피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주희가 죽고 난 후에 그의 문인들은 리기선후 사상에 모호한 점이 많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P案.. 주희 50대후반 60대초반의 이기론은, 육구연과의 태극논변과 상수역학의 영향으로 형성되었다. 육구연과의 논변을 통하여 리가 기에 앞선다는 리선기후설을 제창하였으며, 상수역학을 통해 리가 기를 낳는다는 생성론, 발생론적 입장을 취하게 된다. 이 시기의 리선기후란 리로부터 일체 사물이 생겨났다는 것을 뜻한다.
3. 리선기후
p.49
주희의 사상에 입각하여 본질상에서 말하면 태극이 천지에 앞서 있으며, 현존하는 세계의 측면에서 말하면 태극은 천지 만물 가운데 있다. ...
p.52
리기에 선후가 있는가 하는 문제는 본원론인가 구성론인가에 따라 각기 다른 해답을 갖게 된다. ...
p.53
본원상에서 주희는 '리가 기에 앞서 있음'을 말하였다. 그러나 그는 구성상으로는 리가 기에 앞서 있다고 하지 않고 '리기에는 선후가 없다'고 강조하였다. 만약 본원에 대한 논의를 구성에 대한 논의로 보고, 또 반대로 구성에 대한 논의를 본원에 대한 논의로 보면서 주희 철학을 시종일관 '리기무선후의 이원론'이라고 단정지어 말한다면 주희 사상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틀림없이 혼란에 빠지게 되고 만다. ...
p.54
구성상으로는 리기가 한 곳에 있으므로 나뉠 수 없지만, 리가 제1성이라는 각도에서는 '리가 기에 앞서 있다', '리가 사물에 앞서 있다'고 설명된다. ...
p.55
이상의 서술은 주희의 '리선기후' 사상이 한 시기에 크게 발전하였음을 보인 것이다. 초년의 본체론에서 나중에 우주론을 흡수하는 데 이른 것은 이론 사유 면에서 진일보한 것이다. 또 모든 철학적 문제와 마찬가지로 이론상으로 '리가 기에 선재한다'는 견해를 내는 데는 인식적 기초가 요구되는데, 그것은 일정한 철학 문제 처리에 대한 결과이며 이 문제는 리기 관계 속에 포함된 일반과 개별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떤 한 종류의 사물의 '리'는 그 사물의 보편적 본질 또는 법칙이 되는데, 그 리는 한 종류 사물 가운데 어떤 하나의 개별 사물이 사사로이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며 개별 사물의 발생과 소멸로 인해 전이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이미 있었던 한 종류의 사물의 리를 그런 종류 가운데 나중에 만들어진 사물에 대해 '리선물후'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법칙이 일반성을 가
p.56
지고 있다는 것을 표명한 것이다.
P案.. 발생론적 입장의 리선기후설에서도, 본원상에서 논하는 것인가 구성상에서 논하는 것인가를 구별해야 한다. 본원상에서는 발생론적 입장을 견지하므로 당연 리선기후이며, 구성상에서 논할 때는 리기가 나뉠 수 없으므로 리기무선후라고 말해야 한다.
4. 만년정론
p.57
'리의 선재를 미루어 말하는 방식'은... 주희 만년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p.58
주희의 이런 설명을 살펴보면 첫째, 리와 기는 실제상에서는 선후를 말할 수 없다. 둘째, 논리적으로 추론하여 올라가거나 그 소종래를 추론하면 리가 기에 선재한다고 할 수 있다... 풍우란은 그의 저서 <<중국철학사>>에서 이런 사상을 개괄하여 '논리적 선재'라고 하였는데 적합한 표현이다. 여기서 말하는 논리란 흔히 말하는 형식 논리가 아니라 이론상의 관계를 넓은 의미로 가리킨 것이다. 이미 실제적으로 리와 기에 선후가 없는데 어떤 것이 논리적으로 그것들의 선후를 관계짓는가? ...
리가 기에 선재한다는 것은 오늘이나 내일 같은 시간적 선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철학상에서 어떤 것이 제1성이 됨을 가리킨다. 주희는 그의 논리를 풀어서 말하기를 "만일 산하 대지가 모두 무
p.59
너져도 결국 리는 그 속에 있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설령 일체의 물질이 모두 소멸된다 해도 리는 변함없이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즉 기는 생멸할 수 있으나 리는 형이상의 것으로서 생멸이 없다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말하면, 리는 물질이 소멸하는 데 따라 함께 소멸하는 것이 아니며, 마땅히 물질이 아직 생산되지 않았을 때도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질이 소멸하고 산하 대지가 모두 무너진다는 데서 '만일'이란 논리적 가설일 뿐이라는 것이다. 주희는 물질이 소멸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인정하였지만 실제로 물질이 철저하게 소멸된다고 인식한 것은 아니었다. ...
초년기에는 주희가 리선기후설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동정무단', '음양무시'와 모순되지 않았다. 그러나 후에 "리가 기에 선재한다"고 주장하면서부터 '동정무단', '음양무시'와 논리적으로 충돌하게 되었다. ...
p.60
리가 기에 앞서 있다는 설과 음양무시의 개념이 모순이라는 것을 의식하였던 것... 이는 주희가 만년에 이르러 논리적 선재설로 향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주희는 리와 기에 시간적인 선후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양자간에 오늘이나 내일과 같은 시간적 개념과는 구별되는 선후를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예를 들어 "역시 선후가 있다", "요약하면 역시 먼저 리가 있다" 등과 같은 말은 시간적인 선후 관계를 나타낸 것이 아니다. 즉 이 둘 사이에 시간적인 선후는 없지만 그 지위가 나란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른바 선후가 있어야 한다는 말은 양자간에 선차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의 차별을 두기 위하여 한 말이다. 이로써 볼 때 논리적 선재설은 리로써 제1성을 삼은 정치한 유심주의적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p.62
"그 생기는 것을 논하면 함께 생기는 것이고 태극은 음양 속에서 그대로 존재한다. 단지 그 순서를 말하면 오직 실제의 리가 있어야 비로소 음양이 있다"고 한 데서의 '단지 그 순서를 말하자면'이라는 말은 이론상·논리상으로 말한 것이지 결코 사실상의 순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 ...
P案.. 주희의 만년정론 역시 본원상에서 논할 때와 구성상에서 논할 때를 구분하여야 한다. 본원상에서 논할 때는 '리선기후'이다. 그런데 이 리선기후는 발생론적 리선기후, 즉 리에서 만물이 파생한다는 의미는 리선기후가 아니다. 이것은 리가 선차적인 것이며, 본질적인 것이며, 제1성이라는 의미의 리선기후이다. 따라서 이 때의 선후는 시간적 선후가 아니라 지위가 동등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주희 40대의 리본체론적 입장을 다시 견지하는 데 이르게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구성상에서는 뭐.. 리기무선후이다.

횡적으로 볼 때 주희의 리기에 대해서는 선후로 토론할 것이 아니라 본원과 구성의 두 문제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 ...
p.63
종적으로 볼 때 주희의 리기선후 사상은 일대의 발전 과정을 거쳤다. 초년기에 주희는 리가 근본이라는 논의에서 출발하여 리기무선후를 주장하였다. 리가 기에 선재한다는 사상은 남강에 머문 후 진량과의 논변을 거쳐 육구연과의 태극 논변에 이르게 되면서 차츰 형성되어 갔다. 리가 기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 그 때의 '리선기후' 사상의 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주희 만년의 정론은 논리적 선재설이며 논리적 선재설은 다시 높은 수준의 본체론으로 돌아오는 사상이었으므로, 이것은 곧 부정의 부정이다... 그것은 본질상 리의 기에 대한 제일성의 지위를 다른 형식으로 확인한 것이었다.

성性-북송의 성설性說

성性-북송의 성설性說 致知
2010/07/23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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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마 쓰요시 지음, 신현승 옮김, <2. 성性- 1.북송北宋의 성설性說>, <<송학의 형성과 전개>>, 논형, 2004.

p.96
육구연은 생애의 대부분을 고향인 무주撫州에서 보냈다. 무주에서는 육구연보다 백 년 정도 이전에 북송을 대표하는 사상가를 배출하였는데, 그가 왕안석이다. 남송에 이르러 도학파를 중심으로 왕안석 비판의 풍조가 높아지고는 있었지만, 왕안석은 의연하게 문묘에 종사되었다. 그 존재가 얼마나 컸음을 느끼게 했던가는 왕안석 비판자인 주희가 <<주자어류朱子語類>> 속에서 빈번하게 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사실로부터도 역설적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또한 육구연에게 <형국왕문공사당기荊國王文公祠堂記>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다.(<<象山先生全集>> 권19) 이 문장이 쓰여진 것은 주희와 논쟁을 전개하고 있는 순희淳熙 15년(1188)의 일이었고, 그 문말文末의 표기는 <방인육모기邦人陸某記>로 되어있다.
육구연의 왕안석에 대한 평가는 호안국이나 주희에 비교해보면 상당히 부드러운 편이다. 그는 왕안석에 대해서 인격에 관련된 공격은 전혀 하지 않았다. 왕안석의 개혁의 잘못은 정치의 요체를 법으로 추구했다는 점에 있었다.
정치를 하는 것은 사람이고, 사람을 등용하는 것은 몸(身)에 의한다. 그 몸을 수양하는 것은 도道에 의하고, 도를 수양하는 것은 인仁에 의한
p.97
다. 인이란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은 정치의 근본이고 몸은 사람의 근본이며 마음은 몸의 근본이다. 근본을 정확히 하지 않고 말末에만 구애되어서는 말末조차 다스릴 수가 없게 된다.
마음을 핵심의 자리에 고정시킨 평소의 지론이 설명되고 있다. 순희 2년(1175)의 <경재기敬齋記>는 "옛날의 사람이 그 몸을 가家·국國·천하天下로 정확히 미치게 하였던 것은 그 본래의 마음(本心)을 잃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시작된다. 천자千字에 조금 못미치는 짧은 문장 속에 '심心'이라는 글자가 열세 번 등장하고 확실히 '심학'의 선언문의 취지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연보 13세 때의 조문에는 '우주야말로 내 마음, 내 마음이야말로 우주'라고 말한 것이 보이고, 육구연에게 있어서의 마음의 문제가 유소년기 때에 이미 깨달음의 단계에 도달한 것 같이 묘사를 하고 있다. 육구연은 마음의 학문(心學)이라고 하는 평가는 이미 일찍부터 정해져 있었다. 왕수인이 '성인의 학문은 심학이다'라고 해서 육구연을 재평가하고 스스로 그 계보를 이어 받은 자로서 자임했던 것도 뚜렷한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심학'의 대극에 위치한 '성리학性理學'자 주희도 심이라는 용어에 유달리 주의를 기울인 사상가였다. 단지 주희의 경우에는 장재張載의 '심心은 성性과 정情을 통합한 것'이라는 규정에 전면적으로 의거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의 문제는 항상 성이나 정의 구별을 둘러싼 의론과 불가분의 관계였다. 바로 그것이 일반적으로 심성론心性論이라고 일컬어지는 이유이다. 그리고 맹자의 성선설에도 전면적으로 의거하기 때문에 선善으로서의 성性이 어째서 그대로 발현되지 않고 이 세상에 악惡을 초래하는가라는 악의 기원을 논하는 것이 심성론에 요구되었다. 하지만 맹자의 성선설은 송대 이전에 결코 정론이었던 것은
p.98
아니다.




북송에서 맹자를 세상에 널리 알린 제일인자는 왕안석이었다. 그에게는 <원성原性>이라는 제목의 문장이 있는데(<<臨川先生文集>> 권68), 어떤 사람이 맹자孟子·순자荀子·양웅楊雄·한유韓愈의 성설이 서로 다른 이유를 질문하다고 하는 상정으로 시작되고 있다. 그 제명 및 그 첫머리부터가 한유의 동명同名의 문장(<<韓昌黎문집>> 권1)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한유는 맹자의 성선설, 순자의 성악설, 양웅의 선악이 뒤섞인 성설을 열거하고 자신의 견해로서 성삼품설性三品說을 제창하였다. 한유의 이 문장이나 <원도原道> 말미의 기슬에 의해 ... 북송에서는 공자의 뒤를 계승하는 대학자로서 이 네 사람의 이름을 내세우는 것이 통례였다. 왕안석의 <원성>에서도 질문자는 이 네 사람은 모두 '옛날에 도道를 갖추고 있던 어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주장이 다른 것은 어떠한 이유였을까라는 형태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것에 대해 왕안석은 자신이 의거하는 것은 공자의 주장뿐이라고 대답한 뒤, 네 사람의 주장에 각각 비판을 덧붙여 간다. 먼저 한유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오상五常을 성 그 자체로 간주하고 있는 점에서 잘못되어 있다. 성이란 이러한 오상의 '태극太極', 즉 근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고 오상과는 구별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음으로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을 한 쌍의 것으로서 받아들이고 어느 쪽이나 모두 선인가 악인가라는 성격규정을 성에 대해서 행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한다. 선악이 문제가 되는 것은 정의 위상 문제에 달려있는 것이고, 성 그 자체에는 선악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情 또는 습習의 위상을 성으로서 논하고 있다. 양웅의 주장도 성이 아니라 습에 관한 논의를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p.99
다. 그리고 공자가 "본성(性)은 서로 가까운 것이지만, 습관(習)이 서로를 멀어지게 한다"(<<論語>> 陽貨)라고 서술한 것이야말로 자신의 견해라고 한다. 즉 성에는 선험적인 시비是非나 선천적인 차이는 보이지 않고 그것들이 문제가 되는 것은 성이 원인이 되어 구체적인 형태로서 발현한 상태·단계라고 하는 것이다.
<성설性說>(<<臨川先生文集>> 권68)은 <원성>의 속편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의 내용을 갖추고, 공자의 위의 말과 상지上智·중인中人·하우下愚라고 하는 인간 유형과의 관계를 논하고 있다. 한유가 제시했던 바와 같은 성삼품설이란 결국 습관에 의해 나누어진 것이고, 하우라고 하더라도 선인善人이 될 소질은 갖추고 있는 것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성은 누구라고 선하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양맹楊孟>(<<臨川先生文集>> 권64)에서는 맹자와 양웅의 서로 다른 점을 개념의 내용규정이 서로 빗나가 있는 점에서 찾고 있다
맹자가 말하는 성이란 올바른 본성만을 가리키고 있다. 양웅이 말하는 성은 본성의 올바르지 않은 부분을 합쳐서 가리키고 있다. 양웅이 말하는 명命은 올바른 명만을 가리키고 있다. 맹자가 말하는 명은 명의 올바르지 않은 부분을 합쳐서 가리키고 있다. ... 지금의 학자들은 맹자 측에 가담해 있으면 양웅을 비판하고 양웅 측에 가담해 있으면 맹자를 비판한다. 그것은 문자의 표면만을 이해한 것뿐이고 거기에서 지시하는 내용을 이해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은 성이나 명의 도리道理를 분별하고 있다고 스스로 일컫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성정性情>(<<臨川先生文集>> 권67)에서도 세간에서 통설로 되어 있는 '성은 선하고 정은 악하다'고 하는 사고방식을 비판하고, 그것이 맹
p.100
자의 문장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에서 유래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맹자의 성선설이란 성이 무조건 언제나 선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에는 악으로 향하는 요소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고, 그렇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양웅도 사람의 성에는 선과 악이 뒤섞여 있다고 설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왕안석은 맹자의 주장을 기본적으로는 시인하고 그 자신의 해석에 맞추어서 양웅을 증거로 인용하는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결국 그의 견해에 의하면 맹자나 양웅도 말하려고 했던 것은 동일한 것이고, 그것은 공자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한다-결국은 왕안석 자신의 견해와도 일치한다. 다만 그 설명방법에 약간의 문제가 있어 정이라고 해야 할 것을 성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이해에 혼란을 초래하였다고 파악하는 방법이다.
북송에는 사마광에 의해 대표되는 맹자 비판세력이 존재하였다. 사마광에 의하면 공자의 교설은 명名을 바로잡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고 맹자는 그 가르침으로부터 이탈해 있다는 것이다. 그의 저서 <의맹疑孟>(<<增廣司馬溫公全集>> 권101) 속에서 사마광은 맹자의 고자告子에 대한 반론을 다시금 논박하고 있다. 고자가 물의 흐름에 비유하여 성에 본래는 선악이 없다는 것을 논한 것에 관해 그 비유는 중인中人에 관해서만 들어맞는 것뿐이고, 한편으로는 확실히 타고난 선인이 있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교도敎導할 방법이 없는 악인도 있으며, 맹자가 말하는 바와 같이 누구에게도 성선性善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마광은 기본적으로는 성삼품설을 주장하였다. 또한 소식은 <맹자변孟子辯>에서 성 그 자체에 선악은 없다고 서술하고 맹자의 주장을 비판하였다. 덧붙여 왕안석과 마찬가지로 <<주례>>에 근거하여 정치의 실현을 구상한 이구는 <상어常語>에서 맹자가 춘추오패春秋五覇*의 업적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이 있는데,
(* 춘추오패: 중국 춘추시대에 가장 강대하여 한때의 패업을 이룬 다섯 사람의 제후. 곧 제 환공·진 문공·진 목공·송 양공·초 장왕, 또는 진 목공·송 양공 대신에 오 부차·월 구천을 넣기도 한다.)
p.101
그것은 공자의 의도에 반한다고 비난하고 있다(여윤문余允文의 <<존맹변尊孟辯>>에 의거함).
그 중에서 왕안석은 맹자의 옹호파이고, 그는 맹자의 성선설을 완벽하다고는 말하지 않더라도 기본적으로는 수긍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에서의 맹자 성선설의 현창顯彰은 정호·정이에서 시작되는 도학계 학자들의 것과 공통의 기반 위에 서 있는 것이었다.
왕안석은 개혁의 일환으로서 과거의 시험과목을 변경하여 당대唐代 이래로 중시되어 오던 시부詩賦를 시험과목에서 제외하고, 그 대신에 책策(시사문제에 관한 대책)과 논論(역사 비평)을 중시하였다. 경학에 관해서는 경문·주석의 암기가 아니라 내용의 이해를 묻고 그 자신이 '단란조보斷爛朝報'**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했다고 하는 <<춘추>>를 빼버리고, 그 대신에 <<주례>>를 넣은 오경五經을 '본경本經'이라고 부르고 이 중에서 선택하게 한 것 이외에, '겸경兼經'이라는 명칭 하에 <<논어>>와 <<맹자>>를 모두 과거의 필수과목으로 삼았다. 결국 <<맹자>>는 이러한 계기를 시작으로 하여 경서로서의 취급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과거시험의 개혁에 관해서는 도학계의 인사들도 <<주례>>를 <<춘추>>로 돌려버렸다는 것 이외에는 왕안석의 개혁을 기본적으로는 답습하였다. 이러한 신학 및 도학의 맹자 현창에 의해, 예를 들면 남송 말 진진손陳振孫의 <<직재서록해제直齋書錄解題>>에서 <<맹자>>는 자子가 아니라 경經으로 분류되고 <경록經錄>에 <어맹류語孟類>로서 <<논어>>와 병칭되기에 이른다.
(**단란조보: 여러 조각이 난 조정의 기록이란 뜻. 왕안석이 <<춘추>>를 헐뜯으며 한 말. 왕안석은 처음에 스스로 춘추를 주해하여 천하에 펴려고 했으나, 이미 손신로孫莘老의 <<춘추경해春秋經解>>가 나왔고, 그와 견줄 수가 없음을 깨닫고 마침내 춘추를 헐뜯어 이를 폐하고, '이것은 단란조보'라고 한 고사.)
이보다 먼저 경덕景德 2년(1005)에 칙명에 의한 사업으로서 당의 <<오경정의五經正義>>를 증보하는 형태로 소疏가 간행되었는데, 그것은 전부 열두 개의 경서로 이루어져 있었다-경학상 엄밀하게 말하면 춘추삼전은 철저하게 전이고 경은 아니지만, 여기에서는 다른 것과 똑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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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서라고 부르기로 한다. 즉 <<오경정의>>의 다섯 가지 서적-<<주역>>, <<상서>>, <<시경>>, <<예기>>, <<춘추좌씨전>>-과 <<주례>>, <<의례>>,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 <<효경>>, <<논어>>, <<이아爾雅>>이다. 여기에 <<맹자>>가 덧붙여지면 오늘날 우리들이 통상적으로 불러서 익숙해져 있는 <<십상경주소十三經注疏>>가 갖추어지는 것이지만, 이 시점에서 <<맹자>>는 아직 경서라고 간주되고 있지는 않았다. <<심상경주소>>에 들어 있는 <<맹자>>의 소疏는 경덕의 사업에 참가한 학자의 한 사람인 손석孫奭의 이름을 위에 붙이고 있지만, 이미 주희가 지적한 바와 같이 남송 초기의 사람에 의한 위작이다.
서적 목록에서도 조공무晁公武의 <<군재독서지郡齋讀書志>>나 <<송사宋史>> 예문지藝文志에서는 여전히 경부經部가 아니라 자부子部에 들어가 있다. ...
신학이든 도학이든 맹자를 현창하는 최대의 이유는 인의를 사람의 본성이라고 하는 소위 성선설에 달려 있었다. 당시 왕성하게 논의되었던 성론性論 속에서 그들은 맹자의 주장을 근거로 삼았던 것이다. 그때 필연적으로 본성과 마음의 관계를 논의의 과정 속에 포함시키게 되었다. <<맹자>>에 자주 나오는 마음에 관한 발언, 그리고 "그 마음을 다하는 자는 그 본성을 안다. 그 본성을 알면 하늘을 알게 된다"로 시작되는 진심편盡心篇 첫 장의 논리 등이 초점이 된다.
<<하남정씨유서河南程氏遺書>> 권1에 수록되어 있는 정호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주희에 의해 <<근사록近思錄>> 권1에 재차 수록되어 있다.
태어난 그대로를 본성(性)이라 한다. 본성은 곧 기氣이며, 기는 곧 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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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이것을 생生-태어난 그대로-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태어나면 기품이 있고 도리(理)에는 선과 악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본성의 안에 본래부터 선과 악이 있는 것이고, 서로 대립하여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선한 사람이 있고, 어릴 때부터 악한 사람도 있다. 이것은 사람에게 기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선은 물론 본성이지만 악도 또한 본성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여기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정호의 주장이 뒤에서 서술할 정이·주희의 그것과는 그 취지를 달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기품 이전의 본성 그 자체에 관해서는 이것을 선인가 악인가로 논할 수 없다는 견해를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왕안석과 일치하기는커녕 여윤문余允文에 의해 맹자 비판파로 분류되고 있는 소식의 주장과도 아주 닮아 있다. 본성이란 사람의 태어난 그대로의 것이라는 표현은 실제로는 맹자의 논적인 고자告子의 논법이었다. 본성을 선악을 뛰어넘는 차원에서 이해하려고 하는 이러한 사고 방식은 지금부터 살펴보는 바와 같이 도학계열에서는 호굉의 <<지언知言>>이나 장구성張九成의 <<맹자전孟子傳>>으로 계승되고, 이윽고 양명학陽明學의 무선무악론無善無惡論에서 그 면모를 일신하여 부활하게 된다.
그것은 주희의 용어를 가지고 설명하면 그들이 본성(性)이라는 개념을 <<중용>>에서 말하는 바대로 미발未發 단계에서의 마음 상태로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미발의 성에 대하여 이발已發 단계의 상태는 정이라고 불린다. 정호는 그것을 기氣에 의한 것으로서 설명하였다. 왕안석이든지 정호이든지 간에 윤리적인 의미에서의 선악은 이 단계에서 밖에 사용할 수 없는 말이라고 생각하였다. 뒤에서 서술하겠지만 주희 자신은 이러한 방식으로 성과 정을 구별하고 있다. 그리고 주희 이후에도 왕안석이 부정했던 바의 성선정악설性善情惡說에 대한 약간의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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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 한때 널리 퍼지기도 하였다. 이것은 그렇게 파악하는 방법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쉬웠고, 바꾸어 말하면 그들의 생활감각에 익숙해지기도 쉬운 도식이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다만 마음에 관하여 호굉 등이 이발이 단계에, 장구성 등이 미발의 단계에 귀착시키는 것에 대하여 주희는 장재의 주장에 근거하여 새로운 심성론을 이른바 주자정론朱子定論으로서 주장하게 된다. 

성性-주희의 정론定論

성性-주희의 정론定論 致知
2010/07/27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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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마 쓰요시 지음, 신현승 옮김, <2. 성性- 2.주희의 정론定論>, <<송학의 형성과 전개>>, 논형,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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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정을 둘러싼 논의는 주희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단계를 맞이한다. 주희는 복건福建 북부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소흥紹興 18년(1148) 전시殿試에 제278위로 합격한다. 그는 이때 열아홉으로, 과거 합격자의 평균연령을 훨씬 밑도는 대단히 일찍 핀 꽃이었다. 다만 그 순위가 278위라는 성적 때문에 관계의 엘리트 코스에 올라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오히려 조정에서 행정업무에 쫓기지 않고 깊은 사색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는 사실은 사상가로서의 주희가 탄생하는 데 바람직한 방향으로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만일 그 해에 과거시험에 낙제하고 3년 후에 장원이라도 되었다면 동아시아의 근세사상사는 상당히 그 양상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하위의 합격자가 임관되기 위해서는 다시금 전시銓試라는 심사를 통과해야만 했다. 주희는 3년 뒤인 소흥 21년(1151)에 무사히 이것에 합격하여 천주泉州 동안현同安縣 주부主簿에 임명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곧바로 부임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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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인사이동에서 현임자의 후임이 되는 것이 내정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일단 거주지인 건주建州 숭안현崇安縣에 돌아갔다가 소흥 23년(1153)의 여름에 부임길에 올랐다. 숭안에서 동안同安을 향하여 가는 이 여정이 그의 사상을 결정짓는 만남을 초래하게 된다.
숭안을 출발한 주희는 건계建溪를 따라 남하하여 남검주南劍州-현재의 南平-를 지나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의 부친 주송朱松과 마찬가지로 나종언羅從彦에게서 수학한 이동李侗이 살고 있었다. 주희 자신 및 후세의 주자학자에 의한 현창을 거쳐서 그들에 관하여 잘 알고 있는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눈에는 두 사람의 만남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비친다. 나종언의 스승인 양시楊時는 정호에게 "나의 도道는 남쪽으로 전해질 것이다"라고 기대되었던 인물이고, 그의 학술을 전하는 이동에게 주희가 가르침을 청하러 길을 떠난 것은 당연한 과정이라고 보인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중기 이전부터 높은 명성을 날리고 있던 양시에게는 그 문하에 장구성을 비롯하여 많은 훌륭한 제자들이 있었고, 나종언은 시골에 파묻혀 사는 범용한 학자에 지나지 않았다.
<<송원학안宋元學案>>이 나종언의 문인으로서 이동과 주송 두 사람밖에 이름을 내세우고 있지 않다는 것, 주송이 양시 문하의 다른 인물도 사사했다는 것, 자식의 교육을 위해 다른 우인友人을 만나 유언을 남겼다는 것 등을 종합해서 생각해보면 나종언 및 그의 문인 이동이 당시 어느 정도의 평가를 받고 있었는가는 자연스럽게 상상이 갈 것이다. 주희는 범여규范如圭에게 보낸 서간에서 이동에 대하여 일부러 소개하고 있다.(<<朱文公文集>> 권37, <與范直閣>)
범여규는 호안국 문하의 뛰어나고 훌륭한 도학자이면서 건양建陽에 거주하고 있었던 인물이다. 그런 그조차도 이동이라는 이름을 몰랐다고 한다면 이동은 철저하게 무명에 가까운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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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송이 진작부터 이 동문同門의 선비를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겨우 100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인물에게 그 자식이 임지로 향하는 도중, 그 기회에 잠깐 들러서 첫 대면의 인사를 시키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두 사람의 만남은 좀더 일찍 이루어져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운명은 두 사람을 대면시키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것이 주희의 생애에서 가장 결정적인 만남이었다는 것은 선행의 제 연구가 한결같이 지적하는 바이다. 다만 첫 번째의 만남으로 인해 곧바로 주희의 사색에 일대 변화가 오지 않았다는 것은 그 자신이 후년에 술회하고 있다. 이동에게 들었던 것을 동안同安에서 반추할 때 그 깊이를 깨닫고 주희는 임기가 만료되어 숭안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다시금 이동의 거처를 찾아가서 만나 뵈었다.
그때까지 주희의 사색적인 경향은 선禪의 강한 영향 아래에 있었는데, 이동과 만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되고 이정의 학통을 계승하는 도학자로서의 자각이 싹트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마음 수양 방법의 문제에서 현저하게 드러났다. 이동은 마음이 발동하여 나오지 않는 미발未發의 단계 이른바 고요할 때(靜時)의 마음상태에 그 중점을 두었다. 고요할 때에 대본大本을 체인體認해두면 갖가지 사물에 대해서 스스로 올바르게 대응할 수가 있다. 그럴 때야말로 이일理一이면서 분수分殊인 이 세계의 상태에 대처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러한 수양에 힘쓰면서도 마음의 본체와 그 작용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만 할 것인가라는 의문이 주희에게는 아직 남아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서 장식張栻을 방문하고 그 스승인 호굉으로부터 전하는 소위 호남학湖南學의 학풍을 접하게 된다. 그들의 논법은 '미발未發은 성性이고, 이발已發은 심心이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결국 미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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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에 관해서는 수양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마음이 발동한 상태에 있어서의 그 움직임을 명확히 파악하는 것, 이른바 찰식察識이 중시되었다. 거기에 그들의 성설性說, 즉 성 그 자체를 선악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사고방식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여기에서 주희의 사색은 미발에서 이발 쪽으로 다시 크게 흔들렸던 것이다.
그 흔들림에서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은 주희 자신의 사색에 의해 초래된 결과였다. 그때 그가 근거로서 강조했던 것이 장재의 '심心은 성性과 정情을 통합한 것'이라는 테제였다. 마음이라는 개념을 둘러싼 주희의 사색은 여기에서 일단락짓게 된다.
이러한 소위 정론의 확립이 주희의 사색의 종착점은 아니었으며 그후 그의 교설을 계승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 심성론이 더 한층 전개되고 완성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역시 여기에서 잠시 멈추어서서 주희의 심성론에 관해서 살펴두고 싶은 이유는 그러한 심·성·정의 취급방법이 북송 이래의 성설의 전개사 속에서 하나의 전형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정확하게는 후세에 주희의 정론을 가지고 한 방면의 전형으로 삼고, 한편으로는 육구연의 주장을 가지고 다른 한 방면의 전형으로 간주하는 것에 의한 이항대립의 도식이 상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뒤에서 서술하는 바와 같이 두 쪽 모두 맹자의 성선설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는 북송 때의 제 논의의 과정 속에 있는 특정한 유파(道學)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마치 때로는 하늘과 땅만큼의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처럼 취급을 받고, 때로는 외관상 상반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그렇다고 이 종류의 논자들도 인정한다-내실內實은 동일한 것이라고 하여 그 조정이 시도되었다. 또한 때로는 양자가 제각기 시기에 따라 주장을 바꾸어 놓았다고까지 얘기되는-그 대표적인 경우가 '만년정론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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年定論'이라는 사고방식-이러한 이항대립성의 폭넓은 인지와 대립이 있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말의 갖가지 표현 차이를 모두 자기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동향의 실상을 해명하기 위해서 주희의 정론에 관한 설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주희의 정론은 장재의 '심통성정心統性情'과 정이에 의한 '성즉리性卽理'라는 두 개의 규정 위에서 성립되어 있다. 그래서 먼저 이 두 개의 말에 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심통성정'의 본래의 출전은 사실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주희가 편찬한 <<근사록>> 권1에 의해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고 있기는하지만, 장재가 언제 어떠한 문맥에서 집필한 것인지 또는 발언한 어구인가는 알 수 없다. 그의 문장·어록을 수집하여 편집한 <<장자전서張子全書>>는 명대 후반의 편찬물이고, 그 안에 수록된 <성리습유性理拾遺>에 이 유명한 어구를 포함한 조문이 보인다. 단지 <성리습유>란 명대 초기에 편찬된 <<성리대전性理大全>>에서 골라내어 수집했다고 하는 의미이며, 실제로 그 권33 '심성정心性情'에 <<장자전서>>의 일련의 조문이 세 개로 구분되어 수록되어 있다. 그 맨 처음에 나오는 조문은 "장자가 말하기를 심은 성정을 통합한다(張子曰, 心統性情者也)"라고 하는 바로 그 어구만으로 되어 있어 앞뒤의 맥락을 전혀 알 수가 없다. <<성리대전>>은 <<근사록>>으로부터 인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원대에 편찬된 <<장자어록張子語錄>>에는 <후록하後錄下>에 '심통성정'이 몇 번 등장하기는 하지만 어록의 본체에는 이러한 어구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후록하>란 <<주자어류朱子語類>>에서 발췌하여 쓴 것으로, 예컨대 주희가 발언한 말들 중에서 장재에 관련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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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집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 어구가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그 태생부터 의심스러운 이 어구가 지금에 와서 장재의 사상을 말하는 데 빠뜨릴 수 없게 된 것은, 주희가  이것에 의거하여 자신의 정론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것은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면 주희 이전 시대에는 이 어구가 그다지 주의를 끌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보다는 장재라는 사상가 자체가 도학자들 사이에서 평판이 높았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역사적 사실로서 이정과 교류한 사실이 있고, 이정이 그 나름의 경의를 표시하여 그에 관해 언급한 어록이 남아 있기는 하다.
또한 장재의 문하에는 그의 사후에 정이를 스승으로 우러러 받는 자들도 많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동일한 문장이 문헌에 따라서 장재의 발언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정이의 것으로 되어 있기도 하였다. 하지만 도학의 본류는 철저하게 이정 문하의 것이었고, 장재는 이것과는 약간 성격을 달리하는 사상가로서 부즉불리不卽不離의 관계로 보였던 것 같다. 그가 도학사에서 찬연히 빛나는 거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정몽正蒙>>과 <<서명西銘>> 및 그 태허太虛의 사상, 거기에 '심통성정'이라고 하는 한 마디의 어구 등이 주희의 현창을 거친 결과였다. 이것과 비슷한 상황이 '이학理學의 개산開山'이라고 불리는 주돈이周敦頤에게도 벌어진다는 것은 제3장에서 상세하게 살펴본다.
... 주희는 무엇때문에 '심통성정'을 그토록 중시하였던 것일까. 그는 어떤 문인에게 성性·정情·심心·인仁의 관계에 관하여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횡거橫渠(張載)가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데, '마음(心)은 본성(性)과 감정(情)을 통합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맹자가 '가슴아 파하는(惻隱) 마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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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함(仁)의 실마리이고, 부끄러워하고 싫어하는(羞惡) 마음은 의로움(義)의 실마리이다'라고 말한 것도 본성과 감정과 마음을 매우 잘 설명하고 있는 말이다. 본성에는 선善하지 않은 것은 없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 감정이 되지만, 여기에는선하지 않은 것도 있다. 선하지 않은 것은 마음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마음의 본체에는 원래 선하지 않은 것이 없고, 그것의 결과로서 선하지 않게 흐르는 것은 감정이 바깥의 사물(外物)에 옮겨져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본성이란 이치(理)의 총체적인 명칭이며, 인자함(仁)·의로움(義)·예의바름(禮)·지혜로움(智)은 모두 번성 가운데 있는 이치의 총체적인 명칭이다. 가슴 아파하고(惻隱)·부끄러워하고 싫어하며(羞惡)·겸손하고 양보하며(辭遜)·참과 거짓을 가리는 것(是非)은 감정이 드러날 때의 명칭으로 이것들은 감정이 본성에서 비롯되어 선하게 된 것이다. 그 실마리가 드러난 것은 매우 미미하지만, 모두가 이 마음에서 나온다. 때문에 '마음은 본성과 감정을 통합한다'라고 말한다. 본성이란 어떤 것이 특별히 마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본성과 감정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朱子語類>> 권5)
이렇게 설명함으로써 주희는 본성 그 자체에는 선악의 구별이 없다는 기존의 사고방식과 결별하였다. 왕안석이 한유의 잘못으로 비판하였던 인의예지를 본성으로 인정한다고 주희는 감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만인에게 본래적인 성性과 실제로 각자에게 부여되어 있는 본성을 구별하는 발상을 장재에게서 배웠기 때문이다. 장재는 이렇게 말한다.
형체를 갖춘 단계가 되고 나서 기질의 성이라는 것도 나타난다. 원래의 곳으로 돌아갈 수가 있다면 천지의 성을 유지할 수가 있다. 따라서 군자는 기질의 성을 성이라고는 부르지 않았던 것이다.(<<正蒙>><誠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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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는 천지의 성과 기질의 성이라는 이층구조二層構造에 의해 성을 파악하는 방식으로, 맹자가 말한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성과 순자 등이 말하는 현실적인 사람의 양태로서의 성이 정합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사람은 본래 선善으로서의 본성을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질의 소위所爲에 의해 악행이 생겨난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악을 없애기 위해서는 기질을 선善으로서의 본성으로 되돌리기만 하면 된다. 기질변화론氣質變化論이라고 불리는 주자학의 수양론은 이러한 성설에 근거하고 있었다. 주희는 이러한 자기 학설에 의해 '태어난 그대로야말로 본성(性)'이라고 해야할, 앞에서 예를 든 정호의 주장을 막무가내로 바꾸어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인의예지를 전자의 의미의 본성으로서 사람의 마음에 미리 부여된 리理라고 간주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성즉리설性卽理說이다. 다음으로 그 전거가 된 정이의 발언을 살펴보자.
맹자가 사람의 본성(性)이 선하다고 말한 것은 옳다. 순자나 양웅 정도의 학자라도 역시 본성에 관해서는 이해하고 있지 않다. 맹자가 이들 유자儒者보다 한 단계 뛰어난 점은 본성에 관해서 확실히 해둘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분성에 선하지 않은 것은 없다. 선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재才이다. 본성이란 다름아닌 리理이다. 리란 요순堯舜 뿐만 아니라 그 주변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동일하다. 재는 기氣로부터 부여받지만 기에는 청탁淸濁이 있다. 기의 맑은 것을 받으면 현인이 되지만, 기의 탁한 것을 받으면 우둔한 자가 된다.(<<河南程氏遺書>>권18)
성에 대한 재를  세우는 것으로 정이는 성선설을 지지하는 논리를 만들어 내었다. 그것이 성즉리설이다. 이러한 리가 그 본래적인 올바름·선함은 지고至高의 존재라고도 말해야 할 천에 의해 보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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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를 통하여 전체 우주와 연결되어 있는 성에 악이라는 성질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정이의 성선설은 맹자가 사용한 문맥의 단면을 그 나름대로 바꾸어 이해함으로써 선으로서의 성이 만인에게 동등하게 부여되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정이의 설명으로 양웅이나 한유가 성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어차피 재의 차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同, 권19) ... 리로부터 말하면 천, 품수稟受로부터 말하면 성, 사람에게 갖추어져 있는 것으로서 말하면 마음이라고 하는데, 이것들은 하나의 리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同, 권22 상)
주희의 성설은 정이의 이러한 발상을 계승하면서 여기에 성과 정이라는 이층구조를 도입함으로써 왕안석이나 정호가 구별하였던 미발과 이발의 벽을 뛰어넘게 되었다. 그것은 본체로서의 성과 작용으로서의 정을 통합하고 주재하는 것이 되는 마음의 제시였다. 따라서 주자학을 성리학이라고 규정하여 단지 육왕심학陸王心學과 서로 대치되는 것으로 삼는 그러한 이해는 지나칠 정도로 표면적이다. 문제는 마음(心)이 아니며 또한 성리性理를 설명했다고 하는 등의 차원이 아니다.('문제는 마음을 말했다거나 성리를 말했다고 하는 등의 차원이 아니다'의 오역인듯... 원문 확인 불가하여 오역이라 확언할 수는 없음, 원저자가 이상하게 썼을 수도...;;) 이미 선학先學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주자학이 말하는 '마음'과 심학이 말하는 '마음'이 내용적·구조적으로 어떻게 달랐는가 하는 차원에서의 비교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성性-심心·신身·정情·성性, 고지마 쓰요시 지음, 신현승 옮김, , 송학의 형성과 전개, 논형, 2004.

성性-심心·신身·정情·성性 致知
2010/07/29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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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마 쓰요시 지음, 신현승 옮김, <2. 성性- 3.심心·신身·정情·성性>, <<송학의 형성과 전개>>, 논형,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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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와 육구연 학풍의 차이는 두 사람의 저작 확동에서 현저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것은 육구연이 언어에 의해 진리를 전수할 수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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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육구연은 저술에는 그다지 힘을 쏟지 않았다. 이에 반해 주희는 그 생애에 걸쳐 수많은 서적을 집필·편집·출판하였다. 그 대표작이라고 간주할 만한 것이 <<대학>>, <<중용>>, <<논어>>, <<맹자>>의 주석서, 이른바 <<사서장구집주四書章句集注>>이다. 명대에는 이것이 과거시험의 정식 주석서가 되고 또한 사서는 필수의 경서로 중시되기도 하여 독서인이라면 누구나 읽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주희 자신이 가장 먼저 읽어야 할 것이라고 지정했던 <<대학장구大學章句>>는 삼강령三綱領· 팔조목八條目이라는 정연한 논리적 구조를 갖추게 되어-이렇게 주희에 의해 그 내용이 바뀌었다.-인격 수양의 지침서로서 우러러 받들어졌다. 주희는 정호·정이 형제의 주장에 의거하면서 텍스트를 경 1장과 전 10자으로 나누어 상세하게 주를 달았다. 죽음의 문턱에 서서도 또한 성의장誠意章의 주석을 수정하려고 했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하려고???)
... 팔조목은 주자학의 이해에 의하면 수기치인修己治人의 계제성階梯性을 나타내고 있다. ... 팔조목의 전개는 학습자의 내면의 도야가 어떻게 그 주위를 감화시키고 마침내는 태평천하를 가져오게 되는가를 이야기 형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 성의에서 평천하에 도달하는 계제성은 <<대학>>의 원본 텍스트가 이미 갖추고 있는 내용이고, 주자학의 독창적인 견해라고 할 수 없다. ...
p.114
그러나 송대가 되어 <<예기禮記>>의 이 한 편이 모든 경서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은 이 시기가 되어서 처음으로 <<대학>>이라는 텍스트가 갖추고 있던 어떤 이해(讀法)의 가능성이 개척되고 수용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 그 이해는 <<예기>>의 한 편으로서 그것에 주석을 단 정현에게는 그만큼 중요하다고 의식되지는 않았던 것이고, 자주 논급되는 바와 같이 송대에 등장하는 과거 관료제를 배경으로 하였던 독서인讀書人층에게 호소되기 시작한 것이다. 주희가 '수기치인'으로서 정리한 팔조목의 커다란 두 단계, 즉 자기 수양과 타자에 대한 교화를 연결시켜 연속성을 갖추고 파악하는 시점은 어떻게 해서 가능하게 된 것일까.
... 양자의 이음매는 수신과 제가의 관계에 있고, "천자天子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일체 모두 수신을 근본으로 삼는다"라고 하는 원본 텍스트의 기술에 의해 수신을 종착점으로 하는 요지의 정당성이 보장되었다.
하지만... 신학적神學的 입장보다는 그 논리의 과정을 분석하는 시각으로 조망해 본 경우, 수신이 종착점이 되어 양자를 연결한다고 하는 논리는 그다지 자명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 주자학의 근간에 관련되는 대전제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거기에서 열쇠가 되는 것은 '신身' 자에 대한 이해일 것이다. ...
 


p.116
주희에 의한 장구의 전傳 제7장은 "이른바 몸身을 닦음이 그 마음을 바르게 함에 있다는 것은 몸에 분치忿懥하는 바가 있으면 곧 그 올바름을 얻지 못한다"라고 시작된다. 여기의 '몸에 분치하는 바가 있다(身有忿懥)'의 '신'이라는 글자에 <이천선생개정대학>은 '마땅히 心으로 고쳐야 한다(當作心)'라고 주를 달고 있다. ...
주희의 <<대학장구>>는 "정자程子에 의하면 '신유身有'의 '신'이라는 글자는 심心이라고 하는 것이 좋다"라고 하여 정이의 주장을 인용하는 형태로 이 부분의 개정을 주장하고 있다. ...
p.117
애당초 이곳의 원문에는 계속해서 그 외 공구恐懼·호요好樂·우환憂患이라고 하는 세 가지의 경우에도 각각 '그 올바름을 얻지 못함(不得其正)'이 된다고 서술되어 있으며, 어느 것이나 그것들의 격정이 끓어오르는 장은 모두 '신身'이라는 글자와 관계를 맺고 있다. 정이·주희는 이 네 가지가 몸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주장해야만 할 내재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 주희는 스스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 네 가지는 모두 마음의 작용이니, 사람에게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라도 있어 또한 그것을 살피지 못하면 욕慾이 동動하고 정情이 치우쳐서, 그 작용이 행하는 바가 혹 올바름을 잃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이것들은 마음의 작용이지 몸의 작용은 아니다. 따라서 그것들이 일어나는 것도 몸에서가 아니라 마음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 학습자는 자기 마음속에서의 욕망·감정의 움직임을 찰지察知하여 미연에 그것을 방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에 성공하는 것이 '마음을 바르게 함'이고, 다음의 조목인 수신의 전제가 된다. ...
p.118
정이의 '개정改正'에 대해서는 반론이 있었다. 이하의 세 가지 예는 모두 위식衛湜의 <<예기집설禮記集說>> 권151에 실려있는 것으로 시간적으로는 정이와 주희 사이에 위치하는 사람들의 문장이다. .... 먼저 장구성張九成은 현존하지 않는 <대학설大學說>에 있는 문장이라고 생각되는 것 중의 한 구절에서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마음의 본래 상태에는 분치도 공구도 호요도 우환도 없다. 분치·공구·호요·우환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혈기血氣에 의한 것이다. 때문에 '몸에 분치하는 바가 있으면'이라는 것과 우환까지만-모두 몸에 관하여-말하는 것이며, 마음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마음의 본체에 이것들의 격정이 일어나는 일은 없다. 그것들은 혈기
p.119
가 만들어낼 수 있는 소행이며, 따라서 몸 차원의 일에 속한다. 그리하여 텍스트에는 몸이라고 말하고 마음이라고는 말하지 않은 것이다. 오여우吳如愚도 혈기를 내세우면서 해석을 가하고 있다.
'그 올바름을 얻지 못한다'라고 하는 것은 몸에 그것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몸에 그것들이 생겨나는 것은 혈기가 그렇게 하는 것이며 바로 사욕私慾이다.
이것도 혈기에 의한 소행을 사욕이라고 규정하고, 그 때문에 올바른 도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원백李元白은... 이곳이 '신'이라는 글자가 아니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한다.
처음에는 마음이 몸을 제어할 수 있지만, 이미 지금은 몸이 오히려 그 마음을 상하게 하고 있다. 그 때문에 경문에서는 '마음에 분치하는 바가 있으면'이라고는 말하지 않은 것이다. 특별히 내세워서 '몸에 분치하는 바가 있으면'이라고 몸에 갖다 붙이어 말하고 있는 것은, 이것들 네 가지의 장해障害가 몸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
p.120
그들이 네 가지의 격정을 마음이 아니라 몸에 귀속시켰던 것은 마음이 혈기를 갖추고 있지 않다고 간주하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마음은 혈기가 작용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 이전의 차원, 즉 말을 바꾸어보면 미발의 단계에 속해 있는 것이다. 장구성이 정호의 주장을 받아들여 성性은 선악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파악했다는 점은 이미 앞에서 서술하였다. 그에게 성은 즉 마음이며, 이것이 이발의 정情과 서로 대립하였다. 이 마음을 그대로 현현시키는 것이야말로 정심正心의 요점이고, 마음에 올바르지 않은 격정이 끓어오른다고 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이러한 논리야말로 육구연의 '심즉리心卽理'설에 연결되는 것이었다. ...
그러나 주희에게 그것은 수양을 일면적인 것으로 처리해버리는 위험성을 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p.121
장구성과 같은 입장은 '마음이 올바르면 몸도 닦여진다'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희에게 팔조목은 그 순서에 따라 차차 장을 확대해가면서 점진해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수양법으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번잡한 것이다. 이른바 '심학'파의 주자학 공격은 마음의 본래성을 발현시키는 것뿐인 일에 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인물성동이논쟁-인간과 만물의 차별성에 대한 검토

인물성동이논쟁-인간과 만물의 차별성에 대한 검토 致知
2010/03/19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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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찬, '인물성동이논쟁-인간과 만물의 차별성에 대한 검토', "논쟁으로 보는 한국철학", 예문서원, 1995.


1. 논쟁의 발단과 배경

p.205
성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우주 만물의 발생과 변화는 리와 기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진다. 조선 초부터 인간의 성정에 관심을 기울이고 심성의 올바른 발현을 통해 성리학적 이상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던 조선 성리학자들은 인간의 성정이 우주만물 사이에서 어떻게 구성되고 현실 속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관해 이미 깊은 탐구를 해 왔다. 우리는 그 대표적인 성과를 사단칠정 논쟁이라 부른다. 인간만이 만물의 영장으로서 다른 동물들과 달리 사회 규범을 가지고 이를 실천해 나갈 수 있다고 할 때, 이제 시야를 인간의 성정에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 쪽으로 확장시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자연스런 일이라 할 수 있다. ...
p.206
인간이 왜 동물과 같지 않은가 하는 문제를 둘러싼 일반적 관심이라면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비롯한 성리학자 대부분의 글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인성과 물성의 차이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관심은 사계 김장생, 우담 정시한, 외암 이식, 농암 김창협 등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아무래도 본격적인 논의의 시작은 수암 권상하의 문하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권상하는 이이-김장생-송시열의 뒤를 이어 기호 학파의 맥을 계승하는 사람이다. 그 문하에는 인물성동이 논쟁의 주인공이 되는 외암 이간과 남당 한원진이 있었다. 한원진은 1705년 지은 '시동지설示同志說'에서 인물성론에 관해 이미 상당히 정리된 입장을 밝히고 있고, 이간은 1709년 최성중에게 보내는 편지('與崔成仲')에서 오상과 미발의 관한 논의를 한 바 있다. 즉 1712년에 본격적인 논쟁을 벌이기 이전에 이미 이들은 자기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토론은 1712년 이간이 스승 권상하에게 미발 상태의 순선 문제를 제기하면서 시작된다.
처음에 권상하는 이간의 설에 수긍하였으나, 한원진이 자기의 의견을 설명하자 이번에는 한원진의 설을 인정하였다. 그러자 이간은 스승 권상하에게 편지를 보내 스승과 한원진의 설에 이의를 제기하였고, 한원진은 스승을 대변해서 다시 이간을 반박함으로써 이들 둘 사이의 논쟁은 본격화되었다. 이간은 '리통기국변'(1713), '미발유선악변'(1713), '미발변'(1714), '오상변'(1714)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발변후설'(1719)을 썼다. 그리고 한원진은 '부미발오
p.207
상변'(1715), '부기질지성변증'(1715) 등을 쓰고, 1724년에는 이간이 권상하에게 보낸 편지에 대한 종합적인 변론을 담아 '이공거상사문서변'을 지어 자신의 입장을 마무리하였다.
이들의 논쟁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집단적 논쟁의 성격을 띠면서 조선조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이간이나 한원진은 모두 권상하의 문인들로서 기호지방(충청도)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후 이간의 설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주로 농암 김창협과 삼연 김창흡 계열을 잇는 기원 어유봉, 도암 이재, 여호 박필주 등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서울에 사는 노론 낙론 계열이었으므로 이들의 이론을 낙론洛論(洛下, 즉 서울 부근)이라고도 한다. 한편 권상하와 한원진의 이론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병계 윤봉구, 매봉 최징후, 봉암 채지홍 등 주로 충청도 근방에 살았기 때문에 호론湖論(湖西, 즉 충청도)이라고도 한다. 이 때문에 이들 사이의 논쟁은 '인물성동이론'이라는 명칭 이외에 '호락논쟁'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2. 논쟁의 전개

1. 성 개념의 다의성

성리학에서의 성이란 인간 또는 사물 안에 내재된 리를 가리킨다. 성은 구성상으로는 '기 안의 리'(氣中之理)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p.208
보는 관점에 따라 두 가지 이상의 함의를 지닌다. 동론同論을 주장하는 측과 이론異論을 주장하는 측이 이용하는 논거를 살펴보면 이러한 사실이 명확히 드러난다.
이간은 "중용"의 '천명지위성'에 대한 주희의 주석을 동론의 근거로 든다. 주희의 주석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명命은 령令과 같고, 성性은 곧 리理이다. 하늘이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써 만물을 화생化生하게 함에, 기氣로써 형태를 이룰 때에 리理 역시 부여되니 마치 명령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사람과 사물이 생겨날 때에는 각기 부여된 리를 얻어 건순오상健順五常의 덕德으로 삼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성性이다. ("中庸章句", '天命之謂性'의 朱子註: 命, 猶令也. 性, 卽理也. 天以陰陽五行, 化生萬物, 氣以成形而理亦賦焉, 猶命令也. 於是, 人物之生, 因各得其所賦之理, 以爲健順五常之德, 所謂性也.)
만물이 모두 리를 부여받아 기로써 형태를 이루고, 이 때 각기 부여된 리가 곧 성이 되므로, 인간을 포함하는 만물의 성이 근본적으로 같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원진은 "맹자집주"와 "대학혹문"에서 나오는 주희의 글을 논거로 사용한다. "맹자집주"에서 주희가 주장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사람과 사물이 생겨남에 성性이 없을 수도 없고 기氣가 없을 수도 없다. 그러나 기氣로써 말하면 지각 운동에서는 인간과 사물에 다름이 없는 듯 할지라도, 리理로써 말하면 사물이 어찌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온전하게 받았겠는가? 이것이 인간의 성性이 선하며 만물의 영장이 된 까닭이다. ("孟子集註", '告子上', 3장의 朱子註: 人物之生, 莫不有是性, 亦莫不有是氣. 然以氣言之, 則知覺運動, 人與物, 若不異也. 以理言之, 則仁義禮智之稟, 豈物之所得而全哉. 此人之性, 所以無不善而爲萬物之靈也.)
p.209
기에는 차이가 없지만 품부받는 리가 다르기 때문에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된다고 하니 인물성 이론의 논거가 될 만하다. 주희는 "대학혹문"에서 또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사람과 사물이 생겨남에 반드시 리理를 얻은 다음에 건순인의예지健順仁義禮智의 성性을 이루게 되고, 반드시 기氣를 얻은 다음에 혼백 오장 백해의 신체를 이루게 된다. ... 그런데 그 리理로써 말하면 만물의 근원은 하나이므로 참으로 사람과 사물은 귀천의 차이가 없다. 그러나 그 기氣로써 말하면 기氣의 바르고 통한 것을 얻으면 사람이 되고 그 치우치고 막힌 것을 얻으면 사물이 된다. 그러므로 귀천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大學或問", '經一章': 人物之生必得是理, 然後有以爲健順仁義禮智之性; 必得是氣, 然後有以爲魂魄五臟百骸之身. ... 然以其理而言之, 則萬物一原, 固無人物貴賤之殊; 以其氣而言之, 則得其正且通者爲人, 得其偏且塞者爲物, 是以或貴或賤而不能齊也.)
여기서도 사람과 사물의 차이를 말하고 있기는 하나, 이번에는 리는 동일하지만 기에 차이가 나기 때문에 사람과 사물의 다름이 생긴다고 한다. "중용"의 주석에 따르면 사람과 사물이 모두 천으로부터 리를 부여받아 성으로 삼기 때문에 사람과 사물의 성이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맹자집주"에 따르면 부여받은 리의 차이에 의하여, "대학혹문"에 따르면 기의 차이에 의하여 사람과 사물이 달라진다. 성이란 리가 기와 결합된 경우를 말하므로 리의 차이에 의한 것이든, 기의 차이에 의한 것이든 기와 결합된 리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리와 성의 개념을 다중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주희의 혼용이 문
p.210
제된다. 만물 생성과 변화의 원리라는 의미에서 리는 우주 전체에 관통하고 있고, 그러한 의미에서는 개체 내의 리인 성도 동일하다. 그러나 각종의 사물이 유적類的 특성을 이루게 하고, 또한 각각의 개체이도록 하는 원리를 성이라 할 때 이 성은 사람과 사물에서, 나아가 각각의 개체에서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그 차이의 원인을 기라고 하든 리라고 하든 그것은 그 다음의 문제이다. 이러한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된 성 개념을 사용하는 한 인물성동이 논쟁의 전개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성을 보는 관점에 따라 본원적인 리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고, 각 부류의 유 개념 또는 개별적 특성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는 것은, 이 논쟁에 참여하는 성리학자들도 이미 염두에 두고 있었다. 문제는 그 중 어느 관점을 택하며, 굳이 그 관점을 택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있다. 한원진은 성삼층설性三層說로 이를 해명하려 한다.
 리는 본래 하나이다. 그런데 형기를 초월하여(超形氣) 말한 것이 있고, 기질에 인하여(因氣質) 말한 것이 있고, 기질을 섞어서(雜氣質) 말한 것이 있다. 형기를 초월하여 말하면 태극이라는 이름이 이것으로, 만물의 리가 동일하다. 기질로 인하여 이름하면 건순 오상의 이름이 이것으로, 사람과 사물의 성이 같지 않다. 기질을 섞어서 말하면 선악의 성이 이것으로 사람과 사람, 사물과 사물의 성이 또한 같지 않다. ("
南塘集" 권11, '擬答李公擧': 理本一也。而有以超形氣而言者。有以因氣質而名者。有以雜氣質而言者。超形氣而言。則太極之稱是也。而萬物之理同矣。因氣質而名。則健順五常之名是也。而人物之性不同矣。雜氣質而言。則善惡之性是也。而人人物物又不同矣。)
기질을 초월하여 말할 때는 만물의 리가 동일하고, 기질과 같이 있는 것
p. 211
으로서의 리인 성을 말하자면 사람과 사물의 성이 다르며, 기질과 섞여 있는 것으로서 말하자면 모든 개체의 성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
한편 이간은 '일원一原'과 '이체異體'라는 개념으로 이를 설명한다.
일원으로 말하면, 천명 오상이 모두 형기를 초월할 수 있으므로 사람과 사물에 치우침과 온전함의 다름이 없다. 이것이 이른바 본연지성이다. 이체로 말하면, 천명 오상이 모두 기질로 인하여 영향을 받을 수 있으므로 사람과 사물 사이에 치우침과 온전함의 다름이 있을 뿐 아니라, 성인과 범인 사이에도 천차만별이 있다. 따라서 치우친 곳에서는 성명性命도 함께 치우치고 온전한 곳에서는 성명도 함께 온전하다. 이것이 이른바 기질지성이다. ("巍巖遺稿" 권7, '答韓德昭別紙': 以一原言。則天命五常。俱可超形器。而人與物無偏全之殊。是所謂本然之性也。以異體言。則天命五常。俱可因氣質。而不獨人與物有偏全。聖與凡之間。又是千階萬級。而偏處性命俱偏。全處性命俱全。是所謂 氣質之性也。)
근원으로 말하자면 만물에 다름이 있을 수 없고, 기질에 구애됨으로 말하자면 사람과 사물이 다를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두 사람 다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음을 인정하므로 결국 논쟁의 쟁점은 어느 관점을 위주로 보아야 하는가에 있다. 이간은 '일원一原'의 관점을 택한다. 
본연이든 기질이든 성은 단지 리일 뿐이다. ... 성을 말하는 자리에서 그것을 리로 바꿀 수 없고, 리를 말하는 자리에서 그것을 성으로 해석할 수 없다고 한다면, 나의 미천한 견해가 미칠 바가 아니다. ("巍巖遺稿" 권7, '答韓德昭別紙': 本然氣質之間。性只是此理也。... 言性處。不可以理易之。言理處。不可以性釋之。則非鄙見之所及矣。)
p.212
성은 곧 리이므로 일원의 관점을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한원진은 성을 기와 결합된 리라고 보면서 '인기질因氣質'의 관점을 택하여 인성과 물성이 서로 다름을 주장한다.
성을 말하는 자리에서는 진실로 그것을 리로 바꿀 수 있고, 리를 말하는 자리에서도 또한 그것을 성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성과 리 두 글자를 함께 대비한다면 리가 같고 성이 다름은 분명하다. ("南塘集" 권11, '擬答李公擧': 言性處固可以理易之。言理處亦可以性釋之。然以性理二字。幷擧對言。則理同而性異。不可不辨也。)
리는 기와 상대되는 것이고 성은 기와 결합된 리(氣中之理)이므로 우주의 보편 원리로서의 리와 개별성 또는 유개념으로서의 성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 리통기국理通氣局의 이중성

서로의 관점을 인정하면서도 의견의 대립을 이루는 양측이 공통으로 이용하는 또 하나의 논거가 있다. 그것은 이이의 리통기국설이다. ...
이이는 자신의 리통기국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리통기국은 본체 위에서 말해야 하며, 또한 본체를 떠나서는 따로 유행을 구할 수도 없다. 사람의 성이 사물의 성이 아님은 기氣의 국한됨이요, 사람의 리가 곧 사물의 리임은 리의 통함이다. 모나고 둥근 그릇은 다르나 그릇 안의 물은 동일하고, 크고 작은 병은 다르나 병 안의 공기는 동일하다. 기의 하나의 근본이란 리의 통함 때문이고, 리의 만가지로 다름은 기의 국한됨 때문이다. 본체 가운데 유행이 갖추어져 있고, 유행 가운데 본체가 있다. 이로써 생각해보면 리통기국의 설이 과연 한부분에 떨어지겠는가? ("栗谷全書", 권10, '與成浩原': 理通氣局。要自本體上說出。亦不可離了本體。別求流行也。人之性非物之性者。氣之局也。人之理卽物之理者。理之通也。方圓之器不同。而器中之水一也。大小之瓶不同。而瓶中之空一也。氣之一本者。理之通故也。理之萬殊者。氣之局故也。本體之中。流行具焉。流行之中。本體存焉。由是推之。理通氣局之說。果落一邊乎。)
p.213
이이의 리통기국설은 리의 무형무위無形無爲한 특성과 기의 유형유위有形有爲한 특성에 기초하여 리기의 불상잡 불상리한 구성 관계를 리일분수의 체계로 설명하고자 한 것이었다. 리통에 의하면 사람과 사물의 리가 동일하고, 기국에 의하면 사람과 사물의 성이 다를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물과 사물 사이의 성도 다르다. 따라서 리통에 따르면 인물성동론을 지지하게 되고, 기국에 따르면 인물성이론을 지지하게 된다. ... 그런데 논쟁의 양측은 이것을 받아들이는 관점이 서로 다르다.
율곡에 따르면 천지만물은 기의 국한됨이고, 천지만물의 리는 리의 통함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리의 통함이라는 것은 기의 국한됨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만 오히려 기의 국한됨에 나아가서 그 본체를 가리키면서도 기와 섞지 않고 말하는 것이다. ("巍巖遺稿" 권12, '理通氣局辨': 盖栗谷之意。天地萬物。氣局也。天地萬物之理。理通也。而所謂理通者。非有以離乎氣局也。卽氣局而指其本體。不襍乎氣局而爲言耳。)
p.214
이간은 일원과 이체의 구분 가운데 일원의 입장에서 리통을 이해한다. 성은 기중지리이지만 리의 온전한 성질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것이므로 기와 섞지 않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원진은 통과 국을 각각 리와 성에 대비시킨다.
대개 단지 성자만 말하면 통함과 국한됨은 모두 성이고, 단지 리자만 말하면 통함과 국한됨은 모두 리이다. 성과 리를 상대하여 말하면 통함은 리이고 국한됨은 성이다. 성과 리가 비록 단 하나의 리일 뿐이지만 성이라고도 하고 리라고도 하는 것은 쓰이는 곳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미 리자가 있는데 또 성자가 있는 까닭이다. ("南塘集" 권28, '李公擧上師門書辨': 盖單言性字則通局皆性也。單言理字則通局皆理也。以性與理對言。則通爲理而局爲性。性也理也。雖只一理。曰性曰理。用處不同。此所以旣有理字而又有性字也。)
성을 리가 기와 결합되어 변화된 것으로 보는 한원진은 초형기로서의 리와 인기질로서의 성을 각각 리통과 기국에 대비시키는 것이다.

3. 본연지성과 기질지성

이러한 견해 차이는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에 대한 이해에서도 또한 나타나다.
아직 발하기 전에 리가 기 가운데 있을 때 리만을 가리키면 본연지성이고, 기를 함께 가리키면 기질지성이다. 아마도 바꿀 수 없는 이론일 것이다. ("南塘集" 권11, '附未發氣質辨圖說': 未發之前。理具氣中。單指理爲本然之性。兼指氣爲氣質之性者。恐是不易之論也。)
p.215
한원진은 현상계의 인간과 사물에서 리만 가리킨 것이 본연지성, 리기를 함께 가리킨 것이 기질지성이라 하고, 인기질의 관점에서 기질지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에 대해 이간은 '리기동실理氣同實', '심성일치心性一致'의 입장, 즉 리기를 분리해서 지적할 수 없고, 심心을 두고 성性만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심은 바르지 않을지라도 성은 스스로 중을 지킬 수 있고, 기는 순조롭지 않을지라도 리는 스스로 조화를 이룰 수 있다니, 천하에 이런 것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선만을 가리킨 것은 기器와 분리하는 것이니, 사람의 경우에는 반드시 리기동실理氣同實 심성일치心性一致인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야 한다. ... 심은 둘이 아니다. 그러나 구속됨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두 가지로 지적한다면 이른바 대본지성이란 그 본연지심에 나아가 그것만 가리킨 것이고, 기질지성이란 그 기질지심에 나아가 함께 가리킨 것이다. ("巍巖遺稿" 권12, '未發辨': 心之不正而性能自中。氣之不順而理能自和。天下有是乎。故單指之善。自不干涉於其器。而在人則必待夫理氣同實。心性一致處言之者。... 心非有二也。以其有拘與不拘而有是二指。則所謂大本之性者。當就其本然之心而單指。所謂氣質之性者。當就其氣質之心而兼指矣。)
한원진처럼 기질지성과 본연지성을 구분하여 기와 별개로서의 리를 따로 끄집어내어 이를 본연지성이라 단지單指한다는 것은 이간이 보기에는 성이라고 하기가 곤란하다. 이간은 기와 분리된 리를 성이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기와 결합된 리로서의 성이 본래의 리의 특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리와 기가 공존하는 리기동실 심성일치의 상태를 고수하고자 한다. 본연지심에 나아가서 단지하면 본연지성이고, 기질지심에 나아가서 겸지하면 기질지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원진의 격렬한 비판을 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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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은 기이고 성은 리이다. 기는 맑거나 탁함 아름답거나 추함에 가지런하지 않음이 있지만 리는 곧 순선하다. 그러므로 리만을 가리키면 본연지성이고 리와 기를 함께 가리키면 기질지성이나 성에 두 몸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기질을 겸함과 겸하지 않음에 따라 두 가지 이름이 있을 뿐이다. ("南塘集" 권11, '附未發氣質辨圖說': 心卽氣也。性卽理也。氣有淸濁美惡之不齊。而理則純善。故單指理爲本然之性。兼指理氣爲氣質之性。性非有二體也。只是氣質之兼不兼而有二名耳。)
... 한원진은 하나의 물物, 하나의 심心에서 단지와 겸지로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구분하고 기질지성의 관점을 택한 것이다. 이간은 자신의 일관된 리기 불상리 불상잡 및 리기동실 심성일치의 원칙은 고수할 수 있었지만, 하나의 사람 또는 사물 안에 두 개의 심과 두 개의 성이 존재하게 된다는 문제에 부딪힌 것이다.

4. 오상론

... 이들은 인성과 물성의 동이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증거를 오상五常에서 찾는다.

생각건대 만물이 모두 이 성을 가지고 있는데 오직 사람의 성이 가장 귀하고 지극히 선하게 되는 까닭은 인의예지의 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맹자가 성선을 논할 때 다른 말은 없이 다만 인의예지로써 말한 것이다. 만약 만물 중 지각 운동을 가지고 있는 것이 모두 인의예지의 온적한 덕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면, 사람의 성이 가장 귀한다는 것은 과연 무슨 까닭이겠는가? ("南塘集" 권29, '論性同異辨': 盖萬物同有是性。而獨人之性爲最貴而至善者。以其有仁義禮智之德也。故孟子論性善。無他語。只以仁義禮智言之。若使萬物之有知覺運動者。皆具仁義禮智之全德。則人性之爲最貴者。果何事也?)

사물의 지각은 그 기가 오행의 거칠고 흐린 것을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 기는 단지 거칠고 흐린 리를 얻을 뿐이다. 비록 일찌기 그 리가 없지는 않지만 또한 인의예지라고 할 수는 없다. <호랑이와 이리의 인仁, 벌과 개미의 의義와 같은 종류는 오행 가운데서도 그 증 하나의 빼어난 기를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 기는 인이 되고 의가 되지만, 끝내 온전할 수는 없다.> 사람의 지각은 그 기가 오행의 정밀하고 빼어난 것을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 리는 인의예지가 되고, 지각의 발현도 인의예지의 작용이 아님이 없다. ("南塘集" 권29, '論性同異辨': 物之知覺。其氣得五行之粗濁者。故其理只得爲粗濁之理。雖未嘗無其理。亦不可謂仁義禮智也。<虎狼之仁。蜂蟻之義之類。是於五行中亦得其一段秀氣。故其理爲仁爲義而終不能全也。> 人之知覺。其氣得五行之精英者。故其理爲仁義禮智。而知覺之發見者。莫非仁義禮智之用也。)
한원진에 따르면 리는 기와 결합함으로써 성이 되고 기의 청탁수박에 따라 오상을 가짐이 다르다. 사람만이 빼어난 기를 얻은 까닭에 오상도 온전히 갖추지만, 나머지 다른 사물들은 거칠고 흐린 기를 얻었으므로 다섯 가지 오상 중 일부만 갖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사물의 성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간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우주에는 리와 기가 있을 뿐이다. 그 순수지선의 참됨, 무성무취의 오묘함은 천지만물의 똑같은 하나의 근원이다. 그것을 높여서 태극이라 하니 그 명칭은 포괄적이고, 그 전부를 세어 오상이라고 하니 그 조리가 분명하다. 이것은 곧 그치지 않고 계속되는 실체로서, 사람고 ㅏ사물이 받은 온전한 덕이다. ("巍巖遺稿" 권12, '五常辨': 夫宇宙之間。理氣而已。其純粹至善之實。無聲無臭之妙。則天地萬物。同此一原也。尊以目之。謂之太極。而其稱渾然。備以數 之。謂之五常。而其條粲然。此卽於穆不已之實體。人物所受之全德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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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것도 오상이고 치우친 것도 오상이다. 통하는 것도 오상이고 막힌 것도 오상이다. 모두 오상이지만 바르고 통하므로 발용할 수 있고, 치우치고 막혔으므로 발용할 수 없다. 이제 발용의 여부를 보고서 하나는 있다고 하고 하나는 없다고 한다면, 그 뜻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巍巖遺稿" 권4, '上遂菴先生-別紙': 正亦五常也。偏亦五常也。通亦五常也。塞亦五常也。同是五常。而正且通。故能發用。偏且塞。故不能發用。今見其發用與否。而謂之一有。而一無。無迺爲未盡耶?)
천지만물이 모두 하나의 근원에서 비롯되고 그 근원을 세부적으로 지칭할 때 오상이라고 하므로 사람과 사물이 오상을 온전히 받지 못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오상을 온전히 갖추지 못했다는 것은 태극을 온전히 갖추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사람이건 사물이건 오상을 온전히 갖추고는 있지만, 다만 겉으로 드러남(發用)에서 차이가 날 뿐이라는 것이다.
이간에 의하면 우주만물의 이치인 리가 기 속에서도 그대로 보존되므로 사람과 사물의 차이는 그 발용에서 드러날 뿐이다. 그러나 한원진의 경우 리가 기 안에 들어갔을 때는 그 원인이 기이든 리이든, 이 때의 리는 이미 기와 결합하면서 성으로 변화된다. 따라서 모든 사물의 성이 온전한 오상을 갖추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5. 미발의 심체 문제

사람과 사물의 성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은 단지 존재론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결국은 가치론의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성에 윤리적 가치 실현 능력인 오상이 어떻게 갖추어져 있는가를 문제시하는 한편, 더욱 구체적으로 선악의 가치 실현 가능성을 미발의 심체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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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에서 다룬다. 성을 기중지리로 보는 한원진은 심체도 성과 대비되는 기의 측면에서 바라본다.
심이란 기의 모임이니 그 체는 본래 허虛이다. 허이므로 어둡지 않고 기이므로 가지런하지 않다. 그 체가 본래 허하여 어둡지 않다는 데서 말하자면 이를 선善이라 하고, 그 기의 모임이 가지런하지 않다는 데서 말하면 선악善惡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미 선이라 하고 또 선악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 말이 각기 가리키는 바가 있어 서로 방해되는 일이 없다. 기 가운데 있는 성은, 그 미발허명함을 가리켜 대본지성이라 하고, 기품이 가지런 하지 않음을 겸하여 말하면 이를 일러 기질지성이라 한다. ("南塘集" 권11, '擬答李公擧-附未發五常辨': 心者氣之聚而體本虛也。虛故不昧。氣故不齊。自其體本虛而不昧者言則謂之善。自其氣之聚而不齊者言。則謂之有善惡。然則旣謂善而又謂有善惡者。言各有所指而未甞相妨也。性在氣中者。卽其未發虛明而中。則謂之大本之性。兼其氣禀不齊而言。則謂之氣質之性。)

심은 기이고 성은 리이다. 기는 청탁미악의 가지런하지 않음이 있지만 리는 곧 순선하다. ... 기는 비록 청탁미악의 다양함이 있을지라도 미발시에는 기가 움직이지 않으므로(不用事) 선악이 드러나지 않고 고요히 텅 빈 듯 맑을 뿐이다. 비록 고요히 텅 빈 듯 맑을 지라도 그 기품 본래의 청탁미악은 또한 없을 수가 없다. ("南塘集" 권11, '擬答李公擧-附未發氣質辨圖說': 心卽氣也。性卽理也。氣有淸濁美惡之不齊。而理則純善。故單指理爲本然之性。兼指理氣爲氣質之性。性非有二體也。只是氣質之兼不兼而有二名耳。氣雖有淸濁美惡之不齊。而未發之際。氣不用事。故善惡未形。湛然虛明而已矣。雖則湛然虛明。其氣禀本色之淸濁美惡則亦未甞無也。)
리만을 가리켜 말한다면 본연지성이라 하고 리기를 겸하여 말하다면 기질지성이라 하지만, 한원진이 사람과 사물의 성을 이야기할 때 택하는 관점은 기질지성이다. 그러므로 심체에서 기가 발하지 않았을 때에도 기의 선악이 드러나지 않은 것뿐이지 본체에 기의 청탁이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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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한원진은 미발을 외물에 접촉하지 않은 고요한 상태에서 기가 발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간은 일반적인 기와 심의 기를 구분한다.
기는 하나이지만 그 거친 것을 말하면 혈기이고 그 섬세한 것을 말하면 신명이다. 거칠고 섬세한 것을 통틀어 기라고 한다. 그러나 심은 혈기가 아니고 신명이다. 심체는 지극히 섬세하지만 기질은 지극히 거칠며, 심체는 지극히 크지만 기질은 지극히 작다. ("巍巖遺稿" 권13, '未發辨後說': 夫氣一也。而語其粗則血氣也。語其精則神明也。統精粗而謂之氣。而所謂心則非血氣也。乃神明也。心體也至精。而氣質也至粗。心體 也至大。而氣質也至小。)
한원진과 달리 심체의 기와 일반적인 기질을 구분한 이간은, 다시 진정한 미발을 혈기와 뒤섞여 있는 미발과 구별한다.
명덕본체는 성인과 범인이 동일하게 가지고 있고 혈기청탁은 성인과 범인이 다르게 가지고 있다. 명덕은 천군이고 혈기는 기질이다. 천군이 주재하면 혈기가 백체에 물러나서 마음이 텅 비어 환하게 되니, 이것이 대본의 소재이며 자사가 말한 '미발'이다. 그러나 천군이 주재하지 못하면 혈기가 마음에서 용사하여 청탁이 가지런하지 않게 된다. 이것은 선과 악이 뒤섞인 것이다. 덕소(한원진)는 이것을 미발이라고 말하고 있다. ("巍巖遺稿" 권12, '未發辨': 故愚謂明德本體。則聖凡同得。而血氣淸濁。則聖凡異稟。明德卽天君也。血氣卽氣質也。天君主宰。則血氣退聽於百體而方寸虛明。此大本所在。而子思所謂未發也。天君不宰。則血氣用事於方寸。而淸濁不齊。此善惡所混。而德昭所謂未發也。)
이간에 의하면, 한원진은 단지 발하지는 않았지만 혈기가 마음에서 용사하는 것을 미발이라고 한다. 그 반면에 자신이 말하는 미발은 단지 외물에 접촉하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천명(天君)을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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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는, 즉 리의 실현 가능태를 말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각각 '부중의 미발(不中底未發)'과 '중의 미발(中底未發)'이라고 하여 구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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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논쟁의 의의

인성과 물성의 동이 문제는 18세기 초에 시작된 후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거의 모든 지식인이 관심을 기울였던 문제였다. ... 논쟁의 의의를 정리해보면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성性 개념의 다의성, 특히 주희가 사용하는 성 개념의 혼란을 정리했다는 것이다. 사단칠정 논쟁을 거치면서 조선 성리학의 이론적 깊이는 이미 중국을 능가하였다. 우주와의 관련 속에서 인간의 심성정을 정밀히 탐구해왔던 이들은 성 개념의 다의성에 주의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인간 심성의 긍정적 능력을 고양하여 성리학적 이상 국가를 실현하고자 했던 조선 성리학자들에게는 필연적인 과제였다. ...
둘째, 중국 이외에 새로이 등장하는 세력에 대한 대처 문제와 관련된 논의라는 것이다. 병자호란(1636~1637)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맛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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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사람다운 사람의 문화'로서 중화 문화를 추구하며 소중화를 자부했던 조선이, 짐승에 가깝다고 여기며 천시했던 오랑캐의 강대한 세력을 현실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것은 그 당시 커다란 문제였다. 따라서 이 논쟁을 화이론적인 문화적 우월성에 입각하여 거론되었던 북벌론과 같은 맥락에서 파악하려는 시도도 있다. 또한 같은 논의의 차원에서 정반대의 입장으로 북학파의 인물성론에 주목하는 시도도 있다. 북학파, 특히 홍대용과 박지원은 사람을 포함한 만물이 모두 똑같이 기로 구성되고 공통된 생명의 원리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만물은 균등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사람의 입장에서만 세계를 볼 것이 아니라 사물의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객관적 상대적 관점을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의 상대화 객관화는 중세 사회의 계층적 질서를 부정하고 근대적인 사회 질서를 만들어 가는 데 있어 중요한 사고의 전환이라 할 수 있다.